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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개표, 생각보다 훨씬 힘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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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지방선거가 치러진 뒤 개표사무원을 자청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한 번 몸으로 느껴봤습니다. 경남선거관리위원회 사람들을 블로그 업무 관련으로 만났을 때 그렇게 해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권한 바도 있었고 해서요.

 

경남선관위 직원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전체 진행 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고요. 개표사무원 수당도 지급을 하는데, 자정에서 1분만 넘어도 이틀치를 쳐서 주거든요. 잘만 하면 그렇게 시간이 끝나질 수도 있답니다."

 

실제로 해보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는 일이 단순반복작업이라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힘까지 들지 않는 그런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한참 하다 보니 어깨가 결리고 목까지 뻐근해져 왔습니다.

 

등록을 위해 문밖에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개표사무원들.

 

투표가 채 끝나기도 전인 낮 3시에 선관위는 우리를 소집했습니다. 먼저 개표사무원으로 등록을 한 다음 간단하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뭐, 사실, 교육을 받았다기보다는, 개표 작업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얘기해 주고 거기에서 자기가 맡은 바를 제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마산회원구 개표장, 마산실내체육관에서 개표 작업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투표지를 만지는 부문이었습니다. 개함부였지요. 사전투표소를 비롯한 관내 모든 투표소에서 들어오는 투표함을 열어서 그것을 각급 선거별로 구분해 모으는 작업을 했습니다.

 

 

개표장 들머리 개표사무원 등록처.

 

개표사무원 명단. 저는 109번입니다.

 

자리를 찾아 갔더니 개함부 업무를 일러주는 홍보물이랑 제 이름표가 놓여 있었습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전력확보 상황실도 한 켠에 있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앉아 시작을 기다리는 개표사무원들.

 

저는 개함부 제5반이었습니다.

 

개함부에서 각급 선거별로 분류해 모은 투표지를 담아 다음 차례로 넘기는 데 쓰려고 만든 종이상자.

 

개함부에서 정리되고 모아진 투표지는 이렇게 투표지 분류기 운영부로 넘어갑니다.

 

개함부와 투표지 분류기 운영부를 거친 투표지는 다시 심사집계부에서 처리됩니다.

 

여기는 정리부입니다. 개함부-투표지 분류기 운영부-심사집계부 다음에 있는, 마지막 부문입니다.

  

때 이르게 저녁을 먹고 6시에 맞춰 돌아왔습니다. 조금 기다리니까 한 쪽에서 개표 준비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대로 투표함이 먼저 들어오고 있습니다. 5월 30일과 31일 이틀 동안 치른 사전투표함이 가장 먼저였습니다.

 

 

마산회원구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의 개표 선언과 더불어 개표가 시작됐습니다. 위원장은 아래 사진 심사 집계부 표지가 보이는 뒤쪽에 앉아 있습니다. 입에 마이크를 대고 있네요. 창원지법 무슨 부장판사라고 합니다.

 

 

먼저 개함부에서 투표함을 열었습니다. 사전투표함은 위쪽에 하얀 플라스틱 테두리를 둘렀고 아래쪽은 검은 천입니다. 아마 우편으로 옮길 때 무게랑 부피를 최소화하려고 이리 한 것 같았습니다. 투표일 투표함은 아래쪽까지 모두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돼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투표함에 들어 있던 투표지가 쏟아져 나오면 개함부 개표사무원들이 이 투표지를 하나씩 펴서 교육감, 도지사, 시장, 도의원, 시의원, 도의회비례대표, 시의회 비례대표 일곱 가지로 구분해 모아둡니다. 아래 사진 순서대로 말씀입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자리잡은 개표사무원들이 잘못 분류돼 다른 선거 투표지인데 뒤섞여 버린 것이 행여 있는지 한 번 더 살펴봅니다. 그런 다음 앞에 말씀렸던 종이상자에다 종류별로 담아서 다음으로 넘깁니다. 투표지 분류기 운영부로요.

 

 

 

 

 

 

투표지 분류기 운영부에서는 이렇게 넘겨받은 투표지를 '투표지 분류기'에 적당한 부피로 끼워넣습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어디에 기표가 됐는지를 이 분류기가 알아차리고 재빨리 분류해 탁탁 맞춰 넣어줍니다.

 

하지만 언제나 잘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잘못 분류된 엉뚱한 투표지가 들어가 있으면 기계가 멈춥니다. 또 제대로 펴지지 않은 투표지도 분류기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기계는 또 무효표도 제대로 분류해 줍니다. 이는 다시 한 번 개표사무원과 선거관리위원의 손을 거치게 됩니다.

 

 

 

 

 

사전투표함이 아닌 선거일 투표함을 여는 장면입니다. 선거일 투표함은 아랫도리가 꺼먼 천이 아니었습니다. 책임 개표사무원이 이렇게 올라가 표를 쏟아부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마산회원구 선관위 무슨 계장인가 하는 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올라가서 투표지를 쏟으면 훨씬 힘이 덜 들거든요. 나중에 해봐서 알지만 올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하면 허리가 빠져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하지 말라는 까닭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정도일 텐데 정작 사람의 수고로움에 대한 생각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바쁜 사람은 개표참관인이었습니다. 교육감 도지사 시장 투표지를 분류하고 집계하는 쪽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도의원 투표지 관련해서도 많이 없었고 시의원 쪽에 유독 많았습니다. 나름 까닭이 있겠지요. 제가 하나하나 설명드릴 필요조차 없지 않나 싶습니다만.

 

사진에서 몸벽보 비슷한 조끼 비슷한 모양을 걸치고 전화 통화를 하는 이가 개표참관인입니다. 그이들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개표 현황을 메모하고 자기가 아는 개표참관인을 만나면 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어딘가에 전화를 해서, 또는 어딘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서 지금 개표소 분위기라든지 득표 현황 등등을 일러줍니다. 그러면서 어쩌다 한 번씩은 투표지가 제대로 분류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기계가 처리 못한 투표지가 나오면 그 까닭을 살핍니다.

 

 

 

이렇게 개표는 이튿날 새벽 2시 30분 즈음 끝났고, 모두들 지쳤습니다. 늘어져 엎드린 모습은 부러 찍지 않았습니다. 개함부가 먼저 끝나고 투표지 분류기 운영부가 다음 끝나고 심사집계부는 그 다음, 그리고 정리부는 마지막에 끝납니다. 집에 돌아오니 3시 30분이 넘어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로 보면 엄청난 인원이 이날 개표사무원을 했을 것입니다. 일개미 같은 노릇입니다. 대부분 일반인인 개표사무원들은 몇 푼 되지 않을 수당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개표 업무를 본다는  자체에 더욱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이런 참여로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박근혜야 뭐라든 말든.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별 찾아 떠나는 경북 영천 문화유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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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보현산천문대·천수누림길 → 8.6km 정각별빛마을 →6.5km 옥간정·모고헌 → 3.8km 자천교회 → 1.2km 오리장림 → 7.6km 귀애정·귀애고택 → 1.4km 별별미술마을(귀호리와 화산리는 붙어 있으나 가상리는 5.1km 떨어져 있음)(가상리까지) → (바로 붙어 있음)시안미술관 → 15.1km 임고서원

 

별뿐 아니라 풍경까지 멋진 보현산천문대

 

별을 잘 볼 수 있는 곳은 지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들 사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인공의 빛에서 멀어질수록 별빛은 영롱하답니다. 해발 1124m 보현산 꼭대기에 최첨단 천문대가 있는 까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별이 가장 잘 보입니다. 보현산은 비는 적게 내리는 반면 일조량은 풍부한 지역으로, 1만원 지폐 뒷면에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이 도안으로 들어 있을 만큼 유명합니다. 천문대 가는 길은 꾸불꾸불 산길을 따라 이어지지만 산길답지 않게 말끔했습니다.

 

 

보현산천문대 관측 시설은 아이는 물론 일반인도 아닌 천문학자에게만 전문 천체 관측용으로 쓰입니다. 딱 한 해에 한 차례 일반 야간 개장(14:00~23:00)을 하는데요, 영천시가 하는 ‘영천보현산별빛축제’의 하나로 진행되기에 영천시 홈페이지(http://www.yc.go.kr)를 통해 참여할 수 있답니다.

 

보현산천문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렇지만 별은 아무래도 어른뿐 아니라 아이에게 많은 환상을 심어줍니다. 그래서인지 일반인 어른 아이를 위해서는 보현산천문대 바로 아래 방문자 센터와 전시관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4·5·6·9·10월 넷째 토요일 오후 2시부터 두 시간 동안 일반인을 위한 주간 공개 행사가 열립니다.

 

 

보현산 정상에는 천문대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림 같은 풍경도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 서면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눈앞에 떠다닙니다.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지는 마을 풍경은 고요하답니다.

 

보현산 능선 자락에서 시작되는 천수누림길은 천수를 누리고자 하는 염원은 담아 만든 길이라 합니다. 이밖에도 구들장길, 태양길, 보현산댐길, 황계구곡길 등 보현산 천문대를 중심으로 하는 길이 네 개 더 만들어져 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나름 지역 특색을 살려 지은 길은 이름마다 색다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현산의 맑은 공기와 숲 내음을 코로 들이키며 동자꽃·은초롱꽃·현호색 등 철마다 피어나는 야생화를 볼 수 있습니다.

 

‘별빛마을’로 브랜드를 잡은 정각리

 

정각리에서 정각(正覺)은 바르게 깨달음이라는 뜻이랍니다. 보현산 남쪽 산골로 보현산천문대 마을이라 알려져 있지만 마을 이름에 걸맞게 석탑과 절골 등 불교 관련 유적과 지명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마을 절골 안쪽 언덕배기 들판 한가운데 영천정각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도 있습니다. 근처 자양면 보현리 탑전마을에서 스님 한 명이 밤에 칡넝쿨로 매어 옮겼다는데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합니다.

 

 

밭으로 쓰이는 자그마한 터에 서 있는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 탑신(塔身)을 올렸습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인 듯하고 사방으로 트인 전망이 좋아 예사롭지 않은 터전으로 여겨집니다.

 

보현산 천문과학관도 있습니다. 5D-동영상관, 천체만원경 천체 관측, 멀티미디어 활용 천문교육 같은 체험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어 어린이 등 학생들이 단체로 많이 찾는답니다. 입장료는 어른 4000원 청소년·어린이 2000원이며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 1월 1일과 추석·설 연휴는 쉽니다.

 

 

별빛마을에서는 지나가는 길에 들러 간단히 음식도 사 먹을 수 있고 하룻밤 묵으면서 다리품도 쉴 수 있습니다. 천문대와 연관 지어 ‘별빛마을’을 브랜드로 삼아 별빛 축제도 열고 저농약 쌀과 사과·미나리 등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도 상품화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며 누리는 옥간정·모고헌과 오리장림, 자천교회

 

옥간정과 모고헌은 형제와 같은 존재랍니다. 실제 정만양·규양 형제가 왕래하며 제자를 길러내는 한편으로 우애도 다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옥간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은 영의정 조현명, 형조참의 정중기, 승지 정간을 비롯해 인물을 많이 배출했답니다.

 

길 가다 만난 일소. 주인 어른은 소가 이제 써레질처럼 어려운 일은 못한다고 하십니다.

 

원래는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맞아 서당으로만 남았습니다. 향나무가 안마당에 있는데 이를 일러 자단치경(紫檀稚莖)이라 했습니다. 보라빛 박달나무 어린 줄기라는 뜻입니다. 제향은 하지 않고 교육만 남았던 셈입니다.

 

도로 쪽에서 본 모습.개울 쪽에서 본 모습.

 

모고헌 아래 개울.

 

물 좋은 골짜기에 정자가 있기 마련이듯 여름이면 옥간정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이 시원하고요, 가을이면 계곡으로 펼쳐지는 단풍이 빼어나답니다. 보통 정자와는 달리 가운데 작은 방이 있고 둘레로 작은 마루가 놓였는데 이런 독특한 평면 구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 더욱 돋보입니다.

 

옥간정 가운데 방 아궁이와 빙 둘러친 툇마루와 난간.

 

옥간정 바로 옆에 모고헌(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이 있는데 4면에 툇간을 뒀으며 같은 울타리 안에 횡계서원을 품었습니다. 누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모고헌도 옥간정 못지 않습니다.

 

모고헌 안 향나무(왼쪽)와 횡계서원.

 

영천자천교회(문화재자료 452)는 경북에 유일한 한옥 교회당이랍니다. 1903년 4월 권혁중이라는 지역 인물이 설립했는데 자천교회는 겉모습도 이름나 있습니다만 내부 구조·구성이 실은 더 눈여겨 볼만하다고 합니다.

 

 

내부는 두 채를 붙인 겹집 형태인데 늘어선 기둥(列柱)이 공간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늘어선 기둥 사이를 남·녀석으로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로 가른 데 비춰 기둥 쓰임새가 넉넉하게 짐작됩니다. 예배를 볼 때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데 쓰였던 것이지요.

 

 

 

앞쪽은 중앙 열주를 멈춰 넓게 하고, 양쪽 기둥을 세워 예배석을 향한 시선을 막지 않음과 동시에 강단과 예배석을 나누는 구조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엄연한 현실이던 개신교 선교 초기의 시대 상황과 건축 양식, 교회 건축의 토착화 과정이 반영돼 있습니다.

 

문득 찾아가면 교회 내부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천교회가 늘 열어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거든요. 그러니 미리 연락을 하고 가는 편이 낫습니다. 자천교회 전화 054-337-2775.

 

자천교회 바로 옆 천주교 자천공소.

 

오리장림(천연기념물 제404호)은 화북면 자천리에서 오동리까지 2km에 걸쳐 길게 이뤄져 있는 마을숲이랍니다. 아시는대로 오리는 2km고요, 장림(長林)은 긴 숲입니다. 1500년대에 마을의 바람막이, 제방 보호와 홍수 방지를 위해 주민들이 꾸몄습니다.

 

150살이 넘은 왕버들·굴참나무 등 12가지 282그루가 자연 그대로 시원함을 빚어냅니다. 200년 전부터는 주민들이 이 숲을 위해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자정에 제사를 지냈으며 봄에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가운데로 도로가 나면서 숲이 좌우로 나뉘었고 학교 설립, 도로 확장, 1959년 사라호 태풍 등으로 많이 사라졌습니다. 아쉬운 구석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숲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자취를 느낄 수 있답니다.

 

별별미술마을 1 - 귀애정의 귀호리, 그리고 화산리

 

영천 귀애정(문화재자료 제339호)은 공조참의를 지낸 귀애(龜厓) 조극승(1803~1877)을 추모하기 위해 동생 성재 조규승이 지은 정자라 합니다. 귀애정에 들어서니 마음이 확 열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담장을 두르지 않은 건너편에 길이 나앉아 있고 그 너머에 들이 또 퍼질러 있었습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와 구분 없음이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인 것 같은데요, 아무데서나 흔하게 느껴볼 수는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귀애정 들머리.

 

 

그 앞에는 귀애고택이 자리잡고 있는데요 안에는 연꽃이 활짝 피는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섬을 만든 다음 육각정자와 돌거북을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육각정자가 귀애정과 통하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아름다워지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누구의 소유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경계 없음이 만들어내는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정자는 장대석 기단 위에 두 칸 온돌방, 한 칸 마루방, 한 칸 온돌방을 기본 구성으로 한 다음 툇마루를 두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누마루는 툭 튀어나오게 만들어 운치를 한껏 높였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개가 한 마리 놓여 있습니다.

 

귀애정이 있는 화남면 귀호리와 그에 붙은 화산면 화산리는 별별미술마을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귀애정에도 미술 작품이 몇몇 설치된 모양입니다. 하늘에 별을 다는지 아니면 따는지 모르겠는 아이 모습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 문화재 반열에 끼이려나 모르겠습니다만.

 

화산2리 버스 정류장.화산리 마을 벽화.

별별미술마을 2 - 가상리와 시안미술관

 

같은 별별미술마을 범주에 들어가는데도 화산면 가상리는 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별별미술마을은 가상리에서만큼은 작품이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미술작품은 대체로 특정 공간에 가둬져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편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내놓았습니다.

 

왼쪽은 바로 저랍니다.

 

그래서 ‘지붕 없은 미술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네요. 미술에 대한 지식이 특별하게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동네입니다. 그래서 가상리 별별미술마을은 즐겁고 또 유쾌합니다. 미술 마을이라 해서 미술 작품만 있는 것은 더욱 아니랍니다.

 

가상리에 있는 우리 동네 박물관.

 

박물관 내부.박물관 내부.

 

앞산 뒤산과 들에 실개천이 흐르는 농촌인 여기에는 재실과 정자·서원도 있는데요 그 자체로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옛날 정미소 우물, 정류장, 토성, 빈집, 폐가 등 옛 모습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쏠쏠하답니다.

 

 

가상리에 있는 쾌우정.

 

'행복을 찾아가는 다섯 갈래 길'에는 작가 50명의 작품들도 있습니다. 걷는길(자연상태 미술조각공원 9점) 바람길(찾아다니며 감상하는 거대한 동네미술관 9점) 스무골길 (비보풍수와 예술의 만남 9점) 귀호마을길(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예술 9점) 도화원길(복숭아 향기를 따라 걷는길 9점)이 그것입니다.

 

 

탱자나무도 좋았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2011 마을미술프로젝트추진위원회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복마을만들기 프로젝트-신몽유도원도’를 통해 일상생활 공간을 공공미술로 가꿔 놓았습니다. 특히 마을 앞 버스 정류장이 잘 꾸며져 있는데 매우 눈길을 끈답니다.

 

가상리 버스 정류장.

 

가상리 별별미술마을 옆에 시안(CYAN) 미술관이 있습니다. ‘시안’이 무슨 뜻이냐고 미술관에 물었더니 “그냥 편(安)하게 보시라(視)”는 뜻이랍니다. 원래는 폐교였는데 고풍스런 유럽식으로 새로 꾸며졌고 내부는 공간 자체를 작품처럼 만들었더군요. 

 

 

2005년 한국여행작가협회가 ‘폐교를 활용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선정했는데요 TV 드라마 촬영이나 가수들 앨범 촬영에도 많이 간택된답니다. 수도권 비수도권 구분 없이 여러 작가들의 파격적이거나 수준 높은 작품들로 언제 찾아도 서운하게는 하지 않는다 합니다.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 날) 쉬고 추석·설 등은 쉬는지 여부를 따로 알리며 관람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어린이 2000원이지만 전시 내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전화 054-338-9391~3.

 

살아 쓰러졌어도 죽어서는 별이 된 포은 정몽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이방원 하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 단심가)

 

정몽주의 단심가가 그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와 함께 임고서원 앞 빗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학창시절 공부는 못했어도 이 시조만큼은 외우지 못한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별 찾아 떠나는 경북 영천 문화유산 여행길’의 마지막은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입니다. 죽어서 우리 역사에 별이 된, 단심가의 주인공 포은 정몽주를 기리고 있습지요.

 

 

임고서원 소장 전적은 보물 제1109호로, 포은 정몽주 영정은 보물 제111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여진족 토벌과 왜구 정벌에도 공을 세웠고, 외교관으로도 능력을 발휘했으며, 성균관에서 경서를 강의한 선생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로 일컬어졌던 이가 정몽주라 합니다.

 

 

위기에 빠진 고려를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맞서 절의를 세운 포은은 고향이 바로 여기 영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천 사람들이 임고서원을 들이세웠고 서원은 소실과 중건·정화를 거치면서도 지금처럼 남았습니다. 서원 앞에는 500년 가량 묵은 은행나무가 지나온 세월을 껴안은 채 서 있습니다.

