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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서 오히려 몰랐던 우리 고장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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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탐방] (1) 창원시 옛 마산·진해

 

2013년 11~12월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수능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과 자기 고장을 둘러보는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지역의 역사·문화·인문·자연을 오감으로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자기 고장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한편으로 허술해지기 마련인 막판 고3 교실 수업을 작으나마 메울 수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경남도교육청의 이해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경남 18개 시·군 모두에서 하려 했으나 그렇게 못했습니다. 창원·양산·김해·통영·거제·고성·사천·합천·함안·창녕 10개 지역에서 해당 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경남도민일보와 해딴에 공동 주관으로 13차례 진행했습니다.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은 마산·진해 지역에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1월 12일과 13일에 두 차례 저마다 60명씩 둘러봤습니다. 탐방 루트는 고장 역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며 공부하느라 지친 고3 학생들의 상태를 고려해 짰습니다.

 

먼저 고장의 역사적·문화적 특징을 제대로 나타내는 존재들을 꼽은 다음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들을 골랐습니다. 먹을거리 또한 지역색이 뚜렷한 쪽으로 했고요. 프로그램 진행에서는 흥미와 즐거움, 속도감을 중요하게 여겼답니다.

 

지쳐 늘어진 학생 상태를 고려한 바이지만, 탐방 체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답니다. 12년 동안 죽어라 공부하다가 이제 조금 풀려났는데, 다시 학습이다 뭐다 하면 애초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고 짐작이 됐거든요.

 

아침 9시 창원교육지원청 마산민원실을 출발해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유적지~원해루·선학곰탕(점심)~제포진성~웅천왜성~창동·오동동~옛날우정아구찜·오동동진짜아구찜(저녁)으로 이어지는 루트였습니다.

 

지금 진해가 일제 침탈로 이름을 가져가기 전까지 '진해'라 일컫던 진동 지역까지 처음에는 포괄하려 했으나 시간이 모자라 빼야 했습니다. 저녁 먹은 다음에는 창신대 강당으로 옮겨 재미있는 지역 이야기와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지역 역사·문화 도전 골든벨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해군기지사령부 탐방은 창원시의 군항문화탐방 안내실 도움을 받아야 했답니다. 군사 시설이라 대부분 버스를 타고 돌아봐야 했고 사진도 찍지 못했지만 학생은 물론 동행한 선생님조차 퍽 재미있어 했습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 새겨진 안중근 의사 유묵비, 철도 진해선의 종착지 통해역, 러시아 풍모의 사령부 본관 등 일제 강점기 건축물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승만 별장과 해사박물관은 걸어 들어가 가까이 보면서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승만 별장.

 

이승만 별장에 있는 이승만의 글씨.

 

이승만 별장 회의실에서.

 

학생들은 지붕 아래 새겨진 태극무늬에도 눈길을 줬고요, 응접실·침실·경호실·회의실·부속실 따위 집기들의 소박함에도 탄성을 냈답니다. 지금과 견주면 자기네들도 쓰지 않을 그런 물건이라며, 지위 높낮이보다는 어느 시대에 태어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고들 자기네끼리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별장에 있는 낡아빠진 의자.

 

낡아빠진 의자에 새겨져 있는 사자 얼굴과 발톱 조각.

 

이승만 내외의 침대.

 

아울러 아래로 깊이 들여다보면 시커먼 조그만 비상 탈출구가 아래쪽 바닷가까지 이어진다는 데 대해서는 다들 신기해했습지요. 침실과 화장실 사이 마루판을 들면 나오는데 일본군이 긴급 상황에 대비해 만든 것이랍니다.

 

비상 탈출구 들머리.

 

별장에서 바다 쪽으로 육각정이 있는데요, 1949년 이승만이 중국 총통 장개석을 만난 역사적 장소랍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그런 사실이 중요할 까닭이 없습니다. 거기서 보이는 바다 풍경과 의자들의 독특한 모습, 나무로 만들었지만 앉으면 그지없이 편안하다는 설명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는 품새를 보였거든요.

 

육각정.

 

육각정에 있는 독특한 나무의자.

 

그리고 해사박물관. 완전 이순신 장군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해설을 해주는 사람도 유물 그 자체보다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많이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들머리 조선 시대 군사용 깃발에 새겨진 한자 '帥(수)'의 엄청난 크기도 눈길을 끌었고요.

 

해사박물관 수자 깃발.

해사박물관에서.

 

어쨌거나 탐방길 즐거움의 절반은 음식이 차지하거든요. 그리고 먹을거리 또한 지역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문화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날 둘로 나뉘어 원해루와 선학곰탕에서 점심을 먹은 까닭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원해루는 진해 대천동 군항마을역사관 가까운 데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공군 포로였던 장철현 씨가 榮海樓(영해루)로 1956년 장사를 시작한 중국음식점이라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종종 찾은 곳입니다. 학생들은 그런 역사를 한편으로 듣고 허름한 내부 구조를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보다 음식맛에 더 감탄을 했습니다.

 

선학곰탕 들머리에 늘어서 있는 학생들.

 

선학곰탕 집안에 있는 옛날 전화기.

 

남원로터리와 중원로터리 사이 선학곰탕은 1912년 진해요항부 해군병원장 관사로 지어진 건물이랍니다. 등록문화재 193호인데 복도는 흘러간 세월만큼 삐걱대고 괘종시계·축음기·전화기조차도 그대로인데 정각이 되면 '댕댕' 소리까지 낸답니다. 눈 밝은 학생이 간혹 있어서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기 전에 남 먼저 알아보고는 눈을 빛내기도 했습니다.

 

이어 둘러보는 제포진성과 웅천왜성은 마산·진해 지역의 역사적 특징을 한꺼번에 일러주는 유적입니다. 웅천읍성에서 바다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은 제포진성은 그 아래 제포왜관과 당연히 관련돼 있었겠지요.

 

제포진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제포진성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왼쪽에 옛날 왜관이 있었습니다.

 

왜인들이 교역을 목적으로 드나들던 왜관을 통제하고, 더이상 넘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삼포왜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조선과 왜의 이런 역사는 뒤이은 임진왜란에서 더욱 뚜렷하게 마산·진해 지역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어 찾아간 웅천왜성이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왜군이 임진왜란 때 쌓았는데 성벽이 수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선의 성과 다르답니다. 곳곳에 소용돌이처럼 마련한 여러 암문도 조선과 다릅니다.

 

일본은 지진이 잦습니다. 지진에 잘 견디라고, 왜성은 사진 오른편에서 보는 바처럼, 수직으로 쌓지 않고 조금 기울어져 있습니다. 조선성과는 다른 점이지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얼굴이 보이는 이)이 학생들에게 이런 특징을 성명하고 있습니다.

 

웅천왜성 마루에 올라서.

 

교역 또는 전쟁으로 표현됐던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 교섭의 자취가 이렇게 진해·마산과 남해바다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원형 그대로 잘 남아 있는 왜성으로, 이런 역사와 관련 없이 산마루에 서면, 이제 신항 건설로 매립되는 바람에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원한 눈맛을 누릴 수 있었답니다. 

 

웅천왜성에 가느라 1시간 남짓 등산했던 학생들은 곧바로 마산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버스 안에서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창동·오동동 일대 근·현대사 자취를 찾아오는 순서대로 상금을 주는 식이었답니다.

 

귀기울여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학교 단위로 팀을 이뤄 버스가 닿자마자 뛰어내려 내달렸습니다. 그러고는 시민극장, 3·15의거 발원지, 노현섭기념사업회, 조창, 책사랑, 원동무역, 마산형무소를 찾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등은 물론 꼴찌까지 모두 상금이 주어졌습니다. 가까운 창동예술촌 등지에서 이런저런 체험을 하는 데 쓰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 다음 저녁 자리는 마산 명물 아구찜을 하는 밥집 두 곳으로 잡았습니다. 학생들은 거기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창신대로 옮겨가 남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답니다.

 

풍선을 불어 갖고 레크레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늦은 8시에 마쳤어도 얼굴 표정은 다들 즐거웠습니다. 평소 둘러보지 못했던 색다른 현장을 탐방하고 즐겁게 놀았는데다가 점심·저녁까지 맛있게 먹은 덕분이겠지요. 마지막 프로그램인 ‘도전! 골든벨’에서 정답을 맞히고 문화상품권을 얻은 친구들은 입이 좀더 벌어졌겠고 말씀입니다.

 

도전! 골든벨 장면.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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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생태 한눈에…이야기꽃 한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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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2) 창원시 옛 창원 지역

 

2013년 11월 14일과 15일 60명씩으로 진행된 옛 창원 지역의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은 일정이 이랬습니다. 성산패총유물전시관~창원향교~창원읍성~북동시장~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해상 전쟁 유적.

 

창원 지역 역사·문화·생태의 특징과 장점이 담겨 있는 장소랍니다. 12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공부를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될 학생이라면 꼭 들러봐야 할 곳들이었습니다.

 

성산패총 유물전시관. 초등학교 시절 소풍 삼아 한 번쯤 와봤을 장소지만 실제 여기를 다녀간 친구들은 많지 않았답니다. 창원에서는 널리 알려진 곳이기에 학생들이 심드렁해하지나 않을까 여겼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고요.

 

늦가을 단풍 아래 성산패총 유물전시관으로 올라가는 모습.

 

놓인 유물들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면 별로 기억에 남는 바가 없었겠지만, 이날 탐방에서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전시된 유물들 특징을 지루하지 않게 제대로 짚었습니다. 이를테면 낮은 불에 구워 만들어 상대적으로 무른 토기와 높은 불에 구워 비교적 단단한 토기가 출토됐는데, 그 색상과 질감과 시대를 서로 견줘보면 새로운 느낌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산패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도 흥밋거리였습니다. 1970년대 개발된 창원공단에는 성산패총 말고는 유적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같으면 개발 지역 전체를 시굴·발굴하기에 곳곳에 이런 유물 전시관이 들어섰겠지만, 당시는 군사독재 치하였기에 죄다 뭉개고 지나갔답니다.

 

그런데 성산패총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창원공단 건설 현장을 방문했을 때, 보존 방안을 궁리하던 발굴 책임자가 꾀를 내어 여기 발견된 야철지를 창원공단 상징 공간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건의했다는 것입니다.

 

쇠를 주로 다루는 공단의 특징을, 여기 야철지와 연관지어 내는 바람에 이렇게 작으나마 남길 수 있게 됐다는 얘기랍니다.

 

이어 창원향교로 갑니다. 지금 소답동 일대에 있던 창원읍성의 핵심 건물 가운데 하나랍니다. 지금으로 치면 공립 고등학교쯤인데 1748년 마산 합성동 청룡산 자락에서 지금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창원향교에서 옛적 학생들 공부하던 교실인 명륜당.

 

공자를 비롯한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생 교육, 지역 주민 교화가 주된 기능인데, 으뜸 건물은 가장 위쪽 높은 대성전으로 여기서 제사를 모십니다. 앞쪽에는 학생들 공부하던 명륜당이 있고 그 아래 양쪽에는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가 자리잡았습니다.

 

창원향교 대성전으로 취족을 하면서 올라가는 학생들.

 

문은 모두 셋으로 이뤄진 삼문인데, 가운데는 영혼이 드나들고 나머지는 양쪽 문을 써야 합니다.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반대편 문을 씁니다. 문루도 있어서 학생들이 올라가 놀 수 있었는데 대개는 백성들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을 담아 풍화루라 일렀다고 하지요.

 

이어서 창원읍성을 찾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북쪽 성벽인데요, 여태까지는 일제강점기 철도를 내면서 무너진 줄 알았으나 2011년 발굴에서 묻혀 있던 성벽을 파냈답니다. 하지만 다시 묻어버려 지금은 안내판만 남았습니다. 최헌섭 원장은 도로를 따라 성벽 자취를 일러주며 보존은 물론 교육과 탐방을 위해서도 성벽을 원래대로 드러내는 편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땅에 다시 묻힌 창원읍성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발굴로 모습을 드러냈었던 창원읍성. 두류문화연구원이 맡았더랬습니다.

점심은 북동시장 가장 오래된 밥집 가운데 하나인 할머니국밥과 혜경이네국밥에서 국밥을 먹었습니다. 원래 창원읍성의 관청 건물 자리에 들어선 시장인데요, 여기 밥집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지는 않지만 30년 넘게 장꾼들에게 뜨뜻한 국밥을 대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 주남저수지 바로 옆 월잠리 한 건물 2층에 있습니다. 오래 공직생활을 하면서 갖은 자료를 수집해온 양해광 관장의 세월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창원향토자료전시관에서 양해광 관장의 설명에 눈을 빛내는 학생들.

 

왼쪽에 무슨 약품 선전 포스터, 가운데 선거공보.

 

오래된 음반부터 옛날 교복과 선거 포스터, 그리고 전화기 휴대전화 삐삐까지 가지각색 물건이 전시돼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어린 학생들이 따분해할 수도 있겠다고 걱정했으나 친구들은 여기서 매우 즐겁게 시간을 보내더군요. 옛날 의자에 앉아 옛날 풍금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옛날 교모를 쓴 친구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주고 있다.

 

옛날 걸상에 앉아 옛날 풍금을 치는 손길.

 

이어지는 동판저수지는 창원 명물 주남저수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지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걸으며 노닐기는 주남저수지보다 훨씬 나은데도 동판을 찾는 이는 드문 편이랍니다.

 

동판저수지.

 

고니.

 

주남이 툭 트여 시원한 맛이 있다면, 동판은 오목하게 굽어서 오밀조밀한 맛이 세답니다. 또 물버들이 수북하게 자란 데가 많아 그윽한 느낌까지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늦가을 따사로운 햇살을 쬐면서 둑길을 걸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은 단감을 한 광주리 담아 내놓고 먹으라며 인심을 자랑했고요, 저수지 한가운데에는 학생들 눈을 호강시켜 주려는 듯 희귀 철새 고니가 여럿 모여 앉았습니다.

 

동네 아주머니가 내어놓은 단감을 한두 알씩 집었습니다.

 

동판저수지 둑길을 거닐고 있습니다.

 

창원 탐방의 마지막은 해상 전쟁 유적. 합포만 마산만 진해만 바다는 여기 사람들 삶터인 동시에 아시아 여러 세력이 다툼을 벌인 현장이기도 하답니다. 용호동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가 바라보이는 데까지 나가 두 시간 남짓 둘러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풀어놓았습니다.

 

마산박물관 이상목씨가 마산만 합포만 진해만 일대 해상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일에 대해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얘기는 포상팔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바닷가 여덟 나라라는 뜻인데 이 가운데 창원은 골포에 해당되지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 포상팔국이 가라 등을 침입했다고 나온답니다.

 

이어서 고려시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지금 몽고정이 있는 마산 일대에서 일본을 향해 출정했습니다. 당시 주둔 병력이 4만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민간인까지 포함해서 20만 규모 도시가 여기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고 합니다.

 

또 임진왜란 때는 여기서 안골포해전과 합포해전이 있었고 1905년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침한 일본 함정이 진해만에서 길을 나섰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면 좋았을 텐데요, 해방 이후 보도연맹과 관련해 민간인을 무더기로 수장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 데도 여기 바다였습니다.

 

뱃머리에 나앉은 학생들.

 

노래방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학생들은 바닷바람이 시원해서 좋고 뱃전에 부서지는 물결이 새삼스러워서 좋고 공부에서 풀려나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자체가 좋습니다. 어떤 학생 몇몇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노래방 시설을 작동해 멋들어지게 노래까지 불렀답니다.

 

오후 5시 30분 즈음 돌아온 일행은 가까운 밥집에서 따끈한 곰탕으로 배를 채운 다음 창원대로 향했습니다. 마지막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였지요.

 

제가 앞에 나서서 당시 신라를 뒤흔들었던 창원 백월산의 일대 사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성도(成道)'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했습니다.

 

이종호 여가문화연구원 원장이 진행하는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창원 백월산과 관련해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풀어보는 재미있는 지역 이야기, 그리고 상품권 등 푸짐한 상품이 걸린 지역 역사·문화 도전 골든벨.

 

이종호 여가문화연구원 원장의 지도를 따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모습.

 

탐방을 마친 학생들은 창원에 이렇게 재미있고 볼만한 데가 많은 줄 처음 알았다고들 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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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준 의원님, 무척 자랑스러우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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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가 있는 모양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홈페이지가 있더군요.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이면서 마산회원구 국회의원인 <안홍준 2014년도 의정보고서>에 나옵니다.

 

안 의원은 이 협회로부터 '2013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대상 의정 발전 부문'을 받으셨습니다. '국민일꾼, 마산일꾼 안홍준!!'의, '국회의원 300명 중 여·야 각 1인만 수상하는 대상 5개 포함 2013년 국회의원 평가 7관왕 달성!!'에 한 몫을 한 단체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신문 기자 가운데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 소속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는 한국기자협회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회장 인사말은커녕 회원 기자나 회원 회사 명단도 없었습니다. 정관도 규약도 나와 있지 않았고 연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의정보고서 1면.

