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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가 안 좋은 소리 그만 들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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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상식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선거 관련 규정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공직 사퇴 시한이 그렇습니다. 일반 공직자는 선거 90일 전에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을 떠나야 합니다.

 

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알기로 해당 선거 자치단체장은 선거를 하는 당일까지도 현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도 후보 등록 시점까지는 자리를 지켜도 됩니다.

 

까닭이 저마다 없지야 않겠습니다만, 형평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자치단체장과 국회의원에게는 그 자리가 주는 프리미엄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는 반면, 다른 공직자들에게는 석 달 앞선 시점에 사퇴하도록 해서 아무 프리미엄도 누리지 못하게 막아 놓았습니다.

 

창원시장이던 박완수 당시 예비후보는 창원시장 자리를 떠나서 계급장 없이 싸웠지만, 당시 경남도지사였고 지금도 도지사인 홍준표 당시 예비후보는 도지사 계급장을 그대로 단 채로 싸웠습니다. 한 사람은 현직 프리미엄을 조금도 누리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현직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이런 불합리는 또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만, 널리 알려지기로는 따를 사람이 없기에 정몽준 국회의원을 보기로 꼽겠습니다. 정몽준 선수는 현직 국회의원입니다.

 

서울시장 후보로 등록을 하게 되면 서울 동작을 지역구 국회의원직을 그만둬야 합니다.(글을 쓰고 있는 지금, 국회의원 사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네요.) 이로써 서울 동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당연히 치러질 테고, 이로써 또 당연히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이 비용을 지금 당장은 세금으로 감당하도록 돼 있는데, 이에 대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권자는 멀쩡하게 가만있고 정몽준 국회의원 본인 귀책사유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됐는데도 그 비용을 왜 유권자들이 물어야 하느냐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의사 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은 줄 압니다. 하지만 당사자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과 보궐선거든 재선거든 그것을 치를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당사자가 비용을 대는 것이 대립하지는 않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보궐선거 비용만 댄다면, 국회의원직을 그만두든 단체장 선거에 나가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오히려 이렇게 함으로써 국회의원들의 정치활동에 책임을 더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법률이나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런 선거 관련도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고치거나 바꾸거나 합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테면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선거 관련 현행 제도와 법률이 국회의원에게 유리하게 돼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저는 압니다. 법률이나 제도가 아무리 유권자들한테 유리해도, 자기네한테 불리하거나 해로우면 어지간해서는 만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경남선거관리위원회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이들도 아무리 개정안을 잘 만들어 갖다 줘도 국회의원들한테는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권자를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그렇게 해도 제대로 안 될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달리 없습니다. 만약 이처럼 현직 국회의원에게 유리하고 형평에는 맞지 않는 규정을 바꿀 생각이 선관위한테 있으면 그에 걸맞게 여론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선관위도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여론을 살피고 챙겨 왔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선거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전체 과정을 따져보면서 잘못이나 문제가 있지 않은지 확인하는 작업을 벌입니다.

 

쟁점이 제기되면 무슨무슨 학회 등등에다 연구·조사도 맡깁니다. 때로는 몸소 나서서 토론회나 공청회를 열기도 합니다. 또 홈페이지에다 ‘정책제언’ 코너를 두고 누구나 글을 써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도 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저는 좋겠습니다. 특정 사안 하나를 집중해 다루는 띄우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치단체장 선거 입후보자 공직 사퇴 시한 하나만 집어냅니다.

 

지금처럼 국회의원은 후보등록일, 단체장은 아무 제한이 없고 일반 공직자는 선거 90일 전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언제가 되든 같은 날로 통일하는 것이 나은지 설문 조사를 합니다.

 

차등을 두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많으면 그대로 두고, 통일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가 많으면 국회에다 그렇게 개정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이런 사안이라면 시민사회와 함께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시민사회가 선관위와 함께하기 먼저 바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 참여 제고를 위한 활동 가운데 하나. 경남도민일보 사진.

 

설문 조사를 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또 동원하는 일까지 선관위가 나서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한 사안을 마무리짓고 나면 다른 사안으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말씀한다면 당사자 귀책사유로 치르는 보궐선거 비용 부담 주체를 누구로 삼아야 맞느냐가 그런 사안이 될 수 있겠습니다.

 

선관위는 여태 좋지 않은 얘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권력 눈치를 본다는 말씀입니다. 강한 사람한테는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강하다는 얘기도 종종 들어왔습니다. 시·군의원 선거 불법 단속에는 호기롭게 나서지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불법 단속에는 오그라든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생각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아래에 있는 일반 유권자와 직접 소통하는 데 있습니다. 가장 아래 일반 유권자들이 선거 과정에서 가장 거슬려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바로잡는 일이 선관위 업무의 또다른 시작이고 또 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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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감각으로 빛나는 장흥 토요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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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과 주5일 근무제의 만남

 

장흥 토요시장은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그 대단함의 근원을 장흥 토요시장을 구상하고 만들어낸 감각에서 찾습니다. 거기 찾아갈 때마다 저는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장흥이 토요시장을 시작한 때가 2005년 7월입니다. 주5일근무제 전면 시행에 맞췄다고 들었습니다. 토요일이 노동에서 해방돼 일하지 않게 되면서 이를 겨냥해 전통시장을 한 차례 더 열자는 얘기였겠습니다.

 

이로써 장흥장날은 2일과 7일에 더해 토요일이 더해지게 됐습니다. 이제 2일과 7일은 오히려 수그러들고 토요일이 훨씬 더 두드러져 있습니다.

 

토요시장 풍경.

 

생각을 거꾸로 해 봅니다. 우리나라 곳곳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장흥과 같거나 비슷한 조건을 갖춘 데가 전혀 없지는 않을 텐데, 어째서 토요시장은 장흥에만 생겨났을까요?

 

다른 자치단체는 생각을 못했고 장흥은 그렇게 하자 생각해냈던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바로 이런 생각해내는 조그만 차이가 능동과 수동을 나누고 창발과 답습을 가르며 성공과 실패를 결정합니다.

 

 

빼어난 장흥의 명물들과 산천경개

 

물론 장흥과 같은 조건을 갖추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장흥 명물이 굉장하기 때문입니다. 장흥 명물 가운데 제가 잘 모르는 것도 오히려 많을 텐데요, 어쨌거나 제가 아는 명물만 해도 농업·어업·임업·축산업 분야에 가지가지 있습니다.

 

갑오징어.

탐진강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바다에서 잡아내는 키조개·바지락·낙지·쭈꾸미, 그리고 매생이·미역·감태·김, 산에서 나는 전통차와 표고버섯과 여러 약초들, 들에서 나는 찹쌀·맵쌀·올벼쌀 등등이 토요시장을 알차게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흥은 산천경개도 빼어난 편이어서 그 풍물과 경관을 찾는 이들까지 토요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가을 억새 천관산과 봄철 철쭉꽃 제암산 등등에 더해 1000년 넘는 역사를 품은 보림사 같은 절간까지 장흥에 있는 것입니다.

 

제암산 철쭉군락.

 

그리고 새롭게 경관과 풍물을 더하려는 애씀까지 합해져서 편백우드랜드가 억불산에 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장흥은 이렇듯 산천경개를 배경으로 삼고 전통산업을 발판으로 삼아 전통시장 판을 키우고 이들이 서로 제대로 맞물려 줄곧 잘 돌아가도록 하는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장흥에서 만들어낸 대표 청정, 무산김

 

잘 돌아가도록 하는 핵심은 제가 보기에 ‘청정’입니다. 장흥 사람들은 청정이 엄청난 힘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렸습니다.

 

 

무산(無酸)김이 그 보기입니다. 장흥군에서는 염산 처리를 하는 김은 아예 기르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래서 장흥에서 나는 김은 전혀 염산 처리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닷물에 넣어놓고 김을 길렀습니다.

 

기간을 정해놓고 때가 되면 들어올려 염산을 풀어넣은 물에다 담갔다가 꺼냈습니다. 잡티 없애고 갯병 걸리지 말고 때깔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만 염산이 얼마나 심각한 독성 물질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는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도 좋지 않고 바다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는 이런 염산 처리를 전혀 하지 않는 대신 김발을 바다 위로 끌어올려 햇볕에 쬐고 바닷바람에 말리는 방법을 씁니다.

 

무산김.

 

이런 무산김을 생산·판매하는 100% 주민 기업으로 장흥무산김주식회사까지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염산에 찌든 나쁜 김이 아니라 햇볕에 보슬보슬 마른 좋은 김을 장만하려는 목적만으로 토요시장이 있는 장흥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토요시장에서 색다른 김을 마련했는데 양식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뜯었으며 또 네모나게 뜨지도 않고 그냥 말린 김이었습니다. 비싸지 않게 사서 집에 와 먹어보고는 정말 반했더랬는데, 씹을수록 차지고 고소했으며 또 그게 혓바닥에서만 놀지 않고 입안 전체에 촥촥 감겨드는 맛이어서 그야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할매실명인증제와 청정 장흥 지키기

 

장흥은 이렇게 ‘청정’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애써 지키는 데에도 나름 힘을 쏟습니다. 토요시장에 나오는 이런저런 산물들에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것들이 섞이면 섞일수록 사람들은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이런 장점을 악용해 쉽사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중국에서 밀수한 인삼은 보통 충남 금산으로 스며들어가 ‘신분 세탁’을 합니다. 실제로 한국 인삼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금산에는 한국산으로 둔갑한 중국산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양파·마늘·고추가 나름 좋다고 소문난 경남 창녕에서도 그런 일은 마찬가지 벌어집니다.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양파·마늘·고추가 들어와 창녕 장날에 뒤섞여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주로 이런 일은 ‘동네 아지매·할매’로 위장한, 다른 지역에서 온 소매상들 손에서 이뤄진다고 들었습니다.

 

육즙이 풍성한 키조개전.

 

장흥 토요시장에는 ‘고향 할머니 장터’가 있습니다. 여기 ‘할매들’은 다들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장면이어서 신기하고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장흥군에서 까다롭게 따져서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섞여 들어와 장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장흥 산물이 아닌 것이 장흥에서 청정 이미지를 업고 팔려나가지 않도록 하는 ‘할매실명인증제’인 셈입니다.

 

청정으로 버무린 장흥 명물 음식

 

이처럼 장흥은 ‘청정’을 만들어내고 또 지키기도 하지만 장흥은 이 ‘청정’을 제대로 버무릴 줄도 알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요즘 들어 새로 개발했는지까지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장흥삼합’이 그 대표라 할만합니다.

 

 

 

장흥은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고을입니다. 사람은 4만2000명이지만 소는 5만 마리 가량 됩니다. 새끼를 한 번도 배지 않은 암소고기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경남 합천의 삼가가 소고기로 유명한데, 삼가와 마찬가지로 품질도 좋고 값도 싼 소고기를 살 수 있는 데입니다.

 

천정에는 소가 그려져 있습니다.

 

키조개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는 장흥에서 키조개를 보고서야 키조개를 보고 왜 키조개라 하는지 까닭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그냥 키가 커서 키조개라 하나보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요, 여기 와서 엄청나게 큰 키조개를 보면서 그 조개껍데기가 그야말로 옛날 곡식 까부르던 ‘키’를 완벽하게 닮았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고기와 키조개에 다시 표고버섯을 더합니다. 표고버섯도 장흥 명물로 자리잡은 녀석입니다. 호남정맥이 흩뿌려 놓은 억불산·제암산·천관산 산들이 장흥 곳곳에 있기에 가능했던 명물입니다.

 

 

이런 식으로 버무리고 뒤섞어 만든 것으로 소고기+키조개+표고버섯=장흥삼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낙지삼합도 있습니다. 그것은 낙지+삼겹살+키조개, 이렇습니다.

 

토요시장 곳곳에서 엿보이는 남다른 감각

 

 

그런데 이런 어울림이 저절로 이뤄졌을 리는 없습니다. 절로 이뤄진 측면이 있다 해도 누군가가 감각을 더하고 섬세함을 입히지 않으면 전체적으로는 꺼칠꺼칠함을 벗어나기 어렵고 세부적으로는 새는 구멍이 뚫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맑은 사람이라면 장흥 토요시장을 두 번 아니라 한 번만 휘 둘러봐도 그런 섬세함과 남다른 감각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우리 음식거리’입니다. 장흥으로 시집온 이주 여성들이 떠나온 고국의 먹을거리를 펼치는 데입니다. 저는 처음에 ‘다문화 음식거리’이리라 여기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다문화’가 아니라 ‘다우리’라 적혀 있습니다.

 

다우리 음식거리.

 

손뼉을 쳤습니다. 기가 막히는구나! 싶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모두가) 다 (남이 아니고) 우리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까지 세심하고 섬세하게 신경을 써서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작명을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세심함은 화장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붙여놓은 글귀와 그림을 사진으로 확인만 해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잘은 모르지만, 토요시장은 지역의 명물과 지역의 사람이 제대로 어울려지고 버무려지는 바람에 생겨날 수 있었던, 그런 명품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순수 민간 역량까지

 

한 나절 아니라 하루종일 누리고 노닐어도 전혀 지겹지 않고 즐겁기만 한 그런 명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장흥 토요시장을 더욱더 명품답게 가꿔 주는 순수 민간 역량(^^)도 있습니다.

 

추억의 사진관.

 

 

아무 이득이 생기지 않는데도 부담 없이 누구든 들어와 노닐다 가라고 공간을 내놓은 전시관인 ‘추억의 사진관’이 그렇고요, 60도 넘는 소주를 전통 방식으로 여지껏 빚어내고 있는 ‘선비 주조장’도 그렇습니다. 이런 양념들이 있어서 풍성한 장흥 토요시장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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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 세병관, 주전소터, 후원, 십이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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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저녁 창원교통방송에서 전파를 탄 내용입니다. 실제로 나간 방송보다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이 줄어들었는지 대략 절반 정도만 반영해 고친 원고가 왔더군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오늘은 '통영'이라는 도시 이름을 낳은 삼도수군통제영, 줄여서 통제영을 함께 둘러보겠습니다. 8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지난 3월 선보였는데요, 강구안·중앙시장·동피랑 등 통영 중심가와 가까우니까 통제영 가는 길에 이런 다른 데를 함께 둘러봐도 괜찮겠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요즘 해군사령부쯤이 되는데, 1604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6년째 되는 해에 지금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통제영과 이순신 장군이 관련돼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데요, 세워진 1604년이 이순신 장군 세상 떠난 뒤니까 직접 관련은 없는 셈입니다.

 

통제영 내삼문인 지과문. 戈는 창, 止는 그친다, 입니다.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개설한 통제영은 한산돕니다.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제승당도 이순신 장군 사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복원되기 전에는 세병관만 덩그러니 하나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세병관뿐 아니라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운주당, 통제사 사택에 해당되는 내아, 주전소터, 비탈진 언덕배기 정자들이 들어서 있는 전망 좋은 후원 그리고 옛날 갖은 군수물품과 진상물품들을 만들어내던 십이공방까지 해서 나름 짜임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내아에서 통제사 거처.

 

통제영 으뜸 건물은 누가 뭐라 해도 세병관입니다. 임금 궐패를 모셔두고 통제사 한 달 두 차례 예를 올리던 곳입니다. 이름 자체가 은하수 물을 끌어와 무기를 씻고 싶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전쟁은 하지 않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 전통 건물이면서 거기 마루에 올라 바라보는 통영 바다 풍경, 그리고 나무 재질이 전해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등등이 좋습니다.

 

그리고 멋진 풍경과 나무 그늘을 누릴 수 있는 데는 후원입니다. 세병관에서 오른편으로 통제사 비석 무리와 운주당·내아를 지나 언덕배기에 있습니다. 통제사가 운주당에서 근무하다가 아니면 출장 갔다 돌아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또는 귀한 손님이 찾아와 얘기를 나눠야 할 때 걸음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후원 한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

 

3월에 찍은 후원 전경.

 

심은 지 오래된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나 그늘을 깔아놓은 그런 자리에, 초가 또는 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여기 올라서 바라보는 통영 바다 풍경 또한 썩 좋고요. 날씨가 좀더 더워지면 여기 앉아서 듣는 대숲 지나는 바람소리가 한결 더 시원해질 것 같습니다.

 

주전소 터,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자면 조폐공사, 화폐 만들던 자리도 발굴돼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는 세병관만큼이나 뜻깊은 장소가 되겠습니다. 건물 자리와 불을 피워 상평통보 같은 엽전 만들던 자리가 함께 발견됐는데, 우리나라 유일한 화폐 제작 유적지라 하고요.

 

주전소 건물 자리.주전소 화폐 만들던 자리.

 

또 이렇듯 화폐 발행권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수군 최고 사령관·지휘관으로서 통제사에게 주어진 책임과 권한이 엄청났음을 일러주는 역사의 현장이라 합니다.

 

이밖에도 새로 발굴돼 선보이고 있는 기삽석통-가로세로 10m는 됨직한 장수기 커다란 깃발을 꽂아두던 돌통이라든지, 석인-청황적백흑 다섯 방향을 가리키는 오방기를 꽂아두던 돌인형이 이번 복원 과정에서 발굴돼 앞마당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들 한 번 쓰다듬어 보는 재미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석인-돌인형기삽석통旗揷石桶에 꽂힌 수자기帥字旗

 

마지막 십이공방은 요즘으로 치면 군수산업시설입니다. 활·화살, 칼·창 같은 병장기를 만들었고요, 나전이나 대나무발 같은 생활용품도 만들었습니다. 통영 예술의 원천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통제영 군인들이 쓰기도 했지만 서울 임금한테 공납도 했습니다.

 

왼쪽 위 건물이 세병관, 나머지는 십이공방 건물들.

 

송방웅 선생이 찾은 이들에게 나전과 옻칠에 대해 얘기해 주는 모습.

십이공방은 공방이 열두 개라서 십이공방이라 한 것은 아니랍니다. 아주 많다는 뜻으로 ‘십이’라는 숫자를 붙였을 뿐이고요, 지금은 통영 출신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螺鈿匠) 송방웅 선생이나 제114호 대발을 만드는 염장(簾匠) 조대용 선생이 간간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내려올 때는 왜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의식을 해마다 치렀던 수강루를 둘러봐도 괜찮습니다. 원래는 남문 밖에 바닷가에 있던 것이었는데 개발을 하면서 떼어내 옮겼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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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산 철쭉군락은 여름에도 좋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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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제암산의 철쭉군락은 대단했습니다. 5월 10일 다녀왔는데, 키 작은 철쭉만 봐왔던 저로서는 정말이지 그런 정도로 자라난 철쭉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사는 경남에도 봄철 꽃들이 붉디 붉게 피어나는 철쭉으로 이름난 명소가 합천 황매산 창녕 화왕산 등등 여럿 있습니다만, 거기 철쭉들은 대체로 무릎이나 허벅지 정도 아니면 잘해야 허리께까지밖에 자라나 있지 않습니다.

 

이런 데는 꽃을 들여다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요, 제암산 철쭉군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여야 볼 수 있는 철쭉꽃은 거의 없었고요, 제가 키가 184cm인데 눈높이는 오히려 낮은 편이었고 대부분 철쭉나무가 2m 훌쩍 넘는 것들이어서 고개를 쳐들어야 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답니다.

