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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글쓰기 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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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서울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하는 ‘수습기자 기본 교육’에서 제가 한 강의를 맡아 했습니다. 거제신문·합천신문·옥천신문 등 기초자치단체 단위 지역 주간신문 기자 12명이 제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주제는 ‘지역밀착형 기사 쓰기’였는데요, 생각해 보니 참 난감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할 때 ‘지역밀착형 기사’는 있어도 ‘지역밀착형 기사 쓰기’는 없거든요. 같은 취재를 했는데, 이렇게 쓰면 지역밀착형 기사가 되고 저렇게 쓰면 지역밀착형 기사가 되지 않고 해야지 ‘글쓰기의 지역밀착성’을 얘기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는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글쓰기 방법론’에 해당하는 내용을 한 시간 정도 말씀드리고, 나머지 두 시간은 ‘지역신문의 지역밀착’에 대해 말하기로 정했습니다. 지역밀착 여부와 상관없이 글쓰기에 대한 제 생각을 이렇게 한 번 정리해 올려봅니다.

 

1. 스트레이트 기사 쓰기는 그래도 중요합니다

 

스트레이트 기사 쓰기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역삼각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앞에 세우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것은 가장 뒤에 세운다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또 있습니다. 경제적인 글쓰기입니다.

 

보통 스트레이트 기사를 두고 ‘무미건조하다’고들 하지요. 달리 말하자면 군더더기가 없는 것입니다. 명사·대명사·동사·형용사가 대부분이고 이들을 꾸미는 부사 따위는 조금뿐입니다.

 

집을 짓는 데 견줘보면 이렇습니다. 스트레이트 기사는 기둥과 들보와 담벽과 지붕만 있는 집입니다. 아무 장식이 없습니다. 장식·꾸밈이 없는 글쓰기가 바로 스트레이트 기사 쓰기입니다. 이렇게 먼저 기초를 익히는 편이 좋습니다.

 

기본 뼈대와 거기에 더해져도 되거나 말거나 하는 살점을 잘 구분해 발라내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능력도 커집니다. 요점을 똑바로 파악하고 나면, 그 요점을 효과적으로 꾸미고 강조하는 방법은 손쉽게 터득되고 눈에도 잘 뜨입니다.

 

2. 하나에 하나씩만 담아도 족합니다

 

욕심은 언제나 어디서나 금물(禁物)입니다. 문장 하나에는 한 가지 팩트만 담으세요. 글 꼭지 하나에는 한 가지 주제만 담습니다.

 

대부분 독자들은 두어 가지가 뒤섞인 문장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끈질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글 한 꼭지에 섞여 있는 여러 가지 주제를 제대로 찾아내어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쓰는 본인 자체가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한 문장에 서너 가지 팩트를 담으면서 그것을 보기 좋고 알기 쉽게 제대로 차려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 글 한 꼭지에다 여러 주제를 담으면서 서로 헷갈리지 않게 하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글을 읽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피곤하게 작용하는 여러 주제·사실 섞어쓰기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좋은 점도 있습니다. 글이 늘어지지 않습니다. 짧아지고 탄탄해집니다. 그러면 글에서 저절로 힘이 생깁니다.

 

강의하기 전 강의실 모습.

 

3. 글을 쓰는 과정이 바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글을 쓰겠다는 얘기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설가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인 나를 끌고 다닌다”고요. 처음 시작할 때 지향이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풀려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고백입니다.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기사라면 글을 써가면서 생각도 더불어 정리하는 식으로 해야 좋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이들 써먹는 비유지만, 생각을 먼저 정리하고 나서야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은, 헤엄치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글 끄트머리에 빠져나오면서 적어야 할 글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글 쓰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의 장벽, 생각에만 있는 장벽일 따름입니다.

 

들어가는 한 마디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를테면, “그이는 자신의 결정을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들어가는 글 한 마디를 끝까지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써나가면서 보고 적당하지 않거들랑 버리면 됩니다.

 

어쩌면 오히려 버려야 합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만 소용이 됩니다. 강을 건넌 다음 걸을 때 뗏목을 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시작이 끝까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은 생각 또는 무의식의 감옥입니다.

 

4. 취재한 내용으로 먼저 글을 쓰고 빠진 부분은 나중에 더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취재는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설렁설렁 취재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리 꼼꼼하게 취재해도 비는 구석은 있기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취재는 똑바로 하되, 지금 글을 써야 한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확보해 놓은 것을 갖고 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기가 취재하지 못해 비는 구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럴 경우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거든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면 됩니다.

 

간단하게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부분은 비워두고 계속 써 나간 다음 마지막에 확인하고 그에 걸맞게 내용을 채워 넣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자기가 취재한 내용이 얼마나 모자라는지 잘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먼저 완벽한 취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제 경우에 비춰볼 때, 오히려 취재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말하자면 기사를 쓰는 데 필요없는 내용까지 취재를 하는,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때가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먼저 써놓고 보면 그 기사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꼭 보충 취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가늠이 될 때가 많습니다. 시간을 아끼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방법론이라 하겠습니다.

 

5. 독자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면 좋습니다

 

글쓰기는 소통의 수단입니다. 물론 자기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런 자기 표현조차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글을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언제나 머리 속으로는 자기가 쓰는 글을 읽어줄 독자의 눈을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 쓰는 본인은 알겠는데 읽는 사람은 전혀 모르거나 제대로 알 수 없는 글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이를테면 글을 쓰는 본인에게는 당연한 전제라서 생략을 했는데, 글을 읽는 독자로서는 그 생략된 부분이 반드시 알아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편한 글이 나올 개연성이 높아집니다. 끊임없이 독자를 의식하다보면 절로 독자랑 눈높이가 맞춰집니다. 독자가 무엇을 잘 모를까, 무엇을 궁금스러워할까 등등을 생각하다보면 묻고 답하기 그리고 더 나아가 독자와 가상 대화까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즘 가장 좋은 글쓰기로 꼽히는 ‘스토리텔링’으로까지 어렵지 않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6. 사진은 이제 필수, 꼭 곁들여야 합니다

 

지금은 대세는 비주얼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신문(기사)을 읽지 않고 봐 왔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커지고 또 뚜렷해졌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만큼은, 주인공은 글자가 아니라 사진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글자는 조역일 따름입니다.(하지만 아주 중요한 조역입니다.) 그러므로 취재를 할 때부터 사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사진 찍는 방법을 일러드릴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기사에서 담고자 하는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도록 찍고, 나아가 그런 내용을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진이 주재 하나만 담아서는 밋밋합니다. 저는 주재와 부재를 제각각 하나씩 담기를 권합니다. 말하자면 인물 기사여서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그 인물을 앵글 한가운데 덩그마니 놓고 찍어서는 인물조차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럴 듯한 배경으로 받쳐줘야 마땅할 것입니다.

 

7. 반드시 퇴고를 합니다

 

문인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지만 아주 글을 잘 쓰는 사람 한 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문학적·예술적으로 잘 쓰는 글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그런 글입니다.

 

그이 동료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느냐?’고요.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글 쓰고 나서 스무 번을 고쳐.” 어쩌면 글은 들여다볼 때마다 고칠 데가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정확하고 세련된 표현은 생각하면 할수록 샘솟듯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강론을 아주 잘 하기로 유명한 신부(神父)가 있었습니다. 그 신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강론 원고를 쓴 다음에는 꼭 어머니에게 읽어드리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잘 모르겠다고 하면 고쳐 썼습니다.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고 일러주는 대목은 손질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잘 알아듣겠다고 하면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그 신부는 차선책으로 자기가 어머니가 돼서 스스로 읽고 고쳤습니다. 어머니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머니한테 어려운 표현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고 따졌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사람들이 참가한 수습기자들을 모아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입니다.

8. 한 번 정도 되풀이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입니다

 

옛날에는 되풀이가 쓸데없는 노릇이기만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람들은 대개 기사든 아니든 글을 꼼꼼하게 읽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는 그대로 제목만 보고 넘어가기 일쑤고 어쩌다 읽더라도 어지간해서는 낱낱이 따져 읽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글을 잘 썼다 하더라도 끄트머리에서 한 번 되풀이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독자들은 선명한 인상이나 기억을 갖지 못한 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9. 상투(常套)를 쓸 때는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상투’는 늘 쓰는 투입니다. 상투가 상투가 된 데에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목불인견(目不忍見)’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이라는 뜻이지요.

 

처음에는 이 표현이 산뜻했을 것입니다. 어떤 참상이 있다 했을 때, 참상 그 자체를 그려보이는 것보다 이렇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낱말 또는 표현이 이런 산뜻함이나 효과를 갖춰야만 상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투는 되도록 쓰지 않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상투를 제대로 골라서 알맞게 써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투라 해도 무슨 피해야 하는 나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투적(常套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조지자면 ‘뻔하다’는 얘기입니다. 처음에는 나름 산뜻함도 있고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표현이다 보니 자주 쓰이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주 쓰이다 보니 원래 갖고 있던 효과라든지 산뜻함은 퇴색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뻔한 말 뻔한 사연은 사람을 질리게 하고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듭니다. 지금 쓰려고 하는 ‘상투’가 ‘상투적’이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10. ‘갖다’ 따위 낱말은 적게 쓸수록 좋습니다

 

기자회견을 가졌다, 경기를 가졌다, 행사를 가졌다, 협약식을 가졌다, 수료식을 가졌다, 발대식을 가졌다, 견해를 갖고 있다, 시간을 가졌다, 활동을 가졌다, 간담회를 가졌다, 피로연을 가졌다…….

 

영어 take 또는 have에서 나온 표현들입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주범이 일어였다면 지금은 영어입니다. ‘가졌다’는 다른 낱말들이 많이 쓰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획일화가 되면서 다양성을 빼앗습니다. 우리말 곳간이 갈수록 비게 됩니다. 얼핏 생각해도 이렇습니다.

 

‘행사(경기)를 치렀다’, ‘피로연을 베풀었다’, ‘시간을 누렸다’, ‘생각하고 있다(또는 여기고 있다)’. 시간에 쫓기든 어쨌든 어쩔 수 없이 이런 영어식 또는 일본식 표현을 쓸 때는 쓰더라도, 좀더 나은 다른 표현은 없을까 하는 고민까지 거두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김훤주

 

※ 초보 블로거를 위한 글쓰기 십계명(http://2kim.idomin.com/2204)과 함께 읽으시면 좀더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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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알려졌어도 또 가고픈 함양 화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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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저녁 7시 20분 즈음에 했던 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다들 잘 아는 장소이고 누구나 손쉽게 즐기는 골짜기이기는 합니다. 7월 하순 8월 초순 나들이하시면 너무 붐벼서 제대로 누리고 즐기지 못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조금 조절하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이번 여름도 찜통 같이 무덥겠구나 생각하며 보니까 한창 무더위는 그래도 내달 15일까지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태 겪었던 여느 해보다 무더위에 시달리는 기간이 좀 적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는 이번 주말도 좋고 아니면 좀더 기다렸다 휴가철이 무렵 해서 들러도 좋은 데입니다.

 

함양 화림동 골짜기입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계곡으로 물도 풍성하고 바위들 하얀 빛도 대단하고 둘러싼 산과 들도 빼어납니다. 이런 데를 골라서 옛날 사람들은 정자를 앉혔습니다. 꽃 화자 수풀 림자를 써서 화림동인데요, 그렇다고 꽃 피는 봄만 좋은 것이 아니라 네 철 모두 아름답고 그럴 듯합니다.

 

 

여기를 일러서 팔담팔정(八潭八亭), 여덟 개 여울이 있었고 거기마다 정자를 들여앉혀 정자도 여덟 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위에서부터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셋이 남았고 가장 아래쪽에 있는 농월정은 2003년 10월 까닭 모를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아 있는 세 군데 정자와 취근 불타버린 농월정 가운데 퍼질고 앉아 놀기 가장 좋은 데를 꼽으라면 누구나 농월정을 꼽습니다. 물이 많고 시원할 뿐만 아니라 골짜기 이곳저곳 자리잡은 바위들도 아주 널러서 그야 말로 두루 나대도 걸리적거리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농월정. 함양군 사진.

 

더욱이 둘러싼 나무숲도 괜찮습니다. 물가에 나와 놀다보면 새까맣게 살갗이 타기 쉬운데요, 여기는 그늘과 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그토록 새까맣게 그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하고는 뚜렷핫게 구분되는 장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농월정 물가를 따라 먹고 마시는 음식점이 여러 개 잇달아 있다는 점입니다. 풍경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음식점이 썩 반갑지는 않겠지만, 적당하게 놀고 즐기려는 대다수 탐방객들에게는 이런 음식점들이 그다지 나쁜 존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고 쉬고 할 수 있는 물과 바위와 숲과 그늘과 음식점이 공존하는 농월정 일대입니다. 대신 번잡함은 피할 수 없습니다.

 

동호정.

 

농월정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넓이에서만 조금 빠질 뿐 물과 숲의 아름다움과 배어남은 조금도 쳐지지 않는 데가 앞에 말씀드린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입니다.

 

가장 높은 데 있는 거연정은 바로 아래 군자정이나 좀더 아래 동호정과 마찬가지로 도드라져 있지는 않습니다. 자연석 위에 일부는 주춧돌을 깔고 기둥을 세운 다음 건물을 세우고 지붕을 올렸습니다. 이런 정자를 둘레 우람한 나무들이 감싸고 덮습니다.

 

이렇게 감싸안은 데로 들어가면 멋진 풍경이 새삼 펼쳐집니다. 물길이 조각한 바위들이 하얗고 가볍게 빛납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을 이어 서 있는 위쪽에서부터 물은 촬촬촬 소리내어 흐르고 그 옆 한 쪽은 고여 있습니다. 거연정은 바깥에서 보는 모습도 괜찮지만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눈맛이 더 좋습니다.

