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후라이밍
Viewing all 1163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우포늪 신당 주매 장재 세진마을 둘러보기

$
0
0

우포늪 네 군데 생태체험마을 


창녕우포늪생태관광협회(대표 김천일)가 우포늪(소벌) 둘레 생태체험마을을 적극 알리고 있습니다. 우포늪 둘레에는 생태체험마을이 신당·주매·장재·세진 등 네 군데 있습니다. 제각각 가시연꽃·반딧불이·기러기·따오기를 표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협회는 2013년 정부가 우포늪 일대를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생겨난 주민 중심 민간단체라 합니다. 2014년 9월 창립 총회를 열었고 2015년 1월 사단법인으로 설립 인가가 났습니다. 


협회는 대체로 우포늪 일대 자연생태를 보전·복원하고 이를 활용한 체험·관광으로 소득을 창출하고 자연친화적 관광문화를 일으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 역량과 관심·흥미를 알맞게 재구성하는 일과 일대 마을을 제대로 가꾸고 알리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신당마을 생태체험 관련 시설과 건물.


협회는 나라 안팎 전문가를 초청해 마을별로 도움말을 받았습니다. 람사르사이트에 등록된 산지습지 '용늪'이 있는 강원도 인제로 견학도 다녀왔습니다. 자기 마을의 특징과 장점을 찾고 이들 얼개를 짜기 위해 주민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관광·체험 프로그램도 다섯 차례 남짓 진행했습니다. 


찾아오는 마을을 만들려면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르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깥사람들은 멀리서 올수록 마을이 아니라 우포늪 자체에 더 많이 관심을 돌리기 십상이고 주민들은 어쨌거나 자기 마을로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서로 처지가 다르므로 이런 차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마을 주민들이 지금 할 일은 우포늪 전체의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을 먼저 맛보고 싶다는 바깥사람들 바람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체험장 방문 등을 위해 마을에 들어왔을 때, 풍경을 둘러보면서 이야기나 사연에 재미를 느끼고 매력적이라고 여기도록 만드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협회가 주민들과 함께 네 곳 생태체험마을에서 이야기길을 구성하는 데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직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가꿔져 있지는 않고, 자취가 사라진 옛길과 옛 장소를 찾아내고 관련된 추억·기억과 옛이야기를 끌어내면서 안내팻말을 시험 삼아 세웠노라는 얘기였습니다. 


협회 오상훈 사무국장은 12월 22일 "이제 시작인 셈인데, 얘기가 있는 장소를 찾아 옛길을 복원함으로써 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안내를 하면 소일거리도 되고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풍경, 느낌이 따뜻한 흙돌담


25일 하루 시간을 내어 둘레 생태체험마을들(걸어서 다녀도 좋을 만큼 붙어 있지는 않지만)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일찍 생태체험마을로 선정된 신당마을은 잘 가꿔져 있었습니다. 우포늪의 일부인 사지포를 향해 걸으며 보는 풍경이 그럴 듯했고 쪽배타기 체험장·가시연꽃 재배지 등은 겨울철인데도 소담스러웠습니다. 


신당마을에서 사지포늪을 향해 걸으면 볼 수 있는 풍경.


마을에서는 오래된 흙집과 흙담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집도 있었고 짚·흙·잔돌을 섞어 지은 집도 있었는데 그대로 드러난 들보와 서까래가 이채로웠습니다. 



간혹 고둥 껍데기도 박혀 있었는데 당연히 우포늪에서 말미암았으리라 짐작이 됐습니다. 한가운데 있기 마련인 대청이 부엌에 자리를 내주고 한편으로 밀려난 독특한 구조도 보여 재미있었습니다. 



이어 찾은 주매마을은 당산나무길·서재마루길·참나무덤길·개구리덤길·안골갓길 등 오리 부리로 방향을 가리키는 나무팻말이 여럿 들어서 있었습니다. 팽나무노을길을 따라갔더니 잘 알려진 250년 넘게 묵은 팽나무로 이어졌습니다. 우포늪을 채운 물들이 서쪽 낙동강으로 빠져나가면서 저녁 무렵에는 붉은 노을이 바람과 함께 안기는 자리입니다. 



우포늪(소벌) 둘러보기에 나선 젊은이 둘.


경로당 뒤쪽 동산에 올랐더니 우포늪을 한 눈에 담으면서 걸을 수 있는 흙길이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신당마을과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옛집이 남아 있었는데 허물어진 데를 메우고 조금 꾸미면 사람 눈길 잡는 효과는 단단히 낼 것 같았습니다. 


주매마을 뒷동산 흙길을 걸으며 볼 수 있는 우포늪 풍경.


'와릉와릉' 오래된 탈곡기도 한 대 고장난 채 길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일본글로 '일본농림성' 권장품이라 적혀 있었는데요 재활용해 체험거리로 삼으면 인기 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재마을은 우포늪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골짜기에 들어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포늪에서 물고기를 잡는 '육지 속 어촌'이 특징이라 합니다. 장재 사람들은 바로 옆 우포늪이 너무 훌륭해서 마을보다는 이런 것들과 이어지는 길을 찾아 가꾸는 모양이었습니다.(8월 15일 전문가 자문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왕버들 빨래터 팻말.옛날 주막터 팻말.


사지포쪽에서 들어가는 길은 짐승들도 많이 다니는 모양이어서 '고라니길'이라 이름이 붙어 있었고 왕버들이 무리지어 있는 풍경 어름에는 '왕버들 빨래터', 조금 바깥쪽에는 '옛날 주막터' 팻말이 서 있었습니다.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인상적인 세진마을 


마지막 세진마을은 늠름한 소나무와 병풍 같은 대숲이 자리잡은 뒷동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품이 아늑하고 푸근했습니다. 곳곳에 남은 흙집과 담장도 그럴 듯했으며 택호를 넣어 만든 문패는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세진마을은 이밖에 마을과 들판과 뒷산을 온전히 한 바퀴 두를 수 있는 산책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km 남짓이었는데 마을을 출발해 들판을 바라보며 걷다가 산모퉁이를 돌면 토평천을 감싸안는 제방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옛 습지(삼박포) 자리는 길이 500m 너비 200m 정도 적지 않은 면적이 온통 부들밭이었습니다.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묵정논이었지 싶은데, 바닥이 온통 흥건한 품새가 이미 습지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갈대밭이나 억새밭은 많이 봤지만 부들밭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여름·가을에 오면 풍경이 대단해서 눈이 무척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 


세진마을 한 재실 흙돌담과 은행나무.


끝에는 마을 방향으로 '바랑곡'이 나 있는데, 옛날 꼴머슴들이 지게로 나무 지고 넘던 자드락길이지 싶었습니다. 전혀 가파르지 않아서 걷기에 딱 좋았거든요. 만약 세진마을에 들른다면 마을 안쪽에서 바랑곡을 넘은 다음 부들밭을 구경하면 딱 알맞겠다 싶었습니다.


바랑곡과 팻말.


마을 보물 찾기가 필요하다는 생각 


창녕우포늪생태관광협회는 아직 채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1년 만에 투박하고 서투른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주체로 나서도록 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길은 제대로 잡은 것 같았습니다. 


뒷동산에서 내려다보는 세진마을 전경.


찾아오는 사람들 마음에 들도록 꾸미고 내고 하려면 그 무엇보다 먼저 마을 사람들 마음이 움직여야 가능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마을이라는 공동체와 생태계를 함께 들여다보면서 뜻을 모으면, 거기서 찾아낸 남다른 특징과 매력적인 장점을 찾아 갈고닦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신당·주매·장재·세진마을 모두에는, 잊히고 사라져 가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사람 손길이 닿으면 금세 매력 덩어리로 되살아나지 싶은 것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오래된 흙돌담, 양지바른 담벼락, 늠름한 정자나무, 씩씩한 소나무, 작지만 고풍스런 재실, 떡메 치기 좋은 돌확, 발로 밟는 탈곡기, 탱자나무 울타리, 청신하게 사각대는 조릿대, 제대로 낡은 기와 얹은 흙집……. 


신당마을 들머리 풍경.


물론 우포늪이 안겨주는 멋진 풍경은 당연히 덤으로 따라왔는데요, 다만 그런 것들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눈길과 소중하게 가꿀 수 있는 손길이 조금만 더해져도 무척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조선 여왕 혜주가 우리시대에 주는 교훈

$
0
0

'자신의 능력이나 그릇에 넘치는 권력을 잡은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 보여주는 소설.'


처음 소설 《혜주》 원고를 읽고 난 뒤 한줄로 정리된 생각은 이랬다. 내가 이 책을 출간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함께 원고를 읽고 검토한 사장도 이 뜻에 동의해주었다.


물론 망설임도 없진 않았다. 조선시대에 여왕이 있었다는 역사의 가설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현대 인물과 관련, 괜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진 않을지….


이 원고는 지난해 10월 말 메일로 받았다. 발신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글 파일로 제목과 목차, 본문까지 A4 용지로 딱 200매였다. 한 권으로 묶기엔 다소 많은 분량.


저술 경력이나 출판 이력을 알 수 없는 정빈(丁彬)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을 내용만 보고 선뜻 출간한다는 것도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에게 메일로 작가 소개를 부탁했다. 돌아온 메일의 내용은 딱 한 줄이었다.


"지난 30년간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해왔다."


거기에 내가 한 줄 더 보태 넣었다.


"더 이상의 작가 소개는 원하지 않았다."


소설 혜주 작가소개.


제목은 애초 《여왕 혜주》로 하려다 그냥 《혜주》로 바꾸고, 대신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이라는 부제를 보탰다. 분량이 많아 상, 하 두 권으로 낼까 하다 좀 두껍더라도 한 권으로 내기로 했다. 428페이지.


'오래된 종택 제각에 잠들어있던 한 권의 비록(秘錄), 회운사 종소리와 함께 여왕이 깨어난다'는 표지의 문구는 편집자가 적어넣었다.


소설은 전혀 왕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주가 선왕의 갑작스런 승하로 여왕이 되는 설정으로 전개된다. 왕세자가 아니었으니 군왕 수업을 받지도 못했을 터. 그러나 마음은 곱고 착한 공주였다. 그런 공주가 막상 권력의 정점에 올라 어떻게 폭군으로 변모해가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혜주 - 10점
정빈 지음/피플파워


작가는 책이 나온 뒤에도 스스로 저자 마케팅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사실 책이 나오면 출판사도 마케팅을 하지만, 저자가 자신의 이름값과 인맥으로 하는 마케팅도 책을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마케팅에 불리한 요소를 미리 안고 출간됐다.


결국 책을 읽은 독자들이 어떤 평가를 내놓느냐가 관건이다. 그들의 입소문 추천에 소설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다.


다가올 선거에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투표해절대 안 된다. 그 자리에 걸맞은 그릇과 능력, 철학을 갖췄는지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그것이 소설 《혜주》가 우리에게 주는 끔찍한 교훈이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학교서도 생생 직업체험 할 수 있으면"

$
0
0

중학생 진로 체험 활동 (3)

"진로 설계가 가장 어려웠어요"


두산중공업이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함께하는 '마이 드림(M. Y. Dream, Make Your Dream) 청소년 진로체험단'이 12월 16일 발표회를 끝으로 한 해 일정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번 청소년 진로체험단 활동은 직업 탐색에서부터 체험을 거쳐 설계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으로 진행됐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울러 단순히 동영상을 보거나 강의를 듣는 것으로 직업 체험을 끝내는 여태까지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로 지역에 있는 직업인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실습까지 했다는 점 또한 색달랐습니다. 


이번에 아이들이 체험한 직업은 요리사(양식·중식), 네일아티스트, 가수·작곡가, 동물사육사, 바리스타, 마술사, 제빵사, 헤어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심리상담사, 경찰관 등 모두 열한 가지였습니다. 



먼저 아이들 희망을 받은 다음 조정하는 과정을 거쳤는데요, 텔레비전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화려하고 빛나게 여겨지는 직업도 있었고 머릿속에서 주관적으로 희망하는 직업도 있었으며 장래 수익을 보장해 주리라는 기대로 선택한 직업도 있었습니다. 


10월 3일 여덟 번째 모임은 참여한 학생들이 서로 체험 소감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였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겉으로 보는 직업하고 실제로 일하는 직업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밝혔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멋지고 그럴싸하지만, 그 뒷면에는 힘든 노동과 면밀한 준비 또는 계획이 있을 수밖에 없더라는 얘기였습니다. 


이를테면 물 위에 떠 있는 고니가 보기에는 무척 멋스럽고 여유롭지만, 그렇게 떠 있기 위해서는 물 속에서 갈퀴 달린 발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이런 두 가지를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 해도 곧장 직업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고 했습니다. 


네일아트의 경우 자기 손톱을 꾸미고 색칠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지만, 다른 사람 손톱을 꾸미고 색칠하는 것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또 이미 만들어진 색깔이 아니라 손수 새로운 색깔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로만 직업으로 삼기는 어렵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참여했는데 뜻밖에 거기서 취향이나 적성을 발견하고 흥미와 관심을 느낀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경찰 체험을 보기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여한 학생들 대부분이 딱딱하고 지루한 직업이리라 지레짐작했었지만 막상 경찰서를 찾아가 경찰관 제복이 주는 권위도 느껴보고 유치장·수갑도 체험해보고 지문 채취 등 첨단 과학 기법 수사 등을 실습해보면서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직업이 바로 경찰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11월 14일 아홉 번째 모임에서는 향후 진로 설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번 직업체험을 통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직업을 정한 학생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직업인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며 실습까지 한 것은 분명 작지 않은 성과지만, 그것만으로 중학생이 장래 직업을 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이런저런 장래 직업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앞모습과 뒷모습을 함께 보고 느낄 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향후 직업을 정할 때 좀더 입체적으로 여러 측면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 좋았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범위에서 진로 설계도 했습니다. 직업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꿈을 마음껏 펼쳐라' 또는 '네 끼를 한껏 발산하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되려면 체력과 추리력을 키워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격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영어와 국사 과목을 잘해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상과 맞춰나가는 것이 진로 설계였고 또 거꾸로 자기 조건을 따져보면서 꿈을 고치고(또는 다듬고) 희망 직업을 바꿔나가는 것도 진로 설계였습니다. 


12월 16일 열 번째 마지막은 두산중공업 게스트하우스 회의실에서 발표회로 진행됐습니다. 


두산중공업 김명우 사장과 창원교육지원청 안병학 교육장 등 20명 남짓이 함께하는 가운데 전체 진행 경과 설명·보고, 참가 학생들이 만든 동영상 상영, 진로체험 참가 학생들 소감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참가 학생들에게는 김 사장과 안 교육장이 번갈아가며 수료증과 상장을 나눠줬습니다. 



두산중공업과 창원교육지원청은 이번 '마이 드림 청소년 진로체험단' 성과를 바탕 삼아 같은 날 '자유학기제 진로교육 업무 협약'을 했습니다. 



2016년에는 모든 중학교에 자유학기제가 전면 시행된다고 합니다. 시험이 없는 자유학기(대부분 1학년 2학기)에는 진로체험을 비롯한 자율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집니다. 


