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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이사장님, 저를 고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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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제가 얘기한 바들을 두고 비방이고 음해라 얘기한 모양입니다. <미디어스>를 비롯해 몇몇 매체에서 다뤘지 싶은데 <뉴스코리아>가 가장 자세한 것 같습니다. <뉴스코리아> 11월 4일치 “야권 ‘고영주 때리기’ 의혹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뒷부분에 나오는데요, 소제목은 고영주 이사장 발언을 따서 이렇게 달았습니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 주장은 비방과 음해”. 이어지는 기사를 그대로 끌어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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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사장이 지난 1985년 공안검사 시절 ‘일보전진’이란 단행본을 펴낸 한 대학 언론출판연합체 회장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하면서 진술을 강요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경남도민일보의 김훤주 기자가 이 같은 주장을 한 당사자로, 그는 고 이사장이 지난 달 국감에서 부림사건 피의자를 여관에서 불법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여관에서 당사자 동의 아래 합숙하면서 수사했을 것”이라고 밝히자, 8일 자신의 블로그에 <고영주가 말한 ‘당사자 동의 합숙 수사’의 실상>이란 제목의 글을 올리고 자신이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글에서 “저는 1985년 7월 시골 고향집에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까만 승용차를 타고 온 네 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운전하고 한 명은 조수석에 앉고 다른 두 명은 뒷자리 한가운데 저를 태운 다음 양옆에서 저를 끼고 앉았습니다"라면서 "그이들은 저더러 고개를 깊이 숙여 바깥을 보지 못하도록 했는데요, 그렇게 해서 끌려간 데가 처음에는 서울 어느 한 경찰서였습니다. 거기서 구둣발과 주먹으로 좀 얻어맞은 다음 끌려간 데가 말하자면 고영주 이사장이 입에 올린 ‘여관’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는 등, 자신이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여관에서 불법적 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미디어오늘 등 일부 매체는 이를 인용 보도하면서, 제목과 기사 내용에 고 이사장이 당시 수사를 하면서 마치 불법구타나 감금행위에 가담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듯 묘사했다.    


그러나 고영주 이사장은 이에 대해서도 “완벽한 음해와 비방”이라고 잘라 말했다. 고 이사장은 4일 통화에서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내게서 1985년경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을 당시 경찰에서 7일 동안 조사받으며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식으로 발표하고 마치 내가 고문에 관여한 것처럼 비방했는데 완전한 음해”라며 “그 사건은 내가 직접 인지 구속한 사건이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의자를 조사할 수가 없었다. 경찰은 지명수배된 피의자를 검거해 바로 검찰에 인치했기 때문에 피의자를 상대로 엄문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던 사건”이라고 했다.    


고 이사장은 “경찰은 피의자를 붙잡아 내게 인계한 것뿐이다. 경상도에서 피의자를 붙잡아오는데 시간이 걸려서 하루쯤 숙박했는지 몰라도, 그건 또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경찰에서 조사하는 건 있을 수가 없다”며 “경찰이 내가 뭘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조사하나. 경찰조사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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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코리아>에 나오는 고영주 이사장 발언대로, 경찰은 저를 상대로 수사 또는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 또한 제가 경찰한테 수사 또는 조사를 받았다고 글쓴 적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폭행과 감금을 당했을 따름이고 제 글 또한 그런 내용이 전부입니다. 


(짚어두자면 ‘경상도에서 피의자를 붙잡아 오는데 시간이 걸려서 하루쯤 숙박’하는 경찰관은 없습니다. 차도 없고 길도 끊겼다면 몰라도 말씀입니다. 그런 상황은 영화에나 나옵니다. 또 제가 붙잡힌 고향에서 서울까지는 그 때도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 블로그글 “고영주가 말한 ‘당사자 동의 합숙 수사’의 실상”에서도 저는 다만 △경찰한테 두어 시간 맞았다, △유치장이 아닌 여관방에 갇혔다, △경찰관은 동의 여부를 묻지도 않았다, △여관방에서 제 손목에는 수갑이 일상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밤에 잠잘 때는 경찰관이 속옷을 벗겨 자기네들이 깔고 잤다, 고만 적었을 뿐입니다. 


물론 ‘수사’라는 말을 쓴 적은 있습니다. 이렇게요. “제가 여관에서 경찰과 같이 자면서 수사를 받는 데 동의를 했다면 ‘아, 이 친구가 몰래 도망칠 수도 있지!’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잘 때도 제게 수갑을 채우거나 옷을 벗겨 깔고 잔다든지 하는 일 또한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적었을까요? 고영주 이사장은 경찰이 수사·조사를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모양이지만, 저를 비롯한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봅니다. 경찰관에게 끌려갔느냐 아니냐, 경찰에서 폭행을 당했느냐 아니냐, 법률로 정한 구금 장소가 아닌 여관방에 감금됐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고영주 이사장이 말씀한대로 경찰이 저를 조사 또는 수사하지 않았더라도 저를 폭행·감금하는 주체가 될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또 경찰이 폭행하고 불법 감금했다면 그렇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경찰이 무언가를 캐내려고 수사하느라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고영주 이사장은 경찰이 수사·조사하지 않으면 폭행이나 불법 감금도 하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싶은 모양인데요, 당시 실정을 알면서 이렇게 말한다면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으로 우기는 것이 되고 당시 실정을 진짜 몰라서 이렇게 말한다면 경찰에 대한 지휘·감독이라는 검사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이와 더불어 고영주 이사장은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내게서 1985년경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을 당시 경찰에서 7일 동안 조사받으며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식으로 발표하고 마치 내가 고문에 관여한 것처럼 비방했는데 완전한 음해”라고도 말했습니다. 


먼저 제가 당한 폭행을 두고 ‘가혹행위’라거나 ‘고문’이라고 말한 적이 여태껏 한 번도 없었음을 밝혀둡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행위나 고문은 폭행 이상으로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살떨리는 무엇이었습니다. 



부림 같은 조직사건으로 20일 넘게 행방불명인 상태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거나 80년대 청년운동을 이끌었던 김근태 선생처럼 상처가 아물어도 피딱지가 앉도록은 당했다거나 해야지 가혹행위나 고문이라는 말에 어울립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끄트머리에 있었던 ‘일개 피라미’밖에 안되는 저 같은 존재가 두어 시간 경찰한테 얻어터진 것은 그냥 폭행이었을 뿐이지 가혹행위나 고문이라는 낱말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상황인 것입니다. 


고영주 이사장은 그러면서 제 발언을 두고 ‘비방’이고 ‘음해’라 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었던 일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는 것도 ‘법률적으로’ 비방이나 음해가 될 수 있는지요? 


저는 제 발언이 헐뜯어 말하는 ‘비방’도 아니고 응큼하게 남을 해코지하는 ‘음해’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만 제가 당한 폭행과 불법 감금에 대해 ‘사실 적시’를 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데는 다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쓰는 글도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적어 남겨야 한다고 여길 따름입니다. 이렇게 써서 남기지 않으면, 고영주 이사장이 말한 ‘주장’-사실과 다른-이 나중에 세월이 흐른 뒤 ‘사실’로 굳어질까봐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동안 글과 말을 통해 밝힌 바를 두고 본인에 대한 비방 또는 음해라고 고영주 이사장께서 보신다면, 저를 고소하시기 바랍니다. 비방이나 음해는 형법상 처벌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해서라도 사실 여부는 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별것 아니지만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고영주 이사장은 앞서 ‘당시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여관방에 가둔 것은 잘못’이라는 국회의원들 지적에 맞서 ‘당사자 동의가 있었으므로 문제없다’는 식으로 답했습니다. 


저는 블로그글 “고영주가 말한 ‘당사자 동의 합숙 수사’의 실상”에서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이 유치장·구치소·교도소 등 법률로 정한 데가 아닌 장소에 가두면 당사자 동의를 얻든 않든 모두 불법’이라 했습니다. 하나는 틀리고 다른 하나는 맞을 텐데요. 보시기에 제 소견이 틀렸는지 어떤지 여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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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골 단풍 따다 가을 수채화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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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교실 9 

생태체험 : 얼음골옛길∼남명초교 솔밭 


10월 17일 밀양으로 떠난 생태체험에는 좋은씨앗교실·누리봄다문화·경화·창원행복한·팔용·메아리 지역아동센터가 함께했습니다. 


얼음골옛길은 옛날에는 차들이 다녔으나 지금은 새로 큰길이 나면서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사람들 마음놓고 걸을 수 있는 길이 흔하지 않습니다. 얼음골 들머리에서 동명복지회관까지는 양쪽으로 가로수와 사과나무까지 늘어서 있습니다.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얼음골옛길 나무들은 길가에 낙엽들을 제법 수북하게 깔아놓았습니다. 아이들은 느티나무 벚나무 등에서 떨어진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을 주워모읍니다. 길을 걸으며 살펴보니 갖은 나무와 풀들이 다 단풍이 들고 있습니다. 



담쟁이덩굴은 단풍이 빨갛게 들었고 꺼칠꺼칠한 환삼덩굴조차 노랗게 잎이 물들고 있습니다. 언덕배기 꽃술을 흔드는 억새는 물기가 촉촉하고요, 개망초는 여태 꽃을 피우고 있었으며, 구절초·쑥부쟁이는 여린 꽃을 가장 높은 데 매달고 있습니다. 


이런 꽃들 보고 잎들 줍느라 아이들 걸음이 느려집니다. 주운 단풍잎이 둥글거나 길쭉하거나 갈라지거나 하트 모양이거나 손바닥을 닮았거나 해서 저마다 다른 줄을 새삼 알아보고는 신기해하는 아이들입니다. 


내달리는 남자아이.


여자아이들은 손잡고 걸으며 노랫소리를 높였고 남자아이들은 앞으로 뒤로 내달리기를 빠르게 합니다. 한 여자애가 말했습니다. "빨리 앞에 간다고 뭐가 좋아. 정말 예쁜 것은 보지도 못하는데." 그 어른스러움에 놀라 누구한테 들었느냐 물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내 생각인데요" 합니다. 


예쁜 척하는 여자아이들.


이 친구 나뭇잎 담긴 봉지는 아주 수북했습니다. 이파리 갖은 색깔과 모양은 물론 억새 꽃술과 또다른 꽃의 노란색, 어떤 열매 검은색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봉지에다 코를 갖다대면서는 "잎에서 정말 향기가 나요!"라고까지 합니다! 어린 시인 한 명 탄생입니다. 


길가 동네사람들 늘어놓은 메주콩과 들깨를 지나니 삽짝 어귀에 씨앗을 묵직하게 매단 봉숭아가 나옵니다. 아이들 보라고 짐짓 멈춰서서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씨방'을 건드렸더니 씨앗이 사방으로 터집니다. "우와!" 탄성을 내지르더니 아이들도 한 번씩 터뜨려봅니다. 


인심좋은 어르신 부부가 몸소 농사지은 사과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한 분 만났습니다. 유명한 얼음골 사과를 몸소 손수 농사지으시는 모양입니다. 아이들 떼지어 걷는 양을 지켜보다가 어디에서 왔느냐 묻고는 따라오라 하십니다. 가까운 농막으로 데려가더니 아이들한테 사과를 넘치도록 안겨줬습니다. 아이들 입이 모두 함지박 만해졌습니다. 


점심은 산내남명초교 뒤편 솔숲에 들어가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가져온 돗자리를 펼치고는 삼삼오오 모였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는 이리저리 휘고 비틀며 자란 덕분으로 바라보기에 그럴듯했습니다. 


솔밭에서 나뭇잎 꾸미기.


어른들은 짙은 솔그늘이 좋아 남았고요 아이들은 도시락을 먹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학교 운동장까지 나가 놀기에 열중했습니다. 


