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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전국 동시 개봉과 사라진 꽃샘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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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이 미쳤습니다. 대박이 예상되는 최신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전국 동시 개봉’이 돼 버렸습니다. 보통은 동백이 피고 난 다음에야 목련이 꽃을 피우고, 매화·산수유가 꽃을 벌린 다음에야 벚꽃·진달래가 피어납니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경남이라 해도 유채는 4월 중순이나 돼야 그 뒤를 이어 꽃이 피어나는데 올해는 이 모두가 한꺼번에 다 피어났습니다. 어떤 데는 조팝나무에서조차 꽃이 피어났을 정도고, 벚꽃은 이미 서울에서까지 활짝 피어났습니다. 서울 벚꽃 3월 개화는 기상 관측 이래 처음이라고까지 하네요.

 

꽃이 이렇게 한꺼번에 피고 보니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알겠습니다. 봄꽃들은 서로서로 조금씩 맞물리면서 피고 살짝 어긋나면서 집니다. 동백꽃이 피어나서 한창을 지나 조금씩 시들 즈음에 목련이 꽃을 피우고요, 목련꽃이 내리는 빗줄기에 후두둑 떨어질 조짐이 보이면 벚나무 꽃봉오리가 벌어집니다.

 

3월 31일치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경남 창원 진해 벚꽃 사진.

 

또 이를테면 유채꽃은 벚꽃이 남쪽을 지나 서울·경기 쪽에 다다를 즈음 남쪽 바닷가에서 노란 꽃을 세상으로 뿜어냅니다. 이런 식으로 지나친 겹침도 번짐도 없이 그리고 공백도 없이 시간의 경계선을 슬그머니 흐리면서 즈려밟는 것이 봄꽃의 속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슬몃슬몃 서로 넘겨짚고 기대면서 이어지다 보니 봄철 내내 꽃이 끊어지지 않았고요 사람들 또한 이런 꽃들 덕분에 지난 겨울 어깨를 시리게 만들었던 차가운 얼음을 녹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한꺼번에 전국 동시 개봉을 하고 보니 꽃구경조차 오히려 제대로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벌도 나비도 이 꽃들이 한꺼번에 다 진 뒤에는 양식 걱정을 해야 할는지도 모르겠고요. 예전에는 시차를 두고 돌아다니면 한 가지 꽃을 질리도록 볼 수 있는 데가 여러 군데였습니다. 올해는 여러 꽃이 한데 뒤섞여 피고지는 바람에 여러 색깔 물감으로 황칠해놓은 도화지를 보는 것 마냥 어지러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홍매화축제가 3월 30일 열렸는데, 이날 경내 홍매화는 절반 넘게 꽃이 져 있었고, 벚꽃과 산수유꽃과 동백꽃으로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답니다.

 

한겨레 그림.

 

앞으로 남은 봄날은 또 어찌해야 하나요. 생물학적 지식이 충분하지는 않은 처지라서, 결실과 생장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알 도리가 제게는 없지만, 지금 꽃들이 지고난 다음에는 틀림없이 연두를 지나 초록만이 온통 넘쳐날 텐데요, 지금 왕창 피어난 꽃들이 그 때 다시 피어줄 까닭이 없으니 그 단조로움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는지요…….

 

물론 이리 말하면 팔자 늘어진 꽃 타령으로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꽃소식이 제주를 지나 전남·경남을 거쳐 수도권과 강원까지 차례대로 북상해왔습니다.

 

전국 자치단체들과 민간 조직들은 지역 특성에 맞도록 꽃 관련 축제나 놀이를 마련하고 장사도 해 왔습니다. 적지 않은 상인들도 이런 꽃 관련 축제나 놀이에 맞춰 남에서 북으로 차례로 올라가며 난전을 펼쳐왔습지요.

 

그런데 이런 흐름이 이번에는 단박에 사라졌습니다. 경남 창원 진해도 벚꽃이 만개했고 서울 여의도 벚꽃도 더없이 벌어졌습니다.

 

3월 31일 한겨레에 실린 서울 벚꽃 사진.

 

말하자면 예전에는 사람들이 벌이를 할 수 있도록 봄꽃이 차례대로 피고지고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열어줬는데요, 지금은 전국에서 동시에 피고지고 함으로써 그 시간과 공간을 오히려 가로막고 말았습니다.

 

올해는 꽃샘추위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상기후였습니다. 이번 봄꽃 ‘전국 동시 개봉’과 없어진 꽃샘추위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이상기후는 한반도 전역을 한 달 가량 뒤덮었던 눈으로 기억됩니다. 한 해는 지나치게 추웠고 다른 한 해는 넘치도록 따뜻했습니다. 이런 이상기후의 원인을 많은 사람들은 자연 생태 파괴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을 망가뜨리고, 쓰는 과정에서도 생태계를 부서뜨립니다. 그러면서 지구는 더워집니다. 이제 더는 지구를 덥히지 말아야 하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봄날 제대로 된 꽃구경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봄꽃을 활용해 조금이나마 지역경제를 활성화해 보려는 자치단체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김훤주

 

※ <기자협회보> 4월 2일치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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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변 유채 창녕 남지서 봄철 한나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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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4월 11일 원고입니다. 낙동강을 끼고 있다는 특징이 발길 닿는 모든 데에서 느껴지는 나들이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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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녕 남지로 나들이를 합니니다. 단일 면적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유채꽃 단지가 남지에 있습니다. 축제가 다음주 18일 금요일부터 22일 화요일까지인데요, 이번 주말에 가도 좋을 정도로 꽃들은 활짝 피어 있습니다.

 

지금 유채단지 일대는 2000년대까지 낙동강 강변에서 유일하게 둑이 없었던 지역입니다. 큰물이 지 면 수해가 뒤따랐는데 2002년 태풍 루사 때는 예전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피해가 났고, 이를 계기로 저습지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제방을 쌓으면서 생겨난 공간입니다.

 

모두 18만 평, 60만㎡에 이릅니다. 여기에는 수평선도 없고 지평선도 없습니다. 단지 꽃평선뿐입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노란 꽃물결을 질리도록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노란 꽃을 앞에나 뒤에 놓고 사진 한 장씩 찍는 것은 기본이고요, 꽃밭 속으로 들어가 걸어도 좋고 꽃밭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겨도 괜찮으며 제방 같은 데서 멀찌감치 떨어져 걸으며 봐도 풍경이 쓸 만합니다.

 

남지철교도 한 번 가봐야 합니다. 올해 나이가 여든한 살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2월에 세워졌고 대구와 마산을 잇는 국도 5호선 위에 있습니다. 1900년 한강철교, 1911년 압록강철교에 이은 세 번째로 들어선 근대 강철 다리입니다.

 

옛 남지철교. 이쁘지 않습니까? 새 남지철교는 빨간색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일제가 아무 뜻 없이 이런 강철 다리를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의 산물을 수탈하는 데 그만큼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또 1950년 6·25전쟁 당시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으려는 미군에게 다리 가운데가 폭파되는 기억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모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까지 널리 알려지면서 2004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145호가 됐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다릿발은 튼튼한 알파벳 T자 모양이며 철골 트러스를 걸친 상판은 넉넉하고 자연스럽게 휘어지게 돼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사람만이 걷거나 자전거로 다닐 수 있도록 허용돼 있습니다.

 

다리 위에서 보면 양쪽으로 모두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노란 꽃색과 눈부신 햇살이 뒤엉기기라도 하면 때때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다음 남지시장으로 갑니다. 장날은 2일·7일입니다. 이번 토요일 12일이 장날이네요. 장터와 주변에서는 웅어회를 먹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바다에서 살다가 봄철에 알을 낳으려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가 웅어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임금한테 진상되던 고급 어종이랍니다. 남지에서도 봄날 한 철만 맛볼 수 있는 계절 별미인 셈입니다. 물론 언제나 이렇게 입을 호강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국밥 한 그릇 말아 드시고 걸음을 떼셔도 좋겠습니다.

 

이런 정도로 즐기고 집에 돌아가셔도 되지만 남지에는 또 낙동강 개비리길이 있습니다. 용산 마을과 창아지 마을을 잇는 강기슭 벼랑길입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고 두 사람만 마주쳐도 비좁은 길입니다.

마삭줄 우거진 남지 개비리길.

 

지금쯤 가면 빼곡하게 깔려 있을 마삭줄도 쓸 만하겠고, 햇빛조차 뚫기 어려울 정도로 우거진 대숲도 장할 것 같습니다. 마냥 걷지만 마시고 둘레 풀과 나무들에 눈길과 손길을 건네시기 바랍니다. 쑥밭이 만나지면 조금 캐도 좋겠고요.

 

거리가 3.5km 가량으로 짧지 않아 유채꽃 구경까지 하고 왕복하기는 어렵습니다. 타고 가신 자동차는 창아지 마을 또는 용산 마을에 세워두고 적당하게 거리를 정해 걸어갔다가 돌아나오는 편이 좋겠습니다. 

 

부곡온천. 노천족욕탕 같습니다. 창녕군 제공 사진.

마지막은 덤입니다. 부곡온천이지요. 한때는 땅에서 나오는 유황 섞인 온천이 아니고 업자들이 물을 데워 쓴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지금은 창녕군 차원에서 그렇지 않다고 보증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부곡온천에서 목욕하면 살갗이 매끈매끈해지고 얼굴에서 한동안이나마 빛이 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주 이름난 부곡온천이라서 목욕요금이 비싸지 않나 싶으시겠지만 아닙니다. 일반 시중 목욕탕과 요금이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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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모산재 기암괴석들 이름이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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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에 가면 모산재가 있습니다. 봄날 철쭉으로 이름난 황매산의 남쪽 봉우리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모산재는 엄청난 바위산이랍니다. 그 아래 통일신라시대 지어졌다는 영암사 망한 절터가 있는데요, 거기 석재들도 죄다 모산재에서 나왔습니다.

 

모산재 바위는 화강암이라 그 색깔이 맑고 밝고 씩씩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바위산에 이상하고 별나게 생긴 바위들이 없을 리가 없겠지요. 돛대바위 순결바위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돛대바위는 물 위를 떠다니는 배 한가운데 돛을 단 돛대 같이 생겨서 얻은 이름입니다.

 

순결바위는, 가운데가 사람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너비로 벌어져 있는데,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 들어가면 바위가 오므라들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하, 그렇게 해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저는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돛대바위.

 

순결바위.

 

모산재에 이런 바위만 있지는 않습니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했다뿐이지 이상하고 별나게 생긴 바위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4월 2일 모산재를 올라갔다가 왔는데, 이태 전 오를 때보다 숨이 조금 더 가쁘더군요. 아무래도 나이 탓인 모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 때 찍은 바위 사진들을 한 번 올려보려고요. 먼저 순결바위 옆 모습입니다. 합천신문 박황규 발행인과 동행했는데, 저는 엉덩짝 같다고 했고 박 발행인은 함께 껴안고 입맞춤을 하는 남녀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좀 으뭉스러운 편이고 반면 박 발행인은 담백한 편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무엇을 닮았느냐고 페친들한테 물었더니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사람 귀처럼 생겼다, 짝사랑하는 남녀 같다, 스타크래프트의 질럿을 닮았다, 돼지 발톱처럼 보인다 등등. 물론 엉덩짝 같다거나 입맞춤하는 남녀 같이 보인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보시기에 무엇 같으신지요? 

 

 

이렇게 생긴 바위도 있습니다. 옛날부터 모산재 오를 때마다 무척 별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바위인데요. 이번에 들어보니 그 새 이름을 얻었더군요. 득도바위랍니다. 과연, 여기에 올라앉아 아래를 내다보며 도를 닦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도를 깨칠 것 같은 느낌이 잔뜩 듭니다.

 

 

사진 가운데 잔뜩 웅크리고 있는 듯하게 아래위로 포개어져 있는 바위는 어떠신지요? 무엇인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느낌을 주는 것 같기는 한데, 마땅하게 떠오르는 낱말이나 형상이 저는 없습니다. 못난이 바위라고나 할까요.

 

 

이 바위를 보고는 바로 느낌이 들었습니다. 쌩택쥐페리가 쓴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여우를 닮았다고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왕자와 이 여우는 보리밭 따위를 얘기거리 삼아 서로 사귀고 결국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잘은 모르겠으나 별나게는 생겼다고 저는 여겨졌습니다. 두더지 대가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저는 들기는 합니다. 햇볕을 아래서는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속성 때문에 대가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첫 인상으로는 거북처험 보이는 바위입니다. 그런데 앞발 뒷발이 보이지 않습니다. 편하게 앉아 허리를 기댈 수 있는 의자처럼도 보입니다. 아니면 오래 된 무덤을 지키고 있는 상징 석물 같다는 인상도 줍니다.

 

 

가파른 산세 중턱 즈음에 보이는 바위입니다. 조금 희게 보이는 부분입니다. 코 부분 형상과 눈자죽이 뚜렷하다고 저는 봤습니다. 보는 순간 저는 코가 비죽 튀어나온 돼지 대가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암벽 한가운데 거무스럼한 자죽이 있습니다. 사진 한복판에 말씀입니다. 저는 보관을 쓴 부처님 또는 왕관을 쓴 임금이 돌아앉아 있는 모습 같습니다. 바닥에 퍼질러 앉지 않고 뒷받침 없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조금 숙인 것 같습니다.

 

 

왼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이 코끼리 귀처럼 보이지 않으십니까? 다른 각도에서 찍으면 또 다르게 보이겠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제게 그렇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돼지코처럼도 보이는데, 그렇지만 돼지코 치고는 앞부분이 너무 가느다랗습니다.

 

 

매우 넉넉합니다. 조금 기울어져 있기는 하지만 멋진 너럭바위입니다. 그런데 생긴 모양이 저는 바다에 치는 파도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잔잔하게 너울대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리 꿈틀 저리 비틀하면서 거세게 몰아치는 그런 종류 말입니다. 그래서 파도바위 되겠습니다.

 

 

왼쪽에서부터 살짝 솟아올랐다가 꺾어지면서 툭 뒤어나온 이 바위는 무엇을 닮은 것 같은지요? 저는 한눈에 주먹바위라고 이름을 붙이면 딱 맞겠다 싶었습니다. 가볍게 말고 힘껏 불끈 움켜쥔 주먹처럼 제 눈에 보이거든요.

 

맞은편 마루에서 바라본 돛대바위. 오른편 끝머리에 있습니다.

 

내려오는 끝자락에 있는 국사당. 무학대사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위해 기도했다는 자리입니다.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여러 군데에서 별스런 바위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커다란 암벽에 망치를 그려놓은 것 같은 것도 찍었으나 카메라가 좋지 않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먹고 찾아보면 재미나고 별스러운 바위들이 무척 많을 것 같습니다.

 

무지개터에서 바라보는 맞은편 산줄기.

 

모산재는 이렇게 재미를 누리며 오르내릴 수 있는 얘기거리 볼거리를 여러 모로 품고 있습니다. 홀로 우뚝하지도 않았습니다. 천하제일명당이라는 무지개터에서 왼쪽으로 조금 벗어났더니, 바로 이렇게 사람 인(人)을 여럿 새긴 산이 씩싹한 기상으로 놓여 있었습니다. 무척 상쾌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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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 버린 선장만 탓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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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실이 더 안전하니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라." 세월호 이준석 선장은 그렇게 승객들을 버려두고 제일 먼저 침몰하는 배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한 이도 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그는 1950년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자 국민들에겐 '서울 사수'를 지시해놓고 자기만 몰래 도망쳐버렸다. 6월 27일 새벽 2시였다. 내각과 국회에도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대전에 도착한 그는 더 기괴한 일을 벌인다.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연설을 녹음하게 한 후 마치 대통령이 서울에 있는 것처럼 꾸며 방송토록 지시한 것이다. 27일 밤 10시부터 되풀이하여 방송됐던 연설내용은 이랬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니 …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새빨간 거짓말이었으나 대다수 선량한 서울시민은 대통령의 말만 믿고 서울에 남았다. 그러나 이미 소문을 들은 정부 관료와 군·경찰 고위 관계자,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연설이 방송된 지 4시간 뒤인 28일 새벽 2시 30분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다리 위에 있던 수백~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이 이 폭파로 죽었고, 피란길은 차단되었다. 이로써 당시 서울시민의 2/3는 속절없이 인민군 치하에 남아야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상대로 부역자·협조자 색출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처형됐다.


