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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살 남명매가 가장 어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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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14일치 원고입니다. 산청삼매, 정당매와 원정매와 남명매를 알려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울러 둘레 볼거리도 말씀드렸고요.

 

이지애 아나운서/ 금요일~ 여행코치와 함께하는 여행이 좋다!

여행코치죠,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김훤주/ 예, 반갑습니다. 어제 그제 봄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조금 쌀랑해졌죠.

그래도 봄인지라 주말이면 어디든 떠나고 싶습니다.

이지애씨는 어떠세요?

 

이/ 네, 저도 한 주가 정신없이 지나는 것 같은데...

지난주 알려주셨던 통영을 못 가봐서 조금 아쉽습니다.

대신 오늘 여행지는 이번 주말 꼭 가보려고 하는데 어딘가요?

 

김/ 봄기운이 더욱 빠르게 넘쳐흐를 것 같은데요.

오늘은 봄꽃 가운데 가장 먼저 피는 매화를 찾아 한 번 떠나보겠습니다.

산청삼매 이야깁니다.

 

이/ 오늘은 산청으로 매화를 찾아 떠나는군요. 

 

김/ 네, 우리 고장 산청군에 있는

아주 오래되고 빼어난 매화나무를 만날 텐데요.

먼저 단성면 운리 탑동마을 정당매와

단성면 남사마을 하씨 옛집의 원정매,

그리고 시천면 사리 덕천강가 남명매,

이렇게 세 가지 매화가 주인공입니다.

 

단속사지 정당매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입석리 용두마을 언덕배기 느티나무 있는 데서 개울가로 내려가면 이렇게 광제암문이라 적힌 바위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기까지가 단속사 경내였답니다.

이/ 정당매, 원정매, 남명매... 그럼 본격적으로

세 그루의 매화를 만나러 떠나볼까요?  

 

김/ 출발합니다~ 오늘 여행지는 서로 이웃해 있어서 자동차를 타고 둘러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당매와 원정매는 600살이 넘었고, 남명매도 450살이 넘었다고 합니다.

먼저 정당매, 있는 자리는 단속사라는 절이 있었던 절터인데요,

고려 말기 통정공 강회백이라는 인물이

여기 공부하러 와 있을 때 창문 밖에 심은 매화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고시 공부하러 온 셈인데

나중에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기 때문에 정당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매우 오래된 나무라 매화꽃이 굉장하게 피지는 않지만,

그래도 600살 넘은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죠.

 

정당매.

이/ 600살 넘은 매화나무의 꽃이라 ...

비밀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볼거리도 있나요?

 

김/ 네, 여기는 폐사지라서 다른 구경거리도 있는데

마을 앞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석재들입니다.

동네 어른들은 동탑을 수탑이라 하고 서탑을 암탑이라 하더군요.

 

이/ 탑에 암수 구분이라, 재미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 가까이 보이는 탑이 암탑.

김/ 생김새 때문인데

동탑은 꼭대기 머릿돌이 거의 깨지지 않아 관(冠)을 쓴 것 같아서 수탑이고,

많이 깨진 서탑은 모자를 쓰지 않은 민머리 같아서 암탑이라 한다네요.

 

이/ 아~ 동네 어르신들의 생각이 명쾌하네요 ㅋㅋㅋ

 

김/ 당간지주는 마을 아래쪽 소나무 우거진 데에 있는데

아주 곧고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둘레 풍광과도 썩 잘 어울립니다.

단속사 절터는 느낌이 조용해 그윽하고 아늑하고 따뜻한데요.

남향이면서 동쪽이 트여 있고 둘레보다 봉긋하게 솟아 있는 덕분으로 보였습니다.

 

단속사지 당간지주. 둘러싼 소나무도 멋집니다.

이/ 그럼 두 번째 매화는 어디에 있나요?

 

김/ 오래 된 기와집이 많은 남사예담촌에 원정매가 있는데요.

하씨고가라고도 하고 분양정사라고도 하는데,

또 매화집이라고 안내판까지 붙어 있어요.

그 집 뜨락에서 볼 수 있죠.

꽃은 붉은 색인데 앞서 정당매를 심은

통정공 강회백의 외할아버지뻘 되는 원정공 하즙이 이 원정매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 붉은 매화라 ... 직접 가서 그 향기를 맡고 보고 싶네요..

 

정당매. 원정매는 제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김/ 원래 둥치는 말라죽었고 대신 곁가지가 자라나 꽃을 피우는데요,

향기가 짙기로 유명합니다. 더불어

남사예담촌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습니다.

흙돌담장이 높다란 옛집들 사이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고요.

또 여기저기 솟아 있는 오래된 나무들을 눈에 담는 것도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보람입니다.

 

남사마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도중에 하룻밤 묵었다는 집을 찾아봐도 좋겠고,

개울 따라 나 있는 산책로를 더듬어도 괜찮습니다.

마을에는 밥집 찻집도 갖춰져 있어서

거기 들어가 느긋하게 쉴 수도 있습니다.

 

이/ 남사예담촌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꼭 가봐야 겠네요.

이제 마지막 매화를 만나야죠.

 

김/ 마지막 남명매는 시천면 소재지에 있습니다.

덕천강이 흘러가는 길목인데요,

강에 바짝 붙어서 산천재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이름난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이 예순 되던 해인 1561년에 지은 것인데요.

그 때 합천 삼가 외토리 생가를 떠나와 뜰에다 심었다는 매화나무가 지금 남명매입니다.

 

이/ 남명매는 나이가 400살이 넘었다고 하셨죠?

 

산천재와 남명매. 산청군 홈페이지에서.

 

김/ 450살을 조금 넘은 나이인데요, 그래도 산청삼매 가운데서는 가장 젊습니다.

남명 선생은 여기서 10년 남짓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늘그막에 왜 매화나무를 심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 이유는 남명선생만 알겠네요.. ?

 

김/ 남명 선생이 남긴 설매, 눈 매화라는 한시를 보면 조금은 짐작됩니다.

이렇습니다.

"홀로 지내기 어려운 가운데 한 해가 저물었네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조차 내렸는데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하던 선비 집에

매화 피어나니 맑은 기운 다시 솟네."

 

남명 관련 유적이 산천재 말고도

선생의 산소와 덕천서원, 세심정 따위가 더 있는데요,

어지간하면 이런 데까지 함께 둘러보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오가다보면 이런 모습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 네.. 오늘은 정당매, 원정매, 남명매 ..

우리 지역 산청의 매화여행이었는데요..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돼 유익한 여행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도 좋은 여행지 기대하겠습니다~ 

 

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 일러드린다면,

남명매 있는 산천재에서는

그냥 둘러보시지 말고

바깥 벽면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눈여겨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거기 담긴 뜻을 새기시는 보람까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열두 명의 고집 인생』 구주모 사장의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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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주완은 일선 기자 시절부터 유독 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도 단순한 캐릭터 분석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이 지닌 ‘삶의 궤적’-요즘 말로 하자면 인물 스토리텔링-을 종합적으로 살피는 데 강한 면모를 보였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인물 스토리텔링’에 큰 관심을 갖고, 그런 관점을 지면에 녹여낸 것도 이같은 ‘원초적 본능’이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김 국장이 이번에 펴낸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인터뷰이들이 털어놓는 성공과 보람, 좌절과 시련은 그들이 살아온 여정과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큰 공감을 자아낸다. 김 국장은 때론 친구처럼, 때론 집요한 추궁자가 되어 인터뷰이들이 삶을 털어놓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열두 명이 걸어온 삶 전체를 조망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책이 지닌 또 한 가지 미덕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인터뷰이들의 개인사를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딱딱한 외피에 둘러싸인 ‘내밀한 히스토리’를 더듬는 즐거움 또한 만만치 않다. 


등장인물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역민들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지역사회를 좀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유용한 매개체가 되리라 본다. 인터뷰 전체를 관통하는 유기적인 글 솜씨는 천생 기자로 살아온 김 국장을 다시 한번 주목하게 한다. /구주모(경남도민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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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의 고집 인생에 담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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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기에 오히려 잘 몰랐던 그들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


경남을 중심으로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유명인들을 심층인터뷰하여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기록한 책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인터뷰하기 전 철저한 사전 자료조사와 주변인물을 통한 탐문조사를 거쳤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서 내밀한 부분까지 찾아냈다.


강기갑 전 국회의원, 강민아 진주시의회 의원, 강병중 넥센그룹 회장, 고영진 경남도교육감,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 박영빈 전 경남은행장, 박완수 전 창원시장, 송정문 여성인권운동가, 이재욱 전 노키아티엠씨 회장, 조순자 가곡 예능보유자,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 열두 명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차


강기갑 전 국회의원

농사꾼으로 되돌아온 정치인/국회의원 중 가장 단식을 많이 한 까닭/자연스레 농민의 길을 선택하다/한국의 진보, 비판할 자격 잃었다/노총각, 14살 연하와 사랑에 빠지다/특별한 '밥 따로 국 따로 음양식사법'/그의 남은 꿈 "4억 빚 갚는 게 급선무"


강민아 진주시의원

싸움닭은 아니지만 ‘왕따’도 두렵지 않다/아버지가 의사였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여고생 시절 혈서를 쓰고 점거투쟁에 나서다/학교에서 정학 당했을 때 아버지의 한 마디/대학 문화패 활동으로 끼를 드러내다/졸업 후 노동현장 투신…첫 월급 43만 원/노동자문화패 새노리에 올인했던 시절/1997년부터 해온 진보정당을 탈당하다/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일 두 가지


강병중 넥센그룹 회장

군인·법조인이 되고 싶었지만…/군인의 기강… 그러나 섬세한 면모/방송인 강호동과 기업인 강병중/결혼과 졸업, 그리고 창업/창원상의 최충경 회장과 특별한 관계/'타이어 강' 일본·미국시장 진출한 사연/실패한 쓰라린 경험들/참 재미없는 사람이 느끼는 재미



고영진 경남도교육감

아버지는 사회 교사, 아들은 영어 교사/의병장 고경명·고종후의 후손/국제대 총장 시절에는 월급 전액 기부/기획단계에서 성과와 문제점을 미리 챙긴다/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대학 입시제도/큰 틀만 제시하고 세세한 부분은 자율에 맡긴다/교육감 이후, 더 이상 큰 욕심은 없다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

20여 년 풀뿌리 현장 지킨 마산 토박이/백찬기 의원 권유로 마산시의회 입성/3선 시의원 거쳐 재선 도의원으로


박영빈 전 경남은행장

고교 시절 나는 ‘날라리’였다/4대(代)가 은행원인 금융 명문가 출신/삼성그룹 합격했지만 안 간 까닭/문화예술에 눈뜬 런던 지점장 시절/더 이상 욕심은 없다



박완수 전 창원시장

고구마와 칼국수가 주식이었던 시골 소년/돈도, ‘빽’도 없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지만…/좋은 직장을 버리고 행정고시에 도전하다/김혁규 도지사에게 인정받은 ‘4인방’/김해 부시장직을 버리고 도전했지만…/2014년 새로운 도전이 주목되는 까닭


송정문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

세 살 때 넘어져 장애인이 되다/열여덟 살까지 ‘은둔형 외톨이’의 삶/악착같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나 아닌 다른 장애인들의 아픔을 느끼고/아이를 출산하고 장애인 인권에 눈을 뜨다/영화 비평을 쓴 후 ‘논객’으로 등극하다/교수가 꿈이었던 대학원생, 학교와 싸움을 벌이다/40대 이후 송정문의 ‘인생 3막’은?


이재욱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명함에 박힌 여섯 가지 직함/‘북청물장수’의 타고난 성실성과 향학열/“객지 사람도 하는데, 이 지역 사람은 왜?”/노키아의 쇠락, 그러나 서서히 올라갈 것/노키아 회장 월급은 국영기업체의 3분의 1/경영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조순자 세계 유일의 가곡전수관 관장

전수관 건립은 제자들의 힘이었다/교사가 된 제자들을 다시 가르치다/여전히 힘겨운 전수관 운영/서울 토박이가 마산에 뿌리내린 까닭/1964년 일본 공연 계기 가곡의 길로…/유네스코 등재 과정의 비화/국악으로 인간문화재가 되려면…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다/삼성장학생으로 대구대에 입학하다/군대에서 만난 사람, 인생 바꾸다/항해사 되어 해외 문물에 눈 뜨다/네 가지 악기 익히고, 조리사에 도전/기러기 아빠, 공부가 생활이 되다/삼성전자에서 초고속 승진하다/직원들에게도 인문학 공부 시키다/충분히 대우해준 만큼 되돌아 온다/‘서울 집중’ 해결 못하면 폭동…/청년이여! 해외로 눈을 돌려라



홍준표 경남도지사

은행창구에 있는 여직원에 반했다/스물일곱 번 이사를 다닌 사연/여자 있는 술집엔 절대 안 간다/모래시계 검사와 달리 나는 거칠었다/판표(判杓)에서 준표(準杓)로 개명한 이유/재정건전화 목적은 복지예산 확대/부자에겐 자유를, 가난한 자에게는 기회를/경남도지사 오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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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실직자가 품위있게 새 인생을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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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이 쓴 『어느 날, 백수』를 읽고


50대에 직장을 퇴직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나도 한국 나이로 52세, 만으로 쳐도 51세다. 아마 나도 길어봤자 몇 년 안에 퇴직하게 될 것이다. 당장 올 6월 말에는 편집국장 임기를 마치게 된다.


이런 시점에서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쓴 『어느 날, 백수』(비아북, 1만 3000원)를 읽었다. 저자 정운현은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존경하는 언론계 선배이자 내가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해준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정 선배는 만 49세 때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로 있던 중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으니 지금의 내 나이보다 3년이나 이른 나이에 실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실직한 중년이 망가지지 않고 당당하고 품위있게 사는 방법들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하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쪽팔림을 무릅쓰고 쓴 '50대 서생'의 백수생활 분투기'다.



나도 멀지 않은 시기에 지금의 직장을 퇴직해야 할 입장에서 정말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퇴직한 뒤에 읽기보다 지금 읽어둔 것이 훨씬 미래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퇴직 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읽어도 금과옥조와 같은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이미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40대, 50대, 60대의 필독서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 저자가 언론인 출신이자 역사학자인만큼 '서생 백수'(저자의 표현)들에겐 정말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 선배가 왜 미리 실직에 대비해 석·박사 학위 등 대학강단에 설 수 있는 준비를 해놓지 않았는지 궁금하면서 안타까웠다. 이 정도의 저술과 연구 업적이라면 웬만한 대학 교수 자리 정도는 충분한데도 말이다.)


책은 정말 단숨에 읽었다. 판형도 적당하고 쪽수도 207페이지 정도라 부담이 없을뿐더러 특유의 쉽고 편안한 글쓰기 덕분에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어느 날, 백수』를 읽으며 내가 밑줄 친 부분을 옮겨본다.


○ 실직을 하게 되면 인연이 끊어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가족 이외 업무상 인간관계는 대부분 깨지거나 사실상 소용이 없게 된다. 일단 집 밖 출입이 줄면 만남이 줄고, 만남이 줄면 연락이 끊기기 쉽다. 실직자한테 특별한 볼일 없이 전화 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비교적 활동 범위가 넓은 편이었는데도 결과는 비슷했다. 집 근처를 지나는 길에 생각났다며 연락하는 언론계 선후배, 출판사나 단체 등의 원고나 강의 요청 전화, 가뭄에 콩 나듯 걸려오는 지인들의 안부 전화가 전부다. 오는 전화는 그렇고, 내가 특별히 전화할 곳도 별로 없다. 완전히 백수가 되어 집에서 일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는 전화요금이 전에 비해 반도 나오지 않는다. 실직자가 되면 일단 외부적인 연락이 급격히 감소하는 게 보통이다.