 

제암산 철쭉.

 

 

그래서 등날(능선)에 올라 양옆으로 철쭉군락을 거느리고 걸을 때에도 철쭉이 나지막한 합천 황매산이나 창녕 화왕산 등지와는 달리 햇볕에 얼굴 따가운 일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늘이 내려와 있는 데도 많았습니다.

 

 

높다랗게 자란 철쭉이 우거진 사이로 걷고 있는 모습.

 

 

그래서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에도 햇볕과 더위에 별로 시달리지 않고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란지 50년이 넘어서 키가 훌쩍 자라난 철쭉들이 등날 따라 길이 6km, 너비 최대 200m 최소 50m 정도로 엄청 무리지어 있다는 데 더해 제암산이 좋은 까닭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탐방로가 별로 가파르지 않으며 길이도 왕복 6km 안팎으로 적당한 데다 그리고 걷는 내내 등날에 이르기까지 나무그늘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딱 꼬집어 말하면 일부러 깎아내리려고 그런다고 보일 수 있어 그런 데가 어디인지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만, 철쭉이 좋은 어떤 산은 30분 가량 내내 할딱거려야 하며 다른 어떤 산은 가파르지는 않지만 탐방로가 너무 길거나 단조로워 따분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또 다른 어떤 산은 중턱까지 넓은 아스팔트가 나 있고 철쭉이 있는 등날 일대가 마치 평지처럼 평평해서 산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산은 등날에 이르기까지 걸어야 하는 탐방로에 그늘이 전혀 없어 여름에는 짜증이 받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남 장흥 제암산은 이 모든 것이 대체로 적당해서 산에 왔다는 느낌도 충분하고 올라가면서 보는 풍경도 단조롭지 않으며 따가운 햇살에 시달려야 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아래로 들판이 시원하게 내다보입니다.

 

게다가, 다른 많은 산들도 그렇겠지만, 등날에 올라섰을 때 눈에 담기는 이쪽저쪽은 그야말로 더없이 너르게 트여 있으며 시원한 바람 또한 땀에 젖은 등짝이 서늘해질 정도로 불어오니 산에 올라 누릴 수 있는 바를 골고루 갖췄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때문인지, 제가 제암산을 찾았던 5월 10일, 이미 철쭉꽃은 많이 지고 없었지만 저랑 같은 창원에서 일부러 찾아온 한 산악회가 버스 두 대를 몰고 와 무리지어 등반을 하고 있었더랬습니다.

 

게다가 제암산 철쭉군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너르다고 할 정도니 더이상 따로 얘기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조차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일치 한겨레신문을 보고 알게 됐는데, 제암산 철쭉보다 더 높고 굵게 자란 철쭉이 우리 경남 밀양 가지산과 천황산에 여럿 있다고 합니다.

 

2005년 8월 19일 천연기념물 제462호로 가지산 철쭉나무군락이 지정되기도 했는데, 110만㎡가 넘는 범위에 22만 그루 가량 있고, 이 가운데는 400~500살 넘게 나이를 먹은 철쭉도 50그루 안팎이라 하니 참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한겨레 사진. 가지산에서 오래된 철쭉나무 밑둥 둘레를 재는 모습.

 

제암산 철쭉.

 

그러나 나무로서는 참 잘 된 일이겠지만, 사람에게 이 가지산 철쭉군락은 이른바 접근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전문 산악인이라면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해발 1200m넘는 데까지 찾아가기는 어려운 노릇이지요.

 

한겨레는 철쭉이 진달래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이렇습니다. 철쭉과 진달래는 지구에서 동북아시아에만 있습니다. 철쭉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요동, 중국 남부, 중국 내몽골, 극동러시아에 있으며 진달래는 이에 더해 일본 쓰시마 섬이 더해지는 정도랍니다.

 

게다가 중국·러시아·일본에서는 철쭉·진달래가 보기 드문 데 견줘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흔한 식물이어서 한반도가 그 분포의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지 싶습니다. 철쭉군락이나 진달래군락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면 곧바로 세계에서도 으뜸인 셈입니다.

 

제암산.

 

그러니까 지금 알려진대로 장흥 제암산 철쭉군락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꽃도 가장 장한 한국 최고라면 동시에 세계 최고이기도 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런 장흥 제암산 철쭉군락을 봄철 꽃으로만 누리지 말고, 여름철 잎으로 누리고 즐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던 것입니다.

 

장흥토요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키조개전. 부드럽고 또 촉촉합니다.

 

갑오징어.장흥막걸리 상표와 장흥삼합.

 

염산처리를 하지 않은(無酸) 김.정말 커다란 키조개.

게다가 토요일에 맞춰 찾으면, 소고기·표고버섯·키조개·청정김 등등과 ‘고향 할머니 장터’를 비롯한 로컬푸드까지 장흥의 산물들이 가지가지 넘쳐나는 장흥 토요시장도 누릴 수 있으니 말씀입니다. 아니면 원래 전통 장날인 2일과 7일에 찾으시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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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화계 덕양전, 구형왕릉, 유의태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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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5월 23일 저녁 7시 20분에 나갔던 원고 초안입니다. 실제 방송은 이보다 매우 건조했습니다. 그리고 초점도 조금 달랐습니다. 초안을 바탕삼아 가다듬어서 제게 보내준 내용이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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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해 가락국 마지막 임금으로 신라 법흥왕한테 나라를 넘겼다는 구형왕의 무덤 있는 데로 나들이해 보겠습니다. 임금 자리를 양위했다 해서 양왕이라고도 하는데요, 산청군 금서면 화계 마을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가용 자동차로 가신다면, 내비게이터에 덕양전,을 찍어넣고 찾아가시면 됩니다. 마을 들머리에 있는데, 나라를 양도하고 임금 자리를 양위한 덕을 기리는 전각, 그래서 이름이 덕양인데요, 구형왕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덕양전과 그 담장 담쟁이덩굴.

 

다른 왕릉은 대부분 평지에 보드라운 흙으로 덮여 있지만 구형왕릉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산비탈에 커다란 돌로 이뤄져 있습니다. 마치 중국 만주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릉처럼 말씀입니다.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보통 왕릉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차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좀 무거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덕양전도 건물은 나무로 기둥을 하고 기와로 지붕을 이었지만 담만큼은 바깥과 안쪽을 가리지 않고 모두 돌로 쌓아 둘렀습니다. 구형왕릉과 마찬가지로 해서 일관성을 갖췄습니다. 지금 가시면 덕양전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이 싱싱할 테고 또 조그맣지만 우거진 대숲, 그리고 대숲을 간지르고 지나가는 바람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덕양전을 둘러본 다음 산으로 나 있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길가에는 구형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널려 있습니다. 가락국 가야 임금 족보를 기록한 빗돌도 있고, 구형왕 손자로 나중에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 찾아와 활을 쏘았다는 사대도 있습니다.

 

 

같은 김유신이 할아버지 무덤을 지키면서 지냈다는 사연을 적은 빗돌도 있습니다. 또 구형왕이 나라를 신라에 넘기고 산청 화계 골짜기에 들어와 살면서 옛적 도읍지가 그리워 멀리 바라봤다는 자리에는 망경루도 지어져 있습니다.

 

구형왕릉에 이르러서는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무덤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가장 위에 이르렀을 때는 지긋이 아래를 조망해 봅니다. 앞쪽으로 돌아와 나무그늘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느낌도 괜찮습니다. 풀은 쑥쑥 푸르게 자라고 나무는 잎이 무성해져 있습니다.

 

 

나라가 흥하든 말든, 사람이야 죽든 말든, 세월은 이렇게 흘러서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상하게 조금은 이렇게 감상적으로 됩니다. 사람은 없고 수풀 우거진 산중인데다 층층이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라 그런지 착 가라앉아 있고 적막한 분위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유의태 약수터 찾아가는 산길입니다. 유의태는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여러 차례 제작돼 널리 알려진 <동의보감>을 펴낸 조선 시대 명의 허준의 스승입니다. 구형왕릉에서 능선으로 단숨에 이르는 산길도 있지만 가파릅니다.

 

대신 우리는 구형왕릉 들머리 주차장으로 돌아나와 거기 있는 콘크리트 깔린 임도로 들어섭니다. 소나무와 고로쇠나무가 터널을 이뤄 시원한 그늘도 선물합니다. 산청군에서 심었는데,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꽤 높이 자라는 나무인데, 아주 빨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지도 무성하고 잎이 넓어 봄과 여름에는 그늘이 좋고 가을에는 단풍까지 나름 예쁘게 물듭니다.

 

가파르지 않아 힘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쉬엄쉬엄 멈춰 서서 한 번씩 뒤를 돌아봅니다. 지금껏 걸어온 고로쇠 터널 바라만 봐도 우거진 그늘이 호젓함과 서늘함을 더해주거든요. 그러다 고로쇠 그늘 끝나는 즈음에서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접어듭니다.

 

임도 고로쇠나무.

 

여기도 나무그늘이 좋고 흙길은 더 좋습니다. 유의태는 화계 마을에 살았습니다. 유의태는 여기에서 뜬 물로 한약을 달였습니다. 지금도 화계 마을 사람들 상수원은 여기입니다. 콸콸 쏟아지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달콤함과 시원함을 맛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화계 마을로 접어듭니다. 함양군 유림면과 이웃해 엄천강 곁에 들어선 마을입니다. 고샅고샅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담장에 적힌 '식량 증산', '저축정신을 생활화하자', '퇴비 증산' 같은 70년대 구호가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둘러본 다음에는 엄천강 쪽으로 갑니다. 엄천강에서 잡히는 피리 따위를 튀기거나 끓여서 파는 음식점이 몇몇 있습니다. 살짝 배여나는 흙냄새가 싫으면 맛보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여기 와서 한 번은 먹어볼만한다는 얘기를 듣는 토속 음식입니다.

 

덕양전에서 구형왕릉까지는 대략 0.8km, 구형왕릉에서 유의태약수터까지는 2.2km 정도 됩니다. 돌아나와 구경하는 화계마을은 멀리 갈 것 없이 덕양전이랑 바로 붙어 있습니다. 모두 걸어 다니면 가장 좋지만, 자동차로 다녀도 상관은 없습니다. 덕양전·구형왕릉 모두 주차장이 딸려 있고, 유의태약수터 들머리 임도에도 주차를 할만한 좁은 공간이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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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재벌 불로소득과 노동자의 근로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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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 염호석씨가 자살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경남 양산을 떠나 강원도 정동진에 가서 죽었습니다. 해가 뜨는 그곳에 간 까닭을 염호석씨는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라고 유서에서 밝혔습니다.

 

염호석씨가 소속돼 있는 전국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지금 파업에 들어가 있습니다. 노조 요구를 살펴봤더니 무척 단순했습니다. 생활임금과 노조 활동을 보장하고 사업장 위장 폐업을 철회하라는 정도였습니다.

 

염호석씨는 2010년 6월 삼성전자서비스 양산센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태 뒤 센터 사장이 직원 숫자를 늘리는 바람에 수리 건수가 적어져 월급으로 받는 수수료가 줄어들자 그만뒀다가 지난해 2월 다시 들어갔습니다.

 

삼성에서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행복한 눈물'.

 

보니까 ‘건당 수수료’가 문제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들이 임금 대신 받는 월급입니다. 센터 사장은 삼성전자서비스주식회사와 계약합니다. 삼성 표지를 달고 다니지만 직접 고용돼 있지는 않습니다.

 

사용자 처지에서는 참 편리합니다. 삼성전자서비스는 현장 인력은 관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리한 건수에 맞춰 돈만 넘겨주면 됩니다. 센터 사장도 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직원을 10명 채용하든 20명 채용하든 수리 건수가 같으면 지출되는 인건비 총액은 같습니다.

 

10명에게 200만원씩 주든 20명에게 100만원씩 주든 센터 사장이 알아서 할 일일 따름입니다. 수리할 거리가 많아지면 센터 사장은 수리하는 사람을 늘립니다. 개별 노동자가 챙겨가는 월급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노동자만 죽어나는 셈입니다.

 

염호석씨 유서.

대신 노조 활동을 하든지 해서 밉보이면 불이익을 줍니다. 일감 자체만 줄이면 건당 수수료가 저절로 적어지는 것입니다. 노조 분회장을 하던 염호석씨 월급이 70만원(3월) 40만원(4월)뿐이었던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염호석씨 같은 노동자를 밑변으로 삼은 삼성전자서비스의 먹이사슬이 이렇습니다. 삼성전자에서는 먹이사슬에 백혈병 노동자가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병든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치료비와 보상금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의령 이병철 생가.

 

반면에 먹이사슬의 상층부에는 일한 대가 이상으로 챙겨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염호석씨 같은 노동자가 제 몫을 제대로 가져갔다면 이건희·이재용을 비롯한 삼성그룹 지배 일가와 측근들의 불로소득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습니다.

 

배당금이든 이자든, 임원 급여든 그 본질은 불로소득입니다. 또 그들의 불로소득은 삼성 노동자들이 그이들로부터 지급받지 못한 근로소득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는 누군가가 생활임금을 못 받았습니다. 또 삼성전자에서는 또다른 누군가가 치료비와 보상금을 못 받았던 것입니다.

 

모든 불로소득은 사회에 해롭다고 저는 압니다. 손쉽게 얻어지는 불로소득은 더 큰 불로소득을 기대하게 합니다. 불로소득 그 자체와 불로소득에 대한 기대는, 땀흘려 일하는 사람을 천하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하지 않고도 떵떵거리는 인간을 대단한 존재로 만듭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노력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노력이 생략될 때 참사가 일어납니다. 세월호 침몰도 불로소득을 노린 탓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컨테이너를 선박에 제대로 묶어두는 노고를 하지 않았던 처럼 말씀입니다.

 

 

삼성전자에서 백혈병에 걸리는 노동자도 죽고, 한 달에 40만원밖에 못 받는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도 죽습니다. 엄청나게 불로소득을 챙기는 삼성그룹 지배 일가 구성원이나 그 측근들도 결국은 죽습니다. 죽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불로소득으로 사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한테 대못을 박거나 한이 맺히게 만든다는 점이 근로소득으로 사는(또는 살 수밖에 없는) 사람과 다릅니다. 물론, 언제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삼성 재벌이 그런 예외처럼,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깨를 감싸안을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개연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엄효석씨 주검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보아하니, 아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김훤주

 

<기자협회보> 5월 23일치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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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찾은 장흥 제암산과 토요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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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의 ‘이웃 고을 마실가자’는 영남과 호남의 자치단체들과 경남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해 마련한 기획 연재입니다. 자치단체는 자기 지역 관광 명소와 먹을거리를 비롯해 특산물을 알리고 경남 주민들은 여행을 통해 삶을 좀더 풍요롭고 빛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자치단체와 협의가 되면 요청에 따라 지역민 등과 더불어 해당 지역 역사·문화·생태·인물을 탐방하고 거기 볼거리 들을거리 먹을거리 누릴거리들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서로에게 도움과 보탬이 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창녕·합천·통영에 이어 네 번째 ‘마실’은 전남 장흥을 다녀왔습니다.

 

사람 키보다 훌쩍 더 자란 철쭉들

 

장흥 제암산은 전국 최대 규모인 철쭉군락에서 꽃은 이미 지고 있었지만 대단했습니다. 나무 크기가 그에 맞설 상대가 쉽사리 찾아지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랍니다. 철쭉 나무야 크든 작든 분홍꽃 머금기는 매한가지지만 그 웃음이 사람 키높이에 있을 때와 무릎 또는 허리께에 찰랑거릴 때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습지요.

 

 

철쭉은 사람 가슴 위로 올라오기가 어려운 법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꽃이 핀다는 여기서는 2m 훌쩍 넘게 웃자란 녀석들이 많았습니다. 눈높이가 사람과 맞아서인지 얼굴 가까이서 또는 그 위에서 하늘거리는 꽃잎들은 널찍하고 커서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줄기도 예사롭지 않게 굵었답니다. 보통은 사람 엄지손가락보다 굵기가 어려운데 여기서는 사람 손목 정도 되는 줄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경남의 거제도 어디 동백나무 어린 숲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저런 정도 굵어지기까지 견뎌냈던 세월은 얼마였을까요…… 산마루 쌩쌩 불어대는 칼바람은 또 얼마나 맞았을까요…… 그러면서도 가을에 잎 떨구고 새 봄에 물기 빨아올려 꽃과 잎 피워 밀어내는 일은 또 어떻게 해냈을까요…….

 

 

 

땀 뻘뻘 흘리며 산마루에 올라섰을 때는 반갑기만 했던 산바람이, 이렇게 철쭉들 괴롭혔으리라 생각이 드니까 사뭇 원망스웠던 것이랍니다. 눈 앞에서 지는 꽃을 보면서도 활짝 피었을 때 장관을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철쭉들 크게 웃자란 높이와 숱한 세월을 견디며 더디게 불려 냈을 굵기 덕분이었습니다.

 

간재 고개마루에 올라섰을 때 전후좌우 사방으로 너르게 펼쳐지는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거기서 곰재 지나 제암산 정상으로까지 이어지는 철쭉 나무들이 말입니다. 멀리 정상 왼쪽 언저리는 아직 지지 않은 꽃들로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소나무 묵은 초록과 활엽수 새로운 초록과 뒤섞이며 피어나는 분홍빛이었습니다.

 

 

오르는 탐방로는 내내 그늘

 

남동쪽 간재에서 북서쪽 곰재까지 이어지는 등날에서는 내내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철쭉 무리 속에 드문드문 솟아 있는 소나무들은 앉을 자리로 맞춤이었고 잊힐만하면 다시 나타나는 바위 언덕들은 탁 트인 전망을 안겨줬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꽃이 지고 있어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잘도 돌아다녔고, 그럴 듯하게 자세를 잡고는 사진도 곧잘 찍어 댔었습니다. 철쭉에 파묻힌 속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자리를 깔고 무리를 이룬 이들은 먹을거리와 더불어 이야기보따리도 함께 풀었습니다.

 

제암산이 좋은 것은 등날을 뒤덮은 철쭉 군락만이 아니었습니다. 들머리 오른쪽으로 임도를 끼고 오르는 탐방로도 훌륭했습니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지나치게 가파르거나 아니면 멋없이 길게 이어져 밋밋하고 지리한 느낌을 주기가 십상인데 제암산은 아니었습니다.

 

그늘이 풍성하게 내려앉은 탐방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만큼 기울기가 적당한데다 나무들 초록 잎사귀로 줄곧 그늘이 이어져 햇살에 살갗 따가울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5월 10일 일행 45명이 경남 경계를 벗어 나들이한 제암산은 이렇듯 대단했습니다. 앞서 콩샛골식당(061-864-1192) 우리 콩으로 만든 청국장 점심도 만족스러웠고요.

 

산·들·바다·강을 죄다 갖춘 장흥

 

오후 3시 남짓에 제암산 탐방을 마친 일행은 정남진 장흥 토요시장으로 향했습니다. 2005년 7월 문을 열어 올해가 10년째인 토요시장은 풍성하고 청정한 로컬푸드 먹을거리로 전국에서 이름을 얻었습니다.

