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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과 헤어지기 싫어 우는 아이들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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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억 속에 '교장선생님'은 어떤 분으로 남아 있나요. 대개 가까이 다가서기엔 어려거나 무서운 권위적 이미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겠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마산 태봉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좀 이색적인 광경을 봤습니다.


아이들이 교장선생님과 헤어지는 게 서러워 서로 끌어안고 펑펑 우는 겁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좀체 보기 어려운 이색적인 광경이어서 동영상으로 찍어봤습니다. 일단 영상부터 한 번 보시죠.



영상 속의 교장 선생님은 태봉고 개교 때부터 4년간 교장으로 재직했던 여태전 선생입니다. 그는 이번 학기까지 4년의 교장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됩니다. 그걸 아는 아이들이 더욱 서럽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태봉고 여태전 교장의 회고사 "사람이 먼저다" 


교장 선생님이 다시 이 학교 교장 공모에 응할 수 없다는 경남교육청의 방침이 알려졌을 때 아이들은 이런 대자보를 교내에 붙이기도 했죠.



이런 모습 말고도 태봉고 졸업식은 여러 모로 다른 학교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엊그제도 한 번 포스팅을 했지만, 남아 있는 다른 사진도 기록 차원에서 여기 올려둡니다.



1~2학년 재학생들이 졸업생을 위한 노래를 부른 후, 저렇게 무대에서 큰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큰 절은 또 이어집니다. 이번엔 이 학교 교사 전원이 무대에 올라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단상 아래에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도 교사들과 맞절을 올립니다.



이 학교에 꾸준히 장학금을 대주고 있는 한국야나세 우영준 사장에게 교장 선생님이 '학교사랑운동 자매결연학교' 팻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3년 전 입학식에서는 선생님들이 신입생의 발을 씼겨주었습니다. 이날 졸업식에서는 아이들이 저렇게 선생님의 발을 씼겨드립니다. '세족식'이라고 하더군요. 세족식 중에도 우는 아이와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헤어질 시간입니다. 교사들이 강당 입구에 도열하고, 나가는 졸업생 한 명 한 명을 끌어안아 줍니다.


이 학교는 평소에서 서로 인사하는 방식이 끌어 안는 거랍니다.



아이들이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에서 얼핏 웃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지만, 사실은 우는 거랍니다.



교사와 학생들도 끌어안으면서 눈물 샘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아직은 웃고 있지만...



이렇게 통곡하는 선생님과 아이들도 있습니다.



강당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각자 교실에 들어가 담임선생님과 마지막 종례시간을 마친 후에도 헤어지는 절차는 서로 끌어안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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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남을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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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6일 경남발전연구원에서 <‘2013 부울경 방문의 해’ 경남 관광지 콘텐츠 개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저는 말석에 앉아 세미나의 제1주제로 선정된 ‘경남 관광지 스토리텔링 활용 방안’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주제 발표는 청운대학교 관광경영학과 최인호 교수(창업주 스토리를 활용한 지역 관광 활성화 방안)와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 김태훈 소장이 했고요, 토론은 저 말고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윤애경 교수가 했습니다.

 

앞서 경남도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 등을 위해 다섯 곳 명소를 꼽았는데요, 이렇습니다. ①진주 유등축제 ②통영 케이블카와 미륵산 ③남해 금산-보리암과 양아리 석각 ④의령 이병철 생가(솥바위) ⑤창녕 우포늪.

 

남해 금산 금산산장.

 

금산에서 바라본 두모마을.

 

제가 보기에는 이 날 발표문에도 나름 짚어볼만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세미나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점과 아울러 그 해결책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날 제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 다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참에 한 번 정리해 올릴까 합니다.

 

첫째는, 제가 보기에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누구에게 다가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으뜸 목적으로 꼽고 있는데, 이 외국인 관광객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전혀 얘기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함양 서암정사에서.

 

둘째는, 말하자면 외국인 관광객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고 무엇을 듣고 싶어하고 하는지를 얘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위주로 논의하는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더 쉽게 풀어가기 위해 우리나라와 경남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구체적인 모습, 그리고 그런 외국인 관광객에게 매겨져 있는 경남의 지위부터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이를 위해 자료를 뒤진 끝에 얻은 수치들과, 그에 대한 제 해석을 덧붙이겠습니다.

 

대한민국과 경상남도가 외국인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요? 스스로를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영국 사람 프랑스 사람 중국 사람이라 생각하고 한 번 떠올려 보시지요. 대한민국은 어딘가에 붙어 있는 조그만 나라가 되겠지요. 그리고 경남은 그보다 더 조그마한 그런 지역일 수밖에 없을 테고요.

 

김해 분산산성.

 

거꾸로 우리가 관광하러 미국에 간다 생각하고 일정을 짜 보셔도 되겠습니다. 먼저 뉴욕에 들르겠지요. 거기서 이런저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볼 테고,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도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취향을 따라 무슨 나이애가라 폭포 따위를 찾아갈 것입니다.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을 찾으면 먼저 서울과 서울의 것들을 구경하겠지요. 그러고는 세계적으로 이름나 있는 경주라든지 제주도라든지 하는 관광지를 찾을 테고요. 또 경남이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길에 걸린다면 통도사나 소벌(우포늪) 같은 이름난 명소를 찾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남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2011년 경남 통계를 보면 외국인 관광객이 30만6547명으로 나옵니다. 2012년 8월에 나온 경남도 보도자료를 보면 2012년 1~7월 경남 외국인 관광객이 27만명입니다. 한 달 평균 4만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경남 관광지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을 헤아리면서 중복 여부를 따지지 못한 것입니다. 외국인 하나가 통도사도 찾고 화왕산도 찾고 표충사를 찾았다면, 한 명이 아니라 세 사람으로 계산된다는 말씀입니다.

 

거제관아 기성관.

 

<제5차 경남권 관광개발 계획(2012~2016년)>을 보면 현실적인 숫자가 나옵니다. 2012년 28만2089명, 2016년 37만8624명, 2021년 56만8487명. 2013년을 부울경 방문의 해로 정하고 외국인 관광객 유치 목표를 100만명으로 세웠으나, 실제는 이런 숫자들 보면 제대로 짐작이 됩니다. 아마 반 토막? 50만 명을 365일로 나누면 1370명, 다시 열여덟 시·군으로 나누면 76명입니다.

 

경남은 이 정도 하고 대한민국을 두고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2013년 8월 문화관광체육부가 발행한 <2012년 기준 관광 동향에 관한 연차 보고서>입니다. 2012년 외국인 관광객은 한 해 전보다 13.7% 늘어난 1114만28명으로 나옵니다.

 

(아시아권은 16% 늘어난 888만7132명으로 79.8%, 미주권은 5.9% 늘어난 87만6149명으로 7.9%, 중동권은 17.3% 늘어난 12만2191명으로 1.1%, 유럽권은 5.3% 늘어난 71만7315명으로 6.4%, 대양주·아프리카·교포는 4.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제 가배량성.

 

이어서 2012년 한국관광연구원이 발표한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업 활성화 방안 연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연구 대상 지역을 수도권·부산·대전·대구·광주·경주·제주로 꼽으면서 그렇게 정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단체가 아니고) ‘개별 여행객의 80% 이상이 방문하는 서울 지역’이라 적혀 있습니다. 또 도시민박업은 ‘대도시와 주요 관광지의 가정집’에서 하는 것이라고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외국인이 주로 이런 지역을 찾는다는 얘기입니다.

 

<2012년 기준 관광 동향에 관한 연차 보고서>에 나오는 외국인 관광객 숫자를 여기에 대입해 보면, 900만명 가까이가 서울을 찾고 나머지 200만명이 경주·제주, 그리고 나머지 대도시 부산 따위를 찾는 셈입니다.

 

합천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

 

이런 숫자를 보면 외국인 관광객에게 차지하는 경남의 지위가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주변부 가운데서도 주변부(sub of subs)입니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경남의 2010년대 계획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삼아야 마땅하겠지요.

 

경남을 관광하러 자기 나라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서울이나 제주도나 경주 같은 국제적인 관광지를 찾아 대한민국에 들어오는 이들을, 경남만이 갖추고 있는 콘텐츠를 찾아내고 개발해 경남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앞서 경남도가 꼽은 다섯 곳 명소를 위주로 하지 말고(또 사실 그런 데는 별나게 꼽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나름 찾아갑니다.) 제주도나 경주나 서울 또는 대도시에는 없고 경남에만 있는 독특한 것들을 활용할 꾀를 내야 하겠습니다.

 

진주 남강 제방.

 

이런 관점에서 볼 때 2013년 10월 1일 경남도의 기획조정실 정보통계담당관이 발표한 ‘2012년 경남 관광 실태 조사’(외국인 800명 대상 조사)는 우리한테 얘기해주는 바가 아주 많습니다. 적힌 차례대로 늘어놓으면서 하고픈 말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함안 무기연당.

 

가장 많이 활용하는 정보원 : ① 친구·동료 25.4%. 다음으로 여행사, 다음으로 가족·친척.(인터넷이 없습니다.) 여기서 친구·동료는 누구를 뜻할까요? 이어지는 문항을 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경남을 찾은 까닭 : ①연수·회의 28.8%, ②볼거리·즐길거리 25.1%.

 

업무 때문에 경남을 들른 김에 볼거리·즐길거리를 누린다고 풀어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친구·동료는 업무로 찾은 기업(이를테면 경남의 두산중공업·삼성해양조선 같은 데 또는 부산이나 울산의 이런저런 기업들)의 직원이기 십상입니다.

 

방문 형태는 개별 여행이 77.9%이고 단체·패키지 여행은 22.1%입니다. 2010년 조사에서 개별 여행은 67.0%였는데 비율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외국인 관광객 전체 추세이기도 합니다. 개별 여행객의 특징과 속성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함안 장춘사 감나무.

 

경남 관광을 위한 방안으로는 자연·생태 관광 자원 활성화를 가장 많이 꼽았는데요, 비율은 14.6%입니다. 아울러 가장 인상 깊었던 점에 대한 대답도 곱씹을만한데요. 독특한 문화 유산이 31.4%로 가장 많았고 자연 경관이 다음으로 18.6%였습니다.

 

게다가 독특한 문화 유산을 꼽은 비율이 2010년보다 7.1%가 많아졌다니, 앞으로 추세가 어떨지는 넉넉히 짐작이 됩니다.(사실 외국인 아니라 우리도 그냥 자연경관이 문화재보다는 옛적과 오늘날의 사람살이를 이루는 ‘문화’를 보고 즐기고 싶어한답니다.)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런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틈새시장을 노려야지요. 앞서 경남도가 꼽은 다섯 명소처럼 이미 알려져 있는 데를 더 알리기보다는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유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창녕 관룡사 북. 괴수 표정이 색다릅니다.

 

앞에 나온 조사에서 개별 여행객이 77.9%라는 수치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합니다. 개별 여행객은 자연경관이나 빼어난 문화재를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주어진 지역을 곰탁곰탁 구석구석 돌아보려 합니다. 거기서 나는 사람 냄새 또는 사는 풍경에 즐거워합니다.

 

닷새마다 서는 전통 장터가 있습니다. 거기서 이들은 국밥 한 그릇을 얻어 걸치고 싶어합니다. 그 고장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먹을거리면 더욱 좋을 테고요. 하하. 노랫가락 틀어놓고 신나게 춤추는 풍경 또는 각설이 놀음 따위를 눈에 담고 싶어합니다.

 

잘 알려진 유물이나 문화재보다는 해당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럴 듯한 물건들을 거기 깃들어 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누리고 싶어합니다. 보기를 들자면, 산청 도전리 손바닥만한 마애불상 무리나, 신돈이 태어나 자란 창녕 옥천사 망한 절터 따위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구석구석 숨어 있는 풍광·문화재·특산물·고유 음식을 찾아낸다면, 외국인 관광객 발길을 두고두고 끌어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외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자국 관광객들이 이런 데로 걸음할 개연성도 덩달아 높아집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삼아 대충 짜 본 그림이 있습니다. 경남 시·군별 관광 루트입니다. 이런 구석구석 숨은 명소를 찾아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고, 이것들을 다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명소들과 이어놓는 것입니다.

 

물론 제 말씀이 모두 옳고 전혀 손볼 데가 없다고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여기에다 고유한 먹을거리 따위, 더 나아가(지금 당장은 엄두도 내지 못할 노릇이지만) 제대로 된 전통 문화 체험을 곁들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하동 매암다원에서 차훈 체험을 하고 있는 풍경.

창녕 지석묘.

 

사천 : 매향비, 작도정사, 사천만갯벌, 종포~대포 갯벌, 선진리성(조명이총), 비토섬과 갯벌(별주부전 설화 관련).

 

거제 : 조선해양문화관, 폐왕성지, 공곶이, 거제관아, 홍포 바닷가, 여차몽돌해변, 지심도, 장승포항과 애광원, 가배량성(한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자리).

 

통영 : 통영옻칠미술관, 박경리기념관, 서문고개·서피랑, 세병관, 제승당(한산도), 삼덕항(서양인최초도래기념비·돌벅수), 동피랑.

 

하동 차밭.

 

양산 : 북정동 고분군, 황산잔도, 가야진사·용당(그리고 맞은편 용산), 용화사.

 

김해 : 율하유적(한국 유일 솟대 설치 유적), 관동유적(한국 유일 고대 항구 유적), 화포천과 봉하마을, 김해천문대.

 

밀양 : 월연대, 밀양연극촌,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작원잔도, 만어사, 삼랑진역 급수탑.

 

창녕 : 팔락정, 가항늪, 가항마을, 관산서원(모두 한강 정구 유적), 망우정(곽재우 말년을 보낸 장소), 옥천사지, 용선대, 만년교, 창녕지석묘.

 

창녕 옥천사지 연자멧돌. 여기 가면 부러 깨뜨린 석탑 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함안 : 함안박물관과 앞 아라연못(고려 시대 연밥이 살아남아 꽃을 피운 장소), 말이산 고분군, 장춘사, 무기연당, 고려동 유적지.

 

의령 : 정암진, 빗방울 화석지, 보천사지 3층 석탑과 승탑, 곽재우 장군 생가와 현고수,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이병철 생가, 관정 이종환 생가, 일준부채박물관.

 

거창 : 수승대, 황산마을, 동계 정온 고택, 월성계곡 분설담, 금원산 자연휴양림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불입상, 거창박물관 대동여지도 그리고 농경 유물.

 

하동 쌍계사 꽃담장.

 

산청 : 남사마을, 광제암문, 단속사지, 구형왕릉, 유의태 약수터, 동의보감촌, 도전리 마애불상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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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솟은 자리 다사로운 정자 함안 악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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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 악양루(岳陽樓)는 함안천을 흘러내린 물이 남강에다 몸을 푸는 들머리 공격사면 언덕에 동그마니 놓여 있습니다. 벼랑이랄 수도 있는 자리인데요.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습지요. 해가 조금 솟아오른 다음에는 거의 종일 내리쬡니다.

 

제 생각에는 중국 동정호에 자리잡고 있는 악양루에서 이름을 가져왔을 상 싶은데요, 물론 경남 하동 악양면에 가면 동정호도 있고 악양루도 있지만, 보는 풍광과 보이는 정경은 함안 악양루를 따라오지 못하지요.

 

함안 악양루는 거기서 바라보는 풍경도 그지없이 좋고요, 맞은편 둔치에 서서 바라보이는 악양루도 매우 멋집니다. 특히 맞은편 둔치에 서면 이 멋진 악양루를 곱절로 즐기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둑방길도 함안의 자랑거리랍니다.

 

북동쪽 벼랑에 자리잡은 악양루가 하나고, 그 악양루가 함안천 흐르는 강물에 비쳐 거꾸로 놓여 있는 악양루가 또 하나입니다. 이 그림자 악양루는 물결을 따라 가늘게 갈라지기까지 하는데, 여기서 사람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만히 감탄하기 말고는 없습니다.

 

두 악양루.

 

물 위 악양루.

 

맞은편 둔치에서 벼랑에 놓인 악양루를 올려다보면, 악양루가 악양루인 까닭이 절로 깨우쳐집니다. 물론 제 생각일 따름이지만, 악(岳)과 양(陽)이 저마다 뚜렷한 뜻으로 제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큰 산을 이르는 악岳은 우뚝 솟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흔히들 볕으로 읽는 양陽은 다사롭다는 얘기도 됩니다. 포근하고 따뜻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양루는 우뚝 솟아 있으면서 다사로운 자리에 들어선 누각이 됩니다.

 

이렇게 풀이할 수 있는 근거를 저는 하동군 악양면에서 봅니다. 신라 경덕왕은 우리 땅이름을 죄다 중국식으로 바꾼 장본인입니다. 이 임금은 한다사(韓多沙)를 하동(河東)으로 바꿨고, 소다사(小多沙)는 악양(嶽陽)으로 바꿨습니다.(그러다가 嶽 대신 岳을 쓰게 됐습니다.)

 

땅이름 유래와 관련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이 가운데 제 눈길을 확 끌어당긴 것은 ‘솟+다사’였습니다. 솟다+다사롭다이지요. 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악양 골짜기는 양쪽으로 산악이 솟은 가운데 있는 다사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거기 자라는 차나무들이 동해(凍害)나 냉해(冷害)을 입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겨울에 눈이 내려도 금세 녹아 사라진다고 합니다. 악양천이 흘러내리다 섬진강에 합류하기까지 펼쳐지는 거기 들과 골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함안 악양루 있는 자리도 비슷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여간 포근하고 따뜻한 자리가 아닙니다. 낙동강 강바람이 남강을 따라 거스르다가 함안천으로 찢겨들어와도 여기는 비껴갈 듯 싶은 그런 자리입니다. 어쨌거나 제 마음에 쏙 드는 악양루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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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이 독수리 최대 월동지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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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새는 정말 날지 않고 싶다

 

경남 고성은 여러모로 유명합니다. 그런 가운데에는 독수리도 있습니다. 한반도 최대 독수리 월동지역입니다.

 

주로 몽골에서 살아가는 독수리는 지구에 2만마리 정도 있다고 합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한반도를 찾는 독수리는 2만 마리의 10%인 2000마리 가량이고, 이 가운데 600마리 남짓이 여기 고성에서 겨울을 납니다.

 

다들 아시는대로, 몽골은 겨울이 너무 춥고 따라서 먹이도 없기 때문에 따뜻한 남쪽으로 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롭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속도는 시속 50km정도라고 하는데, 이 날아다니기가 그렇게 쉽기만 하겠습니까? 새들한테 고역이 바로 이 날아다니기입니다. 그래서 몽골에서 한반도까지 날아올 때에도, 지친 날개를 쉬어야 하기에 두 시간에 한 번꼴로 뭍에 내려온다고 합니다.

 

내려앉기 시작한 독수리들.

 

이토록 먼 거리를 날아오는 까닭이 바로 먹이를 얻는 데 있다니, 그야말로 독수리 일생 참으로 가련합니다. 몽골에 그대로 남아 있자니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겠고, 해서 이판사판으로 날갯짓을 해서 한반도까지 날아온다니 죽지 못해 벌이는 고역 가운데 으뜸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 고성 독수리는 창녕 소벌(우포늪)에 모이는 100마리 독수리나 김해 화포습지에 모이는 200마리 독수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어리고 약한 존재들이라니 더욱 가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한테는 들판이 너르게 펼쳐지고 마실 물까지 갖추고 있는 강원도 철원 일대가 한반도에서 가장 살만한 터전인데요, 거기서 먹이 경쟁에 처진 녀석들이 더 지친 날갯짓을 해서 찾아오는 데가 바로 경남의 고성·창녕·김해라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이렇게 많이 내려앉았습니다.

 

2. 독수리 아빠를 아시나요?

 

고성에 이처럼 독수리가 많이 모이는 데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고성 철성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시는 김덕성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제는 ‘독수리 아빠’로 불리는 김 선생님께서 10년 넘게 전부터 이 지치고 힘빠진 독수리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장만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로 돼지 비계 따위인데 본인 주머니를 털거나 이웃·친지가 십시일반으로 장만해 주는 정성으로 독수리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조금밖에 고성을 찾지 않던 독수리를 해를 거듭하면서 숫자가 불어나 이제 600마리를 웃돌게 됐다고 합니다.