○ 악조건 속에서도 '좋은 인연'은 잘 살려가야 한다. 마치 화롯불의 불씨와도 같다. 밖에서 만난 '좋은 인연'을 나는 '사회적 피붙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말이 있다. 그들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에 나는 실직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 명함은 그 사람의 직책과 연락처를 알려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명함을 내밀지 못하게 되니 사람이 위축되고 작아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혹자는 명함의 상실을 "사회적 자존감의 상실이며 힘의 추락이며 좌절"이라고도 말했다.


백수나 은퇴자는 이제 영영 명함을 가질 수 없을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꿈 명함'을 만들어 갖고 다니면 어떨까? '꿈 명함'이란 과거 직장의 직책에 있던 자리에 자신의 '꿈'을 적어 넣은 명함을 말한다. '일요 화가 OOO', '영원한 블로거 OOO', '평생 자원봉사자 OOO'와 같이 써넣으면 된다.


꿈 명함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을 깊이 각인시키는 효과도 있다. 이를 매개로 비슷한 꿈이나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도 이뤄질 수 있어 사교 수단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꿈 명함'은 자신의 미래 계획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은 도전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훌륭한 장치다. '꿈 명함'을 통해 은퇴자들 스스로 하나의 '개인 브랜드'를 만들어 자신감과 의욕을 되찾을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경우에 따라서는 '꿈 명함'이 일자리로 연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백수나 은퇴자도 자신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 직장인 출신의 중년백수 상당수는 중간 간부 이상의 직위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일반 회사로 치면 과장, 부장, 혹은 그 이상의 직위에도 재직했을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부하직원들로부터 과장님, 부장님, 이사님 소리를 들으며 제법 대접(?)을 받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실직하고 집에서 놀게 되면 어느 날부터인가 "아저씨!"로 불리기 시작한다.


.... '호칭은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 이제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 직장 다닐 때는 기록했는데 실직했다고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록 의지에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이런저런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실직 이후에도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청탁을 받아서 쓰는 글도 더러 있지만 상당수는 그냥 쓰는 것이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자 신경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 내가 글쓰기를 존귀하다고 상찬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글 쓰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 실직자일수록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별로 기록할 것도 없는 하루라고 여기지 말 일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숨 쉬고 하루를 버텨낸 것도 대단한 일이다.


....뭐가 됐든 간에 쓰고 기록하는 습성을 이제라도 들여야 한다. 그래야 내게도 미래가 열린다.


○ 흔히 은퇴자들은 돈만 있으면 노후 준비가 다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넘쳐나는 '시간들'이다. 하루 24시간 중 수면과 일상생활에 소비하는 시간을 13시간 정도로 잡으면 11시간이 남는다. 이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무려 12만 시간이나 된다. 이 많은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 말콤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어느 한 분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은퇴 후 12만 시간이며 열두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다. 텔레비전을 끄고 매일같이 가는 등산은 조금 줄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은퇴 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시간 관리와 소일거리에 따라 남은 30년 인생의 행 불행이 갈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대체적으로 한국인들은 도서관 이용에 별로 친숙하지 않다. 40~50대 중년 세대들은 더욱 그렇다. 도서관에 많이 가보지 않아서 그렇다.


.... 그런데 요즘은 도서관에서 고전강좌, 독서토론 등 다양한 문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어 성인들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내가 즐겨찾는 두 도서관에도 이런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여럿 걸려 있다. 최근에 일기 시작한 인문학 붐은 도서관이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대부분 실직자는 시간이 많다. 남아 도는 게 시간이다. 어떤 때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일과인 경우도 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60~70대는 종묘 앞 광장으로, 40~50대는 기원으로 향하는 게 보통이다. 이제 발길을 도서관으로 한 번 돌려보자. 도서관은 나이 제한도 없고 입장료도 없다. 책은 기본이고 어떤 도서관에서는 재미있는 영화를 공짜로 상영하기도 한다.


.... 실직은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 정신적 피폐를 가져오기 쉽다. 그럴 경우 묘약은 책이 아닐까 싶다. 책에는 동서고금 현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고 숱한 정보가 살아 넘친다.


.... 가볍고 재미있는 만화책도 좋고 통속소설, 대중잡지도 좋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대로 읽어도 좋고, 한 권 다 읽지 않았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편식은 건강에 해로운지 몰라도 편독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렇게 영혼의 양식이 그득해지면 정신의 건강은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다. 소일에, 자기 위안에, 게다가 심신의 건강까지. 이보다 더 좋은 방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 (도서관) 회원이 되면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각종 행사를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안내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런 행사에 자주 참석하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사교 활동을 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고 바깥출입이 줄어들수록 사람 만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 실직 초기에 하루빨리 새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화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되레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일자리가 쉽게 나타나지 않자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가게를 차렸다가 홀랑 털어먹기도 하고 급한 마음에 준비 없이 귀농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도 더러 봤다.


○ 한 번 기회를 잃었다고 해서 전부 잃은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좀 먼저 직장을 나왔다고 해서 무덤에도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세상사 1등이 있으면 2등도 있고 3등도 있다. 마라톤 같은 인생에서 역전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준비하기 나름이다. 해외여행 가려고 95세에 영어공부를 시작한 할아버지도 있다지 않은가.



○ 동서고금을 통해 중장년에 대성한 예가 적지 않다.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 65세에 직장에서 은퇴한 할아버지는 95세 생일 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일까? 할아버지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으니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기다렸다. 덧없고 희망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다"며 "그 때 내가 이미 늙어버려 뭔가 시작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고 밝혔다.


○ 95세에 할아버지가 평소 하고 싶던 어학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 째 생일에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 백수일수록 더욱 절조있고 품위있는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어느 날, 백수 - 10점
정운현 지음/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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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첫 걸음은 기차 타고 원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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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어제 저녁 창원교통방송에서 씨부랑댔던 원고입니다. 양산 원동 매화는, 오늘과 내일이 축제이기는 하지만, 다음 주말에도 아주 좋을 것입니다. 마산을 기준으로 볼 때, 이렇게 가까운 데에 이만한 매화가 있다는 자체가 참 작은 복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듭니다요.

 

▶ 행복! 플러스 플러스

 

금요일~ 여행코치와 함께하는 여행이 좋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오늘은 날씨가 좋은데 어디로 떠나나요?

 

김/ 오늘은 올 한 해 시작을 알리는 양산 원동매화축제를 소개할까 합니다. 올해로 벌써 여덟 번째인데요 내일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열립니다. 개회식은 내일 낮 2시 양산 원동면 쌍포매실다목적광장, 주소로는 영포리 537번지에서 하는데요.

 

 

매화 꽃 구경하고 적당하게 마련돼 있는 먹을거리 마실거리 즐기면서 미나리·고로쇠물·도토리묵 같은 지역 특산물도 둘러보고 쓸만 하면 사보셔도 좋겠습니다.

 

이/ 축제장은 항상 주차장이 문제잖아요. 양산 원동매화축제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을까요?

 

네,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가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주차난 교통체증을 피하기는 어렵겠고요, 그래서 가장 좋기로는 기차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시간을 좀 알아봤는데 마산역에서 아침 8시 15분과 12시 17분, 그리고 오후 3시 2분에 떠나는 기차가 있고요, 원동역에서는 오후 1시 42분과 7시 32분에 마산으로 돌아오는 기차가 있습니다.

 

이/ 우와~ 친절히 기차시간까지^^ ㅋㅋㅋ

이동시간은 어느 정도 걸리나요?

 

 

마산역과 원동역 오가는 데는 50분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축제 기간에는 원동역과 행사장을 잇는 셔틀버스가 20분마다 다니는데요, 공짜니까 이용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축제를 비롯해 볼만한 건 뭐가 있을까요?

 

원동역 부근에는 원동면 사무소가 있는데요, 여기에는 70년대와 80년대풍 건물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장년층에게는 이런 것조차 추억거리가 됩니다만.

 

또 원동역 가까운 매화공원 순매원은 이미 매화가 활짝 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 제일 많이 찾는데요, 그렇다 해도 축제 행사가 열리는 데까지는 한 번 찾아가봐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 주말에 가면 만개한 매화는 볼 수 있는 건가요?

 

 

물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죠. 또 꽃만 잔뜩 바라고 가시면 꽃 말고 다른 것에는 눈길을 돌릴 줄 생각도 못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마음 넉넉하게 가지시고, 사람들 곁으로 찾아오는 봄의 모든 기운을 느끼고 누리겠노라 여기시는 편이 훨씬 행복하겠죠.

 

또 축제가 열리는 행사장 가까운 데에 신흥사라는 절간이 하나 있습니다. 통도사처럼 볼거리가 쏟아질 정도로 많지는 않습니다만, 대광전이 아주 멋집니다.

 

요즘 같이 봄볕이 좋을 때는, 들머리 사천왕문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 어두컴컴한 그늘을 지나 환한 햇살을 온통 누리는 대광전을 온전하게 감상하실 수 있고요, 그 앞에 나와 있는 배롱나무도 퍽 씩씩해 보입니다.

 

그리고 돌아오실 때는 아무리 무료라도 셔틀버스를 다시 타시지 말고, 천천히 걸어오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원동역에서 행사장이 있는 영포까지는 올라가야 하지만 거기서 돌아올 때는 내리막길이어서 그다지 힘도 들지 않거니와 둘레에 매화들도 많이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럼 걸어서 돌아 나오는 게 좋겠네요?

 

그렇죠.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도 매화는 꽃이 감탄을 자아내도록 만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하늘거리는 꽃잎이라든지, 부풀어 올라 퍼질 것 같은 매화 꽃봉오리, 그 속에 숨어 있는 청매화의 연둣빛 물색, 홍매화의 분홍빛 물색 따위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좀체로 자기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시는 길에는 역전 포장마차나 허름한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 또는 쓴 소주 한 잔 일행과 함께 나누는 것도 작지 않은 즐거움일 것입니다. 요즘은 막 봄이 샘솟는 시절이라 멍게나 조개 따위 해물 안주가 한참 좋을 때니 주말 좋은 여행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 오늘은 양산원동매화축제를 소개해 주셨는데요 ~ 지금까지 여행코치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와 함께 했습니다~ 이어서 노래 한곡 듣죠.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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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 소개된 '열두 명의 고집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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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2일) 아침 MBC경남(진주) 라디오 '좋은 아침입니다'(연출 박흥준)와 10분여 가량 인터뷰를 했다. 강수진 아나운서가 묻고 내가 답하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시간 관계상 미처 라디오에선 말하지 못한 내용도 있다.


강수진 : 유명인을 인터뷰한 책이 출시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그들의 성공비결이 무엇인지, 어떤 철학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이 궁금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건 아니죠. 질문자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어떻게 대답을 이끌어내느냐가 중요한데요, 이런 의미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책이 출간됐습니다. 우리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나고 그들의 철학과 식견을 숨김없이 담은 책인데요..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이란 책입니다. 


저자인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편집국장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Q. 강수진 : 책 제목이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입니다. 책의 좌측 상단에 ‘유명하기에 오히려 잘 몰랐던 그들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란 설명글이 있는데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지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김주완 : 예. 강기갑 전 국회의원, 강민아 진주시의원, 강병중 넥센그룹 회장, 고영진 경남도교육감,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 박영빈 전 경남은행장, 박완수 전 창원시장, 송정문 여성인권운동가, 이재욱 전 노키아티엠씨 회장, 조순자 가곡 인간문화재,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홍준표 경남도지사, 이렇게 열두 명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Q. 이 책은 경남도민일보에서 발행하는 <피플파워>라는 잡지에 수록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셨을 텐데, 이 중에 열두 명을 추려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을 한 건가요?


삶의 굴곡이 크고, 스토리가 많은 열두 분을 추렸습니다. 이 분들보다 더 훌륭하거나 유명한 분들도 있었지만, 인생 스토리 자체가 단조롭고 재미없는 분들은 제외했죠.


Q. 책 제목이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집 인생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주체적이고 도전적으로 현재의 인생을 개척해온 사람들이란 의미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 공무원 출신들의 경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정년까지 잘 마치고 퇴직을 한 뒤, 또 선거에 출마하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박완수 전 창원시장의 경우 정년까지 13년이나 남아 있는 상태에서 김해부시장이라는 좋은 자리를 버리고 나와 한 번 선거에서 떨어지는 쓰라림을 겪고 재도전해 창원시장에 세 번이나 당선됐죠.


이 분은 공고 졸업 후 당시 가장 좋은 직장이라던 일본계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대학과 행정고시에 도전했던 전력도 있어요.


그리고 인간문화재 조순자 선생의 경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악을 배웠고, 서울 태생이지만, 경남에 와서 유네스코 인류유산이 된 가곡이라는 분야를 개척해 예능보유자가 된 억척스럽고 고집스런 분이죠. 


Q. 강기갑 전 의원, 홍준표 현 경남도지사를 비롯해서 강민아 진주시의원, 송정문 경남장애인협회 대표 등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판매부수를 생각하면 유명한 사람들을 위주로 구성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은 없으셨나요?


세속적인 출세 기준이나 지위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경남이라는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 강민아, 송정문 이런 분이야말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력이나 권력을 갖고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분들이 있다면, 비록 돈과 권력은 없지만 그런 주류 권력이 썩지 않도록, 그리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지역의 소중한 인물자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송정문, 강민아 두 분이 그런 쪽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보고 그 분들의 삶을 기록한 거죠.



Q. 인터뷰 준비는 어떻게 하시나요?


일단 대상이 정해지면, 그 분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봅니다. 그 분이 쓴 책이 있으면 책을 사서 읽고, 다른 매체에 인터뷰한 게 있으면 그것도 모두 찾아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동안 언론에 많이 나온 유명한 사람도 정작 그 분이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어떻게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의 철학이나 가치관, 정신세계,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된 배경이나 이유, 이런 걸 알 수 있는 자료들이 거의 없어요. 예를 들어 상공회의소 회장의 경우 그동안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대개 질문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어떤 방안을 갖고 있습니까’ 뭐 이런 질문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거의 모든 인터뷰가 딱딱하고 드라이하죠.


어쨌든 그나마 그런 자료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좀 쉬운데, 그런 것마저 없는 분들도 있죠. 그러면 그 분을 알만한 사람들, 대학동창이라든가, 직장동료 이런 사람들을 찾아내서 전화를 걸어 ‘어떤 사람이냐’ ‘대학시절은 어땠냐?’ 뭐 이런 식으로 탐문조사를 하죠.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 최대한 알고 가지 않으면 구체적인 질문를 할 수 없고, 그러면 내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가 없거든요. 


Q.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르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터뷰하기 싫은 사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괜히 곤란한 질문을 준비해서 던진다거나. 이렇게 하면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경우는 없으셨나요?


그런 경우도 있죠.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사람들의 인터뷰는 정치적인 현안에 대한 입장을 듣기보다는 그 사람을 탐구하는 게 목적이다 보니 거기에 집중하진 않았습니다. 인터뷰이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기가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경우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부자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부자에게 자유보다는 책임을 더 강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죠.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자신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특유의 에고이즘”을 지적하기도 했고, 반대편까지 아우르는 화합과 관용의 자세가 더 필요하다는 충고도 했죠.


