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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탁족 주물럭 온천욕 모두 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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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창원교통방송 방송 원고입니다. 들어가는 첫머리에 날씨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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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눅눅하고 후텁지근합니다. 비까지 뿌리고 바람도 불어올 모양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가까운 숲에 들어가 나무그늘에서 매미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탁족(濯足)을 하면서 여름을 났다는데요, 우리 사는 근처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명소가 있어서 소개하려 합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거락 마을숲입니다. 돼지고기 소고기 주물럭으로 이름난 대정마을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요, 일대가 한 때는 사람 사는 중심지였는지 중학교도 있었고 우체국도 있었던 자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는 여항산에서 시작돼 둔덕마을을 거쳐 창포만 너른 갯벌에다 몸을 푸는 진전천이 흘러가는 중간허리쯤 되는 자리로, 바로 거락 마을숲이 이 진전천을 따라 제방에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2km 정도 되는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대부분 오래 된 나무로 밑둥치가 서너 아름은 되는 크기입니다.

 

겨울에 찍은 사진입니다. 대단합니다.

 

요즘 도심 가까운 동네에서 이토록 무성한 마을숲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람한 나무들은 진전천 개울 흐르는 물에까지 그늘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실 진전천처럼 물이 좋은 데는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데가 모두 이렇게 사람들한테 쉼터가 돼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어서 한낮에는 뙈약볕에 그대로 노출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무랑 그늘이랑 물이랑이 아주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장소가 바로 여기 대정 마을 안쪽 거락 마을숲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는 물이 흐르는 바닥이 편편하고 물도 흐름이 빠르지 않아 전혀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또 말씀드린대로 숲이 아주 좋기 때문에 숲을 구경하고 누리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피서가 되고 더 나아가 훌륭한 구경거리까지 됩니다. 나무가 줄지어 심겨 있는 제방을 따라 산책하면서 나무들 껍질을 쓰다듬고 잎사귀를 만져보며 무엇과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헤아려보는 재미도 있는 것입니다.

 

골옥방 나무 아래로 흐르는 탁족처 개울.

 

그리고 거락 마을숲에서 여항산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그야말로 탁족을 하기에 알맞은 데가 나옵니다. 골옥방이라는 마을이 들어서 있는 조그만 골짜기 개울물인데요, 길섶과 들판과 논밭 두렁 따위에는 달맞이꽃 개망초 지칭개 같은 들풀과 호박꽃 참깨꽃 도라지꽃 같은 것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술인방 옥방 들담 같은 이름이 정겨운 시골 마을을 지나 옥방교를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치오르면 나오는 동네입니다. 여기 골옥방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개울이 조그맣고 여울이나 웅덩이도 없지만 한여름 가물 때도 어지간해서는 개울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마을 아래위로 800m 정도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탁족처(濯足處)로 내어주고 있는데요, 마을 한가운데 다리를 기준으로 위쪽에는 나무그늘이 없어 파라솔 따위 햇살가리개를 쳐야 하지만 아래쪽 한 300m는 갖은 나무들이 가지와 이파리를 개울 위로 늘어뜨리고 있어 아주 그럴 듯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거락 마을숲처럼 왕성한 놀이터는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개울 자체가 너르지 않아 그런 따위는 아예 생각부터 할 수 없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거락마을숲이나 골옥방 탁족처가 갖춘 또다른 장점은 대정마을 주물럭입니다. 잘 놀고 난 다음 제대로 챙겨 먹는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길 수 없을 만큼 대단합니다. 대정마을에는 그런 주물럭집이 늘어서 있고 다들 고기도 좋거니와 값이 비싸지도 않습니다. 어느 밥집에 들어가셔도 대체로 만족하실 수 있습니다.

 

김주완 선배 사진을 좀 빌려왔습니다.

 

또하나 미덕은 거기서 마산쪽으로 나오다가 마주치는 양촌온천입니다. 창녕 부곡온천이나 창원 북면온천처럼 요란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리고 어지간하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온천이지만, 물이 따뜻하고 매끄럽기는 어디에 내놓아도 처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즐거운 물놀이와 탁족, 그리고 푸짐한 음식에 온천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퍽 훌륭한 피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하나 새겨두실 일은, 이처럼 시골 농촌 마을 가까운 데로 놀러 가시면 먼저 콩이나 옥수수나 들깨 같은 농작물이 손을 타거나 해코지를 입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노는 자리 바로 옆에 그런 것들이 자라는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이런 작물이 손을 타면 한 잎 뜯어가는 이에게는 별 일 아닐는지 몰라도 여기 주민들에게는 크게 타격이 될 수밖에 없겠기 때문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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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보람 : 떡이 먼저일까? 밥이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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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2009년 3월 펴낸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여행>을 보면 84쪽과 85쪽에 시루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말해두자면 이 책은 옛적 가야 사람들의 삶을 잘 그려놓고 있어서 저는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아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스크루를 전기 따위 동력으로 움직여 배를 나아가게 하는 지금은 물이 깊고 밀물과 썰물 차이가 적은 데가 좋은 항구지만 그렇지 않았던 옛날에는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 차이가 큰 데가 좋은 항구였다는 지적(41쪽)이라든지,

 

경북 고령 대가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대가야왕(형) 뇌질주일(腦窒朱日)과 금관국왕(동생) 뇌질청예(腦窒靑裔)를 제각각 ‘붉은 해’와 ‘새파란 후예’라고 단박에 정리해 버리는 장면(152쪽)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시대 여러 토기들.

 

말하자면 가야 역사는 물론 옛날 사람들의 일상을 재구성해보는 데에 많은 영감을 주는 저작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가운데에 앞서 말한 시루 이야기를 읽었으니 저로서는 그런 서술이 잘못됐으리라고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현재 김해시청의 자리와 그 주변은 가야의 부뚜막이 설치된 여러 채의 집자리가 발견된 부원동 유적입니다. …… 토기의 바닥에 원형(圓形)이나 장방형 구멍이 뚫린 시루도 있었습니다.

 

사루는 증기로 곡물을 찌는 질그릇입니다만, 출토된 토기에서 시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밥 같은 주식보다는 떡처럼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데 가끔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설이나 추석 때 부뚜막에 솥을 걸고 물을 끓여 시루에 떡을 찌던 가야인의 모습을 그려보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밥 같은 주식보다는 떡처럼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데 가끔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입니다.

 

그러다 2011년 황교익이라는 맛칼럼니스트가 쓴 <한국음식문화박물지>를 봤습니다. 마산 출신이지요. 여기서 황교익은 떡과 밥을 두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는 집 모양 토기.

 

“찹쌀은 시루에 쪄서 떡판에 올린 후 떡메로 쳐서 떡을 만든다. 쫄깃한 식감이 있어 찰떡이라 한다. 맵쌀은 물에 불려서 가루를 낸 후 찌는 것이 일반적이다. 쌀가루에 쪄낸 상태의 것을 시루떡이라 하고 이를 다시 치대어 길쭉하게 뽑은 것을 가래떡이라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떡을 먹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삼국시대 유물 중 유독 많은 것이 시루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곡물을 가루 내거나 그 알곡을 쪄서 먹은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삼국유사에 밥보다 떡에 관한 일화가 먼저 나온다. 서기 17년 남해왕이 죽자 노례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놓고 양보를 하는데, 탈해가 성지인(聖智人)은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조상들이 쌀로 밥을 지어 일상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밥보다 떡이 더 오래 우리 민족과 함께해온 음식인 것이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옛적과 이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착각을 했구나, 그 때도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떡을 찌고 밥을 지었으리라 생각을 했구나!’

 

국립김해박물관 부뚜막과 시루. 앞에 놓인 사진은 가야 사람들이 썼던 옻칠 그릇.

 

게다가 옛날에는 지금처럼 알곡 껍질을 까는 기술이 발전해 있지 못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갈돌이라든지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는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밥과 떡이 옛날에는 뚜렷하게 구분돼 있지도 않았고 밥이든 떡이든 겨가 섞여 있기는 다반사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쌀이든 보리든 알곡을 물과 함께 토기에 넣고 끓여 먹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죽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래에 구멍을 뚫은 시루로 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찐밥이라 할 수도 있고 또는 지금 같으면 떡메로 내려쳐서 으깨기 전에 떡과 같은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쌀이든 보리든 곱게 갈아서 가루를 내어 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를 지난 다음 금속으로 솥을 만들게 되면서 지금과 같은 밥을 지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밥은 떡보다 나중인 것입니다.

 

그러다 요즘 들어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에서 펴낸 <가야인의 삶, 그리고 흔적>(2011년 12월 초판 발행)을 읽었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썼다고는 절대 얘기할 수 없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름 그간 역사 연구가 이룩한 성과는 담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12쪽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15세기 조선시대에도 농경지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율은 20%”라고요. 옛날에는 떡을 쌀이 아닌 다른 잡곡으로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떡을 만들어 먹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일러주는 구절입니다.

 

139쪽에서는, “쇠솥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짓는 밥의 형태로 바뀐 것”이며 “쇠솥은 …… 남한에서는 5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출현한다. ……일반인들에게도 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밥이 됐든 떡이 됐든 시루로 쪄서 먹는 일이 오랫동안 이어졌음을 뜻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재료가 쌀이었을 개연성은 그다지 높지가 않습니다.

 

국립김해박물관의 갖은 가야시대 토기들.

 

어떠신가요? 혼란스럽지 않으신가요? 저는 떡과 밥과 죽이 혼란스럽고 쌀과 보리와 다른 곡물이 혼란스럽습니다. 그 까닭은 예전과 이제를 나눠 생각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예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살았으리라는 여김, 지금과 마찬가지로 떡을 해 먹고 밥을 해 먹고 죽을 해 먹고 살았으리라는 여김, 그 때 시루도 지금 시루와 마찬가지 구실을 했으리라는 여김, 그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솥이 따로 있고 시루가 따로 있었으리라는 여김을 제가 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그런 관성에서 제 생각이 벗어나지 못했던 때문입니다. 역사 또는 역사를 통해 예와 이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게 이제를 통해 옛날을 보지 않고 옛날을 재구성해 바로 그 옛날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우리가 살아내는 ‘지금 여기’도 한낱 스쳐 지나가는 순간일 따름이고, 바로 내일만 돼도 오늘을 살았던 대부분이 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겠지요. 물론 이렇게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은 그대로 남겠지만 말씀입니다.

 

여기에 더해 오늘의 눈으로 어제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 더 나아가 오늘의 눈으로 내일을 본다면 정말 큰 일 난다는 것까지 깨칠 수 있다면 더욱 큰 다행이겠지요.

 

김훤주

 

※ 올해 7월 발행된 <경남작가> 25집에 실은 글을 아주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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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귀 씻고 지리산 신선이 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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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저녁 창원교통방송에서 했던 방송 원고입니다. 고운 최치원 전설이 어려 있는 지리산 골짜기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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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둘째 주말은 전설이 함께하는 지리산 골짜기로 여러분을 모셔볼까 합니다. 신라 시대 이름을 떨쳤던 고운 최치원 관련입니다. 최치원은 우리 경남 여러 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요, 가까운 마산의 월영대도 고운 선생이 노닌 자리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양에는 당신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인공숲을 조성했는데, 바로 상림입니다. 또 가야산에도 머문 적이 있는데요, 최치원의 형이 가야산 해인사에 스님으로 있었습니다. 홍류동 골짜기 농산정에 가면 최치원이 읊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에도 고운 관련 유물·유적이 많습니다. 먼저 쌍계사 들머리 한자로 바위에다 새긴 쌍계(雙溪) 석문(石門) 넉 자가 최치원의 솜씨라 하고요, 경내에 있는 진감선사대공영탑비 비문은 최치원이 지은 것입니다. 불일폭포 가는 길에도 최치원이 두루미를 불러서 타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서린 환학대도 있습니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

 

어쨌거나 오늘 소개하려는 데는 세이암인데요, 쌍계사 들머리에서 아자방으로 이름난 칠불사 쪽으로 4km정도 거슬러 오르면 시냇가에 있습니다. 의신마을에서 내려오는 화개천이 여기서 너럭바위를 만나 넘쳐흐릅니다.

 

이 너럭바위에 한자로 세이암, 씻을 세(洗) 귀 이(耳) 바위 암(嵓)이라 적혀 있습니다. 귀를 씻은 바위라는 뜻이지요. 물론 바로 옆 바위와 맞은편 세워져 있는 바위에도 이런저런 글자들이 새겨져 있지만 모두 최치원 글씨가 아닙니다.

