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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뷰징이 아니라 쓰레기 기사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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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인 광고를 덕지덕지 붙여놓고 포털에 낚시질 기사를 반복 전송해 클릭을 유도하는 짓거리를 ‘어뷰징(abusing)’이라 한단다. 우리말로는 ‘오용’ ‘남용’ 뭐 이런 뜻이라는데, 뭔가 선명하게 와 닿는 말이 아니어서 늘 불만이었다.


최근 내가 경남도민일보에 출고한 ‘제주항공 승무원 톡톡 튀는 코믹 기내방송’ 기사가 어떻게 ‘오용’되고 ‘남용’되는지 지켜본 결과도 그랬다. 아내와 모처럼 태국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찍은 영상 기사였다.


지난 6일 아침 유튜브에 올린 영상과 함께 경남도민일보 지면과 인터넷에 실린 기사가 복제되어 순식간에 확산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후 5시 30분쯤 쿠키뉴스가 우리 기사를 거의 그대로 베껴 ‘[이거 봤어?] "빵 터지셨습니다~" 제주항공 여승무원의 독특한 기내방송’이라는 기사를 전송했고, 포털 다음은 이를 메인에 썸네일 사진과 함께 주요하게 배치했다. ‘제주항공 기내방송’은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올랐다.


이때부터 수많은 복제 기사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디에도 원 기사의 출처는 없었다. 그냥 ‘유튜브 영상 캡처’로 끝이었다. 그 유튜브가 누구의 계정인지도 표기한 언론도 없었다. 그래도 언론인데 약간의 보충취재라도 추가하여 올리는 곳이 있나 봤더니 역시 한 군데도 없었다.


경남도민일보의 원래 기사.


기사 베끼기와 영상 퍼가기는 7일에도 계속됐다. 심지어 YTN은 내가 올린 영상을 무단으로 내려받아 가져간 것도 모자라 재가공·편집하고 자막을 다시 입혀 썼다.


한국의 인터넷 뉴스시장이 얼마나 엉망인지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세상에 뭐 이런 후안무치가 다 있나 싶었다. 열 받아서 글을 썼다. ‘코믹 기내방송 기사 베끼기에도 기본 예의가 필요하다’는 기사였다. 7일 저녁 이걸 포털에 전송해놓고, 다음날 아침 다시 검색을 해봤다.


그제서야 ‘경남도민일보’ 또는 ‘경남도민일보 유튜브 계정’이라는 출처를 표기한 기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어보니 출처를 밝힌 기사가 20여 개, 밝히지 않은 건 60개가 넘었다. 웃기는 건 한 매체에서 같은 기사를 적게는 2회, 많게는 10회까지 반복 전송하고 있었다.


특히 민중의 소리는 낚시질 제목이 단연 압권이었다. ‘제주항공 기내방송, 입담은 김신영급 외모는 박신혜급?’ ‘제주항공 기내방송, 센스도 미모도 만점!’ ‘제주항공 기내방송, 미술과 악기연주까지… 특화 서비스 눈길’ ‘제주항공 기내방송, 아리따운 여성의 입에서 어떻게...‘남심 흔들’’. ‘민중’의 소리를 전한다는 매체가 언제부터 여성의 외모와 미모, 남심에 관심이 깊어졌는지 참 안타깝다.



그런데 과연 기사의 출처만 밝혀준다면 문제는 없는 걸까? 사인 간의 인간관계에서도 남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하면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한다. 하물며 명색이 언론이라면 출처 표기는 물론이고 원래 기사와 영상의 주소까지 링크해야 하는 게 기본 도리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언론뿐 아니라 개인블로거들 또한 이런 짓거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줄잡아 100여 개에 달하는 블로거들이 영상과 기사를 무단으로 퍼가거나 적당히 가공하여 올렸다. 그런 블로그에는 어김없이 구글 애드센스 등 광고가 붙어 있었다.


이런 짓거리가 계속되면 언론의 신뢰 추락은 물론이고 한국의 포털은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쓰레기를 청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쓰레기를 쓰레기라 정확하게 이름 붙이는 것이다. ‘어뷰징’이라는 생소하고 애매한 단어 말고, ‘쓰레기 기사’라고 확실히 불러주자.


※미디어오늘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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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치유 장흥 보림사, 몸치유 통합의학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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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흥 보림사와 통합의학박람회를 다녀왔습니다. 경남 마산에 사는 저로서는 드문 발걸음이었습니다. 장흥뿐만 아니라 전라도는 경상도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 감정이 생기고 또 상하고 하면 따로 득 보는 세력이 있다고 여기는 저로서는 이번 장흥처럼 전라도 한 번 다녀오면 되도록 알리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서울 또는 수도권에 비춰보면 대접 못받는 ‘지방민’이기는 마찬가지이기도 하니까 말씀입니다.

 

장흥은 지역을 살리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자치단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전국 명물을 장흥은 하나 갖게 됐습니다. 바로 정남진장흥토요시장입니다. 이 토요일마다 엄청나게 큰 규모로 서는 이 장터에는 장흥 산과 강과 바다에서 나는 갖은 특산물이 푸짐하게 펼쳐집니다.

 

 

이밖에도 장흥에는 지역을 살리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여름에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봄에는 장흥물잔치가 있고 가을에는 백세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실정에 걸맞은 대한민국 통합의학박람회가 있습니다. 또 자연풍광도 빼어나서 봄 철쭉 제암산, 가을 억새 천관산을 비롯해 멋진 산들도 많습니다.

 

 

올해 전라도 마지막 나들이는 10월 23일(목)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에서 출발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지역민 40명 남짓과 함께 장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랍니다. 지역 차별을 줄이고 서로에게 쌓여 있는 마음의 벽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고, 해당 지역 문화·역사·관광 자원을 널리 알리자는 목적이지요.

 

크지 않지만 알찬 보림사

 

보림사는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가지산파 으뜸 절간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도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삼보림으로도 꼽힌답니다. 조선시대는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선풍(仙風)을 떨쳐왔지만 6.25전쟁을 맞아 대부분이 불타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놓인 자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네모반듯한 보림사는 산 속에 있으면서도 평지 절간처럼 반듯하고요, 그 안에 들어앉은 석탑·불상·건물 같은 문화재도 별로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11시 즈음 버스에서 보림사 앞 마당으로 내려서니 절간을 감싼 산세가 퍽 넉넉해서, 깊지는 않으나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옵니다. 산줄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면서 보림사가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감싸고 있습니다.

 

금방 보수를 마친 듯한 외호문(外護門)을 넘어서면 사천문, 사천문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입니다. 외호문은 다른 절간서는 보기 드문데, 담장과 이어진다는 점에서 여느 일주문과 개념이 아예 다른 것 같습니다.

 

 

사천문도 별나답니다. 아마도 규칙에 매이지 않는 선종 기풍에서 받은 영향이 크지 싶은데요, 다른 데서는 대개 ‘천왕문’ 또는 ‘사천왕문’이라 이르지 이렇게 ‘왕’자를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 사천문 안에 있는 사천왕상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우락부락함’이라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0년 남짓 이전인 1539년 처음 만들어졌으니까요. 여러 특징이 있는 사천왕이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둘러볼 데도 많기 때문이지요.

 

먼저 삼층석탑, 통일신라 말기 세워졌다는데 크기나 맵시가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단·탑신은 물론 위쪽 꼭대기까지 망가지지 않고 온전하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저도 전체가 온전한 석탑 모습을 눈에 담은 것은 이번에 여기서가 처음이었습니다. 경주 석가탑·다보탑,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등등 아름답고 세련된 돌탑들은 적지 않습니다만, 그것들은 한결같이 원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대적광전 본존불 자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웅장하고 묵중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선불교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도의선사와 이를 위해 가지산문을 연 보조국사 등은 조사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전'은 부처님을 모시는 건물이고 ‘당’은 그보다 한 등급 이상 낮은 건물을 이른다고 보시면 크게 틀리지는 않는데요, 가지산문에서 이런 스님들을 어느 정도 높이 받드는지 이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대웅보전은 6.25 때 불탔다가 새로 복원이 됐는데요, 겉에서 보면 2층이고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조사전에서 나오는 일행들.

 

대웅보전 뒤편 오른쪽 보조국사창성탑과 탑비는 매우 우람해서, 보림사를 창건한 그이를 크게 모셨음을 잘 짐작하게 합니다. 탑비 거북받침돌(귀부) 물갈퀴는 매우 힘차게 조각돼 있어서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듯하고요 조금 위 (부도)탑 자리에서는 유연하게 흐르는 보림사 뒤꼭지를 제대로 눈에 넣을 수 있었답니다.

 

 

명부전에서는 웃음과 감탄이 함께 터져나왔습니다. 바람벽에 그려진 그림 덕분이었는데,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서 업경대(業鏡臺)로 지난 잘못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얼음지옥 불꽃지옥 독사지옥 등등 가지가지 열 가지 지옥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대조적으로는 극락행 KTX라 할 반야용선(般若龍船) 그림까지 설명이 곁들여져 놓여 있었습니다.