Q. 정치인들의 경우 단정적으로 대답을 하기 보다는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시나요? 그냥 넘어가는 편인지, 아니면 분명한 답을 내놓을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스타일이신가요?


그런 편입니다. 예를 들면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을 인터뷰하면서, 청탁이나 뇌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지금까지 뇌물을 줄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냐, 그런 유혹은 어떻게 대처하느냐, 인사치레라도 돈을 주려던 사람은 없었느냐, 골프는 치느냐, 정말로 치는 방법도 모르냐, 왜 골프를 안 배웠냐, 의원이 되면 골프 접대도 많지 않느냐, 앞으로도 골프는 안 칠거냐? 이런 식으로 끝까지 물고 늘어진 일도 있었습니다. 


Q. 열두 명 중에 정치인이 5명, 경제인이 4명 그리고 다른 분야의 3명입니다. 이 중에는 시간을 오래 내기가 힘든 사람도 있었을 텐데, 시간에 쫓기듯 인터뷰를 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괜히 만났다.. 이런 생각도 들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습니까?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은 딱 한 사람 빼고 최소한 두 시간 이상씩 인터뷰를 했습니다. 홍준표 도지사만 딱 55분을 했는데, 그것도 홍 지사 쪽에서는 언론과 했던 인터뷰 중 가장 오래 했다고 하요. 대개 이런 기관장들 인터뷰는 미리 서면으로 질문을 보내고, 비서실이나 공보실에서 답변을 대신 작성해주면 정작 인터뷰는 10분 정도 만나 차 한 잔하면서 사진만 찍는 걸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저는 그런 인터뷰는 안 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Q. 어르신들이 흔히 하시는 말로,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된다고 하시죠. 선입견에 사로잡힐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시는 건데요.. 이 책에서 소개한 명사들 중에, 직접 만난 이후에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뀐 사람이 있다면요?


우선 강민아 진주시의원의 경우, 만나기 전에는 굉장히 깐깐하고 심각하고, 전투적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직접 만나보니 아주 밝고 명랑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겁니다. 그래서 놀랐어요. 그리고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의 경우, 강인하고 저돌적인 이미지였는데, 직접 만나보니 의외로 세심한 면이 많았고요.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은 딱딱한 기업인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진정으로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고, 직접 악기를 연주도 하고, 심지어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요리학원까지 다니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더군요.


박완수 전 창원시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여동생과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고요. 홍준표 도지사는 고려대 재학시절 우연히 은행에 돈찾으러 갔다가 한 눈에 반한 은행 창구 여직원을 꼬셔서 5년간 열애 끝에 결혼하여 지금까지 동반자로 살고 있는 순정파더군요. 그리고 넥센그룹 강병중 회장은 방송인 강호동 씨의 아버지와 사촌이고, 둘의 관계도 각별하다는....


Q. 많은 사람들이 유명인과 인터뷰를 한 책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성공비결을 캐내길 기대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는 어떻습니까? 


네, 그런 말이 있죠. “성공한 사람 10명을 인터뷰하면 성공한 사람 10명의 머리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10명의 성공 노하우가 담긴 책을 읽으면 그들의 성공 노하우가 나의 경쟁력이 된다.”는...


사실 이 책에도 기업가나 정치인들의 깨알 같은 성공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충경 경남스틸 사장 같은 경우,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 어렵게 자랐고, 명문대학교를 나오지도 못했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사람과 인연을 중시하는 태도, 이 분은 군대에서 만난 동료와 인연이 되어 그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게 됐고, 그게 창업으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리고 군 제대후 항해사 자격증을 따서 상선을 타고 외국 문물을 익혔던 것, 이런 것들이 성공 요인이 됐더군요.


Q. 이 책에서 소개하진 못했지만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좀 소개해 주시죠.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309일간 크레인 농성을 하고 내려왔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그리고 한국형 폭탄주의 원조라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 등이 기억에 남는데, 두 사람이 참 대조적인 삶을 살아왔더군요. 김진숙 지도위원의 경우 살아온 과정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나는데, 지금도 가장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게 참 안쓰럽더군요. 그러면서도 표정과 말투는 늠름하고 흔들림이 없어요.


Q. 끝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될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다면 부탁합니다.


이 책에 담긴 상당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소위 출세한 사람, 기득권 세력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리고 정치적으로 보수 쪽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김주완이 왜 이런 사람을 조명하느냐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일선 기자로 일할 때 우리 지역의 근현대사, 그러니까 지역의 역사를 발굴하는 취재를 많이 했는데요. 의외로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를 움직여온 중요한 공적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더라고요. 그래서 싫든 좋은 이 사람들이 당대 지역사회를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들의 삶과 철학, 그리고 활동기록을 남기는 게 기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이 나름 중요한 역사 기록물이 될 것이라고 보고요. 많은 분들이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볼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의 저자,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편집국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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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원공사 이번 토론회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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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원공사 하천 관리 방안 대토론회

 

3월 20일 한국수자원공사 경남부산지역본부가 창원컨벤션센터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하천 관리 방안 대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안효원 본부장은 물론 대전 본사 수자원사업본부 최병습 본부장까지 참석한 데 비춰 수자원공사로서는 퍽 신경써서 마련한 자리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후 2시 시작한 토론회에서 발표는 안종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기획팀장(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하천관리전략 및 추진방안-낙동강 물환경 정책 중심으로), 이상용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수질환경센터장(도랑살리기를 통해 생명 넘치는 강과 하천 만들기), 이상종 한국수자원공사 낙동강수계통합물관리센터 운영팀장(낙동강 수계 댐-보 연계 운영을 통한 수량-수질 관리 방안)이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 아홉 사람(최동호 낙동강유역환경청 유역관리국장, 이재기 경남도 수질관리과 사무관, 최규현 낙동강 홍수통제소 시설연구관, 이상용 수질환경센터장, 양운진 한국생태환경연구소 이사장, 정우창 경남대 토목공학과 교수, 이송희 한국수자원공사 경남부산지역본부 운영처장, 서규태 대한환경공학회 회장)은 토론을 했더랬습니다.

 

토론자들.

 

이 가운데 좌장은 창원대 환경공학과 교수이기도 한 서규태 회장이 맡았습니다. 저랑 같이 토론석에 앉았던 면면을 보시면 충분히 짐작이 되겠지만, 전문 지식이나 전문 기술면에서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가 그런 쪽에 입질을 할 깜냥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랑 살리기 운동에서 민간의 자율성과 주도성이 앞으로도 유지돼야 한다는 생각과, 여태껏 지역 사회에서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던 수자원공사가 이렇게 지역사회에 적극 개입해 소통·교감하려는 자세를 보여 정말 좋다는 느낌을 말씀드렸습니다.

 

 

도랑살리기는 민-민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생각해 보면 도랑 살리기는 이렇습니다. 한국생태환경연구소 같은 민간에서 먼저 시작을 했고 낙동강유역환경청과 수자원공사 경남부산지역본부에 그 효과와 필요성을 역설해 관련 예산을 지원받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갈수록 그 필요성과 효과가 두드러지게 되니까 지금은 낙동강청·수자원공사는 물론 자치단체도 관련 예산을 짜는 등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환경부를 비롯해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법률·제도 측면에서 내팽개쳐져 있었던 도랑을 위해 법제화를 추진한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하천법과 소하천정비법이 있지만 여기에는 하천과 소하천만 대상이 될 뿐 도랑처럼 가는 물줄기는 대상으로 삼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랑에 대한 법제화가 이뤄지면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측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민간의 자율성과 주도성이 사라지고 지방자치단체나 중앙정부 같은 관청이 주도하고 혼자서 결정할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도랑 살리기 운동은 토목·건축 사업이 아닙니다. 도랑을 앞뒤에 두고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운동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부분 중앙정부나 자치단체 같은 관에서 한다고 하면 일단 기대하고 기대는 성향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순한 토목·건축 사업이 아니고 지역 주민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민간단체에게 그들이 자율적으로 주도적으로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맞다고 본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했던 민간의 자율성·주도성 보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랑 살리기 운동은 민관 협력뿐 아니라 민-민 협력도 이룩돼야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름 전문성을 갖춘 민간 단체와 도랑을 앞뒤에 두고 살아가는 마을의 주민들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관(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은 당연히 이렇게 되도록 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와 어울리기 시작한 수자원공사

 

다른 하나, 수자원공사의 태도 변화입니다. 지금껏 수자원공사는 지역에서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할 일만 설렁설렁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한테 주어진 할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상용 센터장의 발표 장면.

 

이런저런 물들을 관리하고 파는 일인데, 이는 상수도관을 통해서만 지역 주민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자원공사 또는 수자원공사의 물 관리 탓에 불편이나 손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편의나 시설·물품을 대어주는 일이겠습니다.

 

물론 여태까지처럼 조용히 소리 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것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다 보니 지역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해 왔습니다. 그래서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같은 존재’라는 극단적인 비난을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울러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는 그 일을 수자원공사가 주관했기 때문에 또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수자원공사의 태도 변화를 저는 이번 대토론회 개최에서 느꼈습니다. 이런 토론회를 여태까지는 경남도 같은 광역자치단체나 지역에서 강과 물을 아끼는 민간단체들이 열었을 따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환경부 직속인 낙동강유역환경청 같은 데서도 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수자원공사 경남부산본부가 이렇게 지역의 강과 하천과 도랑을 두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를 따져보는 토론회를 크게 열었습니다. 지역의 문제를 갖고 지역의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저는 수자원공사가 앞으로도 줄곧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지역 사회 구성원 가운데 하나라고 스스로를 여기면서 지역 사회 구성원답게 지역 사회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수자원공사가 어떻게 하면 지역사회에 작으나마 이바지하고 지역 주민들 삶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할 수 있겠는지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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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칠미술관 안 들르고도 통영 다녀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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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

 

‘옻칠’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낯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 공예 가운데 하나이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 곁에서 한 번 찾아보면 아예 없는 때가 많답니다. 언제부터 이리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씀입니다.

 

이런 옻칠에 평생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1935년생인 김성수 통영옻칠미술관 관장입지요. 1월 28일 오후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통영 용남면 화산리 그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 그이에게서는 진짜 향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옻칠이 경남의 브랜드인 까닭

 

“지금 경남에도 신경 쓰는 사람이나 단체가 전혀 없기는 하지만, 옻칠은 경남의 브랜드입니다. 한 번 짚어볼까요?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옻칠 붓·부채·그릇 등이 나왔어요.

 

 

중국 영향이 없는 자생적 옻칠이었지요. 2200년 전에 말입니다. 2011년에는 다호리 고분군 옻칠이 고유한 우리것임을 밝히는 고고학 논문도 나왔어요.

 

또 합천 해인사에 고려시대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잖아요? 그 경판이 다 옻칠이 돼 있어요. 지금까지도 보존이 완벽하게 되는 까닭이 이 옻칠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 문화 유산이 경남에 있으니 옻칠이 경남 브랜드라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통영에다 열두공방을 설치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상하칠방입니다. 상하칠방에서 자개 장식에다 옻칠을 더해 나전칠기를 만들었으니 지금과 바로 연결되는 역사만도 420년입니다. 그러니 옻칠이 경남 브랜드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옻칠 분야 으뜸이 되기까지

 

통영이 고향인 김성수 관장은 1951년 나전칠기 공예에 들어선 옻칠 분야 최고 전문가·예술가입니다. 홍익대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학장, 디자인대학원 원장 등도 지냈습니다.

 

잔입니다. 하나에 8만원. 무척 예뻐서, 냉큼 사고 말았답니다.

 

그이 옻칠 작품은 현대 미술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답니다. 이런 그이가 2006년 통영으로 돌아와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옻칠미술관을 열었습니다.

 

“1951년 청와대가 부산에 와 있었어요. 경남도청 소재지가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된 거지. 사람들이 피란을 와 있었는데 금붙이를 갖고 있어도 팔 데가 없어서 다들 굶고 있던 시절이었지요.

 

이런 가운데 청와대 쪽에 사람들이 모여 갖고 화염 속에 우리 문화재가 파괴되고 없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맨손으로 가만 있지 말고 다음에 복원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않겠느냐 의논이 됐어요.

 

그러면 자리는 어디로 할까, 통영은 50년에 이미 인민군이 한 번 지나간 자리고 400년 가져온 뿌리가 있으니까 거기 두자, 이래서 경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들어서게 됐어요.

 

미술관에 있는 옻칠 생활 소품들.

 

광복 이후 서구 교육을 받은 제1호, 디자인 교육이지요. 당시 왔던 선생님들 가운데 이중섭 선생도 끼어 있었어요. 친척 아저씨 한 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오는데 너 여기 가서 배워 봐라’ 하셨는데 저도 모르게 도취돼 갖고 몰두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설계 제도를 배웠는데 그게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공인된 첫 기술이었어요. 서울대학교에 응용미술과가 생긴 때가 1956년이니까 말이에요. 거기서 창의력을 키웠습니다. 두 해 마치고 부산으로 가서 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진학하러 가려다 1956년 기술원 부소장(소장은 도지사)이던 김봉룡 선생이 찾아와 ‘통영 가자’ 해서 다시 붙들려 왔습니다. 강사를 했었지요.

 

김성수 관장의 옻칠 그림.

 

그런데 몇 년 쭉 해보니까 제가 나름대로는 아이디어를 갖고 열심히 가르치는데, 통영에서는 볼 것도 없고 참고서적도 없고 해서 서울 갈 결심을 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김 관장 얘기가 아니더라도 돌이켜보면 경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는 당대 으뜸 명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현대적인 감각을 지닌 다른 분야 예술가들도 난리를 피해 통영에 많이 와 있기까지 했었습니다.

 

김봉룡(줄음질)·심부길(끊음질)·안용호(칠예)·장윤성(데생)유강렬(디자인) 같은 인물에게서 배웠고요, 강창원·이중섭 같은 거장의 특강도 이어졌던 것이랍니다.

 

 

“1962년입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심판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서 지내며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을 했어요. 공예부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처음 출품해 처음으로 최고상을 말입니다.

 

라디오에서 ‘김성수’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어디에 사는 뭐 하는 사람이냐, 남자냐 여자냐, 이런 물음이 나올 정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몇 년 연거푸 상을 받게 됐어요. 그러니 홍익대학교에서 초청해 강사로 위촉을 합디다.”

 

 

“1969년 홍익대 강단에 섰고 1972년 숙명여대로 옮겨갔는데, 제가 어느 정도 올라가져서 전국 최초로 디자인대학원 설립 신청을 했는데 인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장신구 디자인 오브제 작품 창조, 디자인을 통해 옻칠 교육이 이뤄지고 했습니다.

 

이밖에도 제가 옻칠을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옻칠협회도 창설하고, 무형문화재 인간문화재도 키우고, 전람회 출품도 많이 했는데 옻칠이 귀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옻칠은 쫓겨나게 되고 우레탄칠을 하는 것이 많지요.

 

게다가 서울은 문화가 다양하니까 아무리 활동을 해도 파장이 크지 않았습니다. 옻칠로 국선 입선해도 아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지, 전업작가조차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옻칠을 되살리려는 노력

 

김 관장은 자기 혼자 잘 나가는 예술가로 인정받으며 살려 했다면 편하게 살 수도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옻칠이 그이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20년 넘게 애를 썼는데도 옻칠은 죽어만 가고 알아주는 사람도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김성수 관장의 옻칠 그림.