 

오른편에 洗 耳 岩(글자는 다릅니다)이라 쓰여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손가락으로 세이암 석 자를 바위에다 새겼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력이 세었다는 것입니다. 최치원이 여기서 귀를 씻은 뜻은,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 속세에서 더럽고 어지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물이 많은 뿐만 아니라 맑기까지 합니다. 물이 풍성한 덕분에 물고기가 유난히 많습니다. 산골짜기답지 않게 사람 손 하나보다 더 큰 물고기도 참 많은데요, 반면에 게는 전혀 없다고 합니다. 바위도 많고 조그만 돌들도 많아 게들이 즐겨 살만한데도 게가 없는 까닭은 역시 최치원에게 있습니다.

 

왼편 너럭바위가 세이암입니다.

여기서 최치원이 몸을 씻고 있는데 그 발가락을 게가 물었습니다. 최치원은 게를 잡아 멀리 던지며 “다시는 여기서 사람을 물지 말라”고 했더니 그 뒤로 사람을 무는 게가 사라졌다는 전설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물에 몸을 담그고 맞은편을 바라보면 언덕배기에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범왕리 푸조나무입니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 앞에 있는데요 이 나무에도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여기서 귀를 씻고 세이암 글자를 새긴 다음 지리산 신흥사로 들어갈 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란 나무가 바로 이 푸조나무입니다. 고운 최치원은 이렇게 입산을 하면서,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고 없을 것이라 했답니다.

 

푸조나무는 여태 죽지 않고 살아서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운 또한 신선이 되어 지리산 골짜기 어디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 골짜기에 들렀다면 그냥 세이암에 발만 담그고 바로 가기는 어째 좀 아쉽고 아깝습니다.

 

드나들면서 쌍계사나 칠불사에도 한 번 걸음하면 좋겠습니다. 쌍계사도 칠불사도 매우 유명하지만, 그래도 쌍계사에 가시면 대웅전 오른편 옆 자리에 놓인 마애불상은 한 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무척 맑고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한테 보여주면서 한 번 쓰다듬어 보라고 하면 아주 좋아합니다.

 

마애불과 더불어, 쌍계사 대웅전 둘레 투박한 꽃담장도 볼만합니다.

칠불사는, 김해 가락국 김수로왕와 허황옥의 일곱 아들이 출가한 절간으로 그와 관련된 아자방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장에서 직접 눈에 담을 수 있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칠불사에 가시면 영지 둘레를 한 번 거닐어 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한자로 그림자 영(影) 못 지(池)를 써서 그림자 연못이 되는데요, 출가한 일곱 왕자가 보고 싶어서 수로왕 일행이 찾아 왔지만, 자식들이 다들 용맹정진 중인지라 만나보지 못하고, 여기 연못에 비친 왕자들 그림자만 보고는 돌아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나무그늘이 좋고 아늑한 분위기도 그럴 듯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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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즐기고 누리는 장흥 물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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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물축제 다녀왔습니다. 올해로 일곱 번째랍니다. 장흥 물축제는 이미 성공한 축제로 이름나 있습니다. 가서 보니 과연 그러했습니다. 올해는 태풍이랑 겹쳐지는 바람에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물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 즐거워하는 표정에서 그 ‘성공’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즐거워할까요? 어째서 장흥 물축제가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 핵심은 단순함에 있었습니다. 장흥 물축제는 여러 가지를 늘어놓지 않습니다. 물을 갖고 즐길 수 있는 몇몇을 정하고는, 오로지 그것에 집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놀이와 물고기 잡기가 그것이었습니다. 가 보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다른 것도 여럿 준비돼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말 그대로 들러리일 따름입니다. 장흥을 남북으로 가르는 탐진강을 활용해 무더운 여름 한 때를 오로지 물놀이만 하고 물고기 잡기에만 집중해 즐길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지상최대의 물싸움’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물놀이는 날마다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열립니다. 호스에서 아주 센 압력을 받아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곳곳에서 쏟아져 내립니다. 준비된 풀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그 물줄기를 맞으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물총 물바가지 물풍선 따위를 갖고 서로에게 물을 흩뿌리며 한바탕 놀이를 합니다. 진짜, ‘아水라장’이었습니다. 참여하는 대부분은 식구 친구 연인끼리든 무리지어 오게 마련인데, 이 ‘지상최대의 물싸움’ 놀이터에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놀아제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리 난간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 모습.


이런 즐거움은 실제 이 ‘지상최대의 물싸움’ 한복판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실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한 시간 동안 원기왕성하게 놀았으면 지칠만도 한데도-지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인데도, 웬지 아쉬워하는 표정이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읽힐 정도였습니다. 


어린아이 물에 젖어 삐죽대는 엉덩이가 귀엽습니다.


지상최대 물싸움을 마친 뒤 진행 요원들이 참여한 이들 요청으로 함께 사진을 찍혀주는 모습.


‘지상최대의 물싸움’이 끝나자 바로 ‘물고기 잡기 체험’이 펼쳐졌습니다. ‘맨손으로’ 하는 체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반두라든지 연장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공짜로 즐기는 ‘지상최대의 물싸움’과 달리 ‘물고기 잡기 체험’은 입장료를 받고 있었습니다만, 그래야 1000~3000원이어서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공짜로 탈 수 있는 배.


공짜로 탈 수 있는 워터볼과 바나나보트.


제가 둘러본 바로는, 이 물고기 잡기 체험과 수영장 말고는 이렇게 입장료를 받는 데가 전혀 없었습니다. 워터볼 체험, 바나나보트 타기, 그리고 배 타기 등등은 모두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무조건 ‘공짜로’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오히려 한 판 신나게 하루종일 놀면서 이런 정도는 부담해야 맞지 않겠느냐 여기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재수가 좋아 물고기를 한 마리라도 잡게 되면 1000~3000원 본전은 충분히 되찾고도 남음이 있으니까요. 


수영장 매표소.


사람들은 반두 따위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고기를 몹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기 딴에는 아주 잽싸게 반두를 들어올립니다. 그렇지만 물 속에서는 물고기가 사람보다 빠른가 봅니다. 물고기가 담겨 있는 반두보다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반두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고 통 잡히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우와!’ 하는 환성이 여기저기서 터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진행요원은 이렇게 저렇게 물고기를 잡는 요령을 일러주기도 하고요, 참여하는 사람들이 함께 협동해 좀더 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앞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이렇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글게 빙 둘러서게 합니다. 그리고는 반두 따위를 바닥까지 내리게 한 다음 앞으로 모여들게 합니다. 그러면 물고기들도 쫓겨 모여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서로 부딪힐 정도로 좁아졌을 즈음 호각을 불러 한꺼번에 반두를 들어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물론 이러거나 말거나 물고기가 사람을 피해 몰려 있으리라 짐작이 되는 가장자리를 따라 아랑곳없이 반두질을 해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니 이 물고기 잡기 체험 또한 ‘물놀이’였습니다. 



더운 여름날 그것도 흐르는 물속에 들어 있다는 자체가 즐겁고, 그 흐르는 물 속에서 첨벙첨벙첨벙대면서 이리저리 대중없이 뛰어다닌다는 즐거움도 작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크든작든 물고기를 잡게 되면 그것은 바로 ‘덤’이 될 테고요. 




다녀온 날은 8월 7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제가 본 것이 전부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장흥 물축제는 이렇듯 흥겨움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자리였습니다. ‘지상최대의 물싸움’ 아니라도 탐진강 어디나 들어가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여러 곳에 자리가 마련돼 있었고요, 물놀이에 뛰어들지 않은(또는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노는 모습 구경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돼 있었습니다. 




또 아무 데서나 적당하게 자리를 깔고 함께 온 사람들끼리 먹고 놀 수도 있었고요 여러 가지 군것질을 하거나 출출한 배를 체울 수 있는 음식거리도 알맞추 장만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 고맙게 여겨지는 것은 장흥 사람 또는 진행요원들의 싹싹한 태도였습니다. 여러 군데 축제를 다녀봤지만 그 주관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크게 선심 쓰는 주인이 피우는 거드럼 같은 것이 느껴질 때가많았습니다만 여기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한결같이 공손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이들 사이에서 어떤 공동체 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데, 거기 쳐져 있던 안내 천막에서, 20대 젊은이가 중학생 두 아이에게, 목마를 텐데 물이라도 마시라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혀주는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식조차 느껴졌던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이들은 일당 몇 푼을 위해 나선 그런 알바가 아니었습니다. 장흥 물축제의 성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동지가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장흥 물축제의 단순함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흥 물축제는 좌고우면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참여하는 이들의 즐거움과 누림이 대단해지기만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물축제!!!! 미소와 친절이 성공을 좌우합니다”고 적힌 펼침막이 이런 좌고우면하지 않음을 웅변하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다른 축제하는 데 가 보면 이렇습니다. “친절과 예의로 문화시민의 긍지를 지킵시다.” 


친절·예의·미소 따위를 ‘문화시민의 긍지’로 에두르느냐 아니면 ‘물축제의 성공’으로 직결시키느냐의 차이는 제가 보기에 작지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장흥의 관·민은 ‘먹고사니즘’을 위해 물축제를 만들었습니다. 장흥의 또다른 명물인 토요시장도 제가 보기에는 또다른 ‘먹고사니즘’의 산물입니다. 


먹을거리 파는 장소.


그런 토요시장이 만들어진 때가 2005년입니다. 물축제는 2008년 시작됐습니다. 그러므로 물축제는 토요시장의 성공을 위해, 장흥에서 나는 이런저런 특산물품의 성공적인 판매를 위해 기획됐습니다. 그렇다면 물축제가 성공을 해야 합니다. 


성공을 하려면 참여하는 이들이 즐거워야 하기에 그 즐거움의 극대화를 위해 ‘지상최대의 물싸움’과 ‘물고기 잡기 체험’에 집중을 했고 이런 데에 장흥의 관·민이 동감·공감하면서 지금처럼 진행이 웃음 속에서 친절하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이런 마음만 바탕이 된다면 장흥 물축제는 성공하지 아니할 수 없는 그런 축제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축제의 즐거움은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여하는 이들의 몫이다, 참여하는 이들이 먼저 즐거워해야지 준비하는 사람도 즐거워질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까닭만으로도 내년 장흥 물축제가 새삼스럽게 기다려지기도 한답니다. 


덧붙임 : 사는 데가 경상도라서 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경우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경남 창원 옛 마산에 삽니다. 자동차를 몰고 가면 2시 30분~3시간이 걸립니다. 저는 아침 9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장흥 토요시장에는 정오 즈음에 도착했습니다. 



밥 먹고 장 보고 하는 데는 2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오후 2시면 밥 먹기와 장 보기를 마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 이런 사정까지 고려한 결과이지 싶은데요, 장흥 물축제의 킬러 콘텐츠는 오후 2시부터 선을 보입니다. 


‘지상최대의 뭇싸움’은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동안, ‘민물고기 잡기 체험’은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인가 하는 것입니다. 잘라 말하자면, 경상도에서 당일치기로 오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고, 하룻밤 묵기라도 한다면 더 좋은 그런 콘텐츠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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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물축제- 좋은 먹을거리가 성공의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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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물축제가 나름 성공을 거둔 까닭을 저는 먹을거리에서 찾습니다. 조선 팔도 이런저런 축제에 가보면 그야말로 조선 팔도 먹을거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장흥 물축제에는 조선 팔도 먹을거리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장흥 명물 먹을거리들을 더 쉽게 맛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흥 명물 먹을거리들은 날리지가 않습니다. 정말 잘도 만들어서 내놓습니다. 얄궂은 양념을 쓰지도 않고 얄궂은 재료를 쓰지도 않습니다. 대표로 장흥삼합을 들 수 있습니다. 장흥 명물인 소고기와 키조개와 표고버섯을 재료로 삼습니다.

 

장흥은 사람 숫자보다 소가 숫자가 많은 고장입니다. 그만큼 정성 들여 키우는 대표 명물이라는 말씀입니다. 키조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청정한 장흥 앞바다 득량만에서 나는 명물인 것입니다. 장흥은 또한 산도 나름 높고 좋습니다. 이런 조건을 활용해 만들어 내놓은 명물이 표고버섯입니다.

 

장흥 명물 이런 세 가지를 갖고 만드는 먹을거리가 바로 장흥삼합입니다. 그런데 소고기에는 이른바 ‘안티’가 있습니다. 또, 제가 알기로는, 표고버섯에도 ‘안티’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장흥삼합으로 버무려져 나오는 소고기와 표고버섯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먹을거리는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을 꼽고 싶습니다. ‘키조개전’을 먼저 꼽고 싶고 ‘소고기전’도 있더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장흥삼합으로 나오는 소고기랑 조금 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소고기전입니다.

 

키조개전과 소고기전이 함께 나왔습니다.

 

물기가 촉촉하고 고소한 맛이 더하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장흥삼합 소고기랑은 다를 것입니다. 재료가 장흥 명물인 점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구워서 먹는 장흥삼합 씹는 맛과는 다른 느낌을 줍니다.