 

장흥은 여러 모로 물산이 풍부하답니다. 토요시장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지요. 장흥은 서울을 기준해서 볼 때 정남향으로 가장 멀리 있습니다. 그만큼 기후가 따듯합니다.

 

바다도 있지만 탐진강이라고, 전남에서 영산강·섬진강 다음 세 번째 긴 강도 유역을 적신답니다. 덕분에 논과 밭이 너르게 자리잡았고 산들도 호남정맥이 여기저기 누비며 봉오리들을 곳곳에 맺어놓았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키조개·매생이·바지락·낙지·쭈꾸미·갯장어, 탐진강에서 잡은 민물고기, 들판에서 자라는 한우(사람보다 소가 많은 고장이 장흥입니다. 사람은 4만2000명이지만 소는 5만마리랍니다), 논에서 나는 찹쌀·맵쌀·올벼쌀, 산에서 나는 표고버섯·약초·전통차 등이 토요일마다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다른 지역에서는 바다 양식을 할 때 염산 처리를 하는 김의 경우, 장흥은 이런 잘못을 깨끗이 걷어낸 무산(無酸)김으로 청정함을 더했습니다. 좀더 믿음을 주려는 목적으로 이를테면 ‘고향 할머니 장터’에서는 장흥군에서 자격을 따져 발급해 주는 이름표가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도록까지 만들었습니다.

 

 

장흥삼합과 낙지삼합, 그리고 키조개전

 

일행은 3시 20분 장터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60도 넘는 소주를 빚는 ‘장흥 선비 주조장’도 찾았고요 70년대식 2층 건물에 골동품이랑 옛날 물건과 오래 된 사진을 모아둔 ‘추억의 사진관’도 찾았답니다.

 

 

대통령도 와서 먹었다는 ‘3대곰탕집’에서 소고기수육에 막걸리를 곁들이는 이도 있었고요, 장흥으로 시집온 이주 여성들이 판을 벌이는 ‘다우리 음식거리’를 기웃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으뜸 관심은 장흥삼합과 낙지삼합이었답니다. ‘삼합’이라 하면 ‘홍어삼합’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 셋을 합하면 삼합(三合)이랍니다. 장흥삼합은 장흥 명물 셋(소고기 키조개 표고버섯)을 합했고요, 낙지삼합은 낙지+삼겹살+키조개였답니다.

 

 

키조개전. 뒤쪽 검은 빛이 비치는 녀석은 소고기전.

키조개전을 먹은 이도 있었습니다. 얇게 저민 조갯살에 달걀 반죽을 입힌 다음 약한 불로 그윽하게 구워낸다는데, 조개즙이 그대로 머금어져 있는데다 또 부드럽기는 씹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라 합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오후 4시 50분 시간이 모자라 아쉬워하며 돌아오는 버스에 오르는데요, 하얀 스티로폼 상자나 까만 비닐 봉지들이 저마다 손에 들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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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경천대와 예천 용궁, 회룡포, 삼강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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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생태·역사기행 세 번째는 낙동강 상류 경북 상주와 예천을 찾았습니다.

 

물과 뭍이 어우러져 풀어놓는 습지 풍경과, 거기 터 잡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였습지요. 시원한 강바람과 까칠까칠한 모래밭이 특히 누릴 만했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이런저런 개발이 자연에 끼치는 악영향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산세와 들판·물길 어우러진 풍경……

 

5월 21일 45명을 실은 버스는 10시 40분께 상주 경천대(擎天臺)에 닿았습니다. 낙동강 1300리 물줄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이곳에 도착도 하기 전에 조금씩 들떠 있었습니다. 여기 낙동강 풍경이 바위절벽과 너른 들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세, 넉넉한 물길 등을 두루 갖추고 있음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겠지요.

 

전망대.

 

 

정문을 지나 왼쪽 오솔길로 천주봉 전망대에 이른 이들은 휘감아도는 강물과 물이 찰랑거리는 논들을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맞이했습니다. 오솔길에서는 바닥에 깔린 흙과 솔갈비가 주는 보드랍거나 까끌까끌한 느낌을 신발을 벗고 맨발로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으뜸은 낙동강에 바짝 붙은 벼랑 경천대와 그 옆 무우정(舞雩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벼랑 끝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마치 할 말을 잊은 듯이 물끄러미 내려다봤습니다. 앞서 전망대서는 웃음이나 감탄사라도 터뜨렸지만, 여기서는 그냥 다들 멀거나 가까운 풍경을 눈에 담기 바빴던 것이랍니다.

 

 

 

햇살은 구름에 가려져 부드러웠고 물줄기를 타고 밀려오는 강바람은 몸을 휘감으며 지나갔습니다. 무우정에서는 앞뒤로 둘러선 나무들 그늘을 그윽하게 즐깁니다. 지붕 위에 피어난 노란 꽃이 색달랐는데, 거기서는 강물 흐름의 푸근함을 누릴 수 있었답니다.

 

 

 

 

경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망한 자리에 새로 들어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을 모셨던 한 선비(우담 채득기)의 자취가 있습니다. 명나라 망한 까닭이 여럿 있지만, 임진왜란 탓이 적지 않음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명나라 군대가 조선 땅에서 횡포를 퍽 부리기는 했지만, 조선 선비로서는 '명나라가 조선을 지켜주는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을 테고, 그것이 여기 새겨져 있습니다. 경천대를 알리는 자연 빗돌에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을 세로로 두 줄 적었습니다.

 

경천대 빗돌을 살펴보는 이들.

 

경천대 빗돌.

 

고사리가 수북하게 자란 탐방로.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연호이니까, 뜻은 대충 이렇겠지요. ‘대국 명나라 천지에 해와 달 같은 숭정 황제여!’ 지금은 누구나 조선 선비들의 이런 사대주의를 아무렇게나 비판해 대지만, 동아시아를 뒤흔든 끔찍한 재앙 같은 전쟁을 온 몸으로 감당해야만 했던 당시 사람들은 의리나 명분 아니라도 명나라를 끔찍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겠지 싶습니다.

 

4대강 사업 이전인 2010년 경천대 일대. 다음 지도.

 

4대강 사업을 끝내고 난 최근 경천대 일대. 다음 지도.

다만 2010년만 해도 경천대 이쪽저쪽에 너른 모래밭이 있어서 그 풍경이 한결 넉넉하고 조화로웠는데, 4대강 사업을 끝낸 지금은 물고기가 파들고 더러운 물질을 거르던 모래가 사라져 아쉬웠답니다. 바로 아래 들어선 상주보가 물을 가두는 바람에 경천대 앞은 고인 물이 내는 푸른 빛으로 강심조차 깊었고요…….

 

탐방 루트 마지막에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상도 세트장도 멋졌습니다.

 

내륙 한가운데 ‘용궁’이 있다?

 

점심은 예천군 용궁(龍宮)면 용궁단골식당에서 먹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밥집인데 평일에도 줄 서서 기다린 끝에야 국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때가 잦습니다. 바닷가도 아니고 내륙 한가운데 용궁이 있다니 재미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는 독립된 용궁현이었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 예천군에 더해졌습니다. 용담소·용두소 두 여울에 사는 용들이 이룩한 수중 용궁 같은 지상낙원을 지향하는 지명이라 합니다. 여기서는 파출소도 ‘용궁’파출소고 면사무소도 이름이 ‘용궁’이랍니다.

 

 

이처럼 ‘용궁’이 붙은 간판이 많은데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어울린답니다. 또 용궁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100% 국산 재료로 만드는 '토끼간빵'은 요즘 새롭게 뜨는 이곳 명물입니다.

 

모래가 풍성한 내성천

 

뭐니뭐니 해도 이날 정점을 찍은 데는 예천 회룡포, 모래가 풍성한 내성천이었습니다. 내성천 상류 영주 소백산은 이름에 들어 있는 흰(白)색에서 나름 짐작되듯, 쉽사리 잘게 부서지는 사암(砂岩)이 대부분이지요.

 

뿅뿅다리를 건너는 청춘 남녀.

 

들어서고 있는 영주댐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낙동강 모래 절반이 여기서 나온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모래가 풍성도 하고 굵기도 해서 하류 자잘하고 고운 모래가 익숙한 이들에게는 색다른 체험이 됐던 것입니다.

 

뿅뿅다리를 건너 제방 따라 걸은 다음 마을을 가로질러 돌아온 뒤 바짓가랑이를 걷고 신발을 벗은 채 얕게 흐르는 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이는 구멍이 숭숭 뚫린 다리에 앉아 얘기를 나눴고 어떤 이들은 마주보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거기 움직이는 꽤 큰 물고기들을 헤아리기도 했고, 그런 녀석들 사진에 담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물살이 빠른 데는 모래가 발을 디디면 쉽사리 쑥 들어갔고 느린 데서는 발이 깊이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발가락을 간질이는 감촉이 까칠까칠하니 좋은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발등 위를 구르며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모래가 잘 보이는 데는 아무래도 빠른 물길이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모래를 이리저리 퍼나르며 뒤적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기야, 예닐곱 해 전만 해도 여기서 돈짝만한 재첩이 잡혔다 하니까요…….

 

돌아오는 길에는 삼강주막에 들렀지요. 내성천이 낙동강에다 몸을 푸는, 두 물이 만나 세 흐름이 되는 자리입니다. 1900년대 지어진 주막 건물은 커다란 나무 아래 나지막하고, 복원한 보부상 숙소와 뱃사공 숙소는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아래쪽 시커먼 것은 하늘을 나는 새 그림자입니다.

 

 

 

옛적 동네 남자들 어른이 됐는지 여부를 갈라주던 들돌이 오지게 있고, 뒤편 엄청나게 큰 당산나무에는 아낙 몇몇이 들러붙어 소원을 이뤄주십사 빌고 있습니다. 1990년대 진짜 삼강주막에서 술밥 팔던 할머니는 이제 없지만, 사람들은 새로 생긴 주막에 들러 1만4000원 짜리 한 상을 즐겼고요.

 

소원을 비는 두 아낙.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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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 이래도 투표안하면 나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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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기 참정권=투표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안다면

 

저는 사실, 투표는 하루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좀 편하게 사는 축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투표가 어쨌든 일단은 권리인데, 세상에 ‘권리 위에 잠자는 사람은 보호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데로, 지금처럼 평등선거·보통선거·비밀선거가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잃지 않은 모든 구성원에게 주어지기까지는 그야말로 피튀기고 숨넘어가는 일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이 되고 처음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성년에 이른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습니다만, 유럽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는 재산이 없는 사람이나 여성들이 자기들 선거권=참정권 확보를 위해 엄청나게 피를 뿌려대야 했던 것입니다.

 

사전 투표를 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과정을 겪고서야 노동자나 여성들이 부자들이나 남자들과 마찬가지 권리를 갖게 됐으니, 그 역사를 귓등으로나마 들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 뿌려진 피한테 미안해서라도 그 끊어진 목숨한테 미안해서라도 방해를 하든 말든, 바쁜 일이 있든 말든, 사용자가 일이나 하라 하든 말든, 투표는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투표가 없었던 박정희 독재 말기

 

또 하나, 이런 기억도 저로 하여금 투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다닐 때 들은 우스개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35년 전 일이네요. 1979년 봄이었으니까요.

 

떡을 두고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누가 가장 자주 목욕을 하지 않는지를 가립니다. “나는 설 추석 명절마다 한다네.” “나는 전국체전이 열릴 때마다 한다네.” “나는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한다네.” 이렇게 해서 4년이나 지나야 목욕을 한 번 한다는 사람이 떡을 가져가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완전 새까맣고 더러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람이 짠~~ 나타났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게나, 아직 하수군. 나는 말일세,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목욕을 한다네.” 그러니까 그이는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17년 남짓 목욕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서읍사무소 앞에, 사전투표소를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경찰에 들키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런 치들한테 이런 일이 발각됐다면 아마 어쩌면 줄초상을 치고 난리도 보통 아니게 났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욕을 했다가, 중앙정보부 요원한테 끌려가서 어금니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고문을 당했다는 따위 풍설을, 어린 저도 심심찮게 듣곤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저는 때가 되면 때 맞춰 투표를 할 수 있는 세상과 때가 돼도 때 맞춰 투표를 할 수 없는 세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나름 알고 있기 때문에, ‘귀찮아서’ 또는 ‘공장에 일하러 가야 해서’ 또는 ‘시험공부를 해야 해서’ 따위는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투표하기 너무 쉬워진 요즈음 선거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귀차니스트들이 엄청나게 늘었나 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빠졌나 봅니다. 그보다는 투표를 소중한 권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귀찮은 의무로 여기는 사람이 늘었나 봅니다.

 

물론, 투표가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무라는 것은 틀리지 않는 사실이라고 저는 봅니다. 사람들이 투표라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사회가 존립하지 못하거나 정치가 비틀리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나라가 나서서 투표할 수 있는 날을 하루에서 사흘로 늘렸습니다. 6월 4일 투표일에 더해 그 나흘 닷새 전인 5월 30일 오늘과 31일 내일까지 사전 투표일로 정했습니다.

 

사전투표일에 하는 투표가 투표일에 하는 투표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려고 오늘 사전 투표를 한 번 해 봤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입니다. 다른 점이 두 개 있었고 같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해진 투표일에 투표를 하려면 자기한테 정해진 투표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투표소에서는 투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전투표일에 투표를 하면 전국 곳곳에 널려 있는 읍·면·동사무소를 찾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내서읍사무소 3층에 마련된 사전투표소 들머리.

특별하게 정해진 장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번거로움이 오히려 없습니다. 자기가 일하다가 또는 어디 나들이 나가다가, 얻어걸리는 읍·면·동사무소가 있을 때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오늘 출근하는 길에 제가 사는 동네인 마산 내서읍 읍사무소에 들어가 투표를 했습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사전투표는 관내 선거인과 관외 선거인 두 줄로 나뉘어 진행되고, 정해진 투표일에 하는 투표는 그냥 한 줄로 서서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내서읍에 살기 때문에 관내선거인 줄에 서서 투표용지 받은 일곱 장에다 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꾹 누른 다음 바로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관외선거인은 이렇게 누른 다음이 달라집니다. 꾹꾹꾹꾹꾹꾹꾹 누른 투표지를 해당 지역으로 우편 발송을 해야 하기 때문에, 봉투에 넣는 작업이 하나 더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선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쉬웠습니다.

 

같은 하나는, 신분증만 들고 가면 전국 어느 읍·면·동사무소에서나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신분증이 필요한 것은 정해진 날 하는 투표랑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데도 투표를 하지 않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그런 이는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돌과 나무에 새겨진 옛사람들의 심정과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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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울산암각화박물관 →1.1km 반구대 암각화 →(울산암각화박물관 근처까지 돌아나옴)2.3km (자동차로는 5.7km) 천전리 각석 →(울산암각화박물관으로 돌아나옴)4.5km 구량리 은행나무→56.2km 달전리 주상절리 →11.2km 포항 흥해읍 이팝나무 군락지 →8.6km 냉수리 신라비 →4km 북송리 북천수藪→9.6km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자연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오랜 세월 돌과 나무는 인간에게 신앙의 대상이었습니다. 큰 바위나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안녕을 빌었습니다.

 

삶이 거칠고 험했기에 그 마음은 더욱 절실했겠지요. 희미하게나마 곳곳에 남아 있는 그런 흔적들을 통해 인간 보편의 욕망과 삶을 더듬어 보게 됩니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돌과 나무를 찾아가는 여행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서 시작합니다. 반구대 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답니다. 오밀조밀한 산이 겹겹이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을 감싸듯 펼쳐져 있습니다.

 

반구대를 휘감은 물줄기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일부인 연로(硯路)는 반고서원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벼랑길로 너비가 2.5m가 채 되지 않습니다. 연로개수기(硯路改修記)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연로는 ‘벼룻길’이라는 뜻으로 ‘벼루처럼 미끄러운 바윗길’, ‘벼랑길’, ‘사대부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학문길’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눈맛이 좋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반구대 암각화에 이릅니다. 태화강 상류 서쪽 기슭 ‘건너각단’이라는 암벽에 있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입니다. 대부분이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한살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 얼굴을 비롯해 사냥하는 사람들, 활·작살·그물, 다양한 고래, 거북 같은 바다동물, 호랑이·멧돼지·사슴 같은 뭍짐승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사실적이랍니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새끼를 밴 호랑이, 교미하는 멧돼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사슴 등이 그렇다고 합니다.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도 있습니다.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의 모습도 그렸으며, 그물이나 배까지 표현돼 있습니다. 대부분 다산과 풍요로운 생업, 안전한 사냥을 기원하는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당시 생활상을 풍성하게 보여줍니다.

 

건너편 반구대암각화를 바라보는 데 필요한 망원경.

 

선과 점으로 동물과 사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특징을 실감나게 그려낸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당대 생활과 풍습을 알려주는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습니다.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답니다.

 

하지만 반구대에 가면 이런 훌륭한 작품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는 편이 좋습니다. 주변을 감싸며 끝없이 펼쳐졌던 초원도 사라지고 망원경으로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암각화도 이제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연댐으로 해마다 침수와 노출이 되풀이되는 바람에 망가질까봐 걱정스러운 실정이랍니다. 문화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아쉬운 대목이지요.

 

둘레 풍경에 넋을 잃다보면 무심히 스치고 지나가기 십상인 것이 반고서원유허비(울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3호)입니다. 돌아나오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눈에 들어옵니다. 귀양살이하러 온 여기서 반구대에 올라 시를 지었던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빗돌입니다. 반구대는 ‘포은대’라고도 합니다.

 

울산암각화박물관. 거기 들머리에 있습니다.

 

울산암각화박물관은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을 소개하는 한편으로 암각화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물 모형을 통해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데요, 암각화와 각석을 찾아가기 앞서 박물관에 먼저 들러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울주 천전리 각석과 서석

 

울주 천전리 각석은 태화강 상류 물줄기인 대곡천(大谷川) 중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를 이릅니다. 여기를 걸어가는 길도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만큼이나 멋지답니다.

 

걷는 내내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온통 바위로 이뤄진 골짜기를 풍성한 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이지요. 대곡천이 대곡천인 까닭을, 물소리를 들으니 알겠습디다.

 

 

각석에 있는 마름모꼴, 동심원, 나선형 등 기하학 문양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림 말고 ‘천전리 서석’이라고,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800자 남짓 명문도 남아 있습니다.법흥왕 때 씌어진 글자들로 이를 풀면 당시 신라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더불어 조상들의 생활모습과 종교관을 알려주는 암각화랍니다.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의 모습이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돼 있는데 사실성은 처진다는 평을 받는다고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와 견줘가며 감상하면 재미가 더해집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이 담겨 있는 그림들은 어느 특정 시대가 아니라 여러 시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더욱 뜻깊다고 합니다.

 

여기 새겨져 있는 6세기부터 9세기까지 신라시대 여러 글자들은 특별히 천전리 서석(書石)이라 합니다. 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금석문)들은 종이에 남겨진 문헌 기록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그 시대라는 나무에서 나이테 같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십상입니다.

 

왼편:원명=원래 있었던 새김글. 오른편:추명=뒤에 덧붙인 새김글.