 

“역발상을 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대접을 못 받지만 거꾸로 미국에 가서 옻칠로 만든 예술품이 거기서는 통하더라, 그렇게 해서 역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오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미국 가서 사는 큰 딸한테 ‘미국에다 작업실을 하나 만들어다오’ 했습니다.

 

이렇게 1998년 미국 들어가서 활동을 하는데 그 곳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아, 서광이 비치는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래커 페인팅(lacquer painting)이 너무 좋기는 한데 너무 비싸다, 그 값이면 미국 유명 작가 작품을 살 수 있다’ 이래요.

 

미술관에서 옻칠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미국에서도 ‘래커’는 싸구려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옻칠 평가절하시키는 ‘래커’라는 한 마디였지요. 미국은 아무 것이나 수용해 주는 나라니까 왔는데, 한없이 서글프고 고민스러워하며 돌아갈까 말까 하고 있는데 미국 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특이한 것 가져와 창작 활동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2003년이 미국 이민 100주년이니까 2002년부터 전시를 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차, 잘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래커’라는 말을 없애야겠다, 작품에서 액자를 걷어내야 하겠다, 갑작스레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옻칠 그림을 액자 속에 넣어놓으니 내가 봐도 영판 서양 그림이라.

 

 

그리고 옻칠의 물성, 옻칠이 갖춘 특성, 방수 효과도 있고 썩지 않는 방청 효과도 뛰어난데 래커라는 일반명사에서 벗어나 ‘옻칠(ottchil)’을 고유명사화하자. 한·중·일 세 나라에 고유한 예술로 말이지. 옻칠 페인팅, 옻 페인팅 이렇게 말입니다.

 

첫 해는 로스엔젤리스와 샌프란시스코 이듬해는 뉴욕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한국에서 보려면 어디 가야 합니까?’ 이래요. 이전과는 느낌이, 표정이 달라진 것이지요. 하하. 뉴욕에 있는 한국문화원 원장이 빨리 돌아가서 미술관을 한 번 만들어 봐라 했어요.”

 

결심을 하기는 했는데 서울에서는 만들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교수 해가지고 작품 몇 개 팔았다고 해도 서울서는 만들 수가 없는 미술관이었던 것입니다. 다달이 월세도 줘야 할 뿐 아니라요, 옻칠이 몽땅 망하고 한 사람도 없는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으리라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옻칠 그림.

 

“그러나 통영은 뿌리가 있다, 역사를 갖고 공략하자, 다짐했습니다. 2004년 바로 가서 정리하고 여기다가 땅을 확보하고 서울서는 귀국 신고만 하고 바로 여기 통영으로 왔습니다. 마산 문신미술관에 이어 민간 미술관 2호라 할 수 있겠지요.

 

연금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족이 아내 설득이 힘들기는 했습니다. ‘애들한테 당신은 먹고 살 수 있지 않느냐? 나는 옻칠을 하다가 죽을 테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학교에서 옻칠을 가르쳐야

 

김 관장은 옻칠 작품을 만들어 팔아 그 수익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 관장 말을 들어보면 운영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미술관 홍보부터 하기 어려운 그간 사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제 한 조선업체에서 일하는 독일 사람인데, 귀국하기 앞서 한국 고유 작품을 사고 싶어 옻칠미술관에 들렀답니다.

 

고향이라고 돌아왔으나 좋게 보는 눈길만 있는 것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무슨 속셈으로 왔을까?’ 미심쩍어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통영 관광 오는 사람들이 바다·섬·생선 이런 것 때문에 오지 옻칠미술관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관광 온 사람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실낱같은 희망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저는 100% 적중했다고 봅니다. ‘바다만 보지 말고 옻칠미술관 거기는 꼭 가봐라!’ 오시는 사람들 발걸음을 보면 이제 좀 이런 게 되는 것 같아요.”

 

김 관장은 옻칠이 죽게 된 까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되살리기가 그렇게 손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60년 넘는 한 평생을 옻칠예술에 바쳤는데, 그냥 그것으로 당대에 끝나버리고 말는지도 모르는데도, 김 관장 본인이 나서서 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속이 더 타는 모양입니다.

 

“우리 전통 뿌리문화가 옻칠이 아닌 ‘카쉬’라는 질료 때문에 죽었어요. 옻칠은 비싸지만 카쉬는 싸거든요. 통영이 나전칠기로 유명지만 옻칠을 쓰는 데는 하나도 없어요. 또 6.25전쟁통에 다들 가난해서 옻칠 장인들이 가족들 먹여 살리기 위해 이직을 했습니다.

 

통영옻칠미술관 유리 넘어 김성수 관장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단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금보다 귀한 것인데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옻칠인 줄 알고 있는 옻칠은 재료가 옻칠이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 체험을 하고 깨닫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경남도교육청에서 시·군 교육지원청을 통해 지역 뿌리 문화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옻나무도 심어야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자리 창출도 많이 됩니다. 자개는 자연 전복 껍데기로 만들어야 하는데 죄다 양식뿐이라 어렵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전칠기, 옻칠이 살아나면 바다 전복 키우는 사람도 부가가치 엄청나집니다.

 

작품 창작 하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나무그릇 만드는 사람, 옻나무 기르는 사람 이렇게 말입니다. 옻나무는 약리 효과도 있어서 식품쪽으로도 발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역 향토 문화와 전통 지역 특산으로 삼아 경남 브랜드가 되면 덩달아 세계적인 명품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정을 해 갖고 지역 대학에서 가르치게 하는 것입니다. 시범학교 이런 제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 미술관 옻칠 체험 학교 아카데미 교육을 하고 있는데요, 아이들 같은 경우는 집중력이 좋아져서 학교 성적도 올라갑니다.

 

이렇게 지역 학교에서 지역 전통 문화·예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꼭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옻칠을 하는 까닭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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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대농원이 2000원 싸게 닭죽 판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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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12월에는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을 진행하고 2014년 1~2월에는 그 결과를 저희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를 해 올렸습니다. 모두 10개 시·군에서 열세 차례를 치렀었습지요.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탐방의 취지는?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아 제대로 모를 수밖에 없게 된 자기 고장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고 즐거운 기분으로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으로 익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공부하듯이 학습하듯이 가르치듯이 하면 당연히 아이들 흥미를 잃을 것이기 때문에, 특징과 성격 위주로 설명은 최대한 간단하게 하는 한편 아이들이 좀소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제 졸업만 하면 곧바로 자기 고장을 떠날 사람이 대부분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부터, 이런 기회를 마련해줘 나중에라도 자기 고장을 사랑하고 아끼고 떠올리게 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물론 이런 뜻을 바로 인정 이해해 준 경남도교육청과 해당 지역 교육지원청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저희도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해 만장대농원 백숙

 

 

이렇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도중에 가장 뿌듯하고 보람 있는 때를 꼽는다면 저희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잘하는 일이라고 말씀하는 분들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만나진 가운데 여러 분들이 해딴에·경남도민일보 의도에 동의하고 도움말도 주시고 격려도 주셨지만 가장 앞장에 내세울 수 있는 분은 바로 김해 만장대농원의 엄준석 대표셨습니다.

 

만장대농원 음식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역사·문화 탐방 가운데는 당연히 해당 지역 음식도 들어가기에, 저희도 여기 들러 예약을 하려고 했습니다. 엄 대표와 또 같이 일하시는 아주머니 한 분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숫자까지 다 맞춰놓았는데, 밥값을 예산이랑 견줘보니 1인당 2000원이 차이가 났습니다.

 

 

닭죽·닭백숙을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말씀입니다. 난감해져 있는데 엄 대표께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고요. 저희는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의 취지를 앞에 적은 대로 말씀을 드리고 우리 김해 지역 알토란 같은 고3 아이들이 와서 먹을 음식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엄 대표 저희를 말똥하게 한동안 쳐다보시더니, 두 말 않고 주어진 예산에 가격은 맞추되 음식은 원래대로 만들어 제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저희 처지에서는 무척 잘 된 일이었습니다.

 

입가심으로 귤까지 장만해주고

 

그래서 고맙다고 거듭 말씀을 드렸는데, 툭 던지는 한 마디가 이랬습니다. “우리 김해 좀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김해 아이들이 둘러보는 일인데 도울 일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입술 꼬리에는 작으나마 웃음까지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약했던 날짜 시각에 맞춰 갔겠지요. 음식이 아주 풍성하게 마련돼 있었습니다. 내심으로는, 고3 아이들이라면 엄청나게 먹어댈 나이인데, 음식을 딱 맞춰 장만하거나 하면 어째 모자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더랬거든요. 몇 그릇씩 퍼먹는 아이들이 많았는데도 나중에 바닥이 비워진 솥은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엄준석 대표의 만장대농원은 아이들 입가심용으로 먹으라고 귤까지 몇 상자 장만해 내놓고 마음껏 집어갈 수 있도록도 해줬습니다. 물론 별로 비싸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마음씀이 어디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통은 아닐 것입니다. 하하.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에 달린 댓글들

 

이런 보람을 저희는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을 통해서도 좀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보도한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에 달린 댓글들이 저희들을 그렇게 해줬습니다. 거제서 임진왜란 유일 조선 수군 패전 칠천량해전 기념공원을 둘러본 글에 대해서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수치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인 것을..이러한 모습을 통해 현재의 일본에 대해 알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이 되었으리라 믿어요~~~”.

 

한 때 통제영이 설치됐었던 거제 가배량성에서.

 

저는 기뻤습니다. 냉큼 답글을 달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짚어 주시니 말씀입니다.^^ 일본 지배집단은 그 속성이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댓글도 저희를 힘나게 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역사를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멋진 프로그램입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이를 두고 저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역 역사 문화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저희 생각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런 댓글들은 또 어떠신가요? “누군가의 추억 속에 기억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죠!!!그러한 추억이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있으면 더더욱 보람있고 뿌듯한 일입니다. 나도 역사의 한 점에 서 있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은 곧 나를 알아간다는 뜻이기도.....여러분은 아름다운 사람들....^^”.

 

주남저수지 가까운 창원향토자료전시관에서.

 

“역사를 배우는 길의 첫걸음이 바로 지역사가 아닐까요? 내가 살고있는 지역을 아는 것이야말로 '나,너,우리'를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그러한 일에 힘써 주시는 여러분들과 배우는 여러 학생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댓글을 보고도 저희가 뿌듯해지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겠지요. 

 

아이들이 직접 남긴 댓글도 보기 좋고

 

게다가, 요즘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도 신문을 잘 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에 함께했던 학생이 남긴 댓글도 있었습니다. 저희 프로그램이 헛수고는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퍽 상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김연진 학생은 “우리지역 문화와 역사 탐방을 하면서 재미있고 관심이 생겼습니다. 뿌듯합니다~”라고 했고요, 조유나 학생은 “초등학교때 소풍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번엔 좀 더 자세히 보게 될거 같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라 적었습니다.

 

밤에 잠자리 들기 앞서 '사랑과 돈'에 대해 토론을 하는 양산 아이들.

저는 물론 고맙고 반갑다고 답글을 올려붙였는데요, 그 가운데서도 ‘초등학교 때 소풍 갔던 기억’이 난다는 대목이 제일 반갑고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소풍처럼 즐겁게 재미나게 이번 역사·문화 탐방을 했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그런데도 그런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어서 ‘다음번엔 좀 더 자세히 볼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재미·즐거움+관심을 겨냥한 저희 기획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기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좋았습니다.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은 올해도 이어집니다. 좀더 알차고 좀더 재미있는 내용으로, 그리고 지난해는 10개 시·군에서만 했는데 올해는 18개 시·군 모두에서 진행할 것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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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인문학 민간 조직은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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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인문학 협동조합을 꿈꾼 근거

 

지역 인문학은 없거나 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역에서 지역 인문학을 할 사람이나 소재는 넘친다고 봤습니다. 지역 인문학을 들을 사람도 넉넉하게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지역 인문학을 강의할 사람과 들을 사람을 묶어내고 모아내는 틀로 협동조합을 생각했습니다. 필요한 사람들이 자발해서 모이는 조직이 바로 협동조합이고 그 안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지기 때문입니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대립, 주는 이와 받는 이의 구분·대립을 협동조합 조직 활동 속에서 어느 정도 필요한 만큼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하지 않은 영역이 바로 지역 인문학이니만큼, 이런 자발성과 평등성을 바탕삼아 지역 밀착과 생활 밀착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제대로 굴러가는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광주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인문학 강의는 되도록 하지 않는 쪽으로 잡았었지만, 대중성 확보를 위해서는 때때로 한 번씩은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해도서관. 경남도민일보 사진.

 

연회비 1만원에 2000명 조합원을 꿈꾼 까닭

 

사람이 많을수록 다양성은 커집니다. 생각도 다양해지고 말도 다양하게 나오고 행동도 다양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도 인문학도 협동조합도 다양해지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강의·모임·활동도 다양해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가입비 1만원에 연회비 1만원, 그리고 조합원 2000명은 한 해 경비를 2000만원으로 잡고 거기 맞춰 계산해 숫자입니다. 인건비 한 달 100만원씩 한 해 1200만원, 그리고 강좌를 한 해 서른 안팎으로 잡고 한 차례 경비로 30만원씩으로 셈한 결과였습니다.

 

가입비와 연회비를 걷을 생각을 한 까닭은, ‘돈 가는 데 마음 간다’는 말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버리듯이 내놓을 수 있는 금액이 1만원 정도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3월 27일 경남대 인문관 2층 강의실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인사를 하고 있는 인문과학연구소 강인순 소장. 옆으로 오른쪽부터 김남석(발제) 배대화(사회) 김재현(발제) 교수.

그리고 이렇게 내는 1만원 2만원이 그 돈을 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협동조합의 주인으로 여기게 만들고 나아가 이런저런 강좌를 열심히 찾아들어도 ‘어쩐지 신세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지 않도록도 만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 꿈을 깬 까닭

 

아주 간단합니다. 저희 해딴에에 실무 전담 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의 공간은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을 아쉬운대로 쓰면 됩니다. 지역 인문학 강의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기획하고 조직하고 진행할 사람을 저희가 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해딴에 인력으로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을 할 수 있다고 여겼었는데, 사정이 그렇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꿈에서 깨어나 생각과 활동을 바로 접었습니다.

 

장유문화대학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초청 특강. 경남도민일보 사진.

 

지금도 가능하다고 보는 연회비 1만원 조합원 2000명

 

저는 한 해에 1만원 내는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 조합원 2000명 조직은 지금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꾸리고 추슬러 나갈 사람만 한 명 있다면 말씀입니다. 지역에서 지역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힘과 뜻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지역에 관한 인문학스러운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우리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한 사람이 스무 명 서른 명 사람 모아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스무 명 서른 명 가운데 가입비 1만원(탈퇴하면 돌려주는)과 연회비 1만원을 아까워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문학·예술하는 사람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더욱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강의는 자기가 하겠다고 나선다 해서 무작정 다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어느 정도 수준에는 이르러야 가능하겠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떠오르는 고민거리들

 

첫째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두고 인문학이라 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옛날에 했던 노동교실이나 교양강좌랑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경남주부교실. 경남도민일보 사진.

 

그냥 유행하는 인문학에 우리도 그냥 얹혀 실려가는 존재는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만약 이런 문제가 풀린다면, 이름에서 인문학을 내다버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행복한 인문학 교실이 아니라 행복한 지역 교실, 지역 인문학 협동조합이 아니라 지역 공부 협동조합 이렇게요.

