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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코믹 기내방송 기사 출고과정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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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제주항공 승무원의 재치 발랄 코믹 기내방송'이라는 기사의 출고 과정 정리.


1. 10월 4일(토) 방콕-김해공항 제주항공 비행기에서 우연히 톡톡 튀는 기내방송을 보고 아이폰으로 동영상 촬영.


2. 착륙 후 내릴 때 해당 승무원에게 인터뷰 요청. 아이폰으로 대화 녹음.


3. 사진 촬영과 기사화 동의 구함.


4. 5일(일) 일단 영상부터 편집, 두 편의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http://youtu.be/h9Ve32QPdFw?list=UUWs6iNaAk-Gmq4RwZXCrXgg / http://youtu.be/aDHkSxPU1_s?list=UUWs6iNaAk-Gmq4RwZXCrXgg


5. 5일 오전 블로그에 기내방송 전 과정 녹취 풀어 올림( http://2kim.idomin.com/2681)


6. 구글플러스와 트위터, 페이스북에 소개 : 반응이 괜찮았음. 해당 블로그 포스트에는 '좋아요'가 500회 넘고, 페이스북에서는 공유 33회 기록.


7. 5일 오후 김해공항에 착륙한 항공기라는 점에서 지역성이 있다고 판단, 신문용 기사로 정리하여 편집국에 출고.


8. 신문용 기사에 큐알코드로 첨부할 영상 재편집(2개의 영상을 1분 51초 짜리로 합침), 경남도민일보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http://youtu.be/TMzgE4rySa8)



9. 6일자 신문 4면에 보도. 큐알코드 첨부.


9. 6일 오전 경남도민일보 인터넷 신문에 업로드.(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61448)


10. 네이버와 다음에 기사 전송

※그런데 인터넷 신문에 올라온 기사 제목이 ㅠㅠㅠ. 본문 링크에도 이상한 점선과 부호가 보이고... 쩝.


11. 6일 오후 3시 <위키트리>에서 유튜브 동영상 인용 기사화(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9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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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베껴쓰기에도 기본 예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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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뷰징. 남용, 오용, 학대 등을 뜻하는 단어인 abuse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엔하위키 미러)


'기사 어뷰징'이란 말도 있다. 언론 전문지 <미디어오늘>은  "실시간 검색어 위주로 의미 없는 기사를 보도하거나 이를 반복 전송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지난 4일 아내와 함께 태국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새벽 0시 50분 제주항공 여객기를 탔다. 이륙 직전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좀 이상했다. 의례적이고 딱딱한 방송이 아니라 경상도 토박이말(사투리)이 섞였고, 무엇보다 "오늘도 우리 비행기는 186석 만석이네예. 덕분에 제 월급도 문제없이 받을 수 있겠네예."라는 대목이 웃음을 자아냈다.


어! 재밌네? 곧바로 아이폰을 켜고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4시간 30분이 지나 김해공항에 착륙할 때도 톡톡 튀는 기내방송은 이어졌다. 이 또한 아이폰 영상으로 촬영했다.


내릴 때 해당 승무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1976년생 대구 출신 이정아 씨였다. 흔쾌히 받아주었다. 이는 아이폰 음성메모 앱으로 녹음했다.


제주항공 승무원 이정아 씨.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그날 오후 두 영상에 서툰 실력으로 자막을 넣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리고 저녁 7시 좀 넘어 내 페이스북에 링크하고 반응을 살펴봤다. 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다음날인 5일 블로그에 이정아 승무원의 기내방송 전문을 정리해 올렸다. 그러나 SNS에 링크하진 않았다. 자료 정리 차원의 포스팅이었으니까.


그리고 신문 지면용 기사를 새로 써서 편집국에 넘겼다. 영상도 두 개를 합쳐 자를 부분은 자르고 제목과 자막을 추가해 1분 51초 짜리로 재편집했다. 이는 경남도민일보 유튜브 계정에 올렸다.


6일 아침 신문 4면에 기사가 실렸다. 아울러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에도 기사가 떴다. 그런데 당초 제목이 좀 그랬다. '목적지까지 즐겁게 모시겠습니데이∼"라는 제목이었다. 인터넷 기사 제목으로는 최악이었다.


편집자에게 제목수정을 지시하고 포털에서 검색해보니 위키트리에 우리 기사를 베낀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주항공 승무원의 신박한 기내방송'이라는 제목이었고, 내 개인 유튜브 계정에 올렸던 두 개의 동영상을 삽입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출처 표기는 그냥 '유튜브'였다.


포털에 우리 기사의 제목이 '제주항공 승무원 톡톡 튀는 코믹 기내방송 눈길'로 수정된 후, 오후 5시 30분쯤 쿠키뉴스에 '[이거 봤어?] "빵 터지셨습니다~" 제주항공 여승무원의 독특한 기내방송'이라는 기사가 떴다. 영락없이 우리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보고 베낀 것이었다.


베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영상에 담긴 이정아 승무원의 말만 쿠키뉴스 기사에 실렸다면, 그냥 '유튜브 영상을 보고 기사를 썼구나'라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처 영상에 담지 못한 앞부분의 "오늘도 우리 비행기는 186석 만석이네예. 덕분에 제 월급도 문제없이 받을 수 있겠네예. 제가 원래 고향이 대구거든예. 그런데 (항공사에) 입사해보니..."라는 말까지 쿠키뉴스 기사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기사나 내 블로그 글을 베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이씨의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비행기에서 내리던 승객들은 출입문에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해당 승무원에게 “즐거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라는 문장은 경남도민일보 기사에만 나온다. 그걸 보지 않은 쿠키뉴스 기자가 승객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지 무슨 수로 알 수 있나.


그런데 포털 다음은 천연덕스럽게 베껴쓴 쿠키뉴스 기사를 뉴스 메인에 썸네일 사진까지 박아서 노출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한 건 당연. 나는 보지 못했지만 한 때 1위까지 올랐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베껴쓴 어뷰징 기사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코리아데일리, 코리아재팬타임스, 뉴스퀵, 브리핑뉴스, 티브이데일리, 뉴스엔 같은 생소한 인터넷신문부터 헤럴드경제, 민중의 소리, 민주신문 등 별의별 신문들이 어뷰징 대열에 동참했다.





특히 민중의 소리는 '제주항공 기내방송, 입담은 김신영급 외모는 박신혜급?' '제주항공 기내방송, 센스도 미모도 만점!' '제주항공 기내방송, 미술과 악기연주까지...특화 서비스 눈길' '제주항공 기내방송, 아리따운 여성의 입에서 어떻게...‘남심 흔들’' 이런 제목으로 비슷한 어뷰징 기사를 반복 전송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베끼기 기사, 어뷰징 기사에 내 블로그나 경남도민일보라는 기사 출처 표시는 없었다. 저작권 침해에다 기사 도둑질이다. 법으로 걸려면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걸 피해가려고 내가 직접 찍은 승무원 이정아 씨 사진은 사용하지 않았다.(유일하게 코리아데일리는 그 사진을 썼다. 이건 걸면 바로 걸린다.) 대개는 유튜브 영상만 이용하고 이정아 씨 사진은 과거에 어떤 개인 블로거가 올린 것을 무단으로 가져다 썼다. 유튜브가 어차피 공개된 영상 공유 사이트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좀 있다 보니 언론매체뿐 아니라 개인 블로그들도 어뷰징 포스트를 줄줄이 올리기 시작했고, 영상도 허락없이 퍼가서 판도라TV, 다음TV팟, 네이버 블로그 등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를 본 독자들이 열을 받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어뷰징 기사를 비판하는 글과 댓글들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변을 올렸다.


"치사하죠. 그런데 이런 베끼기 기사나 쓰고 있는 기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할까요.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쓰겠죠."


※이번 일에서 얻은 교훈.

1. 유튜브에 영상을 올릴 때 가급적 '퍼가기 금지'로 올린다.

2. 저작권 표시를 '표준 유튜브 라이선스'로 하지 않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저작자 표시'로 한다.

3. 공식 인터넷판에 올릴 때 제목을 처음부터 제대로 단다.

4. 영상에 반드시 '경남도민일보' 로고를 박는다.(사실 이번에도 넣으려 했으나, 동영상 편집자인 박민국 기자가 출장 중이어서 넣지 못했다. 내가 아직 로고 넣는 방법을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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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언론사 얕잡아보는 기자들의 못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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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나는 오마이뉴스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


'모언론' '모일간지' '한 시사주간지'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언론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상대매체의 이름을 우리 매체에 실을 수 없다는 속좁은 관행 중 하나다.


더 웃기는 것은 외국 언론을 인용할 땐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는 물론 외국의 삼류언론까지 정확하게 출처표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언론, 상대언론 표기 '꼼수' 버려라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언론은 어떨까? 그보다 훨씬 심해졌다. 이젠 '모언론'이란 표현도 쓰지 않는다. 신문사의 공식 유튜브 계정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서도 그냥 '유튜브에 따르면'으로 퉁친다. '누구의 유튜브'라는 출처도 밝히지 않는다.


이번 '제주항공 승무원 톡톡 튀는 코믹 기내방송 눈길'이라는 기사와 영상을 무단으로 가져가 기사를 쓴 100여 개 기사가 대부분 그랬다.



심지어 YTN은 내가 올린 유튜브 동영상을 무단으로 가져간 것도 모자라 그걸 재가공, 재편집까지 하여 방송했다.


7일 저녁 경남도민일보에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올렸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도 기사 베끼기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8일 아침부터는 '경남도민일보' 또는 '경남도민일보 김주완'으로 출처를 표기한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에서 '경남도민일보'로 검색했을 때 나타나는 기내방송 기사들.