올해 '마이 드림 진로체험단' 활동을 한층 더 끌어올린 내용으로 '맞춤형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년 시범 공급에 나선다는 얘기입니다. 


이날 발표회에서 김 사장은 이런 프로그램을 맞춤형으로 제공하려는 취지를 쉬운 표현으로 정리했습니다. 



"대부분 청소년들이 공공기관이나 기업체에 취업하려 할 때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또 좋아하는지 모른 채 일단 응시부터 하고 봅니다. 기업체나 공공기관도 일단 뽑고 나서 처음 바닥에서부터 완전 재교육을 합니다. 사회 전체로 보면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진로체험을 맞춤형으로 미리부터 해 나가면 취향과 적성을 찾고 자기 현실 조건 등을 고려할 수 있어서 이런 낭비를 줄이고 청소년과 기업체·공공기관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문화사업을 전담하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가 진행을 맡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끝>>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여왕의 미래가 심히 염려스럽다

$
0
0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은 연산군이다. 그는 결국 신하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어 왕으로 추대된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언론자유를 강화한다.


그는 즉위 3년 승정원과 예문관에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내리면서 "이것으로 나의 모든 과실을 숨김없이 쓰라"고 했다.


또 7년에는 "사관(史官)의 직무는 국가와 관계되며, 대저 역사란 사실대로 써서 천추에 전하는 것인데, 사화(史禍·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말함)를 겪은 이후로는 모두 사필(史筆)을 경계할 뿐"이라고 탄식하며 "사필 잡은 자들은 왕의 선악과 신하의 득실을 사실대로 써서 숨기고 꺼리는 폐단이 없어야 한다"고 전교했다.


이처럼 조선은 '대간에게 비판받으면 관료생활을 못하는 것으로 그치고, 왕에게 잘못 보이면 귀양을 갔지만, 사관에게 폄하되면 후세에 영원히 전해져 역사의 심판을 받는' 사회였다. 그래서 왕도, 신하도 모두 역사를 두려워했고, 왕이라도 마음대로 실록과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을 갖게 되었다.


중종실록 3년 부분.


그로부터 5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나서 역사교과서를 새로 쓰라고 지시하는 일이 벌어졌고, 집필진도 비밀에 붙인 채 일이 진행되고 있다. 옛날 같으면 선비들의 상소가 줄을 잇고,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시위에 나섰을 일이다.


절대왕조였던 조선에도 그런 언로(言路)는 열려 있었다. 왕이 부당한 결정을 하면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언론3사와 선비들의 상소가 줄을 이었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머리를 풀고 도끼를 옆에 둔 채 도끼상소(持斧上疏)까지 했다. 내 상소가 틀렸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치라는 뜻이었다. 성균관 유생들도 연대서명한 상소를 올리고 동맹휴학을 한 뒤, 집단농성이나 단식을 했다. 그래도 임금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학교에서 짐을 싸서 나와 집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왕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만일 조선의 왕이 그들을 '불법시위' 혐의로 잡아가두거나 목을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연산군 꼴이 나지 않았을까.


최근 읽은 소설 <혜주>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여왕의 폭정에 대한 간관의 상소가 잇따르지만 여왕은 불윤비답(不允批答)으로 묵살한다. 유생의 도끼상소가 시작되고, 왕을 비방하는 괴벽보와 괴소문까지 나돌자 여왕은 정탐서라는 정보기관을 설치, 유언비어 유포자를 색출해 단설형에 처하고, 유생을 의금부에 가둔다. 이에 흥분한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광화문 육조거리에 모여 집단농성에 들어간다. 이들까지 모두 잡아들이려 하자 좌의정과 영의정이 이렇게 간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하! 태조대왕 이래로 이 나라 조선은 선비를 귀히 여겨 왔사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유생들의 언로를 막아서는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연좌농성하는 유생들을 강제로 해산시켜 잡아들인 임금은 폭군 연산군 뿐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지금 대한민국에 이런 정승은 없고, 여왕 한 사람만 보인다. 여왕의 미래가 염려스럽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예술가와 함께한 김해 용전 도랑살리기

$
0
0

김해시 진례면 용전마을은 도랑이 마을을 세로로 지르며 흐르고 마을숲이 들머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마을 뒤에 받치고 있는 용지봉 산줄기는 사철 마르지 않는 수원입니다.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도랑물은 진례천의 일부를 이루다가 화포천과 합류한 다음 낙동강으로 빠져나갑니다. 


마을숲은 적어도 30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조선시대 교통 요충인 생법역 관할이었는데 신라 시대부터 있어왔다고도 합니다. 마을숲이 원래는 더 크고 넉넉했겠지만 지금 규모도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잎이 넓고 키가 큰 나무들인데 하도 울창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낮에도 어둑어둑할 지경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도랑과 마을숲을 사랑합니다. 


김해시는 타고난 조건이 이처럼 좋은 용전마을을 2015년 도랑살리기 사업 대상 마을로 선정하고 낙동강유역환경청에서 받은 예산 3000만 원을 쓰기로 했습니다. 



수행 단체 공모에서는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이사장 양운진)가 지정됐습니다.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는 2013년 함양 임호마을, 2014년 창녕 명리마을과 함양 망월마을에서 경남도민일보 자회사인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와 사업을 함께 진행해 왔습니다. 이번 용전마을 도랑살리기도 둘이 힘을 합해 함께했습니다.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는 6월 준비를 거쳐 7월부터 본격 사업을 벌였습니다. 11일 마을회관에서 첫 주민교육을 하고 19일에는 발대식·협약식을 마을숲에서 크게 치렀습니다. 


도랑을 살리는 데 힘을 합하자는 협약에는 김해시와 마을 주민은 물론 화포천환경지킴이·한울타리가족봉사단(5기)·낙동강환경지킴이 같은 민간단체와 게스템프카테크·푸른환경이엔지 같은 지역 기업까지 동참했습니다. 


그 뒤 도랑살리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주민 교육은 11월까지 모두 아홉 차례 진행됐고 선진지(김해 양지마을) 견학, 도랑 치기, 노랑꽃창포·미나리·물억새 같은 수질 정화 식물 심기 같은 일도 잇달아 해냈습니다. 


화포천환경지킴이 등 민간 단체들은 7월과 11월 두 차례 마을을 찾아 쓰레기를 치웠고 이에 질세라 마을 주민들도 틈을 내어 9월과 11월 도랑지킴이활동을 벌였습니다. 



이처럼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마을주민들한테 있었습니다. 마을주민들은 도랑과 마을숲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래서 더욱 능동적·적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마을숲을 찾아 놀러오는 외지인들한테는 생태 보전 홍보를 하고 또 더럽히지 않도록 부탁도 했습니다. 도랑에 있는 쓰레기를 스스로 치울 뿐만 아니라 누구도 버리지 못하도록 서로 감독도 했습니다. 


게다가 사업 대상에 들지 않는 데까지 발벗고 나섰습니다. 마을 위쪽 도랑 상류에서 놀러 온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용전폭포 일대 오염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며 대책을 세우려고 애를 썼다. <경남도민일보>는 이런 주민들 애씀을 높이 사서 8월 10일자 1면에 관련 기사를 크게 싣기도 했습니다. 


도랑살리기 사업에서 마을숲이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찾는 사람이 넘쳐나다 보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포장지에 '우리가 더럽힌 용전숲 도랑물, 하루 뒤 우리 입에 들어옵니다'라고 적은 홍보용 물티슈를 만들어 나눠줬습니다.(실제 용전마을 도랑물은 낙동강과 합류한 뒤 창암취수장과 명동정수장을 거치며 김해시민이 마시는 식수가 됩니다.) 


여태까지는 놀러온 사람들이 쓰레기를 제대로 봉투에 담아 내놓아도 고양이 등이 갉아먹는 바람에 동네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보관창고를 만들어 그 안에 넣어두도록 했습니다.


무뚝뚝한 물건이 되지 않도록 김진성·이성헌 씨 등 지역 미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재질이 부드러운 목재로 색깔을 입히고 글자와 솟대도 더해 멋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쓰레기분리수거함은 실용성을 중시해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작가들은 조형물 제작에서 더욱 빛을 냈습니다. 맨 위에 산이 있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도랑을 곡선으로 형상화한 뒤 그에 기대어 나무와 숲과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뜻이 온전하게 전해지면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형상입니다. 



여태 도랑살리기에서는 어디에서도 이처럼 예술성 있는 조형물이 만들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그냥 사업 경과를 정리하는 푯말을 우람하게 세우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민간 환경단체들도 남달랐습니다.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는 도랑 수질 정화를 위한 행사에 쓰이는 EM(유용미생물)흙공 500개를, 화포천환경지킴이는 농업용과 가정용으로 쓸 수 있는 EM원액 다섯 상자를, 낙동강환경지킴이는 집집마다 두고 쓸 수 있도록 가정용 쓰레기 분리수거함 서른 뭉치를 기증했습니다. 


오른쪽이 임차식 어른.


이런 노력은 용전마을이 도랑살리기 사업 우수마을로 뽑혀 낙동강유역환경청장상을 받는 보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마을 도랑 살리기에 가장 열성으로 나선 임차식 어른이 11월 26일 2015년 하반기 도랑살리기 워크숍(대구)에 참석해 상장과 상금을 받았습니다. 경남에서는 용전마을 한 군데만 선정됐는데 선정 타당성과 사업 효과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12월 6일에는 올 한 해 활동을 마무리하는 '완공 기념 주민 잔치'를 마을회관에서 열었습니다. 양종욱 용전마을 이장은 "확실하게 달라졌어요. 도랑도 숲도 마을도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주민들 태도도 더욱 적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마을 주민의 능동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민간단체와 기업, 그리고 김해시까지 뜻을 내고 힘을 보탠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장만한 떡과 고기, 다과 마실거리를 나누며 뿌듯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도랑에 수풀이 대중없이 우묵하게 자라 보기 싫은데, 내년(2016년)에 사업이 이어져 이런 현상을 없애고 싶다고들 말했습니다. 아마 주민들 바람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크라우드펀딩으로 공익콘텐츠를 출판하다

$
0
0

의미도 있고 공익적 가치도 있지만 상업성은 낮은 콘텐츠가 있다. 그래서 비용을 들여 책으로 출판하기 부담스럽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분들에게 기본적인 출판비용을 후원받아보기로 했다. 물론 200만 원은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지만, 출판사는 전혀 비용을 대지 않고 100% 후원으로만 충당한다는 것은 뻔뻔한 짓이다. 그래서 목표금액을 200만 원으로 잡았다. 물론 모금 기한 내 목표금액을 넘어선다면 고마운 일이고...


이렇게 시작한 것이 《남강 오백리》 출판 펀딩이다. 경남도민일보 웹사이트에 올리고 인터넷과 모바일 결제시스템을 붙였다. 인터넷과 모바일 결제에 익숙하지 않은 분을 위해 계좌번호도 밝혀두었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등을 통해 모금 사실을 알렸다.


1월 11일부터 시작한 출판 펀딩은 이제 9일째가 됐다. 모금액은 계좌이체까지 합쳐 140만 원 정도. 모금 기한을 한 달로 설정했으니 목표는 무난히 채울듯 싶다. 첫 시도가 성공적이어서 기쁘다. 아래는 출판 펀딩 안내글이다.



경남 공익 콘텐츠 기획 《남강 오백리》 출판 펀딩을 시작합니다.


경남에는 3개의 큰 강이 있습니다. 낙동강섬진강, 그리고 남강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지역은 물론 한반도의 젖줄이자 물길을 중심으로 조상 대대로 형성되어온 삶의 터전입니다.


3개 중 낙동강과 섬진강에 대한 콘텐츠는 많습니다. 소설이나 산문, 탐방기 등 책으로 출판된 기록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남강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처음으로 남강을 스토리텔링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2014년 6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남강 오백리’를 취재하여 《경남도민일보》와 월간 《피플파워》에 연재한 바 있습니다. 경남의 가장 중요한 식수원으로서 남강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경남 사람들의 삶과 역사,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공익 프로젝트였습니다.


진양호의 석양. @김주완


의미 있는 콘텐츠는 책으로 출판, 유통됨으로써 최종 가치를 창출하고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의미도 있고 가치도 높지만, 상업성이 낮은 경우도 있습니다. 《남강 오백리》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독자님들께 이 공익 콘텐츠의 의미와 가치를 먼저 평가받아보려 합니다. 이른바 ‘출판 펀딩’입니다. 《남강 오백리》가 꼭 출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해주십시오.


■ 출판 대상 프로젝트 : 《남강 오백리》(가제)


■ 저자 : 권영란 기자(전 경남도민일보, 현 단디뉴스 대표)


■ 프로젝트 마감 : 2016년 2월 11일(30일간)


○펀딩 목표 금액은 200만 원입니다. 목표가 달성되면 3월 중 출판 예정입니다.

(출판비용은 500만 원 정도로 예상하지만, 나머지는 공익 차원에서 저희 출판사가 부담합니다.)


○1만 원 이상 후원해주신 분은 책에 후원자의 이름이 기재됩니다.


○2만 원 이상 후원해주신 분께는 저자가 서명한 《남강 오백리》(권당 2만 원 내외 예상) 한 권을 보내드립니다.


○3만 원 이상 후원해주신 분께는 두 권을 보내드립니다.


○5만 원 이상 후원을 해주신 분께는 두 권 + 직접 지정해준 개인이나 단체에 정가에 해당하는 책을 보내드립니다.


후원하기 바로가기 


경남도민일보·도서출판 피플파워 올림


*직접(수동) 계좌이체 시 계좌번호: 농협 301-0070-4384-01 경남도민일보사(이체 후 성함과 연락처, 이체금액을 idomin@daum.net으로 보내 주셔야 후원자 성함을 기재하고 책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소설 혜주 출간을 알리기 위해 보낸 메일

$
0
0

소설 《혜주》가 나온 후 지인들께 이렇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남도민일보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는 김주완입니다. 연초에 저희가 펴낸 한 권의 소설을 소개드리기 위해 메일 올립니다.


이번 책은 역사소설입니다. 《혜주》(도서출판 피플파워, 1만 3000원, 428쪽)라는 소설인데요.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그릇에 넘치는 권력을 잡은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 보여주는 소설.'


제가 처음 소설 《혜주》 원고를 읽고 난 뒤 한 줄로 정리된 생각은 이랬습니다. 제가 이 책을 출간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망설임도 없진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여왕이 있었다는 역사의 가설을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현 시대 인물과 관련, 괜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진 않을지….


저술 경력이나 출판 이력도 알 수 없는 정빈(丁彬)이라는 소설가의 작품을 내용만 보고 선뜻 출간한다는 것도 위험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가 소개의 문구처럼 ‘지난 30년간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해왔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게 없는 신예 소설가입니다.



소설은 ‘오래된 종택 제각에 잠들어있던 한 권의 비록(秘錄)’이 발견되면서 시작합니다. 비록에 적혀있는 내용은 놀라웠습니다.