대통령이 이랬으니 전국 곳곳에서도 이런 기만적인 피란 금지령과 직장사수 명령이 횡행했다. 경남 진주도 그랬다. 인민군이 진격해오자 진주시장과 진양군수, 경찰서장은 물론 소방서 직원과 신문사 기자들까지 겉으로는 '진주 사수' '결사항전'을 외치며 시민들을 속인 후 은밀히 진주를 탈출해버렸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안 시민들은 인민군이 시내로 진입하던 7월 31일 새벽에야 피난을 가려 했으나 당시의 유일한 남강다리인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다. 곧이어 군·경은 진주교를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이후 과정도 똑 같았다. 9월 25일 아군의 진주 수복 후 남아 있던 진주의 모든 시민이 부역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그 중 상당수가 처형됐다. 이들 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단지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집단학살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대통령을 처단하지 못했다. 그는 4·19혁명으로 실각했으나 하와이로 망명하여 천수를 누렸고, 사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침몰 중인 세월호. /연합뉴스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 치하에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묵살했다. 아니 오히려 유족회 간부들을 구속시키고 발굴된 유해를 파헤쳤으며 비석은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 또한 인혁당 사법살인 등 수많은 인권범죄를 저지른 후 측근의 총탄에 숨졌지만, 국민의 처단을 받지는 않았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대통령 전두환은 또 어떤가? IMF로 국가부도 사태를 불러온 대통령 김영삼은? 온갖 비리에 얽힌 사대강 사업으로 국고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국정원 등 온갖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을 낳은 대통령 이명박은?


대통령뿐만 아니다. 천안함 침몰 당시 경계 실패와 지휘 책임을 져야 할 해군 장성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국정원이 간첩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져도 국정원장은 책임지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번 세월호 재난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나라에서 세월호 선장이 승객과 배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게 오히려 기묘해보인다.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책임지지 않는 풍토는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단 한 명도 처단하지 못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처단은 커녕 그들이 정부와 군·경을 장악하고, 교육계와 언론계까지 휘어잡았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친일을 옹호하고, 독재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이런 나라를 바로잡지 못한 모든 어른들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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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대교 볼거리는 유채꽃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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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창원교통방송 원고로 썼던 글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말미암아 방송이 취소됐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가하게 노다니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도 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정보일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합니다만. 창선삼천포대교를 거니면서 누릴 수 있는 섬 바다 바람 유채꽃 들에 대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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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참사가 터져 정말 드릴 말씀이 없을 지경입니다. 지금은 차분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놀란 심정을 다스리면서 채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어린 청소년들과 승객들, 그리고 그 부모 일가 친척 여러분을 위해 뜻을 모으고 힘을 모아 위로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일상을 마냥 접어둘 수만은 없는 일, 이런저런 사유 또는 희망으로 길을 나서더라도 말과 생각과 행동을 삼가고 또 삼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창선삼천포대교를 소개하겠습니다.

 

이곳도 이번 주말에 유채꽃축제를 벌이는 창녕 남지와 마찬가지로 유채꽃이 유명하지만, 굳이 이번 주말에 꼭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 주말이나 다음다음 주말에 가셔도 유채꽃은 충분히 볼 수 있고 바람 또한 마찬가지로 싱그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선·삼천포대교는 부두 옆에 있습니다. 부두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이 다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는 길목 여기저기에는 생선을 말려 파는 노점상과 가게들, 무슨 수산 또는 무슨 무역 업체들과 수산업협동조합의 냉동창고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아주 활기가 넘쳐나는 시장 풍경입니다.

 

 

대교 들머리에는 밥집이 여럿 있습니다. 때 맞춰서 여기서 먼저 점심을 먹고 출발하는 편이 낫습니다. 아니면 김밥 같은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하셔도 좋습니다.

 

창선·삼천포대교는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넷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들이는 끝까지 가지 않습니다. 늑도대교까지 다리 세 개를 걷는데요, 3km정도 됩니다. 왕복 6km를 걸어서 오간다 해도 모두 두 시간이 걸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대신 늑도에 들어가 마을과 바다를 훑어본 다음 초양휴게소로 돌아나와 바다와 섬을 맛보는 보람이 있습니다. 4월과 5월이면 삼천포대교를 따라 관광버스들이 쉴 새 없이 오갑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정형화된 풍경밖에 볼 수 없겠지만 이렇게 걸으면 시원한 바람, 봄 햇살에 젖은 물빛, 바닷가 갯내음까지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다리들에는 걸을 수 있는 길까지 확보돼 있습니다. 늑도로 갈 때는 오른편이 좋고 돌아서 초양휴게소로 향할 때는 반대편 길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섬과 바다 풍경을 늘씬하게 잘 생긴 다리 위에서 골고루 누릴 수 있습니다.

 

 

유채꽃은 아름답습니다. 유채꽃 자체보다 어른 아이 남자 여자 구분 없이 그 꽃밭에 들어가 노니는 정감 넘치는 모습이 더욱 좋을 수도 있습니다. 초양섬과 늑도섬의 유채꽃을 지나 가면 늑도 마을을 나타납니다.

 

뒤쪽 오솔길을 따라 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지나면 조그만 바다가 열립니다. 오후에 가시면 앞바다에 떨어져 부서지는 햇살이 볼만합니다. 캥거루 뛰어오르는 뒷다리처럼 힘차게 뻗어나가는 창선대교가 위로 보이는데요, 그러고 있다가 돌아나오면서는 마을 앞쪽과 고기잡이 항구를 둘러봅니다.

 

거기 한 가정집 유리창에 비친 늑도어항.

 

이렇게 늑도를 둘러본 다음에는 초양 휴게소로 되짚어갑니다. 이렇게 걸어가시면 학섬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풍경으로 꽤 그럴 듯합니다. 다리 위에서 보면 바다 여기저기에 낯선 구조물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죽방렴이라고 멸치를 몰아잡는 시설들입니다.

 

예전에는 대나무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H빔 같은 철물로 만듭니다. 죽방렴은 대체로 조류가 흘러오는 쪽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멸치도 조류 흐름을 타기 때문입니다.

 

초양도 어항.

가만 가늠해 보면 보통 사람들 눈에도 조류가 보입니다. 조류로 흐르는 물은 그렇지 않은 물과 색깔이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초양휴게소에 가시면 전망대가 마련돼 있습니다. 예서 눈맛을 누리시다가 삼천포부두로 걸어 나오셔도 좋고, 아니면 정류소에서 창선서 삼천포 나오는 시내버스를 타셔도 됩니다.

 

삼천포까지 자가용 자동차로 가셔도 됩니다만, 저는 시외버스를 권합니다. 마산 합성동 터미널에서 삼천포행 버스는 아침 6시 30분부터 40분~1시간 간격으로 있고, 또 삼천포터미널 맞은편 정류장에서는 모든 시내버스가 삼천포부두로 가기 때문입니다. 터미널과 부두는 거리도 무척 가깝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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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체험장으로 새로 나는 합천 모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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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이 국선도 수련인들과 풍수지리사를 초청했습니다. 자치단체로서는 썩 보기 드문 일입니다.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생기체험 프로그램을 개발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러고는 황매산 남쪽 자락 모산재를 돌며 이 바위산에서 뿜어나오는 생기를 알아보고 실제로 체험까지 해 봤습니다.

 

초청을 받아 19일 합천군을 찾은 이는 민중원 전국풍수지리학회 총재 겸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회장, 세계국선도연맹 류인학 법사와 최태성·고정길 현사, 그리고 박황규·심금희·박종수 사범 등 22명이었답니다.

 

민중원 회장은 모산재산악회 허흥용 회장·합천군 관광개발사업단과 함께 명소로 알려진 돛대바위와 무지개터, 모산재 정상과 득도바위·순결바위 그리고 국사당을 오후 1시부터 네 시간 남짓 둘러봤습니다.

 

틈틈이 메모하는 민중원 회장.

 

민 회장은 산행하는 내내 모산재 산세와 둘레 산세, 주변에 있는 흙과 바위와 물 등을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무지개터에 대해 “바깥쪽에 말발굽 모양으로 바위가 둘러쳐 있는 가운데 흙이 덮였고 살짝 가라앉아 있어 바람이 잦아드는 좋은 자리”라 했습니다.

 

또 “촛불·등잔처럼 주위를 밝히는 혈(穴)자리로 마침 아래에 고여 있는 물은 불을 피우는 데 필요한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지개터 자리와 그 아래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얘기였습니다.

 

무지개터에서.

 

무지개터는 가뭄이 들면 사람들이 디딜방아를 지고 와서 기우제를 지내던 자리로 무덤을 쓰면 개인을 크게 발복하지만 대신 나라가 망한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입니다. 또 이런저런 산악회에서게 여기가 시산제를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민 회장은 또 “모산재 돛대바위·득도바위·순결바위 등 다른 바위들도 좋은 명상 자리이자 기도처·수련장”이라며 “조금만 가꾸면 특정 수련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모산재에서 생기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모산재산악회 허흥영 회장과 산세를 둘러보는 민 회장.

 

이어 국사당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기도하는 본인 보호·양생도 하고 목적하는 바도 이룰 수 있는 혈(穴)”이라며 “모산재 스토리텔링을 하는 데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국사당은 고려말 합천 출신 무학대사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위해 천지신명에게 기도한 장소입니다.

 

그러는 동안 국선도 수련인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이들 시범단 20명의 모산재 탐방은 오후 1시30분에 시작됐습니다. 영암사지 마당에서 간단한 수련으로 몸을 푼 다음 돛대바위·무지개터, 모산재 정상과 득도바위·순결바위·국사당을 거쳐 영암사지로 다시 돌아왔답니다.

 

다시 영암사지에서.

 

이들은 가는 데마다 명상과 수련 시범을 하며 가만히 서거나 앉아서 하는 내공, 몸을 움직이면서 하는 외공, 이를테면 주먹을 쓰는 권법이나 칼 따위를 쓰는 무기술까지 선보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명산대천을 찾아 몸과 마음을 닦은 바와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암사지에서.

 

이날 시범을 전체적으로 이끈 류인학 법사는 “모산재는 아름다우면서도 특별하다”며 “좋은 기운을 많이 누렸고 오늘 참여한 다른 수련인들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심금희 사범도 “류인학 법사 지도를 따라 돛대바위 근처에서 수련을 하는데 발끝에서부터 생기가 느껴졌다”며 “적절한 지도를 받으면 보통 사람들도 모산재에서 생기를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돛대바위에서.

 

돛대바위 바로 옆에서.

 

이들은 모산재에 대해 대체로 좋게 평했지만 아쉬움을 느끼게 한 대목에 대해서는 지적도 했습니다. 오르는 이들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도록 적절한 지점을 잡아 볼거리와 쉴자리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돛대바위 근처에서.

 

류 법사는 “매우 가파른 편이데 이대로 두면 접근성이 좋지 않아 생기체험 프로그램 가동에도 장애가 되는 만큼,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만한 지점에다 쉼터를 두고 거기서 볼 수 있는 기암괴석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작은 안내판을 설치하면 좋겠다”고 짚었습니다.

 

무지개터에서.

 

모산재 정상에서.

 

마찬가지 모산재 정상에서.

 

득도바위 근처인 듯.

 

득도바위 앞에서.

 

물론 합천군 관광개발사업단은 이날 이전부터 나름 대책을 마련해오고 있습니다. 멋진 바위를 여럿 고른 다음 그것들이 가장 잘 바라보이는 자리가 어디인지예전부터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합천군은 얼마 안 가 모산재 생기 체험이라는 새로운 관광 명소를 하나 더 갖게 될 것 같습니다.

 

국사당에서.

 

다시 영암사지에서.

 

마치고 나서 다함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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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에 주전소가 있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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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이 복원됐습니다. 옛날에는 세병관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분위기였는데, 이번에 가니 예전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나름 짜임새가 있어 보였습니다.

 

물론 여기저기 어색하거나 맞지 않는 구석도 없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눈 앞에 이렇게 복원이 됐다는 자체가 고마워서 그랬는지, 그런 것들은 앞으로 고치고 채워 나가면 되겠지 싶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주전소가 가장 뜻깊게 여겨졌습니다. 제 모습이 확인된 우리나라 유일한 주전소 터라는 의미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통제영에서 이처럼 화폐를 독자적으로 발행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화폐 독자 발행권을 가졌을 정도로 책임과 권한이 세었고 그만큼 통제영이 중요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니까요.

 

다음으로 멋진 것을 꼽자면 후원이 아닐까 합니다. 세병관과 운주당 뒤쪽 언덕배기 여기저기에 초가지붕이나 기와지붕을 이고서 서너 채가 들어서 있는데요, 올라가 앉아 보니 여기서 바라보는 통영 풍경이 무척 그럴 듯했습니다.

 

 

 

 

오른쪽 지붕들 아래에서 주전소 터가 발굴됐습니다.

 

 

아울러 대숲이라든지 크고 굵은 나무들이라든지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봄 여름에는 불어오는 바람이 여기서는 더욱 시원할 것 같았고, 가을에는 알록달록 색깔을 입은 잎사귀들이 더욱 빛날 것 같았으며, 겨울에는 내리쬐는 햇살이 여기서 더욱 다사로울 것 같았습니다.

 

기삽석통(수자기帥字旗)를 꽂아 두는 데 썼던 돌통)과 석인(오방기五方旗 꽂아두는 데 썼던 돌인형)들 발굴해 내어 앞에다 세워놓은 것도 좋았습니다. 그 돌들 재질이 화산활동 영향을 받은 듯이 보였는데요, 문화동 돌벅수랑 질감이 비슷했습니다.

 

발굴된 기삽석통.

 

새로 만들 기삽석통에 꽂혀 있는 수자기.

 

석인들.

 

아마도 통영에서 많이 나는 돌을 갖고 만들었지 싶은데요, 옛날 선조들이 그랬듯이 앞으로 우리도 이렇게 자기 동네에서 나는 재료를 갖고 무엇이든 만들고 다듬고 세우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지역특색이 살아나니까요.

 

보기만 해도 그 투박한 맛이 기분좋게 휙휙 감겨들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말씀입니다. 군사용 의전용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당대 석공들이 그 모습을 새겨넣는 데에 정밀함 정확함 이런 따위는 아무래도 필요가 없었겠지요.

 

내아, 그러니까 통제사 살림집으로 기억합니다만.

운주당이나 거기 딸린 살림집, 그리고 12공방 복원은 좀 그저 그랬습니다. 나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복원 자체만으로도 소중하고 뜻깊다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다만 예산이 적었던 탓인지 거기 쓰인 목재들이 허접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12공방 공록당.

 

12공방들. 오른쪽 핑크빛 벽이 보입니다.

 

그리고 벽에 칠해져 있는 색깔이 맞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운중당 쪽은 그래도 그럭저럭 제대로 돼 있는 것 같았지만 12공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영 아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있지도 않았을 색깔(이는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 색감이 덜 떨어져 있었다는 뜻도 아니고 색깔 만드는 기술이 모자랐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핑크빛을 거기다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거기 핑크빛이 제가 알기로는 우리한테 고유한 색깔이 아니고 서양에서 들어온 색깔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고칠 수 없을 그런 정도는 아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통제영이 꼴은 제대로 갖주게 됐습니다. 일제강점기 소학교로 쓰여져 소설가 박경리 선생 같은 이들 책 읽고 공부했을 세병관에 더해 새로 복원을 하면서 이러저런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세병관에서 임금 궐패를 모셨던 중심 자리. 바닥을 높여놓았습니다.