 

또 하나는 운동권 중심주의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지난 세월 이런저런 방식으로 운동권을 구성해온 단체들이 무슨 인문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런 운동권 단체들이 ‘헤쳐 모여’ 하는 식으로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지역 인문학 공부터가 마련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운동권 단체·조직들은 자기한테 고유한 목표·가치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고 다채롭게 지역에 대해 그리고 인문학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하고 조직도 하지 못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길게 말씀드리면 구질구질해지겠지만, 운동권 사투리도 뜯어고쳐야 합니다. 운동권 사투리는 이미 멀어져간 대중을 더욱 멀어져가게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 역량의 자립과 자율

 

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기업에 운영을 기대는 데 대해서는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 하는 지원이 이미 하고 있는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지역 인문학을 하는 민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다음, 특별한 주제나 대상을 정해 프로젝트를 꾸미고 그 프로젝트에 대해 지원을 받는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있고 또 더나아가 바람직하다고도 봅니다.

 

창원도서관. 경남도민일보 사진.

지원을 받으면 생길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자율성 침해입니다. 이를테면, 인문학 강사를 시쳇말로 ‘빨갱이들’로 모두 채웠을 때, 지원을 해주는 지방자치단체 등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관·단체·기업 등이 민간 지역 인문학 역량을 지원하리라 여기는 것도 오산입니다. 기관·단체·기업 등은 이미 자기가 손수 또는 자기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런저런 조직들을 통해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는데, 자기 말을 잘 듣게 생기지도 않은 민간 역량에다 ‘옛다’ 하고 많든적든 돈을 던져줄 그런 기관·단체·기업은 손쉽게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은 것입니다.

 

김훤주

 

※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3월 27일 마련한 제92차 인문학 세미나 : 인문학과 시민의 만남 - 인문학 시민강좌의 성찰과 방향에서 토론문으로 내놓았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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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 화포천과 봉하마을이 좋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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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28일치 여행 소개 원고입니다. 이번에는 연둣빛 새 순이 보기 좋은 김해 진영 화포천과 창녕 장마면 대봉늪을 한 번 골라봤습니다.

 

이번 주는 물론 다음 주에도, 여기 화포천이나 대봉늪(그리고 출입금지가 풀리면 우포늪(소벌)까지)에 가시면 갈색을 가르며 솟아오르는 연둣빛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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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어떻게 보내셨어요?

 

김/ 지난 이 시간에 양산원동매화축제를 소개해 드렸잖아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나서 직접 한 번 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다녀왔습니다. 영포마을과 순매원의 매화, 신흥사 대광전, 모두 좋았습니다.

 

이/ 어제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았는데요.. 이번주는 어디로 떠날지 기대됩니다.

 

김/ 네.. 오늘은 풀과 나무에서 파릇파릇 돋아나는 잎사귀들이 멋진 장소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바로 멋지기로는 둘째가 서러운 창녕 우포늪 소벌인데요, 거기 할배나무랑 힐링나무 있는데요나무아래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만 즐기셔도 무척 좋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조류독감 AI 탓에 출입금지가 돼 있어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소벌(우포늪) 할배나무 아래 그늘.

이/ 그럼 우포늪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고 어디로 가나요?

 

김/ 우리 경남에는 우포늪 말고도 그럴 듯한 데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첫 손꼽을 만한 데가 바로 김해 화포천입니다. 어쩌면 식구들끼리 친구들끼리

나들이하기에는 화포천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는데요.

봉하 마을과 그 뒷산 봉화산까지 한꺼번에 둘러보고 누릴 수 있어 더 좋습니다.

기분에 따라 화포천을 먼저 찾아도 좋고

봉화산을 먼저 올라도 좋은데요. 출발은 언제나 봉하마을입니다.

 

이/ 봉하마을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아닌가요?

 

김/ 맞습니다. 김해 진영 봉하마을은 노무현 전 대통령 고향이기도 하고

퇴임해 세상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인데요. 노 전 대통령 묘소도 있죠.

취향에 따라 잠깐 들르셔도 좋고 지나쳐 묘역 옆으로 나 있는 산길로 접어듭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런 경우 산행을 먼저 하고 화포천 습지 거닐기는 나중에 합니다.

 

이/ 이유가 있으신가요?

 

비스듬히 드러누운 석가모니 마애불.

 

김/ 힘이 조금이라도 덜 빠졌을 때 산을 오르는 편이 낫기 때문인데요. 저만의 방식입니다. ㅎㅎ

어쨌거나 이 산길에는 비스듬히 누운 마애불 석가모니불을 만날 수 있는데요.

해방 이후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진 전설로 마애불이 벌떡 일어나 바로 앉으면

우리나라 통일이 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아..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다른 볼거리도 있나요?

 

김/ 그리고 조금 더 가면 부엉이바위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봉하마을 쪽도 바라다 보이고 화포천 습지 쪽도 보이는데요. 습지 쪽은 이제 막 피어나는 이파리들의 연둣빛으로 가득합니다.

산에는 선진규 법사가 1959년 시작한 농촌 계몽 운동의 자취가 스며 있는 정토원도 있고요 산마루에는 호미 든 관음상이 서 있습니다. 관음상은 보통 사람들 치유해 주는 약병을 드는데, 여기서는 개척을 뜻하는 호미가 들려 있죠.

 

호미 든 관음상.

 

그리고 산길이 끝나는 데서는 왼쪽 말고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빙 둘러야 습지 풍경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쭉 걸었는데 습지 풍경을 둘러보기 힘에 부치지 않을까요?

 

김/ 화포천 걷기는 전혀 어렵지 않은데요. 워낙 걷기좋게 만들어져 데크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이/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김/ 모두 다 해야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릴 텐데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단 무조건 천천히, 작고 낮은 데 눈길을 주면서 무조건 천천히 걸어야 하는 건데요.

그러면 물억새 시든 가지 서걱대는 가운데 환하게 피어나는 새순이라든지

물버들 몽글몽글 가지 따라 부옇게 내밀고 나오는 잎사귀들이

그야말로 환장하도록 좋아질 것입니다.

 

화포천.

 

이/ 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천천히 걸으면 되는군요?

 

김/ 정답입니다 ㅎ 그리고 화포천 들머리 사람들이 보통 미루나무라고 하는 양버들이

무리지어 높이 치솟은 풍경도 썩 괜찮습니다. 가로로 주욱 펼쳐지는 전체 풍경에

세로로 삐죽 솟은 이 나무들이 적당한 긴장감을 확 안겨주는데요.

이번 주말에 가면 막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화포천.

 

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걷다보면 넘 허기질 것 같은데요..?

 

김/ 그래서 저는 봉하외할머니라고 상호가 적힌 밥집을 찾아갑니다. 여행이 주는 절반 이상의 즐거움이 음식에서 온다고 하죠. 생각보다 외할머니는 젊은 편인데요,

국수도 그럴 듯하고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김치는 맛이 좋고 찹쌀과 누룩으로 몸소 담갔다는 동동주는 개운합니다.

아니면 봉하테마식당을 찾으셔도 괜찮습니다. 여기 소고기국밥은 걸쭉한 국물이 진국인데요.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물론 봉하마을 특산 막걸리도 여기서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오늘 여행이 막바지에 이른 것 같은데요?

 

대봉늪 어린 나무들.

 

김/ 네 봉하마을이 마땅찮으시면 대신 창녕군 장마면에 있는 대봉늪에 가서 연둣빛 이파리를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육지화가 많이 진행된 습진데요. 왕버들 비롯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니 바닥까지 미치는 햇살이 적어 억세지 않은 고운 풀들이 파릇파릇 자라는데요.

 

게다가 나무들도 아직은 아름드리가 아니어서 가녀린 가지들이 고운 풀줄기와 어울려

한층 느낌이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조용하며 수풀 속에 들어가 앉으면 몽환적인 느낌까지 솟아날 정도입니다.

 

대중교통은 그다지 편하지 않은데요,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내비게이터 등에서 검색할 때는 대봉늪으로 하시지 말고

대봉리를 치시는 편이 낫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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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과 토속음식점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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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일주일 넘게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서 혼자 밥을 해먹어야 할 때가 있었다. 우리 신문 '동네 사람' 코너에도 소개된 바 있는 신세계백화점 마산점 앞 채소 파는 할머니로부터 상추 한묶음을 샀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식품관에서 파는 것과는 다른 재래종 상추였다. 넓이나 크기, 색깔도 일정하지 않았고, 너무 작아서 여러장을 겹쳐야 밥을 싸먹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가격은 물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보다 훨씬 쌌다.


잘 씻어서 큰 양푼에 담아보니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았다.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참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파를 넣어 쌈장을 만들었다.


상품 질·가격경쟁력 충분한 우리 전통시장


할머니가 해운동 집 뒷산 텃밭에서 직접 길렀다는 상추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백화점에서 비싸게 파는 '유기농 친환경' 상추보다도 열 배는 더 맛있었다. 상추의 약간 쓴 맛이 그토록 미각을 자극하는 줄을 처음 깨달았다. 김치에는 아예 손도 가지 않았다. 상추쌈만으로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반 그릇을 더 먹었다. 저녁에도 그렇게 먹고, 또 그 다음날 아침에도 상추쌈만 먹었다. 그래도 물리지 않았다.


상추쌈.


그러나 아내는 우리 집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전통시장에 잘 가지 않는다. 모처럼 한 번 마음 먹고 제사장을 보러갔을 때 겪은 안 좋은 기억 때문이다. 채소를 팔던 할머니에게 가격을 묻고 그냥 지나치던 순간 뒤통수에 이런 말이 들렸다. "빌어먹을 년, 사지도 않을 걸 뭐할라꼬 물어보노?"


나 또한 올해 들어 단골 식당 세 곳에 발길을 끊었다. 한 곳은 횟집이었다. 그 집의 모둠회는 5만 원, 6만 원, 7만 원짜리가 있는데, 하필 그날은 일행 세 명이 모두 다른 곳에서 저녁을 먹고 와서 가장 작은 5만 원짜리를 시켰다. 그랬더니 종업원이 "세 명이면 최소한 6만 원짜리를 시켜야 한다"고 강요했다.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그러면 못판다"고 배짱을 부렸다.


또 한 곳은 생선조림을 아주 잘하는 집인데, 음식을 먹던 도중 쇠로 만든 수세미 잔해물이 나왔다. 주인에게 사실은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 먹고 나오면서 그걸 보여줬다. 그랬더니 나에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걸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머지 한 곳은 단골 고깃집인데, 주인 아들 친구라는 젊은 남자가 서빙을 하고 있었다. 고기를 먹은 후 국수를 시켰는데, 엄지손가락을 국물에 반쯤 담근 채 들고왔다. 게다가 국물이 튈 정도로 '탕' 하고 그릇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주방쪽 다른 종업원과 농담을 하면서 "배 째라"고 고함을 치는가 하면 큰 소리로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노래를 불렀다. 또한 식탁 사이를 지나다니는 동안 습관처럼 손을 올려 머리를 털었다. (결국 이 집은 몇 개월 후 폐업했다.)


주인·종업원의 무뚝뚝함과 불친절 없어야


<경남도민일보>에 '대형마트, 골목상권 장악 끝났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경남의 대형마트 판매액이 10년 만에 886%나 증가했다는 내용이었다. 비단 대형마트뿐일까? 골목마다 들어와 있는 대기업과 외국계기업의 편의점은 또 어떤가? 아이들의 코묻은 돈까지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 싹쓸이해 간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서울 프랜차이즈가 지역의 외식산업까지 잠식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나도 정말 전통시장과 재래상가, 토속음식점만 이용하고 싶다. 상품 질이나 가격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문제는 불친절이다. 가끔 외지에서 온 손님을 모시고 우리지역 맛집에 간다. 외지 손님은 두 번 놀란다. 첫째는 음식의 맛에 놀라고, 다음은 주인과 종업원의 무뚝뚝함과 불친절에 놀란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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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 살려고 청소일 하는 여호와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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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가 즐거운 형제

 

첫 인상이 맑고 시원했습니다. 빙그레 웃는 얼굴도 좋아 보였고요. 그렇다고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은 아니었답니다. 그냥, 수수하고 또 꾸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3월 10일 오후 밀양시청 맞은편 주택가에서 박진성·성기 형제를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얘기를 나누는데 말씨랑 말투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억세지도 않고 여리지도 않았으며 어려운 낱말이나 한자말 또는 외래어·외국어 따위도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시골 마을 사는 어른들한테서나 들을 수 있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말투·말씨가 아주 자연스러운 형제

 

나이를 물어보니 형 진성씨가 78년생이고 동생 성기씨는 81년이랍니다. 형제들 말씨가 매우 신기해서 어디에서 누구한테 배운 그런 것이냐 다시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잠깐 짧은 동안 침묵하더니, 형 진성씨가 툭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거든요.”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됐습니다. 어쩌다 쉬는 날 집에 있을 때 얇은 선교용 책자를 들고 찾아오던 사람들,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면서도 예의바르게 깍듯이 인사를 하던 사람들, 양심 또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집총을 거부하거나 병역을 거부하고는 징역을 사는 사람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깊이 배우는 사람들. 기독교 계열 종교 가운데 일반 신도들 공부하는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들.

 

“항상 모여서 대화하고 토론하고 하니까 그러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나 봅니다. 또 선교도 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연습을 나름 하기도 하고요. 이게 저희들한테는 일부러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 형제를 만난 사정은 이렇습니다. 청소를 정말 재미나고 열심히 하는 형제가 있으니 취재해 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이는 ‘이들 형제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재미있어 죽겠다는 느낌이 절로 묻어난다’고 했습니다. ‘한참 청소에 열 올릴 때 보면 막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고도 했었고요.

 

걸레질을 하는 동생 박성기씨.난간을 닦는 형 박진성씨.

 

청소는 대부분 사람들이 꺼리는 직종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편안하고 깨끗한 상태를 누리려고만 하지 자기가 나서서, 편안하고 깨끗한 상태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귀찮고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사회에서 대접을 해주고 대가도 두둑한 돈다발로 쳐주면 달라지겠지만 세상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깨끗해지도록 쓸고 닦고 청소하는 사람을 더럽고 하찮게 여기는 풍토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소 키우고 컴퓨터 가게 하려 했는데

 

그런데도 박진성·성기 형제는 청소를 전업으로 삼았습니다. 1년 남짓 됐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용활동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형 진성씨가 지난해 3월 16일 결혼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야 할 때가 된 셈입니다.

 

“저희가 밀양 토박이입니다. 용활동 선불홍고추 주산지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오늘 내일 할 때 그 내일동으로 옮겨와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교는 저는 밀양대학교 축산학과를 나왔고 동생은 컴퓨터공학과를 나왔습니다.”

 

형제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선택한 학과도 ‘여호와의 증인’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리 기업이든 비영리단체든 아니면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든 공기업이든, 어디 소속돼 밥줄을 걸게 되면 그 논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과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마음대로 내어 쓰지 못하겠지요. 주어지는 일이 여호와의 말씀대로인지 아닌지 구분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조직의 논리나 이해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형은 소 키우면서 농사지으려고 축산학과를 들어갔고 저는 자영업으로 컴퓨터 가게나 차려볼까 싶어서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갔는데 가게 내는 방법 그런 것은 가르쳐주지 않더라고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가르쳐주고…….”