 

안 의원은 이밖에도 '2013 대한민국소비자대상 소비자 입법 부문 대상(한국소비자협회)' '2013 제19대 국정감사 최우수 국회의원(사단법인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 '2013 제1회 소비자보호 우수 국회의원(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2013 대한민국 우수 국회의원 최고 대상(사단법인 한국언론사협회)'에 꼽혔고, 국회사무처 선정 '2013 입법 및 정책 개발 우수 국회의원' 그리고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13년 '웹 접근성 품질 마크' 획득을 했습니다.

 

의정보고서 1면 아래 부분.

 

이 가운데 국회 사무처, 한국정보화진흥원,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누구나 믿을만한 존재입니다. 반면 한국소비자협회는 인터넷 검색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앤디앤뉴스>라는 평소 보지 못하던 인터넷 매체에 배너광고로 떠 있기에 눌렀더니 포털 네이버 카페가 나왔습니다. 2014년 2월 24일 현재 '즐겨 찾는 멤버'는 5명이고 '게시판 구독수'는 0회로 적혀 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이사장 서정태)는 홈페이지를 보니 최근 소식이 이태 전인 2012년 11월이었습니다. 2010년 12월에 안 의원이 이 단체로부터 '한국의 미래 개혁 정치 발전 대상'을 받은 기록이 있었습니다.

 

의정보고서 2면 왼쪽 아래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미소를 받고 있는 안홍준'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한국언론사협회도 인터넷 검색이 쉽지는 않았는데, 최종옥 대표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 언론사들의 대표기관"을 자임하고 있지만 구성원 면면을 보니까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안홍준 국회의원께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마산회원구 유권자들한테 활동을 알리는 데 이만큼 좋은 거리도 없을 것입니다. 의정보고서 1면으로도 모자라 11면을 통째로 내어 상 받은 내용을 자세하게 적은 까닭도 이런 데에 있으리라 짐작됩니다.

 

의정보고서 11면.

다만 한 가지가 아쉽습니다. 자치단체장은 이렇게 상을 받으면서 접수비·심사비·홍보비·광고비 명목으로 돈을 주는 일이 많다는데, 같은 선출직인 국회의원은 이와 다른지 어떤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자기 단체가 주는 상이 값어치나 귄위가 조금이라도 있는 듯이 보이려고, 받기 싫어하는데도 억지로 상을 떠맡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름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라면, 상 주는 쪽에서 오히려 어떻게든 모셔가려고 애쓰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 홈페이지에서.

 

또 하나 아쉬운 것이 더 있습니다.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가 언론인연합협의회 등과 함께 주관한 '2014 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 시상식'이 2월 20일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여기에 안 의원 이름이 또 올랐는데도 이번 의정보고서에 실리지 않은 바람에 지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상 받은 이름에 김연아·이상화 선수와 더불어 상을 주는 주체이기도 한 대한민국신문기자협회의 회장도 사회복지봉사공로대상에 들어 있어서 흥미롭기까지 했답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 2월 25일치 11면 데스크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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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 통도사가 한국 3대 사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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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3) 양산시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근본 취지는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랍니다. 둥지를 떠나 드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고3 학생들에게 소중한 고장 이야기 한두 가지쯤은 괴나리봇짐에 넣어 주고픈 마음으로 기획했던 것이지요.

 

좀 더 보태자면 잘 알려진 것보다는 "어, 이런 데도 있었나? 정말 새롭네, 좋네" 그런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을 찾으려고 발품을 많이 팔았음에도 잘 알려진 곳을 중심에 둘 수밖에 없는 고장이 양산이었습니다.

 

자주 갔지만, 되레 몰랐던 통도사

 

통도사를 빼고 어찌 양산을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2013년 11월 13일 1박2일 일정으로 탐방에 나섰을 때 오전 시간은 통째로 통도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흔히들 한 장소를 몇 번 들러보고 나면 다 아는 양 여기기가 십상입니다. 통도사를 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학생이 많았답니다. "수없이 와 봤는데 새삼 뭘 본다고?" 몇 번 둘러봤다 해서 통도사를 안다 할 수 있을까요?

 

통보사 부도밭. 왼쪽 등을 보이는 사람은 설명을 맡은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거찰(巨刹) 통도사를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통도사가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새삼스러워하는 친구가 적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통도사 탐방은 두 갈래로 진행했습니다. 역사·문화적인 부분은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에게, 종교적인 의미는 통도사 스님에게 부탁해 해설을 맡겼습니다.

 

범종루. 그러나 여기에는 범종 말고 운판 목어 법고 같은 다른 사물도 있었습니다.

 

부도와 탑에 대한 기본 설명에서 시작해, 스님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수계(受戒) 의식이 금강계단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절간에서 울리는 법고·목어·운판·범종 같은 사물에도 제각각 다른 의미가 담겼음을, 절간에 아무 뜻없이 만들어지거나 놓인 건물·물건은 없다는 사실을,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손가락만 누르면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와 지식,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손쉽게 얻어서야 어떻게 감흥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눈으로 보기와 마음으로 새기기는 관심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제 다수가 고장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잔잔한 무늬들이 새겨져 고장을 좀 더 이해하고 아끼게 된다면 더없이 고맙겠습니다.

 

영산전 앞에서.

 

점심은 절간 공양으로 했습니다. 흔한 경험이 아니라는 배려의 결과였습니다. 한창 뜨고 있는 절간 음식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요! 공양은 참 소박했답니다. 무·콩나물·시금치에 시래깃국, 돌을 삼켜도 소화해 낸다는 열아홉 청춘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밥상이지만 이 한 끼 소찬으로 우리가 얼마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부부총 유물을 만나다

 

오후에는 양산박물관을 찾았습니다. '100년만의 귀환 - 양산 부부총 특별전'. 1920년 일제강점기 발굴돼 실려나간 부부총 유물이 잠깐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것이지만 지금은 남의 것. 최헌섭 원장은 '귀환'은 잘못된 표현이고 '친정 나들이' 정도가 맞다고 했습니다.

 

북정동고분군. 무덤 덩치가 우람합니다.

 

앞서 성황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마루금을 따라 북정동 고분군으로 올라갔습니다. 근처 산다는 한 친구는 운동 삼아 오르는 뒷동산이 이런 역사적인 장소인 줄 몰랐다며 신기해했습니다. 고분군을 돌아본 후 자유롭게 전시 공간을 둘러보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물의 반환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답니다.

 

이어 조그만 절간 용화사에 들러 소박한 품새를 둘러봤습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작품 <수라도>가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지요. 법당 높이를 훌쩍 넘어선 나무와 더불어, 지방보살을 기리는 빗돌에 한글과 한자가 함께 쓰인 점이 이채롭습니다.

 

용화사.

 

서울과 동래를 잇는 옛길인 동래로 가운데 가장 험했다는 '황산잔도' 2km 남짓을 걸었습니다. 잔도(棧道)는 벼랑에 나무를 박거나 바닥을 깎아 만든 길을 이르고 황산(黃山)은 양산 물금 일대 낙동강을 달리 이르는 황산강에서 나왔다고들 하지요.

 

어둑해질 즈음 배내골 장선농촌체험마을에다 짐을 풀었습니다.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와 마을을 감싼 나지막한 산, 늦은 가을색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마련한 저녁 밥상은 진수성찬이었습니다.

 

통도사에서 푸성귀로 배를 채웠던 친구들은 두세 그릇씩을 너끈히 비웠답니다. 돼지고기볶음은 바닥이 보이도록 먹어치웠고요. '금강산도 식후경', 이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음을 배부른 아이들의 푸짐한 얼굴에서 느꼈답니다.

 

고민과 꿈을 나눈 밤

 

그러고는 마을회관에 둘러 앉아 자기를 소개하고 이번 탐방에 참여한 까닭과 하루 동안 다니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지역을 알려고 왔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생님 권유로 왔고 처음에는 왜 하는가 싶었는데 지금은 재미있고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마을회관에 둘러앉아 자기 소개를 하면서 주제토론까지 하고 있는 모습.

 

토론을 마치고 모둠별로 간식을 나눠먹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서먹했지만 얘기를 나누면서 또래끼리 고민과 꿈을 함께하고 나누는 자리로 바뀌어갔습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다/없다'로 토론할 때, 살 수 있다는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돈으로 마음까지는 살 수 없다는 발언에는 여기저기서 공감하는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입시에 찌들려 이런 얘기를 나눠볼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이 바라거나 최고로 치는 것들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마흔 명 남녀 학생들의 하룻밤은, 어른들 걱정과는 달리 생각과 행동이 저마다 진지하고 의젓했었지요. 밤이 깊도록 나눈 대화와 그 즐거움은 좀체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부도 만들고 떡메도 치고

 

이튿날 아침을 먹고는 다시 마을회관으로 모였습니다. 이번에 돌아본 장소와 양산에 대한 상식을 바탕으로 '고장 역사·문화 도전 골든벨'을 했습니다. 양산을 다 아는 것처럼 여겼었지만 하나씩 문제가 나올 때마다 바람에 가을잎 지듯이 학생들은 떨어져나갔습니다.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무지가 새삼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무지에 대한 자각은 바로 새로운 앎의 시작. 아마도, 대부분 학생들은 자기 고장에 대해 하나씩 알아나가는 보람을 누렸을 테지요.

 

두부 만들기.

 

이런 가운데 문제를 끝까지 다 풀어낸 친구가 탄생했습니다. 선물로 준비한 상품권은 장차 역사를 전공하겠노라는 이 '역사덕후' 청년에게 돌아갔답니다.

 

체험은 두부 만들기와 떡메치기였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래도 몸을 더 많이 부리는 떡메치기가 좀더 즐겁습니다. 하지만 서슴없이 어울려 놀 만큼 가까워졌을 즈음 다시 짐을 싸야 했습니다.

 

떡매치기.

 

짧은 1박2일 일정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단 하나라도 마음에 담았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라도 "그런 것이 있었지, 그게 바로 양산이었어" 하고 떠올릴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양산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 소요'에서 돈가스로 점심을 먹으며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윽하게 내려다봅니다. 양산, 참 멋지고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부디 떠나더라도 양산을 더 많이 사랑하고 그리워하기를…….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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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이비 언론에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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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이다. 맛집 취재를 담당하고 있는 박정연 기자가 내부 게시판에 이런 보고를 올렸다. 맛집으로 소개된 식당에 경남도민일보를 사칭한 전화가 걸려와 15만 원 상당의 책을 사라고 요청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본 기자들이 제각기 개탄하거나 분노하는 댓글을 달았고, 앞으로는 취재할 때 미리 '이러이러한 전화가 오면 사기꾼이니 절대 응하지 마라'는 당부를 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검찰 경찰은 이런 사기꾼들 좀 잡아 넣어라


그러나 이건 새로운 것도,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맛집뿐 아니라 인터뷰나 미담 기사로 소개된 사람에게도 사기꾼들은 손을 뻗친다. 그들이 사 달라는 책은 대개 '○○기자연맹' 혹은 '○○기자클럽', '○○기자협회' 등의 이름으로 발간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이나 방송의 기자들을 대표하는 단체는 '한국기자협회'다. 그러나 이들 사기꾼들은 '한국' 대신 '전국' '대한'을 집어넣거나, '협회' 대신 '연맹' '클럽' 따위를 넣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속인다. 절대 속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검찰과 경찰은 이런 민생침해 사범들, 제대로 기획수사 좀 해줬으면 좋겠다.


언론단체를 사칭해 이런 고가의 책을 팔아먹는 상술에 속지 마시길...


그러나 정작 문제는 실제로 버젓이 신문을 발행하면서 이런 짓을 하는 '사이비(似而非) 신문'도 많다는 것이다. 보통 책 한 권에 1만 5000원이나 2만~3만 원인데, 그런 신문은 '○○연감'류의 책을 하드커버로 만들어 15만~20만 원의 비싼 가격으로 팔아 수익을 올린다. 물론 이는 언론사의 전통적인 수익사업 중 하나다. 그러나 판매 방식이 주로 신문사와 관계에서 을(乙)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기관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사람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떠안기는 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아예 책부터 보내놓고 입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 이런 식의 강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경남도민일보도 2000년대 초반 이런 연감 사업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윤리상 이건 도저히 아니라고 판단해 딱 접었다. 지금도 출판업을 하지만 소비자가 납득하는 수준의 가격(1만~2만 원)이거나 아예 공익적인 콘텐츠는 비매품으로 배포한다.


고용노동부는 근로감독 좀 해라


황당한 '사이비 잡지'들도 있다. 우리가 월간 <피플파워>를 창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아예 정기구독자가 없는 잡지도 있다. 구독자 없이 어떻게 운영하느냐고? 잡지에 실린 사람들에게 수백 권씩 구입을 강요(또는 애걸)해서 연명하는 것이다.


잡지 기자는 지역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에 선행이나 미담, 수상 소식이 실렸던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후, 자신의 기사가 실린 잡지를 몇 권이나 구입하겠느냐고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대개 300권이나 500권을 산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인터뷰이(interviewee)가 끝내 책을 사지 않겠다고 하면 아예 그의 기사를 쓰지 않는다. 사겠다는 사람만 책에 실으니 매호 몇 권을 인쇄해야 할 지 수요가 확실하고, 손해 볼 일도 없다.


물론 우리 <피플파워>도 잡지가 나온 후 10권, 20권, 많게는 100권 넘게 구매를 요청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해 정기구독자보다 좀 많이 발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절대로 책 구입을 요구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레 그런 걸 우려해 취재 자체를 거부하는 분들도 종종 있다. 이 또한 '사이비 언론'의 폐해다.


그런 신문사나 잡지사는 대개 기자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아예 '무보수 명예(?)직'으로 기자를 부리는 곳도 있다. 월급을 주더라도 기자에게 '신문 구독료'나 '판매 대금'을 강제 할당해 월급에 육박하거나 초과하는 대금을 회사에 의무 납입토록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기자들은 뭘로 먹고사느냐고? 광고 수당이나 판매 수당 또는 촌지나 뇌물로 산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악덕기업 근로감독 좀 해줬으면 좋겠다.


사이비언론 피해 사례 제보받습니다.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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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성서 굽어보니 숨통까지 탁 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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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4)김해시

 

김해 지역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은 화포천에서 시작했습니다. 11월 19일 아침 10시 30분께 마흔 명 학생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고향 봉하마을에서 습지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갔습니다. 탐방로 한 바퀴는 따뜻하면서 시원했습니다.

 

키 큰 갈대가 지천으로 널린 그 너머로 바람이 불었고 학생들 걷고 얘기하는 소리는 오리와 기러기 같은 철새들을 날아오르게 했습니다. 가로로 넓게 펼쳐진 습지에 균형을 맞추려는 듯, 세로로 높이 치솟은 양버들 가까이에서는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답니다.

 

 

돌아와서는 어느새 봉하마을 명물이 된 봉하테마식당 걸쭉한 국밥을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운 다음 김해민속박물관으로 걸음했습니다. 대성동고분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등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옛적 김해평야의 드높은 생산력을 입증하는 농경 유물들이 주로 나앉아 있답니다.

 

 

다음은 율하리·관동리 유적공원. 2008년 당시 손수 발굴했던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율하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대표적이랍니다. 곳곳에 있는데 작은 돌들을 촘촘하게 박아두른 영역 표시가 독특합니다. 둘러싼 영역이 클수록 거기 고인돌 아래 묻힌 인물은 지위가 높다고 합니다.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솟대의 기둥 자리'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있는 '소도'(=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지역)의 원형일 텐데 신들의 영역인 고인돌 지역 들머리에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 돌 셋 있는 사진이 솟대 자리.

 

관동리는 율하리 바로 옆동네입니다. 김해평야보다 더 내륙인 여기서 가야 시대 항구 유적이 발견됐습니다. 예전에는 여기 일대가 바다고 갯벌이었다는 얘기지요.

 

최헌섭 원장(오른쪽)이 옛적과 지금의 바다 지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동리유적공원전시관.

 

낙동강 끄트머리 김해의 가락국은 낙동강과 바다의 물길을 활용한 교역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습니다. 바다에 잇댄 나루터와 창고 자리, 민가 유적, 아직도 바퀴 자국이 뚜렷하게 남은 도로 따위가 관동리에서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옛적 도로의 모습.

 

최 원장은 1500~2000년 전 도로와 나루 유적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는 무슨 공공건물을 짓느라 땅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망가지면 다시는 복원하지 못하는데, 눈앞 이익에 눈먼 개발은 이토록 거침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김해에 이런 소중한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알게 된 데 대해서도 어이없어했지만, 이런 유물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는 더욱더 어처구니없어했습니다.

 

이어서 분산, 분산성에 올랐습니다. 여기 마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드넓은 김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얼마나 자주 왔는지 물었더니 대답이 허망합니다. '한 번도 없다'가 대다수였고, '온 것 같은데 하도 오래 돼 기억이 없다'가 몇몇 있었을 뿐이었거든요.