 

달걀 반죽에 밀가루를 풀어서 살짝 튀겨냅니다. 그런 덕분에 재료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물기가 줄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키조개전도 한 입 베어물면 그 촉촉한 느낌이 입안 가득히 퍼져나가는 점에서는 소고기전이랑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아주 부드럽다는 점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소고기랑 같이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저야 물론 소고기든 키조개든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그것 가려 먹는 사람 처지에서 보자면 ‘키조개전’이 있고 그 맛이 또한 남다르다는 것은 정말 장흥 먹을거리의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전’들을 토요시장 곳곳에서 맛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키조개회무침’도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런 ‘전’들과 더불어 키조개회무침을 먹어보고는 정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키조개를 알맞추 썬 다음 살짝 대쳐서는 갖은 양념이랑 채소를 버무려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양념 때문에 톡 쏘는 느낌이 있으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회무침이 있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저는 못해 봤습니다. 무척 좋았습니다. 더불어 맛본 추어탕과 팥죽도 좋았습니다.

 

추어탕은 완전 전라도식이었습니다. 고기살을 갈아내어 뻑뻑하게 만든 추어탕이었는데요, 제가 경상도 출신이고 어머니 아버지도 경상도 출신이긴 하지만 어릴 적 어머니(어머니도 경상도 출신입니다.) 만들어주신 추어탕도 이런 식이었고 그렇게 닮아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팥죽은 국산 팥으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거기 들어가는 건더기는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였습니다. 쫄깃거리는 맛은 덜했지만,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이 저를 황홀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막걸리는 어떤가요? 재료가 100% 장흥산이고 100% 햅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70%는 찹쌀이고 30%는 맵쌀이었습니다. 이런 막걸리, 요즘 어디에서든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좋은 음식을 바로 손만 뻗으면 맛볼 수 있기에 장흥 물축제가 성공하지 않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토요시장을 위해 생겨난 물축제가, 토요시장 덕분에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자치단체도 이런 장흥군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조그만 동네 축제를 하면서도 조선 팔도 온갖 떠돌이 먹을거리로만 거리를 채우는 그런 일은 없으면 참 좋겠습니다. 자기 고장 명물 먹을거리로 밥상이 장만되는 그런 축제가 더욱 늘어나면 저는 좋겠습니다.

 

 

게다가 장흥에는 토요시장이 있어서 좋은 먹을거리 푸짐하게 장 볼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좋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콩나물을 2000원 어치 샀는데, 뿌리에 재가 묻어 있었습니다. 처음 봤는데, 2000원 어치가 푸짐도 했지만, 집에 와 나물 해 먹었더니 고소함이 그야말로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고소한 콩나물이었는데, 그 씹는 맛 또한 일반 시중에서 만나는 콩나물 흐물흐물함과는 완전히 완전히 다른 섬유질이었답니다. 이런 즐거움이랄까 보람이, 장흥 토요시장에서는 곳곳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김훤주

 

관련 글 : 온몸으로 즐기고 누리는 장흥 물축제(http://2kim.idomin.com/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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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늦여름 거닐기 좋은 거제 홍포 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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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8월 15일에 나간 원고입니다. 늦여름에 거닐기 좋은 데로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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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바닷가로 나들이합니다. 바람과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제 홍포 바닷가와 여차 몽돌 해변입니다. 홍포 바닷가는 이미 유명해져 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주 멋지기 때문입니다.

 

홍포에서 여차에 이르는 4km 남짓 거리를 모두 걸으시면 가장 좋습니다만, 자동차를 달고 다니는 처지에서는 다시 돌아와야 하는 부담이 있기에 이번에는 홍포 마을 둘레에서 조금 거닐면서 놀고 그런 다음에 다시 자동차를 타고 여차몽돌해수욕장으로 옮겨가는 길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홍포 마을에서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아스팔트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1.5km 조금 못 미치는 거리입니다. 햇살 좋은 날 여기에 가면 햇빛이 바닷물과 만나 출렁출렁 노랗게 황금빛을 띱니다.

 

그러다 살짝 물안개가 끼면 또 달라집니다. 가까운 바다는 여전히 노랗게 보이지만 멀리 보이는 바다는 햇빛과 만나 자줏빛을 뿜습니다. 자줏빛 바다는 노란색 바다와 달리 착 가라앉아 있는 느낌을 주면서 기품도 한 결 더하고 그윽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이런 바다를 여기서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동차를 몰고 와서 잠깐 내려 이런 멋진 풍경을 스윽 훑어보고 스쳐지나가도 나름 재미가 있겠지만, 몸소 발을 놀려 누리면 그런 멋진 풍경을 좀더 깊숙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도 어떻게 보면 남해 여느 바닷가와 마찬가지로 툭 트인 전망이 좋고 그래서 일망무제 망망대해에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경치가 좋고 가끔씩 고깃배가 오가며 물살을 가르는 산뜻합니다. 하지만 두 발로 걸어가면서 누리면 바다와 풍경을 바라보는 각도를 달리해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지금 찾아가면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햇살은 따갑습니다. 그렇지만 홍포 일대는 언제나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잠깐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만약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에라도 잠시 들어가면 팔뚝이랑 목덜미에 소름이 돋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원한 길을 왔다갔다 거니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당연히 왼편으로 바다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 때 오른쪽 올 때는 왼쪽 이렇게 방향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바라보이는 바다는 꽤나 다릅니다.

 

갈 때는 드넓게 수평선이 펼쳐진 바다였다면, 돌아오면서 보는 바다는 해안선을 따라 올망졸망 솟아난 커다란 바위들이 눈길을 끌곤 합니다. 이렇게 거닐면 가다오다 하면서 길가에 주저앉아 주전부리까지 한다 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다음으로는 다시 자동차를 타고 학동해수욕장처럼 몽돌로 유명하지만 그렇게 크지는 않은 여차 바닷가로 옮겨갑니다. 지금 해수욕장은 제철이 아닌지라 사람들이 그다지 있지 않고 한적해서 거닐기가 아주 좋습니다.

 

멀리 위에서 본 여차몽돌해수욕장.

 

몽돌 구르는 바닷가를 잠시 돌아다니면서 늦여름을 바다를 즐깁니다. 함께 온 일행과 함께 멋진 바다와 몽돌을 배경으로 삼아 사진을 찍기가 아주 좋습니다. 또 가져온 돗자리를 몽돌 위에다 깔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썩 괜찮습니다.

 

아니면 시골 티가 채 가시지 않은 구멍가게에 들러 라면을 좀 끓여달라 해서 먹어도 좋습니다. 라면 먹을 탁자는 나무그늘 있는 자리에 놓여 있기 마련인데요, 그렇게 라면을 한 젓가락 들면서 바라보는 바다도 그럴 듯합니다.

 

제철 지난 해수욕장 바닷가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나와 있기 십상입니다. 바다에서 나는 조개 같은 것을 또는 깨나 고추처럼 밭에서 기른 것들을 손질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네 할머니들 이런 일을 할 때는 대부분 혼자가 아닙니다. 심심함 가시게 하고 고단함을 잊으려고 두셋 어울려 일합니다.

 

이런 할머니들 하는 얘기들 엿듣는 재미도 그럴 듯합니다. 만약 넉살 좋은 사람이라면 할머니들 얘기하는 데 끼여들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맞장구도 쳐가며 추임새도 넣어주면서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동네 할머니들이 얘기 상대로 마다할 까닭이 없거든요.

 

어쩌면 집에 심겨 있는 나무에서 딴 복숭아 같은 과일을 몇 알 얻을 수도 있습니다. 더위에 지친 늦여름 나른한 주말에, 큰 기대 품지 않고 편안하고 느긋하게 바람 쐬기 좋은 여행길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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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이병철 생가 탐방과 세월호 유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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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의령에 갔더랬습니다. 담장과 건물이 모두 의젓한 정곡면 중교마을 이병철 생가도 들르고 현고수와 은행나무가 장한 유곡면 세간마을 곽재우 생가도 들렀습니다.

 

30분 남짓씩 머물렀는데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의병장 곽재우 생가를 찾는 발길은 드문드문 이어졌습니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 생가는 보수 공사로 공개조차 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찾았습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본가·외가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으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기강나루전투와 정암나루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러 낙동강 서쪽 영남 내륙과 호남을 지켜냈습니다.

 

원래부터 본거지였던 의령은 물론 창녕·합천 등지에서도 용맹을 떨쳐 그이와 관련된 숱한 전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곽재우 생가.

 

전란이 끝난 뒤 행적 또한 반듯합니다. 벼슬을 멀리해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고 억지로 나갔다가도 핑계를 대어 곧바로 물러났습니다. 재산을 모두 쓴 때문에 먹고살기 어려웠습니다.

 

당대 지역 공동체가 실제로 그렇게 대접하지는 않았겠지만, 패랭이를 삼아 입에 풀칠을 했다는 얘기가 지금껏 남아 있을 정도랍니다.

 

그이는 이렇게 낙동강가 망우정에서 가난하게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삶을 산 데는 사정이 여럿 있었겠고 곡절도 많이 있었겠지요만, 말하자면 자기 한 몸 부귀영화를 좇지는 않았습니다.

 

이병철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지금 아들 이건희가 회장으로 있는 삼성그룹은 이병철 시절에도 대한민국 으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서와 마찬가지로 자산가로서 사회에 이바지한 바가 많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조 부정, 정경유착, 사카린 밀수, 뇌물수수, 재산 편법 상속 등등 사회에 끼친 해악이 더 컸습니다.

 

이병철 생가. 보수하느라 이렇게 높이 둘러친 탓에 담장 구경만 할 수 있었습니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 자본주의를 더욱 천박하게 만드는 악영향까지 끼쳤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병철 이병철 하면서 그이 생가를 많이 찾습니다.

 

제가 보기에 원인은 간단합니다. 우리 마음 속 돈 욕심입니다. 이병철만큼은 되지 못하더라도 아낌없이 펑펑 쓸 만큼 많이 돈 벌고 싶은 마음에 거기 생가를 찾아 풍수지리인지 무엇인지에서 말하는 그런 기운을 조금이나마 받아 제것으로 삼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이가 저지른 악행은 떠올리지도 않으며, 누가 옆에서 그런 말 할라치면 돈 버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었던 무엇이라 타박까지 합니다.

 

동시대 인물과 견주면 어떨까요? 같은 의령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안희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병철보다는 스물다섯 살이 많습니다. 그이 생가는 부림면 입산마을에 있는데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알려진 정도가 이병철이나 곽재우에 훨씬 못 미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병철과 마찬가지로 자산가였던 안희제는 무역을 해서 번 돈을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했습니다. 이병철이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을 했고 그렇게 나라 독립을 위해 나선 탓에 일제 고문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안희제 생가.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는 곽재우 생가, 줄줄이 발길이 이어지는 이병철 생가, 거의 언제나 쓸쓸한 안희제 생가.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한 지금 이 시대 우리들 징표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우리는 이렇게 푸대접을 하고, 세상에 해악을 끼치면서까지 자기 앞으로 부귀영화를 쌓은 말과 생각과 행동은 칭송하고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세월호 참사를 불러온 장본인으로 손가락질받는 유병언의 돈 욕심을 어떻게 나무랄 수 있을까요. 또 공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공동선보다는 사리사욕을 더 위하는 그런 고위 공직자를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요.

 

현고수(懸鼓樹). 곽재우가 의병을 모을 때 북을 매달아 놓고 쳤다는 나무입니다.

'나'도 그이들처럼 자본의 욕망을 내면에 장착했음이 분명하고, 그래서 그이들 차지한 자리에 '내'가 앉았어도 별반 다르지 않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을 텐데 말씀입니다.

 

김훤주

 

※ 8월 19일치 경남도민일보에 데스크 칼럼으로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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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학교 책읽는 아이 웃음이 야릇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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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저녁에 있었던 창원교통방송을 위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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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밀양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밀양은 얼음골이 유명합니다만, 지금 보자면 얼음골은 이름만 남았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사람들 접근이 차단된 탓에 그 얼음골 여름에 얼음 얼고 차가운 바람이 끼치는 골짜기를 실감하기란 무척 어렵게 됐습니다. 얼음 말고는 별로 보고 만지고 놀고 할 거리가 없는 얼음골에서, 지금은 얼음을 철재 칸막이 너머로 겨우 지켜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데에 호박소는 여전히 대단합니다. 호박소 일대 골짜기는 가파르지 않아서 지금처럼 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때라도 느릿느릿 누리고 즐기면서 산책하기에 알맞습니다. 골짜기로 들어가 걸어도 좋고 산비탈로 올라가 길 따라 걸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거닐다가 적당한 자리가 나타나거든 쑥 들어가서는 앉아 노니는 것입니다. 물줄기가 거세차게 떨어지면서 바위가 깊이 파이어 절구처럼 생겼습니다. 바닥이 온통 암석이고 깊은 정도도 대단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해 들어갔다가는 빠져나오기 어렵겠습니다.