솔밭에서 나뭇잎 꾸미기.


이어서 얼음골옛길을 걸으며 주워모은 나뭇잎으로 꾸미기를 했습니다. 저마다 들판, 산, 사람, 얼굴, 꽃 등등을 만들어냈고 선생님들은 마음에 드는 작품에 돌멩이를 하나씩 얹어 품평을 했습니다. 가장 많은 돌멩이를 얻은 팀에게는 1인당 2000원씩 '쥐꼬리장학금'이 돌아갔습니다. 


나뭇잎 꾸미기에 대한 선생님들의 품평.


마지막으로 소나무에 대해 알아보는 '소나무 도전 골든벨!'을 진행했습니다. 소나무는 몇 년마다 잎이 질까 등 열세 문제였는데, 놀랍게도 아홉 문제나 맞힌 팀이 나왔습니다. 대단합니다. 가을길 거닐며 낙엽을 살피고 꾸미기를 하며 솔숲에서는 소나무를 알아보는 여정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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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방참방 신나게 놀며 '물의 신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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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토요 동구밖 생태·역사 교실 

6. 여름방학 특별기획 


"우리 지구에 물이 언제 생겨났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요. 어림잡아 44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물이 44억 년 동안 줄었을까요, 늘었을까요? 아니면 때로는 줄고 때로는 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물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형태는 얼음이나 지하수 또는 바닷물과 강물 아니면 지하수 등등으로 바뀌지만 총량은 언제나 일정했다고 해요. 만약 물이 많아지거나 적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물론 동물과 식물이 살아가는 데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또 하나, 물은 썩을까요, 썩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물은 썩지 않습니다. '물이 썩었다', '썩은 물에서 냄새가 진동한다', 이렇게 말들 하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라 물에 들어 있는 풀, 나무, 열매, 곡식 등이 썩었을 뿐이지 물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런 썩는 물질들을 걸러내면 물은 금세 깨끗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물은 맛이 어떨까요? 신맛?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 물은 아무 맛도 없습니다. 바로 이렇게 아무 맛이 없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산청 송정숲에서.


만약 자기 맛이 있다면 우리가 물로 음식을 해먹을 수 없습니다. 물에 맛이 있으면 김치를 담가도 밥을 지어도 나물을 무쳐도 그 맛이 나지 않고 물맛에 휘둘리게 됩니다. 


이처럼 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늘 일정합니다. 물은 썩지도 않습니다. 물은 또 아무 맛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만 알아도 여러분은 아주 유식한 사람입니다. 바로 물의 미덕입니다." 


◇여름철 무더위 싹 = 여름철 무더위에는 뭐니뭐니 해도 물놀이가 으뜸 즐거움이랍니다. 어린아이들한테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메르스 때문에 6월에 못했던 '두산중공업과 함께하는 토요동구밖교실'은 생태체험·역사탐방 구분 없이 모두 물놀이를 프로그램에 넣었습니다. 


의령천.



나중에 잊어먹어도 좋으니까, 물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특징 세 가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고 물에 들어가자고 하면서 말이지요. 


백천농원에서.


생태체험에서는 7월 29일 누리봄다문화·경화·좋은씨앗교실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사천 백천 골짜기를 찾아 백천농원에서 종일 물놀이를 즐겼습니다. 


8월 10일에는 메아리·팔용·창원행복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산청 남사마을에서 문화와 함께 자라는 풀과 나무들을 알아본 뒤 의령읍내 의령천으로 옮겨 물놀이를 했습니다. 


산청 남사마을 사효재에서.


역사탐방은 7월 28일 전원해운·늘푸른·SCL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산청 목면시배유지전시관의 우리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해준 문익점 선생을 찾아 미션 수행을 한 뒤 송정숲에서 물놀이를 했습니다. 


산청 목면시배유지전시관에서.


8월 21일 중리·큰샘원 지역아동센터와 함께한 역사탐방은 당일 비가 제법 오는 바람에 물놀이는 못했지만 대신 목면시배유지전시관에 이어 이순신 백의종군길과 남사마을 옛집에 더해 유림독립운동기념관까지 재미있게 둘러볼 수 있었답니다. 



산청 남사마을 이순신 백의종군로.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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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월연대 예림서원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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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마지막 생태·역사기행은 가까운 밀양으로 향했습니다. 밀양은 산도 좋고 들판도 좋고 인물도 좋은 고장이지요. 자연과 인물이 어우러지니 그럴 듯한 문화유산은 절로인 듯 생겨난답니다. 


아침 8시 40분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한 일행 발걸음이 처음 닿은 데는 월연대였습니다. 밀양강이 동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가지산에서 시작된 동천은 재약산에서 발원한 단장천을 쓸어담으며 몸집을 부풀린 다음, 월연대 앞에서는 밀양강 물줄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물과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언제나 흐름이 느린데요, 그래서 언저리에는 습지가 너르게 펼쳐지고 강물은 연못(淵)처럼 잔잔하기 마련입니다. 여기 이름 월연(月淵)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보름 밤이면 둥근 달 어리는 모습이 더없이 멋지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둘씩이나, 동천에 하나 밀양강에 하나. 



하지만 보름밤이 아니라도 월연대는 언제나 멋집니다. 조선 중기 이태라는 양반이 여기 별장을 짓고 살았습니다. 강가를 향해 튀어나온 바위가 낭떠러지를 이루는 형상입니다. 그 꼭지에 정자를 앉히고 이름을 월연정이라 일렀습니다. 


강물 따라 흐르는 아래쪽에는 묵을 집 두 채를 지었는데 하나가 쌍경당(雙鏡堂)입니다. 거울(鏡)은 강물에 비친 달을 이릅니다. 마루에 앉아 현판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눈길을 앞으로 돌렸더니 과연 그러했습니다. 바라보는 풍경이 건물 바깥에서도 그지없었는데 한 채 정자와 두 채 건물 자리에서 보니 그것이 더 멋졌습니다. 일행은 다들 따스한 햇살 아래서 조그마한 탄성을 자아냅니다. 


월연대는 건물과 풍경도 좋지만 나무도 멋진 친구가 많습니다. 정자 아래 평지와 언덕에 자리잡은 배롱나무는 이제 길고 화려했던 꽃을 떨구고 잎마저 떠나보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연륜을 굵은 둥치로 드러내보입니다. 


또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라고 오목새김이 된 바위 너머에는 백송이 한 그루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주 드문 나무인데요, 껍질이 소나무답지 않게 거칠지 않으면서 흰 빛이 납니다. 바로 옆 은행나무도 멀리서 보니 그럴 듯하고 들머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오래 된 활엽수들도 사철 구분 없이 멋집니다. 


이어서 예림서원입니다. 밀양 출신으로 조선 시대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지는 김종직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이름도 예쁘고 둘레 풍경도 처지지 않으며 경내 분위기 또한 퍽 소박하면서 단아합니다. 시간을 길게 들이지 않아도 전통 서원의 풍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정문 노릇을 하는 독서루를 지나면 오른편 열고각에는 목판들이 보관돼 있습니다. 왼편에는 몽양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아이(蒙)를 기른다(養)'는 뜻에 비춰볼 때 당대 학생들 가운데 나이가 어린 축에 드는 이들이 묵었던 곳이지 않나 싶습니다. 


축대를 오르면 중심 공간입니다. 소나무와 산수유가 받쳐주는데, 동재는 돈선재고 서재는 직방재입니다. 착함(善)을 두텁게(敦) 하자는 뜻이고 곧고(直) 반듯하게(方) 살자는 뜻입니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김종직은 <소학(小學)>을 으뜸으로 삼아 읽고 공부했다고 합니다. 


동재와 서재는 요즘으로 치자면 학생들 기숙사니까요, 이런 현판에 담긴 뜻은 그러니 요즘으로 치면 교훈 또는 급훈이 되겠습니다. 가운데 건물은 교실과 교무실을 겸합니다. 일신재(日新齋)와 시민재(時敏齋)는 옛날 선생님이 머물던 곳입니다. 


구영당(求盈堂)은 강당인데 지금으로 치면 교실쯤이 되겠지요. 구영은 모자람이나 이지러짐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으로,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한테 충분히 가치로운 목표라 하겠습니다. 


강당 구석자리 옛적에 썼음직한 오래 된 예림서원 현판에까지 눈길을 던집니다. 그보다 위에 있는 사당 육덕사(育德祠)는 공개되지 않는 제사 공간이니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나오는 길에는 독서루 2층 누각에 올랐습니다. 아래위로 주변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옛날 손님도 맞이하고 풍류도 즐기고 공부도 하고 하기에 걸맞은 공간입니다. 


여기는 그늘이 짙습니다. 잠깐 몇 마디 얘기 나눴을 뿐인데도 은근히 추워질 정도입니다. 그늘이라 그런 모양이지요. 바깥은 햇볕이 따사로운데도 그렇습니다. 가을 햇살 개햇살입니다. 


가까이 밥집 ‘흑담’에서 비빔밥을 맛나게 먹은 다음 호박소로 향했습니다. 호박소 단풍이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며 잎사귀가 물들어가는 모습이 은근히 괜찮습니다. 멀리서 보면 별것 아니지만 가까이서 보는 가을 나뭇잎은 그랬습니다. 



풍경 자체가 워낙 빼어난데다 산길이 산길답지 않게 가파르지 않고 무척 평탄한 편이어서 호박소 언저리 위쪽이나 또는 오천평바위까지 바람소리 물소리와 더불어 이리저리 거닐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호박소 둘레는 해마다 빠져 죽는 사람이 있는 바람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통제가 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위쪽이나 아래쪽도 골짜기와 바위가 못잖게 좋았습니다. 


그런 너럭바위에 올라앉아서 따뜻한 햇살 따라 볕바라기를 하노라면, 저절로 저기 나무처럼 단풍이 들 것만 같은 느낌까지 뭉개뭉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1시간 30분 가량 노닌 일행은 마지막으로 얼음골옛길로 갔습니다. 



얼음골 들머리에서 동명복지회관까지 2.5km남짓한 길은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답니다. 자동차 소음 없이 사고 걱정 없이 사람이 활개치며 걸을 수 있는 한적한 길이 요즘은 썩 드뭅니다. 


가깝고 먼 주변 풍경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벚나무 가로수와 바로 옆 사과밭 여물어가는 빨간 열매도 받쳐줍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으면 사각사각하는 느낌이 그 뽀송뽀송한 질감으로 척추를 타고 퍼져나가기까지 합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는, 2015년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마지막 루트로 그다지 손색이 있지는 않는 그럴 듯한 길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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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조현오가 쌍용자동차 진압작전 밀어부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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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20화.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


조현오는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국회 통지를 받는다. 2012년 9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조현오를 쌍용자동차 청문회 증인으로 지목한다. 주변에서는 출석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말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년 전인 2009년 4월 8일 쌍용자동차 사측은 2646명을 구조조정하는 안을 발표했다. 사측은 희망퇴직서를 내지 않은 976명을 정리해고한다. 이 가운데 600여 명이 옥쇄파업에 참가한다.