 

명부전 바람벽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

보통 절간에서는 전각 바람벽을 이렇게 이른바 속되게 처리하지는 않는 줄 저는 압니다. 어지간해서는 보기 어려운 파격(破格)인데요, 이런 서민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이 어쩌면 선불교 선종의 특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민 참여 무대 돋보이는 통합의학박람회

 

통합의학은 특징이 현대의학+한의학+보완·대체의학으로 두루 함께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통합의학박람회는 2010년 시작돼 이제 나름 틀을 잡은 셈인데 천관사 자락 박람회장에는 통합의학관·자연치유관·건강체험관이 있어서 따로 돈 들이지 않고 진료도 받고 체험도 해 볼 수 있었답니다.

 

 

물론 약품이나 식품을 제것으로 삼으려면 당연히 돈을 들여야 하지만요 하하. 이밖에 시음·시식을 할 수 있는 약선요리관, 건강음식관과 의료산업관도 마련돼 있어서 한편 눈요기 하고 다른 한편 필요한 물품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앞뜰 너른 데서는 나름 소담하게 국화축제(물론 마산국화축제와는 규모나 무게 면에서 견줄 바 아니고요)가 열려 잠깐이나마 즐겁게 눈맛을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장흥은 남해바다와 가깝고 또 탐진강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관산·제암산·수인산·가지산·부용산·억불산·사자산·삼비산 등등 500m를 넘는 산들이 꽤 있어 약초가 제법 많이 난답니다. 이런 특징을 살려 장흥을 좀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데에 통합의학박람회를 여는 까닭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합의학박람회는 적어도 목적의식이 뚜렷한 이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부위에 아픔이 있거나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는 이들 또는 그 가족, 피로나 불면 등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증상이 있는 이들은 체험관·치유관·의학관·산업관 따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울러 안팎에서 먹을거리나 승마 체험(유료)을 할 수도 있어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람회라 해도 신나는 볼거리가 빠지면 아무래도 밋밋하고 재미가 덜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23일 장흥읍내 콩샛골에서 청국장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는 박람회장을 들러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그러고나서 다시 눈길을 돌리니 한 켠에 '건강한마당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음악과 노래소리가 거기서 울려퍼지기에 들여다봤더니 전라도 고을고을 어르신들이 갖은 분장을 하고 나와 춤과 체조에 곁들여 노래까지 부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이처럼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습니다.

 

이렇게 노래와 음악과 춤·체조를 건강과 연결지어낸 눈맵시가 산뜻하게 여겨졌습니다. 그것도 팔팔한 청춘들이 아니라 지역 어르신을 매개로 삼아 연결지어낸 것입니다. 어르신들 흥도 돋우는 한편 박람회 분위기도 띄우는 감초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8학년 학생들이랍니다.

 

 

아마 텔레비전을 통해 얼굴이 잘 알려진 탤런트나 가수들 초청해 무대를 펼쳤다 해도 이보다 더 신나고 흥겹고 풍성하지는 못하리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만 그렇게 여기지는 않는 모양인지 거기 놓여 있던 의자들은 많은 구경꾼들로 빈 데가 없었고 뒤쪽과 옆쪽에서 서서 보는 이들도 수두룩했답니다.

 

 

이렇게 즐겁고 보람있게 한 때를 보낸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장흥 토요시장 상설 코너에 잠깐 들렀습니다. 살림 솜씨가 매운 이들은 토요시장에서 장흥 특산물을 장만했고요,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저와 비슷한 몇몇은 '3대곰탕' 같은 맛집을 찾아 수육도 집고 막걸리도 기울였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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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 수 늘리는 디지털퍼스트, 그게 최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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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퍼스트'란 말이 미디어업계에서 유행이다. 원래 영국 신문 <가디언>이 먼저였지만, 올해들어 미국 <뉴욕타임스>가 내부용으로 만든 '혁신보고서'가 유출되면서 더 확산된 듯하다. 조직규모가 큰 서울지역 일간지들은 물론이고, 전체 직원 5~6명에 불과한 소규모 지역주간지까지 너도나도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고 있다.

 

그렇다면 한 번 물어보자. 왜 하느냐고. 그걸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게 뭐냐고.


아, 그거야 종이신문보다 먼저 인터넷과 모바일에 실시간으로 기사를 올리면 방문자가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수익도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뉴욕타임스 혁신보고서 번역본 표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시다. 그래봤자 거의 모든 뉴스가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에서 소비되는 현실에서 얼마나 방문자를 늘릴 수 있을까. 내가 재직 중인 지역일간지를 기준으로 말씀 드리자면 하루 방문자 1000~2000명 정도는 더 늘릴 수 있겠다. 그러면 늘어나는 수익은? 고작해야 구글 애드센스 광고로 하루 1달러 정도다.

 

SNS 전담인력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등에 열심히 기사를 퍼나르면 그래도 좀 더 늘릴 수 있지 않느냐고? 웃기지 마시라. 지금 경남도민일보는 전국 지역일간지 중 SNS 영향력이 이미 톱 클래스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 모양이다.

 

스타일 좀 구기더라도 '알바'나 '인턴 기자'를 고용해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가십성 정보를 짜집기해 큐레이션 기사를 양산하고, 선정적인 낚시질 기사로 트래픽을 올린다면? 거기에다 발기부전 치료제나 성형외과 광고 등을 덕지덕지 붙이면 광고수익이 좀 오르지 않겠냐고? 흐흐. 꿈 깨시라. 그것도 포털과 기사 전재계약을 맺은 신문사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래봤자 '알바생' 월 인건비도 안 나온다.

 

얼마 전 경남도민일보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이 있었다. '제주항공 승무원의 재치발랄 코믹 기내방송'은 8만 9000 조회수를 찍었고, '안상수 창원시장 시의회서 계란 봉변'은 2회에 걸쳐 올렸는데 합쳐서 10만이 넘었다. 그런데 정작 이 영상으로 장사를 잘 해먹은 곳은 포털과 기사 전재계약이 되어있는 서울 매체들이었다. 그들은 영상을 무단으로 퍼갔고, 기사도 베껴써서 포털에 전송했다. 그렇게 베껴쓴 기사는 포털의 메인에 올랐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조회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만큼이나마 너희도 수익 좀 보지 않았냐고? 그래봤자 150달러다. 또한 그런 기사는 매일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경남도민일보 웹사이트는 기사 본문 페이지에 구글 에드센스 광고 딱 하나만 걸고 있다.

 

이처럼 지역신문은 아무리 큰 특종을 해도 포털의 기사 페이지에 오르지 못한다. 전재계약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헐값으로라도 주겠다 해도 포털은 받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지역신문 입장에선 자기 기사를 베껴쓰는 서울매체에 항의는 커녕 외려 고마워하는 웃지못할 일도 생긴다. 지역이슈를 전국화하기 위해선 서울매체들이 베껴써주기라도 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기를 쓰고 포털과 전재계약을 하면 '디지털 퍼스트' 효과를 볼 수 있을까? 포털 종속의 대가로 조회수도 늘어나고 수익도 좀 나아지긴 할 것이다. 선정적 광고를 덕지덕지 붙일 경우 말이다. 그게 과연 대안일까?

 

강정수 ㈔오픈넷 이사는 최근 한겨레에 쓴 칼럼에서 "뉴스사이트 방문자 수를 절대적인 경영 목표로 유지하는 동안 ‘기(자+쓰)레기’ 함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저널리즘 혁신을 주도하는 전세계 언론사 중 방문자 수를 신봉하는 곳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 지역신문에게 대안은 뭐냐고? 결국 콘텐츠의 문제다. 수만, 수십만 명을 끌어들이는 방문자 전략보다 100명, 아니 10명의 독자에게라도 꼭 필요한 정보, 안 보면 손해보는 뉴스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디지털 퍼스트'보다 '독자 퍼스트'가 우선이다. 지역뉴스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경남도민일보에 썼던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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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어지는 그이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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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이야기탐방대 1 - 합천 남명 조식 관련 탐방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8월부터 11월까지 경남이야기탐방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사회 공익 실현을 위해 만든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입니다.

 

경남 이야기탐방대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경남·부산 스토리 랩' 사업의 한 부분으로 '지역 이야기산업 활성화를 위한 자생 기반 마련'을 목표로 역사적 사건·인물과 설화, 명물 등을 찾아보고 결과를 글·그림·사진으로 내놓는 일을 할 것입니다.

 

'이야기산업'이란 보통 사람들한테는 아직 많이 낯선 개념으로 구체적인 형상이나 생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지역 여러 '꺼리'에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해 새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여행·관광은 물론 애니메이션·영화·음식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활용·적용하는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예술인탐방대. 왼쪽에서 하아무 신미란 신희경 박래녀 손남숙. 그리고 해설해 주신 정해식.

 

시작 단계인 지금은 ①여러 '꺼리'를 찾아내 공유하고 ②이야기를 만드는 경험을 공유하는 한편 ③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직하는 일이 당면 과제라 하겠습니다. 탐방대는 '청소년'·'예술인'·'SNS'탐방대 셋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제각각 5명씩인데요 이들은 8월 27일 치른 발대식 겸 간담회에서 탐방대별로 모두 세 차례 탐방을 하되 이 가운데 가운데 합천 남명 조식 유적과 의령·창녕 망우당 곽재우 유적은 공통으로 탐방하고 예술인·SNS 같은 어른 탐방대는 막걸리를 찾기로 했습니다. 청소년탐방대는 당시 정하지 못했는데요 나중에 '통제영과 예술'을 주제로 삼아 통영을 찾았답니다.