소설은 전혀 왕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주가 선왕의 갑작스런 승하로 여왕이 되는 설정으로 전개됩니다. 왕세자가 아니었으니 군왕 수업을 받지도 못했는데 막중한 왕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곱고 착한 공주였습니다. 그런 공주가 막상 권력의 정점에 올라 어떻게 폭군으로 변모해 가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요즘 우리시대에 비춰 던져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습니다.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도 있습니다. 다가올 선거에선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으로 투표해선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 걸맞은 그릇과 능력, 철학을 갖췄는지를 철저히 검증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설 《혜주》가 우리에게 주는 끔찍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 이어지길 빌어 올립니다.


○책 소개 보기


예스24http://bit.ly/1mBbtGh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orderClick=LEB&barcode=9791186351024  

알라딘http://aladin.kr/p/5Jv7l  

인터파크http://bit.ly/1PeJcM1 


김주완 드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역사 공부는 자기 사는 고장에서 시작해야

$
0
0

2015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

경남도민일보가 2013년과 2014년에 이어 2015년 세 해째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을 진행했습니다. 고등학생 특히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경남도교육청 후원으로 모두 열다섯 차례에 걸쳐 이뤄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 경남 지역의 역사적 명소·명품을 둘러보고 알아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다들 아시는 대로 대학 입시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능 시험에 나오는 전국적인 것이나 세계적인 것만 배우고 익힌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다들 지역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기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인 셈입니다.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찾은 마산제일고 학생들이 옛날 풍금을 연주해 보고 있습니다. 옛날 문화재들도 다들 당대에는 이런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물건들도 나중에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진 외국에서는 특히 역사 또는 사회 과목의 경우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부터 광역과 전국 그리고 세계로 넓혀나가는데 우리나라는 이와 양상이 사뭇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창원 진해 웅천읍성 옹성에 올라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양산여고 학생들. 문화재는 이렇게 사람과 어우러질 때 더 값어치가 살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틈새를 메우면서 지역에도 소중한 역사·문화 자산이 있음을 알고 자기 지역에 대한 애틋함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은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합천삼가고 학생들이 하동 쌍계사에서 미션 수행을 위해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진감선사대공탑비는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짓고 썼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탑비이지만, 미션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거기 적힌 한자들을 한 번이나마 곰곰 살펴보게 됩니다.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나름 중요한 지역 현장을 찾고, 널리 알려져 있는 대상이라 해도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새기는 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천 선진리왜성 천수각 자리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마산무학여고 학생들. 선진리왜성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해에 왜군에게 조선-명나라 연합군이 참패한 격전지입니다. 우리 전통 토성이 있던 자리에 쌓은 왜성인데, 왜군이 임진왜란 당시 울산 순천과 함께 조선 남부에서 3대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2015년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은 11월 18일 마산제일고(창원)와 합천 삼가고(하동)에서 시작해 11월에는 산청 덕산고(26일, 함양) 마산고(27일, 김해) 마산 지역 학생들(29일, 창원)로 마무리했습니다.


경남 대표 선비인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시는 덕천서원 강당에서 미션 수행한 결과를 보고 있는 창원문성고 학생들. 남명 조식은 당대에 퇴계 이황과 더불어 쌍벽으로 꼽혔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퇴계 이황은 다 알지만 남명 조식은 아는 경우가 적습니다. 왜일까요? 잘라 말하자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한 번 생각해볼만한 구석입니다.


12월에는 김해 진영고(3일, 남해)와 남해 창선고(3일, 거제) 마산삼진고(7일, 통영) 진주진양고(10일, 산청) 김해 구산고(12일, 창원 옛 진해) 김해여고(15일, 진주) 창원 명지여고(15일, 창녕) 마산무학여고(19일, 사천) 양산여고(19일, 창원 옛 진해) 창원문성고(24일, 산청)로 이어졌습니다. 


함양 화림동 골짜기에서 산청덕산고 학생들이 거연정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 멋집니다. 정자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등에 걸친 쓰임새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이렇게 한 번 거닐고 찾아보는 보람도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탐방 대상 지역을 보면 창원이 네 차례(옛 진해 지역만 탐방 두 차례 포함)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산청으로 두 차례였습니다. 그리고 하동·함양·김해·남해·거제·통영·진주·창녕·사천이 제각각 한 차례씩이었습니다. 


창녕 하병수 초가를 찾아 장독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창원명지여고 학생들. 주인 할머니는 이 날도 뒤뜰에서 나무를 돌보시는 가운데서도 소란한 어린 방문객들을 온기어린 웃음으로 맞아주셨습니다.


학생들로부터 한 차례도 간택받지 못한 지역은 합천·함안·의령·양산·밀양·고성·거창 등 일곱 군데였습니다. 


김해 화포천 습지를 찾아 억새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마산고 학생들. 가까운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묘소도 함께 둘러봤는데요, 미래문화재로 손색이 없는 명소라 하겠습니다. 정치색이나 또는 그이에 대한 좋아함과 싫어함을 떠나,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 자기 고향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최초 인물이라는 점이 돋보입니다.


경남도민일보는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을 위해 경남 지역 열여덟 곳 자치단체별로 모두 탐방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신청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바로 떠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랍니다. 


진주 문산성당 서양식 본관 건물에 들어가 구경하고 있는 김해여고 학생들. 문산성당은 경남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본당입니다. 진주는 물산이 풍성한 덕분에 이처럼 '최초'가 여러 군데 있습니다. 진주향교, 옥봉경로당, 진주상무사(상공회의소), 진주교회 등등이 그렇습니다.


지역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는 유적을 중심으로 삼고 학생들 관심을 끌 만한 거리를 더하는 식입니다. 이를 기본으로 한 위에 학교쪽 주문을 감안해 더하거나 빼거나 해서 진행합니다. 


남해유배문학관을 찾아 주리틀기 고문을 해보고 있는 김해 진영고 학생들. 유배=귀양은 근본 외로움을 고통으로 안기는 형벌입니다.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같은 유배문학은, 그런 고통을 꿰뚫으면서 피어난 꽃이라 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참고해 보시라고 경남 전역 탐방 루트를 함께 소개합니다. 


△거제 : 사등성~가배량성~거제향교~거제현관아~옥산금성(또는 칠천량해전공원) 


남해 창선고 학생들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거제 가배량성을 찾았습니다. 그 뒤 통제영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가지 않았으면 거제가 통영이 될 뻔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렇게 통제영 진영이 이리저리 옮겨다녔습니다.


△거창 : 정장리최남식가옥~문바위~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불입상~수승대~거창박물관 


△고성 : 마암면석마~옥천사~학동마을 옛담장~상족암~고성박물관 


△김해 : 율하유적공원~화포천~봉하마을~분성산성~김해향교 


마산삼진고 학생들이 통영 삼덕항에서 돌벅수를 찾아 둘러보고 있습니다다. 바닷가에는 나무가 아니고 돌로 만든 장승이 많은데 그 까닭은 돌이 나무보다 해풍이나 소금기에 쉬이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해 : 이락사 일대~정지석탑~남해향교~남해유배문학관~물건방조어부림 


△밀양 : 삼랑진역급수탑~작원관~예림서원~월연대~밀양박물관 


△사천 : 다솔사~사천향교~사천읍성~선진리성·조명군총~대포·종포갯벌 


△산청 : 단성향교~단속사지~남사마을~남명조식유적지~구형왕릉·덕양전 


산청 단속사지 당간지주 앞에서 그 쓰임새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진주 진양고 학생들.


△양산 : 춘추공원~용화사·황산잔도~통도사~북정동고분군·양산박물관 


△의령 : 덕곡서원~충익사 일대~정암진 일대~성황리소나무~곽재우·안희제 생가 


△진주 : 청곡사~문산성당~진주역차량정비고~상무사~진주향교~진주성·국립진주박물관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찾은 창원 명지여고 학생들이 소원을 빌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은 동짓날 해뜨는 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경주 석굴암 본존불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창녕 : 관룡사·용선대~옥천사지~신씨고가·영산향교~창녕지석묘~술정리동삼층석탑 


△창원 : 창원향토자료전시관~동판저수지~제포진성·웅천읍성~창동·오동동 근대역사유적(또는 옛 진해시가지 근대역사유적) 


△통영 : 서포루~통제영~문화동 벅수~삼덕항 일대~당포성지~박경리기념관 


창원 진해 남원로터리에서 미션 문제 풀이를 하고 있는 김해 구산고 학생들 모습. 남원로터리에는 이순신 장군이 지은 한시를 백범 김구 선생이 쓴 김구친필시비가 있습니다. "바다에 뱅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을 하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나무와 풀조차 알아주는구나!" '나라를 구하겠노라'는 결심이 300년 세월을 뛰어넘어 두 위인을 이어줬습니다.


△하동 : 하동읍성~조씨고가~범왕리푸조나무·세이암~쌍계사 


△함안 : 칠원향교~무기연당~주리사지사자석탑~말이산고분군·함안박물관~장춘사 


△함양 : 벽송사~남계·청계서원~허삼둘가옥~운곡리은행나무~거연정·동호정 


△합천 : 영암사지~뇌룡정·용암서원~월광사지삼층석탑~옥전고분군·합천박물관(또는 해인사). 


함양 지리산 벽송사를 찾은 산청 덕산고 학생들. 절간에 가면 대체로 석가모니불(대웅전)이나 비로자나불(무량수전 또는 대적광전) 같이 부처님을 한가운데 자리에 모십니다. 그런데 벽송사 한가운데는 대신 선원(禪院)이 있습니다. 조선 선불교의 종가라 할만합니다. 앞에 보이는 전나무 두 그루가 아주 기상이 씩씩합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권력 누릴 수 있다면 박근혜도 잡아먹을

$
0
0

소설 <혜주>를 읽었습니다.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이 부제입니다. 30년 가량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해 왔다는 정빈(丁彬)이라는 사람의 역사소설입니다. 


<혜주>는 아주 독특한 역사소설입니다. 보통 역사소설은 역사에서 사건이나 인물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혜주>는 아니었습니다. 현대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역사 소재를 빌려쓴 경우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혜주>는 박근혜 대통령을 바로 겨냥하고 있습니다. 역사 무대만 조선시대로 설정해 놓았을 뿐입니다. 부왕 광조에 뒤이어 왕위에 오르는 여왕 혜주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혜주>를 보면 두물섬이 홍수에 잠겨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과 마포에서 시작된 장질부사 역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가 떠오릅니다. 


이에 항의하는 성균관 유생들과 일반 백성들의 농성도 나오는데 이 또한 곧바로 2014년 이후 이어지는 광화문 농성과 겹쳐집니다. 이들 농성에 대한 무시와 탄압도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과 겹쳐집니다. 



이렇듯 박근혜 대통령을 바로 겨냥하는 <혜주>는 조선시대 광조 치하로 곧장 옮겨갑니다. 물론 아시는대로 광조는 완전 허구입니다. ‘혜주’는 광조의 딸 ‘혜명공주’로 나오는데요, 이또한 완전 허구입니다. 


광조는 재위 20년만에 세상을 뜨는데요, 그 사후 혜명공주가 왕위에 오릅니다. 남파와 북파가 합의해서 임금으로 추대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사건들이 죽 벌어집니다. 


진실을 입에 올리는 인물에 대한 단설형(斷舌刑:혀를 자르는 형벌)과 백성들을 감시하는 정탐서, 지금으로 치면 정무직으로 여겨지는 별직(別職)과 더불어서입니다. 


그러는 사이사이 이중삼중으로 얽어지는 남녀관계도 곁들여집니다. 어떤 이는 이또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미지가 겹쳐진다는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있군요. 


열다섯에 임금이 된 혜명공주=혜주의 치세 4년은 이렇게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다시 남파와 북파가 합작으로 혜주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작가 정빈은 여기에다 혜주 치세 4년을 역사에서 지우는 작업을 덧붙입니다. 혜주를 임금 자리에 올리고 내리는 데 함께했던 신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폐주시대는 너무도 치욕스럽습니다. 우리도 조정에서 정사를 같이 봤습니다만, 그때를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폐주의 갖가지 실정을 전부 다 기록할 수도 없을 뿐더러 기록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폐주의 실정은 우리의 책임도 전혀 없진 않고요….” 


“폐주 같은 임금은 이 나라 종사의 수치요, 당대를 산 모든 사람들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후세에 교훈으로 삼을 폭군은 연산군 하나로도 족합니다.” 


“게다가 폭군의 폭정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대소신료들도 함께 거명이 돼야 하는 폐주의 폭정을 굳이 기록으로 남겨 부끄러운 선조가 되고 싶으신 겝니까?” 


폐주의 재위 4년은 선왕 광조의 재위 기간에 들어갔고 이로써 광조의 재위는 20년에서 24년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폐주는 혜명공주로 있다가 광조가 승하하는 그 해에 돌연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습니다. 



소설 <혜주>의 이런 전개를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혜주>에서는 혜주를 임금 자리에 올린 벼슬아치들이 혜주와 그 통치에 대해 부끄러움은 느끼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더불어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과연 생각이 어떨까요? 박근혜 대통령과 그이의 통치를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길까요? 


제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맞아 보여준 여러 행태는 적어도 제 눈에는 더없이 무능하고 뻔뻔하고 비인간적이어서 한없이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소설 <혜주>에 나오는 이런 대사들은 혜주가 임금 자리에 쫓겨난 뒤에 이야기이므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건재하는 상황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고 혹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요.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박근혜 대통령 치세가 끝난 뒤에도, 더 나아가 그 말로가 비참하게 마무리된 이후라 해도,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과 더불어 권력을 누린 자기 처신을 부끄러워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고 저는 봅니다. 


진정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구할 인물이며 그 통치 또한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 믿고 열심히 좇을 뿐 사리사욕은 챙기지 않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은 출세와 영달과 권력을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싸고도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이들 대부분은 자기네가 권력을 누릴 수만 있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가 출세와 영달을 하고 누릴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박근혜조차도 잡아먹을 그런 인물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서출판 피플파워. 1만3000원. 427쪽. 일단 잘 읽힙니다. 소설로서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한 서슬 푸른 비판이나 풍자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재미가 더 쏠쏠하게 많아집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블라인드 처리된 농협 회장 선거 관련 글

$
0
0

원래 이 글의 제목은 ‘농협 중앙회장 후보 김순재 숨은 얘기 둘’이었습니다. 1월 3일 써서 올렸는데 요즘으로는 보기 드물게 댓글이 51개 달렸고 페이스북에서는 1244차례 ‘좋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1월 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 글이 불법 선거운동으로 보고 다음카카오에 삭제 요청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카카오가 ‘삭제’까지 하지는 않고 ‘블라인드 조치’만 했습니다. 말하자면 지워지지는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만 했다는 말씀입니다. 


농협중앙회장 선거는 1월 12일 끝났습니다. 기호 5번 김순재 후보는 5표를 얻어 꼴찌를 했습니다. 이즈음 김순재 후보는 이 같은 선거 결과를 확인해 주면서 ‘은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으로는 어쩌면 김순재 선수가 농협과 관련해서 나서는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이 ‘블라인드 조치’를 당했을 때 저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해서 물었습니다. 중앙선관위는 이 글이 선거운동에 해당이 되며 ‘공공단체 등 위탁 선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징역 2년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에 해당되는 범죄라 했습니다. 