 

군자정에서도 거연정과 같은 느낌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길 가면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계곡과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면 거연정이든 군자정이든 옛날 사람들이 거기 정자를 앉힌 까닭이 저절로 알아지는 그런 명당입니다.

 

동호정 앞 너럭바위.

 

동호정은 거연정이나 군자정에 견줘 정자도 좀더 크고 그럴 듯합니다. 골짜기 너럭바위와 물이랑 어울리는 품이 한층 격식이 있어 보입니다. 거연정이나 군자정이 어쩌면 평상복 차림 같은 느낌을 준다면 동호정은 제대로 차려 입은 정장 느낌을 주는 그런 정자입니다.

 

동호정 마주보는 개울은 여울져 흐릅니다. 개울을 마주보며 서 있는 소나무는 은근히 씩씩해 보입니다. 개울과 소나무를 아우러는 너럭바위는 또 엄청나게 너릅니다. 한 100명은 한꺼번에 들어서도 넉넉한 그런 크기입니다.

 

개울을 건너면 또 솔숲이 이어집니다. 흘러가는 개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소나무숲입니다. 이런 솔숲에 들어가 앉으면 한여름에도 더위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틈이 난다면, 가까운 운곡리 은행마을에 있는 운곡리 은행나무를 한 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엄청납니다. 1000살 은행나무를 마주하는 감흥은 또 더할 나위 없습니다. 마을 가운데 떡 자리잡았는데, 사람들이 영역을 마련해 울타리까지 치는 정성까지 들일 정도로 잘 생겼고 씩씩하고 싱싱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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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의 일상이 된 '받아쓰기' 그 연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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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정확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을 익히기 위해 선생님이 불러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학습방법이다. 말의 내용에 대한 의심은 필요 없다. 그저 잘 받아쓰기만 하면 100점을 얻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론보도가 그랬다. 그러나 결과는 빵점이었다. 언론 역사상 길이 남을 대형 오보가 쏟아졌다. 300여 명의 원통한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의 첫 오보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였다. 경기도교육청과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한 결과였다. 한국 언론의 참사였다.


문제는 이런 ‘받아쓰기 오보’가 세월호 참사에서 어쩌다 생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처럼 만천하에 밝혀진 대형 오보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는 ‘받아쓰기 오보’는 한국 언론에서 그냥 비일비재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사실(fact)을 보도한 기자가 오히려 이상한 놈 취급을 받는 일도 생긴다.


@표 경남도민일보


'받아쓰기'는 권력에 굴복해온 비겁한 역사에서 비롯


1991년 10월 10일이었다. 당시 진주시 하대동에 있던 진주전문대에서 생긴 일이다. ‘운동권’ 후보와 ‘비운동권’ 후보가 맞붙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 쪽의 천재동(당시 24세) 후보가 200여 표 차이로 당선됐다.


사건은 개표가 마무리되기 직전 발생했다. 사건을 감지하고 기자가 진주전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 학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 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렇게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 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당시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그 이전에도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 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남학생)들로부터 “강간을 해버리겠다” “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으로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33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이들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 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측 천재동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 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경찰 불러주는대로 '받아쓰기'한 한국의 모든 언론


이처럼 사실(fact)관계만 놓고 본다면 경상대생 33명이 다수의 진주전문대생들로부터(집단폭행), 강의실에 감금당한 채(감금폭행),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특수폭행)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즉 피해자는 33명의 경상대생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운동권’이라는 것, 남의 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피해자라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다만 쇠파이프(사용해보지도 못했지만)를 천막용 가방에 넣어 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쌍방폭행’ 정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경찰의 발표를 받아쓰기한 언론보도.


하지만 경찰은 피·가해자를 바꿔치기하여 경상대생 19명을 폭력 혐의로 구속했다. ‘타 학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 시작한 언론이었다. 어떤 언론도 ‘사실 확인’은 커녕 ‘취재’도 하지 않았다. 1991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를 보자.


“10일 오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 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 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기사는 짧은 2개의 문장 대부분이 오보로 구성돼 있다. 사실보도의 구성요소를 6하원칙이라고 할 때 이중 사실과 부합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언제(when)에 해당하는 ‘오후 5시반경’이 틀렸다. 학생들 간에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4시께였다. 또 어디서(where)에 해당하는 장소도 틀렸다. 경상대생들은 개표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개표장과 다른 101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who)에 해당하는 난동과 폭력을 주체도 오히려 뒤바뀌었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이다. 주체가 바뀌었으니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른 행위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왜(why)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운동권후보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천재동 후보의 나이도 안맞다. 그는 1학년이었으나 늦깎이 입학으로 실제 나이는 24세였다.


이처럼 사실관계에서부터 오보 투성이인 기사가 당시 모든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조선·동아·중앙 등 전국일간지의 경우 취재기자가 진주에 없어 일방적인 경찰 발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지에 많은 취재기자를 두고 있는 지역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경남일보> <경남신문> <경남매일> 등 3개 지역일간지도 모두 경찰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노보> 10월 21일자는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14일. 이날 진주경찰서는 ‘지리산결사대’ 관련 보도자료를 진주 및 경남도경 기자실에 보냈다. 첫 보도 때 이미 단추를 잘못 끼운 연합통신 진주주재기자가 또다시 확인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해 본사로 송고했다.(…중략…) 이날 오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연합통신 기사를 서비스 받은 이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 보냈느냐’는 투의 전화를 해당지역에 했다. 이에 따라 경남주재 중앙지 기자들은 별다른 확인과정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첫 보도 겸 ‘결사대’ 속보를 작성해 본사로 송고했다.”


이에 따라 전국일간지와 양 방송사 등은 ‘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 등 특집 해설기사 등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언론의 앵무새 같은 보도에 힘입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이들 경상대생 18명에게 대부분 폭력혐의를 인정, 유죄선고를 내렸다. 물론 진주전문대 학생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던 경상대생들은 10년 후인 2001년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게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했던 언론은 사과하지 않았다.



기자는 '묻고 확인'하는 직업인데... 


이뿐일까? 아니다. 79년 부마항쟁, 80년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 때도 그랬다. 항쟁이 승리하면 슬그머니 논조를 바꾸지만, 진압되면 그냥 쌩까고 넘어가는 게 언론이다.


진주의료원 폐업, 밀양송전탑 사태에서도 이런 언론의 ‘발표저널리즘’ ‘받아쓰기 보도’는 이어지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진주의료원 노조를 ‘강성 귀족노조’라 매도하면서 “1999년에는 노조가 원장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기’했다. 우리가 당시 기록과 취재노트를 바탕으로 확인해보니 오히려 원장이 주먹을 휘둘러 간호사 노조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홍준표 경남지사의 주장을 확인해본 결과 폭력의 가해자는 오히려 원장이었다.


이처럼 누군가의 발표, 누군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건 언론이 아니다. 기자가 아니라 한글을 아는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름 많이 배웠다는 기자들이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까? 정말 바보여서 그런 걸까?


내가 보기엔 앞의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력에 굴복하고 순치되어온 비겁한 한국 언론의 역사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국 언론인 이지 스톤의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자라면 ‘저 말이 과연 사실일까’라는 의심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해야 한다. 경기도교육청이, 안전행정부가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를 발표했을 때, 기자라면 응당 ‘어떻게 구조했는지, 구조된 학생들은 어디 있는지’를 묻고 확인했어야 했다.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소식지 '산재없는 그날까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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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한 여름에 우박 세례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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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진흥재단 부산지사에서 마련한 포토저널리즘 연수를 마치고 허귀용 기자의 승용차에 얹혀 마산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 1시쯤 '남강 오백리' 기획취재를 떠난 권영란 기자의 페이스북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함양군 용추계곡 쪽이었는데, 취재를 포기해야 할 만큼 많은 비였다.


이어 진주에 사는 이우기 경상대 홍보실장이 "진주에서 보니 비봉산 뒤 지리산 쪽 새카맣습니다"라는 댓글을 올리는가 싶더니, 곧바로 "진주도 드디어 (소나기) 시작"이라는 글과 사진이 올라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려니 생각했다.


@권영란 기자의 페이스북 사진


@이우기 실장의 페이스북 사진


그런데 허귀용 기자의 차가 부산 사상구쯤에 이르자 앞 쪽에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폭우였고 승용차의 천정에 작은 돌이 부딪치는 듯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우박이었다. 얼음 쪼가리가 앞 차창을 때리는 게 선명히 보였다.


창원 쪽에서 밀려오는 먹구름.


잠시 계절을 착각했다. 지금이 겨울이었나? 아니었다. 여름이었다. 그동안 우박 내리는 걸 가끔 본적은 있지만, 한 여름에 이렇게 굵은 우박이 내리는 건 처음 봤다. 무서웠다.


그냥 단순히 이상 기온 탓이라고 여기기엔 뭔가 찜찜한 불안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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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관심보다 독자의 관심부터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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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인쇄 매체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며, 지역신문이 특히 지역주민의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지난 2014년 6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간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를 대상으로 '프랑스 지역신문 디플로마'를 진행했고, 여기에 제가 동행한 바 있습니다. 공공 목적으로 이뤄진 연수였던 만큼 그 결과를 동종업계 및 독자와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프랑스 신문의 독자친화전략 (1)독자의 관심사 파악이 관건


프랑스 언론시장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정기구독자에게 배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판대나 매점에서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1면은 기사 대신 큼직한 사진과 제목만으로 꾸며진다. 1면 전체가 아예 인덱스인 셈이다. 가판대에서 독자의 눈길을 잡기 위한 전략이다.


이는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가정독자가 많은 독일은 예외)의 거의 모든 신문이 그렇다. 1면에 비중 있는 기사 전문이 다 들어가는 우리나라 신문이 인덱스 중심으로 제작되는 유럽 신문의 비주얼을 그대로 따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프랑스 신문들의 1면에는 대개 사진과 제목만 들어간다. 해당 기사가 몇 면에 실려있는지 안내하는 인덱스를 이렇게 크게 편집하는 것이다. 가판대에서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수법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르몽드>와 <르피가로> 등 전국지를 제치고 지역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가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한다. <르파리지앵>이라는 지역일간지는 전국일간지를 자매지로 발행한다. 한 신문사가 수십 가지 지역별 주간신문을 발행하고, 분야별 잡지, 무료 잡지 등을 함께 펴내기도 한다. 이 역시 신문사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수천 개의 가판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이들 가판대는 프랑스 정부의 지원도 받고 있다. 우리처럼 정기구독자 외에 따로 판매처를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주일 간 둘러본 프랑스 지역신문에서 나름 배울 점도 적지 않았다. 독자의 관심을 파악하고, 독자에게 밀착하며, 철저히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기사 작성, 그리고 특화된 콘텐츠를 발굴해 잡지와 단행본으로 연결시키는 전략, 전문분야 기자와 지역 파견기자의 협력 시스템등이 그것이다.


프랑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신문 독자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 등 뉴스의 전달 수단이 바뀌고 있는 영향이 크지만, 한국의 경우 신문저널리즘 자체의 근본적 문제도 중요한 이유로 꼽히고 있다. 바로 신뢰의 하락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다른 문제를 끄집어냈다. 하루 78만 부를 판매하는 프랑스 최대 일간지이며 지역신문인 <우에스트 프랑스>의 프랑수와 사이비에르 르프랑 편집국장은 "원망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에스트 프랑스 르프랑 편집국장.


"독자가 줄어드는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자기 지면을 되돌아봐야 한다. 결국은 콘텐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연 독자가 관심 있어 하는 유용한 정보를 싣고 있는지…. 독자의 관심은 바뀌었는데, 기자들은 여전히 관행적인 취재와 기사쓰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타성에 젖은 신문 제작으로 독자의 기대와 요구에 신문사가 더 이상 부응할 수 없거나, 신문사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독자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고 흥미도 떨어지도록 만들지 않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새로운 관심이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문사의 규모를 떠나 독자들에게 어떤 정보를 주고, 관심을 끌 것인가가 중요하다. 독자의 관심이 뭔지 신문이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신문의 미래가 달려 있다."


독자들의 관심을 파악하기 위해 이 신문사는 독자들과 직접 만나는 형식을 꾀하고 있다. 별도의 리서치 담당 파트가 직접 거리에서 신문을 구매하는 독자들을 만나 현안에 대한 생각을 묻고,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떤 내용이 신문에 실리길 원하는지 질문한다.


기자들 역시 취재와 인터뷰, 기사를 작성할 때 '과연 이것이 구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도록 하고 있다. 기자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고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43만 부를 발행하는 파리의 지역신문 <르파리지앵>도 독자의 관심을 파악하기 위해 매달 독자와 만남 행사를 열고 있었다. 마케팅 부서에서 본사로 초청할 독자를 10명 씩 선정하는데, 신문 판매 현장에서 독자를 섭외한다.


"독자와 만남 진행 방식은 해당 날짜의 신문을 펴 놓고 각 지면과 기사, 사진과 제목 등에 하나하나 의견을 묻는 식이다. 이것을 마케팅부 직원이 모두 녹음한다. 왜 이 사진이 여기 있느냐, 기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등 의견을 받아 모두에게 공유한다. 물론 매달 섭외하는 독자는 바뀐다."