 

 

해딴에가 고성을 찾아 어린이 겨울 철새 탐방을 벌인 가장 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8일 해딴에 일행이 고성 철성중학교 앞쪽 논을 찾았을 때 10시 30분에 이르러 불쑥 떠오른 해를 한 쪽으로 삼은 하늘에는 엄청나게 많은 독수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40명 되는 아이들은 타고 온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우와, 이야” 하는 감탄사를 입에 달고 있었습지요. 독수리는 논바닥에도 있었습니다. 열 마리가 살짝 넘는 정도였는데, 독수리보다 까마귀가 더 많았더랬습니다. 

 

 

이렇습니다. 독수리는 철새고 까마귀는 텃새입니다. 텃새는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욕구가 있고 까마귀는 머리가 좋은데다 무리 지어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자기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들어온 독수리를 쫓아내기 위해 독수리를 공격해대는 것입니다.

 

많이 자란 큰 독수리에게는 무리 지어 달겨들고요, 아직 작은 어린 독수리에게는 까마귀 한 마리가 대적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자니 독수리들이 성가신 모양인지 죄다 하늘로 날아올라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독수리 아빠는 논바닥에 먹을거리를 잔뜩 깔아놓았고요.

 

논바닥에 깔아놓은 먹이를 독수리 쪽으로 던지고 있는 김덕성 선생님.

 

김덕성 선생님은 전혀 놀라지 않은 기색으로 아이들을 버스에 오르게 했습니다. 독수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을 숨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살펴보기 좋게 버스를 논이랑 평행이 되도록 돌려세운 다음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며 독수리를 살펴보게 했습니다.

 

버스에서 설명을 해주는 김덕성 선생님. 그 오른편으로 이날 뜻밖에 현장에서 만난 한겨레 최상원 기자가 보입니다.

 

MBC경남에서도 취재를 나왔습니다.

 

독수리들이 떼 지어 하늘을 빙빙 도는 까닭은 동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다, 독수리한테도 차례와 예절이 있어서 우두머리가 내려앉기 전에는 다른 독수리들은 절대 내려앉지 않는다, 먹을 때도 우리가 밥상머리에서 가장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밥 먹기를 시작하듯 독수리들도 우무머리가 먼저 먹어야 먹기 시작한다…….

 

렇게 하늘을 맴돌던 독수리가 과연 얼마가 지나자 한꺼번에 내려앉았습니다. 펼치면 2m가 넘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는 장관, 몸이 무거워 단번에 멈춰서지 못해서 날개로 바닥을 한두 차례 두드리는 모습. 황조롱이나 매는 그 앉은 자세의 날카로움으로 사람 눈길을 끌지만, 독수리는 어지간한 아이 정도 크기는 되는 그런 덩치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먹이가 눈 앞에 있는데도 바로 물어뜯지 않습니다.

 

그러나 녀석들은 내려서도 곧바로 먹이를 뜯지는 않았습니다. 떼로 뒤섞여 통통거리면서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대략 5분이 지나자 먹이랑 가장 가까이 있던 한 녀석이 고기를 덥석 뜯었습니다.

 

그러자 독수리들의 회식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사람처럼 한꺼번에 다 먹지는 않았습니다. 둘레 있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독수리 아빠가 풀어놓은 먹이가 있는 데로 옮겨가 뜯어먹지 않고, 거기서 먹이를 부리로 콕 집어 무리 속으로 가져 와서 먹었습니다.

 

먹이를 물고 서로 뜯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 살펴보면, 먹는 녀석보다 먹지 않는 녀석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 독수리 떼를 눈여겨보니, 먹이랑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덩치가 커다란 녀석들이 앉아 있고, 먹이랑 거리가 먼 데일수록 덩치가 작은 녀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떼 지은 자리가 끝나는 가장자리에는, 겨우 까마귀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녀석들이 머리를 주억대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들이 많이 내려앉아 다시 뜨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김덕성 선생님은 아이들을 내리게 한 다음 좀더 가까운 데로 다가가 살펴보게 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났지요. 자기만한 독수리를 아주 가까운 데서 그것도 무더기로 보게 됐으니 말이지요.

 

 

 

 

선생님 요청으로 한국조류보호협회 고성지회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일부 독수리들이 내려앉아 먹이를 먹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하늘을 맴도는 독수리들이 많았습니다.

 

3. 고성은 박물관에서도 새를 전시한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일행은 고성박물관으로 옮겨갔습니다. 조문청동기 탁본 체험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조문(鳥紋), 이렇게 한자로 하니 어렵습니다만, 우리말로 풀면 매우 쉽습니다. 바로 새무늬랍니다.

 

옛날옛적 새는 우리 인간에게 무척 신성한 존재였답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훨훨 날아다니니 그렇게 여길만도 했겠습니다. 옛적 사람들은 그렇게 날아다니는 새가 하늘(신)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신성한 구역을 뜻한 솟대(소도) 들머리에 나무를 새 모양으로 깎아 세우기까지 했던 것이지요.

 

새가 얼마나 있는지 한 번 찾아보세요. 모두 마흔세 마리랍니다.

여기 새무늬 청동기는 거의 망가지지 않고 완벽하게 남았는데, 요즘 사람 눈으로 봐도 거기 새겨진 무늬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크고 작은 새가 촘촘하게 들어 있는데요, 커다란 새는 다른 무늬랑 뒤섞이게까지 해서 마치 숨은 그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새 무늬 청동기 모형을 갖고 탁본을 했는데요, 박물관 해설해 주시는 선생님이 아주 친절하고 꼼꼼하게 이끌어주신 덕분에 다들 즐겁게 한 때를 보냈답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밥 때가 무척 늦어졌습니다. 12시 40분을 넘겨버렸습니다.

 

서둘러 밥집으로 옮겨갔습니다. 정든한정식이었는데요, 마흔 사람 넘는 밥상이 깔끔하게 나왔습니다. 먼저 달콤한 고구마 죽이 한 그릇씩 나왔고요, 구수하면서도 짜지 않은 된장찌개도 좋았습니다.

 

문어나 조개 따위와 해물 나물 채소 나물이 어우러지는 틈새로 문어랑 조개도 나왔는데요, 뭍엣고기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 식성을 고려한 돼지목살도 그럴 듯했습니다.

 

4. 민물저수지 마동호로 바뀐 당항만 안쪽 일대

 

그러고는 당항만 안쪽 끄트머리 간사지교가 있는 데로 달려갔습니다. 여기 일대는 한국농어촌공사가 바닷가 이쪽저쪽을 가로막아 민물 저수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름도 마동호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마주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에서 맞은편으로 직선을 그어 둑을 쌓고 막은 것입니다. 밀물 때는 거기 수문을 막아 짠물이 들지 못하게 하고, 썰물 때는 수문을 열어 안쪽 짠물을 빼내고 있다고 합니다.

 

김덕성 선생님은 여기서 예전에는 500원짜리 동전만한 재첩이 났다고, 짠물과 민물이 뒤섞여 생산성이 아주 높은 습지였다고, 그래서 갖은 철새들이 모여들고 조개들과 물고기들이 넘쳐났다고 담담하게 일러줍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로 들렸는데, 그래도 아직 여기를 찾는 철새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여기 있는 갈대를 위해 궁리합니다. 경남 바닷가에서, 여기처럼 장하게 갈대밭이 남아 있는 데는 없다고 일러주십니다.

 

그 갈대는 갖은 작은 새들을 품어주는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갈대밭에 들어가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세차게 불어대는 겨울철 칼바람도 갈대를 만나면 잦아들기 때문입니다. 키가 큰 갈대는 메말랐지만 따뜻하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물 위에는 새들이 점점이 떠 있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그 점들이 새인 줄을 몰랐습니다. 아마도 앞서 본 독수리들의 커다란 덩치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이겠지요. 그러나 그 점들이 푸드득 날아오르자 이내 알아봅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5. 층층을 이룬 맞은편 벼랑에도 눈길을 주고

 

선생님은 바다와 철새만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마동호를 왼쪽으로 끼고 걷는 오른편으로 층층을 이룬 사암이 만든 벼랑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사암은 돌이 물러서 잘 부서집니다. 그리고 돌로 굳기 전에 새겨진 무늬들을 잘 간직합니다. 바다가 물결치면서 남긴 무늬가 화석으로 남았습니다.

 

 

 

벼랑 바위를 만져보게도 하고 그런 잔잔한 화석들을 쓰다듬어 보게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갈대도 하나씩 꺾어들고 놀게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즐겁습니다. 돌을 만나면 돌과 놀고 갈대랑 만나면 갈대랑 놉니다. 그러다가 물가에 서면 납작한 돌로 물수제비를 뜨며 놉니다.

 

여기 사암 납작한 돌은 사람살이에도 그대로 쓰였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손쉽게 떨어지는 이 녀석들을 활용해 담장을 쌓고 우물을 지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바뀐 데가 대부분이지만 아직 그대로 남은 것도 적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두호마을까지 이어지는 바닷가와 들판길 2km정도를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연으로 나오면 그저 얼굴이 밝아집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온 아이들을 잠자코 기다리는 것은 두호마을숲입니다. 나이가 100살 넘었습니다.

 

조선 말기 임금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전국 서원 대부분을 없앴을 때 여기 있던 서원도 없어졌는데, 바로 그 때 마을 사람들이 서원을 대신해 아이들을 가르칠 서당을 만들면서 숲을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3시 10분, 겨울 철새를 보러 고성을 찾은 아이들 나들이가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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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탑 탐방 - 맑게 머리 속까지 헹궈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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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의성탑리리오층석탑 →34.6km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17.4km 법흥사지 칠층전탑→3.1km 운흥동 오층전탑·당간지주 6.7km 이천동 석불상·삼층석탑→ 76.3k 남장사 석장승 → 8.7km 복룡동 당간지주 → 6.6km 화달리 삼층석탑 →3.3km 상주박물관 석각 천인상 →21.9km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입상 →35.3km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탑은 불교 발생 이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무덤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후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면서 불교 조형물이 되고, 대승불교가 크게 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신앙대상으로 바뀌었습지요.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탑이 불상 구실을 했습니다. 탑의 모양이나 재료는 시대상과 주변 환경에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중국은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진흙이 많았기 때문에 전탑(塼塔)이 주류를 이루고, 화산 열도 일본은 화산암 재질상 전탑이나 석탑 제작이 어려워 자연 목탑이 많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탑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이었지만, 안동·의성을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전탑도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의 전탑과 일본의 목탑에 견줘 우리나라가 석탑을 중심으로 삼은 까닭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석탑은 목탑이나 전탑보다 장점이 많다고 합니다. 석탑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버틸 수 있지만 목탑은 수명이 짧습니다. 전탑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석탑은 유연한 곡선미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탑은 가지고 있는 의미도 다양하답니다. 종교적인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자연 조건을 이해하는 자료도 되고 탑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장인정신을 바탕삼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답니다.

 

돌탑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은 아무래도 이런 기본 지식을 바탕삼아야지 비슷한 탑을 되풀이해 보는 데서 오는 밋밋함을 떨칠 수 있답니다. 이에 더해 상상력까지 보태지면 돌탑 여행의 즐거움은 곱절로 많아지게 마련이겠습니다.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는 무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곳에 보석처럼 서 있습니다. 조그만 마을에 서 있는 이 탑이 국보랍니다. 동네 이름도 탑리이고요. 마을 전체가 탑을 받치는 기단 같은 느낌이 들지요.

 

 

중학교 교정 한 켠에 들어선 이 오층석탑은 야트막한 1단 기단 위에 탑신을 5층으로 올렸습니다. 얼핏 보면 벽돌로 만든 전탑인 듯이 여겨진답니다. 기단의 기둥돌과 벽판석을 제각각 다른 돌로 짜 맞추고, 몸돌(옥신석)의 기둥돌들도 모두 다른 돌로 배흘림까지 다듬었습니다. 목탑에서 발전한 백제탑 양식이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지붕돌은 층층이 처마와 지붕이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의 지붕과 같은 전탑 양식이랍니다. 말하자면 백제 석탑과 신라 전탑이 혼합된 양식입지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으로 꼽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 제57호)은 화강암과 벽돌을 섞어 만든 통일신라시대 전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 주류입니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에 이렇게 전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겠지, 벽돌 말고 다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 때문 아닐까, 풍수지리설에 따라 특정 시기에 벽돌로 만드는 전탑이 집중해서 축조되었을 수도 있지, 백제 쪽에서 장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발달된 솜씨로 전탑이 쌓았을 개연성도 있다, 등등 여러 견해가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얘기가 사실과 맞아떨어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전탑은 안동 조탑리 전탑처럼 대부분 화강암을 함께 쓰고 있습니다. 돌로 된 1층 몸돌 남면에는 감실을 파고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습니다. 2층과 4층 몸돌 남면에 형식적으로 새겨넣은 감실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의 다른 전탑들과는 달리 기와가 없습니다.

 

감실 양옆 인왕상.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벽돌에는 문양이 남아 있습니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높고 5층 몸돌이 너무 커서 조화스럽지 않습니다. 보수를 거듭하면서 원형이 많이 손상됐기 때문이겠습니다.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 왕방울눈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은 통일신라시대 법흥사에 있던 탑으로 짐작되지만 둘레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는 탓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답니다. 1층 기단에 7층 탑신을 안정되게 쌓아 올렸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탑머리는 금동제로 장식돼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사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칠층전탑은 가장 큰 탑이기도 합니다. 이는 전탑 일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탑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아무래도 커다랗게 쌓아야 더욱 위엄이 있다고 여겼을 테고, 그런 점에서 전탑은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보수 중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왼쪽은 고성 이씨 탑동 종택, 오른쪽은 지나가는 화물열차.

 

몸돌의 각층은 무늬가 없는 진한 회색 벽돌로 쌓아 올렸습니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으로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 다릅니다.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이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이도록 만듭니다. 이는 전탑이 목탑을 모방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답니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보물 제56호)은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永嘉誌)>에 7층 전탑으로 적혀 있습니다. 1608년 편찬된 안동 읍지인 운가지를 따르면, 원래 7층이고 탑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훔쳐가면서 무너져 선조 31년(1598) 5층으로 새로 쌓았습니다.

 

 

당시 이곳에 법림사(法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가 안동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덕분에 당간지주도 나란히 하나 있습니다. 이 두 탑은 그러므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벽돌로 만든 전탑이고 7층이며 머리 장식이 금동제였습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바로 옆으로 철도가 나 있어 쉴 새 없이 기차가 다닌다는 점이랍니다. 전탑은 석탑보다 훨씬 더 흔들림에 약할 텐데, 그 대책이 하루라도 빨리 나와야 하지 싶습니다.(법흥사지 칠층전탑은 2012년 가을 찾았을 때도 보수를 하고 있었는데, 듣자 하니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 이른바 제비원 미륵불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붐빕니다. 제비원 미륵불이 기도 효험이 크다는 소문 때문이랍니다. 제비원이 있는 자리는 전국에서도 땅의 기운이 세다고 꼽히는 장소라 합니다.

 

 

미륵불 새겨진 바위에 달라붙인 동전들.

 

기도할 때 바위에 얹혀 있는 작은 돌을 갈기도 하는데 이런 풍습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으니 새삼으럽지는 않습니다.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바위, 사람 손이 닿을 만한 데는 동전이 빼곡하게 꽂혀 있습니다.

 

거의 수직에 가까워서 동전이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 보이는 데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무슨 복을 받거나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답니다. 그러나 실제로도 그러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높이가 12.38m나 되는 거대 불상입니다. 높은 벼랑 바위에 몸통을 얕게 새기고 얼굴과 머리랑은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이라 합니다. 뒤통수는 수직으로 잘려나갔으나 얼굴은 온전히 남았습니다.

 

입술에 두드러지게 채색이 남았습니다.

 

머리와 얼굴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채색돼 있었으리라 짐작한답니다. 입술은 붉음이 더 뚜렷합니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부처 머리 위에 닫집이 있었습니다. 공경하는 표현이고 비바람을 가리는 실용입니다. 지금도 어깨 즈음에 닫집을 위해 세운 기둥 자리가 있습니다.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하는데 이 자리에 옛날 원(院:요즘으로 치면 여관)이 있었다고 하지요. 앞쪽에 연구사(燕口寺), 뒷쪽에 연미사(燕尾寺)가 있었고 제비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언덕에 있는 연미사중수비(燕尾寺重修碑)가 이를 뒷받침하지요.

 

연미사 중수비.

 

조선 말기까지도 제비원을 중심으로 술집과 여각이 즐비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제비원이 안동으로 오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앞에 떨어져 있는 바위는 이름이 ‘울바위’랍니다. 뒤에 있는 바위에만 부처를 새기니 앞에 있는 바위가 나도 새겨 달라면서 울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도 울었던 눈물 자국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울바위에는 부처 대신 나무아미타불 글자만 새겨져 있습니다. 뒤쪽 언덕배기에는 조그만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9호)도 있습니다.

 

 

상주 남장사 석장승(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33호)도 ‘제비원 미륵불’처럼 토속 내음이 물씬 묻어납니다. 마주하고 보면 빙긋이 웃음이 번져납니다. 성난 표정을 나타내려 했는데도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느껴진답니다.

 

전체.얼굴.

 

한쪽으로 치우쳐 비뚤어진 얼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 커다란 주먹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 거기 삐죽 나와 아래로 뻗어 있는 송곳니. 가슴에는 한 가닥 수염이 있으며 밑에는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 글귀가 놓였습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다듬었는데, 제게는 걸작으로 보입니다.

 

이 돌장승은 원래 남장동에 있었는데, 1968년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 합니다.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 만들었다고 짐작된답니다. 남장사에는 사천왕이 없는데요, 사천왕 구실까지 대신해 주는 셈입니다.

 

절간 들머리에 자리잡아 잡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는 한편, 절간 영역이 시작된다는 표시도 해 주면서, 이런저런 풍수 비보 노릇까지 함께하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神將)입니다. 그래도  불교 냄새보다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느낌이 훨씬 세답니다. 그래서 마치 돌하르방처럼 만만하답니다.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호)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길가 논 한가운데 있는 바람에 원형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답니다. 커다란 절간 대웅전 앞마당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을 법하지요.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당간지주는 절간 들머리나 으뜸 법당 앞에 마련합니다.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당간지주의 크기로 절간 규모까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간이 클수록 깃발이 컸고, 큰 깃발을 지탱하려면 당간지주도 커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호)은 사벌국 왕릉이라 전해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석탑은 전탑보다 크기는 작습니다. 하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은 전탑을 앞서지요.

 

1층 기단에서 아래쪽 땅과 닿는 기단 면석을 두지 않는 양식은 상주·문경 석탑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합니다. 비례가 잘 맞지 않고 기단 일부가 망가져 모습이 이상합니다. 어리숙한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느낌이 묘합니다.

 

 

상주박물관 석각천인상(보물 제661호)은 주악(奏樂)천인상과 공양(供養)천인상을 새긴 돌입니다. 원래 석탑 기단석이나 면석으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며, 보기 드물게 잘 만들었다는 평을 받습니다.

 

주악상은 비파를 타는 모습으로, 화관을 쓴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가 부드럽습니다. 자태는 웃음을 살짝 머금은 채 단정하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은 섬세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공양상은 오른손으로 연꽃 봉우리를 받쳐들었는데 움직이는 듯 자연스럽다는 평을 받습니다.

 

공양.주악.

 

 

만든 시기는 700년대로 여겨지는데 여기 옷차림이 당시 복식(服飾)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답니다. 어쨌거나 이들 천인에게 주어진 역할이 부처를 기리고 중생을 믿음으로 이끄는 데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상주 용화사 증촌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20호)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습니다. 왼손에 약병을 들고 있으니 바로 약사여래불입니다. 광배(光背)는 사라지고 없으며, 앉은 자리 대좌는 8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팔각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안정돼 있습니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웃음기 없는 작은 입, 군살 붙은 턱 같은 세부 표현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답니다. 통일신라 중기의 풍만하고 균형 있는 양식이 이어져 오면서도 형식화·경직화돼가는 특색을 보여줍니다. 얼굴과 몸은 시멘트로 이어져 조잡한데요, 이 부처가 모셔져 있는 용화사랑 닮았습니다.

 

상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얼굴.

 

상주 용화사 삼층석탑. 보잘것이 없습지요.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8호)도 같은 절간에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광배도 불상이랑 한 돌로 조각돼 있는데 많이 닳고 망가졌습니다. 석조여래좌상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경직돼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상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과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683)은 고려시대 작품이랍니다. 경술국치를 겪어 일본 헌병이 탑신을 허물어버렸고, 1978년 복원했다고 합니다.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7층으로 올렸습니다. 보통은 삼층, 많아봐야 오층인데, 많이 올린 셈이지요.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본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얇아보이는 지붕돌은 느릿느릿 기울어져 있고, 귀퉁이 네 곳은 뚜렷하게 치켜올려 놓았으며, 밑면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7층은 4단을 넣었습니다. 꼭대기 머리장식은 어디 가고 그것을 받쳤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았습니다. 