최소한의 출처라도 표기한 매체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서울경제

 헤럴드경제

 부산일보

 TV 리포트(8일 자)

 한국경제TV

 아시아경제

 조선일보

 더팩트

 스포츠조선

   중도일보

   서울뉴스통신

 스포츠조선(8일 자 2차)

 스포츠조선(8일 자 3차)

 TV 리포트(8일 자 2차) 개선

 동아일보(8일 자 2차. 일부 기사만 표기)

 데일리그리드

 아시아경제(8일 자 2차)

 뉴스타운

 헤럴드POP(8일 자 2차) 개선

 SBS

 SBS funE

 국제신문(8일 자 2차) 개선

 스포츠조선(8일 자 4차)


그러나 같은 내용의 기사를 약간 제목만 바꿔 반복 전송하는 매체들은 여전히 많았고, 출처 표기도 없이 베껴쓴 쿠키뉴스의 기사를 메인에 배치한 포털 다음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리고 한 지역신문 관계자의 아래와 같은 푸념도 뇌리에 남는다.


"경남도민일보도 기사를 무단으로 빼앗기는 세상이죠. 그보다 더 작은 언론사는 단독 또는 특종을 해도 알아주지도 않고, 나중에는 그 기사를 무단 도용하여 올리기도 하지요. 몇 번 당해봐서 압니다."


사실 기자들의 의식 속에는 자기가 속한 매체보다 작은 언론사를 은근히 깔보고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작은 언론사 이름을 출처로 표기하는 걸 수치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또한 각 시군에서 나오는 지역주간지의기사를 그냥 출처표기 없이 베껴서 출고하는 일은 없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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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여행 중 방문한 한방병원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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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내와 함께 태국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방콕에서 하루 자고, 파타야에서 이틀 묵는 3박 5일 여행이었죠.


으레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이 그렇듯이 마지막 날 라텍스, 보석상, 잡화점 등으로 쇼핑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 특이한 곳이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말로는 '한방병원'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을 방문하기 전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하는 말.


"이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분은 교민사회에서 아주 존경받는 분입니다. 교민들의 자녀가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한국말을 못해요. 그래서 한국학교 설립 필요성이 높았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보조를 해주지 않는 겁니다. 그럴 때 이 분이 거금 5억 원을 한국학교 설립에 쾌척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가면 다른 쇼핑몰과 달리 예의를 좀 갖춰 주시고, 원장님의 말씀이 끝나면 박수를 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과연 원장이라는 분은 나이 지긋하고 중후한 인상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입는 하얀 가운을 입으셨더군요.



원장실처럼 꾸며진 방. 태국 국왕의 사진 액자도 걸려 있습니다.


우리를 안내한 방도 '원장실' 느낌이 드는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태국 왕족들의 사진 액자도 걸려 있었습니다.


원장이라는 분은 중의학, 한의학이 서양의학과 다른 점을 설명하신 후 일행들의 얼굴만 보고도 체질을 대략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희망자에 한해 진맥을 해주시겠답니다.



각종 약재가 장식품처럼 놓여 있습니다. 저울도 보이네요.


일행 중 그동안 여행 과정에서 잔병 치레가 잦았던 한 여성분이 진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3개월 분의 약을 지었습니다.


저도 진맥을 받았습니다. 대뜸 간이 좋지 않다면서 웅담을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알미늄 도시락 같은 곳에 담겨 있던 웅담을 보여줬습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60만 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국에 가면 아는 의사도 있고, 한의사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과 잘 상의해서 치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러시라"면서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더군요.





이 현판에 있는 태국어에도 '병원'이란 단어는 없다고 합니다.


일행이 약을 짓고 결제를 하는 동안 화장실을 간다면서 '한방병원'이라는 곳을 둘러봤습니다. 아까 우리가 있었던 '원장실'과 똑 같은 인테리어를 한 방이 몇 개 더 보이더군요. 어디에도 '병원'이라는 표식은 없었습니다. 입구 현관에도 병원 표식은 없었습니다. 태국어로 적혀 있는 초록색 현판을 찍어와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그냥 주소일뿐"이라는 답이었습니다.


현관 로비에 걸려 있는 사진. 세 명의 의사가 동국대나 경희대 한의과 대학을 졸업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사 학위 번호도 적혀 있습니다.


아, 참. 입구 로비에 커다란 사진이 있었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세 분의 의사 사진이었는데요. 보니까 다들 동국대와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나온 분들이더군요. 검색해보니 가운데 '안덕균'이라는 분은 꽤 유명한 한의사인 것 같던데, 그 분이 태국에 가서 한방병원을 차린 것일까요?


그런데, 저희들 앞에서 원장님이라고 소개했던 그 분은 이들 세 명의 사진 중에 없습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우리가 방문했던 이곳이 한방병원이 맞는 걸까요? 그 분은 진짜 한의사일까요? 저 사진 속의 세 분 한의사는 정말 이곳에 근무하는 분들이까요? 원장이라는 분은 정말 태국 교민사회에서 존경받는 분일까요? 혹 태국에 살고 계신 교민이나 교민사회를 잘 아시는 분이 있으면 속시원히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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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들은 하루에 몇 건의 기사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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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일주일만에 숨진 조선비즈 기자 "여기서는 기자 못해"'라는 기사가 미디어스에 실렸다. 기사 내용 중 이런 대목이 있었다.


(숨진) A기자는 수습기간 6개월을 포함해 지난 5월28일까지 8개월 동안 1390건의 기명기사를 작성했으나, 복귀 뒤에는 한 건의 기명기사도 작성하지 않았다. 조선비즈는 포털사이트 급상승검색어 등 온라인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고용, ‘조선비즈닷컴’ 바이라인의 기사를 내보내는데, A기자도 이 같은 무기명 기사를 쓴 것.


놀라웠다. 8개월 동안 1390건의 기사라니…. 이후 8월 말부터 무기명으로 쓴 온라인 기사까지 합치면 도대체 하루에 몇 건의 기사를 썼다는 말인가? 나도 일선 기자 시절엔 하도 기사를 많이 써서 '기사 제조기'라는 말까지 듣긴 했지만, 진짜 기사 제조 기계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조선비즈 기자의 죽음을 알리는 미디어스 기사.


그래서 이 기사를 페이스북에 링크했더니 더 놀라온 댓글이 올라왔다.


JaiBong Kim 열악한 환경이 많습니다. 취재기사는 대략 하루에 2개에서 3개면 충분하지만, 보도자료까지 다 한다면 하루에 10개 이상, 어떤 경우 20개도 작성합니다. 저도 전에 취재기사 한 두개에 보도자료 기사화는 대략 15개 이상을 매일 작성하기도 했는데요. 종이신문은 한정되지만 인터넷은 기사가 많이 올라가야 하니 회사에서 그렇게 요청을 하더군요. 그런데 하루에 보도기사 15~20개 정도 처리하면 사실 취재할 시간은 거의 없게 되지요. A기자는 하루에 평군 5.7개의 기사를 쓴것으로 나옵니다. 규모가 작은 신문사에서는 그정도만 되어도 행복해 할 것입니다.

10월 18일 오후 7:20 · 좋아요 취소 · 3


놀라워서 "그게 과연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라고 질문을 달았더니 다시 연달아 두 건의 댓글이 달렸다.


JaiBong Kim 취재기사만 하기로 했어도 나중에 기사가 부족하면 보도자료 기사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계속 하더군요,....전에 다른 신문사 근무할 때 두군데 모두 하루 15개 이상의 보도자료를 처리해 달라고 그러더군요. 처음엔 취재와 기관방문만 이야기하더니 슬슬 보도자료 기사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10월 18일 오후 9:57 · 좋아요 취소 · 2


JaiBong Kim 기자로서 꿈은 기획을 하고 자기만의 취재기사를 만드는 것인데요. 많은 신문사들이 그럴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기획기사는 아예 시도도 못하고 간단한 취재기사로 나날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하루에 20개 이상의 보도자료를 처리하다보면 그 보도자료를 분석하고 기사를 올리기 보다는 정신 없이 요약하여 올릴 수 밖에 없지요. 많은 신입기자들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요,....저도 그런 시간을 보낸적이 있고요,...

10월 18일 오후 10:00 · 좋아요 취소 · 2


이를 계기로 알게 된 사실이다. 조선비즈 A기자는 휴일을 빼고 근무일 기준으로 하루 약 8건의 기사를 썼다. 그런데 2014년 한국의 인터넷신문은 보도자료를 포함, 하루 최소 10개 이상, 많게는 20개의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이건 기자가 아니다. 이들이 쓰는 건 기사도 아니다.


우리 기자들은 얼마나 쓸까? 소속부서와 담당분야, 출입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하루에 1~2건은 직접 취재한 기사, 보도자료를 포함해도 4~5건이 평균인 것 같다.


창원시청을 담당하고 있는 이승환 기자로 검색해보니 9월 한 달 64건의 기사를 썼다. 22일 근무한 걸로 계산한다면 하루 2.9건의 기사를 쓴 셈이다. 경남도청을 담당하는 조재영 기자는 46건을 썼다. 하루 2.1건이다. 창원시의회를 담당하는 이창언 기자는 43건, 하루 2건이 채 못된다.


시민사회부는 이보다 훨씬 많다. 경찰과 법원 검찰을 담당하는 표세호 기자는 9월 한 달 105건의 기사를 썼다. 하루 평균 4,7건이다. 옛 창원지역과 진해지역의 사회를 담당하는 김두천 기자는 83건, 하루 3. 8건이다.


이걸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씁쓸한 일이다.


이참에 각 매체별 기자의 적정 기사 생산량을 알아보고 싶네요. 이 글은 일간지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만, 월간지, 주간지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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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가 창간 3주년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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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가 10월로 창간 3주년을 맞았습니다.3주년을 맞아 편집책임자로서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소통과 공감의 매체가 되겠습니다


역사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저도 편찬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남도사(慶南道史)> 역시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제가 우리 지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아쉽고 안타까웠던 게 있습니다. '해방 전후부터 50·60년대에도 지금의 <피플파워> 같은 사람 중심의 잡지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습니다. 각종 기관이나 단체의 공식 직함에 등장하는 이름은 많지만,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의 철학과 삶을 알 수 있는 기록물은 없습니다. 만일 당시에 <피플파워> 같은 매체가 있어 당대 인물들의 삶을 기록해뒀다면 역사는 한층 풍부해질 것이고, 이를 통해 다양한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영화 <명량>이 이 충무공의 <난중일기>라는 기록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듯이 말입니다.