수드 우에스트 스테팡 조나당 문화부장과 띠에리 마놀 편집중재인.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30만 부를 판매하는 <수드 우에스트> 또한 독자의 관심을 파악하고 그걸 지면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이 신문사에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한 직책이 있다. 굳이 번역하자면 편집중재인(Mediateur)이라는 직책인데, 조직도 상에서는 편집국장보다 위에 위치해 있었다. 미국 언론의 옴부즈맨이나 우리나라의 고충처리인과 비슷한 것 같지만, 이 신문사의 중재인은 그보다 더 적극적이고 강력하며 종합적인 권한을 갖는다고 했다. 띠에리 마놀(Thierry Magnol)이라는 분이 중재인을 맡고 있었는데, 그는 독자 및 공공영역과 신문사간의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어느 부서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로 신문사 강령을 만들고 준수 여부를 관리 감독하는 한편 독자의 관심을 편집국에 전달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독자 조사 기능도 담당하고 있는데 "가판대에서 만나는 독자들을 신문사로 초청해 신문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의견을 신문에 게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들의 책상이 지저분한 것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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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모르면 글이 어렵다 쉽게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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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인쇄 매체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며, 지역신문이 특히 지역주민의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지역신문발전위원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지난 2014년 6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간 우선지원대상 신문사를 대상으로 '프랑스 지역신문 디플로마'를 진행했고, 여기에 제가 동행한 바 있습니다. 공공 목적으로 이뤄진 연수였던 만큼 그 결과를 동종업계 및 독자와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프랑스 신문의 독자친화전략 (2) 쉽게 쓰고, 친밀하게 다가가라


누군가의 글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글쓴이 스스로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썼거나, 이해했더라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보량보다 설명이 중요하다 = 브루따뉴와 노르망디 지역에서 발행되는 프랑스 최대 일간지 <우에스트 프랑스>의 프랑수와 사이비에르 르프랑 편집국장은 정보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쉽게 쓰는 게 중요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신문의 기조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정보량을 늘리는 게 아니라 다르게 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관한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인터넷의 그런 정보를 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그 중 하나를 택하더라도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하지만 정보 제공이 아니라 정보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


우에스트 프랑스에서 르프랑 편집국장의 설명을 듣고 있는 한국 언론인들.


◇기자가 모르면 글이 어렵다 = 쉽게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자가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기자 스스로 잘 모르는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르프랑 편집국장의 말이다.


"우리 신문은 엘리트문화보다는 대중문화에 비중을 두되, 대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자 인터뷰 기사를 쓸 경우, 그 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대학생이 봐도 모자라지 않고, 빵집 주인이나 정비사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한다."


비슷한 말을 <르파리지앵>에서도 들었다. 이브 재글 문화부장은 문화 관련 기사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문화부 기사의 잘못된 점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마치 문화부 기자에게 설명하듯 이해도가 떨어지는 기사를 많이 썼다. 르파리지앵의 철칙은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관련 기사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독자들의 생각과 의견을 넣는다. 현장에서 5명의 관객을 붙잡고 당신은 이 공연을 어떻게 봤느냐, 관람료가 아깝지 않느냐고 묻는다."


르파리지앵 이브 재글 문화부장.


이브 재글 부장은 "우리는 지식인부터 일반 시민까지를 대상으로 하므로 독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서 기사를 쓰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종이신문과 인터넷 타깃을 달리하라 = 보르도 지역에서 발행되는 <수드 우에스트> 스테팡 조나당 문화부장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현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신문과 인터넷 기사를 완전히 다르게 작성한다. 예를 들어 종이신문에는 '나의 아버지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고, 블로그에는 전문가용으로 아주 심도 있게 작성한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의 타깃 층을 다르게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르파리지앵> 자끄 랄랑 행정편집국장은 인터넷 유료화를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층이 뭘 보느냐를 조사해보니 웹 사이트는 평균 연령 35세 미만, 종이는 평균 60세였다. 연령대에 따라 서로 선호하는 콘텐츠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웹 사이트 콘텐츠는 평균 연령 35세에 맞춰 출고하고, 종이신문은 질을 높여서 고급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젊은이의 관심에 부응하라 = 이브 재글 문화부장도 "이제 기자들은 종이신문의 기사를 쓰기 전에 인터넷에 먼저 쓴다"며 "예를 들어 인터넷은 젊은 층이 주로 구독하기 때문에 유명 가수의 콘서트는 축구 실시간 중계처럼 라이브 블로깅(블로그나 SNS로 실시간 보도하는 방식)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 신문은 젊은 독자를 겨냥한 이벤트도 고안했다.


"문화부에서 전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 냈다. 전에는 가수가 새 음반이 나오면 그냥 인터뷰 기사를 냈다. 그러나 이제는 가수를 회사에 불러서 3~4곡을 부르게 하고, 이걸 찍어서 사이트에 올린다."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는 장면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리기도 한다.


"스릴 있는 놀이기구를 큰 공터에 설치해서 시민이 즐길 수 있게 해놓은 곳이 있다. 이번에 새로운 놀이기구가 나와서 기자가 직접 타보고 그걸 자신이 촬영해 비명 소리까지 영상에 담았다. 요즘 독자가 (기자에게) 원하는 것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인 것 같다."


수드 우에스트 스테팡 조나당 문화부장.


<수드 우에스트>는 2013년 12월부터 <경남도민일보>처럼 부분적 유료화를 시행하고 있는데 매월 10유로를 받는다. 현재 4000여 명이 유료회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한다.


△기사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써야 하고, △인터넷은 젊은 층에 타깃을 맞춰야 하며, △독자와는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라. 프랑스 신문은 이렇게 주문하고 있었다.


관련 기사 : 기자의 관심보다 독자의 관심부터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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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저널리즘 강좌에서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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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수)부터 18일(금)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 부산지사가 주최한 '멀티형 기자-포토저널리즘 언론인 전문연수'에 수강생으로 참여했다.


강사가 아닌 수강생으로 연수에 참석한 건 지난번 '인포그래픽 제작' 연수 이후 두 번째다. 역시 새로운 뭔가를 배우는 건 가슴 설레는 일이다.


첫 날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임종진(전 한겨레신문 기자) 씨로부터 카메라 세팅과 조리개, 셔터속도, 노출, 망원렌즈와 광각렌즈의 적절한 활용, 피사계 심도 등 기본적인 걸 배웠다.


기본적이라곤 하지만, 정작 비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도 대개 P모드로 놓고 찍어온 나로서는 눈이 뜨이는 듯한 내용이었다.



둘째 날 오전과 오후 3시까지 중부매일 김용수 부국장으로부터 상황별 보도사진 촬영법에 대해 배웠다. 인터뷰 사진과 행사, 기자회견, 스케치 사진 등에 대해 배웠다.


3시부턴 생태 사진가 이종렬 씨(전 대전일보, 세계일보 기자)로부터 회의 취재, 야간 취재에 대해 배웠으며 야간 촬영 실습도 했다.


셋째 날 오전에는 사진의 기본적인 구도, 황금 나선형 등에 대해 배웠고, 사진을 어떻게 보정하고 가공하는 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이번 연수에서 배운 내용 중 기자들이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둔다.


1. 생태 사진가 이종렬. 그는 일찌기 신문사 사진기자 시절부터 '글쓰는 사진기자'로 알려졌다. 당연히 다른 사진기자들은 그를 못마땅해 했다. 사진기자가 사진만 잘 찍으면 되지, 글까지 쓰라면 어쩌느냐는 것이었다.


생태사진가 이종렬.


그러나 이종렬이 그랬듯이 분업시대는 가고 통섭과 융합, 멀티시대가 와버렸다.


취재기자는 사진을 찍을 줄 알아야 하고, 사진기자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기술자도 인문과 역사를 알아야 하고, 인문학자도 컴퓨터 첨단기술을 이해해야 한다.


이종렬은 여기에 덧붙여 "적어도 작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사상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기자라면 단순한 사진설명 말고도 해당 사진에 대한 에세이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한다. 사진기자도 글쓰기와 역사, 철학, 사회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종렬 사진가가 최근 펴낸 책.


2현장까지 가서 달랑 사진 서너 장만 찍어오는 기자들이 있다. 그것도 같은 위치에서 찍은...


취재 기자들 중에는 행사장 무대 앞쪽에 나가지도 못하는 기자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 뒤통수만 찍어온다.


보도사진은 기본적으로 가로사진, 세로사진과 전체 상황을 알 수 있는 원경, 근경, 앞과 뒤, 위와 아래에서는 물론 클로즈업, 주변 스케치 사진까지 찍어야 한다. 그래야 그날의 지면 사정과 밸류 판단에 따라 가장 적절한 사진을 골라쓸 수 있다.



3. 내가 찍을 수 있으면 물론 가장 좋겠지만, 독자를 위해서라면 남이 찍은 사진을 구하려는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4악수하는 사진을 찍을 땐 중심 인물이 오른쪽에 오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가슴이 드러나 당당해보이기 때문이다. 왼쪽 인물은 등이 보이게 된다. 움츠러져 보인다.


그렇게 찍으려면 기자는 중심인물의 왼편에 위치해야 한다.



5보통 사진은 3분할로 찍지만, 책이나 잡지용 사진은 2페이지에 걸쳐 편집될 경우를 감안, 4분할로 찍는 게 좋다.



6. 취재원의 초상권을 항상 염두에 두고,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모자이크 대신 자연스레 얼굴이 가려지도록 찍어라.



7.사건 현장은 클로즈업 외에도 배경 건물을 함께 담아 그곳이 어딘 지를 알 수 있게 해야 하고, 높은 위치에서 전경 사진도 찍어야 한다.



8. 삼각형 구도와 황금 나선형 구도는 보도사진에서도 기본이다.





황금 나선형 구도로 찍은 사진들.



영정 사진이 황금 나선형 위치에 있다.


9. 회의 촬영은 중심인물의 뒤통수만 찍지 말고 표정이 보이도록 찍어야 한다.




10. 뒷 이야기 하나. 정치인들은 사진기자가 귓속말 나누는 모습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사진에 찍히기 위해 일부러 중요인물에게 다가가 별 내용도 없는 귓속말을 하기도 한다. "오늘 점심 뭐 먹을 겁니까?" "저, 사진 한 번 찍히고 갈게요." 등...



11지면에 쓸 사진 색상을 제대로 보려면 컴퓨터 모니터와 포토샵에서 색상표준화를 해줘야 한다. 특히 최종 ok를 하는 편집국장이나 사진작업자, 사진기자의 컴퓨터는 필수적으로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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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보다 시민 속에서 기사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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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문의 독자친화 전략 (3) 지역과 동네, 사람에게 밀착해라

 

<우에스트 프랑스>는 프랑스 서부권을 커버하는 지역신문사이다. 프랑스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발행부수는 78만 부로, 크게 브르타뉴(Bretagne), 노르망디(Normandie), 페이 드 라 루아르(Pays de la Loire)등 3개 권역에 배포된다. 지역신문이 <르몽드>나 <르피가로> 등 전국지를 제치고 프랑스 최대 부수를 자랑한다는 게 우리로선 부럽기만 하다.


◇53개 지역에 맞춘 지역판 발행 = 우선 이 신문은 나치 독일군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에 의해 2차 대전 직후 창간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신문이다. 또한 배포권역 안에 있는 53개 소도시에 대한 철저한 지역밀착보도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에 지역사회에 확실히 뿌리내리는 게 가능했다.


왼쪽부터 르파리지앵, 우에스트 프랑스, 수드 우에스트. 우에스트 프랑스 1면 하단에는 논평이 실려있다.


전체 사원 1600명 중 574명이 기자로 일하고 있는데, 각 지역에 맞춰 매일 53가지 편집본을 발행하고 있다. 전면과 뒷면을 제외하고 내용은 지역 뉴스에 맞춰 제작된다. 또한 유료 주간지 75개도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우리나라 신문들처럼 대판 크기로 발행된다. 가격은 0.95유로. 1면은 다양한 사진과 함께 윗부분은 인덱스만으로 꾸며지고, 하단에 사설(논평) 한 편이 실려 있는 게 이채로웠다.


◇인물 사진 위주로 편집 = 2면부터 프랑스 전국 뉴스부터 각 지역별 뉴스로 채우고 있는데, 대부분 인물사진으로 채워진다는 게 특징이었다. 또한 각 지역면에서는 온갖 소소한 모임이나 행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었다.




또한 3~4개 지면에 걸쳐 부음 광고 등 개인의 생활광고가 빼곡하게 실려 있는 점도 부러웠다. 전체 지면은 38면.


르프랑 편집국장은 지면에 등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인이 큰일을 겪었거나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가장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사를 발굴해야 한다."


그는 인물사진 위주의 지면 제작에 대해서도 "인물사진은 구독자와 인터뷰이(interviewee)간의 소통을 위한 우리 신문사의 방침"이라면서 "말하는 모습, 또는 액션을 취하는 모습 위주의 사진을 통해 신문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인물과의 소통을 꾀한다"고 말했다.


우에스트 프랑스의 부음 광고.


◇1000여 명의 지역통신원이 생활밀착 보도 =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 지역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수드 우에스트>에는 총 직원 980명에 280명의 기자가 있으며 1050명의 각 지역 통신원(시민기자)이 있다. 이들은 시·군과 마을 단위의 행사를 보도한다. 덕분에 지면에 실리는 기사는 행정기관이나 정치권, 기업에서 나오는 것보다 시민의 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 훨씬 많다. 그야말로 지역밀착, 시민밀착, 생활밀착이다. 지역신문이 지역공동체의 공론장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들 지역통신원에게는 기사에 따라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다. 기자증은 발급하지 않는다. <경남도민일보>의 '갱상도블로그' 시민기자(150여 명)와 같았지만, 이들은 지역소식을 알려준다는 게 달랐다.


이 신문은 9개 도를 배포권역으로 총 30만 부를 발행하고 있는데, 50%는 정기구독, 50%는 가판대에서 판매된다. 최근 32만 7000부를 발행했고, 발행부수는 요일과 계절, 페스티벌 유무에 따라 조금 다르다. 요즘처럼 월드컵이 있거나 페스티벌이 있을 때는 부수를 늘리고 겨울에는 부수를 줄이고 있다. 주말판은 평일보다 더 많이 발행한다. 인터넷과 종이신문, 애플리케이션을 함께 구독하면 25% 할인해준다.


시민들의 생활이 지면에 담긴다.


◇독자들의 개인광고로 6개 지면 제작 = <수드 우에스트> 역시 1면은 제목과 사진만 들어간 4개의 인덱스로 채워져 있었다. 판매가격은 1유로. 전체 지면은 48면. 크기는 베를리너판형으로 작지만, 1개 면에 최소 2장에서 많게는 6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인물사진이 많았다.