 

천전리 서석도 마찬가지랍니다. 서석은 아래쪽에 있고 각석은 주로 위쪽에 있습니다. 여기 그림과 글들은 반구대 암각화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서 맨눈으로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각석으로 건너가기 전 골짜기 바위에는 공룡 발자국도 화석(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호)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전리각석 들머리. 공룡발자국 화석.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64호)는 나이가 대략 550년으로 짐작됩니다.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이 들통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갈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가 여기로 들어오면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었다고 합니다. 이지대를 기리는 유허비(遺墟碑)도 함께 서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지요. 그런 믿음으로 나무를 우러름의 대상으로 삼고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구량리 은행나무도 그렇습니다. 나무를 해코지하면 해를 입는다고 믿어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경.밑둥.

 

나무 밑둥 썩은 구멍에 대고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낙이 정성들여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된다고도 합니다. 나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입혀지는 의미와 해석이 달라집니다. 구량리 들판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아왔습니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사무소 뜰에 있습니다. 진흥왕 때인 524년 세워졌다고 짐작되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 적어도 21년 앞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 된 신라비로 인정받았었습니다.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至都盧) 갈문왕(지증왕)이 글자로 나왔고 그래서 지증왕 4년(503년)에 세워졌다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2009년 발견된 같은 포항의 중성리 신라비(보물 제1758호)가 마찬가지 재산 문제를 다루면서 신사년(辛巳年)이라 적은 빗돌이라 최고(最古) 지위는 잃게 됐습니다. 여기 신사년은 냉수리 신라비보다 이태 앞선 501년으로 여겨지고 있답니다.

 

어쨌거나 냉수리 신라비에는 고르지 못한 네모꼴 화강암의 앞·위·뒤 3면에 231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과 상속에 관한 내용이라 합니다.

 

지증왕을 비롯한 6부 출신 귀족 7명이 앞선 두 임금이 재산 소유를 인정한 결정 사항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절거리가 죽은 뒤 아우 아사노(또는 아우의 아들 사노)에게 상속하고, 다른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귀족이 참여한 가운데 처리했는데, 이는 왕권이 세어지기 이전에 임금의 권한이 보잘것없었다는 신라 실상을 알려주는 증표라 합니다. 국가에서 세운 빗돌로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뒤에서.앞에서앞쪽 위에서

 

바위가 그전에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문자를 만나면서는 성격이 바뀌어 임금과 나라의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흥해 이팝나무 군락

 

흥해 이팝나무 군락(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은 흥해향교(대성전은 문화재자료 제87호) 뒤쪽으로 상수리나무와 뒤섞여 자라는 이팝나무 서른네 그루를 이릅니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향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이팝나무에서 씨가 떨어져 차츰 번식했으리라 짐작합니다.

 

흥해 이팝나무 군락. 꽃이 피었을 때 찍지 못했습니다.

 

흥해향교 태화루.

 

마을 가운데 공원에 자리잡고 있는 100~150년 가량 된 이들 나무가 꽃이 피면 장관을 당연히 이룹니다. 사람들은 때맞춰 산책만 나와도 이 엄청난 꽃잔치를 누릴 수 있겠지요. 이팝나무는 여름 문턱에 들어설 때 마치 뻥 튀겨놓은 쌀밥처럼 하얀 꽃이 핀다고 붙은 이름이랍니다.

 

이팝나무에 피는 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쳤는데 여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답니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데서 잘 자라므로 비가 알맞게 내리면 꽃이 활짝 피고, 그렇지 못하면 제대로 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는 벼농사에도 영향을 끼치는 만큼 오랜 경험을 통해 자연을 관찰한 결과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고 항상 바다와 함께 흥한다는 뜻이 담긴 흥해 지명과도 관련이 깊다 할 수 있겠습니다.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

 

포항 달전리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415호)는 신생대 제3기(대략 200만 년 전)에 용암이 뿜어져 나오다가 식으면서 굳은 것으로, 돌기둥이 높이 20m 너비 100m로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펼쳐놓은 병풍처럼 생겼습니다.

 

 

 

주상절리는 대부분 수직으로 서 있는데요, 여기는 위쪽은 80도 정도 기울어졌지만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수평에 가깝게 휘어져 있어 특이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용암이 땅 밑에서 지표로 솟아 오른 후 수평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처럼 흘러내린 방향이 유별나서 멀리서 보면 기와지붕으로도 보이고 활짝 펼친 부채처럼도 보입니다. 또 잘 마른 나무를 제대로 쪼개어 켜켜이 쌓아놓은 장작 같기도 하답니다. 이런 달전리 주상절리 앞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 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옛날 돌을 캐내던 채석장 자리여서 발견이 됐다는데 그 덕분에 이리 사람들 눈길을 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주상절리야 그런 데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그래도 새옹지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설핏 드는 듯도 하답니다.

 

포항 북송리 북천수

 

 

이번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마는 포항 북송리 북천수(천연기념물 468)입니다. 곡강천을 따라 2.4km로 길게 만들어진 솔숲입니다. 남아 있는 마을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길며, 규장각에 있는 <흥해현지도>와 <한국지명총람>, <조선의 임수> 등에도 기록돼 있는 예부터 매우 이름난 숲이라 합니다.

 

 

옛날부터 소나무는 뿌리가 깊어 방풍림으로 쓰였는데요, 흥해읍 일대 수해와 바람을 막는 구실을 했습니다. 정월대보름에 숲속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앞산에서 산제를 지내며 한 해 전에 병에 담아 묻어둔 소금물 상태를 보고 한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등 오랜 기간 신앙 대상이었습니다.

 

 

규모나 가치로 보면 사람들 발길이 잦을 것 같은데 뜻밖에 한산하고 조용합니다. 여기 서쪽 끄트머리 흥해서부초등학교에는 굵직한 소나무가 운동장에까지 무리를 지어 있는데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여기 북천수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이 나무를 꾸준하게 심고 가꿉니다. 소나무 품종을 알맞추 골라 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숲을 과거 유산으로만 여기는 대신 지금도 손을 보태어 키우는 모습이라 보기에 썩 유쾌하고 즐거웠답니다.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바위와 나무에 새겨진 문화유산 여행길의 종착지는 바닷가에 나와 앉은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9호)이랍니다. 규모에서 보자면 우리나라 최대라는데요, 여행 삼아 다니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데는 두 군데랍니다.

 

칠포리 산기슭 암각화 전경.

 

하나는 길가다가 오른편 무슨 공장 있는 데서 산으로 100m 정도 올라가는 기슭(칠포리 201번지)에 있고요, 다른 하나는 암각화길이라 이름 붙은 이 도로가 바닷가쪽으로 더 나아가 국도 20호와 만나지며 왼쪽으로 휘어지는 왼편 언덕배기 들머리에 있습니다.

 

가장 위쪽 바위.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옛날 사람들의 제사터라 해도 틀리지 않을 텐데요, 여기 두 곳은 모두 제사 지내기에 적격인 자리들로 보였습니다. 산기슭 암각화는 모두 세 군데로 흩어져 있습니다.

 

조그만 골짜기에 들어 있는 바위는 원래 위에 있던 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것 같고 아래쪽 바위에는 신통한 암각화가 그다지 있지 않습니다. 가장 위쪽 바위에는 제법 암각화가 많은데 가운데는 잘록하고 아래와 위가 널찍한 실패 또는 두툼한 칼손잡이 모양이 여럿 있고 알구멍(性穴)도 많습니다.

 

바닷가 언덕배기 들머리 암각화는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데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칼손잡이 모양과 화살촉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절박한 심정으로 바위를 쪼아 팠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칠포리 바닷가 암각화.

 

칠포리 바닷가 암각화.

 

이렇게 보면 거기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거기에 바위가 있었고 또 절박한 사람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빌고 바라는 심정을 거기에 새겨 넣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박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그 무엇을 이루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가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잠깐 해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답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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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서석 주인공은 연인? 오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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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 천전리 각석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이 서석골이랍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전에 이름이 확인되는 골짜기입니다. 이를 일러주는 명문이 바로 천전리 서석(書石)입니다.

 

이 서석은 천전리 각석 아래 쪽에 주로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먼저 쓰여졌다 해서 원명이라 하는 왼쪽 네모 상자 안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을사년(법흥왕 12년, 525년)에 사탁부 갈문왕이 찾아 놀러와 처음 골짜기를 봤다. 오래된 골짜기이면서도 이름이 없어 서석곡이라 이름 짓고 좋은 돌을 얻어 글자를 새겼다.”

 

여기 서석곡에 사탁부 갈문왕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함께 놀러 온 우매(友妹)  여덕광묘(麗德光妙)한 어사추여랑님이다.” 그밖에 이들을 수행한 이는 남자 셋과 여자 둘이었습니다.

 

천전리 서석. 아래 왼쪽이 원명. 아래 오른쪽이 추명.

 

원명에서 서석골 이름을 지었다고 나오는 갈문왕이 누구인지는 나중에 쓰여진 오른쪽 네모 상자 안 추명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을사년 6월 18일 새벽(昧)에 사탁부 사부지 갈문왕 누이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 온 이후 올해로 14년이 지났다.”

 

여기 사부지는 입종으로 법흥왕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놀러왔던 때를 6월 18일 새벽이라고 콕 집어 적었습니다. 이어지는 추명은 이렇습니다.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정사년(537년)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셨다. 왕비 지시혜비는 애타게 그리워했다. 기미년(539년) 7월 3일 왕과 누이가 함께 써놓은 서석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이번에는 사부지 갈문왕의 왕비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이는 <화랑세기>에 지소태후로 나옵니다. 추명은 왕비와 동행한 사람들도 적었습니다. “셋이 함께 왔는데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와 사부지왕 아들 심맥부지가 함께 왔다.”

 

천전리 각석. 천전리 서석과 같은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위쪽에요.

 

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라 하니 그 왕비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 박씨 보도부인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 아들 심맥부지는 한 해 뒤(540년)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입니다. 이어지는 추명은 이들을 수행한 이가 남자 셋과 여자 셋이라고 일러줍니다.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주인공 자격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부지 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 그리고 갈문왕의 조카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지시혜비, 그 어머니인 법흥왕비 부걸지비(사부지 갈문왕에게는 형수 겸 장모), 마지막으로 지시혜비의 아들 심맥부지 다섯입니다.

 

여기서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원명의 우매(友妹)와 추명의 새벽(昧)이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우매를 벗으로 사귀는 누이(같은 여자)로 풀고요, 다른 한쪽은 벗(友)을 두고 별 뜻 없이 꾸미는 글자일 따름이라고 봅니다.

 

벗으로 사귀는 누이로 보면 사부지 갈문왕과 어사추는 연인(그 때 근친혼이 성했기에 둘은 친족일 수도 있답니다)이 되지만 별 뜻이 없다고 여기면 말 그대로 손아래누이가 됩니다.

 

천전리 서석/각석 들머리에 있는 공룡발자국 화석. 옛날 신라 사람들도 여기 서석골에 들를 때 이 화석을 보기는 봤겠지요. 화석인줄 알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새벽(昧)은 원명에 나오는 나들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글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눈길을 두는 쪽에서는 나들이가 목적이 가벼운 놀기에 있지 않고 제사 지내기에 있다고 봅니다. 귀신이 활동하는 때가 밤이라는 데에 착안한 얘기입니다.

 

반면 새벽이라는 시기에 별로 눈길을 쏟지 않는 이들은 놀기가 목적이라 여깁니다. 여기 나오는 (음력) 6월 18일과 7월 3일이 여름철임을 내세워 피서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쪽에서는 남녀 연인이 놀러 왔다고 보고, 다른 한쪽은 오누이가 제사를 지내러 왔다고 봅니다. 어느 얘기가 맞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인설 쪽이 사람들 흥미와 관심을 더 당기게는 합니다. 그렇지만 개연성이 더 높기는 오누이설 쪽인 것 같습니다.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어사추와 사부지가 그리워 그이들이 함께 새겨놓은 서석을 보러 나왔다는 서석 내용도 이런 견해를 좀 더 많이 뒷받침해 준다고 합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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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만만해도 녹록잖고 버거워도 살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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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임시 수도 기념관 →0.7km 동아대학교 박물관  →2.8km →중앙공원 3.8km →남포동·광복동일대 0.5km →자갈치 시장 1.0km → 보수동 책방골목 0.4km →부산근대역사관 1.1km →40계단 문화관광테마거리(40계단문화관)

 

임시수도기념관-이승만 대통령 임시청사

 

부산이 지금은 국제적인 영화제가 열리고 외국인 관광객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화려한 국제도시로 탈바꿈했지만 6.25전쟁 당시는 전국에서 밀려든 피란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1950년 8월 18일부터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 27일까지, 그리고 1.4후퇴로 서울을 내어준 뒤부터 휴전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였답니다. 

 

임시수도기념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3호) 건물은 일제강점기 경남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지은 도지사 관사로 6.25전쟁 당시 대통령 임시 청사였습니다. 일대 광복동과 남포동의 화려함에 밀려 근처에 이처럼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뜻밖에 많습니다.

 

 

한국전쟁 때 정치·경제·국방 등 정책 수립과 전쟁 수행의 산실로 근·현대 헌정사를 담당한 장소랍니다.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유럽식 르네상스 양식이 변형되면서 일본식과 서양식이 절충된 목조건축물인 것입니다.

 

대외 활동을 하는 대현관(大玄關)과 응접실 등은 서양식으로, 주거 공간은 일본의 전통 주거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건축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잘 가꿔진 야외 정원과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기품 있는 운치가 느껴집니다. 1월 1일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 날)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근·현대사 체험 학습 장소로도 활용되는데,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전쟁의 폐해만큼은 아주 열심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마치 이승만 기념관처럼 꾸며 놓은 것은 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란행렬 그림과 이승만 내외가 입었던 옷.

이승만이 대통령이기 이전에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인물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보도연맹 학살은, 더없이 처참한 동존상잔으로 역사에 기록된 6.25전쟁에 견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이었습니다.

 

그 특명을 내린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의 비극만 강조하고 그런 학살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역사의 현장이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단편적으로 기록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고민을 좀 더 깊이 있게 해야 하겠다 싶습니다.

 

임시수도기념관 선거 유세 모형.

 

동아대학교박물관-부산 대표 근대 공공건축물

 

동아대박물관.

 

사람들이 북적이는 번화가에 박물관이 있다면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6.25전쟁 당시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였던 곳에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가 들어오면서 지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눈길을 잡아끄는 건물 겉모습이 범상치 않습니다. 정면 한가운데 현관에 자동차를 댈 수 있도록 포치(porch)가 툭 튀어나왔고, 가운데와 양쪽 끝부분을 튀어나오게 하는 한편으로 양끝을 ‘ㅅ’자 모양으로 널빤지를 붙이는 박공(牔栱)지붕으로 하는 등 전체적으로 위엄이 있어 보이게 처리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사뭇 위협적이었겠다 싶습니다. 어쨌거나 근대 정치·사회적 변화를 감당했던 건물로, 경남도지사 관사(임시수도기념관)와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근대 공공 건축물이랍니다.

 

정문.

 

등록문화재 제42호로 국경일, 공휴일, 동아대학교 개교기념일, 일요일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당에 있는 탑들이 사람들이 오고가는 한길과는 한 뼘 거리입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눈길을 주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보물 제569호로 지정된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내어주라)이라 적은 안중근의사 유묵과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그려 담은 국보 제249호 동궐도를 비롯한 문화재를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2층은 서화실·도자실·고고실·와전실·민속실·불교미술실 같은 상설전시실이고요, 3층은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기록실로 쓰고 있습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면 조그마한 설명문 하나에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자취가 보이는 등 곳곳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이 확 느껴집니다.

 

3층 기록실에 나와 있는 관련 유물들.

 

부산민주항쟁기념관-부산 민주화 운동의 열기

 

중앙공원에서 내려다보면 부산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몰려들어 피란민 판자촌이 넘쳐났던 대청산이 부산 시민들의 휴식처로 거듭난 것입니다.

 

70m 높이로 우뚝 서 있는 충혼탑에는 부산 출신 전몰 장병 영령 8954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용두산 충혼탑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밖에 일제강점기를 돌아보는 부산광복기념관과 대한해협 전승비도 있습니다.

 

중앙공원 충혼탑.

 

 

중앙공원에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 노릇을 했던 부산의 민주화 열기를 느낄 수 있는 부산민주항쟁기념관(월요일·공휴일 휴관)도 있습니다. 여기를 돌아보면 한국 근·현대 역사 발전에 부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열정을 바쳤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답니다.

 

그래서 부산민주항쟁기념관을 비롯한 일대를 민주공원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체험학습으로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치와 그 소중함에 대한 교육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노무현 소나무.

 

2002년 5월 4일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여기를 찾아 소나무로 기념 식수를 했습니다. 민주공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연이 깊은 까닭을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부산을 찾는 정치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중앙공원에는 많은 조각상과 기념조형물이 있습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원형 램프로 에워싸인 민주항쟁기념관 안쪽 마당에 세워진 높이 20m의 ‘민주의 횃불’이랍니다. 민주공원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밤중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부산광복기념관은 2000년 광복절에 맞춰 부산의 독립운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문을 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 기지가 된 항구도시 부산의 독립운동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비롯해 여러 부문에서 일찍부터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래 3.1독립만세운동과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등을 주제에 따라 전시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지역 항일운동을 정리한 연표와 자료도 있습니다.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 날)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남포동·광복동 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공간입니다. 일제강점이 끝남에 따라 ‘본토’로 돌아가게 된 일본사람들이 물자를 팔아 노자를 챙기기 위해 지금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새롭게 형성됐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들여온 많은 통조림들이 나오는 바람에 깡통시장이라고도 했습니다. 밀수품도 꽤 나왔는데 자유시장, 돗떼기시장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지금은 국제시장으로 일컫는 일대를 포함해 남포동·광복동 거리도 도심 공동화로 쇠락하다가 몇 해 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광복동패션거리와 PIFF광장에는 모여드는 사람들로 주말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임시수도기념관에 있는 당시 판자촌 모형.

 

용두산공원과 국제시장 주변은 통째로 근·현대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산기념관도 그런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남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를 기리는 이 건물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옛 백산상회 자리에 지었습니다.

 

지하와 1·2층 전시실로 되어 있는데 입구는 독특하게 피라미드 모양입니다. 민중계몽교육사업과 언론사 창설, 백산상회를 통한 독립운동자금 확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모로 힘썼던 백산의 흉상도 있고, 친필 편지를 비롯해 책과 도장 등 유품과 독립운동 자료들도 모여 있습니다.

 

자갈치시장-아지매들의 활기찬 웃음소리

 

자갈치시장은 새벽에 어판장에서 그 싱싱함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부산스런 움직임으로 시작됩니다. 자갈치 아지매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에는 그들만의 애환과 고단함이 보람과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1924년 일본인들이 여기 바닷가에 시장을 열면서 남쪽 물가를 뜻하는 ‘남빈(南濱)시장’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자갈치시장의 시원이 됩니다. 검은 자갈 해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살아 있는 활어만 취급해 살아 있는 채로만 거래되는 자갈치라는 물고기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자갈치시장의 으뜸 매력은 누가 뭐라 해도 그 역동성에 있습니다. 바다사람 특유의 비릿함이 묻어 있는 거칠음은 오히려 정겨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시장사람들과 뒤섞이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갈치시장의 매력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 매력을 누리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이제는 부산에서 으뜸가는 명소로 꼽히게 됐습니다. 자갈치시장에 가면 눈맛 입맛 사람 사는 맛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습니다.