 

용암서원을 찾은 블로거탐방대. 가장 위에 있는, 남명 제사지내는 사당 상도사 모습인데요, 여기는 남명 지위를 그냥 처사라고만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찾은 데는 합천 남명 조식 유적. 남명 유적은 산청(남명 산소·덕천서원·산천재 등)과 김해(산해정·신산서원)에도 있지만 합천으로 한정한 데는 나름 까닭이 있답니다. 남명이 태어나고(외토리) 부모상을 치르고(하판리) 학문을 완성하면서 13년(1548~1561) 동안 제자까지 가르친(외토리) 고을이 합천이거든요.

 

그만큼 중요한데도 정작 눈길은 제대로 끌지 못하는 데가 합천입니다. 남명이 1561년 일가를 이끌고 옮겨가 1572년 일생을 마친 산청군 시천면 일대의 덕천서원이나 산천재가 누리는 명성에 가려진 셈이라 하겠습니다.

 

또다른 까닭은 '삼가장터 3·1만세운동'에 있습니다. 1919년 합천 삼가장터에서 두 차례 일어난 만세 시위에 3만을 넘는 사람이 참여했답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당해 일어난 정미의병에도 삼가 사람들은 적극 가담한 역사가 있습니다.

 

뒷면 기록을 살피는 소설가 박래녀.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앞면.

 

 

삼가가 큰 고을이 아닌데도 이처럼 의로운 거사(의거)에 많이 나선 특별한 까닭이 있지 않았을까요. 삼가가 당시 교통 요충이었음도 원인 가운데 하나겠지만, 경(敬)·의(義)로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가르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지역에 이어진 덕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삼가면 소재지 금리마을에 2005년 들어선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은 멋지면서도 씩씩합니다.

 

8월 24일 청소년 탐방 때는 이봉영 어르신을 동구밖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는 행운까지 누렸습니다. 남명 외가쪽 후손인 인천 이씨 이 어르신은 청소년들이 기특했던지 남명 생가 등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해줬습니다.

 

마을을 찾은 청소년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이봉영 어르신.

 

외토리 쌍비 앞에서도 이봉영 어르신은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외토리 마을을 건너편 산에서 보면 영판 옆으로 누운 토끼 모습인데 남명 생가는 왼편 가슴에 해당한다거나, 남명 생가가 바로 남명 외가인데 남명을 낳은 딸과 마찬가지로 며느리도 몸을 풀러 와 있었으나 영특한 기운이 외손(=조식)에게 넘어가 외할아버지가 탄식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들려줬습니다.

 

9월 15일 예술인탐방대와 23일 SNS탐방대는 정해식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둘러봤습니다. 합천 으뜸 해설사라는 합천군 추천에 걸맞게 뇌룡정·용암서원·남명 생가를 돌며 알려져 있지 않은 여러 사실을 일러줬습니다.

 

새로 만든(복원이 아니고) 뇌룡정 문간채에서-예술인탐방대.

 

그러면서 지금은 사라진 계부당(鷄伏堂=뇌룡정과 함께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터로 짐작되는 장소도 어디쯤이라 짚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또 합천 삼가 일대 남명 유적이 다른 고장 유적보다 뜻깊은데도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아쉬워 하기도 했습니다.

 

SNS탐방대는 들판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로부터 마을 지형에 대한 설명도 듣고 그이한테서 손수 만든 도토리묵을 얻어먹는 영화도 누렸습니다. 남명 생가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는데요, 남명뿐 아니라 마을 풍수가 빼어나다는 자랑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암서원 묘정비를 둘러보는 블로거탐방대.

 

묘정비 받침돌 거북. 거북 같지 않고 그냥 익살맞은 만화 캐릭터 같은 느낌이 납니다.

 

이렇게 탐방에 나선 이들은 모두 용암서원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기도 하고 마을 들머리 느티나무 엄청난 크기와 멋진 그늘에 흥겨워하기도 했습니다. (잘못 복원돼 있어서 감흥이 조금 줄기는 했지만) 뇌룡정(雷龍亭)에서는 기둥에 붙은 주련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낸다)'도 곱씹었답니다.

 

용암서원 들머리. 을묘사직소 새긴 빗돌.

 

떠들고 나대는 대신 평소는 가만있다 때가 되면 뚜렷하게 나타나고 또 크게 소리내야 한다는 뜻이 담겼지 싶습니다. 곽재우·정인홍을 비롯한 제자들이 평소에는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서슴없이 떨쳐나섬으로써 이런 가르침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요, 이번 탐방에 나선 이들은 어른조차 남명 조식과 그 유적을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남명이 경남의 공식 대표 인물인데도 모두 모른다고들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남명이 퇴계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고 서로 인정하는 쌍벽이었다고 말해줬더니, "이황은 1000원짜리 지폐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남명 조식은 어떻게 이다지도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어요?"라고 되묻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벼슬에 나선 이황과 나서지 않은 조식, 조식의 문벌과 이황의 문벌, 모두 다 만만찮게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 제자들이 활동에서 보여준 차이 등등 앞으로 가면서 풍성한 이야기가 줄줄이 매어달릴 그런 물음이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용암서원 거경당 마루에 앉아서.

 

그리고요, 남명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합천·산청 일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또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시대 현실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실제 상황과 더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나 인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보다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이들로 탐방대를 꾸린 때문도 있겠지만 그런 지식은 앞으로 알아나가면 되고 한편으로 그런 지식은 없는 편이 탐방으로 알게 된 것들을 자기것으로 삼는 데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가 신미란의 그림. 저작권은 신미란님께 있으니까, 함부로 가져가지 마세요.

그리고 이번 탐방에 참여한 이들은 청소년이든 블로거든 예술인이든 가리지 않고 탐방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글과 사진과 그림들을 내놓았습니다. 마치 자기 열성과 관심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씀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느꼈던 감흥이 남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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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은행나무 성산산성 고분군 농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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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7일에 했던 창원교통방송원고입니다. 한 번 올려봅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시지 않겠지만, 지난 18일을 마지막으로 방송 출연을 끝냈습니다. 너무 바빠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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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함안으로 걸음해 봅니다. 함안군청 앞으로 곧게 나 있는 도로를 따라 함안면에 있는 이수정까지 걸어갑니다. 늦가을을 맞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사귀를 한껏 누릴 수 있는 2km 정도 길입니다.

 

며칠 전 다녀왔을 때는 나무에 매달린 잎이 더 많았는데요, 지금 어떤지는 단정 못하겠습니다. 가야읍내에서 이수정까지 이어지는 79번 국도는 양쪽에 은행나무 가로수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읍내에서 전깃줄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인 나무들은 거기 벗어나 들판 접어들면 원래 모양대로입니다.

 

오래 된 절간이나 서원 들머리처럼 덩치가 우람하지는 않고요, 대신 시원하게 쭉쭉 뻗어 있습니다. 올해는 가을이 됐어도 단풍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합니다. 올해는 태풍도 장마도 없어서 열매가 좋다 하는데, 그러면 잎으로 보내지는 영양분이 줄어지는 탓인지 단풍은 못해진다고 합니다.

 

 

은행나무 잎사귀들은 노랗게 익어서 그 색깔만으로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한결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부드럽고 환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노란 은행잎은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도 그런 느낌을 뿜고요, 바닥에 내려앉아 발길을 푹신하게 만들어주면서도 그런 느낌은 그대로입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바람이 제법 맵싸하지만 낮에는 햇살이 꽤나 푸근합니다. 바삐 걸으면 이마에 땀도 맺힐 지경입니다. 좌우로 널려 있는 들판은 결실로 가득찼다가 인간에게 통째로 내어주고는 이제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를 풍겨냅니다.

 

 

사람길에는 사람이 없고 낙엽만 수북하니 가득 쌓였습니다. 찻길에는 한적하지 않을 정도로만 자동차들이 다닙니다. 이 은행나무 낙엽들은 길바닥에만 깔려 있지 않고요, 나무 가운데 걸려 있는 까치 둥지 위에도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주치는 데가 이수정입니다. 봄철 낙화놀이를 크게 하는 장소인데요, 처음 찾은 이라면 한 번 둘러볼만은 합니다. 앞에 만들어져 있는 그윽한 연못 위로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다리를 통해 연못 가운데 정자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수정에 있는 부자쌍절각과 충노대갑지비.

 

위쪽 이수정에도 한 번 올라봐야겠지요. 들머리에 있는 배롱나무는 꽃은 오래 전에 지고 잎도 대부분 지고 없지만 그 품새는 나름 멋집니다. 이렇게 둘러본 다음 온 길로 곧장 돌아나갈 수도 있지만, 주차장 있는 데서 산길을 골라잡아도 괜찮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글자가 적힌 편지 등이 나온 성산산성이 바로 여기입니다. 자드락 산길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데요, 대략 700m 오르면 산성 들머리에 닿습니다. 아직 발굴을 마치지 않은 여기에는 산마루를 둥글게 돌아나오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산산성에 있는, 건물터 비슷하게 여겨지는 자리.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아 산아래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시원함은 없지만 안쪽 산과 나무와 수풀이 안겨주는 풍경은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대략 3km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 돌아보셔도 좋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도로 내려와 가야읍내까지 가야 하는 걸음이 남아 있으니까요. 이수정에서 돌아오면서는 함안박물관을 품은 말이산고분군을 거칩니다. 1km정도 걸으면 왼쪽으로 함안 곶감단지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는데요, 여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도동마을로 접어들면 바로 고분 무리가 보입니다.