위탁선거법을 따르면 누군가를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않게 하는 선거운동은 후보자 본인만 할 수 있으며 나머지 다른 사람이 하면 처벌 대상이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제 글이 선거운동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냐를 떠나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분명하기에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농어민신문.

어쨌거나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해서 선거가 끝났으니 원상회복해 줘야 맞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중앙선관위는 불법인 선거운동을 단속할 권한만 있지 불법으로 선거운동을 한 블로그 글을 원래대로 돌려줘야 할 의무는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선거도 끝났고 했으니 다음카카오한테 연락을 해서 다시 열어달라고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권한만 있고 의무는 없다는 중앙선관위 말에 조금은 황당했습니다. 헌법상 보장된 권리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엄연한 제약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원인 제공을 한 주체가 그로 말미암은 침해를 원래대로 되살려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법률 조건과 현실 상황은 중앙선관위가 상황을 원래대로 회복해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이렇게 원래 썼던 글을 다시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봐 주시는 여러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이런 정도 선거운동은 용인하고 합법화해 줘야 맞지 않을까요? 농협 조합원이 230만 명을 넘는데, 그 중앙회장을 뽑는 선거에 투표권을 가진 이가 291명밖에 안 되는 조건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돈은 최대한 묶어야 하지만 입은 최대한 풀어야 합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회장 선거가 1월 12일(화) 치러지는 모양입니다. 여기 등록한 후보 여섯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전직 조합장입니다. 


2009년 동읍농협 조합장에 당선됐는데, 2015년 있었던 전국 최초 조합장 동시 선거에는 나서지 않았습니다. 출마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까닭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제가 대표로 있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다 단감 홍보 블로거 팸투어를 두어 차례 맡긴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묻지는 않고 이래저래 알아보니 농협중앙회 회장 출마를 위해 동읍농협 조합장 재선에 나서지 않았다더군요. 이 또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현직 조합장도 중앙회장 선거에 나설 수 있고 그런 경우가 오히려 득이 된다고 들었으니까요) ‘김순재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이는 이번 출마를 위해 그동안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전국 곳곳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만나 오래 토론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대부분 사람들 눈에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공룡’으로 비치는 농협 개혁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주장하고 설명한 것 같습니다. 


왼쪽이 저 김훤주고 오른편이 김순재 선수입니다. 저는 김순재 팬입니다.


저는 농민이 아니기에 농협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래서 그이 주장과 설명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도 판단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김순재에 대해서 두 가지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10년 동안은 농사만 짓고 농민운동은 그 다음에 하겠다.” 


제가 알기로 김순재는 경상대 낙농학과를 나왔고 창원 동읍 판신마을이 고향입니다. 학생운동 시절에도 이러저런 신화나 전설 수준에 이르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대 젊은 시절 뜨거운 혈기가 있다면 어떻게든 한 번 해 볼 수는 있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3년인가에 김순재한테서 들었던 한 마디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학교 졸업했을 때 ‘앞으로 10년은 아무 말 않고 농사만 짓겠다. 그러고 나서 농민운동을 해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토록 긴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나름 노동운동 쪽에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중반을 보냈습니다만, 거기서 저를 포함해 그런 생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아마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그것도 대학 출신으로 지도자급에 이른 사람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실천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지금 현실과는 달라져도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 때 했었습니다. 


학생 출신이 공장에 들어가 작업복을 입는다고 바로 노동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노동자처럼 행동하고 노동자처럼 생각하고 노동자처럼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노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노동자 복장을 한 학생일 따름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노동자가 아닌 학생운동 출신이 노동운동을 이끌고 주도할 경우 그 노동운동이 성공할 개연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운동의 재판일 뿐이지 참된 노동운동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순재는 속된 말로 먹물을 다 빼고 몸과 마음이 모두 농민이 되는 것이 먼저고 운동은 그 다음이라고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농민운동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타산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2010년 1월 동읍농협 조합장 선거에서 순수 농민운동 출신이던 김순재가 모든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출마도 뜻밖이었고 당선도 뜻밖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아니었습니다. 


당선되기 전에 김순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조합장 선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얼마나 당선 가능하다고 보시느냐 물었습니다. 그이는 “거의 100%”라고 말했습니다. 출마하기 전에 이미 파악이 다 됐다고 했습니다. 


동읍농협 조합원이 얼마나 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김순재는 그 모든 조합원의 현황과 성향을 정통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이가 10년 동안 농사지으며 농민으로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조합원들을 그리 잘 알고 또 나아가 믿음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농민운동을 하기 앞서 먼저 농민이 되겠다…… 농민이 하는 운동이 바로 농민운동이라는 명제에 기본부터 충실한 자세를 저는 여기에서 봅니다. 그리고 이를 이룩하려면 돌아가는 길이 없고 긴 안목으로 꾸준하게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정확한 현실 인식과 성실함도 함께 봅니다. 


우리 사회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쉽습니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 한 순간 벼락치기로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 자기 삶을 통째로 걸고 일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 우리나라 농협에도 아쉽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스무 살 시절에 겪은 경험이 평생을 좌우한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린 시절 고생을 한 사람은 서른 마흔이 돼서도 고생을 잘 견디고 이깁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사리 무너지곤 합니다. 


그런 고생을 사서 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김순재 군대 생활이 그러했습니다.(물론 김순재는 자기가 그런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았다고, 나중에 겪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돼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2015년 봄철 어느 날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학 3학년 때 육군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찌어찌해 받은 보직이 지역 신병 훈련부대 조교였습니다. 


그 때 신병들은 몸에 돈을 지니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는 친가 외가 일가친척 집을 죄다 돌면서 입대 인사를 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받는 돈이 꽤 쏠쏠했습니다. 그렇게 꼬불쳐 들여오는 돈이 몇 만원은 예사고 몇십 만원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다 받아내어 은행 통장에 넣어뒀다가 돌려주는 것이 조교의 임무였다고 합니다.(대한민국에서 국가의 가장 커다란 책임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지키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절대 다수였다고 합니다. 



돈을 꼬불쳐 들어온 신병들한테도 조금 콩고물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통장에 넣지 않고 빼돌리는 일을 당시 대부분 조교들이 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이렇게 빼돌려진 돈은 먹이사슬을 타고 군대 지휘부까지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순재는 신병들 돈을 규정대로 은행에 100% 예치했다고 합니다. 부정에 저항하고 비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하니까 했던 것뿐이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부에서 ‘상병’ 김순재를 찾는 전갈이 왔습니다. ‘어디서 이런 빨갱이가 들어왔느냐?’, ‘어떻게 이런 녀석이 조교라는 중책을 맡게 됐느냐?’ 등등 험한 말도 많이 듣고 고초도 꽤 겪었다고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고초가 많은 경우 물리적 폭력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물리적 폭력을 넘어서는 이상이라 했습니다.(구체적인 내용을 듣기는 했지만, 여기서 자세한 서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읽는 분들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에 어찌어찌해서 군대 다른 기관에 알려지는 바람에 더이상 커지지 않고 마무리가 됐다고 합니다. 고초에서 풀려나게 됐을 때 담당 장교가 한 말이 이랬답니다. “야 인마, 어째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있었어?” 


그제야 김순재는 비로소 눈물을 왈칵 펑펑 흘리며 말했답니다. “뭐를 어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진정성 그 자체입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물론 고립감·무력감 등등에 시달리면서도 놓지 못했던 진정성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진정성을 갖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성을 갖춘 사람은 우리 농협에도 필요하리라고 저는 압니다. 


덧붙임 : 이번 농협중앙회장 선출에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 대의원 290 더하기 현직 중앙회장 1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간선제로 농협 조합원의 뜻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지 미심쩍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읽어주십사 바랍니다. 


그이가 농협 개혁을 전면적·전격적으로 추진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10년은 농사만 짓고 그 다음 10년은 운동도 하다가 최근 5년은 제도권에서 조합장까지 하면서 익힌 현실 감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가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지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김순재 여태 살아온 삶이 말해주는 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블라인드 처리된 박기준 예비후보 관련 글

$
0
0

2011년 6월 16일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제목은 ‘실명 기록 : 검사와 스폰서, 그리고 경찰청장’입니다. 2015년 12월 11일 다음카카오로부터 ‘해당 게시물 임시조치’를 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016년 1월 11일 ‘블라인드 처리’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뭘 잘못 썼나? 사실 관계에서 틀리게 쓴 대목이 있나? 그래서 나중에라도 무슨 나쁜 일을 겪지나 않을까? 이런 생각이 줄이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바쁘기도 하고 해서 깜박 잊고 지났습니다. 요즘 들어 조금 시간이 나기도 하고 해서 ‘박기준’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한 번 해 봤습니다. 제가 쓴 이 글에 대해 권리침해신고를 한 주체가 ‘박기준의 대리 단체’로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색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우습기도 했습니다. 20대 총선에 새누리당 예비 후보로 울산 남갑 선거구에 등록한 사람이 바로 박기준이었습니다. 박기준, 현직 변호사로 돼 있는데요, 이래저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바로 우리 사회에 ‘섹검’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당사자라 할 만한 인물이더군요. 


총선 출마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관련 내용이 올라 있는 블로그들을 봉쇄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이에 다시 올립니다. 이렇게 하는 제가 잘못이라거나 불법이라면 그에 따른 처분을 달게 받겠습니다. 


참고삼아 한 말씀 덧붙입니다. 여기 이 글은 제가 일부러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2011년에 나온 책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을 보고 거기 나오는 것들을 옮겨 적었을 따름입니다. 


아울러 관련 기사도 두엇 덧붙입니다. <시사인>, <한겨레>, <민중의 소리>, <고발뉴스>, <미디어스>의 것입니다. 


어디 한 번 써 봐 삭제하면 그만이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188 

각종 ‘파문 중심’ 인물들, 대거 출사표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26915.html 

총선 출사표 던진 ‘섹스 스폰서’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의 ‘철판’ 행보

http://www.vop.co.kr/A00000982237.html 

최승호PD “스폰서 검사 정치 안돼…한승철 영입취소, 與 박기준도 박탈하라”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00 

김석기 김용판 서갑원 박기준… ‘그때 그 사람들’ 총선 나온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965 


------------------------------


1. 검찰 중수부 폐지 무산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합의했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가 없었던 일로 됐습니다. 13일의 일입니다. 청와대 부정과 검찰 반발에 부딪히자 한나라당이 곧바로 돌아섰고 민주당도 슬그머니 놓아줬습니다. 



검사 윤리강령 제1조는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돼 있답니다. 중수부 폐지에 대한 검찰의 반발이 이 윤리강령을 실현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섹검' '술검' '떡검(뇌검)' 등으로 표상되는 '누리기'를 위한 것일까요? 


이번에 마침 제가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을 읽었습니다. 접대받은 검사들 실명을 그대로 적어서 눈길을 끌었던 책인데요, 지난 4월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검사 스폰서 정용재가 증언을 하고, 정희상 <시사인> 기자와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검찰 중수부 폐지 무산을 기념해 책 내용을 한 번 간추려 봤습니다. 


2. 룸살롱 여사장이 검사들 장모 


룸살롱 사장 : 아가씨들 이제 자기들 파트너 정해준다고 전부 내가 (검사들) 장모로 통했어요. 내가 책 쓴다고 하면 부들부들 떨 사람 엄청나게 많아요.(250·275쪽) 


당대를 풍미했던, 앞으로도 길이 남을.


"4월 6일 출간을 앞두고 안동교도소에 수감된 '스폰서 정씨'를 면회했다. 수감 상태에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검찰의 주시 대상이었다. 안동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그의 구속을 지휘한 부산지검 검사가 이 책 초고를 손에 넣으려고 구치소 내 그의 방에 들이닥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원고를 우편으로 내보낸 뒤여서 허사로 끝났다고 한다."(12쪽) 


"책에서는 '정용재 문건'에 나온 대로 모든 연루자의 이름을 실명으로 밝히고 있는 바, 그 연루자 가운데 혹 '억울하다'는 분이 있어 '공개적'으로 그 '억울함'을 명백하게 입증한다면 입증 이후 발간되는 책에서는 그 사정을 밝혀 배려할 용의가 있다. 또 혹 '물증' 운운하며 저자와 출판사를 겁박하려는 분이 있다면 먼저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그 증거를 물을 것을 권한다."(13쪽) 


3. 술접대 돈접대 성접대와 안하무인 행위들 


어떤 실명이 나오는지, 한 번 알아봤습니다. 먼저 검사들입니다. 


뉴시스 사진.


문규상 : 술접대는 받았으나 성접대는 받지 않았답니다. 정용재가 접대한 검사 가운데 유일하게 정용재한테 술 밥을 샀답니다. 정용재가 사정이 어려울 때 위로해 준 유일한 검사라 합니다. 


박기준 : 술접대 돈접대 성접대 가리지 않고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진주지청 평검사 시절 부산 원정 접대(술 그리고 성)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2010년 폭로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이었습니다. 


유일석 : 정용재와 접대로 얽힌 사이가 아니고 '민사로 해결할 문제를 놓고 정용재를 사기죄로 형사 처벌하려 하고 양자간 합의조차도 방해하는 등 인권유린적 수사'를 했답니다. 정용재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해 유일석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김경수 : 정용재는 김경수가 사법연수원생일 때 진주지청 김학곤 검사실에 배치돼 와서 시보를 할 때 서너 차례 향응과 촌지를 제공한 기억이 있답니다. 성접대도 했답니다. 폭로를 앞둔 2010년 2월 당시 부산지검 차장이던 김경수는 정용재를 불러 40분 넘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한승철 : 창원지검 차장검사이던 시절 후배인 강길주·김철 부장 검사와 함께 술접대를 받고 돈접대는 따로 받았다고 합니다. 


강길주·김철 : 한승철 창원지검 차장검사와 함께 술접대를 받고 선배인 한승철을 두고 아가씨들과 함께 성접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김철은 당시 검찰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성접대를 받은 검사로 유일하게 확인됐습니다. 


이어진 특검에서는 김철도 성접대 무협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특검 발표는 이렇습니다. "장부에 성매매를 한 것처럼 표시돼 있다고 하더라도 속칭 '공차', 화대는 받고 남성 측의 사정 때문에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고 합니다. 공차라는 것도 있어서 반드시 성행위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강수산나 : 서울중앙지검에서 특별검사팀으로 파견된 검사. 정용재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을 했습니다. "강수산나 검사는 내게 '성관계를 어떻게 하냐?' '한 달에 몇 번 하냐?' 하는 식으로 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립선비대증을 앓고 있는데 관련 진단서까지 있다. 내가 어이없어 하며 강 검사에게 '왜 묻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녀는 '김철 부장검사를 성 접대했다고 제보했지만 김 부장검사는 성 매수를 당신이 해놓고 자기에게 덮어씌운다고 하더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검사님, 내가 성기능이 좋으면 그날 내가 한 것이고 성기능이 안 좋으면 내가 안 한 것입니까? 이런 질문이 어디 있나요?'라고 따져 물었다. 강수산나 검사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검찰 계장 두 명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강한 모욕감을 느꼈다." 