 

날렵함과 경쾌함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바라보는 눈맛을 매우 시원하게 해주거든요. 전체로 봐서 균형미와 정제미가 뛰어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전기에 만들었으리라 짐작이 된답니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이처럼 돌탑이라 하면 삼층석탑만 떠올리는 사람, 그리고 탑이라 하면 죄다 돌로 만들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경북 의성과 안동·상주 일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갖가지 재료를 가지고 갖은 모양을 만들어 내었음을 여기만큼 오밀조밀 잘 알려주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훌륭하게 만들어진 작품을 마주하면, 마치 맑은 물로 행궈낸 듯이 머리가 속까지 시원해집니다. 더욱이 그런 작품이 놓여 있는 풍경까지 그럴 듯하다면, 마음이 마냥 흥겨워져 언젠가는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마저 없어지게 만든답니다.

 

김훤주

 

※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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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거림농원의 100살짜리 단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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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고속도로 부산 방향에 있는 마지막 휴게소인 진영휴게소에 가면 이런 홍보물이 있습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진영 단감에 대한 얘기입니다.

 

단감의 시배지가 진영이라는 말씀이지요. 요지는 지금의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 일대가 단감 재배의 최적지로 판단돼 1927년 단감을 기르기 시작했다, 입니다. 1927년이라면 올해가 2014년이니까 87년 전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오래된(또는 오래됐다는) 단감나무를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 마산리 연동마을 언덕배기였습니다. 하희종·최순희 부부가 운영하는 거림농원입니다.

 

 

2013년 11월 초순이었는데,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마련한 '창원단감 블로거 팸투어'에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단감나무가 될 텐데요,

 

저는 처음에 저으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단감이라 하면 김해의 진영이 으뜸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김해 진영이 아닌 창원 북면에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단감나무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었거든요.

 

100살짜리 단감나무.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거림농원의 주인 하희종씨는 할아버지적부터 단감 농사를 지었는데 그 때 기르던 나무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제가 알기로 하희종씨는 56년생이신데, 그렇게 따져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고 셈해보면 단감나무 나이랑 얼추 맞아들어갑니다.

 

거림농원은 1만5000평에 좀 미치지 못하는데 야산 한 쪽 언덕배기를 단감나무가 뒤덮고 있습니다. 하희종씨는 여기 자라는 단감나무 가운데 몇몇을 짚어 할아버지 적부터 키워온 것들이라고 일러줬습니다.

 

 

한 대여섯 그루를 짚어줬는데요, 다들 둥치가 예사롭지 않게 굵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단감나무는 키가 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가둬들일 때 힘을 적게 들여도 되도록, 옆으로옆으로 벌어지도록 가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키만 봐 갖고는 그 나무의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운데, 둥치를 보니 뚜렷하게 구별이 됐습니다. 30년 안팎 자란 나무는 허벅지 아래쪽 정도 굵기에 이르지 못하는데, 100년 된 나무는 사람 허리 정도 굵기가 된다고, 하희종씨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단감이 가장 먼저 재배된 지역이, 세상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김해 진영이 아니고 창원 북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슬며시 궁금증이 솟아났습니다. 100년 가까이 오래된 단감나무도 열매를 제대로 맺어내는지였습니다. 그래 물었더니 아무 차이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맛만 좋다고 했습니다.

 

 

거름을 알맞게 주고 제대로 가꾸기만 하면 오래된 나무에서 수확이 더 많다는 것이 다른 과일나무와 다른 점이라 했습니다. 100년 된 나무에서 단감을 하나 따서 주셨는데, 과연 그 촉촉함과 달콤함이 전혀 나쁘지 않았고 좋았습니다.

 

한창 단감을 따내는 바쁜 철이라서 오래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거림농원 주인 하희종·최순희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지어온 단감농사를 본인들이 이어간다는 사실에 제법 뿌듯해했습니다.

 

물론 오래 되지 않은 나무에서 딴 단감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에서 단감이나 그 맛은 별로 다르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어쩌면 나중에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는, 심은 지 100년 된 단감나무를 여태 거두고 있는 하희종·최순희 부부의 거림농원이 살갑고 고마웠습니다.

 

거림농원 전화번호

010-6574-8412

010-9660-8412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진리에 이르는 가장 멋진 방법은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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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깁니다. 200자 원고지로 100장 넘는 분량입니다. 2013년 7월 31일 남해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아침 아홉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 동안 했던 ‘경남 문화관광해설사 신규 양성 과정’ 강의 내용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게 맡겨진 강의였는데, 저는 이를 기회 삼아 그동안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를 운영하면서 얻게 된 이런저런 경험과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결과로 이렇게 긴 글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에게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관심이 있으시거들랑 한 번 보시라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인데요 예비 사회적 기업이기도 합니다. 여행/체험,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제작. 마을 만들기/도랑 살리기/볼런투어 같은 공익성 사회 이바지 활동, 탐방/체험 루트 개발 등을 합니다.

 

 

1. 생태계의 중심은 생명일까?

 

생태(계)를 상징하는 색은 초록입니다. 그런데 과연 초록이 생태계를 대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녹색 연합’이라는 생태환경 관련 운동단체도 있고 <녹색 평론>이라고 인간 중심 환경운동을 뛰어넘는 생태 보편의 값어치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적극 펼치는 격월간지도 있습니다.

 

초록이 생태계의 상징색이라면 생태계의 모든 속성에서 초록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될까요? 초록으로 물든 풀이나 나무조차 얼마 안 가 시들어버립니다만, 그래도 풀이나 나무는 초록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아울러 풀이나 나무, 또는 그 열매를 먹고 사는 짐승(사람도 포함)도 초록 자체는 아니지만 초록의 연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먹고 사는 짐승도, 그 생명의 뿌리가 풀이나 나무에 있으니 초록의 2차 연장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생태계 전체를 보면 전혀 아닙니다. 초록조차도 일시 현상일 뿐이고 그나마 일부에만 국한됩니다. 생태계가 인간이나 생명(=생물)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 생명과 비생명으로 이뤄지고 생물과 생명은 초록으로 수렴될 수 있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아무래도 도저히 초록으로 수렴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이 으뜸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생명체에게만 으뜸 가치일 뿐이지 비생명(=무생물)에게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 해도 그것이 생명체를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구나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존재할 뿐이니까요. 햇빛 물 흙 공기 따위는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오히려 생명이 만들어지는 데 필수 바탕입니다. 비중이 생태계에서 절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초록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죽지 않는 생명(=생물)은 없습니다. 모든 생명(=생물)은 언젠가 때가 되면 죄다 무생물(=비생명)로 돌아갑니다. 비생명(=무생물)은 처음부터 비생명(=무생물)이고 생명(=생물)은 끊임없이 비생명(=무생물)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생태계의 중심은 굳이 따지자면 비생명(=무생물)이 아니겠습니까? 생명과 생물은 유한하고 한 때뿐이지만, 무생물 비생명은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생물과 생명은 끊임없이 무생물(=비생명)이나 다른 생물(=생명)을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생물(=비생명)은 그야말로 창조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습니까? 저 말없는 흙이 저기 흘러드는 물을 빨아들인 위에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지 않으면 어떻게 생명과 생물이 태어나고 살 수 있겠습니까?

 

흙을 하나 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흙이 없으면 물을 머금을 수 없어 나무나 풀이 자랄 수 없고 나무나 풀을 먹는 많은 동물들도 덩달아 살 수 없습니다. 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위가 없으면 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위가 쪼개지고 닳아서 흙이 됩니다. 흙은 다시 압력을 받아 바위로 되기도 합니다.

 

농부 시인 서정홍이 펴낸 <농부시인의 행복론>에 나오는 글입니다. “흙 1cm가 쌓이는 데 넉넉잡아 400년이 걸리고, 콩알 반쪽밖에 안 되는 흙알갱이 속에도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이 무려 2억 마리나 살고, 흙 한 줌 속에 살고 있는 생명이 지구에 사는 사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답니다. 2천~3천년이 걸려야 바윗돌에서 겨우 10cm 만들어진다는 귀한 흙입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 걸작이라 한다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을 버리고 생태(자연 그대로 있는 자연)를 맞이한 것처럼 초록과 생명 중심 관점을 버리고 비생명 무생물을 으뜸으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을 이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명과 생물이 의존적이고 지엽말단이라는 사실과, 반대로 무생물과 비생명이 독립적이고 근본적이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은 사람 같은 생명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은 공기와 물과 햇볕과 흙 같은 무생물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람 같은 생물들은 기대야만 존재할 수 있지만 무생물은 전혀 기대지 않아도 잘만 존재합니다.

 

무생물은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생물은 아기 같은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아기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지만 무생물은 사실 어머니보다 더한 존재입니다. 어머니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지만 공기와 물과 흙과 햇볕은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지구로 구성원이 되어 들어와서는, 인간이 갖은 해코지를 해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무생물이 바로 생명을 만들어주고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생산적이며 영원불멸한 무생물(=비생명)을 깨끗하게 지구의 중심 또는 원천으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 비생명(=무생물)에 어떻게 하면 잘 빌붙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돼야 하고, 중심에 있는 인간이나 생명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대로 유지 보호되지 않아도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도움이 되는 쪽으로 변형 파괴돼야 한다.’

 

2. 습지는 과연 생명의 자궁이기만 할까?

 

습지를 일러 사람들은 이런저런 규정을 해왔습니다. 물론 20년 전 30년 전 습지를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라고 여겼던 데에 견주면 엄청나게 좋은 변화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모자랍니다. 단편적이고 일면적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 많은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학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가르칩니다. 생명의 땅이다. 생명이 움트는 자궁이다. 생태계의 보고다. 생물다양성이 살아 있는 터전이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자연저수지다.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터전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생태관광지다. 습지는 우리 인간의 삶터다.” 옳으신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반대 측면도 있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이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생물 덕분에 알아오던 생물도 죽으면 바로 그 순간 무생물이 됩니다. 이런 ‘좀 전만 해도 생물이던 무생물’은 바로 생물들에게 살아가는 영양분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의 주검 위에 풀과 나무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립니다.

 

맞물려 있음은 바로 돌고 돎이 됩니다. 생물이 무생물이 되고 무생물에서 다시 생명이 태어나는 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습지는 ‘생명의 자궁’이기도 하고 ‘생명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삶터이기도 하고 죽음터이기도 합니다. ‘맞물림’과 ‘돌고돎’이 가장 잘 일어나는 데가 습지입니다.

 

습지는 축축하게 젖은 땅입니다. 물기가 있으니까 식물이 잘 자랍니다. 식물이 잘 자라니 식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가 많이 생깁니다. 곤충이나 물고기 따위를 먹고사는 새라든지 수달도 당연히 생기고, 노루나 고라니 같이 습지랑 무관해 뵈는 것들도 물을 마신다든지 해서 들락거립니다.

 

옛날에는 사람도 습지 둘레에 주로 살았습니다. 습지가 소중한 진짜 까닭은 이처럼 생명의 태어남과 생명의 죽음이 함께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습지가 ‘생명의 자궁’이기만 하거나 반대로 ‘생명의 무덤’이기만 하면 하나도 소중할 것이 없습니다.

 

 

생물과 무생물의 연관, 생물과 무생물의 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활발한 땅이라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습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 연관과 순환이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메마르게 됩니다.

 

한 번 태어난 생명체가 무생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냥 사라진다면, 모든 생명들이 딛고 있는 땅이 메마르게 됩니다. 영양분도 공급받지 못합니다. 영양분은 식물·동물이 죽고 분해되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식물·동물이 썩어문드러지지 않으면, 물이 흐르고 공기가 통하고 해가 쨍쨍 내리쬐도 아무것도 태어나지 못합니다.

 

3. 낙동강 발원지가 강원도 황지 말고는 없을까?

 

낙동강은 발원지가 강원도 태백 황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구석이 아주 많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낙동강에 흐르는 그 많은 물이 황지에서 흘러내린 그 물만이 아닌 만큼,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줄기의 발원지를 모두 낙동강의 발원지로 여기자는 말씀입니다. 발원지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입니다.

 

 

황지는 낙동강의 유일한 발원지가 아니라 여러 발원지 가운데 낙동강과 바다가 맞닿는 끄트머리에서 가장 멀리 있을 따름입니다. 경북 경주 산내면 대현리 동쪽 골짜기 밀양강 물줄기 시작점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그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단장천의 발원지라 할 밀양 재약산 산들늪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거창 궁항리 황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이고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 남강의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경북 포항 죽장면 가사리 남쪽 계곡 금호강 발원지도 낙동강의 발원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습대로 낙동강이 있도록 하는 물줄기가 황지에서 발원한 물줄기 하나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마다 다른 데서 시작한 밀양강과 단장천과 황강과 남강과 금호강도 자기 물줄기를 낙동강에다 풀어넣습니다.

 

 

낙동강 종점에서 볼 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을 뿐 낙동강을 이루는 물줄기가 발원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낙동강이 훨씬 더 풍성해집니다. 예전에는 ‘낙동강’ 하면 태백 황지에서 부산 하단을 잇는, 남진하다가 꺾어져 동진하다 다시 남진하는 낙동강 본류만 머리에 떠올라 앙상했습니다.

 

하지만 낙동강 발원지가 낙동강에 물을 보태는 물줄기마다 하나씩 있다고 보면 그 앙상함이 풍성함으로 바뀝니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에다 강원도 남부 지역까지가 온통 낙동강으로 여겨집니다. 눈길이 가는 영역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황지가 여러 발원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발원지로 생각하게 되면 낙동강 본류로 스며드는 숱한 하천과 개울을 낙동강과 동떨어진 무엇으로 여기게 됩니다. 황강 상류에 세워진 합천댐, 남강 상류에 들어선 남강댐, 금호강 상류의 영천댐, 밀양강의 밀양댐 등은 낙동강과 무관해집니다.

 

 

하지만 낙동강이 가난해진 까닭이 낙동강 본류에 들어선 임하댐과 안동댐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낙동강 강물이 더럽다면 그것은 황지에서 샘솟아 흘러나오면서 거치는 구비에서만이 아니라 낙동강과 합류하는 모든 하천이나 실개천이 들판과 마을과 공장을 흘러나오면서 더러워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4. 습지는 특별한 존재일까?

 

습지와 관련한 가장 힘있는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은 습지를 ‘물이 6m 이하 깊이인 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러 만들었든 저절로 생겨났든 물이 흘러다니든 고여 있든 민물이든 짠물이든 일시적이든 항상적이든 넓든 좁든 다른 아무 구분이 없습니다.

 

습지는 무슨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다. 또 크고 아름다운 습지만 습지인 것 또한 아닙니다. 순천만 사천만 비토섬 갯벌 창포갯벌 우포늪(소벌) 따위만 습지가 아니고 앞에 말씀드린 ‘물이 6m 이하 깊이인 땅’은 모두 습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둘레에 널려 있는 곳곳이 바로 습지입니다. 습지를 두고 별난 무엇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 인간은 습지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근본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이런 인식은 습지를 좀더 쉽게 망가뜨리게 합니다.

 

우포늪이나 순천만 같이 크고 아름답고 훌륭한 습지는 마땅히 보호해야 하지만 집 앞을 흐르는 도랑과 그 둘레는 돌보지 않아도 크게 탈날 일이 없다고 여기는 단초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죽을병만 치료하면 되고 잔병은 그대로 둬도 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염통에 걸린 병만 고치고 발가락 사이에 난 무좀은 고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고향 시골에 가면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요? 이른바 대부분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고 있습니다.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있는 자리입니다. 아니면 앞에 너른 들이 있는데, 이는 예전에 습지였다가 사람이 개간을 하는 바람에 정식 농경지가 됐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산이 있어야 물이 생겨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국토가 온통 습지입니다. 정지용 ‘향수(鄕愁)가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습지 모습입니다. 습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토록 습지는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바로 습지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다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거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5. 논도 당연히 습지다

 

2005년 11월 아프리카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제9차 람사르 협약 당사국 총회’는 뜻 깊은 회의였습니다. 일본 미야기(宮城)현 다지리(田尻)정 가부쿠리(蕪粟) 늪과 일대 무논이 ‘국제적으로 중요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기 때문입니다.

 

자연습지가 아니고 인간이 개발해 농사를 짓기까지 하는 땅이 습지 목록에 오른 첫 사례였습니다. 가부쿠리늪 일대에는 무논이 21ha(7만평) 정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겨울철에도 물을 채워 놓는 등 500가구 가량이 유기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부쿠리늪 일대 무논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아 자원이 절약되며 생물다양성과 자연성도 회복됐습니다. 가을걷이를 한 다음 볏짚과 쌀겨를 뿌리고 물을 채우는 겨울철 무논 농법은 한 번 시작한 사람이라면 쉽게 그만두지 못할 정도로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실지렁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실지렁이가 흙 속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질소성분이 들어 있는 배설물을 쏟아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논은 인간이 간섭한다는 점만 빼면, 다른 습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과 식물의 터전이며 물 속 유기물질을 없애는 정화도 합니다.

 

물을 가둬두는 저수지 구실과, 빗물을 땅 밑으로 스며들게 하는 통로 구실도 톡톡하게 하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연구소 김동수 소장과 엄기철 토양수분 연구실장 등 연구진 5명이 공동 집필한 책 <논, 왜 지켜야 하는가>(1994년)는 논의 습지로서 가치를 돈으로 환산했습니다.

 

우리나라 논 134만5000ha의 홍수 때 저장능력은 36억t에 이릅니다. 다목적댐 건설비 t당 4315원을 곱하면 15조5000억 원이 됩니다. 다목적댐 홍수조절비용 t당 439.55원을 적용하면 1조5824억 원입니다. 여름철 논이나 벼를 통해 대기로 증발돼 나가는 물은 하루에 ha당 60t, 전체 8070만t으로 온도를 떨어뜨리는 효과도 냅니다. 에어컨으로 낮춘다면 물 1t당 원유 0.57kl, 전체는 4600만kl입니다.

 

토양 유실 방지 효과는 한 해 2596

만t이라는데, 객토로 채우는 비용으로 2061억 원이며, 논이 보존하는 토양 유실량에 맞먹는 사방(沙防)댐을 만들려면 666억7042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정화 능력은, 관개수(灌漑水)의 10%(19억4000만t)가 오염됐다고 잡을 때 정화시설을 만들고 가동하는 비용 t당 3073원을 곱하면 5조9600억 원이랍니다.

 

벼의 이산화탄소 제거 효과는 한 해 4178억 원, 산소 공급 기능은 한 해 5조2795억 원입니다. 쌀 소출 한 해 소득 6조 원과 견줄 수 없을만치 많으며, 지하수 함양(해마다 157억5000만t)까지 합하면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경남 지역에서 논농사는 늦어도 무문토기시대 초기(3000년 전)에는 시작됐습니다. 밀양시 산외면 금천리(琴川里) 일대에 유적이 있습니다. 밀양강과 단장천 합류 지점 가까이에 있습니다. 물이 오랜 세월 동안 흙과 모래 따위를 갖다 쌓은 충적지입니다.

 

보(洑)와 봇도랑, 무논(水畓) 같은 농경유적과, 돌로 둘러싸고 불을 땐 터와 마을 집터 같은 생활 자취들이 함께 타나났습니다. 마을 집터와 생활유적은 자연제방 높은 자리에, 바로 밑에 밭터가, 이어서 논터가, 배후습지는 논터보다 더 뒤에 있었습니다. 보와 봇도랑은 배후습지와 논을 이어서 필요한 물을 대거나 빼는 데 쓰였습니다.

 

이런 배치는 2005년 5월 성과가 나온 마산시 진동면 청동기유적에서도 되풀이 볼 수 있었습니다. 남강댐 수몰지구 진주 대평리와 울산 무거동·야음동 등에서도 신석기시대 논농사 유적이 발견됐는데, 모두 개석곡(開析谷) 아랫도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개석곡은 준평원·선상지·삼각주 따위로 일정하게 솟아오른 지형을, 다시 물줄기가 흘러가면서 깎아내려 평평해진 땅을 이르는데, 논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자연습지였습니다. 보와 봇도랑은 산비탈 끄트머리 부분을 따라서 길게 들어서 있답니다.

 

 

옛날 사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해, 자연을 입맛에 맞게 ‘개발’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3000년 전 즈음에 이미 논농사가 있었으며, 그것도 초보적이거나 원시적이지 않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논으로서 기능을 죄 갖춘 완성된 형태였습니다.