20개 지역별로 지역판을 따로 제작하고 있고, 매주 일요일에는 16페이지에 이르는 특별판을 제작하고 있다. 평일 신문이 1유로인데, 특별판이 추가되는 일요일 신문은 1.8유로에 판매된다.


유럽의 지역신문이 대개 그렇듯 이 신문에도 독자들의 개인광고가 많이 실린다. <경남도민일보>의 '자유로운 광고' 또는 생활정보지의 줄광고와 비슷한데, 무려 6개 지면에 걸쳐 애인 구함, 미팅 제안, 모임, 결혼 70주년 알림, 감사, 축하, 생일, 부음, 애견 판매 등 광고가 실려 있었다. 사진과 함께 10×7cm 정도 크기로 실린 결혼 70주년 알림 광고의 경우 100유로, 그보다 좀 작은 광고는 40유로 정도 받는다고 한다. 인터넷에도 이런 광고가 있었다.


수드 우에스트의 개인광고. 오른쪽은 모두 '애인 구함' 광고다.


애견 분양, 결혼 70주년 축하광고 등.


결국 지역신문의 살길은 '지역 밀착, 사람 밀착'이고, 광고 또한 지역과 사람에 밀착해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하지 못하면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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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보다 역사 문화 콘텐츠가 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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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문의 독자친화 전략 (4)문화콘텐츠를 잡지·단행본으로


이번 디플로마 과정에서 방문하진 않았지만 고급일간지 <르몽드>가 영화감독 프랑수와 트뤼포 사망 30주년을 맞아 발행한 단행본이 눈길을 끌었다.


가판대나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판매실적도 높은 것으로 보였다. 가격은 7.9유로로 페이지(122)에 비해 싼 것도 아니었다. 내용은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모든 것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묶은 내용이었다.


◇역사적 사건도 콘텐츠로 활용 = 프랑스 최대 일간지로 78만 부를 발행하는 지역신문 <우에스트 프랑스> 역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당시 전쟁 상황을 정리하고 참전 군인을 인터뷰하여 단행본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다. 이 단행본의 경우 노르망디 지역에 근무하는 100여명의 기자들이 총동원되어 전쟁을 겪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과 정보를 구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단행본(왼쪽)과 다양한 역사 관련 잡지들.


이 신문은 평소 문화와 경제 관련 월간지를 발행해 무료로 신문에 끼워 판매한다. 이들 잡지 또한 각 도시마다 다르게 발행된다.


요트 정보를 담는 특정 주제의 유료 월간지도 발행되고 있다. 이 또한 7000여 개 판매처(가판대와 매점 등)에서 지역 독자와 만나고 있다. <부알리에>라는 요트 전문잡지의 경우 가격이 3~5유로 선이다. 두께나 내용에 따라 가격은 다르다.


또한 관내의 한 유명한 수도원을 주제로 디지털 단행본을 발행했다. <우에스트 프랑스>가 예전부터 썼던 기사를 모두 종합하고 체계화해 디지털화한 것이다. 또한 유명한 역사 관광지인 몽생미셸에 관한 소책자도 발행했다.


보르도는 와인이 특산물이다. <수드 우에스트>는 이런 지역 특성을 살려 <떼르드뱅>(와인의 땅)이라는 포도주 관련 매거진을 격월로 발행하고 있다. 가격은 6유로이며 전담기자들이 참여해 매우 고급스럽게 제작한다. 1만 5000부씩 발행하고 있는 이 잡지는 유료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그들은 이 잡지 발행을 '문화적 활동'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수드 우에스트가 발행하는 와인 전문 잡지 떼르드뱅과 르몽드가 펴낸 트뤼포 사망 30주년 기념 단행본.


이와 함께 포도주와 관련된 문화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큰 극장에서 보르도 와인 맛보기(시음) 행사를 하고 있다. 약 150명의 소믈리에를 초청해 1년에 두 차례 열고 있으며, 지역을 순회하면서도 개최하고 있다. 이런 행사는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고 수익 창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 <수드 우에스트>는 <MAG>라는 일상생활 잡지도 발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참가비를 받아 약간의 수익을 얻고 있으며, 건축업자들이 콘퍼런스를 요청하기도 한다. 이런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콘퍼런스 개최 시스템(조직화)을 갖추고 있다.


◇전문 분야와 파견 기자의 협력시스템 = <우에스트 프랑스> 문화부에는 8명의 문화 전담 기자가 소속돼 있다. 8명이 적은 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에스트 프랑스>는 각 지역 파견기자들과 협력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신문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르프랑 편집국장은 파견기자들과 협력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일렉트로닉 음악에 조예가 깊은 한 지역 파견기자는 일하는 시간의 90%는 해당 지역의 선거 정보 등 일반 기사를 다루고, 10% 가량을 음반 기획사의 CD를 받는다든지 음악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협조하는 기자가 100명이다. 그리고 프리랜서 기자를 써서(서울에도 한 명 있다) 많은 정보를 얻는다."


극장별 영화상영시간표를 신문에서 볼 수 있다면?<수드 우에스트>는 280명의 기자 중 문화부에 6명의 기자들이 있다. 스테팡 조나당 문화부장은 문화면 전체를 관장하면서 대중음악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극장별 영화 상영시간표가 실린 지면.


일요일에 발행되는 문화 특별판은 전문가가 작업하는 영화 소개 2페이지, 극장별 영화 상영시간표, 전국적인 문화기사, 페스티벌 소개 3페이지, 문화적인 활동 트렌트, 문화적 쇼핑 등으로 구성된다. 문화적 쇼핑이란 샹송CD 구매, 비디오, 웹 사이트, 애플리케이션, 음악공연, 사진책자 소개 등이다.


이 가운데 신문에 실린 극장별 영화 상영시간표를 보니 '아! 우리도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터넷에 들어가 일일이 극장을 검색하고, 거기에 들어가 상영시간표를 찾는 게 번거롭기 때문이다. 신문에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다면, 그걸 보고 '오늘 이 영화나 볼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매주 목요일 문화면은 영화판으로 제작되는데, 프랑스는 매주 목요일 영화를 개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프리뷰나 비평, 여배우와 인터뷰 등을 싣는다.


르파리지앵의 편집회의 모습.


<르파리지앵>은 아무래도 파리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다 보니 문화부의 비중이 높았다. 350명의 본사 기자 중 18명이 문화부 소속이었다. 대중지를 추구하다 보니 영화와 음악, 방송을 많이 다룬다. 프랑스에서도 연극과 전시는 비대중적인 분야에 속한다. 그래서 18명의 문화부 기자 중 5명이 방송 분야 취재에 투입된다.


자매지로 발행하는 <르파리지앵 매거진>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여기에도 문화부에서 콘텐츠를 제공한다.


그들은 신문의 문화면이 수많은 공연과 행사, 전시의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주당 근로시간이 35시간이다. 문화적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고, 파리는 문화적으로 즐길 수 있는 전시와 공연 등 콘텐츠가 엄청나게 많다. 르파리지앵은 그 사람들에게 가이드 역할을 하여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명한 사람을 인터뷰하여 모두가 알지만 대중이 그동안 잘 몰랐던 면을 부각하는 기사를 쓴다. 한 판사가 있는데 그가 락(Rock) 음악을 종아한다든지, 현대미술을 좋아하는 큰 기업의 사장을 인터뷰하는 기사도 쓴다. 매달 독자와 만남에서 이런 기사들이 호평을 받아 매주 일요일에 이런 인터뷰를 출고하고 있다."


◇수많은 잡지와 가판대 = 프랑스는 잡지의 천국이었다. 모든 신문사가 시사주간지와 패션, 여성, 음식, 부동산, 문화, 경제 등 전문분야 월간지, 수십 종의 지역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신문 잡지 전문 매장 RELAY.


가판대와 신문·잡지 전문 매점이 많다는 것도 부러운 일이었다. 특히 모든 지하철이나 철도역 등 공중이용시설에 입점해 있는 'RELAY'라는 매점이 인상적이었다. 각종 잡지와 신문, 책, 음료, 스낵 종류를 구비하고 있는 이 매점에는 항상 사람이 북적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여행에 앞서 이 'RELAY'에 들러 자기가 읽을 책이나 잡지, 신문을 샀다.


고속도로 휴게소도 마찬가지였다. 서점이 아닌 편의점에도 신문과 잡지, 단행본이 진열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매점과 가판대는 모두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사르코지 정부가 추진했던 인쇄매체 지원 정책 덕분이다. 잡지 진열대에 전쟁과 역사 관련 잡지가 많았다는 것도 특이했다.


역사 콘텐츠를 이용한 잡지가 많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역사 콘텐츠를 활용한 잡지가 많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잡지 시장의 확대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다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이나 트뤼포 사망 30주년 기념 단행본은 우리가 응용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명량대첩 500주년, 낙동강전투 70주년,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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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문창극 낙마는 언론의 선동보도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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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마산에 왔습니다. 은퇴한 언론인들의 단체인 (사)경남언론포럼(회장 박소웅) 주최 세미나에 발제자로 초청되어 왔습니다.


오늘(25일) 오후 3시 마산 사보이호텔 4층에서 진행된 세미나는 조갑제 대표의 1시간 강의식 발제에 이어 이광우 경남언론포럼 이사의 사회로 성재효 크리스천경남 대표, 원용관 경남언론포럼 이사의 토론이 있었습니다.


이날 세미나 중 조갑제 대표가 한국의 좌경선동언론을 이야기하면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사례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일면 옳은 말도 있지만, 또다른 일면에는 다른 문제들을 생략해버린 부분도 있었습니다.


조갑제 대표 @김주완


친일파는 다 죽었다…지금 한국엔 친일파가 없다


친일파라는 이 말이 굉장히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친일파는 한국에 지금 없습니다. 친일파 있습니까?


친일파는 결국 뭡니까? 일제시대 때 일본에 부역하고 일본에 충성하고 독립군들 잡아 족치고 하던 사람을 우리는 친일파라 불렀습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사찰과 경찰 또는 헌병대에서 근무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가 흔히 친일파라고 했습니다. 또는 벼슬한 사람들, 군수를 했거나 총독부에서 국장 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지금은 다 죽었어요. 이제 친일파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친일파란 말을 가지고 사람을 잡느냐는 겁니다. 그게 참 미스터리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친일파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게 확대해석이 되어가지고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곤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장로의 입장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KBS가 보도했습니다. 그 동영상은 이미 공개되어 있고 전문도 다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조갑제 대표. 왼쪽은 이광우 경남언론포럼 이사. @김주완


제가 읽어보니까 참 잘~한 연설이에요. 그리고 약점 잡을 데도 없어요. 그 사람 기자 출신이다 보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전제조건을 달아가지고 약점이 잡히지 않게 한 연설입니다. 아주 교양 있는 연설이고, 한국현대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봤지만 사실과도 크게 틀리지 않고 애국적이고 정말 좋~은 강연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KBS 아홉 시 뉴스가 일부분을 딱 떼어내서 ‘문창극 씨가 일제 식민지 그리고 분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역사관에 논란이 예상된다’ 이렇게 했어요. 30분이 넘는 강연을 딱 요 한 문장으로 요약했어요. 식민지와 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정당한 것이라고 옹호한 것처럼 딱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가 식민지를 겪고 분단을 겪고 전쟁을 겪은 것, 이것은 하나님이 한국인을 단련시켜가지고 강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일본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지고 동북아시아에서 이젠 과거처럼 종속적 변수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데까지 왔다’ 하는 아주 극일, 일본을 극복한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뒷부분은 잘라버리고 앞부분만 딱 보도한 거죠. 예컨대 검찰이 발표하는데, A라는 공무원이 돈 봉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들어있는 걸 발견하고 돌려 줬습니다 이렇게 발표했는데, 기자가 뒷부분은 잘라버리고 돈 봉투를 받았다는 것만 보도하는 것이나 똑같은 왜곡, 왜곡이 아니라 이건 조작이죠. 제 부하기자가 이런 글을 써왔다면 이게 기사냐, 이게 사람 잡는 거지라고 나무라면서 보는 앞에서 찢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을 겁니다.


이런 선동보도에 대통령이 굴복한 것입니다. 흔히 진실 정의 자유라고 하는데, 대통령이 진실을 포기하면 자유와 정의가 설 수 없어요. 마녀사냥과 인민재판에 언론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친일파로 몰린 사건이죠. 어떻게 스트레이트 기사에 ‘논란이 예상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나요?


이상 조갑제 대표의 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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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가 보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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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가 마산에 왔습니다. 7월 25일 오후 3시 마산 사보이호텔 4층에서 (사)경남언론포럼(회장 박소웅, 전 YTN 이사)이 주최한 '오늘의 정치현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세미나에 발제자로 왔는데요.


그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국정원이 이런 (댓)글도 못 쓴다면 해산해야 한다"며 댓글 공작 자체를 정당한 국정원의 업무라는 취지로 이야기하더군요. 기록 차원에서 그의 발언을 남겨둡니다.


아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발제 중인 조갑제 대표.


"국정원 댓글사건이란 것은 이런 겁니다. 하도 종북세력이 북한과 연계해가지고 인터넷상에서 선동을 해대니까 국정원에서 어떤 기구를 만들어가지고 대응을 한 것이죠. 대응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정치인을 비판하게 되었어요.


‘정치인의 종북성향, 종북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선거개입이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이 사건을 엮어서 지금 재판에 가 있는데, 제가 그 기소장에 올라있는 글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게 과연 죄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것도 범법행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이 쓴 글인데요. ‘나도 금강산에 가고싶지만 신변 보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가기는 싫다’ 요렇게 썼습니다. 이게 문제인 후보를 비판하는 거다 라고 하여 지금 걸어놨습니다. 이 정도입니다.