 

 

늦가을 단풍 자취가 남아 있었던 덕분인지 군데군데서 감탄하더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전경에서는 '우와!' 소리를 합동으로 냈습니다.

 

최 원장이 "저기는 수로왕릉, 저기는 봉황대, 저기는 서낙동강…" 이렇게 짚어나갔는데 좀 있다가 보니 학생들 모두가 자기 아는 데랑 사는 집이랑 다니는 학교를 꼽아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반짝이고 입가에 웃음이 맺히며 내어뻗는 팔에 신명이 넘쳐납니다. 가야시대 이래 역사·유물·유적이 넘치는 김해이기도 하지만 여기 학생들에게는 생동하는 삶터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드락 숲길을 지나 왼쪽으로 휘어지는 산성을 따라 걸었습니다. 김해로 귀양왔던 고려 선비 포은 정몽주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옛 산성을 넓고 크게 고쳐 쌓았다. … 천 길 깎아질렀으니 한 사람만 지켜도 만 명이 당할 수 없겠다."

 

왜구 분탕질 탓에 쌓은 산성인데 분산 마루 만장대(萬丈臺)를 타고봉(打鼓峰)이라 하는 데서도 이런 사정이 짐작됩니다. <김해읍지>는 "왜구가 쳐들어오면 북(鼓)을 쳐서(打) 주민들로 하여금 분산성으로 들어오도록 해서 난을 피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저녁 먹을 차례. 만장대농원이랍니다. 앞서 주인을 만나 '우리 고장 사랑 역사 문화 탐방' 취지를 말하고 밥값 예산이 충분하지 않은 데 대해 의논을 했더랬습니다. 그랬더니 "김해 아이들 먹이고 지역을 알자는데, 덜 벌어도 된다"며 기꺼이 장만하겠노라 해줬습니다. 무척 좋고 화끈한 분이었습니다.

 

 

종일 돌아다닌 아이들은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그러나 만장대농원 닭백숙은 푸짐해서 솥이 끝까지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답니다. 다 먹고 나서는 과일 조각도 후식으로 내놓는 푸짐한 인심을 보였습니다.

 

이어서 친구들은 한옥체험관에 짐을 풀고 조금 쉬었다 김해천문대로 향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문대가 여럿 있지만 도심 가까이 자리잡은 데는 김해뿐이라고들 합니다.

 

천문대에서 학생들은 갖은 감탄사를 아낌없이 쏟아냈습니다. 내려다보는 김해 야경이 그지없이 좋았던 덕분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지난 고등학교 3년 동안, 이런 밤풍경은 한 차례도 눈에 담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김해천문대에서 보는 김해 야경.

 

김해천문대는 기본이 되는 별자리와 계절에 따라 다른 별자리 찾는 방법을 가상 체험으로 재미나게 일러줬습니다. 가상 하늘과 가상 별자리를 불빛으로 일러줄 때마다 친구들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관측장은 지붕이 뚜껑처럼 열리는 것부터 신기했습니다. 이날 11월 19일은 음력 열이레였는데, 달 보기에 알맞았습니다. 친구들은 천체망원경으로 달 표면 곰보딱지까지 실감나게 볼 수 있었답니다.

 

첫날 일정이 마무리됐지만 학생들은 쉬 잠들지 않았습니다. 학교가 달라 조금 어색했던 처음 분위기가 많이 가셔졌기 때문입니다. 새벽 1시 넘어까지 군것질도 하면서 말을 섞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옥체험관 꽃담장.한옥체험관 굴뚝

이튿날 일정은 단순했습니다. 한옥체험관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우리 고장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을 진행했습니다. 정답을 맞히는 친구가 예상보다 많지 않아 선물로 준비한 상품권이 조금 남았습니다.

 

 

 

그래서 소개를 겸한 토론을 뒤이어 진행하면서 남은 상품권을 풀었습니다. 자기를 춤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영어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해 구석구석 돌아보니 처음 예상과 달리 재미있었다는 얘기, 분산성·천문대가 기억에 남는다는 얘기, 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여행은 처음이라는 얘기…….

 

 

마당에서 전통놀이·떡메치기·전통장식만들기 체험을 한 다음, 바로 옆 석정숯불갈비에서 점심을 먹고 다들 헤어졌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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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준 떨어진 장사도만큼 동백이 멋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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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부터 창원교통방송 라디오에 출연을 하게 됐습니다. 무슨 ‘여행 코치’라면서, 우리 경남에 있는 가 볼만 한 데를 금요일마다 오후 5시 40분 어름부터 5분 남짓 소개하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철에 걸맞게 동백꽃을 잘 구경할 수 있는 데를 올렸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고요~~ 그 자회사로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해딴에’는 탐방과 기행, 마을 만들기, 도랑 살리기, 자원봉사와 여행의 결합, 스토리텔링콘텐츠 개발·제작 같은 일을 잡다하게 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애청자들의 여행 코치가 돼 주실 텐데 어떤 각오로 임해주실 건가요?

 

공곶이 동백터널. 가을에 찍은 사진이라 꽃은 없습니다.

 

<즐거운 라디오> 애청자 여러분께 우리 경남의 좋은 여행지를 나름 열심히 소개해 드릴 텐데요, 무슨 ‘코치’라기보다는 동반자 또는 동행 가운데 한 명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더 좋은지 이런 말씀들 한 번 드려볼까 합니다. 같은 지역 같은 문화재라도 어떤 자세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거기서 받는 느낌이 상당히 달라지거든요.

 

#그렇지요. 오늘은 첫 시간인데 우리 지역 어디로 여행을 떠나보나요?

 

예, 계절이 계질인 만큼 오늘은 동백꽃을 잘 볼 수 있는 데 거제 이곳저곳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어제 끝마쳤지요? 김수현과 전지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말씀입니다.

 

거기 19회 방송분에 보면 독극물이 든 와인을 마시고 쓰러진 천송이를 도민준이 안고 뿅 사라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 갖고 갑자기 툭 떨어지는 데가 바로 동백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는 섬인데요. 바로 장사도입니다.

 

지심도 떨어진 동백꽃.

 

장사도는 입장료를 따로 8500원을 받는 해상공원으로 통영 또는 거제에서 배삯을 따로 줘 가면서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돈을 더 쓰지 않고도 피어나는 동백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데가 거제에 여럿 있습니다. 먼저 공곶이입니다.

 

# 공곶이라고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주는데요.

 

공곶이는 강명식 어르신 부부가 수선화와 종려나무와 선인장과 동백 등을 가꿔온 데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바닷가 언덕배기이기만 했지만 50년 넘는 세월 사람 손길이 더해지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절에는 푸르게 반짝이는 동백잎과 다소곳하게 고개를 수그린 동백꽃이 함께 어우러지는 관광 명소가 됐습니다.

 

지심도 동백꽃.

 

여기에다 바닷가 몽돌과 바다와 바람이 더해져 훨씬 더 크게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동백으로 터널을 이룬 곳도 있는데요, 이런 데 들어서면 낮에도 조금은 컴컴한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바닷가에서는 언제나 대체로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주는데요, 봄이면 막 새 잎이 돋기 시작하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함께간 친구랑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도 새삼스럽게 좋습니다.

 

강명식 어르신 내외는 지금도 일하시는데요, 갔다가 마주치시거든 웃음과 함께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 거제에는 공곶이 말고도 동백이 좋은 데가 더 있다고 하던데요~~

 

지심도 흙길.

 

그렇죠. 동백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데가 바로 지심도입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마치 한자로 쓴 마음 심(心)자 같다고 해서 지심도라 이른다 합니다. 지심도는 그야말로 동백 섬입니다. 동백으로 빽빽하게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여기 동백은 사람들이 갖다 심은 그런 나무가 아니고 모두 저절로 나서 자란 야생 동백입니다. 그래서 잎사귀도 그다지 크지 않고 꽃송이도 자그마합니다. 또 사람이 개량한 자취도 없으니까 꽃빛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편입니다.

 

거제 남쪽 끄트머리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데요, 장사도 같이 입장료를 따로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시설물도 없어서, 오히려 자연 상태 동백을 즐기기에는 더욱 나은 데가 지심돕니다.

 

그리고 동백에 그 자체에 매이지 말고, 다른 꽃들, 다른 나무나 풀들도 많으니까, 두루두루 둘러보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시면 더욱 좋습니다.

 

# 지심도는 야생 동백이 무척 많은 모양이네요. 혹시 지심도 가는 길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으면 좀 일러주시죠.

 

지심도 흙길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 2012년 4월에 찍은 사진이지 싶습니다만.

 

예, 지심도는 거제에서 보면 바깥 바다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배가 출항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까 출발하기 전에 미리 알아보실 필요는 있겠습니다.

 

바람의 언덕 동백을 하나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람의 언덕은 말 그대로 바람이 주인공인데요. 커다란 풍차도 들어서 있는 여기 언덕배기에 오르면 언제나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을 맞으며 자라난 동백이 언덕에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름이나 가을에 가면 동백에서 떨어진 열매를 줍는 이주민 여성을 만나기도 하는데요, 지금은 가면 열매 대신 꽃들이 사람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찾아 가시면 어쩌면 조금 일러서 꽃들이 활짝 핀 동백을 보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지난주보다는 많이 피어났을 텐데, 22일 찾아갔을 때는 한 20% 정도 꽃이 망울을 터뜨린 느낌이 들었어요. 3월 첫째 주말이 가장 좋을 듯한데요,

 

가능하다면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찾으면 훨씬 조용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주말에 찾을 수밖에 없다면 아무래도 사람 인파 자체도 구경거리로 삼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부담 없이 불평 없이 돌아볼 수 있다는 정도는 새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심도.

#오늘 첫 시간 함께 하셨는데 어떠셨나요, 소감?

 

이렇게 소개해 드릴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고맙기도 하고요~~

 

여기까지가 방송 원고입니다. 여기에 이월춘 시인이 쓴 '지심도' 전문을 덧붙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인데요, 그래서 오히려 더욱 가 보고 싶어지도록 만드네요.

 

 

은쟈 봄에는안 갈란다

동백섬 지심도 안 갈란다

얻을 거보다 잃을 거 더 많은

붉은 나이를 보는 거 같아서

모가지 뚝뚝 부러진

길바닥의 저 슬픔 보기 싫어서

담방담방 물수제비뜨는 바닷새들

파도의 지루함 사이로 섬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막 던져주는 자기 연민이,

한사코 밀어넣는 감정이입이 정말 싫어서

은쟈 봄에는 지심도 안 갈란다

두려움의 다리를 건너 용기를 배운다는데

웬 슬픔이 저리도 흔해 빠졌는지

참말로 은쟈 지심도 안 갈란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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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문화동 벅수가 남자인 증거 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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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5) 통영시

 

통영의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은 2013년 11월 26일과 27일 이틀 진행됐습니다. 첫 걸음은 삼도수군통제영 시절 형성된 '열두 공방(工房)'을 통해 400년 넘게 작품을 생산해내 통영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못한 '옻칠'을 품은 '통영옻칠미술관'으로 향했답니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은 1935년생으로 옻칠 공예를 지키고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예술로 자리잡게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옻칠은 아직 본고장에서조차 제대로 대접 못 받고 있습니다.

 

김 관장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른들이 옻칠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는 때문이라 여깁니다. 제도교육의 정규 교과 교육과 특기·적성 교육은 물론 사교육에서도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김성수 관장이 학생들에게 옻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 관장은 오전 10시 조금 넘어 미술관을 찾은 마흔 명 어린 손님들을 아주 감격스러워하며 맞았습니다. 작업하다 그대로 나온 듯한 차림으로 김 관장은 자상하고 정성스레 얘기하고 작품까지 보여주면서 옻칠의 특징과 장점, 역사 등을 들려줬습니다.

 

"옻칠은 향기가 뛰어나고 썩지 않게 하며 해로운 벌레를 쫓아요. 또 옻칠이 중국 소산이라고 많은 이들이 여기지만 실은 우리것이지요. 창원 다호리처럼 청동기 시대 무덤에서 옻칠한 나무가 나온답니다." 등등.

 

아이들로서는 모두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이 어린 손님들은 관심을 보이며 여러 옻칠 예술 작품들을 그윽하게 들여다봅니다. 생활용품으로 쓰임직한 소품들 앞에서는 귀여워하는 웃음도 빼물고요……. 좀더 있다 가라고 아쉬워하던 김 관장은 아이들이 탄 버스가 떠날 때까지 바깥에서 손을 흔들었었습니다.

 

이어 봉평동 '오미사꿀빵'을 찾아 하나씩 베어 물었습니다. 통영에는 꿀빵이 유명하고 으뜸 자리에 오미사가 있답니다. 오미사라는 이름은 무엇에서 비롯됐을까요?

 

 

대부분 빵집 이름으로 알지만 아니고 원래는 빵집 옆 세탁소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빵집에는 간판이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세탁소 이름을 빌려 오미사꿀빵이라 했답니다. 그 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탁소 오미사는 없어지고 빵집이 오미사 이름을 이어 달았던 것입니다. 통영적십자병원 뒤편 골목에 허름한 차림으로 그 본점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큰 제승당과 그 앞자리 문화동 벅수도 찾았습니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미션식'으로 진행했지요. 문화동 벅수가 남자라는 증거 네 가지 찾기, 제승당 경내에서 평화를 상징하거나 기원하는 글귀 두 개 찾기, 그리고 제승당이 당시 통제영에서 중심 건물이었음을 입증해주는 부위 찾기…….

 

세병관. 세병은, 무기를 씻어 둔다는 뜻.지과문. 지과는, 창을 거둔다는 뜻.

 

미션 수행을 위해 문화동 벅수 앞에 선 학생 둘에게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통영 학생들도 여느 다른 지역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장을 아주 잘 아는 듯이 굴었겠지요. 그런데 결과는 신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미션을 즐기는 가운데 지역 속살을 좀더 알게 됐습니다.

 

통영서 이름난 먹을거리 가운데는 멍게비빔밥도 있습니다. 항남동 국민은행 뒤편 ‘멍게가’는 깔끔하고 맛있는 밥집인데 통영 비싼 물가를 고려해 남들이 무어라 하기 전에 스스로 밥값을 1000원 낮추기까지 한 식당이랍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박경리기념관과 삼덕항·당포성지를 둘러봤습니다. 통영 고3들은 당연하게도 박경리를 알고 있었고 박경리기념관에 와 본 학생들도 많았답니다. 그런데 뒤편 박경리 선생 무덤까지 찾아 본 친구는 없었습니다.

 

박경리기념관에서.

 

박경리기념관을 지나 박경리 선생 산소로 가는 길목에서.

 

 

양지바른 데 자리잡은 무덤은 거기서 내려다보는 풍경 또한 아주 좋습니다. 아이들은 여태까지 이 정경을 보지 못한 것이지요. 무덤 맞은편 오른편 산기슭과 그리로부터 미끄러져 내려가 왼편 아득한 바다까지 한 눈에 담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이렇게 멋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박경리 선생 산소 있는 데서.

 

기념관 잔디밭에서는 노루꼬리 오후 햇살을 활용해 '우리 고장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을 진행했습니다. 문제 맞힌 즐거움과 맞히지 못한 아쉬움이 엇갈리는 가운데 끄트머리에는 놀이까지 진행했답니다. 덕분에 기념관 잔디밭의 오후 한 시간 남짓은 어린 손님들 함성으로 가득찼습니다.

 

우리 고장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

 

삼덕항에서 길라잡이로 나선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맞은편 장군봉에 대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삼덕항 일대가 중요함을 알려주는 유적이 장군봉 꼭대기 당집이고 삼덕 고갯마루와 나루 벅수라고 일러줍니다. 안녕과 번영을 비는 이런 시설이 아무데나 들어서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당포성에 올라 삼덕항을 바라보는 학생들.

 

 

학생들은 당포성에서 많이 즐거워했습니다.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람이 좋았나 봅니다.

 

 

장군봉은 여기가 군사 요지임도 아울러 일러준다고 했습니다. 단박에 사방이 한 눈에 장악되는 자리이거든요. 뒤편 당포성지는 고려말 최영 장군이 왜구를 막으려고 쌓았다는 얘기가 있고, 이순신 장군은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왜선 스물한 척을 깨뜨렸으며 왜병 250명 남짓도 무찔렀습니다.

 

그런데도 삼덕마을에 사는 셋만 빼고는 여기 와 본 학생이 없었습니다. 즐거움은 작지 않았습니다. 재게 걸어 올랐어도 바람이 시원해 땀이 나지 않을 정도였고요, 바라보는 바다와 산과 섬과 배들은 때때로 나서거나 잦아들었답니다.

 

당포성을 들렀다가 자드락 오솔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아이들.