 

 

옛날 밀양 사람들이 하늘이 가물면 여기서 기우제를 올렸다 하고요, 그러면 반드시 빠짐없이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호박소 일대는 나무가 내려주는 그늘도 좋고요, 그냥 하염없이 물이 내리꽂히면서 내는 소리만 들어도 그지없이 시원하고 상큼한 그런 자리입니다.

 

또 바로 옆에는 얼음골 케이블카도 있습니다. 자연생태계를 파괴한다 어쩐다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그냥 찾아간 김에 한 번은 타 볼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른 데 들르지 않고 바로 내려온다면, 환경 파괴를 않으면서 나름 그 풍경을 누리고 즐기는 보람을 얻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조그만 시골 학교인 남명초등학교에 들러 볼 일입니다.  학교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과 책 읽는 소녀상과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여느 학교와 다르지 않은데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었던 유정 사명대사가 더 있다는 것이 색다릅니다. 그것도 보통 자리가 아니라 가장 잘 보이는 한가운데 자리에 놓여 있는데요, 대신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습니다. 밀양 무안 출신으로 밀양 표충사에 모셔진 인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크고 중요하게 모셨습니다.

 

 

정문 앞 책 읽는 소녀는 읽는 책이 만화책쯤 되는 모양인지 웃음이 야릇하고요, 사명대사는 마치 초등학생 스케치북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처럼 얼굴이랑 옷매무새가 투박합니다. 또 이순신은 어리숙한 중학생마냥 표정이 더없이 순진해 보입니다.

 

 

이런 모습들 둘러본 다음에는 뒤쪽 동천 물가로 옮겨갑니다. 잘 자란 소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어서 경주의 신라 왕릉 둘레 솔밭보다 어쩌면 더 높은 품격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명초교 뒤편 솔숲.

 

그런 다음에는 밀양 멋진 절간인 표충사를 찾아가면 되겠습니다. 표충사는 언젠가 우화루를 한 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우화루 아니라도, 또 절간이 아니라도 여름철에는 솔숲을 따라 산책하고 흐르는 개울물에 들어가 발을 담가도 좋은 그런 절입니다.

 

표충사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서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향로로는 가장 오래 된 고려시대 청동함은향완과 삼층석탑, 석등, 대광전 등 숱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표충사는 이처럼 유교까지 아우르는 우리 불교의 넉넉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새로 만든 사천왕문에서는 그 사천왕들이 발밑에 험상궂은 남정네 대신 어여쁜 여인네가 깔아뭉개고 있습니다. 사천왕 발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는 상당히 드문 편인데요, 거기서 고개를 갸웃하면서 왜 아름다운 여자를 저렇게 죄악시할까, 잠깐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쨍쨍 내리쬐는 지금은 좀 아니지만, 따가운 햇살이 조금 수그러드는 9월 즈음해서부터는 얼음골 들머리로 해서 남명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한 번 걸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세상이 편해지고 빨라지면서 가장 많이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길입니다.

 

옛날에는 얼음골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이 길이 실어다 날랐습니다만, 새로 큰 길이 나면서 여기 이 콘크리트길은 그야말로 한적한 길이 돼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 농사지으러 오고가는 그런 차량만 다닐 뿐이어서, 정말 안전하고 걷기 좋은 그런 길이 됐습니다.

 

 

행정에서조차 '얼음골 옛길'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요, 처음에는 양쪽으로는 나무가 나타나고 그러다가 쑥부쟁이나 산국 같은 들풀이 차지한 길섶도 적지 않게 나오지만, 조금만 지나면 전국적으로 이름을 얻은 '얼음골 사과'가 둘레 과수원마다 넘치도록 매달려 있습니다.

 

전체 길이가 4.5km 남짓한데요, 이렇게 길면서도 아주 호젓한 길은 강이나 바닷가 둑길이 아니면 아주 드문 현실입니다. 느린 걸음으로도 1시간이면 족한 꾸불꾸불 이어지는 얼음골옛길에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자동차도 거의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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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족암 못지 않은 임포~송천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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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창원교통방송에 나간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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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고성 바닷가로 나가 볼까 합니다. 고성 바닷가는 무엇보다 상족암이 가장 이름나 있지만, 상족암 아니라도 한 나절 즐길 만한 바다는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임포마을에서 송천마을까지 이르는 일대 바닷가입니다.

 

임포마을은 돌담장과 옛집으로 이름난 학동마을이랑 아주 가까운데요, 만약 자동차를 타고 갔다면 여기에다 세워두고 송천마을까지 걸어 갑니다. 그렇게 해야지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고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갯벌과 갯잔디와 함초, 굴양식장과 일하는 사람 모습 등을 생생하게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한 나절 나들이에 굳이 물때를 맞추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맞춰 가면 썰물이 쫙 빠지고 갯벌이 장하게 드러나 있는 그런 모습을 보실 수 있겠지요. 이번 주말 30일은 고성 자란도 기준으로 썰물이 오후 4시 30분 어름이니까, 드넓은 갯벌이 보고 싶으면 그 이쪽저쪽 한 시간 정도로 해서 찾으면 좋겠습니다.

 

해안, 또는 해안을 따라 둘러친 제방 위를 걸으면, 갯벌에 들어가 바지락이랑 게 따위를 잡고 있는 사람들, 또는 갯잔디에 퍼질러 앉아 '함초'를 뜯고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만약 무엇을 잡고 있는지 궁금하시면, 슬그머니 다가가 물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갯가 짠 기운을 바탕삼아 자라는 함초는 변비 치료에 좋다고 하는데요, 집에서 약재로 쓰고 내다 팔기도 한답니다. 썰물이 들면 보통 때는 바닷물 출렁이던 갯벌을 걷는 보람도 누릴 수 있습니다. 갯바위에 조그맣게 닥지닥지 붙어 있는 굴은 모양새 날렵한 돌로 껍데기를 열어 짭조름함과 싱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쉬엄쉬엄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송천마을입니다. 바로 코앞에 솔섬이 나옵니다. 솔섬에다 고성군은 생태체험학습장을 들여세웠습니다. 해안을 따라서도 데크가 놓여 있고 위로도 가로 세로 산책로가 다듬어져 있습니다. 옆으로든 위로든 길만 따라가면 훌륭하게 산책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에서든 바닷가에서든 바라보는 풍경이 시원하고 그럴 듯합니다. 솔섬은 사실 옛날에만 섬이었지 지금은 뭍에 닿아 있습니다. 대신 솔섬 앞바다에는 밀물이 들면 끊기고 썰물 때는 달라붙는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썰물 때가 맞으면 여기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여기 바위들은 상족암 못지 않게 그럴 듯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여기 바위들이 상족암과 마찬가지로 퇴적암이어서 아주 무르기 때문에 너울대는 바닷물이 들고나면서 만들어낸 무늬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바위도 있습니다. 퇴적암보다 단단한 안산암 같은데요, 뭍에서 바다를 향해 퇴적암을 뚫고 길게 들어가면서 공룡 지느러미처럼 솟아 있습니다. 끄트머리가 바닷물에 잠겨 얼마나 멀리 뻗어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공룡이 살았을 아주 오랜 옛날에, 화산이 뿜어낸 용암이 퇴적암을 갈랐던 자취라 합니다.

 

 

이렇게 노닌 다음에는 온 길을 되짚어 걸어나가도 되고요, 아니면 마을을 거쳐 아스팔트도로로 나가도 괜찮습니다. 되짚어 나간다 해도 풍경은 달라져 있습니다. 이미 물이 달라져 있습니다. 쫙 빠졌던 바닷물이 슬금슬금 차오르고 있습니다. 멀리 바다 쪽은, 갈 때와 올 때가 방향이 반대이니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스팔트도로 쪽으로는, 지금보다는 한 열흘 뒤가 더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곳에는 벼논이 제대로 익어가면서 노란빛을 띠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번 나들이로 농촌 곡식 익어가는 풍경과 바닷가 갯내음 나는 바람을 어렵지 않게 모두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자동차 세워 놓은 데로 돌아와서는, 임포마을에 흩어져 있는 횟집에 들어가도 좋고요, 아니면 앞에 한 번 소개했던 학동마을을 찾아 돌담길까지 거닐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바닷가 물일 나왔다가 저녁 장만하러 발길을 서두르는 할머니들과 걸음을 함께 섞을 수도 있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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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초의선사 탄생지와 회산백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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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진행하는 '2014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은 6월 25일 경북 포항을 다녀온 다음 7월 한 달을 건너뛰고 8월 13일 전남 무안으로 다섯 번째 걸음을 놀렸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 전통 다도를 중흥시킨 스님 초의(草衣)선사가 탄생한 자리와 동양 최대 백련 군락지로 알려진 회산백련지를 둘러보는 일정이었습니다. 창원 만남의 광장을 오전 8시에 출발한 버스는 세 시간 남짓 걸려 초의선사탄생지에 가 닿았지요.

 

같은 전남의 신안과 함께 갯벌이 너르기로 유명한 서해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 시간 남짓 걸려 초의 탄생지에 도착했더니 가는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대각문(大覺門)이라 적힌 정문을 통해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복원된 초의 생가가 숨은 듯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층층이 나란한 차밭이 나옵니다. 차(茶)라 하면 경남 하동 야생차나 전남 보성 녹차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도 차나무를 볼 수 있다니……. 하지만 알고 보면 차나무가 그렇게 드문 존재는 아니랍니다. 전통차에 대한 우리 관심이 드물 따름이지요.

 

먼저 어지간한 절간에는 대체로 차밭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는 품질 좋은 차를 생산해내는 절간도 있는데 이를테면 사천 다솔사가 그러합니다. 심지어는 지역 주민을 위해 일부러 차나무를 심고 가꾼 데도 있는데 창원 진해 장복산 일대에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전통차라 하면 만들기도 어렵고 마시기도 어렵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답니다. 지금도 차나무는 새순을 내어놓는데, 그것을 잘라 적당한 방법으로 말리고 비비고 덖거나 뭉치면 그만입니다. 물론 사전 지식 전혀 없이 즐길 수 없기는 커피를 비롯한 다른 마실거리와 다를 바 없지만은요.

 

 

조선 시대 스님은 천민이었습니다.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의선사는 달랐습니다. 당대 으뜸가는 지식인이었고 갖은 학문에 능했던 추사 김정희와 오랜 시간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둘이 그렇게 친하게 지냈음을 알려 주는 비석이 여기에 마련돼 있습니다.

 

추사가 초의한테 보낸 편지에서 따온 글귀를 새긴 것이랍니다.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는 반이지만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묘한 작용이 있어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잘은 모르지만 그윽함은 느껴진답니다. 

 

열정적으로 해설을 하시는 사진작가 겸 전직 대학교수인 박종길 선생은 차와 선(禪)이 다르지 않음을 일러준다고 풀이합니다. 그렇기는 하겠습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자세를 고르고 몸과 마음을 열어나가는 그런 경지가, 실행은 못해도 상상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박종길 선생의 해설은 그치지 않습니다. 한 칸 짜리 일지암 초당에서는 초의선사가 이 띠집을 고쳐 짓고 거처하면서 <동다송(東茶頌)>·<다신전(茶神傳)> 같은 책을 썼다고 소개합니다. 다신전은 찻잎을 따서 마시는 전체 과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고 동다송은 다도와 우리 차에 대해 일러주는 책입니다.

 

이처럼 초의 또한 추사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둘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살이 갔을 때 초의가 가장 먼저 찾아가 함께 머물면서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박종길 선생이 설명을 이어나가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또 이런 바탕으로  55살 때인 1840년 헌종한테서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종사(大覺登階普濟尊者草衣大宗師) 시호를 받았고 이를 새긴 빗돌이 여기에 세워졌습니다.

 

 

 

초의선사기념관과 조선차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용호백로정을 찾았습니다. 기와를 얹은 용호백로정 바로 곁 연못에서는 몇 송이 꽃을 빼어문 연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들어간 몇몇은 연꽃을 사진찍고 더불어 사람도 찍었습니다.

 

 

 

 

가까운 서해명가(061-285-8533)에 들러 그야말로 정성껏 깔끔하게 잘 차려낸 밥과 반찬에 동동주까지 한 잔씩 곁들인 일행은 회산백련지로 향했습니다. 다음날인 14일부터 나흘 동안 '무안 연꽃축제'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기로 돼 있었기에 연꽃은 당연히 피어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가는 길에 보니까 피어난 연꽃이 드문드문 있기에 아직 다 피어나지 않았나 싶었으나 그것은 대부분이 이미 지고 남은 몇몇이었습니다. 알아봤더니 원래 개최 시기는 7월 하순이지만 올해는 보름 넘게 늦췄다고 했습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세월호 참사 때문이랍니다.