 

이 대목에서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답니다. 그래서, 컴퓨터 가게를 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학과 가서 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차리면 되는 거예요’ 하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웃어야 했답니다.

 

“저는 소를 키울 생각도 해 봤는데, 막상 일이 너무 거창하더라고요. 규모도 크고요. 규모가 큰 만큼 일단 시작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가고 말입니다. 복잡하게 사느니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편이 낫겠다 싶었지요.

 

청소하는 데는 돈이 별로 들지 않아요. 빗자루값 기름값이 전부예요. 물은 청소하는 데서 끌어쓰면 되니까 돈이 들지 않고요. 트럭이 중고로 1100만원 들었고, 청소 도구 20만~30만원, 보험 60만원, 고압 분무기 30만원이 전부였어요.”

 

200만원 벌이만 되면 좋겠지만

 

이렇게 밑천을 들여서 하는 청소 사업이 단가는 어떻게 될까요? 원룸 건물이나 사무용 건물을 주로 하는데 원룸 방 하나를 기준으로 해서 5000원이라 했습니다. 한 주에 한 차례씩 한 달에 네 차례 쓸고 닦고 깨끗하게 해 주는 대가랍니다.

 

“계단이나 복도를 청소해 드리는데요, 방이 많으면 그만큼 계단이나 복도가 넓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만약 방이 18개라면 한 달에 9만원이 됩니다. 상대적으로 저희가 좀 싸다고 해요. 지금 4~5층 짜리 건물 서른두어 개 하고 있어요. 건물당 방이 12개라고 보면 삼륙 십팔 해서 180만원 정도 수입이 되네요.

 

입주 청소도 들어와요. 원룸은 방 하나에 3만원, 투룸은 하나에 5만원, 쓰리룸은 7만원을 받습니다. 깨끗하게 원래대로 청소해 드립니다. 지금 청소를 맡고 있지 않은 건물에서 입주 청소 주문이 들어오면 상태에 따라 1만~2만원을 더 받습니다. 이러면 한 달 수입이 200만원은 넘습니다.”

 

이런 한 달 수입을 형제가 똑같이 나눈다고 했습니다. 결혼한 형은 100만원으로는 살기 어렵다고 했고요, 부모와 함께 사는 독신인 동생은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형 진성씨도 그리 돈에 열을 내지는 않았습니다. 아내가 정말 알뜰하거든요 하면서, 200만원만 되면 넉넉하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정도만 돼도 저축까지 하면서 살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뜻대로 살려고 청소를 직업으로 삼고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산다는 게 제약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청소를 선택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조정해서 다 할 수 있으니까. 생활하기가 편하니까 자유로우니까. 회사에 취직을 하면 몇 시까지 무얼 해야 한다든지, 여호와의 말씀과 맞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요.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가 곧 생활입니다. 다른 종교는 보면 종교는 일부일 뿐, 생활하다가 힘들 때 위안이나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찾는 것이 종교이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가 삶보다 더 큽니다. 전국에 10만이 넘는데 종교의 가르침을 생활에서 바로 실천합니다.”

 

 

형제는 전과자이기도 했습니다. 형은 군대 가서 집총을 거부하는 바람에 군형법상 항명에 걸려 징역을 살았다 하고요, 동생은 징병을 거부해 병역법 위반으로 감방살이를 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전과 2범이라 했습니다. 집총 거부로 징역형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 나와서 잘 살고 있는데, 예비군 어쩌고를 어겼다고 다시 징역을 살리더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형제에게는 세상에 대한 불만 따위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답니다. 한 달 100만원 수입이 너무 적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계속 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저희도 불완전하고 죄인이지만, 성경에 나오는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삶이 윤택해지고 기쁨이 찾아오고 합니다. 지금 집에 텔레비전은 있고 유선방송은 없고 인터넷은 없습니다.

 

굉장히 문란한 성적인 것에 쉽게 노출될 수도 있고 시간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하고 하는 데 방해 되기도 하고요.

 

어릴 때는 술도 마시고 여자친구도 만나고 그렇게 한 번 해볼까 이런 생각도 있었고, 어쨌거나 그 때는 부모님 손을 잡고 따라다녔는데 머리가 커서 돌아보니까, 아 이거 다른 종교 하고는 다르구나, 스무 살 넘어가면 자기 삶을 자기가 선택해야 하잖아요?

 

돈을 좇아서 물질을 좇아서 형제부모 간에 원수도 되고 자살도 하고 살인도 하고 하는데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요.”

 

농사에 견주면 청소는 너무 쉽고 편해

 

형제는 지금 하는 청소 일에 무척 만족스러워했습니다. 형이 빗자루로 먼저 쓸고 뒤이어 동생이 밀대로 닦아 내려오는 일이 좋다고 합니다.

 

두 가지 까닭이 있었습니다. 일이 너무 편하다는 것과 시간이 자유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점은, 업수이 여기는 사람들 눈길만 빼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청소도구를 싣고 다니는 짐차에서.

 

“일주일에 이틀 정도 청소 일을 합니다. 아직 물량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힘도 세고 키도 커서 농사를 했습니다. 아버지한테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게다가 농사랑 견주면 청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20년 전 고추 가격이랑 지금 고추 가격이 똑 같으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청소는 한 주에 이틀만 하는데도 돈을 이만큼이나 버니까요.

 

청소하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줍고 하면 좋지 않게 여기고 토박이니까 안면 받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수월합니다. 너무 재미있고요. 농사지을 때보다 힘도 덜 들고 형제가 같이 일하니까 눈치 안 봐도 되고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요. ‘쉬자’ ‘하자’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해 드리는 청소 자체도 좋습니다. 자부심을 느끼지요. 올라갈 때는 더러운 계단을 봐야 하지만 청소하고 내려오면서 보면 깨끗해져서 보기도 좋고 마음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하고 나면 다시 신경쓸 일이 없다는 점도 좋습니다.

 

농사는 일 끝내고 나도 무슨 병에 걸리지나 않나 살펴봐야 하고 비가 와도 바람이 많이 불어도 눈이 많이 와도 죄다 걱정을 몰고 다니면서 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 해도 저희는 청소가 즐거워요.”

 

성의껏 하다 보니 입소문도 나게 되고

 

마음가짐이 이렇다 보니 성심성의껏 청소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업체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를 하게 되고 따라서 이제는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답니다.

 

“이쪽 동네는 저희가 잘한다고 소문이 나갖고, 소개해 주시는 데가 많습니다. 일하는 날에는 저기 김밥 카페에서 점심을 대놓고 먹는데, 저희 홍보물을 앞에 꽂아 놓아 주시더라고요. 고맙지요. 이제 저희가 나서서 막 영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는 됐습니다.

 

저희한테 믿고 맡겨 주시니까 더 애착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창문틀을 손걸레로 닦고 주차장에 있는 담배꽁초나 모레나 자갈 따위 치우는 일에 더해, 건물과 관련 없는 주변 도로나 화단 청소도 하게 됐어요. 저희가 청소해 주는 건물은 둘레도 깨끗하다, 이런 정도는 하려고요. 정말 깨끗하게 해 보자는 생각입니다.”

 

넉넉한 시간, 풍성한 자유

 

 

형제가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보람은 ‘시간’과 ‘자유’랍니다. 한 주일에 열다섯 시간 정도 청소하는 데 쓰고 나면, 나머지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좀 더 돈을 벌려고, 다른 사람들한테 좀 더 인정받으려고 아둥바둥 애를 쓰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사실은 나를 모르면서 남의 시선 때문에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내가 살아간다는 그런 의미를 갖고 좀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잖아요.

 

세상이 어차피 생각할 시간도 안 주기는 하지만, 딴 사람 보여주려고 사는 세상은 아닌 것이잖아요? 나의 시간이 많으니까 그 점이 제일 좋습니다. 남는 시간으로 봉사 활동도 하고 전교도 하고 그러면서 삽니다.”

 

국기가 무엇이고 국가는 또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만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국기에 대한 경례 안 한다고 이단시하고, 집총이나 징병을 거부한다고 반사회적이라고 내몰고 하는 풍토가 과연 옳은 것일까요?

 

이런 이들이 설 자리는 당연히 우리 사회가 마련해 줘야 합당하지 않을까요? 욕심 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자기한테 비춰 또는 여호와한테 비춰 옳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는 이런 삶이 오히려 의미 있고 바람직하고 보람직한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 하나님 야훼를 섬기고 믿는다면서, 오히려 일상에서는 하느님 하나님 야훼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과는 어긋나게 사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 세상에서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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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노래동산 주인공은 토끼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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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위해 만든 산토끼노래동산

 

창녕군 이방초등학교 위에 들어선 ‘산토끼노래동산’은 어린아이들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위해 창녕군이 만들었습니다. 창녕군이 펴낸 관광 안내 책자 <생태천국 창녕 맞춤여행> 10쪽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2박3일 일정에서 이틀째 되는 날 산토끼노래동산을 들르도록 안내가 돼 있습니다. 오가는 길목에 만들어지는 ‘우포늪 생태체험장’까지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도록 기획돼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아이들을 위한 시설들이 산토끼노래동산에는 두루 갖춰져 있습니다. 놀이터·롤링미끄럼틀·미로정원 따위가 그런 것들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신나게 놀아 젖힙니다. 미끄럼틀을 대여섯 차례씩이나 오가면서도 힘든 줄 모릅니다. 그만큼 아이들한테 맞춤형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생태천국 창녕 맞춤여행' 10쪽.

 

그러면서 어른들도 충분히 즐거운 공간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몸소 겪어보기 전에는, 실제 답사까지 했었는데도, 아이들한테나 재미있고 보람있지 어른들한테는 별로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3월 28일 40·50·60대가 대부분인 어른들 40명 가량과 함께 산토끼노래동산을 찾아가 보고는 생각을 바꿔야 했습니다.

 

 

어른들한테도 충분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공간이 바로 산토끼노래동산이었고, 아이뿐 아니라 어른한테도 안성맞춤인 데가 산토끼노래동산이었습니다. 먼저 토끼에 대해 좀더 잘 알려주고 잘못 알고 있는 그릇된 상식을 바로잡아 주는 데였습니다.

 

즐겁고 상큼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토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음도 깨칠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도 잘못 알거나 제대로 모르는 토끼 참모습 몇몇 보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토끼는 귀를 잡고 들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랍니다. 토끼는 마치 개의 코처럼 몸 전체 온도를 조절하는 중요한 부위라고 합니다. 그래서 토끼귀를 잡고 있으면 10분만 지나도 축 늘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귀를 잡고 있는 바람에 몸이 더워지고 그 때문에 부대끼고 힘들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토끼를 잡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네 발 달린 짐승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목덜미를 잡으면 된다고 합니다. 거죽이 늘어나서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나쁜 사냥꾼이나 자기 편한대로 토끼귀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토끼는 눈동자가 빨갛다.’ 이것도 잘못된 상식이랍니다. 토끼 또한 다른 포유류 일반과 마찬가지로 눈동자 갈색이거나 검은빛이라고 합니다. 다만 돌연변이로 염색체가 모자라거나 해서 그런 빨간색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토끼 사육을 맡고 있는 산토끼노래동산의 서한결씨가 일러준 얘기 가운데 일부입니다.

 

눈화장을 한 듯한 토끼 종류.

 

알고 보니까 더욱 그럴 듯한 토끼

 

실제로 이런저런 토끼 무리를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들으니 더욱 실감이 나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밖에 토끼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많이 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 말하지는 않으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다 말해 버리면 다음에 찾아가셨을 때 재미가 덜할 수 있겠기 때문이랍니다.

 

지금 산과 들에 많이 퍼져 있는 토끼,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이 산토끼라고 알고 있는 토끼가 실은 산토끼가 아닌 외래종이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도 듣기는 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지금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하하.

 

그런데, 이렇게 토끼에 대해 좀더 알고 나니까 거기 있는 토끼들이 이상하게도 좀더 사랑스러워 보이고 귀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 녀석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토끼, 이 녀석들은 어릴 때 누워 있던 귀가 자라고 나면 쫑긋 서는 토끼, 이 녀석들은 눈에 마치 아이라인을 한 것 같은 토끼…… 이렇게 말입니다.

 

산토끼 감성으로 바로 흥겨워지는 어른들

 

그림자놀이-손 따위로 스트린에 그늘을 만들면 그에 걸맞게 움직임이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산토끼노래동산은 어른들한테 내장돼 있는 동요 산토끼 추억·기억을 손쉽게 끄집어내었습니다. 여러 가지 토끼를 보면서 흥겨워진 어른들은 산토끼 곡조만 나와도 그 앞에서 몸을 흔들고 없는 지휘봉까지 흔들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산토끼 노래가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 유전자가 돼서 박혀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진시 공간인 산토끼동요관에서도 어른들의 즐거움과 재미는 이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체험 시설(매우 간단한)과 그림자놀이, 그리고 오래 된 학교 책·걸상(1920년대 여기 이방보통학교 선생으로 있으면서 산토끼 노래를 지은 이일래를 위해 만든 전시관에 있는) 따위에서도 웃음 소리는 곧잘 터져나왔던 것입니다.

 

토끼보다 더 귀여운 존재는 바로 아이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 일행이 다음 일정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나오는데, 유치원에 다님직한 아이 예닐곱이 선생님 둘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들머리에서 만난 아이들.

 

동행한 블로거 선비님 사진. 우리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고 무엇인가를 주고 있습니다. 다른 일행들은 이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군요.

일행 전체를 챙기는 일을 제가 하다보니 사진을 찍지는 못했습니다만,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제가 봤는데도, 정말 아이들이 더없이 그지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앞서서 눈에 토끼를 담으면서 그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그렇게 감탄을 아끼지 않던 어른들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아이들이 재잘대며 걸어오는 모습에 허리를 꺾어가면서 손뼉을 치고 웃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토끼와 아이들, 비교·대조되는 무리가 있으니 그 귀여움과 어여쁨이 더욱 돋보였던 모양입니다. 산토끼노래동산은 그러니까 토끼와 아이들이 언제나 이렇게 어우러져 돌아가는 공간인 셈입니다.

 

지역 역사·문화자산을 활용한 사례

 

동요 산토끼의 산실이 바로 여기입니다. 앞에서도 적었지만 1920년대 이방보통학교에 선생으로 와 있던 이일래씨가 여기서 노랫말을 쓰고 곡조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정확한 근거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산토끼노래동산에서 일하는 서한결씨 얘기인데요, 곡조가 단순해서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인데,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노래 가사를 바꿔서 불러댔기 때문이랍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 이렇게 되는 원래 가사를, 시대 상황에 맞춰서 “독립운동 하러 갈 테야”라든지, “까막소(감옥소)에 갇혔다”든지, “탄광으로 끌려갔다”든지 하는 식으로 바꾸고, 주어도 그에 걸맞게 바꿔불렀다는 것입니다.

 

제가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그 때 학생운동·노동운동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 바로 ‘노가바’,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였던 만큼,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창녕에 어려 있는 이런 역사·문화 자산을 나름 잘 활용해 산토끼노래동산을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사진 찍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빠졌습니다.

 

어른 위해 콘텐츠 보강하겠다는 계획

 

그리고 마지막 하나, 산토끼노래동산에서 토끼 돌보는 일을 맡고 있는 서한결씨는 앞으로 산토끼노래동산에다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도 더불어 즐길만한 그런 콘텐츠를 많이 갖춰나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고령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는 데 더해 세대별로 따로 떨어져 사는 풍조 또한 돌이키기 어려운 만큼, 앞으로는(어쩌면 지금도) 50대 넘어 60대 70대 어르신들한테는 삐약삐약 재잘재잘 어린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볼거리·즐길거리라 할 수도 있겠거든요.