 

궐패 모시던 자리에서 내다본 모습.

 

 

통제사 비석군.

 

앞으로 좀더 정확하게 좀더 제대로 자리잡게 하는 일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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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수련인들 합천 모산재 찾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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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이 주최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주관한 4월 19일의 '국선도 고수 초청 합천 모산재 생기체험 탐방'은 별난 구석이 많았답니다. 양산·진주·창원 등 경남 지역 고수도 여럿 참여했지만 대전·서울 같은 다른 지역 고수도 합세했습니다.

 

또 단순히 지역 명소를 알리는 차원을 넘어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역 관광 활성화의 단초를 마련한다는 목적도 남달랐습니다. 자연이 품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찾아내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는 방법으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쪽으로 써보자는 시도였거든요.

 

경쟁사회에서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되풀이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체험·휴식·치유를 해야 하는데, 실제 그렇게 할 수 있는 산천경개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위해 우리 산천이 뿜어내는 생기를 찾아 널리 알림으로써 합천 지역 관광 자원으로 삼고자 한다는 얘기입니다.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합천에서 이렇게 시도할 수 있는 근거는 엄청난 바위산인 모산재가 합천에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생기체험 프로그램을 본격 개발해 보겠다는 합천군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아예 있을 수 없는 시도였겠지요.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이번에 초청된 사단법인세계국선도연맹은 기수련(氣修鍊) 단체 가운데 가장 이른 1970년 창립했습니다. 또 기수련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짙은 다른 단체들과는 달리 현실과 일상 속 수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날 생기체험은 안팎으로 이름이 높은 류인학 법사가 좌장격으로 참여해 이끌었습니다. 또 이밖에는 최태성·고정길 현사와 박황규·심금희·박종수 사범 등 20명이 함께했습니다.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먼저 오후 1시 30분 영암사지 마당에 모여 수련으로 몸을 가볍게 푼 다음 돛대바위·무지개터, 모산재 정상과 득도바위·순결바위·국사당을 거쳐 영암사지로 돌아오는 길을 골랐습니다. 모산재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올라가 왼편으로 내려오는 루트랍니다.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영암사지에서.

 

국선도 수련인들은, 공식 시범단까지 포함돼 앴었는데요, 발길 이르는 데마다 단전호흡·명상과 수련을 선보이며 가만히 서거나 앉아서 하는 내공은 물론 몸을 움직여서 하는 외공, 주먹을 쓰는 권법이나 칼을 쓰는 무기술까지 고루 선보였습니다.

 

가장 앞서 걷는 이가 류인학 법사.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정상에서.

<단전수련 길잡이>, <우리 명산 답산기 1·2>를 펴내기도 한 류인학 법사는 모산재와 모산재가 뿜어내는 기운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명소마다 걸맞은 명상·수련 자세를 (합천군에서) 안내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놓았습니다.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충남 서산에서 온 고정길 현사는 "모산재의 장대한 기운을 느끼고 빼어난 풍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데서 시범을 하니까 국선도가 더욱 멋스러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심금희 사범은 오늘 생기를 느꼈다. 보통 사람도 누구나 적절한 지도·안내를 받으면 이런 생기를 체험할 수 있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모산재가 통째로 생기체험 수련처·명상처라는 얘기입니다.

 

무지개터에서.

 

 

국사당에서.

 

모산재는 퍽 가파른 편인데, 오르는 탐방로 군데군데에 쉼터를 만들고 거기서 잘 감상할 수 있는 기암괴석이나 멋진 풍경이 무엇인지 안내해 그것을 보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가쁜 숨을 고르고 다리품도 쉬도록만 좀 한다면, 모산재는 아마 얼마 안 가 둘도 없는 생기체험장으로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세계국선도연맹 사진.

 

바위로 이뤄진 돛대바위·정상·득도바위 그리고 순결바위, 또 바위산 가운데 드물게 흙이 풍성하게 모여 있는 무지개터라든지 국사당 자리, 영암사지 따위가 모두 그럴싸한 명상처·기도처·수련처임이 이날 국선도 수련인들의 탐방으로 확인이 됐으니까요.

 

김훤주

 

※ 사진을 가져가 쓰실 때, 특히 '세계국선도연맹 사진'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반드시 꼭 어쨌든, 세계국선도연맹한테 저작권이 있음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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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머리처럼 짧게 깎은 순천만 갈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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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는 ‘2014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두 번째 나들이는 전남 순천으로 갔습니다. 멀리 또는 가까이에 있는 습지를 찾아 즐겁게 누리면서 그런 습지가 우리 인간의 역사·문화·일상과 얼마나 깊이 관련돼 있는지를 몸소 느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습지와 생태계가 아주 소중한 존재임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것을 지키고 가꾸려는 마음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겠지요. 낙안읍성과 순천만은 이런 성격에 잘 들어맞는 탐방 대상이랍니다.

 

낙안읍성에는 인공습지라 할 수 있는 연못이랑 샘이 여럿 있습니다. 조선 인조 때 낙안군수였던 임경업 장군이 1628년 성 쌓기를 마무리한 이 읍성에서 요즘 들어 그 자취를 발굴해 복원한 것입니다. 여기 연못들은 옥사(감옥)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내판에는 죄수들 탈옥을 막는 데 연못이 한 몫 했으리라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겠습니까? 마실 물로도 쓰고 농사짓는 물로도 쓰고 아이 어른 놀고 쉬는 데도 썼겠지요. 때로는 여기서 물고기를 잡아 나눠먹기도 했으리라 싶은 것입니다.

 

4월 10일 오전 11시 즈음해 다다른 마흔여섯 일행은 동문 낙풍루(樂豊樓)를 거쳐 낙안읍성으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오른쪽 임경업장군선정비 투박한 거북 받침돌도 보고 담장 안팎도 기웃대다 객사에 들어섭니다.

 

현판에 낙안지관(樂安之館)이라 쓰였는데 가장 큰 건물입니다. 궐패를 모셨던 임금 권위를 돋보이도록 하려는 뜻이었는지 전체 일곱 칸에서 가운데 세 칸은 지붕이 한 뼘 더 높답니다. 뒤뜰에 가니 담장 너머로 오래 된 나무가 여럿 있었습니다. 둥치가 아주 굵은 하나는 말라죽은 채였습니다.

 

 

객사는 조용한 편이었는데 옆 동헌 사무당(使無堂)에는 이와 달리 아이들이 넘쳐납니다. 곤장 치던 형틀에 먼저 누워보겠다고 서로 난리법석을 피우는 것이었는데요, 원님 살림집이던 내아는 다시 조용해져 있었습니다. 앞뜰에 이런 놀이감이 없는 덕분이지요.

 

 

내아.

 

바로 앞 동헌 출입문 낙민루(樂民樓)는 높다랗고요, 그 옆 둥치 굵은 나무 아래에는 사람들이 하마 우북했답니다. 겨우내 말라 있던 가지들에서 피어난 여린 잎들이 그늘을 그윽하게 만들어낸 덕분이겠습니다.

 

 

 

나이 많고 둥치 굵은 나무들은 이밖에도 많았습니다. 은행나무·팽나무·푸조나무·느티나무·모과나무 따위들이 곳곳에 드높이 서 있었습니다.

 

상설체험장에서는 진도아리랑 가락이 드높게 울리고 어린아이들 노래하는 모양 구경하는 사람들은 즐겁게 손뼉을 쳐댄답니다. 옥사는 사람들 가두던 데라 그런지 그늘이 유독 서늘하지만, 마당에 장만돼 있는 곤장틀과 큰칼과 주리틀은 이미 아이들한테 장난감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낙안읍성 으뜸 미덕은 이런 데 있지 않습니다. 넉넉하게 들어선 초가집과, 거기 살면서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이 내뿜는 생기와 살가움이랍니다. 서문에서 오른 성곽길이 남문을 향해 굽어지면서 내려가기 시작하는 자리에 서면, 이런 초가집들이 한 눈에 함빡 들어옵니다.

 

 

텃밭과 나무와 사람들 사이로 누렇게 이엉을 올린 풍경이 푸근했습니다. 다가가서 돌담길을 거닐면 담벼락에 걸린 연장들도 눈에 들고요, 한 쪽 구석에 아무렇게 놓인 돌절구나 디딜방아도 정겨운 모습이었습니다.

 

 

문이 살짝 열린 부엌에서는 점심밥을 짓는지 설거지를 하는지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고, 안방에서는 바느질을 하는지 무엇을 다듬는지 고개 숙인 사람의 정수리가 보였습니다. 담장 위로 솟아오른 살구·매실·앵두나무들은 아마도 초가집과 나이가 비슷하지 않을까 여겨졌고요.

 

 

읍성 안 민속음식점에서 동동주까지 곁들이며 점심을 먹은 일행은 순천만을 향했습니다. 훌쩍 웃자란 갈대들이 드문드문하거나 성기지 않고 빼곡하게 빈틈없이 우거진 갈대밭이 거기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데, 메마른 갈대 몸통은 햇살에 따라 흰빛 잿빛 금빛으로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갈대숲은 때때로 햇살뿐 아니라 갯바람도 불러들이지요. 사람 옷깃을 붙잡고 놓지 않던 바람은, 우거진 갈대밭을 통째 무너뜨리면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도록 만든답니다.

 

 

순천만은 이렇듯 습지가 갖는 심미·치유 효능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사람을 사로잡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깨끗하게 씻어내도록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순천만은 습지의 경제 효능까지 보여주는 셈이 됩니다. 심미·치유 효과를 바라고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오니까 지역 경제에도 단단히 보탬이 되겠지요.

 

이번 순천만은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옛날 중학생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봄철에 한 번 베어내면 다른 계절에 더욱 풍성한 갈대를 누릴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베어진 자리 대궁이에서 솟아나는 여린 초록빛은 메마름 가운데 돋아난 싱그러움이었습니다.

 

갯벌도 덕분에 거뭇거뭇 드러나 있어 우거진 갈대밭일 때보다 갯내음은 한결 짙게 맡을 수 있었습니다. 오만 군데 다 나 있는 보송보송한 게구멍은 아이 여드름 같이도 보였답니다.

 

 

 

베어낸 갈대는 여러 모로 쓰인다고 합니다. 억새·볏짚과 마찬가지로 지붕을 이을 수도 있습니다. 발이나 모자나 돗자리, 그리고 울타리나 빗자루 따위 재료도 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얻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바닷물을 가두고 햇볕에 말리는 일본식이 들여오기 전에는, 소금을 얻으려면 바닷물을 솥에 담고 끓여야 했습니다(자염법 煮鹽法). 갈대는 땔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즐겁다.

 

 

 

 

어쨌거나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왔고요, 밑둥에서 다시 자라는 갈대는 막 싹튼 보리 같았으며, 순천만은 조류독감으로 말미암은 폐쇄를 풀고 생태체험선도 띄우고 있었습니다.

 

생태체험선.

 

 

 

돌아오는 길에는 마침 장날(5일·10일)을 맞은 순천 웃장(북부시장)에 들렀습니다. 일부는 순대집에 들러 돼지수육을 안주 삼아 순천 토종 막걸리를 마셨고 대부분은 장터를 돌며 물건을 샀습니다.

 

여수 칼치, 말린 칡뿌리, 커다란 오이, 그리고 산나물과 푸성귀까지. 저녁 6시 30분 즈음 창원 만남의 광장에서 내릴 때 보니 대부분 크든 작든 비닐 봉지를 하나둘씩 들고 있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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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만 누려도 저절로 맑아지는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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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낙안읍성에 가서, 성곽이나 초가집 그리고 잘 다듬어진 돌담 정도만 그럴 듯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이 처음 보는 눈에는 색다르고 도드라져 보이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지난 4월 10일 가봤더니 정작 훌륭하고 엄청난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된 나무들이었습니다. 들머리에서부터 끄트머리까지, 그리고 중간중간에 가지가지 나무들이 옛적부터 지키고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봄철이다보니, 줄기와 가지 곳곳에서 삐져나오는 그 푸르름이란!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 연녹색 잎사귀들! 사귀고 싶은 잎사귀들, 볼수록 빛나는 잎사귀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잎사귀들, 그러면서 동시에 들기름을 칠한 듯 윤이 나는 잎사귀들.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처럼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마도 동물쪽에서는 드물거나 없지 않나 싶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 붙박혀, 자연이 주는 것만 받으면서도 저리도 장한 존재가 나무들입니다.

 

 

물론 오랜 세월 살다가 고사한 나무도 있었습니다. 조금 썰렁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그또한 자연스러워 좋았습니다. 지난 세월을 보여주기도 하고, 저렇게 서 있으면서 죽어서도 세월이 꾸며주는 치장을 조금씩 해마다 철마다 하게 되겠지요.

 

초가지붕 둘러쓴 민가 뜨락들은 또 어떤가요. 감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 따위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집 처음 지어진 시기랑 나무가 심긴 시기랑이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이 되는데요. 돌담 위로 키를 키워 놓은 이런 나무들도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낙안읍성에는 성곽과 민가와 관청만 있지는 않습니다. 샘도 있고 인공 습지인 연못도 있고 거기 노니는 물고기도 있고 거기 자라는 마름 같은 물풀도 있습니다. 마을 역사와 함께 심겨져 자라온 우람한 나무들도 더불어 있습니다.

 

 

 

 

그런 나무 아래 삽상한 그늘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린 잎사귀들이랑 사귀고 싶습니다. 거기 나무들 말없이 버티면서 살아온 100년 200년 300년 세월에, 진정으로 옷깃여미고 매무새단정하게 경건함을 바치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제 겨우 50년 남짓밖에 살지 않았는데도 팍삭 지쳐 버린 한 인생이. 그렇게 팍삭 지쳐 버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사람이라는 존재로 태어난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한 인생이. 자기 몫이 아닌 것을 끊임없이 자기것으로 삼아야 존재할 수 있는 한 인생이.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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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재 무지개터 국사당 영암사지 다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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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모산재 무지개터와 국사당·영암사지가 전문 풍수지리사로부터 명당이라는 감평을 받았습니다. 무지개터 등의 풍수지리적 가치가 여태까지는 사람들 사이에 말로만 전해져오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들 장소가 합천 관광 활성화를 위한 모산재 생기체험 프로그램 개발에 활용될 개연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4월 19일 합천군 초청으로 모산재를 둘러본 민중원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회장 겸 전국풍수지리학회 총재가 24일 감평서를 보내 무지개터·국사당·영암사지가 “모두 진혈(眞穴)로 명당”이라고 밝혔습니다.

 

무지개터는 산소를 쓰면 개인은 크게 발복(發福)하지만 대신 나라가 망한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국사당은 고려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위해 무학대사가 기도했다는 자리며 영암사지는 모산재를 배경으로 삼아 남향을 한 통일신라시대 절터랍니다.

 

1. 무지개터는 정상에 자리잡은 보기 드문 명당

 

 

민중원 회장은 무지개터에 대해 정상 가까이에는 혈(穴)이 잘 맺히지 않는데 여기는 보기 드물게 혈이 맺힌 명당으로 생기가 흐른다고 얘기했습니다. “풍수지리는 장풍(藏風 바람을 가려줌)을 중시하고 또 땅의 기운은 흙으로 모이므로 돌산이나 산마루에는 명당이 드물지만 무지개터는 주변이 암석이고 한가운데는 흙이어서 드물게 보는 석중혈(石中穴)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무지개터에서 단전호흡과 명상을 하고 있는 국선도 고수들.

 

민 회장은 또 “정상에 높게 자리잡은 천혈(天穴) 또는 천교혈(天巧穴)로 귀(貴)함을 주관하는 자리로 인체에 비유하면 정수리에 맺힌 신문혈(顖門穴)이고 사물에 견주면 하늘을 비추는 촛불 같은 조천납촉혈(照天蠟燭穴) 또는 매달아놓은 등불 같은 괘등혈(掛燈穴)”이라 평했습니다.