 

 

 

살아서는 그이를 쓰러뜨린 사람이 권세와 영화를 누렸지만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이렇게 처지가 뒤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포은을 따라 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노릇이겠지요.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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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사 쓰면서 배달까지 하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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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열었더니 메일이 하나 와 있었습니다. “농협과 보도로 인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 기사가 문제가 될는지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합천신문 박황규 발행인이 발신인이었습니다. 합천동부농협이 거래 상대 업체한테 부당한 처사를 했다는 내용.

 

기사를 띄워 읽어봤더니 크게 문제점은 없었지만 합천동부농협쪽 얘기가 충분히 실리지는 않은 기사였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잘 아실 텐데, 왜 이랬을까?”

 

하지만 정작 알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개 지역 주간신문이, 어떻게 자기 지역 유력기관 비판기사를 이렇게 대놓고 실을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거든요.

 

 

1. 발행인이 작성한 합천동부농협 비판 기사

 

합천신문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기초자치단체 단위 지역 주간신문이 맞지만, 박황규 발행인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지역 주간신문 발행인이 아니었습니다. 대표이사이고 사장이기도 하지만 신문에는 발행인이라고만 적는답니다. 발행인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는 일도 하고 관리하는 일도 하지요.

 

 

편집인은 서정한 편집국장이 맡고 있다고 합니다. 2009년 세상을 떠난 선친의 친구로 어린이·청소년 생활시설인 합천애육원 원장이기도 하답니다. 발행인과 편집인이 다른 경우를 지역 주간신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박황규 발행인은 이번(4월)에 합천군으로부터 ‘국선도 수련인 모산재 생기체험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몇 차례 만났는데 지역 주간신문 사장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지나치게 젊습니다. 1974년생 범띠입니다. 몸매나 입성, 얼굴 생김새도 사람들이 떠올리는 지역 주간신문 사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쩌면 매우 순진해 보였습니다. 훌쩍 키가 크면서도 마른 체질에 즐겨 입는 헐렁한 생활한복도 그런 느낌을 줬습니다.

 

 

5월 2일 마산에서 만나자마자 합천동부농협 보도부터 물었습니다. “합천동부농협 얘기를 싣지 못한 것은 맞아요. 몇 차례 전화 연락을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거든요. 기사는 팩트가 있으니까 썼고 그 팩트가 분명하니까 꿇리지 않고 떳떳합니다.

 

그런데 합천동부농협은 합천군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합천신문 폐간을 주장하고 저희와 보도된 업체 사이 금전 거래가 있지 않나 의혹까지 제기했습니다. 왜곡된 사실을 보도했다면서 언론중재위원회 회부나 명예훼손 소송 제기도 말했습니다. 저희가 왜곡 보도라면 정확한 사실이 뭔지도 밝혀야 마땅한데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합니다. 오히려 저희 명예를 훼손하고 있어요.”

 

배달 나갈 준비를 하는 박황규 발행인. 뒤에서는 어머니가 전단을 끼우고 있습니다.

 

합천동부농협 보도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일까? 일단 먼저 보도된 내용을 보면, 언론중재위원회에 넘어가도 반론보도는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정정보도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보였습니다. 박황규 발행인 말대로 보도가 팩트와 일치한다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합천동부농협의 힘이라든지 이런 것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물론 알았다 해도 보도를 안 하지는 않았겠지요. 업체 당한 사연이 구구절절해요. 우리 사회 ‘갑’의 횡포를 실감하게 하는…… 이럴 때는 약자 편을 들어야 해요. 힘센 쪽은 그러잖아도 잘하거든요. 이번에 하나 나갔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숨고르기는 하겠지만 저희한테 확보된 팩트가 더 있습니다. 끝까지 갈 겁니다.”

 

2. 꽉 깨문 어금니와 앙다문 입술이 낯설었던 까닭

 

박황규 발행인은 이런 이야기 끝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습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결연한 모습은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신문 배달 나가는 길에 마중 나온 딸이 사진을 찍는다니까 손짓을 해보이고 있습니다.

 

보통은 실실 잘 웃는데다 인상까지 선량해 무엇 하나 맺힌 것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답니다. 합천군 공무원들조차 ‘신문사 사장이나 기자가 아니라 귀농한 농촌 총각 같다’고 얘기할 정도니까요. 한 순간 그이의 앙다문 입술이 살짝 낯설었던 까닭이랍니다.

 

“합천신문사는 창간일이 1995년 12월 11일입니다. 부친(박환태)께서 창간하셨는데, 2009년 세상을 떠나시면서 ‘신문사만큼은 꼭 이어나가면 좋겠다’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제가 장남이거든요. 대한민국에는 장남으로 태어난 업보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합천신문사를 떠맡게 됐습니다.

 

기자 생활 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버지를 돕고 하면서 어느 정도 친숙은 해져 있었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하는 것 아니냐 해도 틀리지 않으니까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고 또  사실이 그러니까 숙이고 다닙니다. 정식 기자 교육도 받고 활동도 그렇게 했으면 자부심도 갖고 어깨도 펴고 다닐 텐데…….”

 

기자가 되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신문사를 경영하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이 없는 사람이 덜컥 <합천신문> 대표이사가 되고 발행인이 되고 또 기사까지 쓰게 됐습니다. 대학도 글쓰기나 신문·방송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종교학과를 나왔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언론이 너무 이렇게 좋은 것만 써주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나쁜 것도 써야 한다, 이런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악의적으로 쓰고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요. 보통 사람들은 섣불리 말을 못하거든요.

 

서민들은 지역에서도 그런데 신문에서 대신해 주면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아, 이게 신문 인지도를 늘리고 인정을 받는 길이구나! 영 너무 반대되는 반항적인 길로 갈 필요는 없지만요. 이슈는 바로 숨기지 않고 바로 해야겠다!

 

제대로 된 언론 역할,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나쁘다 할 수 있는 신문, 제보가 들어왔거나 이슈가 된 것은 보도를 해야 한다. 일단 알아야 한다. 작거나 크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빼버린다든지 정말 축소시킨다든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3. “배달을 하면 사장이 아니라 배달부 마음이 된다”

 

 

독자를 바라보고 지역 주민들을 마주하면서 배우고 느낀 점이라 합니다. 합천신문이 ‘합천의 조선일보’라는 말도 아직은 왕왕 듣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요즘 합천신문 보도가 자꾸 이상해지고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게 나오는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1995년 합천신문 창간 이래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신문 배달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친께서는 일당백, 근면·성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어요. ‘대부(大富) 재천(在天), 소부(小富) 재근(在勤)’이라고, 큰 부자는 하늘에 달렸지만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고요.

 

신문 배달도 강조하셨고요. 저는 물론 식구 모두가 신문 배달에 거부감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어떤 신문도 겁 안납니다. 조선일보도 합천서는 300부 수준인데 합천신문은 5000부 찍어서 집집마다 다 돌립니다.

 

 

독자들한테 군민들한테 가까이 가는 신문이라야 합니다. 소시민적인 군민들에게 이웃 같은 신문으로 가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미 통하지 않습니다.

 

신문 배달을 하면 건강해지고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사장이 되지 않고 신문배달부 마음이 됩니다. 권위주의적인 생각이 안 듭니다. 우편 발송 비용도 아낄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도 큽니다. 환경미화원은 많이 알고, 식당도 일찍 여는 집은 압니다.

 

막일꾼들도 많이 만나는데, 저희 따뜻하게 챙겨주고 그러십니다. 늦어도 6시 나갑니다. 일주일에 이틀 하루에 두세 시간 신문을 돌립니다. 주간신문인데 굳이 아침에 나갈 필요가 있느냐고요? 신문은 아침에 보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낮에는 신문 대신 일을 봐야 하니까.

 

재미있습니다. 하하. 겨울에는 야광 처리가 된 배달복을 입는데요, 옷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건네는 이들도 많답니다.”

 

박황규 발행인 아내의 신문 배달 복장.

4. 식구 모두 ‘우리는 배달의 가족’ 자부

 

박황규 발행인뿐만 아니라 식구들은 모두 신문 배달에 대한 기억, 이젠 세월이 흘렀으니 추억이 됐겠는데 그런 게 있답니다. 선친이 물려준 유산이겠지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그런 유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박황규 발행인의 배달복. 한국도로공사의 한밤중 작업복이라 합니다.

 

“저희 집은 슈퍼마켓과 신문지국을 함께 했습니다. 선친께서 지국장으로 신문과 인연을 맺고, 나중엔 기자로도 활동하셨죠. 경험이 있었기에 나중에 합천신문도 창간하게 됐고요. 신문 배달이나 물품 배달, 카운터 보기 등을 자식들에게 시키셨습니다.

 

그런 경험이 저희 네 남매한테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모두 아침마다 신문을 접고 배달을 가야 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기 참 싫잖아요. 그때는 신문배달이 아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까지 있었죠. 저희 네 남매 모두, 특히 여동생이 아주 싫어했지만, 작은 구역이라도 꼭 돌리도록 하셨죠.

 

저는 중학생쯤 됐고 동생은 초등학생 때였는데, 저와 누나·여동생은 신문배달을 하러 다 떠났는데, 막내 남동생이 새벽 추운 날씨에 신문 돌리기가 싫어 방안에 있다가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울면서 나가 멀리도 못 가고 길가에서 신문뭉치를 안고 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배달 모습 1.

 

어둑어둑한 새벽 4~5시였겠는데, 술집아가씨 몇몇이 일마치고 가다가 남동생을 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경기도 좋았고 집안 형편 어려운 아가씨들이 술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은 시절이었고요. 한 아가씨가 돌아와서는 동생 주머니에 손을 넣더랍니다.

 

동생은 자기 돈을 훔치려 하나 오해를 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가 있었다고 하네요. 어떤 아가씨인지 예나 이제나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자기 남동생을 떠올리지 않았을까요? 남매끼리 명절에 만나면 그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그 시절을 떠올립니다.

 

지금은 가정주부인 누나가 한때 아시아나항공 스튜어디스를 했었는데 그때 면접에서 집과 부모에 대해 물었을 때, 집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음료수 상자 배달도 많이 해서 무거운 것도 잘 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합니다.

 

배달 모습 2.

 

당시 면접관이 이를 좋게 봤고 합격하는 데도 당연히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누나는 물론 여동생까지 선친께서 딸이라도 봐주지 않고 남녀 평등하게 또 강하게 키웠기 때문에 다들 사회에 진출해 다들 아주 잘 살아나갑니다.

 

지금은 오히려 장남인 저를 많이 걱정해줍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하며 말씀입니다. 하하.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저희 식구가 바로 ‘배달의 가족’입니다. 신문 배달을 위해 일찍 일어나 힘차게 뛰면서 일하는 것, 바로 저희 가족의 정신이고 합천신문을 지탱하는 힘이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신문배달 하는 목·금요일은 새벽부터 부산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머니는 신문에 전단 넣고, 우편발송용 신문은 접어둡니다. 저와 아내는 각자 맡은 구역 배달을 나가고요. 이 ‘배달의 정신’을 저는 언제나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당백으로 노력하는 것, 누구에게 미루지 않고 직접 일해 나가는 것, 놀고먹지 않고 당당히 일을 해서 밥값을 하는 것…….”

 

배달 모습 3.

 

5. 3대가 빨리 나타나면 좋겠다는 2대 발행인

 

제대로 수지타산을 맞추기는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모든 신문이 다 어렵다니까 드는 생각이지요. 게다가 합천신문 수입원은 오로지 광고료와 구독료뿐이라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사옥을 갖고 있어서 유지비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게 좋고요, 수지타산은 따지자면 본전치기? 저까지 유급 종사자가 4명인데, 직원들만 급여를 챙겨주고 저는 월급을 가져가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경영 안정, 활성화가 먼저입니다. 이익을 따지면 할 수 없습니다. 장남이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는 선친 유언이 없었으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배달 모습 4.

 

그래도 안팎으로 시스템을 갖추려고 합니다. 경남도민일보 보니까 지면평가위원회라든지 편집규약 같은 것 갖췄더라고요. 그런데 지역 주간신문으로서는 번거롭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민기자제도는 운영합니니다. 합천군 17개 읍·면에 20명 안팎 있습니다. 이들이 쓰는 기사도 적지 않습니다.

 

월요일마다 오전 11시에 하는 편집회의도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랄 수 있는데요 논설위원이나 시민기자도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모여 의견 교환을 하고 지역에 특이한 이야기가 있으면 듣고 합니다. 이런 시민기자제도와 편집회의가 힘이 많이 됩니다.”

 

그이는 처음부터 특별하게 방향을 정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권위주의적이지 않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또 좁은 지역에서 이런저런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부정한 결탁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울러 편집과 보도에서도 열린 자세를 보여왔습니다.

 

배달 모습 5.

 

그런데 박황규 발행인의 으뜸 소원은 뜻밖에도 신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2대 발행인인데, 3대가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남동생이 받으면 가장 좋겠지만, 꼭 가족이 아니라도 창간정신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이면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신문 발행인이라든지 기자라는 데서가 아니라 국선도 수련인이라는 데서 제 정체성을 찾습니다. 대학 들어가던 1993년 국선도에 입문했으니까 올해로 22년이 되네요. 2002년 대학 졸업하고서는 내내 전문 수련인으로 사범을 했습니다.

 

서울 강남 일산 청담동 도장에서였는데요, 새벽 5시 20분 지도를 시작해 끝나면 저녁 9시였습니다. 신문·방송은 보지도 않았고 시사에 대해 관심 끊고 세상사 접어놓고 살았었습니다. 남들 하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듣는 것 잘하고, 잘 들어주기를 좋아합니다. 하하.

 

배달 모습 6.

 

지금은 신문도 꼬박꼬박 읽고 인터넷 검색도 열심히 합니다만. 지금도 수련인이라는 끈을 잇고 싶어서 합천에만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국선도 수련 지도 봉사 활동도 나갔고 합천종합사회복지회관 국선도 프로그램 지도도 하고 있습니다.”

 

국선도 수련인들은 대체로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답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무엇이 있을 때, 피할 수 없겠다 싶으면 군말 없이 그냥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선도 사범’ 박황규가 ‘합천신문 발행인’ 박황규로 바로 바뀐 데도 그런 사정이 작용했지 싶습니다.

 

아무리 선친 유언이라 해도 별 갈등 없이 여지껏 자기 하던 일 단번에 걷어치우고 나서기가 쉬웠겠습니까? 나중에 어찌 될지까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합천신문 박황규 발행인은 독자들이나 지역 주민들에게 편하게 여겨지는 기자이고 언론인인 것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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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만큼 여름에도 그럴 듯한 하동 십리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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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창원교통방송에서 썼던 원고입니다. 사람들이 봄에만 몰리는 하동 십리벚꽃길이, 여름에도 썩 괜찮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낭만도 누릴 수 있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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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6월 21일과 22일 이번 주말에는 기차여행을 준비해 봤습니다. 마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동에 가서 쌍계사를 둘러보고 십리벚꽃 길을 걷고 화개장터까지 구경한 다음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여행길입니다.

 

아침 9시 49분 마산역에서 경전선 열차를 타면 하동역에 11시 15분쯤이 됩니다. 도중에 중리 9시 56분 함안 10시 4분 반성 10시 22분 진주역 10시 32분을 거치니까 집에서 가까운 역에 나가 타시면 되겠습니다.

 

하동역 내린 뒤에는 하동역에서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하동버스터미널에서 11시 40분 버스를 타시면 쌍계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쌍계사 들머리에 12시 30분 전후해서 도착합니다. 그런데 22일 일요일은 비가 오지 않고 흐리기만 하지만 21일 토요일에는 비가 오신다니 어쩌지요?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비가 많이 오지는 않는다니까 맞으면서 걸으면 됩니다. 오히려 빗길이 더 큰 감흥을 안겨다 줄 때도 많답니다. 12시 30분 도착이니 쌍계사 들기 전에 점심부터 먼저 먹어야겠습니다. 쌍계석문 근처에는 비싸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밥집들이 많으니 아무 데나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발길을 서둘러 쌍계사를 찾습니다. 쌍계사는, 아주 푸근하고 소박한 절간입니다. 대웅전 오른편에 자리잡은 마애불 천진한 인상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적지도 않습니다. 따로 성보박물관을 갖추고 있을 정도니까요.

 

쌍계사로 가는 숲길.

 

 

신라 명필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도 있고 구층석탑도 있고 앞에 말씀드린 마애불도 그럴 듯합니다. 이런 훌륭한 유물도 좋지만 대웅전을 둘러싼 흙담장에서 꽃무늬를 애써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옛적 사람들 좋아했음직한 소박한 솜씨로 기와를 갖고 해넣은 꽃무늬가 여럿 있습니다.

 

진감선사대공탑비.

 

구층석탑과 불두화.

 

그리고 구층석탑 아래 아름드리 굵은 나무 두 그루에도 눈길을 넌지시 한 번 던져볼만합니다. 길어야 100년밖에 못 버티는 존재인 사람으로서 이 나무들이 겪었을 1000년 안팎 세월을 헤아려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테니까 말씀입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돌아나와 화개천 싱싱하게 흐르는 냇물을 왼쪽에 두고 십리벚꽃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미 여름 날씨에 다다른 6월 중순에 마주하는 십리벚꽃길은 꽃으로 터널을 이루는 4월 초순과는 또다른 눈부심을 안겨줍니다.

 

 

4월에는 꽃잎의 화려함 덕분에 눈이 부셨다면 6월에는 잎사귀의 푸르름이 그렇게 만듭니다. 파랗게 물이 점점이 떨어져 온몸을 적시고 바닥까지 적실 것만 같습니다. 활짝 피어나 짙푸른빛을 띠는 잎사귀가 터널을 이뤘습니다.

 

해가 쨍쨍하면 온통 그늘 터널을 이루는데요, 그런 덕분에 비가 오는 날에도 여기 들어서면 빗방울이 그렇게 많이 들지를 않는 정도가 됩니다. 걷는 틈틈이 고개를 길 밖으로 돌리면 하동 명물 차밭 풍경이 펼쳐집니다. 연록색 찻잎은 눈맛을 시원하게 만듭니다.

 

 

민들레 밭.

 

여기서 길러낸 갖은 차를 파는 분위기 좋은 찻집도 드문드문 마주칩니다. 자연경관에 스며들어 보일 듯 말 듯한 찻집도 있고 민망할 정도로 도드라진 찻집도 있습니다. 약초로 유명해져서 이제는 일부러 사람들이 키우는 민들레 밭도 보입니다.

 

찻집 '산유화'에서 바깥 풍경을 쳐다보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화개천이 십리벚꽃길과 동행을 해줍니다. 그러면서 화개천은 씩씩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도로 쪽 사람 있는 데까지 뿜어올리고 있습니다. 화개천은 십리벚꽃길과 길동무처럼 편안하게 어우러지다가 화개장터 있는 지점에서 헤어져 섬진강으로 합류해 들어갑니다.

 

화개천.

 

화개장터는 아시는대로 가수 조영남 덕분에 유명해졌습니다. 노래를 듣고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화개장터를 찾았다가는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어쩌구 하는 화개장이 현실에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관광을 위한 상설장으로 꾸며져 있는데요, 예전 같은 장터 풍경은 볼 수 없지만 사람 북적대는 맛은 새롭습니다. 그래도 여기 나오는 푸성귀나 약초 같은 물건만큼은 제대로 관리가 돼서 죄다 하동산이라고 합니다.