피플파워 창간 3주년 기념호.


3년 전 제가 <피플파워> 창간호에도 썼듯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땅도 아니고, 공장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고 희망입니다. 더 나은 세상, 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 내는 것도 결국 사람의 힘입니다. 일간신문이 당대의 이슈와 현안에 대한 사람의 의견과 주장을 보도한다면, 우리 잡지는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 역정과 철학, 그리고 앞으로 이루고픈 꿈을 기록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지난 3년 간 경남을 사랑하고 경남에 뿌리박고 살면서 경남에 문화와 예술의 씨앗을 뿌리며 경남을 좀 더 행복한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 700여 명을 만났습니다. 이들 중에는 정치·행정·경제 등 분야에서 지역사회를 이끌고 움직이는 리더도 있었고, 나와 이웃의 행복한 삶을 가꿔나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저희가 희망했던 것은 소통과 공감이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서로의 삶과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서로의 거리를 좁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의 이런 바람이 통했는지 많은 분들이 <피플파워>를 아껴주셨습니다. 정기구독자는 3500여 분에 불과(?)하지만, 많은 분들이 돌려가며 읽고 피드백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그 사람의 진면목을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 지역에 이런 좋은 분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줘 고맙다.' '그 분의 인생 역정을 보니 작은 일에도 힘들어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위안을 받았다.' '아는 사람이 나와 반가웠고, 그를 더 잘 알게 되어 고맙다.'


책이 배송된 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을 통해 보내주시는 독자님들의 이런 피드백이야말로 저희가 <피플파워>를 만드는 이유이자 기쁨입니다. 창간 3주년을 맞은 편집책임자로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번호에는 특별히 한 분의 독자를 모셨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빠짐없이 구독해주신 오유림 독자님입니다. 이 분이 인터뷰에서 밝힌 칭찬과 지적, 바람 잘 읽었습니다. 적극 반영하여 더 좋은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 다른 독자님들도 언제든 거침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피플파워>의 주인은 바로 독자님들이니까요. 페이스북이든 카카오톡이든 카카오스토리든 문자 메시지든, 아니 직접 저에게 전화를 주셔도 좋습니다. 제 전화번호는 010-3572-1732입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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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어릴수록 좋기는 단감도 매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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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문산에서 나는 과일로는 예로부터 배가 대표로 꼽혀 왔습니다. 여전히 진주 문산 배는 그 명성이 가시지 않았습니다만 이런 가운데 진주 문산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과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단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감을 과일로 별로 쳐주지 않습니다. 사과, 배, 복숭아, 자두, 포도, 귤, 그리고 과일도 아니고 채소인 토마토까지 잠깐 꼽다가는 바로 외국 이름 과일로 옮겨가 버리기 십상입니다. 키위,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따위로 말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잘은 알지 못합니다만, 과일이라면 옛날에는 보통 때 보통 사람들은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시절이 한 때나마 있었고 반면 단감은 감과 더불어 둘레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인 1970년대를 떠올리면, 그 때 단감은 지금 다른 과일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보통 감과 모양은 같지만 맛은 아주 달라서 더 귀한 취급을 받았던 것도 같습니다.

 

어쨌거나 단감은 이렇게 제대로 과일 취급을 받지 못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어디서든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사람들 인식 속에 과일로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 보니까 조금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지는 측면은 있습니다만.

 

그런데 이번에 농협경남지역본부(산지육성팀)와 단감경남협의회에서 마련한 경남단감 블로거 팸투어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경남이 바로 단감의 최고·최대 생산지라는 것입니다.

 

진주 문산 최중경씨 농장 나무에 매달린 단감들.

 

2013년을 기준 삼아 보면 생산량은 경남이 10만2571톤으로 전국에서 63.9%를 차지하고 판매량은 5만3036톤으로 전국에서 7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이 전남인데 생산이 22%(3만5940톤) 판매가 11%(7597톤)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경남이 압도적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지난 겨울 전남 무안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단감나무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따지고 보니까 경남이 아닌 지역에서 단감나무를 봤던 적이 거의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감은 경남 대표 과일 가운데 하나라 하겠는데요, 지금껏 널리 이름이 알려진 것은 진영(김해)과 창원이었습니다. 진영은 오래 전부터 단감이 유명했다는 것으로 유명하고, 창원은 전국 최고·최대 단감 생산지라는 사실로 유명합니다.

 

이미 수확을 끝낸 조생종 단감나무. 품종이 '서촌'이라 하는데 추석을 앞둔 시점에 익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주 문산에서 2만평 규모로 단감농장을 하고 있는 최중경씨(황제단감 011-860-8211)는 "품질을 놓고 보면 문산단감이 으뜸"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말씀하시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계속 웃으셨는데요, 거기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태 진영이나 창원 단감만 좋은 줄 알고 있었으니 그리 말하는 까닭이 궁금해 살짝 물었습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무가 어리거든! 젊은 나무에 열리는 단감이니 더 좋을 수밖에!"

 

단감 선별 작업장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살림하는 공간처럼 깔끔합니다.

 

생각해보니 이치가 그랬습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늙고 나이가 든 것보다 젊고 나이가 어린 것이 더 싱싱하기 마련이거든요. "단감나무는 15년은 돼야 상품성이 있거든, 그 때부터 20년까지가 가장 좋아요." 최중경씨는 단감농사를 한지 한 20년 됐다고 말씀했습니다.

 

최중경씨 아내. 주변 정리를 이리도 깔끔하게 해낸 주인공이었습니다. 얼굴 살결도 고왔습니다.

 

그렇지만 오래 된 나무가 많은 창원에서 저는 지난해 "단감은 나무가 오래 됐어도 열매가 싱싱하고 맛이 좋기는 매한가지"라 들었기에 그 까닭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흰칠판 계획표는 빡빡하고 옷가지 따위는 잘 정리돼 있습니다.

 

돌아온 답은 역시 간단했습니다. "오래된 나무도 열매가 좋을 수 있어요. 대신 거름도 듬뿍 주고 해서 그만큼 관리를 더 잘해야 줘야 하지. 안 그러면 안돼요." 또한 생각해 보니 이치가 그랬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짐승도 늙어가는대로 두고 관리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이가 든 그 이상 시들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아주 깔끔합니다.

 

문산단감 설명 자료를 보니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문산은 일교차가 뚜렷하고 토질이 좋아 단감 재배에 적지이다." 물론 단감 생산지역 가운데 이렇게 적지 않는 데는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대부분 유목으로 섬유질이 풍부하고 단감에 고유한 맛과 색깔이 선명하며 당도가 높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단감 생산지역이라도 죄다 그렇게 적을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유목을 한자로 쓰면 幼木, 말하자면 어린 나무가 되겠고, 이는 창원 진영처럼 오래 전부터 단감을 생산해 온 지역에서는 쓰기 어려운 표현이기에 그렇겠습니다.

 

단감이 곳곳에 제대로 열렸습니다.

 

(물론 창원이나 진영에서 나는 단감이 문산보다 덜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난해 했던 창원 단감 팸투어에서는 맛 좋은 단감 생산을 위해 거름을 힘들여 쓰고 등겨로 불을 놓아 온도까지 맞춰주는 등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을 너무나도 잘 봤기 때문입니다.)

 

최중경씨는 덧붙였습니다. "진영단감은 부산으로도 많이 나가지만 문산단감은 거의 전부 가락동(서울)으로 나가고 거기서 가장 좋은 값을 받습니다. 청과시장 하면 가락동이 제일 아닙니까? 거기서 으뜸 대접을 받는 단감이 바로 문산 것들입니다." 허투루 지어낸 말이 아니고 세상에 두루 인정되는 팩트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결론삼아 말씀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이든 나무든 나이 어린 젊은 시절에 만들어낼수록 좋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잘 하려면 그만큼 더 잘 먹고 더 잘 관리를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삶을 살아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원칙 같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저도 나이가 이제 쉰을 넘어섰는데, 건강 관리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주 문산에서 단감농장을 하는 최중경씨를 만난 덕분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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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 볼거리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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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전파를 탔던 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의령으로 발길을 한 번 돌려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의령에 무슨 대단한 볼거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의령 사는 사람들조차도 의령에 볼 것이 뭐 있느냐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실 알고 보면 곰탐곰탁 즐길거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데가 바로 의령이랍니다.

 

아시는대로 의령은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령 나들이는 의병장 곽재우의 승전지인 정암진, 솥바위 나루에서 시작이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은 부산과 양산 밀양 일대를 손에 넣으면서 서울을 향해 거침없이 북진을 하는 한편으로, 군사들 먹일 양식을 빼앗기 위해 창원·함안을 거쳐 낙동강과 남강 물길을 따라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정암진 바로 옆에 있는 정암철교. 1935년 들어섰고 한국전쟁 때 폭파된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의병장 곽재우가 막아낸 자리가 바로 정암진 일대입니다. 당시 왜적은 강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 가로지르는 경로를 깃발을 꽂아 표시했는데, 그 깃발을 곽재우 장군이 늪지대로 들어가도록 바꿔 꽂은 다음 거기 빠져 허우적대는 왜군을 향해 건너편 언덕에서 활을 쏘아대 물리쳤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찾아가도 정암진 일대 풍경이 그럴 듯하지만, 알고 찾으면 더욱 멋진 데가 바로 정암진 일대입니다. 남강 물 속에 의령쪽으로 바짝 다가서 있는 정암은 물에 잠긴 부분이 옛날 가마솥처럼 다리가 셋 달려 있다 해서 솥바위라고 합니다.

 

정암루 아래 쪽에 있는 의령 여씨 관련 비각.

 

이를 두고 이야기 지어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를 중심으로 사방 30리 안에 3대 부자가 나는 좋은 기상을 지녔다고들 하는데, 그 세 부자가 바로 우리나라 재벌 그룹 삼성·금성·효성 창업자라고 합니다.