 

어쨌거나, 그러면 산토끼노래동산의 주인공은 누구냐고요?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토끼에 더해 어린아이들들도 주인공이고 어른들도 주인공입니다. 산토끼 노래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추억이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아이들 좋아하는 놀이시설도 주인공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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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도 먹을 수 있는 고깃집과 횟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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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식당 경쟁력은 전국 '꼴찌'


블로그나 SNS 활용, 지역신문 관련 강의차 전국 곳곳을 혼자 여행할 기회가 많았다. 먼 곳을 하루만에 다녀오려면 너무 피곤하여 대개 1박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혼자 식당을 찾아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나홀로 식도락' 체험이 5~6년 축적되어오는 동안 점점 굳어진 확신이 있다.


내가 사는 경남의 음식점들이 전국에서 가장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다. 음식의 맛이나 친절, 청결 수준은 제쳐두고라도, 우선 메뉴 구성 자체부터 손님에 대한 배려가 없다. 경남의 횟집이나 고깃집에서 1인분 메뉴를 파는 곳이 있을까? 1인분은 고사하고 둘이 가서 시켜도 3인분이 기본이다. 이게 가장 심한 곳이 경남이다.


그럼 1인분을 먹을 수 있는 고깃집이 과연 있느냐고? 그렇다. 서울이나 광주·전남에는 많다. 얼마 전 갔던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선술집에서 숯불에 구워 먹는 소 갈비살 1인분(1만 1000원)을 시켜먹었다. 증거 사진도 보여줄 수 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백암숯불구이'에서 먹은 1인분.


바로 전날 갔던 서울역 앞 STX 본사 건물 지하에 있는 한 설렁탕 전문점에서도 그랬다. 거긴 설렁탕 한 그릇이 7000원인데, 1만 원 짜리 '설렁탕 정식'을 시키면 수육 한 접시(100g)가 함께 나온다. 혼자 가도 반주 한 잔 하기 딱 좋은 메뉴다. 게다가 이 집은 모든 메뉴가 혼자 온 손님을 배려한다. 수제왕만두 3개 2500원, 5개 4000원을 선택할 수 있고, 수육도 소(1만 2000원), 중(1만 8000원), 대(2만 6000원)으로 골라 시킬 수 있다.


서울 한설명작의 메뉴판.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서울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에 가면 돼지고기 편육(한 접시 1만 4000원)을 파는데, 혼자 가면 반 접시만 시켜먹을 수 있다.


을지면옥(위)과 필동면옥의 편육. 반 접시만 시켜도 준다.


춘천과 서울 서초동에 나름 유명한 '샘밭막국수'라는 곳이 있다. 이곳도 막국수 한 그릇이 8000원인데, 1만 3000원 짜리 '정식'을 시키면 딱 혼자 먹기 좋을 돼지보쌈과 작은 녹두전이 함께 나온다. 역시 혼자 온 손님을 배려한 구성이다.


늘어나는 1인 가구 배려한 식단이 아쉽다


광주에서 유명한 '막동이회관'이라는 쇠고기 전문점은 1인분 150g(안창살 2만 9000원) 단위로 파는데, 두 명이 가서 2인분만 시켜도 군말 없이 준다. 우리 지역 마산에서 나름 유명한 쇠고기 전문 식당이 100g(갈비살 2만 4000원) 단위로 팔며 기본 3인분 이상인 것과 비교된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광주의 그 식당에 혼자 가서 1인분을 시켜봤더니 주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횟간과 맑은 선짓국도 변함없이 기본 서비스로 챙겨줬다. 내가 아는 광주의 또 다른 쇠고기 전문점은 200g을 같은 가격으로 파는 곳도 있다.


광주 '막동이회관'의 1인분 안창살.


전남 광양의 '광양불고기' 식당들도 그렇다. 아직 1인분(180g)을 시켜본 경험은 없지만, 둘이 가서 2인분만 시켜도 커다란 화로에 숯불을 가져온다.


심지어 국내 최대의 관광지라는 제주도에서는 1인분 생선회를 파는 횟집도 봤다. 2012년에 들렀던 제주시 동문시장 안에 있는 '싱싱회센터'라는 식당은 1인분(1만 5000원)을 시키면 황동(참돔) 등 4가지 어종의 회를 각 4점씩 내온다. 게다가 서비스 안주로 자리돔 회와 무침, 가오리 회, 고등어 회, 소라, 새우, 생선까스, 초밥과 알밥 각 2~3점씩을 준다. 관광지여서 무조건 비쌀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제주 동문시장 '싱싱회센터'에서 먹은 1인분 회.


반면 경남의 횟집들은 어떤가? 비교적 회가 싸다는 마산도 모둠회 한 접시가 최소 4만 원~5만 원이다. 둘이 먹어도 너무 많은 양이다.


경남의 횟집에서 파는 한 접시. 4만~5만 원이 기본이다.


한 번은 마산 해안가의 한 횟집에 남자 세 명이 가서 가장 작은 5만 원 짜리를 시켰는데, 종업원이 "세 명이면 기본 6만 원 짜리를 시켜야 한다"고 강요해 기분이 상했던 적도 있다. 이래 갖고서야 경남의 식당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1인 가구를 배려한 메뉴 구성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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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 당일치기 명품 나들이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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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이웃 고을 마실가자 ① 경남 창녕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의 '이웃 고을 마실가자'는, 영남권과 호남권의 자치단체와 경남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해 마련했습니다. 자치단체는 자기 관광 명소와 먹을거리를 비롯해 특산물을 알리 경남 주민들은 여행을 통해 삶을 좀더 풍요롭고 빛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자치단체와 협의가 되면 경남도민일보는 지역민과 더불어 해당 지역 역사·문화·생태·인물을 탐방하고 거기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 누릴거리들을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서로에게 도움과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1. 어른도 신나게 하는 산토끼노래동산

 

창녕 장날은 3일 8일이랍니다. 장날에 맞춰 창녕을 3월 28일 찾았습니다. 일행 마흔 명과 함께 가장 먼저 들른 데는 '산토끼노래동산'이지요. 이방초등학교 위에 있습니다. 작사·작곡가 이일래(1979년 타계)씨가 일제강점기 이 동요를 이방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든 사실을 바탕해 조성했습니다.

 

 

2013년 11월 문을 열었는데 무려 110억원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아이들이 와서 즐겁게 배우고 놀 수 있도록 많은 체험장·쉼터·학습장·동요관·놀이터 따위가 제대로 들어서 있습니다.

 

유치원과 초·중학생들은 당연히 여기 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오후에만 4000명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하지요. 하지만 즐겁게 노니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이들은 빠졌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일행은 대부분 40대 이상이었는데요, 이들 또한 여기서 아주 즐거워했거든요. 여러 가지 토끼들 귀여운 모습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해설을 맡은 직원의 얘기에 귀를 쫑긋 기울였습니다. 여태껏 잘못 알았거나 몰랐던 토끼 생태에 대해 들을 때는 감탄이 터져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산토끼 노래를 넋 놓고 따라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고요 어떤 이는 노래 곡조를 따라 지휘하는 시늉까지 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어른들에게도 '산토끼 동요 감성'이 내장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유치원 아이들이 쏟아져오자 어른들은 더욱 신이 났습니다. 토끼들도 귀엽지만, 어른들은 사람 아이들을 더욱 귀여워하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2. 전환기 여러 양식이 함께하는 성씨 고가

 

석동 성씨 고가에서는 그 크기에도 감탄했지만 잘 가꿔진 모습에서 한 번 더 감탄했습니다. 185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지어진 집으로 모두 더하면 서른 채가 넘고 한 칸 두 칸 따져도 130칸을 웃돌거든요.

 

경근당. 마루에 바깥창이 있고 오른쪽 뒤편에는 측간을 뒀습니다.

 

아석헌·구연정·석운재·경근당·일신당 등 다섯으로 구분되는데요, 전체 규모도 커지만 남다른 특징이 있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끈다고 합니다. 전통 한옥 양식에 더해 일본식·서양식 건축 기법이 더해진 전환기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랍니다.

 

측간(화장실)이 안채에 들어앉아 있다든지, 추녀 끝에 빗물받이를 해달았다든지, 대청마루에 바깥창을 덧대었다든지……. 안마당에 자리잡은 곳간도 전통 양반 가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실용을 중시하는 가풍 또는 시대 정신이 반영됐지 싶습니다.

 

일행들은 이런 특징이나 규모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손색없고 흠결없이 잘 가꿔져 있다는 사실에 더욱 눈길을 두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나눈 것입니다. 국가나 자치단체만이 아니라 성씨 집안의 애씀이 틀림없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 남향인 집에 내려앉는 볕발이 더욱 따스하고 고왔답니다. 뒤쪽 대숲 사이를 걸을 때는 머리가 청신해졌고요 일신당 앞 연못 둘레에서는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바빴답니다. 그러고는 모두들 대청마루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뒷동산 대숲.

 

사진 오른쪽으로 연못이 있는 일신당을 지나는 모습.

 

3. 석빙고·동탑·하병수초가 어우러진 장터

 

화왕산 장마을 밥집에서 막걸리·파전·청국장을 맛나게 먹고는 창녕석빙고를 거쳐 장터로 향했습니다. 석빙고는 뒤로는 시내를 끼고 앞으로는 높아지도록 기울어져 있습니다. 옛날 겨울철 한 데서 얼음을 얻기 쉬워야 했고 여름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빠지기 쉽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녕석빙고는 우람한 편입니다. 같은 고을 영산석빙고는 물론 경북 청도나 대구 현풍의 석빙고와 견줘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창녕 물산이 예로부터 풍성했다는 증거로 여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터 구경은 즐거웠습니다. 들머리부터 새끼오리·병아리·강아지 따위가 그런 느낌을 준답니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석빙고 따위 문화재 구경은 뒷전으로 하고 장터로 바로 스며들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까만 비닐 봉지를 다들 두엇씩 들고 있었고요. 대부분 나물이었고 어떤 이는 쑥떡 같은 것을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장터 끄트머리에는 술정리동삼층석탑과 하병수초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탑을 멀리서 가까이서 바라보고 커다란 통돌로 만들어진 석재 크기를 가늠해보기도 했습니다.

 

술정리동삼층석탑.

 

거기 기단석에 나 있는 우물구멍, 40년 50년 전에 그리고 그 이전 조선 시대 고려 시대까지 동네 아이들이 소꿉놀이하면서 내었던 자취에다도 눈길을 던집니다.

 

하병수초가 안채 마루에 앉아서.

 

하병수 초가도 그 집 인자한 어르신 허락을 받아 한 바퀴 둘렀습니다. 디딜방아도 좋고 길게 튀어나온 추녀가 만든 짙은 그늘도 누리고 뒤뜰 꽃밭 파릇한 새싹까지 느낌에 담았답니다.

 

4. 관룡사·용선대, 신돈이 나고 자란 옥천사지

 

관룡사와 용선대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이름난 곳이지요. 크지는 않지만 스스로도 둘레 풍경도 아름다운 관룡사, 무척 많은 보물 문화재를 품은 관룡사, 요즘 들어 대웅전 후불탱화까지 보물로 지정된 관룡사를 느긋하게 둘러보고 일행들은 용선대로 올라갔습니다.

 

관룡사 법고. 괴수(怪獸)가 웃고 있나요? 화내고 있나요?

 

물론, 여기저기 솟아난 쑥·냉이·달래 따위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가지 않고 주저앉아서, 갖고 온 보자기 배를 불렸고요. 용선대에서 멋진 석가여래가 바라보는 동짓날 해뜨는 데를 함께 눈길 맞추며 탁 트인 픙경을 누린 다음에는 아래 옥천사지로 향했습니다.

 

옥천사는 신돈(?~1371)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망한 절터는 천하에 다시 없을지 모릅니다. 제대로 놓인 돌조각이 석탑·석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전혀 없습니다. 옛날 살림살이로 썼음직한 연자멧돌조차 뒤집어진 채 처박혔습니다.

 

옥천사지. 보이는 돌 대부분이 옥천사를 구성했던 석재들입니다.

토지를 차지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았던 당시 권문세족들이 신돈으로부터 공민왕의 신임을 물리고 목숨을 날린 다음 태어나 자란 여기 옥천사까지 깡그리 뒤집어버렸던 것입니다.

 

법명이 편조(遍照), 그러니까 골고루 비춘다고 했던 신돈. 7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조금은 무심한 채 '너무 했네', '나쁜 사람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무심한 해는 조금씩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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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사람 구경하는 합천 영암사지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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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4일치 원고입니다. 이번에는 합천으로 갑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장소랍니다. 모산재와 영암사지, 그리고 일대 벚꽃길입니다. 2001년 8월 처음 찾은 이래로 해마다 두세 차례씩은 꼭 들르는 제 마음 속 장소가 돼 버린 데입니다.

 

== 지난 주말 화포천과 봉하마을이 있는 김해로 갔었죠.

이번에는 합천으로 가볼까 합니다. 영암사지와 모산재, 그리고 가회마을로 이어지는 벚꽃길인데요. 모산재는 엄청난 바위산이고, 영암사지는 망한 절터면서도 느낌과 기상이 씩씩하고 밝은 폐사지랍니다.

 

이/ 오늘은 합천으로 떠나는 군요~ 먼저 영암사지인가요?

 

 

== 네, 영암사지는 크지 않은 삼층석탑이 단정하게 앉아 있고

 

쌍사자석등은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축대 위에 화려하게 솟아 있는 곳이죠. 금당터를 돌아가면서 놓여 있는 석재들에는 연꽃무늬나 괴수·사자 몸통 따위가 생동감 넘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뭔가 느낌이 역사기행 같은데요... 

 

== 금당터 왼쪽 위에 서금당터가 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옛날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가 있는데요. 오른쪽 거북은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고 왼쪽 거북은 목을 똑바로 한 채 자연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꼬리나 몸통무늬 주름 같은 것도 실감나게 새겨져 있고요.

 

영암사지 서금당터 오른쪽 귀부.

 

이/ 무엇이든 꼼꼼하게 보시는 것 같은데 찾아보니 영암사지가

우리나라에서 꼭 가봐야 할 사찰 중 하나로 꼽히네요...

 

== 신비함과 영험함이 깃들어 있고 자연환경이 좋아 그런 것 같은데요. 요즘 같은 계절엔 벚나무 꽃잎도 날리고, 솔숲 아래 진달래도 정말 볼만합니다. 금당터를 가로지르면 당간지주나 돌로 만든 물통을 볼 수 있고 이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면서 모산재를 넉넉하게 바라보며 보람을 누리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암사지를 나와 이어서 모산재로 오르겠죠?

 

== 네, 해발 767m로 높지는 않지만 바위산이라 가파른 편입니다.

모산재는 생기, 살아 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산으로 알려져 있고

가야산과 매화산과 황매산을 지나온 흐름이 우뚝 멈춰선 지점이기도 합니다. 조선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무지개터가 바로 이 산에 있지요.

 

이/ 천하제일의 명당이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지네요.

바위산이라 느낌이 조금 다를 것 같기도 하고요...

 

돛대바위.

 

==바위 생긴 모양이 다양해서 재미나게 오를 만한데요.