 

거꾸로 되짚어 화개에서 하동읍내로 돌아나오는 버스는 4시 40분과 4시 45분과 5시 5분이 적당합니다. 이 버스를 타면 하동역에서 5시 58분 출발해서 마산역까지 가는 기차를 맞춰 탈 수 있습니다. 기차에서는 걷느라 노곤해진 몸을 의자에 기댄 채 눈을 붙이는 여유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돋보이는 두산중공업의 ‘토요 동구밖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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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망둥어는 어째서 헤엄치지 않고 갯벌을 뛰어다니나요?” “거제향교 용머리가 왜 닭대가리처럼 생겼나요?” 두산중공업이 5월 17일부터 다달이 두 차례씩 웅동지역아동센터 등 창원에 있는 60개 가까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모아 갯벌이나 문화재 등을 찾아 체험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역사회공헌 활동으로 창원시내 58개 지역아동센터 1300명 아이들을 위해 ‘두산중공업과 함께하는 토요 동구밖 교실’이라는 대규모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체계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산중공업은 3년 전인 2011년부터 창원시내 여러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토요일 아이 방임 문제 해결과 상대적 소외감 해소, 사회성 증진 등등을 목표로 삼아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문화 체험·정서 지원·창의적 체험 프로그램을 꾸준히 제공해 왔습니다.

 

 

 

이를테면 2013년 4월 27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 300명을 초청해 창원과학체험관 등에서 ‘두산중공업과 함께하는 과학체험’ 행사도 치렀고요, 같은 날 프로야구단 두산베어스와 NC다이노스의 경기에는 지역아동센터 600명을 불러 함께 구경했으며 어린이날에도 두산중공업 창원공장으로 다문화가정 300명과 지역아동센터 1200명을 초청해 문화제를 열었답니다.

 

구성원 95%가 사회봉사 활동 참여

 

창원은 물론 서울까지 사업본부별로 전체 임직원의 95%가 참여해 사회봉사단을 운영하고 있는 두산중공업은 이처럼 지역사회를 위해 공헌 활동을 벌여왔으나 체계적이지 못하고 산발적이어서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2013년 개선 방안 마련에 들어갔습니다.

 

 

2013년 한 해 동안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긴밀하게 협의하는 한편 지역 사회적 기업과 사회단체 등 아이들을 위한 체험을 진행할 수 있는 역량을 모아 5월 17일부터 역사탐방, 생태체험, 사회·과학, 전통문화, 창원투어, 공예체험, 자연물체험 등 7개 분야로 나눠 활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한 달에 두 차례 토요일을 골라 펼쳐지는 이런 활동을 위해 두산중공업은 사원들 자발적인 모금과 회사 출연금을 매칭펀드 형식으로 모아 금전도 지원하는 한편으로 8개 사업본부별로 사회봉사단 소속 임직원까지 나서서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올해부터 미래 경쟁력 확보와 인재 중심 경영을 위해 본격 가동하고 있는 ‘청년 에너지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중·고교와 대학을 거쳐 취업에 이르기까지 성장 과정 전체에 대한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인데요, ‘토요 동구밖 교실’은 그 중요한 일부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린이를 위해서는 지역아동센터에 체험 중심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하며, 형편이 어려운 중고생에게는 장학금 지원과 함께 이공계 인재 양성을 위한 창원과학고와 산학협력, 창원기계공고 ‘두산반’ 개설 등을 하고 대학생을 위한 프로그램도 따로 가동합니다.

 

 

형편 어려운 아이들 위한 불평등 해소

 

두산중공업에서는 이를 두고 “△인재 양성 △소외 어린이·청소년 대상 △지역밀착을 기조로 삼았다는 점에서 남다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7개 분야 프로그램에 지속적으로 참여를 하면 지역과 역사를 좀더 알고 사회성·자립심도 키우며 문화·예술적 소양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두산중공업의 이런 프로그램 가동·제공은 당연히 상대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집안 아이들에게 커다란 도움·보탬이 됩니다. 아시는대로 요즘은 이런저런 체험 또는 탐방 프로그램은 결국 따지고 보면 이른바 ‘있는 집안 아이들’에게만 제공이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돈을 대지 않으면 아이들이 그런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프로그램 진행 업체로서도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참여를 시키고 싶지만 당장 운영하려면 수지타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합니다. 두산중공업의 이런 지원은 아이들에게 ‘기회의 불평등’을 작으나마 해소해 주는 뜻깊은 일인 셈입니다.

 

일회성 아닌 지속적·체계적 제공

 

게다가 ‘토요 동구밖 교실’은 또 올 한 해로 그치지 않고 내년과 그 뒤로도 이어진답니다. 여태까지도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 왔지만 커다란 안목에서 하는 계획은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단순한 물품 지원이 아니라는 점도 남다르지만 모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여러 방면 프로그램을 다 누리도록 하겠다는 (두산중공업의) 의지도 남다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한 해 또는 두 해로 끝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산중공업은 “연말에 평가·점검을 통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창원의 모든 지역아동센터가 지금 진행되는 7개 프로그램을 모두 체험하려면 6년은 넘게 걸릴 것으로 봅니다”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에도 작지 않은 도움 

 

 

이와 같은 두산중공업의 ‘토요 동구밖 교실’ 운영은 요즘 들어 일자리 창출과 지역 사회 공공성 실현을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예비)사회적기업에도 작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으며 다른 사회단체의 존재 가치 실현에도 한 방안이 돼 주고 있습니다.

 

경남 권역 (예비)사회적기업 통합 지원 기관인 경남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는 두산중공업의 ‘토요 동구밖 교실’을 두고 “지역사회공헌뿐 아니라 사회적기업 육성·지원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며 게다가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일감이라 해당 (예비)사회적기업이 뿌리내리고 자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라고 평했습니다.

 

 

(예비) 사회적 기업은 공공성(공익성)과 이윤을 동시에 추구합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공익적·공공적 활동을 꾸준하게 벌이려면 자립 가능한 수익이 창출되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씀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부는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라도 사회적 기업 육성 정책을 여러 방면에서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토요 동구밖 교실’에 참여하는 (예비)사회적기업은 해맑음문화센터(공예체험)·파이디아(자연물체험)·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역사탐방, 생태체험)고요, 함께하는 사회단체는 창원YMCA(사회·과학)·창원민예총(전통문화)이며, 일반 기업은 그린고속관광(창원투어)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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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을 따라가는 문화유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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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모산재 영암사지→14.4km 괴정 쉼터(삼가면 두모리)→2.5km 삼가장터(기양루·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삼가향교)→9km 걸어서 2시간 남명조식선비길(둑길)→바로 옆 조식생가터→18.6km 의령 충익사→19.7km 곽재우 생가→3.1km 안희제 생가→15.1km 보덕각·쌍절각→21.3km 망우정

 

영암사지 명물 석등을 지켜낸 동네 사람들

 

합천 영암사지(陜川 靈岩寺址:사적 제131호)는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랍니다. 절터 앞에 서면 우선 모산재에서 뿜어내는 기상에 압도됩니다. 망한 절터에서 뿜어져나오는 을씨년스러운 기운 따위는 없습니다. 대신에 씩씩함이 느껴진답니다.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과 삼층석탑(보물 제480호) 그리고 귀부(보물 제489호)는 절터에서 나온 건물 받침돌, 갖가지 기와조각들과 어우러져 서 있습니다.

 

 

쌍사자 석등에 얽힌 마을 사람들의 충정은 유명합니다. 1933년 전후 일본인이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가회면사무소에 보관해 놓았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석등 화사석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요 아시는대로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신이지요. 그러니 이 석등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로움이 예사로 여겨지지 않는답니다.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데, 쌍사자 엉덩이의 토실토실하고 부드러운 실감은 어떻게 정확하게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랍니다.

 

 

영암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일러주는 기록은 아직 전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에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이 여기서 83세에 입적했다고 나옴에 따라 그 이전에는 세워져 있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건물터는 여느 다른 절간과 다른 특징이 많다고 합니다. 금당을 올려 앉힌 축대의 가운데가 튀어나와 있고요, 그 좌우에 가파른 돌계단이 있는 점, 금당터 연석에 얼굴이 새겨져 있고 앞면과 좌우 세 면에 동물상이 돋을새김으로 들어앉아 있는 점 등이 그렇답니다.

 

 

금당 축대 사자 조각.

 

또 최근 이어진 발굴에서는 회랑(回廊) 자리까지 나와 여기 절터가 예전에는 아주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회랑이 있으면 비나 눈이 와도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습니다. 왕립 절간인 경주 불국사에 바로 그런 회랑이 있습지요.)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쌍사자 석등의 남다름에 밀려 조금은 소박해 보입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잘 이어받았으나, 기둥 표현이 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들어 있어 조금은 약해 보입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

 

위쪽 따로 하나 더 있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자리잡은 영암사지 귀부들은 아주 잘 생겼습니다. 전체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입니다. 새겨진 것들이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는데 두 거북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하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씩씩해 보이고요, 다른 하나는 고개를 숙인 듯해서 다소곳해 보입니다.

 

 

삼가장터를 빛나게 하는 의로움의 실천

 

삼가장터는 여느 장터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예전만 못하답니다. 삼가는 한우가 유명한데 장날이 아니어도 한우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삼가장터 한 모퉁이에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이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선열들 만세 시위를 형상화한 모습이 양쪽으로 새겨졌는데, 하늘을 나는 모습과 기상이 매우 힘차면서도 정갈합니다. 앞면에 새긴 그림은 아름답고 뒷면에 쓰인 글씨는 씩씩합니다. 한 쪽 구석에는 100년 전 의병 활동을 벌인 이들을 기리는 빗돌도 놓여 있습니다.

 

 

 

1919년 삼가 장날인 음력 2월 17일(3월 18일)과 2월 22일(3월 23일) 두 차례 일어난 이 거사에는 삼가·쌍백·가회면 주민 등 무려 3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가담했습니다. 삼가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랍니다.

 

일제의 진압은 잔인했습니다. 4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고 150명 정도가 크고작게 다쳤으며 50명 가량이 감옥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에 앞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여기 지역민들은 떨쳐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기개의 배경에는 바로 같은 삼가 출신인 남명 조식(1501~1572) 있다고 지역 사람들은 봅니다. 350년 가량 세월이 흘렀어도 그이의 정신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길가다 여기 어르신 붙잡고 여쭈면 남명 선생 얘기는 술술 나옵니다.

 

삼가장터 둘레에는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말고 삼가 기양루(三嘉 岐陽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와 삼가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도 있습니다.

 

기양루.

 

기양루는 옛날 고을 수령들의 연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쪽에 남아 있는 동헌터와 관련지어 볼 때는 삼가현 관아의 문루로도 짐작이 되는데요 어쨌거나 합천에서는 가장 오래된 누각이라 합니다.

 

삼가를 휘감으며 흐르는 양천 건너에는 우람한 삼가향교가 언덕배기 높은 데 있습니다. 향교가 있다 해서 마을 이름도 교동(校洞)이 됐습니다. 풍속을 교화한다는 유교 특유 계몽주의가 담긴 현판 풍화루(風化樓)가 걸린 대문은 올려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로 대단합니다.

 

삼가향교 정문격인 풍화루.

 

안에 있는 명륜당 건물 축대는 보통과 달리 화강암이 아니고 지역에서 많이 나는 검고 푸른 퇴적암을 얇게 겹쳐 쌓아 눈길을 끈답니다.

 

경(敬)·의(義)를 후대까지 전한 남명 조식

 

남명 조식 생가로 이어지는 선비길과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가 겹쳐지는 두모 마을에는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고 그 아래 정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괴정(槐亭) 쉼터라 하는데 백의(白衣)를 입은 이순신이 권율이 있는 합천 초계 율곡 도원수부로 가던 길에 하룻밤을 묵은 자리랍니다.

 

양천 둑길 따라 이어지는 남명 조식 선비길.

 

괴정 쉼터.

 

이순신이 종들에게 마을 사람들 쌀로 밥을 짓지 말라고 일렀는데도 종들이 지키지 않자 매질하고 쌀을 갚아 주는 일이 있었던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순신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남명조식선생생가지(南冥曺植先生生家址:경상남도 기념물 제148호)는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습니다. 남명은 30대 후반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으뜸으로 쳤습니다. 모든 사람과 세상 만물을 공손하게 대하고 세상살이에서 의로움을 실천하자는 정신이었습니다.

 

남명 생가터.

 

퇴계와 남명은 둘 다 벼슬살이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해 벼슬을 했고요 남명은 한 번도 그 부름을 받아들이지 않아 처사(處士)로 남았습니다.

 

복원되고 있는 남명 조식 생가.

 

대신 그이는 한편으로는 학문을 닦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를 길렀습니다. 그이가 이렇게 제자를 길러내 않았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정말 큰 일 날 뻔했지요.

 

임진왜란 육전과 해전을 통틀어 첫 번째 승리를 기록한 의병장 곽재우가 바로 남명의 문하생이었고 합천을 지켰던 의병장 정인홍도 남명의 제자였습니다.

 

곧게 살다 간 남명의 이런 영향은 시대를 뛰어넘어 근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앞서 살펴봤듯 그이가 태어난 삼가에서는 을미의병도 많이 나왔고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에서도 다른 데와는 크게 달랐답니다.

 

이어지는 뇌룡정(雷龍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9호)은 1549년 남명이 지은 정자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연못 같이 묵묵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우뢰 소리를 내고, 주검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왔다고 합니다.(지금은 용암서원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같은 글귀가 양쪽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종알거리지도 말고 언제나처럼 입을 닫고 있지도 말라, 시도 때도 없이 촐랑대지도 말고 언제나처럼 가만 있지도 말라, 이런 뜻이지 싶습니다. 과연 제대로 된 선비라면 그래야 마땅하겠지요.

 

 

 

 

뇌룡정 바로 옆 용암서원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따르고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커다란 돌덩이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문은 명종 임금이 1555년 내린 단성현감 자리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경과 의에 입각한 꼿꼿함이 그대로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사라졌다는데 한동안 내팽개쳐져 있다가 발굴을 거쳐 2012년 11월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의병장 곽재우

 

의령 충익사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망우당 곽재우(1552~1617) 홍의장군과 17장령을 비롯해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곽재우 유물 일괄(郭再祐 遺物 一括:보물 제671호) 여섯이 여기 있는데요 잘 보존된 장검을 비롯해 말갖춤(마구), 포도 모양 벼루, 사자철인, 화초문백자팔각대접 등이 그것이랍니다.

 

충익사.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앞에 있는 의령 중동리 충의각(宜寧 中東里 忠義閣: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2호)은 어느 한 곳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이라 합니다. 옆에는 곽재우장군 유적 정화 기념비도 있습니다.

 

많이 무거워 보입니다.

 

충익사라는 딱딱한 이름 그리고 20세기 말기를 대표하는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리 여기 정원은 아주 아름답게 잘 가꿔져 있습니다. 키가 8.5m에 가슴높이 둘레가 3m에 이르는 모과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83호)도 있습니다.

 

 

지금은 여기 서 있지만 원래는 수성이라는 마을을 지키던 당산나무였답니다. 줄기가 근육처럼 울퉁불퉁하게 골이 패여 있는데요, 오래된 모과나무에서 볼 수 있는 긴 세월을 견디어낸 연륜이겠지요.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터 앞은 늦은 가을이면 온통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합니다. 어린 시절 장군이 놀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2)가 한 눈 가득 들어옵니다.

 

곽재우 생가.

 

곽재우 생가 안채.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해마다 음력 정월초열흘에 여기다가 금줄을 치고 ‘목신제(木神祭)’를 지내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는데 제사 비용은 여기 은행 열매를 팔아 마련했다니 나무가 얼마나 큰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곽재우 생가에서 바라본 세간리 은행나무.

 

나무 바로 옆에 곽재우 장군 생가가 있습니다. 여기서 곽재우는 난리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킵니다. 마을 입구 현고수(懸鼓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7호)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고 훈련을 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

 

세간리 은행나무와 곽재우 생가.

 

왼쪽 앞에 놓인 평상이 그럴 듯합니다.

 

세간리 은행나무 금줄.

 

그러니 현고수 앞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최초 의병이 떨쳐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랍니다. 의령군이 해마다 열고 있는 의병제전 성화는 여기에서 불씨를 받아 나간답니다.

 

 

 

세간리 마을 정자에 있는 북.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는 9일 뒤인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켜 펼쳐 불패 신화를 이룩한 바다의 이순신에 버금가는 승리를 그 해 5월과 6월 의령에 있는 강줄기에서 유격전과 심리전으로 일궈냈습니다. 관군이 아닌 의병이라 활과 창·칼, 농기구가 전부였을 텐데도 왜군에 맞서 승전함으로써 조선 민·관·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습니다.

 

백산 안희제(1885∼1943) 선생은 일제강점기 국권회복을 위해 정신적·경제적 자강(自强)과 교육과 민족기업 발전에 힘쓴 독립운동가랍니다. 일제 자본에 맞서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했습니다.

 

안희제 생가. 사랑채는 초가 지붕이고 안채는 기와지붕입니다.

 

발해에 건너가 농장을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쓰다 몸을 다쳐 귀국한 1942년 일제에 붙잡힙니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보석으로 풀려나왔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듬해 숨지고 말았습니다.

 

의령 부림면 입산 마을에 있는 백산 안희제 생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는 권위와 꾸밈이 없어 소박합니다. 안채와 사랑채 둘로 돼 있는데 사랑채는 초가지붕을 이었습니다.

 

보덕각·망우정에서 한 번 더 확인하는 의로움의 길

 

쌍절각(雙節閣)은 임진왜란 때 경남 합천 초계 마진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숨진 손인갑 장군과 아들 손약해를 기리기 위해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운 것인데 1943년 여기로 옮겼습니다.

 

 

보덕각(報德閣)은 곽재우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임진왜란 의병의 첫 전투지이자 승전지인 여기에 1739년 세웠는데요, 당시 영의정 채재공이 몸소 비문을 썼다고 합니다.

 

보덕각.

 

보덕각에 있는 보덕불망비. 대명조선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합천에서 의령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앎에서 끝내지 말고 몸소 실천해야 함을 힘주어 말했던 남명의 정신이 그의 제자 곽재우로 실현된 자취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답니다.

 

보덕비각이 있는 기강(岐江:거름강)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4일과 6일 갈대밭에 군사를 숨겨두고 강물 아래에 나무 말뚝을 박아둔 다음 왜군 배가 꼼짝 못하게 해놓고 화살을 쏘아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6월 의령 정암진에서 이뤄진 두 번째 승전은 강을 걸어서 잘 건널 수 있도록 왜군이 꽂아놓았던 표지를 뻘밭 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승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뒷면. '박정희 대통령 각하 분부로 의령군수 아무개가 했답니다 글쎄.'보덕각과 쌍절각을 알리는 빗돌 앞면.

 

마지막 걸음은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입니다. 망우정은 곽재우가 말년을 보낸 곳이랍니다. 그이는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온 다음 1602년부터 망우정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선조와 광해군의 요구로 잠깐잠깐 벼슬살이를 한 때는 빼고 하나같이 여기 머물렀습니다.

 

 

망우정 뒤편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왜 그랬을까요? 아마 제대로 죽기 위해서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공이 높은 사람인데도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등 세상이 어지러우니 벼슬을 하면 오히려 명줄만 줄인다고 봤을 것입니다.