 

정암, 솥바위. 왼쪽 몇몇은 기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야기 덕분에 더욱 많은 이들이 찾는데요, 그렇지 않더라도 솥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높다랗게 자리잡은 정암루에서는 강물과 들판과 강가 습지 나무들이 시원하게 어우러지는 풍경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언덕배기 둘레를 감싸고 있는 오래된 나무들도 아주 좋습니다. 이리저리 구부러지면서 얽히고 설켜 실제로는 세 그루인데도 마치 하나처럼 붙어버린 그런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리는 나무이기도 한데 그래서 나무둥치에는 새끼줄이 감겨 있기 일쑤이고 때로는 마른 북어나 막걸리가 차려져 있기도 합니다.

 

막걸리가 열두 병 맥주가 한 병입니다. 북어는 몇 마리일까요?

 

다음으로 옮겨가는 데는 탑바위입니다. 의령 정곡면 죽전 남강변 바위벼랑에 일부러 사람이 쌓아올린 것처럼 보이는 높이 4m가량 되는 바위더미인데요,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이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또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남강 굽이치는 흐름이라든지, 맞은편 함안 백산 들판 너른 품새를 오롯이 누릴 수 있는 눈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 다음 바로 아래 조그만 절간 불양암에 들르셔서 약수 한 모금 마시고 난간에 기대어 들판과 강물을 한 번 더 바라보셔도 괜찮겠습니다.

 

탑바위에서 바라보는 함안 백산 들판.

 

그러고 나서는 성황리 소나무를 찾아나섭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로 곧게 자라지 않고 두 그루가 서로 맞닿을 듯이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운 자태가 그윽하면서도 씩씩합니다.

 

아래에서 쳐다보면 소나무 잎사귀가 하늘을 가리듯이 하고 있는데요, 자리를 깔아 놓고서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통째로 솔향을 온 몸 가득하게 받아들이며 머리를 헹궈낼 수 있는 그런 자리라 할만합니다.

 

성황리 소나무 밑둥치.

 

이런 멋진 나무는 유곡면 세간리에도 있습니다. 바로 의병장 곽재우 생가가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 한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가 기역자와 니은자를 붙여놓은 것처럼 휘어져 있습니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집할 때 여기에다 북을 달아놓고 두드렸다고 해서 한자로 매달 현(懸) 북 고(鼓), 나무 수(樹) 해서 현고수라 합니다. 600살이 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동네 사람들한테 아낌과 사랑을 받으면서 예전보다 더 푸르고 윤이 나는 잎사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현고수.

세간마을에는 현고수 말고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습니다. 마을에서 살짝 떨어져서 복원돼 있는 곽재우 생가 앞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랍니다. 세간 마을 주민들은 여기 매달린 은행 열매를 주워 팔아 쏠쏠하게 돈을 장만한다고 하는데요, 그 정도로 왕성한 생명활동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곽재우 생가 앞에 자리잡은 세간리 은행나무.

 

아기 낳은 산모가 젖이 모자라면 여기서 기도를 올리기도 할 만큼 크고 우람한 나무입니다.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지금 봐도 아름답고 멋집니다만, 조금 더 지나 완전히 노랗게 물들었을 때는 그 엄청난 색감만으로도 세상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황홀감을 확실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나오는 길에는 충익사까지 들르시면 더욱 좋습니다. 의병들 기상을 닮아 아주 잘 생겼다는 평을 받는 모과나무라든지, 배롱나무와 감나무를 비롯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런 나무들이 충익사 마당에도 많이 심겨 있기 때문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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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월간 피플파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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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드리는 편지]권영길 전 의원의 쾌유를 빌며


재벌급 부자로 살다 어느 순간 무일푼에 신용불량자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진 학교법인 이사장이니 재산가 아니냐고요? 학교법인은 말 그대로 법인일뿐 개인 재산이 아닙니다. 사고 팔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 이사장이라고 해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죠. 학교 회계에서 이사장이 돈을 한 푼이라도 가져간다면 그건 횡령이 됩니다.


물론 부인이 국립대학 교수 출신으로 정년퇴임했으니 부인의 연금이라든지 기본 수입은 있겠죠. 그래서 사는 것 자체는 그리 곤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다든지, 민주화운동 진영에 거액의 후원을 해준다든지 그런 선심은 쓸 수 없을테죠. 서울에 오래된 주택이 있지만, 그는 양산 개운중학교 뒷편에 햇볕도 들지 않는 작은 골방에서 침대도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때 우리나라에서 세금 납부액이 10위권 안에 드는 거부(巨富)였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호에 이어 11월호에도 채현국 이사장의 살아온 이야기가 실립니다. 이 시대의 어른이자 스승으로서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이나 철학, 사상은 올 1월 <한겨레> 보도를 포함, 몇몇 매체에 이미 나왔습니다. <피플파워>에서는 그런 그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기자의 공부와 필력이 여러 모로 부족해 온전히 그의 삶을 담았다기엔 모자람이 많습니다. 추후 이를 채워넣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고 독자 여러분의 많은 조언과 질책 부탁드립니다.


이번호부터 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의 '도시와 스토리텔링' 연재를 시작합니다. 농촌공동체의 급속한 붕괴와 도시 인구의 팽창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90%가 도시에 살고 있지만, 새로운 '도시공동체'는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 스토리텔링은 지역공동체 구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롭게 다가옵니다. 공동체 구축은 지역 단위의 공론장 형성이라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지역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목표로 이어지겠죠. 이는 또한 '사람 간의 소통과 공감'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피플파워>의 창간 취지로 연결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김 소장의 이번 연재를 의미있게 읽어봐주십시오.


피플파워 11월호 표지.


표지 인물로 실린 외과의사 최원호 씨의 살아온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흔히 의사라면 근엄하고 환자 앞에서 무게나 잡는 이미지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원호 씨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시민들과 함께 사회의 부조리에 분개하고 힘없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론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떠드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발라드나 록큰롤을 멋지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의사 최원호 씨와 이번호에서 소통하고 공감해보시기 바랍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젊은이들의 새로운 여행 트렌드이자 숙박 문화로 번지고 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진주에도 들어왔습니다. 권영란 기자가 '뭉클' 게스트하우스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짚었습니다.


3년 전 서울의 여러 매체에서 잔뼈가 굵은 고동우 기자가 뭔가에 꽃혔는지 <경남도민일보>에 왔습니다. 지금 문화체육부장으로 있는데요. 그가 지역사회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것은 경상도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기존 개념을 깨뜨렸던 겁니다. '초짜 애식가의 음식 이야기'를 28회까지 연재하며 신선한 충격을 줬던 그가 이번에는 비장의 요리 실력을 꺼내보입니다. 이번호부터 시작되는 '초짜 애식가의 레시피 탐구'도 음식과 요리에 관심있는 분들이 눈여겨볼 콘텐츠라 자부합니다.


이번호에도 지역사회의 리더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지역 문화를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또한 권영길 전 국회의원이 '권범철의 얼굴'로 선정되었습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쾌유를 비는 마음이 그의 슈퍼맨 의상에 담겼지 않나 생각합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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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행 보람은 이 은행나무만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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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 함께하는 2014 생태·역사기행 10월 걸음은 함양으로 8일 떠났습니다. 올해 진행하는 전체 일정에서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랍니다.

 

햇살은 아직 따가우나 바람은 뚜렷하게 가을 기운을 뿌리는 즈음에 맞은 이번 기행에서는 일두고택과 허삼둘가옥, 그리고 운곡리 은행나무와 화림동 골짜기를 둘러봤습니다.

 

일두고택은 조선 선비 정여창(1450∼1504)의 옛집인데 아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명하기로는 화림동 골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6km 남짓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갖은 바위와 수풀이 어우러지는데, 이런 아름다움만큼이나 그 덕분에 명성도 드높다 하겠습니다.

 

일두고택 사랑채. 일행 가운데 몇몇이 마루에 앉아 단체 셀카를 찍고 있습니다.

 

반면 안의 허삼둘가옥과 화림동 골짜기 위에 있는 서상면 운곡리 은행나무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허삼둘가옥은 달리 보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여성 중심형이라는 특징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많고요, 운곡리 은행나무는 그로 말미암아 동네 이름이 '은행마을'일 정도로 대단하지만 명성은 거의 없답니다.

 

운곡리은행나무.

 

이처럼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고에서 차이는 나지만, 훌륭한 문화유산과 뛰어난 자연생태를 두루 찾아 누릴 수 있는 데가 바로 함양이랍니다. 어쩌면 자연생태가 뛰어나기 때문에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대표 고을이 함양이라는 이야기입지요.

 

일두고택은 정여창의 호를 집 이름으로 삼았지만 정여창 생전부터 있었던 건물은 아니라 합니다. 정여창은 무오사화로 함경도 경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목숨을 잃었고 갑자사화를 당해서는 무덤에서 끄집어내어져 부관참시까지 당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인(仁)을 바탕으로 그렇지 않은 훈구파를 공격해댔던 사림파의 선봉이었으니 고집이나 자존심이 세었을 법한데, 정작 본인은 아주 겸손했다고 합니다. '좀벌레 한 마리'를 뜻하는 '일두'를 호로 썼을 정도인데요, 말하자면 '저는 한 마리 좀벌레 같은 존재랍니다~' 이렇게 읊은 셈입니다.

 

후대에 지어진 이 집은 사랑채가 아주 권위롭게 생겼습니다. 들어서는 솟을대문에도 나라에서 내린 충신·효자 정려가 다섯이나 걸려 있는 데 더해 말에서 타고 내릴 때 쓰던 돌덩이까지 따로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싶지요.

 

사랑채 자체도 높직한데다 들어앉힌 축대조차 사람 어깨 높이가 될 만치 높고, 글자 하나 크기가 어지간한 사람 몸통만한 충효절의(忠孝節義)·백세청풍(百世淸風)도 드높은 데 걸려 있어 보는 이를 사뭇 압도를 한답니다.