 

자갈치시장에서 또다른 명물은 생선구이입니다. 기름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생선구이 정식을 시키면 얼큰하게 끓인 순대국이 따라 나옵니다. 몇 번을 시켜도 공짜입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곰장어 구이 한 접시를 주문해 놓고 바다구경을 해도 좋습니다. 붉은 노을을 등지고 영도를 오가는 통통배들을 바라보면 그 풍경이 그만입니다. 자갈치시장은 다달이 마지막 화요일 하루가 쉬는 날이랍니다.

 

보수동 책방골목-한국전쟁이 만들어낸 명물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헌책방이 60개 남짓 촘촘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가게마다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책방골목 또한 6.25전쟁의 산물입니다.

 

 

중구·동구·서구·영도구 등에 살던 피란민의 자식들은 구덕산 자락 보수동 뒷산 등에 마련된 노천교실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했습니다. 배움이 그이들에게는 절망을 견디게 해주는 강력한 희망이었습니다. 덕분에 보수동 골목길은 통학로로 붐볐습니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시절에 헌책이라도 살 수 있으면 감지덕지였습니다.

 

한편에서는 피란 온 사람들이 먹을거리 살 돈조차 없을 때면 갖고 있던 책들을 여기에 내다팔았습니다. 여기 책방골목은 이런 수요와 공급이 맞물린 결과물입니다.

 

 

이제 어디 가나 책이 넘쳐납니다. 굳이 책방에 가지 않고 인터넷에서 더욱 손쉽게 살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드는 서점 자리에는 술집과 옷가게가 들어섭니다. 이런 시절에도 보수동 책방골목은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보람을 선사합니다.

 

쉼터가 돼 주기도 하고 추억과 향수도 느끼게 해주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헌책은 정가보다 50~70% 싸게 살 수 있고요 새 책도 다른 데 견줘보면 훨씬 싸답니다. 이제는 책방 노릇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소로 자리를 매겼습니다.

 

부산근대역사관과 40계단 일대-외세의 수탈과 전쟁의 고달픔

 

부산근대역사관(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49호)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얼룩진 부산의 근·현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부산의 근대 개항, 일제의 부산 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비전 등으로 전시가 짜여 있고요 부산 근대거리도 모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착취·수탈의 본거지로 1920년대 지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미군 숙소였다가 1949년 미국문화원이 됐고 그 뒤 시민들의 끊임없는 반환 요구에 힘입어 1999년 대한민국 소유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역사로 외세 지배의 상징이 됐고 부산근대역사관이 여기 들어선 까닭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40계단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피란민들이 살았던 판자촌으로, 바로 앞으로 보이는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하는 장소로 이름을 떨친 곳입니다.

 

40계단. 가운데 즈음에 아코디언 켜는 악사상이 있습니다.

 

40계단 가운데 아코디언 켜는 악사.

 

40계단문화관은 1950년대 피란민들의 힘겨운 생활상이 당시 사진과 생활용품에 담겨 있습니다. 미군 전투식량, 구호 밀가루, 화폐, 비누, 전쟁 당시 학교 모형이나 교과서, 필기구, 도시락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월요일과 국경일, 명절은 쉽니다.

 

일대 테마거리는 잘 짜여 있고요 바로 옆에 자리잡은 동광동 인쇄골목도 여기 밀집해 있는 인쇄공장들을 구경하는 재미를 누리게 해주고 있습니다. 40계단 들머리에는 뻥튀기 조각상이 있습니다. 주인은 뻥튀기 기계를 막 터뜨릴 참이고 지켜보는 두 아이는 지레 질려 귀를 막았습니다.

 

40계단 들머리 뻥튀기 기계.

 

 

어릴 적 골목에서 자주 보던 이 풍경에 눈길을 두다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40계단 가운데 즈음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스며듭니다. 빗방울이 맺혀 있는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니 여러 사람이 오가는데 카메라를 든 외국인 여자도 한 사람 보입니다.

 

 

고난을 온 몸으로 견뎌내며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목표로 삼아야 했던 그 때 그 시절이 이제 와서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 부산의 근·현대 역사 현장을 찾으면서는 지난 날 향수에만 매달릴 일이 아닙니다. 지난날 겨레붙이를 괴롭힌 사실을 들어 일제나 지배집단을 나무라기만 할 일도 아닙니다.

 

아무리 만만한 세상이라도 사람살이가 녹록지 않음을 일러주는 한편으로, 아무리 버거워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이 또한 사람살이라고 말해주는 여행길이랍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에서 발행한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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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마을 이팝나무꽃은 이미 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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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창원교통방송 ‘라디오 정보 교차로’에서 했던 여행지 소개 방송 원래 원고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남해로 초청해 봅니다.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호젓한 길, 주변 자연과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마을, 이에 더해 세상사는 사람들 속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나들이길입니다. 남해 가천 마을과 홍현 마을이 그렇고요, 이 두 마을을 이어주는 도로와 그 도로를 걸으면서 만나지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남해 바래길 가운데 아름답기가 으뜸인 코스로 더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집과 모자라는 농지 확보를 위해 층층이 올린 다랭이논, 마을 이름조차 다랭이마을인데요, 크고 잘 생긴 암수바위와 임신해 배 부른 여자 바위가 대표입니다.

 

가천마을 들머리에서, 봄철에 눈을 뒤집어쓴 이팝나무.

 

마을 아래 있는 조그만 바다도 예쁘장한데, 산책로까지 잘 만들어져 있어 쉽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날씨가 더 더워지면 거기 물에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바다를 제대로 전망할 수 있는 벤치 따위도 갖춰놓았고 담벼락에 그려넣은 이런저런 벽화들도 천박하지 않고 상스럽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인기를 끌게 되면서 예전에는 구멍가게조차 없었으나 지금은 밥집 술집이 여러 군데 생겼습니다. 해물파전 두부김치 유자잎동동주 따위들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멋진 풍경을 누리며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천마을 앞머리 조그만 바다.

 

이어서 걷는 길은 가천 다랭이마을만큼이나 멋집니다. 거슬러 나와 오른쪽으로 아스팔트도로에서 들어서면 홍현마을로 갈 수 있습니다. 2km 남짓인데요 처음 시작은 조금 오르막길이지만 한 모랭이만 돌면 거기서부터는 곧바로 내리막길입니다.

 

길도 편하고 풍경도 아주 편합니다. 바다에는 몇몇 섬과 배가 둥둥 떠 있습니다. 이어지는 해안은 철썩이는 파도와 바위가 조화를 이룹니다. 아직 뽑지 않은 마늘은 비탈진 밭에서 줄지어 선 채 잘도 자랍니다.

 

도로 곳곳 이쪽저쪽 간혹 나타나는 낙서들은, 여기 길을 걸었던 이들이 무슨 사연이었는지 살짝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이렇게 걷는 내내 오른쪽 바다에서는 줄곧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렇게 해서 만나는 홍현마을이 요즘에는 더 뜨고 있습니다.

 

가천마을과 홍현마을 이어주는 도로 담벼락에 적힌 사랑 표시. 저 사랑이 지금도 사랑으로 남아 있을까요?

 

물론 마을 규모는 홍현이 예로부터 가천보다 컸습니다만, 유명하기로는 홍현이 당하지 못했었습니다. 홍현(虹峴)이 우리말로 하면 무지개마을쯤이 되는데요, 가천 마을에 없는 것이 여기는 많습니다.

 

어선들이 드나드는 어항도 있고 바위를 쌓고 물고기를 가둬 잡는 석방렴, 그러니까 우리말로는 독살이라 하는 데도 두 개나 있고 쇳소리 내며 물질하는 해녀도 있습니다.

 

방조림과 독살이 나란히 보입니다.

 

물질하는 해녀 오리발.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방조림도 있어서 마을을 통째로 둥그렇게 감싸안았습니다. 마을에다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입혀주는 멋진 마을숲입니다. 가천 마을은 조그맣고 또 언덕배기에 들어서 있어서, 이런 마을숲을 입힐 데도 없었고 입힐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걸리는 시간은 이렇습니다. 가천 마을에서 40분 안팎, 길을 걷는 데 30분 정도, 홍현마을 둘러보기 적어도 1시간.

 

길 따라 걸으면서 본 풍경. 오른편 마늘밭에서 왼편 홍현마을로 사람 셋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옛날 홍현마을에는 구멍가게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뜨면서는 밥집 술집이 들어섰습니다. 마을 차원에서 운영하는 데도 있습니다. 그러니 막걸리 한 잔 못 걸치거나 밥 때를 놓치거나 할 까닭은 전혀 없습니다.

 

이번 나들이는 자가용 자동차를 몰고 가도 좋고, 남해읍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가셔도 좋습니다. 가천행 군내버스는 자주 있는데 시설이 시외버스 수준으로 뛰어납니다. 자가용이 아니다 보니 여러 군데 들르는 데가 많아 1시간가량 걸리지만, 버스에서 보는 사람 풍경은 썩 괜찮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일연스님 따라 비슬산에서 인각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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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일연 관련 문화유산 여행길 <삼국사기>는 사관이 쓴 정사(正史)고 <삼국유사>는 스님이 쓴 야사(野史)입니다. 정해진 틀대로 하는 유교의 문신귀족이 쓴 삼국사기에 견줘 삼국유사는 매임이나 걸러짐이 없이 자유롭고 진솔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삼국유사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입니다. 만록(漫錄)으로 보기도 하고 미완성 작품으로 여기기도 하며 또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처럼 엇갈림에도 누구나 크게 인정하는 삼국유사의 가치가 있습니다. 유사(遺事)로서 갖는 특징이랍니다. 정사인 삼국사기가 놓친 부분을 삼국유사가 제대로 보완하고 있다는 얘기입지요. 이를 위해 필요한 뼈를 깎는 노력과 뚜렷한 역사의식이 삼국유사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일연의 일생이 오로지 바쳐진 삼국유사

 

일연은 전국을 두루 유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사료도 발굴·수집했고, 유물·유적에 대한 관찰에 필요한 현지 답사도 겸했으며, 사료 검증이나 객관적 서술을 위한 배려 등도 얻었습니다. 역사가로서 일연이 기울인 노력이 이랬으며 그 결과로 삼국유사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유가사에 있는 일연시비.

 

역사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해석하는 사실로서 역사와 현재 관점에서 사건을 재해석하는 현재로서 역사로 구분됩니다. 오늘날은 현재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는데 그런 면에서 삼국유사는 드높이 평가를 받는답니다.

 

유교사관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눈길이 기층민의 삶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고 있음을, 그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지라도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한 가치이고 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더해 일연이 삼국유사에 담아낸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권력·권위와 물질을 지향하는 삶에 찌든 오늘날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는 바가 크답니다. 육당 최남선은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만큼 매력 있는 역사서가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대견사지와 그 삼층석탑이 있는 비슬산.

비슬산과 일연은 인연이 깊습니다. 일연은 지금 경산(경북)인 장산에서 태어났습니다. 22살 승과에 합격한 뒤 20년 동안 보당암․묘문암․무주암 그리고 인흥사와 용천사를 거쳤는데 이 모두가 비슬산에 있습니다.

 

일연이 비슬산에서 묵은 22년 세월은 삼국유사를 태동하고 완성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연은 또 나이 많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경북 군위 인각사로 가서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처럼 일연 스님과 삼국유사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길은 일연과 인연이 깊은 비슬산 유가사에서 시작해 마지막 삶을 마친 군위 인각사에서 마감된답니다.

 

탐방 루트

 

①비슬산 유가사 - 2km, 걸어서 1시간 ②대성암 - 0.4km, 걸어서 10분 ③도통바위 - 1.2km, 걸어서 50분 ④비슬산 산마루 -2.5km, 걸어서 1시간 ⑤대견사지 - 2.5km, 걸어서 1시간 ⑥비슬산자연휴양림 -0.3km, 걸어서 5분 ⑦소재사 - 29km, 자동차로 1시간 10분 ⑧인흥사지 삼층석탑(=남평문씨인흥세거지) - 1시간 30분 74km ⑨군위 인각사 - ⑩일연공원

 

유가사의 돌탑, 도성암의 돌탑

 

유가사는 비슬산 천왕봉 기슭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에 있습니다. 서기 827년 흥덕왕 2년에 도성(道成)이 창건했으며, 한때는 머무는 스님만 3000 남짓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말았답니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절간 오르는 길목에 부도들이 있는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옛 문헌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유가사, 이상한 돌탑만 없으면 이렇게나 좋습니다.

 

유가사는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습니다. 대신 돌로 만든 돌문과 양쪽으로 뾰족한 돌탑이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탑에서 낯선 이의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하나, 둘, 셋, 넷…… 스님이 3000명씩이나 머물렀다는 그 자리에 이제는 돌탑이 가득합니다.

 

너무 많아 어지럽습니다. 저 정도면 간절함이 아니라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씁쓸한 마음을 접고 서둘러 돌아서는데 앞산에 걸려 있는 구름이 시리도록 하얗습니다.

 

 

유가사에서 발길을 돌려 찾아가는 곳은 도성암입니다. 982년 성범이 중창한 이곳에는 일연이 지은 <현풍유가사도성암사적>이 남아 삼국유사에 ‘포산이성(包山二聖)’으로 나오는 도성과 관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유가사에서 도성암에 이르는 산길.

 

도성암.

 

비슬산 정상과 가까운 도성암 가는 길에는 낙엽이 수북했습니다. 지나가는 이는 드물고 늦가을 소슬한 바람에 낙엽들만 이리저리 몸을 뒤챕니다. 도통굴 아래에 있는 도성암 들머리에는 수도에 방해가 되니 말을 삼가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도성암에 들어서자 마당 가운데 삼층석탑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 것도 없이 덩그러니 탑이 놓여 있을 뿐으로 특별한 것 없이 그저 무던한 탑입니다. 그럼에도 한없이 너그러워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빈 공간 때문입니다. 비워냄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성암 마당 탑에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유가사 돌탑들에 짓눌린 어지러운 마음을 개운하게 달래고 발걸음을 대견사지로 돌렸습니다.

 

도성암 마당 한 켠에 있는 도성대사나무.

 

씩씩하고 호방한 절터 대견사지

 

비슬산 휴양림을 따라 올라가다 자동차가 갈 수 없는 지점에서 2.5km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대견사터와 삼층석탑과 조화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슬산 정상에서 참꽃군락지를 스쳐지나면서 월광봉을 지나 내려와도 대견사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창건한 절터가 대견사지라 합니다. 여기에는 삼층석탑이 우뚝 남아 있습니다.

 

대견사는 절 이름에 얽힌 설화도 있습니다. 당나라 황제가 절을 지을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상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떠놓은 대야 물에 아름다운 산이 비취었는데 바로 지금 대견사 자리였답니다.

 

발굴하고 있는 대견사지.왼쪽 위에 삼층석탑이 보입니다.

 

원래 왕지골이라 했는데 그 위쪽에 커다랗게 축대를 쌓고 터를 닦았답니다. 절을 짓도록 한 대국 중국(大)에서 보였던(見) 절터라 해서 대견사(大見寺)라 했다는 것입니다.

 

도성암 석탑에서 느꼈던 감흥은 대견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서 우주를 온 몸으로 끌어안은 듯한 석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 실제 몸체에 견줘 열 배는 더 웅장해 보입니다.

 

낭떠러지 끝간 데 들이세운 대견사지 삼층석탑.

 

캄캄한 밤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별이 스스로 빛날 수 없듯이 존재의 가치는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겸손함과 배려를 생각게 하는 돌탑이었습니다.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에 견줘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대견사지였습니다.

 

대견사는 일연과도 인연이 깊다고 합니다. 대견사 복원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단이 하는 얘기랍니다. 기록에 있는 보당암이 바로 대견사라는 얘기인데, <동문선>에 나온다고 합니다. 보당암이 바로 일연이 머무른 절간이었는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거나 구상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대견사지가 절을 복원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분주해졌습니다. 구체 형상으로 돌리는 대신 상상할 수 있도록 여지를 허락하는 배려도 좋을 듯한데 복원이 된 뒤 어떤 모습을 보일지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답니다.

 

대견사지에 오르면 볼거리와 느낄 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합니다. 대견사지 옆으로 남쪽을 향해 우람한 바위들이 겹쳐 있는데, 그 돌 틈에 열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여기서 사람들이 기도라든지 불교 신앙과 관련된 일들을 해 왔고요.

 

밀교 관련을 짐작게 하는 마애불상.

 

들머리에는 여기 절터가 밀교(密敎)와 관련돼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 모양이 ‘유가심인(瑜伽心印)’과 비슷하다는데, 이는 으뜸 깨달음의 순간을 공(空)으로 표현하고 위로는 부처를 형상화하는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나타내는 밀교 문양이라 합니다.

 

여기 이 ‘유가’는 아래쪽 산자락에 있는 유가(瑜伽)사에서 한 번 더 확인되고 유가사가 포함돼 있는 달성군 유가(瑜伽)면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습니다. 유가는 인도에서 말하는 ‘요가’로서, 마음 작용의 멈춤과 사라짐=열반을 뜻한답니다. 수련 방법으로서 유가(요가)는 호흡 조절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 이치에 걸맞은 상태에 이름을 일컫는다고 합지요.

 

대견사지에서 내려다보는 비슬산.

 

대견사지에서 비탈을 하나 올라가면 나오는 30만 평 규모 진달래 군락지도 전국에 널리 알려진 명소랍니다. 봄이면 여기서 진달래축제가 벌어지는데, 봉우리와 봉우리가 이어지는 사이로 그야말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진달래 무리를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비슬산자연휴양림 쪽 내리막에는 갖은 바위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습니다. 여러 갈래 물길이 흘러내리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바위들입니다. ‘비슬산 암괴류’라 하는데요,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화강암들이라고 합니다. 길이 2km, 너비 80m, 두께 5m에 이르고, 바위덩이 하나가 지름 1∼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답니다.

 

 

비슬산 돌너덜.

 

대견사지 들렀다가 내려오는 길 끝에는 소재사(消災寺)가 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오래된 단풍나무가 인상깊어서, 늦가을이면 이글이글 불꽃처럼 타오른답니다. 모든 재앙을 사라지게 한다는 소재(消災)와 잘 어울리는 풍경이라 하겠습니다. 2000년 대웅전 중수에서 확인된 상량문에는 스님 300명이 머무는 절이었다지만 지금은 대웅전과 삼성각만 남았습니다.

 

소재사 대웅전과 단풍나무.