 

아울러 “둥우리 모양을 한 와혈(窩穴)인데 테두리와 위에서 양옆으로 내려간 줄기, 양옆에서 아래로 감싼 줄기가 선명하며 가운데 둥글게 솟아 뒤를 받쳐주는 승금(乘金)이 두텁고 묵직한 진혈”이라면서, 가운데가 패여나간 부분을 아쉬워했습니다.

 

도도록하게 살찐 미유(微乳)·미돌(微突)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한가운데를 기우제 등을 지낸다고 파냈다고 들었는데 원래대로 복원하고 잔디를 입혀 높이면 좋겠다”는 처방을 내놓았습니다.

 

이밖에 무지개터를 좋게 만드는 다른 요인도 있다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아래로 보이는 대기저수지도 풍수지리상 좋은 영향을 미친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재물을 뜻하는데 물이 흘러 달아나지 않고 많이 고여 있다는 것은 부(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순결바위. 아래에 대기저수지가 보입니다.

 

2. 보호 양생도 되고 기도 목적도 이뤄지는 국사당

 

 

국사당도 민중원 회장은 좋은 자리라고 감정했습니다. 민 회장은 “정상에서 뻗어내린 줄기가 자체적으로 봉우리를 일으켜 혈이 맺혔는데 바위절벽 등 살기로부터 벗어난(脫殺) 곳으로 황매산 줄기가 뒤를 받쳐주는 낙산(樂山) 역할을 하고 전체가 흙으로 돼 있어 느낌이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국선도 고수들이 국사당에서 내공 시범을 하고 있습니다.

민 회장은 “대개 기도터는 바위절벽 자리가 효험이 좋다고 하는데 여기는 기도하는 목적 달성뿐 아니라 오랜 시간 기도하는 사람의 몸도 돌볼 수 있는 자리로 풍수지리상 가치가 있으므로 소원성취의 명당터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전망했습니다.

 

천지신명한테 빌거나 명산대천의 기운을 누리거나를, 국사당 자리에서 편안하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국사당은 흙으로 덮여 있어 보통 기도처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골짜기 바위절벽 같은 데와는 달리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3. 영락없고 손색없는 절터, 영암사지

 

마지막으로 둘러본 영암사지를 두고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본을 제대로 갖춘 공간으로 전혀 손색없는 절터인데 앞에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있으니 확 트인 곳보다 도를 닦는데 유리하므로 소원성취를 빌어보는 기도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영암사지에서 국선도 고수 들이 외공을 하고 있습니다.

영암사지에서 기수련을 하는 국선도 고수들.

민중원 회장은 아울러 정상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보이는 이런저런 여러 산봉우리들이 명당자리를 품었음직하다는 것입니다.

 

 

“모산재 자체에 명당이 여럿 있다는 홍보도 좋지만 정상에서 전후좌우로 천하제일 명당자리를 볼 수 있으므로 덕을 쌓으면서 자주 오르면 명당자리를 찾을 수 있는 안목이 뜨인다(開眼)고 알리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감평을 바탕으로 합천군이 본격 나서서 모산재를 생기체험장으로 새로 꾸미게 되면, 전문 기수련을 하지 않은 보통 사람도 쉽게 우리 산천경개의 기운을 누리고 느낄 수 있는 좋은 터전이 될 것 같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제주올레에 담긴 사람 자연 문화 역사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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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제주올레 완주기

 

친구 성우제가 쓴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를 쉬엄쉬엄 읽었습니다. 설렁설렁 쉽게 읽히는 책이었습니다. 여행 관련 글이니 일부러 어렵게 쓰려 했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책입니다.

 

군데군데 드문드문 밑줄을 쳐 가면서 읽었습니다. 무슨 교훈이나 새로운 사실이 거기 스며 있기 때문은 물론 아니고요, 남다른 표현이나 감각이다 싶은 데에 손길이 머물렀습니다.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도와 제주올레의 아름다움이나 특별함·멋짐 따위를 많이 다루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거기 사람과 문화와 역사도 건져 올리고 있었습니다. <폭삭 속았수다>를 읽으면서 눈길이 한 번이라도 더 갔던 글귀들을 풀어놓아 봅니다.

 

1. 숨어 있던 옛 이름들 살려낸 올레길

 

 

올레길이 생겨서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게 주인은 “사람이 많이 와서 장사가 잘된다” 같은 상투적인 말 대신 재미있는 답을 내놓았다.

“해안도로를 돌면서 숨어 있던 옛 이름들을 살려내서 좋다. 산물통·답다니탑 같은 정겨운 이름들을……” 그이는 한때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했다.(20쪽)

 

땅콩 막걸리 낮술 한잔을 걸치면서 해녀의 남편 및 해녀와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략) 우도에 사는 사람들과 나눈 짧은 대화를 통해 ‘내가 알던 제주도’는 실제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우도는 제주도의 많은 것을 한데 모은 작은 섬인 동시에, 제주도 여행 오리엔테이션을 받기에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26쪽)

 

곁을 지나는데 “음료수 한잔하고 가세요”라며 나를 부른다. 이런 호의는 거절하면 안 된다. 호의를 고맙게 받는 것이 베푸는 사람에 대한 예의이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갚으면 된다, 라고 나는 들었다.(45쪽)

 

터진목 모래밭은 새벽 바위를 감상하는 가장 달콤한 자리인 동시에 “냉전의 가장 삭막한 한 대목”이 펼쳐진,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대표적인 지점이다. 이곳에서 성산읍 지역 양민 4백여 명이 학살을 당했다. 성산읍 4·3사건 유족회는 2012년 유적지를 만들어 그 넋을 담담하게 위로하고 있다.(53쪽)

 

2. 29년만에 혼자 하는 첫 외출을 제주올레로

 

그는 직장 생활 29년만에 혼자 하는 첫번째 외출이라고 했다. 한 달 예정으로 올레길을 모두 걸어볼 참이다. “한 직장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이렇게 잘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이는 아픈 속마음을 혼잣말하듯 털어놓았다.

 

“가만있으면 슬프잖아. 퇴직자 지원 프로그램에 등록해서 학원도 두 달 다녔는데…… 나를 낮추는 게 어려워. 버리기가 힘든 거지. 어제 엔지니어로 일했다는 어떤 인생 선배를 만났는데, 2년 쉬다가 경비한대. 나도 금방은 안 될 것 같아, 낮추는 게.”(76~77쪽)

 

제주도 밭담만큼이나 아름답고도 긴 ‘선의 예술’이 지상에 또 있을까 싶다. 밭담의 최고 매력은 역시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소박함이다. 규격·표준화한 것 하나 없이 어느 담을 봐도 구불구불 제각기 다른 모양이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누대에 걸쳐 돌을 쌓아올린 오랜 역사까지 담 안에 녹아 있으니 완벽한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다.(83쪽)

 

3. 험한 것도 천천히 걸으면 할 수 있다

 

성우제. 잘 웃는다.

 

남편은 불편한 몸인데도 카메라를 걸치고 있다. 걷다가 야생화가 보이면 쉬면서 사진을 찍는다.

 

“우리 아저씨가 대단하다. 여기 와서 고생을 좀 했다. 어제는 무리를 해서 오늘 못 걸을 것 같더니 아침 6시에 일어나 나왔다. 걷다가 지루하면 내가 노래도 불러준다. 우리 아저씨 즐겁게 해주려고…… 이 얘기 저 얘기 많이 하고 지금은 재롱도 부린다.” 아내는 발랄하고 남편은 과묵하다.

 

남편이 입을 연다.

“먼저 가세요.”

말하기가 성가셔서 그런가 싶어 순간 긴장했다. 그게 아니라 내 걸음을 맞추자니 숨이 차서 그렇다고 했다. 남편은 말했다. “험한 길도 천천히 가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하면서…… 다리가 튼튼해지면 한라산에도 오르고 싶다.”(84~85쪽)

 

“3코스 걷다가 너무 지쳐서 오늘은 짧은 코스를 걸으려 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운이 생겼다”고 그이는 말했다. 나도 그랬고, 올레길 걷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 지치고 힘들어서 다음날 도저히 못 걸을 것 같다가도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새롭게 솟는다.(96쪽)

 

4. 민간의 자발성이 제주올레를 빛나게 한다

 

우리나라에 생겨난 수백 개의 걷는 길 가운데 제주올레길이 돋보이는 까닭은 원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올레길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민간의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순전히 민간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이 주도한다고 하여 나쁠 것은 없으나, 민간 차원에서 출발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것에 비한다면 생동감이나 생명력은 확실하게 떨어진다.(171쪽)

 

올레 정신에서 어긋난다며 포클레인 한 번 쓰지 않고 삽과 곡괭이만으로 작업을 했으니, 길을 낸 사람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길을 걸어본 사람이면 안다. 때로는 그냥 걷기에도 힘에 부치는 길들을 그들은 찾거나 만들어냈다.(172쪽)

 

강정마을 앞바다로 가던 올레길은 담장에 막혀 마을로 돌아간다.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마을을 책마을로 꾸민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찾아보고 싶었다. 지나는 길에 눈에 띄지 않아서 “다음에 찾아보지, 뭐” 하다가 결국 가보지 못했다. 길은 한 번 지나가면 돌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179쪽)

 

그는 구체적인 속내를 이야기한다. 최근 회사에서 대규모 명예퇴직이 이루어졌다. 그는 그 방식 때문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 능력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고 몇 년생 이상을 모두 그만두게 했다는 것이다(몇 년생인지 들었으나 쓰지 말라는 부탁이 있었다).

 

“바로 내 앞에서 잘려나갔는데 능력 있는 선배들, 안타까운 선배들이 많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한들 미래가 없다. 충격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멘붕’이 올 법도 하다. 누구도 불만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아주 ‘공평’한, 그러나 초강력 처방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를 대고 나이라는 숫자에 빨간 줄을 그은 다음 그 위를 털어낸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 걸으며 노래도 부르고, 바다를 보며 소리도 치르고 했다는 조씨는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다 털어놓아서 속이 시원한데, 처음 만나서 결례를 한 것 같다.” 그러고는 점심 값을 서둘러 낸다.

 

나는 그가 속을 시원하게 털어놓아서 오히려 고마웠다. 가까운 친구들끼리도 잘 나누지 못하는 한국 중년 남성의 슬픔을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185~186쪽)

 

우선 흙길은 밟는 곳마다 다른 모양, 다른 느낌이지만 시멘트 길은 어느 곳을 밟아도 똑같은 느낌이다. 발에 와 닿는 길의 느낌이 프랜차이즈 커피점처럼 획일적이다. 똑같은 강도의 딱딱함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발에 와 닿아 피로감이 더하다.(188쪽)

 

5. 세한도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소나무

 

“선배, 저 소나무 좀 봐요. 특이하지 않아요?”

너른 들판, 마늘밭 사이로 난 들길을 걸으면서 이실장이 소나무 몇 그루를 가리킨다. 소나무가 뭍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잎이 무성하여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적송赤松과 달리 제주도 소나무는 숱이 적고 듬성듬성 빠진 쓸쓸한 모습이다. 바닷바람에 시달리지만 바닷바람에 잘 견디는 곰솔(해송海松)이다. 나무 색깔도 회백색이다.

 

이 소나무들이 왜 눈에 익었나 싶었더니, 추가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에 스산한 분위기의 곰솔과 닮았다. 지금 걷는 이 길은 추사가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대정읍 안성리 추사적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다.(277쪽)

 

6. 올레길에서 만나는 인심과 풍속

 

노씨에 따르면 ‘천 원의 행복’은 한경면 조수리 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소년소녀 가장 돕기 프로그램이다. 마을 입구에 농산물 무인 판매대를 설치하고, 이 동네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판매한다. 곡물·야채·과일 한 봉지에 천 원씩이다.

 

 

수익금은 모두 한경면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데 쓰인다. 판매대에 대한 호응이 꽤 뜨거운 것 같다. 4월 한 달 수익금은 54만3,210원. 어린 가장 다섯 명에게 매달 3만원씩 지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노씨는 ‘천 원의 행복’을 지난 1월에 시작했다고 했다. 올레길 곁에 있는 쉼팡은 ‘천 원의 행복’에서 파생된 일로 “우리 마을 곁을 지나는 올레객들에게 마을 인심을 전하는 곳”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쉼팡에서도 귤을 판매한다.

 

5월 ‘천 원의 행복’ 판매대에는 배추 세 단, 감자 세 봉지, 감자 세 봉지가 나와 있다. 나는 나중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겠지만 잡곡 한 봉지를 사서 배낭에 넣었다.

 

올레길로 돌아오는 길. 청년회에서 길옆에 화단을 만들었다. 꽃길을 걸으며 ‘천 원의 행복’을 만끽했다. 바쁜 농사철이어서 노씨와는 5분도 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이렇게 바쁜 사람들이 농산물 무인 판매대와 올레꾼 쉼팡을 어떻게 기획하고 운영하는지 그 정성이 놀랍고 아름답다.

 

마음이 맑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13코스는 제주 바다를 낀 화려한 풍경이 없는 대신 이렇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볼거리가 많다.(287~288쪽)

 

지금 벌초하는 곳은 “둘째 어머니 산소”라고 했다. 고씨에게는 어머니가 세 분이다. 그이의 아버지는 1928년생. 아버지 세대만 해도 제주도에서는 일부다처가 흔한 일로, 사회적으로 공인되었다.

 

바다를 향해 용암이 꿈틀꿈틀 뻗어내려가다 굳어버린 모습. 멀리 우도가 보입니다. '폭삭 속았수다'에 없는 사진입니다.

육지와는 반대로 제주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아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고기밥”이라고 여길 만큼 해상 사고가 잦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관의 지독한 수탈과 왜구의 노략질 등을 피해 뭍으로 도망간 제주도 남자만 만 명을 헤아렸다.

 

(중략) 급기야 조선 인조 7년(1629년)에는 출륙금지령까지 내렸다. 금지령은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기근에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더해져서 제주도 남자들은 탈출 러시를 이룬다. 4·3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도 엄청나게 컸다.

 

해상사고와 핍박, 수탈, 흉년 등으로 일찍 죽거나 생존을 위해 섬 바깥으로 도망쳐야 하는 운명. 태생적으로 그런 운명을 타고 나는 남자 아이를 집안 어른들이 선호할 리는 만무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 남자가 여자 여럿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여자와 함께 살아야 했다. 역사적·사회적 환경 탓이다.

 

육지에서는 첩을 비하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본부인을 큰각시, 작은부인을 조근각시라고 부른다. 조근각시를 첩으로 하대하여 차별하는 풍조가 없고 큰각시·조근각시가 함께 살기도 했다.

 

뭍에서와는 달리 제주도에서는 둘째 어머니 산소라고 하여 벌초를 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남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사연을 알고 나면 “제주도는 삼다도”라고 가볍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돌은 제주도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말하고, 여자가 많다는 것은 제주도의 오랜 아픔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고창억 씨의 친모는 셋째 어머니. 큰어머니는 생존해 계시고, 둘째 어머니와 친어머니는 작고했다. 고씨는 친모에게서 난 8형제의 막내. 세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은 모두 14남매이다. 고씨가 1968년생이니 시대를 감안하면 형제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다.(293~294쪽)

 

 

5월 제주 농촌은 어디를 가든 마늘종을 쳐내느라 바쁘다. 말 걸기가 미안해서 그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298쪽)

 

6. 올레길에서 만나는 인심과 풍속 2

 

이사무장의 집은 지금 4대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올해 아흔둘이신데 오늘도 아래층에 운동을 하러 오셨다.”

 

집 대문은 하나지만 건물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다. 대문의 왼쪽 바깥채에는 부모님, 가운데 안채에는 할머니, 그리고 바깥채를 또 하나 새로 지어 이미순 씨 부부와 자녀들이 산다. 제주도 전통적 가족 형태인 ‘따로 또 같이’의 전형이다.