어떤 분들이 참석했는지 인증샷.


이 사건은 완전히 허상입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누가 만들었느냐? (권은희) 수사과장과 채동욱 씨가 검찰총장할 때의 검찰수사관, 그 안에는 좌익세력 후원금 낸 검사도 들어 있었어요. 이 경찰과 이 검찰, 그리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좌경 선동 언론, 그리고 큰 정치적 에너지를 제공한 야당이 합세해가지고 만든 사건이 국정원 댓글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국정원이 이런 글도 못 쓴다면 이건 국정원 해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민주당에 의한 국정원 파괴공작 사건’입니다."



이상 조갑제의 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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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마산 통술집 찾기 프로젝트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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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우 기자가 '다찌·통술·실비 어떤 점이 같고 다를까'라는 기사를 경남도민일보에 썼다. 이 기사는 SNS와 웹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페이스북 '좋아요' 수가 850회에 이를 정도였다.


이 기사를 본 Paul Kim 이라는 한 페이스북 사용자가 '경남 맛집' 그룹에 이런 제안을 올렸다.


"다찌집의 전설 집... 통술의 전설.. 실비집의 TOP3 선정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에 앞서 정원각 씨도 그 기사를 공유한 내 페이스북 담벼락에 이런 댓글을 올렸다.


"잘 쓰셨는데 이후 후속 취재하면 좋겠어요. 사람 중심의 스토리 전개요. 진주의 실비집이 가장 저렴한 편인데 그런 이유와 실비 집을 오래해서 아이들 키우고 성장하는 또 여주인들의 애환 등등요."



그렇잖아도 우리가 개설·운영 중인 '경남 맛집' 그룹을 통해 얼마 전 '최고의 냉면 찾기 프로젝트'를 시도했으나 제대로 된 냉면 집이 없는 한계로 실패를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다른 메뉴를 골라 다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리라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게다가 마산 통술이나 통영 다찌, 진주 실비는 지역만의 독특한 술 문화라는 점에서 공공적 가치도 있었다.


그래서 즉각 프로젝트 실행에 들어갔다. 우선 진주 실비나 통영 다찌에 앞서 마산 통술집부터 최고의 맛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남 맛집'에 이런 공지 글을 올렸다.


"[추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이곳 관리자 중 한 명인 김주완입니다. Paul Kim 님의 제안에 따라 우선 최고의 통술집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애용하는 마산 통술집을 추천해주세요.


일단 댓글로 추천을 받은 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통술집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통술집으로 선정된 곳에서 '번개'도 추진해보겠습니다. 추천해주세요."



이 글에는 모두 70여 개의 댓글이 붙었고, 마산 통술에 관한 다양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올라왔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이다.


"김성진신마산 통술의 야사 조금. 옛날 뜨락하던 형수는 지금 담소통술 옆서 럭키 양구이 하고 있고, 옛날 담소하던 통영 광도면 출신 주인은 향미정으로 옮겼다 한참 전성기 유지하다 지금 팔고 쉰다고 들었고, 서호 아주머니들은 27~8년 전만 해도 불과 40살 전후의 꽃다운 나이였고, 석민이나 럭키통술 등등은 다들 주인이 한두번 바뀌었고, 튀김안주가 유명하여 마산시청 공무원들이 단골이었던 양지도 월영초등 출신 형수가 하고 있으니 신마산 통술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네요. 오동동의 수림, 서울, 소영, 강림 등도 주인이 다 바뀐것 같은데 유정통술만 주인이 그대로 이더군요."


"김성진 27~8년전엔 기본 안주 한판이 15,000원에다 약간의 추가 안주는 리필 되었고, 맥주 한병에 2.000원이고 소주는 1.000원~1.500원 받았는데 세월이 좀 흘렀다고 안주 값이 장난이 아니네요. 앉았다 하면 1~2십만원이니, 이제 서민들이 쉽게 갈 수 있는 통술집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런 과정을 거쳐 열 대여섯 개의 통술집 추천을 받았고, 이 중 13개 통술집을 대상으로 '경남 맛집'에서 투표에 들어갔다.



이 투표를 홍보하기 위해 페이스북 경남도민일보 페이지김주완 페이지, 여러 기자들의 개인 담벼락에 공유했고, 경남도민일보 뉴스사이트에도 온라인 기사를 올렸다. 이 기사는 임종금 기자가 썼다.


창원지역 '술꾼'들 해묵은 논쟁 이번에 마무리?


마산 최고의 통술집은 어디일까? 자칭 창원지역에서 ‘술꾼’이라면 한번 쯤은 이걸 놓고 논쟁해 봤을 것이다. 수십 년 된 해묵은 논쟁을 끝낼 기회가 왔다.



경남도민일보가 운영하는 회원 수 2만 2000여 명을 자랑하는 페이스북 그룹 ‘경남 맛집( https://www.facebook.com/groups/idominfood/ )’에서는 ‘마산 최고의 통술집 찾기’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경남 맛집 운영진은 지난 25일 오후부터 그룹 내 공지글을 통해 통술집 추천을 받았고, 총 71개의 댓글이 달렸다. 이 가운데 다수의 추천을 받은 12곳을 추려 내 26일 저녁부터 투표에 들어갔다.


최종후보에 오른 통술집 12곳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마산 반월동 지역이 7곳, 마산 오동동 지역이 3곳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고, 마산 창동지역과 신마산 지역에서 각각 1곳이 후보에 올랐다.


경남 맛집 운영진은 7월 말 까지 투표를 마감하고, ‘마산 최고 통술집’에 선정된 곳에 번개 모임을 추진할 계획이다.

투표는 아래 링크를 통해 하면 된다. 


https://www.facebook.com/groups/idominfood/permalink/506077512856951/


27일 오후 5시 현재 10표를 받은 오동동 유정통술이 8표를 받은 반월동 서호통술을 약간 앞서가며 경합을 벌이고 있다. 투표는 28일(월)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투표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1위와 2위에 꼽힌 통술집에서 차례로 '번개 모임'을 해볼 생각이다. 회비는 1인당 2만 원 정도로 하고, 초과하는 비용쯤은 주최측이 부담해야겠지. 번개 모임에 참석한 독자들에게 해당 통술집의 음식과 분위기 등에 대한 의견을 받아 이 역시 온라인용 기사로 써서 올릴 계획이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경남에서 밀면이 가장 맛있는 집' '파스타가 가장 맛있는 집'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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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천이 베풀어준 포항의 명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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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풍경이라 해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답니다. 6월 25일 창원서 두 시간 남짓 달려가 만난 경북 포항 북송리 북천수는 흥건한 논물에 발을 담근 벼포기들을 들머리에 베풀고 있었습니다.

 

농사짓지 않는 보통 사람들 보기에는 이 논 저 논 다를 바 없는데, 그 차이를 금세 알아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른쪽은 물이 흐려져 있었고 왼쪽은 씻은 듯 말간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얘기를 듣고 ‘그렇네! 왜일까?’ 궁금해하는 차에 답까지 말해줍니다. “손김을 맸지 싶은데, 그렇게 맨 지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라고요. 볏잎 짙어진 푸른색을 보니 뿌리 내린지 열흘은 넘었음직 싶었는데요, 녀석들 아랫도리가 무척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북천수 들머리

 

흥해읍 북송리 마을숲 북천수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소나무 단일 숲으로는 우리나라 으뜸이지 싶은데, 곡강천 따라 길게 늘어선 첫머리는 바로 흥해서부초등학교랍니다. 2층짜리 조그만 학교는 소나무를 정원수로도 울타리로도 삼았습니다.

 

흥해서부초등학교.

 

흥해초교 아이들은 정말 복받았습니다. 교실서 공부하다가도 고개만 살짝 돌리면 멋진 솔숲을 누릴 수 있으니 말씀입니다. 소나무가 일러주는 곱고 차분하고 조용한 심성을 체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일행은 흥해서부초교를 지나 곡강천 둑으로 올라가더니 얼마 안가 솔숲으로 쑥 들어갑니다. 천변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놀러 나와 있고 가장자리에는 텃밭 가꾸는 아낙이 고개도 들지 않고 일하는데, 솔숲은 자기 품으로 안겨들어온 이들에게 그늘 한 자락 바람 한 줌을 천천히 건넨답니다.

 

 

 

 

솔갈비가 수북하게 쌓인 바닥에는 소나무 내뿜는 피톤치드가 얼마나 제 몫을 하는지 풀도 드문드문하고 나무는 아예 없습니다. 덕분에 걸치적거리는 데가 없어 걷고 뛰고 거닐기 좋았습니다. 바람은 때맞춰 다시 곡강천을 건너와 솔숲 한가운데서 잠시 숨을 골랐다가 빠져나가는데, 살짝 돋은 땀방울이 그 새 보송보송 마르고 말았습니다.

 

 

평상에 잠시 앉았다가 가까운 형제농원 밥집에 들어갔습니다. 점심으로 먹은 순두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얀 색깔이 매우 고왔는데 우리 콩을 손수 갈아 내온다고 했습니다. 나무 키우고 가꾸고 꾸미는 사업까지 겸하고 있어서 밥 먹은 뒤에는 갖은 나무가 있는 뜨락도 둘러보고 몇몇은 매실도 제법 따올 수 있었습니다.

 

형제농원 식당에서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

 

달전리 주상절리는 바닷가에 있지 않습니다. 조그만 개울이 흐르는 산중에 있습니다. 주상절리라 하면 대부분 제주나 울산이나 경주를 떠올리며 죄다 바다에 있다고만 생각할 뿐 산에도 있을 수 있다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여기 달전리 산중 말고도 전라도 광주 무등산에도 꽤 이름난 주상절리가 있는 것입니다.

 

달전리 주상절리 가는 논두렁길.

 

 

주상절리(柱狀節理)는 규칙적으로 갈라진 기둥 모양 바위인데 지각을 뚫고 솟은 용암이 식으면서 형성된다고 합니다. 달전리 이 녀석은 높이 20m 너비 100m라는데 왼쪽은 수직에 가깝게 서 있지만 오른쪽으로 갈수록 수평에 가깝게 드러눕고 있습니다. 앞자리에 서면 100년 전 시공으로 돌아간 듯한데, 사실 조금은 몽롱해지는 것이랍니다.

 

사람들은 별난 모습도 좋지만 실은 꽃들 피어나는 모습이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가지런히 펼쳐진 주상절리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더니 이제는 개망초꽃 수북한 데로 들어가 사진 찍기 바밨습니다. 이런저런 설명보다 한바탕 즐기고 누리는 것이 좀더 확실하게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법이니까요.

 

 

 

돌아나오는 논두렁에서는 개울 건너편 바위절벽에서 마애비를 찾아내고는 얘기를 몇 마디 덧붙여 드렸습니다. 얼핏 보니 ‘행공조참의(行工曹參議)’ 따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행(行)’은 ‘그에 맞먹는’ 정도 뜻이라 합니다.

 

마애비가 있는 바위절벽.

 

어쨌거나 여기 마애비는 옛적 여기가 지금처럼 한적한 논두렁이 아니라 발길 잦았던 한길이었음을 일러줍니다. 남들한테 보이려고 홍보 목적으로 애써 만드는 물건이 빗돌이니까 말씀이지요. 어쩌면 조선시대 10대로 가운데 하나였던 흥해로(포항시 흥해읍의 그 흥해!)가 이리로 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화산시대를 떠나 인간 선사시대로 나옵니다. 좁다란 골짜기 칠포리 암각화랍니다. 울퉁불퉁한 바위 표면에는 실패 꾸러미 또는 방패 또는 가면 또는 칼 손잡이 같은 무늬가 여럿 새겨져 있고 동심원과 알구멍(性穴)도 많습니다.

 

오른쪽 바위에 암각화가 있습니다.

 

새기는 도구조차 변변찮았을 옛날,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을까요? 열매 따고 짐승 잡고 농사 짓고 하는 대신에 새겼을 암각화는, 식량 마련만큼 또는 그보다 더 절실한 무엇이 있었음을 일러줍니다.

 

우주만물이 제멋대로였던 그 시절 어떤 절대존재 마음에 들도록 하는 일이 더욱 절실했을 수도 있고 집단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생산력·노동력이 절실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그런 절실함이지요. 지금 저런 바위가 다시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새겨넣게 될까요?

 

 

돌아나오는 길에는 암각화 나들머리 생선 말리는 자리에서 고등어 새끼·꼴뚜기·멸치 따위를 샀습니다. 올라갈 때 거기 널린 것들 슬금슬금 집어먹기에 그리 하지 마십사 말렸더랬습니다.

 

민폐라 여겼기 때문인데, 살 물건 미리 맛보는 것이었음을 제가 몰랐던 것입니다. 꾹꾹 눌러 수북하게 담은 한 상자가 만원이었고 그렇게 산 사람이 스물은 넘었지 싶습니다. 뜻밖에 누리는 즐거움이란!

 

칠포해수욕장에는 칠포리 암각화에서 금방 가 닿았습니다. 사람들은 세 패로 나뉘었습니다. 달려가 물결 밟기를 하더니 결국은 바닷물에 뛰어드는 축이 있고요, 이들 모습을 구경하는 축이 있고요, 적기는 했지만 동해안 으뜸이라는 칠포해수욕장 모래밭을 걷는 축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버스 다시 탈 때쯤 해서 막걸리나 맥주로 시원함을 더하는 데는 그런 구분이 있지 않았답니다. 칠포해수욕장은 곡강천에 달려 있습니다. 곡강천이 바다에다 펄 대신 모래를 내민 덕분입니다. 동해 해류는 모래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안으로 석호 비슷한 모양을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모래밭 위로는 솔씨가 내려앉아 솔숲이 이뤄졌습니다. 이번 나들이 첫 순서였던 북천수도 곡강천 덕분에 생겨난 마을숲이니, 곡강천이 없었다면 포항은 이래저래 무척 빈약했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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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사람들은 좋겠다 잣나무 둑길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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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창원교통방송에서 얘기했던 원고입니다. 이번에는 여름철에도 걷기 좋은 의령 잣숲 둑길을 소개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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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 가면 아주 걷기 좋은 길이 하나 있습니다. 잘 가꿔져 있고 양쪽으로 잣나무가 심겨져 있어 줄곧 그늘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햇볕 따가운 여름에도 좋고 어쩌다 비가 조금씩 내릴 때도 큰 불편 없이 걸을 수 있답니다.