돛대바위 코끼리바위 득도바위 순결바위 등등이 곳곳에 있습니다.

순결바위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하는 크기로 갈라져 있는 바위입니다.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 그 틈새에 들어가면 바위가 오므라들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죠.

 

이/ 아~ 재미있는 전설인데 김기자님은 들어가 보셨나요?

 

== 네, 저는 순결해서 그런지 의심 없이 나왔는데요. 여태껏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전혀 없는 것으로 압니다. 하하.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두 시간이면 되고요. 사람들이 보통은 영암사지 왼편 산길로 올라가서 그 반대편인 오른쪽으로 내려오는데요, 오르시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본인 선택 사항입니다.

 

이/ 그럼요~ 애청자들의 선택입니다 ㅋㅋ 볼만한 게 또 있나요?

 

== 오른쪽으로 내려와 끄트머리에는 국사당이 있습니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위해 기도를 올렸던 데라고 하는데요.

 

꽃그늘에 들어가 장만해온 도시락을 먹는 재미도 좋습니다.

 

산까지 타고 내려왔으니 슬슬 배꼽시계가 요동을 칩니다. 그럴 때 바로 밑에 포장마차를 이용하면 되는데요. 주인아줌마가 산에서 캐거나 몸소 길러서 만드는 나물전 손두부가 있고 국수·막걸리도 맛이 좋습니다.

 

아니면 조금 더 내려가셔서 철쭉꽃 필 무렵이라는 식당도 괜찮습니다. 이 집 산채비빔밥에는 언제나 싱싱하고 좋은 재료를 쓴다는 주인아줌마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는데요. 도시락을 싸갈지 식당을 이용할지 내키는 대로 하세요.

 

이/ 자 배도 부르고 이제 기자님이 좋아하는 게 남은 것 같아요.

 

 

== 네, 이제 걸을 차례입니다. 모산재 영암사지에서 나와 가회쪽으로 한가득 늘어진 벚꽃을 따라 길을 걸으면 되는데요. 진해나 하동 창원 못지않게 벚꽃이 웅장하게 줄곧 이어져 있습니다.

 

가끔 벚꽃 구경 가면 꽂 보다 사람이 많아 당황스러운데요. 이곳은 조용하기로는 경남에서 으뜸으로 꼽을만합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평일에는 거의 없어 꽃을 보고 날아드는 벌들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정도입니다. 사람이 꽃구경하는 길이 아니라 꽃이 사람 구경하는 그런 길이죠.

 

이/ 꽃이 사람 구경하는 길이라~한적한 길에서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면 이야 딱 영화 같겠네요.

 

== 남녀가 함께 맞으면 더 좋겠네요. 가회면 소재지까지 모두 다 걷지는 마시고, 커다란 이팝나무가 도로 한 켠에 있는 오도마을까지가 적당합니다. 차는 두고 가시는 편이 낫기는 하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습니다. 대신 가회면 소재지에는 택시가 있으니까 서넛이 어울리면 비싸지 않은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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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 좋고 역사문화까지 풍성한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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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①거제

 

경남람사르환경재단은 2008년 람사르협약 제10차 당사국 총회가 경남에서 열린 사실을 기념해 만들어졌습니다. 습지와 생태계의 보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리기 위해 여러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인데, 사람들이 누리는 자연과 문화·역사가 습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에서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와 함께 맡아 하기로는 올해가 3년째랍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의 자회사이기도 합니다.

 

생태·역사기행 2014년 첫 나들이는 3월 19일 거제로 갔습니다. 거제는 빼어난 자연경관 때문에 역사·문화 따위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 거제의 역사·문화라 하면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관련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제 기성관.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제면 소재지에 모여 있는 옛 건물들을 둘러보면, 거제도 뿌리가 어지간히 깊은 그런 고장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50명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데는 거제향교였습니다. 향교는 알려진 대로 고려·조선 시대 공식 교육기관입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된답니다.

 

향교는 교육 기능에 더해 선현에 대한 제사 기능, 일반 주민에 대한 풍속 교화 기능까지 함께해야 했습니다. 거제향교는 아주 큰 편입니다. 경남에서는 사천향교와 더불어 가장 크다고 손꼽히는데, 전체 공간도 너르답니다.

 

거제향교.

 

앞쪽 명륜당은 공부하는 공간이고 뒤쪽 대성전은 제사지내는 공간입니다. 다른 지역 향교들은 보면 명륜당이 낮은 데 있고 대성전이 높은 데 있지만, 거제향교는 그냥 평지에 앞뒤로 나란히 있습니다.

 

더욱 멋진 건물은 거제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는 기성관입니다. 임금 궐패를 모시던 객사로 고을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면이 모두 아홉 칸으로 경남서는 통영 세병관,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목조건축물이라 합니다.

 

 

 

가운데 3칸은 지붕 옆면을 맞배지붕으로 살짝 높였고, 양쪽 3칸은 낮추어 옆면을 팔작지붕으로 마감했습니다. 단조롭지 않게 하고 생동감도 주면서 한가운데 모셨던 임금 궐패를 높이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합니다.

 

바로 앞 질청은 관아에 딸린 건물로 행정실 또는 도서관 구실을 하면서 고을 수령이나 관리 자제들이 여기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ㄷ'자 형태로 양날개에 살림방을 두고 가운데에는 대청이 널찍합니다. 사람들은 여기 마루에 앉아 뜨락에 심긴 나무들을 무심하게 쳐다봤습니다.

 

거제질청에서.

 

 

그러나 이런 것보다 거제초등학교 본관이 더욱 돋보입니다. 다른 많은 지역도 그러했겠지만, 6·25 한국전쟁은 거제도를 피해가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1907년 세워진 거제초등학교는 망가졌을 테고, 1953년 휴전이 성립된 뒤 거제 주민들이 뜻을 한데 모아 지금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거제초등학교.

 

보통 초등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그런 힘과 멋이 풍겨져 나옵니다. 서양식 석조 건물 외양이 뿜어내는 것이 여길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지역 교육을 위해 힘을 모으고 뜻을 보탠 이 지역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씀이 더욱 고마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습니다. 거제장터 풍경.

 

학동해수욕장 부산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바로 신선대·바람의 언덕으로 옮겨갔습니다. 해금강 들머리 이쪽 비탈과 저쪽 해안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신선대는 그래도 몽돌이 있고 모래도 깔려 있지만 바람의 언덕은 온통 바위로만 해안선이 이뤄져 있습니다.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은 사철 가리지 않고 바람이 불어대지만 신선대는 바람이 잦아들어 무턱대고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의 언덕에서는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신선대에서는 바위와 몽돌 해안이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바람의 언덕 풍차 있는 데.

 

바람의 언덕 동백숲에서.

 

 

일행은 바람의 언덕에서 봄기운을 바람으로 한껏 맞아들인 뒤 신선대로 몰려가 고즈넉하게 좌우로 펼쳐져 나가는 바다 분위기를 즐겼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은 쑥이나 냉이나 달래 같은 봄나물을 캐기도 했고요.

 

신선대.

 

바람의 언덕에서 가장 멋진 데는 동백숲이었습니다. 아래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피어나 매달렸거나 떨어져 바닥에 있는 동백꽃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운데 산책로를 따라 스쳐지나가 버리고 말지만 몇몇 알뜰한 사람들은 동백 숲 속으로 들어가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즐깁니다.

 

동백숲에서는 동백꽃도 잘 보이지만 바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랑 파도랑도 아주 느낌이 좋게 다가옵니다. 동백 숲이 내려주는 그늘도 좋고, 그 덕분에 사람들 말소리가 한 칸 더 멀리에서 들리는 것도 속세를 벗어난 듯하게 만들어준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홍포 바닷가길이지요. 홍포에서 홍(虹)은 무지개를 뜻합니다. 무지개처럼 여러 빛깔이 어우러져 아롱대는 동네라고 봐야 맞습니다.

 

홍포 바닷가.

 

하늘에서 해가 뉘엿뉘엿 기울 즈음이면, 바다와 바닷물과 바닷물이 튕겨내는 햇살과, 바닷물이 품어안는 햇살 등등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황금빛에서 선홍빛까지 여러 색깔로 빛이 난답니다. 여기에 더해 물안개까지 더해지면 바다가 통째로 자수정처럼 자주·보라로 물들기도 합니다.

 

일행은 여차로 이어지는 도로 포장된 끄트머리에서 마을로 돌아나오는 길을 걸었습니다. 바람이 시원했고 풍경은 멋들어졌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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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못지 않은 경남대 캠퍼스 벚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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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도 진해는 벚꽃놀이를 나온 사람과 차량이 북적이고 있다고 하네요. 이미 떨어진 꽃잎이 많아 벚꽃놀이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그런데 굳이 차 밀리는 진해까지 가지 않고, 마산에서도 벚꽃 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경남대 캠퍼스인데요. 학교가 언덕받이에 있어 정문으로 들어가면 다리가 좀 아플 수 있으니, 산복도로 서문쪽으로 들어가 걸어내려오면서 구경하면 한결 편하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지난주 월요일에 찍은 건데요. 기록삼아 올려봅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면 흩날리는 꽃잎이 환상적일 겁니다. 월영지에 둥둥 떠 있는 꽃잎도 예쁘고요.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도 있고, 니콘 D800으로 찍은 것도 있는데요. 한 번 구별해보시죠.



이건 경남대 맨 위쪽에 있는 법정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찍은 겁니다.



역시 법정대 계단에서 찍은 겁니다.



마찬가지이고요.



이건 한마관 앞에 있는 나무인데, 이름을 까먹었네요. 작년에는 알았었는데...ㅠㅠ



약간 당겨서 찍은 겁니다. 무슨 꽃이죠?



도서관 쪽에서 한마미래관을 보면서 찍은 겁니다. 여기가 포인트로군요.,



같은 포커스 두 사진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여긴 문과대에서 월영지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월영지 위쪽입니다.



역시 같은 곳 약간 다른 앵글.



월영지 아래쪽입니다.



아이폰으로 찍은 월영지 분수.



정문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입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시면 좀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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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사 보살 마음씀도 물결무늬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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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승사 엄청난 물결무늬화석

 

고성군에 있는 계승사(桂承寺)라는 절간을 다녀왔습니다. 여기 있는 1억년 전 물결무늬 화석이 대단하다는 얘기를 어디서 전해 들었거든요. 마침 올해 지역 역사·문화를 주제로 삼아 책을 한 권 낼 계획도 있고 해서 책 펴낼 때 쓰려고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것입니다.

 

고성은 은근히 골짜기랍니다. 이를테면 해발 1000m를 넘는 높은 산은 없지만 바다와 바로 붙어 있어서 500m나 600m짜리 산도 깊고 그윽합니다. 계승사 있는 골짜기도 그러했습니다. 마을에서 1km 올라가면 된다는 표지를 봤는데 올라가다 보니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가서 봤는데, 정말 물결무늬가 좋더군요. 아주 넓기도 하고 그 하늘하늘 물결이 허트러지지 않고 제대로 남았더군요. 같은 바위에 공룡 발자국 화석도 있고 빗방울 화석도 있다는데, 일부러 찾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오고 싶을 때 핑계로 써 먹으려고요. 하하.

 

 

계승사는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절간이라는데, 그런 오랜 자취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는데, 그랬다가 1960년대 들어 스님 둘이 나서 절을 지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대광보전을 비롯해 들어앉은 몇 칸 집들이 가파른 벼랑에 올라서 있었습니다.

 

엄청난 바위산인 것 같은데, 그런 바위들을 깎아내고 떼어낸 끝에 지은 모양이었습니다. 다시 물결무늬 화석으로 돌아가 얘기하자면,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여기 있는 바위들이 그와 같은 무늬를 안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주 많지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그 물결무늬 화석도, 이처럼 절간을 짓느라 바위를 파내고 떼어내는 과정에서 노출되게 됐음이 틀림없거든요. 어쨌거나 이렇게 좋은 풍경 눈에 잘 담고 절문을 나섰습니다.

 

2. 떡도 주고 밥도 주고 바나나까지 챙겨주는 보살님

 

 

계단을 다 내려갔지 싶은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들고 가라고 떡 좀 챙깄는데 벌써 다 나갔네. 우야노, 들어올라요? 아니면 봉지에 좀 싸 주까?” 저는 두 말 않고 오던 길 돌아서서 부리나케 올라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무안스러워하고 당황스러워했겠지만, 호의는 절대 거절하는 법이 아니라는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듣고부터는 일부러라도 반갑게 그런 것들을 맞이하게 바뀌었던 것입니다. 올라가니 스테인리스 쟁반에 호박떡을 비롯해 세 가지 떡이랑 바나나 두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 받은 떡과 바나나.

 

평상에 앉아 반갑게 떡을 한 조각 입에 무는데 보살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밥은 드싰는가?” 먹었을 턱이 없습지요. 아직 정오에서 10분 정도 모자랄 때였으니까요. 그래 그냥 웃음을 배시시 베어 물고 있었더니, 바로 밥을 차려 들고 오셨습니다.

 

공양은 밥상에 놓고 하는 것 아니라면서, 또다른 쟁반에 푸성귀랑 김치랑 절인 깻잎이랑 채워서 또 나물도 비벼 먹을 수 있도록 잔뜩 담아 갖고 오셨습니다. 저는 입이 찢어졌습니다. 제가 이름을 모르는 나물 반찬 하나는 흙냄새조차 향기로웠으며, 김치는 짜지 않아 좋았습니다.

 

 

 

특히 저는 절인 깻잎이 마음에 들었는데, 깻잎에 고유한 맛이 이렇게 절였는데도 그대로 간직돼 있었습니다. “보살님, 깻잎이 진짜 좋습니다!” 했더니 보살님 입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지난 가실 단풍 들 때 뚝뚝 따다가 된장에 찔러넣었던 거라” 합니다.

 

가을 단풍 들 때 깻잎은 그 꼬신 맛이 이렇게 오래가나 봅니다. 조금 있으니 처사 한 명이 나와서 목탁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아래와 위에서 각각 스님이 한 명씩 나와 공양간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

 

3. 스님, 손님, 신도 그런 구분과 나눔도 없었고

 

순간, 짧으나마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 보살님, 무애(無碍)했습니다. 막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 절간에 가면 스님이 공양을 하고 난 다음에라야 다른 사람한테 밥을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치 대웅전 한가운데 문짝 아래 댓돌에 ‘스님 전용’이라 써놓고 양쪽 옆구리 문에다 ‘신도용’이라 써놓는, 그러한 구분과 막힘이 여기 이 보살님한테는 없었던 것입니다. 좀 있다 보살님 밥 한 그릇이랑 나물 한 보시를 더 가져와서 양이 차지 않으면 더 들라며 줬습니다.

 

대광보전 뒤로 올라가는 계단. 온통 바위입니다.

 

스님도 공양을 마치고 나오더니 빙긋 웃으며 뭐 모자라는 것 있으면 더 달라 하라고 말을 보태줬습니다. 저는 말씀만으로도 이미 배가 터질 것 같다면서, 더 챙겨준 밥과 나물은 손대지 않고, 이미 버무려 놓은 밥과 나물일랑 깨끗하게 해치웠습니다.

 

 

그러고는 보살님한테 인사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돌아서 활짝 핀 꽃 아래로 들어서는데 고맙고 반갑고 즐거운 마음이 물결치듯 밀려들었습니다. 이런 보살님 마음도 오랜 세월 1억년이 지나면 저기 바위에 새겨진 물결무늬처럼 남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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