 

곽재우는 또 의병을 일으키느라 재산을 써버리고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고도 합니다. 말년에는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기도 했다는데, 어쩌면 그이의 이런 선택이 최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의병도 마찬가지로 일으켰던 바로 옆 합천의 정인홍은 광해군 조정에도 남아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결국 제 명에 죽지는 못했습니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배기에 숨은 듯 앉아 있습니다. 망우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뒤에는 1789년 세운 충익공망우선생유허비(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와 1991년에 세운 또다른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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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간과 자연 따라 흐르는 문화유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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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경북 청도 운문사→18.9km 울산 울주 석남사→5.6km 가지산(석남터널 둘레)→11.1km 경남 밀양 호박소→2.7km 얼음골·얼음골옛길(남명초교)→3.5km 도래재→10km 표충사→10.8km 밀양댐→24.2km 밀양박물관→13.9km 표충비(표충사에서 밀양댐을 빼고 밀양시립박물관으로 바로 가면 →23.3km)

 

운문사와 석남사, 공통점과 차이점

 

오래 된 절이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청도 운문사는 보물이 많습니다. 매년 삼월 삼짇날이면 막걸리 열두 말을 마신다는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절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해 대웅보전(보물 제835호) 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전 등 조선시대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운문사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은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고, 꼭대기도 연꽃봉오리 모양 보주(寶珠)가 올려져 있습니다. 운문사 동호(보물 제208호)는 검은색 항아리로 이름이 감로준(甘露樽)이랍니다. 뚜껑 손잡이에는 불꽃 모양이 있습니다.

 

작압전 석조여래좌상과 석조 사천왕상.

 

고려 스님 원응국사의 업적과 행적을 적어넣은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석불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은 작압전(鵲鴨殿)에 석조사천왕상과 같이 모셔져 있습니다. 육각 대좌와 광배가 모두 온전한데, 광배 가운데에는 연꽃이 있고요, 테두리에는 불꽃무늬가 있습니다. 석조사천왕상(보물 제318호) 4기는 수법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운문사 옛 대웅보전(오른쪽)과 삼층석탑.

 

대웅보전(보물 제835호)은 조선 중기 건물이랍니다. 운문사에는 대웅보전이 둘인데 사람들은 무슨 뜻이라도 있나 궁금해 하지만 알고 보면 싱겁답니다. 원래 대웅보전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고쳐 써왔다는데요, 1994년 들어 원래 자리에 대웅보전을 새로 지으면서 옛 비로전에도 이름을 되찾아 주려 했으나 아직은 문화재청과 합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운문사 새 대웅보전. 국화 화분이 나란합니다.

 

그러니까 보물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원래는 비로전이던 건물입지요. 보물 대웅보전(보광명전)에 있는 비로자나삼신불회도(보물 제1613호는)는 커다란 화폭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을 함께 담았습니다.

 

운문사 만세루. 국화 화분이 군데군데 놓여 있습니다.

 

운문사 만세루.

 

이밖에도 보물이 더 있지만, 가을 단풍에 물든 아름다운 풍치는 따로 꼽아 마땅한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기도 효험이 있다는 암자들에는 한 해 내내 사람들이 끓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갈함’이랍니다. 경내 마당에 남아 있는 막 끝낸 비질 자죽과 밀짚모자를 쓰고 울력을 하는 비구니들의 쉼 없는 움직임은 운문사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기만 합니다.

 

운문사 울력하는 스님들.

 

그리고 들머리 길게 이어지는 길 따라 들어선 소나무들은 서늘하고 시원하지요. 그 사이로 갈라져 내려오는 햇살은 바닥 솔갈비에 내려앉으며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전각 앞이나 옆 댓돌에 놓여 있는 신발들은 가지런하고요, 절간 여기저기 놓여 있는 화분들은 철 따라 꽃을 바꾼답니다. 그래서 운문사를 제대로 돌아보려면 한나절은 족히 걸립니다. 넓은 경내 곳곳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보물이며 주변 풍경은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면 아쉬운 것들이랍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와 만세루.

 

운문사는 화랑정신과 <삼국유사>가 탄생한 역사의 산실로도 유명하지요. 운문사에 머물던 원광국사가 찾아온 화랑들에게 세속오계 가르침을 내려준 곳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충렬왕 때 일연선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답니다.(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주차요금 2000원)

 

운문사에서 석남사 가는 길에서 만나는 가지산 골짜기는 늦가을이면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릅니다. 가지산은 유별나게 소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보다 잎이 지는 활엽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둘러싼 그 활엽수들이 한꺼번에 만들어내는 단풍은 남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떤 물감으로도 담아내기 힘든 천연색감으로 세상을 물들이는데, 여기 넋을 놓고 가다보면 금방 석남사가 나옵니다. 석남사와 운문사는 비구니 절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절을 비교하면서 보면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석남사 일주문.

 

 

운문사 들머리에는 소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어 약간 긴장감을 주는 반면 운문사 들머리에는 참나무나 서어나무 따위 활엽수들이 늘어서 있어 푸근한 느낌을 줍니다. 또 운문사 하면 먼저 정갈함이 떠오른다면 석남사는 어쩌면 ‘실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남사 가는 길.

 

그리고 그 실용의 대표선수는 ‘섀시’라 할만하답니다. 경내에 들어서면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대웅전은 물론 여기저기 모든 건물에 달아놓은 섀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여름이면 선방마다 에어컨을 달고 사는 처지여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운치를 기대하고 찾는 사람에게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노릇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깔끔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랍니다. 운문도 석남도 마찬가지로 깨끗하지만, 운문사에는 화분이 나와 있는 반면 석남사는 석탑 둘레 네모나게 공간을 내어 꽃을 심어 놓기 십상인 점은 서로 다릅니다.

 

석남사 삼층석탑 둘레 꽃밭.

 

울주 석남사 승탑(蔚州 石南寺 僧塔:보물 369호)은 꼭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뒤쪽 언덕 넓은 터에 놓여 있는데 석남사를 처음 세운 통일신라 시기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답니다.

 

 

 

승탑 자리에서 보는 석남사 뒷모습.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며 아래받침돌에는 사자와 구름무늬, 가운데받침돌에는 코끼리 눈 모양 장식에 꽃무늬 띠를 새겼습니다. 또 연꽃 대좌 위에 놓은 탑신에는 서 있는 신장(神將)을 도들새김으로 넣어놓았습니다.

 

이 도의선사는 우리나라 남종선의 시조라 합니다. 도의선사가 귀국(821년)해 활동하던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는 교종인 화엄종이었답니다. 그래서 도의의 선종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 뒤 세월이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름 널리 퍼졌습니다.

 

아래 둥치에서 일제 송진 공출 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8세기 후반부터 신라 왕족의 중앙집권이 약해지고 지역마다 호족이 세력을 얻어나가는 시대 흐름과 맞물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중앙집권 세력은 교종에, 호족 세력은 선종에 기대었습니다.

 

석남사삼층석탑(石南寺三層石塔)은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호입니다. 석남사에는 삼층석가사리탑도 있는데 헷갈리기 십상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가사리탑이 있고 삼층석탑은 극락전 앞에 있습니다.

 

 

삼층석탑이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3년 삼층석가사리탑이 들어서면서 지금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삼층석탑도 삼층석가사리탑도 모두 도의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삼층석탑은 아직도 원래 모습 그대로고 삼층석가사리탑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15층이었다 하는데 임진왜란 때 무너져 버렸고 이를 스리랑카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를 가져와 봉안하고 3층으로 새로 쌓았습니다.

 

석남사 석가사리석탑.

 

신앙하는 대상으로는 석가사리탑이 적격이겠지만, 아담하고 가지런하고 소박한 느낌은 삼층석탑 쪽이 좀더 낫게 풍긴답니다.(입장료 어른 17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1000원)

 

가지산, 호박소, 천황산, 얼음골과 얼음골 옛길

 

가지산은 경북 청도·경남 밀양·울산 울주에 걸쳐 있습니다. 이른바 영남 알프스의 한 부분입니다. 한겨울 눈에 덮인 모습이 유럽의 알프스처럼 아름답다고 붙은 이름이랍니다. 하지만 겨울만 멋지고 가을과 봄과 여름은 멋지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멋진 모습을 보려면 지르지 않고 둘러가는 길을 골라잡아야 합니다. 속도를 숭상하는 새로 난 국도 24호선은 석남사 들머리에서부터 가지산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통째로 터널로 관통해 버린답니다. 이러면 빠르기는 해도 국도 터널 가운데 가장 길다는 가지산터널 4.5km 내내 콘크리크벽말고는 아무 볼 것이 없습니다.

 

석남터널 가까운 데 단풍.

 

대부분이 여기로 빨려 들어가기는 하지만 ‘뭘 좀 아는’ 이들까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석남사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지방도 69호선을 고릅니다. 울산쪽 가지산 골짜기를 타고 올랐다가 석남터널 500m 남짓을 지난 다음 밀양쪽 골짜기를 타고 내립니다.

 

석남터널 가까운 데서 보는 가지산 단풍.

 

오르내리는 내내 가지산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고 그럴 듯한 지점에서는 멈춰서서 한참을 누려도 되거든요. 이렇게 해서 호박소에 닿습니다. 호박소 또한 가지산 자락에 듭니다.

 

호박소 일대 골짜기는 가파르지 않아서 느릿느릿 누리고 즐기면서 산책하기 알맞습니다. 골짜기에 들어도 좋고 산길을 걸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거닐다가 적당하다 싶은 자리가 나타나거든 들어가 앉아 노닐면 그만입니다.

 

물줄기가 돌에 떨어지면서 깊이 파이는 바람에 절구처럼 만들어졌습니다. 바닥이 온통 돌이고 깊기도 하기 때문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늘이 가물 때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답니다. 사철 내내 제각각의 색깔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은 가지산과 천황산 중간 어름에 있습니다. 여름에도 얼음이 맺힌다고 해서 이름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얼음골에는 얼음 말고는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얼음조차 이제는 철재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오히려 얼음골 들머리에서 마을을 거쳐 남명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한 번 걸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세상이 편해지고 빨라지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 가운데 하나가 길입니다. 길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고 덩달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도 사라졌습니다.

 

이 옛길은 새 길이 나면서 조용해졌습니다. 얼음골과 호박소로 이르는 아스팔트 도로가 놓이기 전에는 자동차들이 이 좁은 콘크리트길로 다녔더랬습니다. 지금은 동네 사람들 농사짓는 데 쓰는 차들만 가끔 지나친답니다.

 

얼음골 옛길.

 

얼음골 옛길 사과밭 사과들.

 

얼음골 옛길 사과밭.

 

고맙게도 옛길은 행정에서 쓰는 이름조차 ‘얼음골 옛길’로 돼 있습니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도 1시간이면 족한 꾸불꾸불 이어지는 길에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길가 과수원 사과나무에는 올망졸망 얼음골 사과들이 부산스레 달려 있습니다. 아직 때 타지 않은 이 옛길이 그대로 오래 남으면 좋겠습니다.

 

길 끝에서 만나는 남명초교는 동상들이 재미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과 책 읽는 소녀와 반공소년 이승복에 더해, 밀양 출신 임진왜란 승병장 사명대사가 있습니다. 정문 안쪽 책 읽는 소녀는 웃음이 야릇합니다.(들여다보는 책이 19금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사명대사에게 한가운데를 내어주고 운동장 한 쪽 구석으로 옮겨간 이순신은 표정이 순진한 중학생 같습니다. 뒤쪽 동천 물가에 빙 둘러 있는 솔숲은 품격이 신라 왕릉 솔밭 같이 대단합니다. 이 학교 아이들은 이것만으로도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교실에 앉아서도 삼림욕을 할 수 있으니 말씀입니다.

 

 

도래재로 넘어가 만나는 표충사의 아름다움

 

표충사 가는 길은 빠른 길과 느린 길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잘 나 있는 도로는 사람들 바쁜 걸음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누릴 수 있는 운치는 그만큼 덜해졌습니다. 도래재를 타고 넘어 표충사 가는 길을 잡으면 옛길의 운치를 조금이나마 더 느낄 수 있습니다.

 

골짜기 양쪽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썩 좋습니다. 도래재는 산내면 남명리에서 단장면 구천리로 넘어간답니다. 고개가 너무 높고 날씨도 변덕이 잦아 도로 돌아오는 일이 많아 도래재(回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요.

 

표충사 수충루. 유교식 건물입니다. 일주문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장터 나들이에 퍽 쓰임새 있는 길이었지만 이제는 여기 붙어 있던 이런저런 마을조차 사라졌고, 자동차는 그래도 드문드문이나마 넘어가지만 사람이 타박타박 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합니다.

 

도래재를 돌아 나와 표충사에 이르는 길에는 대추나무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대추나무 한 그루에 자식 한 명을 대학 공부시켰다고 할 만큼 밀양 대추의 명성이 높았습니다.

 

절간 표충사(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서원(表忠書院: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가 있습니다. 영축산에 있던 표충사(祠)를 1839년 표충사(당시 이름은 영정사)로 옮겨오면서 서원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표충사에는 우리나라에서 향로로는 가장 오래 된 고려시대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국보 제75호)을 비롯해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 표충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표충사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표충사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등등 숱한 문화재가 있습니다.(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 주차요금 2000원)

 

표충사는 이처럼 유교조차 품어 안는 우리 불교의 유연함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둘레 경관의 아름다움도 한껏 드러내 보여줍니다. 으뜸 전각인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雨花樓)에 앉으면 경건함과 조용함 한가운데서 그 풍경을 온전하게 담을 수 있고요 시원한 계곡물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둥에 기대어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거나 노래를 듣거나 졸 수도 있답니다.

 

우화루에서 바라보이는 단풍.

 

돌아 나오는 길에 사천왕상을 훑어보면 거기에도 재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천왕 발밑에 험상궂은 남정네 대신 어여쁜 여인네가 깔려 있습니다.

 

왜일까요? 죄와 악은 원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죄와 악이 험상궂고 나쁘면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죄와 악을 저지를 리 없다, 아름다움과 이로움과 편리함을 경계하라, 이런 따위가 여기 들어 있다고 한답니다. 사천왕 발 아래에 여자가 깔려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 절간에 표충사까지 치더라도 몇 군데가 없습니다.

 

박물관·표충비에 깃든 아름다운 정신

 

 

표충사에서 나오는 길에는 밀양댐에 들를 수도 있습니다. 가을의 밀양댐은 단풍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냅니다. 전망대에 서서 내려다보는 밀양댐 풍경은 원래 목적과 무관하게 사람이 만든 듯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답니다. 밀양댐도 이제는 제법 관광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밀양박물관은 보통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박물관답지 않게 규모도 내용도 실하답니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박물관인데요, 영남루 근처에 있다가 2008년 지금 장소에 건물을 새로 짓고 옮겼습니다.

 

밀양십이경도.

 

사명대사 유물도 있고, 영남루에서 출토된 용머리 장식 망와 따위, 아랑 영정, 백범 김구·해공 신익희의 글씨, 김종직(金宗直)·노상직(盧相稷)·이익(李瀷)의 문집 책판을 비롯해 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의 그림과 밀양12경도 등이 나와 있습니다.

 

 

아랑 영정.

 

밀양 출신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 내용과 밀양 지역 독립운동을 둘러볼 수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도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나라 잃은 시기 많은 아름다운 밀양 사람들의 독립운동이 크고 또 많았음을 알게 해줍니다.

 

영남루 출토 용어밀 장식 망와.

 

주차요금은 받지 않으며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이고 1월 1일과 설날·추석, 월요일은 쉰답니다.

 

밀양 무안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표충비(表忠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는 사명대사비라고도 합니다. 나라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같은 좋지 않은 일을 앞두고는 빗돌에서 땀이 흐른다고 해서 ‘땀 흘리는 표충빗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치 예고라도 하는듯이 비석에 물이 맺혀 흘렀습니다. 사명대사의 아름다운 나라 걱정이 지금까지 전해진 결과라 해서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표충비가 흘리는 ‘땀’은 물기를 머금은 따뜻한 바람이 찬 비석에 닿아 표면에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빗돌은 1742년 남붕선사가 경북 경산에서 가져온 휘록암이라 하는데요 휘록암은 쉽게 차가워지는 성질이 있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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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세월호를 자빠뜨맀단 말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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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있던 6월 4일 저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여자분들이었습니다. "박근혜가 무슨 죄가 있노! 세월호를 타라 캤단 말이가, 아이모 배를 자빠뜨맀단 말이가!"

 

맞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단 한 번도 세월호를 타라 말하지 않았고 배에도 전혀 손대지 않았습니다. 다만 국가 원수로서 행정부 수반으로서 국가의 존재 이유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해내는 데서는 처참하게 무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들은 지난해 노인기초연금 매월 20만원 지급 등 여러 공약을 깼어도 박 대통령 지지를 바꾸지는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6월 10일 박 대통령은 문창극 중앙일보 기자 출신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24일 아침에 자진사퇴를 한 모양이더군요. 그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어떤 논란이 벌어져 왔는지, 이런 인사 참사가 어째서 벌어지게 됐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앞서 안대희 전직 대법관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는 사이 박 대통령 지지율(국정수행 긍정평가 비율)이 꽤 낮아진 모양입니다. 올해 3월부터 4월 넷째 주까지는 50%대 후반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여론에 반영된 4월 다섯째 주부터는 그보다 10%가량 낮은 48%를 기록한 뒤 6월 둘째 주까지 40%대 후반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창극 후보 지명 이후 처음 벌어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43%로 나왔습니다. 또 한 주 전과 견주면 긍정평가가 4% 줄어든 반면 부정 평가는 43%에서 5% 많아져 48%였습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2002년 7월과 8월 김대중 대통령 시절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김 전 대통령이 잇달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던 장상·장대환 두 사람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낙마했던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집권 5년째 레임덕이 있었고 지금 박 대통령은 2년째라 그런 현상이 없는 차이, 후보자 둘 다 청문회까지는 갔던 그 때와 견주면 지금은 두 후보자 모두 경과야 어떻게 됐든 결과는 자진사퇴에 이르렀다는 차이는 있습니다만.

 

놀라운 블랙코미디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연출 역량이 아주 돋보였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그런데 대통령 지지율을 보면 상당히 다릅니다. 김 대통령은 2002년 5월 지지율이 34.7%였는데 월드컵 축구 4강 진출과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힘입어 7월 45.9%로 늘었다가 장상·장대환 두 명 낙마를 맞아 결국 20%대로 떨어집니다.

 

이런 김 대통령과 견주면, 세월호 참사라는 엄청난 사태가 터졌는데도 여전히 40%대인 박 대통령 지지율이 저는 무척 경탄스럽습니다. 박 대통령을 떠받치는 이른바 '5060세대를 중심으로 한 매우 견고한 지지 기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나이가 지긋하신 여자분들'이 아마도 해당이 될 것 같습니다. 문창극 사태를 두고도 이들은 "박근혜가 무슨 죄가 있노! 문창극이 옛날 글로 대통령이 우예 일일이 챙기본단 말이가! 지바람에 그만 안두고 버텼던 그런 인사가 잘못이지!" 할지도 모릅니다.

 

실종자 가족이 머물고 있는 진도실내체육관. 한밤중에 달이 뜬 동영상이 비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묻지 마 지지'입니다. 제가 알기로 자기자신을 위해 투표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로지 '박근혜'를 위해 투표합니다. '묻지 마 투표'입니다. 김무성 같은 새누리당 사람들이 이번에 눈물까지 들먹이며 박근혜 마케팅을 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다음 사진.

박근혜는 복을 터지도록 받았습니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 덕을 한 번 더 입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때 되면 이자까지 붙여 돌려받을 채권을 하나 더 발행한 셈입니다. 이러거나저러거나 아무렇거나 지지율이 40%는 받쳐주니까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제멋대로 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다른 국민들은 이들 탓에 벌써부터 죽겠고 또 괴롭습니다. 복이 아니라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죽겠고 괴로운 원인이, 제가 봤던 '나이가 지긋하신 여자분들'이라 해서 피해갈 리는 없습니다.