 

시작은 가례면 운암리 평촌마을 은광학교 있는 데서 조그만 개울 가례천을 따라 내려가면 마주치는 의령천 제방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의령읍 중동리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을 모시는 충익사까지 3.5km가량 멋진 길이 이어집니다.

 

 

우레탄으로 만든 자전거길과 흙을 깔아 만든 사람 걷는 길이 나란히 나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양쪽으로는 나이어린 잣나무가 5~6m 높이로 죽 늘어서 있습니다. 지금은 어리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중에 나름대로 장관을 이루겠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여기는 의령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사람들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집니다. 한 중년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뒤이어 한 청년이 반바지 차림으로 달리기를 하며 얼마 안 있어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여자가 두 팔을 휘저으며 재게 걸어가는 식입니다.

 

게다가 쉼터이기도 합니다. 길가에는 긴의자가 마련돼 있는데요, 이런 데서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마주 앉아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줄곧 이어지는 의령천도 풍경이 그럴 듯합니다.

 

 

곳곳에 바위가 나와 있고 그 언저리를 따라 물이 흘러갑니다. 건너편 산자락에는 붉은 줄기 내비치는 소나무가 곳곳에서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고 은사시나무는 푸른 잎을 매단 채 굵지 않은 하얀 줄기를 내어보입니다. 또 물고기가 많은 모양인지 천변에는 왜가리와 백로들이 날아듭니다.

 

게다가 3km 정도 되는 자리에는 퇴계 이황(1501~1570)을 모시는 덕곡서원도 있습니다. 덕곡서원은 밖에서 봐도 멋지고 안에 들어가 서원 건물 앞에서 내려다보면 앞이 툭 트여 풍경이 좋고 시원합니다. 여기 잠시 들렀다가는 도로 다리를 건너서 구름다리로 올라갑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구름다리는 걸을 때마다 출렁거립니다. 작으나마 색다르게 즐길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남산 꼭대기로 이어지는 길도 있고 충익사로 곧장 나아가는 길도 있는데요, 지금은 날씨가 무더우니까 산길로 드는 대신 충익사로 바로 빠지는 편이 낫겠습니다.

 

 

충익사는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의병으로 떨쳐 일어났던 여러 장령들을 기리는 곳입니다. 충익사 뜨락은 아주 잘 가꿔지고 있습니다. 의령이 의병의 고장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둥치 굵은 배롱나무들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한두 그루가 아니라 곳곳에서 꽃들을 터뜨립니다.

 

모감주나무나 가문비나무들도 좋습니다. 나이가 500살이 넘었다는 커다란 뽕나무도 한 그루 놓여 있는데 이 나무가 참 대단합니다. 어쩌면 임진왜란 당시 난리와 곽재우 장군 생전 모습을 몸소 겪고 봤을지도 모릅니다. 또 둥치 굵고 아주 의젓한 모과나무도 있는데요, 나이가 280살 넘었다 합니다.

 

500년 넘게 됐다는 뽕나무.

이렇게 거닌 다음에는 충익사 전시관이나 아니면 새로 만들어진 의병박물관을 들러봐도 좋겠습니다. 아울러 잘 갖춰진 화장실에 들어가 손과 얼굴을 씻어도 괞찮겠습니다.

 

적당하게 걷고 나면 배가 출출하기 마련입니다. 의령은 소바와 소고기국밥이 명물입니다. 충익사 바로 옆에 도로만 건너면 의령전통시장이 있는데요, 여기 일대 가게들에서 취향대로 골라 먹을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또다른 명물인 망개떡을 조금 장만해도 좋겠습니다. 많이 달콤한지라 아이들이 좋아하거든요.

 

의령 잣나무 숲길 들머리를 찾아가시려면 자동차 네비게이션에서 ‘은광학교’를 찍으시면 되겠습니다. 나중에 자동차 있는 데로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타면 되겠습니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대중교통 편 버스나 택시를 활용하는 수도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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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마산 통술집은 서호·유림통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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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예고해드렸듯이 최고의 마산 통술집 찾기 프로젝트 중 투표 단계가 마무리되었습니다.(☞최고의 마산 통술집 찾기 프로젝트 왜?)


투표에서 드러난 최고의 마산 통술집은 두 군데였습니다. 2개 통술집이 동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총 78표 중 반월동 서호통술이 18표, 오동동 유정통술도 18표였습니다. 반월동 통술골목과 오동동 통술골목에서 각각 한 곳이 선정된 것입니다.


물론 페이스북 경남맛집 그룹에서 진행된 이 투표가 아주 엄밀하거나 과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회원이 2만 2000여 명에 이르지만, 그 중 마산 통술집을 두루 섭렵해본 이는 그리 많지 않는데다, 가 본 사람이라도 자신이 갔던 통술집이 최고의 맛집이라고 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투표는 그냥 재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놀이를 하면서 마산의 독특한 주점과 술안주 문화를 널리 알리고 관심도 높이자는 차원입니다.



서호통술과 유정통술에 이어 3등은 반월동 담소통술이 9표를 받아 선정되었습니다. 4등은 오동동 사거리 목화통술(8표), 5등은 산호동 구 가야백화점 뒷골목의 수복통술(6표)이었습니다.


이어 신마산 향미정통술과 반월동 양지통술이 각각 4표를 받았고, 반월동 골목 안 고우미통술도 3표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통술집 추천'을 요청하는 글에 84개의 댓글이 달렸고, 투표 창 아래에도 48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관심이 높았습니다.


예고해드린대로 2곳이 동점으로 선정됨에 따라 두 곳 모두에서 번개모임을 해볼까 합니다. 번개의 제목은 '최고의 마산 통술집 원정대'로 하면 될까요?


쇠뿔도 단 김에 뺀다고 바로 내일(30일) 오후 7시 유정통술입니다. 1인당 회비는 2만 원이며, 추가 비용은 주최측에서 부담합니다. 인원은 선착순 7명입니다. 댓글 순서대로 7명이 차면 마감하겠습니다.


번개 과정은 저희 박민국 기자가 영상으로 담을 예정입니다. 참석자의 인터뷰도 영상으로 담아 공개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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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서 당일치기 가능한 장흥 물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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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고속도로를 달려보면 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답니다. 부산과 전남 영암을 잇는 남해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차량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볼 때, 창원을 지나 진주·사천까지는 자동차들이 많지만 섬진강 건너 전라도로 접어들면 사정이 달라진답니다. 그래도 광양까지는 거기 있는 공단 때문에 화물차라도 조금 다니지만, 순천서부터는 자동차가 뜸하다 못해 한적하다고나 해야 할 지경이 되고 맙니다.

 

아무래도 정치권에서 불을 지핀 지역감정 탓일 텐데, 이처럼 사람과 문물이 오가지 않으면 세월이 흘러도 이런 장벽은 오히려 더욱 높아지고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구성원이면서 서로 통하지 않는 현실은 하루빨리 바뀌어야 옳습니다.

 

토요시장 주무대.

 

교류와 소통, 이해와 친밀은 이쪽에도 좋고 저쪽에도 좋습니다. 넘나듦과 오고감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이로움을 줍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가 '이웃 고을 마실가자'를 통해 경상권뿐만 아니라 전라권 지역의 명소와 명물까지 적극 소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답니다.

 

경상권, 수도권보다 가깝고 인구도 적지 않아

 

지난 시기 전라권 자치단체들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만 목을 매달았습니다. 우리나라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살기 때문이지요. 역사를 들여다볼 때, 전라권에는 영남에 대한 피해의식이 크든작든 있을 수밖에 없기에 경상권으로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런 가운데 경남·부산·울산으로 눈을 돌리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구가 900만으로 수도권 다음으로 많고 거리는 오히려 더 가깝다는 데 착안한 것입니다. 지금 전라도에서 영남과 교류·소통을 가장 활발하게 하는 자치단체는 장흥군입니다.

 

 

 

정남진장흥토요시장'이 성공을 이어나가는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같은 영·호남 교류가 꼽힙니다. 장흥군은 지난해 부산 시민을 세 차례 초청했습니다. 토요시장과 지역 명소를 둘러보게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표고버섯과 한우, 싱싱한 키조개와 미역, 염산 처리를 하지 않은 김 등이 호평을 받으면서 올해는 다달이 넷째 토요일마다 부산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장흥 물축제 킬러콘텐츠 세 가지

이런 장흥군이 올 여름 '제7회 정남진 장흥 물축제'를 마련하고 경상도로 손짓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 프로그램들이 모두 오후에 열려 경남에서 당일치기로도 다녀올 수 있습니다. 장흥은 탐진강과 장흥댐이 있으며 앞바다 득량만은 깨끗하기로 유명합니다.

 

8월 1일부터 7일까지 이레 동안 진행되는 장흥 물축제는 '물과 숲 - 휴식'을 테마로 잡았습니다. 올해 축제에서 핵심(killer contents)은 '지상최대물싸움' '맨손물고기잡기' '천연약초힐링풀장' 세 가지랍니다. 행사장은 토요시장과 생태습지 사이 무지개다리 가까이에 모두 마련돼 있습니다.

 

 

맨손 물고기 잡기. 그런데, 맨손이 아닙니다. 하하.

 

천연약초힐링풀장은 편백·표고버섯·헛개·동백·석창포·매실·다시마 일곱 가지 성분 진액을 풀어 만든 풀장으로 축제 기간 쉬지 않고 운영된다고 합니다.

 

맨손물고기잡기는 2~7일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이벤트와 더불어 진행됩니다. 뱀장어·잉어·붕어·메기 등 탐진강에서 자라는 물고기는 모두 잡을 수 있습니다.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의 생생한 움직임을 손맛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지상최대물싸움은 '안면 몰수'하고 체면도 던져버리고 벌이는 한 판 '아水라장'이랍니다. 물대포, 소방차, 물풍선, 바가지, 물총 등을 갖고 벌이는 물싸움으로, 일상을 벗어나는 '일탈'의 즐거움을 줍니다. 2~7일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뙈약볕이 가장 좋을 때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물방울, 물 속 사람들의 활기찬 몸짓과 아우성은 구경하는 이들까지 즐겁게 만들어 주지요.

 

6일 오후엔 지역색 뚜렷한 지역 주민 무대도

 

얼음물통.

 

 

이밖에 풀장 두 곳을 더 운영하며 뗏목·우든보트·카타마란·수상자전거·줄배·카누·워터볼·바나나보트 등 탈것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또 축제 첫날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날마다 팝오케스트라 공연, 라틴음악 콘서트, 전남 청소년 문화존 공연, 대학생 뮤지컬 갈라쇼 등이 볼거리로 나오고 6일에는 지역 주민이 꾸미는 무대도 선보입니다.

 

노래·춤·악기 연주 등에 재능이 있는 지역 주민이 등장해 장흥을 찾은 이들을 위해 흥겨움을 한 보따리 풀어놓는 지역색 뚜렷한 프로그램으로,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맨손물고기잡기를 하는 두 시간(오후 3~5시)만 빼고 내내 치러진답니다.

 

 

 

아울러 전시 프로그램도 내실있게 마련돼 있습니다. 물과학관·힐링치유관·장흥전통차관·장흥문학관·건강안전도시관·다문화복지체험관·향토산업관·향토음식관·읍면홍보관이 그것입니다.

 

토요시장, 편백숲 우드랜드, 천문과학관

 

축제 기간에는 그 자체로서 명물인 토요시장도 거르지 않고 나날이 문을 엽니다. 축제로 시원함도 누리고 토요시장 싱싱하고 오염되지 않은 장흥 특산물도 장만하는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돈도 줍는 보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축제에 간다고 해서 물축제만 하지는 않습니다. 장흥에는 편백숲 우드랜드도 있고 정남진천문과학관도 있습니다. 우드랜드는 편백나무로 특화된 억불산(해발 518m)에 있습니다. 입장료 2000원(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을 내고 들어서면 편백나무가 심긴 비탈을 따라 열린 탐방로가 나옵니다.

 

끝에는 풍욕(風浴)을 하는 '비비에코토피아'(오전 9시~오후 6시, 3000원)가 있습니다. 부직포옷으로 갈아입고 편백의 기운을 온몸으로 누리는 장소랍니다. 사방을 둘러싼 대나무 울타리는 아늑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비비에코토피아에서 산마루까지(3.7㎞)는 '말레길'이 나 있습니다. 마루를 뜻하는 전라도말이 '말레'랍니다. 별로 비탈지지 않은 말레길에는 계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도 휠체어를 타고 오를 수 있습니다. 

 

편백소금집도 있는데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합니다.(금·토요일은 24시간, 어른 1만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 아토피 피부질환이나 고혈압 치료에 좋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편백나무로는 여러 가구와 소품도 만든답니다. 목재문화체험관·목공건축체험장·편백 톱밥 산책로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경매시장이 약식으로 열립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이 설기는 해도, 경매에 참여해 보면 편백 제품을 싸게 살 수도 있고 은근히 재미도 있습니다.

 

억불산 자락에는 정남진천문과학관도 들어서 있습니다. 낮에는 태양 관측을 하고 밤에는 별자리 관찰을 합니다. 8월 전라도 밤하늘에서는 직녀성이 있는 거문고 자리와 견우성이 있는 독수리 자리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오후 2시부터 자정까지 하며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이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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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사기자협회에 공개적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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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친구 한 분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조사기자협회에서 발간한 19만 8000원 짜리 책에 대한 문의였다. 내용은 이랬다.