정택화 : 정용재가 성접대한 일도 없고 단순히 한 차례 식사 대접만 한 검사인데도 특검이 스폰서 검사의 핵심 인물인 양 기소했으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김승대·황희철·백승일 : 처음에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검사들. 하지만 나중에는 다 받았답니다. 


최근서 : 정용재랑 상견례한 날 2차 성접대를 받은 검사. 장소는 진주 동성동 해중호텔이었답니다. 진주에서 부산으로 원정 접대(술 그리고 성)도 많이 갔답니다. 


노승수 : 평소 점잖았는데 술만 마시면 농담으로 자신이 1호 검사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했습니다. 이밖에 돈접대 성접대도 받았습니다. 


최용석 : 당시 신혼 때였는데도 술만 마시면 성접대를 받았답니다. 인기가수 김수철과 친했고 기타를 잘 쳤답니다. 


서돈양 : 정용재로부터 돈접대 술접대를 받았습니다. 진주지청장 시절 김동철 부산고검장 출판 기념회에 가서 200만원을 전달해 자기 체면을 세워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답니다. 그래서 정용재는 부산까지 가서 책을 한 권 받고 200만원을 전달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동철 : 부산고검장으로 진주지청 순시를 왔을 때 정용재 사무실을 방문해 지하 룸살롱에서 오후 3시쯤부터 폭탄주 20잔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민유태 : 정용재가 통장 계좌로 300만원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식사와 향응 접대를 받았습니다. 


김진오·백승일 : 진주지청 평검사 시절 민유태·박기준·최근서와 함께 부산 원정 접대(술 그리고 성)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술집아가씨보다 모델들을 '선호'했답니다. 김진오는 술자리 매너가 깔끔하다고 정용재는 말하고 있습니다. 


김태희·조정환·안종택·박종환 : 부산고검 검사 시절 정용재로부터 밥·술 접대를 받았답니다. 


강민구·최운식 : 2000년 박기준이 울산지검 형사1부장으로 있을 때 같은 부서 부하였는데 박기준과 더불어 술접대 성접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부부장이던 김종로는 성접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성우 : 박기준이 서울지검 형사부에 있을 때 어느 토요일 지리산 등반을 위해 진주에 왔을 때 동행했다가 박기준과 더불어 정용재한테서 술접대 성접대를 받았답니다. 당시 일행 가운데는 유재성도 있었는데 그이는 성접대를 받지는 않았답니다. 물론 돈접대는 다 받았답니다. 


반종욱·김창환 : 박기준이 부산지검 형사1부장으로 있을 때 같은 부서에 있던 평검사들인데 정용재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답니다. 


구본진·하만석·이명재(전직 검찰총장과 동명이인)·박영근·임무영·최준원 : 2003년인가 부산지검 사무 감사를 할 때 술 접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성욱 : 정용재가 서울에 갈 때마다 돈도 주고 성접대도 했다는 검사입니다."20년 전부터 중간중간 접대했다. 한 번인가 빼고 성접대를 다 받았다. 2004년에 마지막으로 접대했는데 그때만 성접대가 없었다." 


오해균 : 문규상 검사가 창원지검 특수부장을 할 때 그 밑에 부부장 검사로 있으면서 다른 평검사 두 명과 함께 "술 마시고 2차를 하기 위해 모텔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명재 : "검찰총장을 지냈던 이명재 검사는 딱 한 번 접대했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부장 시절 강남 룸살롱에서 접대했는데 술은 거의 하지 않았고, 일행보다 일찍 자리를 떴다. 내가 이 검사를 집까지 바래다 줬다. 그날 이 검사에게 쥐포와 멸치 그리고 200만원의 현금을 줬다." 


송희식·김상봉·문장운 : 술접대와 돈접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종린 : 2009년 5월 (부산) 장전동 카페에서 여사장을 성추행했답니다. "여사장에게 자기 무릎에 앉으라고 했고, 뒤에서 끌어안은 뒤 가슴을 만졌다. 심지어 치마 속을 더듬자 여사장이 거부했다. 여사장이 몇 번이나 항의하고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 검사는 막무가내였다." 


4. 미래 경찰청장은 검사 파트너인 모델들 에스코트해 줬고 


납품을 기다리고 있는 고속도로 순찰 차량. 뉴시스 사진. 경찰차는 아니고. 한국도로공사 차량.


이밖에도 정용재는 후세 사람들이 읽어도 재미있을 증언들을 해놓고 있습니다. 경찰청장을 지냈던 어청수 관련 얘기인데요, 고속도로 순찰대장으로 있으면서 정용재가 모델들을 부산에서 진주로 데려갈 때 또는 검사들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데리고 갈 때 차량 호위를 해줬습니다. 


나중에 정용재는 어청수를 위해 인사청탁까지 했다는데요, 어청수가 경찰청장이 된 뒤에는 이런 얘기가 숨어 있었네요. 근엄하고 높아만 보이는 경찰청장으로 가는 길목에 이처럼 검사 성 접대를 위한 '에스코트'가 한 자락 깔려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나라 공권력의 쓰임새가 이 따위입니다. 


"모델들이 부산에서 진주로 내려올 때 고속순찰대의 호위를 받았다. 고속순찰대 6지구대에서 호위를 해주었다. 그러면 모델들도 기분이 업됐다. 내가 부탁했고 검사들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당시 순찰대장이던 어청수씨가 알아서 해주었다. 


대원들이 40명쯤 됐는데, 그렇게 모델들을 진주로 부르는 행사를 할 때마다 촌지를 주었다. 당시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긴 했지만, 순찰대원들은 나와 우리 회사 차를 다 기억하고 단속을 안 했다. 


내가 어청수 순찰대장을 고속순찰대 본대 대장으로 발령 나도록 부탁을 했다. 서울에 올라가 당시 교통을 총괄하고 있던 치안본부 치안감을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강남구 역삼동 소재 오죽헌에 불렀고, 내가 어청수 순찰대장을 인사시키고 부탁했다. 당시 어청수 순찰대장은 서울 경찰국 작전계장으로 있었다. 


모델들을 진주뿐 아니라 부산에서도 불렀다. 진주에서 검사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갈 때도 고속순찰대에서 호위를 해줬다. 문현동 소재 코리아시티 등 부산의 룸살롱에서 모델들을 불러서 놀았다. 폭탄주에 이어서 유두주도 마시고 2차(성 접대)도 갔다.


군인들,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네요. 정용재가 자리잡고 살던 사천에는 공군이 많습지요. 돈을 무척 밝혔던 공무원들 얘기도 있습니다. 지금은 입찰 시스템이 많이 바뀌었지만 말씀입니다. 


김홍래·김성일·이양호·조근혜 : "(공군) 진주교육사령부도 생겼는데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은 거의 다 공군참모총장이 됐다. 김홍래·김성일·이양호·조근혜 장군 등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근혜 장군만 빼고 대부분 성접대도 받았다." 


황기준 사천 군수 : "황기준 사천 군수는 돈을 바라면서 경쟁을 시켰다. 과장이나 계장한테 지시를 내리면 우리 회사에 온다. 그러면 할 수 없이 거액을 준다. 그러면 경쟁분위기는 사라지고 공사가 남한건설에 떨어진다." 


황완수 부군수 : "황완수 부군수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공사를 따내려면 예정가를 알아내야 하는데, 전날까지도 안 가르쳐준다. 오전 11시에 입찰이면 전날 저녁 또는 입찰 직전까지 담판에 들어간다. 그러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딸 결혼식을 치른다 어쩐다 하는 명목이었다.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분양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냥, 한 번 훑어봤습니다. 손수 책을 사서 몸소 읽으시면 그 실상을 좀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명을 찍어낸 정희상 구영식 기자와 출판사 책보세의 용기가 돋보입니다. 고마운 노릇입니다. 비실명 검사도 나오는데, 그리 한 까닭이 또 기막힙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칼춤-조선 검무 기생 운심의 환생 이야기

$
0
0

소설 <칼춤>을 읽었습니다. 김춘복 선생 작품입니다. 10년 넘게 공들여 썼다고 말씀하셨는데, 읽어보니 과연 그에 걸맞은 역작이라 하겠습니다.아주 매끈하게 잘 빠진 작품이라고 저는 봅니다.


다만 김춘복 선생은 우리 사회 ‘대통합’을 기원하며 썼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회 대통합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 주고 읽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전제는 어쩌면 작품을 날것 그대로 즐기고 누리는 데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거운 장편 소설이었습니다. 지난 20일 저녁 출판기념회(밀양시청 대강당)에서 사회를 맡은 경남작가회의 하아무 회장(소설가)이 “책을 들면 놓기 어려울 것”이라 말했을 때 저는 괜한 공치사겠거니 여겼습니다. 


김춘복 선생.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제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들면서 심심풀이 땅콩 삼아 이 책을 펼쳤는데(읽다가 잠이 오면 자려고요) 새벽 4시가 돼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한 장을 다 읽었을 때마다 그만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그 다음이 궁금해 도저히 덮을 수가 없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1960년생으로 동갑인 박준규와 최은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한 번 더 간단하게 말하면 준규는 좌익 빨갱이의 자식이고 은미는 우익 백색분자의 자식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나졌다가 스무 살이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되지요.



여기에 밀양 출신으로 칼춤(진주 검무 따위) 원형을 만들어낸 조선 기생 운심, 그리고 그이가 사랑했던 관헌 이야기를 겹쳐놓았습니다. 운심은 밀양 관기였다가 서울로 뽑혀갑니다. 칼춤도 잘 추고 인물도 고왔던 때문이겠지요. 


관헌은 소설에서 모습이 뚜렷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둘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납니다. 운심은 죽어서도 잊지 못해 관헌들이 오가는 역로가 내려다뵈는 언덕배기(꿀뱅이)에 묻힙니다. 


준규는 관헌의 화신이고 은미는 운심의 화신입니다. 은미는 운심의 칼춤을 배워 그 원형을 되살리려는 춤꾼이고, 준규는 운심 관련 얘기를 소재로 삼아 작품을 쓰려는 소설가입니다. 


전생이 겹쳐진 현생을 살아가는 박준규와 최은미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여곡절우여곡절, 구절양장구절양장. 


소설 <칼춤>은 무겁지 않습니다. 내용은 아주 빈약하면서 그것을 가리려고 모호한 낱말들을 총동원해 가면서 억지로 버티는 소설들도 많은데 <칼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낱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적시하는 상황과 국면이 모두 구체적입니다. 


늘어지지도 않아서 장면 전환이 재빠릅니다. 그냥 따라가다 보면 어떨 때는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져 옵니다. 쓸데없고 엉뚱한 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습니다. 


경상도와 밀양의 지역말을 잘 살려 썼다는 미덕도 갖췄습니다. 어떤 소설은 보면 지역말을 살려 썼다어도 겉도는 경우가 많은데요, 김춘복 선생 이 소설은 적재적소 있는 그대로여서 아주 찰지고 쫀득쫀득합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새록새록 솟아나는 말맛이 입안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줍니다. 


시대 상황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50년 세월을 제대로 아우르고 있습니다. 전체로 보면 아주 잘 재현해 놓으셨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 해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가운데 두 초등학생이 박준규와 최은미가 처음 만나는 대목을 낭독하고 있습니다.


다만 20~30대 젊은 친구들한테도 쉽고 재미있게 읽힐는지 여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세대가 달라져서 언어조차 작지 않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지요. 소재 자체가 주는 거리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생, 칼춤, 환생, 운동, 데모가 20~30대에게는 좀은 낯선 존재들이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약점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현대화(또는 청년화)까지 김춘복 선생이 감당해 내셔야 할 몫이라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지금 50대에 이른 작가들이 맡아야 할 몫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춘복 선생은 1938년 태어나셨습니다.


출판기념회에서 김춘복 선생은 몇 마디 말씀 기회가 왔을 때 “이런저런 얘기 않겠고, 그냥 오셨으니 즐겁게 먹고 마시며 놀다 가시라”고만 하셨습니다. 저도 같은 말씀 드리려 합니다.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니까 이런저런 세상 생각 마시고 그냥 푹 빠져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산지니. 366쪽. 1만5000원.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서세원 아버지는 서세원을 이렇게 키웠다

$
0
0

기록은 무서운 것이다. 방송인 서정희와 32년 결혼생활 중 가정폭력을 일삼아온 것으로 알려진 개그맨 서세원의 기록이다. 그가 직접 쓴 아버지에 대한 글인데, 1999년 뿌리깊은나무에서 출간한 <아! 아버지>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에서 서세원은 아버지가 늘 "사내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겨"라고 말씀했다며 자신의 기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서세원은 성장기에 그야말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서세원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날아가는 새를 잡고 싶다고 하니까 총포상에 데리고 가서 공기총을 사주었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철저히 순종적이었고, 생전 말대꾸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심지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말 한 마디 못했을뿐 아니라 그 여자가 잘 해줬다는 카레라이스를 죽을 때까지 해서 남편과 아들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의 아이 키우는 방식이 잘 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음은 서세원이 직접 쓴 아버지 이야기 중에서 발췌.


서세원 아버지에 대한 글이 실린 책.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하도록 해주셨다. 마치 당신이 하시려는 일들은 다 하시고 당신 식으로 철저히 사셨듯이."


"내가 초등학교 이학년에 다니던 가을날이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산책을 하다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참새를 보고 "저걸 잡고 싶다"고 하니까 내 손을 잡고 나를 총포상에 데려가셨다. 그래서는 느닷없이 공기총을 사 주시면서 "사내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겨" 하시는 게 아닌가."


"또 한 번은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한 리어카를 통째로 사다 주시면서 "너도 나중에 장가 가서 애 낳으면 남자답게 먹여라" 하셨다. 게다가 그 옆에 있던 참외까지 리어카째 사 주시는 것이었다. 수학여행을 갈 때에는 우리 반에서 돈을 가장 많이 가져 가는 애보다 언제나 천 원을 더 가져 가라고 하셨던 아버지.


고등학교 다닐 때에 나는 워낙 사고뭉치여서 세 번, 네 번 전학을 다니고 나서야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학교에 오셔서 일을 처리하곤 하셨는데 내게는 늘 웃는 얼굴이셨다. 나 대신 선생님께 빌고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나오면서 "사내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겨"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머리가 길다고 학교에서 매를 맞고 돌아오자 그 길로 학교로 쫓아가셨다. 가셔서는 "내 아들이 머리 기르고 싶다고 하니까 집에 데려가서 한 일 년 머리 길러보게 하고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하셔서는 교무실이 떠나가도록 웃음바다로 만들어놓으신 적이 있다.


내게는 언제나 그렇게 관대하시고 사내 자식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그렇게 하게 해 주셨던 아버지지만 형이나 누나들한테는 그러지 않으셨다. 얼마나 엄하게 키우셨는지, 형이 공부를 안 한다고 돼지 우리에 처넣기도 했고, 누나가 좀 늦게 들어오기라도 하면 장작개비로 두들겨 패고 치마를 찢고 머리를 깎고 하시며 호되게 하셨다.