 

람사르협약에 따르면 물에 잠겨 있는 6미터 이하 땅도 죄다 습지고요, 한 해 한 번이라도 물에 잠기는 땅까지도 모조리 습지로 봅니다. 그러니까, 논은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기 전부터 습지였는데, 사람들이 늘 곁에 가까이 두고 보는 대상이다 보니까 그에 걸맞은 관심이나 보호노력을 오히려 받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생명 다양성이라는 면에서도 논은 습지와 똑같습니다. 보통 논에는 벼만 사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농약이 못 살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개구리밥 같은 물풀은 물론이고 논고둥 미꾸라지 뱀 개구리 지렁이 따위가 아주 많고요 이들을 먹이로 삼는 갖가지 새들도 논과 둘레를 어슬렁거립니다. 

 

6. 인간은 습지와 교섭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옛적 사람으로 보자면 습지는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물길을 통해 옮겨 다니기 좋으니까 교통도 편리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사는 산보다 안전한 터전이었습니다. 갖은 퇴적물로 땅이 기름지기까지 하니 나중에 농사를 짓게 되면서는 더욱 습지랑 친하고 가까워졌습니다.

 

 

습지와 인간이 교섭, 그러니까 사귀고(交) 겪고(涉) 했습니다. 원래 자연은 보호 대상이 아니고 교섭 대상입니다. 자연을 보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섭하지 않아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습지란 그 자체로 고립돼 존재하지 않고 사람에게 아주 소중한 보금자리이며 사람살이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8000년 전 창녕 비봉리 신석기 시대 저습지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3000년 전 밀양 금천리 신석기 시대 논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2000년 전 창원 주남저수지 저습지인 다호리 철기 유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지금 말밤 따고 논고둥 잡고 거룻배 타고 그물 거두는 창녕 소벌(우포늪)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습지랑 인간의 교섭 역사를 보려면, 경남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를 묶어야 합니다.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서쪽에 있는데, 동쪽 맞은편은 신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된 창녕 비봉리입니다. 주남은 그 자체가 다호리 철기시대 유적지이기도 하고요, 주남 남쪽 아래 김해에는 요즘 새롭게 알려지는 화포습지가 있습니다.

 

 

주남에서 남동쪽으로 낙동강을 가로지르면 또 오래된 인공 저수지인 수산제가 있습니다. 수산제 일대는 아주 옛날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줄곧 개간이 행해졌다 해도 무방합니다. 낙동강이 이렇게 일대를 하나로 묶었고 그래서 낙동강 공동체라 할만한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결국 사람까지 포함해 자연 만물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원래 이어져 있던 것들이 뚝 떨어져 나오게 되면 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단절 또는 차단이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습지와 함께 하던 인간이 언젠가부터 경계를 만들어 물과 뭍의 교섭을 막고 물을 빼낸 땅에 물을 채우는 대신 다른 것들을 들이세우면서 습지가 사라졌습니다.

 

습지와 교섭하기를 멈춘 습지의 인간들은 당연히 자연과 대립하게 됐습니다. 습지를 찾지 못하는 물은 인간이 사는 자리를 덮치기 십상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인간은 더욱 높게 제방을 쌓습니다. 그러면 자연은 다시 갖은 모레와 자갈 따위를 퇴적시키고 강바닥을 높여 제방을 넘거나 터뜨립니다. 자연과 교섭하기를 멈추면 이처럼 피곤해집니다.

 

7. 습지에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낙동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물줄기’로 여기는 본보기로 ‘낙동강은 식수원’이라는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1000만 영남권 주민의 젖줄’이라고도 합니다. ‘식수’를 만들려면 낙동강 ‘원수(原水)’를 퍼내 찌꺼기를 거르고 미생물을 비롯한 생명체까지 제거합니다.

 

 

낙동강을 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식 속 낙동강입니다. 지금 저기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낙동강은 당연히 물줄기 이상입니다. 갖은 생명이 태어나 살고 죽어가는 공간이며 사람들이 노동을 바치면서 먹을거리 등등 먹고 살 바탕을 마련하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평안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낙동강과 낙동강으로 스며드는 많은 물줄기들은 경남 일대 곳곳에 습지를 남겼습니다. 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중요한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순환 과정에서 습지가 중요한 ‘고리’ 구실을 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터 잡고 살아왔습니다.

 

그 조각들을 땅이름에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창녕 부곡 학포의 토종 이름은 ‘새개’인데 들머리 청도천과 낙동강이 마주치는 어귀에 황새 등 새가 많이 날아와서 붙은 이름입니다. 부곡에는 수다(水多)리도 있는데 말 그대로 물이 많은 동네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밀양시 무안면 인교리도 다리 교(橋)를 쓰는 데서 짐작되듯 이전에는 돛단배가 드나들 정도로 습지와 관련이 깊고 인교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오는 범평리는 이름에 아예 돛(帆)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안면도 찬찬히 따져보면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는 수안(水安)이라 했는데, 여기서 ‘수’는 뜻을 땄고 ‘안’은 소리를 땄다는, 호수처럼 물이 괴어 있는 안쪽이란 뜻이 됩니다. ‘물안’이라 하다가 ‘ㄹ’이 탈락됐다는 것인데, 사명대사가 힘을 써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고 해서 무안(務安)이라 한다는 설과 맞서고 있습니다.

 

 

우포(牛浦)늪 소벌의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소벌은 나무갯벌과 쪽지벌 사이에서 불쑥 물 쪽으로 들어온 땅 모양이 소대가리 같다 해서 붙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만 알고 있었습니다. 소목(牛項)도 있는데 소 목덜미에 해당됩니다. 대가리를 박고 물 마시는 소 모양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뜻도 모른 채 한자 소리대로 ‘우포’라 할 뿐이니 딱합니다. 어떤 시인은 여기 와서 시를 썼는데 이 우항을 우황이라 적는 남우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는 우포가 누포(漏浦)라 적혀 있습니다. 우포의 옛 이름인 셈입니다. 샐 루 개 포를 쓰니 동쪽을 가리키는 우리말 ‘살’ ‘사라’를 품은 이름입니다. 샐개, 곧 낙동강 동쪽에 있는 벌이라는 얘기입니다.

 

우포 또한 누포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동풍을 샛바람이라 일컫는 것처럼, 동쪽을 가리키는 ‘쇠’ ‘소’ ‘새’를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우포의 ‘우(牛)’가 동쪽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스토리텔링이 진행돼 ‘소 대가리 모양’ 운운이 나왔습니다.

 

 

소벌 가까운 창녕 대지면에 소맥산(小麥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읽으면 소보리산=소벌산이 됩니다.

 

창녕 부곡 노리 북쪽 임해진(臨海津)도 눈길을 끕니다. 바닷물이 예까지 올라왔다는 이름으로 50년대에는 5일장이 설 정도로 번창했고 노리로 이어지는 열두 굽이 절벽은 더없이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합니다. 임해진 북쪽 남지서는 지금도 바닷물고기 웅어가 잡히니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벌이 있는 유어면은 옛날 유장면과 어촌면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늘 논다 유장(遊長)도 별나지만, 육지 한가운데 고기잡이마을 어촌(漁村)이 있다니 흥미롭습니다. 일제 때인 1914년 둘이 합쳐지면서 놀면서(遊) 고기잡는(漁) 유어면이 됐습니다.

 

또 낙동강 따라 널려 있는 세진 송진 반포 본포 등에서 진(津)과 포(浦)가 나옵니다. 진은 여객운송업만 주로 이뤄진 작은 나루고 포는 여객운송업에 더해 화물운송업까지 행해진 커다란 나루였다는 식으로 구분하면 다 맞답니다.

 

 

이렇게 인간이 습지랑 교섭하는 바람에 창녕에서 대지국민학교를 다녔던 성기각 시인이 ‘토평천’이라는 시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토평천(土坪川)이지만 옛적에는 물슬천(勿瑟川)이었습니다. 낙동강 동쪽에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물(勿)은 통일신라시대 이두로 물을 적을 때 그리 썼고, 슬(瑟)은 동쪽을 나타내는 한자 소리입니다.

 

 

화왕산 정기 받아 넓은 들 안고

굽이쳐 흘러가는맑은 토평천

토끼풀 가는 모가지에 꽃을 맺는 냇가에 서면

대지초등학교 나갈 종소리 낭랑하게 퍼져오고

여름 내내 우리는

선생님 몰래 멱을 감았다

돌틈 사이로 메기 잡는

병우가 냇물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면

꼭순이는

검정고무신 넘치도록 피라미를 잡았다

말매미 울어쌌는 버드나무

마파람은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오후 수업 시작종은 사분의 삼박자로 이어졌다

종소리에 놀라 우리는 제각기

물에 젖은 깜장빤쓰를 입고

발목 붙잡는 고들빼기 농로를 지나

물새궁둥이를 흔들며 교실로 달려갔다.

 

 

8. 습지에는 역사와 문화의 자취가 남아 있다

 

창녕 부곡 비봉리 44번지 신석기시대 습지 유적은 100평 정도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고 역사적 의미도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 습지 유적을 통해 인간이 습지와 어떻게 관계하고 교섭하면서 살아왔는지 원형을 한 번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이 유적 옆에 2층 건물이 있는데 양·배수 펌프장입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 일대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펌프 용량을 키우는 확장 공사를 하게 됐습니다. 이 때 유수지(遊水池)를 파다가 조개층 따위가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은 200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김해국립박물관이 진행했습니다. 80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원래 길이 3m 남짓), 사람 것으로 보이는 똥 화석(糞石), 짠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가 발견됐습니다. 모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었습니다.

 

도토리와 가래(가래나무 열매), 솔방울, 조 같은 먹을거리도 나왔습니다. 목탄(木炭)과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도 있었으며 재첩과 굴과 고막의 껍데기는 물론 잉어 이빨과 사슴·멧돼지·개의 뼈, 상어 척추와 가오리 꼬리뼈도 함께 띄었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들도 확인이 됐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맷돌 구실을 하는 갈돌과 갈판도 함께 나왔습니다.

 

뒤쪽으로는 해발 401m 짜리 월봉산이 가파르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래가 열리는 가래나무와 솔방울이 맺히는 소나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자랐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도 살았을 것입니다.

 

왼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낙동강 본류와 직각에 가깝게 만나는 청도천이, 유적 근방에서 갑자기 넓어집니다. 편평한 저습지였을 것입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 행렬은 당시 해안선이었습니다. 떫은 맛(타닌 성분)을 우려내는 데는 민물보다 짠물이 낫습니다. 이런 사실을 신석기 사람들이 알고 바닷물 드나드는 데다 구덩이를 파고 도토리를 담았습니다. 비

 

 

봉리 일대는 동해안 석호(潟湖) 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낙동강과 청도천이 만나는 지점에 서에서 동으로 모래톱 따위가 만들어져 있었고 안쪽은 호수 같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종합하면 전형적인 습지대였습니다.

 

바다가 강을 만나는 하구, 사람을 비롯한 갖은 생명이 어우러지는 터전이었던 셈입니다. 전형적인 습지대였음은 재첩이나 고막, 잉어 같은 유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잉어는 바닥이 진흙이고 흐름이 느린 데 주로 사는 민물고기입니다. 재첩과 고막은 짠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에 많습니다.

 

조개더미는 비봉리 사람들이 눌러 살았다(定着)는 증거입니다. 떠돌이라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일 리가 없습니다. 배를 타고 석호 안쪽을 돌아다니거나 때로는 고기잡이를 위해 바다에도 나갔습니다. 이는 상어나 가오리 뼈가 입증합니다. 상어나 가오리가 석호 안에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 비봉리 일대에만 사람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건이 비슷한 여러 곳에 살았습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는 8000년 전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입증합니다. 비봉리 상류는 민물이고 하류는 바닷물입니다. 유적이 발굴된 지대 높이가 해발(海拔) 0m 안팎입니다.

 

낙동강은 기울기가 완만해 창녕 남지의 수면이 지금도 해발 1∼2m밖에 안 됩니다. 흐름이 완만하다 보니 일대에는 비봉리 말고도 곳곳에 바다를 낀 습지가 있었습니다. 비봉리가 있는 청도천 일대와 맞은편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야산 너머 동쪽에 있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들판과 동남쪽의 김해 한림면 화포천이 흐르는 한림·시산 들판이 모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지도에서 인공제방을 지우면 그대로 확인이 되는 사실입니다. 창원 동읍과 대산면 주남저수지 일대는 비봉리와 같은 배후습지였고 주남의 주천강은 비봉리의 청도천과 마찬가지로 배후습지와 바다 사이에 물이 드나들게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강물은 서로를 잇는 통로이고 습지는 먹을거리 등을 제공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강줄기가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구실을 하는 시기는 훨씬 이후입니다. 당시는 바다·강과 습지를 중심에 놓고 여러 군데 흩어져 사는 동일 문화권으로 봐야 합니다.

 

비봉리와 성격이 비슷한 유적이 낙동강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비봉리에서 동쪽으로 산 하나 넘으면 나오는 밀양 하남 들판 한가운데는 백산(栢山)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습니다. 주민들은 ‘흰산’이라 하는데 조개더미가 하얗게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원 동읍에도 합산패총이 있습니다. 비봉리 사람들과 비슷하게 산 사람들의 자취입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다호리 고분군과 거기서 출토된 철기·청동기도 습지 유적입니다.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을 갖춘 습지가 아니면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남저수지 가까운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은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했습니다. 기원 전후 무덤과 널과 청동기·철기·목기, 그리고 붓과 지우개칼과 노끈 같은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수전(五銖錢)과 판상 철부(板狀 鐵斧·납작 도끼), 그리고 붓이 눈길을 끕니다.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때 동전으로 전한(前漢)과 후한 사이 잠깐 있었던 신나라 왕망도 만들었습니다. 만든 시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청동기·철기 유적에서 연대 측정에 쓸모가 있습니다. 오수전의 발견으로 다호리 사람들이 중국까지 교역했음이 확인됐습니다.

 

판상 철부는 실제 도끼 구실도 했지만 철정(鐵錠·덩이쇠)처럼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가공 소재 겸 화폐 노릇도 했다고 합니다. 낙동강 일대에서 가장 일찍 철기문화를 이룩한 집단이 이 습지 유적의 주인입니다.

 

습지의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이 이들로 하여금 앞서가는 문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앞서가는 문화였음은 붓과 지우개칼에서도 짐작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앞선 시기에 발견된, 문자 관련 유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생활을 가장 먼저 누렸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천은 경남에서 갯벌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고장입니다. 사천만에는 옛적 조창(漕倉)이 여럿 있었습니다. 동쪽인 용현면 선진리와 사남면 유천리 조동마을에 통양창과 유천창이 있었고 서쪽 축동면 구호리에는 장암창, 같은 면 가산리에는 가산창이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시대에 조세로 거둔 곡식을 모아 두고 옮겨가기 위해 강가나 바닷가에다 조정에서 지어놓은 곳집인 조창이 이렇게 많았지만 지금은 사천이 항구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남강댐에서 가화천을 타고 내려온 방류수 탓입니다. 

 

가화천은 남강댐과 이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 일대 낙남정맥을 가르고 물길을 내어 가화천을 남강댐으로 이어 버렸습니다. 사천만 바깥 지점으로 흘러나가는 가화천을 타고 방류수가 들어오면서 사천만 바닷물은 흐름이 크게 느려졌습니다.

 

사천만 안쪽 사천강과 길호강 등을 통해 북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 방류수 때문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결국 물살에 실려온 퇴적물은 바깥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사천만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당연히 바닥이 높아지면서 항구 기능을 잃게 돼 버린 것입니다.

 

 

사천에는 갯벌 관련 문화유적이 많습니다. 사천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처음 투입된 승전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진리성 어귀 ‘조명군총’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10월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이 패전했음을 일러주는 자리입니다.

 

가산리 돌장승과 가산오광대 놀이도 있고 대방진 굴항도 있습니다. 퇴계 이황이 스승 어득강과 노닌 작도의 정사도 있고 남명 조식이 놀던 쾌재정도 있고 민중들이 미륵 염원을 모아 묻은 자취인 매향비도 있습니다.

 

이들 자리를 이렇듯 훑어보면 옛날 갯벌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음도 절로 알 수 있습니다. 사천 갯벌 관련 유적에서 으뜸은 마땅히 ‘매향비’입니다. 고려 우왕 13(1387)년에 민중들이 미륵부처 오시기를 기원하며 향을 묻고 세운 빗돌입니다.

 

사천만에서 묵곡천을 따라 4km 가량 들어가 농지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지금은 논이지만 당시는 갯벌이었습니다. 620년 전 이들은 갈대 우거진 갯가에 모여 태평세상을 꿈꿨습니다. 빗돌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을 빌었다고도 돼 있지만, 사실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핑계일 뿐이고 매향 행사는 사실 지배층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위력시위 성격이 더욱 컸으리라 저는 짐작합니다.

 

귀족과 토호와 왜구에게 겹겹이 시달리던 민중은 미륵의 하생(下生)을 바랐습니다. 첫머리는 “많은 사람이 계를 모으고 미륵불 오시기를 바라며 향을 묻는다(千人結契埋香願王)”고 적었습니다. 끝에는 “모두 4100”(計四千一百)이라 적혀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1442년 사천 인구가 1817명이었고 남해군과 사천시 곤양·곤명면을 아우르는 곤남군은 1419년에 1300명이었습니다. 매향에 참여한 사람이 이 두 군현 인구보다 많았습니다. 아마 당시 토호들은 이 규모에 기겁을 했지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습니다. 서포면 외구리입니다. 옛적에는 섬이었고 이름은 작도입니다. 우리말로는 까치섬입니다. 작도정사를 둘러싸고 있는 뭍은 그러니까 일제 말기인 1938년에 일본 사람 야마다(山田)가 매립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작도정사는 퇴계 이황(1501∼70)이 곤양군수로 있던 스승 관포 어득강(1470∼1550)을 1533년에 찾아와 함께 ‘잔질’한 자리입니다.

 

“곤양에서 어 관포를 모시고 까치섬에 노닐며 조석(潮汐)을 논했다. 까치섬은 곤양군의 남쪽 십리 즈음에 있다. 섬 양쪽에 산이 문처럼 마주서 있고 밀물이 여기를 들어와 섬을 감싸고 8~9리를 돌면 바다가 되고 밀물이 빠져나가면 뭍이 된다. 때가 되기를 기다려 고기잡이들이 그물로 막는다.

 

(어득강) 선생은 사인(舍人) 정세호와 생원(生員) 이령과 생원 강공저 그리고 황(滉)과 더불어 배를 타고 상류·중류에서 그물을 치고 있는 여기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려 고기잡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과 큰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장면을 보고 아주 즐거워했다.

 

밀물이 빠질 때가 돼서 다들 배를 버리고 까치섬에 올랐다. 오후가 지나 배가 떠 있던 데를 돌아보니 평지가 되어 까마득하고 그물에 가리어 은은하다. 밀물 썰물의 이치를 논하면서 회를 치고 술을 잔질하다 드디어 날이 저물고서야 마쳤다.

 

까치섬은 마치 손바닥처럼 평평하고 멀리 마주보이는 금오산은 높다. 아침이 다하도록 깊이는 헤아리지 못하고 예로부터 근본을 따지기는 어렵다. 숨 쉬는 땅은 입이 되고 오고가는 산은 문을 지었다.” 

 

거기 빗돌 글귀입니다. 그림 같은 풍경과 당대 사람들의 안목이 함께 들어옵니다.

 

 

9. 남명 조식의 두류산 유람도 습지에서 시작했다

 

퇴계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선비 남명 조식(1501∼72)은 이 사천 갯가 쾌재정에서 쌍계사가 있는 하동 화개까지 배를 타고 올랐습니다. 지리산 유람의 첫발을 습지에서 내디딘 셈입니다.

 

남명은 1558년 음력 4월 지리산을 둘러보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습니다. 도서출판 돌베개에서 펴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우리말 번역이 들어 있습니다.

 

남명은 음력 4월 11일 합천 삼가에 있던 집 계부당(鷄伏堂)을 떠나 진주 자형 집에서 묵었습니다. 사흘 동안 잘 놀고 난 다음 남명은 15일 일행과 함께 쾌재정을 찾아왔습니다. 진주목사 김홍과 자형 이인숙과 고령현감을 지낸 이희안과 청주목사를 지낸 이정이 일행이었습니다.