 

내려올 때는 성곽 뒤편 마을 쪽 오솔길과 사람 사는 자취를 좇았습니다. ‘최초의 서양 도래인(渡來人) 기념비’도 둘러봤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조선 시대 국경 일지인 <등록유초(謄錄類抄)>에 '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로 적혀 있는 주앙 멘데스가 주인공입니다. 임진왜란 끝난 직후인 1604년 일본 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여기 앞바다로 흘러들었습니다.

 

첫날 탐방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도남식당서 끼니를 잇고 통영시청소년수련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간단하게 씻은 뒤 모여 통영 출신 예술인이 많은 까닭을 짧은 시간 함께 생각해 봤습니다.

 

요지는 첫째 물산 풍부 둘째 아름다운 자연풍광 셋째 전통 깊은 통제영 열두 공방 따위였습니다. 이런저런 설명이 뒤따랐는데, 그럴 듯한 내용이었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서포루로 올라가는 학생들.

 

11월 27일 이튿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를 대비해 전날 프로그램을 많이 소화한 터였습니다. 남은 일정은 서문고개 골목문화 탐방. 아침을 먹고 서포루에 올라 통영길 문화연대 송언수 사무국장과 설명을 나눈 다음 골목을 찾아나서니 바로 비가 내립니다.

 

뒤편 북포루, 앞쪽 바다, 오른쪽 동포루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서포루를 끼고 한가운데 들어앉은 통제영 세병관이 후줄근해 보입니다. 다들 서둘러 남옥식당에 모였습니다. 점심도 먹을 겸해서 해물탕으로 이름난 여기를 집결지로 삼았었더랬습니다.

 

 

팀을 이뤄 완성한 탐방 지도를 설명하는 모습.

매직펜과 사인펜으로 4절 크기 종이에다 서문고개 일대 지도를 그리고 나름 발표하고 설명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내리는 비 탓에 분위기가 조금은 어수선했지만 배불리 먹고 헤어지는 학생들은 입가에 웃음을 베어물고 있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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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경험을 세상과 나누는 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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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경남에서 알아주는 고고학자입니다. 올해로 29년째이니 중견이라는 말로는 어쩌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

 

당장 소득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자기가 갖춘 지식과 경험을 지역 사회와 나누고 있습니다. 별다른 조건 없이 지역 사회가 요청하면 그대로 응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오늘날과 옛날의 지역 사회 모습을 찾아내어 기록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자취를 찾기 어려워지는 옛길과 4대강 사업으로 하루하루 원형이 무너지던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는 것이랍니다.

 

 

2009년까지와 2009년부터

 

최 원장에게는 2009년이 분기점이었습니다. 전에는 이런 일들을 하고 싶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남도의 공식 도정 연구기관인 경남발전연구원 소속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있는데, 경남발전연구원에는 역사문화센터가 있어요. 발굴 등 문화재 조사·연구를 하는데, 2000년 즈음 들어가 조사연구부장을 거쳐 마지막 3년은 센터장을 하다가 2009년 그만뒀습니다. 잘 나갔지요. 한 해 매출액이 60억원 수준에 이를 때도 있었으니까요.

 

 

왜 그만뒀느냐고요? 센터장이 되면 연구원 지침을 따라야 하거든요. 지침을 따르는 것은 좋은데 그게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고 원장이 바뀔 때마다 틀도 바뀌었어요.

 

까닭은 원장 채용 방식에 있습니다. 김혁규 도지사 시절까지는 원장을 형식적이나마 공채로 뽑았는데, 2004년 김태호 도지사가 들어서면서 임명제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나쁜 전통이 돼 갖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0년 당선된, 그나마 민주적이라는 김두관 도지사가 아쉬운 것이, 임명제를 그대로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 나서 공채로 바꾸기 바랍니다. 임명제는 원장 임기도 보장이 안 됩니다.

 

게다가 사무국장은 도청 간부 공무원 가운데 은퇴를 1년 정도 앞둔 사람이 와서 합니다. 사무국이 흔들립니다. 원장 오고 사무국장 따로 오고 어긋나게 임명돼 들어오면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임명돼 오는 원장 체제 아래에서 업무 말고 다른 요구를 하고 해서 불만이 있었던 데 더해 4대강 사업이 낙동강을 뒤집어 바꾸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같은 2009년이었습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될 때, 이런 걱정을 했어요. 4대강 사업 현장 문화재 조사 사업을 무슨무슨 문화(재)연구원 같은 민간 법인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면, 역사문화센터가 준정부 기관이니까 해야 할 텐데, 나는 하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말입니다. 신분이 준공무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 동의를 얻어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민간인 신분 연구원들이, 돈 되니까 다해 버렸어요. 정치권은 물론이고 환경·시민단체들이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격렬하게 내고 있었고, 그래서 연구원들이 절반 정도는 치열하게 싸우고 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낙동강 유역권 연구원 가운데 거기 안 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들 발굴 조사를 연구가 아니라 돈으로, 사업으로 보는구나’ 싶었지요. 물론 이해는 됩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만으로 모두 정당화되지는 않는 노릇이지요.

 

4대강 사업을 하면 ‘현상 변경’이 됩니다. 현재 이렇게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는 것이 바로 역사인데 이것을 아무도 기록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낙동강 전역을 모두 하고 싶었지만, 능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경남만이라도 하자, 싶었지요.”

 

옛길과 낙동강에 대한 공부와 기록

 

최 원장은 이듬해인 2010년 3월 <자여도-세월을 거슬러 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냅니다. ‘자여도(自如道)’는, 창원 동읍에 있던 자여역을 중심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조선 시대 옛길을 이릅니다.

 

자여역을 비롯해 근주·창인·대산·신풍·파수·춘곡·영포·금곡·덕산·생법·적포·안민·보평·남역 등 15개 역과 그런 역들을 잇는 길이 있었습니다.

 

 

<자여도> 첫머리는 당시 상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자는 지난해(2009년) 가을에는 세상에 나왔어야 했다. 책을 마무리해 갈 즈음에 한가위를 맞았고, 그 무렵 온 나라가 4대강 사업으로 들끓고 있었다. …… 몹쓸 사업으로 강의 경관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기에 마음은 벌써 내 삶터 주변만이라도 기록하라고 종종대었다. 서둘러 나서지 않으면 물가의 경관은 원래의 모습을 잃을 터, 일을 덮고 강바람을 맞으러 나섰던 까닭에 이제야 출판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눈물겨운 장면들

 

최 원장은 처음에는 현장을 몸소 걸어다니며 보고 듣고 기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이 보폭을 맞춰주지 않았습니다. 속도전이 붙어 도저히 걸어서는 따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원장은 결국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했습니다.

 

“눈물 나는 장면도 많았습니다. 농사짓는 이들이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개인 최헌섭일 뿐인데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둔치 농지에서 쫓겨나게 됐다고요. 둔치에서 1만평 하던 사람이 제방 너머 농지는 1000평도 못 빌린다는 것입니다.

 

소유권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있는 둔치를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조그만 보상을 받고 쫓겨나다 보니까 제방 너머 농지는 수요가 많아져 임대료가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토지 소유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임차농은 다시 가난해지는…….

 

김해시 대동면 매리에서 산딸기 농사를 하는 이를 만났는데, 심은 지 5년은 돼야 열매가 제대로 열리는데, 막 그렇게 될 즈음에 쫓겨나게 됐다고요. 싸구려 보상금을 갖고는 10분의1도 농지를 얻을 수 없으니까.

 

김해시 대동면 조눌리에서 만난 쌈채소를 하는 할머니는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뉴트리아를 수달로 착각하고 사진을 찍다가 그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뉴트리아라고 했습니다. 저게 농토를 망치고 둔치를 망친다 했습니다.

 

그러더니, ‘진짜 망치는 사람은 이거(4대강 사업) 하는 사람이다, 제발 힘 있는 사람이 이걸 좀 말려달라’고 사정을 하더군요. 할머니 저 힘없습니다. 대신 본 것을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리 말할 수밖에요.”

 

 

이런 답사와 기록은 최 원장이 2010년 3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경남도민일보에 ‘낙동강을 품는다’는 제목으로 26차례 글을 연재하는 바탕이 됐습니다. 최 원장은 첫 글에서 ‘저와 함께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강이 가진 참 모습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느끼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최 원장은 이렇게 안정된 직장과 넉넉한 보수를 포기했습니다. 대신 몸소 발품을 팔아 건져올린 소중한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단행본 <자여도>가 그렇고 경남도민일보 연재물 ‘낙동강을 품는다’가 그렇습니다. 2011년 연재를 시작해 지금껏 56회까지 이어온 ‘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도 있습니다.

 

최 원장은 <자여도>에서 “옛 역도와 각각의 역을 잇는 길에 대해 조사·정리하기 시작한 지 벌써 다섯 해가 더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에 이처럼 옛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셈이 됩니다.

 

최 원장은 “앞으로 황산도-소촌도-사근도를 걸으며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의창사회교육센터에서 그 구성원들과 함께 소촌도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두류재·두류문화연구원과 ‘두루두루’

 

연구원 2014년 시무식. 두류문화연구원 홈페이지에서.

 

대가는 치러야 했습니다. 아내한테 벌이가 있어서 살림을 책임져야 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1년 남짓을 수입이 없이 견뎌야 했습니다. 최 원장에게는 그 때가 가장 가난한 시절이었답니다. 물론 집에서 돈을 타서 생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창원 북면 신촌마을에 허름한 사무실을 하나 얻었어요. 이따금씩 생기는 발굴·조사 관련 회의에 참석해 회의비나 수당 받아서 월세 내고 밥값 대고 기름값 쓰고 했지요. 당시 팔룡동에 집이 있었는데요, 자전거로 출퇴근했습니다.

 

용강검문소 있는 고개가 길고 가파르잖아요. 말은 건강에 좋으라고 자전거 탄다고 했지만 교통비 아끼려는 목적도 있었어요. 처음에는 단번에 넘을 수 없었어요. 나중에 허벅지 근육도 탄탄해지고 나서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넘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탕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평생 못 읽은 책을 그 때 다 읽었지요. 스스로 긴장을 늦추지 말자는 뜻도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은 정시에 했고, 손님이 찾아오거나 다른 약속이 없는 이상은 저녁 8시나 9시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최 원장은 당시 혼자서 외롭게 지키던 그 사무실에 두류재(頭流齋)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 그리고 그 지리산을 좋아했던 남명 조식을 뜻한답니다. 남명 선생은 최 원장이 사표(師表)로 삼고 있는 인물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두루두루’라는 뜻도 있어요. ‘소통’이지요. 학문을 하는 데서는 옹색하게 한쪽으로만 갖고 나가지 말자는 얘기지요. 깊이는 얕아질는지 모르지만 한국학 전반으로 넓히자는 취지입니다.

 

또 저마다 갖고 있는 바를 ‘두루두루’ 나누자는 것도 됩니다. 우리 집단에서 다른 집단과 두루두루 말입니다. 저희 연구원 건배사도 그래서 ‘두루두루!’입니다.”

 

지역 사회를 위하고자 하는 연구원

 

지금 그이가 운영 책임을 지고 있는 두류문화연구원의 두류는 뿌리가 두류재입니다. 2010년 9월 3일 만들어진 재단법인으로 김해에 있는데 이듬해 1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발굴조사 전문 기관으로 인정받았답니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자격이 생겨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신생 기관이라 그런지 사정이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 친구들이 찾아왔어요. 다른 연구원에 있던 친구들이지요. 자기가 소속돼 있는 연구원의 대표들이 자기가 애써서 벌어놓은 돈을 다른 데 쓰는 것 같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발굴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원장이 마음대로 처분한다고 말입니다.

 

벌어들인 돈을 자기네 생각하는 바대로도 고루 쓰이면 좋겠다는 그런 뜻으로 왔어요. 저말고 다른 사람도 찾아갔겠지요. 그런데 배짱이 맞지 않았던 것 같고, 또 자기네끼리만 해서는 될 것 같지 않은데다가, 적어도 최헌섭이는 혼자 뜻대로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도 했겠지요.

 

단지 발굴해 돈만 버는 데서 벗어나, 지역 사회를 위하는 일이나 학술 연구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저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여기고는 있었어요. 한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그 때까지 가족들이 잘 참아줬습니다.”

 

답사·강의는 물론 감밭과 지하 공간 내놓기까지

 

최 원장은 이런 상황에서 지역 사회를 위해 자기를 내어놓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경남정보사회연구소에서 답사를 이끌기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보수를 받는 일이 아니고 때로 무료로도 한답니다.

 

지역 역사 등을 공부하는 주민 모임도 꾸리는 중입니다. 부친이 터잡고 사시는 창원시 동읍 용전마을 감나무밭이랑 논밭도 활용하라 내어놓고 나아가 가음동에 있는 자기 집 지하 공간도 지역 사회를 위해 거저 제공할 뜻이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전략입니다. ‘최헌섭’ 하면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항상 이렇게 인식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큰 기업들처럼 광고를 하고 다닐 수 있겠어요? 이런 식으로 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바지하고 살지 못하면 그게 사람이 할 일입니까? 알고는 싶은데 그 길을 몰라서 쩔쩔 매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능 기부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부분이니까요. 역사 수업 강의나 영화를 통해 역사를 읽어보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많이 배웁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독서해야 합니다. 저도 공부 안 하면 모르거든요. 그리고 제가 먼저 나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역 사회에서 요구해 오면 그에 대응해 주는 정도라고 할까요?

 

감나무 한 그루당 일정 금액을 받고 한 해 동안 가꾸고 감을 수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손해는 아닙니다. 감나무도 좀 의미 있게 나누면 좋겠다 싶고, 논밭도 주말농장이나 체험공간으로 활용해 도시와 농촌이 함께 득보는 식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두류문화연구원 홈페이지에서.

 

가 경남정보사회연구소 이사를 맡은 지가 꽤 됐는데, 연구소가 금전에 엄청나게 구속을 당합니다. 한 달 회비 1만원씩 갖고는 안 됩니다. 분양한 감나무 한 그루에 1만원씩 기부를 합니다. 사람들 반응이 좋습니다. 앞으로 좀더 커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저희 집 지하 공간도 지금 당장 식당으로 세를 놓으면 재산이 불어나는 보람은 있겠지요.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의미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임대료는 나중에 수익이 생겼을 때 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나마 엄두를 내는 사람이나 단체가 없네요.”

 

땅 위에 나 있는 길만 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을 하는 방향이나 인생을 사는 방향도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최 원장은 이렇게 길을 연구·조사하는 한편으로 이처럼 자기 삶과 학문에 새로운 길을 내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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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가 거제가 아닌 통영이 될 뻔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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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6) 거제시

 

거제에서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빼놓기는 어렵습니다. 남해에서 특히 거제도 일대가 이순신 장군의 주된 활동 영역이었거든요. 2013년 11월 28~29일의 거제 지역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은 그래서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이 벌어졌던 견내량에서 시작됐습니다.

 

견내량(見乃梁)은 거제시 사등면과 통영시 용남면 사이에 있습니다. 길이 3㎞남짓, 너비 최대 400m 안팎으로 좁고 길다랗습니다. 여기서 이순신은 1592년 음력 7월 8일 학익진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한산도대첩'은 후세 사람이 붙인 이름이고요, 이순신이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에는 '견내량파왜병(見乃梁破倭兵)이라는 글귀가 있을 따름입니다. '견내량에서 왜병을 깨뜨렸나이다.' 일행은 거제대교를 건너 통영타워 꼭대기에 올라 견내량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산도대첩 당시를 머리로 그려 봤습니다.

 

기성관.

 

여기서 발길을 돌려 찾아간 데는 거제 관아. 기성관(岐城館)과 질청이 남아 있습니다. 객사로 쓰인 중심 건물 기성관은 정면 9칸으로 매우 크며 가운데 3칸은 지붕이 높다랗습니다. 그 모습이 우람하고 무척 인상깊습니다.

 

 

부속건물인 질청은 행정실 또는 도서관에 해당된답니다. 모두 27칸으로 ㄷ자형인데 고을 수령 자제들 강학 공간으로도 쓰였습니다. 하지만 동헌은 헐리고 그 자리에 거제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가배량성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흥미로운 거제 지역 문화재입니다. 여기에 원래 경상우수영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끝난 뒤에는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배량성에 오르는 학생들.

 

수풀이 우거진 동부면 가배리 언덕배기 마루금을 따라 별로 허물어지지 않은 채로 남은 가배량성에는, 하마터면 거제가 '거제'가 아니라 '통영'이 될 뻔했던 사연이 서려 있는 셈입니다.

 

지금 통영에는 3년 뒤인 1604년에야 통제영이 들어섰습니다. 학생들은 거제에도 통제영 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가배량성에서 최헌섭(가운데 등을 보이는 사람)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가배량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세포에 있는 밥집 대패나라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거제조선해양문화관을 둘러봤습니다. 거북선 등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 쓰인 배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삼성·대우 같은 세계적인 조선업체가 들어선 거제에 걸맞은 전시시설이었습니다.

 

거제조선해양문화관을 배경으로 삼고 찍은 기념 사진.

 

거제조선해양문화전시관을 둘러보는 학생들.