 

 

 

 

하기야 세월호에서 숨진 사람들 생각하면 이런 걸음조차 아직은 조심스러운 것이 맞습니다. 어쨌든, 넓이가 10만 평 남짓으로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일제 강점기 물세 수탈을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들판 한가운데를 피땀으로 들이세운 저수지에서, 하얀 연꽃을 줄줄이 눈에 담는 즐거움은 아쉽지만 못 누렸답니다.

 

 

 

하지만 꽃이 적으면 또 어떠랴, 한 바퀴 둘러보기는 해야지요……. 대규모 연꽃을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렇지 않고 주어진 사정에 적당히 맞춰 즐기고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답니다.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었던 반면 푸른 연잎이 너르게 펼쳐지는 풍경도 장관이라는 이도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연꽃 몇 송이 드문드문하고 실하게 맺힌 연밥은 그보다 좀 덜 드문드문하고 푸른 연잎과 푸른 잎사귀를 매단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책로를 깜냥껏 걸으며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마련된 쉼터에 모여 얘기를 나누거나 하다가 오후 3시 30분 발길을 돌려 창원으로 돌아왔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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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정찬용이 권영길에게 선물한 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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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하마터면 쓰레기로 버려질 뻔했습니다. 몇 개월 전 곧 반출될 우리 회사 쓰레기 더미 속에 이 액자가 유리도 깨어진 채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깨진 유리를 제거하고 닦은 후 낙관을 사진 찍어 페북에 올렸더니 정찬용 님의 글과 그림이라 알려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정찬용 님은 광주 출신으로 거창YMCA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광주YMCA를 거쳐 참여정부 인사보좌관과 인사수석 등을 지낸 분이죠.



알고보니 권영길 대표가 언젠가 광주에서 강연을 했는데, 감사 표시로 정찬용 님이 그리고 써서 선물한 것이었고, 이후 어떤 행사에 권영길 대표가 소장품 경매에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버려질 뻔 했던 당시의 모습.

액자 뒷면에 붙어 있는 사진.


강연한 연도가 언제였는지, 경매행사도 언제 어디였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습니다. 이것도 역사인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선물을 할 때 연도와 날짜도 표기해주면 좋겠네요.)


광주 전남 민주언론운동연합 홈페이지에 들어가 연혁을 찾아보니 1993년 3월 제1기 언론학교를 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게 이 액자에 표기된 '제1회 광주전남 민언협 언론학교'가 맞다면, 바로 그 때 정찬용 님이 권영길 님께 선물한 것이겠군요.


이게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회사에 왔는지 확실치 않지만, 결국 저에게까지 오게 된 물건인데 이걸 어떻게 활용하는 게 가장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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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버킷, 유럽식 복지냐 미국식 기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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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들 중 자신의 선행이나 미담, 수상 소식이 신문에 실리는 걸 한사코 마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의 의미도 있지만, 알고 보면 또다른 내막이 있다. 그런 소식이 보도되면 '복지'나 '봉사' '자선'을 앞세운 온갖 단체에서 찾아와 기부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라고 치켜세우면서 도와달라는데 거절하는 게 참 난감하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있다. 제법 알려진 무슨무슨 재단이었는데 정기 후원이나 기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별의별 홍보나 상품구매를 권유하는 스팸성 전화는 많이 받지만, 이런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거절하자니 내가 나쁜 인간이 되는 것 같았고, 정말 후원을 하자니 내 자발성이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사실 기부나 후원은 스스로 알아서 할 때 가장 흔쾌한 것이다. 어떤 분야, 어떤 단체 또는 누구에게 후원할지를 결정하는 데에도 각자의 철학이 작용한다. 스스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왜 이토록 대놓고 기부를 요구하는 자선단체가 많을까? 게다가 자선이나 봉사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사기꾼 집단인 곳도 많다. 아마도 그 이유는 국가가 책임져주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복지를 국가의 책임으로 명확히 하고 있는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자선단체도 많지 않고 GDP 대비 자선 금액도 아주 낮다. 반면 의료보험도 제대로 안 되고 사회보장 시스템도 부실한 미국은 세계에서 자선과 기부 비율이 가장 높다. 석유 재벌 록펠러가 설립한 록펠러재단, 철강 재벌 카네기의 카네기재단,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가 만든 게이츠재단, 거기에 거액을 기부한 워런 버핏도 모두 미국 사람이고 미국의 재단이다.


그래서 미국은 국가가 저질러놓은 천민자본주의의 모순을 부자들이 기부로 덮어주고 있는 나라라고들 한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는 최근 <한겨레>에 쓴 '아이스버킷, 가진 자들의 비정한 얼음물 놀이'라는 글에서 미국이란 나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복지를 맡았듯이 미국은 자본 자체가 중요한 사회 안전장치 노릇을 해왔다. 그게 기부다. 기부가 세제 혜택이니 기업 선전을 넘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도구였다. 단 자본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기부는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생산비에 포함되는 체제 유지 비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그 기부를 세상에 알리고 인정받는 걸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왔다. 그게 얼음물 놀이에 담긴 기부 방법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나경원 아이스버킷. 미디어오늘에서 가져온 사진.


우리는 어떤가? 유럽식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도 없고, 미국식 기부나 자선도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다. 이래저래 없는 사람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란 곳이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기본적으로 의료와 복지, 교육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도 대놓고 기부를 요구하거나 공개적으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문화까지 이식되고 있다. 정작 한국 재벌들은 미국처럼 내놓지도 않는데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한국 재벌들에게 게이츠나 버핏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대신 그들에게서 그만큼 세금을 많이 걷으면 유럽식 복지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기는커녕 담뱃값만 올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버킷을 거부하는 대신 부자증세-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에 기부한다.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으로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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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책을 좋아하는 채현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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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은 TV도 안 보고 신문도 읽지 않지만 사람과 책은 참 좋아하는 것 같다.

8월 말 경남도민일보를 방문했을 때 배낭 안에는 책이 들어 있었고, 9월 초 내가 양산을 방문했을 때도 여러 책을 자랑했다.

그 때 내가 썼던 <토호세력의 뿌리>를 말씀 드렸더니 꼭 구해보고 싶단다.

그래서 어제 방문할 때 어렵게 한 권 찾아서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와 함께 드렸다. 기뻐하신다.

그러면서 오후에 서울 가는 길에 이 책을 가방에 넣어 갖고 가셨다. 이마 기차 안에서 읽으려는 것 같다.

​헤어질 때 "이 책 읽어봤습니까?"라며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라는 책을 건넨다. 그의 친구 박이엽 선생이 번역한 책이다.

표지를 열어보니 번역자의 부인 서명이 있다.

그래서 "내가 서명까지 있는 이 책을 가져가면 됩니까"라며 사양하려 하니 "다음에 올 때 가져오면 되지"하며 극구 읽어보라 주신다.

그러면서 또 한 권의 책을 더 주신다. 임락경 목사가 쓴 삶의 이야기다. <임락경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

뜻하지 않은 책 선물을 받았으니 읽어보고 독후감도 써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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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걷기 좋은 하동 악양 들판과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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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9월 12일 전파를 탔지만 내용으로 보면 지금이 딱 맞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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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른 추석을 지나고 나니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낮에는 더운 기운이 느껴지지만 나뭇잎은 벌써 짙은 초록을 벗어나 노랗게 바뀌고 있습니다. 들판에 나가봐도 가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논에 벼에서 이삭이 패고 나락이 여물면서 고개를 수그린 데가 한층 많아졌습니다. 가을은 단풍 울긋불긋한 산이나 골짜기보다 들판을 먼저 찾아옵니다. 적당한 선글래스 하나 볕 가리기 좋은 모자 하나 장만해서 들판으로 나가 거닐기 좋은 계절입니다.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으로 이름난 악양 들판을 이번에 거닐어 보겠습니다. 제각 생각할 때 악양 들판 거닐기는 하동군 악양면 노전 마을이 시작점입니다.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상신마을로 들어가서 면소재지 정서마을까지 걸어갑니다.

 

이렇게 걸으려면 아무래도 버스를 타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참판댁 들머리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간 다음 거기서 악양 택시를 호출해 노전마을까지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거리가 5km 남짓이니까 요금이 비싸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전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까만 고양이. 네로일까, 아닐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하동읍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노전마을 들어가는 버스는 오전 7시 40분과 9시 50분, 그리고 오후 2시 10분에 있습니다. 버스를 타면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섬진강을 넉넉하게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부드럽고 푸근하게 풀어주는 섬진강과 버스는 악양 들판 들머리까지 20분 가량 동행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악양면사무소가 있는 정서 마을을 지나 상중대마을 들머리에서 내려 왼편 비탈로 올라가면 되고요, 만약 택시를 타셨다면 노전마을회관까지 가자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제법 알이 여문 나락논 사이로 드문드문 자리잡은 토란 밭이 사뭇 색다릅니다. 여기 명물 가운데 하나가 토란대, 줄기인 모양입니다. 시골마을과 농가의 전형이 여기 있습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얕은 담장 밑에는 오이 호박 수세미 따위가 자랍니다.

 

 

갖가지 색깔로 꽃을 피운 봉숭아 너머로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야무지게 익어가는 열매를 넘치도록 달고 있습니다. 집안 마당이나 길가 담장 아래 그리고 틈틈이 자리잡고 층층이 다락을 이룬 논이나 밭을 훑어보면서 ‘내가 아는 농작물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수수, 노각, 취나물, 머위, 토란, 콩, 들깨, 무, 고사리, 아주까리, 도라지, 더덕, 수세미, 오이, 호박, 옥수수, 참깨, 박, 열무, 상추……. 감나무, 차나무, 배나무, 자두나무, 뽕나무도 있습니다. 이래 헤아려 보면 이름을 아는 녀석도 많지만, 모르는 녀석도 적지는 않습니다.

 

노전마을 아래 끄트머리에는 '십일천송'이라는 명물 소나무도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한 그루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열한 그루가 한 데 어울렸습니다. 옛날 임금이 받치던 일산(日傘)처럼 장해 보이는데요, 굵고 가는 나무들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달라붙지도 않았습니다.

 

 

십일천송 아래로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흙길을 타박타박 밟고 들판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상신마을이 나옵니다. 바닥은 콘크리트를 덮어썼지만, 길게 이어지는 돌담길이 새로운 맛을 던져줍니다. 번듯하게 들어선 새 건물 때문에 시골스러운 맛은 덜합니다.

 

대신 조씨고가, 보통 조부잣집이라는 명물이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를 한 번 찾아보지 않고도 <토지>를 썼다는 얘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 박경리 선생이 최참판 캐릭터와 최참판댁 활동무대를 창조해낼 때 주요하게 참고한 데가 조부자와 조씨고가였다고 합니다.

 

노전마을은 돌담장이 별로 없지만 시골맛이 많이 나고, 상신마을은 돌담장이 많은데도 시골맛이 덜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여기 조씨고가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옛집 그 자체만 두고 봐도 아주 그럴 듯한 느낌을 뿜어냅니다. 이렇게 해서 돌담을 따라 내려오면 1일과 6일 시골 장이 서는 정서마을이 나오고 악양천변에는 취간림(翠澗林)이 있습니다. 곱고 짙은 푸른색=비취빛 물이 흐르는 수풀이라는 뜻입니다.

 

걸으면서 보는 악양 들판.

 

여기 숲 그늘에서 잠깐 다리품을 쉬셔도 좋고요 아니면 농협 맞은편에 있는 매암다원이라는 차밭에 들어가셔도 됩니다. 차밭 주인이 매암차문화박물관도 만들어놨는데요, 아무 제약이나 조건 없이 그냥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전통 방식으로 차나무를 기르고 차를 만드는 차밭인데요, 여기서는 전통차도 마실 수 있지만 따로 정가를 정해놓지는  않았으며 주인이 늘 붙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눈 앞 가득 펼쳐지는 악양 들판을 마음껏 누빕니다. 들판은 온통 넉넉하게 출렁거립니다.

 

최참판댁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악양 들판. 섬진강과 부부송이 보입니다.

 

덩달아 들판을 전후좌우로 끼고 걷는 사람 마음도 풍성해집니다. 따가운 햇살을 잘게 부수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거니는 길은 결국 최참판댁으로 이어집니다. 최참판댁 사랑채 끄트머리에 서면, 여태 걸어왔던 들판은 물론이고 동정호와 부부송까지 두루 잘 내려다보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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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 반구대암각화가 품은 걷기 좋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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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7일 떠난 올 들어 여섯 번째 생태·역사기행의 핵심은 좋은 절간도 아니고 빼어난 유적도 아니었습니다. 걷기 좋은 멋진 길이었습니다.