 

 

“잠시 후 사천군수 노극수가 고을의 수령 자격으로 찾아와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어주었다. 모두 큰 배에 오르자 사천군수 노군은 술과 안주와 음식을 실어준 뒤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기생 열 명이 피리·생황·북·나발 등의 악기를 모두 벌여놓았”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이런 대접을 받으며 남명 일행은 이틀 동안 배를 타고 곤양·하동·악양을 거쳐 화개에 이른 다음 아전들이 모시는 가운데 쌍계사로 들어갔습니다. 쌍계사에서 남명 일행은 17일 아침 “호남 유생 김득리·허계·조수기·최연 등이 먼저 이 절에 와 있어서 이들을 법당으로 청하여 술을 한 차례 돌리고 풍악을 울렸”습니다.

 

19일 드디어 지리산 오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이인숙과 이강이는 병을 핑계로 동행하지 않았다. …… 김경이 병 때문에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을 데리고 급히 떠났다. …… 호남에서 온 (유생) 네 사람과 백유량·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타면서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그 뒤를 따르면서 선두 대열을 이루었다. 나머지 여러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줄지어 앞으로 전진하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음식과 놀이를 맡은 진주 아전)과 요리사와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갔다.” 어떠신지요?

 

10. 놀이는 진리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6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창녕 부곡 온천 로얄관광호텔에서 ‘제2차 논습지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한·일 자치단체 네트워크-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튿날 여기 참여해 소중한 경험을 했는데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에 마련한 이 행사에서 ‘논 교육’에 대해 발표한 슈사쿠 미나토라는 일본 선생님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미나토 선생.

 

일본을 대표하는 논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81년부터 어린이들에게 30년 넘게 논과 환경보전을 교육해 왔고, 2011년부터는 간사이대학교에서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분이었습니다.

 

논을 두고 미나토 선생은 자연환경과 문화환경과 사회환경과 경제의 총합이라 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논을 제대로 공부하면 한 나라의 자연과 문화와 사회와 경제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제대로 놀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논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갖가지 것들을 갖고 그렇게 놀아야 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체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이 얼마나 줄어들었고 그 때문에 황새나 따오기 같은 것들이 살기 어려워졌고 그런 얘기는 곁가지였습니다.

 

풀잎으로 배 만들어 띄우기 놀이를 한 뒤.

 

미나토 선생은 놀이 속에서 논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습니다. 그이에게 논은 사람을 기르는 장소이면서 다른 생명도 함께 키우는 공간이었습니다. 벼 문화를 키워온 장소이면서 우리 모든 생명에게 소중한 물을 머금어 주는 습지이기도 했습니다. 자연과 농업과 경제와 인간 생존이 지속 가능해지도록 하는 공간이 됩니다.

 

이어서 가까이 있는 논으로 옮겨가서 현장 활동도 했는데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논과 논 주위 생명체가 무려 5668가지나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나토 선생이 30년 동안 조사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논 체험은 바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생명에 대한 체험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만들어놓은 갖은 현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심은 놀라움과 기쁨이었습니다.

 

논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는 미나토 선생.

 

미나토 선생은 일단 논에 가서 밭두렁에 앉아 3분만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많은 생물들이 요렇게 조그만 데서 꼼지락거릴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갖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뒷면을 보는 것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파리 냄새를 맡고 그 주인 되는 풀을 찾아오는 놀이도 했습니다. 그밖에 풀잎으로 배를 만들어 봇도랑에 띄우거나 표적을 만들어 세워놓고 풀을 뽑아 던져 맞히는 등등 다른 많은 놀이도 소개해 줬습니다. 고무줄로 먹이사슬 나타내기, 풀잎을 따서 투명 비닐에 넣어 비춰보며 차이점 공통점 찾기, 논가에서 사물들 그려보고 그 소감 말하기 따위입니다.

 

말하자면, 논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갖고 그냥 즐겁게 놀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숫자나 문장에 있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자기 몸에 새겨져야 진짜 진리가 되는데, 그렇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놀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미나토 선생은 오감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성만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지식이나 자연에 대한 인식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통 과학이라고 하는 영역도 풍부해진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지식이 책 속 활자가 아니라 생활 속 경험으로 이어지다 보니까 더욱 구체적으로 남는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놀이를 생태 관광 해설에서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 까닭은 이 날 미나토 선생과 함께 놀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공해 줬습니다.

 

그이들은 대부분 논이나 습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이른바 ‘전문가’ 또는 ‘활동가’였는데요, 논이나 습지로 조사를 나가서 기록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머리와 가슴에 결과와 과정이 남은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이들 스스로도 놀라워하면서 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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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예쁜 연이 살던 자리, 안동 제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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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쓴, '경북 탑 탐방 - 맑게 머리 속까지 헹궈내는(http://2kim.idomin.com/2511)'과 관련이 있는 글입니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 나오는 성주의 본향이랍니다. 성주는 집을 짓고 지키는 수호신으로 식구들 건강과 화목을 돌보고 집을 재해로부터 지켜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집은 단순히 개별 가정만뜻하지는 않습니다. 씨족공동체나 지역공동체로 범주가 쉬이 넓어지지요.

 

이런 성주신앙은 우리 문화 여러 뿌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주신은 처음으로 집 짓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쳐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목수의 신입니다. 또 아내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며 집안을 화목하게 만드는 가장의 신이기도 합니다.

 

 

성주는 나아가 솔씨, 소나무까지로도 확장해 나갑니다.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인 까닭도 제비원 솔씨에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게 읊는 전설이나 민요가 많거든요.

이를 반영하듯, <영가지(永嘉誌)>에서 “아득하게 높다란 지붕 추녀가 반공에 나래를 편 듯하다.”고 표현한 제비원 누각을 지은 목수가 죽어서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한 목조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까닭도 제비원 솔씨 성주, 이런때문이라 합니다.

 

 

성주풀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당이 부르는 노래(巫歌)이고, 다른 하나는 보통 지신밟기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용은 비슷하다지요.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임을 밝힌 다음 제비원에서 솔씨가 날아들어 커다란 소나무로 자랐고, 이를 갖고 집을 지었으니 매우 번창하리라는 줄거리를 따릅니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조선 팔도에서 어느 곳 없이 성주풀이를 할 때면 한결같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비원에는 전설도있습니다. 주인공 이름은 제비를 떠올리게 하는 연이 처녀랍니다. 행실이 착하고 예쁜 연이는 여덟 살에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제비원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냈겠지요. 연이는 힘들게 일하면서도 글도 익히고 미륵불에 늘 정성으로 기도했답니다.

 

제비원 미륵불은 엄청나게 크지만 이 삼층석탑은 없는 듯이 조그맣습니다.

이런 연이를 이웃 마을 부잣집 총각이 좋아하게 됐는데 그만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총각은 염라대왕한테 사정해 연이의 공덕을 빌려쓰고 되살아나면 재물로 연이한테 갚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갑자기 엄청난 재물이 생긴 연이는 부처한테 시주합니다. 연이 재물은 제비원 누각 공사에 쓰이게 됐습니다. 5년에 걸쳐 지어진 법당은 당연히 제비가 날아가는 모양처럼 잘 빠졌겠지요.

 

그런데 완공하던 날 기와를 얹던 와공(瓦工)이 높다란 지붕에서 떨어져 죽었고, 육신은 묻히고영혼은 제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랐습니다.

 

연미사 중수비.

 

오래 사나 짧게 사나 좋음과 나쁨이 없는데, 어쨌든 연이는 착하게 살다가 서른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연이 영혼은 제비원에 깃들었습지요. 이때부터 사람들은 절간을 연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 했고요, 연이가 살던 곳을 제비원이라 이르게 됐습니다.

 

어떻습니까? 역사가 오랜 제비원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얘기 아닌가요?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이 발행한 비매품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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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도랑 때문에 빚도 많고 복도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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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수질환경센터 센터장

 

 

스승과 제자 사이 아름다움이 여기 있었습니다.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양운진 이사장과 이상용 수질환경센터 센터장. 수질환경센터는 한국생태환경연구소의 부설 기관이며 이상용 센터장은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상임 이사이기도 합니다.

 

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학문과 운동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 활동이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둘이 같이 활동하는 단체인 한국생태환경연구소가 지난해는 환경부 수생태(도랑)복원 컨테스트 대상을 받았고 올해는 한국생태환경연구소와 수질환경센터가 공동으로 SBS물환경대상(교육연구 분야)을 받은 것입니다.

 

 

스승이 자랑스럽게 앞세우는 제자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 초대 의장을 지낸 양운진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경남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로 있었지만 이제 명예퇴직을 하고 물러나 있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지역사회 원로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이사장이나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 이사장 같이 둘레에서 요구하거나 자기가 필요하다 싶은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질환경센터 이상용 센터장이 큰 상을 받았거든. SBS에서 물환경대상. 너거 신문에 좀 크게 다뤄줄 수 없나?” 조금은 취한 듯한 목소리였지요. 아무래도 기분이 아주 좋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시 연락을 드리겠다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더랬습니다.

 

경기도 오산천에서 수질 생태 조사를 하는 장면.

 

알아봤더니 자기가 이사장으로 있는 단체가 대상을 받았으니 본인이 상을 받았다고 해도 괜찮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용 센터장이 상을 받았다고 한 데에는 나름 까닭이 있지 싶었습니다. 그이가 전반을 총괄 진행해 왔기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산청에서 태동하고 마산에서 태어나

 

1965년 7월 7일 생인 이상용 센터장은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가 고향입니다. 지리산 둘레길 5구간 종점, 물 좋은 동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어나지는 않았고 태동기(胎動期)를 여기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난 데는 마산이랍니다. 그러니까 마산은 살아온 고향이 됩니다. 이상용 센터장이 기억하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마산은 대단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었습니다.

 

회원천이 흐르는 앵두밭골, 그러니까 앵기밭골에서 자랐습니다. 물놀이하고 가재 잡고 얼음 지치고 물고기 잡고 그렇게 놀았다고 합니다. 우물도 살아 있었고요. 이런 마산의 추억이 이상용 센터장에게는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청 수철마을의 추억은 더욱 강렬했습니다. 더 크고 더 많은 추억을 그이는 수철마을에 담아두고 있었습니다. 큰집 본가와 외가가 모두 거기에 있으니까, 방학을 비롯해 틈만 나면 거기서 뛰놀았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나무도 하고 도랑에 들어가 물놀이도 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도랑 살리기 운동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곳곳에 있지만 강도 아니고 하천도 아니고 지천도 지류도 아니어서 나라로부터 아무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있는 도랑입니다. 하천법과 소하천 정비법 두 가지가 있는데, 도랑은 어느 법률도 다루지 않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상용 센터장은 오래 전부터 도랑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도랑은 실핏줄이기 때문이랍니다. 낙동강·한강·영산강·금강·섬진강 같은 커다란 강줄기가 동맥이고 밀양강·함안천·석교천·황강·남강 같은 물줄기가 굵은 핏줄이라면 도랑은 실핏줄에 해당됩니다.

 

실핏줄이 깨끗하지 않으면 굵은 핏줄과 동맥이 절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물을 더럽히는 일들은 대부분 동맥이나 굵은 핏줄에서가 아니라 실핏줄에서 벌어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굵은 데에만 눈길을 둡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상용 센터장은 2007년 고향 수철마을에서 마을 앞 도랑을 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그지없이 깨끗하지만 그 때는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고 냄새도 많이 났습니다. 여기저기 쓰레기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도랑을 돌보지 않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수철 마을 사람들은 도랑이 깨끗해지면서 마을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찾는 마을이 됐고 깨끗해진 도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을이 됐다고 합니다. 한 주일에 한 차례 꼬박꼬박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청소도 합니다.

 

도랑을 깨끗하게 하려다 보니 농사도 달라졌답니다. 게다가 마을에서 나가 사는 사람들도 쉬는 날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옵니다. 물놀이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도랑이 깨끗해졌기 때문이지요.

 

어느 새 더러워져 있었던 마산 앞바다

 

1983년 겨울 들머리 대입 학력고사(요즘으로 치면 수학능력시험)를 마친 이상용 고3 학생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마산 바닷가 일대(마산만)를 거닐게 됐습니다.

 

중학교 들어가고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세상 모르고 공부만 하게 돼 있는 동안, 그 좋았던 마산 바다가 엄청나게 망가지고 더러워져 있는 모양을 바로 이 때 자기 눈으로 확인을 한 것입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마산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사주기도 해서 여전히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져 있구나, 이런 바다를 내가 살려봐야겠다,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신설된 부산대학교 환경공학과에 지망을 했는데 첫 해인 1984년에는 떨어졌답니다. 재수 끝에 이듬해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합격했습니다. 대학 1학년 학생 이상용은 환경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제 첫 운동은 이랬습니다. 당시 낙동강 하굿둑을 건설하고 있었습니다. 물길을 막으니까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 들어간 그 해에 선배들이랑 실태 조사를 나갔어요. 사진을 찍고 나오는데, 현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한테 카메라를 빼앗겼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사진이 없으니까 당시 눈에 담았던 모습들을 죄다 그림으로 그려 갖고 학생들한테 알렸습니다. 이렇게 시작이 됐습니다. 하하.”

 

학생 이상용은 운동을 하느라 ‘1년 굽어 먹는 바람에’ 졸업이 한 해 늦춰지기도 했고 부산대 공과대학 학생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1992년 4학년이 돼서는 여름방학 때부터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지금 부산환경운동연합)에서 상근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1월에 정식 월급을 받았는데 8만원이었어요. 당시 자취비가 8만원 정도였으니까 생활이 안 됐지요. 부산대 앞에 자취하는 친구들 가운데 ‘사회 변혁을 위해’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한 달에 10만원씩 모아 후원해 줬습니다.”

 

“제가 활동력이 컸어요. 공대 학생회 사무국장을 할 때였는데, 모두 전동타자기 쓰고 있었어요. 컴퓨터는 없었지요. 제가 생각하기를 ‘학생회 명색이 그래도 공과대학’인데 컴퓨터를 장만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여러 군데 찾아다닌 끝에 컴퓨터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 뒤 각급 학생회에서 전동타자기를 컴퓨터로 업그레이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요.

 

학생 시절 벌였던 그런 활동들이 그 뒤로도 제게 기획·조직 등등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이 됐습니다.”

 

운동도 좋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해야

 

그러다 1994년 마산·창원으로 오게 됐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이 밝힌 경위는 이렇습니다.

 

 

“한 해 전부터 마창공추협(마창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 지금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과 관계하고 있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실무자들 환경 관련 공부를 가르치러 왔거든요.

 

그러다 1993년 12월 수돗물 악취 사건이 터졌고 94년 1월 1일 대책 활동에 바로 투입됐습니다. 당시 양운진 교수가 의장이고 전교조로 해직돼 있던 이인식 선생님(지금 우포늪 따오기 복원위원장)이 사무국장, 저는 사무차장을 맡았지요.”

 

“아침 8시에 나서면 자정 이전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민관 합동 수질 조사를 최초로 마산시랑 한 일도 기억이 납니다. 환경 분야에서 민간이 정부를 감시한 첫 사례였어요. 민관 협력의 단초이기도 했고요.

 

한편 내부 개혁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회원 800명 가운데 500명을 정리했어요. 300명 수준에서 다시 조직을 시작해 그 해에 1000명을 채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의장이던 양운진 교수가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운동도 좋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양 교수는 시민장학금을 모았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을 대학원에 진학시키기 위한 종잣돈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습니다. 첫 학기는 그렇게 다닐 수 있었으나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양 교수가 다시 나서서 박재규 총장 동의를 얻어 경남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했습니다.

 

‘미래를 위해 뜻있는 사람을 공부시켜 키우고 있는데 학자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부총장과 총장에게 요청했는데 파격적으로 들어준 것입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이런 아름다운 인연으로 여러 군데에 빚지고 있습니다.

 

“마창환경련에서 대학원으로 파견하는 형식이었어요. 상근비도 받았지요. 회원으로 계속 활동하면서 환경련에서 요청하는 수질 조사 같은 것도 했습니다. 1996년에는 공단이 있는 창원 지하수에 발암 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TCE)가 스며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보도된 신문을 보면 제가 ‘마창환경연합 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수질 관련 전문 연구 기관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97년 4월 17일 창립식을 했습니다. 마창환경연합 부설로 ‘수질환경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마창환경련 부설이지만 여건 때문에 연구실은 대학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남대학교 환경문제연구소와 시설·공간 등을 공유하는 협약을 했습니다.(이렇게 지내다 2010년 2월 한국생태환경연구소가 창립되면서 그 부설 기구가 됐으며 2013년 12월까지 경남대에 공간을 두고 있다가 학교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활동도 영향력 있으려면 여럿이 어울려야

 

이상용 센터장은 수질환경센터와 더불어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여럿이 한데 어울려 했습니다. 그리고 여럿이 한데 어울리게 하는 데에는 어김없이 이상용 센터장이 있었습니다. 대충 훑어보면 이렇습니다. ‘최초’를 꾸밈말로 붙여도 손색이 없는 것들입니다.

 

 

낙동강 본류 수계 전체 수질 조사, 마산만 살리기 운동, 경남물포럼 조직, <생명의 물> 발간, 경남물엑스포 개최, 경남 도심 하천 살리기 운동, 낙동강 유역 네트워크 조직, 그리고 도랑 살리기 운동 등등.

 

이 가운데 특히 도랑 살리기 운동은 2007년 처음 제기된 이래 날이 갈수록 그 너비가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경남 곳곳에서는 민간 단체와 자치단체가 도랑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경남에만 그치지 않고 경기·충청 등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상용 센터장은 최근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물 또는 수질과 직결된 분야에 집중해 왔다면, 2010년부터는 이를 포함해 ‘저탄소’ 전반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속가능한 활동’을 ‘독자적으로’ 벌이려고 ‘저탄소 녹색 미래 사회를 위한 협약’을 2010년에 했고 2013년 다시 협약했습니다. 대상은 경남대학교와 한국폴리텍7대학·대우백화점 그리고 한국생태환경연구소(부설 수질환경센터)입니다.

 

저탄소 목적에 동의하는 단체가 모여 저마다 가진 바를 내놓고 저탄소와 녹색 미래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식이랍니다. 이처럼 이상용 센터장은 혼자서 활동하기 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함께하기를 더 좋아한답니다. 그렇게 해야 영향력이 더 커지고 더 오래 지속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양운진 교수한테 고마워하면서 양 교수가 지역사회에서 했던 역할을 대신해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양 교수는 마산이 아닌 제주 출신이면서도 경남에서 물 운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입니다.

 

 

“양운진 선생님은 지역 사회를 위해 의식 있게 활동을 하셨습니다. 지역 문제로 머물지 않고 전국 문제로 개선 활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활동을 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셨던 역할을 제가 이어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높은 연봉으로 채용해 주겠다는 유혹도 종종 받지만, 지금 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인터뷰 말미에서는 아내 자랑도 곁들였습니다.

 

“서른다섯이던 99년에 결혼했습니다. 여름인가 가을에 만났는데 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환경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꿈이 있다’고요.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는 사람이 있나? 다들 현실만 이야기하는데…’ 아내가 학교 선생님입니다. 돈을 적게 벌어도 가정이 꾸려지고 하니까, 고마울 수밖에요.”

 

이렇게 보면 이상용 센터장은 복 받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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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안철수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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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나 안철수의 진정성은 얼마나 될까

 

문재인은 지난 번에 무슨 책을 내면서 다음 대선에 출마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안철수는 이른바 ‘새정치신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있는데 꾸준히 대선 후보로 거론됩니다. 하지만 저는 문재인과 안철수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도 문재인도 유권자들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선물할 줄 모르거든요. 그이들은 유권자들이 어떤 때 짜릿짜릿 전율을 느끼는지 그런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그런 데 대해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안철수 새정치신당의 대표위원들. 안철수 홈페이지에서.

 

사기성이 가장 짙은 낱말이 바로 진정성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보통 사람인 유권자들은 진정성이 제대로 느껴질 때 감동을 한다고 저는 압니다. 그런데 적어도 겉으로 볼 때 문재인과 안철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그다지 진정성이 있다고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거나 아니면 대중 또는 자기한테 절실한 무엇을 위해 명예나 돈이나 지위 따위 중요한 무엇을 서슴없이 내놓거나 할 때 사람들은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못했습니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지금껏 ‘새 정치’를 힘주어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들려는 정당 이름도 ‘새정치신당’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는 과정은 별로 ‘새 정치’답지 않았습니다.