 

그이들도 곧 죽겠는 심정이 되고 또 괴로움을 겪을 개연성이 큽니다. 박 대통령도 정치인이기에 '묻지 마 지지자'들한테는 손이나 한 번 더 흔들어주고 말지 실제로 배려할 필요까지 느끼지는 않을 것이기에 말씀입니다. 자기자신을 위하느 투표를 하지 않은 이들의 자업자득이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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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역사 문화가 함께하는 창녕 옥천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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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제 고향이기도 한, 창녕에 있는 옥천골짜기를 소개했습니다. 더불어 함께 있는 관룡사와 옥천사지도 들러보시라 권했겠지요. 나름 그럴 듯한 계곡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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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탁족도 하고 물놀이도 할 수 있는 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녕 옥천골짜기가 있는데요, 아주 크고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깊이가 있어서 여기 들어서면 여름이라도 골짜기를 타고 시원한 공기가 흘러듭니다.

 

그리고 관룡사라는 오래 된 절도 있고 옛날 고려시대 스님 신돈이 태어나 자랐던 옥천사지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네비게이터에 관룡사를 찍고 가다가 그 화왕산군립공원 요금소를 지나면 나오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바로 옥천 골짜기입니다.

 

이쪽저쪽 펑퍼짐한 바닥이나 나무그늘 아래에다 자리를 잡으면 됩니다. 아직은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을 텐데요, 7월 하순이나 8월 초순 휴가철이 되면 그야말로 들어갈 틈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골짜기가 길게 이어지고 있으니까 도로에서 가까운 데 적당하게 놀 자리가 없다 해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좋은 자리가 아직은 남들 차지가 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함께온 일행이랑 이야기도 주고받고 아니면 아니면 카드게임 등 앉아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즐기기도 합니다.

 

또 어린아이들 데리고 가족끼리 나온 사람들은 물놀이 기구에 아이를 태워놓고 같이 놀거나 조그만 그물로 만든 반두를 서로 마주 들고 물고기를 잡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데 나오면 먹고 마시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찾는 것 같은데요, 바리바리 먹을거리 마실거리를 미리 장만해 싸들고 가도 좋지만, 거기 동네 주민들이 파는 음식을 사 먹는 편이 좋은 점도 많습니다.

 

 

맨날 먹는 그런 고기 음식 말고 그 동네에서 나는 나물이나 동동주를 맛보는 새로움도 있고 잔뜩 싸들고 가는 수고를 하지 않는 간편함이 그렇습니다. 또 이렇게 찾아와 잘 놀면서, 물만 흐리고 골짜기만 더럽히고 가는 대신 지역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는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 공정여행이 뜨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어디 외국여행 나가야만 공정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찾아가는 사람도 좋고 지역 주민도 좋은 그런 공정여행은 이처럼 동네 골짜기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옥천 골짜기를 찾으면 바로 옆에 있는 옥천사 폐사지와 멀지 않은 위쪽에 있는 관룡사도 찾아야만 제대로 보람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분 남짓 걸리는 관룡사 가는 길은 양쪽으로 심겨 있는 벚나무 가로수들이 풍성한 잎사귀로 줄곧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여기에 더해 개울물이 끝까지 동행해 주기에 거기서 나오는 청신한 바람이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곧바로 말려줍니다. 이렇게 걷다보면 주차장으로 쓰이는 너른 자리가 나오는데요, 여기서는 콘크리트길 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 돌계단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관룡사 명물 돌장승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거든요. 둘 다 커다란 왕방울 눈과 주먹코가 인상적인데요, 작은 오른쪽은 할멈이고 상투를 튼 왼쪽은 영감입니다. 돌장승을 지나면 곧바로 절간이 나타나는데, 이 관룡사의 주인은 이런저런 전각들이 아니라 뒤를 받치는 관룡산 병풍바위의 아름다운 퐁경입니다.

 

 

앞으로 나 있는 좁다란 돌계단과 돌문을 지나서 만나는 대웅전 약사전 원음각 같은 건물도 괜찮지만 마당에서 대웅전 뒤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솔숲과 멀리 있는 바위들이 더욱 멋진 것입니다.

 

 

 

여기까지 걸음을 한 김에 관룡사 서쪽 요사채 뒷길로 500m쯤 떨어진 중턱 용선대까지 올라도 괜찮습니다. 통일신라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사방팔방 트여 있어 바람도 시원하고 동쪽과 남쪽 아래 내려다보는 눈맛도 썩 시원합니다.

 

관룡사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내려오는 길에는 옥천사 폐사지를 들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제대로 망한 절터가 옥천사 폐사지입니다. 다른 폐사지는 절로 허물어진 데가 많아서 돌탑 석등 따위 석재가 층층이 쌓여 있지만 옥천사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랫돌 위에 제대로 놓인 윗돌이 하나도 없어서, 석등 몸통으로 짐작되는 돌덩이는 뒤집어져 있고, 석등 받침돌에는 정에 쪼인 자국이 뚜렷하합니다. 석탑이었을 돌덩이들은 이리저리 곳곳에 흩뿌려져 있고, 연자방아맷돌 또한 뒤집어진 채입니다.

 

고려 말기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신돈이 임금의 신임을 잃으면서 처형을 당하게 되자, 그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었던 수구세력 권문세족들이 신돈에게 원망을 품고 이렇게 앙갚음을 한 것입니다. 시원한 시냇물이랑 자연과 더불어, 우리 역사와 문화까지 함께 엿볼 수 있는 그런 옥천골짜기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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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사퇴가 인사청문회 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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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 문제로 정국이 시끄럽던 최근 며칠 새 경남도민일보와 경남신문, 경남일보 등 도내 신문 3사 편집국장이 바뀌었다. 세 신문사는 모두 '임명동의제'를 시행하고 있다. 사장이 편집국장 후보를 지명하면, 기자들이 투표를 통해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국무총리 임명동의 절차와 거의 같다.


신문사 편집국장도 이렇게 뽑는데...


경남도민일보의 경우 사장의 지명을 받은 후보자는 임기(2년) 동안 어떻게 편집국을 운영할지, 어떤 신문을 만들지 소견과 공약을 밝힌다. 노조와 기자회는 이에 대한 설문조사와 함께 후보자에게 하고픈 질문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나온 질문만 50개가 넘었다.


이어 열리는 '후보 검증 토론회'에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패널의 질문과 후보자의 답변이 약 2시간 동안 진행된다. 토론회라곤 하지만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가치관, 공약 등을 검증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국회의 인사청문회와 진배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진행된 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하면 그 후보자는 탈락하고, 사장은 새 후보자를 다시 지명해야 한다. 게다가 임기 절반(1년)이 지나면 중간평가도 거쳐야 한다. 이 역시 똑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이땐 3분의 2가 거부하면 임기 중에라도 물러나야 한다.


편집국장 선임과 해임 과정을 이처럼 엄격하게 정해놓은 것은 그 자리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편집국장은 기사의 게재 여부와 지면 배치 등 기사 취급 결정권과 편집국 기자에 대한 인사 제청권을 갖는다. 따라서 신문의 논조와 의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거운 자리다. 일개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이럴진대 국가 행정을 책임지는 국무총리는 오죽하랴. 반드시 인사청문회를 거치고, 임명동의까지 받도록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난 6월 25일 열린 경남도민일보 이수경 편집국장 후보 임명동의 투표 전 간담회 모습.


그런데 신문사에서도 좀체 일어나기 힘든 희귀한 일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고르고 고른 끝에 지명한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거치기도 전에 중대한 결격사유가 드러나 사퇴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이 연달아 그렇게 탈락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더 이상 새로운 국무총리감을 찾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실제 청와대에서 접촉한 인물 상당수가 총리직을 고사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대통령은 이미 본인이 사퇴 의사를 밝혔고, 청와대가 수리하겠다고 발표까지 했던 정홍원 총리를 다시 눌러앉힌 것이다. 대통령의 인력풀 안에서는 이제 더 이상 총리감이 없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국무총리 시킬 사람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 세상의 별의별 기괴한 일들을 찾아 보도하는 '해외토픽'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일이다. 사실 나는 유임이라는 발표를 보고 모멸감이나 분노를 느끼기보단 그냥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내 주변 사람들도 그런 반응이 많았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이런 칼럼을 쓰는 것조차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인사제청권도 행사 못하는 국무총리


하지만 대통령이 유임 결정 이유로 "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국정공백과 국론 분열이 매우 큰 상황"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사청문회와 여론 탓으로 돌리고,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만들었던 인사청문회 제도를 무력화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신문사 편집국장은 선임 과정도 그렇지만 부서장과 기자들에 대한 인사 제청권도 확실히 행사한다. 국무총리도 헌법에 의해 국무위원에 대한 제청권이 있지만 대통령은 이것도 무시하고 있다. 신문사 편집국장보다 못한 국무총리, 그런 국무총리조차 할 사람이 없는 대한민국.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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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유족회에 대한 안상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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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월 5일) 오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천주교 마산교구청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창원유족회가 준비한 창원지역 합동 위령제 및 추모식이 열렸다. 희생된 지 64주년, 위령제 횟수로는 7차였다.


안상수 창원시장이 참석하진 않았지만, 추모사를 보냈고, 행정과장이 참석했다. 추모사에서 안상수 시장은 이렇게 약속했다.


"우리지역에서 발생했던 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등 한국전쟁 당시 참혹했던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일부 이루어지고, 위령제와 추모식이 열리고는 있지만 유족들의 가슴 속에 맺힌 한을 풀기에는 아직까지 많은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의 불행하고 아픈 역사를 용서와 화해로 극복하고, 유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우리 시에서 '6.25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만큼 앞으로 유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고,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그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런지 잘 지켜봐야 겠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과 증거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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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장마철에 걷기 좋은 공곶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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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저녁 7시 20분 즈음 창원교통방송에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비가 와도 걷기 괜찮을 길을 찾고 비가 와도 분위기가 그럴싸한 장소를 골랐습니다. 장마철이 시작되는 모양이니까요.

 

강명식 어르신 내외와 공곶이

 

일요일 6일부터는 줄곧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날씨가 그래도 걷기 괜찮은 그런 장소가 거제에 있습니다. 공곶이 가는 길이랍니다. 자가용 자동차로 찾아가신다면 내비게이터에 예구 마을을 찍어서 그 끝까지 가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공곶이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죠. 여기는 강명식이라는 어르신이 아내와 함께 1969년부터 46년 동안 일궈온 농원입니다. 비탈진 야산과 자갈밭 1만 평을 사들여 동백나무와 수선화와 선인장 따위를 가득 넘치게 심었습니다. 수선화는 길거리에 심으라고 거제시에다가 해마다 기증할 정도가 됐고요, 동백나무는 농원 나드는 자리에 터널을 이룰 만큼 울창해져 있습니다.

 

 

이런 명소를 일궈놓고도 강명식 어르신 내외는 입장료 따위는 전혀 받지 않고 그냥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곶이에서 허름한 일옷을 입고 허리가 구부정한 채 때로는 뒷짐을 지고 다니시는 분을 만나면,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 한 번 올리는 것은 기본이겠지요.

 

옛길보다 새길이 좋은 까닭

 

예구 마을에서 공곶이 가는 길이 예전에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난해 하나가 더 새로 생겼습니다. 자동차가 멈춰서는 주차장 끄트머리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질러 콘크리트길로 들어선 시점에서 오른쪽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어가면 새 길이 나옵니다.

 

새길과 옛길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옛길은 조금 가파른 편입니다. 새길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옛길은 길이 널러서 서너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길은 너비가 좁아서 둘은커녕 혼자만 걸어도 꽉 차는 느낌이 듭니다.

 

옛길은 공곶이까지 20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새길은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그러니까, 다니러 온 시간이 빠듯하면 옛길을 걷고, 시간 여유가 좀 넉넉하다 싶으면 새길을 걸으면 됩니다.

 

 

게다가 새길은 나무가 전후좌우로 우거져서 여름에도 햇살에 살갗 그을릴 일이 없습니다. 또 옛길과 달리 바다를 끼고 빙 돌아가면서 걷는 길이라서,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푸른빛 바다가 선들선들 나타나는 풍경도 쓸만합니다.

 

여기에 더해 걷다 보면 군데군데 이정표가 잘 설치돼 있는데요, 오른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아주 훌륭한 쉼터가 있다고 일러주면 그대로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거제시 사람들이 그런 데는 이골이 났는지, 아주 전망도 좋고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오는 그런 데를 잘도 찾아놓았습니다.

 

공곶이에서 누리고 즐기는 방법

 

이렇게 해서 도착한 공곶이에는 앞에 말씀드린 강명식 어른 수목 농원도 있고 바람이 시원한 몽돌 바닷가도 있습니다. 물론 정석대로 하려면 농원도 구석구석 알뜰하게 둘러보고 물결치고 바람부는 바닷가도 샅샅이 살피는 편이 맞겠지만, 굳이 꼭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냐에 따라서, 또 사람마다 다 다른 개성과 취향에 따라서 그냥 그렇게 움직이시면 되겠습니다. 저라면 일단 지금은 꽃이 없더라도 이리저리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농원을 좀 더 누비겠습니다. 강명식 어르신 일하시는 보람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잎사귀가 주는 상쾌함도 더불어 누릴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이처럼 꽃이 없어도 좋은 냄새가 나기까지 한답니다. 그런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언뜻언뜻 비치면서 기분도 좋아지게 만들어줍니다.

 

 

다음에는 해변과 농원이 만나지는 자리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들어가 잠깐 다리품을 쉬겠습니다. 언제나 상큼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여기는 동행한 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입니다.

 

또 신발과 양말을 벗고 파도 밟기도 하고 싶습니다. 맨발로 다가가는 순간 바다는 더 많은 것을 열어서 보여주고 느끼게 해줍니다. 그냥 바라보는 바다랑 자기가 몸을 섞어 한데 어울리는 바다랑은 도저히 같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바다로 풍덩 뛰어들지는 못할지라도 이렇게 발바닥이나마 여기 바닷물에 적시면 그 발바닥을 통해 바다는 더욱 많은 느낌을 건네줍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리저리 잔뜩 흩어져 있는 몽돌을 거닐겠습니다. 여기 몽돌은 학동해수욕장 같은 데와는 달리 조금 큰 편입니다. 그러니까 발을 내디딜 때 조심해야 합니다. 뾰족구두를 신고 왔다면 아예 처음부터 벗고 다니는 편이 낫습니다.

 

 

어쨌거나 몽돌을 높다랗게 쌓아놓은 데도 둘러보고 어린아이들처럼 몽돌 무늬나 색깔 따위를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바닷가에 적당하게 자리잡고 앉아 머리와 가슴을 비워보겠습니다. 이런 데 와서까지 이런 생각 저런 걱정을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몽돌을 담벼락처럼 쌓아놓은 위에 자라난 나무들.

앉을 자리는 바닷물과 가까울수록 시원합니다. 물결이 쳐올라와도 옷이 젖지 않을 정도가 알맞겠습니다. 함께하는 일행이 정겨운 사람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아이들이랑 같이 가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커다란 몽돌과 조그만 갯메꽃.

 

바닷가에 오면 아이들은 가만 내버려 둬도 잘만 놉니다. 물수제비 뜨기도 하고 고둥 따위도 줍고 몽돌 쌓기도 하고 파도 밟기도 하고 또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기도 합니다. 여벌옷, 여벌 신발 정도만 미리 장만하시면 그만입니다.

 

서이말등대 들머리에서 공곶이 가는 길

 

좋은 길 찾아 걷기를 정말 좋아하신다면, 예구마을에서 들어가는 길 대신 시내버스를 타고 누우래재에서 내린 다음 서이말등대 가는 길을 따라 걸으시다가 공곶이로 빠져 들어가는 길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누우래재는 한자로 쓰면 와현(臥峴)이고 와현해수욕장 할 때 바로 그 와현입니다.

 

누우래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서이말등대로 가다 보면 이렇게 와현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좋은 자리에 긴의자가 있습니다.

 

콘크리트길.

 

서이말등대 가는 길은 들머리가 지세포 자원비축단지 가는 길과 겹쳐집니다. 이렇게 겹쳐지는 길은 아스팔트도로이고요, 한 800m쯤 가서 그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서이말등대 가는 길로 접어들면 거기서부터는 콘크리트길이 나옵니다.(무슨 경비 초소 같은 것이 있어서 찾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2km가량 걸어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오른쪽 흙길로 접어들면 끄트머리에 공곶이가 매달려 있답니다. 숲이 무척 좋아서요, 나무에서 뿥어져 나오는 향기도 맡을 수 있고, 가지가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답니다.

 

흙길.

 

공곶이를 누릴 만큼 누린 다음에는 왔던 길을 되밟지 말고 예구마을로 나가는 편이 낫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옛길보다 새길이 또 낫습니다. 좀 길기는 하지만 말씀입니다. 저녁에 나오는 버스(능포 종점)가 60-1번이 6시 45분 출발이네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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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64년, 위령제는 7차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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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64주기 제7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이 7월 5일 오후 1시부터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천주교 마산교구청 1층 강당에서 열렸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창원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는 23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717명 정도로 확인했고, 그 중에서도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358명이었다.


2014년 제7차 위령제.


그 분들이 학살된 지는 64년이 지났는데, 위령제는 왜 7차일까? 이날 정동화 부회장이 읽은 경과보고는 이렇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09년 2월 18일 마산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의 희생자 63명의 진실규명 결정 후 동년 4월 25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김주완 부장의 주선으로 김도곤, 황양순, 노치수, 송시섭, 송수섭, 권영철, 배기현, 김재환, 김정임, 박군자, 나석기 등 14명이 모여 마산유족회 준비위원회 결성.


2009년 6월 20일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유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 마산유족회 창립총회 개최.


2009년 10월 16일 제59주기 제2차 마산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을 마산공설운동장 내 올림픽기념관에서 봉행."


물론 2009년 이전에도 진상규명 운동은 있었다. 1999년 10월 경남도민일보의 곡안리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발굴보도에 이어 2001년 경남에서는 처음으로 유족들의 공개적인 증언대회가 열렸다. 그날의 행사가 진실규명과 유족회 결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001년 처음으로 열렸던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대회. 지금은 유족회장이 된 노치수 회장이 증언 중인 가운데 유족회 부회장이 된 정동화 전 창원시의원이 증언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왜 2009년의 합동위령제가 제2차였을까? 그건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27일 마산역 광장에서 제1회 합동위령제가 열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로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어 용공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게 됐고, 진상규명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45년이 지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시행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함에 따라 부분적이나마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 1차 위령제가 2009년에야 2차 위령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결국 박정희 쿠데타정권 때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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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는 문화유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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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거제대교 한산대첩 승전지 견내량 통영타워 전망대 →29.8km 칠천교 칠천량 해전 → 칠천도 일주도로를 따라 한 바퀴(13km) →17.1km 옥포대첩기념공원 →9km 옥포대승첩 기념탑(대우조선해양 동문 둘레 아양공원) → 56.2km (구조라 학동 여차 등 남부해안도로를 타고) 거제현 관아 →27.2km 이순신 공원 →2.1km 통영시 문화마당(통영 중앙시장, 삼도수군통제영 병선마당) →1.2km 통영 서호시장·통영 여객선 터미널 →배 타고 25분 내린 다음 1km 통영 한산도 제승당(돌아나온 다음 여객터미널) →1.3km 세병관 →0.7km  충렬사 → 36km 고성 당항포(이순신이 왜군을 속여 당항만으로 들게 만들었다는 까닭으로 붙은 속개라는 마을(지금 소포)이 있는 지점인 동진대교까지는 가던 그대로 8.8km를 더 가면 된다) → 51.2km 국립진주박물관 →52.1km 남해 이락사

 

한산대승첩과 친천량 대패가 교차하는 거제도

 

23전 23승, 그이는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이런 그이를 두고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 인물 가운데 세종대왕과 더불어 이순신에 대한 관심이 유독 많은 까닭이랍니다.