 

울주 석남사 진입로도 그랬고 반구대암각화로 이어지는 길도 그랬고 반구대암각화에서 돌아나와 천전리각석까지 걸어가는 길도 그랬습니다. 자동차 한 대 다니지 않는 길을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둘레 풍경만 눈에 담고 흐르는 물소리만 귀에 담으면서 그렇게 오롯하게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구니 스님 도량 석남사

 

석남사에는 10시 10분 남짓해 도착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오르는 길은 전혀 가파르지 않습니다. 오른쪽 골짜기를 타고 참나무와 서어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마른 잎을 냇물에다 몇몇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좀 있다 단풍 들면 아주 그럴 듯할 텐데요, 지금 푸른 기운이 조금씩 가시는 모습도 나름 괜찮았답니다. 제철을 맞은 도토리가 툭, 툭, 떨어지는데, 줍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극락전. 스님 염불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대부분 절간은 아침나절이 부산스럽습니다. 아침 예불 덕분입니다. 이날 석남사도 거의 모든 전각마다 스님들이 염불을 하고 목탁을 치고 있었고 대중이 모이는 법회까지 함께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왔다면 보기 어려웠을 스님들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서 산뜻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석가사리삼층석탑과 탑돌이하는 사람.

 

여러 전각들과 석가사리삼층석탑과 '그냥' 삼층석탑을 눈에 담은 다음 대웅전 뒤쪽 승탑 자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서는 온전하게 남은 승탑도 볼 수 있고, 석남사 뒷꼭지 그윽한 느낌(지붕기와가 빛나는 푸른색으로 바뀐 뒤는 좀 덜하지만)과 석남사 감싸안은 가지산 줄기 넉넉함을 제대로 누리는 보람도 작지 않습니다.

 

석남사 승탑.

 

그러고 내려오는 길에서는 한 일행이 오른쪽 바위벼랑에서 마애비를 발견했는데, 대충 보니까 아무아무 현감의 애민선정비였습니다. 빗돌은 사람들 보라고 길거리에 세웠으니만큼, 적어도 조선시대는 여기에 길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애비.

 

습지의 높은 생산성과 반구대암각화

 

습지, 물가는 오늘날만 아니라 옛적에도 사람들 삶터였고 동시에 놀이터였습니다. 물이 있으니 물을 먹으려고 갖은 짐승들이 드나들었고요 사람들은 그런 짐승들 잡아서 먹고 살았겠지요. 또 물이 있으니 풀과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었고요, 두고두고 씨앗을 퍼뜨려 널리 번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풀이랑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둘레 산악들과 어우러지니 풍경 또한 그럴 듯하게 됐고 그런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데를 즐겨 찾아 노닐며 몸을 튼튼히 하고 마음을 닦기도 했습니다.

 

들머리 반구대. 여기에는 암각화가 없습니다. 가운데 보이는 건물은 포은 정몽주 관련입니다.

 

이런 옛 사람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표 명소가 바로 울산 반구대암각화라 합니다. 까마득한 옛날 먹고살기 위해 애썼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위에다 무엇을 새기는 일은 오늘날도 쉽지 않은데 옛적 그 사람들이 갖은 곤란을 무릅쓰면서까지 왜 이런 그림을 새기고야 말았을까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 절실함만큼은 나름 눈치를 챌 수가 있지요. 당장 먹을거리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틀림없이 있기에 힘들고 어려운 시간과 노력을 여기에 쏟아붓지 않았겠습니까.

 

바위그림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도 상당합니다.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고래·상어 따위 물고기와 그 잡는 모습, 호랑이·늑대·여우·노루 따위 산짐승과 그 잡는 모습, 가면을 쓰거나 활이나 막대기를 든 사람 모습 등등을 아주 사실적으로 새겨놓은 바위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 가는 길.

 

하지만 실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지금 드뭅니다. 예전에는 암각화 바로 밑에까지 걸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요 맞은편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망원경으로는 그 형상이 제대로 안 보이데요, 이제 댐까지 만들어져 많은 나날을 바위그림은 물에 잠긴 채 지내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반구대 들머리 암각화박물관에 들러 복제해 놓은 암각화 모형을 보면서 그 구체적인 형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먼저 더듬었습니다. 실물을 못 보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지만 손쉽게 알아보도록 장치가 돼 있어 많이 지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밥집 '암각화 사진 속으로'에서 점심을 먹고 반구대암각화 맞은편 물가 언덕까지 우거진 수풀 사이로 골짜기랑 개울물이랑 동행하며 거닐었습니다. 거기 나와 있었던 이의 자세한 해설은 두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일행들 아쉬움을 토닥여 줄 수 있었습니다.

 

천전리각석과 서석, 공룡발자국 화석

 

여기 일대를 사람들이 선사시대에만 살거나 노닐지는 않았습니다. 역사시대에도 노닐었습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2km 가량 떨어져 있는 천전리각석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에서 천전리각석으로 이르는 길도 가파르지 않습니다.

 

천전리각석 가는 길.

 

 

 

골짜기를 따라 그냥 평탄하게 나 있는 데가 대부분이랍니다. 더욱이 반구대를 벗어나 각석 있는 쪽으로 접어들면 바위를 구르는 물이 제법 크게 소리를 내어 귀까지 즐겁게 만들어준답니다.

 

천전리각석에서는 반구대암각화와 달리 바로 코 앞에서 바위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심원이나 사다리꼴, 잎사귀 모양, 꾸불꾸불 물결 모양, 사람 얼굴이나 여자 몸통 모양 등등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형상을 드러내 보여준고 합니다.

 

천전리각석.

 

 

래쪽에는 신라시대 왕족이 새긴 한문이 보입니다. 천전리 서석(書石)이라 하는데요, 처음 새긴 원명이 있고 나중에 새긴 추명이 그 오른편에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여기 나오는 사람 이름과 육십갑자로 연대(법흥왕 12년, 525년)를 특정할 수 있어 귀하게 보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도 우리 사람과 깊이 관련돼 있는 장소임을 일러주는 지표라 하겠습니다.

 

 

각석에서 개울을 건너면 공룡발자국화석이 몇몇 흩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노닐기 전에는 여기가 공룡들 먹이터·놀이터였을 수도 있겠지요. 천전리각석 바위 쪽에 있을 때는 잘 모르겠더니, 공룡발자국화석 너럭바위에 올라서니 골짜기가 수풀에 가려 있다 한결 널러지면서 탁 트이는 느낌을 안겨줬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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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풍-석남사, 운문사, 가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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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창원교통방송에 나간 여행 소개입니다. 지금도 그럭저럭 괜찮지만, 좀 있다 단풍이 들면 그지없이 좋은 탐방루트입니다.

 

오늘은 가을 단풍으로 이름 높은 두 절간, 울산 석남사와 경북 청도 운문사 나들이길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래 된 절이 대체로 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청도 운문사는 보물이 무척 많은 편이랍니다.

 

삼월 삼짇날 막걸리 열두 말을 마시는 처진 소나무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가장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해 대웅보전 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전 등 조선시대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운문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과 바로 옆 만세루.

 

운문사 단풍 든 모습.

 

밀짚모자 쓰고 울력에 나선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

 

운문사 금당 앞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고, 꼭대기도 연꽃봉오리가 올려져 있습니다. 고려 스님 원응국사의 업적과 행적을 적은 빗돌, 고려시대 석불 석조여래좌상, 석조사천왕상도 있습니다.

 

운문사 작압전에 들어 있는 돌부처와 석조사천왕상.

또 운문사는 대웅보전이 둘인데 원래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전에는 비로전이던 건물이고 새 대웅보전은 1994년 세워졌습니다.

 

운문사.

 

하지만 운문사에서 으뜸가는 보물은 가을 단풍에 물든 아름다운 풍치입니다. 운문사를 둘러싼 호구산 단풍도 멋지고 운문사 마당 안에 심겨 있는 은행나무라든지 이런 것들의 단풍 또한 아주 멋집니다. 그리고 들머리 길게 이어지는 진입로 소나무들의 행렬도 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운문사의 으뜸 이미지는 ‘정갈함’입니다. 경내 마당 비질 자죽과 밀짚모자를 쓰고 울력을 하는 비구니들의 쉼 없는 움직임은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전각 앞이나 옆 댓돌에 놓여 있는 신발들은 가지런하고요, 여기저기 놓인 화분들은 철 따라 꽃을 바꿉니다.

 

운문사와 석남사를 이어주는 가지산 골짜기는 단풍이 유별나게 멋집니다. 가지산은 소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보다 잎이 지는 활엽수가 많습니다. 어떤 물감으로도 담아내기 힘든 천연색감으로 세상을 물들이는데, 여기 넋을 놓고 가다보면 금방 석남사가 나옵니다.

 

석남사와 운문사는 비구니 절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그래서 두 절을 비교하며 보면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운문사 들머리에는 소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반면 운문사 들머리에는 참나무나 서어나무 따위 활엽수들이 늘어서 푸근합니다.

 

석남사 진입로.

 

운문사 하면 먼저 정갈함이 떠오른다면 석남사는 어쩌면 ‘실용’이라 할 수 있고 그 실용의 대표는 ‘섀시’입니다. 겨울 추위 여름 벌레를 막기 위해 대웅전을 비롯해 모든 건물에 달아놓은 섀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석남사.

 

머무는 스님께는 좋은 일이겠으나 구경삼아 나들이나온 이들에게는 썩 반갑지 않은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깔끔함에서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모두 깨끗하지만, 운문사는 화분이 대세인 반면 석남사는 석탑 둘레 네모나게 공간을 내어 꽃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승탑은 꼭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뒤쪽 언덕 넓은 터에 있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 하는데 온전하게 다치지 않고 남은 모습도 장하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석남사 절간 뒤꼭지가 남다르게 그윽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랍니다.

 

석남사 승탑.

 

석남사에는 삼층석가사리탑과 그냥 삼층석탑도 있습니다. 삼층석가사리탑은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은 극락전 앞에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원래 그대로고 삼층석가사리탑은 15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무너졌다가 1973년 스리랑카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를 가져와 봉안하고 3층으로 쌓았습니다.

 

석남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사리삼층석탑.

 

신앙하는 대상으로는 석가사리탑이 적격이겠지만, 아담하고 가지런하고 소박한 느낌은 삼층석탑 쪽이 좀더 낫습니다.

 

석남사 일주문.

 

돌아오는 길에는 우거진 숲을 감상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단풍이 정말 멋지게 들 텐데요, 경북 청도·경남 밀양·울산 울주에 걸쳐 있는 가지산의 멋진 모습입니다. 이를 보려면 질러 가지 않고 둘러가는 길을 골라야 합니다.

 

속도를 숭상하는 새로 난 국도 24호선은 석남사 들머리에서부터 가지산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통째로 터널로 관통해 버린답니다. 이러면 빠르기는 해도 국도 터널 가운데 가장 길다는 가지산터널 4.5km 내내 콘크리크벽말고는 아무 볼 것이 없습니다.

 

석남터널 가까운 데 단풍.

 

하지만 우리는 ‘뭘 좀 아는’ 사람들입니다. 석남사 나오면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지방도 69호선을 고릅니다. 울산 쪽 가지산 골짜기를 타고 올랐다가 석남터널 500m 남짓을 지난 다음 밀양쪽 골짜기를 타고 내립니다. 이렇게 하면 자동차로 달리는 내내 아름다운 단풍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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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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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의외의 통계를 접했다. 지난 25일 있었던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권역별 현안 토론회 자리였는데, 정상윤 지역신문발전위원(경남대 교수)이 발표한 자료에 '2012~2013년 SNS 서비스사별 이용률 추이'라는 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자료였다.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이용자 수 많은 것은?


나로선 의외였다.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을 둘 다 쓰고는 있지만, 친구 수도 페이스북이 월등하게 많고 실시간으로 수많은 글이 생산되며,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곳이 페이스북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나의 예를 봐도 페이스북 친구는 3900명, 받아보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5000명이 훌쩍 넘는다. 카카오스토리의 경우 친구 수는 400여 명에 불과하다. 열 배 이상의 차이다.



그래서 각각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에 이 통계 사진을 올리고, 페친과 스친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과연 이 통계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다. 우선 페이스북에 달린 댓글 의견들이다.


페이스북 댓글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여자 친구들이 페북보다는 카카오스토리를 더 많이 한다고 하네요. 동기, 동창 카스를 더 많이 한다고요. 남자들은 주로 페북이나 트위터고요."