 

물색 초라한 인흥사지 삼층석탑

 

인흥사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이른바 인흥에 절터로 남았습니다. 일연스님이 영일(경북 포항) 운제산 오어사(烏魚寺)에서 여기 주지로 오자 법문을 들으려는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연스님이 여기로 올 때는 이름이 인홍사(引弘寺)였는데 스님이 절을 중창하고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 달라고 임금에게 요청한 끝에 인흥사(仁興寺) 현판을 받았답니다. 마을 이름 ‘인흥’과 마을 개울 건너에 있는 인흥서원은 모두 인흥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절터에는 남평문씨 세거지가 있고 그 앞 들판에 이른바 인흥사지 삼층석탑이 있는데 온전한 제 모습은 아니어서 보기조차 매우 구차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 1295년 세워진 보각국사비(보물 제428호)에는 비슬산에서 수행하던 일연 스님의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1227년 겨울 선불장(選佛場)에서 장원=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한 뒤 포산(包山:비슬산) 보당암(寶幢庵)으로 옮겨 수행했고 1236년 가을 몽고병란 때 같은 비슬산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며는 ‘생계(生界)는 줄지 않고, 불계(佛界)는 늘지 않는다’는 화두(話頭)로 참선하다 문득 깨우쳐 “오늘에야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으며, 대지에 터럭 하나만한 장애도 없음을 봤노라” 했습니다.

 

초라하게 남은 인흥사지 삼층석탑.

 

비슬산은 바로 일연의 득도처입니다. 그러나 비슬산에 살던 관기와 도성에 관한 ‘포산이성(包山二聖)’을 도성암 사적에서 썼고 22년 동안 수도한 이런저런 암자들은 자취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경북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인흥사(仁興寺)는 이미 허물어져 남평문씨 세거지로 바뀌는 등 그야말로 무상(無常)이 일상(日常)이었습니다.

 

인각사, 삼국유사를 완성한 장소라지만

 

조금 휑뎅그렁한 인각사와 인각공원 군위 인각사로 나설 차례입니다. 사적 제374호로 기록돼 있고 경내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80호이기도 하답니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으로 자처합니다. 삼국유사가 구상되고 준비되고 태동된 데가 비슬산 일대였다면 완성한 곳은 인각사입니다.

 

인각사.

 

인각사는 642년(선덕여왕 11) 의상 스님이 또는 한 해 뒤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는 절인데 여기서 일연스님은 여기서 삼국유사도 탈고했고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도 두 차례 열어 인각사를 구산선문 중심 절간으로 자리잡게 하는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인각사에 있는 같은 보물 제428호인 보각국사정조지탑(靜照之塔)은 일연스님의 부도탑이랍니다. 중대석에 동물상이 있고 상대석에 연꽃무늬가 있으며 탑신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과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들어 있는데 느낌이 조금 둔합니다.

 

인각사 보각국사비.

 

이밖에 군위인각사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9호), 군위인각사미륵당석불좌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6호) 군위인각사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427호) 따위도 있습니다.

 

인각사는 아직 터만 넓고 제대로 된 건물이 적어 휑뎅그렁한 편이었습니다. 앞으로 복원을 한다는데 정말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인각사 자리에서는 여러 차례 이뤄진 발굴에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인각사 전시관과 일연학(一然學)연구소도 있습니다.

 

인각사 일연학연구소.

 

인각사에서 도로를 따라 위로 좀 올라가면 일연공원이 있습니다. 2010년 11월 15일 준공됐습니다. 군위다목적댐을 머리에 인 공원인데요 일연스님과 삼국유사가 중심 주제랍니다.

 

어찌 보면 유치하게 여겨지는 구석도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성의를 담아 탑과 비와 상과 건물을 들인 것 같습니다. 한나절 지내기는 나쁘지 않겠고요, 아이들과 노닐기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일연공원. 단군 신화 동물 범과 곰.

 

삼국사기는 놓쳤으나 삼국유사는 놓치지 않은

 

사람들은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다루지 않은 얘기를 다뤘다는 점을 두고 일연 스님이 쓰면서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삼국사기는 단단히 따져 꼼꼼하게 썼고, 삼국유사는 닥치는대로 설렁설렁 썼다는 식이지요.

 

인각사 전시관 일연 영정.

 

하지만 이는 지금 인간들의 관성이고 생각일 뿐 사실과는 크게 다르답니다. 삼국유사는 "자신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하는 대신, "당시 나라 안팎 여러 고전 문헌들에게서 폭넓게 인용"해 쓴 부분이 많습니다.(<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18쪽, 까치)

 

그만큼 더 가치가 있으며, 그런 가치를 더 찾는 데 일연이 정성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인용된 중국 고전만도 27가지, 우리나라 고전은 책명이 확실한 것만도 50가지 안팎, 고기(古記)·향기(鄕記) 약칭 또는 범칭 표시 문헌은 매우 많으며 비문(碑文)이나 옛 문서에서 끌어쓴 대목도 많습니다.

 

실제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담지 못한 <가락국기>를 요약해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일연이 뚜렷한 목적의식에 따라 삼국유사를 썼음을 매우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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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그리고 1인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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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언론협동조합에서 지난해 발행을 시작한 순천광장신문 초청을 받아 5월 31일 강의하면서 내놓았던 원고입니다. 순천광장신문 시민기자와 회사기자를 비롯해 열 분 정도가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물론 실제 강의는 당연히 이 원고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블로그를 하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고 들을 때는 당장 해야지 싶은데 실행으로는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순천광장신문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블로그를 할 수 있겠느냐고 도중에 물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린 대답은 이랬습니다. 먼저 시민기자단 말고 블로그기자단을 운영하시라, 순천광장신문도 언제든 조건이 되면 (경남도민일보처럼) 곧장 자체 메타블로그를 운영하시라, 이를 위해 올해 하기 어렵다면 내년이라도 블로거 양성 교육을 자체 프로그램으로 실행하시라.

 

아울러 글쓰기가 쉽지 않듯이 블로그도 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갈수록 못하게 된다, 허점 투성이이고 어수룩한 구석이 많아도 그런 데에는 마음을 두지 마시라, 어쨌든 운영하는 자체가 중요하고 블로거 양성 교육을 해내기만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난해 프로축구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빌리자면, '닥치고' 실행인 것입니다. 실행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성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순천광장신문이 지역 블로거들한테 '비빌 언덕'이 돼 줄 수만 있다면 성공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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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언론협동조합을 알리는 펼침막.

 

2000년 2월 22일 <오마이뉴스>가 창간됐습니다. 오연호 당시 <오마이뉴스> 대표는 창간사 ‘뉴스게릴라 727명의 대반란’에서 "모든 시민은 기자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어 “기자는 별종이 아니라 새 소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진솔하게 남에게 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는 기자가 특권시되는 문화 속에서 유린되어 왔습니다. 특권화된 기자들이 모인 집단은 거대 언론사가 되어 뉴스의 생산뿐 아니라 유통과 소비 구조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여태까지는 특정 매체에 소속된 기자의 기사와 사진만 신문방송에 나갔다는 얘기입니다.

 

<오마이뉴스>가 창간되면서 보통 시민들도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어 매체들에 보낼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시민기자가 글을 써서 보내면 회사기자들이 그것을 매체에 싣거나 싣지 않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권한은 갖게 됐지만 실을 권한까지는 갖지 못했습니다.

 

1. 시민기자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관점에서 규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문기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문기자는 기사를 쓰는 훈련을 받았지만 시민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기자는 기사를 쓰는 훈련을 받았지만 시민기자는 그냥 일반적인 글쓰기 훈련 정도밖에 받지 않았습니다.

 

전문기자는 기사를 쓰는 데에 나름 인정받은 능력을 갖췄지만 시민기자는 전문기사라고는 거의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문 기자는 기사를 쓰는 일로 밥을 벌어먹지만 시민기자는 기사를 쓰는 것과는 별도로 밥벌이를 하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회사기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회사기자는 특정 매체의 조직 체계 속에서 움직이지만 시민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기자는 특정 매체의 사시나 방침에 따라 움직이고 특정 매체의 가치관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민기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기자는 소속된 매체를 벗어나서는 활동할 수 없지만 시민기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기자는 기자가 아닌 생활인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기자입니다. 시민기자는 자기 밥벌이에 매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말고는 얽매이는 데가 없는 기자입니다.

 

시민기자는 자기 이해관계와 자기 관점에 따라 기사를 쓰는 기자입니다. 겉으로는 시민기자라 해도 자기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자기 관점이 아니라 특정 매체의 관점을 따르거나 눈치를 보면 이미 시민기자가 아닙니다.

 

2. 시민기자가 되면 무엇이 좋을까요?

 

자기와 가치관이 같거나 비슷하고 자기가 소속된 집단·계층·계급의 이해를 잘 대변하는 매체를 골라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되면 여러모로 좋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 깜냥껏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쓴 기사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고 거기 담긴 생각이 현실화로 나아가기까지 할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매체를 통해 세상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보람도 대단합니다. 이런 교류와 소통을 발판삼아 세력이나 모임도 만들고 외로움을 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민기자가 모두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기를 시민기자로 받아준 매체로부터 무엇인가를 누리려는 생각을 하는 시민기자들을 저는 적지 않게 봐 왔습니다.

 

어떤 시민기자는 자기를 시민기자로 받아준 매체가 찍힌 명함을 만들어 갖고 다닙니다. 어떤 시민기자는 그런 매체에 보도된 자기 기사를 들고 다니며 보여줍니다. 물론 이런 자랑이나 자부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행동으로 매체의 영향력을 누리려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원래 자기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은 영향력을 조금 행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금세 사람들은 알아보고 맙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매체랑 관계가 없어지면 사람들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습니다.(이런 참담함은, 사실 회사기자들이 퇴직한 뒤 더욱 뼈저리게 겪습니다.)

 

'사이비'로 낙인찍히기도 십상이고, 자유로운 기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미 시민기자가 아닙니다. 시민기자가 시민기자인 까닭은 회사기자와 달리 자유롭다는 데 있는데, 매체의 영향력을 등에 업으려는 순간, 그 시민기자는 회사기자 뺨칠 정도로 매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바뀝니다. 매체 눈 밖에 나면 자기가 목적하는 '매체의 영향력'을 누리는 근거 자체가 박탈되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하면 시민기자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자기를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해 주는 매체를 통해 영향력은 물론이고 어떤 이득(원고료는 제외)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글쓰기가 자유롭고 생각이 자유롭고 말과 행동도 자유로워집니다. 이와 같은 전면적인 자유가 없고서는 누구도 시민기자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두 번째는 회사기자를 따라하면 망합니다. 먼저 글쓰는 투입니다. 회사기자의 글투는 이미 상투(常套)가 돼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요한 것일수록 더욱 앞에 내세우는 역삼각형 구조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앞쪽 한 문장에 앞으로 얘기할 모든 요점을 정리해 담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요점 정리를 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대단하게 쳐주는 데는 기성 보도 배체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무한 스크롤이 보장되는 인터넷 때문에도 이런 글쓰기는 이제 아무 보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글투를 이미 좋아하지 않습니다.

 

글쓰는 내용도 그렇습니다. 회사기자는 보편타당한 내용을 좀더 중요시하는 성향이 짙습니다. 누구나 관심을 가질 그런 내용을 다루려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보편타당한 기사,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큼 중요한 기사 등등은 세상 모든 매체가 이미 다 다루고 있습니다.

 

차고 넘치는 신문·방송·통신에, 회사 이름만 다르지 내용은 똑같은 보도가 그야말로 차고 또 넘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쓰는 기사가 다른 기자가 쓰는 기사보다 더 보편타당하고 더 중요하다고 해야 하다 보니 괜히 더 객관적인 척하게 됩니다.

 

객관성 그 자체야 아무리 많아도 탓할 것이 못되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러해야’ 하니까 괜히 딱딱해지고 뻣뻣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시민기자에게 그런 따위를 바라지 않습니다.

 

친근한 기사를 좋아합니다. 시민기자는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를 글감으로 삼으면 절로 친근해집니다. 물론 자기 이익을 위해 글을 꾸미고 사실 관계를 왜곡하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무나 풀을 기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저는 넘쳐난다고 생각합니다. 말걸리든 소주든 술공장에서 술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무척 많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농사를 짓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사짓는 환경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습니까? 그러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도 덩달아 많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잘 알거나 잘하는 분야를 집중해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회사기자들은 출입처에서 기사거리를 찾습니다. 시민기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이처럼 자기 일상에서 기사거리를 찾으면 그만입니다.

 

순천광장신문 들머리.

 

글쓰는 형식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체는 쳐다볼 필요도 없습니다. 괜히 어깨에 힘들어가는 글투도 쓸모가 없습니다. 기성 매체들 회사기자들이 써대는 기사만으로도 대부분 사람들은 질려 있습니다.

 

시민기자까지 그렇게 해서 질려 있는 사람 더 질리게 할 까닭은 없습니다. 동생한테 얘기하듯이, 엄마한테 넋두리하듯이 쓰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즘 하는 말이 스토리텔링입니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늘어져도 나중에 다듬고 고치면 그만입니다.

 

4. 시민기자 노릇만 잘하면 그만일까요?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모든 시민은 기자입니다”라고 선언했을 때는 세상에 있는 모든 매체가 ‘회사 매체’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선언은 ‘회사 매체’가 회사기자 기사만 말고 시민들이 쓴 기사도 받아 싣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시민은 기자’라는 표현이 시민 입에서 먼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회사기자 입에서 먼저 나왔고 회사매체 입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당시로서는, 회사기자 입에서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고 회사매체 입에서 먼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회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매체를 가질 수 있게 바뀌었습니다. 조직이나 자본이 없어도 누구나 매체를 가질 수 있는 시대입니다. 바로 블로그입니다. 블로그에서 글을 쓰면 바로 발행까지 됩니다.

 

글을 다 쓰고 사진까지 앉히고 이런저런 설정을 한 다음 마지막에 ‘저장’을 누르면 바로 그 순간에 해당 블로그가 연결(링크)돼 있는 모든 메타블로그에 넘어가 바로 ‘발행’이 됩니다.

 

여행·문학·시사·사회·정치·연예·스포츠 등등 갖은 주제별로 나뉘어 시간순으로 다음뷰나 올블로그, 다음뷰, 믹시 같은 메타블로그에 가서 걸리는 것입니다. 인터넷 사이버 공간 불특정 다수가 모여 있는 데에 가서 전시가 되고,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게 뭐지?’ 하고 그것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간신문·주간신문이 집집마다 배달이 되듯이 블로그에 쓴 글도 개인개인에게 배달이 되기까지 합니다. RSS(Really Simple Syndicate)라고, 정말 간단한 배급쯤이 되겠는데, 미리 신청한 사람한테 자기가 쓴 블로그 글이 실시간으로 전달돼 메타블로그를 찾아가지 않아도 바로 읽어볼 수 있게 해줍니다.

 

게다가 페이스북이라든지 트위터라든지 하는 보조수단까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블로그로 생산해 놓은 글을 여러 메타블로그나 블로그 자체 기능을 통해 유통시키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통시킬 수가 있게 됐습니다.

 

이를 뭉뚱그려 이르는 말이 SNS(Social Network Service)입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회 관계망을 형성해 주는 서비스입니다. 1인 미디어, 1인 커뮤니티로서 의사소통과 정보 공유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또한 무한히 확장해 나가는 네트워크 과정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가 창출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블로그와 페이스북·트위터가 등장하면서 기성 회사매체가 주도하던 일방 통행식 소통은 점점 힘을 잃고 쌍방 소통이 대세가 됐습니다. 옛날에는 객관적 정보나 자료가 주로 유통됐다면 SNS에서는 감성 그 자체 또는 객관적 정보나 자료에 얹혀진 감성이 주로 소통됩니다.

 

이와 같은 감성 소통은 전혀 새로운 재창조 또는 각색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정보나 자료를 적극적·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여러 사람들이 새로운 감성과 견해를 덧입힘으로써 처음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내용이 창조되기도 합니다. SNS 공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5. 이제는 1인 미디어가 대세입니다

 

이제 시민기자를 넘어 1인 미디어로 나가야 합니다. 시민기자에게는 기사를 쓰는 자유만 보장돼 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기사를 메체에 실을 자유까지 시민기자가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올해 찍은 기념사진이 이렇게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는 순간 앞에 말씀드린 두 가지 자유, 기사를 쓰는 자유와 기사를 매체에 싣는 자유 모두를 누구나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시민기자가 아니라 1인 미디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제각각 특징과 장점이 다릅니다. 이런 특징과 장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SNS를 종합적으로 연동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블로그는 앞에 말씀드린 가장 능동적이고 개방적입니다. 누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뛰쳐나가 읽힙니다. 또 오래 유지되기 때문에 자료 같은 것 저장도 잘 되고 기록성도 높고 검색도 잘 됩니다. 그래서 매체 기능으로 보자면 블로그는 생산 수단입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어떨까요? 다들 아시는대로 140자 단문 블로그라고도 하는 트위터는 블로그와 견줘 저장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깊이 있는 글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써 놓은 글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반면 트위터는 '리트윗'을 통해 글이 다단계로 기하급수로 퍼져 나가는 장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에서 '이슈 파이팅'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유통 기능입니다. 하지만 트위터의 특징인 수직적 관계 형성은 치명적 약점입니다.

 

유명 인사 아니면 팔로워를 많이 거느리기 어렵습니다. 이외수·공지영·진중권 같은 인사들이 한 마디 던지면 그것이 그이들의 엄청 많은 팔로워들의 리트윗을 통해 빠르게 확산하는 식입니다.

 

수직적 관계 형성은 일정하게 편향되게 하는 효과도 냅니다. 자기가 팔로우하는 사람에는 우호적으로 반응하고 자기가 팔로우하는 사람을 비판·공격하면 적대시하는 성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은 수평 관계입니다. 친구 관계입니다. 어느 일방이 친구 신청을 해도 상대방이 응하지 않으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서로 친구니까 친한 관계입니다. 친하다 보니 사적인 얘기도 스스럼없이 하게 됩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좀더 쉽게 모여지는 현상을 보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블로그는 기록, 저장, 생산, 검색입니다. 트위터는 휘발, 유통, 일방, 수직입니다. 페이스북은 친근, 수다, 수평, 유통입니다. 그리고 셋 다 공통되는 성격은 감성과 주관과 소통인데 굳이 나눠서 보자면 트위터나 페이스북보다는 블로그가 감성과 주관과 소통이 아무래도 조금 처진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SNS 가운데 기본은 블로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블로그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측면에서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따라오기 어렵습니다. 페이스북·트위터는 생산된 콘텐츠를 유통시키는 기능이 뛰어납니다. SNS를 활용하려면 블로그를 기반으로 삼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으로 더욱 폭넓게 유통시키는 등 1인 미디어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 시민기자든 1인 미디어든 기본은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민기자를 할 것 같고 블로그를 할 것 같지만 실제 이름을 거는 사람도 생각만큼 많지 않을 뿐더러 제대로 하는 사람은 더욱 적은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많이 하면서도 블로그는 잘 하지 않은 까닭도 저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원래부터 어려운 글쓰기를 더욱 어렵게 하는 몇몇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 눈치 보기입니다. 둘째는 생각이 먼저 정리가 돼야 글을 쓸 수 있다는 허상입니다. 셋째는 맞춤법·띄어쓰기·문법에 얽매이는 태도입니다. 이런 따위 때문에 글쓰기를 두려워하기조차 합니다.