2009년 8월 6일 파업 77일 만에 쌍용차 노사는 '쌍용자동차 회생을 위한 노사 합의서'를 내놓으며 극적으로 합의한다. 정리해고자 절반을 무급휴직자로 하되 1년이 지나면 생산 물량에 따라 순환근무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후 회사는 휴직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구조조정 이후 자살한 노동자와 가족 수가 22명이었다. 이 같은 노사합의 이행 과정을 확인하는 것은 고용노동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가 증인으로 출석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게 뻔하다는 게 주변 걱정이었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루는 언론 논조도 달라졌다. 그동안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을 '과잉진압 논란'으로 다뤘던 언론도 '과잉진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MBC <PD수첩> 898회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청문회는 예상대로 조현오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조현오를 향해 사망한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사죄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정신과 박사인 정혜신은 방송과 청문회 등에서 쌍용차 희생자 발생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찰특공대 진압을 꼽았다. 당시 하늘에서는 헬기가 최루액을 쏟아부었다.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긴장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 쌍용자동차 사건에 투입된 정보과 형사에게 물었다. 옥상에서 저항하는 노동자를 움츠러들게 할 방법이 최루액 투하밖에 없었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경찰은 어떻게든 대화로 풀려고 노력했어요."


경찰 역할은 사회 안정이다. 경찰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노사 갈등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 오래 근무한 경찰은 노동자와 서로 잘 아는 사이기도 하다.


1986년 출범한 쌍용차는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지만 대우그룹이 몰락하면서 1999년 함께 워크아웃됐다. 쌍용자동차 주인이 바뀌는 시점에 노사 갈등은 증폭됐다. 2004년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자동차를 사들이자 노조는 이에 반발하며 부분·전면 파업을 했다. 쌍용자동차 경영이 나아질 기미가 없던 2008년 말에는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먹튀'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쌍용자동차 노조는 12월 5일 한상균을 10대 지부장으로 선출한다. 정보과는 '정리해고 박살'을 구호로 걸고 지부장이 된 한상균을 평소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판단했다.


2009년 1월 9일 상하이차는 인수 4년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법정관리신청을 하며 경영권을 포기한다. 2월 6일 기업회생절차가 시작되면서 사측은 핵심 정책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인다. 곧 정리해고자가 발표됐다. 부분파업을 벌이던 쌍용자동차 노조는 5월 22일부터 옥쇄파업을 시작했다. 이후 약 두 달 동안 정보과 형사가 조현오에게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화를 붙여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최상이다."


노사 견해차는 너무 컸다. 정리해고 통보와 옥쇄파업이 맞섰고 사측은 대화 의지가 부족했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직원 3000여 명이 회사를 가동하겠다며 사내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공장 안에 있던 농성 노동자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경찰력 6개 부대를 투입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사 양측을 갈라놓았다. 당일 MBC 뉴스 보도는 이렇다.


“경찰은 27개 중대 20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헬기까지 띄워 감시하고 있지만, 쌍용차 직원들 간 격한 충돌에도 개입하지 않고 주변 통제만 하고 있습니다.”


사측은 경기지방경찰청에 방문해 "우리 회사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며 항의하면서 공장 진압을 재촉했다. 조현오는 공장 외곽에 경찰을 배치해 사측은 물론 그 누구도 공장을 출입할 수 없게 했다. 사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측은 네트워크를 동원해 공권력이 뒷짐을 지고 있다며 경기지방경찰청을 압박했다. 조현오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2의 용산사태'를 언급하며 버텼다.



실제로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2공장 믹싱룸에는 인화물질이 가득했다. 자칫 폭발이라도 일으키면 대참사를 각오해야 했다.


정보과 형사들은 물밑에서 해고 노동자와 접촉했다. 정보과 형사는 당시 해고노동자에게 최루액 때문에 고통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노동자에게 가장 큰 관심은 '협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노조 입장을 회사에 전했다. 성의를 보이지 않는 사측을 압박하고 대화장으로 끌어냈다. 다음은 경찰이 주선한 교섭일지다. 이 모든 사항은 조현오 지시로 이뤄졌다.


- 5월 28일 : 경기청 정보분실장이 쌍용차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노조 측은 기존의 ‘총고용보장’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무급휴직안 등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며 사측이 협상에 나서줄 것을 촉구


- 6월 15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담당정보관이 사측 박영태 사장과 노조 한상균 지부장을 쌍용차 본관 1층에서 접촉. 6월 17일 박영태 사장과 한상균 지부장이 단독 협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주선.


- 7월 8일 : 경기청 정보계장과 정보관 1명이 공장 내 노조사무실을 방문. 노조사무실에서 한상균 지부장을 접촉. 기존 ‘총고용 보장’ 주장에서 한발 물러나 현실성 있는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회사 측이 교섭 주선 거부.


- 7월 중순부터는 경찰중재로 물밑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노조가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음.


조현오도 직접 사측에 안을 제시했다. 정보계장을 통해 노조에도 의견을 전했다. 조현오 제안은 '독일식 일자리 나누기'였다. 각자 월급을 줄여 모두 껴안고 가자는 것이다. 노사는 모두 조현오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사측은 생산효율성을 들어 반대했다. 해고 대상자가 아닌 노동자는 월급이 깎이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는 완전고용을 주장했다.


조현오는 2012년 7월 8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노사 양측을 중재하면서 잡셰어링으로 접근했는데 양쪽 다 씨도 안 먹혔다"고 말했다.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교섭이 이어졌다. 사측은 정리해고자 가운데 40%만 구제하겠다는 안을 제시한다. 노조는 이 제안도 거부한다. 8월 2일 협상이 결렬되자 정보과 형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 상황에 대한 노조 측 증언이 다르다. 2012년 9월 20일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한상균 지부장 말이다.


“우리 조합원이 모두 아는 상태에서 8월 1일 자 교섭을 정말 끝장 교섭이라고 하면서 진행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에 실질적으로 정리해고를 회피할 방법들에 대해서 근접했던, 그야말로 그래서 우리 모두 정말 아픔이 있었지만 원만히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디인지는 모르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것들이 어느 순간 깡그리 무시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공권력 투입만 없었다면 노사간 타협이 됐을 것”이라는 한상균 지부장 주장에 대해서 조현오는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받아쳤다.


반면 정보과 형사는 “지부장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상균 지부장의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쌍용자동차는 1차 협력업체 255개, 2·3차 협력업체 1900여 개로 딸린 노동자만 약 10만여 명이었다. 만약 파업이 이어지면 협력업체 수만 명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경파들은 ‘완전 고용’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 대상일 것은 자명했다. 당시 정보과는 강경파는 한상균 지부장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보고했다.


경찰은 합의점을 찾으려면 공권력으로 압박하여 강경파 입지를 좁히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도장 공장 폭파위협’ 강경파 움직임도 정보보고로 올라왔다. 게다가 쌍용자동차 협력업체가 하나씩 부도처리 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공권력 행사를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경찰은 8월 4일 작전을 시작했다. 12개 부대와 특공대 4개 대대를 동원해 폐수처리장 옥상을 장악했다. 5일 새벽이 되자 서울 등 타지역 부대가 속속 도착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작전 직전에 경찰청장인 강희락이 “위험하니까 작전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이미 인력과 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였다. 충분히 작전 가능하다는 현장 판단이 있었다. 조현오는 청와대를 설득했다. 그리고 강희락에게 다시 작전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지방경찰청장이 경찰청장 지시를 무시한 것은 항명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원인 심상정은 “이게 어느 나라 위계질서냐”며 “강희락 경찰청장이 투입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현오 청장이 찍어 눌러서 1시간 만에 지시를 번복하게 한 것 아니냐”고 질책했다. 조현오는 이 대목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고했다.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 논리라면 부당한 지시는 언제나 따라야 하느냐? 공무원 세계에서는 상사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그 상급자에게 이의신청이란 것을 할 수가 있다.”


8월 5일 경찰은 도장2공장을 제외하고 모두 장악했다. 당시 정보과 형사들은 노동자와 접촉할 때마다 경찰이 인화물질이 가장 많은 도장2공장 안에 들어오는 일은 없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사태가 벌어지면 어느 문으로 나가면 된다는 말도 전했다. 8월 5일 조현오는 6일까지 나오면 선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물리적,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노조는 8월 6일 사측과 합의했다.


조현오는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그리고 2010년 8월 23일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2009년 쌍용차 사태 해결로 10만여 명의 생존권을 지켜내고 국가경제의 피해를 최소화시킨 데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쌍용차 진압작전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이 전화로 찬사를 보냈다. 조현오는 칭찬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에 담긴 사회적 의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으로 모든 완성차 업체 임금은 한 번에 동결됐다. 완성차 업체 노동자들은 파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금속노조 전체 판은 그렇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창원 대림자동차 노조가 무너졌다. 2010년 2월 경주에 있는 발레오만도 노조도 와해했다. 발레오만도는 직원 923명 중 621명이 조합원이었고 비정규직이 없다는 게 자랑이었던 업체였다. 그런데 취임 때부터 위기감을 조장하던 새 대표이사는 느닷없이 직장폐쇄를 강행했다. 노동조합 사무실도 용역을 투입해 출입을 막았다. 경주지역 금속노조는 연대파업을 벌였으나 노조 핵심 간부들은 바로 구속됐다.


2010년 6월 구미 KEC 여성 기숙사에 용역이 투입된다. 경주 발레오만도에 투입됐던 그 용역이었다. 그해 8월 대구 상신브레이크, 2011년 3월 광주 금호타이어까지 노동조합 파괴는 이어진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노동부도 뒷짐을 지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5월 충남 아산에 있는 유성기업 차례가 됐다. 2012년 7월에는 안산 SJM 노조 농성장에 용역 깡패들이 들어왔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은 ‘야만의 새벽’이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같은 달 퇴직한 조현오는 <도전과 혁신>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한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1층이었다. 책에서 조현오는 여전히 업적 중 하나로 쌍용차 진압작전을 내세웠다. 출판기념회 현장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화환이 가득했다. ‘부산고등학교’ 동문이 보낸 화환과 MB 정부 시절 또 다른 공적이었던 어청수가 보낸 화환이 눈에 띄었다. 필자는 잠시 둘러보고는 서울시청까지 걸어갔다.


서울시청 근처 덕수궁 앞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설치한 시위 천막이 눈에 띄었다.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더불어 정리해고 문제를 외치고 있었다. 길가에 주차한 경찰버스가 그 앞을 가렸다. 그날 밤 SNS에는 눈 한쪽이 멍든 조현오가 표지인 책 <도전과 혁신> 사진이 욕설과 함께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경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왜 늘 국민과 부딪힐까? 연재 시작에 밝혔듯이 그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도전과 혁신> 책에는 없는 내용이다.


조현오는 1955년생이다. 전쟁 중에 몸을 다친 군인을 ‘상이군인’이라고 한다. 전쟁 후 상이군인은 국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몇몇은 일반 서민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조현오 부모 가게에도 상이군인이 찾아와 물건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그때는 조현오가 3살이 채 안 됐는데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였다. 조현오는 상이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사지군인 씨팔, 자지야, 보지야.”



그러자 어머니는 막내아들 입을 황급히 틀어막고 방문을 닫았다. 60년대는 모두 가난했다. 조현오는 형편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다가 2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돈이 없어 산을 넘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1969년에 개봉한 <천년호>를 단체관람했다. 하얀 소복을 입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 날아다녔다. 영화가 끝나 집으로 갈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각이었다. 인적 없는 산길 숲 속에는 영화처럼 연못도 있었고 달빛도 비쳤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진짜 머리를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천년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생 조현오는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천년호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리고 천년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에 칭칭 감겨 도는 비닐이었다.


조현오는 무인 기질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어머니 교육까지 더해졌다. 어머니는 조현오가 어릴 적부터 “남자는 용맹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어려운 시절 조현오 모친은 배급을 받으려 줄을 설 때 새치기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조현오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은 ‘정직’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진압 작전이 훌륭했다며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받았는데, 사회적 상황이 변했다고 잘못이 되는 것을 조현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청문회 불참으로 ‘불똥’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현오는 천년호도 피하지 않던 청소년이었다.