특히 유교적인 사고 방식을 지니신 분이라 누나들한테는 더하셨다. 우리 큰 누나는 연애하여 혼인을 했는데, 오 년 동안이나 자식이 아니라며 만나지를 않으셨다. 그런 반면에 남자들은 한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아무 말씀 않으시는가 하면 백만 원쯤을 가져다 탕진해버려도 마찬가지로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밥을 먹을 때에도 우리 집에서는 늘 남자가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아이들, 여자의 차례로 먹고는 했었다. 그만큰 철저하게 남자 중심의 사고를 하셨다."


서세원이 직접 쓴 아버지에 대한 글.


"아버지는 말하자면 우리 집의 성주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생전 말대꾸 한 번 못 해보고 사셨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토록 철저한 대비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이 하나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우리 나라에서 살던 일본 사람들이 다 쫓겨갔다. 그런데 그때에 그 틈에 끼지 못한 한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그 여자가 불쌍하다고 여기셨는지 어쨌거나 바람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카레라이스를 아주 맛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그 일이 가슴에 맺히셨을 텐데도 뭐라고 말씀을 하시기는커녕 돌아가실 때까지 죽어라고 카레라이스를 만들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카레라이스라면 아주 신물이 날 정도로 먹으면서 자랐다."


"아버지 성품 중에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잡수시는 욕심이다. 고등어 자방도 꼭 숯불에 구워야만 드시고, 빨갛게 양념장을 바른 돼지고기를 드시는가 하면 그냥 삶은 쇠고기를 좋아하셨다. ... 날마다 진수 성찬을 고집하신 아버지는 늘 식도락에서 행복감을 느끼시는 분 같았다. 먹는 것 만큼은 자식한테라도 고기 한 점 양보를 하지 않으셨다."


"아무튼 아버지는 철저히 자기 주장대로 사신 분이다."


"내가 혼인할 때에도 혼례를 올리자마자 아버지는 아내에게 대뜸 아버지식대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 남편을 지금까지 키운 것에 대한 보상을 항상 염두에 둬야 혀", "부모님께 잘한다고 해도 돌아가시고 나면 다 죄스럽고 후회스러운겨. 그러니까 지금들 잘려" 하며 효도를 강요하셨다. 또 다짜고짜 "너 한 달에 나 얼마씩 줄 거냐" 하셔서 아내가 얼마나 당황해 하던지. 처음에는 아버지의 그런 성품을 잘 모르고 어색해하던 아내도 이제는 만성이 되어 아버지의 눈빛만 봐도 무얼 원하시는지 척척 알아내고는 한다."


"나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서른세 해를 살면서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 번도 어려움을 느껴 보지를 못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주남저수지 다호리에 서린 역사와 생태

$
0
0

자연과 인공이 절반씩인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배후습지가 뿌리입니다. 홍수가 지면 강물이 넘쳐흐르면서 옆으로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주남저수지 일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데는 낙동강을 따라 길쭉하고 도도록하게 솟은 자연제방 둘레뿐이었고 그것도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주남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주남저수지 일대와 지금 벼논을 이룬 대산들판은 대부분 자연습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벼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물에 잠겨 실농하고 대파(代播:다른 씨앗을 대신 뿌림)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이 세운 무라이(村井:むらい)농장이 1910년대 자연제방이 배후습지와 만나지는 경계선을 따라 둑을 쌓았습니다. 무라이제방입니다. 낙동강 본류가 아니라 배후습지로부터 물이 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라이농장은 그 뒤(1940년대로 짐작)에 산자락으로 바짝 붙여 다시 제방을 쌓았습니다. 



이로써 주남저수지가 생겨나게 됐고 주남저수지와 무라이농장 사이 배후습지는 벼논으로 개간돼 오늘날 풍요롭고 넉넉한 들판을 이루게 됐습니다. 자연습지는 그만큼 사라졌으며 농토는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자연습지는 그다지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쌀 한 톨이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주남돌다리와 저수지 수문 


주천강 수문도 이 때 들어섰습니다. 주천강은 주남저수지와 낙동강을 이어주면서 동읍과 대산면을 가르는 경계도 되는 물길입니다. 주천강에는 주남돌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자연석만으로 다릿발을 세웠으며 판석도 모두 널찍한 자연석입니다.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 다리인데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이렇게 돌다리를 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세월의 더께가 거뭇거뭇하게 묻은 모습은 둘레 우묵한 풀들과 어우러져 상당히 그럴 듯합니다. 




거기서 낙동강 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주남교’라는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 위에 덮어씌운 콘크리트와 철제 난간은 전혀 별스럽지 않지만 그 아래쪽은 건축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육면체로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고 콘크리트로 이어 붙였습니다. 다릿발 구실을 하는 부분이 무지개 모양인데 가운데 둘은 낮고 옆쪽에 둘은 높다랗습니다. 




1940년대 주남저수지 제방을 쌓을 때 함께 설치됐던 수문이었습니다. 바닥을 보면 수문이었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다듬은 돌과 콘크리트로 마감을 했습니다. 그 높이가 주천강 평소 수위와 똑같이 맞춰져 있습니다. 주남저수지 쪽 바닥을 보면 가로로 길게 홈이 파여 있습니다. 수문을 가로막는 철판이 완전히 내려가면 그 홈에 꽉 차게 끼일 것입니다. 


적어도 70년은 넘은 건축물인데 아직도 금간 데 하나 없이 튼튼해 보였급니다. 재료인 돌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 듯도 싶은데, 여기에 아치 곡선과 높고 낮은 수문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근대문화재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바닥에 파인 홈과 짝을 이뤘던 철판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은 주남저수지 쪽으로 해방 이후 새로 낸 콘크리트 수문으로 옮겨갔습니다. 주남교 상류 800m쯤에 있는 이 콘크리트 수문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수문보다 아름답지도 못하고 튼튼하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주남저수지는 둘레길이 필요해 


주남저수지는 주남저수지 하나만 이르기도 하지만 다른 두 저수지까지 함께 일컫기도 합니다. 보통 주남저수지라 하면 사람들은 대개 주남저수지 하나만 떠올리지만 주남저수지뿐만 아니라 그 북쪽 산남저수지와 남동쪽 동판저수지까지 모두 아우르는 말인 것입니다. 



주남저수지 셋은 앉은 자리가 탁월합니다. 자연생태가 아니라 농업과 관련해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람사르문화관과 생태학습관이 있는 주남저수지 동쪽 제방을 사람들은 가장 많이 찾습니다. 여기 올라 저수지를 향해 서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산줄기가 보입니다. 


백월산과 구룡산 줄기들인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들은 남김없이 산남 주남 또는 동판저수지로 모여들게 돼 있습니다. 홍수 예방과 가뭄 대비라는 저수지 본래 기능을 톡톡히 하는 셈입니다. 주남저수지는 대산면 동읍 들판뿐만 아니라 창원공단 여러 사업장들에도 물을 대어주고 있습니다. 



세 곳 저수지는 제방으로 나뉘어 있고 물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세 저수지를 다 둘러보려면 24km 남짓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둘레길이 나 있지 않습니다. 길이 없지는 않으나 토막토막 끊겨 있습니다. 둘레길을 두고는 찬성과 반대 양쪽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생태환경과 철새 보호를 위해 둘레길을 만들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고 관광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철새·생태 보호를 위해서도 둘레길을 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둘레길은 주남저수지로 사람을 끌어들여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알게 하는 방편이 됩니다. 주남저수지는 창원·김해·부산 같은 도시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개발 압력이 무척 세다고 합니다. 개발 압력을 법률과 행정만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창원·김해·부산 등 가까이 있는 여러 도시민들이 주남저수지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도록 하는 것만이 개발 압력에 맞서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봅니다. 물론 많은 도시민들이 찾음으로써 무슨 이득이 생기면 그 과실은 가장 먼저 일대 지역 주민들한테 돌아가야 맞겠습니다. 


산남저수지 주남저수지 동판저수지 


세 곳 저수지는 저마다 특징이 뚜렷합니다. 가장 작은 산남저수지는 찾는 사람도 가장 적습니다. 세 곳 가운데 유일하게 낚시가 허용되는(2015년 12월 현재) 때문인지 낚시꾼은 자주 눈에 띕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새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개구리밥·물옥잠·마름 같은 작은 물풀이 수면을 덮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풍경은 한가로우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주남저수지는 씩씩하고 다채롭습니다. 트여 있는데다 넓기도 해서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풀은 많지 않지만 연이 한 켠에 무리지어 있고 잎사귀 하나가 최대 2m인 가시연도 봄·여름에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좀 허전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동쪽 제방(가장 많이 찾는)에서 보는 풍경에 한정됩니다. 



주천강 시작점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제방을 따라 들어가면 느낌이 다른 풍경들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그러다 산남저수지와 만나지는 어름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양버들들이 수직으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수평으로 펼쳐지는 수면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새로운 풍경인 것입니다. ‘아, 좋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동판저수지는 숨은 듯이 앉아 있습니다. 왕버들과 버드나무가 둘레와 물 속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툭 트이는 시원스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동판저수지 남쪽 제방을 걷다가 멀리 백월산으로 눈길을 던지면 수평선이 길게 뻗어나갑니다. 그 위로는 드문드문 물버들이 삐죽 솟아 있고요. 


사람이 별로 찾지 않다 보니 낮에 철새들이 종종 들러서 쉬었다 가곤 합니다. 동판저수지 둑길을 가을·겨울에 거닐 때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철새에 목을 매면 철새도 제대로 못 본다 


주남저수지는 자연습지인 동시에 인공저수지입니다.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농업시설인 셈입니다. 1980년대 이래 철새도래지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유명 관광지로도 꼽히게 됐습니다. 창원시는 주남저수지에서 겨울이 되면 철새축제도 열곤 합니다. 


하지만 철새를 보기 위한 주남저수지 나들이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철새, 특히 그 화려하고 거대한 ‘군무’에 목을 매면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철새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연출해주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두세 시간 또는 하루종일 기다려도 보지 못할 때가 적지 않고 또 본다 해도 아주 짧은 순간이랍니다.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는 괴로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럴 바에는 주남저수지와 그 둘레에 고유한 아름다움과 미덕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철새에 목을 매면 이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오르거나 내려앉는 모습은, 볼 수 있으면 좋고 못 봐도 그만인 덤으로 여기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철새를 눈에 담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2015년 2월 일본으로 생태 관련 취재를 갔었는데, 그 때 거기서 고니를 봤습니다. 고니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겨울철새입니다. 일본 고니는 사람을 보더니 헤엄을 치면서 따라왔습니다. 다가오더니 부리를 내밀어 사람 손을 더듬었습니다. 동판저수지에도 같은 고니가 있는데, 인기척만 느껴져도 멀리 달아납니다. 한국 사람은 고니가 날아오르는 사진을 찍기 위해 돌을 던지고 일본 사람은 녀석들 배고플까봐 먹을거리를 챙겨줍니다. 


합산패총 다호리고분군 신방리 음나무군 


주남저수지 일대는 역사·문화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합산패총’입니다. 산남저수지 동쪽 가운데 물을 향해 튀어나온 부분으로 마을 이름도 합산입니다. 합(蛤)은 조개입니다. 


합산마을 가까운 산남저수지 풍경.


2000년 전 일대 언덕배기에 살던 사람들이 먹고 쓰고 남은 쓰레기를 내다버린 장소입니다. 패총(貝塚), 조개무지는 바닷가에 만들어집니다. 당시는 여기가 바다였다는 얘기입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경계지점이라 짐작하면 되겠습니다. 


다호리고분군도 있습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다호마을 뒷동산이 저수지로 흘러내리는 비탈에 있는 대략 2000년 전 가야 무덤들입니다. 1988~1991년 발굴에서 ‘골드바’와 맞먹는 ‘철부(鐵斧, 쇠도끼)’, 해외 교역을 보여주는 중국 화폐 오수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널 등등 드문 유물들이 제법 나왔습니다. 


문화 측면에서 뜻깊고 가치로운 것들도 여럿 있습니다. 붓과 긁개(요즘으로 치면 지우개)와 칠그릇(漆器)이 나왔습니다. 붓·긁개는 다호리 옛 사람들이 문자 생활을 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다고 합니다. 칠그릇은 중국 일본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한 전통 옻칠 문화를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뜻깊은 문화유산이 출토된 습지인데도 현장에는 안내판만 있을 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거리가 제대로 없습니다. 합산패총은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머지않은 시기에 박물관 또는 전시관이 생겨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신방초교 뒷동산에 있는 신방리 음나무군(천연기념물 제164호) 네 그루는 그래서 무척 반갑습니다. 적어도 700년은 살았다니 옛날 모습과 사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음나무는 삿됨을 막고(防邪) 귀신을 쫓는(逐鬼) 역할을 합니다. 바로 옆에 동판저수지가 있음을 감안해 옛 모습을 재구성해보면, 음나무가 있는 일대가 항구와 마을의 경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주남저수지 쪽으로 더 가서 나오는 다호마을에는 옛적 항구라 짐작해 봄직한 지명도 남아 있습니다. 동쪽 끄트머리 일대를 ‘짝지’라 하는데 ‘닻’을 이르는 옛말이라 합니다. 배가 항구에 닿으려면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 ‘다호’도 어쩌면 ‘(배가) 닿다’ 할 때 그 어간 ‘닿’과 관련돼 있는 듯 싶습니다. 


김훤주 


※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창원시 지원을 받아 비매품으로 펴낸 <이야기지도로 찾아가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에 실은 글입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남강 오백리 출판 펀딩 후원자님들 고맙습니다

$
0
0

월간 피플파워 2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 훌륭한 독자님들과 함께여서 행복합니다

 

의미도 있고 공익적 가치도 있지만 상업성은 낮은 콘텐츠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비용을 들여 책으로 출판하기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분들에게 기본적인 출판 비용을 후원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목표 금액은 200만 원으로 잡았습니다. 물론 책 한 권을 출판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지만, 출판사는 전혀 비용을 대지 않고 100% 후원으로만 충당한다는 것은 뻔뻔한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남강 오백리> 출판 펀딩입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 웹사이트에 올리고 인터넷과 모바일 결제시스템을 붙였습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결제에 익숙하지 않은 분을 위해 계좌번호도 밝혀두었죠. 그리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등을 통해 모금 사실을 알렸습니다.


1월 11일부터 한 달 간 목표로 시작한 출판 펀딩은 11일째 되는 22일 목표액 200만 원을 채웠습니다. 아마 이대로 가면 조만간 300만 원도 무난히 넘어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좋은 콘텐츠는 독자들이 알아보고 평가해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기뻤지만, '이렇게 훌륭한 독자님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뻤습니다.


알다시피 <남강 오백리>는 월간 <피플파워>에 1년 3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콘텐츠입니다. 이번 펀딩에 참여해주신 분들 중에는 <피플파워> 구독자도 상당수임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씀 올립니다.


피플파워 2016년 2월호 표지.


지난달 이 지면을 통해 약속 드렸듯이 불안하고 우울한 시대에도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계시는 분들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임종금 기자가 양산지역 학부모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을 통해 '아줌마의 힘'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사회 진보를 위해 학계에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아온 장상환 경상대 교수도 정성인 기자가 만났습니다. 장 교수는 올해로 정년퇴임을 하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 3막은 어떨지 지켜봐주십시오.