 

일두고택 사랑채 앞에서 제가 얘기를 좀 했습니다. 안쪽 위에 아주 큰 글자들이 보이시나요?

 

누마루 아래 곳간 문을 열어 왼편을 살펴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는데요, 거기에는 집안을 받쳐주는 남근석이 제대로 솟아 있습니다. 반면 안채는 사랑채처럼 권위롭지는 않고, 대신에 환하고 따듯한 기운이 한 가득 느껴집니다.

 

일두고택 포근한 안채에서.

 

일행들은 이러구러 한 바퀴 둘러보고 안사랑채를 지나 다시 사랑채로 돌아와서는 사진 찍기에 바빴습니다. 사랑채 앞뜰 왼편 석가산(石假山)과 그 소나무가 주로 사진 찍는 대상입니다. 여기에 사랑채 높다란 기와지붕과 누마루까지 어우러지니 그보다 더 멋진 풍경이 없기는 하겠습니다. 사랑채 마루에서 마주보이는 자리에는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 그 푸르름을 절의 삼아 자랑하고요.

 

석가산 소나무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일두고택에 더해 개평마을 곳곳에 있는 옛집들까지 아울러 둘러본 일행은 안의로 향했습니다. 허삼둘가옥은 안의초교 조금 위에 있습니다. 허삼둘은 집을 지은 1918년 당시 안주인 이름이랍니다. 보통은 바깥양반 이름을 따서 집 이름으로 삼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안채 구조를 조금만 뜯어봐도 바로 눈치챌 수 있습니다. 'ㄱ' 모양으로 가운데가 꺾여 있는데, 바로 그 꺾인 한가운데가 부엌이거든요. 안쪽 공간이 상당히 너른 부엌에서는 행랑채와 중문과 마당은 물론 사랑채까지 한 눈에 넣고 장악할 수 있답니다.

 

허삼둘가옥 행랑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일행들.

 

집안 전체를 안주인이 통째로 경영하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고요, 이런저런 관습 따지지 않고 편리함을 좇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그 부엌에서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서도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이를테면 안마당에 햇살 내려앉은 질감까지 손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위쪽 농월정거창식당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뚝딱 해치우고 농월정'국민관광지'(농월정은 2003년 불타 지금은 없습니다) 이쪽저쪽을 기웃대다 운곡리 은행나무를 '뵈오러' 떠났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거기 은행나무가 가슴높이 둘레가 9m가량이고 키는 38m를 웃도는 진짜 엄청난 존재라 얘기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한편으로 기대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야 별 것 있겠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동네 사람들이 둘레에 널따랗게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고 영역을 마련해 줬겠느냐는 얘기도 곁들여 말씀했지만, 심드렁한 표정은 지우기가 어려웠답니다. 들머리에서 걸어들어갈 때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00m 정도 떨어진 데서 바라보이는 모습이 예사로운 수준을 벗어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골목을 지나 마을 한가운데에 이르러 마주했을 때 일행들 표정이란! 벌어진 입으로는 감탄이 절로 나고 혓바닥을 구르는 소리는 '엄청' '대단'이 모두였답니다.

 

 

저마다 멀리와 가까이를 오가면서 은행나무 할아버지를 사진에 담기 바빴고 어떤 이는 둘러싼 돌담장까지 한 화면에 담기 위해 바닥에 엎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굵은지 다들 궁금했던 모양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에 손잡고 빙 둘러섰는데 일곱 아름이 나왔답니다. 어떤 이는 가지와 잎사귀의 하늘거림이 좋았던지 벌렁 드러눕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오늘 보람은 이 은행나무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못지 않은 보람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자연 속에 쏙 들어앉은 거연정에서 시작해 군자정과 동호정을 거쳐 호성마을 지나서까지 이어지는 화림동 골짜기 탐방로를 따라 걷는 일이랍니다.

 

거연정 넘어가는 다리에서.

동호정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 너럭바위 그늘진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아시는 그대로, 정자를 누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정자를 바라보며 정자가 자리잡은 풍경이 얼마나 그럴 듯한지 감상하는 것과, 옛날 선비들이 그랬던 대로 정자에 올라 거기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사방 풍경을 눈에 담는 것입니다.

 

동호정 앞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징검다리를 건너 동호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화림동 골짜기는 둘 다를 멋지게 즐기고 아름답게 누리게 해줍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물과 바위와 숲과 그늘이 어우러졌고요, 그러다 햇살이 조금이라도 따가울라치면 물소리 바람소리가 말끔히 씻어가 버렸답니다.

 

걷는 길에 마주친 사과 농장.

 

게다가 정자들마다에는 너럭바위가 개울 쪽으로 하나 이상 받쳐주고 있어서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한 자락 너르게 펴놓고 한 바탕 즐길 만하겠다는 싶었습니다. 동호정 아래 개울 한가운데는 사람이 심어 가꾼 솔숲까지 마련돼 있습니다. 나른한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걷다가 노닐고 노닐다 걷고를 되풀이하다 네 시 조금 못 미쳐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3월 거제에서 시작해 순천, 영주·상주·문경, 포항, 무안, 울산을 거쳐 함양에서 끝마친 2014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에 안팎으로 함께해 주신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이 참에 올립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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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가을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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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창원교통방송 원고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단풍 구경 하면 멀리 떠나야 제 맛인줄 압니다. 하지만 멀리 떠나봐야 길만 막히고 오고가는 데 시간만 많이 걸릴 뿐 실제 누리는 바가 대단하지는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가까운 지역에서 잘 찾아보면 들이는 노력은 크게 주는 반면 내용은 알찬 그런 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창원과 가까운 함안에서 그런 데를 한 번 찾아나서 보겠습니다.

 

첫머리는 칠원면 무릉산 기슭 장춘사가 되겠습니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장춘사까지 가는 산길은 대략 3km입니다. 이 자드락 산길은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 넘지 않고 발길을 재게 놀리면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갈 무기연당.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하환정(何換亭). 이 좋은 풍경을 어찌(何) 벼슬 따위와 바꾸겠는가(換) 하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별로 가파르지도 않으며 양쪽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잔뜩 키를 키운 채 늘어서 있어서 시원한 기운이 언제나 뿜어져 나옵니다. 이처럼 올라가는 길은 고즈넉하고도 호젓합니다. 왼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숲은 소나무도 있지만 활엽수가 그보다 더 많아 나름 단풍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리저러 보기 좋을만치 휘어져 있어서 가물가물해진 30년 전 어릴 적 추억처럼 아련함을 흩뿌리기도 합니다. 장춘사는 이런 오솔길이랑 잘 어울리는 절간입니다.

 

신라 흥덕왕 때 무염국사가 지었다지만 자취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앞마당에 5층석탑이 하나 있는데 어떤 시대 양식과도 관련이 없이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후대 사람들은 이 석탑에서 대한민국 시대 석탑 조성의 한 특징을 찾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릿대로 만든 장춘사 삽작문.

 

그래도 멋과 맛이 있는데요, 바로 조그맣기 때문입니다. 장춘사는 있는 그대로 나앉은 천연덕스런 공간입니다. 다른 여느 절간에는 다 있는 일주문이라든지 사천왕문이라든지는 아예 있지도 않습니다.

 

조릿대로 만든 삽작문이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무릉산 장춘사(武陵山 長春寺)' 현판이 붙은 조그만 정문은 오히려 오른쪽에 숨어 있습니다.

 

대웅전도 크지 않아 설법을 펼치는 무설전보다 작습니다. 무염국사를 섬기는 조사전은 여염집 사랑채처럼 들어앉았고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도 가로세로 한 칸짜리입니다. 산신각 안에서는 산신령 한 분이 귀여운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산신각 옆에는 발갛게 익어가는 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감나무가 한 그루 자태를 뽐냅니다. 대웅전 뒤쪽 언덕배기는 볕바라기 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더 이상 소박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장춘사이기에 사람들은 여기서 긴장할 까닭이 없습니다.

 

긴장은 속세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무장해제를 합니다. 대웅전이 어떻고 부처가 어떻고 따져볼 필요가 없습니다. 대청마루나 축대에 삼삼오오 걸터앉아 정담을 나눠도 어느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습니다.

 

 

장춘사 스님들은 오히려 그렇게 하라 부추기기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절간이 주는 힐링 효과가 아주 큰 장춘사입니다. 사람 마음에 주는 위안이 꼭 절간 크기랑 비례하지는 않음을 잘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려동 유적지로 갑니다. 고려 왕조에서 성균관 진사 벼슬을 살았던 이오라는 인물이 600년 전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노라며 자리를 잡은 데가 바로 산인면 모곡리 고려동입니다.

 

이오는 마을 전체에 담장을 둘러 바깥쪽 조선 땅과 구분지은 뒤 '고려동학' 비석을 세워 고려 유민이 사는 땅임을 밝혔습니다. 스스로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함으로써 바깥세상과 연결·접촉도 최소로 줄였습니다. 아들에게는 조선 왕조에 벼슬을 하지 말라 유언했고요, 후손들은 선조 유산을 돌보는 한편으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 힘쓰면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떤 가르침이나 깨우침은 줄 수 있겠지만, 대대손손 왕조를 바꿔가면서 벼슬을 하든, 아니면 이렇게 이오 선생과 그 후손처럼 그렇게 하지 않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인생은 다들 늙어서 죽어갑니다.

 

무기연당.

 

이번에 가시거들랑 그런 교훈 따위는 조금만 생각하시고요, 거기 비어 있는 고택 아무 집에나 들어가 그 대청마루에 앉거나 서서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 들판을 가없이 바라보는 편이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함안에는 멋진 옛날 정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원 가운데 전라도 담양에 있는 소쇄원과 함께 으뜸으로 꼽히는 무기연당입니다. 국담 주재성이 1728년에 지었는데요, 소쇄원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경관은 소쇄원 못지 않게 빼어납니다.