 

“4대가 안거리(안채)·밖거리(바깥채)에 살면서 밥을 따로 해먹는 것을 육지에서는 이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육지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풍습이다. 구순 할머니께서도 밥을 직접 지어 드신다. 제주도에서는 어른이고 자식이고 이렇게 독립심이 강하다.”

 

“살림을 따로 하니 시집살이는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사무장은 웃기만 했다. 서류를 떼러 왔다가 이야기를 듣던 한 주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안하는 건 아니죠.”(315~316쪽)

 

 

저가 항공 이야기를 하다가 그이는 갑자기 ‘이재수의 난’을 아느냐고 묻는다. 저가 항공인 제주항공이 애경그룹 계열사인데, 애경그룹이 제주항공을 운영하게 된 배경이 있다고 했다.

 

애경그룹 창업자 장영신 회장의 시댁 선조가 장두 이재수를 통인(관노)으로 데리고 있었던 대정군수 채구석이라는 얘기다. 군수로서 백성 편에 서서 난을 수스하려고 애를 썼던 채구석은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얻은 관장이었다.

 

도민들은 채구석 군수의 우선 석방을 조건으로 내걸고 프랑스가 요구한 배상금을 물겠다고 자원하고 그 약속을 이행했다. 제주도와 애경그룹 간에 그런 인연이 있고, 그 연이 제주항공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320쪽)

 

7. 제주도 기부금 내는 문화의 뿌리는 무엇일까?

 

올레길은 밭길을 따라 이어진다. 양배추를 한 트럭 가득 실어가는 광경이 보인다. 제주도 밭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든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백전백색百田百色이다. 지금은 수확을 마치고 텅 비어 있는데도 밭마다 제각기 흙 색깔을 달리하며 이곳만의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밭담의 곡선은 더 유연하고, 하늘과 오름이 밭과 잘 어울린다.(322쪽)

 

 

지금도 마을에 기부금 내는 문화가 살아 있는지, 기부금을 낼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중략) 4·3사건 때 마을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이는 선선히 대답해준다. 일이 벌어질 당시 그이는 여덟 살이었다.

 

이 동네도 초토화된 130여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이 모두 불타고 우리는 해안가로 피난 갔었다. 산으로 도망갔다가 죽은 사람도 많고. 한국전쟁 이후 올라왔더니 동네가 잿더미였다. 산에서 벤 나무를 등에 지고 와서 집을 지었다. 굶주림과 고생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씨는 “협조심이 있어서”라고 했지만 기부금 문화에 대한 실마리를 본 듯했다.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향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일본에서든 육지에서든 이 마을 출신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불행을 겪어본 일이 없는 육지 사람들에 비해 고향에 대한 애정의 강도도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을 터이다.(339~340쪽)

 

젊은 사람들 많이 살러 오지. 먹고사는 건 자기 하기 나름이여. 몸으로 일하겠다고 해봐. 일거리는 쌨어. 내 이름? 뭐 비싼 거라고 숨긴대? 임병애여. 나 첨에 여기서 기절할 뻔했잖아. 자기 아들 며느리 같이 살면서 밥은 따로 해먹더라니까. 한집에서도 같이 안해먹어.

 

육지에서 보면 그런 몰상식이 어디 있어? 근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그게 합리적이야. 시어머니들이 그러더라고. 며느리들하고 살면 배가 고프대. 옛날에는 식량이 없잖아. 젊은 애들이 일을 많이 하니까 많이 먹고 노인들은 적게 먹는데,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따로 먹기 시작했대.(354~355쪽)

 

들길에서 올레길을 걷는 40대 부부를 만났다. 남편이 공무원이다. 10년 전 발령을 받아 부산에서 제주도로 왔다. 부인은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3년만 살다 가려 했는데 살다 보니 좋아서 그냥 눌러앉았다”고 남편은 말했다.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그이의 답변이 재미있다. “외국말 안해도 되는 외국 같지 않습니까?”(355쪽)

 

8. 올레길이 열어보여주는 제주도 역사 명소

 

참깨씨를 뿌려놓고 꽝꽝나무로 만든 이 선비를 끌고 다니며 알맞추 흙으로 묻어주고 있는 김두생씨. 290쪽.

 

제주도에 자주 왔으면서도 관덕정 광장을 알고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올레길은 평소 몰라서 볼 수 없었던 제주도의 다양하고 중요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도의 관광 명소는 많이 보았으나 제주도의 역사적 명소를 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361쪽)

 

동문시장 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었다. (중략) 물어물어 오현단을 찾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거나 관인으로 내려와 민폐 제거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조선 시대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라고 했다.

 

비석들이 소박하게 서 있는 모습, 김상헌, 송시열 같은 알 만한 분들의 이름이 보인다. 서울에서 만난 제주도 출신 남자들 대부분은 오현고 출신이었다. ‘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362~363쪽)

 

불탑사 안에 있는 석탑은 세계에서 유일한 현무암 석탑이자 제주도에서 유일한 불탑이다. 기황후가 아들 낳기를 소원하며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탑을 제작한 석공은 고려 사람일 터이며 탑의 재로 및 양식 또한 이 땅의 것이다. 오층석탑은 날렵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오층석탑이 조성되어 있는 정원이 좋다. 감귤나무·배롱나무·동백나무·대나무가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언제부터인가 ‘잘생긴’ 탑을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새소리·바람 소리가 들린다. 탑을 바라보며 정원 안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394쪽)

 

“나는 1969년 12월 중순에 배를 타서 이듬해 1월 3일 일본에 도착했다. 큰 배의 한구석에 10여 명이 함께 탔었다.” 그때까지도 한국이 살기가 어려웠던 만큼 밀항이 많았다. 그는 닥치는대로 일했다.

 

공장에도 다니고 ‘노가다’도 하면서 돈을 모았으나 ‘합법적인 신분’을 만들어 준다는 브로커에 속아 10년 동안 번 돈을 몽땅 털리고 말았다. 요코하마 불법 체류자 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다. 나중에 불러들였던 아내도 따로 수용되어 아이 둘을 수용소에서 키웠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벌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그이는 “너무 억울해서” 약속을 깨고 도망을 갔다. 3년 후인 1990년에나 고향 땅을 밟았다. 20년 만이다.

 

“예전에는 한국이 못살 때고 일거리도 없고 해서 나처럼 많이들 건너갔었다. 요즘에야 일본에서 고생하는 만큼만 일하면 여기서도 다 부자 되는 거지.” 1944년생. 성은 백씨라고 했다. 옛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상한 마음을 조금 달랜 듯 인사를 할 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폭삭 속았수다'에 없는 사진입니다.

 

나는 좋은 커피에 누구보다 집착하는 커피 마니아지만 봉지 커피를 최고로 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커피 한잔을 함께하면서 뜻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바로 그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커피이다.(396~397쪽)

 

북촌리 포구에는 단순하고 나지막한 옛 등대가 하나 서 있다. 고기잡이 나간 배가 불을 보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1915년 동네 사람들이 돌을 쌓아 만든 등명대(도대불)이다. 등명대 위에 건립비를 세우고 건립 연도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 특이하다고 하는데, 건립비의 귀퉁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4·3사건 때 총탄을 맞은 흔적이라고 했다.(414쪽)

 

9. 걷기 여행은 몸을 불편하게 만든다

 

일반 여행이 몸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하는가 쪽으로 진화해왔다면, 도보 여행은 몸을 어떻게 하면 더 불편하게 만드나 하는 쪽에 관심을 갖게 된다. 걷기 여행은 편하게 빨리 이동하며 보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일부러 멀리하면서,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고 받아들이게 한다.

 

몸을 불편하게 하는 여행은 곧 몸을 위한 여행이다. 숲속에 들어서면 모든 감각이 저절로 열리고 민감하게 작동한다. 새소리, 바람 한 점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 동복리에서 김녕리로 넘어가는 늦은 오후의 숲길, 한적한 이곳에서 도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홀로 즐긴다.(417~418쪽)

 

(캐나다) 브루스트레일은 멤버십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1년 회비는 50달러(약 5만2천 원)이다. 회비를 내면 헝겊으로 만든 브루스트레일 마크를 보내준다. 회원들은 헝겊을 모자나 배낭에 붙이고 다닌다. 브루스트레일을 걷는 중에 “회원 등록을 했느냐?”고 물어오는 회원들이 종종 있다.

 

트레일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회원이 되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고 그들은 강력하게 권한다. 이런 말을 두어 번 듣고도 회원 등록을 하지 않는다면 강심장이다.

 

50년 역사를 헤아리는 브루스트레일과 2007년에 길을 열어 2012년 완성된 제주올레의 멤버십 제도를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올레길을 걸으면서 아쉬운 광경을 더러 목격했는데, 올레길은 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 모두의 재산이라는 인식이 아직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올레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길을 사랑하고 관리하는 주인이 되어 후원자에게 주는 ‘날개 달린 조랑말’ 마크를 달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원이 되시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문화가 제주올레에도 머지않아 자리잡게 될 것이다.(439~440쪽)

 

 

바닷길을 걸으면서 수십 개의 테왁을 띄우고 물질을 하는 해녀들을 또 본다. 올레길을 걸어오는 동안 해녀가 혼자 작업하는 광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동으로 작업을 한다.

 

물론 각자 일하는 만큼 수익을 얻지만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개별적으로 물질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속에서 하는 일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정신은 이렇게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442~443쪽)

 

두 발로 걸어서 완주를 했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내 몸과 마음속에 많은 것을 담아 간다는 기쁨이 더 컸다. 몸과 마음은 좋은 에너지로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내 생애에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또 올까 싶었다.(447쪽)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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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요금 단일화와 해안감시원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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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접근성도 떨어지고 요금도 더 내고

 

경남 지역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시(군)내버스 요금이 1200원 같은 요금으로 단일화돼 있는 데가 그렇지 않은 데보다 훨씬 적습니다. 창원·김해·진주·사천·양산 정도만 그렇고 나머지는 아닙니다. 같은 주민이라도 사는 데가 시청·군청 소재지에서 멀수록 시내버스 탈 때 돈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어르신들 없는 살림에 한 번 나들이하는데 시내버스 요금이 왕복 6000~7000원은 예사입니다. 심지어 합천 삼가는 같은 합천이라도 북쪽 끝 해인사까지는 7800원인가 합니다. 왕복 아닌 편도 요금이 이렇습니다.

 

행정기관이나 문화·복지기관 같은 편의시설이 몰려 있는 중심지에 사는 주민들은 같은 버스를 타도 요금은 적게 내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시간도 더 걸리고 교통편도 불편한데다가 요금까지 더 내야 합니다.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물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기름값도 더 들고 그래서 요금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당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울이나 부산은 1200원 한 번만 내면 끝에서 끝까지 두 시간 넘게 그것도 갈아타고 하면서 다녀도 까딱 없이 괜찮은데 그것은 왜일까요?

 

 

현금 수입이 별로 없는 시골 어르신들한테 이런 시내버스 요금이 적지 않게 부담이 되는 줄로 저는 압니다. 고질병이 있어서 의료기관이 있는 읍내까지 날짜 정해놓고 꼬박꼬박 나들어야 하는 경우는 부담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런데도 요금 단일화 공약은 찾기 어렵고

 

지금도 걷기 여행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다 보면 시골 구석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이런 하소연을 하는 어르신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데도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이런 공약을 내는 후보가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까닭이 무엇일까요? 형편 넉넉지 못한 이런 어르신들이, 특히 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일수록 더욱 조직돼 있지 못하고 세력화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에 더해 후보들은 대부분 시내버스 따위는 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이런 것 알아서 챙겨주면 득표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꼼꼼하게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예산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3. 산불감시원은 있고 해안감시원은 없는 까닭

 

 

그런데 지방선거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대상은 어르신만이 아니랍니다. 자연 생태계도 그렇습니다. 자연 생태계는 아무리 부당한 처사를 당해도 당장은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생태계를 망가뜨려도 곧바로 잘못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파업을 하지는 못해도 앙갚음은 할 줄 압니다. 자기가 겪은 바를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보기를 들자면, 바다가 더러워져서 물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같은 자연이라도 산은 나름 보호를 받습니다. 산불감시원제도를 두고 이르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사람은 위험한 존재한테 먼저 관심을 보이는가 봅니다. 산불이 나면 집도 사람도 재산도 불타고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으니까요.

 

 

우리 해안이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쓰레기로 덮여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도시 부두 가까운 바다에서 죽은 물고기를 한 마리 건졌는데 배를 갈라보니 폐스티로폼 작은 알갱이가 수북하게 들어 있더랍니다. 바닷물에 뜰 뿐 가라앉지 못해 죽었던 것입니다.

 

해안감시원을 둬서 이들로 하여금 있는 쓰레기를 치우게 하고 또 쓰레기 버리려는 사람이 있을 때 말리게 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이른바 일자리 창출도 될 텐데요.

 

울산이 떨어져 나가고 부산이 양산의 바닷가 읍·면을 쓸어담아 가면서 경남 지도에서 동해안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남해 바다가 아직은 짱짱하고 여전히 쓸만합니다. 조금이라도 덜 망가지게 하는 정책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채택해 쓰면 좋겠습니다. 이번 6·4 지방선거를 계기로 삼아서요.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 4월 22일치 '데스크칼럼'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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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박근혜의 '대통령의 글쓰기'도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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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를 읽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실 행정관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모두 합해 8년 동안 근무했던 사람이 펴낸 책입니다.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새롭게 배운 점도 많고 제가 나름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한 점도 많았습니다.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것들을 차례대로 적어봅니다. 이런 정도만 익혀도 누구나 글을 쓰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모자라는 구석도 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모든 연설을 다 잘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잘못된 연설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이들의 실패한 연설, 실패한 글쓰기를 구체적인 보기로 들며 그 까닭을 제대로 밝혀내기만 하면 좀더 크게 좀더 많이 좀더 정확하게 배울 수 있을 텐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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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만 있으면 된다.논리적인 얘기보다 흉금을 터놓고 하는 한마디가 때로는 더 심금을 울리기도 하니까.(68쪽)

 

횡설수설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할 얘기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느낀 그대로, 아는 만큼 쓰자. 최대한 담백하고 담담하게 서술해나가자. 그러면 결코 횡설수설하지 않는다.(68~69쪽)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당시까지 해온 어록들은 모두 모았다. (중략) '주제별 어록'이란 책으로 가제본을 하여 대통령께도 보여드렸다. 연설문을 쓸 때마다 그것을 찾아봤다. 모든 실마리를 거기서부터 찾았다. 김대중이란 거인의 글을 보좌할 수 있는 힘이 그곳에서 나왔다. 나는 난장이였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무동을 타고 있었다.(76쪽)

 

그다음으로 찾아봐야 할 것(자료)이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메시지에 관련된 내용이다. 핵심메시지 관련 자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보는 게 좋다. 글을 쓸 때 먼 곳에서 자료를 찾으려고 구천을 헤매는 경우가 많다. 시간만 낭비하고, 설사 찾았다 한들 공허한 소리가 되기 십상이다. 파랑새는 우리 집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79쪽)

 

말과 글의 성패는 첫마디 첫 문장에서 판가름 난다. 거꾸로 얘기하면, 출발에서 실패하면 독자와 청중은 떠난다. 그런 점에서 글의 시작은 유혹이어야 한다. 치명적인 유혹이면 더욱 좋다. 그러나 쉽지 않다.

(중략) 긴장하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다. 첫째는 눈이 높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쓰기가 아닌 글짓기를 하려고 한다. 글짓기는 농사짓기와 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욕심을 버리자. 나중에 고친다는 생각으로 일단 쓰고 보자. 시작하는 용기가 글쓰기의 첫걸음이다. 다른 하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검열한다. 이렇게 쓰면 남들이 저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럴 사람 없다. 설사 있더라도 나중 일이다.(95~96쪽)

 

2009년 8월 경남도청 분향소. 경남도민일보 사진.