조현오는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문재인 등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문재인은 고소취하 조건으로 ‘헛소리’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했다. 단순한 조현오는 사태를 크게 만들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임경묵에게 들은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볼 수는 없다 판단한 것이다. 조현오는 결국 사자 명예훼손 건으로 기소됐고 재판부는 조현오가 지어내서 한 말이라고 판단했다. 세상은 조현오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던 조현오는 거짓말쟁이로 전락한 상황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2015년 5월 건설업자 정모 씨에게 5000만 원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고 이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그를 버티게 했던 ‘청렴’이라는 한 축마저 무너질 판이다.



그럼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조현오는 눈물이 지닌 의미를 ‘굴복’과 ‘나약함’이라고 답하곤 했다. 한참 있다가 우는 것을 싫어하지만 울어본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물었다. 조현오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첫사랑 차였을 때. 자기는 학교 못 가고, 나는 좋은 데 가니까 여자가 안 만난다고.”

“영화 ‘닥터 지바고’ 마지막 장면에서.”

“내 첫 경찰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에 직원들과 너무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


경찰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경찰 이야기로 돌아갔다. ‘치안상황’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요즘 사람들은 상이군인이 행패를 부리던 상황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1990년대 시절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불과 20년 전 상황인데도 말이다. 한국 치안이 매우 안정된 편인 것은 경찰 노력 덕이라고 했다. 아래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경찰 후배들을 위해서 ‘전과자’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출세욕을 위해 산 것처럼 보이는 그는 ‘나는 지휘관으로서 상황마다 판단을 잘해야 한다’는 다짐을 거듭했다고 했다. 조현오가 이런 생각을 한 계기 중 하나는 쌍용자동차 진압작전이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터는 23만여 평이다. 8월 4~5일 진압작전을 개시할 때 그는 헬기에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도장1공장과 조립공장 옥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을 전개했다. 조현오는 상공에서 무전으로 작전에 동원된 모든 부대를 지휘했다. 조현오는 아래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메곤 했다.


“헬기 위에서 내 명령 하나에 위험한 작전구역으로 들어가는 경찰대원들을 봤을 때….” 


(끝)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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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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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정치 사회발전의 희망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자는 때론

 너무 낯가림이 심하다

 

 나도 그 출신이다

 

 -<이상익의 시적 사유>(도서출판 해딴에) 중에서

 

우리는 사회 진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을 합니다. 집회와 시위도 그 방법 중 하나이겠지요. 이런 운동은 왜 하는 걸까요? 우리의 생각과 요구를 널리 알리고,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가려내 하나씩 배제시키는 식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은 더 선명하고 더 전투적인 사람이 되겠지만,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은 고립되는 수순으로 가게 되겠죠.


이상익의 시적 사유에서도 '너무 낯가림이 심하다'고 자탄했듯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아예 말도 섞지 않겠다는 태도는 진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진보가 욕하는 대상과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 10월 <한겨레> 신문이 교육부의 국정교과서 광고를 실은 것을 두고 진보를 자처하는 분들이 극단적인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며 그런 답답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디어오늘>에 '한겨레가 기사를 엿 바꿔 먹었나'라는 글을 써보내기도 했습니다.


지난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렸던 민중총궐기 집회를 두고 언론 보도도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수언론'은 시위대의 폭력만 부각시키고, '진보언론'은 경찰의 폭력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쪽의 정보만 접한 국민도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느 편이냐'며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죠. 이 또한 '가려내고 배제하기'밖에 안 됩니다.


피플파워 12월호 표지.


이런 상황에서 지난 11월 19일 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김영언 독자의 '제3자 입장에서 본 민중총궐기'라는 기고문은 참 반가운 글이었습니다. 그는 "폭력 시위 논쟁은 과잉 진압 논쟁의 물타기로 보인다"고 전제하면서도 "시대가 변한다면 방법론도 고민을 좀 했으면 한다"고 집회 주최측에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굳이 청와대에 가지 않아도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하고 시작한 집회 시위인지 궁금하다"며 글을 맺었습니다.


<미디어오늘> 조윤호 기자는 16일 '"청와대로 가자"구호로는 안 된다'는 글을 썼습니다. 조 기자는 "집회가 고립된 광화문에서 벌어지면, 제3자가 보기에 집회는 '남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14일 민중총궐기는 공권력의 과잉 진압과 함께 집회 전략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고민거리를 던졌다"고 화두를 던졌습니다.


저는 우리 진보가 좀 더 넓은 가슴으로 이분들이 던진 화두를 고민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남석형 기자가 11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는 '경찰청 사람들'은 경찰관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해소해보자는 의미가 큽니다. 이번호에 소개되는 도창현 경남117센터 팀장도 거칠고 험한 정권의 하수인이 아니라 "학교폭력에 상처받은 아이들 마음을 진정으로 어루만지려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따뜻한 경찰관입니다.


<피플파워>는 특정한 정치지향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인으로 소개되는 서각가 김덕진 씨는 현재 새누리당 경남도당 대외협력위원을 맡고 있는 분입니다. 향우로 소개되는 전해철 국회의원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입니다. 정성인이 만난 사람 김석봉 씨는 전 녹색당 대표 출신입니다. 이렇듯 각기 다른 정치 지향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찾아 담고자 합니다. 진보와 보수는 어느 한쪽을 배격하고 일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진화 발전해야 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호에서는 김태훈 소장의 '도시와 스토리텔링'을 꼭 일독하길 권합니다. 지역의 향토기업, 토착기업이 지역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글입니다. 그런 점에서 <피플파워>가 벌써 열한 번째 연속하여 소개하고 있는 아너소사이어티 기업인들이 더욱 귀해 보입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월간 피플파워 12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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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과 김정배 두 고려대 총장의 다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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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과 김정배. 둘 다 고려대 총장 출신이다. 김준엽은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제9대 총장이었고, 김정배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제14대 총장이었다.


나이는 김준엽이 20년이나 앞서지만, 둘은 고려대 사학과에서 스승과 제자로, 또한 동료 교수로 함께 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총장 이후 둘의 삶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김준엽은 총장 재임 시절 데모 학생들을 제적하라는 정권의 압력을 거절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강제퇴임하게 된다. 이에 고려대 학생들은 “총장을 지키자”며 한 달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광복군 시절의 김준엽(가운데). 오른쪽은 장준하.


1987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에게 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딱 부러지게 거절한다.


“내가 만일 총리가 된다면 야당에게 투표한 66% 국민의 뜻에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총리와 대통령의 의견이 다르면 대통령의 뜻에 따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도 다시 간청하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교육자다. 우리 제자들이 민주화를 외치다가 많이 잡혀갔고, 고문을 당해 죽기도 했고, 성고문까지 당했는데, 교육자라는 교수가 어떻게 이런 정권에 들어가 협력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날린다.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뛰어들어 굽실굽실하는 한심스러운 풍토를 고쳐야 한다. 나 하나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이 벼슬자리를 고사한 일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그가 광복군 시절 모시고 있던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직하면서 정부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사양하고 중국에 공부하러 가버렸다. 1960년 4·19혁명 후 장면 내각도 그에게 주일대사 자리를 제안했으나 “이 양반들아, 나 대사시킬 생각 말고 쿠데타나 막아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결국 그의 예언대로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김종필이 제안한 공화당 사무총장직을 거절했고, 1974년에는 통일원 장관직도 고사했다. 심지어 그는 고려대에서 쫓겨난 후 다른 대학에서 출강 요청과 연구실 제공 제의가 잇따랐지만 모두 거절했다.“총장까지 지낸 내가 타교에 가면 고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김준엽은 또 “대한민국의 법통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고 줄기차게 말씀해 온 분이다. 박정희 정권이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부분을 삭제하고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를 추가한 데 대해 “헌정사상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탄식했던 분이다.1987년 6월항쟁 후 임시정부 법통이 헌법에 되살아나자 가장 기뻐했던 사람도 그분이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 @연합뉴스 사진


이런 김준엽이 김정배의 스승이었다. 스승이 2011년 타계했을 때 김정배는 후학을 대표하여 이런 조사를 읊었다.


“끊임없이 고위 관리 제의가 들어와도 사양하며 학문 세계를 지킨 인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 두고두고 후학들과 이 땅의 국민들이 본받아야 할 표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랬던 김정배가 지금 박근혜 정부의 국사편찬위원장 자리에 앉아 국정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있다.


그렇게 김준엽은 겨레의 사표(師表)가 되었지만, 김정배는 권력의 주구(走狗)가 되었다.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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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이 서울에서만 진행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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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들에게 참으로 묘한 말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 이외의 지역은 모두 ‘지방’이라 통칭하는 버릇이다. 부산에 출장을 가면서 ‘지방 출장 간다’ 하고, 창원에 와서 현지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전화가 걸려오면 ‘응, 지금 지방에 와 있어’라고 대답한다.


서울도 수많은 지역 중 하나일 뿐인데, 그들에겐 대한민국이 ‘서울+지방’으로만 보이는 걸까. 아니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고, 그 외에는 그냥 이름 없는 ‘부속 도서’ 쯤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서운하다.


민중의 힘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바꾼 사건은 모두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시작됐다. 1948년 제주 4·3항쟁부터 1960년 이승만 독재에 맞서 일어선 2·28 대구항쟁이 그랬고,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 마산의거가 전국에 확산됨으로써 4·19혁명과 이승만 하야로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변화는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부른 부마민주항쟁도 그러했고, 80년 광주의 통한을 바탕으로 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민주항쟁도 전국 각 지역의 열정적인 투쟁이 없었다면 2008년 광화문 촛불시위처럼 사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 87년 6월항쟁의 역사는 그동안 서울 중심 시각에서 기록된 게 많으므로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서울과 전국 주요도시에서 6월 10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후 나흘간 계속되던 명동성당 농성이 14일 밤 해산되면서 15일부터 서울의 시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경남 진주에서 전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6·10대회는 마산을 경남의 거점으로 삼아 연합시위로 치렀지만, 이후 진주에서 독자적인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대학생들이 15일 1만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시위를 벌여 시내 거리를 완전 장악해버렸다. 마산에 집결해 있던 경찰은 허를 찔린 격이 됐다. 급히 3개 중대를 진주로 급파했으나 진압은 역부족이었다. 그날 마산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15일 진주 시위에 놀란 경찰은 16일 8개 중대를 증원해 무차별 폭력 진압에 나섰다. 이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은 파출소를 습격해 불태우는 등 민중항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7일 기어이 일이 터졌다. 시위대가 경전선 철도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LPG 운반트럭 2대를 탈취해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1987년 6월 18일자


이런 지역도시의 투쟁은 18일자 전국 주요언론은 물론이고 <워싱턴포스트>(WP)와 <타임> 등 외신에도 대서특필된다.


WP는 ‘S. Korea Protests Grow In Provincial Cities’(지방도시 시위 증폭)라는 제목을 뽑았고, 조선일보 1면 머리는 ‘남해고속도 3시간 장악’, 사회면 머리는 ‘지방시위 갈수록 격렬’이었다. 또 <타임>지는 인포그래픽으로 시위 발생 지역을 표시했는데, 진주·마산·부산·울산·포항·대구·목포·광주·전주·군산·대전·청주·수원·원주·춘천·인천·서울에 선명한 폭발 이미지를 그려 넣었다.


이런 지역의 투쟁으로 6월항쟁은 다시 고양되었고 6·26대행진으로 최고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타임지 6월 18일자. 한국의 시위.