 

이어 찾은 옥포대첩 기념공원. 옥포대첩은 이순신 전라좌수사와 원균 경상우수사가 함께 싸운 해전으로 조선이 바다에서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이로써 왜군의 기세를 꺾고 전라도 곡창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하지요.

 

옥포대첩기념공원 옥포루에서 바라본 바다.

 

지금 대우조선이 있는 옥포만 일대에 기념공원을 지은 때는 1957년이랍니다. 판옥선 모양을 한 기념관과 옥포루·사당 등을 둘러봤습니다.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경과 불어오는 바람이 학생들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내줬답니다.

 

옥포대첩기념탑.

 

다음은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 칠천량해전을 다루는 칠천량해전공원. 여기 전시관에는 1597년 7월 있었던 전투가 재구성돼 있습니다. 조정·장군이 아니라 일반 수군·백성 관점에서 다룬 애니메이션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망대에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한 중년 부부는 "뭐 한다고 굳이 공원까지 만들어 진 싸움을 보여주나?" "그래 말이야, 참 성난다"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해설을 맡았던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바깥 전망대에서 학생들에게 달리 말했습니다.

 

칠천량해전-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죽었는데, 장수와 병사가 죽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일으킨 전쟁입니다. 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재현돼 조선을 일제가 강점했고 중국·러시아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도 참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우익 지배집단은 이런 시도를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칠천량해전 기념관.

 

일본 지배집단의 생각은 예나 이제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칠천량해전공원은 조선 수군의 유일한 이 패전을 통해 일본 지배집단의 속성을 역사적으로 일러주고 도발을 대비하도록 하는 공간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일행은 장승포동 밥집 멧돌순두부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는 노자산에 자리잡은 명물 거제자연휴양림으로 옮겼습니다. 동백 1~4호실에 10명씩 들어가 짐을 푼 다음 산림문화휴양관으로 모였습니다.

 

먼저 '재미있는 지역 이야기'를 통해 칠천량해전 패배의 장본인 원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진행했습니다. 원균이 지금 알려져 있는 대로 나쁜 인물일까를 두고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학생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영이 전멸한 상태에서 왜군을 막는 데 적극 나섰고 이순신과 공동으로 전투도 했습니다.

 

이순신은 초기부터 이겼는데 임진왜란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균은 1592년 1월 고작 3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돼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이순신은 왜군의 이간책에 넘어간 선조 임금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았으나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1월 파직됐습니다.

 

뒤이어 통제사가 된 원균 또한 같은 명령을 받고 실상을 알고는 출전을 미루다 거듭 독촉을 받는 바람에 나섰다가 칠천량에서 대패했습니다. 원균은 또 1594년 3월부터 줄곧 육전에 배치돼 1597년에는 해전에 익숙지 못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마지막, 임진왜란 1등 공신은 딱 세 사람이 책봉됐는데 이순신·권율·원균입니다. 따라서 원균이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인정되지만 무능하고 몹쓸 인간은 아니었고 나름 전공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이런 얘기에 쫑긋 귀를 기울였습니다. 몇몇 학생은 어이없어하며 사실과 달리 원균에 대한 나쁜 인식이 퍼진 까닭이 무엇이냐 따져묻기도 했습니다.

 

원인은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우상화 정책과 관련돼 진행된 원균 깎아내리기였습니다. 이순신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려고 경쟁 상대인 원균을 나쁜 놈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황포돛배 모형 등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모습.

 

학생들은 이어 '지역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과 게임 등을 진행했으며 일정을 마친 다음에는 저마다 주어진 방으로 옮겨 이번 탐방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나 관점을 두고 얘기를 나누고 즐겁게 놀았습니다. 졸업을 앞둔 고3에게 또래랑 함께하는 하룻밤은 여러모로 뿌듯한 추억거리였을 것입니다.

 

잔디밭에서 공 차기를 하는 모습.

이튿날 아침 학동해수욕장 경북식당에서 따끈한 찌개로 배를 채운 학생들은 영공방으로 옮겨 황포돛배와 사진 액자를 만드는 체험을 남녀로 나눠 진행했습니다. 아울러 다사로운 햇살 아래 공놀이도 즐기다가 거제 시내 돌산보리밥에서 점심을 먹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졌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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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홍준표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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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가 설립한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두 번째 책이 곧 나온다.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이다.


강기갑 전 국회의원, 강민아 진주시의원, 강병중 넥센그룹 회장, 고영진 경남도교육감,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 박영빈 전 경남은행장, 박완수 전 창원시장, 송정문 여성인권운동가, 이재욱 전 노키아티엠씨 회장, 조순자 인간문화재, 최충경 경남스틸 사장,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보다시피 이들 중에는 현직 정치인으로 곧 다가올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이 책에 담긴 특정 몇몇을 극도로 싫어하거나 심지어 증오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거나 '이 따위 인물의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느냐'며 원색적인 반감을 표현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도 굳이 책을 내는 까닭이 있다.


나는 지역신문 기자라면 당연히 지역의 역사, 그 중에서도 근·현대사를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그 결과 우리 지역의 현대사를 추적한 <토호세력의 뿌리>(2005, 도서출판 불휘)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자료와 기록물을 찾는 과정에서 지역사회를 지배해온 인물들의 면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고 아쉬웠다.


예를 들어 '김종신'이라는 사람을 보자. 그는 마산시장, 국회의원, 마산대학장, 마산문총(현 예총) 회장, 경남신문 사장, 마산문화방송 사장,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거치면서 마산의 행정권력, 정치권력, 교육권력, 문화권력, 언론권력, 경제권력을 모두 쥐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기록에서도 그의 인물됨이나 가치관, 철학, 성장과정, 가정환경 등을 알 수 있는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각각 기록의 편린들을 끼워맞춰 그가 해방 직전 일제가 임명한 마산부회(마산시의회) 의원이었음을 밝혀냈고, 해방 직후에는 미 군정에 의해 일본인 적산관리인으로 역할했으며, 한국전쟁 직전에는 국민보도연맹 사업부장으로서 민간인학살에도 연관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로서 싫든 좋든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람들의 면면과 면모를 기록해둘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물 중 하나로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혹은 그와 맞서 싸워야 할 사람일지라도 알고 싸우는 게 훨씬 유리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만일 기록이 없었다면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가진 자가 좀 더 양보하는 세상!

가지지 못한 자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세상!

그리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바른 세상, 세계 중심국가를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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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소가야는 ‘작은 가야’ 아닌 ‘센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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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7) 고성군

 

2013년 12월 5일 1박2일 일정으로 시작한 고성 지역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첫 방문 대상은 고성박물관과 송학동 고분군이었습니다. 좀 더 재미있게 박물관 탐방을 하기 위해 약간 색다르게 진행했습니다.

 

팀을 나눠 미션을 주는 방식이었지요. 4~5명씩 팀을 이룬 학생들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주어진 문제의 정답을 찾아 '미션 수행'을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정답을 찾은 학생들의 즐거운 함성이 울려퍼졌습니다.

 

미션으로 나간 문제는 고성박물관에서 꼭 봐야 하는 것들을 골랐답니다. '古'(고)자 토기와 새무늬 청동기가 그 대표 유물이지요.

 

고자미동국, 고자국, 그리고 고사포국.古라고 새겨져 있는 그릇.

 

현대 기하학 디자인처럼 아주 균형을 잘 갖춘 청동기인데요, 원형 그대로 남은 우리나라 유일한 유물로 옛적 사람들이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를 두고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유물들이 예사롭게 지나치던 고성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학생 대부분은 오늘 처음 알게 됐답니다.

 

새무늬청동기 탁본. 새를 한 번 찾아보세요. 모두 마흔세 마리랍니다.

 

교과서에는 고성을 옛날에 '소가야(小伽倻)'라 했다고 나오지만 여기서는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라 했다고 일러줍니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바로 '古'자 토기입니다.(사실 '소가야'라는 말은 여러 옛 문헌 가운데 <삼국유사>에서만 한 차례 나올 뿐입니다.)

 

고성 옛 이름이 무엇인지 미션 문제를 통해 자신이 나고 자란 고성의 뿌리를 새삼 확인하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송학동 고분군을 둘러본 일행은 다음으로 마암면 석마를 찾았습니다. 석마 마을 들머리 정자나무 아래에 놓여 있는 돌말 두 마리가 그것입니다. 아이들은 옮겨가는 도중 버스에서 설명을 들을 때부터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다들 ‘우리 고성에 이런 유물이 있었다니!’ 하는 표정이었답니다.

 

 

여기 석마(石馬), 돌말은 농경문화 한가운데 남아 있는 기마민족의 자취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돌말 유적은 우리나라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안내를 맡은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옛날 사람들에게 숭배 대상이 하늘에서는 새였고 땅에서는 말이었다고 일러줍니다. 말은 빠르고 귀했습니다.

 

 

그래서 제사 지낼 때 말을 희생해 바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희생마가 나오면 말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에 나무나 쇠·돌·흙으로 말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그 유물이 석마라는 얘기였습니다.

 

석마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이었을까요? 즉석에서 문제를 냈더니 맞히는 학생이 없습니다. “말이니까 당근 아니겠느냐?”는 답도 나왔는데 사실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바친 제물은 콩 한 말이었습니다. 말은 콩도 좋아하잖아요.

 

점심은 옥천사 절간 들머리에 있는 옥천식당에서 먹었습니다. 밥값이 비싸지 않으면서도 갖은 재료를 외국산이나 허드레를 쓰지 않습니다. 손수 길렀거나 고성에서 나는 물건만 쓰는 식당이지요. 고성 역사 문화 탐방을 한다면서 이런 식당을 놓치면 무척 아까운 노릇이 됩니다.

 

 

음식은 그 자체로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수저를 놀렸습니다. 세상에는 배고픔보다 더한 반찬은 없으니까요.

 

옥천사는 볼 것도 많고 새길 것도 많은 절간입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자방루랍니다. 자방루는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데 규모나 모양새가 대웅전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옥천사는 한때 군사훈련에 쓰이기도 했는데요, 자방루에 승병(僧兵) 3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옥천사의 규모나 가치가 짐작이 가고 남습니다.

 

오른쪽이 자방루.

 

아름다운 단청과 정교하게 잘 그려진 새 그림으로도 유명하답니다. 세월은 어김없이 자방루 단청에도 내려앉아 하나둘씩 새들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남아 있는 새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 남아 있는 새조차 다 날아가 버릴 때가 오리라 싶었습니다.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옥천각.

 

절간을 떠나 찾아간 학동은 담장과 집채가 옛적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입니다. 여기 일대는 상족암에서도 볼 수 있는 납작하고 편편한 돌이 많이 납니다. 그다지 단단하지 않아서 떼어내고 쪼개기가 쉽답니다.

 

 

그런 돌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것이 여기 담장이지요. 우리나라에는 돌담으로 유명한 곳이 많지만 학동 돌담은 모양이 매우 특별하다는 설명을 아이들은 최헌섭 원장으로부터 이날 처음 들었습니다. 늘 있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인데 온통 처음 듣는 이야기들입니다.

 

학림헌 주인 최영덕(왼쪽) 어른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왼쪽 건물이 학림헌입니다.

 

옛날에는 목간통 들여놓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는 학림헌 아랫도리 고방.

 

물때를 맞춰 찾아간 상족암은 수없이 많은 세월이 파도를 빌려 바위에 새겨놓은 무늬로 장관을 이룹니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차올라 건너갈 수 없는 데입니다. 몇 번씩 왔었지만 물때를 맞추지 못해 상족암에 있는 선녀탕이나 쌍발은 처음 보고 만져본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상족암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습니다.

 

상족암에서, '셀카질'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보기만 해도 즐겁지 않으신가요?

 

 

 

상족암 바다를 온전히 누리고 해변을 따라 돌아나온 일행은

 

 

아이들이 '귀여운 척'을 하고 있습니다.

 

주차장 너른 터에 모여 '지역 역사 도전 골든벨!'을 했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공부보다는 노는 것이 좋습니다. 지역 역사를 책상에 앉아 공부한다면 이렇게 신나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싶을만큼 열성적이었습니다.

 

상족암 주차장에서.

 

마지막 몇몇만 남았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일정을 마치고는 '흙시루'에 짐을 풀었습니다. 흙시루는 황토로 만든 민박형 펜션이랍니다. 학생수련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골냄새가 물씬 풍기는, 낭만적인 곳이라고 다들 좋아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모여앉아 나눈 지역 이야기의 주제는 '소(小)가야'. 고성은 절대 작은 가야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자기 고장 자기 나라를 두고 스스로 '작다'고 이르는 못난이는 없습니다. 오히려 <삼국유사>에 나오는 낱말 ‘소가야’에서 '소'는 '쇠'를 표현한 한자소리로 봐야 맞답니다. 그러니까 쇠가야, 또는 센 가야인 셈입니다.

 

지역 이야기를 마치고 게임을 진행했습니다. 이긴 팀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뼉을 크게 쳤습니다. 자기 고장 고성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얻은 덕분이 아닐까요.

 

밤이 깊도록 아이들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두런두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게임을 했습니다. 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학창 시절의 아름답고 귀한 추억들…… 아이들은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먼 훗날 지금 이런 시간들이 눈물겹게 그리울 때가 오지 싶습니다.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쉽기만 한 겨울밤이 소록소록 깊어갔습니다.

 

이튿날 6일은 삼계체험마을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을 어르신이 미리 장만해 놓은 짚가닥을 갖고 새끼를 꼬아보고 복조리까지 만들어 봤습니다. 다들 처음 해보는 새끼 꼬기와 복조리 만들기였지만 손으로 만지는 일은 역시 즐거웠습니다.

잘 만든 아이들에게는 상품권을 몇 장 선물로 건넸습니다. 의젓하기도 하고 놀기도 잘 놀던 고성 친구들! 짧았지만 고성을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이었기를 바랄 따름이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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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지겨운 기자, 진짜뉴스는 어떻게 찾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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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안수찬 기자가 쓴 <뉴스가 지겨운 기자-내러티브 탐사보도로 세상을 만나다>(삼인, 2013, 1만 3000원)를 읽었다. 6~7년 전 역시 그가 썼던 <스트레이트를 넘어 내러티브로-한국형 이야기 기사쓰기>(한국언론재단, 2007, 1만 2000원)를 읽고 나름 얻은 게 많았던지라 이번에도 기대하며 읽었다.


아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메모한 것이다. 내러티브 기사에 대해서는 앞선 책에서도 이미 읽었기 때문에 따로 메모하지 않았다. 이 책은 한국언론의 '출입처 제도'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도 적극 공감하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언론의 현실에서 어떻게 출입처 제도를 재편 또는 개선해야 할지는 이 책에도 해답이 없고, 나 역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의 기자들에게 출입처는 벙커다. 들어가서 안 나온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는 수세적으로 기사를 쓴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에는 정치부 또는 사회부가 없다. 그들은 '영역'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임무를 나눠 맡는다.

우리의 정치부에 해당하는 일은 <뉴욕타임스> '워싱턴 지사'의 몫이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기자들이 백악관, 연방정부, 연방의회 등을 두루 담당한다. 백악관 브리핑룸에 드나드는 전속 기자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주요 관청들을 유연하게 넘나든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도 함께 담당한다. 우리의 사회부 기자 노릇도 함께 맡는 것이다.


본사가 있는 뉴욕에는 '시티 데스크'가 있다. 우리의 사회부와 흡사하지만 기자마다 전속 출입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행정 등을 포괄하면서 느슨하고 넓은 의미의 '전문 (주제) 영역'에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기사를 쓰면, 데스크가 좋은 기사를 선별하여 게재한다.


이런 편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기자들은 말 그대로 '쏘다니는' 수밖에 없다. 관점을 이동하며 기사거리를 찾을 것이다. 갈등의 현장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갈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 더 강화해야 하는 것은 출입처 체제가 아니라 정보공개청구 제도를 포함한 '시민의 알 권리' 차원의 각종 제도다.


-미국언론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전업 기자의 혁신과 함께 그 외곽에 있는 방대한 '프리랜서 기자'들의 위협이 있었다. 기성과 관성에 안주하려는 이른바 유력 매체에 비해 그들 자유 기자들은 끝없이 혁신을 도모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것이 곧 유력지를 자극하여 언론계 전체의 진화로 귀결됐다.


-미국에선 주로 News story 또는 Story라는 단어를 쓴다. 기자가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사를 가져오라"고 호통치는 편집국장이 쓰는 단어는 Story다. 얼핏 들으면  "소설 써서 가져오라"고 기자에게 명령하는 것 같다.


Article은 하나의 단편 기사를 뜻하고 Story는 하나의 테마에 대한 일련의 기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영미 언론인들은 취재보도 과정에서 '단발 보도'가 아니라 '일련의 종합적 기사 체계'를 확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뉴스는 더 이상 '새롭고 충격적인 사실'이 아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이 뉴스다. 이를 드러내는 능력이 곧 기자의 자질이다. 어떤 기자는 내러티브, 다른 기자는 분석해설, 또 다른 기자는 조사통계 등 그 무기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추구하는 바는 같다. 정치권력을 비롯한 여론주도층이 아니라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각자의 방법론을 갖추고 있어야 기자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자의 자격 요건도 변화한다. 공부하고 성찰하고 사색하는 기자가 유능한 기자다.