 

오른쪽 고분 뒤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르면 되는데요, 이 고분길은 함안 사람들한테 잘 알려져 있어서 언제나 가벼운 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길섶에는 물론 억새도 자라나 있고 산국 쑥부쟁이 구절초 벌개미취 같은 가을꽃도 피어 있어 아주 그럴싸합니다.

 

가다가 세 갈래 길에서 삼기마을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서면 함안박물관입니다.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에서 나온 가야 시대 유물을 주로 전시하는데요, 들르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내쳐 걸으면 되겠습니다. 고분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지는 길입니다.

 

고분이 자리잡은 데는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 고분군도 무척 아늑하고 또 가야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기까지 합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함안군청으로 빠지는 편이 낫습니다. 고분군 있는 언덕이 바로 군청 뒤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5일 10일 장이 서는 전통시장 가야장에 들르셔도 좋습니다. 진이식당(055-582-7663)이라고, 아주 맛이 색다른 농주=막걸리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시중에서 맛볼 수 있는 농주 가운데 가장 달지 않고 누룩 냄새 가장 가득한, 그러면서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 그런 막걸리가 나옵니다.

 

그럭저럭 지내다 마산으로 나오려면 정류장에서 114-1번이나 252-2번을 타면 됩니다. 이 두 노선 버스는 꽤 자주 다니는 편이라서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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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당 곽재우가 망우정에 숨어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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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운영한 경남이야기탐방대(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주관)는 청소년·예술인·블로거 셋으로 구성돼 있답니다.

 

이들 세 탐방대는 저마다 세 차례씩 지역 유적·명물을 찾아 거기 있는 '꺼리'를 엮고 묶고 맞춰 이야기로 풀어내는 일을 합니다. 글일 수도 있고 사진이나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로만 이뤄질 수도 있고 상상력을 더해 전혀 새롭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숨어 있는' 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연들을 좀더 널리 알리고 재미있게 만들자는 취지입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로 말미암아 지역이 더욱 풍성하고 빛나도록 이끄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곳곳에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정암루에서-예술인탐방대정암루에서-청소년탐방대

 

합천 남명 조식 유적을 둘러본 데 이은 두 번째 나들이는 주제가 임진왜란 당시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1552~1617)였습니다. 예술인탐방대는 9월 22일 찾았고 SNS탐방대는 9월 30일 둘러봤습니다.(청소년탐방대는 학교 시험 때문에 11월 2일로 멀찌감치 날짜를 잡았습니다.)

 

길라잡이는 지역 시인이면서 '의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화·관광 분야에서 여러 일을 기획·추진해온 윤재환 씨가 맡았습니다. 부탁하기 전에는 손사래라도 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하면서 단박에 승낙해 주셨습니다.

 

가는 길에 들른 탑바위(예술인).오는 길에 들른 성황리소나무(블로거)

윤 씨는 농담·재담도 섞고 추임새도 발라 가면서 '사랑하는' 의령과 '존경하는' 곽재우에 대해 조곤조곤 일러줬습니다. 이런 인물을 두고 이야기를 엮어 봐도 매우 그럴듯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곽재우는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조선 침략을 위해 왜군이 대마도를 떠난 날이 4월 13일이었고 곽재우 의병은 아흐레 뒤인 4월 22일 처음 꾸려졌습니다.

 

왼쪽 강가운데 바위가 솥바위(정암鼎巖). 청소년탐방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찾아가는 의령 탐방은 의령읍 들머리 정암진에서 시작했습니다. 정암진(솥바위나루)은 곽재우와 그 의병이 두 번째 승전을 일궈낸 장소랍니다. 육지길이 발달한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물길이 가장 손쉽고 안전했습니다.

 

왜군은 낙동강 지류 남강을 거슬러 의령~진주~산청~함양을 거쳐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갈 참이었는데, 곽재우 의병이 이를 막아냈습니다. 왜군은 강을 건너기 앞서 안전한 지대를 골라 깃발을 꽂았다고 합니다. 깃발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도록 한 것이지요.

 

정암진 둘레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치성을 들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곽재우 의병이 이 깃발을 늪지대로 들어가도록 바꿔 꽂았습니다. 이를 전혀 몰랐던 왜군은 허우적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의병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건너편 언덕서 활을 쏘아댔다지요. "의령 사람들은 대첩(大捷)이라 합니다. 2000 적군을 물리쳤지요." 곽재우는 이렇게 유격전에 능했습니다.

 

곽재우 생가에서 바라본 세간리은행나무.

 

탐방대는 이어 유곡면 세간리 곽재우 생가에 들렀습니다. 생가는 마을에서 조금 북쪽에 있습니다. 원래 자리인지는 확실하지 않답니다. 마을 한가운데 현고수(懸鼓樹)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의병박물관에 있는 '의병창의도'에는 곽재우 머물던 집 바로 옆에 현고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원래 모습이 남아 있지도 않은 생가를 거기다 새로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모으면서 북을 매단 느티나무가 현고수입니다. 550살 정도로 짐작되는데, 'ㄱ'자와 'ㄴ'자를 붙여 놓은 것처럼 휘어져 있어 과연 매달만했겠구나 여겨진답니다. 곽재우 생가는 본가가 아니라 외가였습니다.

 

현고수를 둘러보고 살펴보는 예술인탐방대.

 

현고수 옆 마을 정자에 마련돼 있는 큰북을 울려보는 박주희 청소년탐방대. 완전 신이 올랐습니다.

 

본가는 현풍현(대구 달성군 현풍면)에 있습니다. 곽재우는 본가 재산은 물론 외가(그러니까 아버지의 처가) 재산까지 털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한 뜻은 입신양명에 있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을 멀리하고 가난을 가까이 했던 삶이 이를 증명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실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과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스승 남명 조식(1501~72)이 평생을 두고 일러준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곽재우말고도 남명 제자 출신 의병장이 서른을 넘었다니 가르침의 강렬함, 사제지간 돈독함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겠습니다.

 

세간마을에는 현고수 말고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습니다. 곽재우 생가 앞에 솟은 600년 넘은 은행나무랍니다. 곽재우 장군의 출생과 창의는 물론 갖은 개인사와 가정사와 나랏일을 내려다도보고 들여다봤을 나무들입니다.

 

세간리은행나무 가까이 들러붙어 살펴보는 청소년탐방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을 건너온 나무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잘해야 감탄사 한 번 던지고는 무심하게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요. 요즘 사람들 세태가 그렇고 짐막하는 깜냥이 그렇게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점심을 먹은 다음 곽재우 첫 전승지로 갑니다. 가는 길에 지정면 돈지마을 앞을 지납니다. "곽재우 장군이 서른넷 되던 1585년에 과거에 급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문장이 당시 선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방(罷榜)을 당합니다.

 

그 뒤 돈지 어딘가에 강사(江舍)를 짓고 임진왜란 때까지 3년가량 지냅니다. 돈지 시절에 왜군 침략을 예견하고 일대 지형지물을 세밀하게 익혔으리라 봅니다. 남명 조식이 자기 외손녀와 혼인하게 한 다음 유일하게 병법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곽재우였으니까요."

 

청소년탐방대는 현고수에도 이렇게 들러붙어 봤습니다.

이렇게 윤 씨 설명을 들으며 기강(거름강)나루에 닿았습니다. 임진년 5월 4일과 6일, 곽재우는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여기서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선 최초 승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컸습니다.

 

이미 서울조차 5월 2일 왜군 손에 일찌감치 떨어진 상태였고 나름 준비가 있었던 수군조차 깨지고 있었습니다.(이순신장군의 첫 승리는 5월 7일 옥포해전이었다.) 곽재우는 물 밑에 나무막대를 박아놓고 거기에 걸린 왜선에다 화살을 집중해 쏘아 열네 척을 깨뜨렸습니다.

 

일대 지형지물에 밝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전술이었습니다. 기강나루에서 일군 임진왜란 최초 승리는 어떤 효과를 냈을까요? 당시 조선 사람들한테 어떤 울림을 안겼을까요? 칠흑처럼 캄캄한 절망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 아니었을까요?

 

쌍절각과 보덕각을 알리는 표지석을 살피는 블로거탐방대. 1979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 '분부'를 받자와 당시 의령군수가 세웠습니다.

 

'야, 이겼단다! 관군도 아닌 의병이. 죽는 줄만 알았더니 살 수도 있겠네. 싸우다 죽으나 붙잡혀 죽으나 매한가지니 한 번 나서볼까?' 실제로 이 최초 전투에 나선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두 번째 정암진전투에서는 의병이 크게 불어나 있었다고 합니다.

 

기강나루에는 보덕불망비가 있습니다. 곽재우 숨지고 나서 100년도 더 지난 1739년 영조 임금이 세웠습니다. '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有明朝鮮國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報德不忘碑)'. 글자는 적으나 뜻은 큽니다.

 

더 크게 이긴 정암진이 아닌 여기에다 당시 조정이 굳이 빗돌을 세운 애틋함도 나름 읽힙니다. 기강나루전투 승리가 비록 작지만 당시 백성과 조정에 끼친 사회심리적인 영향을 제대로 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기강나루에서 보덕각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는 예술인탐방대.