그래서 신영복 선생도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요즘 집회와 시위는 모두 서울, 그 중에서도 광화문으로만 집중되고 있어서다. 그럴 때면 경찰도 모두 서울로 가버려 그 외 지역은 치안공백 상태가 된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서울 집중 현상은 더 두드러졌다. 예전에도 ‘상경투쟁’은 있었지만 요즘만큼은 아니었다. 교통이 좋아져서일까. 시위에도 서울 빨대효과가 작용해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라도 이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서울이 곧 대한민국이고,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만 벌이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미디어오늘 12월 2일자 [바심마당] 코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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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선생의 별명이 '흰머리 소년'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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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선생의 별명은 ‘흰머리 소년’이다. 머리카락이 일찍 세기도 했지만, 때 묻지 않은 소년의 감성을 나이 들어서도 그대로 갖고 있다는 데 방점이 찍힌 별명이다. 워낙 오래되어 남들은 이미 포기했거나 당연시해버린 관행도 흰머리 소년에겐 여전히 그냥 놔둘 수 없는 문제다. 그럴 땐 ‘누가 흰머리 소년 아니랄까봐’ 하는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전혀 굴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10년 전 마산의 한 고등학교에 발령받았는데, 학생과 교사의 급식이 다르더라는 것이다. 같은 급식비를 내면서도 학생이 먹는 반찬은 서너 가지인데, 교사는 예닐곱 가지나 되었다. 게다가 식당에 칸막이를 치고 따로 먹고 있었다. 동료 교사에게 물어보니 ‘처음부터 그랬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단다.


흰머리 소년은 그때부터 보름 동안 혼자서 학생 줄에 서서 밥을 타 먹었다. 무언의 1인 시위를 한 셈이다. 그러면 적어도 젊은 교사 몇 명쯤은 동참해줄 줄 알았단다. 그런데 단 한 명도 그런 교사가 없더라고 했다.


김용택 선생.


그는 결국 내가 재직 중인 신문에 기고를 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 학교는 닷새 뒤 여론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차별급식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문제는 바로잡혔지만, 김용택 선생은 동료교사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미운털을 마다하지 않고 불합리에 대항하는 사람. 바뀌지 않는 교육현실이 답답하더라도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바꾸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 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 - 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 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에 보낸 추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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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재 농협중앙회장 후보의 반보장각(半步長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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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장각(半步長脚). 긴 다리의 반 걸음. 튼튼하고 긴 다리로 반 걸음만 전진해도 큰 변화를 불러온다는 말이다.


김순재 전 창원 동읍농협 조합장이 농협중앙회장에 출마하면서 밝힌 각오다. 그는 "왜란(倭亂-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고도 대비하지 않았던 조선이 호란(胡亂-병자호란)을 다시 겪었듯이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또다른 어려움들이 있는지 살피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그의 소책자 <반보장각>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농어민신문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한 농업경영인이 전국각지 농협마다 보낸 소책자 ‘반보장각(긴 다리의 반걸음)’이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농민운동가 출신의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전 조합장의 농협개혁 의지를 피력한 소책자다.


농협중앙회장 선거가 조합장 선거보다 더 폐쇄적으로 치러져 정책 및 후보 검증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우려 속에 접한 이 책자는 농협개혁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베스트셀러’ 못지않은 ‘가뭄 속 단비’로 다가간다."


기사 모두 보기=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전 조합장의 반보장각




그런데 최소한 조합장 직선제로 바뀌길 기대했던 농협중앙회장 선거는 이번에도 조합장들이 선출한 대의원 간선제로 치러지는 모양이다. 이것부터 개혁해야 할 과제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2016년 1월 12일 치러지는 선거는 조합원 약 235만 명이 선출한 조합장 1142명 중 뽑힌 대의원 291명이 투표권을 행사한다. 대의원들은 선거 당일 농협중앙회 강당에 모여 후보자 정견 발표를 듣고 투표한다.


과연 농협 개혁이 가능할지는 이번 투표에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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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픈 직업이 뭐지? 스스로 찾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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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진로체험 활동 (1) 

재미있고 자유롭게 직업탐색을 


두산중공업과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가 창원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중학생들을 상대로 모두 열 차례에 걸쳐 진로체험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11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한백빌딩 3층 강당에서 지역아동센터 학생과 선생님 그리고 두산중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마이 드림(M. Y. Dream, Make Your Dream) 청소년 진로체험단 발대식'을 치른 이래 10월 20일 현재까지 모두 여덟 차례 활동을 펼쳤습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그동안 여러 가지 직업 세계를 알아보고 어떤 직업이 자기한테 좋은지 현장에서 체험해 보는 한편 해당 분야 전문가 특강 등을 통해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자기 힘으로 설계해보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지금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①탐색 ②체험 ③설계 셋으로 전체 과정을 나눠 한 달에 한 차례씩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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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진로체험단은 여태까지 탐색 과정 네 차례, 체험 과정 세 차례 했으며 진로 설계 과정도 한 차례 체험했습니다. 남은 두 차례 가운데 11월 14일에는 여태 체험한 직업을 자기가 찍은 동영상으로 재구성해 보는 한편, 갖고자 하는 직업을 정하고 그에 맞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계해 봅니다. 


또 12월 12일에는 그동안 아홉 차례 펼쳐온 활동을 워크북과 스토리텔링 또는 동영상을 통해 발표하는 자리가 마련됩니다. 아이들의 진로 설계도 프로그램에 포함될 것입니다.



진로탐색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좋다면서 권하는 그런 직업이 아니라 자기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직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찾아내 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제사회공유가치창출연구원(ICSV)과 협업을 통해 여러 직업의 세계를 알아보는 동영상(www.isharevalue.org)들을 무료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체험 활동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서도 ICSV의 직업 동영상을 여럿 볼 수 있었습니다. 



플로리스트, 언더그라운드 래퍼, 해커, 동물학대 고발·구조 담당자, 게임 기획자 등 지역에서 마주하기 어려운 직업인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흥미를 잃지 않도록 구성이 재미있게 돼 있었습니다. 


또 직업이 갖는 여러 효과, 이를테면 생계 유지 또는 재산 형성, 자아 실현, 세상과 소통·교류하는 창구 등을 알아보고 자기한테는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 가늠해 볼 수 있도록 양산 개운중 서진희 상담교사를 초청해 함께 얘기를 나누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막연하기만 했던 직업의 의미와 구실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됐습니다. 



1회차에는 참가 학생들끼리 서로 좀더 친해지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자는 취지로 지역 문화공연기업 '어처구니'를 초청해 마산 우리누리청소년문화센터 공연장에서 난타 체험도 했습니다.제대로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처음인데도 어렵지 않게 손발을 척척 맞춰 감탄스러웠습니다. 



3회차에서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준 두산중공업을 찾아갔습니다. 바닷물로 민물을 만드는 설비, 원자력발전에 필요한 터빈 기계, 규모가 엄청난 플랜트 등 두산중공업이 취급하는 제품이 생산되는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또 현장직으로 들어와 이제 경영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한 임원으로부터 성공하려면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듣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생산현장은 보안 때문에 사진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프로그램의 모든 과정은 5∼6명씩 팀별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마련됐으며 자발성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도록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습니다. 통제나 지시 같은 일방통행은 일절 없이 무엇이든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마주하면서 함께 얘기하고 생각하면서 결정해 나갔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꾸었던 꿈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서로 발표하게 해 긴장도를 유지하는 한편 '아는 직업 모두 써 보기' 게임이나 세상 직업의 다양한 면모를 재구성한 '직업 도전! 골든벨'과 '미션'을 군데군데 배치해 1~4회차 탐색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진로 탐색을 거쳐서 학생들에게 최대 여섯 가지까지 한 번 체험해 보고 싶은 직업을 적어내게 한 다음 희망직업을 추렸더니 모두 열하나였습니다. 요리사, 네일아티스트, 가수(작곡가), 동물사육사, 바리스타, 마술사, 제빵사, 헤어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심리상담사, 경찰. 


내가 어떤 직업을 희망하는지 서로 얘기하는 모습.


'청소년 진로체험단'의 5∼7회차 활동은 이들 희망직업에 대한 현장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내년에 전면 시행되는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앞두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마련됐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업 모두 적어보기 등 미션 수행을 하고 있는 모습.


두산중공업은 '청년에너지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지역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진로체험단 활동을 앞으로는 청년에너지프로젝트의 핵심으로 삼아 내용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입니다. 


두산중공업의 청년에너지프로젝트는 ‘지역사회 미래성장 동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청사진을 내놓겠다’는 사회공헌 모토를 따라 어려운 이웃에 대한 단순한 금전·물질적 뒷받침을 넘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기초역량을 단단히하고 정서를 풍성하게 가꾸는 데도 신경쓰고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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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국적 문제와 조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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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출신 재일동포들을 초청하는 방안을 알아보려고 올 가을 일본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저는 일본 정부와 사회의 차별·멸시에 맞서고 견디며 64년을 살아온 재일동포 2세 이상재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적이 한국이었고,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우리말을 익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른이 돼서 머리와 입이 굳어버린 조건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한반도 도래인(渡來人) 공부도 했습니다. 재일동포 사학자 박종명 지도 아래 세 사람이 교토도래인연구회를 무어 연구했고 그 결과로 <교토 속의 조선(京都の なかの 朝鮮)>(1999)이 단행본으로 나왔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은 이 책을 보고 뱀무덤을 찾아가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뱀무덤은 교토를 개척한 신라계 도래인(진하승)의 것으로 알려진 커다란 고분인데요, 요즘 들어 유홍준 저작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당시 이 씨는 학자가 아니었고 그냥 회사원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상재 씨는 한국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럴 수 있었지 싶습니다. 이 씨는 어린 시절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비롯된 바 또한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이는 교토조선제2초급학교와 교토조선중급학교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자기 모교인데, 갈수록 쪼그라들어 이제는 전교생이 저마다 60명 40명 수준이라 했습니다. 차별이 심해져서 줄었느냐 물었더니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교토조선제2초급학교 교정에서. 가운데가 김영주 교장, 오른쪽이 이상재 선생.


조선학교는 그냥 버림받은 존재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버렸습니다. 식민 지배와 전쟁 동원으로 조선 사람을 일본으로 끌고 와서 재일동포를 만들어 낸 원죄가 있는 일본인데도 그랬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다른 일반 학교에는 다하는 무상의무교육이나 무상급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학교 운영비나 인건비 지원도 거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학교는 학부모 부담이 엄청 많습니다. 선생님은 월급을 제때 못 받고, 학부모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청소 같은 자원봉사를 해야 합니다. 


조선학교는 남과 북의 조국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한때 도움을 줬던 북한은 자기 손발(조총련)조차 망가졌으니 이제 다른 말이 더 필요 없습니다. 가난해서 자식을 버린 셈이지요. 


그런데 나름 산다는 남한 정부도 똑같거나 더합니다. 무신경·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거기에는 조선학교를 북한 것으로 보는 잘못된 눈길이 개입돼 있기도 합니다. 


교토조선제2초급학교 통학버스. 하나는 아버지호, 다른 하나는 어머니호.


심지어 때로는 이런 조선학교들을 위해 '책 보내기 운동'을 벌이는 민간단체에 대해 사찰도 했습니다. 자기 밥은 한 술도 주지 못하겠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이 밥 담아주는 바가지까지 깨버리겠다는 심보입니다. 재일동포가 한국 국적을 유지하든 일본 국적으로 옮겨가든 상관 없다는 태도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일본에서 우리 민족교육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이상재 씨 같은 재일동포는 더이상 나오지 못합니다. 


이상재 씨는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한국 국적을 밝히면 바로 차별과 무시를 받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데 어떻게 숙이고 들어가겠습니까?" 재일동포의 한국 사람 정체성이 무너지면 당연히 일본 귀화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토에 사는 우리가 조선학교를 도와야 하는 핵심입니다. 