 

국담 주재성은 풍류도 알았고, 또 왕조 입장에서 보면 의로운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을 모아 이를 막았으며 재산까지 털어 군량미를 대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도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무기연당은 주재성이 꿈꾼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연못과 마당을 잇는 돌계단 앞 작은 돌 탁영석은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고 깨끗하면 갓끈을 씻겠다'는 뜻이고 그 옆 정자 하환정은 이 멋진 풍경울 어찌 벼슬 따위와 바꾸겠느냐는 말입니다. 풍욕루는 불어오는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겠다는 얘기고, 양심대는 곧고 바른 마음을 양성하겠다는 얘기가 됩니다.

 

풍욕루.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여기 가서 옛날 선조들이 자기 집안 마당으로 끌어들인 자연과 연못을 둘러보며 세상살이를 잠깐이나마 잊고 푹 쉬다 나오면 그만이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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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재 조합장에게 듣는 단감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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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감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주산지다. 일본과 중국 등에서도 재배가 되지만, 일본은 생산비 비중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고, 중국은 스몰 사이즈로 감이 아주 작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단감만큼 상품성이 없다.


우리 단감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로 수출을 많이 하는데, 그들 나라에도 열대 과일이 많지만, 물컹한 맛이어서 단감과는 근본적으로 식감이 다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맛볼 수 없는 아삭한 단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김순재 동읍농협 조합장은 "우리나라에서도 단감은 특성상 재배농가가 급속히 늘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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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삭한 식감 덕에 수출까지 하는 경남 단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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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자 노릇을 하고는 있지만, 세상살이에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번에 26일 경남농협과 단감경남협의회가 마련한 경남 단감 블로거 팸투어에 참여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제가 바로 옆에 두고 먹는 바로 이 단감이 수출까지 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채소는 어쩌다 파프리카처럼 수출하는 품목이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과일이라 하면 죄다 수입만 해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수입을 막아야 우리 농업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경남 단감이 수출이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감이 많이 나는 경남에서 그 생산량(10만2571톤)의 5% 정도(5435톤)를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남 단감은 수출 대상인 나라들의 농민들에게 손해를 별로 끼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여느 과일들과 다릅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우루과이에서 포도를 수입하면 우리나라 포도 농가가 곧바로 타격을 받습니다. 포도를 소비하는 총량은 별로 변함이 없는 조건에서 값싼 외국 포도가 들어오면 당연히 값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단감은 세계적으로 볼 때 생산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그것도 경남과 전남 정도이고 다른 나라로는 일본이랑 중국이 조금 꼽힐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경남 단감을 수입하는 나라 대부분은 단감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역이 됩니다. 따라서 단감을 수입한다 해도 곧바로 타격을 입을 그런 농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나라들입니다.

 

말하자면 착한 수출인 셈입니다. 경남 진주 문산에서 단감 농사를 크게 하고 있는 최중경씨(황제단감 011-860-8211)도 생산하는 절반을 수출한다고 했습니다. 필리핀·대만·인도·말레이시아·싱가포르 같은 동남아시아 일대로 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이 작업장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작업장이 마치 살림집처럼 깔끔했습니다.

 

수출 단가는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면서, 태국·말레이시아 등지로 판촉 활동 나갈 물량도 마련돼 있다고 했습니다. 최중경씨는 2만평 농장에 3000그루 단감나무를 키우고 있습니다. 2만평에 3000그루라면 나무가 적게 심긴 편입니다.

 

당장 한 평 땅이 아까울 텐데 그러시는 까닭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널찍널찍하게 해 줘야 나무가 더 잘 자라고 열대도 더 좋다고 답했습니다. 당장 눈 앞에 이익에 매달리지 않는 태도이시라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면 경남 단감에 어떤 특징과 장점이 있어서 이렇게 수출을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식감의 차별성이었습니다. 아시는대로, 그리고 바나나나 파인애플 따위가 대표하듯이 열대 과일은 (지나치다 해도 될 만큼) 많이 달고 씹는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퍼석퍼석하고 물컹물컹합니다.

 

문산농협에서 단감을 짐차에 싣고 있었습니다. 물었더니 싱가포르로 수출할 물량이라 했습니다.

 

단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열매- 과육(果肉)이라 하지요-가 단단하고 섬유질도 상대적으로 많아서 아삭아삭 씹는 식감이 대단합니다. 단맛 또한 적당해서 단맛 때문에 입맛을 버리거나 하지는 않고 오히려 상큼합니다. 바로 이 적당한 단맛과 찰진 식감 덕분에 동남아시아 일대로 수출이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또 하나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국 상하이로 진출한 경남 단감입니다. 동남아시아로는 알이 굵은 단감(그러니까 비싼)과 작은 단감(그래서 상대적으로 싼)이 다 나가지만 중국 상하이에는 비싼 단감만 나간다고 합니다.

 

상자에는 단감이 담겨 있습니다. 왼쪽 건물이 공동선별장입니다. 단감들이 크기에 따라 골라 담기겠지요.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소득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나라인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인구가 13억5000만명으로 어림짐작됩니다. 그 가운데 10% 또는 5%만 대상으로 잡아도 1억3500만명 7000만명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든 중국공산당의 모택동(1893~1976)이 생전에 중국에는 아직도 부르주아가 5%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까짓 5%가 뭐라고! 여기기 쉽지만 숫자로 돌려놓고 보면 엄청납니다. 4000만~5000만명이지요.

 

지금 여기 싣고 있는 단감은 서울 가락동 시장으로 가는 물량입니다. 문산농협은 수출용과 서울용이 따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게다가 해당 지역은 상하이입니다. 중국 신흥 졸부 신흥 부르주아들이 모여들어 있는 도시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리 비싸도 좋다, 내 입맛에 맞기만 하다면'이 바로 소비하는 패턴이라고 합니다. 돈 걱정 전혀 없이 사는 이들의 특권이겠습니다.

 

이런 중국 이런 상하이에 우리 경남에서 생산된 단감들이 수출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대상 가운데 하나가 경남 단감이고요 그렇게 된 까닭이 바로 뛰어난 식감과 상큼한 단맛에 있다고 합니다.

 

김훤주

 

황제단감
최중경 011-860-8211
문산농협 055-761-5505.
www.munsann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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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분방과 무애파격의 절간 장흥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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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전남 장흥에 있는 보림사를 다녀왔습니다. 절간이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따뜻한 느낌을 안겨줬습니다. 자리잡은 가지산이 품은 기운도 부드럽고 여유로웠습니다.

 

아마도 전라도 산악 지형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삐죽삐죽 치솟는 대신 산마루를 차분하면서도 정연하게 흘러내리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쪽저쪽 둘러본 바 보림사는 특징이 자유분방이었습니다. 격식에 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필요한대로 필요한 만큼 하는 파격(破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게 아닌데……" 이렇게 읊조릴 만한 대목에서도, 그냥 능청스럽게 "아무려면 어때서" 대꾸하는 식이었습니다.

 

절간 들머리부터 그랬습니다. 정식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 외호문(外護門)이었는데 저는 어디서도 이런 이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바깥으로부터 지키는 문쯤이 되겠는데 그런 '지킴' 때문인지 빙 둘러쳐진 담장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외호문 위쪽에 달려 있는 용머리.

 

보통 절간이 갖추는 일주문·불이문과는 달랐습니다. 일주문·불이문은 절간 영역을 생각 속에서 개념으로 구분짓는 문들이라 하겠는데, 여기 외호문은 절간 안과 밖을 실제로 나누는 그런 문인가 봅니다.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사천문도 이름이 남달랐습니다. 보통은 사천왕문이라 하거나 아니면 줄여 일러도 천왕문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왕'자를 빼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자를 과감하게 빼버리고는 사천문이라 붙였습니다.

 

이름만 봐 갖고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들어가면 사천왕상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515년 조성된,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입니다.

 

사천문에서 바라보이는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또 보니 보림사 마당에는 당간지주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신 대적광전 앞에 있고요, 다른 하나는 2층 높이로 지어서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보전 앞에 있습니다.

 

여기 당간지주는 법회 따위를 위해 탱화를 내거는 데 쓰이므로 당간지주가 두 군데 있다는 것은 법회 장소가 하나로 고정돼 있지 않고 두 군데라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보림사가 원래는 규모가 큰 절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줄 저는 압니다.

 

 

이와 같은 파격이랄까 자유분방함의 절정은 정작 명부전에 있었었습니다. 거기 바람벽을 보면 처음에는 죽어 저승에 간 사람이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業鏡臺 지난 날 무슨 죄악과 잘못을 저질렀는지 비춰보는 거울)를 보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렇게 죽은 사람이 죄과에 따라 겪어야 하는 숱한 지옥들이 열 장면 나옵니다. 혀를 뽑아 쟁기로 가는 지옥, 얼음지옥 불꽃지옥 독사지옥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가는 지옥 등등이 그림 속에 펼쳐져 있습니다. 아울러 육십갑자에 따라 해당되는 지옥이 무엇인지도 적어놓았는데요 퍽 실감이 나는 그림입니다.

 

명부전 바람벽에 그려진 그림을 둘러보는 사람들.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는 부처님과 함께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직행하는 사람들 그림이 등장합니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은 아시는대로 사바세계에서 곧바로 극락정토로 나아가는 지혜의 배입니다. 갖은 지옥을 겪지 않고 극락으로 바로 가려거든 살아 생전에 이렇게 선업(善業)을 쌓아야 한다고 이르는 셈입니다.

 

명부전,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공간이며 또 또 죽은 이들을 돌보는 지방보살을 모시는 전각인 여기 이 보림사 명부전은 오래된 건물이 아니고 바람벽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격식을 따지고 품격을 따지고 했다면 그려지지 않았을 그림들입니다.

 

 

보통 절간 전각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한살이라든지 아니면 어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나름 고상한 내용들이 그려집니다만, 여기는 그런 따지고 재고가 없이 사람이 죄 짓고(업을 쌓고=업장을 지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림사가 통일신라시대 보조국사 체징이 세운 선종 절간이고(그래서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 으뜸 절간이 됐고) 거기서 무애(無碍)한 선불교의 전통이 여지껏 흘러내린 덕분이지 싶습니다.(교종에 선종을 견줘 보면 그런 특징이 누구에게나 뚜렷하게 보입니다.)