기강나루에는 쌍절각도 있습니다. 초계 마수진 전투에서 나란히 목숨을 잃은 의병장 손인갑과 아들 손약해를 기리는 빗돌을 품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닌데, 어쨌거나 이처럼 한 곳에 임진왜란 의병장을 기리는 빗돌이 둘이나 있는 경우를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제 곽재우 장군이 마지막 숨을 거둔, 낙동강 건너 창녕 도천 우강리 망우정이랍니다. 곽재우는 1602년부터 대부분을 여기서 가난하게 지냈습니다. 모든 재산을 털어 왜적을 맞아 싸웠기에 가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망우당을 둘러보는 예술인탐방대.

 

그런데도 왜 이렇게 했을까요? '나라가 어려울 때는 부르지 않아도 마땅히 나가고, 할일을 다한 뒤에는 남아라 붙잡아도 마땅히 물러난다.' 그래서 곽재우는 임금이 불렀어도 때로는 나가고 때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지 않았다고 1599년부터 이태 동안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도 했습니다. 탐방대 구성원 대부분은 "이러구러 지내다 종신(終身)이나 제대로 하면 그만이라 여겼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윤재환 씨는 "곽재우 장군은 이 망우정조차 자손한테 남기지를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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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임금으로 둔갑시킨 못난 유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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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임금을 따라다니며 모신 사람은 호성공신으로, 왜적을 무찌른 여러 장수들과 군사·양곡을 보내달라고 명나라에 아뢴 사람은 선무공신으로, 1596년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사람은 청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앞자리가 호성, 그 다음이 선무, 가장 아래가 청난이었습니다. 1604년 6월 25일치 <선조실록>을 보면 호성공신은 1등 3명 2등 31명 3등 53명으로 모두 86명입니다. 선무공신은 1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으로 18명입니다. 청난공신은 1등 1명 2등 2명 3등 2명으로 5명이었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이를 보면 왕조 시대 임금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도 백성도 아니었고 자기자신의 목숨과 신체였습니다. 임금을 말에 태워 모셔 가고 등에 업고 사나운 물을 건너면서 '먼지를 뒤집어 쓰는' 몽진(蒙塵)을 함께한 공신들이 가장 앞에 나서 있고 숫자도 가장 많습니다.

 

반면 조선 강토를 들어먹으려는 왜적과 맞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운 사람,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갖은 치욕도 마다하지 않고(어리석은 임금의 신하 된 탓에) 입에 풀칠할 양식과 나라를 되찾아줄 병력을 빌려오는 데 힘쓴 선무공신은 모두 더해도 호성공신의 20%밖에 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이몽학의 반란 토벌은 어떤가요. 실제 가담한 병력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미친 영향도 작았으므로 이를 두고 공신 운운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런데도 선조는 공신을 다섯이나 삼았습니다.

 

자기 임금 자리를 위협한 사건이다 보니 그랬던 모양이겠습니다.(선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호남 의병장으로 신망이 높았던 김덕령을 터무니없이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공신 책봉에 대해 당대에도 비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호성공신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처음이고요 선무공신을 호성공신 뒤에 둔 데 대한 공론이 두 번째였으며 이몽학의 난을 두고서는 따로 책봉할 필요조차 없다는 얘기가 세 번째였습니다.

 

연합뉴스 사진.

 

하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1601년 3월 17일 기사에서 이항복은 이렇게 아룁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중국 군대에 기대어 오늘날이 있지만 여러 장수들 노고도 적지 않습니다. 만일 호종공신의 말석에다 부친다면 반드시 불만스러워할 것입니다."

 

이에 선조는 자기가 사실에 근거해 있다면서 이렇게 답합니다. "중국 군대가 아니었으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 회복은 모두 중국 군대의 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다만) 여러 해 방어한 공이야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합뉴스 사진.

 

호성공신이 너무 많다는 논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분인 내시가 24명이나 되고 임금 심부름꾼도 그 비슷한 숫자가 된다는 공론은 여러 차례 제기된 모양이지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공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조실록>을 기록한 이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호성공신은 분수에 지나치고 청난공신은 그것이 무슨 공훈이 될 일인가. 공신록이 참으로 구차한 데 쓰이고 말았구나.'

 

이처럼 선조 임금과 조선 왕조에게 강토와 백성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잘라 말하자면, 임금 자리와 왕조가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런 따위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런 세상이 아닌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고 두려워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조선 왕조 임금처럼 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고위 공무원이 조선 시대 임금을 호종하던 대신들과 같기 굴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래도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지금 대통령이 된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이래 세 번째 여왕'이라 자랑스레 일컫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같은 유권자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한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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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경남지사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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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파플파워> 10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무상급식 예산 지원 중단 말입니다. 지난해는 서민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강제 폐원하고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만들더니, 올해는 느닷없이 무상급식을 '좌파정책'으로 몰아붙이며 이슈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우물가에서 물로 배를 채웠다'면서 왜 그러는 것일까요?


지난 2013년 1월 <피플파워>는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재정을 건전하게 만드는 가장 큰 목적은 복지예산의 확대에 있다"면서 "도정방침 다섯 개가 다 복지예산 확충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죠. 그 인터뷰를 마친 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의료원 폐원을 밀어붙였고 끝내 관철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포함한 열두 명의 인터뷰를 엮은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인생>(도서출판 피플파워, 2014)을 출판하면서 그의 모순적인 심리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습니다.


"자신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특유의 에고이즘(egoism)이 '독고다이'라는 별명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습니다. 어렵게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나만큼 고생해봤어?' 하는 심리를 드러내는 이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매몰차게 대하기도 합니다. 자신은 그걸 극복했는데 당신들은 뭐냐는 거지요.


<피플파워> 12월호 표지.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모두 그런 건 아닙니다. 이번호에 소개되는 김재영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이 그런 분입니다. 김 원장 역시 가난한 페인트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참고서 한 권 살 돈도 없는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치매노인들을 친부모처럼 여기며 보살피는데 삶의 보람을 얻고 있습니다. 그가 병원에서 어떻게 치매환자들을 대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프로 무용가에서 무용기획자로 변신해 노인과 장애인, 비행청소년 등 소외계층을 무용으로 치유하고 있는 정옥경씨의 삶도 김재영 원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호 표지인물은 평생을 차(茶) 문화 확산에 바쳐온 고성배한국차문화연합회장입니다. 그가 60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지, 마산에 공자(孔子)촌을 만들자는 그의 원대한 구상은 뭔지도 눈여겨 봐둘만 합니다.


아울러 68세의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한 변희우씨 이야기,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티소믈리에 자격증'을 따서 창원으로 돌아온 박은애씨의 꿈, 늦은 나이에 한의원을 열어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학당을 운영하며 인술을 펼치고 있는 인중천지일한의원 이상미·김창호부부 이야기도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줍니다.


개인의 성공이나 가족의 평안에 머물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의 삶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진주아이쿱생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권춘현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그리고 권범철의 얼굴에 등장한 이계삼밀양송전탑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 그런 분입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은 없는지, 권력의 횡포에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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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집막걸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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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가 사회적 기업으로 만든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올 8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경남이야기탐방대도 이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하고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는 이번 탐방대 활동은 11월 안에 마치도록 예정돼 있는데요 11월 2일 토요일 중간고사를 마친 청소년탐방대의 의령 의병장 곽재우 유적 둘러보기가 마지막이었답니다. 

 

경남이야기탐방대를 이루는 셋 가운데 하나인 블로거탐방대와 예술인탐방대는 14일과 20일 세 번째 탐방길을 제각각 남해로 잡았습니다. 남해 두 군데 집막걸리를 누리는 걸음이었지요.

 

남해 남면집 농주와 뜯어 먹다 남은 지짐.

 

사실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가 풍성한 대상도 드물 텐데, 시어머니 손에서 며느리 손으로 또 어머니 손에서 딸 손으로 전해오는 막걸리를 맛보고 그에 걸맞은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어 구성해 보기 위해서랍니다.

 

막걸리는 이렇습지요. 대체로 보자면 식량 자급자족이 우리나라 최대 정책 과제가 되면서 쌀막걸리는 공식 자리에서 한순간 사라졌습니다. 1970년대 즈음이었습니다. 옛날 고을마다 있던 술도가에서는 쌀 대신 밀가루를 써서 막걸리를 빚었습니다.

 

옛날 집에서 담가 먹는 막걸리는 세무 당국한테 한 번씩 털렸는데요, 거기엔 정식으로 주세(酒稅)가 매겨져 시장에 나오는 '주류'를 보호한다는 뜻과 더불어 <쓸데없는 데> 쌀을 쓰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면집 안주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쌀 자체에 대한 개량이 거듭된 끝에 엄청난 다수확이 가능해졌고요 나라 전체 차원에서 보자면 쌀 소비량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새로 생겨난 현상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속돼 온 경향이랍니다.