 

'새 정치'를 둘러싼 안철수의 말과 행동

 

안철수는 2013년 4·24 보궐선거에서 서울 노원병 선거구에 출마했습니다. 딱 이기기 좋은 선거구라서 골라잡은 것입니다. 진보정치를 위해 애써온 ‘노회찬과 일당들’을 자기 설 자리를 만들려고 짓밟았습니다.

 

노원병이 보선에 나오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삼성으로부터 떡값 받은 검사 따위 실명을 공개했다가, 터무니도 없고 형평성에도 맞지 않게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바람에 국회의원직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노원병에서 낙선한 뒤 후보였던 김지선(노회찬 아내)과 노회찬이 해단식에서 찍은 사진. 정의당 홈페이지에서.

 

그래서 ‘노회찬과 일당들’은 그 판결이 부당하다고 비판·비난하면서 여지껏 노원병에서 활동해 온 성과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회찬 아내를 출마시켰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안철수는 득표 계산을 마친 다음 노원병을 접수했습니다.

 

단순 득표 계산만으로 상대 후보가 무구인지도 가리지 않고 가로채는 안철수의 이런 행동은 새 정치가 아닙니다. 노회찬의 진보 정치도 다른 무엇 못지 않은 새 정치일 텐데 ‘새 정치’를 얘기하면서 다른 새 정치를 짓밟았습니다.

 

또 낡은 정치, 헌 정치와 맞서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도 안철수의 노원병 출마는 새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낡고 헌 정치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새누리당, 새누리당 김무성이 4·24 보선에서 부산 영도 선거구를 통해 되살아났습니다.

 

김무성은 부활하고 노회찬들은 쪽박 차고

 

김무성은 역사·사회관이 수구적이고 전체주의 사고도 얼비칩니다. 지난 대선 시기 노무현 관련 NLL 논란에서 한 얘기들이 방증하는 그대로 거짓말쟁이이기도 합니다. 김무성은 판단 기준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닙니다. 유리하냐 불리하냐입니다.

 

안철수 탓에 일단 꺾인 노회찬. 그래도 손석희는 노회찬을 불렀네요. 정의당 홈페이지에서.

 

이런 낡은 정치의 표상인 김무성을 꺾기 위해 부산 영도에 출마하고, 이를 통해 낡은 정치인 김무성이 되살아나도록 영양분을 대어주는 지역 토양을 갈아엎는 것이 새 정치입니다. 새 정치라면 마땅히 새누리당에 장악당한 영남권을 일신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나 안철수는 부산 영도로는 눈조차 돌리지 않은 채 당선이 보장되는 노원병을 찍었습니다. 노회찬과 일당들의 새 정치는 안철수 탓에 일단 꺾였습니다. 낡은 정치의 표상인 새누리당 김무성은 아무 저항 없이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안철수와 새정치신당의 ‘새 정치’입니다.

 

안철수의 말과 안철수의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자기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떼어내어 희생하지도 않았습니다. 덕분에 낡은 정치의 표상 김무성은 너무나 쉽게 무덤에서 널 뚜껑을 열고 살아났습니다.

 

안철수 홈페이지에서.

 

(그리고 안철수가 표방하는 바를 보면 부드러운 새누리당 또는 착한 새누리당 정도입니다. 그이 좌표를 정한다면 진보정당들(통합진보당 포함)과는 매우 거리가 멀고 또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는 최장집이 떠난 일과 윤여준이 돌아온 일이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이 연제구에 나서지 않은 까닭

 

문재인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주의에 장악된 부산을 흔들려면 문재인의 연제구 선거구 출마가 요청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제구가 ‘부산 정치 1번지’로 꼽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블로그에서.

 

문재인이 연제구에 출마하면 전국 선거판에 지역주의 타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재인은 사상구를 골라잡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뻔합니다. 부산 연제구보다 사상구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지지세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역대 선거 결과를 보면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연제구는 한나라당 김희정 53.72%와 열린우리당 노혜경 37.28%로 나왔지만 사상구는 한나라당 권철현 52.74%와 열린우리당 정윤재 43.58%로 나왔습니다. 연제구보다 사상구가 여권 지지 성향은 약하고 야권 지지 성향은 셉니다.

 

2008년 18대 총선서는 연제구에서 친박연대 후보가 44.65% 지지로 당선되고 한나라당 후보는 41.32%로 2위 낙선한 반면 사상구서는 한나라당 후보가 45.48%로 당선되고 친박연대 후보는 36.97%로 밀렸습니다. 야권에서는 두 선거구에서 모두 민주노동당만 나섰는데 득표는 연제구(6.33%)보다 사상구(15.70%)가 훨씬 세었습니다.

 

문재인은 자기에게 바로 보이면서 이득이 되는 당선 가능성을 집었습니다. 대신 자기 눈에 보이지 않고 가치롭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그다지 이득이 되지는 않는 지역주의 타파·극복을 버렸습니다. 노무현을 계승한다는 이른바 친노그룹 좌장의 생얼굴입니다.

 

버려야 할 때 버리지도 못한 문재인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문재인은 제대로 버리지도 못했습니다. 2013년 11월 2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대통령 후보 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박근혜는 국회의원직을 아무 미련 없이 집어던졌습니다만, 문재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문재인은 국회의원 자리에 목매다는 사람이 됐고, 새누리당 박근혜는 대중이 볼 때는 새로운 가치를 위해 자기한테 가장 중요한 무엇을 내놓는 사람이 됐습니다. 버리지 못함으로써 더욱 큰 다른 무엇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문재인은 대선에서 지더라도 돌아갈 자리가 있는 사람이 됐고 박근혜는 대선에서 깨지면 돌아갈 자리조차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바로 그와 동시에 문재인은 국회의원이나 하고 말 사람이 됐고 박근혜는 대통령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미 흘러간 물이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이처럼 유권자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유권자로부터 선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새누리당만한 조직력이 없는 야권으로서는 ‘유권자의 감동’과 그로 말미암은 ‘바람’이 필수입니다.

 

말로는 새 정치를 하지만 행동으로는 헌 정치를 하는 사람, 말로는 지역주의에 맞선다면서도 행동으로는 지역주의를 피해다니는 사람, 대통령 하겠다면서도 국회의원 자리가 아까워 놓지도 못하고 벌벌 떠는 사람은 감동도 줄 수 없고 바람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보기에 안철수와 문재인은 대통령 선거로 국한해서 보자면 이미 흘러간 물입니다. 한 번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다시 돌리지 못합니다. 새누리당의 계속 집권을 바라지 않는다면 새 물을 끌어대야 합니다. 어쩌면 2017년이 아니라 2022년을 겨냥해야 할는지도 모르겠군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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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볼 때마다 생각나는 선생님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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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지난 1년 남짓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 줄로 꿰는 낱말이 있다면 저는 '무시'라고 생각합니다. 도지사로서 행정을 하고 정치를 하면 반드시 그 맞은편 상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상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없이 본다는 얘기입니다.

 

홍준표 선수가 이렇게 '무시'했다는 증거는 그야말로 곳곳에 늘려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진주의료원 폐업을 반대하는 도의원들을 물리력까지 동원해 꼼짝 못하게 하고 관련 조례를 해치워 버린 것입니다.

 

윤성혜 당시 보건복지국장(지금 경남도의회 사무처장)은 홍준표 선수 진주의료원 폐업의 첨병(尖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는 다양하게 변주되기까지 합니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면 '무시'는 무배려, 배려 없음이 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무시'는 홍준표 선수가 자기하고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배려 없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보다 약하거나 없는 이들 딱한 처지를 무시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릅니다.

 

개인 차원에서든 사회 차원에서든 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이는 보살피고 부축하고 거두고 돌봐야 마땅한데도, 그냥 대책 없이 내버리고 팽개치고 했습니다. 진주의료원 폐업 그 자체가 바로 이같은 배려 없음의 표상입니다.

 

이에 대한 무엇보다도 명확한 증거는, 진주의료원이 엉망진창이 되고 난 뒤 원래 거기 있던 환자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숨졌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진주의료원 입원 환자들의 도지사 면담 요구는 이렇게 방호 인력에게 막혔습니다.

 

홍준표 선수의 무시는 다른 방식으로도 작동됩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말이고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눈에는 이런 유권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이 구는 것입니다.

 

누가 나서서 "홍준표 당신, 거짓말했어"라고 짚어주지 않더라도, 도지사를 맡은 공인이라면 뽑아준 유권자한테 그냥 인정하고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 약속해야 마땅한데도, 여태 한 번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홍준표 선수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선생님이 한 분 있습니다.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아니고요, 사회 생활릏 하면서 사귀게 된 제 또래입니다. 이 선생님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일수록 인성 교육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요구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얼핏 보면 이상합니다. 좋고 올바른 인성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이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선생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게 옳든 그르든 공부 잘하는 친구가 그렇지 않은 친구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이다. 더 높은 자리에는 반드시 더 큰 영향력이 따르게 마련이다.

 

동장 자리에 있는 사람 인성이 더러우면 한 동네 주민만 괴롭고 그만이다. 하지만 시장·군수가 인성이 더러우면 전체 시민이 고통당하고 더러운 꼴을 봐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똑같이 인성이 나쁘다 해도 피해를 끼치는 범위는 그만큼 더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일수록 인성 교육을 집중할 필요가 그래서 생긴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을 홍준표 선수. 도지사 취임 한 해를 맞아 치른 기자 간담회 장면.

홍준표 선수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아무래도 공부를 잘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서울에서 대한민국에서 명문사학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대학을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잘했던 모양입니다. 다들 붙기 어렵다고 하는 사법고시에 붙어 검사 노릇을 오래 했거든요.

 

그런데 홍준표는 국민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16년 세월 동안 제가 알고 있는 그런 선생님은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는가 봅니다. 마음을 적시고 울리며 다른 사람 생각도 할 줄 아는 인성을 북돋아주는 그런 선생님 말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경남에 사는 유권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순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저토록이나 죄를 불리는 홍준표 선수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쩌면, 그런 선생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런 상대를 무시하지 말고 그 처지를 넉넉히 짐작하라는 얘기를 듣기까지 했지만 홍준표 선수한테 그런 말을 제대로 새겨 들을 귀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더욱 안타깝고 나아가 불쌍하기까지 한 노릇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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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의 거짓말, 배한성의 창원시장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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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경남도지사는 2012년 부궐선거 당선 직후인 12월 27일 “토호 세력과 확실하게 거리를 두겠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토호(土豪)란 힘깨나 쓰는 토착 세력을 일컫는데 많은 경우 좋지 않은 뜻으로 쓰입니다.

 

홍준표 지사는 뒤이어 “(한나라)당 대표할 때 대기업 회장들과도 만나지 않았는데, 지역 토호들과 만날 일이 뭐 있겠느냐”고 덧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이었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헛소리’였습니다.

 

1. 토호 세력과 거리를 두겠다고?

 

 

경남도민일보 사진.

옛 창원 지역 토착 비리 세력의 대표격으로 부정을 저질러 한 때 창원시장 자리에 있었던 배한성을 2013년 6월 7일 경남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임기가 1년 넘게 남아 있던 당시 사장(김은종)에 대해 표적 논란을 일으키며 감사를 벌인 끝에 몰아내고 배한성 선수를 앉혔습니다.

 

배한성은 앞서 보궐선거 홍준표 선거대책본부에서 자문위원을 맡았었습니다. 이른바 ‘개발’과 관련한 전문성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창원시 근무 당시 택지 조성과 분양 등 개발 사업을 추진한’ 정도뿐이랍니다.

 

그런데 옛 창원 지역 원주민과 토호들에 대한 영향력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홍준표 선거운동을 도왔다는 ‘대호산악회’, 옛 창원 원주민 모임 ‘삼원회’, 창원시발전협의회 등에서 전직·현직 회장이라는 경남도민일보 보도(2013년 6월 10일치)까지 있었을 정도입니다.

 

2. 본인 동생 아내 모두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이런 배한성 선수가 2월 5일 창원시장 선거에 후보로 나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지방선거에 후보로 나설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경남개발공사 사장을 넙죽 맡았는지 저로서는 참 황당합니다. 당시 김은종 사장을 그대로 뒀다면 어쨌든 1년 남짓 남은 임기는 채울 텐데 배한성이 들어서 여덟 달만에 사장 자리가 공석이 됐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배한성 선수는 옛 창원 지역 토착 비리 세력 가운데서도 대표로 꼽힐만합니다. 이는 배한성 선수가 5일 출마 기자회견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입에 올린 “민선 3기 창원시정을 이끈 바”와 관련돼 있습니다.

 

먼저 창원시장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배한성 선수 본인이 공직선거법을 정면으로 어겼고, 이로 말미암아 창원지법과 부산고법 대법원에서 모두 똑같이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고 시장직을 잃었습니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 관계는 이렇습니다. 2002년 3월 20일 선거운동원 20명 남짓을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해서 30만원어치 술밥을 사면서 ‘도와 달라’는 연설도 하고 개별 요청도 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선거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법정에 선 사람은 배한성 본인뿐만 아니었습니다. 동생도 섰고 아내도 섰습니다. 그밖에 60명 넘는 사람이 검찰 기소(9명 구속 기소)를 당해 법정에 나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3. 한 사람 선거로 60명 넘게 기소된 경남 신기록

 

이처럼 한 사람 선거 관련으로 60명이 넘는 선거법 위반 사건은 아직도 적어도 경남에서는 신기록입니다. 선거운동 조직부장은 현금 680만원을 뿌렸다는 혐의를 받고 실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소답·소계·동정·중·북동, 반송·반지·반림동 지역에서 활동한 20~50대 가정주부들도 법정에 서야 했습니다. 배한성 선거운동 동책한테서 활동비 명목으로 돈을 받은 혐의였었지요. 겉으로 드러난 사정이 이렇다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을는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배한성은 옛 창원 원주민에 대한 영향력 또는 장악력을 악용해 이처럼 대규모로 부정 선거를 하고도 시장 자리에 목매다는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선거 부정의 엄청난 규모가 드러나자 시민사회가 ‘사퇴하라’고 들고 일어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그냥 무시했던 것입니다.

 

배한성 선수. 경남도민일보 사진.

 

2004년 3월 12일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창원시장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정 어린 사과는커녕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기 선거를 도운 숱한 사람들은 물론 동생과 아내와 수하들은 이어지는 재판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4. 갖은 방법으로 정치 생명 연장 꾀해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 연장의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예정돼 있던 대법원 선고 기일(2004년 2월 13일)을 코앞에 둔 2월 5일, 자기한테  적용된 선거법 조항에 위헌 요소가 있다며 담당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한 것이 하나입니다.

 

물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권리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판결 날짜를 바로 앞에 두고 한 데 초점을 맞춰 보면 선고 연기를 노렸다고밖에 할 수 없겠습니다.

 

탄원서도 숱하게 냈는데, 그 과정에서 허위 여부와 공무원 강제 동원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2003년 1월 29일치 오마이뉴스는 ‘선거법 위반 창원시장 탄원서 말썽’ 기사에서 ‘탄원서 작성과 접수를 공무원이 하고 있어 말썽이다’라 했습니다.

 

배한성 창원시장 출마 표명 기자회견 장면. 경남도민일보 사진.

 

아울러 ‘탄원서는 공무원뿐 아니라 창원시의원 대부분이 참여했으며, 지역 유지급들로부터도 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도 했는데요, 이를 두고 공무원노조 경남본부는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든 정치 생명을 연장해 보려고 갖은 술수를 부렸다고나 할 수밖에요.

 

5. 배짱을 잘 맞춘 홍준표와 배한성

 

이렇게 배짱을 맞춘 두 선수는 앞으로 새누리당 후보 경선이나 지방선거 본선에서 공동 이익을 위해 서로 도울 것입니다. 멋들어진 콤비입니다. 새누리당이 홍준표 선수와 배한성 선수 가운데 적어도 한 명 이상을 공천에서 배제하지 않은 이상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새누리당은, 홍준표 선수가 지금보다 더하게 유권자를 상대로 서슴없이 거짓말을 해도 공천에서 배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배한성 선수는 공천받을 자격이 인정될까요?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새누리당이 공천하지 않는다고 들은 것 같아서요. 물론 10년 전 12년 전 일이라 해서 어쩌면 불문에 붙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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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사퇴, 김두관은 문제고 정몽준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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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는 두 가지 선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회의원 선거였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당시 통합진보당 소속이던 손석형 경남도의원이 창원 성산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 위해 도의원을 그만뒀고 민주당 소속 김두관 당시 경남도지사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도지사직을 그만뒀습니다.

 

이 때 손·김 두 사람의 ‘중도사퇴’를 두고 지역에서는 비난·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중도 사퇴’는 여러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의원직이든 도지사직이든 도중에 그만두는 일은 취임할 때 했던 선서와 어긋날 뿐 아니라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며 다시 선거를 치러야 하기에 예산 낭비이며 사회 전체의 피로도까지 높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랬던 때문인지 손석형은 처음에는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았음에도 떨어졌고 김두관은 민주당 경선 문턱도 넘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특히 김두관 경우 경남 민심이 받쳐주기만 했으면 어쩌면 크게 눈길을 끌고 판을 흔들 수도 있었을 텐데, 자기 욕심에 스스로 떠밀려 중도사퇴하는 바람에 완전 가라앉고 말았던 것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지금 수도권 광역 단체장 선거 보도를 보면 중도사퇴 얘기가 나와야 마땅한 국면인데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서울시장 거론 후보 이혜훈·정몽준, 경기도지사 거론 후보로 원유철·정병국·원혜영·박기춘·김진표, 인천시장 거론 후보 박상은·이학재 정도가 모두 현역 국회의원입니다.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2012년 5월 30일 시작됐으니까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광역단체장 선거 출마를 위해 중도사퇴한다면, 2012년 경남에서 크게 지적됐던 바와 같은 폐해들이 수도권에서 고스란히 재현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문제제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문제 제기가 없는 것 같고 보도 매체도 이 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종편’은, 하고 한 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것도 되풀이해 뱉어대면 댔지 이런 중도사퇴 따위는 전혀 다루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하지만 모릅니다, JTBC의 손석희가 할지 안 할지는요….)

 

서울에 본사가 있는 매체들의 수도권 광역단체장 보도는 천편일률로 경마 중계식입니다. 깊이 있는 문제 제기가 없습니다. 이런 따위입니다.

 

박원순이 앞서고 있습니다. 정몽준이 뒤따릅니다. 김황식도 만만찮습니다. 정몽준과 김황식 두 말의 마주(馬主)인 새누리당이 한 말로 정리하고 날개를 달아주면 추월할 수도 있습니다. 안철수 마주도 출마시킬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정몽준 홈페이지에서.

안철수가 말을 내보내면 박원순과 부딪혀 상대방에게 어부지리를 넘겨줄 수 있습니다. 박원순의 마주인 민주당에서 안철수 마주를 견제하는 발언이 쏟아지는 까닭입니다. 이밖에 돈 안 되는 군소 마주들도 있는데 이들은 어떤어떤 말들을 내보낼지 골라보고 있습니다. 운운.

 

지금 광역단체장 선거에 나선답시고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들이 출마를 위해 중도사퇴하면 그 예산 낭비는 얼마나 되는지를 왜 묻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에서 선거에서,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개판이어도 관계없다는 얘기인지도 정당과 거론 후보에게 왜 따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했던 공약 따위를 제대로 지켜냈는지도 함께 말씀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요? 그런 따위가 뭐 중요하냐고 되묻겠지요. 아니면 사람들 관심을 끌기 어려워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할까요? 어쨌든 단순 중계하는 식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씨부렁대기만 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쓰기만 해주면, 가장 힘센 마주에게 당연히 발언·행동 기회가 많으니까 가장 유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매체들의 수도권 광역단체장 선거 관련 보도는 선거판 자체보다 더 과열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기 본래 역할이라 할 수 있는 시비(是非)도 보이지 않습니다. 신문이든 지상파방송이든 종편방송이든 통신이든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김훤주

 

※ <기자협회보> 2월 12일치에 실린 글을 조금 보완하고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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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제주올레 완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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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글 쓰는 이들에게도 매력 있는 고장입니다. 제주도와 제주도것들을 소재로 삼으면 멋진 글이 나올 것 같은 착각들을 종종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너 차례밖에 다녀오지 않았으면서도 어떻게 제대로 한 번 엮어 ‘제주도 관련 단행본’을 하나 내 볼까, 저조차도 헛된 꿈을 품었더랬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책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고, 더 나아가 나름대로 팔리는 책을 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대중은 대체로 현명해서, 그 팔리는 흐름을 보면 제대로 된 책인지 아닌지를 절로 알아볼 수 있는 지경이기도 합니다.