"올초 1월에 한국조사기자협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 땅, 독도'라는 제목의 사진책(1, 2권)이 사무실로 배달돼 왔습니다. 곧바로 사무실로 00기자협회 누구라면서 저를 매우 잘 아는 척 하면서 이야길 하길래 우리지역 기자모임인가 싶었습니다... 이때 암만 봐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요지는 '책 좀 사달라'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엔 검토해 보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책 내용이 뭐 같아서 반품을 했습니다. 근데 곧바로 다시 배송돼 오더라구요... 그러면서 책을 다시 구매할 것을 이야기해서 지금까지 걍 사무실 구석에 쳐박아 놓고 있었습니다.


근데 요 며칠 바짝 대금 독촉을 하고 있기에 도대체 이 단체가 뭐하는 곳인지, 이런 류의 사기?가 자주 있는 가 싶어 메세지로 문의를 드려봅니다. 한국조사기자협회나 사진조사기자협회? 이런 단체들이 실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단체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홈페이지에서는 판단할 근거들이 부족하더군요."


일방적으로 배송해온 19만 8000원 짜리 책.


한국조사기자협회 홈페이지.


과연 그랬다. 한국조사기자협회 홈페이지가 있긴 하지만, 전화번호도 나와 있지 않았다. 회장 인사말도 있었지만, 그 회장이란 분이 어느 신문사 소속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흔하다. 조사기자협회 뿐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00기자연맹'이니 뭐니 하는 단체를 만들어 그 단체명의로 고가의 책을 만들고, 기자를 사칭하여 사실상 반 강제로 책을 판매하는 일 말이다.


한국조사기자협회 명의로 온 계좌입금의뢰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을 보냈다.


"존재하는 단체이긴 한데, 수익사업으로 책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판매하는 게 아니라, 대개 판매대행업체에 맡깁니다. '00기자협회' 누구라고 전화하는 사람은 그 대행업체 직원일 겁니다. 기자를 사칭하는 거죠.


책을 사지 않더라도 절대 불이익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들 협회가 무슨 불이익을 줄 만한 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문은 해당 신문사에서 만드는 것이지, 그런 협회에서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협회에 소속된 기자도 00지역에는 없습니다. 00시에 있는 신문사의 경우 '조사기자'가 한 명도 없거든요.


설사 거기에 소속된 기자가 있을지라도, 그 기자가 신문을 앞세워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다시 전화가 온다면, 소속된 신문사가 어디인지, 기자 이름이 뭔지를 확실히 물어봐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실제 기자가 전화했다면, 그런 기자는 기자사회에서 매장됩니다.


책은 절대 사시지 마시고 다시 반품하십시오. 또 보내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하십시오. 실제 그런 식으로 책을 팔다가 구속된 사례도 있습니다."


한국조사기자협회 명의로 온 공문.


그러자 이런 답변이 왔다.


"답변 고맙습니다. 답변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얼마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고,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이었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국조사기자협회에 공개적으로 묻는다.


-정말 조사기자협회에서 이런 식으로 책을 직접 판매하는가.


-계좌입금의뢰서에 적혀 있는 '한국조사기자협회 연감부 김병순'이라는 사람이 실제 조사기자협회 소속 인물이 맞는가.


-만일 '한국조사기자협회 연감부'가 실제 조사기자협회 소속이 아니라면 협회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을 묵인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위의 공문들을 정말 한국조사기자협회가 발송한 사실이 맞는가.


-이런 식으로 책을 판매하는 게 기자윤리나 언론윤리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앞으로도 이런 식의 책 판매를 계속할 것인가.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동학혁명 생각하면 지금 농민운동 쪽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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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희식, 

치매 어머니와 함께 사는 

노동운동 출신 농민

 

1958년생인 그이는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58년 개띠입니다. 낳고 기른 어머니는 김정임씨랍니다. 어머니는 1922년생으로 14살에 시집와서 여섯 남매를 낳았습니다. 막내아들인 그이를 37살에 낳고 남편을 43살에 여의었습니다.

 

어머니 일생의 신산함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그이는 자기와 같은 개띠인 어머니를 올해로 8년째 모시고 있습니다. 태어난 고향에서 직선거리로 14km 정도, 육십령 고개만 넘으면 바로 나오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해발 620m 산골에서요.

 

벌써 아흔을 넘긴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잘 움직이지도 못한답니다.

 

 

진보운동과 함께한 전희식의 삶

 

그이를 처음 알게 된 때는 30년 전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벌어진 중공업 남성 노동자 파업으로 80년대 노동자 투쟁의 포문을 열었다는 1985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파업의 주역이었고 당시 이를 큼지막하게 보도한 신문과 방송 등 매체를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알았던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1982년 대학 들어가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4학년 당시는 졸업하면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여서, 그 이름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이를테면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던 것입니다.

 

파업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른 그이는 그 뒤로 줄곧 인천을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습니다. 나중에는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민중당 인천북갑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지내는 등 진보정당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로 적지 않게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그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으뜸으로 치는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들어갔으니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에 나서면서 어머니가 바라 마지않았을 ‘출세’는 기대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나 보통 진보운동과는 다른 삶

 

그이를 처음 만난 때는 2012년으로 기억됩니다. 2010년 그이가 펴낸 책 <엄마하고 나하고>를 읽고 경남도민일보에 서평을 쓴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제목이 ‘치매 걸린 팔순 어머니, 쉰 줄 막내아들의 시골살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된 뒤, 2012년 경남도민일보 자회사이면서 사회적기업인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를 설립·운영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전북 장수 그이가 사는 곳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 진보운동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그이는 말했습니다. “그 때는 아직 ‘귀농’이라는 말조차 있지 않았지요. 1995년인데, 문득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모두 접고 전북 완주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거의 20년 가까운 옛날, ‘귀농’이라는 낱말이 그 때도 있기는 했겠지만 대부분에게 낯선 개념이었고 특히 도시에서 진보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선택이었습니다. 운동으로 하는 ‘귀농’, 조직으로 하는 ‘귀농’은 운동권 통념상 인정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2010년 그이가 펴낸 책 <엄마하고 나하고>는 내용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또 감동적이기도 했고요. <엄마하고 나하고>는 그이가 어머니 김정임씨와 함께 쓴 책이랍니다. 어머니와 함께 쓴 책은 이밖에 또 있습니다. 2008년 세상에 나온 <똥꽃>이 그것입니다.

 

<똥꽃>도 <엄마하고 나하고>도 모두 어머니의 치매 덕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몸소 모시고 손수 봉양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과 말과 행동이 진보적이라 해도 아무나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강한 시절 몇 년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요? 6월 7일 그이를 만났을 때 바로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펴낸 <똥꽃>에서 밝힌 바가 있고 이를 두고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는 서평에서 이렇게 요약·정리했습니다.

 

 

“3년 전(2005년) 서울 큰형 집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단독주택 3층 두 평 남짓한 외딴방에서 기저귀를 찬 채 밥과 약을 받아먹으며 두문불출하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에게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며 하소연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일부러 찾아뵌 적이 없었고,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때나 형 집에 들른 김에 어머니께 인사드리는 정도였다. 한 번 얘기를 꺼내면 끝이 없고 냄새가 진동하는 어머니 방에 누구도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10년 전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고관절이 바스러져 철심을 넣은 뒤 아랫도리를 쓰지 못했고 귀도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 누워 지내면서 치매가 진행됐다. 작은형이 식사 때마다 어머니 틀니를 칫솔로 닦을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해 고개를 돌리곤 했던 그였으나 그날 벌겋게 짓무른 어머니 아랫도리와 하얗게 세어버린 체모를 보고 울었다.

 

‘그 많은 자식 키우면서 어머니가 똥오줌 묻은 옷이나 걸레를 빠신 햇수만큼은 다 못하더라도 두세 자식 몫은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내 건강한 시절 몇 년을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2006년 봄 식구들이 사는 전북 완주를 떠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에서 다 쓰러진 외딴 빈집을 얻어 고친 다음 식구들한테 알리고 이해를 구했습니다. 같은 해 9월 먼저 혼자 옮겨 간 뒤 2007년 2월부터 거기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 해 처음 거기 진달래가 피던 날 ‘똥꽃’도 피었습니다. 이를 두고 그이가 쓴 시가 있는데 가만 읽어보면 참 좋은 시이면서 동시에 잘 쓴 시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절창(絶唱)이라 해도 모자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감자 놓던 뒷밭 언덕에

 

연분홍 진달래 피었더니

 

방안에는

 

묵은 된장 같은 똥꽃이 활짝 피었네

 

어머니 옮겨 다니신 걸음마다

 

검노란 똥자국들

 

 

어머니 신산했던 세월이

 

방바닥 여기저기

 

이불 두 채에

 

고스란히 담겼네

 

어릴 적 내 봄날은

 

보리밭 밀밭에서

 

구릿한 수황냄새로 풍겨났지

 

어머니 창창하시던 그 시절 그때처럼

 

고색창연한 봄날이 방안에 가득 찼네

 

 

진달래꽃

 

몇 잎 따다

 

깔아 놓아야지.

 

 

그이가 바뀌고 다음에 어머니가 바뀌었으나

 

그러나 똥꽃의 주인공은 영 아니었습니다. “오래되었는지 작은 똥덩어리는 딱딱하게 말라붙었고  손이나 발에도 똥칠갑이었다.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내가 왔지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돌부처처럼 가만히 있었다. …… 어머니 눈은 겁을 머금고 있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겁먹은 눈초리.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앞서 사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비웃고 무시하고 또 잘못됐다며 고치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공포는 뿌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이는 반드시 존댓말을 썼고 드나들 때는 절을 올렸으며, 크고작은 집안일도 낱낱이 알리고 허락을 받는 등 ‘건강보다도 존엄’을 중히 여겼답니다.

 

전희식과 어머니가 함께 쓴 책 어디에 나오는 사진.

 

어머니가 ‘맘에 안 들면 당당하게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고’ 살도록 된 배경이 이렇습니다. 먼저 그이가 바뀌고 어머니가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뀐 어머니가 다시 그이를 바꿨습니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 좌충우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이는 이런 어머니에게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내어 깨달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엄마하고 나하고>에 나옵니다. “‘너 아니믄 내가 일찍 죽었을 끼다. 니가 날 살렸다’면서 새벽녘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애달파 하신다. 그러다 한 숨 자고 나면 표변하신다. 삶이란 그냥 한 바탕 꿈인 것을 온 몸으로 증언하신다.

 

어제 내가 한 선행을 잊으라는 것. 어제 내가 빠졌던 유혹을 넘어서라는 것. 어제 내가 저지른 실수에 더 이상 상심하지 말라는 것. 내일도 모레도 다 허상이요,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금 여기가 온전한 삶이라는 것.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내 미래라는 것.

 

기억 저 밑바닥으로 침전된 경험들은 정화의 과정에 던져진 것. 잊힘을 자축하라는 것. 실체가 아닌 것들을 왜 짊어지고 끙끙대냐고 오늘도 어머니는 피를 토하듯이 내게 이르신다.”

 

그이는 이렇게도 적었습니다. “내가 어머니랑 살면서 생기는 수도 없이 많은 심적 충돌들은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이 내 예측과 판단에서 벗어났다고 여기는 데 있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못하고) 나름 자기 생각에 따라 기대와 예상과 판단을 하기 십상이고, 그것들이 맞지 않을 때 마음에 괴로움과 좌절과 미움이 솟아난다는 얘기입니다.

 

‘생각이나 판단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바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데에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이 집 마당에서 함양 유림술도가에서 받은 전주를 마셨습니다.

 

전북에 살면서 경남도민일보 받아보더니

 

그이의 근황이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아 경향 각지를 오가면서 주어진 직분을 다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 대해 묻다가 지역신문 하나 없는 장수군 형편을 개탄하더니, 경남이 아닌 전북에 살면서도 어느 날 경남도민일보 구독을 불쑥 신청한 그이였습니다.

 

인문학을 주제로 삼아 이런저런 얘기를 오랫동안 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그이가 <장수신문> 창간에 나서고 지역 인문학 모임을 꾸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지난 8년 일관되게 세 가지를 해 왔어요. 어머니랑 같이 사는 일상과 농사, 그리고 사회적 관계입니다. 농사는 규모를 줄였습니다. 2500평에서 400평으로요. 어머니 덕분에 생각도 못했던 강의도 다니고 글쓰기도 하니까 시간이 모자라요.

 

집 뒤 400평만 무경운, 토종 씨앗을 구해, 혼작을 합니다. 고추와 깨를 같은 땅에 심는 등 섞어 기르면 상보관계가 있어서 좋습니다. 똥오줌 말고는 밭에서 나오는 잡초 따위만 거름을 씁니다.

 

어머니 모시고 글 쓰고 강의하고 시민단체 일하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하하. 특별히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서요. 농사, 어머니, 사회적 관계 자체가 다 글쓰고 강의하는 주제·소재니까요. 그리고 총체로 하나로 연결돼 있기도 하고….”

 

분명, 어머니 ‘덕분’이라 했습니다. 괜한 겸손은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치매 걸리고 거동까지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다면 <똥꽃>이나 <엄마하고 나하고>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테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 출연도 없었을 것이고 강의 요청이나 원고 청탁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더불어 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적어도 지금만큼은 클 수도 전면적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희식과 어머니가 함께 쓴 책 어디에 나오는 사진.

 

“여기 들어와 어머니 모신지 8년째거든요. 신체적인 쇠약함에 움직임이 약화되셨어요. ‘체위 변경’도 혼자서는 못하시고 숟가락질도 못하셔서 그런 수발까지 추가되는 생활입니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노쇠해 지시니까 캐어(care) 수고가 줄어듭니다. 어머니한테 죄송하지만, 전에는 할퀴고 때리고 꼬집고 하다가 이제는 거의 내 주도 아래 가능한 상황이 됐어요.