조선학교 아이들 그림.'우리'라는 낱말이 가슴 시립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 하나. 재일동포 가운데는 북한 국적이 없습니다. 있은들 뭐가 문제겠습니까만은. 


동포 50만 명 가량에서 80%가 한국(남한) 국적이고 나머지 20%는 조선 국적입니다. 여기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아닙니다. 남쪽에도 북쪽에도 국가가 없던 1947년, 일본이 외국인등록령으로 강제로 우겨넣은 민족 딱지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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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비판의식이 꺾여버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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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제가 수업을 맡고 있던 대학생들에게 이런 과제를 내봤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투표와 집회·시위 등 사회 참여를 꺼리는 까닭에 대해 기획취재를 해보라는 거였습니다.


학생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관련 자료를 찾고, 카카오톡을 이용해 친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하고,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교수와 면담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했더군요.


그 결과 학생들의 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키워드를 정리해보니 '스펙 경쟁' '취업 경쟁' '개인화' '현실 순응' '부모 의존' '인터넷·모바일' 등이었고, '계층 변화'라는 단어도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과거 대학생이 사회변화의 주력이었던 시절과 지금의 대학생은 아예 '계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부 소수만 대학에 진학하던 시절에는 대학생이 한국사회의 인텔리 계층으로서 사회변화를 선도해야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모두가 대학생이 되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은 한층 심화되었고, 초·중·고등학교부터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며 자랐으니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사회 참여?'냐는 진단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보다 부모에 대한 순응과 의존적인 사고가 일반화했고, 인터넷과 모바일의 영향으로 집단보다는 개인으로 사는데 특화한 세대라는 진단도 나왔습니다.


대충 제가 나름대로 짐작한 바와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직접 대학생들의 취재와 그들의 기사를 통해 이런 결과를 접하고 보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비판의식과 참여의식이 사라진 세대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는 비관적인 마음 말입니다.


사실 저도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웠던 세대이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각종 연구동아리나 학습 모임에서 우리가 잘못 배웠던 역사를 깨우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학에서 그런 모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취업에 도움이 되는 모임이나 동아리만 보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그야말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여지마저 잘라버리고, 더더욱 체제순응적인 국민을 길러내겠다는 의도로만 여겨집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이번호 '역사에서 만난 사람-독일 제3제국을 떠받친 음모가 하이드리히'를 읽으니 갑자기 오싹해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어쩌면 나치와 같은 독재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역사에서 만난 사람' 필자는 이런 말도 하더군요. "파시즘은 불경기에 등장한다"는 겁니다. 취업이 어렵고 먹고 살기가 힘들수록 독재자의 허황된 거짓말이 잘 먹힌다는 거죠. 히틀러도 독일은 물론 세계 경제가 공황기일 때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6년 새해에는 이런 불안하고 우울한 시대에도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각계에서 애쓰고 있는 분들을 찾아 나서려 합니다. 그리고 취업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 친구들의 고민에도 더 관심을 갖고 접근해볼까 합니다. 그러는 속에서 이 시대의 언론이, 그리고 <피플파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성찰하겠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피플파워 2016년 1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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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들께 큰절하던 베트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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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활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경남도민일보와 해딴에(문화사업을 전담하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는 올해도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습니다. 고등학생들과 함께 ‘고장 사랑 지역 역사 탐방’과 ‘우리강지킴이 청소년 기자단’도 하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토요 동구밖 교실-역사탐방/생태체험’도 했습니다. 


어른들을 상대로 전국 명소를 찾아다니는 생태·역사기행도 진행을 했고, 경남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경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해서 ‘경남 체류 외국인 지역 풍물기행’도 맡아 했습니다. 


올 한 해 벌인 이런 활동이 모두 저마다 나름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인상 깊었던 장면은 베트남 사람들과 의령으로 탐방 나갔을 때였습니다. 


의령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볼거리가 별로 없는 지역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는 이날 베트남 사람들 나들이에서도 적실하게 확인이 됐습니다. 


이병철 생가 앞에서.


이병철 생가 안채에서.

10월 15일 의령을 찾았는데 먼저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생가를 둘러본 다음 백산 안희제 선생(독립운동가) 생가~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의령천 잣나무 숲길~충익사~정암진 일대를 차례로 탐방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안채에서.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사랑채에서


하루 나들이하기에 딱 좋은 일정이었는데요, 이날 베트남 사람들 참 잘 놀더군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기 위해 북을 걸었던 나무 현고수(懸鼓樹)나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 같은 데서는 강강수월해 하듯 나무를 감싸고 돌면서 노래를 불렀고 너른 잔디밭을 만나면 퍼질러 앉거나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생가 앞 은행나무에서

곽재우 생가 안채 마당에서


더불어 제가 이런저런 설명을 곁들이면 그 또한 놓치지 않고 귀기울여 들을 줄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즐겁게 지내다가 의령천을 따라 양쪽으로 잣나무가 늘어서 있는 둑길을 걷고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충익사 일대에 다다랐습니다. 


여기는 나무가 좋습니다. 전시관도 있고 사당도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잔디 깔린 뜰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간단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동행한 베트남 사람 가운데 우리 말을 할 줄 아는 한 사람이 통역을 해줬습니다. 


충익사.


“우리나라도 베트남처럼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 미국의 침략을 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중국 몽골 일본 이렇게 침략을 당했습니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을 때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였습니다. 


일본은 앞서 500년 전에도 우리나라로 쳐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데요, 마을은 불타고 나라는 엉망이 되고 백성들은 마음 붙일 데 없이 죽어나가고 임금은 도망가고 하는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워져 있을 때 자기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와 지역을 위해 목숨 걸고 일어나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서 생가를 둘러봤던 곽재우 장군이 제일 대장이었고 그 아래 열일곱 장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암진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들을 의병이라 합니다. 곽재우는 의병 대장이었지요. 당시 나라 이름이 조선이었는데, 이런 의병들 덕분에 나라가 일곱 해 동안 난리를 겪었는데도 망하지 않고 결국에는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가 충익사인데요, 이런 의병들 장한 뜻을 기리면서 제사지내는 장소입니다. 1978년 12월 완공을 할 때 의령 곳곳에서 좋은 나무 멋진 나무 커다란 나무들을 골라 가져와 여기 뜰에다 심었습니다. 그래서 충익사 뜰이 아주 그럴 듯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떠들지는 마시고요, 천천히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 


정암철교. 충익사 들른 다음 이리로 옮겨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충의각 있는 데로 걸음을 옮겨갔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둘러보고 나오면 충의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려고 말씀입니다. 대충 이렇게요. 


“만들어진 지는 100년 정도 됐습니다.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끼지 짜 맞춰서 세워놓은 건물입니다. 겉모습은 옛날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사지내러 갈 때 널을 태워가는 상여를 본땄습니다. 


충익사에서 모시는 열여덟 대장 이름판이 안에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분들 죽고 나서 좋은 세상 가시라고 그런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할 내용을 머리로 정리해 보면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함께 온 베트남 여자 몇몇이 충익사 건물 앞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심상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씩 짝지어 서더니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너부죽하게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만 하지 않고 두 번 거푸 큰절을 올렸습니다. 또 일어서서는 가까이 다가가 탁자에 놓인 향을 두어 가닥 집어 불을 붙이더니 향로에 꽂고는 손을 흔들어 향기가 퍼지게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태까지 여기 의령 충익사를 자주 찾아왔었지만 저 또한 저렇게 절을 한 적이 없고, 우리나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충익사 열여덟 대장한테 큰절을 올리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이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말씀입니다. 한둘도 아니고 대여섯이 큰절을 올리고 향까지 살랐습니다. 방명록에다 자기 이름을 적어넣은 다음 ‘고맙습니다’, 하고 소감까지 밝혔습니다. 


뭉클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그래 뒤늦게 뒤따라가 그이들 하는 모습을 사진찍었습니다. 표정도 보니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사뭇 진지했습니다. 그이들한테 왜 이렇게 큰절을 하고 향을 불살라 바쳤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네 조국 베트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침략에 시달렸다는 데서 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요? 아니면 곽재우 장군 등등이 그렇게 일본을 물리쳐준 덕분에 오늘날 자기네가 여기 와서 일하고 돈 벌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이들 감수성만큼은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서슴없이 큰절을 하고 향을 사르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2015년 마지막 날을 맞아 문득 떠오르는, 아주 인상 깊은 베트남 사람들의 큰절이었습니다. 


정암진에서


어쨌거나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여기 계시는 동안 아프거나 다치지 않기를 빕니다. 몸 성하게 여러분 나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 가운데 이병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리고 백산 안희제 선생도 이병철과 마찬가지로 자산가였습니다. 이병철이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이라면 안희제는 우리나라에서 돈을 가장 훌륭하게 쓴 사람입니다. 나라의 독립과 후세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가진 돈을 썼으니까요. 


여기 한국에 계시는 동안에는 돈 많이 버시고요, 베트남에 돌아가서는 더 많이 돈 벌고 또 훌륭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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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 기러기 오리만 구분할 줄 알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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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동구밖교실 생태체험 

  부산 명지철새탐조대~다대포해수욕장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2015년 마지막 생태체험은 11월 21일 느티나무·어울림·회원한솔·샘동네·옹달샘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부산에서 함께했습니다. 11월이면 겨울철새가 이미 우리나라에 적지 않게 날아와 있는 때입니다. 


부산 낙동강 하구는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입니다. 부산 남명초등학교 앞에 있는 명지철새탐조대는 겨울철새들을 가까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소입니다. 을숙도가 더 많이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거기 에코센터에서 보는 철새는 여기 탐조대보다 많지 않습니다. 


기본 설명은 버스에서 먼저 했습니다. 우리나라 철새는 종류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세세하게 알려고 하면 머리만 터지기 십상입니다. 철새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크게 오리, 기러기, 고니 이렇게만 구분해 알아도 된답니다. 



오리가 가장 작고 고니가 가장 크며 기러기는 중간이어서 거위랑 비슷합니다. 오리는 파닥파닥 앙증맞게 날고 고니는 너울너울 여유롭게 날며 기러기는 날 때 'V' 등 모양을 이룬답니다. 


도요새와 물떼새 무리도 있는데 대체로 다들 오리보다 작습니다. 대신 도요새는 다리가 긴 편이고 물떼새는 짧은 편이지요. 


고니라 하면 아는 사람이 적지만 백조라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백조’는 고니의 일본식 이름입니다. 고니는 세계적으로 2만~3만 마리밖에 안 되는 멸종위기종인데요 낙동강 하구를 비롯해 창원 주남저수지와 창녕 우포늪(소벌) 등지에서 20~30%에 해당하는 5000마리 안팎이 겨울을 납니다. 


그런데 같은 고니라도 일본에서는 사람을 따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피해다닙니다. 일본 사람은 고니한테 먹이를 주지만 한국 사람은 돌을 던져서 날도록 해놓고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상식을 익힌 아이들에게 명지철새탐조대는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미션지를 받아든 아이들은 설명글과 안내판을 찾아 뛰어다니며 해답을 찾습니다. 아이들 웃는 입술에는 즐거움이 묻어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미션 문제를 다 풀고는 모였습니다. 그에 따라 1000원짜리 두 장이 든 '쥐꼬리 장학금'을 건네고는 본격 철새 보기에 들어갔습니다. 




망원경으로 철새 모습을 생생하게 보는 아이들은 이제 맨눈으로도 오리와 기러기와 고니 정도는 구분할 줄 압니다. 


"저어기 고니 같아 보이는데 색깔이 좀 작고 거무스름해요." "몇 마리가 모여 있지? 어린 고니들이야. 고니는 어릴 때는 잿빛이다가 자라면서 하얀색으로 바뀌거든." 