 

업적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도 크게 한 몫을 합니다. 사령관으로서 카리스마와 백성과 부하에 대한 애정, 부모에 대한 효성에 이르기까지가요. 여기에 더해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유적지 성역화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고 말았답니다.

 

통영타워에서 내려다보는 견내량.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가는 문화유산 여행길’은 통영 견내량(見乃梁)에서 시작됩니다. 통영에서 거제로 가는 길 끝에 두 다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옛 거제대교이고 또 하나는 거제대교입니다. 거제대교 입구에 그럴듯한 건물이 서 있는데 통영타워 전망대(입장료 1000원)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견내량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견내량은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좁은 해협으로 옥포해전과 한산대첩의 현장이랍니다.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조선 수군의 제해권을 확립하고 전라도 곡창을 지킨 전투였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왜군에 맞설 수 있는 뒷심을 갖추게 됐습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학익진으로 전투에 나선 조선 수군은 왜군을 전멸하다시피 만들었답니다. 작전은 여기 견내량에 있던 적선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견내량의 왜선 76척 앞으로 이순신은 13척만 보냈고 그것을 병력의 전부로 착각한 왜군은 곧바로 추격해 너른 바다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견내량. 통영타워에서.

 

리 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왜선을 포위하듯이 하면서 전투를 벌여 적선 47척을 깨뜨리고 12척을 나포했으며 9000명 가까이 죽였으나 조선 수군은 고작 3명이 전사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597년의 칠천도(七川島)는 엄청난 패배의 현장입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7월 16일(음력)에 조선 수군이 여기서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김완은 <해소실기>에서 처음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김완은 칠천량해전에서 조방장으로 나섰으나 왜군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돌아온 인물입니다.

 

칠천도는 2000년 1월 거제도와 연륙교로 연결됐습니다. 제대로 전투도 못해 보고 무너졌음은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됩니다. 1597년 7월 22일치 세 번째 기사에서 유성룡이 임금에게 아뢴 내용입니다.

 

칠천도 들머리 칠천량해전 안내비.

“칠천도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틈타 잠입해 있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해 포획하지도 못했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의 손해는 엄청났습니다. 거북선을 비롯해 판옥선 100척 남짓이 침몰됐으며 군사 2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됐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갖고 달아난 전선 12척이 전부였습니다. 반면 왜군은 100명 안팎만 죽거나 다쳤고 전선 피해는 없었습니다. 제해권은 왜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순신과 원균, 그 차이는 무엇일까

 

칠천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군중에 있지 않았습니다. 앞서 선조 임금은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과 교대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3월 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면서 신하들에게 처리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그러다 4월 1일에는 백의종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순신은 4월 27일 도원수 권율이 머물던 순천에 도착했고, 이어 도원수부가 있던 경남 합천 초계로 갔습니다. 칠천량해전 소식이 전해진 7월 18일, 해안을 둘러보고 대책을 세우겠노라고 길을 나서 7월 21일 남해와 하동 사이 노량에 도착합니다.

 

임금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삼으라고 명령한 날은 하루 뒤인 7월 22일이고, 이때부터 이순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는 등 제해권 회복을 위한 활동에 나섭니다. 칠천량해전 패배를 계기로 이순신은 복권됐습니다.

 

칠천량 바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지휘관으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균을 두고 이런저런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칠천량해전 당시 원균은 시기가 안 좋아 지금 싸우면 불리하다 했으나 권율이 곤장을 때리고 출병을 강요했다는 설이 그렇습니다. 일방적인 원균 매도는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은 분명히 짚을 수 있겠습니다. 원균은 칠천량해전에 앞서 7월 4일 부산포로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을 얻으러 가덕도에 정박했는데요, 이 때 왜군이 기습하자 군사가 400명 정도 남아 있는데도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1597년 2월 13일 가덕도에서 ‘병사도 아닌’ 초동(樵童) 1명이 맞아 죽고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바로 공격해 왜군 14명을 죽이고 17명을 다치게 함으로써 이튿날 곧장 돌려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원균과 이순신의 다른 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순신 불패 신화의 시작 옥포해전

 

옥포해전(玉浦海戰)은 이순신이 이룬 조선 수군의 첫 승전입니다. 1592년 5월 7일 경남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도도 다카토라의 왜군 함대를 무찌른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룬 전승 신화의 시발점입니다. 불패신화의 시작인 셈이지요.

 

옥포대첩기녕공원.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관.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탑.

 

옥포대첩기념공원 앞바다. 오른쪽으로 대우조선해양이 있습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옥포루.

 

옥포대첩기념공원 효충사.

 

효충사 이순신 영정.

 

이런 옥포해전을 기념하는 옥포대첩기념공원이 거제시 옥포 2동에 있습니다. 기념관은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떠 있는 판옥선 모습입니다. 옥포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아래 파도가 거친 방파제에는 지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기념공원보다 앞서 1957년에는 옥포만에 내려다보이는 당등산에 옥포대승첩기념탑이 들어섰는데요, 바로 여기에 대우해양조선이 들어섬에 따라 1975년 옥포정(1963년 세움)과 함께 지금 위치(대우해양조선 남문 옆 아양공원)로 옮겼다고 합니다.

 

옥포대승첩기념탑.

 

옥포정.

 

이순신 장군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거제도를 둘러보고 다시 통영으로 나갑니다. 빠른 길을 두고 남부 해안도로로 잡는 까닭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배부르게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남부해안도로를 타고 가며 보는 거제 바다.

 

수선화 같은 꽃으로 유명한 공곶이, 와현·구조라 해수욕장과 학동몽돌해수욕장을 지나 해안을 따라가면 잘 다듬어진 꽃길이 눈길을 끈답니다. 이른 봄 붉디붉은 동백 꽃길이 어느새 수선화 수국길로 이어집니다. 수채화 같은 광경이 펼쳐지는 일몰도 장관입니다.

 

여차몽돌해수욕장을 지나는 그 길에서 들르는 곳이 거제현 관아랍니다. 거제현 관아(巨濟縣 官衙)는 사적 제484호로 지정돼 있다. 거제기성관(巨濟岐城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은 조선시대 거제부의 행정·군사를 통괄하던 기관의 중심건물입니다.

 

기성관.

 

이 또한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고현성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거기를 폐성하고 건물을 거제현으로 옮겨 거제현 객사로 썼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초등학교 교실로 쓰였습니다. 배흘림기둥에 단순·소박하게 공포를 뒀고 전체 9칸에서 가운데 3칸은 지붕을 높인 반면, 양쪽 3칸씩은 낮춤으로써 눈으로 볼 때 역동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질청.

 

거제질청(아전들이 업무를 보거나 수령 자녀들이 공부하던 곳)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입니다. 조선 중기 지어진 우아하고 정중한 건축이라는데 ‘ㄷ’자 형태로 가운데 5칸은 대청이고 양쪽 5칸씩은 방들도 두고 있는 유별난 모습이어서 눈길이 절로 끌립니다.

 

이순신 시절부터 통제영의 고장이었던 통영

 

이렇게 해서 넘어온 통영입니다. 통영 중앙시장은 평일에도 북적일 만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답니다. 가까운 망일봉 자락에 통영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아름다운 이순신공원이 있습니다.

 

이순신기념공원에서 보는 바다.

 

이순신기념공원 장군상. 광화문 느낌이 팍 납니다.

 

중앙시장 앞 바다에는 통제영 거북선과 좌수영 거북선이 떠 있어 여기가 이순신의 고장임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저녁 6시 이전에 여기 오면 내부 모습을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통영 강구안 거북선들.

 

거북선 내부 모습.

 

중앙시장에서 조금만 가면 서호시장이 나오는데요, 중앙시장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랍니다. 서호시장 도로 건너편에 통영 여객선터미널이 있는데 이곳에서 한산도 가는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시간마다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를 오간답니다. 한산도에서 전남 여수를 잇는 뱃길(한려수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답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입니다.

 

왼쪽부터 제승당 수루 비각.

 

한산도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돼 있던 조선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앞바다에서는 한산대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로 유명한 ‘수루’도 여기 있답니다.

 

한산대첩 하면 누구나 학익진(鶴翼陣)을 떠올린답니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붙은 이름인데 육지전투에서 쓰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 형태라 합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한산도 앞바다는 배가 침몰됐을 때 헤엄쳐나갈 길이 없답니다.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없어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 알맞았답니다. 왜선은 속도가 빠르기는 했으나 서둘러 회전을 하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바닥이 뾰족했거든요.) 그래서 뒤쪽에까지 전선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승당.

 

제승당 내부.

 

 

왜군은 대부분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명 가량은 양식이 없어 13일 동안 바닷풀을 뜯어 먹다가 뗏목을 만들어 겨우 달아났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듯이,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힙니다.

 

한산대첩 이후 한산도에 들어선 제승당(制勝堂:사적 제113호, 당시 이름은 운주당運籌堂)은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됐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해군작전사령관실인 셈이지요.

 

1948년 초중학생 성금으로 세운 제승당 한글비.

 

제승당에는 이순신 영정이 있는 영당을 비롯해 한산대첩기념비, 유허비, 많은 송덕비와 사정(射亭)인 한산정, 수루 등이 있습니다. ‘ㄷ’자 모양인 바다 건너편에 과녁이 있는데 이런 사대는 전국에서 하나뿐이라 합니다.

 

한산대첩 승전지를 일러주는 거북등대.

 

배를 타고 바다를 오갈 때 거북 등대가 보입니다. 등대라 하지만, 뱃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한산대첩 승전지가 거기임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승당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수루는 이순신과 관련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에 담고 있는 장소랍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閑山島明月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하는 ‘진중시’의 탄생지이지요.

 

수루.

 

왼쪽 위에 진중시가 걸려 있습니다.

 

또 1491일치 난중일기 가운데 1029일치가 여기서 쓰여졌답니다. 이순신은 여기서 시도 많이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일컫습니다. 겉으로는 강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적인 그이가 고민과 갈등과 외로움을 여기 수루에서 시와 일기로 달랬을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제승당 충무사.

 

이순신 영정.

 

세병관(洗兵館:국보 제305호)은 선조 37년(1604)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리저리 떠돌던 통제영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완공한 그 뒤 1895년 모든 군영이 없어질 때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이었답니다. 앞면 9칸·옆면 6칸 크기로 더없이 웅장합니다.

 

 

세병관.

 

네 면이 모두 트여 있고 안쪽에도 막힌 데가 하나도 없이 기둥만 가지런합니다.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서울 경복궁 경회루, 전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평면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로 꼽힙니다. 소설가 박경리를 비롯해 등 통영 출신 유명 인사들이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학교 건물로 쓰였답니다.

 

통영 충렬사.

 

임진왜란 최후 전투 노량해전에 바쳐진 목숨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사적 제236호)는 세병관 가까이에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이랍니다. 선조 39년(1606)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고요, 현종4년(1663) 남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 현판을 하사받았습니다.

 

해마다 역대 통제사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충무공의 주된 활동 무대가 한산도를 비롯한 통영 근처였기 때문에, 이순신이 숨진 장소인 남해 관음포 이락파와 이곳 두 군데에 사당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영에서 고성 당항포까지는 30정도 걸린답니다.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 당항만은 이순신장군이 선조 25년(1592년)과 27년(1594년) 두 차례에 걸쳐 왜선 57척을 수장한 전승지입니다.

 

당항포해전관.

 

당항포 해전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지명이 몇몇 남아 있습니다. ‘속싯개’는 당항포 일대를 일컫습니다. 월이라는 기생이 왜군 첩자의 지도에다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넣어 당항만이 막힌 만이 아니라 트인 바다로 알도록 속였다는 전설에서 나왔습니다.

 

‘잡안개’라는 지명은 왜군을 잡았다는 ‘잡은개’에서 바뀐 말이라 합니다. 당항리 동쪽 ‘핏골’은 당시 피로 물들었다 해서고요, ‘도망개’는 왜군이 도망한 길목이라 해서고요, 당항만에 들어오는 좁은 해협을 이르는 ‘당목’은 닭의 목처럼 길고 좁다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충무공당항포대첩기념비.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옆에는 당항포관광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당항포해전관·거북선체험관·충무공디오라마관·승충사 등이 단장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토캠핑도 할 수 있는습니다.

 

이밖에 고성자연사박물관·고성수석전시관·공룡엑스포주제관·공룡캐릭터관·빗물체험관·공룡나라식물원·레이저영상관·생명환경농업체험관·한반도공룡발자국화석관·공룡콘텐츠산업관·수영함도 있습니다. 입장료(어른 6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가 헐한 편이 아니니까 만약 들어가게 된다면 빠짐없이 두루두루 돌아보는 편이 낫겠다 싶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에 있는,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랍니다. 특정 인물 중심 영웅사관이나 순국사관에 매몰되지 않고요, 임진왜란이 일본이 일으킨 참혹한 침략전쟁인 한편으로 조·명·일 국제전쟁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이순신의 격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남해 이락사(李落祠) 일대랍니다. 정식 이름은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으로, 사적 제232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바다라는 뜻으로 ‘이락파(李落波)’라 한답니다.

 

이락사는 순조 32년(1832) 왕명에 따라 세운 제단과 유허비·비각입니다. 바로 옆에는 남해군이 만든 이순신영상관이 있습니다. 이순신 관련 복합미디어 전문전시관이라 합니다. 임진왜란 발생 배경과 전개, 이순신 장군 중심 국난 극복 과정 등을 한·중·일 세 나라의 눈높이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영상관.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이며 월요일은 쉰답니다. 이순신은 여기 앞바다 1598년 11월 벌어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200척밖에 없는 이순신은 곱절이 넘는 500척 왜군 앞에서도 전투를 명령했습니다. 200척 넘는 왜군이 격파됐고 나머지 50척 남짓만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습니다. 이순신은 달아나던 왜적을 뒤쫓다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싸움이 지금 급하니 함부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 걸려 있는 ‘이락사(李落祠)’, ‘대성운해(大星隕海)’ 현판은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쓴 것입니다. 말 그대로 대성운해-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첨망대.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관음포 바다.

 

여기 관음포 앞바다는 저녁 해질 무렵이면 햇살을 받아 붉은 핏빛으로 물듭니다. 이락사에서 바다 쪽으로 500m 들어가 첨망대에 오르면, 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딱히 슬프지 않고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지만, 과연 사람살이에서 최선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의 가닥들이 머리 속을 떠다닙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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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출신 동학 최제우 도 닦으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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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남사리 사지 삼층석탑(현곡면 남사리 234-2)→0.9km 남사리북삼층석탑(남사리 313-4)→0.2km 남사저수지(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0.3km 수운최제우 태묘→1.6km 수운 최제우 유허비(탄생지)→2.3km 용담정→3.9km 나원리 오층석탑→0.8km 손순유허비→2.2km 오류리 등나무→1.1km 진덕여왕릉→8.4km 태종무열왕릉→3.1km 김유신장군묘→4.7km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석탑과 배호 노래비가 어우러지는 경주 남사리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리에는 유래를 알 수 없는 돌탑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사지 삼층석탑(보물 제907호)이고 또 하나는 북삼층석탑(경주시 문화재자료 제7호)입니다.

 

그런데 지금 놓여진 처지는 서로 다릅니다. 북삼층석탑은 있던 자리에서 옮겨와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이 조금 산만합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많이 망가졌지만 밑면에 새긴 5단의 받침은 비교적 선명한 편입니다.

 

남사리북삼층석탑.

 

사지 삼층석탑은 처지가 한결 낫습니다. 산중 절터에 남아 있어 자태가 훨씬 돋보입니다. 저 혼자로써만 잘나기가 힘든 사정은 사람이나 탑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지요. 하하. 두 탑을 돌아보면서 그런 느낌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사지 삼층석탑은 2단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양인데요, 지붕돌의 추녀가 살짝 들려 있어 날렵한 느낌을 주고요, 전체적으로 간략함을 추구하는 형식이라 9세기말 작품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남사저수지에서 만나는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수운 최제우의 탄생과 득도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길에 생각지 않은 재미와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배호는 요즘 표현으로는 ‘국민가수’가 되겠습니다. 5060세대들은 다들 배호에 열광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지요.

 

 

가슴을 울리는 중저음으로 대중의 감성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배호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신장염에 걸려 1971년 29살로 아깝게 요절했습니다. 활동하는 5년 동안 ‘누가 울어’, ‘파도’, ‘울고 싶어’, ‘안녕’, ‘0시의 이별’ 등 300곡 남짓을 남겼는데요 이 가운데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시작 시각에 이별한다는 노랫말 때문에 금지곡이 됐던 끔찍한 에피소드까지 있는 노래랍니다.

 

배호 노래비가 여기 들어선 까닭은, 그이가 부른 노래 ‘마지막 잎새’ 노랫말을 쓴 정귀문씨가 여기 출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배호가 숨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971년 7월에 음반으로 담겨 나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합니다.

 

이 빗돌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언젠가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여기 빗돌에 새겨진 노랫말은 배호의 당시 처지를 뜻하는 듯 무척 애절합니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싸늘히 부는 바람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을 걸/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일래/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경주 구미산 지구의 중심은 수운의 득도처

 

용담정 노래비에서 경주로 가는 방향 200m 지점 오른쪽에 조그만 도로가 있습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태묘(太墓)가 있습니다. 36살 득도하고 그 뒤 동학을 포교하다가 마흔 나이에 사도난정(邪道亂正)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묻힌 곳이지요. 둘레에는 그이와 고락을 함께했던 수운의 아내와 큰아들·둘째아들의 무덤이 함께 있습니다.

 

둘째아들 무덤.맏아들 무덤.

 

아내 무덤.

 

수운 최제우 태묘는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재우 유허비가 서 있는 탄생지, 그리고 득도를 했던 용담정(龍潭亭)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의 발상지가 되고 있습니다.

 

 

 

태묘를 들른 다음에는 탄생지를 먼저 가도 되고 득도처를 먼저 가도 좋습니다. 탄생지는 오른쪽에 있고 득도처는 왼편에 있습니다. 태묘에서 거리는 비슷하답니다.

 

현곡면 가정리 탄생지는 유허비만 우뚝해서 밋밋한 편입니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만든 안내판에는 “포덕(布德) 전 36년 후천 천황씨인 수운대신사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적혀 있고 “포덕 1년 저 앞 구미산 계곡의 용담정에서 만고없는 무극대도를 득도하시었으니, 이 겨레와 억조창생을 살리실 다시 개벽(開闢)의 천도(天道)를 밝히시었다”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천도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

 

그리고 “포덕 112년(1971) 8월에 빈 터만 남아 있던 이 곳에 정부의 도움과 교단의 정성으로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탄생지, 그러니까 생가터는 2012년 11월 현재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운이 태어나 살던 당시 집터를 짐작할 수 있는 자리들이 수북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허비 앞에서 만난 할아버지 한 분은 “이 동네 출신이고 지금은 경주시내 살면서 밭일을 하러 왔는데 (수운 최제우와) 같은 경주 최가”라며 “지금 발굴하고 있는데 얼마 안가 (생가) 복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멀지 않은 용담정으로 갑니다. 용담정은 그야말로 천도교의 성지입니다. 경주국립공원의 구미산지구의 중심에 해당되는데 여기에 드러나 있는 신라 관련 유적은 별로 없습니다. 들머리에서 용담정까지는 편안한 산길이랍니다.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먼저 눈으로 새길 것은 수운의 동상입니다. 도포를 입고 관모를 쓴 채 왼손에 책을 말아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절박한 무엇인가를 외치는 듯한 역동성이 썩 뛰어나 보이는 작품입니다.