이번호에는 좀 특별한 향우를 만났습니다. 임채민 기자가 취재한 신학림 미디어오늘 사장인데요. 그는 남해 출신 향우이자 전 언론노조 위원장을 거친 '언론전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장 임기를 마친 후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한국사회 1% 지배계층의 혼맥을 추적해 까발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호 표지인물은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입니다.공무원 출신으로 지역을 기록하는데 평생을 바쳐온 인물인데요. 저는 이런 분이 있기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생성되고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특이한 30대 젊은 분도 찾았습니다. 경남이 아닌 대구에 살면서 '경상도愛빠지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박종근이라는 분인데요. 돈도 되지 않는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경남과 부산, 대구, 경북의 소식과 콘텐츠를 널리 알리는데 몰두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감명 깊게 읽었던 인터뷰는 김해생명의 전화 이진규 이사장 이야기였는데요.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활동비 한 푼 받아가지 않고 오히려 선뜻 개인재산 1억 원을 기부했더군요. 저도 노년을 이렇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경남을 대표하는 두 향토기업이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몽고식품과 무학 오너의 '갑질' 때문인데요. 이 분들이 우리 잡지에 연재 중인 '김태훈의 도시와 스토리텔링-토착기업 편'만 읽어봤어도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외국인과 함께 경남 역사 문화 둘러봤더니

$
0
0

경남 체류 외국인을 위한 지역 풍물기행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창의주도형 사업' 공모에 경남도민일보의 프로그램 '경남 체류 외국인 지역 풍물 탐방'이 선정됐습니다. 취업 등을 위해 경남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한테 경남에 고유한 역사·문화·생태·경관·풍습 등을 소개하자는 취지입니다. 


외국인에게 경남과 한국에 대한 친근감과 애정·이해를 갖추게 하고 이는 경남과 여기 체류하는 외국인 사이 거리감을 좁히는 반면 통합력을 조금이나마 높이는 효과를 내리라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외국인들은 경남에 머물러 살고 있지만 관광 또는 여행을 다녀도 말 타고 달리며 산을 훑어보는 식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한테 경남도민일보의 이런 프로그램은 지역의 속살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한편 여기 한국과 경남이 자기 살던 나라와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가늠해보는 계기도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2015년 10월 1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베트남 몽골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여섯 나라 외국인들이 의령 통영·거제 하동 합천 진주 다섯 지역을 일곱 차례 탐방했습니다. 기행에 함께할 외국인들을 모으고 일정을 짜는 데는 경남이주민센터(대표 이철승 목사)가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에서 보지 못했던(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나 현상에 신기해했고 사연이 깃든 문화재에 관심을 보였으며 거대하고 잘 알려진 것들보다는 자그맣고 덜 알려졌지만 특색이 뚜렷한 데에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의령을 찾은 베트남 사람들 


베트남 사람들은 10월 11일 의령을 찾아 이병철 생가~안희제 생가~현고수~곽재우 생가~의령천 잣나무 숲길~충익사~정암진을 둘러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생가에서는 돈 버는 기운을 받고,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바친-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자기 재산을 가장 뜻깊게 썼다고 꼽히는- 자산가 백산 안희제 생가에서는 돈을 잘 쓰는 데 대해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안희제 생가 안채 칸칸으로 복잡한 구조는 독립운동하며 숨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하니까 다들 솔깃해했습니다. 베트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와 미국 등 외세 침략에 맞서 싸운 역사가 있습니다. 


의령 곽재우 생가에 들른 베트남 탐방대.


현고수, 곽재우 생가·은행나무와 그 둘레, 의령천 잣숲길은 우리나라 자연이 아름다웠고 충익사에서는 베트남 사람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500년 전 임진왜란을 맞아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모시는 사당이 바로 여기 충익사라 했더니 베트남 사람 몇몇이 옷깃을 여미고 들어가 향을 피우더니 크게 절을 한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잘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있는 곽재우 전승지 정암진을 찾아 남강 푸른 물결과 하늘을 배경으로 잠깐 즐긴 다음 한국전쟁 상처를 안은 정암진 철교까지 거닐었습니다.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 둘레에서.


◇몽골 사람들과 이순신 장군의 바다 


몽골 사람들은 10월 11일 통영과 거제로 탐방을 떠났습니다. 통제영에서 세병관을 올려다보며 연신 탄성을 쏟았습니다. 규모가 큰 때문인지 임금이 살던 데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400년 전 세워진 해군사령부였다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도 찍고 체험장에서 칼과 활을 다루며 즐거워하더니 또 묻습니다. 몽골이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로 비칠까봐 징기즈칸 얘기는 안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요. 우리나라를 침략해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떠나 아주 용맹스러운 장수로 기억한다니 낯빛이 환해집니다. 과거 침략을 부정하는 일본에 견주면 얼마나 인간적인가요.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징기즈칸 만세!"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줄은 몰랐을 텐데요, 통제영에서 체험활동을 진행하던 가이드가 몽골 사람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으며 터뜨린 선창이었습니다. 


통영 세병관에서.


오후 일정은 거제 바람의 언덕. 가는 길에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왜 그런지 봤더니 다들 바깥 풍경에 눈길이 꽂혀 있었습니다. 학동을 지나 시원하게 펼쳐지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중이었습니다. 청명한 가을 바다와 파란 하늘 하얀 뭉개구름은 수채화였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오래, 즐겁게 바다를 감상하는 모습이라니! 


몽골은 바다가 없습니다. 바람의 언덕, 안겨드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몽골 평원에 부는 바람이 떠올랐을까요? 나중 고향 돌아가면 이들은 어쩌면 이 바람에 대한 기억으로 '문득' 한국과 경남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네시아 기도와 통영 삼덕항 벅수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탐방은 10월 25일이었습니다. 버스 한 대는 거제 기성관~질청을 거쳐 바람의 언덕으로 갔고요 다른 한 대는 통영 삼덕항~당포성을 거쳐 바람의 언덕으로 갔습니다. 바람의 언덕은 이들 인도네시아인도 가보고 싶어하는 명소였던 것입니다. 


거제 바람의 언덕에 들른 몽골 탐방대.


거제현 관아 중심 건물(객사)인 기성관에서 이들은 뜻밖에 앞에 늘어선 선정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고을 원님이 백성을 아끼고 착하게 대해줘서 고맙다고 백성들이 세웠는데, 실제로는 나쁜 원님에게도 세워주는 경우가 있었다니 다들 웃었습니다. 


머릿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 까닭이 무엇이냐(원래는 있었는데 사라졌다), 돌비석도 있고 쇠비석도 있는데 왜 그렇느냐(옛날에는 돌보다 쇠가 비싸서 더 귀하게 쳤다) 등등 다른 질문들도 쏟아졌습니다. 


기성관과 질청(행정 공간)은 기둥이 둥근데 남자들 공간이기 때문이라 하니 다들 귀가 쫑긋해집니다. 여자들 사는 옛날 안채는 격식에 따르면 네모기둥인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오랜 동양사상과 관련돼 있다 일러줬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자는 고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고, 남자는 (씨앗을) 뿌리고 여자는 생산한다는 타고난 차이에 대한 생각일 뿐이라고 덧붙여 얘기했습니다. 


옛날 건물 남녀 공간 구분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엌이 있느냐 없느냐라 하니 또한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인도네시아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었나 봅니다. 우리나라 옛날 남자는 자기 밥도 스스로 해먹을 줄 모르는 존재였지요.) 


이어 통영 당포성에 올랐습니다. 옛적 성벽과 바다 시원한 풍경을 누린 다음 자드락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그 길 끄트머리에는 삼덕항 돌벅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댈 데 없었던 옛 사람들이 돌벅수를 세우고는 거친 풍랑 잦게 해달라, 고기 푸지게 잡게 해달라, 때로 아이 낳게 해달라 기도하는 대상이라 하니 신기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네는 알라를 믿기에 이런 데 절하고 빌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슬람교 알라에 대한 신앙은 이처럼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통영 삼덕항에서 돌벅수를 살펴보는 인도네시아 사람들.


◇방글라데시 사람과 하동 섬진강 재첩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11월 8일 하동에서 송림공원~섬진강~쌍계사~화개장터를 다녀왔습니다. 이날 하동은 어디를 가도 좋았습니다. 가을 단풍이 빈틈없이 하동을 받쳐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이날 경남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터지게 누렸습니다. 쌍계사와 화개장터는 산빛이 물빛과 어울려 더없이 그럴 듯한 풍경을 연출했고요 물빛 덕분에 산빛은 더욱 다채롭게 아롱졌습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앞에서.


송림공원에서는 소나무 그늘에서 서늘한 기운도 느끼고 간간이 비가 뿌렸지만 솔가리 메마른 느낌도 누렸습니다. 섬진강 모래밭에서는 여기가 우리나라에서 재첩이 가장 많이 나는 데라고, 재첩은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데서 잘 자라는 조개라고, 한 번들 캐보시라고 했더니 다들 모래를 헤집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섬진강에서 재첩을 잡아보는 방글라데시 사람들.


◇우즈베키스탄 사람에게 비친 합천의 단풍 


같은 11월 8일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떠난 합천도 단풍이 절정이었습니다.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와 소리길은 다른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조금씩 내리다 잦아들었던 빗줄기는 단풍을 꽃비로 만들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붉은 단풍 아래 삼삼오오 어울려 사진을 찍고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해인사가 부처님 경전을 모시는 우리나라 으뜸 절간이고 가야산 지모신 토속신앙과 외래종교 불교의 합작품이라는 설명은 곁가지였습니다.


합천 영암사지 또한 문화재와 단풍이 모두 좋았습니다. 돌축대 석탑 돌계단 석등 따위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돌이 많이 쓰인 까닭은 여기가 통째 바위산이어서라고, 바로 옆에 돌을 떼어내 쓴 자취가 보인다고, 옛날에는 커다란 바위에 정으로 홈을 파서 마른 나뭇가지를 꽂은 다음 물을 잔뜩 부어 불어터지면서 바위가 갈라지게 했다고 얘기했습니다. 


둘레를 에워싼 분위기가 무척 좋았던 모양인지 몇몇이 '엄지척'을 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즈베키스탄에도 이런 데가 있다고들 일러줬는데요 지금 그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합천 영암사지에서.


◇진주 청곡사에 머문 캄보디아 불심 


캄보디아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서 겪은 것처럼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보다 더한 독재 통치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불교신자입니다. 그래서 11월 15일 진주로 떠난 캄보디아 발걸음은 첫머리를 청곡사로 잡았습니다. 


한국 불교와 절간에 대해 충실하게 일러드릴 테니까 캄보디아와 무엇이 같고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라 했습니다. 전생에 지은 죄를 거울로 비춰본다는 업경전에서 한 사람이 거기 모셔져 있는 염라대왕에 대해 물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그런 존재가 없는가 봅니다. 사후 세상 재판장이지요. 


국보로 지정된 탱화 앞에서는 우리나라 절하는 방법을 묻더니 다들 따라 재배 삼배를 올렸습니다. 지켜보는 사람까지 경건해지게 만드는 장면이었습니다.


진주 청곡사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는 진주역 차량정비고를 찾았습니다. 일제 식민지배 식량 수탈을 위한 철도 가설과 한국전쟁 당시 총탄자국 등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여기서 은행 단풍까지 즐긴 다음 진주성으로 옮겨갔습니다. 거기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느긋하고 푸근하게 남강과 어우러지는 진주 가을을 누렸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세월호 '잊지 않을게' 스티커 붙인 고급승용차

$
0
0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27일 저녁 채현국 어른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전라북도 교육청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 중 명사초청 특강이었는데요. 강연에 앞서 효자동에 있는 한 시래기국 전문식당에서 시래기국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에는 특강을 주최한 전북교육청 김승환 교육감도 강사인 채현국 어른 영접차 함께 했습니다.


밥을 먹은 뒤 밖에 나왔는데 식당 앞에 세워져 있는 검은 고급승용차가 눈에 띄었습니다. 뒤쪽 유리에 '잊지 않을게'라는 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차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다가가보니 운전기사가 앉아 있더군요. 김승환 전북교육감의 관용차량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전북교육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관용차량에 이 스티커를 붙였다더군요.



잠시 후 채현국 어른과 김승환 교육감이 나와 뒷좌석에 탔습니다. 평소 교육감 혼자 타는 뒷좌석에 두 명이 타려니 짐 정리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뒷좌석에서 여러 벌의 옷과 20여 권의 책이 나와 트렁크로 옮겨졌습니다. 김승환 교육감은 평소 차 안에서 늘 책을 읽거나 페이스북을 한다더군요.


그 과정을 영상으로 찍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이야기꾼 길러내야 이야기산업 가능하다

$
0
0

2015 이야기탐방대 (1)

프롤로그-언제든 

활용될 수 있도록 준비를 


경남 곳곳을 답사하면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또 만들어내는 작업, 그리고 그것을 그럴 듯하게 꾸며나가는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 활동을 경남도민일보와 그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이어갔습니다. 


이런 활동을 주최·주관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은 이야기산업 활성화를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이야기산업이라는 개념은 아직 많은 사람들한테 낯이 섭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더 해 보면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관광·여행은 물론 공연·영상·게임도 모두 이야기산업의 영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외국에서 보기를 찾자면 영국 작가 J. K 롤링이 쓴 '해리 포터' 시리즈가 있습니다. 영국에는 스토리클럽(굳이 우리 식으로 하자면 이야기 모임)이 수없이 많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던 롤링은 스토리클럽을 통해 스스로 위안도 삼고 아이들 심심풀이도 삼을 겸해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합니다. <바이블>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 됐다는 평을 받으며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로 퍼져나간 '해리 포터' 시리즈 성공의 배경에는 이처럼 수많은 스토리클럽이 있었던 것이랍니다. 


사천 대곡마을숲. 경남 남부에서는 보기 드물게 소나무로 이뤄져 있는 숲이랍니다.


경남 이야기탐방대도 이와 같이 이야기를 찾고 만들어내는 개인과 단체를 길러내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아직은 모자라는 수준이지만 이런 노력이 거듭되다 보면 언젠가는 갖가지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로 활용될 이야기와 그 생산 주체가 뚜렷하게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2014년 이야기탐방대는 남명 조식·홍의장군 곽재우·막걸리·통제영을 대상으로 삼아 청소년탐방대와 블로거탐방대·예술인탐방대가 제각각 한 차례씩 찾아가 스토리텔링을 진행했었습니다. 


대상 지역(주제)을 넓게 잡지 않는 대신 한 지역(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탐방대가 중첩해 찾아 살펴보자는 시도였습니다. 반면 2015년에는 대상 지역(주제)을 여덟으로 넷을 늘렸습니다. 


사천 대곡숲과 하동 전통차, 사천만 갯벌과 함양 일대 점필재 김종직 관련 유적, 우리나라 최초 물고기족보 <우해이어보>가 태어난 마산 진동 앞바다, 하동 일대 고운 최치원 유적,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남아 있는 동백섬 지심도, 그리고 거제도포로수용소였습니다. 