"나무막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꼼짝 않는 새도 있어요." "미션 문제에도 나왔었지? 황조롱이란다. 가만 있다가 먹이가 눈에 띄면 쏜살같이 날아간단다." 


이어 다대포해수욕장으로 옮겨가 점심을 먹고는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바람이 자고 하늘이 맑고 날까지 푸근했습니다. 아이들이 갯가를 따라서 뛰어다니며 놀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몇몇은 데크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며 바닷물 속에서 게와 조개를 잡았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너르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모래를 파내고 쌓으며 놀았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1시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2015년 토요 동구밖 교실-생태체험도 1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두산중공업과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가 함께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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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중앙회장 후보 김순재 숨은 얘기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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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협동조합 중앙회 회장 선거가 1월 12일(화) 치러지는 모양입니다. 여기 등록한 후보 여섯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김순재 창원 동읍농협 전직 조합장입니다. 


2009년 동읍농협 조합장에 당선됐는데, 2015년 있었던 전국 최초 조합장 동시 선거에는 나서지 않았습니다. 출마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까닭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제가 대표로 있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에다 단감 홍보 블로거 팸투어를 두어 차례 맡긴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묻지는 않고 이래저래 알아보니 농협중앙회 회장 출마를 위해 동읍농협 조합장 재선에 나서지 않았다더군요. 이 또한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현직 조합장도 중앙회장 선거에 나설 수 있고 그런 경우가 오히려 득이 된다고 들었으니까요) ‘김순재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한국농어민신문 사진.


그이는 이번 출마를 위해 그동안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전국 곳곳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만나 오래 토론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대부분 사람들 눈에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공룡’으로 비치는 농협 개혁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주장하고 설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농민이 아니기에 농협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래서 그이 주장과 설명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도 판단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김순재에 대해서 두 가지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10년 동안은 농사만 짓고 농민운동은 그 다음에 하겠다.” 


제가 알기로 김순재는 경상대 낙농학과를 나왔고 창원 동읍 판신마을이 고향입니다. 학생운동 시절에도 이러저런 신화나 전설 수준에 이르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20대 젊은 시절 뜨거운 혈기가 있다면 어떻게든 한 번 해 볼 수는 있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3년인가에 김순재한테서 들었던 한 마디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학교 졸업했을 때 ‘앞으로 10년은 아무 말 않고 농사만 짓겠다. 그러고 나서 농민운동을 해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이토록 긴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나름 노동운동 쪽에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중반을 보냈습니다만, 거기서 저를 포함해 그런 생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김순재 조합장이랑 같이 찍은 사진. 저도 조합장님 팬입니다.^^


아마도,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그것도 대학 출신으로 지도자급에 이른 사람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고 실천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지금 현실과는 달라져도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 때 했었습니다. 


학생 출신이 공장에 들어가 작업복을 입는다고 바로 노동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노동자처럼 행동하고 노동자처럼 생각하고 노동자처럼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노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노동자 복장을 한 학생일 따름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노동자가 아닌 학생운동 출신이 노동운동을 이끌고 주도할 경우 그 노동운동이 성공할 개연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운동의 재판일 뿐이지 참된 노동운동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순재는 속된 말로 먹물을 다 빼고 몸과 마음이 모두 농민이 되는 것이 먼저고 운동은 그 다음이라고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농민운동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타산하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습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2010년 1월 동읍농협 조합장 선거에서 순수 농민운동 출신이던 김순재가 모든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출마도 뜻밖이었고 당선도 뜻밖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아니었습니다.


당선되기 전에 김순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조합장 선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기에 얼마나 당선 가능하다고 보시느냐 물었습니다. 그이는 “거의 100%”라고 말했습니다. 출마하기 전에 이미 파악이 다 됐다고 했습니다.


동읍농협 조합원이 얼마나 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김순재는 그 모든 조합원의 현황과 성향을 정통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이가 10년 동안 농사지으며 농민으로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조합원들을 그리 잘 알고 또 나아가 믿음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농민운동을 하기 앞서 먼저 농민이 되겠다…… 농민이 하는 운동이 바로 농민운동이라는 명제에 기본부터 충실한 자세를 저는 여기에서 봅니다. 그리고 이를 이룩하려면 돌아가는 길이 없고 긴 안목으로 꾸준하게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정확한 현실 인식과 성실함도 함께 봅니다. 



우리 사회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쉽습니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 한 순간 벼락치기로 무엇을 이루려 하기보다 자기 삶을 통째로 걸고 일하는 사람이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마 우리나라 농협에도 아쉽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스무 살 시절에 겪은 경험이 평생을 좌우한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린 시절 고생을 한 사람은 서른 마흔이 돼서도 고생을 잘 견디고 이깁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사리 무너지곤 합니다. 


그런 고생을 사서 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김순재 군대 생활이 그러했습니다.(물론 김순재는 자기가 그런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았다고, 나중에 겪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돼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2015년 봄철 어느 날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학 3학년 때 육군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어찌어찌해 받은 보직이 지역 신병 훈련부대 조교였습니다. 


그 때 신병들은 몸에 돈을 지니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는 친가 외가 일가친척 집을 죄다 돌면서 입대 인사를 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받는 돈이 꽤 쏠쏠했습니다. 그렇게 꼬불쳐 들여오는 돈이 몇 만원은 예사고 몇십 만원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다 받아내어 은행 통장에 넣어뒀다가 돌려주는 것이 조교의 임무였다고 합니다.(대한민국에서 국가의 가장 커다란 책임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지키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절대 다수였다고 합니다. 


돈을 꼬불쳐 들어온 신병들한테도 조금 콩고물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통장에 넣지 않고 빼돌리는 일을 당시 대부분 조교들이 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이렇게 빼돌려진 돈은 먹이사슬을 타고 군대 지휘부까지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순재는 신병들 돈을 규정대로 은행에 100% 예치했다고 합니다. 부정에 저항하고 비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하니까 했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부에서 ‘상병’ 김순재를 찾는 전갈이 왔습니다. ‘어디서 이런 빨갱이가 들어왔느냐?’, ‘어떻게 이런 녀석이 조교라는 중책을 맡게 됐느냐?’ 등등 험한 말도 많이 듣고 고초도 꽤 겪었다고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고초가 많은 경우 물리적 폭력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물리적 폭력을 넘어서는 이상이라 했습니다.(구체적인 내용을 듣기는 했지만, 여기서 자세한 서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냥 읽는 분들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한 달 남짓 지난 뒤에 어찌어찌해서 군대 다른 기관에 알려지는 바람에 더이상 커지지 않고 마무리가 됐다고 합니다. 


고초에서 풀려나게 됐을 때 담당 장교가 한 말이 이랬답니다. “야 인마, 어째 이 지경이 되도록 가만있었어?” 그제야 김순재는 비로소 눈물을 왈칵 펑펑 흘리며 말했답니다. “뭐를 어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진정성 그 자체입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물론 고립감·무력감 등등에 시달리면서도 놓지 못했던 진정성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진정성을 갖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진정성을 갖춘 사람은 우리 농협에도 필요하리라고 저는 압니다. 


덧붙임

이번 농협중앙회장 선출에 투표권이 있는 사람이 대의원 290 더하기 현직 중앙회장 1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간선제로 농협 조합원의 뜻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지 미심쩍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읽어주십사 바랍니다. 


그이가 농협 개혁을 전면적·전격적으로 추진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10년은 농사만 짓고 그 다음 10년은 운동도 하다가 최근 5년은 제도권에서 조합장까지 하면서 익힌 현실 감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가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지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김순재 여태 살아온 삶이 말해주는 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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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陵)' '분(墳)' '총(塚)'만 구분할 줄 알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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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동구밖교실 역사탐방 양산 

통도사~북정동고분군(부부총)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2015년 마지막 역사 탐방은 11월 21일 양산으로 떠났습니다. 회원큰별·안영·정·이동·샘바위·자은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곱더니 그마저도 잠깐, 아이들과 함께 찾은 통도사는 부지런히 가을이 지고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저마다 팀을 찾아서 짝을 이루고 수행해야 할 미션 문제를 기다립니다. 아이들은 이제 함께한 1년 동안 역사 탐방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의젓해졌습니다. 무심히 보람없이 흘려보낸 시간 같지만 몸과 마음이 조금씩 자라난 것입니다. 


두산중 자원봉사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통도사에서 미션 수행을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역사에서는 절이 아주 기본이라는 얘기는 미리 해 두었습니다. 종교가 다른 어른들은 불편해 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절을 종교의 산물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없애려면 절과 우리 역사의 관계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절에 있는 모든 것에는 제각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얹힙니다. 제대로 담지도 못하고 관심도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가장 끌리는 부분부터 하나씩 알아가는 방법이 좋습니다. 


스님한테도 묻고

문화해설사 선생님한테도 묻고


통도사에서는 미션이 모두 열 개였는데 이것도 사실 적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 열 문제 가운데 단 한 팀도 맞히지 못한 문제가 둘 있었습니다. 범종루에 소리를 내는 물건이 모두 몇 개 있는지와 삼층석탑에 기단이 몇 개 있는지였습니다. 


범종루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쇠로 만든 범종, 짐승 가죽으로 만든 법고, 나무로 만든 목어, 쇠로 구름 모양을 낸 운판입니다. 이것들이 소리를 내서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범종은 땅 속 존재들, 법고는 가죽이 있는 짐승들, 목어는 물 속 존재들, 운판은 공중에 있는 존재들) 



1년 동안 하다 보니 탑이 몇 층인지쯤은 이제 시시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단이 몇이냐 묻는 문제 앞에서는 '기단이 뭐지?' 하며 고개를 갸웃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쩌면 내가 아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임을 일깨울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훗날 오래 기억되는 것은 맞힌 문제보다는 틀린 문제일지 모릅니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듯이 말씀입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양산시립박물관 옆 북정동 고분군을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부총인데, 거기 유물들은 지금 모두 일본에 넘어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빼앗아간 것입니다. 


북정동고분군에서 기념사진.


2013년 '백년만의 귀환-양산 부부총 특별전'을 열 때 일본에서 유물을 빌려와야 했다는 말에 '우리 것을 왜 빌려 오지?' 그런 표정들입니다. 


무덤을 일컫는 '능(陵)'과 '분(墳)'과 '총(塚)'을 구분할 줄 아는 친구는 별로 없습니다. '능'은 주인이 밝혀져 있고 '총'은 주인을 모르는 무덤이며 '분'은 모든 무덤을 일컫는다는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포만감을 누립니다. 



관심은 사소한 데서 비롯됩니다. 역사 탐방은 역사 관련 지식 주입이 아니라 관심 갖기를 통한 동기 부여가 목적입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소감 쓰기를 했습니다. 마지막이어서 아쉽다는 말이 쏟아졌습니다. 진심이든 아니든 기분 좋고 고마운 일입니다.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전했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아이들에게 작으나마 보람 있었기를…….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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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안 내도 즐길 수 있는 순천만 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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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30일 우리 경남의 글 쓰는 사람 둘이랑 셋이서 순천만을 다녀왔습니다. 아침 8시 창녕을 출발한 일행이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주차장에 가 닿은 때는 10시 30분 어름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왔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입장료가 많이 불편했습니다. 2012년 가을에만 해도 어른 개인 기준으로 2000원이었는데 지금은 7000원을 받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른 요인이 없고 오로지 순천만정원 개장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압니다.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하면서 순천만정원을 열었는데 그 때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입장료도 크게 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올랐는지 저는 모릅니다. 이렇게 크게 올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는지도 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런 대폭 인상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순천만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한테서 크게 인기를 끌게 되자 그에 기대어 특별한 다른 요인이 없는데도 3.5배나 한꺼번에 끌어올렸다고 봅니다.(순천만정원까지 둘러보려면 8000원짜리 입장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순천만정원만 둘러보는 입장권은 아예 있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입장료가 가장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우리 일행은 입장료를 제대로 냈습니다. 2만1000원이었습니다. 