 

 

 

다음으로는 용담정, 안에서 절을 하고 있던 젊은이가 나오더니 물이 졸졸 흐르는 바로 옆 골짜기로 향합니다. 그이는 한 바퀴 다 둘러볼 때까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하고 있었나 보나 짐작할 뿐입니다. 용담정에는 수운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수운 최제우는 보국안민을 고민하는 가운데 젊은 한 시절을 떠돌아다니며 유람을 했습니다. 용담정은 아버지 근암 최옥이 학사(學舍)로 쓰던 곳으로,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1860년 4월 5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시천주(侍天主) 계시를 받고 득도한 곳이라 합니다.

 

 

최제우가 이 해 포덕을 시작한 동학은 양반 지배집단의 부패와 세도정치가 더없이 심해지고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당대를 배경으로 탄생했습니다.

 

 

동학 하면 바로 인내천(人乃天

용담정에 있는 수운 영정.

)이지요. 사람을 한울 같이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실행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이 동등하지 못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당대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극복하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교세를 넓혀가던 최제우는 이단사교(異端私敎)로 좌도난정(左道亂政)과 요언혹민(妖言惑民)을 했다는 죄명으로 조정에 붙잡혀 1864년 대구성 남문 밖 관덕정에서 효수형(梟首刑)을 당합니다. 앞서 수운은 1863년 탄압을 예상하고 도통(道統)을 최시형(崔時亨)에게 넘기는데요, 최시형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최제우의 보국안민 사상을 이어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물론 3·1독립운동에까지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 간 동학의 발상지인 용담정 등등은 그에 어린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은 크지만 느낌이 조금 밋밋합니다. 그럼에도 의의는 100년 넘게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답니다.

 

 

최제우에 이어 최시형이 이끈 동학은 벼슬아치(官) 위주 정치에서 백성(民) 위주 정치로 바꾸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심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최제우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시대를 뛰어넘고 민주주의에 대한 단초를 자체 개발 제기한 우리나라 최초 근대인인 셈입니다.

 

그에게서 비롯된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는 올해(2012년)로 포덕(布德) 153년, 인내천과 사인여천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 중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이 유적을 이렇게 돌아보면,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절로 던지게 된답니다.

 

구미산지구에서 만나는 색다른 경주

 

이제는 경주 신라 나들이입니다. 그렇다고 경주 오면 다들 보는 그런 풍경은 사절이랍니다. 구미산 지구에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이 있는 것입니다.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높이 8.8m 매우 큰 돌탑으로 짜임새가 있고 비례 또한 아름답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세웠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100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색을 잘 간직하고 있어 청신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나원백탑’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이런 돌탑이 있었던 절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으니 그 또한 오히려 신기한 노릇입니다.

 

 

여러 사람한테서 칭송을 받아온 감은사지삼층석탑보다 덜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 돌탑에게서 받는 느낌은 그 힘이 감은사지석탑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문에 별다른 기대 없이 찾아갔다가 큰 감흥을 받고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기대 없음이 감흥을 키워 주는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문화재와 역사 유물이 넘쳐나는 경주지만, 여기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그런 보배랍니다. 이제는 손순유허비(경상북도 기념물 제115호)입니다.

 

신라 흥덕왕 때 효자로 칭송이 높았던 손순의 효행을 기리는 빗돌이라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 같은 내용을 현실에서 확인하니 참 느낌이 새롭습니다.

 

손순유허비각.

 

손순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손순의 자식이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습니다. 손순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식을 산에 묻으러 갔습니다. 묻으려고 땅을 파니 거기서 돌종이 나와 집에 가지고 와 울렸습니다. 소리는 당연지사 대궐에까지 크게 들렸겠지요. 임금이 사정을 알아보고는 집과 쌀을 내리고 아이를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사연까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순유허비각 옆 문효사.

 

세상의 근본이 효라는 말이 격세지감인 시대입니다. 윗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보다 아랫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몇 백 배 힘들지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만 좋은 자식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은 왜 거의 보이지 않을까요?

 

어버이는 돌덩이 취급을 하면서도 자식만큼은 금덩이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태에 우리 모습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유허비입니다.

 

경주 오류리 등나무(천연기념물 제89호)은 나이가 450살이라 합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자매의 이루지 못한, 그래서 슬프고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나무입니다. 자매가 죽은 자리에는 등나무가 생겼고요 청년이 죽은 자리에는 팽나무가 나왔습니다.

 

오류리 팽나무 한그루와 등나무 두 그루.

 

등나무 줄기.

등나무 두 그루는 팽나무 한 그루를 휘감고 오릅니다. 이 등나무의 꽃잎을 말려 신혼부부의 베개에 넣어주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하며, 사랑이 식어 버린 부부가 잎을 삶아 먹으면 사랑이 되살아난다고도 합니다. 전설이나 설화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께 놓고 견줘보는 무덤 세 자리 

 

이번 여행에서는 그럴 듯한 무덤 세 곳을 돌아보게 됩니다. 진덕여왕릉과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 무덤입니다. 무심히 보면 별로 다르지 않고 같은 무덤입니다. 그렇지만 저마다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지 생각하면서 돌아보면 재미가 더할 것입니다.

 

진덕여왕릉은 입장료가 없지만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장군묘는 입장료를 받습니다.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이랍니다. 진덕여왕릉은 구미산지구에 들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덕여왕릉.

 

먼저 찾아가는 경주 진덕여왕릉(사적 제24호).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뒤이은 신라 두 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勝曼)이며 마지막 성골 출신 임금이지요. <삼국사기>는 “타고난 자질이 풍만하고 고우며, 키가 일곱 자나 되고 손을 내리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를 받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7년 동안 반란을 진압하고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안으로 힘을 기르는 한편 대당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적절하게 견제했습니다. 진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지요.

 

진덕여왕릉에는 꾸밈, 장식이 별로 없습니다. <삼국사기>는 임금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사량부는 경주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요, 지금 있는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입니다.

 

진덕여왕릉 호석.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그런 양식이고요,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뒤늦은 것이라 합니다. 이를 들어 진덕여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경주에 있는 수많은 능들 가운데 주인을 정확하게 아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하지요. 진덕여왕릉도 그렇답니다.

 

여기 왕릉은 경주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좋습니다. 걸어 들어가는 둘레 솔숲도 멋지고 가로세로 지르며 이어지는 오솔길은 오히려 다른 어떤 왕릉보다 걷는 사람 기분을 좋게 해준답니다.

 

진덕여왕릉 가는 길 솔숲.

 

맑은 하늘 아래 내려쬐는 햇살, 어둑어둑한 솔숲 그늘에서 바라보니 무덤 자리가 더없이 환합니다. 한참 머물다 내려와도 좋은 자리였습니다.

 

진덕여왕릉에서 바라보는 솔숲.

 

진덕여왕릉을 떠나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어귀에 태종무열왕릉이 있습니다. 첫날 일정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저녁과 잠자리는 경주시내에서 마련하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진덕여왕에 이어 등극한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골 최초 임금으로 백제는 멸했으나 삼국통일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김유신 장군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으로 꼽힙니다.

 

또 우리 역사상 조종(祖宗)법 묘호를 받은 첫 임금입니다.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붙이는 이름인 묘호(廟號)에, 조(祖)나 종(宗)이 들어간 첫 보기라는 얘기이고, 이는 아주 대단하게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태종무열왕릉과 오른쪽 왕릉비각.

 

그런데도 그이가 묻힌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은 다른 무덤들보다 장식이 소박해 아랫도리를 두르는 호석(護石)조차 없답니다. 덕분에 왕릉을 둘러싼 울창한 솔숲이 한층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크기는 한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다고 합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구석도 있는 것 같습니다. 들머리 국도 4호선은 무열왕릉과 형산강 쪽으로 붙어 있는 후손들 무덤을 나눠주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만 둘러보지 거기까지 걸음하지는 않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은 신라 경주에서 주인공이 뚜렷하게 확인되는 유일한 왕릉이라 합니다. 바로 앞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새겨져 있는 덕분입니다.

 

이 빗돌은 맏아들 법민(=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661)에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고 글씨는 둘째 아들 인문이 썼습니다. 귀부는 조각이 섬세하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여섯 마리 용이 새겨져 있는 이수는 화려하고 웅장하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서 사람들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릉을 돌아보고 나서 가까이 있는 김유신 장군묘까지 둘러보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신하인 장군의 무덤이 어째서 임금인 왕릉보다 화려할까 하는 것입니다. 김유신장군묘(사적 제21호)는 밑둘레가 50m, 높이가 5.3m로 무열왕릉보다 규모는 작지만 장식이 대단합니다. 왜 그럴까요? 두 무덤을 한 데 놓고 이리저리 견줘보면 또 다른 상상력이 이렇게 발동됩니다.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유신은 진평왕부터 문무왕까지 신라 임금 다섯을 섬긴 인물입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보면 “(문무왕은 김유신의)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했으며 채색 비단 1000필 벼 2000섬을 주어 장사 비용에 쓰게 하고 군악대 100명을 보내어 주악하게 했으며 금산 언덕에 장사지내게 하고 맡은 관원에게 비석을 세워 공적과 명성을 기록하게 했다. 또 민호(民戶)를 정해 보내서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과연 이러했으니 무덤이 왕릉보다 더 꾸며졌다 해도 이상한 노릇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은 있지 않았을까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영향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김춘추와 아들 법민(=문무왕) 그리고 김유신이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김춘추의 영향력은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아들인 문무왕에게로 수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문무왕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무덤을 크게만 짓고 장식은 하지 않은 까닭이 되지 않았을까요?

 

반면 김유신의 영향력은 문무왕에게 바로 수렴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김유신의 영향력은 바로 여러 자손과 신하들에게로 미쳤을 테고요 그이들을 추슬러 임금에게로 향하게 하는 데 김유신 무덤 화려한 꾸밈이 소용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도 조금은 영향을 미쳤겠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을 만든 661년은 겨우 한 해 전 백제가 멸망했을 뿐이었고요 김유신이 죽은 673년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668년)한 뒤였습니다. 물론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이북으로 당군을 축출하는 일은 676년 마무리됩니다.

 

 

신하인 장군 무덤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보니 해 보는 생각들이랍니다. 김유신은 후대에 임금으로 추존된 하나뿐인 신하입니다. 사후 150년 즈음인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올렸습니다.

 

김유신 무덤은 십이지신상 호석(護石)이 가장 눈에 띈답니다.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데, 모두 문관 차림에 무기를 들고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살짝 비틀었습니다. 얕게 새겼지만 솜씨는 매우 세련돼 있다는 평을 받습니다.

 

 

경주에는 여기 말고 앞서 들른 진덕왕릉을 비롯한 다른 여러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어느 것도 김유신 장군 묘의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답니다.

 

마지막 들르는 데는 국립경주박물관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또 잘 알려져 있는 박물관입니다. 사철 내내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도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학생 아닌 사람들도 많이 오고 외국 사람들도 많이 들릅니다. 박물관의 대중화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어쩌면 여기 있는 유적·유물을 살펴보는 것만 해도 하루이틀 갖고는 모자랄 것입니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며 월요일은 쉽니다.

 

김훤주

 

※ 2012년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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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최대신문이 신문위기에 대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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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과 타성에서 벗어나라


프랑스에서도 종이신문의 발행 부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최대 일간지이며 지역신문인 <우에스트 프랑스>의 프랑스와 사이비에르 르프랑 편집국장은 “원망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며 이렇게 말했다.


“독자가 줄어드는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자기 지면을 되돌아봐야 한다. 결국은 콘텐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연 독자가 관심 있어 하는 유용한 정보를 싣고 있는지…. 독자의 관심은 바뀌었는데, 기자들의 관행적인 기사쓰기는 여전하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타성에 젖은 신문 제작으로 독자의 기대와 요구에 신문사가 더 이상 부응할 수 없거나, 신문사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독자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고 흥미도 떨어지도록 만들지 않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새로운 관심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문사의 규모를 떠나 구독자들에게 어떻게 정보를 주고, 관심을 끌 것인가가 중요하다. 독자의 관심에 대해 신문이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신문의 미래가 달려있다.”


우에스트 프랑스 르프랑 편집국장



독자의 달라진 관심을 파악하라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 신문사는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형식을 꾀하고 있다. 별도의 리서치 담당 파트가 직접 거리에서 신문을 구매하는 독자들을 만나 현안에 대한 생각을 묻고,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떤 내용이 신문에 실리길 원하는지 질문한다. 


기자들 역시 기사를 작성할 때나 인터뷰를 할 때 ‘과연 이것이 구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도록 하고 있다. 기자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고가 중요하다.


전문성을 높이고 알기 쉬운 기사를 써라


르프랑 편집국장은 정보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쉽게 쓰는 게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신문의 기조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정보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다르게 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관한 정보는 인터넷에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인터넷의 그런 정보를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그 중 하나를 택하더라도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하지만 정보 제공이 아니라 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


쉽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자가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기자 스스로 잘 모르는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르프랑 편집국장의 말이다.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자 인터뷰 기사를 쓸 경우, 그 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대학생이 봐도 모자라지 않고, 빵집 주인이나 정비사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한다. 브르타뉴 지방을 예로 들면, 이 지역민이 가진 고유의 음악, 춤, 언어들을 잘 알고 있는 전문 기자들이 있다. 만약에 그 지역 출신 가수가 유명 영화 삽입곡을 불렀다면, 그 기자가 그 가수에 대해서 자세한 기사를 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라


인물 사진 위주로 배치된 우에스트 프랑스의 지면.


신문에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실리기도 하는데, 이는 어떤 내용일까?


“일반인이 큰일을 겪었거나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가장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사를 발굴해야 한다.”


<우에스트 프랑스>는 인물사진 위주로 신문 편집을 하고 있다. 전 지면의 사진이 거의 모두 인물사진이었다. 왜 이렇게 지면을 짜는지 물어봤다.


“인물사진은 구독자와 인터뷰이(interviewee)간의 소통을 위한 우리 신문사의 방침이다. 말하는 모습, 또는 액션을 취하는 모습 위주의 사진을 통해 신문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인물과의 소통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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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어우러지는 최치원 신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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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운암영당→34.6km 화개장터 →6.4km 쌍계사 →2km(왕복 4km) 불일폭포 →5.2km 범왕리 푸조나무 →바로 시내 건너편 세이암

 

유·불·선에 두루 고루 능했던 고운 최치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을 두고 옛적부터 사람들은 신선이라 일러 왔습니다. 아마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성왕 8년(894년)에 시무 10조를 올리고 6두품으로서는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인 아찬(兒飡)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개혁안을 임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세상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이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곳곳을 떠돌았습니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그 뒤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말년을 마쳤습니다. 아무런 경계도 매임도 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돌았던 신선과 같은 그이의 자취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 있는 불일암 평상.

 

정말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어쩌면 후세 사람들이 그의 높은 이름을 빌려 빼어난 풍경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봄직은 합니다. 어쨌거나 최치원이 지금조차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데에는 유·불·선 모두를 아우르는 그이의 사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고운은 <계원필경(桂苑筆耕)>(886년)을 비롯해 많은 시문을 남겼습니다. 12살에 중국 유학을 가서 18살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했다. 25살 되던 881년에는 당시 반란을 일으킨 지 7년만에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점령했던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을 썼고 이 격황소서(檄黃巢書)가 명문으로 알려지면서 크게 이름을 얻었습니다.

 

또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시조라고도 하지요. 세상을 떠난 지 10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인 고려 여덟 번째 현종 시절 공자 사당에 모셔졌고(1020년) 널리 알려진 시호 문창후(文昌侯)도 1023년에 내려졌습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최치원을 일러 신라 말기 이름난 유학자(羅末名儒)라 했습니다.

 

최치원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당대 고승들의 비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최치원이 실제 지은 비문은 매우 많았겠지만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은 넷이라 합니다.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인데 조선 광해군 전후 철면(鐵面)노인이 최치원의 문집 <고운집(孤雲集)>에서 가려 뽑아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불교를 배우는 이들이 읽어서 익히는 독본 교과서가 됐을 만큼 내용이 그럴 듯하답니다.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초월산 숭복사지비,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등입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나아가 선종에는 공감하는 태도까지 보이지만, 사상 표현보다는 문장 수식에 더 많이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도교에 대해서도 나름 깊이 있게 알고 있었다고 말해집니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 원화(源花)를 다루는 기사에서 최치원이 지은 난랑비 서문을 끌어쓰고 있습니다. “나라에 심오하고 미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한다.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여러 백성을 교화했다. 들어가면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함은 공자의 뜻이요,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가 주장한 요지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함은 부처의 교화다.” 풍류=화랑도의 내용을 논하면서 유불선이 합일함을 짚은 대목이랍니다.

 

반면 그이가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두고는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신라에 고유한 임금 명칭인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을 쓰지 않고 죄다 ‘왕(王)’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기사에서 스스로 묻고 답했습니다. “행여 말이 야비해 족히 부를 것이 못 된다는 까닭일까? <좌전>·<한서>는 중국 역사 서적이지만 오히려 초나라 말과 흉노 말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으니, 이제 신라의 일을 기술함에 그 나라말을 남겨두는 것은 또한 마땅하다.” 한 사람이 모든 방면에서 두루 다 좋을 수는 없는 모양인가 봅니다.

 

사람들이 고운을 신선으로 여겼음을 일러주는 운암영당 영정

 

 

최치원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신선이라 여겼음을 알려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영당 ‘고운선생 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87호)입니다.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 떠나는 이번 여행길이 여기서 시작되는 까닭입니다.

 

운암영당.

 

 

오른쪽 위에 문창후최공지진영(文昌候崔公之眞影)이라 적혀 있는 여기 고운 영정은 문신상입니다. 대체로 신선으로 그려져 있는 다른 고운 영정과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오른편 문방구가 놓인 탁자와 왼편 촛대 받침을 두고 뒤로 구름 속 대나무를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비단 바탕에 당채(唐彩)로 그려진 이 전신상은 관복을 입고 검은 사모까지 쓰고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풍만한 느낌을 줍니다. 가슴 흉배는 화려하고 허리띠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대부와 유학자로서 엄숙한 풍모를 그려내 보였다 합니다.

 

운암영당 고운 영정. 국립진주박물관.

 

그런데 이 영정의 숨은 비밀이 2009년 밝혀졌습니다. 아울러 만들어진 시기까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이 조사한 결과였습니다. 오른쪽과 왼쪽 탁자와 받침이 그려진 부분에 X선을 쬐자 아래에 다른 그림이 확인됐습니다.

 

고운영정에 가려져 있었던 동자승.

 

동자승 둘이었습니다. 최치원을 신선으로 인식하고 그렸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래쪽에는 화기(畵記)도 나타났습니다. ‘건륭(乾隆)58년’ ‘하동 쌍계사’. 그린 사람과 시주한 사람 이름도 나왔습니다. 건륭 58년이면 1793년이랍니다. 당시까지는 1860년 제작된 청도 고운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66호)이 최고(最古)였습니다.

 

청도 고운영정. 해인사본 최치원입니다. 신선으로 그려져 있지요.

 

이 고운 영정은 옛날 선비들이 최치원을 단순한 문인이 아닌 신선으로 여겨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만합니다. 푸른 학이 노닌다는 지리산 청학동. 역사상 으뜸 문인으로 꼽히는 최치원이 청학동에 숨어들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진 이후 많은 선비들이 발걸음을 거기로 돌렸습니다. 그이들도 신선이 되기를 꿈꿨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치원은 오래 전부터 그들 마음 속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입니다.

 

영당 벽에 그려진 고운 행적들.