뉴스가 지겨운 기자 - 10점
안수찬 지음/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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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동네신문을 만드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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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의 한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규모 재래시장 진입로와 맞은편 공장지대를 이어주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체증을 이유로 이 횡단보도가 약 70m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차량은 편해졌는지 몰라도 보행자는 불편해졌고, 재래시장의 손님도 줄어들었다. 상인들은 횡단보도를 원위치로 옮겨달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만일 당신이 신문기자라면 이를 어느 정도 비중으로 취재·보도하겠는가? 대개 일간지쯤 되는 신문이라면 이런 건 사회면 한 귀퉁이에 조그마한 단신으로 취급되거나 아예 누락될 가능성이 높다.


지역신문의 존재 의미


그러나 우리는 ‘특정 동네의 사소한 민원’으로 취급하지 않고, ‘교통흐름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주민의 생존권쯤은 무시해도 좋은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실제 매출 감소는 어느 정도인지, 이로 인해 문을 닫은 가게는 없는지, 실제 교통체증 감소 효과가 있긴 한지, 경찰의 입장과 교통전문가의 견해는 뭔지 등을 종합적으로 취재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경남도민일보


경찰은 ‘보행자의 불편과 상인들의 생존권 침해를 초래했다’는 부담을 안게 됐고, 상인들은 이 보도에 힘을 얻어 횡단보도 원위치를 요구하는 서명운동과 함께 집회를 열었다.


결국 해당 경찰서 교통규제심의위원회는 “양덕재래시장 입구 주변에 횡단보도를 추가로 설치한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같은 마산의 다른 동네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거리 교차로 중 보행자가 많은 곳에는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보도와 육교가 설치돼 있었다. 그 때문에 노약자들의 불편이 많았고, 무단횡단으로 교통사고까지 빈번했다. 그러나 규정상 육교와 지하보도 인근에는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행정기관과 경찰서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이에 우리가 문제점을 집요하게 보도하기 시작했고, 5회째 보도된 후 창원시와 경찰서의 합동심의에서 횡단보도 설치안이 통과됐다. 보행 불편을 겪어온 시민들과 도로 양쪽의 점포 상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 이런 사소한 주민 불편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이나 방송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담론보다는 오히려 이런 취재에 집중한다. 왜? 우리가 아니면 다뤄줄 매체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역신문의 존재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게 지역밀착, 동네밀착, 독자밀착보도라고 믿는다.


우리 편집국엔 이런 저런 작은 민원과 제보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전화했다’고 덧붙인다. 그 중엔 기사로 보도할 수 없는 것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기자가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며 고마워한다.


지역공동체의 공론장으로


우리 신문 1면에는 ‘함께 축하해주세요’라는 코너가 있다. 손자·손녀의 탄생, 백일, 돌, 입학, 졸업 등을 축하해달라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사연이 점점 늘고 있다. 1만 원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광고할 수 있는 ‘자유로운 광고’도 있다.


우리 이웃들이 비록 작은 불편이라도 호소할 수 있는 신문, 축하하고 위로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해줄 수 있는 신문. 그런 사람과 사연들이 모여서 이웃과 이웃을 연결시키고, 이것이 지역공동체가 되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신문. 경기도 지역에 유난히 지역일간지가 많음에도 굳이 부천 사람들이 <콩나물신문>을 새로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콩나물신문> 창간은 부천에서도 ‘풀뿌리 지역공동체’ 실험이 시작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콩나물신문>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창간 준비 과정 자체도 이미 부천의 새로운 역사이지만, <콩나물신문>이 지역사회 공론장(Public sphere)과 지역공동체(Local Community)의 전범(典範)으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역사가 되길 빈다.


※이 글은 부천에서 협동조합 방식으로 창간한 <콩나물신문>에 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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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에서 깨닫는 사천 갯벌의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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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8) 사천시

 

2013년 12월 9일 떠난 사천시의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주제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었습니다. 갯벌 하면 사람들은 순천만을 먼저 떠올리지요. 사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사천도 갯벌이 무척 너르거든요. 이렇듯 사천의 보물이 갯벌이라는 것은 사천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릅니다. 사천만이나 광포만은 경남에서 가장 넓습니다. 이런 갯벌을 어떻게 잘 보전해서 제대로 활용하고 더불어 이름도 널리 알릴 수 있는지 전남 순천시 순천만을 찾아 친구들과 함께 갯벌의 값어치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사천은 문화유산도 갯벌과 관련된 것이 많답니다. 가산창을 비롯한 조선시대 조창(조세 창고), 매향비, 작도정사, 쾌재정 같은 것들이 모두 사천에 갯벌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는 유물입니다.

 

해산물도 풍성합니다. 이렇게 먹을거리가 많다보니 철새도 많이 날아들고 남해안 중요한 물고기 산란장 구실까지 한답니다. 아울러 드넓은 갯벌이 안겨주는 멋진 경관은 사람들 마음에 심미적인 작용도 합니다. 또 비토섬 일대는 전래 설화 별주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답니다.

 

순천만 갈대밭 들머리에서.

 

잘만 가꾸고 살려 쓰면, 순천만처럼 갈대가 풍성하지는 않다 해도 사천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갯벌입니다. 그래서 이번 탐방의 첫걸음은 서포면 조도마을 들머리 광포만이 한눈에 드는 자리로 향했습니다.

 

탐방에 참여한 학생 70명과 선생님 10명은 썰물 때를 맞아 물이 쫙 빠져 더욱 너르게 드러난 갯벌을 바라봤습니다. 광포만은 우리나라 으뜸 갯잔디 군락지랍니다. 갯잔디는 기수갈고둥 같은 조그만 생명을 품고 기릅니다.

 

광포만 갯벌을 찾은 일행.

 

이런 조그만 생명들은 생태계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부분을 감당하면서 그 피라미드를 통째로 떠받칩니다. 광포만을 비롯해 사천 바다의 생산성이 높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여기 갯벌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갖가지 게들이 많이 나와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눈 밝은 아이들은 꺼먼 개흙을 뒤집어쓰고 꼬물거리는 콩게나 칠게 따위를 보고 탄성을 내지릅니다.

 

게들은 개흙을 자기 몸 속에 집어넣고 그 가운데 영양분은 먹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놓습니다. 영양분이 게에게는 먹을거리이지만 사람에게는 오염물질입니다. 말하자면 게들의 생명 활동이 사람에게는 갯벌 정화가 되는 셈이랍니다.

 

어쩌면 이런 설명들보다 친구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갯벌 앞에서 그동안 책상머리에서 답답했던 시간들을 훌훌 털어내는 홀가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앞에 누렇게 보이는 풀들이 갯잔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말을 듣습니다.

 

광할한 갯벌을 눈으로 담고 나서 옮겨간 곳은 사천의 또다른 명소 다솔사입니다. 다솔사는 들머리 잘 자란 솔숲과 전통차로도 이름나 있고 절간의 소담스런 분위기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적멸보궁과 극락전을 거쳐 오솔길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차밭 가운데 서 있는 잘 자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다솔사 전체 풍경을 제대로 내려다봅니다.

 

다솔사는 역사적으로 아주 뜻깊은 절간입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불교계 민족운동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님의 침묵'을 지은 만해 한용운은 1917~18년 이태 동안 다솔사에 머무는 등 12년 넘게 드나들었으며 여기 전각 응진전을 1930년 보수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안심료 앞 뜰에는 황금편백들이 심겨 있는데, 1939년 만해 회갑 기념 모임을 하면서 심은 나무라 합니다.

 

다솔사로 들어가는 학생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양루입니다.

 

다솔사 하면 떠오르는 또다른 이가 소설가 김동리입니다. 1935년 등단한 김동리는 1961년 소설 '등신불'을 발표하면서 한 번 더 유명해졌는데 그 창작 배경이 다솔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다솔사에 머물던 때 여기서 소신공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0~61년 다솔사에 있으면서 작품을 썼던 것이랍니다.

 

설명은 이어집니다. 다솔사를 두고 한용운이나 김동리 같은 유명 인물을 떠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최범술(법명 효당曉堂)이라는 사천 출신 스님이 있었기에 다솔사가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습니다.

 

지역에 좋은 것을 두고도 언제나 서울바라기가 되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16년 출가한 최범술은 여러 갈래로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20년대 불교계 항일 비밀 결사 만당(卍黨)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 만당의 당수(黨首)로 추대된 이가 바로 만해 한용운입니다.

 

또 1934년에는 사천에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세워 민족교육에 나섰는데 김동리는 이것이 계기가 돼서 다솔사와 인연을 갖게 됐습니다. 1936~40년 명성학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 여기 다솔사에서 '등신불'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를 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랍니다.

 

순천만 갈대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광포만 갯벌과 다솔사를 거쳐 순천으로 옮겨갔습니다. 점심으로는 꼬막 정식을 준비했답니다. 순천만 바다가 만들어내는 별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밥상은 꼬막으로 푸짐했습니다. 하지만 간편하고 손쉬운 음식에 익숙한 친구들은 꼬막을 까먹는 데 서툴렀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자연에서 나오는 좋은 음식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귀한 경험이 되었으리라 싶습니다.

 

갈대밭에 파묻힌 일행이 마치 점처럼 떠 있습니다.

 

순천만 생태공원에서 학생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사천이랑 그리 멀지 않은 데라서 한두 차례는 와 봤으리라 짐작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번이 첫걸음인 친구가 대부분이었답니다. 마침 휴일 다음날인 월요일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은 공원을 가로세로로 뛰어다닙니다.

 

 

 

 

 

여학생 한 무리는 함께 걸음한 여자 선생님이랑 함께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 폭 파묻혔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만 들립니다. 순천만은 네 철 모두 아름답지요. 봄은 연둣빛으로, 여름은 짙은 초록으로, 가을은 갈색으로, 그리고 겨울은 물기를 죄다 빼어낸 서걱거림으로 아름답습니다.

 

갈대밭에 파묻힌 선생님과 아이들.

깊어가는 겨울 갈대를 배경으로 데크를 따라 거닐며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빴습니다. 갈대밭 사이로 난 데크는 맞은편 언덕배기 용산으로 이어집니다. 여기 마루에 오르면 순천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용산전망대에서.

 

둥글고 커다랗게 타원형으로 연잎처럼 모여 있는 갈대 군락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서 말소리가 잦아듭니다. 어떤 신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산전망대에서.

 

날씨가 흐리고 때로는 비까지 내려서 오후 햇살이 조용하게 물결치는 바닷물에 튕겨져나오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차갑지만은 않은 바람을 맞으며 갈대밭을 몸으로 누리는 싱그러움은 남았답니다. 오후 4시, 일행은 사천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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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가장 걷고픈 통영, 동백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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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이날 일 때문에 서울에 가 있었는데요, 휴대전화를 통해 이런 얘기를 들려드려야 했었습니다. 지금부터 4월 중순까지 사이에 딱 여행하기 좋은 그런 데를 통영 여기로 한 번 꼽아봤습니다.

 

들를 데를 소개하는 글을 써서 제가 넘기면, 창원교통방송 송국화 작가께서 방송에 맞게 각색해 제게 다시 넘겨주시는데요, 이런 것도 표현이 재미있다 싶어서 넘겨주신대로 적어봅니다.(물론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 잘못이 있다면 그 책임은 물론 제게 있음은 분명합니다.

 

 

 

행복! 플러스 플러스

 

금요일~ 여행 코치와 함께하는 여행이 좋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 예,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우리 지역 어디로 떠나나요?

 

-지난 번 거제에 이어

 

오늘은 통영 명소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꽃샘추위로 봄기운이 살짝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이제 대세는 봄이거든요.

 

대세는 봄이다.

 

겨우내 웅크렸던 가슴을 펴고

 

나들이에 나서는 때입니다.

 

이 시기에 맞춰 통영 봄 바다와 동백,

 

그리고 문화 유적들까지 함께 누릴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 봄 바다와 동백 뭔가 말만 들어도 설레는데……

 

내일 하고 모레, 이번 주말을 이용해 가도 좋은 곳인가요?

 

-그럼요, 이미 바람결에는

 

봄 향기가 가득한데요.

 

내일모레 시간 내어 가 보셔도 좋고,

 

벚꽃이 피었다 지는 4월 중순까지는

 

언제 가셔도 좋은 곳들입니다.

 

# 기대되는데…… 얼른 소개해 주시죠~

 

박경리 기념관.

 

- 네, 박경리기념관, 삼덕항과 돌벅수들과 당포성,

 

그리고 달아공원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되겠습니다~

 

먼저 박경리기념관에서 시작할 텐데요.

 

박경리 선생과 소설 <토지>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기념관 안에 들러

 

구경하셔도 좋겠습니다.

 

박경리 기념관 내부.

 

선생의 일생과 작품 세계가 알기 쉽게 정리돼 있고

 

'김 약국의 딸들' 같은 작품에서 통영이

 

어떻게 형상화돼 있는지도 일러주고 있거든요.

 

하지만 기념관 뒤편

 

박경리 선생 산소로 바로 가셔도 좋습니다.

 

볕이 바르고 펼쳐지는 풍경 또한 걸맞게 멋진데요.

 

박경리 선생 산소에서 보는 봉전항 앞바다 햇살.

 

왼쪽 봉전항 앞바다의 부서지는 햇살과

 

오른쪽 가까운 봄 산이 그럴 듯합니다.

 

또 산책로 곳곳에 선생이 직접 쓴 원고를 뜬 동판이나

 

시편·산문이 늘어서 있는데요.

 

억지로 읽지 않아도

 

그 뜻이 마음에 쏙쏙 들어오게 잘 배치돼 있습니다.

 

박경리 기념관과 산소를 이어주는 데크. 가을 풍경.

# 봄날에 어울리는 문학기행이네요,

 

저도 박경리 선생의 책들을 참 좋아했는데

 

이번 기회에 꼭 가봐야겠어요.

 

자, 이어서 소개해 주실 곳은 어디죠?

 

- 박경리기념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다가

 

삼양농협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고개를 넘는 마루에 돌벅수가 있어요.

 

오른쪽 아래 마을 삼덕항으로 내려가도

 

돌벅수 한 쌍이 나란히 있고요.

 

돌벅수.

 

#돌벅수라면 장승인거죠?

 

-맞습니다, 돌장승이죠. 생김새가 꽤나 투박한데,

 

요즘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풍어와 무사귀환을 빕니다.

 

삼덕항.

 

최초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 기념비도 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인 이 사람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

 

통영 앞바다를 지나다가 풍랑을 만나 여기 표착했는데,

 

나중에 전라도 여수항을 통해 탈출해 나갑니다.

 

이런 유물들을 안고 있는

 

삼덕항은 아주 크고 또 활기가 넘치죠.

 

당포성.

 

앞쪽 맞은편 장군봉과

 

뒤편을 받치는 당포성은 정말 씩씩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승전인 당포해전이 벌어졌던 곳인데,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언덕배기 당포성으로 올라가면

 

삼덕항이 한 눈에 다 들어오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더욱 일품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달뜨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 생각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일 것 같아요

 

지난 겨울 통영 고3들과 함께 여기 자드락산길을 걸었답니다.

 

-꼭 가서 느껴 보세요~

 

그리고 갔던 길을 되밟아 내려오지 마시고

 

왼편 자드락길을 따라 걸으면

 

마을을 가로지르는데요, 그 느낌도 썩 괜찮습니다.

 

# 낯선 마을을 걷는 기분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참, 동백꽃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 예, 삼양농협 삼거리에서

 

 

삼덕항을 거쳐 오는 동안

 

길가에는 내내 동백이 심겨 있습니다.

 

동백은 꽃도 좋지만 잎사귀도 아주 멋지거든요.

 

특히 봄에는 물이 올라 마치 기름을 바른 듯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데요, 햇살을 받으면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인답니다.

 

그런 동백이 거기서부터

 

오늘 나들이 끄트머리인 달아공원까지 내내 이어집니다.

 

#아~ 그렇게 동백이 쭉 이어지는 군요~

 

장관이겠네요~

 

 

-뿐만 아니라 오른편으로는 통영 봄바다가 줄곧 동행하는데요, 

 

그 따스한 기운과 시원한 눈 맛도

 

덤으로 함께 즐길 수 있죠.

 

# 정말 생각만 해도 멋집니다.

 

제가 알기로 달아공원은 통영 서쪽 끝이라

 

저녁 무렵 해지는 모습이 예술이라던데요?

 

달아공원. 공원 자체보다는 거기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이름이 높은 명소입니다.

 

- 맞습니다. 하지만 꼭 해질 무렵이 아니라도

 

언제나 시원한 바람과 점점이

 

섬들이 떠 있는 바다 풍경으로 사람들을 맞아 줍니다.