 

또 이건 불가사의한 일인데 굉장히 총명해지셨어요. 혼탁한 사고와 정서 불안정이 가시고 맑아지신 느낌을 받습니다. 눈이 멀어지면 청력이 좋아진다잖아요? 몸이 약해지시니 분별력이 커지는 것 같아요. 오늘 개한테 사료를 줬거든. 어머니가 가만 째려보더니 ‘개만 주고 나는 와 안 주노?’ 하셨어요. 치매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거든요.

 

여행도 자주 갑니다. 짐차에 가득 (캐어) 용품 싣고 잠자리까지 마련해 갑니다. 경남 거창 가조온천 같은 좋은 데서 목욕도 같이 하고요. 좋은 점이 많아요. 묵었던 모텔 주인이 건물 리모델링하면서 (탁자를 가리키며) 가져가라 해서 가져온 것이에요.

 

순창 벚꽃 필 때 놀러 나왔다가, 어머니 휠체어에 밀고 다니는데 어르신들이 ‘요양원에서 나왔소?’ 묻기에, ‘우리 어머니’라 했더니 좋아라 하시면서 칭찬을 한 보따리 얻은 적도 있습니다.(요즘 친자식이 늙은 부모 휠체어 미는 경우를 보셨는가요?)

 

어머니랑 같이 다니면 이런 흐뭇한 일화들이 많이 생깁니다. 남원 광한루에서는 아는 신부님을 만났는데, 노동운동 할 때 공장에서 알게 된 학생 출신 후배 운동가였는데, 어떻게 신부가 돼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렇게 만나 무척 반가웠어요.”

 

<장수신문>과 ‘농민생활인문학’도 주도

 

그이는 이날 경남도민일보가 아주 재미있고 잘 만든다고, 서울에서 발행되는 어느 신문보다 낫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지난 시절에는 경남도민일보 창간사와 ‘21가지 약속’, 규약·규정 따위를 달라고도 했었습니다. 분명 창간준비 2호까지 나온 <장수신문>과 관련돼 있을 것입니다.

 

 

“장수신문 발행 주체인 장수언론협동조합 발기인일 뿐 별다른 역할은 없습니다. 운영위원회나 총회를 할 때 원칙이나 이런 데 대한 논의 말고 구체적으로 독자 확보 사례 발표라든지 부문별 정보·자료 수집해 집중하는 일 이런 것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실제 필요한 것들이거든요.

 

광고 단가도 정교하게 다듬어 장기 계약 단가는 따로 책정하고 이미지 광고도 달리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지역 신문에서는, 먼저 지역 판세나 주민 생활 정서 요구 판독이 전제돼야 합니다만, 비판과 견제는 10% 정도로 해야 하지 중심이 돼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역에 활력을 넣어주고 관심사를 포착하고 확산하는 신문이 돼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생활 속 지면 사랑방으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정치도 삶 속에서 삶과 연결되는 이슈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고향에 대한 막연한 애정·애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여가 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장수신문>을 생각합니다. 장수에 사는 사람, 장수 출신 사람, 장수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이 돼 가겠다고 생각합니다.”

 

(함께한 <장수신문> 최덕현 편집장이 ‘독자 확보를 무지막지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신문 만들 때 뒤에서 백그라운드를 했습니다. (장수시민연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데) 시민연대에서 힘을 실어줬으며 신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데 역할을 많이 했어요’라고 거들었습니다.)

 

그이는 지역 인문학 공부 모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지난해는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어떻게 꾸려갈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인터넷에서 봤더니 이미 ‘농민생활인문학-닦음과 행함’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이 집안 마당에 심겨 있는 질경이.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 대표 3월에 그만뒀어요. 대신 녹색당 ‘농업먹거리특별위원장’을 맡았어요. 녹색당 농민당원들의 일색화, 녹색적 가치를 농업에서 실현한다, 농사와 삶을 그렇게 꾸려간다는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물론 정당이니까 농업 정책 분야에서 농업 가치를 녹색화하는 것입니다. 2020년대에도 지금 농법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자해농업입니다. 자해문명이고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같은 요인을 더 가속화하는 농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형 마트에 가면 친환경농산물이나 유기농산물 코너가 따로 있잖아요? 그렇지만 선진 외국에는 유기농·친환경을 넘어서 이미 ‘소농’ 코너가 생기고 있습니다. 석유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인 농사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잔에 술을 따르고 있습니다.

 

제가 대표를 맡고 협동조합 형식인데 아무나 가입비와 월회비 1만원씩만 내면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 강좌는 무료로 비회원도 누구에게나 개방되지만 회원은 월회비를 내야 합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돈 내는 자체를 긍지로 삼을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지요.

 

‘농민’과 ‘생활’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삶의 근본을 들여다보고 만물 존재의 근원이 한 뿌리임을 보자는 얘기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모두 농민입니다. 전문가가 따로 있어서 ‘너희들도 인문적 소양을 좀 높여라’ 이런 인문학이 아닙니다.

 

실제 삶이 바뀌는 인문학 모임, 닦음과 행함이 뜻하는 바가 바로 자기 성찰과 자기 성숙입니다. 모든 지식과 강의는 나를 더욱 고양시키고 온유(溫柔)하게 만들고 베풀게 만들고, 생활과 결합되도록 하고 그런 것이 또 당연히 사회적 맥락에 놓이게 합니다.

 

120년 전 선조들은 동학농민전쟁에 나섰습니다. ‘척양척왜(斥洋斥倭)’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내걸고 말입니다. 요즘처럼 쌀값 양파값 마늘값 떨어졌다고 걱정하지는 않았거든요. 동학혁명 생각하면 지금 농민운동이 ‘쪽팔립니다’.

 

여태껏 농민들이 농민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이슈를 제기해 본 적이 없어요. 동학농민전쟁 120주년인데도 농민조직에서 성명서 하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얼핏, 그이가 고향 함양이나 아니면 경남 어디로 옮겨올 수는 없을까 싶었습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지역 사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남달라보였기 때문이랍니다.

 

또 어머니를 모시면서 더욱 그렇게 바뀌었지 싶은데, 그 욕심 없는 모습 또한 예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경남과 창원에 그이처럼 욕심 없는 존재가 무척 드물다는 생각과 함께 말씀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동시에 장수군민이지 않습니까?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일이 주어진다면 말씀이지요. 지금은 집중해서 장수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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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한 책 판매에 대한 한국조사기자협회의 답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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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조사기자협회에 공개적으로 묻는다'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링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공감, 댓글, 공유해주셨다.


그날이 7월 31일이었고, 8월 3일까지 협회의 답변이 없어 다시 한 번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렸다.


그랬더니 전화와 함께 답변이 왔다. 그러나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기엔 부족했다.



애초 내 질문은 이랬다.


-정말 조사기자협회에서 이런 식으로 책을 직접 판매하는가.


-계좌입금의뢰서에 적혀 있는 '한국조사기자협회 연감부 김병순'이라는 사람이 실제 조사기자협회 소속 인물이 맞는가.


-만일 '한국조사기자협회 연감부'가 실제 조사기자협회 소속이 아니라면 협회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을 묵인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위의 공문들을 정말 한국조사기자협회가 발송한 사실이 맞는가.


-이런 식으로 책을 판매하는 게 기자윤리나 언론윤리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앞으로도 이런 식의 책 판매를 계속할 것인가.


이에 대한 조사기자협회의 답변 전문을 여기에 올린다. 독자님들도 과연 이런 식의 책 판매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나 상식을 가진 시민의 입장에서 납득할만한 답변인지 판단해주시길 바란다.


김주완 국장님,

안녕하세요?

 

본 (사)한국조사기자협회에서 발행 된 《대한민국 땅 독도》책이 판매의 잘못으로 인하여 귀 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된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본 협회는 1987년 설립된 전국 신문 방송 조사부 회원들이 소속된 공신력있는 단체로서 언론윤리 및 언론발전에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인의 연락처를 주시면 피해를 본 부분에 대하여 꼭 배상을 하겠습니다. 아울러 본 협회 연감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연감부에 절대 무리한 판매를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번 일을 자성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겠습니다. 


2014년 8월 4일 

(사)한국조사기자협회 회장 김규회 

(사)한국조사기자협회 편집실장 김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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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 체험 - 남해 문항마을 사천 늑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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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창원교통방송에서 했던 여행 안내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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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름에 갯벌 체험 할 수 있는 데를 좀 소개할까 합니다. 물론, 특히 남해군 같은 경우 남해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갯벌 체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안내를 자세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홈페이지를 활용하면 좋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요, 그러면서 저는 제가 경험해본 데를 두 군데 말씀드리려 합니다.

 

앉아서 마냥 쉬기 좋은 늑도

 

하나는 사천에 있고 하나는 남해에 있습니다. 하나는 입장료가 없고 하나는 입장료가 있습니다. 먼저 사천 늑도마을입니다. 조그만 고기잡이 항구까지 갖춘 어촌인데요,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가는 한가운데 섬마을입니다.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국제 항구 유적이 발견되기도 한 곳인데요, 여기 들어가서 선착장을 지난 다음 끝까지 가면 갯벌이 나옵니다. 진흙 같은 펄이 많지 않고 바위랑 자갈 같은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 갯벌에서는 조개 게 쏙 따위를 캐고 잡는 즐거움보다는 그냥 앉아서 쉴 수 있는 즐거움 보람이 있습니다.

 

너르고 편편한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고 또 해안을 따라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는데다 잎사귀 서걱대는 소리가 좋은 대나무 숲도 있습니다. 바다로는 툭 트여 있어서 대체로 언제나 바람이 불어대는 편입니다.

 

가족 단위로 젊은 부부들이 어린아이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고요, 50대 60대들 먹을거리 간단하게 챙겨와서 자리 깔고 먹고 놀고 여유있게 지내다가 해가 늬엿늬엿 넘어갈 즈음 가볍게 자리 털고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이들 놀거리도 풍성한 사천 늑도

 

아이들은 무엇 하며 노느냐고요? 아이들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저절로 놀아집니다. 미역 같은 바다풀들을 갖고 놀기도 하고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굴이나 따개비 거북손 홍합 같은 것 따면서 놀기도 합니다. 펄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뽈뽈뽈 옆으로 걷는 게라든지 고둥 같은 것들은 다른 어디 못지 않게 많이 있어서 아이들은 거기서 눈길을 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도 어른도 다함께 놀기 좋은 그런 갯가인데요, 또 지나치게 크지도 않아서 아담한 느낌, 포근하게 감싸 안기는 느낌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런 느낌이나 분위기는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내지르는 함성이나 감탄이 간혹 깨뜨립니다.

 

성질 급한 경우는 아예 처음부터 바닷물에 뛰어들 수도 있고 대부분은 바위를 뒤집어서 게와 조개를 잡습니다. 그렇게 잡은 것들은 돌아갈 때 바다로 내보내 줘도 되고 물병 등에 담아 집에 갖고 가도 됩니다.

 

사천 늑도는 공짜지만 남해 문항은 유료

 

다음은 남해군 설천면 문항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이미 체험마을로 전국에 이름을 크게 알렸습니다. 여기는 갯벌도 좋고 마을 앞에 조그만 섬들도 좋습니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 걸어서 들어갈 수도 있는데, 섬그늘이 꽤나 그럴 듯합니다.

 

사천 늑도마을 갯가는 공짜지만 문항마을은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그러면 조그만 바구니와 호미를 내어주는데요, 거기 가득 채우는 한도까지는 마음껏 조개 등속을 캐도 됩니다. 이렇게 잡을 수 있는 분량을 정해주는 까닭은, 갯벌 자체의 생산성을 그대로 계속 지속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습니다.

 

주말이면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찾는 편인데요, 아주 어린 아이들 데리고 오는 부모들이 꽤 많습니다. 군데군데 바닷물이 남아 있고 조개 따위가 스며 있는 데서는 꼬물꼬물 거품이 입니다. 이것들을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들어가 캐내는 것입니다.

 

별로 경험이 없는 보통 사람이 조개를 잘 캐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문항마을 주민도 갯벌에 들어가 조개를 캐는데요, 그 분들한테 따라붙어 갖고 어떤 기미가 보이는 어떤 장소를 캐면 되는지를 묻고 보고 듣고 따라하면 실적이 좀더 나아집니다.

 

후릿그물체험으로는 공동체의식 함양도

 

여기서는 개인 말고 단체로도 갯벌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개맥이 체험과 후릿그물체험인데요, 사람 숫자가 대략 50명 이상이면 적당합니다. 공동 작업을 할 수 있고 협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나 기관·단체에서 공동체의식을 기르는 목적으로 하면 딱 좋습니다.

 

 

개맥이는 개를 막는다는 뜻인데요, 바닷물이 밀려든 다음 갯가에 꽂아뒀던 그물을 세워 밀물과 함께 들어왔던 고기랑 오징어·가재 같은 해산물을 가둔 다음 잡는 것입니다. 후릿그물은 그물을 후린다는 뜻입니다. 썰물이 시작할 즈음에 허리께까지 물이 들어차는 정도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합니다.

 

타고 들어간 배를 중심으로 삼아 왼쪽과 오른쪽으로 둥글게 300m~500m 칩니다. 이렇게 해서 밀물을 타고 들어와 있던 물고기들을 가둔 다음, 물이 좀더 빠져 갖고 허벅지 즈음에서 출렁일 정도가 되면 양쪽에서 20명~30명 정도가 그물을 힘껏 잡아당깁니다.

 

이렇게 해서 거두면 보통 물고기는 물론 낙지·문어·갑오징어·새우·가재 등등 갖은 해물들이 걸려 올라옵니다. 이것들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아 먹을 수 있는데요, 그 싱싱함과 향그러움은 이루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게다가 공동으로 땀흘린 뒤끝이기 때문에,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 친목도 더욱 돈독해진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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