 

막걸리를 빚지 못하게 했던 원인인 쌀 부족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막걸리를 빚는 솜씨가 이어지지 않거나 못하는 현실이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담가 먹으면서 대대로 막걸리 빚는 방법과 솜씨가 이어졌지만 이제는 그렇게 이어주는 매듭 자체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집막걸리 두 군데를 공교롭게도 남해에서 찾아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없지 않으나 이번에 찾아낸 지역이 남해라는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짐 부치는 남면집 할매 옆에서 블로거 실비단안개가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남해 읍내 장터에 있는 남면집(010-2045-9133)이 하나고 설천면 문의마을 양모리학교 이르는 길모퉁이에 이름도 없이 나앉은 가게(010-3840-7136)가 다른 하나입니다. 남면집은 올해로 일흔아홉 연세인 할매가 하시고 문의마을 가게는 쉰 줄에 올랐으려나 하는 아줌마가 한답니다.

 

할매는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이 마흔여덟에 혼자 돼서 겪은 고생은 말도 못한다. 아이 셋을 혼자서 키웠다 생각해 봐라, 보통이겠는지. 남면 덕월마을에 시집가 살다가 읍내 나왔는데 재산도 없고 할 거리도 있어야지. 남의집살이에 식당일까지 정말 오만가지 안 한 일이 없다. 그러다 누가 막걸리 빚을 줄 아니까 한 번 해봐라 했는데 지금껏 하고 있다. 한 스무해 됐나 모르겠네."

 

할매 고생이 남편 잃고 혼자가 된 뒤로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읍내로 나왔을 정도면 그 전부터도 삶이 고단했음은 분명합니다. 할매는 얘기하는 도중에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슴에 맺혀 여지껏 풀리지 못한 한이나 분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과거는 그랬어도 지금 모습은 어디 내놓아도 그 이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요즘 연세가 여든 가까운 이들 가운데 허리를 곧게 하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가요! 가게에서 일하는 양을 봐도, 70대 후반 할매답지 않게 허리가 꼿꼿하답니다.(본인이야, 겉은 멀쩡해도 속은 썩어빠진 고목나무 등걸에다 자기를 견주곤 했습니다만.)

 

또 새벽마다 텃밭에 일하러 나간다고 하시는데 또한 건강이 그만큼 받침해 준다는 얘기이지요. 더욱이 지금 가게도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라 했습니다.(지난해 7월 처음 찾았을 때는 세로 얻어 쓴다고 들었었거든요.)

 

남면집 들머리 풍경. 장바구니 걸린 이 자전거는 할배들 자가용입니다.

 

남면집이 스무 해 가까이 이어오면서 아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바깥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많지만 그래도 으뜸 손님은 남해 할배들이랍니다. 읍내에 사는 할배 또는 장이 설 때마다 읍내에 다니러 오는 할배들입니다.

 

어떤 할배는 막걸리를 한 잔만, 어떤 할배는 소주를 한 잔만, 어떤 할배는 소주도 막걸리도 말고 단술을 한 잔만 마십니다. 안주는 시원한 열무물김치가 전부일 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 입 다신 할배들은 500원짜리 동전 두 낱을 탁자에 올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떠난답니다.

 

이런 '한 잔 쟁이'들도 많지만 소주 한 병 또는 농주 한 주전자 주문해 놓고 퍼질러 앉는 할배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때는 혼자가 드물고요, 두셋 정도가 어우러져 술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목소리도 때로는 높아지고 얼굴도 불콰해지는 모습입니다.

 

가운데가 남면집 주인 할매. 양쪽 할매 할배는 따로 왔는데 한 상에 어울렸습니다. 뒤쪽 아재는 한 잔 마시고 퍼뜩 나가는 길입니다.

 

어떤 경우는 이웃에서 할매 친구가 놀러 옵니다. 그 할매한테 막걸리를 권해 올렸더니 거듭 비웠더랬습니다. 한 데 어우러지면서 주전자 막걸리도 마셨고 병소주도 마셨습니다. 해물이 알맞추 섞인 나물전도 할매 상에 올렸습니다.

 

커다란 한 판에 3000원인데요, 지짐에 섞이는 나물은 그날그날 다르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할매가 아침 나절 밭에서 거둔 대로 부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서 이야기도 덩달아 무르익어 갑니다. 실없는 말씀도 나오고 흥에 겨운 소리도 나옵니다. 성내며 다투는 소리도 나고 기분좋게 웃으며 하는 소리도 납니다. 평일인데도 이런 정도면 장날은 어떨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앙숙인 듯한 할배끼리는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이들 서로 흘기거나 슬그머니 피하는 눈길이, 저희 같은 젊은 치들한테는 오히려 순진하게 보였습니다. 어떤 할배는 하모니카 부는 재주가 대단한 모양으로 신이 나면 그것을 꺼내 흥겹게 불어 보입니다. 할매·할배들 어울리는 공간으로 적격입니다.

 

오른손으로 추임새를 넣으며 하모니카를 부는 할배.

 

문의마을 양모리학교 들머리 가게는 남면집에 견주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한 셈이지요. 이 집 아지매는 올여름 들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양모리학교로 체험하러 오가는 이들을 겨냥해 아이스크림과 간단한 마실거리를 내놓았더랬답니다.

 

아지매 손맛을 아는 이들이 국수라도 한 번 말아보라 권했고 그게 이어져서 시어머니 빚던 막걸리까지 한 번 빚어보라고 청을 들였다고 합니다. 아지매는 올 봄에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한테서 어깨 너머로 막걸리 빚는 방법을 배웠답니다.

 

 

아지매가 차려내는 술상·밥상을 보면 먼저 깔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까운 횟집에서 찬모 노릇을 10년 넘게 한 이력이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아지매는 시어머니 세상을 떠나면서 찬모 노릇을 그만뒀답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집안일 농사일을 하는 한편 따로 가게도 차린 셈입니다.

 

상에는 그날 논밭에서 거둔 곡식 과일들이 그대로 올라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밤도 홍시도 단감도 대추도 오릅니다. 때를 놓치고 있다가 뒤늦게 여문 방울토마토도 오르고요 제대로 삶은 고구마도 함께 오릅니다.

 

문의마을 아지매 가게 안방에서. 예술인탐방대.

 

문의마을 아지매 가게 바깥 자리에 앉은 손님들.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여기에 국수를 더해 한 사람에 4000원을 받고 막걸리는 때로 그냥 주기도 하지만 정가는 한 주전자에 5000원이랍니다. 이 집은 좋은 사람과 더불어 좋은 육수에 담긴 국수 한 다발과 옛날 맛 집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서 시원하고도 멋진 풍경을 눈에 담기에 좋습니다.

 

갯가 문항마을을 거쳐 멀리 창선섬과 삼천포대교까지 눈맛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한 잔 하고 나서 마을 여기저기를 거닐다 보면 "여는 머하로 왔능고?" "오데서 왔능고?" 물으시는 할매들 더러 만나집니다.

 

마을 들머리 포구나무 아래에서 만난 할매 한 분. 허리가 잔뜩 굽으셨지만 표정은 해맑았습니다.

 

그런 할매 눈에 띄지 않거든 동구밖 덩치 커다란 팽나무 아래에 앉아서 기다릴 일이랍니다. 얼마 지 않아 할매가 나타날 텐데요, 대부분은 얼굴이 웃는 상이고 말씀도 즐겨 하시는 편입니다. 물론 허리는 굽어 있어서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기 십상입니다.

 

남해 할배들 사귀려면 읍내 남면집 막걸리 기울이면 되겠고요, 남해 할매들 사귀려면 설천면 문의마을 길가 가게와 동구밖 팽나무 그늘에 들면 되겠습니다. 그런 다음 거기서 막걸리를 버무리면 좋은 이야기가 엮여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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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핵발전소와 함께 살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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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Greenpeace)가 한국에서 탈핵 캠페인을 시작했네요. 아래는 그린피스가 널리 알려달라는 캠페인 취지문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온라인 서명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등을 통해 널리 공유해주세요.


- 온라인 서명 페이지http://grnpc.org/IgehK


지난 10월 17일 전남 영광의 한빛원전 3호기가 갑자기 가동을 멈췄습니다. 원전 내 핵심설비에 금이 가 냉각수가 일부 누출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균열이 심했더라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와 같은 대규모 재난으로도 연결될 수 있는 아찔한 사고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인코넬 600'이라는 소재. 원전 주요부품에 사용된 이 재료는 사실 부식과 균열에 약해 위험하다는 사실이 40년 전 이미 밝혀졌답니다. 지진이나 쓰나미, 테러처럼 특수한 상황이 없어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서둘러 부품을 교체하거나 아예 해당 원전을 폐쇄하기도 했습니다. 


세계가 외면한 부품, 2014년 한국은 땜질로 재사용중

한국은 어떨까요? 과연 한빛 3호기만이 문제일까요? 한빛 4호기는 더 심각한 상태라고 합니다. 국내 원전 가동 뒤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2002년 한울 4호기 사고도 인코넬 600이 원인이었습니다. 인코넬 600의 경고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불행히도 2014년 현재 국내에서 인코넬 600을 사용 중인 원전은 무려 14기에 달합니다. 하지만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은 근본적 해결 대신 땜질을 늘리는 미봉책으로 위험천만의 '누더기 원전'을 늘리고 있습니다. 


위험도 시민이 감당, 수조원의 교체 비용도 시민이 부담

오래 전 같은 문제를 겪은 미국은 부실부품을 공급한 회사가 인코넬 600의 교체비용을 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낸 전기요금으로 비용을 충당해왔습니다. 이 규모는 무려 6조 2천억여원에 달합니다. 가구당 35만원씩을 대신 낸 셈입니다. 