"60대 이상에선 의외로 많이 하시고.. 페이스북의 "소셜"이 너무 과하다 싶은 분들도 많이 하세요. 저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이랄 게 없는 분들은 페북보다는 카카오스토리를 쓰는 경우가 많더군요. 제 이모님도 60대인데 카카오톡과 카카오스토리를 씁니다. 자주 이용하는 건 아니고 여행 등의 일로 드물게 글이나 사진 올리죠."


"카톡 성장세와 맞물려 있을거에요. 카톡친구가 되면 카스 연결은 쉽잖아요. 카톡은 상대방 전화만 알면 친구 추가가 쉬우니..."


"젊은층에서는 카카오 스토리를 많이 씁니다. 또한, 그룹은 보통 밴드나 단톡방으로 사용을 하죠. and, 카카오 스토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콘텐츠는 단연 썰만화입니다. 이것은 카카오 스토리에서만 유행하는 것으로 10대들에게 아주 인기가 높습니다. 주로 누군가가 겪었다고 하는 카더라 통신에 경험담을 만화를 그린 것인데 글보다 만화를 선호하는 젊은층에게 인기를 얻은 것입니다. 주제는 웃긴 일, 슬픈 일, 사랑 등으로 다양합니다."


"페이스북은 모르는 이들과도 친구가 될수 있지만 카스는 자동친구추천만 아니면 다 일면식이 있어 번호 아는 사람들이라 젊은사람들 좋아하는 셀카. 30대 좋아하는 아이들 자랑, 40~50대 여성들은 풍경사진이 많은듯 합니다."


"어제 아침에 아버지가 카카오스토리를 깔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카카오톡에서 친구 사진을 더 보려면 카스를 깔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시더군요. 카카오톡 사용자는 거의 스토리를 동시에 사용한다고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카톡을 통해서 유입이 되고 사용하는 분들도 그냥 카톡의 확장이라 생각하시니까요."


"한 때 어르신들 사이에서 "카카오톡도 안하나?" 하고 묻는 게 유행이다가 스마트폰이 많이 팔리고 난 뒤엔 "카스도 안하나?" 하고 묻는 게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트 좀 보내도"가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저희 부모님, 이모님과 주변 어르신들께 본의 아니게 스마트폰 강의를 해드리게 되는 입장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입니다."


"카스는 일단 카톡 사용자라면 자기도 모르는데 페이지는 개설되어있거나, 친구 소식 보는 '리딩' 전용으로 하는 사람의 수가 참 많습니다. 패이스북은 상호참여가 활발한 일이 훨씬 많죠."


"단적으로 저희 아빠를 비롯한 친척들도 페북은 안 해도 카스는 다 하시더라고요. 뭔가 중년의 세계인가 싶기도 하고."


"카스는 지인 중심인데 주로 동문들~."


"카톡 친구를 알게 되면 일단 가장 먼저 해보는 게 카카오스토리를 열어보는 건데 그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접근성이 좋으니까..."


"제 주변에 페북 하시는 분들은 카스도 겸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사용빈도는 낮지만. 그런데, 카스 친구 중에는 페북 안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더군요."


"저도 친한 분들 하고만 카스해요. 중요한 사진만 올리구요."


"주부나 연세 있으신 분들은 카스가 더 접근성이 용이한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 중에도 카스를 통해 정보를 더 많이 얻는다고 합니다."


"카스가 어찌보면 미니홈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는 점과 카톡과 연계된 점이 강점인 점도 있을테구요. 전 카스를 잘 쓰진 않지만 중년 여성분들이 활발하게 쓰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카친이 더 많고 주로 카스에서 놀아요. 페친이 수가 월등 많았으나 실속없어 정리했고요."


"페북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던데요 ...정치적 성향도 강하고 남성중심? 카스는 윗분 말씀처럼 가벼운 미니홈피 같은 느낌 ...쉽게시작할 수 있죠 ....^^"


"우선 카카오스토리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이고있는 카카오톡으로 유입되기때문에, 또 모바일이기때문에 접근성이 더 용이합니다. 페이스북은 전화번호를 수동동기화해야하지만, 카카오스토리는 카톡정보를 기본으로 자동 동기화 되는 점도있고요. 최근에는 같은형태의 네이버의 "밴드" 또한 이용률이 높더군요."


"폐쇄성과 개방성의 차이에 따른 호오가 있을 겁니다. 사실 친구가 많다는 것과 얼마나 많이 이용하냐는 다를 겁니다. 아직 페북 정도의 개방성에 대한 부담, 특히 자기 사생활이 만천하에 퍼지는 문제에 대한 불편함이 많은 게 사실 입니다. 페북은 상대가 나를 친구 먹으면 내 정보와 생각, 일정이 다 공개되는 그런.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훨 우리나라 사람은 카스를 선호하는 게 사실인 듯. 싸이같은 폐쇄성을 유지하면서도 sns의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저는 카스 안합니다 ㅋ 개설도 안했습니다 ㅋ 물론 카톡은 합니다 ㅎ"


"친구 수와는 상관 없는듯합니다. 페북과 카스를 이용하는 이유가 다르니까요. 저도 페북친구가 훨씬 많지요 그런데 카스는 친한 사람과만 친구맺죠. 그 친구들은 카스만 하니까 그 친구들때문에 카스를 하는거죠. 카스는 하지만 페북은 안하는 인구가 상당할걸요?"


"페북안하고 카스만하는 사람많습니다. 오프에서 아는 사람은 카스가 압도적이죠. 특히 초.중 동창들."


"페이스북이나 카스 문제로 IT 어쩌고 하려니 좀 민망합니다만.. IT에 익숙하지 않은 층(여성,중장년 등)은 카스를 많이 쓰는 듯 합니다. 외산 서비스이고, 초창기에 한글화도 잘 안 되어 있고 하니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같고; ...개방/폐쇄성 문제는.. 사실 페북도 폐쇄적으로 쓰려거든 얼마든지 쓸 수 있는데.. (내 글, 내 정보를 특정인 또는 특정 그룹에게만 안 보이도록 설정 가능, 특정인의 포스팅 안 보는 것도 설정 가능..) 페북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중에 5~60대는 압도적으로 카스를 이용합니다. 저 통계가 아마 맞을겁니다."


이상의 댓글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것들이다. 대체로 카스 이용자가 많다는 데 동의한다는 글이 많았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린 질문에 대한 댓글도 그런 의견이 많았다.


카카오스토리 댓글



"카스가 많아요~

페친은 잘 모르는 친구들도 많지만 카친은 대부분 아는 사람들..

게다가 전체공개하면 카톡에 저장된 사람들은 다 볼 수가 있죠..

가끔씩 내소식이 궁금한 사람들은 보고가기도 해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도 제 근황을 꿰고 있더군요^^."


"저는 200명 정도 됩니다. 제 주변 20대 분들은 카스 쓰면 확실히 카스만 쓰고 페이스북이랑 연동해서 사용하지 않더군요. 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 담긴 사진이나 글을 페이스북보다 카스에서 훨씬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532명이네요. 페북에선 전국 각지 해외에까지, 한 번도 오프에서 만나본 적 없는 친구 포함 몇 천 명 있었지만 카스는 지인 위주. 

페북은 할 줄 몰라도 카스는 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ㅎ

꼬진 내 아이폰4로 페북하기가 어려워진 이유도 한 몫.. ㅠㅋ"


"페북은 안해도 카스는 하는 분들이 제 주변엔 더 많은듯 해요~~."


"카스가 훨씬 더 많습니다. 카스는 주로 소상공인분들이 마켓팅으로 잘 활용을 해요."


"당근 카스가 휠씬 많지요. 카스는 신변잡기식 글을 마니 쓰고 페북은 좀 무거운 글이 많으니."


결론


이 정도 댓글을 모아보니 대충 결론이 나온다. 


1. 친구 숫자와 관계없이 페이스북보다는 카카오스토리 가입자가 훨씬 많은 건 사실이다.(그러나 가입은 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더라.)

2. 페이스북보다 카카오스토리 친구들은 더 개인적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3. 글이나 사진도 카카오스토리에 개인적인 내용이 더 많다.

4.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한 글은 페이스북에 더 많이 올라오고 토론도 활발하다.

5. 여성이나 연령대가 높을수록 카카오스토리를 많이 쓴다.


절대적인 이용자 수는 카카오스토리가 많지만, 소통이나 토론은 아무래도 페이스북이 더 활발한 것 같다. 또한 사회적인 여파도 페이스북이 더 크다. 페이스북은 웬만한 글이 '전체공개'로 설정되고, 사실상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오른 글을 언론에서 기사화하고, 그게 사회적 이슈가 되는 빈도도 높다.


카카오스토리도 최근 '플러스' 서비스를 무료로 전환하여 '카카오스토리 채널'을 오픈했다. 각 언론사와 기업들도 앞다퉈 채널을 개설했다. 물론 경남도민일보도 '도서출판 피플파워'와 '월간 피플파워'를 포함, 세 개의 채널을 개설했다.


또 뉴스 기반의 '카카오 토픽'도 곧 출시된다고 한다. 티스토리블로그에 '카카오스토리 공유' 버튼도 생겼다. 그동안 개인적인 소식이나 일상을 전하는 매체로 이용되어 온 카카오스토리의 변화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런 것들이 카카오스토리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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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의 일상이 된 '받아쓰기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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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산YMCA 아침논단에서 '나는 왜 지역신문에 미쳤나'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내용 중 1991년 '지리산 결사대' 사건도 있었는데요. 마침 지난 5월 '마창 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의 소식지에 썼던 글이 있네요. 세월호 오보로 '기레기' 소리를 듣는 요즘, 이렇게 되풀이 되는 오보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짚어봤습니다.


‘받아쓰기.’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정확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을 익히기 위해 선생님이 불러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학습방법이다. 말의 내용에 대한 의심은 필요 없다. 그저 잘 받아쓰기만 하면 100점을 얻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론보도가 그랬다. 그러나 결과는 빵점이었다. 언론 역사상 길이 남을 대형 오보가 쏟아졌다. 300여 명의 원통한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의 첫 오보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였다. 경기도교육청과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한 결과였다. 한국 언론의 참사였다.


문제는 이런 ‘받아쓰기 오보’가 세월호 참사에서 어쩌다 생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처럼 만천하에 밝혀진 대형 오보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는 ‘받아쓰기 오보’는 한국 언론에서 그냥 비일비재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사실(fact)을 보도한 기자가 오히려 이상한 놈 취급을 받는 일도 생긴다.


오늘(30일) 있었던 아침논단. @사진 박민국


지리산 결사대 사건의 진실


1991년 10월 10일이었다. 당시 진주시 하대동에 있던 진주전문대에서 생긴 일이다. ‘운동권’ 후보와 ‘비운동권’ 후보가 맞붙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 쪽의 천재동(당시 24세) 후보가 200여 표 차이로 당선됐다.


사건은 개표가 마무리되기 직전 발생했다. 사건을 감지하고 기자가 진주전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 학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 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렇게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 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당시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그 이전에도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 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남학생)들로부터 “강간을 해버리겠다” “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으로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33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이들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 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측 천재동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 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 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이처럼 사실(fact)관계만 놓고 본다면 경상대생 33명이 다수의 진주전문대생들로부터(집단폭행), 강의실에 감금당한 채(감금폭행),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특수폭행)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즉 피해자는 33명의 경상대생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운동권’이라는 것, 남의 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피해자라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다만 쇠파이프(사용해보지도 못했지만)를 천막용 가방에 넣어 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쌍방폭행’ 정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피·가해자를 바꿔치기하여 경상대생 19명을 폭력 혐의로 구속했다. ‘타 학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였다.


경찰의 일방적 발표를 받아쓰기한 당시 언론의 보도.


경찰의 왜곡과 언론의 받아쓰기 오보


문제는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 시작한 언론이었다. 어떤 언론도 ‘사실 확인’은 커녕 ‘취재’도 하지 않았다. 1991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를 보자.


“10일 오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 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 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기사는 짧은 2개의 문장 대부분이 오보로 구성돼 있다. 사실보도의 구성요소를 6하원칙이라고 할 때 이중 사실과 부합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언제(when)에 해당하는 ‘오후 5시반경’이 틀렸다. 학생들 간에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4시께였다. 또 어디서(where)에 해당하는 장소도 틀렸다. 경상대생들은 개표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개표장과 다른 101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who)에 해당하는 난동과 폭력을 주체도 오히려 뒤바뀌었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이다. 주체가 바뀌었으니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른 행위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왜(why)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운동권후보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천재동 후보의 나이도 안맞다. 그는 1학년이었으나 늦깎이 입학으로 실제 나이는 24세였다.