 

통영 이런 나들이는 자가용보다 버스를 타고 가면

 

마음껏 걸을 수 있어서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거든요.

 

# 맞아요~ 짧은 봄을 마음껏 느끼려면

 

자가용보다

 

대중교통과 두 다리를 이용하는 게 훨씬 좋더라고요~

 

친절한 코치님!

 

혹시 가는 방법도 준비하셨나요?

 

 

-저도 배낭 하나 메고 이렇게 다니는데요.

 

통영 죽림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시면,

 

중앙시장으로 가는 버스는 널려 있습니다.

 

중앙시장 내리셔서 적당히 끼니 때우고

 

534번 535번 537번 시내버스를 타면

 

박경리기념관에 갈 수 있고요.

 

돌아 나올 때는 달아공원에서 

 

530번 536번 버스를 타면 됩니다.

 

(타고 내리는 시간표는 통영시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 두 말하면 잔소리!

 

일단 떠나고 봐야겠죠?

 

오늘 좋은 말씀 너무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도 기대할게요~

 

-네, 지나는 봄은 잡을 수 없잖아요.

 

가까운 우리 지역에서 봄날을 마음껏 느껴보세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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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산신령이 남자 아니고 여자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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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9) 합천군

 

2013년 12월 11~12일 이틀에 걸쳐 진행한 합천군 학생들의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에는 함박눈이 동행해줬답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는 걱정을 했으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눈 덕분에 오히려 흥겨운 여정이 됐습니다. 물론 합천은 산길이 많기 때문에 탐방 지역은 일부 바꿔야 했지만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황매산 모산재 아래 남향으로 들어서 있는 영암사지였습니다. 영암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지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망한 절터 폐사지임에도 통째로 맑고 밝고 환한 기운을 뿜어내는 곳이 영암사지입니다. 그런 느낌은 눈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여전했습니다.

 

자부심 서려 있는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모산재가 양쪽으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가운데 잘 다듬어진 석물들에서 무게와 힘이 느껴집니다. 들머리에 있는 나이가 600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를 지나고 다소곳하게 들어앉은 삼층석탑을 거쳐서, 금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지요.

 

합천박물관 앞에서 기념 사진.

 

한 덩어리 통돌을 쪼아 만든 이 계단은 날렵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가파른 편인데요, 올라가면 눈길은 금당터 아랫도리 돌들에 저절로 머뭅니다. 아름다운 연꽃과 생기발랄한 사자와 험상궂은 괴수 따위가 새겨져 있거든요.

 

영암사지 들머리 600년 넘은 느티나무.

쌍사자석등은 생기기도 아주 잘 생겼고요, 마을 사람들 자부심까지 여기 어려 있답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 사람이 몰래 빼내가려 했을 때 주민들이 합심해 이를 가로막고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런 설명을 들으며 사자의 보드라운 엉덩이를 쓰다듬었습니다.

 

이어서 옮겨간 왼쪽 서금당터에는 비석 받침으로 쓰였던 귀부가 두 개 있습니다. 왼편 귀부 거북은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고 오른편 귀부 거북이는 고개가 다소곳이 숙여져 있습니다. 거북 등짝에도 눈길을 보내는데, 육각형 껍데기의 오톨도톨함이 손에 잡힐 듯했습니다. 꼬리는 또 두어 차례 살짝 감아올린 질감이 생생합니다.

 

금당터 사자 조각.

 

해설을 맡은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의 설명이 곁들여지면서 보는 즐거움에 느끼는 보람이 더해졌습니다. 꼿꼿하게 치켜든 녀석이 오히려 힘이 들어가 어색하고, 다소곳이 숙인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는 둥, 둘레 보면 여기저기 멋진 돌들이 널려 있는데 가만 살펴보면 쐐기 같은 것으로 떼어내려 했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둥, 보는 안목을 트이게 하는 얘기들이 줄줄 이어졌던 것입니다.

 

남명 조식 태어난 합천 삼가

 

합천 삼가는 일제 강점 이전부터 항일 의병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이를 두고 대부분 사람들은 1501년 삼가 외토리에서 태어난 선비 남명 조식과 관련지어 생각한답니다. 안동의 퇴계 이황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남명 조식은 의리를 중시했고요 그런 학풍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랍니다.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은 그를 증거하는 불꽃같은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1919년 삼가장터는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차례 만세운동을 벌였는데요, 그 규모도 엄청나서 일제 기록으로도 3만 명에 이르를 정도였답니다.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뒷면.

 

이를 기려 2005년 제막한 것이 바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이고요. 이렇게 자랑스러운 자기 고장의 역사가 있는데도, 여기 삼가 출신인 학생만 알고 다른 데서 온 아닌 학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답니다. 기념탑을 둘러보면서 새삼스레 감흥에 젖는 모습들입니다.

 

삼가장터는 소고기로도 이름나 있습지요. 그래서 여러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삼가 소고기를 맛보려고 모여든답니다. 같은 합천에 살아도 삼가 소고기를 그리 자주 먹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점심으로 해인식육식당에 들러 불고기 백반을 마주했습니다. 다들 입맛을 다시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그럴 듯한 훌륭한 점심이었습니다. 

 

실크로드와 옥전고분군 로만글라스

 

이어서 합천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옥전고분군 바로 옆에 있습니다. 대부분 유물은 옥전고분군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합천에서도 박물관 탐방은 미션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합천박물관을 특징짓는 유물 네 가지 찾아오기였습니다.

 

합천박물관에서.

 

으뜸은 로만글라스이고 버금은 손잡이가 용과 봉황 무늬로 새겨진 큰 칼(용봉대도)였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만들어진 로만글라스가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한반도의 동남쪽 여기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로마와 장안을 잇는 실크로드가 여기까지 뻗어와 로만글라스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용봉대도는 먼저 크기로 미뤄볼 때 옥전 고분군을 이룬 세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일러준답니다. 학생들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덤들을 둘러봤습니다.

 

옥전고분군을 둘러보는 모습. 앞에 장갑 낀 이가 최헌섭 무류문화연구원 원장.

 

가야 마지막 태자와 월광사지, 그리고 해인사

 

월광사지에는 해인사 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냇물이 흐르는 개울가 언덕배기에 삼층석탑 둘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돌탑들은 또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느낌이 고즈넉하고 기상이 굳셉니다. 이름난 해인사나 영암사지 말고도 합천에는 이런 명승이 구석구석 있습니다.

 

"우와! 정말 멋져요." "합천에 이런 데도 있었다니!" 학생들 놀라는 품이 무리는 아닌 것이요, 여기가 관심 있는 어른들도 잘 모르는 그런 데이기 때문이지요.

 

월광사지.

 

이름은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月光)'에서 왔지만, 시기는 아무리 올려 잡아도 통일신라를 뛰어넘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월광 태자가 지은 절은 아니더라도, 월광 태자가 노닐던 자리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눈싸움하는 모습.눈싸움하는 모습.

 

 

해인사 뜨락에서 아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원래는 소리길을 걸을 작정이었으나 눈이 내리는 데 더해 바람까지 거세어져 해인사 둘러보기로 일정을 바꿨답니다. 눈을 만난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습니다. 눈이 내리는 해인사는 그림처럼 고요했습니다. 해인사를 둘러본 여러 기억 가운데 가장 잊히지 않은 풍경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가야산 정견모주와 해인사 국사단

 

가벼운 물소리가 나는 개울을 건너 경내로 들어서니 스님들이 마당에 내려앉은 눈을 소리도 없이 치우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각,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최치원이 심었다는 학사대 잣나무를 둘러본 다음 내려오는 길에 산신령을 모시는 국사단을 들렀습니다.

 

학사대.

 

국사단에서 제(아래쪽)가 학생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국사단에 모셔져 있는 가야산 산신령, 정견모주.

 

국사단 주인이 보통은 남자지만 여기 주인은 여자랍니다. 가야산 산신령이 여자, 정견모주(正見母主)이기 때문이지요. 대가야 건국신화에서 정견모주가 붉은해 첫째(朱日)와 새파란끄트머리(靑裔) 둘째를 낳았는데 붉은해는 고령 대가야를 세웠고 새파란끄트머리는 김해 가락국을 세웠습니다.

 

김해 가락국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후기 가야세력 대장격이었던 고령 대가야를 머리로 끌어올리는 그런 건국설화라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주일이나 청예 같은 작명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해인사 눈에 쌓인 풍경.

 

눈에 싸인 해인사 홍류동.

 

유성가든에 들러 합천 별미인 붕어찜으로 저녁을 먹고 짐은 황매산펜션에다 풀었습니다. 남학생 여학생으로 나뉘어 흩어지기 전에 함께 모여 합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합천은 매우 넓어서 서울보다 1.5배나 클 정도랍니다. 독립된 행정 단위였던 강양(합천)·삼가·초계가 하나로 합쳐진 때문입니다. 이렇게 크다 보니 인물도 많습니다. 남명 조식과 그 제자인 정인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습니다.

 

뿔똥마을에서 가마솥 밥짓기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합천 지역 의병장이었고 합천은 의병 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답니다. 이런 기풍이 근대까지 이어지면서 터져나온 것이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이라고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튿날 아침에는 지역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을 진행했습니다. 하루 동안 보고 느끼며 마음이 움직인 탓인지 제법 익숙하게 지역 문제를 맞혀나갔습니다.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부채질까지 해대며 밥을 짓는 모습.

마지막 일정은 각사 뿔똥마을에서 풀었습니다. 뿔똥은 보리수 열매를 뜻하는 경상도말이지요. 눈이 내린 뒤끝이라 뽈똥 열매는 많이 지고 얼마 없었습니다. 대신 열매를 한 봉지씩 얻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마솥으로 밥을 짓는 체험에 아이들은 열을 올렸습니다. 조금은 생각밖이었는데요, 아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모양입니다. 연기 때문에 눈물을 글썽글썽거리면서도 정성껏 밥을 지었습니다.

 

손수 지은 가마솥밥에다 시골 마을 자연 반찬을 곁들여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뜸이 알맞게 든 밥은 윤기마저 자르르했습니다. 스스로 지은 밥에다가 시골 마을 자연 반찬을 곁들인 점심은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고3 마지막 학창 시절을 마무리해 주는 따뜻하고 풍성한 일정이라 할 만한 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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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바른 인물 두루 품은 남고북저 함안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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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10) 함안군

 

2013년 12월 17일 펼쳐진 함안 지역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첫 탐방 지역은 산인면 고려동 유적지였습니다. 고려동 유적지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쉽게 눈에 띕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함안에 살고 있다 해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함안은 한반도 전통 지형(남저북고)과는 달리 남고북저(南高北低)인데요, 이를 빌미로 지배집단은 함안을 '반골' 또는 '반역' 이미지와 연결짓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배집단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보통 사람들 눈으로 보면 함안은 '권세나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할 말 하면서 반듯하게 사는 사람들의 땅'일 뿐이겠습니다.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첫 머리, 고려동 유적지

 

그런 의미를 띠는 첫머리에 산인면 고려동 유적지가 놓입니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사람이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들어선 조선 왕조에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었던 심정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에서 성균관 진사 벼슬을 한 이오(李午)라는 인물이 이런 생각으로 600년 전 식구들과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한 터전이 바로 여기입니다.

 

율간정 마루에 앉아서 고려동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배롱나무꽃이 피고 지는 계절에는 눈에 꽃이 와 감기는 흥그러움이라도 있지만 한겨울 고려동은 아무래도 썰렁했습니다. 기본 지식이 없으면 흥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들머리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는 자미단(紫薇壇) 가까이에서 내린 일행은 흙돌 담장이 둘러쳐진 마을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담장은 높낮이가 저마다 다른데 안쪽은 소리 없이 고즈넉합니다. 허물어지고 있는 집도 있고 어떤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지 대문 틈서리에 우편물이 수북하게 꽂혀 있는 데도 있었습니다.

 

"이오는 마을에 담장을 쌓아 조선 땅과 구분지은 뒤 '고려동학' 비석을 세워 고려 유민들이 사는 땅임을 밝혔습니다. 스스로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함으로써 바깥세상과 연결·접촉도 최소화했습니다.

 

이오는 아들에게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 유언했고요, 후손들은 선조의 유산을 돌보는 한편으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 힘쓰면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답니다."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먼저 들은 이런 설명들이 고려동 유적지를 돌아보는 친구들 이해를 높이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벼슬 따위와는 바꿀 수 없는, 무기연당

 

무기연당. 가운데 건물이 풍욕루. 그 앞이 하환정.

 

이어서 찾은 칠원 무기연당(舞沂蓮塘)은 국담 주재성이 1728년에 지었습니다.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더불어 전통 정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힐 만큼 경관이 빼어납니다. 그런데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풍류를 알았던 국담은 의로운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백성을 모아 막았으며 재산을 털어 군량미까지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뒤쪽으로 한자 '敬'이 살짝 보입니다.

 

여기에는 주재성의 이상(理想)이 담겨 있습니다. 연못과 마당을 잇는 돌계단 앞 작은 돌 탁영석(濯纓石)은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겠다'는 뜻이고 그 옆 정자 하환정(何換亭)은 '(이 멋진 풍광을) 어찌 (벼슬 따위와) 바꾸겠느냐'는 말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은 무기연당에 담긴 뜻이야 어떻든 눈에 담기는 경관에 감탄했습니다. 저마다 자리 잡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습니다. 때로는 의미보다 느낌에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는데 무기연당이 딱 그런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향학열이 살아 숨쉬는 칠원향교

 

칠원향교는 무기연당과는 또다른 느낌을 안겨 줬습니다. 둘레에서 가장 높은 데 자리잡은 칠원향교는 홍살문이 있으며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낮은 앞쪽에 있고 성현을 제사 지내는 대성전이 높은 뒤쪽에 있습니다.

 

명륜당 앞뜰에서 향교 총무께서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느 향교와 겉모습은 같지만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학생(學生)들이 모여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향교는 학생들 책 읽는 소리가 울려퍼져야 제격이겠지요.

 

대성전 앞에서.

 

지금도 다달이 정해진 날에 나와 경전을 읽곤 한다는 총무 어르신 이야기는 수능시험을 마치고 홀가분해 하는 고3 학생들에게 아주 각별한 무엇으로 들렸음이 틀림없습니다. 칠원향교 총무 어르신은 게다가 성함을 여쭌 데 대해 “이름 그런 따위 무슨 필요 있어?” 하시며 끝까지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공부하러 나온 어르신들의 신발이 명륜당 댓돌에 놓여 있습니다.

 

소박하고 푸근한 절간 장춘사

 

칠원면 신풍식육식당에 들러 돼지고기와 더불어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 무릉산 장춘사로 향했습니다. 조그맣지만 분위기가 담백하고 그윽하기로 이름난 절간이 바로 장춘사랍니다.

 

장춘사 오르는 오솔길.

 

일주문이 웅장하고 사천왕이 근엄한 여느 절간과 달리 장춘사는 그냥 대나무 사립문 하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눕니다. 더 이상 소박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합니다.

 

 

산기슭에서 장춘사까지 걸어가는 3km가량 길은 별로 가파르지도 않고 양쪽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잔뜩 키를 키운 채 늘어서 있으면서 시원한 기운을 내뿜습니다. 적당하게 굽어 있어서 산자락을 따라 흐르는 오솔길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장춘사에서 아이들 모습은 무장해제 그 자체였답니다. 대웅전이 어떻고 부처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청마루나 축대에 삼삼오오 걸터앉아 그간 애썼던 마음을 풀어놓고 정담을 나눴습니다.

 

 

절간이 사람 마음에 끼치는 위안이 이 이상인 때는 아마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이 깊도록 붉디붉은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에 아이들은 가장 많이 눈길을 던졌습니다. 아마 아이들은 훗날 장춘사라 하면 이날 눈에 담았던 붉은 홍시를 가장 먼저 떠올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장춘사 감나무.

 

그래도 만만찮은 말이산고분군과 함안박물관

 

말이산고분군과 함안박물관으로 옮겨갑니다. 함안 가야읍내 한가운데 나란히 있는 이 둘에 대해 대부분 아이들은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늘 보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이런 생각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말이산 고분군은 먼저 규모에서도 남다르답니다. 커다랗게 쌓은, 우두머리급 무덤만도 100개가 넘는데 이는 함안에 자리잡았던 '아라가야'가 상당한 크기 세력으로 오랜 세월 존속했음을 일러주는 지표입니다.

 

함안 가야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최헌섭(등이 보이는 이)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이산(末伊山)에 한자 끝 말(末)이 들어가 있으나 이는 우리말 '머리'를 한자 소리로 적은 것으로 말하자면 함안의 중심산, 으뜸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두머리들이 머리산에 묻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연을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은 없다시피 했답니다.

 

때마침 함안박물관에서 개관 10주년을 맞아 '말이산'을 주제로 기획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획전을 둘러보고 박물관 탐방은 상품권을 선물로 내걸고 미션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지막 마무리는 지역 역사 문화 도전 골든벨과 간단한 게임으로 했습니다.