들어가 거닐어 보니까 예전처럼 경치가 크게 감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올 때마다 바로 옆 순천문학관에 들러 오세암의 정채봉관과 무진기행의 김승옥관을 찾았던 그대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순천문학관 들머리. 매표소에서 300m라고 적혀 있습니다. 물론 표는 사지 않아도 됩니다.


순천문학관의 김승옥관.


김승옥관에서 본 삽작 바깥 풍경. 오른쪽이 정채봉관.


순천문학관 가는 길에는 순천시가 따로 조성한 낭트정원도 있습니다. 순천시가 프랑스 도시 낭트랑 자매결연이라는 것을 하면서 기념으로 꾸민 공원입니다. 그 옆에는 다리만 건너면 이어지는 습지가 있는데 편히 쉬면서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낭트정원에서 이어지는 조그만 습지.


낭트정원과 습지를 이어주는 다리.


순천문학관과 낭트정원, 원래부터 입장료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


그러다가 생각이 미쳤습니다. 순천문학관과 낭트정원은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입장료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공간입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서 공원 정문으로 해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왼쪽으로 난 콘크리트길을 따라 나서면 닿는 데가 바로 순천문학관과 낭트정원인데요, 누구나 입장료 내지 않고도 걸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보는 갈대와 들판 풍경은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의 그것보다 절대 못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잦아든 가운데 꽃술이 달린 머리를 가만 숙인 채 흔들리지도 않는 채 그대로인 갈대들은 마치 참선하고 명상하는 구도자 같았습니다. 구름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그런 갈대들을 하얗게 빛나도록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콘크리트길이 나 있는 제방에서 순천문학관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서보다 좀더 자연스럽게 갈대 사이를 거닐 수도 있었습니다. 


순천문학관 앞에서 갈대밭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있는 데크 다리.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서는 대부분 길이 데크로 만든 인공이지만 여기 이 길은 대부분이 밟으면 폭신거리는 흙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데군데에는 갈대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도록 데크길이 나 있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순천만자연생태공원보다 더 멋진 풍경을 그보다 훨씬 뛰어난 자연 조건 속에서 거닐고 맛볼 수 있는 데가 여기였습니다. 


입장료 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고동색으로 표시해 봤습니다.


둘레 한 바퀴 도는 거리도 6km 안팎으로 적당했습니다. 갈대를 헤치고 들어갈 수 있는 좁다란 오솔길도 나 있고 그다지 붐비지 않아 한적하다는 사실도 좋았습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은 우리가 찾은 12월 30일이 평일인데도 어김없이 복작거렸지만, 여기는 드문드문 사람이 찾을 뿐이었습니다. 


그 날 우리 일행은 이렇게 해서 순천만과 그 갈대 멋진 모습과 상큼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을 맛나게 즐기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순천문학관 김승옥관 툇마루는 눈이 부시도록 볕이 내렸습니다.)


김승옥관 앞 툇마루에 제가 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봤습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의 핵심은 용산전망대다. 용산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위에 몽글몽글 동그랗게 솟은 갈대 무리들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멋진 풍경이다. 머리를 통째 헹궈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용산전망대에서 눈에 담을 수 있는 풍경들. 몽글몽글 둥글둥글 갈대들이 몽환적입니다.


순천만 갈대밭 돌아보는 즐거움은 오히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이 밋밋한 편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찾을 때는 일부러 입장료 7000원을 들일 까닭이 없다. 돈 안 드는 순천문학관과 낭트정원을 둘러보면서 제방과 그 아래 갈대 사이로 나 있는 흙길을 걷는 편이 훨씬 더 다채롭고 산뜻하다. 



이는 또 별다른 까닭도 없는데 단지 순천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기에 기대어 입장료를 제 맘대로 몇 배씩이나 올리는 순천시 정책에 대한 작은 항의일 수도 있다.’ 


어떠하신지요? 제 생각이 너무 옹졸한 것인가요? 



어쨌거나 그 날 우리는 토종팥과 우리밀로 만든 팥칼국수와 꼬물꼬물 부드러운 꼬막비빔밥도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앞 한 음식점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랫장(남부시장)도 들러 머리전과 정구지전과 고추전과 찔룩게튀김을 우리 쌀 막걸리와 함께 맛보는 즐거움까지 누렸습니다. 


순천은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고마운 고장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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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직업 체험을 해보니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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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진로체험 활동 (2)

학생들 손수 뽑은 열한 개 직업


요즘 들어 학교에서 또는 학교 밖에 있는 청소년 활동 지원기관 등에서 학생들을 위한 진로체험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여러 제약 조건이나 한계로 말미암아 실제 몸으로보다는 말이나 머리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내년 자유학기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직업 체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두산중공업이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2015년 함께해 온 '마이 드림(M. Y. Dream, Make Your Dream) 청소년 진로체험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원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소속 중학생들이 대상인데 7월 11일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한백빌딩 3층 강당에서 발대식을 치렀습니다. 


그 뒤 8월 17일과 29일, 9월 12일 모두 세 차례 직업 체험을 진행했습니다. 직업인들의 작업현장을 대부분 찾아갔고 강당으로 모신 경우도 손수 작업 과정을 재현하도록 했습니다. 


패션디자이너.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으로는 중노동인데다 아이디어 경쟁도 치열한 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앞서 세 차례 체험할 직업을 탐색하는 과정에서는 경제사회공유가치창출연구원(ICSV)의 동영상(www.isharevalue.org)들도 활용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체험해보고 싶은 열한 가지 직업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았던 체험은 요리사였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양식 요리사가 으뜸이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먹방'이니 '쿡방'이니 하면서 많이 보여주니까 아이들도 그쪽에 관심이 높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음식 요리사도 여섯 명이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게임과 토론, 동영상 관람 등을 거친 다음 아이들 희망을 바탕으로 체험해 보기로 한 직업은 요리사, 네일아티스트, 가수·작곡가, 동물사육사, 바리스타, 마술사, 제빵사, 헤어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심리상담사, 경찰 등 열한 가지였습니다. 


특히 경찰은 체험하기로 한 아이들이 원래는 여섯이었지만 나중에 이런저런 곡절을 거치면서 셋으로 줄었는데, 체험하고 난 다음 호응도는 또 가장 좋았습니다. 


경찰 체험에서 지문 채취를 해보고 있습니다.


유치장에 몸소 갇혀 보기도 하고 수갑을 손수 차 보기도 했으며 첨단과학장비를 동원해 범행 증거를 수집하는 등등을 체험했는데,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더해서, 평소에는 쉽게 마주할 수 없었던 경찰관 직업세계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체험 과정을 동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아이들에게 동영상 촬영·편집 방법을 강의하고 찍도록 했습니다. 휴대전화로 열심히 찍은 한 학생은 동영상 촬영에 흥미를 느끼고 나중 직업 삼아도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해보는 과정에서 몰랐던 흥미와 소질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선택)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은 체험 과정 자체가 일러주는 교훈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네일아티스트의 경우 대부분 알록달록하게 색칠하고 꾸미는 것이 좋아보여 체험 선택을 했는데, 실제 해 보니까 색깔이 나오도록 준비하고 배합하는 과정이 어렵고 까다로운 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톱을 예쁘게 가다듬는 것과 다른 사람 손톱을 꾸며주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줄도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는 요리사의 입을 통해서도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직업 요리사의 작업을 관심 깊게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뒤이은 실습도 진지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직업인이 던진 말은 "힘들다"였습니다. 


전망도 있고 보람도 있지만 지금 눈으로 보이고 간단하게 실습으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나 재미는 부분일 뿐 재료를 옮기고 가다듬는 노동이 고될 뿐만 아니라 메뉴를 스스로 개발해 내야 하는 고달픔도 상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리사가 정년 없이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은 학생들한테도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쨌거나 그냥 대충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체험하러 간 합성동 이수인헤어파크는 원장이 베트남 결혼이민자라는 점도 남달랐습니다.


가수·작곡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는 가수나 작곡가가 생각할 수 있는 전부지만 서울이나 전국 단위에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은 극소수고 대다수는 지역에서 크게 이름이 나지 않은 채로 활동하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면 그를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결코 작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영역과 보람이 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한테 작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대부분 아이들은 체험을 마치고 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 작업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마술사 직업 체험은, '마술사도 직업이 될 수 있구나',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또는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나중에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더불어 자기가 하고 싶은 직업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번 '마이 드림 청소년 진로체험단' 프로그램은 참가한 학생들이 장차 무엇을 자기 직업으로 삼을지에 실제 도움을 준다는 취지로 마련됐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고 녹록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중학생 시절에 이런저런 직업을 갖겠다고 정한다 해도, 그것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동물사육사 체험. 돌보는 동물이 말이 아니고 좀 작으면 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직업의 세계는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람과 즐거움과 재미만 있는 일면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양지와 음지, 좋음과 나쁨이 공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직업 세계를 몸으로 겪어보고 여러모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직업 체험에 대한 아이들의 구체적인 소감과 향후 계획은 다음에 이어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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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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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안에서 출판 업무를 맡고 있다 보니 오랜만에 소설 한 편을 읽게 되었다. ‘혜주’라는 조선시대 여왕의 이야기인데, 착하고 곱게 자란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은 후 희대의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악(惡)의 평범성’이었다. 폭군이나 독재자는 본래 성품이 포악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도 막상 권력을 쥐고 보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폭군으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은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정립된 것이다. 나치 치하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 학살을 지휘한 희대의 악마 아이히만은 우리가 상상하던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그 엄청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무 생각 없는 삶’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이히만과 함께 ‘점령지를 피로 물들인 도살자’, ‘유대인 절멸을 입안한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히틀러의 충복 하이드리히 또한 바이올린을 잘 다루는 음악도였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늘 음악으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가치와 철학이 없는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당장 시위에 참여한 칠순의 백남기 농민에게 물대포를 조준 직사한 경찰관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 또한 집에 가면 자상한 아빠이고 남편일 것이다. 그 사람뿐일까. 제주 강정마을에서,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절규하는 주민들을 끌어내고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위를 ‘국가가 하는 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백남기 농민이 45일이 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현 정권의 누구 하나 병실을 찾은 이가 없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니고, 자신이 책임 질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스타파 화면 캡처.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말 바꾸기나 공약 뒤집기, 각종 실정에 대한 국민의 비판여론에 오히려 화를 내며 복면금지법이나 테러방지법, 쉬운 해고법, 교과서 국정화에 몰두하는 것도 그걸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국가가 하는 일’로 동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드러난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봐도 그럴 것이다.


여왕 혜주 또한 간관(諫官)의 상소를 불윤여왕은 비답(不允批答)으로 무시하고, 괴소문이나 비판성 벽보 게시자를 색출해 극형에 처하는가 하면, 성균관 유생들의 농성을 강제 진압하는 등 폭정을 일삼다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워지는 역사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도 여왕은 자신이 하는 일이 폭정이고 학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나는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몇 기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본 인상은 차분하고 조리 있는 말투를 쓰는 단아한 중년 여인이었다. 나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저도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꾸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처럼 부모를 그렇게 잃고 혼자 사는 ‘영애(令愛)’의 모습이 안쓰러워 표를 찍은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새로운 파시즘의 부활이라면 그 자신에게도, 그를 찍은 국민에게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여왕 혜주에서 박 대통령의 미래가 어른거린다면 불경스런 생각일까.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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