 

자기가 아는 말을 해야 쉬워진다.모르는 소리는 글을 어렵게 만든다. 알더라도 알은체를 하는 순간, 어려워진다. 특히 전문용어는 아예 쓰지 않거나 쉽게 풀어서 써야 한다. 또한 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한자어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115쪽)

 

"반드시 창의적일 필요는 없습니다.대신에 진부한 인사나 칭찬으로 시작하는 것은 피해주세요."

<노무현 대통령>

특히 일반론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지면과 시간 낭비다.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같은 사안도 낯선 눈으로 보면 새롭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말대로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119쪽)

 

가장 좋지 않은 마무리는 질질 끄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설가 안정효는 <글쓰기 만보>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장황한 종결은 낭비다. 그것은 꽃상여와 비슷하다. 살아서는 뼈 빠지게 가난하여 누더기만 걸치고 옹색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은 다음 만장을 휘날리며 꽃상여를 타고 가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누구나 멋있게 끝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욕심을 낸다. 하지만 마무리쯤 오면 독자나 청중은 지쳐 있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

반대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에 생각나지 않던 것이 끝날 때가 되면 떠올라 할 말도 많아지고 아쉬움도 커진다. 그래서 끝낼 듯 끝낼 듯하면서 끝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사족이 된다.(130~131쪽)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자.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물어볼 것이고, 느낌은 얘기해줄 것이며, 명백한 오류는 잡아줄 것이다. 나아가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줄 것이다. 특히 전문적인 내용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 조언을 구하는 게 필수다.(144쪽)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면 좋다.너무 분명하면 여지가 없다. 상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약간은 모호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148쪽)

 

경남도민일보 사진.

 

노무현 대통령은 여기서 한 발짝 더나아간다.

"글이라는 것은 중학교 1, 2학년 정도면 다 알아들을 수 있게 써야 한다."

실제로 중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이 어디쯤인지 알고 싶다며 중학교 교과서를 가져와 보라고 한 적도 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정의, 즉 소수가 누리던 것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까지 확산하는 것, 그런 시각에서 보면 선택된 소수가 아니라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역사 발전에 일조하는 길이다.(173쪽)

 

쉬운 이해를 위한 세 번째 방법은 사례를 들고 비유를 하는 것이다. 여행 갔을 때, 가이드가 그 나라 국토 면적을 몇 제곱질로미터라고 하면 이해가 쉽던가? 한반도의 몇 배다, 이렇게 설명해야 쉽지 않던가.

넷째 반복해줘야 한다. 세 번 정도는 반복해줘야 전달이 분명하게 된다고 한다. 글의 서두에 내가 할 얘기는 이것이다(한 번), 이런 얘기를 하는 배경은 이것이다(두 번), 내 얘기의 결론은 이것이다(세 번)는 식으로.

단, 이런 반복이 '강조'로 들리지 않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횡설수설로 들리면 곤란하다.(175쪽)

 

대우 김우중 회장은 달변이었다.생각도 많고 할 말도 많았다. 그는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국면에서 전경련 회장이었다. 말을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결과론이지만, 대우 사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눌변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할 말만 짤막하게 한다. "기업은 2류, 정치는 3류",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그 파괴력은 컸다. 할 말 똑 부러지게 전달하는 게 좋은 글이다.(184쪽)

 

경남도민일보 사진.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필화사건을 주로 변론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그의 책 <권력과 필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필화는 있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없다고 다행인 것도 아니다. 전자가 의당 해야 할 비판과 저항의 살아 있음의 증좌일 수 있고, 반면에 후자는 압제 하에 항복한 침묵과 굴종의 반사적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노무현도 작은 필화사건을 겪었다.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짓기 시간에 '택도 없는 대통령'이란 뜻으로, '택통령' 석 자만 써서 낸 것. 그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여서 그랬다."고 답해서 벌선 일이 있다.

남들이 모두 '그렇다'고 할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글을 쓰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두 대통령은 용기가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 있게 말하고 글을 썼다.(243쪽)

 

2006년 10월 서울대 개교 60주년 초청 강연.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져 '전쟁 불사론'까지 등장하자 대통령은 전쟁만은 안 된다며 던진 비유인데, 강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찰리 채플린이라는 희극배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히틀러를 반대하고 전쟁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희극배우답게 말했어요.

전쟁은 전부 40대 이상의 사람만 가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는 전쟁에 안 가니까 쉽게 결정해서 젊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유머와 위트의 달인이었다. 친근한 이미지와 친화력의 저변에는 타고난 해학과 기지가 있었다.(253쪽)

 

2007년 6월 원광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학위 수여장에 명예박사를 의미하는 '명박'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이제 걱정이 되는 것 하나가, 여기 보니까 '명박'이라 써놨던데, 제가 '노명박'이 되는가 싶어 가지고…. 하여튼 뭐 이명박 씨가 '노명박'만큼만 잘하면 괜찮습니다."(254쪽)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경남도민일보 사진.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생각과 스타일이 있다. 생각과 스타일에는 우열이 없다. 자신감을 갖고 자기 생각을 자기답게 쓰자. 그럼 자기 글이란 어떤 글인가? 첫째 자기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지식은 내 자신의 비판의 그물에서 여과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미숙하고 과오를 범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로서 사는 유일한 지적 생활의 길이다."(최성, <김대중 잠언집>, 다산책방)(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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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나서 드는 생각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삼은 <대통령의 글쓰기> 출판은 과연 가능할까?' 저는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두 대통령에게는 콘텐츠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자기 하는 말을 스스로 이해하고 알고는 있었고, 또 나라를 어떻게 경영해 보겠다는 포부도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화합과 통합'이었고 노무현은 '균형 발전'이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두 대통령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명박이라 하면 저는 '기업들 이윤 추구'밖에 기억나지 않고, 박근혜에게서는 '발표한 공약 깨기'가 가장 도드라져 보입니다.

 

이들은 더욱이 자기가 하는 말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녹색 성장'을 많이 말했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기 쉽게 간추려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또한 지금 '창조 경제'를 되풀이 말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사람들한테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좋은 글도 쓰지 못하고 훌륭한 연설도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저는 <이명박근혜 대통령의 글쓰기> 같은 책이 당연히 세상에 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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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정사 다람쥐 잘 찍힌 사진 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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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통도사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나름 수도를 하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머리를 깎지는 않았습니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 주고받으며 술도 한 잔 걸쳤겠지요. 거의 25년만에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1998년 IMF 이후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더군요. 특히 마음 고생을요. 그러다 통도사와 인연이 됐다고 했습니다. 

 

수도를 해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짐승들하고도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도 짐승들이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면 덩달아 사람한테 남아 있던 어떤 악한 기운도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짐승들이 날세워 경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대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런 생각이 무의식 속에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데, 수도를 하고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그런 따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산길을 가다가 그런 경험, 짐승이 자기를 피해 달아나지 않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머리를 깎지도 않았고, 수도 또한 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숲 속에 들어가면 날아가던 새가 돌아와 그 사람 손이나 어깨나 머리에 앉는다고 합니다. 그이 사는 데가 저랑 떨어져 있어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이랑 함께 지내는 어린아이들하는 말이 그랬습니다.

 

저는 그 때도 고개를 끄덕였더랬습니다. 그이는 전혀 남 탓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어떤 나쁜 생각이나 감정을 품을 줄도 모르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해 가다가 좁다란 길목에서 앞 차에 막혔습니다. 그 차 운전하는 사람은 뒤에 다른 차가 와 있는지 어떤지 모르는 채로 자기 차 세워두고 자기 볼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아는 이 사람은 그냥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도 앞차가 꼼짝하지 않으면 조그맣게 입으로 아 빨리 가야 하는데, 아 빨리 가야 하는데, 몇 차례 뇌까립니다.

 

그런 다음에도 앞차 운전하는 이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대로 있으면 그제야 가서 얘기합니다. 미안합니다만, 차 좀 빼주시면 안 될까요? 그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미안한 티가 팍팍 납니다.

 

 

이는 제가 제 두 눈으로 지켜본 장면입니다.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어디서든 저를 보면 달아나기 바쁩니다. 여태껏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며칠 전 함양 서암정사를 찾았을 때였습니다. 서너 걸음 앞에 다람쥐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꼼짝않고 귀여운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제가 움직이다 보시락 소리라도 나면 달아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다람쥐 한참을 이러고 있더라고요. 그러기에 저는 살그머니 가방을 뒤져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그래도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셔터 누르는 소리가 났는데도 다람쥐가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튀어나오는 데서부터 마지막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는 모습까지 전부를요. 옛날에도 몇 차례 다람쥐를 사진에 담은 적이 있는데요, 이렇게 깨끗하지는 못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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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땅과 농사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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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으로 농업·환경 살리는 흙사랑 조정래 대표

 

흙사랑 영농조합법인 조정래 대표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이 지난 삶들이 여태껏 우연처럼 흘러온 것만 같지만 실은 어느 한 곳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 지나온 삶의 갈림길들이 어땠는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일부러 골라잡지는 않은 듯한데도 방향은 EM 쪽으로 잡혀 있는 것이랍니다.

 

EM(Effective Micro-organisms)은 유용미생물·착한 미생물로 번역되는데, 일본 류큐대학 농학부 히가데루오 교수가 1983년 토양 개량과 자연·유기농업에 이용하려고 개발한 미생물 자재를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경남EM센터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조정래 대표는 1956년 마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창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부모는 함안군 함안면 강명리 강주마을에 거처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고요. 조 대표에게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기능직으로 들어갔습니다. 1998년 IMF 때문에 그만두기 직전에는 마산 석전동에 있던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소장을 하고 있었답니다. 번듯한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기능직으로 입사해서 번듯한 대기업에서 관리직으로 한 지역을 책임지는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인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겠다 싶습니다.

 

“IMF를 맞아 회사에서 통·폐합을 하면서 부서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만뒀지요. 당시 딸 둘이 제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와서 보니 다른 데 다시 취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귀농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고향 함안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었으니까, 또 연세가 일흔이 돼 있었으니까…….”

 

마흔다섯에 4년제 대학 생물학과 진학

 

이 때 조 대표는 창원대학교 야간학부 생물학과에 입학하는 선택을 합니다. 본인으로서는 나름대로 합당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은 이상하고 엉뚱한 선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습니다.

 

귀농을 하겠다면서, 졸업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4년제 대학에, 그것도 농업과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전공을 골라잡았기 때문입니다.

 

EM농장에서 감자를 거두는 조정래 대표(주황색 윗옷).

 

“중학교 다닐 때 교과 과목으로 ‘농업’을 배웠습니다. 옛날에는 하우스 이런 것 없고 관행농업밖에 없었거든. 다른 농법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중학교 때 농업 시간에 배운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미생물을 갖고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은 듣고 보고 해서 옛날부터 알고 있었거든, 거름을 삭혀서 썼는데 그게 발효였던 것이고 발효가 곧 미생물의 작용인 것이지요. 발효한 거름, 그러니까 잘 삭힌 거름을 쓰면 농사에 도움이 되지만 그냥 생짜배기 거름을 쓰면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래서 생물학과에서 미생물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을 갖고 농사를 짓는 데 쓰면 좋겠다, 생각을 한 거지요.”

 

조정래 대표 마흔다섯 살 되던 해였습니다. 정식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치렀답니다. 밤에는 학교에 낮에는 이른바 ‘보험 장사’를 했습니다. 보험설계사를 하면 대부분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이 도와주지만 시일이 흐르면 수입이 줄어들기 마련이었습니다.

 

조 대표도 그랬습니다. 아내가 따로 벌이를 했고 조 대표 벌이는 본인 생활비와 학비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물학과에 들어갔지만 건성으로 다닌 것은 맞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고요. 하지만 지금은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 때 배웠던 것이 말씀입니다. 나중에 EM을 접하게 됐거든요.”

 

함안 한 시골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얘기하는 조정래 대표.

 

EM을 만나 뒤늦게 빛 본 생물학 전공

 

조 대표는 창원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에도 원래 계획과는 달리 귀농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 말대로라면 당시에는 고향 마을에 계시는 두 분 부모께서 건강해 당신들 힘만으로도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다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완치 상태지만 두 차례나 크게 병치레를 했고 어머니 또한 성한 상태는 아니라 했습니다. 상조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만두고 고향에서 농사지을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 대표는 농사를 위해 미생물을 활용하는 방안을 알아보게 됐는데 이 때 인터넷에서 아주 유익한 정보를 얻었던 것입니다.

 

“제주도에 있는 사단법인 EM환경센터 이사장인 이영민 선생님하고 만남이 됐습니다. 제가 앞서 대학에서 배웠던 것과 환경센터 EM하고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는 중에 EM으로 농사를 지으면 농산물의 한계를 돌파한다,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보통 1헥타르에 쌀 600kg이 나면 잘 나왔다 하는데 여기는 보니까 1200kg로 돼 있더라고요.

 

바로 제주도로 날아가서 사흘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연세가 여든이신데 50대보다 정열적이십니다. 하루에 8시간 교육을 하는데, 밥 먹는 시간 말고는 노는 시간도 없고 자리에 앉는 시간도 없습니다.

 

발효하는 기술을 배우는데, 이영민 선생님 가르쳐주는 내용이 제가 농사에 적용하려는 데에 딱 맞는 설명이더라고요. 농업에 대해서만 전문으로 강의하는 분이셨습니다.

 

이영민 선생 강연 모습. 주황색 윗옷이 조정래 대표.

 

교사 출신으로  환경 분야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고, 일찌감치 해로운 농약 안 쓰는 농업에 몸바쳤는데, 귀결점이 EM이 됐습니다. 지금도 EM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작물에 따라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전화를 걸어 묻곤 합니다.

 

이영민 선생은 자연계에서 우리 인간과 공생하는 여러 좋은 미생물 가운데 한 다섯 가지를 선택해서 복합 배양을 합니다. 이것 갖고 농사를 지으면 작물 생장 속도도 빠르고 단맛도 많아지면서 수확량까지 많아지더라 하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EM은 원래 일본 교수가 처음 개발했는데 이영민 선생이 그 교수한테 배웠습니다. 아들 이창홍 EM환경센터 이사는 대학 물리학과 출신인데 그 일본 교수한테 배우려고 유학을 갔다왔습니다. EM농법은 아버지 이영민 이사장이 보급하고, 이창홍 이사는 EM의 환경·산업 활용 방안을 개발합니다. 서로 잘 어울리는 부자 사이지요. 하하.”

 

농업·환경 모두를 위해 땅부터 살려야

 

도랑 살리기를 위해 EM흙공을 던져넣는 현장에서(푸른색 반팔옷).

 

제주도에 사는 사단법인EM환경센터 이영민 이사장과 만난 일은 조 대표에게 EM을 경남 지역에 보급해 보자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고, 이는 흙사랑 영농조합법인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농가 소득 향상과 바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 해 보니까 농산물 가격이 너무 없습니다. EM을 농작물에 쓰면 분명 효과는 있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그 효과로 얻을 수 있는 소득이 크게 나지 않다 보니까, 보통 농사짓는 사람들이 애써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 쪽으로 돌려보자, 생각을 했고 그래서 EM을 갖고 농업과 환경을 같이 묶어서 사업을 하면서 경남EM센터를 새로 설립했습니다.”

 

조정래 대표는 환경이 농업이고 농업이 환경이라 여기며 삽니다. EM으로 농사를 지으면 거름과 농약을 적게 써도 농사가 잘 되니까 돈은 적게 들면서 병충해는 줄어듭니다. 그러니 땅은 절로 살아납니다.

 

땅이 산다는 것은 옥토가 된다, 땅이 기름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옥토냐 아니냐는 그 땅에 사는 미생물이 많으냐 적으냐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미생물이 없으면 땅은 굳어서 단단해지는 것이지요. 죽은 땅인 것입니다.