이처럼 사실관계에서부터 오보 투성이인 기사가 당시 모든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조선·동아·중앙 등 전국일간지의 경우 취재기자가 진주에 없어 일방적인 경찰 발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지에 많은 취재기자를 두고 있는 지역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경남일보> <경남신문> <경남매일> 등 3개 지역일간지도 모두 경찰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노보> 10월 21일자는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14일. 이날 진주경찰서는 ‘지리산결사대’ 관련 보도자료를 진주 및 경남도경 기자실에 보냈다. 첫 보도 때 이미 단추를 잘못 끼운 연합통신 진주주재기자가 또다시 확인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해 본사로 송고했다.(…중략…) 이날 오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연합통신 기사를 서비스 받은 이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 보냈느냐’는 투의 전화를 해당지역에 했다. 이에 따라 경남주재 중앙지 기자들은 별다른 확인과정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첫 보도 겸 ‘결사대’ 속보를 작성해 본사로 송고했다.”


이에 따라 전국일간지와 양 방송사 등은 ‘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 등 특집 해설기사 등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다시 쓴 현장취재기.


이처럼 언론의 앵무새 같은 보도에 힘입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이들 경상대생 18명에게 대부분 폭력혐의를 인정, 유죄선고를 내렸다. 물론 진주전문대 학생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던 경상대생들은 10년 후인 2001년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게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했던 언론은 사과하지 않았다.


권력에 굴복해온 비겁한 역사에서 비롯


이뿐일까? 아니다. 79년 부마항쟁, 80년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 때도 그랬다. 항쟁이 승리하면 슬그머니 논조를 바꾸지만, 진압되면 그냥 쌩까고 넘어가는 게 언론이다.


언론의 역할은 '전달'이나 '받아쓰기'가 아니라 '사실규명'이어야 한다.


진주의료원 폐업, 밀양송전탑 사태에서도 이런 언론의 ‘발표저널리즘’ ‘받아쓰기 보도’는 이어지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진주의료원 노조를 ‘강성 귀족노조’라 매도하면서 “1999년에는 노조가 원장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기’했다. 우리가 당시 기록과 취재노트를 바탕으로 확인해보니 오히려 원장이 주먹을 휘둘러 간호사 노조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누군가의 발표, 누군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건 언론이 아니다. 기자가 아니라 한글을 아는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름 많이 배웠다는 기자들이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까? 정말 바보여서 그런 걸까?


내가 보기엔 앞의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력에 굴복하고 순치되어온 비겁한 한국 언론의 역사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국 언론인 이지 스톤의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자라면 ‘저 말이 과연 사실일까’라는 의심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해야 한다. 경기도교육청이, 안전행정부가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를 발표했을 때, 기자라면 응당 ‘어떻게 구조했는지, 구조된 학생들은 어디 있는지’를 묻고 확인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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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고 풍경도 좋은 마산 산책로 두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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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저녁 창원교통방송에 나간 원고입니다. 제가 사는 데와 가까운 데 있는 두 곳을 소개했습니다. 저도 비치로드와 무학산 둘레길 서원곡~밤밭고개 구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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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산에 있는 거닐기 좋은 두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명하기도 하고 찾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바로 옆 가까운 데 사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대구나 울산 같이 멀리서 일부러 버스를 대절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창원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이를테면 옛 창원이나 옛 진해 지역에 사는 이들은 잘 찾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저도 비치로드와 무학산 둘레길인데요, 옛 창원이나 진해 지역에서도 일부러 발품 한 번 팔아도 될 만큼 그럴 듯한 명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멀리 나가지 않고 손쉽게 마주할 수 있는 그런 걷기 좋은 장소가 우리 지역에도 적지 않답니다.

 

먼저 무학산 둘레길입니다. 무학산 둘레길 전체를 걷자는 말씀은 아니고요, 가장 편하고 멋지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신다면 서원곡 입구 정류장에 내려서 10분가량 올라가 약수터 주차장 조금 아래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여기서 만날고개를 지나 밤밭고개까지가 가장 좋습니다. 이처럼 서원곡에서 시작해 밤밭고개쪽으로 걸으면요, 거꾸로 밤밭고개에서 서원곡을 향해 걸을 때보다 훨씬 낫습니다. 첫째는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마산 앞바다와 시가지 풍경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마산만 매립 공사가 많이 진행돼 그런 맛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창대교 시원하게 뻗은 모습만큼은 괜찮게 다가옵니다. 또 밤밭고개에서 서원곡 쪽으로 오면 바다를 등져야 하지만 반대로 걸으면 바다에 떠 있는 돝섬과 마창대교가 조그맣게 있다가 조금씩 커지곤 합니다.

 

둘째는 힘이 적게 듭니다. 밤밭고개에서 출발하면 학봉을 바라보는 데까지 줄곧 오르막입니다. 서원곡에서 출발해 걸으면 그 오르막이 바로 내리막이 됩니다. 굳이 등산을 하겠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가뿐한 차림으로 산책하듯 걷는다면 서원곡 출발이 아주 좋습니다.

 

때로는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도 만나면서 설렁설렁 걸으면 햇살이 나무 사이로 갈라져 들어오는 모습이 즐겁습니다. 이에 더해 청신한 바람, 때때로 상큼한 소나무 향기, 아름다운 골짜기 풍경이 어울려 줍니다.

 

 

그래서 걸을수록 마음까지 가벼워집니다. 이렇게 느릿느릿 걸으면 밤밭고개까지 대략 3시간 가량 걸립니다.

 

다음으로는 저도 비치로드입니다. 비치로드는 모두 8km라는데요, 3.7km 1시간20분짜리 짧은 구간과 6.6km 2시간 50분짜리 완주 구간 두 개가 있습니다. 오늘은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짧은 구간을 소개합니다.

 

 

하포마을에서 제1·제2전망대와 사각정자를 지나 섬을 가로지르는 구간입니다.  완주하는 구간은 등산길에 가깝고 제가 소개하는 구간은 산책로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바다는 섬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너울이 일어도 그냥 살랑거리는 수준입니다. 때때로는 내려가 바닷물에 손을 담가 보면 좋은 데도 있습니다.

 

군데군데 나무가 우거진 데가 나오는데, 겨울이라면 틈새로 바다가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갑갑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거닐고 또 일부러 지어놓은 전망대 등에서 풍경을 즐기고 사진을 찍고 하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이렇게 짧은 거리로 한 바퀴를 도는 데는 길어야 2시간이 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도 비치로드 걸으러 갈 때는 꼭 버스를 타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 걷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거기 있는 조개구이집에 들어가 푸짐하게 즐기면서 먹고 소주까지 한 잔 걸치면 그지그만으로 좋기 때문입니다.

 

 

자가용 자동차를 몰고 가면 절대 누릴 수 없는 그런 호사를 시내버스가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비치로드 들어가는 시내버스는, 마산역 광장에서 출발하는 61번 한 대가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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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승무원의 재치발랄 코믹 기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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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면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 승무원의 안내방송을 듣게 된다. 대개 준비된 원고를 사무적으로 읽어준다. 그러나 그런 딱딱한 안내방송과 달리 재치 발랄, 코믹 안내방송을 해주는 곳도 있다.


지난 4일 태국 방콕에서 김해공항까지 오는 제주항공 7C2252편에 탑승한 186명의 승객들은 승무원의 익살스런 기내 안내방송만으로 기분이 좋아졌고 여행의 피로가 풀렸다며 다들 즐거워했다. 당시 안내방송을 급하게 영상으로 담았다. 그러나 미처 앞 부분은 촬영하지 못해 아쉽다.


영상에 담기지 못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제주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고맙습니더. 오늘도 저희 부산행 7C2252편은 186석 모두 만석이네예. 덕분에 이번 달도 제 월급 문제없이 받을 수 있게 됐십니더."(탑승객들 '어 뭐지' 하고 놀라며 웅성웅성)


여기서부터는 영상에 담긴 내용이다.



"제가 원래 고향이 대구인데예. 항공사 들어오니 다들 서울 애들이라 가지고 사투리를 몬알아듣더라고예. 지지배들이. 아, 머스마도 있네."(탑승객들 그제서야 웃음)


(갑자기 정색을 하며)"제가 지금부터는 표준어를 구사하겠습니다. 손님 여러부운~. 지금부터 비상구 위치와 비상장비 사용법에 대해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탑승객들이 웃자) "앞에 빵~ 터지셨습니다."


"이 비행기의 비상구는 모두 여덟 개며, 가리키는 것처럼 좌우에 각각 있습니다. 비상상황 발생시 비행기의 전원이 꺼질 경우에는 통로의 야광 유도선과 선반의 유도등이 여러분을 친절히 비상구까지 안내할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여러분의 좌석에서 가장 가까운 비상구 위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오늘 15번, 16번 손님, 안 주무시죠? 손 한 번만 들어주시겠어요? 아. 예. 흔들어주시기까지 예. 감사합니다. 거기 비상구니까요, 혹시 비상상황이 생기면 저희 승무원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좌석벨트 표시등이 켜지면 좌석벨트를 매주십시오. 벨트는 덮개 고리를 끼워 몸에 맞게 조여주시고, 풀 때는 덮개를 들어올리면 됩니다. 헐겁게 매시면 몸매 사이즈 다 나옵니다~?"(웃음)


"산소마스크는 산소 공급이 필요한 비상시 저절로 내려오도록 선반 속에 쏙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스크가 내려오면 앞으로 잡아당겨 당연히 코와 입에 대셔야겠죠? 코와 입에 대시고 끈으로 머리에 고정하여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동반자가 있을 때에는 먼저 착용한 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좌석 아래에 있는 구명복은 비행기가 바다에 내렸을 경우 사용하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구명복을 착용하실 때에는 머리 위에서부터 입으시고, 끈을 허리에 돌려~ 돌려~ 고리에 끼운 후 손잡이를 잡아당겨 몸에 맞도록 조여주십시오. 구명복은 기내에서 부풀지 않도록 유의해주시고, 부풀릴 때는 탈출 직전 비상구 앞에서 붉은 색 손잡이를 당기십시오. 충분히 부풀지 않을 때에는 양쪽에 있는 고무관을 힙껏~ 힘꺼엇 불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좌석 쿠션은 구명복과 함께 부유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모든 승객의 쾌적하고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내에서 폭언 및 고성방가 등의 행위는 금지되어 있으며, (잠시 침묵) 웃으시는 거는 항상 가능합니다."


"이착륙을 포함한 비행 중에는 전자기기를 비행기모드로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앞 좌석 주머니에 있는 안내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 드립니데이?"


이 때 승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아, 이 반응 좋습니다. 흐흐."(탑승객들 함께 웃음)


그리고 영어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자주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라도 이륙할 때나 착륙 때는 약간씩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날 제주항공의 이륙 전 기내 안내방송은 승객들의 그런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사무적이고 딱딱한 안내방송에 비해 토박이말(사투리)과 중간 중간 웃음을 유발하는 코멘트로 인해 친근감이 드는 방송이었다.


이런 기내방송은 김해공항에 착륙할 때도 이어졌다.



"~ 안전을 위해 좌석벨트는 계속 매고 계시고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선반을 여실 때에는 안에 있는 물건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니다. 맞으면 아픕니다. 느낌 아~니까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시고, 놔 두시고 내리신 물건은 저희 승무원들이 정확히 찾아서 1/N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런 재치 발랄한 기내방송을 진행한 승무원은 누굴까? 비행기에서 내릴 때 그 승무원을 만나 짧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의 이름은 이정아. 76년생이니까 서른 여덟이다. 그러나 워낙 밝은 표정이라서인지 20대로 보였다. 대한항공에서 승무원 생활을 시작해 12년을 근무한 후, 2년 6개월 전 경력직으로 제주항공에 입사했다고 한다.


제주항공 승무원 이정아 씨.


-언제부터 이런 재미있는 안내방송을 했나요?

"언제부터요? 아, 입사한 이후부터 계속했죠."


-본인이 그렇게 해보자고 제안을 한 건가요?

"네. 제가 제안을 해서, 저희 회사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런 회사다 보니까 (승객들께도)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죠."


-그건 임의로 해도 되나요? 윗선의 허락을 얻어야 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네. 그런 건 없고요. 그냥 개인적으로…."


-위에 간부들도 알고는 계시나요?

"그럼요. 네."


-태국 노선에서만 하는 건가요?

"아뇨. 제가 근무하는 비행기마다 하죠. 국내선도 있고 국제선도 있고 돌아가면서 순환근무를 하니까."


-승객들 반응이 어때요?

"다들 재미있어 하시죠.(웃음)그 재미로 좀 더 업그레이드시켜서 다른 멘트도 만들어보려 하고."


-원래 고향이 대구시라고?

"네. 대구에요.(웃음) 재미있으셨어요?"


-네. 굉장히 재미있었고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아. 네. 부끄럽네요."


제주항공 재치 발랄 승무원 이정아 씨.


정말 발랄하고 즐거운 기운이 넘치는 승무원이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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