 

문제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음에도 학생들이 자꾸 틀리고 끝까지 남는 친구가 없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하기를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대입 수능에 지역 문제를 반드시 출제하도록 돼 있다면 사정이 조금은 달라졌겠지요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마지막 일정인 게임이었습니다. 게임은 단순했습니다. 60명을 열 팀으로 나눠 동전던지기를 한 다음 점수가 많은 순서대로 상품권을 나눠 갖는 것이었습니다. 8절 크기 종이 한 장과 500원짜리 동전 하나에 학생들이 그렇게 집중하고 열광할 줄이야!!

 

박물관 앞마당은 학생들이 쏟아내는 열기와 함성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친구들에게 이날 하루나마 좋은 추억이 됐기를……. 가까운 밥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나오니 짧은 겨울 하루해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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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신돈이 창녕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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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11) 창녕군

 

창녕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주제는 인물이었습니다. 신라진흥왕척경비, 술정리동삼층석탑, 석빙고 등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을 많이 품고 있는 곳이 창녕이지요.

 

그러나 이것들은 창녕의 뿌리와는 바로 관련이 덜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신라진흥왕척경비는 원래 창녕 빛벌에 살던 가야 세력을 정벌한 위에 들어선 것이지 토박이 가야 세력의 유물은 아니라 할 수 있거든요.

 

우리는 욕심을 최대한 줄여야만 했습니다. 창녕을 1박2일 일정으로 제대로 다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창녕 하면 떠오르는 인물인 망우당 곽재우·한강 정구·편조 신돈을 중심에 두고 창녕의 자연·역사·문화를 돌아보기로 했답니다. 2013년 12월 20~21일 이틀 동안이었지요.

 

 

창녕에서 우포늪(소벌)을 빼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답니다. 다들 몇 번씩은 찾았음직한 우포늪(소벌)이지만 그래도 이번 참에 다시 들러 겨울철새를 눈에 담으며 걷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우포늪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우포늪 철새들.

 

1000명 밥을 담은 관룡사 구시

 

그리고 오후에는 옥천 골짜기 고향보리밥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화왕산 관룡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토록 유명하다는 관룡사인데도 아이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관룡사를 탐방한 적이 없었습니다.

 

관룡사 돌장승을 지나면서.

 

관룡사 돌문을 향하는 아이들 발걸음.

 

관룡사에는 보물이나 문화재가 많습니다. 들머리 돌장승과 범종각 북을 받치고 있는 괴수, 약사전의 육중한 지붕이나 대웅전 의젓한 자태, 조그맣고 귀여운 삼층석탑 볼거리가 수두룩합니다.

 

북을 받쳐들고 있는 괴수. 웃는 얼굴일까요, 우는 얼굴일까요?

 

이런 가운데 단연 학생들 관심과 눈길을 끈 것은 구시(구유)였습니다. 1000명 밥을 담을 수 있다는 구시를 손으로 만지며 지금은 말고 옛날 절간의 규모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대웅전 뒤편 병풍바위.

 

그러나 무엇보다 관룡사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것은 뒤쪽 둘러친 병풍바위의 씩씩한 기운입니다. 마당 끄트머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 그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용선대 돌부처

 

관룡사 하면 또 용선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언제 봐도 위풍당당합니다. 겨울철 동짓날 해뜨는 쪽을 바라보고 앉은 부처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의 배(용선=龍船)를 몰고 있습니다. 뱃머리처럼 산줄기가 툭 튀어나와 멈춘 바위 덩이 위에 용선대가 있습니다.

 

 

먼저 도달한 아이들이 뒤에 오는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500m 남짓 되는 산길을 올라가 용선대에 이른 아이들이 연신 감탄을 합니다. 처음 누려 보는 풍경에 넋을 놓고 말을 잊습니다. 북쪽 화왕산성과 남쪽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기슭, 동쪽 관룡사를 굽어 살피며,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누렸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매우 웅장하지요. 아래쪽이 풍상에 시달린 자취가 큰 반면 위쪽은 그렇지 않고 흰색을 띠는데요, 이는 지금과 달리 햇볕이나 바람을 가려주는 장치가 돼 있었음을 뜻합니다."

 

용선대에서 바라보는 동쪽 병풍바위와 관룡사.

 

절간 대웅전 부처 위에 있는 닫집 같은 물건이 여기 바깥에 나앉은 용선대 부처에게도 있었으리라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의 설명이었습니다. 여기에 학생들은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 그 옛날 용선대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최헌섭 원장의 설명을 따라 돌부처를 살펴보는 아이들.

 

신돈이 태어나 망한 절터 옥천사지

 

관룡사에서 내려오다 두 번째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왼쪽 오솔길로 접어들면 옥천사터가 있습니다. 제대로 놓인 돌이 하나도 없을 만큼 무참하게 망한 절터랍니다.

 

아이들이 딛고 선 바위들이 죄다 깨어져 나간 것들이랍니다.

 

주춧돌은 군데군데 놓여 있는데 석등·석탑·축대라든지가 원래 그대로 남아 있는 데는 전혀 없습니다. 석등의 일부였던 돌은 정을 맞은 자리가 뚜렷하고 연자멧돌조차 뒤집어진 채 묻혀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보복한 처절한 자취라 하겠습니다.

 

연자멧돌.석탑 따위에 쓰였다가 깨뜨려진 돌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고려 공민왕 시절 개혁을 이끌었던 스님 신돈이 이 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입니다. 신돈은 임금의 신임을 업고 백성들이 귀족한테 빼앗긴 신분과 토지를 원래대로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고 합니다.

 

예나 이제나 기득권 세력은 저항이 완강했고요 절대권력 임금의 마음이 오래 가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신돈은 임금의 신임을 잃자마자 곧바로 제거돼 목숨까지 날아갔습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일한 신돈은 그러니까 적어도 요승(妖僧)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욕심이 얼마나 세고 끈질기고 완강한지를, 여기 산산조각난 석재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옥천사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돌들을 훑어보며 우리는 신돈의 참모습을 새삼 더듬어볼 수 있었답니다.

 

더 없이 잘 생긴 창녕 지석묘

 

창녕지석묘.

 

창녕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큼 잘 생긴 고인돌이 있다는 사실도 아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가 그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뿐이지만 원래는 더 많았답니다.

 

1915년 일제강점기 도로 공사를 하면서 여기 높다란 언덕배기에 있는 고인돌들을 죄다 깨버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조각들을 도로 닦는 바닥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창녕지석묘도 당시 동네 사람들이 20원을 보상금으로 일제한테 물려주는 바람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의젓하면서 큼지막한 고인돌을 앞에 두고 학생들은 최헌섭 원장으로부터 설명을 듣습니다.

 

최헌섭 원장이 창녕지석묘를 두고 얘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창녕지석묘는 언덕 꼭대기 잘 내려다보이는 데 자리잡아 둘레 평지를 한눈에 장악합니다. 아울러 얹힌 돌이 일대 재질인 퇴적암이 아니라 화강암인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녕 지석묘가 있는 장마면은 낙동강과 계성천이 만나는 강가여서 죄다 퇴적암뿐이고, 화강암은 창녕읍이나 영산면에나 가야 있습니다. 그런데 무게 40톤이 넘는 돌을 여기까지 누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옮겨왔을까요? 아이들의 상상력은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곽재우 장군의 낙동강가 망우정

 

다음으로 찾은 곳은 도천면에 있는 망우정이었습니다.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선생이 만년을 보내다 숨을 거둔 곳입니다. 알려진 대로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기강나루에서 조선의 육지와 바다를 통틀어 첫 승리를 일궜습니다.

 

망우당 마루에 앉아 아이들이 아래 낙동강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곽재우는 창녕을 비롯해 곳곳에서 작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말년 세월은 좋지가 않았습니다. 좁쌀처럼 째째한 임금 선조의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도 해야 했습니다.

 

망우정 뒤편에는 이렇게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와 비각이 있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낙동강도 보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모든 것을 놓고 여기 낙동강가 언덕배기 정자에서 깨끗하게 살다 갔습니다. 망우(忘憂)는 '근심을 잊는다'는 뜻인데 과연 여기서 곽재우 장군이 잊으려고 했던 근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녁은 도천진짜순대 창녕점에서 먹었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옥천 골짜기 보리밥과 함께 창녕 명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녕에 살면서도 자주 먹지 않았지만 창녕을 떠나면 더욱 맛보기 어려운 고향 음식들이지요.

 

창녕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며 이 친구들이 창녕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무척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창녕을 창녕답게 만든 한강 정구

 

이어 성산면 성곡친환경마을로 옮겨가 짐을 풀었습니다. 낮에 돌아본 망우당 곽재우와 편조 신돈에 이어 한강(寒江) 정구(鄭逑, 1543~1620)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모두에게서 배운 정구는 1580년 창녕현감으로 오면서 창녕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팔락정·부용정을 비롯한 여러 정자를 세우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게 해 학풍을 일으켰고요, 가항마을에 제방을 쌓아 물난리를 막는 등 백성을 위하는 행정을 폈습니다.

 

아울러 읍지 <창산지>까지 펴내어 지역 역사·문화· 풍물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정구가 창녕을 떠날 때 생사당(관산서원)을 지어 모실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이런 한강 정구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했습니다.

 

창녕이 가야 시대 예로부터 빛나는 땅이기는 했지만 조선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름 학풍이 살아 있음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한강 정구였음을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창녕지석묘.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아이들은 그렇게 잘 놀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행복해했고요, 어떤 학생들은 두런두런 모여 카드놀이를 했습니다. 캄캄한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노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천지가 눈에 덮여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눈 때문에 한강 정구 관련 유적 가운데 부용정만 둘러보고 관산서원을 찾는 일정은 취소해야만 했습니다. 성곡친환경마을에서 만든 손두부를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는 아쉽게 일정을 마무리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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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탐방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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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교육청과 해당 지역 교육지원청 후원으로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주관한 2013년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은 11월 12일 창원에서 시작해 12월 21일 창녕에서 끝났습니다. 모두 10개 시·군에서 13차례 진행됐습니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자기 고장에 대해 많이 무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처음에는 "지역 이야기라면 빤하지 않나?" 대체로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자기 고장에 대해 잘 몰랐던 친구들에게는 새롭게 눈이 뜨이는 기회였기도 했고, 잘 안다고 자부했던 학생들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지식이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자기 고장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는 기회

 

진해 웅천왜성 마루에 올라선 모습.

 

학생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자원했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 권유로 왔습니다. 비율로 보자면 선생님 권유 쪽이 월등히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가라 해서 뭔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왔다는 친구도 있고요, 심지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온 학생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시작은 이렇게 달랐어도 끝은 비슷해져 있었습니다. "아, 우리 지역에 이런 게 있었구나", "정말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재미도 있었어요",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 고맙습니다". 학생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 지역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학생들 탓으로 돌릴 수는 전혀 없는 노릇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 걷는 방법인 취족을 하며 창원향교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학생들.

 

지역에 대해 학교도 학원도 가르치지 않고 대학 수능 시험도 다루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아이들에게는 자기 고장을 알고 이해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 책임이 어른에게 있다면 지역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어른 몫이지 않을까요?

 

공부든 놀이든 먼저 재미가 있어야

 

창원향토자료전시관에서 옛날 교모를 쓰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수능을 끝낸 고3 학생들과 함께 탐방하면서 공부를 시키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닫혀 있었던 아이들 몸과 마음을 고장을 돌아보며 활짝 열어주는 데에다 초점을 맞췄습니다.

 

필요한 기본 지식은 옮겨가는 버스 안에서 재미나는 이야기로 풀어냈고요, 현장에서는 되도록 마음껏 느끼고 즐기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김해 분성산성에 올랐는데, 시원한 바람과 풍경에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통영 박경리 선생 산소에서는 살아온 이력이나 소설 <토지>가 아니라 산소에서 보는 산과 바다와 들판 풍경의 아름다움을 먼저 얘기했습니다.

 

창녕 관룡사 용선대에서도 거기 놓인 석조석가여래좌상의 조성 연대나 기법을 읊어주는 대신, 내려다보이는 병풍바위의 아름다움과 아래 산기슭 넉넉한 들판의 풍성함을 한껏 품어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를 일러 용선대라 하는 까닭이나 불상이 동짓날 해뜨는 데를 바라보는 연유를 들려주는 식이었습니다.

 

아울러 공부도 노는 것처럼 준비했답니다. 지루하고 딱딱하게 여기기 십상인 박물관을 탐방할 때는 문화상품권을 걸어놓고 꼭 알아야 할 내용을 팀별로 답을 찾아오게 하는 '미션 수행' 방식을 주로 썼습니다.

 

통영 당포성에 올랐다가 자드락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

 

지역 역사에 대한 학습은 '도전 골든벨!' 형식으로 진행했는데요, 효과가 퍽 좋았습니다. 제출된 문제는 자기 고장 출신 유명인, 특산물, 시장 이름, 지역 특성과 역사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거제 학생들이었습니다. 유명 인물 가운데 거제 출신이 아닌 사람을 찾는 문제였는데, 문재인 국회의원이 거제 출신인데도 거제 학생들은 대부분 전라도 출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랍니다.

 

음식에 특히 신경을 썼고

 

아이들은 탐방을 하면서 웃고 즐기고 떠들면서 다른 학교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습니다. 하루 동안 돌아본 내용을 바탕으로 지루하지 않게 짧고 간결하게 지역 이야기를 정리하는 시간으로 그 날 일정을 마무리했는데요 이런 시간들이 아이들에게는 자기 고장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들 했습니다.

 

거제조선해양문화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잠자리로 잡은 마을회관에서 둘러앉아 '사랑과 돈'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는 양산 아이들.

그리고 어느 하나 신경쓰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특히 음식에는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 한 끼를 때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고장 명물로 기억해도 될 만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밥집 답사도 많이 다녔습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다 보니 질과 더불어 양에도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양산 학생들이 통도사에서 점심 공양을 했을 때, 채소 반찬으로만 밥을 먹고 나중에 허기가 져서 저녁 밥상에서는 차려져 나온 돼지두루치기를 몇 그릇씩 먹어대던 모습이 기억에 뚜렷합니다.

 

한편 이번 탐방에서 어른들이 가장 많이 걱정했던 대목은 바로 장성한 남녀 학생들이 바깥에서 1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담당 선생님들에게는 누구보다도 더욱 신경쓰이는 대목이었습니다.

 

썰물에 맞춰 들어간 상족암에서 예쁜 척을 하고 있는 고성 아이들.

 

생각보다 훨씬 의젓했던 학생들

 

그래서 학생들은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게 여겼을 수 있겠지만, 담당 선생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이랑 같은 방에서 잠자리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겪어봤더니 아이들은 어른들 짐작보다 훨씬 의젓하게 잘 놀았습니다.

 

한 개인이 아니라 탐방에 참가한 모두를 먼저 생각할 줄도 아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함께하는 선생님을 배려했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습니다. 밤이 깊도록 한데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게임도 하고, 준비한 간식을 나눠먹거나 요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순천만 갈대밭에 파묻힌 사천 아이들과 선생님.

 

이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들은 고성 학생들이었습니다. 남녀 학생들이 모여앉아 밤이 깊도록 얘기를 나누고 게임을 하며 즐겼는데요, 어느 시점에 이르자 이제 그만하자며 '다함께 손뼉'을 치고는 자리를 정리하고 잠자리로 돌아가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술은 엄금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 잔 정도 마시고 싶어했습지요. 하하. 그래서 다음에 한다면 주도(酒道) 체험 프로그램을 곁들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러내 놓지 않고 숨기면 오히려 없는 문제도 생기고 작은 문제도 커지는 법이거든요.

 

눈내리는 해인사 뜨락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합천 학생들.

 

또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나가면 술 마시는 자리가 많아질 텐데 제대로 마시는 문화나 방법을 미리 익혀도 좋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다음에는 체험거리를 좀더 다양하게

 

학생들에게 주어진 체험은 떡메치기, 가마솥 밥짓기, 두부 만들기, 사진틀 만들기, 복조리 만들기 등 해당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름 준비했지만 겨울이라 좀더 다채롭지 못해 아쉬웠답니다.

 

장춘사 빨간 감이 그대로 달려 있는 감나무 아래 함안 학생들.

 

합천 뽈똥마을에서 했던 가마솥 밥짓기 체험이 가장 뚜렷하게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 합천'에 이런 데가 있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며, 다음에 친구들과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한 학생이 여럿이었습니다.

 

관룡사 들머리 석장승을 쳐다보고 있는 창녕 학생들.

 

이제 마치고 돌아보니 이런 프로그램이 경남 지역 전체 학생들에게 널리 퍼져 자기 고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작으나마 이바지하게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함께한 모든 친구들에게, 자기 고장을 떠나 세상에 나가서도 나고 자란 자기 고장을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갖게 되기 바랄 따름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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