사천만갯벌. 물이 빠지면 이렇게 경운기를 타고 들어가 작업을 하곤 합니다.


지난해는 집중에 초점이 가 있었다면 올해는 '최대한 폭넓게'가 초점인 셈입니다. 


반면에 탐방대는 하나로 모았습니다. 2014년은 청소년·예술인·블로거 셋으로 탐방대를 나눠 따로 운영을 했지만 올해는 이들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단일화했습니다. 다만 탐방 지역으로 꼽힌 여덟 군데를 탐방대 구성원 모두 다가 둘러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해 적절하게 나뉘어 찾아보도록 했습니다. 


2014년 탐방대를 셋으로 나눠 운영했더니 끼리끼리 결속력이나 이해 정도는 높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가 그리 높지 못했다는 반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2015년 기대하는 바는 청소년·예술인·블로거들이 저마다 개성을 펼치면서도 함께 활동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가진 특징과 장점을 서로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하동 운암영당. 고운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던 집입니다.


그래서 2014년에는 본격 탐방에 앞서 가졌던 발대식을 가볍게 처리했지만 2015년에는 출범식을 치르면서 워크숍까지 겸하도록 했습니다. 해당 지역(주제)이 품고 있는 사연을 미리 알아두자는 취지로 마련됐습니다. 9월 6일 그런 자리가 마련됐었는데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탐방 지역(주제)의 대강을 소개했습니다. 


△경남 남부에서는 아주 드물게 소나무로 이뤄진 사천 대곡 마을숲과 고려 현종 부자가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사연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고자치 고개 △전통차라 하면 까다로운 예의범절과 녹차만 떠올리는 잘못된 차문화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하동 차밭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아들 잃은 애절한 마음을 담아 심었습니다.


△경남에서 가장 너른 사천만갯벌과 그에 담긴 지역 주민의 삶 △관리로서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선비로서 강직함, 인간으로서 유약함을 함께 보여주는 함양 점필재 김종직 △1800년대 진동으로 귀양살이 와서 역경 속에 <우해이어보>를 남긴 담정 김려의 인생역정 


△실제로는 가야산 해인사에서 종신(終身)을 했으나 전설에서는 하동 지리산에서 산신이 됐다는 고운 최치원에 대한 지역 주민의 마음씀 △태평양전쟁 본토 사수를 위한 일제군사기지와 아름다운 동백꽃을 동시에 품은 지심도 △최대 17만 명이 넘게 포로가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거제의 면모를 통째로 크게 바꿨음직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지심도 전등소 소장 사택. 전등소는 발전소를 이르는데 당시 군부대 유지 운영을 위해 소규모 수력발전을 했었답니다.


2015년 이야기탐방대 구성원은 청소년 박주희(진주 경해여고 2)·정다현(진주 경해여고 2)·신윤지(경상대 사대부고 1)·한승지(진주여고 1), 블로거 홍성운(필명 선비)·김욱(필명 거다란)·김성자(필명 커피믹스)·나현주(필명 달그리메), 예술인 손남숙(시인)·박래여(소설가·수필가)·하아무(소설가) 등 11명이었습니다. 


또 현장에서는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과 거제 지역 근·현대 역사학자 전갑생씨, 갯벌과 새들에 대해 전문 식견을 갖춘 윤병렬 경남생명의숲 운영위원, 매암차문화박물관 강동오 관장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동행을 하기로 했었습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경비대 막사. 유엔군이 쓰던 건물이었습니다.


※ 프롤로그까지 쳐서 모두 열 차례 글이 이어집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교토 어느 절간, 풍신수차와 그 무리의 무덤

$
0
0

2015년 11월 12일 일본 탐방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첫날 오사카를 둘러보고 이튿날과 셋째날은 교토에 머물렀습니다. 오전에는 이름난 관광지를 찾아다녔고요, 점심을 먹고나서 오후에는 느긋하게 목표를 정해놓지 않고 교토 골목골목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다녔습니다. 


간사이공항에서 저녁 6시 전후에 뜨는 비행기가 예약돼 있었고 그에 맞추려면 고작 두어 시간만 여유가 있을 따름이었으니까요. 


골목은 참 좋았습니다. 큰길에서 바라보이는 그럴 듯한 모습 대신 그 뒤에 숨은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있었으니까요. 작지도 크지도 않은 개울도 흐르고 있었고요, 낱낱이 적지 않아 지금 기억은 못하지만, 교토가 근대 시기를 거치며 만들어냈던 이런저런 건물이나 자취도 더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입을 헤벌리고 노니는데, 좀은 오래 된 듯한 어떤 건물 들머리에서 ‘豊臣秀次’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때껏 풍신수길(豊臣秀吉)만 알고 있었기에 “풍신수차가 누구지? 차(次)라는 글자가 둘째라는 뜻이니 그러면 풍신수길 동생쯤 되는 모양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오사카성 도요토미(豊臣)신사 앞에 있는 풍신수길공(公) 동상 얼굴 부분.


교토는 한국 사람도 많이 찾기 때문인지 한글로도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절간이었는데요, 풍신수차의 무덤을 모셔놓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니, 제 기억에 기대어 좀더 자세하게 적자면, ‘풍신수차와 그 무리의 무덤’이었습니다. 


아시는대로 일본에서는 무덤이 사람 사는 마을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집이 좁은 서민들은 동네 공동묘지 같은 데다 가족들 무덤을 쓰는 것 같았고,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자기 집안에 따로 무덤을 쓰거나 이처럼 절간 같은 데에도 무덤을 모시는 것 같았습니다. 절간에 무슨 무덤이 있다 해도 이상한 노릇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열린 문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까 풍신수차가 원래는 풍신수길의 조카였는데 나중에 양아들로 들어갔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풍신수길이 아들을 보지 못하던 상황에서 대를 잇기 위해 풍신수차를 양아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풍신수길의 뒤를 이어 대권을 한 손에 틀어쥘 수도 있었던 풍신수차가 여기 묻혀 있다는 얘기였는데요, 이어지는 내용이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출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아들이 풍신수길한테 생기면서 풍신수차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풍신수길은 자기 뒤를 확실하게 이어나갈 아들이 태어나자 갖은 이유를 붙여 풍신수차를 박해하고 결국은 모반으로 몰아 할복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오사카성에 있는 도요토미(豊臣)신사. 두 아이와 그 부모가 신전 앞에 앉아 있습니다.


풍신수길이 모반으로 몰자 그 양아들 풍신수차는 발명을 하려고 면담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유폐돼 있다가 할복 명령을 받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 무리들도 거의 다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아내들과 자식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무슨 강가에서 대략 마흔에 가까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도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섬뜩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나 핏줄에 대한 욕망 애정이 넘친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앞에 보이는 무덤은 사실 그 자체이니 저는 곧바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력 또는 핏줄에 대한 욕망이나 애정이 지나치면 이럴 수도 있구나……. 사람이 권력을 독차지하면 이렇게 모질어질 수도 있구나……. 


풍신수차는 풍신수길한테 누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자기 권력을 이어갈 양아들이었는데, 그래서 나름 신임도 받고 훈육도 받고 했을 텐데도, 어느 한 순간 친아들이 태어나고 보니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도 아니고 버림을 받고 목숨까지 빼앗기고 말았구나……. 


게다가 풍신수길은 자기 양아들의 아내들과 자식들로도 모자라 그 시종들 목숨까지 없애고 말았구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친아들 미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마흔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여버린 악행은 참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풍신수차(도요토미 히데츠구). 한국어 위키백과에서 가져왔습니다.


크지 않은 절간은 고즈넉했습니다. 오른쪽으로 풍신수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무덤이 놓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가 소리 없이 돌아나왔습니다.(이 무덤과 절간은 제가 충격을 나름 크게 받은 때문인지 사진 찍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나오면서 다시 안내판을 보니까 무슨 강가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시신은 오랫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누구도 돌보지 않아 그 백골은 그냥 나뒹굴거나 모래에 파묻혔고 사건 자체도 잊혀졌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풍신수길과 그 뒤를 이은 풍신수길 친아들의 권력이 무서워서였을까요? 그래서 다들 쉬쉬 하며 숨겼기 때문에 잊혀지기까지 했겠지요. 


어쨌거나 참사가 벌어진지 십 몇 년이 지난 시점에 무슨 행사인지 공사인지를 그 강가에서 하는 바람에 백골들이 숱하게 드러나게 됐고 이를 통해 과거 참사를 알게 된 어떤 인물이 여기 절간을 짓고 그 유해를 모셔 기릴 수 있도록 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랑은 아무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죽고 나서 십 몇 년이 흐른 뒤에라도 이렇게 유골을 수습해 모신 인물이 대수롭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일이다’ 하는 혼잣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한 번 찾아봤습니다. 양아들 풍신수차와 그 무리를 이토록 잔인하게 없애버린 풍신수길, 그리고 그 친아들은 어떻게 됐는지를요. 


친아들 풍신수뢰(秀頼)는 1593년 태어났습니다. 풍신수길 나이 쉰일곱이 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듬해입니다.(1589년에 첫 아들 풍신학송(鶴松)이 태어났으나 이태 뒤인 1591년 죽고 맙니다. 그러자 풍신수길은 곧장 풍신수차를 양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양아들 풍신수차와 그 무리를 죽인 해는 1595년입니다. 풍신수뢰가 세 살 되던 해에 싹쓸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1598년에는 아시는대로 풍신수길이 숨을 거뒀습니다. 임진왜란 7년 난리도 더불어 끝났습니다. 


풍신수길이 죽은 뒤 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은 친아들 풍신수뢰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1615년 덕천가강(德川家康) 군대에 깨지면서 친어머니와 함께 자살했습니다. 


아울러 아들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살해됐으며 그보다 한 살 더 어린 딸은 비구니가 되는 조건으로 목숨을 부지하다 서른여섯으로 1645년 세상을 떴습니다. 이로써 풍신수길은 핏줄마저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허망하고 또 허망합니다. 강가 모래밭을 피로 물들이며 그토록 오로지했던 권력인데도 그야말로 찰나입니다. 그리고 그 찰나가 지나고 나니 허방다리이고 그조차 아래에 아무것도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제 뜻대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조금만 길게 보면 누구나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풍신수길은 풍신수차를 죽였지만 그로부터 고작 3년밖에 버티지 못한 채 황천길을 뒤따라가야 했습니다. 


그 아들 풍신수뢰는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최고 권력 자리에 올랐지만 권신들 등쌀에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권신 덕천가강 가문에 맞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깨지고는 아버지를 뒤따라 저승에 가고 말았습니다. 


풍신수길은 “아아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구나. 오사카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답니다. 그런데 이런 행적을 뒤적여보니 풍신수길이 잔뜩 의미를 집어넣은 이 절명시가 오히려 가증스럽게 여겨집니다.  


※ 풍신수차 무리가 참변을 겪은 역사 현장이, 나중 돌아와서 찾아보니 가모가와(かもがわ:鴨川) 강가의 모래밭 산조가와라(さんじょうがわら:三条河原)로 돼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교토 갈 일이 있으면, 꼭 한 번 찾아가 둘러보고 싶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지역신문은 뉴스기업이 아니라 콘텐츠기업이다

$
0
0

얼마 전 경남에 터를 잡고 전국 독자를 상대로 책을 만들고 있는 출판사 관계자들과 만났다. 그렇잖아도 한 번 만나야지 하고 있던 차에 우리 신문 기자가 ‘지역출판’을 주제로 기획취재를 해보겠다고 하여 만들어진 자리였다.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 펄북스 여태훈 대표, 그리고 도서출판 피플파워를 대표하여 내가 참석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다들 의미 있는 지역콘텐츠를 발굴해 책을 펴내지만, 소비층이 제한되어 있다는 게 공통적인 어려움이었고, 공공기관이나 단체에서조차 공익콘텐츠에 대한 가치를 알아주지 않아 서운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출판업을 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일회성으로 신문에 소비되고 마는 지역콘텐츠들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지역신문은 뉴스기업이 아니라 종합콘텐츠 기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나로서는 지역신문이야말로 지역콘텐츠 생산의 선도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진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하지만 지역신문업계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개 지역신문은 ‘연감’이라는 책을 내는데, 지방자치단체와 의회, 기관·단체·대학 등에서 소개 자료를 받아 그걸 짜깁기하여 만든다. 500~700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이 책에는 자료를 제공한 지자체 등의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책 내용도 관(官)에서 받은 것이고, 광고도 거기서 받아 제작비용을 뽑고도 남았으니, 신문사가 저작권이나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부끄러운 책이다.


게다가 그런 책에 19만 원 정도의 가격을 매겨 팔아먹는다. 판매방식도 거의 ‘강매’ 수준이다. 기자들이 판매원으로 내몰리기 일쑤고, 판매대행업체에 위탁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서도 기자를 사칭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로 인한 관폐·민폐가 심각하다. 신문사 입장에선 매년 그렇게 손쉽게 만든 책으로 광고수익과 판매수익으로 1~3억 원 정도는 챙길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다. 앞서 지역출판사 관계자들이 토로했듯이 진짜 가치 있는 지역콘텐츠를 만들어봤자 알아주는 이도 별로 없고 상업성도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콘텐츠는 생산되지 않고 쓸모없는 연감만 기관·단체장 사무실 책장에 꽂혀있다. 악순환이다.


의미 있는 콘텐츠는 책으로 출판, 유통됨으로써 가치를 창출한다. 그래서 지역출판이 없으면 지역콘텐츠도 없다. 지역콘텐츠가 없으면 지역의 정신문화와 정체성도 사라진다.그래서 우리는 연감의 폐단을 극복하고 지역민에게 직접 콘텐츠 가치를 평가받아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나온 책이 역사·문화·관광 인문지리지 <경남의 재발견>, 전통시장 스토리텔링 <시장으로 여행가자>,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 지역 인물 스토리텔링 <열두 명의 고집인생>, <풍운아 채현국>, 마을 스토리텔링 <사람 사는 대안마을> 등이었다.


올해에는 <경남의 숨은 매력>, <한국 속의 경남>, <통영로 옛길을 되살리다> 등도 출판할 예정이다. 다행이 그동안 나온 책은 모두 1쇄(1000권) 이상 판매하는데 성공했고, 몇 권은 3쇄 이상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의미는 있고 가치도 높지만 상업성은 낮은 콘텐츠도 있다. 이런 경우 최소한의 제작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독자들에게 크라우드펀딩을 받고 있다. <남강 오백리>에 대한 출판 펀딩인데, 목표금액인 200만 원이 열흘 만에 달성됐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무관심과 푸대접은 여전하다. 어쩌면 지방자치단체가 용역을 줘서라도 만들어야 할 공익콘텐츠를 민간 출판사가 책으로 펴냈는데, 공공도서관에서조차 구입해주지 않는다. 동네서점 살리기 차원의 지역서점 의무구매 제도와 함께 ‘지역출판물 우선구매 정책’ 또한 절실하다.그래야 전국의 지역신문들이 연감을 없애고 진짜 콘텐츠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칼럼으로 썼던 글입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Viewing all 1163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