 

제주 여행 또는 제주올레 책들 한 번 훑어봤습니다. ‘최신 올레 정보 수록’, ‘100% 현장 답사로 걷기 여행 코스 소개’, ‘제주에 살다시피 머물면서……’, ‘250여 가지 정보 수록’ 따위가 눈에 띕니다. 낱말들이 사람 눈을 어지럽게 합니다.

 

 

제주 관련 책이 서른 가지가 넘는다는데, 그렇지만 대놓고 ‘제주올레 완주기’라고 찍어낸 책은 없었습니다. 2014년 1월 성우제가 도서출판 강을 통해 <폭삭 속았수다>라는, 451쪽에 이르는 1만8000원짜리 여행기를 펴내기 전에는 말씀입니다.

 

성우제는 <시사인> 전신 <시사저널>에서 10년 넘게 기자 노릇을 하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하고는 스무 살 들어 만나 줄곧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왔을 때도 마산 통술집에서 같이 웃고 떠들며 놀았습니다.

 

“완주를 하면 준다는 ‘제주올레 완주증서’를 받으러 서귀포로 건너갔다. 제주올레 사무국에서 스탬프를 빼곡하게 찍은 제주올레 패스포트 두 개로 나의 완주를 증명했다. 완주증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제주올레 완주증서

완주번호 : JO20130521A017-0059

2013년 5월 21일

성명 성우제

 

당신은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오름, 돌담, 곶자왈, 사시사철 푸른 들과 정겨운 마을들을 지나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 제주올레의 모든 코스 약 430km를 두 발로 걸어서 완주한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도보여행자입니다.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성우제.

 

증서 말고도 완주자에게 주는 것이 꽤 많다. 패스포트 두 개에 변시지·이왈종 화백의 완주 인증 그림 스티커를 붙여주고 ‘참 잘했어요’라는 스탬프를 팡~ 하고 찍어준다. 훈장을 달아주더니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제주올레길의 159번째 종주자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게 사실을 증명하는 성우제의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가 451쪽이나 되는 데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길만을 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보이는 풍경만 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만나지는 사람만 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길과 그리고 길에서 보이는 풍경과 길에서 만나지는 사람은 물론 기본으로 다룹니다. 그러니까 제주올레가 품고 있는 그래서 누구나 가기만 하면 느낄 수 있는 사람과 자연과 문화는 당연히 담겨 있습니다.

 

성우제는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에서 제주도와 제주도 사람들에게 새겨진 역사와 물정과 인정까지 끌어냅니다. 역사는 거기 사람들 마음과 몸에 원래부터 그러한 듯 박혀 있고, 물정과 인정은 때때로 비정하다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하기야, 이래저래 맞춰보면 우리 삶 어느 구석인들 비정이 끼어 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주도 바다.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는 마을마다 없는 곳이 없다. 일본에 있는 제주도 사람들은 어느 마을 출신이건 땀 흘려 번 돈을 고향 마을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오조리는 그 문화를 내게 보여준 첫번째 마을일 뿐이다. 마을마다 재일교포 공덕비가 서 있다.

 

일제강점기의 혹심한 수탈과 가난, 4·3사건 등으로 쫓겨나다시피 하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사람들, 그들은 참담한 고통 속에서 번 돈을 고향에 희사했다. 온갖 수모와 고생을 견뎌가며 번 피눈물 젖은 돈이었다.

 

육지에서는 애향심이 고루한 말로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지만,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곳곳에서 애향심이 살아 숨쉰다. 제주도에는 육지에서 상상도 하지 못하는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의 기부 문화는 놀라움을 넘어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외국에 살아보면 안다. 오로지 믿을 것이라고는 자기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낯선 땅에 살면서, 자기 가족도 아닌 마을 발전을 위해 큰돈을 쾌척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한 개인의 선행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가 공유한 집단 문화라는 사실은 고향에 대한 제주도 사람들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증표이다.”

 

<폭삭 속았수다>는 이렇게 제주도 여느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공덕비 무리 하나를 갖고도 아래위로 역사와 문화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한테는 심상한 얘기일는지 모르지만 바깥에서 다니러 온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폭삭 속았수다>를 두고 ‘트레일 문화가 오랫동안 뿌리내린 캐나다에서의 경험까지 보태 제주의 빼어난 풍광과 가슴 아픈 역사와 독특한 풍습을 섬세하게 포착한 역작’이라 평한 까닭이 이런 데 있지 싶습니다.

 

서명숙 이사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올레길을 걷는 복을 누렸을 뿐 아니라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까지 누렸던 것’이라 했습니다. 성우제도 이렇게 말합니다. ‘길이 품고 있는 사연과 더불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바로 그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고요.

 

길은 사람 속으로 나 있어야 제대로 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올레가 그런 길입니다. 제주올레는 마을 속으로 들어가고 사람이 사람과 만나면서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됩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어쩌면 배경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제주올레를 제대로 걷고 소개하려고 펴낸 <폭삭 속았수다>입니다.

 

성우제는 <폭삭 속았수다>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모습을 때때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절실한 사람들은 그런 대목에서 울먹일 수도 있을 텐데, 이는 길 또는 걷기에 고유한 치유 효과에서 비롯되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폭삭 속았수다 - 10점
성우제 지음/강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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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가 진술의 임의성을 입에 올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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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데 대해 1981년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에서 사건을 맡았던 고영주 변호사가 "좌경화된 사법부의 판단"이라며 "법원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학생들이 한 진술의 임의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답니다. 진술의 임의성이라……, 강제로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술술 다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일까요? 저도 고영주 검사한테서 수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1985년 7월입니다. 담당 검사는 고영주였고 주임 검사는 김원치였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쓰던 사무실 번호도 아직 잊지 않고 있는데, 서울지검 405호였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 대학 언론출판연합체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일보전진>이라는 단행본을 2000권 펴냈는데 거기에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6년 1월 징역 2년6개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날 때까지 180일 넘게 감방살이를 했습니다.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을 패러디한 영화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1985년 5월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삼민투입니다. 전국 단위 대학 총학생회 연합 조직 전학련도 만들어졌습니다. 민생투 자민투 민민투 반민투 같은 조직들이 갖은 대학에서 활발하게 투쟁에 나섰습니다.

 

급박해진 전두환 정권은 6월 몇 개 대학 캠퍼스를 군사작전하듯이 덮쳤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보전진>을 경찰이 압수해 갔고 곧바로 제게도 수배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수배 하루만에 붙잡혔습니다. 앞으로 언제 다시 뵙게 될는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시골 계신 어머니 아버지한테 갔는데 바로 이튿날 아침 들이닥친 경찰에게 끌려가야 했습니다.

 

저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맞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인 채 차를 타고 가서는 처음부터 구둣발로 맞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고문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경우는 이미 증거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작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직 사건도 아니어서 배후를 캘 까닭도 없었습니다.

 

보통 경찰에서 수사받는 기간이 열흘인데요, 저는 엿새만인가 이레만인가에 경찰을 떠나 검찰로 넘겨졌습니다. 서둘러서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전학련을 가장 위에 놓고 그 아래 투쟁 조직은 삼민투로 하고 선전 조직은 제가 회장을 맡고 있었던 학교 단위 학생언론으로 해서 전체 얼개를 짰던 것입니다.

 

사실 언론출판연합체는 삼민투와도 총학생회와도 관련이 없었습니다. 언론은 언제나 독립성을 지켜야 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총학생회와 써클연합회 그리고 갖은 매체(학생신문사·교지·영자신문사·방송국), 단과대학 학생회 등의 대표성은 인정했습니다. 그런 데서부터 한 사람씩 파견을 받아 모두 다섯 명으로 꾸려진 모임이었습니다.

 

검찰로 넘어가 처음 만난 검사가 바로 고영주였습니다. 물론 고영주 검사가 저를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세상이 조금은 바뀌어 만약 검찰이 때리거나 하면 바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은 수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 법무법인 케이씨엘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진술의 임의성, 임의로운 진술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쟁점은 딱 하나입니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정(情)을 알면서도'입니다. 이런 목적이 있어야 성립되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입증도 어렵고 반증도 어렵습니다. 사람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어떻게 끄집어내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박정희=전두환과 김일성을 쌍생아처럼 여겼습니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기대어 권력을 생성하고 유지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가 북한을 좋게 봤다고 해도, 제가 발 딛고 사는 데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구성원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맞춰 실행했습니다. 제가 당시 민중민주주의를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 민중은 어디 다른 데 있는 민중이 아니고 저랑 같은 국토에 몸 담고 사는 민중이었던 것입니다.

 

고영주 검사는 제게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정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오랜 동안 말이 오갔습니다. 저는 인정하지 않았고 고영주 검사는 을러댔습니다. 하루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20일인지 30일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공소 제기 마감 시일까지 지루하게 끌었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 하는 일 없이 하루종일 또는 밤 늦게까지 검사실 한 쪽 구석에 쳐박아 놓기도 했습니다. 빨간색 포승줄로 온 몸을 꽁꽁 묶은 채, 손목에는 벨기에제 후진 방지 장치가 돼 있는 철제 수갑을 채운 채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뒀다가 불러서는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어떤 때는 '비둘기장'이라고, 법정이나 검사실 가기 전에 머무는 검찰청 대기실인데 일어서서 몸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만큼 아주 좁고 어둡습니다. 그런 데다 하루종일 또는 밤늦게까지 가둬뒀습니다. 아침에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종일 비둘기장에 갇혀 있다가 그대로 밤늦게 돌아가곤 했습니다.

 

만약 인정하지 않으면 실형을 받고 감옥에서 썩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하면 어쩌면 석방돼 나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통한 회유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되고 또 헛되지만, 저는 고영주 검사의 회유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조서가 일사천리로 꾸며졌습니다. 풀려날 수도 있다는 한 가닥 희망, 헛되고 또 헛된 그 희망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빙긋이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김훤주, 너 구속이야." 이랬습니다. 순간, 제 눈에서 물방울이 몇 낱 떨어졌습니다.

 

고영주 검사가 이런 일을 두고 어떻게 말할까요? 제가 고영주 검사 앞에서 한 진술에서 임의성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제가 임의롭게 제 뜻대로 진술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물론 여섯 달 동안 이른바 빵살이를 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때 구속됐던 것을 고맙게 여깁니다.)

 

부림 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

 

하물며 부림 사건은 1981년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으로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한 해 뒤인 1982년 대학에 들어갔는데, 경찰 2개 중대가 날마다 학교서 학생들을 감시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학생들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 시절 검찰에서 한 진술에 임의성이 보장됐을 리가 있을까요? 분명 저보다 훨씬 험한 꼴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영주 변호사는 이번 무죄 판결을 두고 "좌경의식화 학습을 받은 사람들이 현재 중견 법관까지 됐다는 의미"라고 했다지요. 한 번 공안은 영원한 공안인가 봅니다. 고영주 변호사 같은 공안 검사 출신은 자기가 가장 중립이라고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가장 우익, 수구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좌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10년 넘게 지난 1999년 고영주 검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법조계 취재를 맡아 창원지방검찰청에 드나들게 됐는데 고영주 검사가 검사장 다음 2인자인 차장검사로 와 있었습니다. 제가 한 번 슬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당신한테 수사를 받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김 선생이, 그랬어요?" 하고는 그만이었습니다.

 

피해자는 잘 잊지 못하지만 가해자는 금세 잊어버리는 법입니다. 검사 생활 대부분을 공안 쪽에서 보냈으니, 저처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한 사람이 좀 많겠습니까? 고영주 검사는 자기가 수사한 이들에게도 부림 사건이나 제 사건처럼, '진술의 임의성'이 보장돼 있었다고 착각하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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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는데 거미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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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봤습니다. 보는 내내 거미가 생각났습니다. 거미는 끈끈한 거미줄을 쳐서 잘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먹이를 잡고 자기 소화액을 찔러넣어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듭니다. 거미가 볼 때는 소화액이지만 먹이 처지에서는 독이지요.

 

거미한테는 자르거나 씹는 이빨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화액을 집어넣어 먹이를 물렁물렁한 액체 상태로 녹인 다음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미한테 잡아먹힌 것들은 바싹 마른 채로 껍질만 남습니다.

 

영화는 익히 알려진 스토리여서 무슨 반전 효과는 없었지만 곳곳에 여울이나 굽이를 만드는 장치를 집어넣어 놓은데다 훌륭한 대사도 적당하게 섞여 있고 배우들 연기도 나름 좋은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진 딸 아버지가 진성 건물로 들어가려고 직원들을 뿌리치는 모습.

 

그런데 저는 영화 속 한윤미가 공장에 들어간지 이태만에 백혈병에 걸려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문득 창원공단 한 공장에 다니다 해고된 사람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1000명 넘는 사람이 일했을 만큼 작지 않은 공장이었는데요, 거기 한 10년 넘게 다니면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자기가 다니던 공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지간히 규모가 있는 공장은 모두 그렇다는 얘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나오자마자 들어간 공장에서 특정 부품 제작이나 조립 등 같은 공정 업무만 되풀이하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마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공장 바깥에 대한 관심과 상식은 사라지고 옅어지고 없어져서 공장 말고는 아는 것이 갈수록 없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기를 더욱 무서워하고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어 결국에는 집에서 빈둥거릴 바에야 공장에 나가 일이나 하고 수당이나 벌자는 식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공장에서 떨려나지 않으려고 생각도 말도 행동도 사용자 입맛에 점점 더 맞도록 하게 되고 사용자 눈치도 남보다 먼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한 목숨 살아내야 하는 주체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딸을 화장해 뿌린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 옆에 노무사.

 

하지만 자본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보다 멋진 인생은 없습니다. 자본이 욕망하는 생산과 노동에 최적화된 인생이거든요. 생산과 노동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아예 없는 인생이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공장에만 요구되는 특정 부품 제조·조립 같은 공정에 딱 맞게 틀지워진 그런 인생이거든요.

 

이래서 저는 거미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비정하고 또 무참하지만, 영화 속 한윤미는 그런 거미한테 잘못 걸리고 잘못 물려서 30년만에 40년만에가 아니라 겨우 이태만에 작살이 나버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자면 누구든지 거미한테 걸려들어 거미한테 최적화된 채 길든 짧든 살아가다 죽기는 다들 매한가지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영화가 그려 보여주는 자본의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라 해도 이처럼 인간을 인간 자체의 본성에서 떼어내어 특정 물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 노동에 최적화시켜버리는 자본의 속성 자체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그 무엇이 <또하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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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에 하나 남은 삼랑진역 급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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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영남루→17.5km 삼랑진역 급수탑→2.8km 작원관지→13km 가야진사(원동면 용당리)→2.9km 원동습지(원동면 소재지)→임경대→13.3km 물금취수장 물문화 전시관→0.5km 양산용화사 석조여래좌상→34.2km 낙동강 철새 도래지→15.3km 구포 시장

 

물길 따라 사람 사는자취를 더듬어보는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고들 합니다. 세상 모든 문명은 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어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문화가 꽃을 피웠습니다. 물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고 흩어졌습니다.

 

물을 따라 사람살이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여행길은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에서 시작됩니다. 예로부터 산수 풍치 좋은 자리를 골라 정자와 누각이 들어섰습니다. 진주에서는 촉석루 앞으로 남강이 흐르고 평양에서는 대동강을 내려다보며 부벽루가 서 있습니다.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 적벽 위 영남루에 서면 밀양시내와 막힘없이 흐르는 물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답니다. 영남루의 매력은 첫째 그 웅장함에 있습니다. 기둥은 높고 기둥 사이 공간은 널러서 시원시원하답니다.

 

양 옆으로 능파당과 침류각을 거느림으로써 화려함과 웅장함을 더하고, 계단형 통로인 월랑으로 연결해 통일을 꾀했다고들 하지요. 당당하면서도 회화적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는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의 걸작이라는 평가도 있고요.

 

영남루 이쪽저쪽 걸려 있는 현판들과 딸려 있는 건물들, 여기서 시문을 읊었던 이름 높은 옛적 사람들의 자취들, 아득한 시절부터 이곳에서 그들이 바라보았을 강물은 지금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영남루 뒤편으로 단군을 비롯해 역대 왕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천진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이 있습니다. 천진궁에 갔다가 돌아나서면 석화(石花)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데 무심히 즈려 밟고 지나가면 꽃인지 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천진궁 만덕문

석화, 돌꽃입니다.

 

영남루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밀양 아리랑비가 보인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랑각(阿娘閣:문화재 자료 제26호)에 서려 있는 아랑의 슬픈 전설도 이제 관광 상품이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커다란 봉황새가 날아와 춤을 추었던 자리 무봉사는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았는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이 모셔져 있답니다.

 

지금은 퇴락한 교통 요충 삼랑진 일대

 

삼랑진(三浪津)에서 삼랑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서 이루는 세 물결이라는 뜻입니다. 삼랑진에는 밀양·동래·창녕·통영을 비롯해 일곱 곳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조창이 있었답니다. 삼랑진읍은 영남에서 가장 큰 상업·교통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삼랑진역은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에 문을 열어 여지껏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그 세월만큼 숱한 이별의 사연들이 켜켜이 쌓였었겠지요. 아직도 구내에 남아 있는 증기기관차, 그것이 다니던 1920년대의 자취처럼 ‘이별의 삼랑진역’ 대중가요 가사 속 사연도 이제는 아련한 옛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궂은 비가하염없이 쏟아지는 삼랑진역

니는 경부선 나는 경전선

울면서 헤어지던 날

얌새가 풀을 뜯는 언덕배기서

너랑 나랑 니캉 내캉 맺은 그 약속

아쉬움에 가슴을 치며

나는 마 통곡했다 아이가.

 

모래바람 몰아치는 안개 짙은 삼랑진역

니는 경부선 나는 경전선

운명이 엇갈리던 날

두 손을 흔들며 헤어지면서

잊지 않고 돌아온다 약속했지만

소식 한 장 없는 그 사람

니는 마 더욱 야속한기라.

 

삼랑진역 급수탑.

 

규모가 크고 중요한 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채워주기 위해 급수탑이 들어서 있었는데, 삼랑진역도 그 하나였답니다. 이제는 온통 덩굴식물로 뒤덮이는 바람에 멀리서 보면 전설 속의 무슨 성처럼 덩그러니 서 있답니다.

 

경부선에서 유일하게 남은 이 삼랑진역 급수탑(등록문화재 제51호)은 1923년에 세워져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나올 때까지 자기 구실을 다하다가 지금은 삼랑진역 명물로 거듭났습니다. 이와 함께 열차를 타려면 건너가야 하는 지하통로에는 옛 삼랑진역 흑백사진들이 걸려서 교통 요지 역할을 하던 호시절을 떠올리게 한답니다.

 

영남루에서 꽤 시간을 보냈다면 삼랑진 일대에서 하룻밤 묵는 편이 낫겠지요. 고급스런 숙박시설은 없어도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한 데가 요즘 시골 읍내 형편이라 하지요.

 

임진왜란 격전지 작원관 자리에서

 

작원관과 위령탑.

 

작원관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73호)는 관리가 머무는 원(院) 구실, 외적을 막는 관(關) 구실, 교역하는 나루로서 진(津) 구실을 두루 했던 곳이라 합니다. 지금은 인적조차 드물지만 한 때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지는 동래로의 요충지로 문전성시였습니다.

 

작원잔도는 문 하나로도 길을 막을 수 있을 만치 지세가 험해 한남문(捍南門)을 두고 남쪽의 적을 막았는데 지리(地利)를 살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진격을 막으려는 격전이 벌어진 장소랍니다.

 

위령탑에서 본 작원관과 낙동강.작원관 임란용사위령탑.

 

임진왜란 당시 작원관 전투는 유명합니다.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해 300군졸과 지역민 등 700명이 방어진을 치고 항쟁했으나 중과부적으로 400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밀양으로 후퇴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작원관임란순절용사위령비가 높다랗게 세워져 있습니다.

 

작원관과 한남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세워졌다 합니다. 한남문은 일제강점기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졌다가 1936년 7월 대홍수에 쓸려나갔다지요. 지금 여기 작원관은 원래보다 1.2km 정도 북서쪽으로 옮겨왔는데 1995년 밀양시가 만들었습니다.

 

비각 안 빗돌들.

 

작원관 옆 비각에는 가운데에 대홍수로 쓸려간 자리에 세웠던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碑)가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가 서 있습니다. 작원진석교는 2012년 발굴이 됐고 작원대교는 아직 찾기지 않았답니다.