 

자기가 이렇게 쓰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까 하는 눈치 보기 때문에 글쓰기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글쓰는 자기만 쪽팔려 할 뿐이지 대다수 다른 사람들은 이러든 저러든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런 주눅은 학생 시절 선생님한테서 들었을 텐데요, 그런 선생님처럼 자기 글쓰기를 지적질하는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지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고맙게 받아들여 고치면 그만입니다. 글쓰기를 하지 않을 까닭은 못 되는 것입니다.

 

순천광장신문 사무실에 거렬 있는 포스터 가운데 하나.

생각이 먼저 정리가 돼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생각밖에 꽤 많습니다. 생각이 정리돼야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은, ‘헤엄치는 법을 먼저 알아야 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먼저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글을 씀으로써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엄청나게 더 많습니다. 생각이 먼저 정리가 돼야 글을 쓸 수 있다면 세상에 완성된 글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민기자나 블로거한테 바라는 것은 아주 빼어난 명문이 아닙니다. 회사기자 가운데도 빼어난 명문을 쓰는 사람은 드뭅니다. 게다가 고은이나 박경리나 황석영이나 조정래 같은 이름난 문인들도 비문(非文)을 많이 씁니다.

 

글의 목적, 글쓰기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바로 해답이 나옵니다. 어느 누구도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문법 따위를 맞추려고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상대방한테 전달하려고 글을 쓸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소통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문법이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틀려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틀려도 괜찮다고 여길 때 오히려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습니다.

 

7. 일단 뭐든 ‘닥치고 시작’입니다

 

블로그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할 수 있는만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처음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버리시고 처음부터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리시면 꾸준하게 실망하지 않고 오래오래 하실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글쓰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쓰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써야겠다고 여기는 태도는 어쩌면 글쓰기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내일부터 해야지 모레부터 해야지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당장’ 마음먹고 무조건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블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 눈길에 신경쓰시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들을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서슴없이 올리시기 바랍니다. 처음만 반짝 하지 말고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꾸준하게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블로그와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같은 1인 미디어이면서도 저마다 특징과 장점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블로그에는 블로그에 맞는 말투·글투가 있고 페이스북과 트위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 쓰는 말투·글투를 쓰면 페이스북에서는 어떤 때는 썰렁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까닭이 이런 데에 있습니다. 같은 감성을 바탕으로 한다 해도, 블로그는 혼자서 하다 보니 이리저리 따지기 십상이고, 페이스북은 아무래도 상대가 있다 보니, 그것도 친구이나 보니 아무래도 좀더 배려하고 친근한 말투를 쓰게 마련인 차이가 있는 셈입니다.

 

어쨌든 일단 시작한 뒤에는 그치지 말고 꾸준히 하시기 바랍니다. 멈추면 그 순간에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감성과 주관이 나타나면 성공입니다. 의사소통까지 이뤄지면 더한 성공입니다.

 

8. 시간 순서대로 사진 늘어놓고 설명을 다는 식으로

 

글쓰기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 하나 일러드릴까 합니다. 지금 SNS 글쓰기는 사진과 글의 조합입니다. 블로그를 갖고 말씀드립니다. 여행을 떠났다고 가정합니다.

 

여행하는 장면장면을 담은 사진을 시간 순서로 죽 늘어놓습니다. 그렇게 늘어놓은 사진에 해당하는 설명을 붙입니다. 이렇게 하면 기본은 됩니다. 여행 말고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이 되고 나면 여러 변주나 변형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시간 순서대로만 하지 않고 관점이나 주제에 따라 새롭게 구성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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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스님 품었던 비슬산은 무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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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스님은 가지산문(迦智山門)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가지산문은 신라 말기 도의선사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를 거점으로 삼아 일으킨 종파랍니다.

 

도의선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원조로 꼽히는데요, 이 선종은 고려시대 3대 종파 가운데 하나인 유가종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일연스님이 있었습니다.

 

비슬산 자락에 있는 ‘유가’사나, 유가사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 지명인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유가’면에서 유가종 그런 자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비슬산.

 

유가사를 품고 있는 비슬산 또한 알고 보면 그 이름에서 신비로운 느낌이 듭니다. 신라시대에 인도 스님들이 와서 이 산을 보고 비슬(琵瑟)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비슬’은 인도의 범어(梵語) 발음을 그대로 적었는데, 뜻은 덮는다는 것으로 한자로 쓰면 포(苞)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포산(=비슬산)이라 했고요 지금도 일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포산을 쓴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망우당 곽재우의 본관이 바로 포산인데, 유가면 바로 옆에 있는 현풍면을 이릅니다. 여기에는 포산고등학교도 있습니다.

 

비슬산에 있는 대견사지.

 

그런데요, 일연은 <삼국유사>에 남긴 주석(註釋)에서 "지역 사람들은 소슬산(所瑟山)이라고 불렀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소슬'과 '비슬'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답니다.

 

소슬은 우리말 '솟다'에서 나온 ‘솟을’이고요, 비슬은 '(닭)벼슬'에서 왔습니다. 경상도 지역말 '비슬'이 바로 '벼슬'입니다. 둘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뚝하다, 둘레에서 가장 높다는 말이 그것이랍니다.

 

해발(海拔) 1086m인 비슬산은 과연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일연은 이 비슬산에 성인(聖人)이 많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포산이성(包山二聖)' 기사랍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일연스님의 포산이성 관기도성 찬시를 유가사에서 새겨 이렇게 놓았습니다.

관기(觀機)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정했고 도성(道成)은 북쪽 바위 구멍에 자리를 잡아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쯤 됐답니다.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찾아다녔습니다.

 

도성이 관기를 청하려 하면 나무들이 모두 관기가 있는 남쪽을 향해 엎어져 마치 환영하는 것처럼 돼서 이를 보고 관기가 갔다고 합니다. 관기가 도성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 이와 같았다고 하고요.

 

이런 포산이성 가운데 관기는 관기봉(峰)으로 남았고요, 도성은 후세 사람들이 도성암(庵)으로 남겼습니다.

 

 

일연은 이어지는 글에서 "두 분 스님이 오랫동안 바위 너덜에 숨어 살면서 인간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고 비를 막고 앞을 가렸을 뿐"이라며 "옛날에 은둔생활을 한 인사들의 숨은 취미를 알 수는 있으나 본받기는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연스님조차도 이렇게 본받기 어려웠다고 한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로서는 더욱 본받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 뜻만 어렵사리 헤아릴 따름이랍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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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심신 달래기 딱 좋은 표충사 우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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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6일 저녁 7시 20분 즈음해 나갔던 것입니다. 방송용으로 얘기를 주고받는 식으로 고치기 이전 원고입니다.

 

6·4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당선된 사람도 있겠지만 떨어진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요. 또 그이들을 보이게 보이지 않게 몸과 마음을 써가며 도운 사람도 많을 테고요. 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지친 몸 가누고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 딱 좋은 그런 좋은 절간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다름 아닌 표충사입니다. 밀양에 있습니다. 나름 이름난 절간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사명대사랑 관련지어서만 생각할 뿐 거기에 멋진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세간에 알려진 표충사의 떠들썩한 이미지와는 달리, 뜻밖에 정갈하다는 것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화루에는 이처럼 고영정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습니다. 신령스런 우물이라는 뜻인데, 표충사 옛 이름이 영정사입니다.

 

대광전 맞은편에 자리잡은 정자 같은 건물 우화루(雨花樓)가 이번 나들이의 핵심입니다. 한자로 ‘비 우(雨)’와 ‘꽃 화(花)’를 쓴 누각인데요, 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우화, 그러니까 꽃비에 견주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물론 그런 꽃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오전에 찾아가면 표충사 으뜸 전각 대광전에서 불경을 외는 스님 우렁찬 염불 소리를 들을 수는 있습니다. 널찍한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저쪽 대광전에서는 우렁우렁 염불 소리가 울리는 반면 이쪽 우화루는 비어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우화루에서 한 사람이 기둥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냥 편안한 공간이어서 여기 올라 난간이나 차탁에 기대어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기 딱 좋습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훤하게 열려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우화루 아래 들면 그지없이 시원합니다.

 

바로 아래 골짜기에서는 물소리와 더불어 시원한 기운이 솟아오릅니다. 언덕배기에 높이 자란 나무들은 여기에다 서늘한 그늘을 펼쳐 줍니다. 우화루에서는 이렇게 아무 구애됨이 없이 쉴 수도 있고 복잡한 생각들도 씻어낼 수 있습니다.

 

 

그 아래 담장 바깥쪽 개울에서는 이렇게 우화루 지붕이 올려다 보입니다.

물론 읽고 싶은 책 한 권 정도 챙겨와 느긋하게 읽어도 좋은데요, 다만 드러눕지만 않으면 됩니다. 왜냐, 우화루와 표충사가 유원지가 아닌 절간이니까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이런 누각을 경남에서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물이 아니라, 절간의 중심인 으뜸 전각과 마주해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 사통팔달로 안팎 풍경을 한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말씀입니다.

 

앞서 표충사가 느낌도 정갈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아마도 다른 이름난 해인사나 통도사와 견줘 볼 때, 삼층석탑이나 석등 같은 유물들이 마당에 별로 나앉아 있지 않은 때문이지 싶은데요, 주말이라도 아침나절 사람이 별로 없을 때 찾으면 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스님이나 처사들이 울력으로 아침마다 그리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표충사에서는 대로 만든 빗자루에 갈무리됩니다. 아침마다 마당에 남겨지는 깔끔한 비질자국이 그런 느낌을 더욱 키워주는 것입니다.

 

아침 나절 비질 자국이 정갈한 느낌을 한층 키워줍니다.

 

표충사는 들머리 숲길도 좋습니다. 통도사나 해인사, 또는 쌍계사들도 진입로가 더없이 멋지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조금 길다 싶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가파르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표충사는 이렇게 나고드는 산책로가 전혀 길지 않은 1km정도고 또 평지에 나 있어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걸으면서 보고 누리고 느낄 수 있는 솔숲이 다른 데보다 처지지도 않습니다. 높게 또 무성하게 자라서 어둑어둑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만큼 참나무랑 함께 어울려 우거져 있습니다. 조용하게 차분하게 걷기 좋은 길입니다.

 

오솔길 산책로.

다만, 표충사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에다 차를 대시면 이런 오솔길 산책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만나지는 관광단지 주차장에다 차를 대셔야 합니다. 그러고는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표충사로 올라가면서는 오른쪽으로, 돌아올 때는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시외버스나 시내버스로 가시면 더욱 좋습니다. 밀양버스터미널에서요. 자가용 자동차를 버리면, 관광단지 주차장에는 맛난 동동주를 파는 집이 몇 군데 있는데, 여기서 산나물 안주와 더불어 아무 제약 없이 한 잔 들이킬 수도 있거든요. 버스는 한 시간 정도 간격으로 자주 다니는 편입니다.

 

관광단지 주차장에는 이렇게 산채전과 동동주를 내다 파는 안동믾속촌이라는 그럴 듯한 음식점도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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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지역 신문이 지역 밀착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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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순천광장신문에서 강의할 때, 글쓰기에 대해서만 얘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역 신문의 지역 밀착을 두고서도 이렇게 원고를 마련했더랬습니다. 순천광장신문에서는, 어쩌면 이 지역 밀착에 대해 좀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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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으나마 경남도민일보가 이룬 성과들

 

창원·마산에 온 지 올해로 29년이 됐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 창간 멤버로 들어와 ‘지역’을 붙들고 살아온 지는 16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제게는 실체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어떤 화두(話頭) 같은 존재가 바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보이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1999년 창간된 이후 경남도민일보를 돌아보면 경남도민일보가 한 일이 적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창간됨으로써 경남 지역 기득권 세력이 아닌 사람·집단에게 조금이나마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없는 사람들도 얘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없는 사람들 관점이나 가치관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도 실을 수 있게 됐습니다.

 

지방선거가 치러진 6월 4일치 경남도민일보 1면 머리기사.

 

경남도민일보가 새로운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나감으로써 지역에 있던 기성 매체들로 하여금 자기네 관성과 타성을 돌아보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글들을 버젓이 칼럼으로 싣는 신문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습니다.

 

또 1면 머리기사를 연합뉴스 서울발 기사로 채우던 관행도 이제 씻은 듯이 사라졌고 시민사회단체나 노동단체의 움직임은 흰 눈으로 보고 지면이나 화면을 거의 내어주지 않는 잘못도 고쳐졌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특종이나 단독보도로 성가(聲價)를 올린 일도 있었고, 이런저런 정책 제안과 의제 설정을 통해 경남을 조금이나마 바꾼 일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공무원 뇌물 사건이나 금품선거는 실명 보도를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작으나마 불이익을 주기도 했었고요, 선거판 보도를 정책 위주로 바꾸는 데도 작으나마 힘을 보탰습지요.

 

하지만 그래도 지역과 지역 밀착은 여전히 허전했습니다. 적어도 저만큼은 그렇게 느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이제 와 돌아보니, 이런저런 보도만으로는 지역 밀착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보도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지역 밀착

 

지역 밀착 '보도'만으로는 지역 밀착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음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지역에 지역 밀착을 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없거나 적으면, 아무리 보도를 지역 밀착형으로 한다 해도 한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역 밀착이 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지역 밀착을 하지 않는 팩트나 지역 밀착이 되지 않은 팩트를 찾아내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보도하는 것이 전부였지 않나 싶기도 한 것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제호.

 

흔히들 신문·방송·통신을 두고 ‘심판’에 빗대어 말하기도 합니다. 매체가 하는 구실 가운데 사실 전달에 더해 시시비비 때문에 나온 비유인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일은 심판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 하고 삽니다. 심판도 하고 구경꾼도 하고 현장을 뛰는 ‘선수’들도 합니다.

 

그런데도 신문·방송·통신이 스스로를 일러 ‘심판’이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욕심의 산물이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심판을 제도적으로는 법원이 하고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신문에다 심판 노릇을 맡기지 않았고 아무도 신문을 심판이라 인정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심판이라 내세우며 자기가 시시비비를 하는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팩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서기는 꺼려했습니다. ‘심판’이 ‘선수’ 노릇까지 해서야 되겠느냐면서…….

 

경남도민일보는 신문(보도)을 벗어났습니다. 물론 신문(보도)을 바탕으로 삼기는 했습니다. 신문(보도)을 바탕으로 삼기는 하지만 신문(보도) 자체에 머무르거나 거기 빠져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벗어났다 해도 거기 그대로 벗어나 있지 않고 언제든 다시 신문(보도)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3. 경남도민일보 보도를 바탕으로 나온 단행본들

 

경남도민일보는 신문에 기획 연재했던 기사들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냈습니다. 그런데 그게 여태껏 다른 신문·방송에서 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경남의 재발견>이 있습니다. 경남 지역 열여덟 시·군 스무 개 지역(통합 창원시는 옛 창원·마산·진해로 나눴습니다.)을 2주에 한 차례씩 네 면을 털어 다루고 그것을 두 권으로 묶어낸 책입니다.

 

내용을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1980년대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창기 선생이 주도해 펴냈던 <한국의 발견>을 생각하시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경남의 재발견>은 실제로도 <한국의 발견>을 벤치마킹하고 거기서 영감을 얻은 측면이 많습니다.

 

내륙편.해안편.

 

뒤이어 <맛있는 경남>·<경남의 시장>도 이제 기획 연재를 마치고 단행본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경남을 규정하는, 그리고 경남에서 역사와 문화를 이루고 생태를 구성하는 중요한 낙동강의 물줄기 가운데 하나인 ‘남강’을 가지고 새로운 기획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 또한 별 탈 없으면 단행본으로도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신문을 바탕으로 삼지만 신문에만 머무르지는 않은 보기입니다. 여태껏 다른 신문·방송·통신들이 일삼아 출판해온 무슨무슨 연감이나 무슨무슨 기행 따위와는 아주 근본에서부터 다릅니다. 게다가 적어도 경남에서는, 경남도민일보보다 역사가 오랜 다른 지역 신문들은 거의 하지 않아 온 일입니다.

 

판매 수익은 물론 경남도민일보에 보탬이 되겠지만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내용을 담았고 읽어볼 만한 수준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책값 또한 전혀 비싸지 않습니다. 두 권으로 나온 <경남의 재발견>이 양장본인데도 3만원밖에 하지 않습니다.

 

제가 펴냈는데, 제게 아주 뜻깊은 책입니다.

 

4. 영향력도 있고 돈벌이도 좀은 되는 경남도민일보 갱블’s

 

경남도민일보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블로그 파워’도 신문을 바탕삼지만 신문에만 머물지 않은 좋은 보기입니다. 경남도민일보는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 영향력 확대를 위해 메타블로그 갱상도블로그’s(갱블’s)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경남도민일보 기자들이 활발하게 블로그질을 했을 뿐만 아니라 경남 지역에서 블로거를 양성하고 조직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습니다. 양성교육·보수교육도 꾸준하게 했으며 경남블로그공동체도 ‘사실상’ 만들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블로그 파워’가 영향력도 상당할 뿐 아니라 경남도민일보 경영에도 적으나마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두세 차례 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을 상대로 ‘블로거 팸투어’를 진행하고 그 대가를 받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결과는 다시 경남도민일보 종이신문이나 인터넷신문으로 돌아옵니다.

 

5.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경우

 

경남도민일보는 사회적 기업으로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해딴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를 뜻하는 경상도 지역말입니다. 해딴에는 캐치프레이즈가 ‘잘 놀아야 잘 산다’입니다. 공공성과 영리를 동시에 목적합니다.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해딴에 등의 도랑살리기 협약.

 

하는 일은 많습니다(잡다합니다^^). 마을 만들기와 도랑 살리기를 합니다. 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나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합니다. 지난해는 함양군 휴천면 임호마을 한 곳에서 했고, 올해는 창녕군 계성면 명리 마을과 함양 백전면 망월마을 두 군데서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서 민간 역량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볼런투어라고, 자원봉사(Volunteer)+여행(Tour)을 합한 개념인데요, 자원봉사를 하는 보람에 더해 여행을 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 벽화도 그리고 솟대도 만들고 버스 정류장 단장도 하고 원두막 쉼터도 들였습니다.

 

경상남도자원봉사센터와 해딴에가 함께한 볼런투어에 참가해 벽화 그리기를 하고 있는 함양신협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활동한 결과는 당연히 신문에 보도돼 나갑니다. ‘지역 밀착’의 좋은 사례를 경남도민일보 스스로가 만들고 이를 신문을 통해 알려나가는 것입니다.

 

전국적이거나 세계적인 것은 가르쳐도 지역적인 것은 가르치지 않는(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현실에서,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만지고 누리고 즐기게 함으로써 그 애틋함의 불씨를 이어가자는 취지로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도 진행했습니다.

 

아이들 반응은 화약이 폭발하듯이 뜨거웠습니다. 이런 결과 또한 신문에 크게 잇달아 실었습니다. 이 또한 신문을 바탕으로 삼아 신문을 벗어났다가 신문으로 돌아온 경우입니다. 또 아이들 감수성과 상상력을 키우고 자연과 친화력을 높여나가는 생태체험 프로그램까지 진행했습니다.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탐방. 박경리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밖에 스토리텔링콘텐츠 개발·제작도 있고 지역 고유 역사·문화·생태 탐방 루트 개발도 있습니다. 올해는 지금까지 진행해 온 성과에 힘입어 좀더 체계적으로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 밀착을 신문 밖에서 해 나가다 보면 지역 밀착을 하는 여러 사람들도 덩달아 만나게 됩니다. 아울러 지역 밀착을 하고 싶고 또 돈이든 뭐든은 되는데 방법이 없는 그런 사람 단체들도 많이 알게 됩니다.