 

 

“‘떼알’ 구조라 하는데요, 미생물이 많이 활동하는 땅은 단단히 엉겨 있지 안고 성깁니다. 토질 구조가 바뀝니다. 그러니까 물이 잘 스며들고 작물의 뿌리 썩음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생장에 도움이 되는 공기 속 질소가 그런 구멍을 통해 스며드니까 자라는 속도 또한 상당히 빠릅니다. 또 퇴비를 주고나도 미생물 활동 덕분에 개스 장애도 적어집니다.

 

이렇게 땅이 되살아나면 농사뿐 아니라 환경도 좋아집니다. 지금 관행농업 탓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땅에서는 내리는 비가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지표면에서 흙탕물로 흘러갑니다.

 

혼자만 흘러가지 않고 갖은 농약이나 퇴비 성분을 달고 내려갑니다. 바로 하천 오염입니다. 이렇게 흘러들어간 농약·퇴비 때문에 하천에 잡초들이 또 우북하게 웃자라고요.

 

반면 떼알 구조가 돼서 살아 있는 땅은 비가 와도 밭이나 논에 물이 도랑으로 바로 내려가지 않고 땅으로 스며들고 저 아래 낮은 하천 부분에서 다시 스며나옵니다. 그러니까 하천 물이 항상 맑습니다.

 

비가 오는 그때만 흙탕물입니다. 또 토양이 이렇게 물을 머금어 주니까 가뭄이 들어도 걱정이 덜하고 홍수가 나도 그 정도가 적습니다.”

 

손수 기른 감자들 거두러 나온 어린아이들.

논밭에서 짓는 농사 말고 축산에도 EM이 좋다고 조 대표는 말합니다. EM의 효능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미생물의 증식을 막아주고 발효를 촉진한다, 입니다. 쓰는 방법도 까다롭거나 귀찮지 않습니다. 그냥 뿌려주기만 하면 된다, 입니다. 거름에 뿌리고 사료에 뿌리고 가축들 똥·오줌에도 뿌리고…….

 

“큰 강을 살리려면 국토의 실핏줄 도랑을 먼저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소·돼지·오리 등 가축 키우는 농장은 농촌 골짜기 곳곳에 있습니다. 비 많이 오면 축산폐수 일부러 내려보내기도 실수로 넘쳐흐르기도 합니다.

 

평소에 EM을 뿌리면 악취가 사라지거나 줄어들고 물기를 날려보내는 속도도 빨라져서 덜 질척거립니다. EM을 사료에 쓰는 경우도 원리가 같습니다. 잘 발효된 사료는 흡수율이 높아집니다. 흡수율이 높아지면 같은 분량을 먹여도 가축이 더 잘 자라게 됩니다. 한 10% 정도.

 

EM을 뿌려준 젖소농장의 바닥. 질척거리지 않습니다.

 

이런 효과를 함안군과 창원서부 농업기술센터에 잘 얘기해서 돼지 키우는 농가를 위해 1주일에 1톤 생산이 가능한 시설을 지어 가동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배양된 EM활성액을 농가에서는 200대1로 물에 희석해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또 저희와 함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통영·거제만 빼고 모두 이런 식으로 EM을 농가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EM을 써서 기름값도 줄일 수 있습니다. 겨울철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을 때 안에다 EM을 뿌려만 줘도 난방비를 10~15% 정도 줄어든다는 얘기입니다. 까닭이 궁금하시죠? 하하. 미생물이 활성화되면 그 자체에서 열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오만 데에 다 좋은 것이 바로 EM입니다.”

 

몸소 농사 지어 EM 효능 알리고

 

그런데도 일반 농가에서 EM을 쓰는 경우가 아직은 그리 많지 않는 현실입니다. 꾸준하게 계속 써줘야 효과가 나는데, 조금 써보고는 효과가 없다면서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 대표가 함안 고향에서 EM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로 백날 떠들어봐야 한 번 제대로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

 

 

“논 2000평 밭은 600평 농사를 짓습니다. 밭농사는 집에서 먹는 것밖에 안 하고요. 고시히카리를 EM농법으로 농사짓는데요, 생산량이 두 배로 납니다.

 

고시히카리라는 품종은 쌀맛이 좋지만 기르기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비료는 말만 해도 쓰러집니다. 대가 약한 반면 열매는 많기 때문입니다.

 

농약도 못 칩니다. 요즘은 농협에서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는데 다른 논에서 자라는 벼에 농약을 치는 시기에 고시히카리는 꽃이 핍니다. 꽃필 때 농약을 치면 결실을 못하니까 농약을 치고 싶어도 못 칩니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많이 심는데 남쪽에는 이 품종이 잘 안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EM농법으로 성공했습니다. 고시히카리쌀은 일반쌀보다 값이 두 배입니다. 게다가 EM농법으로 하면 같은 고시히카리라도 일반 농법보다 또 값을 더 쳐줍니다.

 

인터넷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주대학교 EM농법 고시히카리가 20kg에 16만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반쌀은 고작 5만원 하는데 말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렇게 고시히카리 농사를 짓고 있는데 제게 종자를 좀 달라는 가구가 세 군데 생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넓혀나가는 것이지요.”

 

 

일상 생활에도 이로운 EM

 

조 대표는 일상에서도 EM은 좋은 효과를 낸다고 말합니다. 살갗에 바르면 아토피가 완화된답니다. 가렵거나 모기한테 물린 데에도 바르면 가렵지 않게 된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샴푸 같은 세제에는 몸에 안 좋은 환경물질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다 EM을 섞어 쓰기만 해도 환경물질의 나쁜 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거품은 줄어들고 반면 세정력은 높아집니다. 비듬은 한 번만 써도 없어지고 발에 발라주면 무좀도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쌀뜨물에 발효해 창문 방바닥 전자제품 등을 닦아주면 먼지가 앉지 않습니다. 세차하는 물에 EM을 섞으면 황사나 송화가루가 묻지도 않습니다. 먼지나 꽃가루 따위가 들러붙도록 작용하는 정전기 현상을 막아주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좀더 많은 사람, 좀더 많은 기관·단체에 좀더 많이 보급하고 싶습니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EM 보급 사업을 하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정도 수입은 생기거든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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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일 전라도 장흥 첫 나들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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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에 저는 전남에 있는 장흥군 이명흠 군수 앞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창흥군청 홈페이지 ‘군수에게 바란다’에 글을 남긴 것입니다. ‘장흥 명물을 경남에 소개하기’가 제목이었습니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이 되는 그대로 장흥 관광 명소들을 경남 주민들에게 알려 서로서로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는 문화관광체육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로부터 2005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로 선정돼 왔을 만큼 허접하지 않은 신문사고 그 자회사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지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익성을 추구하는 한편 경남도민일보에 재정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장릉 편백우드랜드.

 

여행·체험·스토리텔링콘텐츠 개발/제작·파워블로거 팸투어·마을 만들기·도랑 살리기·탐방 루트 개발 등을 주로 합니다. 장흥군에 대해서는 정남진과 우드랜드·토요시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염산 처리를 하지 않고 무공해로 김을 생산하는 프로젝트를 장흥군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사실도 매우 반갑게 다가왔습니다.

 

장흥군을 비롯해 전남 지역 기초자치단체들은 서울·수도권 상대 관광 마케팅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제는 경남을 비롯한 영남 쪽으로도 마케팅할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수도권의 전남 지역 관광 수요가 한계에 이른 측면도 있고, 경남 사람들의 전남 지역에 대한 관광 수요는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상황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편백우드랜드 며느리손바닥바위.

 

경남 인구가 330만 명으로 적지 않은데다, 농촌 지역은 빼고 도시 인구만 해도 창원·김해·진주·사천 등 200만을 웃돕니다. 장흥군은 풍물과 인심과 민속이 살아 있는 토요시장을 중심 삼고 재미있고 유익한 토요경매가 있는 우드랜드의 건강함을 더한 다음 다른 장점과 특징을 곁들이면 경남서도 한 번 가보고 싶어할 훌륭한 나들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 지난해 7월 해딴에가 장흥군 하나만 집어 일반인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참가비가 비싼 편이었는데도 많이 참가했고 만족도도 높았지만 문제는 수지타산 면에서 남는 것이 없어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었습니다.

 

휠체어도 다닐 수 있는 편백우드랜트 데크.

 

그래서 서로에게 득이 되는 방안을 나름 생각해 봤는데, 장흥군에서 비용을 형편이 되는대로 일정 부분 지원하는 조건으로 ① 40명 안팎 일반인 팸투어 진행, ② 장흥군 관광 명소와 특산물 소개 기사 제공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긍정 검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까닭이 돈 몇 푼 돈 때문은 아니고 영남과 호남 사이 여지껏 남아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 거리낌 없이 너나들이를 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바람에 있음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탁족을 할 수 있는 데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얘기를 드리기는 했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경남과 경북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서 종종 턱턱 가로막히는데, 지역 감정 운운하는 마음의 장벽이 아주 선명한 현실에서는 영남과 호남 사이에 무슨 울림이 반드시 있으리라고는 꿈조차 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울림이 있었습니다. 장흥군 총무과 실용새마을계에서 저희한테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 사이 저희 경남도민일보와 해딴에에 대해 나름 알아보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장흥으로 한 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산이 남아 있는 것이 없기는 하지만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만나 얘기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편백우드랜드 풍욕장 들머리.

 

저희는 이렇게 연락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패내키(경상도말로 아주 잽싸게)’ 약속을 잡고 해딴에 구성원 세 사람이 모두 달려갔습니다. 장흥 장터에 들어가 ‘3대국밥’인가 이름난 밥집에서 조그만 수육까지 한 접시 먹은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장흥군청을 찾아가 실용새마을계 김장용 계장을 만났습니다.

 

아주 야무지게 생긴 이 분은 이야기를 길게 끌지 않았습니다. 행정기관이다 보니 절차와 규정을 어기면 안 되기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예산을 마련해 볼 테니 ‘장흥 명물 경남에 소개하기’를 한 번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야생 헛개나무. 편백우드랜드에 있습니다.

 

일정 부분 금전 지원을 하는 조건으로 모두 세 차례 진행하고 탐방루트는 해딴에에서 알아서 구성하되 장흥군에서 요청하는 필수 코스는 집어넣는 쪽으로 협의를 마쳤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성과가 나면 나중에 나름 평가를 거쳐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협력 사업을 확대해 나가자는 데에도 쉽사리 합의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일 5월 10일 토요일 전남 장흥으로 첫 나들이를 갑니다. 참가할 사람을 모았는데 45인승 버스 한 차가 가득하고도 넘칠 정도로 신청이 몰렸습니다.(보조의자에 앉아 가겠다는 이도 몇몇 계셨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그리하십사 할 수는 없었습니다.)

 

편백우드랜드 토요경매. 편백 제품을 싸게 살 수 있습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찾아가는 데는 우리나라 최대 철쭉 군락으로 이름난 제암산과 올해로 개설된 지 10년째인 장흥 명물 토요시장입니다. 6만 평 남짓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붉은 철쭉꽃이 벙글어지는 제암산입니다. 인심과 풍물과 산물을 한 데 모아 5일장(장흥은 2일·7일)의 틀을 깨는 토요시장입니다.

 

저희는 이번 첫 나들이가 무척 기쁩니다. 장흥군으로부터 금전 지원을 받게 돼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 독재 이래 갈수록 깊어지기만 해온 영남과 호남, 호남과 영남의 지역 장벽을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사실 경상도 사람들은 제 또래(1963년생)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라도 사람이랑은 말을 섞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라도와 전라도 사람에 대해 무슨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전라도에 친구나 선배가 몇몇이라도 있는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제 조그맣지만 통하게 됐습니다. 통하게 되면 다음으로 친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토요시장은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초상권에 신경쓰면서 찍다 보니 이런 사진밖에 안 남았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남해고속도로를 타 보면 이런 현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동마산 나들목을 거쳐 진주 쪽으로 들어가 보면, 경상도 쪽 남해고속도로는 쌩쌩 내달리는 자동차로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만 진주를 지나 하동을 지나 섬진강휴게소를 지나면 고속도로가 통째로 한산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공단이 있는 광양을 지나면 더욱 차량 통행이 줄어서, 그야말로 썰렁해지고 맙니다. 어떤 때는 앞으로도 시야에 차 한 대 들어오지 않으며 뒤쪽 백미러에도 달리는 차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장흥명물 막걸리.

 

물론 이번 장흥 탐방 한 차례만으로 이런 현실이 가시리라고 생각할 만큼 멍청하거나 순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좀더 교류와 사귐이 영남과 호남-호남과 영남 사이에 많아질 수 있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쁠 따름입니다.

 

우리는 내일, 전라도 장흥으로 쌩쌩 내달려 나들이를 갑니다. 경남 합천 황매산보다 더 너른 마루에 더 일찍 꽃피는 철쭉을 보고, 창원 상남시장이나 창녕 창녕시장만큼 흥성대는 장흥 토요시장에서 장보기를 합니다.

 

염산 처리를 하지 않은 장흥 명품 김. 장흥군 차원에서 염산 처리를 못 하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길쭉한 장흥은, 바닷가 고을이면서도 전남에서 세 번째로 긴 탐진강과 곳곳에 솟아오른 호남정맥 덕분에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골고루 놓여 있어서, 거기서 나는 산물 또한 다양하고 푸짐하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전적지이기도 합니다. 동학농민전쟁은 경남에도 영향이 상당해서, 박경리 소설 <토지>에도 그 묘사가 있을 정도이지요. 제암산에는 무참하게 깨진 동학 농민군이, 살아남기 위해 넘어 달아났던 고개도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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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 풀린 우포늪 늦은 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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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9일 저녁 7시 20분에 했습니다. 방송 작가 손보는 과정에서 많이 고쳐졌더랬는데 원래 원고를 그대로 내놓습니다. 다른 별 뜻은 없습니다. 우포늪은 원래 토종말로 소벌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조류인플루엔자로 묶였던 발길이 5월 1일 풀린 창녕 우포늪을 주말 나들이 장소로 소개합니다. 어쨌든 그동안 겨울철새들은 이번 출입 통제 덕분에 요즘 들어서는 무척 드물게 아주 조용하고 한적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포늪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자연습지입니다만, 그 구석구석을 제대로 찾아 즐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즐기고 누려야만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해치지 않고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라면 나름 권장할만하다 하겠습니다.

 

목포(나무개벌) 들머리 왕버들 무리.2011년 4월 초순 사진.

 

봄은 아직 온전하게 오지 않았을 때가 가장 그럴 듯합니다. 엄마 품에서는 엄마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아차리기 힘든 것처럼, 봄 한가운데서는 봄이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르는 법이거든요. 그래서 바람도 쌀쌀하고 잎사귀도 막 고사리손을 내밀어 연두빛을 머금는 초봄이 가장 느낌이 좋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조류인플루엔자 때문에 그런 호사는 아무도 누릴 수가 없었고, 봄 끄트머리 이제야 우포늪 가장자리에서 초록 빛깔을 한 번 눈에 담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출발점은 창녕군 유어면 세진마을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곧장 갑니다.

 

풀과 나무들의 초록이 이미 많이 짙어지긴 했지만 아직 엉큼한 느낌이 풀풀 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코 밑에 가뭇가뭇 여린 솜털이 날까 말까 하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애랑 비교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겨우내 들판을 덮었던 갈색 지푸라기들 뚫고 땅 밑에서 갖은 풀들이 솟아났습니다. 포플라처럼 공중에 있는 가지들은 잎사귀가 손바닥만한 녀석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느릿느릿하는 산책이 우포늪에서는 제격입니다.

 

가운데 고목은 새들의 아파트랍니다. 모두 21층이라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진으로 봐도 둥지로 쓰이는 구멍이 여럿 뚜렷합니다.

 

눈·코·귀·입과 살갗까지 오감을 열어 피어오르는 봄기운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 잎들은, 자기네 눈여겨보는 이들에게만, 같은 초록이라 해도 실은 전혀 다른 초록들임을 알려줍니다.