 

사람 발길이 잦지 않은 시골길 한 편에 자리잡고 있는 운암영당은 고즈넉합니다. 들머리에 길게 늘어서 있는 잘 자란 나무를 따라 올라가면 금방 영당이 나온답니다. 고운영정이 지금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여러 곳을 떠돌았습니다.

 

 

처음엔 쌍계사에 있다가 순조 25년(1825) 같은 하동의 화개 금천사(琴川祠)로 옮겼고, 고종 5년(1868) 금천사가 없어지자 하동향교로 옮겨온 다음 1902년 횡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왔습니다. 한 평생을 떠돌며 곳곳에 자취를 남겨 놓은 고운 생전 행적과 많이도 닮았습니다.

 

고운 영정을 횡천영당에서 옮겨왔다는 기적비.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길에 걸음을 붙잡는 곳이 화개장터입니다.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 전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합니다.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더덕·감자 등을 팔고, 전남 구례와 경남 함양 같은 내륙 사람들은 쌀보리를 팔았습니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도 생활용품을 지고 왔으며, 전남의 여수·광양이나 경남의 남해·삼천포(사천)·충무(통영)·거제 등에서는 뱃길로 미역·청각·고등어 따위 수산물을 싣고 왔습니다.

 

화개장터는 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이기도 하답니다. 체 장수 영감과 딸 계연 그리고 주모 옥화와 성기의 얽히고설킨 인연과 운명을 그려냈습니다.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져야 할 운명인지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운명인지를 묻는 작품이랍니다.

 

고운 최치원과 그의 삶은 운명에 순응한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극복한 것일까요? 느닷없이 떠오르는 조금은 뜬금없는 생각이기는 하지요.

 

화개장터 대장간.

 

화개장터도 옛날의 시골 정취를 온전히 느끼기에는 시절이 많이 변했습니다. 국밥집, 재첩국집, 주막이 늘어서 있고, 엿장수 엿판이나 대장간 앞에 관광객이 북적이지만, 지금 이 화개장터가 예전만 못한 것은 거기에 삶의 절실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씨로 사람을 맞는 쌍계사의 고운 최치원

 

여기서 쌍계사(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까지 이어지는 십리벚꽃길. 봄이면 넘쳐나는 벚꽃이 굉장하지만 여름에는 그 꽃 진 자리에 무성하게 내려앉는 그늘이 장관입니다.

 

이 길 따라 쌍계사에 이르면 고운 최치원의 자취를 또 만날 수 있는데, 진감선사대공영탑비(국보 제47호)가 그것입니다.(입장료 어른 2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삼법화상이 당나라에서 혜능스님(중국 선종의 제6조, 남종선 시조)의 정상(頂相=머리)을 모시고 와서 봉안함으로써 비롯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난야(蘭若)라고 할만한 조그맣고 한적한 수행처였으리라 짐작되는데요, 진감선사(774~850)가 들어서 절간 모습을 새로 갖추고 옥천(玉泉)이라는 현판도 올렸습니다. 840년으로 짐작됩니다.

 

쌍계사 들머리 일주문.

 

쌍계사 이름은 헌강왕 1년(886) 왕명을 따라 바꿨습니다.(같은 지역에 옥천이라는 이름을 쓰는 다른 절간이 있으므로 헷갈리지 말라고)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32년 벽암스님이 중창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슨 대단하기만 한 절간 같지만 사실은 푸근한 구석도 많습니다. 이 푸근함 때문에 찾는 이들이 더 많을는지도 모른답니다. 절간을 푸근하게 해 주는 가운데 하나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바로 옆 투박한 불상입니다.

 

쌍계사 마애불(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이 정식 이름인데 원래부터 여기 있었음직한 커다란 바위 한가운데를 그냥 널찍하게 파내고 거기다 새긴 불상입니다. 앉아 있는 모습인데, 어째 부처님 같이 보이지가 않는답니다. 어쩌면 이웃 아저씨 같기도 하고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찾아오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듯합니다.

 

쌍계 석문.

 

또 다른 푸근한 물건은 들머리 쌍계 석문(雙溪石文)이랍니다. 바위 둘에 제각각 ‘쌍계’와 ‘석문’이라 새겼는데, 보통 사람 눈에는 그다지 잘 쓴 글씨로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오히려 편하고 만만하게 보이지 싶은데요, 어쨌거나 최치원이 여기를 지나는 길에 지팡이로 썼다고 합니다.

 

오른쪽 바위에 적혔습니다.왼쪽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팔영루(八泳樓: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4호)도 그럴 듯합니다. 예전에는 건물 밑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막아놓고 다른 용도로 쓰기에 옆으로 돌아 오르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맛이 좋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듯한 굵은 기둥들은 손맛을 더해줍니다.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에는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영탑비가 살짝 비틀어진 각도로 놓여 있습니다. 깨어졌다 다시 맞춘 듯 얇고 가는 철판으로 둘러놓았습니다. 죄다 한자로 돼 있어 내용을 알기 어렵고요, 안내문도 설명이 풍성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200자 원고지로 50매가 넘는 상당히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보고픈 이는 보라고 번역문이라도 좀 붙여 놓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진감선사의 한살이를 적었는데요, 쌍계사 관련 내용이 많습니다. 선사가 쌍계사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이겠습니다. 드문드문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진감선사대공영탑비 탁본.

 

830년 당나라에서 귀국해 처음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머물다 걸어서 강주(지금 진주) 지리산에 이르니 호랑이들이 이끌어 화개 골짜기 삼법화상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 절간 모습을 갖췄습니다.

 

838년 민애왕이 진감선사한테 혜소(慧昭)라는 이름을 내렸고 몇 해 뒤 남령의 기슭을 얻어 선려(禪廬)를 지었습니다. 대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 돌아가며 물을 대고 옥천(玉泉) 현판을 걸고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웠습니다.

 

850년 정월 9일 새벽 “장차 갈 것이다.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했습니다.

 

진감선사대공탑비.

 

대공탑비 기록을 따르면 진감선사는 “평소 범패(梵唄)를 잘해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해 천상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범패를 했던 데가 팔영루라고 합니다. 바로 앞 섬진강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불교 음악인 어산(魚山)을 지었다고 팔영루라 한답니다.

 

쌍계사 뜨락.

팔영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서면 오른편에는 건물이 별로 없고 왼편에 많습니다. 금당 영역이랍니다. 혜능의 머리를 모셨다는 금당(육조정상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에는 육조정상탑이 있고 육조정상탑·세계일화조종육엽(六祖頂相塔·世界一花祖宗六葉)이라 쓴 추사 김정희 친필 현판도 있습니다.

 

이밖에 팔상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영주당·봉래당·청학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호) 등이 있습니다. 여기를 스님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동안거·하안거를 하지 않는 때에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쌍계사 경내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 가운데 최치원이 학을 불러 타고 날아갔다는 환학대(喚鶴臺)가 있는데, 여기서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잘 다듬어져 있는 길에서 신선이 살았다는 청학동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치원 이후 선비들은 푸른 학이 노닌다는 청학동을 찾아 다녔고 또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려 때 이인로는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다. 길이 매우 좁아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몇 리쯤 가면 넓게 확 트인 드넓은 곳이 나온다. 오직 청학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조선 선비 김일손은 불일평전을 청학동으로 전해 듣고 찾아가 봤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이는 16일 동안 지리산을 탐방했습니다. 서산대사는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에서 화개동천 동쪽 드넓고 푸르른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봤다고 했습니다. 쌍계사에서 불일전대(佛日前臺)에 오른 1600년대 선비 미수 허목 또한 그 남쪽 골짜기에 청학동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불일평전 휴게소.

 

옛 사람들은 불일평전이나 불일폭포 둘레를 청학동이라 여겼지만 몸소 들어가 보고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청학동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마음자리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불일폭포는 물이 풍부하게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60m 높이에서 2단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볼만하며, 절벽 표면이 화강암 폭포의 그것처럼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답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유두류산록>에 불일폭포와 청학동을 읊은 ‘영청학동폭포’ ‘청학동’이란 시를 남겼습니다.

 

불일폭포.

 

지리산에서 고운의 마지막 행적은 지팡이 꽂고 귀 씻기

 

불일폭포에서 돌아나와 범왕리 푸조나무(경상남도 기념물 123호)로 발길을 돌립니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에 있는 이 나무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꽂아 두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바로 이 푸조나무입니다.

 

범왕리푸조나무.

 

고운 최치원은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푸조나무는 여태 살아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일까요?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에 잘 견딘다는 푸조나무는 소금기 없는 산골마을에 자리를 잡고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서 있습니다.

 

범왕리 푸조나무. 옆에 정자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푸조나무가 내려다보는 마을 앞 냇가 건너편에 세이암(洗耳嵒)이 있습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이 여기서 너럭바위를 만나 넘쳐흐릅니다. 이 너럭바위에 한자로 세이암이라 적혀 있습니다. 바로 옆은 물론이고 맞은편 세워져 있는 바위에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지만 최치원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한 분은 “(최치원이) 손가락으로 이래 적었다 아이가. 그만큼 신통력이 있었던 기라”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썼어도 바위가 움푹 파일 만큼 도력이 세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쯤 되면 여기 사람들에게는 최치원이 어김없는 신선입니다.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습니다. 왼쪽 글씨는 무슨 사람 이름 같습니다.

 

최치원은 세이암에서 속세의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습니다. 여기는 물이 맑고 바위가 많아 게가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게가 없다고 합니다. 최치원 때문이라 하지요.

 

여기서 몸을 씻고 있는 최치원의 발가락을 게가 물었습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 게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왼편 너럭바위가 세이암입니다.

 

세이암.

 

비슷한 이야기는 경남 함양의 상림숲에서도 전해집니다. 상림은 고운 최치원이 태수로 있던 시절 만든 마을숲이지요. 어느 날 최치원의 어머니가 상림에 나갔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얘기를 들은 최치원은 곧바로 숲으로 달려가 “모든 해충은 다시는 이 숲에 들지 말라” 했고 그 때부터 뱀이나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최치원은 어째서 지금까지 신선으로 남아 있게 됐을까요? 그이가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이의 학문은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도교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남겨 놓은 자취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선이 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높은 학문을 가졌음에도 당대에 뜻을 펴지 못한 불우함에 대한 사람들의 동정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최치원을 마음에 품음으로써 최치원과 자기 또는 자기 부류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은근한 바람도 작용했을 듯 싶고요.

 

그렇다면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신선으로 섬김을 받고 있을까요. 이미 지금은 신통력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사라져 버린 세상인지라 마음에 신선으로 품음직한 대상은 아예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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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용회마을에 오면 서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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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용회마을은 산과 산 사이에 있습니다. 집도 그렇고 논도 밭도 그렇습니다. 그 두 산을 76만5000볼트 송전철탑이 가로지릅니다. 그렇게 가로지르지 말라고 남녀 구분없이 동네 사람들이 나와 싸움도 하고 건설 예정 현장에서 농성도 했습니다.

 

2005년 시작됐으니 올해로 10년째네요. 여태까지는 어찌어찌해서 송전탑 들어서는 것만큼은 막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 끝나고 중앙정부와 한국전력공사는 밀양시 힘없는 기초자치단체를 앞세워 이른바 '행정대집행'으로 농성현장에서 사람들을 들어내고 시설 장비 따위도 걷어냈습니다.

 

마을 고준길 어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찰이 버스로 마흔 대가 왔어요. 한 대에 마흔 명씩이면 모두 1600명이라. 경찰들이, 송전탑 짓는 데까지 산길로 한 시간쯤 되는데, 거기까지 한 줄로 나래비로 주욱 들어섰어요. 그러고는 들어내기 시작했지.

 

오른쪽 산마루와 왼쪽 산마루에 철탑을 세우고 그 두 철탑을 초고압송전선으로 잇습니다.

 

마을 들머리에서는연세 높은 어른들께서 막아섰고,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산길로 가파르게 올라야 가 닿는 송전철탑 예정지 농성 자리에서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른바 연대자)이 막아섰지만 그야말로 역부족이었어요.

 

용회마을 주민들은 다시 마을 들머리 너른마당에 투쟁하는 자리를 열었습니다. 6월 28일 그런 행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용회마을 주민들은 한전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회마을 주민들이 이길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는 송전탑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싸웠고, 앞으로는 송전철탑을 뽑아내기 위해 싸우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렇게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송전철탑을 받아들이는 순간, 용회마을 주민들은 여태 살아온 일생이 물거품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초고압 전선이 마을과 논과 밭을 가로세로 지르기 때문에 송전철탑이 들어서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세에 맞게 한전이나 정부가 보상을 해주면 되겠지만 한전과 정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말도 안되는 악법을 만들고는 그것을 내세워 소유자 동의 없이도 마구 남의 땅에 들어가 이런저런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또 한전은 여태 전국 곳곳에 송전탑을 세우면서, 개별 보상을 해 준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이른바, '선례(先例)'를 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밀양에서 주민 저항이 하도 거세니까, 개별 보상을 입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 금액이 203만원이었다 합니다. 용회마을을 비롯한 밀양 어른들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03만원 열 배 붙여서 줄 테니까 우리 사는 고향 마을 그대로 내버려 좀 다오."

 

 

물론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보상을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가 그렇다는 얘기일 따름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그 초고압송전선로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어마어마합니다. 전선에 껍질을 씌울 수 없을 정도고, 그 아래에서는 형광등을 세워만 놓아도 전기가 켜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민가나 논밭 등등 사람이 사는 지역에는 절대 들이세우지 않는 것이 76만5000볼트 송전철탑이고 송전선로라 합니다. 76만5000볼트 초고압 송전탑과 사람의 공존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밀양 주민들 집이랑 논과 밭은 그야말로 똥값이 됐습니다. 똥값으로라도 거래가 되면 그나마 나으련만, 아예 거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니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원래는 이렇게 송전철탑이 마을 가까이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몇 차례 설계 변경을 거치면서 지금처럼 됐다는 말씀입니다. 왜일까요? 송전철탑 세우는 데 드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랍니다. 마을 가까이로 오면 자재 옮기는 비용 등등이 적게 들기 마련이거든요.

 

사람이 죽어도 다쳐도 그런 따위는 모르겠고 돈만 적게 들여 전기를 서울 수도권으로 뽑아 가기만 하면 된다, 이런 얘기입지요. 한국수력원자력(주) 고리원자력본부에서 가동할 예정인 신고리 5호기와 6호기에서 나오는 전력을 수도권으로 공급하는 데 이 송전철탑과 송전선로가 쓰이거든요.

 

결국, 문제는 핵발전(=원자력 발전)이고 수도권 집중 그리고 지역 배제입니다. 지역의 피해를 바탕으로 서울과 수도권이 살찌는 그런 모양입니다. 이래서 밀양 용회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서울과 수도권이 잘 보이는 동네가 됐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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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은 어느 산 산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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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지었다는 한시가 있습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습니다. 제목이 秋夜雨中(추야우중)이랍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비 내리는 가을밤에’쯤이 되겠습니다.

 

내용 가운데 ‘만리(萬里)’를 두고 당나라 유학 시절 지은 표시라고도 하고, 전체적인 기교나 내용을 보고 귀국해서 나이를 많이 먹은 뒤에 지었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상관은 없겠습니다.

 

“가을 바람에 외롭게 읊으니(秋風惟孤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적구나(世路少知音)/ 한밤중 창밖에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을 만리를 달려가네(燈前萬里心)”.

 

자기를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랄까 씁쓸함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던 모양입니다. <삼국사기>의 이런 대목은 한시 ‘추야우중’의 정서와 바로 통합니다.

 

최치원이 썼다고 하는 하동 쌍계사 들머리 쌍계 석문.

 

“치원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 벼슬하다가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니,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운수가 막혀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 마음대로 유유히 생활하며, 산림 아래와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를 심고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이어서 그이가 노닌 데가 나옵니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剛州氷山=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동), 합주(경남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창원의 옛 마산 바닷가)의 별서(別墅).

 

하동 범왕리 푸조나무. 원래는 최치원이 지리산 들어가기 전에 꽂았던 지팡이였다 합니다.

 

그런 다음에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가장 나중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았는데, 동복 형인 중 현종 그리고 정현 스님과 도우를 맺어 쉬고 한가히 지내면서 노년을 마쳤다”고 했습니다.(그래서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 보자면 최치원은 지리산보다 가야산과 더 가깝습니다.)

 

이런 최치원이 신선이 됐다는 장소로 주로 두 곳이 꼽힙니다. 지리산 쌍계사와 가야산 해인사랍니다. 합천 해인사 학사대(陜川 海印寺 學士臺)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호)는 장경판전 옆에 있습니다.

 

학사대 전나무.

 

최치원이 해인사 대적광전 옆에 지었다는 정자가 바로 학사대입니다. 최치원이 여기에다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전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골짜기에는 농산정(籠山亭)도 있는데 일대를 두고 최치원이 지은 한시가 있습니다.

 

“첩첩 바위 사이 미친 듯 내달려 겹겹 쌓인 산을 울리니(狂奔疊石吼重巒)/ 지척 사람 말조차 구분하기 어려워라(人語難分咫尺間)/ 시비 소리 귀 닿을까 늘 두려워(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물로 산을 통째 두르고 말았다네(高敎流水盡籠山)”.

 

농산정. 최치원이 여기서 세상을 등졌다는 빗돌도 있습니다.

 

농산정.

 

고운이 여기에 갓과 신발을 벗어두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하지요. 게다가 해인사에는 최치원을 신선으로 표현한 고운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북 청도 각남면 일곡리 경주 최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해인사 나한상 가운데 섞여 있었는데 일본군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옮겨놓았다고 한합니다. 이쯤 되면 가야산과 해인사도 지리산과 쌍계사 못지 않게 고운 최치원의 입산처라 해도 될 만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고운 영정.

거기서 신선이 됐다는 얘기까지는 아니지만 고운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있는 장소는 이밖에도 아주 많습니다. 부산 해운대와 마산 월영대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대충 주워 삼켜도 경남 합천 자필암, 경남 양산 임경대·경파대 경북 문경 야유암, 경북 봉화 치원봉·고운대 등이 있습니다.

 

김훤주

 

※ 2012년 출판된 문화재청 비매품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지리산 자락 어우러지는 최치원 신선길(http://2kim.idomin.com/2632)'과 함께 읽으시면 이해하시기가 좀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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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희생자 창원위령제에 모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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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64주기 제7차 창원지역 합동위령제와 추모식이 7월 5일 오후 1시부터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천주교 마산교구청 1층 강당에서 열렸다.


오랫만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우선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다. 그는 2005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점심 후 창동골목을 둘러보고 한 커피점에서...


그와는 2000년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뜻을 모으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단체를 함께 했다.


위령제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김동춘 교수.


김동춘 교수 사진 한 장 더....


위령제에서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정동화 부회장.


정동화 유족회 부회장이다. 그는 2001년 경남도민일보에서 주최한 '민간인학살 유족 증언대회에 나와 당시 창원시의원 신분으로 자신이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다.



노치수 유족회 회장이다. 그 또한 2001년 경남도민일보 증언대회에 나와 아버지 노상도의 학살을 증언했다. 이후 2009년 유족회를 만들고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이 분은 민간인학살 임실 유족이신 박봉자 여사다. 제노사이드학회 활동도 함께 했고, 2009년에는 명동성당 집회에도 함께 했다.


노용석 박사.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있었고, 지금은 부산외대 교수로 있는 노용석 박사다. 이날 위령제 사회를 맡았다.



김동춘 교수 뒤로 전술손 여사도 보인다. 전 여사는 1950년 누명을 쓰고 학살된 해군장교 전호극 소령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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