 

사진 앞쪽 기와지붕이 약수터.

이렇게 보면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약수터도 파격입니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 하는 대신 구석진 자리에 두기 십상인데 보림사는 아예 한복판에 마련했습니다. 아마도 걸맞은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이밖에 보림사에서 볼거리는 파손이 거의 없이 원형을 제대로 갖춘 석탑입니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데요, 크기도 우람하지는 않고 아름다운 정도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단·몸통은 물론 상륜부까지 거의 제대로 남았다는 점에서 국보 대접을 받는 통일신라시대 돌탑 한 쌍이랍니다.

 

상륜부가 제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웅보전 앞에는 탑이 없고 대적광전 앞에만 탑이 있는 것도 어쩌면 파격일 수 있겠군요. 대부분 절간이 다른 데는 몰라도 대웅전 앞에는 어지간하면 반드시 탑을 세워두거든요.)

 

또 하나, 대웅보전 뒤편 오른쪽에 놓여 있는 보조국사창성탑·탑비도 좋았고 또 대단했습니다. 먼저 창성탑비는 귀부(거북 모양 탑 받침) 물갈퀴가 매우 힘차게 보여 생기가 넘쳐 흘렀습니다(이수-그러니까 탑머리 조각 화려섬세함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위에 있는 창성탑(부도탑이라 하면 되겠는데)은 다른 무엇보다 그 커다란 규모가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보조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존경 또는 애정을 창성탑 덩치로 표현을 했나 봅니다.

 

 

여기 창성탑은 또다른 미덕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창성탑 있는 자리에서는 대웅보전 뒤꼭지가 바라보이는데요 그 너머 가지산 펼쳐지는 산자락 맵시까지 통째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름 아주 멋집니다.

 

창성탑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런데 제가 사는 경상도에서 보자면, 보림사 하나만 보고 가기는 장흥 가는 길이 너무 멉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기로는 토요일에 맞춰 가서 앞뒤로 토요시장(전국에 널리 알려진 장흥 명물입니다)에 들러 갖은 장흥 명물을 사는 한편으로 보림사에 들르면 어떨까 싶습니다.(참조 : 섬세한 감각으로 빛나는 장흥토요시장 http://2kim.idomin.com/2596)

 

그리고 보림사 둘레에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난대성 나무들로 이뤄진 '보림사산림욕장'도 마련돼 있으니 함께 누리면 좋을 것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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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해와 동남아에 단감이 수출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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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재 조합장에게 듣는 단감 이야기2


단감은 크기에 따라 3L(제일 큰 놈), 2L, L, M(중간 놈), S, 2S, 3S, 4S로 나눈다고 한다.


중국에도 단감은 생산되지만 대부분 S급이고, 그 중 큰 게 M사이즈 정도라고 한다. 그게 중국 상하이에서 개당 1200원에 팔린다. 그러나 한국 단감은 3500원이다. 그럼에도 상하이에 수출된다. 2L 이상의 큰 사이즈 단감이기 때문이다.


상하이에는 1억 명의 인구가 사는데, 그 중 800만 명 정도가 백만장자라고 한다. 그들 부자가 경남 단감의 주 소비층이다.


그리고 S사이즈 이하의 작은 단감은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등 동남아에 주로 수출된다.


이게 2L사이즈쯤 된다.


동남아에 열대과일이 많이 나고 당도도 높지만, 대가 물커덩한 과일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단감과 같은 아삭한 식감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자국에서 맛볼 수 없는 아삭한 단감을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다는 것이다.


김순재 동읍농협 조합장의 터프한 설명을 영상으로 들어보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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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접고 단감 농사 뛰어든 이상곤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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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46) 씨는 창원시 의창구 북면이 고향이다.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30대 중반까지 창원공단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직장생활이 싫어졌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감 농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1만 7000여 평의 산지를 임대해 2000여 그루의 단감 농사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단감은 연간 4000~5000박스(박스당 15kg), 매출은 1억 원 정도다. 이 가운데 순수익은 농지대와 박스값, 인건비 등 비용 빼고 700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아내도 있지만 단감 농사는 이상곤 씨 혼자 하고 있다. 아내는 어쩌다 가끔 도와주는 정도라고 한다. 물론 아내도 다른 일을 하면서 번다. 그의 단감 농사 이야기를 들어봤다.


30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만 7000평 감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곤 씨.


-전체 1만 7000평쯤 하신다고 했는데, 여기 보이는 감 농장만 하면 몇 평이나 됩니까?

"7000평."


-여긴 임대라고 했는데, 연간 임대료는 얼마나 줍니까?

"200만 원인데, 더 비싼 데도 있습니다. 7000평에 500만 원 주는데도 있습니다. 거긴 창고하고 다 있거든예."


-혼자 2000주 농사를 다 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그래도 우짤낍니까. 해야지요."


몸은 힘들어도 내 일이어서 농사가 좋다


-감 농사는 주로 하는 게 뭐죠? 약 치는 것 하고….

"적뢰(摘蕾, 감꽃솎기) 꽃이 너무 많으면 감이 안 큰다 아입니까. 솎아줘야죠. 그리고 수확하는 것도 일이고."


-감 딸 때는 인건비 주고 사람을 불러서 하나요?

"그렇죠. 이 많은 평수를 혼자서 다 할 수 있습니까?"


-인건비는 얼마나 줍니까?

"올해 밥 싸오고 6만 5000원. 인건비는 해마다 오르고 있습니다. 밥을 사주면 6만 원."


창원시 북면 무동리에 있는 이상곤 씨의 단감 농장.



-처음부터 농사 지으려고 생각했던 겁니까?

"그냥 뭐. 회사 생활이 지겨워서.(웃음)"


-어떤 회사였는데요?

"그냥 일반 회사지예. 창원에 있는…."


-원래 고향은?

"여깁니다."


-직장 다니다 고향으로 들어오신 거네요? 언제 들어왔나요?

"한 10년 됐습니다."


-그러면 30대 중반쯤에 들어왔네요. 직장 생활과 비교해보니 어때요?

"차이점은 뭐, 스트레스 안 받고 자기 일이니까…. 다른 일 있으면 일보고 해도 되고, 비오면 쉬고."


-감 농사만 하는 겁니까?

"벼농사도 있는데, 거의 90%가 감입니다. 벼농사는 500평만 하고 있습니다."


-감 농사는 1년 내내 매달려야 하는 겁니까?

"자기가 부지런히 하면 1년 내내는 아니고, 많이 하는 사람은 300일 정도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6~7개월밖에 안 합니다."


-300일이나 할 일이 뭔가요? 겨울엔 아예 할 일이 없을텐데?

"그 때도 가지치기 하고 다 합니다. 껍질도 벗겨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껍질을 벗긴다뇨?

"나무껍질을 벗겨줘야 합니다. 껍질 안에 벌레들이 살거든요. 그걸 벗겨줘야 병해충이…."


-아, 그렇구나. 겨울에 껍질을 벗겨야 하는 거네요?

"늦겨울이나 초봄 2~3월에."


-그러면 정말 일이 많겠네요.

"많습니다. 열심히 하려면 300일동안 과수원에 살아야 됩니다."


이상곤 씨를 상대로 단감을 취재 중인 블로거들.


-그러면 겨울엔 가지치기와 껍질 벗기기, 봄에는 감꽃솎기해야 하고?

"퇴비도 해야죠. 3월 말이나 4월 초에…."


-감꽃은 언제 핍니까?

"5월에 피죠. 그 때부터 일꾼 대어 감꽃솎기를 하죠."


사시사철 쉴 틈이 없는 단감 농사


-여름에는?

"적과. 불량과나 그런 건 또 솎아줘야 하니까."


-약은 언제 칩니까?

"날씨 보고 비가 오기 전에 치는데, 한 달에 한 번씩은 거의 칩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5월 초부터 9월까지 칩니다."


-수확은 언제 하죠?

"감도 빨리 나오는 감이 있는데, 조생종은 9월 말부터 나옵니다. 그 외에는 11월 15일~20일까지 땁니다."


-서리 내리기 전까지?

"그 전까지 다 따야죠. 그런데 푸른 건 따면 안 되거든요. 색깔이 나야 하니까. 푸른 건 상품가치가 없어요."


-푸른 것도 떫진 않잖아요?

"네. 당은 다 들었죠. 그래도 익어야 맛이 더 좋지."


-어쨌든 시기를 잘 봐서 따야 한다는 거네요.

"예."


-감 딸 때는 일꾼을 몇 명이나 댑니까?

"보통 7~8명 이렇게 댑니다. 11월 되면 막 따야 하니까 그 땐 많을수록 좋죠."


-일꾼 구하기는 쉽나요?

"아이구. 전쟁입니다. 없어서 난립니다."


이상곤 씨의 단감 농장은 제초제를 치지 않기 때문에 이처럼 잡초가 많다.


-어떻게 구합니까?

"아는 사람 통하기도 하고, 인력회사에 의뢰하기도 하고…. 올해도 인력 구하기 힘들어서 밭뙈기로 팔려고 내놨어요."


-밭뙈기로 팔면 어떻게 팝니까?

"올해는 시세가 그리 안 좋아서 15키로 한 상자 기준 1만 1000원 정도."


-그걸 무게를 어떻게 가늠합니까?

"대충 나무 수를 보고 감이 달린 상태를 보고 합니다."


-그걸 직접 따서 팔면 얼마나 나갑니까?

"좋은 감은 15키로 따면 4만 원 넘지요. 그래서 따는 게 이득인데, 사람도 없고 하니 딸 수가 없다 아입니까?"


-일꾼 구하는 게 제일 문젭니까?

"예. 가면 갈수록 문젭니다. 없습니다. 힘든 일은 안 할라 캅니다."


-형제가 몇입니까?

"1남 3녀."