 

길이 우포늪과 만나는 데서 왼쪽으로 꺾어져 걸어갑니다. 오른쪽으로 커다란 호수 같은 정경이 펼쳐집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가슴을 풀고 한숨을 크게 내쉽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체질이 되고만 긴장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입니다.

 

길섶에서 나뭇잎과 풀잎을 만져봅니다.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연은 원래 그렇습니다. 인공에서는 같은 것이 넘쳐납니다만. 앞면·뒷면·옆면을 쓰다듬어 보면 어떤 것은 매끈매끈하고 어떤 것은 꺼칠꺼칠하며 톱날마냥 오톨도톨한 잎도 있습니다.

 

힐링나무 사진은 찍어놓지 않아서 이번 글에는 쓰지 못했습니다.

 

전망대에는 오르지 않습니다. 사초군락 있는 데로 바로 들어갑니다. 마른 풀들을 헤치고 조금 더 가면 왼편에 둥그렇게 푸근한 느낌이면서 키도 큰 나무가 몇 그루 나옵니다. 가운데에는 습지답게 물이 고여 조그만 웅덩이를 이뤘습니다. 바닥에는 풀들이 연푸른색으로 나지막하게 돋아 있습니다.

 

슬그머니 앉아서는 가만히 소리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숨은 크고 깊게 쉬어봅니다. 눈은 감는 편이 좋지만 뜬 채여도 괜찮습니다.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뒤통수부터 맑아집니다. 살갗 세포들 열리는 느낌이 들면서 소름이 돋을 수도 있습니다.

 

우포늪을 잘 아는 몇몇 분들이 힐링 나무, 치유의 나무라고 별명을 붙인 나무들입니다.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고 기분까지 덩달아 상큼해지는 자리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돌아나옵니다.

 

마침 점심 때입니다. 거기 밥집 ‘우포랑 따오기랑’에 들어가 논고동비빔밥 같이 우포늪 아니면 못 먹는 것을 시켜 먹습니다. 비싸지도 않습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창녕에 우포늪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방면 이방초등학교 뒤편 산토끼 노래동산이 안성맞춤입니다. 얼핏 아이들만 즐거운 공간 같지만 실은 아닙니다. 어른들도 너무너무 좋아 함박웃음까지 터뜨리는 공간입니다.

 

우리는 토끼라 하면 한 가지뿐인 줄 알지만, 여러 가지 많기도 한 가지가지 토끼들을 잘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요 산토끼의 DNA가 깊이 박혀 있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티 하나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몰려드니, 어른들로서는 그런 아이 보는 보람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머금어지는 것입니다.

 

블로거 선비님 사진.

 

아, 참 우포늪은 입장료나 관람료는 물론 주차비도 받지 않지만, 산토끼 노래동산은 관람료를 받습니다.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입니다. 들어가보시면 본전은 충분히 뽑고도 남음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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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로 으뜸 명품 옛길 한티고개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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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됐습니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래 통제영은 한산도와 가배량 등에 설치됐었었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끝나고 여섯 해 뒤인 1604년 지금 자리에 정착했답니다. 이로써 임금이 있는 서울과 통제사가 있는 통영을 잇는 통영(별)로가 열렸습니다. 통영(별)로는 조선 십대로 가운데 경남이 종점인 유일한 도로랍니다.

 

통영로와 통영별로는 다른 십대로와 함께 고속도로 같은 기능을 했으나 일제강점과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거의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요즈음 동래로(서울~동래)나 해남로(서울~해남)는 종이 위에나마 복원이 됐지만 통영로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티고개를 넘는 일행들.

 

2011년 5월 경남도민일보가 창간 12주년 특집기획으로 두류문화연구원(원장 최헌섭)과 함께 빠짐없이 현장을 답사하고 신문에 연재하면서 복원에 나섰습니다. 경상도에 나 있는 통영로로 서울에 이른 다음에 전라도에 나 있는 통영별로로 돌아오는 길로 왕복 2000리입니다.

 

이제 그 대장정을 3년만에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4월 27일 통영 광도면 원산마을에서 문화동 통제영 본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 12km 가량을 답사했던 것입니다.

 

이번 답사와 연재는 통영로 최초 완주에 더해 최초 지상 복원이라는 성과를 냈습니다. 이를 작으나마 기념하기 위해 걷기나 옛길을 좋아하는 47명을 모아 함께 나섰습니다.

 

 

오전 10시 원산마을에 이른 일행은 들머리 고인돌에 먼저 눈길을 던졌겠지요. 산뜻한 모양이었거든요, 덮개돌이 옆으로 길쭉하고 아래위로 납작했는데 보기 드물게 날렵했습니다.

 

고인돌은 여기 통영로 옛길이 지나는 일대가 오래 전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터전임을 일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옛길은 드문드문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고, 대부분은 흙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걷기 좋은 길이었습니다. 마을 오른쪽으로 굽어지며 골짜기를 따라 넘는 고개인데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았답니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지팡이 짚은 이)이 길 한가운데 난 크령을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다니며 살아가는 크령은 밟으면서 다녀야 한다고, 그래야 그이들 번식에 도움이 된다고.

 

구름까지 나서서 하늘을 덮고 해를 가려주는 바람에 땀이 별로 나지도 않았지만, 그늘도 이어지고 바람까지 불어 걷기에는 더없이 딱 좋았습니다. 길은 미녀의 몸매처럼 곳곳에서 휘어집니다.

 

걷는 사람들은 멀리 펼쳐지는 초록 물결과 가깝게 다가서는 여러 풀·나무·꽃에 번갈아 눈길을 빼앗깁니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높이 들어 원경(遠景)을 찍고 어떤 이는 허리를 숙여 근경(近景)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하얀 풀꽃이 보기 좋았던 모양.

 

"이야!" "우와!" 감탄사 몇 차례 내질렀더니 어느새 고개 마루. 오른쪽으로는 섬이 둥둥 떠 있는 남해바다입니다.

 

송전탑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고개마루를 지나는 모습.

 

길을 내려가다 무심결에 바라보니 멀리 벽방산쪽 산자락에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높은 스님 느닷없이 내리치는 죽비 소리에 깜짝 놀라는 행자처럼, 털썩, 송화가루가 노랗게 한꺼번에 휘날리는 양이 "우와!" 소리를 한 번 더 내뱉도록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먼 데와 가까운 데가 모두를 즐겁게 해준 옛길 내려서는 중간 지점. 관덕저수지랑 이어지는 왼편 길에는 '구신비'가 있고 맞은편 길가 오른쪽에는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가 있었습니다.

 

불망비와 구신비는 둘 다 바위 표면을 갈아내고 만든 마애비입니다. 그런데 구신비는 글자가 죄 파내진 반면 불망비는 글자가 뚜렷합니다. 구신비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구(具)씨 성 가진 통제사가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구신비.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죄 파내져 버렸습니다.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 구신비 맞은편에 있습니다.

 

시신을 운구하다 여기를 지나는데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책임관 꿈에 죽은 통제사가 나타나, '역모 누명으로 죽었다. 바위에 공적을 적고 충신이라 새기면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시킨대로 했더니 다시 움직였습니다. 새긴 글자는 진실을 두려워한 모함꾼들이 도로 파냈습니다.

 

구씨 성 통제사는 바로 옆 불망비의 주인공 구현겸(具顯謙)입니다. 1774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통제사를 지냈습니다. <영조실록> 50년 6월 10일치에 '구현겸을 통제사로 삼았다'고 나오고요, 이듬해 7월 10일치에는 '구현겸이 신회에게 핍박받아 경질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적은 없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최헌섭 원장은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가 바로 옆에 있어 자연스레 구씨 성 통제사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빗돌은 보여지는 데 목적이 있는만큼, 왕래가 잦은 이런 길목에다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고개가 통영로 옛길임을 일러주는 또다른 증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개울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들판과 만나는 데 놓인 정자에서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원래 여기서 버스를 타려 했으나 걷는 데 신이 난 사람들은 점심조차 서둘러 먹더니 국도 14호선 만나는 데까지 내쳐 걸었습니다. 한티고개가 정말 명품이었던 때문이겠지요.

 

들머리 고인돌, 고개마루에서 보이는 바다, 굽이굽이 휘어지는 산길, 구신비·구현겸 통제사 불망비들이 좀더 짜임새 있게 버무려져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다 싶은 생각은 들었습니다만.

 

서포루 올라가다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복원된 통제영 건물들이 보입니다. 왼편 시멘트 건축물들은, 일제강점기 통영성 위에 만들어진 상수도 시설물.

 

서포루에서 노니는 모습들.

 

원칙대로는 옛길 전부를 걸어야 하나, 마흔 넘게 사람이 참가해 있는데다 자동차 내달리는 한길가가 위험도 해서 충렬사 앞까지 버스로 옮겨갔습니다.

 

또 원래대로는 동포루를 거쳐 통제영으로 들어야 맞지만, 동피랑 유명세 때문에 동포루에 이미 올라가 봤던 이들이 많아서, 새로 복원한 통제영이 제대로 내려다보이는 서포루로 해서 세병관으로 이르렀습니다.

 

복원된 통제영 십이공방. 왼편 큰 건물이 세병관.

 

우리나라 가장 큰 목조건물인 세병관은 언제 봐도 우람하답니다. 일행은 통제사가 집무하던 운주당, 사택에 해당되는 내아, 주전소터, 비탈진 언덕배기 전망 좋은 정자들로 이뤄진 후원을 차례대로 둘러본 다음 십이공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후원과 앞쪽 운주당/세병관 사이에는 이런 우람한 나무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갈수록 시원해지겠지요. 그늘이.

 

이 가운데 주전소터는 수군 최고 지휘부로서 독자적 화폐 발행권까지 가질 만큼 권한과 책임이 엄청났음을 일러주는유적으로 우리나라 하나뿐인 현장이라고 합니다.

 

주전소 건물 자리.

 

주전소 화폐 만들던 자리.

어쨌거나 십이공장에는 옛날 장인들 작업장과 물건 간추리거나 쌓아두던 자리, 관리들이 장인 부리던 자리들이 복원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螺鈿匠) 송방옹 선생과 제114호 염장(簾匠) 조대용 선생의 작업 모습을 보고 얘기를 들은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나전장은 조개껍질로 자개를 만들어 나무에 박아먹는 솜씨꾼이고 염장은 대나무발을 멋지게 만드는 사람이지요.

 

송방웅 나전장.

 

조대용 염장.


일행은 다시 세병관에 올라 통영(별)로 최초 완주를 기념하는 자체 행사를 간단히 치른 다음 조금은 이른 시각인 오후 4시 서호시장 들머리 남옥식당에 가서 해물탕 등으로 뒤풀이를 풍성하게 가졌습니다. 통영시에서 기꺼이 지원해준 보람으로 이번 나들이가 이렇게 좀더 알차진 셈이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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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시간 보장 안하면 과태료가 1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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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에서는 사전투표제가 전면 도입이 됩니다. 5월 30일(금)과 5월 31일(토)에 신분증만 있으면 누구든지 전국 아무 읍·면·동 사무소에 가서 투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자기 주민등록이 어디에 돼 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주민등록이 돼 있는 읍·면·동사무소에서도 미리(사전) 투표를 할 수 있고, 주민등록이 돼 있지 않은 다른 읍·면·동사무소에서도 마찬가지 할 수 있습니다.

 

투표일이 6월 4일 하루뿐이 아니고 3일로 늘어난 셈이고 그런 만큼 투표권 보장 수준이 높아진 셈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노동자의 사용자에 대한 투표 시간 청구권도 새로 마련됐습니다.

 

모든 사진 출처는 선거관리위원회.

 

이전 선거법은 제6조(선거권 행사의 보장) ③에서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자가 선거인명부를 열람하거나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은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휴무 또는 휴업으로 보지 아니한다."고만 해 놓았었습니다.

 

누가 보장해 줘야 하는지 의무 주체를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벌금·과태료 또는 징역 같이 어기면 처벌하는 규정도 없어 선거관리위원회조차도 "이를 제대로 지키는 회사가 많지 않았다"고 자백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올 2월 13일 개정된 공직선거법에서는 제6조의2(다른 자에게 고용된 사람의 투표시간 보장)를 신설하고 "① 다른 자에게 고용된 사람이 사전투표기간 및 선거일에 모두 근무를 하는 경우에는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고용주에게 청구할 수 있다.

 

② 고용주는 제1항에 따른 청구가 있으면 고용된 사람이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보장하여 주어야 한다. ③ 고용주는 고용된 사람이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거일 전 7일부터 선거일 전 3일까지 …… 알려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아울러 제261조(과태료의 부과·징수 등)에 "③ ……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대상에 "투표시간을 보장하여 주지 아니한 자"를 포함시켜 강제성까지 띠었습니다. 그러니까 투표에 필요한 시간을 청구했는데 거절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 당사자가 아니라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할 수 있고, 선관위에서 사실이 확인되면 곧바로 과태료가 최고 1000만원이 매겨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에 비슷한 규정이 있는데도 여태 잘 지켜지지 않았으니 공직선거법에 해당 조항을 둔다고 지켜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근로기준법 제10조(공민권 행사의 보장)가 "사용자는 근로자가 근로시간 중에 선거권……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면 거부하지 못한다."고 했고, 이를 어기면 제110조(벌칙)에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굳이 따져본다면 공직선거법은 선관위가 다루고 근로기준법은 고용노동부가 다루는 만큼, 그 규율하는 신속성이나 책임감이 고용노동부보다 선관위가 좀 더할 수는 있겠습니다.

 

근로기준법 해당 조항은 어기면 '벌금'이 1000만원 이하이고 공직선거법은 '과태료'로 돼 있는 점도 다릅니다. 벌금은 전과 기록이 남고 과태료는 그렇지 않은 점을 들어 벌금이 더 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과태료가 훨씬 세다고 저는 봅니다. 과태료는 선관위 판단만으로 바로 내려지지만, 벌금은 기소 절차를 거쳐 법원 판단을 받아야 하거든요.

 

적용 대상도 훨씬 넓어졌습니다. 근로기준법은 제11조(적용 범위) ①에서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상시 고용 인원이 4명이기만 하면 투표할 시간을 보장해 주지 않아도 처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투표권 보장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정규직이라기보다는 비정규직인데, 공직선거법은 근로기준법과 달리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고용 규모가 5인 이상이든 4인 이하이든 가리지 않고 규율하면서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또다른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관위에서 신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사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든 제3자든 신고가 있어야 조사하고 처벌하니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권리 위에서 잠자는 사람은 절대 보호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눈치가 보이거나 인간관계가 불편해진다고 '찍' 소리 못하면, 평생 옹졸하고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입에다 밥 떠넣어 주지 않습니다.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어봐야 홍시가 들어가 주지 않습니다. 당사자가 앵앵거릴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고 그렇게 앵앵거렸을 때 곧바로 바로잡아 주고 토닥토닥거려 줄 수 있다면 좋은 법률 괜찮은 제도라고 해야 하지 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공직선거법 개정에서 노동자의 사용자에 대한 투표 시간 청구권을 보장하고 이를 어기면 과태료를 물리는 조항을 신설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 전진'이라 할 수 있겠다고 저는 봅니다.

 

5인 이상 고용 사용자에서 다른 사람을 고용한 모든 사용자로 적용 범위가 넓어진 점, 법원까지 갈 것 없이 선관위 자체 판단만으로도 곧바로 최고 1000만원까지 금전적 불이익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선언적이기만 하지만, '노동자에게 투표 시간 청구권이 있다는 사실'을 선거일 전 7일부터 3일까지 닷새 동안 알리도록까지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삼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5월 30일(금)과 31일(토) 이틀 동안 사전투표를 할 수도 있고, 단 한 사람만 비정규직으로 고용했다 해도 노동자가 청구한 투표 시간을 보장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1000만원까지 물리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용자 눈치가 보여서'를 비롯해 이런저런 불이익을 핑계로 노동자가 투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도 언제나 투표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투표 시간은 사전투표일도 당일 투표일도 모두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똑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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