‘누더기 원전’ 이제 그만!

그린피스는 가장 문제가 심각한 한빛 3, 4호기 즉시 가동 정지를 요구합니다. 한수원은 2018년 2019년에 조치를 취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최소 4년 이상 가슴 졸이며 이 누더기 원전들과 살 수는 없습니다.


부실자재로 몸살 앓는 '누더기 원전'을 없애는 일, 여러분이 할 수 있습니다. 원전 운영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의 조석 사장께 한빛 3, 4호기 즉시 가동 정지를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 온라인 서명 http://grnpc.org/IgehK


기장군에 있는 고리 핵발전소 @김주완


※그린피스는 한국이 점진적 탈핵으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아래는 그린피스가 제시하는 해결책입니다.


탈핵으로 가는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원자력발전소의 신규건설을 중단하고 점진적으로 현존하는 원자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면서 재생가능한 에너지와 효율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원자력발전의 에너지 공급은 이미 전지구적으로 5.7%밖에 되지 않으며 점점 더 감소하고 있습니다. 반면 재생가능에너지는 12.3%에 이르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2012년 기준)

재생가능에너지, 에너지 효율 그리고 친환경적인 신기술들은 이미 존재합니다. 세계는 이미 재생가능에너지의 시장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으며 산업, 경제 및 고용부문에서 엄청난 이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미 선진적인 기술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재생가능에너지 잠재력 또한 매우 탁월합니다.

그린피스는 한국이 2030년, 멀게는 2050년까지 탈핵을 이루고 청정하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여러분이 함께 요구할 때 더욱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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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일간지가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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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역일간신문이 해온 가장 '뻘짓' 중 하나는 서울지역일간신문(소위 중앙지 또는 전국지)을 흉내내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서울지와 비슷해보여야 촌스럽지 않고 '뽀대'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중앙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스스로를 '지방지'라 비하해온 지역신문 종사자들의 심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선 기자 시절 들었던 가장 당혹스러웠던 덕담(?)은 '지방지에 있을 기자가 아닌데…'라는 말이었다. 나름 지역에 애정을 갖고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제역할을 해보고자 하는 내겐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상대는 선의에서 하는 말이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독자가 아니라 취재원의 관심이 중요했다


각설하고, 어쨌든 그러다보니 전국지와는 차별되는 지역신문만의 특화된 지면 구성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지도 못했고, 지역지만이 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공론장 역할도 하지 못했다. 기자들은 정치인이나 단체장, 기관장, 출입처 공무원, 기업체 홍보담당자들, 시민단체 또는 문화예술단체 간부 등 이른바 '취재원'들과 관계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되는 걸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기삿거리가 될 정보를 놓치지 않고 낙종의 위험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취재원과 네트워크가 잘 되어있는 기자'가 곧 유능한 기자로 통했다.


그러나 이 또한 전국지 방식이었다. 기자의 네트워크엔 독자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은 그 지역의 독자들이 지역신문 지면에서 어떤 콘텐츠를, 어떤 정보를, 어떤 스토리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과거부터 내려오는 '기사 밸류(가치)'에 대한 관성이 뭘 취재하고 뭘 크게 편집할지 유일한 기준이었을뿐이다. 이 기준은 옛날부터 취재 일선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고참기자와 데스크(부장급)들이 자신들도 과거 선배들에게 배운 감각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역신문은 지역공동체의 소통망이 되어야 하건만...


이는 한국의 지역신문이 오랜 군부독재 치하에서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왔고, 권력의 눈밖에 나지만 않으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지역신문은 '먹고 살만' 했다. 특히 전두환 일당의 언론통폐합으로 1개 시·도에 1개 신문만 남게 된 이른바 '1도 1사' 시절은 더 그랬다. 해당지역에서 경쟁이 없으니 정부와 지방행정기관, 기업, 대학 등 광고를 줄 주 있는 출입처 관계자들과 잘 지내기만 하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의 관심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신문에 실리는 기사는 출입처 중심, 공급자 위주로 지면을 장식했고, 그 틀과 체계, 구성, 편집은 철저히 '중앙지 흉내내기'였다.


6월항쟁 이후에도 관성대로 만든 지면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신문사 설립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전국에서 우후죽순 지역신문이 창간되었다. 이제 경쟁 체제가 다시 형성되었으니 당연히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을 방책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 창간한 신문사들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있었던 '1도 1사' 시절의 그 신문, 이른바 '춘추사'라는 신문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뿐이었다. 그렇게 숟가락을 얹어 기존 신문이 독점하고 있던 광고주 또는 지방행정기관이 던져줄 당근을 나눠먹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교차로> <벼룩시장> 등 생활정보지들이 창간하면서 10만 원 이하 생활광고 시작을 공략하기 시작했지만, 지역일간지들은 그 시장을 우습게 봤다. '저게 신문이야? 저러다 곧 망하겠지'라고 방심하다가 저가 광고 시장마저 생활정보지에 선점당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지역신문의 지면에는 지역시민들의 삶을 담아내는 기사 대신 기자들의 '출입처'에서 나오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그나마 '출입처'를 벗어난 기사라 해도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집회 또는 기자회견 기사 정도였다. 


그렇게 지역신문은 독자들의 생활과 점점 유리되어 갔고, 지역주민들 또한 지역신문에서 멀어져 갔다.

(여기까진 1990년부터 기자노릇을 해온 내 경험을 바탕으로 거칠게 정리한 것이다. 반론이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댓글 주시기 바란다.)


시민 속에서 나온 기사, 시민의 삶을 담아낸 기사로


그러나 유럽의 지역신문들은 달랐다. 거긴 가판대에서 신문의 90% 이상이 소비된다. 한국처럼 집에서 배달받아 보는 정기구독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신문은 가판대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철저히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으로서 신문을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입처'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기사를 그들은 고민했고, 그 결과 유럽 신문에는 시민들의 시시콜콜한 모임이나 행사가 수십 건씩 실린다. 한국 지역신문의 '게시판'이나 '사람' '인물'란에 실리는 기사들과 비슷한듯 하지만 다르다. 한국은 거기 실리는 기사들조차 대부분 기관, 단체, 학교 등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이지만, 유럽은 진짜 시민들 속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기자 인력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어떻게 시민들의 시시콜콜한 계모임까지 취재해 보도하는 게 가능할까? 그 의문은 프랑스 남서부지역에서 발행되는 <수드 우에스트>라는 신문사에서 풀렸다. 신문사에 소속된 기자는 280명이지만, 1050명의 지역통신원(시민기자)들이 자기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신문사에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에스트 프랑스의 지면. @김주완

수드 우에스트의 지면. @김주완


이들은 한국의 시민기자들처럼 직업기자들이 쓴 기사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주변의 친구들이나 이웃의 행사, 모임을 알리는 식으로 글과 사진을 보낸다. 덕분에 지면에 실리는 기사는 행정기관이나 정치권, 기업에서 나오는 것보다 시민의 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 많다.


그야말로 지역밀착, 시민밀착, 생활밀착이다. 지역신문이 지역공동체의 공론장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우에스트 프랑스의 부음 광고. @김주완


유럽 신문의 광고면도 말 그대로 생활밀착이었다. <경남도민일보>의 '자유로운 광고' 또는 생활정보지의 줄광고와 비슷한 시민들의 개인광고가 무려 6개 지면에 걸쳐 실려있었다. 내용은 주로 애인 구함, 미팅 제안, 모임, 결혼 70주년 알림, 감사, 축하, 생일, 부음, 애견 판매 등이었다. 사진과 함께 10×7cm 정도 크기로 실린 결혼 70주년 알림 광고의 경우 100유로, 그보다 좀 작은 광고는 40유로(5만 4000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이런 광고가 지역신문에 안착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문이 지역주민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지역신문에도 이것만 안착하면 재정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수드 우에스트의 개인광고 지면. 애인 구함, 애견 분양, 결혼 70주년 축하 등 @김주완


설이 길어졌다. 그러면 어찌하면 될까? 우리도 유럽 신문들처럼 하면 독자에게 사랑받는 신문이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다. '동네사람'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그 사람 그 후'... 이런 코너를 만들어 평범한 시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계속하여 취재 보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또한 기존의 '기고'나 '독자투고'처럼 논리를 갖춰 써야 하는 코너와 달리 생활 주변의 자잘한 경조사나 축하, 격려, 칭찬할만한 일을 간단히 스마트폰 사진과 함께 메시지 형식으로 보내주면 1면에 싣는 '함께 축하(기뻐)해주세요' 코너도 운영해봤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광고 또한 생활밀착광고 안착을 위해 최소 1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형편대로만 내면 실을 수 있는 '자유로운 광고'란도 운영하고 있고, 개인사업자들을 위한 '자영업자 광고'란도 있다.


'자유로운 광고'란은 민간 시민사회단체나 개인의 행사 알림 및 의견광고로 정착하여 매일 2개 면에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유럽의 신문들처럼 장례식 알림 광고나 결혼 00주년, 애견 분양, 애인 구함 같은 다양한 생활광고, 개인광고는 정착되지 않고 있다. '함께 축하해주세요' 지면도 1년 넘게 그럭저럭 유지되다가 독자의 관심과 참여가 저조해 결국 지면에서 사라졌다. 