 

서로 좋은 일입니다. 지역 밀착을 억지로 찾는 대신, 신문이 바로 그런 지역 밀착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문을 바탕삼아 신문을 벗어났다가 신문으로 돌아오는 지역 밀착 사업에는 그러고 보니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로 좋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른바 윈-윈입니다. 두루두루 보탬이 되고 고루고루 보람이 됩니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이도 계속하려 하고 매부도 도중에 그만둘 리가 없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서원 찾아 떠나는 경상도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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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예연서원 →16.2km 도동서원 →148.7km 도산서원 →1.9km 퇴계종택 →50.8km 묵계서원·묵계종택 →51.4km 병산서원

 

조선 왕조와 함께하는 서원의 역사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최초로 1543년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이어서 퇴계 이황(李滉)은 1550년 같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백운동서원에 임금의 사액(賜額)을 요청해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을 내려 받는 등 서원 보급운동을 벌였습니다.

 

사림들은 거듭되는 사화(士禍) 탓에 시골로 들어가 숨어 살게 되면서 서재·서당·강사·정사 등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성리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힘쓰게 됐습니다. 서원은 이런 교육 거점이면서 동시에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제향처였습니다.

 

조선 중기 들어 지역 선비들의 사회 활동 역량이 드높아지면서 18세기에는 전국에 서원이 700곳을 웃돌았습니다. 18세기 들어 서원은 교육 기능보다 향사 기능이 위주가 됐고 면세와 면역 특권 남용으로 경제를 좀먹는 역기능이 생겨납니다.

 

도동서원 수월루.

 

그래서 영조는 즉위 3년째인 1727년부터 300개 남짓 서원을 혁파했으며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앞세워 집권하자 고종 5년(1868)과 8년(1871) 두 차례에 걸친 훼철령으로 47곳을 제외한 모든 서원에 대해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 했던 서원이 문화유산으로서 지니는 가치는 인물과 고건축 분야로 국한돼 있습니다. 서원이 처음부터 유지했던 교육 기능은 눈길을 제대로 못받고, 전통 제례 또는 유학의 본산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유교 문화는 인물과 사상, 철학과 정신, 학문과 가치관을 중시한답니다. 그러므로 서원의 가치는 거기서 생활하며 삶을 누렸던 사람과 정신에 있지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크고 작음에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서원은 이런저런 변화를 거치면서 400년 넘게 존속해 온 우리나라 대표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서원문화에는 한국 유교문화의 다양한 모습과 함께 공통되는 특성까지 집약돼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이런 서원이 많이 있습니다.

 

도동서원 환주문.

 

흥선대원군 당시 철폐 대상에서 제외된 47곳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답니다. 함경도는 한 곳, 전라도·강원도는 세 곳, 황해도는 네 곳, 충청도·평안도는 다섯 곳뿐이었지만 경상도는 4분의1을 훌쩍 웃도는 열네 곳이나 됩니다.

 

서울까지 포함돼 있는 경기도조차 열두 곳밖에 안 돼 경상도에 으뜸 자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선 5대 서원으로 꼽히는 병산·도산·소수·옥산·도동서원 가운데 옥산서원 하나만 전북 정읍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을 정도랍니다.

 

마을 가장 높은 데 자리잡은 예연서원

 

이번 걸음에서 첫머리를 차지하게 된 예연서원(禮淵書院: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은 임진왜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1552∼1617)를 기리는 서원입니다. 명물로 이름난 서원은 아니지만 동네 높지막한 데 자리잡은 품이 매우 넉넉하고 여유롭습니다.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곽재우는 의령·합천·창녕 일대에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곽재우의 당숙인 존재 곽준(1551~1597)의 위패도 모시고 있는데요, 정유재란이 일어난 선조 30년(1597) 안음현감으로 지금은 경남 함양 땅인 황석산성에서 가족과 함께 전사한 인물입니다.

 

곽준의 일대를 다룬 <존재선생실기>는 숙종 21년(1695)에 편찬됐는데요, 영조 42년(1766)에 판각된 책판(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은 예연서원 장판각에 있습니다. 임진왜란 연구에서 경상도 지역 인물들의 활동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라는 데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숙종 3년(1677) 사액서원이 되면서 ‘예연’ 이름을 받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됐으며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977년과 1984년 복원됐습니다.

 

예연서원 들머리 은행나무.

 

사당·강당과 제물을 준비해 두는 고사(庫舍), 숙소로 쓰는 동·서재 등이 있습니다. 유림의 회합과 교육에 쓰던 강당은 중앙에 마루 양 옆에 온돌방을 뒀습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홍의장군 신도비와 충렬공(=곽준) 신도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담장이 아름다운 도동서원

 

달성 도동서원(達城 道東書院:사적 제488호)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했고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모십니다. 1678년(숙종 4)에 한강 정구(鄭逑, 1543~1620)를 추가 배향했습니다.

 

1605년 지금 자리에 들어서면서 보로동서원이라 했는데 선조 40년(1607)에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을 임금으로부터 받아냅니다. 그러면서 동네도 이름이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당시에도 철폐 대상에서 들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도동서원 중정당.

 

서원은 향사 기능과 강학 기능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구성이 달라지는데 어쩌다 좌우로 나란한 경우는 있어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사람들 가르치는 강당 앞에 오늘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도동서원 역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 배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앞에는 4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서 있습니다. 다른 서원 대부분에도 은행나무가 심겨 있기 십상인데 공자가 은행나무(정확하게 말하자면 살구나무) 아래(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친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사액 기념으로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입니다.

 

 

사당(祠堂), 학문 강론장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머물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가 있고, 입구에서부터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당은 둘레를 반드시 담으로 둘러싸고 정면 중심에 묘문(또는 신문)을 설치합니다. 묘문은 대부분 삼문으로 양쪽 문은 사람이 다니고 가운데문은 귀신 또는 임금 같은 지체만 다닐 수 있습니다. 담으로 둘러싸면 공간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행사를 치를 때 손쉽게 경건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도동서원의 ‘강당 사당 부 장원(講堂 祠堂 附 墻垣)’은 보물 제350호인데 강당·사당,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담장을 함께 이릅니다. 담장은 기와를 활용해 쌓은 맞담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돌을 쌓아 암키와를 줄맞추어 얹고 진흙을 다져 올린 다음 중간마다 연화문 수막새를 어긋나게 끼웠습니다.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높낮이를 달리해 공간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합니다.

 

 

서원 건축물은 시대상과 역사성을 얼마나 간직하느냐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동북아시아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서원 건축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고종 때 훼철을 면한 47개 서원은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동서원은 간결하고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 중기 건물입니다.

 

청렴결백했던 두 선비를 모시는 묵계서원

 

안동 묵계서원은 응계 옥고(1382∼1436)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을 모시고 있습니다. 숙종 13년(1687)에 지었다가 서원 철폐령을 받아 고종 6년(1869)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됐습니다. 

 

 

묵계서원 파청루.

 

원래 모습대로 하는 복원도 있지만, 강학 기능은 관두고 향사 기능만 복원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라 합니다. 묵계서원도 바로 그렇습니다. 하기야, 지금은 서원에서 공부할 학생이 있지 않으니 강학 공간을 마련한다 해도 별로 쓰일 일이 없기는 하겠습니다.

 

응계옥고와 보백당 김계행은 둘 다 관리로 지낼 때 ‘청렴결백’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합니다. 묵계서원과 함께 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는 안동김씨 묵계종택은 서원 가까운 마을 한가운데 있습니다.

 

 

안에는 제청으로 쓰이는 보백당(寶白堂:청렴결백을 보배로 삼는 집)이 있습니다. 김계행은 굳은 의지와 명석한 자질로 늙어서까지 경학(經學)에 힘썼는데요, 성리(性理) 문제에 깊이 들어가 이치를 깊이 깨달은 인물이라 합니다. 묵계종택 앞 200년 묵은 상수리나무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묵계종택 앞 상수리나무.

 

검소·간략·소박을 실현한 도산서원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사적 170)은 선조 8년(1575)에 사액을 받은 영남 유학의 중심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존속했고, 편액은 명필 한석봉이 썼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도산서당과 퇴계를 죽은 뒤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습니다.

 

 

 

이황은 주자의 학문을 한 데 모아 세운 조선 성리학의 거목이라 합니다. 조선 유학이 나아갈 바를 새로 세우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과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았습니다.

 

중종·명종·선조에게서 지극하게 존경을 받았고요,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한테 약탈돼 넘어간 그이의 서책들은, 그로써 일본 유학이 살아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도산서원 광명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그를 기리는 뜻에서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치러졌으며, 노론이 집권한 뒤인 영조 때는 사라졌었지만 이황 세상 떠난 지 222년 되는 1792년(정조 16)에 도산별과(陶山別科)로 되살아났습니다.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편 시사단.

 

도산서원 낙동강 건너편 시사단(試士壇)이 그 유적인데요, 퇴계는 1968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000원 권 종이돈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명종 16년(1561)에 건립된 도산서당은 퇴계가 몸소 설계했답니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민가처럼 간결·검소하게 꾸몄습니다. 퇴계 세상 떠난 뒤 지은 사당 영역도 간결하고 검소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후인들이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도산서당.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서,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도산서원과 둘레의 빼어난 경관을 글로 남겼습니다. 이처럼 서원이 들어서는 필수 요건 하나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입니다. 앞으로 강이 있고 뒤로는 산이 있어 탁 트여 있어 한편으로 시원함을 다른 한편으로 안정감을 갖췄습니다. 철 따라 달라지는 산색과, 굽이치는 물색에서 생의(生意)를 깨닫고 마음을 넓히며 지혜를 담기 위함이랍니다.

 

전교당.

 

퇴계를 제사 지내는 일대는 국가 공식 지정 보물이 됐습니다.(보믈 제211호) 어렵게는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 급 사주토병(陶山書院 尙德祠 附 正門 及 四周土塀)이라 이릅니다. 토종말로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도산서원 상덕사와 그에 딸린 정문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흙담장.

 

덕(德)을 받든다(尙)는 이 사당은 화강암으로 4단을 쌓아 올린 축대가 엄숙하고 빛나는 느낌을 줍니다만 다른 것은 모두 검소하고 간략합니다. 엄숙·화려와 검소·간략의 이런 비교·대조 또는 조화·대칭은 그 둘을 모두 도드라져 보이게 합니다.

 

담장은 원래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1969년 새로 단장하면서 돌로 바뀌었습니다. 원래 있었던 질박함이 사라졌다는 얘기와 함께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랍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편에서 든답니다. 이 또한 역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서원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반면 일부러 심는 나무는 아주 제한돼 있습니다. 서원 밖에는 공자 행적에 나오는 행단(杏亶)과 관련된 은행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심는데요, 지금은 대부분 나이를 많이 먹어 커다란 나무가 돼 정자나무 구실까지 맡아 합니다.

 

 

담장 주위와 서원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이 심긴답니다. 강학 공간에는 은행나무, 매화나무, 배롱나무 등이 많이 심기는 대표입니다. 사당에는 배롱나무와 무궁화 아니면 모과나무, 단풍나무, 향나무, 측백나무와 회화나무 등이 심깁니다.

 

장판각.내부 모습.

 

그런데 도산서원에는 유독 매화가 많습니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前身應是明月 幾生修到梅花).” 이황의 매화 사랑은 지독했다고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멀리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정인(情人)에 대한 그리움을 매화로 대신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유명합니다.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 도산면 일대를 둘러보면 퇴계 이황이 남긴 자취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퇴계종택(退溪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은 1907년 일본군이 지른 불에 없어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26~1929년 후손들이 지금과 같이 번듯하게 새로 들이세웠습니다.

 

 

가진 돈과 힘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세월이 크게 흐르지도 않은 당대에, 그것도 당시로서는 엄청났을 이런 역사(役事)를 벌였음이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ㅁ자로 모두 34칸인데, 둘레 풍경에까지 신경을 써서 새로 지어 올렸습니다.

 

퇴계와 관련이 없다면 이렇게까지는 할 수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설핏 들었답니다.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고 거기 마루에는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 현판이 걸려 있답니다.

 

꼭 마지막에 들러야 하지 싶은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사적 제260호)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립니다. 그이가 임진왜란 때 겪은 이야기에 후회와 교훈을 담아 남긴 <징비록>은 국보 제132이기도 합니다. 고려 때부터 풍산현에 있던 사림 교육기관 풍악서당을 선조 5년(1572) 류성룡이 지금 자리 병산으로 옮겼습니다.

 

 

병산서원 담장.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앉은 것입니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 때에도 살아남았었는데요 강학 공간인 복례문·만대루·동서재·입교당·장판각, 제향 공간인 신문·존덕사·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초기 서원인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에서 실현된 구조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는 흐르는 강물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산서원이라 한다는 유래도 전해집니다. 이런 정도는 돼야 인간과 자연이 마주보는 경관이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동서원과 도산서원이 가을 달이 찬 물을 비추는(秋月照寒水) 품격이라면 병산서원은 늦은 무렵에 병풍 같은 푸른 산을 마주하는(翠屛晩對), 생기가 가득차 오르는 푸른 산색을 마주하며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마음을 새로 얻어나가는 경지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관이라 하겠습니다.

 

서원 탐방 시작은 아무데서나 해고 크게 탈이 없겠지만 마무리는 병산서원으로 해야 마땅하다 싶습니다. 여기서 다른 데로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울 정도로 서원과 둘레 풍경이 잘 어울리고 또 아름답기 때문이랍니다.

 

만대루.

 

 

그러니까 병산서원을 탐방 앞자리에 놓으면, 자칫 잘못했다가는 여기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다른 서원은 가 보지 못할 수도 있겠고, 둘러보는 차례가 밀린 다른 서원은 마주하기가 시시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만대루에 오르면 한 번 정도 드러누워 보면 좋겠습니다. 앉아 있을 때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건물 뼈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순한 성분은 거의 개입되지 않은 이 건축물은 그 단순함으로 기품 또는 위엄을 내뿜고 있습니다. 또 만대루에서 담을 수 있는 풍경은 따로 말할 필요가 전혀 없을 테고요.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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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물때 맞춰 올라보는 고성 상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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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저녁 7시 20분 즈음해, 창원교통방송 ‘라디오 정보 교차로’ 프로그램에서 했던 방송 원고 초안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아니라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대표’ 자격으로 방송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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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둘째 주 주말은 시원하게 바람이 부는 바닷가로 나가보면 어떨까요? 특히 아이들한테 인기가 높지요. 공룡 발자국이 많아요. 고성 상족암 일대입니다. 아주 유명해서 경남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데요, 그렇다고 그 속살까지 다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데크가 줄지어 있는 바닷가만 좀 거닐고, 공룡박물관 이런 데를 아이들과 둘러보고는 바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정작 긴긴 세월 동안 파도가 들이쳐서 코끼리 다리처럼 깎아 놓은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 상족암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말씀입니다.

 

상족암에 올라가 보려면 물때를 맞춰야 합니다. 밀물 때는 물이 차서 갈 수 없고 썰물로 물이 빠졌을 때만 가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를 몇 번씩 찾아왔었지만 상족암에는 발조차 대본 적이 없다는 사람을 저는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니다.

 

상족암으로 이어지는 데크. 앞에 공룡발자국이 보입니다.

 

이번 주말은 그 물때가 좋습니다. 토요일 14일은 오후 3시 30분, 일요일 15일은 오후 4시 20분이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간조입니다. 이 때를 전후해서 가면 상족암에 올라가 한두 시간 정도 노닐 수 있습니다.

 

고성 바다는 남해안의 표준입니다. 움푹 들어와 있거든요. 파도도 잔잔하게 일렁이고 바람도 그저 살랑거리는 정도입니다. 길고 부드럽게 늘어선 해안선을 따라서,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때맞춰 나타나는 잘 생긴 바위들도 그렇습니다.

 

출발은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제전마을입니다. 여기 자동차를 세워놓고 오른쪽 해안으로 접어들면 색다르게 생긴 바위들과 공룡 발자국이 찍힌 바위들이 나타납니다. 동해와 서해는 물론 같은 남해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들입니다.

 

코끼리 다리처럼 보이시나요?

물이 크게 빠질수록 공룡 발자국이 더욱더 장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상족암까지는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됩니다. 상족암에는 인공이 없습니다. 철썩대는 파도를 맞으며 다듬어지거나 물살에 깎이고 떨어져 나가 바닥에 생긴 구멍도 있고 이리저리 터널처럼 맞뚫린 구멍도 있습니다.

 

상족암에는 코끼리 다리뿐 아니라 선녀탕도 있고 알탕도 있습니다. 터널처럼 생긴 맞은편에서는 낮에는 햇살이 뻗쳐 들어옵니다. 깎아놓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어두컴컴한데요, 그런 가운데 내비치는 밝음이어서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줍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걷던 방향으로 계속 산길을 따라 그늘을 밟고 바람을 맞으며 덕명 앞바다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걷는 길이 수고스럽지 않고 거리도 길지 않아 나중에 제전마을까지 걸어서 돌아온다 해도 크게 부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족암에서 멈추고 돌아나오셔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상족암에서 8km 정도 떨어진 학림 마을도 무척 유명합니다. 옛적 그대로 남아 있는 돌담장인데요, 학동 마을 같은 돌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여기밖에 없습니다.

 

 

학동 일대 뒷산에서는 상족암에서도 봤던 납작하고 편편한 돌이 많이 납니다. 그다지 단단하지 않아서 떼어내고 쪼개기가 쉬운데요, 이런 자연 조건을 그대로 활용해 담장을 쌓았습니다.

 

기와를 얹은 옛집도 여러 채 남아 있는데요, 학림헌(鶴林軒)은 꼭 한 번 들러볼만한 집입니다. 상대방이 불편해할까봐 또는 자기 무식이 탄로날까봐 현지 분들한테 잘 묻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현지 분들은 무엇이든 물으면 누구나 술술 잘 대답해 주십니다.

 

왼쪽 모자 쓰신 이가 학림헌 주인 최영덕 어른.

 

학림헌 주인장 최영덕 어르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살림집이면서도 옛적에 마을 의견을 모으는 공청(公廳) 구실을 했던 건물인데요-당호(堂號) 학림헌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여기 얽힌 이야기이라든지, 사랑채 청마루 아래 목간이 있었던 사연이며, 집안 곳곳에 심긴 나무들 내력까지 아주 잘 말씀해 주십니다.

 

목간을 두던 자리에 들어가 앉은 한 학생.

 

다만 대문을 들어가서는 길손에 걸맞게 주인한테 예절은 갖춰야겠지요. 어쨌거나 이번 나들이는 핵심이 상족암에 올라가 보는 것이니까, 간조 물때를 기준으로 삼으면 상족암을 먼저 들르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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