-부모님도 계십니까?

"두 분 모두 농사짓습니다. 감 농사는 제가 혼자 다 하고…."


농장에 핀 들국화.농장에 핀 들국화.


롯데마트에 공급하는 이상곤 씨의 단감


-학교 때 전공은 뭐 하셨습니까?

"창원전문대 마케팅과 나왔습니다. 농사도 해보니 제일 중요한 게 판로, 마케팅이더라고예."


-롯데마트에 납품하신다고요?

"예. 좋은 감 따서 선별해가지고…."


-가격은 누가 결정합니까?

"농협을 통해서 중간에 바이어가 결정하죠."


-전량을 다 롯데마트에 출하하는 겁니까?

"아니죠. 내가 낼 만큼만 하죠. 일부는 계통출하도 하고, 택배로 직판도 하고…."


-아, 택배도 하시네요. 직거래?

"예. 택배가 마진이 엄청 많습니다. 좋은 감 보내면 비싸게 받을 수 있으니. 소비자도 싸고 좋은 감 먹을 수 있고…. 저도 택배 많이 할 때는 2000박스 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택배가 일이 많습니다. 일일이 보내줘야 하고…."



-감나무는 심은 지 10년 정도 되어야 감이 열린다면서요?

"한 5년 정도 되어도 열리기는 열립니다."


-그러면 제일 경제성이 있는 수령은?

"한 20년에서 25년차 정도."


-너무 늙은 나무는 경제성이 없나요?

"그것도 관리하기 나름이지예. 100년 되어도 감은 열리거든예? 관리하기 나름이라예."


-그러면 감나무 심어놓으면 평생 재산 되겠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예. 나무 수령이 100년인데, 우리 사람이 100년까지 살겠습니까?(웃음)"


-자식한테 물려주면 되죠?

"안 하면 어쩔건데요? 여기도 나이든 분들 많은데, 자식들이 안 할라 캅니다. 남한테 임대주고 맙니다."


-힘들어서 안 할라 하나요?

"농사 이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쌀농사보다는 낫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훨씬 낫지예. 쌀농사 하려면 많이 지어야 합니다. 100마지기, 200마지기 많이 해야 타산이 나옵니다. 기계도 다 있어야 하고예."


-쌀농사는 1만 7000평 해도 아까 말씀하신 매출이 절대 안 나온단 말씀이죠?

"그렇지예."


-힘든 걸로 치면 쌀농사와 감농사가?

"쌀농사가 수월하지예. 다 기계로 한다 아입니까? 약도 한 두어 번만 치면 되거든예."



-아, 이건 하나하나 다 손으로 해야하니까?

"원래 과수농사가 힘듭니다. 손 안 가면 안 되지예."


-그런데 평지보다 이런 산지에 하는 단감이 좋은 건가요?

"아무래도 당도도 그렇고, 서리를 안 맞기 때문에…. 평지에서 하면 서리를 맞는다 아입니까."


-왜 평지라고 서리를 맞지요? 서리는 다 오는 것 아닌가요?

"안개가 아침에 끼이면 아래로 좍 깔리거든요.상식적으로 보면 높은 데가 더 빨리 서리를 맞을 것 같은데, 높은 데는 서리 안 옵니다"


-그게 상식과 좀 다르네. 예를 들어 지리산 높은 그런 곳에 먼저 올 것 같은데.

"(웃음) 안 옵니다. 밑에 오지. 그리고 바람이 잘 통하면 서리도 안 오고요."


☎단감 구매 문의 : 고암농장 이상곤 010-9300-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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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용 트럭에만 있는 이것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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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의창구 북면에서 단감 농사를 하고 있는 이상곤(46) 씨를 취재하던 중 그의 트럭에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동력분무기였다. 나도 경운기에 장착한 동력분무기로 농약을 많이 쳐봐서 알아봤다.


물어보니 농업용 트럭으로 나온 건 이런 게 있단다. 분무기 동작은 운전석에서도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트럭에 장착된 동력분무기는 처음 본 것이라 여기 올려둔다. 


농업용 트럭에 장착되어 있는 동력분무기.


농업용 트럭에 장착되어 있는 동력분무기.


이상곤 씨의 단감 농장은 제초제를 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잡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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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자가 영상 전문가일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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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장도 월간지에 1회 기사를 직접 씁니다. 기자직이 아닌 일반 경영파트 구성원에게도 기사 쓰기나 영상, 사진 촬영을 독려합니다. '시민기자'라는 개념도 있는데 내부 구성원들이 (사장이고 비편집국이라고) 스토리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토리 쓰기는 기자 직군만의 배타적 권리가 아닙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런 기술(동영상 편집)은 당연히 익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웬만한 일반인들도 이 정도 편집은 하는데, 신문사 취재기자들이 못한다면 말이 아니죠."


최진순 기자와 인터뷰에서 제가 했던 말입니다.


☞온라인 저널리즘의 산실 : '코믹 기내방송'엔 지역언론의 희망이 들어 있었다


최진순 기자 온라인 저널리즘의 산실


이런 말 하면 싫어할 기자들도 꽤 있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는 우리 기자들 모두에게 획일적으로 특정 기술을 익히라고 시키진 않습니다.


선택일뿐입니다. 다른 분야에서 자기 실력을 입증하면 되니까요? 어떻게 모든 기자가 똑 같을 수 있나요? 이걸 잘하는 친구도 있고, 저걸 잘하는 친구도 있죠. 이게 재밌는 기자도 있고, 또 다른 게 재밌는 기자도 있겠죠. 재미없는 걸 어떻게 억지로 하나요?


그냥 당위를 말할 뿐이지요. 이런 말이 계기가 되어 그쪽에 관심과 재미를 붙이고 해보려는 기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게 다행이랄까요?


실제 경남도민일보는 전국 어느 신문사에 비해 편집국 기자들이 콘텐츠 유통을 많이 하고 있고, 사진과 영상 제작도 활발한 회사죠. 편집국 취재기자는 물론 사원 모두가 페이스북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고, 취재기자 대부분은 이미 페이스북 경남도민일보 페이지 공동 관리자이기도 합니다. 당직근무 땐 실제로 페이지를 관리하기도 합니다.


이번에 '한국 속의 경남'이라는 공익 콘텐츠 발굴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 권범철 남석형 두 기자는 취재차 서울 간 김에 이런 예고편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두 기자는 영상 쪽 기자가 아닙니다. 한 사람은 만평작가이자 취재기자를 겸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취재기자이자 편집국 서무를 겸하고 있습니다.



아주 세련된 영상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나요? 저는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도 남겨둡니다.


"경남도민일보 기자들은 소셜네트워크에서 시민들과 친밀감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민병욱 기자는 페이스북에서 진정성이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됐죠. 시민들과 함께 부대끼고 호흡하는 기자, 그런 신문이 되면 로컬리즘의 가능성은 억수로 높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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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보에 나온 '기사 베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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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수)자 <기자협회보>에 김고은 기자가 쓴 기사다.


편집국과 분리되어 5층에 있다보니 <기자협회보>를 볼 기회가 없다. 3층 흡연실에서 우연히 봤다.


이미 베껴쓰기가 만연해 있는 언론풍토에서 이런 기사 한 번 나온다고 쉽게 고쳐질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런 지적이나 문제제기가 없는 것보다는 다행이지 싶다.


2014년 한국언론계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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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둘러보기-진주인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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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지역 시민사회에서 진주를 '인권도시'라 표현한 것은 제법 오래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자 신분차별 철폐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의 발상지가 진주이니만큼 진주가 인권도시여야 한다는 당위는 확보된 셈이다.


진주는 또한 지난 2012년 7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무장애 도시(Barrier Free City)'를 선언했다. 사회적 약자인 노인, 장애인, 어린이, 임산부를 비롯한 시민 모두가 장애없이 이동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장애 없는 생활환경' 구축을 통해 살기 좋은 복지도시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무장애도시는 이창희 진주시장이 직접 선포했고, 관련 조례도 제정됐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은애 진주시의원의 발의로 '진주인권조례'도 제정됐다. 진주가 인권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본 틀이 갖춰진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인권도시 무장애도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진주지역 시민사회에서 이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도 궁금했다.


4일 저녁 내가 진주를 찾은 이유다.


평거동 진주여성민우회 회의실은 좁았다. 열서너 명 가량이 둘러앉아 서은애 의원과 홍순삼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무장애도시위원회 위원)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두 명의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이어졌다.


발표를 한 서은애 의원(왼쪽)과 홍순삼 이사.


이번 토론의 핵심은 인권조례, 무장애도시조례가 제정되었지만, 조례에서 규정한 인권위원회는 2년이 지나도록 구성조차 못하고 있었고, 무장애도시위원회는 구성 첫날 위촉장만 전달했을 뿐 이후 회의 한 번 없이 답보상태라는 것이었다.


이에 시민단체가 나서 성명도 발표하고 시민서명운동이라도 벌여 이창희 진주시장을 압박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진주인권조례는 이창희 시장이 직접 주도하지 않고 서은애 의원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제정된 것이다. 그래서 시장이 소극적인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무장애도시는 시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적극 홍보해왔던 일 아닌가?


마치고 기념 촬영.


어쨌든 이번 진주인권학교 참석으로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취재해볼만한 꺼리도 있었다. 나도 토론 기회를 얻어 제안도 한 가지 드렸다. '경남도 단위 민간인학살 희생자 추모공원'을 인권도시 진주에 유치할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마음을 모아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진주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조례'도 있으니 말이다.


뒤풀이 자리에서는 진주지역 시민사회의 요즘 분위기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분들을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편집국장 하는 4년 동안 괜히 마음만 바쁘고 여유가 없어 지역사회 이곳저곳을 다녀보지 못했다. 사람들도 비즈니스 차원 말고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마음 닿는 곳에 자주 좀 다녀야 겠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항상 즐겁다.


*만난 사람들 : 권춘현 장승환강주열 서은애 홍순삼 조한진 김종신, 그 외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분들과 진주시 공무원 두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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