 

한편 일제가 기찻길을 닦으면서 덮어쓰는 바람에 끊어진 줄 알려졌던 작원잔도가 최근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양산 원동의 가야진사 부근 황산잔도와 함께 이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된 셈이랍니다.

 

한남문과 공운루.

 

잔도(棧道)는 강 따위를 따라 이어지는, 다니기 어려운 험한 곳에 만들어내는 길을 이릅니다. 때로는 비리(=벼랑을 뜻하는 경상도 지역말)길이라고도 하는데요, 작원 비리길이 얼마나 험했는지는 <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원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인데 물빛이 푸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한다.”

 

목숨을 걸고 오갔던 이런 비리길에는 한 시절을 힘들게 살아냈을 민초들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야겠지요.

 

가야진사 있는 원동습지와 임경대

 

원동습지 가운데쯤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낙동강쪽으로 들어가면 가야진사(伽倻津祠:경상남도 민속자료 제7호)가 있지요. 뒤쪽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 사이 중간 지점으로 풍수지리상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합니다.

 

가야진사 앞 용당나루와 맞은편 용산.

 

여기 나루는 이름이 용당인데, 가야시대부터 김해와 양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답니다. 기록을 따르면 신라와 가야가 세력 다툼을 하던 시절 이 나루를 거쳐 군사들이 오갔습니다. 낙동강 너비가 바다처럼 넓어져 버린 이곳이 옛날에는 주요한 수운(水運) 거점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강·금강·곡천강(포항)과 더불어 철따라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낸 네 곳(四瀆·사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범람을 막아주고 항해를 순조롭게 해주기 바라며 산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원동의 좋은 물길과 풍요로운 범람이 이 같은 의식의 모태인 셈이랍니다.

 

가야진사 옆 모습.

 

원동습지는 경부선 철도 제방과 1022번 지방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넓이는 20만평 가량이고요. 옛날에는 습지에서 논농사도 많이 했습니다. 홍수가 심했지만 3년에 한 번만 거둬도 소출이 많고 일손이 많이 가지 않아서였습니다. 요즘은 겨울 한 철 딸기나 채소 농사가 많습니다. 민물과 짠물의 범람이 잦은데도 생태계가 풍성하답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가는 어귀에 임경대(臨鏡臺)가 있습니다. 임경대는 최치원이 정자를 짓고 둘레 풍경의 아름다움을 누린 장소입니다. 밀양 삼랑진에서 102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오른편에 육각 정자가 있습니다. 양산시에서 만든 것이지요.

 

임경대에서 보는 낙동강.

 

임경대는 여기서 200m 정도 떨어진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 동쪽 벼랑에 있습니다. 고운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바위벽에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래되어 살펴보기 어렵습니다. 물줄기를 내려다보면 풍경이 고고한 자리랍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과 용화사

 

양산 용화사는 임경대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1호)은 대체로 온전한 편이며 광배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답니다. 근방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호분(胡粉)을 발랐다가 지워낸 자죽이 남아 있습니다.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용화사는 부산에서 활동한 소설가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修羅道)’의 배경지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까지 일대 민중들이 겪은 고초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으로, 소설 속 배경이 실제 이 지역과 맞아떨어지게 그려져 있답니다.

 

부산에 수돗물을 대어주던 물금취수장 물문화전시관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물문화전시관 바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용화사인 것입니다. 1969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하던 취수장을 수돗물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물의 순환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늘 가까이 있는 것이라 오히려 둔감해져 버린 수돗물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답니다.

 

용화사 전경. 조그맣습니다.옛 한글와 한자로 새긴 오래된 빗돌.

 

만약 밀양 영남루에서 발길을 서둘러 한 달음에 여기까지 왔다면 부산에 들어가 잘 곳을 찾으면 딱 맞겠습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발품을 좀더 팔아야 하겠지요.

 

을숙도, 그리고 낙동강 하구둑

 

낙동강 끝자락 을숙도를 비롯한 낙동강 철새 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는 다들 새들의 낙원이라 합니다. 새들은 모래언덕을 중심으로 둘레 갯벌을 따라 먹이를 찾아다닌답니다. 낙동강 철새 도래지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 넓은 하구 지역으로 수많은 삼각주와 모래언덕이 있습니다.

 

대표 철새 고니를 새겼습니다.에코센터에서 보이는 풍경.

 

아직 개간하지 않은 갈대밭이 너르고 물 속에 사는 생물들도 풍성해 물새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안성맞춤이 없습니다. 봄·가을에는 도요새와 물떼새 따위들이 거쳐가고 겨울에도 거의 얼지 않아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철새가 많이 모여든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재두루미·저어새·고니 등이 보이며, 제비물떼새, 넙적부리도요 같은 보기 드문 새들도 눈에 띕니다. 일본과 러시아를 잇는 지역으로 철새들의 국제적인 이동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답니다.

 

낙동강하구에코센터에서는 바라본 철새도래지 풍경.

 

그러나 철새들의 종류나 규모가 예전만 못하답니다. 환경이 오염됐음은 물론이고 하굿둑 공사로 짠물과 민물이 뒤섞이는 기수역이 사라졌습니다. 하굿둑 아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지만 하굿둑에 막혀 위로 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굿둑 위는 민물 호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 탐방로.

 

인간은 좀 더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철새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는 낙동강 여기 이 끄트머리에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자연과 인간의 공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가 있는데 1월 1일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 다음날) 쉰답니다.

 

400년 역사 품은 구포시장에서

 

낙동강 따라 가는 마지막 여정은 구포시장이랍니다. 이를 두고 뜻밖이라고 여기는 이가 많을 듯한데요, 하지만 물과 연관해 조금 생각해보면 전혀 뜻밖이 아님을 알 수 있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구포가 옛적에는 국수로 널리 이름을 알렸거든요. 국수 공장은 물이 풍부하고 좋은 곳에 들어섭니다. 옛날 구포는 물이 아주 좋기로 유명했답니다.

 

 

400년 전부터 감동나루와 감동창이 있던 강가에 장이 섰기 때문에 이름도 감동장이었습니다. 감동(甘東)은 구포의 옛 이름이라 합니다. 부산의 감동나루는 경남 합천 밤마리나루 경북 상주 낙동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로 꼽혔습니다. 1920년대까지는 구포나루로 양산·김해·밀양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갔으나, 구포역이 생기면서 시장도 줄었습니다.

 

1919년에는 여기 구포장터에서 3·1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청년들 주도 아래 장날에 모인 사람 1000명 남짓이 함께 외친 만세소리가 천지를 울렸다고 합니다. 전통시장 다듬기로 현대화된 구포시장은 옛 명성에 걸맞게 화려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다양한 물건과 사람 냄새 나는 생생한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랍니다. 그러니까 구포시장에 들러 구포국수 한 그릇은 먹어야지 제대로 장터 구경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비매품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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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국수는 구포에서 만들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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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올린, '경부선에 하나 남은 삼랑진역 급수탑'과 관련돼 있는 글입니다. 그냥 한 번 읽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구포는 부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동네입니다. 사람들은 ‘구포국수’라 하면 부산 구포에서 만드는 줄로 안답니다. 2008년에는 “부산 전통 식품인 구포국수가 옛 명성 되찾기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 방송에 나기도 했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구포국수는 동래파전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식품으로 일제강점기 근대 국수류의 생산 메카였던 구포에서 생산·판매되던 국수를 통칭하는 것이다. 교차해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낙동강 강바람으로 자연 건조해 쫄깃해진 면발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상표 분쟁과 대기업 식품회사와 경쟁 등으로 현재는 (주)구포국수 한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구포시장 묵자골목.

 

물론 지금도 부산 구포에 (주)구포국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영업본부만 있고 국수를 만들어내는 공장은 경남 합천 가회면에 있습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식품인 구포국수가 구포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랍니다.

 

게다가 구포국수를 만들어내는 업체가 (주)구포국수만 있지도 않습니다. ‘구포식품’이나 ‘구포특면국수’라는 상호로 구포국수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가 여럿 있는데 다들 공장이 구포에 있지 않습니다.

 

경남으로 보자면 때로는 합천에 있고 때로는 산청에 있고 때로는 밀양에 있습니다. 합천과 산청과 밀양의 공통점은 낙동강 지류의 상류 지역이라는 데 있습니다. 상류라서 아무래도 물이 깨끗하겠고, 그래서 그 깨끗한 물을 갖고 국수를 뽑아내고 면발을 만드는 것이랍니다.

 

구포시장 풍경. 왼쪽에 '구포국시'라고, 적혀 있습니다.

구포국수가 한창 널리 알려지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까지는 구포의 낙동강 강물도 나름대로 깨끗했겠지요. 하지만 그 뒤 잇따른 수질오염사고와 낙동강 유역 공장 설립 따위로 구포 강물이 더러워졌고 그러면서 구포의 국수 공장 대부분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면서 찾아간 데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상류 지역입니다.

 

구포국수가 지금도 이렇게 이름을 떨치는 것을 보면 옛날 진짜 구포국수는 참으로 대단했겠다 싶습니다. 물론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라 값싸게 끼니를 떼울 수 있는 수단으로 국수를 찾은 까닭도 있겠지만 말씀입니다.

 

지금 구포시장에서 끓여 내다파는 국수에는, 그러므로 이런 속사정까지 담겨 나오는 셈이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비매품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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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가 선거 브로커 취급 받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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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가 마련한 블로거 간담회에 참여했습니다. '온(ON)라인 속 온(溫)라인 세상 - 유권자 공감&소통을 위한 파워 블로거 간담회'라고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6월 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홍보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경남블로그공동체 회원 다섯이 참여했습니다.

 

기자 노릇을 하면서 선관위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고 내심 여기고 있었는데, 모르는 대목이 꽤 많았습니다. 큰 틀에서 대충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는 제대로 모르는 그런 것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1. 공정선거 정착과 선거관리위원회

 

그런 가운데서도 농·수·축협과 산림조합의 조합장 선거를 관리한다는 사실이 새로웠습니다. 저는 그것이 임의 조항이라서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는데, 법률로 딱 선관위에 맡기도록 못 박아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거 부정과 선거 관리 비용이 다함께 줄었다고 했습니다.

 

블로거 간담회. 저를 비롯해 블로거 다섯 명이 참가했습니다.

 

농협 등 조합장 선거가 지금 가장 부정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선거만 잡으면 사회 전반에서 부정 선거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말도 했습니다. 나아가 효율적인 선거 관리를 위해 지금은 뒤죽박죽이 돼 있는 농·수·축협과 산림조합 조합장의 임기 시작 날짜를 통일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그런 조합들 조합장 선거를 내년 3월 14일 한꺼번에 치르도록 돼 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미 20년 전에 학교 임원 선거 표준 모델을 개발해 보급해 왔으며 이런 선거 관리를 대행해 왔다는 얘기도 새삼스럽게 들렸습니다. 우리 유권자들이 모르는 가운데서도 선관위는 사회 전반의 공정선거 정착을 위해 나름 애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밖에 이번에 개정된 공직선거법(공직 선거 및 선거 부정 방지법) 내용에도 저는 관심이 쏠렸습니다. 가장 주안점을 두는 대목이 어디인지를 보면 우리 사회 공직 선거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2. 금품 받지 않고 요구만 했어도 처벌

 

역시 표를 사고 팔고 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세어져 있더군요. 그만큼 많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선거 브로커 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습니다. 후보자 등에게 금품을 요구해서 받으면 여태까지는 7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상 2000만원 이하 벌금을 매겼는데요, 앞으로는 징역은 7년 이하로 똑같지만 벌금은 3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로 상한선을 크게 높였습니다.

 

간담회 자료집에서.

 

또 후보자 등에게 금품을 요구하도록 지시·권유·요구·알선한 사람에 대해서도 처벌이 강화돼 있었습니다. 징역형은 10년 이하로 같았지만 벌금형이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에서 500만원 이상 7000만원 이하로 높아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금품을 달라고 했으면 비록 후보자 등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해도 처벌을 더욱 세게 하도록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여태까지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 벌금이었으나 앞으로는 5000만원 이하 과태료로 규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받는 행위뿐만 아니라, 돈을 달라고 요구만 해도 범죄가 성립된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처벌도 다른 일반 범죄와는 견줄 수도 없으리만치 엄격하게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3. 일반 홍보성 글쓰기와 혼동하고 돈 요구하면 범죄

 

저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블로거가 후보자 등에게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는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거나 받으면 어떻게 될까 싶었던 것입니다.

 

재선을 위한 출마가 확실한 홍준표 도지사가 사전선거운동이 아니라며 기초자치단체 순방을 하고 있습니다. 13일 거제에서 했다는 '언론인 초청 간담회'.

 

그래서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선거운동의 자유는 보장되기 때문에 블로그에 글을 올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원고료가 됐든 취재비가 됐든 어떤 명목으로든 법정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이 선거운동을 해 주는 대가로 금품을 받으면 모조리 범죄가 되며 따라서 처벌도 받게 됩니다."

 

저는 잠깐 생각을 해 봤습니다. 블로거들이 평소 아는 사람을 위해서 또는 일정하게 대가를 받고 홍보해 주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일은 꽤 일반화돼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치단체인 경우도 있고 기업인 때도 있고 맛집 또는 펜션 같은 숙박업소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법률로 범죄라 규정하지도 않으며 처벌 또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별을 둘까에 생각이 미치니 바로 공공성이 떠올랐습니다. 선거는 공공의 영역이고 선거운동은 공공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인 반면 이와 달리 자치단체나 기업이나 맛집 따위를 홍보하는 일은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해도 되는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선거와 선거운동에서는 공정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돈을 받고 블로거들이 선거운동을 해 줄 수 있도록 한다면, 돈이 많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선거운동의 기회가 균등하지 않아지는 문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론 전부는 아니고 아주 일부겠지만, 블로거들이 선거와 관련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다른 홍보를 위한 블로깅과 같거나 비슷하게 생각했다가는 뜻하지 않게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원시장을 지낸 박완수 새누리당 경남도지사 예비 후보의 경남행복의료원 개원 관련 기자회견

다른 금품 거래는 사적인 영역에 들지만 선거와 관련한 거래는 죄다 공공의 영역임을, 공공의 영역에서 금품 거래를 하게 되면 바로 범죄가 되고 잘못하면 몇 천만원씩 과태료나 벌금 폭탄을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게 해 준 간담회였습니다.

 

4. 후보자 등의 금품 관련도 엄격 처벌하는 까닭

 

바로 그런 때문에 유권자한테 금품을 주거나 이권을 주는 후보자 등에 대한 처벌도 강화한 모양입니다.(매수·이해유도죄 벌금형, 종전 600만원 이상 1500만원 이하→개정 현행 10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

 

아울러 후보자 등이 정당 또는 국회의원 등에게 어떤 명목(채무 변제나 대여 등)으로든 금품 거래를 못하도록도 막고 이를 어기면 의원직 등 공직을 잃도록 형량을 강화(1000만원 이하 벌금→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 벌금)한 까닭도 여기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벌금형을 강화하면 그 실효성이 세어진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처벌 최저선인 벌금 500만원 구형이 검찰에서 나오면, 법원에서 아무리 깎아줘도 공직 상실 하한선인 벌금 100만원 아래로는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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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제 활용하면 휴일이 하루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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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4지방선거에 전면 적용되는 사전투표제

 

부재자 아니라도 누구나 미리 투표할 수 있는 사전투표제도가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전면 도입된다고 합니다. 부재자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는 없어졌습니다.

 

이미 아시는 이는 아시겠지만, 지난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도 적용된 적이 있는데요, 투표율을 크게 높이는 성과를 그 때도 이룩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따로 미리 부재자 신고를 한다거나 아니면 미리 투표를 하겠다고 등록을 하는 그런 절차 전혀 없이, 바로 투표소를 찾아가 신분증만 내보이면 된다고 하니 무척 좋아졌습니다.

 

2월 20일 마련됐던 경남선관위의 블로거 초청 간담회.

 

이번 6·4지방선거에서는 사전투표일이 선거일 전 5일과 4일 그러니까 5월 30일(금)과 31일(토)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정해졌고요, 사전투표소는 전국 모든 읍·면·동사무소에 마련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일요일이 사전투표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불만스러워하기도 하지만, 주어진 시간에 빡빡한 일정으로 선거 관리를 해야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고 그런 한도 안에서는 최대한 늘려잡았다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말하고 있습니다.

 

2. 5월 30~31일 아무 읍·면·동사무소 가면 그만

 

그러면 사전투표를 어떻게 하느냐고요? 아주 간단합니다. 보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에 삽니다. 주민등록도 여기에 돼 있습니다. 제가 만약 5월 30~31일 서울이나 부산이나 광주로 출장을 갔다고 하면 거기 있는 아무 읍·면·동사무소나 찾아갑니다.

 

물론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고요. 그러고는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장애인복지카드나 그밖에 다른 신분증 가운데 아무것이나 하나 제시하고 본인이 맞는지 여부를 확인합니다.(국가·중앙부처·지방자치단체 같은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신분증으로 사진이 붙어 있기만 하면 무엇이든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사전투표 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에게서 투표용지 일곱장과 우편발송용 봉투를 받습니다. 기표소에서 표를 찍은 다음 투표지를 우편발송용 봉투에 넣고 봉한 다음 투표함에 집어넣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살고 있는 읍·면·동에서도 사전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제가 살고 있는 내서읍의 읍사무소를 찾아가서 아무 준비 없이 신분증만 제시하면 바로 투표를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 사전투표할 때와 다른 점은, 우편발송용 봉투에 넣는, 사소하지만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이지 더없이 편하고 좋습니다.

 

3. 하지만 신분증은 반드시 갖고 가야

 

그래서 원래 6월 4일 하루였던 투표일이 5월 30일과 31일을 사전투표일로 삼으면서 사흘로 늘어났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답니다.

 

자기가 주민등록돼 있는 동네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도 사전투표를 아무 제약없이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을 하느라 다른 지역에 나가 사는 경우에도 부재자신고 따위 번거로운 절차 일절 하지 않고도, 아무 읍·면·동사무소에서나 미리미리 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챙겨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 신분증뿐입니다. 그밖에는 누구를 어느 정당을 찍어야 할는지 하는 판단만 가져가시면 됩니다.

 

4. 사전투표제로 당연히 투표율도 높아지고

 

이렇게 하면 무엇이 나아질까요? 당연히 투표율이 높게 나오게 됩니다. 실제로 2013년 재·보궐선거 사전투표자가 전체 투표자 가운데 17.9%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지난날 부재자투표와 견주면 엄청나게 높은 비율이며, 그만큼 투표율이 높아졌음을 뜻한답니다.

 

간담회 장면.

실제로 선거관리위원회가 내놓은 2010년 상·하반기와 2011년 상·하반기 네 차례 재·보궐선거의 평균을 보면 부재자투표 숫자가 전체 투표 숫자의 4.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2013년 재·보궐선거는 이에 견주면 네 배 넘는 인원이 투표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투표율이 높아지게 되면, 투표하는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는 일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전체 유권자에 견주면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지율로 의석을 가져가고 단체장 자리를 차지하는 그만큼 줄어들겠지 싶습니다.

 

5. 사전투표일 활용하면 6월 4일은 느긋하게 하루를

 

또다른 즐거움도 있습니다.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을 따르면 6월 4일 지방선거 투표일은 공휴일입니다. 물론 우리나라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중앙행정기관·국회·법원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국·공립학교에 적용됩니다.

 

2013년 4.24 재보선거에서 투표일 닷새 앞인 19일에 양산시의원 선거 사전투표를 하고 사진을 찍은 양산시장. 경남도민일보 사진.

하지만 일반 기업도 노동조합이 있으면 단체협약을 통해, 노조가 없으면 사규 등을 통해 휴일로 삼은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 노사도 단체협약으로 재보선 아닌 투표일을 휴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전투표제도로 미리 투표를 해 놓으면 금쪽 같은 휴일을 하루 더 누리게 되는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전투표제도로 미리미리 투표를 해놓으면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쏟아진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사전투표를 선택할 유권자들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선거공보를 앞당겨 발송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투표하는 날을 바로 앞에 두고 선거공보가 집집마다 배달되기 일쑤였지만 이번부터는 적어도 열흘 전(6·4지방선거 같으면 5월 25일)까지는 배달이 끝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사전투표제도를 활용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해서 투표율도 끌어올리고 6월 4일 투표일 하루 느긋하게 지내게 된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가 아니겠습니까?

 

김훤주

 

※ 2월 20일 오후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제도 홍보를 목적으로 마련한 블로거 초청 간담회에서 설명을 들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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