또한 제주도의 일간지(한라일보, 제민일보, 제주일보)에 정착되어 있는 결혼 알림 광고, 남해군 지역주간지(남해신문, 남해시대)에 정착된 각종 축하광고도 우리에겐 잘 안 된다.


<수드 우에스트>처럼 생활 주변의 소소한 소식을 전해줄 시민통신원 제도도 아직 요원하다. 이걸 어떻게 우리에게도 성공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이 글을 보신 분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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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탐방대로 한 뼘 더 자란 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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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이야기탐방대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을 맡고 있답니다.

 

'경남·부산 스토리 랩'의 일부로 올해는 합천 남명 조식 관련 유적과 의령·창녕 의병장 곽재우 유적, 남해 손으로 빚는 막걸리를 찾고 그 결과를 글·그림·사진으로 내놓는 일을 했답니다.

 

경남이야기탐방대는 청소년·블로거·예술인 셋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청소년은 탐방 주제 셋 가운데 막걸리를 빼는 대신 통영-통제영과 통영 예술·예술인을 잡았습니다. 합천은 8월 24일 찾았고 통영은 9월 14일 찾았으며 의령에서 곽재우를 만난 날은 11월 2일이었습니다.

 

통영 통제영 십이공방의 잉번청에서 옛날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

 

합천에서 만난 남명 조식 선생을 아이들은 바로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잘 몰랐지만 모른다고 하면 쪽팔릴까봐 그냥 듣고만 있었다. 검색해 읽어보니 영남학파 거장 퇴계 이황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대단한 인물인데 교과서에서 본 기억이 없다.

 

퇴계 이황은 교과서에서 자주 뵙고 천원 지폐에서도 많이 봐서 친숙하다. 왜 같은 영남학파 거장인데도 조식 선생은 잘 볼 수 없는 것일까? 조식 선생은 합천에서 제자 육성에 평생을 힘쓰셔서 그런 것 같다."(범용원·경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2학년)

 

남명 조식 생가터가 있는 합천 삼가 외토마을 들머리 느티나무 아래서 마을 이봉영 어른을 만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남을 대표하고 우리나라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단한 선비임을 알아가면서 아이들은 자기들을 포함해 지역 청소년 대부분이 알지 못한다는 데 대해 어이없어했답니다.

 

퇴계 이황은 대부분 알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남명 조식은 이토록 모를 수 있다니 그게 오히려 신기한 노릇으로 여겨지더라는 얘기입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지요. 왜 나오지 않을까요? 남명의 가문은 퇴계보다 못했습니다.

 

퇴계도 남명도 제자가 많았지만 벼슬을 하고 권력을 누린 이는 퇴계 쪽이 많았습니다. 제자들은 남명 가르침대로 실천을 중시했기에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많이 일으켰고요, 그 끝이 벼슬살이와 영화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용암서원 들머리 남명 식 흉상과 선생의 글을 새긴 빗돌 앞에서.

 

결정적으로는 광해군 때 영의정까지 했던,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합천 으뜸 의병장이었던 남명 수제자 정인홍이 인조반정을 맞아 처형당하는 사건이 있었지요. 이후 중앙 정계에서는 남명 제자들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탐방대에게는 남명 제자들의 의병장 활동이 뜻깊게 여겨진 모양이었습니다. "실제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수많은 인물들이 그의 제자였으며, 당대 비교됐던 학자는 퇴계 이황 선생이다.

 

이황은 이론을 중시한 반면, 조식은 실천을 중시했다.…이론을 안다고 삶이 더 윤택해질까? 실천하지 않는 삶은 빈껍데기 삶이 아닐까."(정다현·경해여자고등학교 1학년) "

 

남명의 교육철학은 제자를 가르쳤던 서당 뇌룡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뇌룡은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꼭 나서야 할 때 나서라는 말인 것 같다.

 

이런 가르침을 매일 듣고 보고 느낀 제자라면 임진왜란 때 어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가만히 있다가 꼭 나서야 할 때 나서라는 그런 교육 정말 멋있다."(범용원)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과 그 오른쪽 정미의병장순국기념비를 살펴보는 모습. 남명 실천 정신이 1900년대까지 이어졌음을 일러주는 지표라 합니다.

 

아이들은 생각을 현재로까지 뻗쳤습니다. "지금 사회를 남명 조식 선생이 보면 어떻게 행동하실까? 저명한 시민단체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않으실까 싶다.

 

윤리 선생님이 되어 학교에서 올바른 사상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청와대 홈페이지에 명종에게 올렸던 상소(을미사직소)와 비슷한 내용을 쓰지 않으셨을까? 아무튼, 진정성이 결핍된 지금, 남명 조식 선생의 교육이 진심으로 절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박주희·경해여자고등학교 1학년)

 

통영옻칠미술관 작업실을 찾은 아이들이 김성실 부관장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9월 14일 찾은 통영에서는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어했습니다. 통제영에서 세병관 엄청난 크기에 압도되고 십이공방 체험에 빠졌으며 우리나라와 경남에 고유한 옻칠을 품은 통영옻칠미술관은 물론 시간이 모자라 제대로 못 본 박경리기념관에서도 청소년탐방대는 즐거웠습니다.

 

 

정은희(18·고졸 검정고시 합격) 친구는 서울에 뇌물로 보낼 장롱을 만들라는 주문을 통제영 고위 관리로부터 받은 십이공방 장인들이,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장인정신과 다시는 뇌물을 만들라 하지 못하도록 허투루 만들어야 한다는 정의로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콩트를 썼습니다.

 

또 주희는, 이야기탐방대 취지에 잘 어울리는 내용을 원고에 적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통제영 십이공방과 세병관, 옻칠미술품이 일으키는 감흥과 일제강점기 소설가 박경리의 어린 시절 따위를 한 꾸러미로 엮어내는 솜씨를 보였습니다.

 

나전장 인간문화재 송방웅 어른과 더불어 나전 만드는 체험도 했습니다.

 

11월 2일 의령과 창녕에서 망우당 곽재우를 찾았을 때 친구들은 한층 깊어져 있었습니다. 현고수 등 곽재우 유물을 바라보면서 그이 스승 남명 조식도 함께 떠올렸습니다.

 

용원은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만들고 좋은 제자는 스승을 빛내는 것 같다. 제자는 꽃이고 스승은 뿌리인 셈이다. 뿌리가 좋다 한들 꽃이 피지 못하면 잊혀질 것이다. 나는 그 꽃을 피워내지 못하는 존재이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글로 표현해 냈습니다.

 

곽재우 생가 앞 세간리은행나무에 들러붙은 아이들.

 

은희는 곽재우 탐방에서 보고 배운 바가 많다면서 이야기를 무려 네 꼭지나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아닌 정치적으로 봤을 때 곽재우의 위치'. "망우당 곽재우가 왜 정치에는 전쟁 때만큼 활약하지 못하셨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남명에서 망우당까지-그들의 사상'. "망우당과 남명 선생은 사제지간으로 사상이 같았잖아요. 그 사상 그대로 현대에 오면 어떨까요?"

 

곽재우가 늘그막에 살다 세상을 떠난 창녕 망우당.

 

'망우정의 도인 곽재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친구가 찾아와 망우당이 은거하는 까닭을 찾는 내용이에요." '개성 만점! 청춘들의 즉석 토론!-전쟁과 의병'. "학생들이 남북 사이 전쟁 발발 상황을 두고 옛날 의병과 연관시켜 여러 가지 즉석 토론을 해요."

 

주희는 곽재우가 의병을 모으려고 북을 내걸었던 나무 현고수(懸鼓樹)가 돼서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를 들여다봤습니다.

 

현고수.

 

"한사코 벼슬을 거부하다 결국 귀양을 갔노라고. 지금 돌아와 조그만 망우정 짓고 조용히 산다고. 나도 모르게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을 버리고 오롯이 신의를 지키며 본인 뜻대로 굳건히 살아가는 사내. 이런 사내를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다."

 

주희가 세간마을 정자에 있는 북을 신나게 치고 있습니다.

 

청소년탐방대는 이렇듯 지역을 찾아 인물과 역사를 더듬고 돌아와서는 글쓰기를 통해 생각도 정리해 봤습니다. 이를 통해 경남이 품은 여러 이야깃거리를 더 풍성하게 알고 또 더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더불어 생각을 펼치거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도 세어지고 자신감까지 덤으로 얻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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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기자는 자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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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제 썼던 '지역일간지가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 강조하고 싶었든 것은 시민 속에서 나오는 기사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출입처'에서 나오는 기사는 정보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출입처 기사'라 하더라도 독자들에게 중요한 정보가 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독자가 관심있어 하고 흥미롭게 읽을 출입처 기사도 분명 있다.


문제는 기자가 출입처를 벗어나 평범한 시민이나 독자들과 만나지 않으면 해당 출입처의 논리와 관심사에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출입처나 기자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취재기자들은 아침에 아예 출근을 출입처로 한다. 거기서 취재를 마치면 회사(편집국)에 들어와 마감하고 퇴근한다. 하루 종일 출입처 관계자들과 동료 기자들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출입처 밖의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한 피드백도 출입처 관계자로부터 받게 된다. 출입처의 반응이 크고 피드백이 많으면 '내가 비중있는 기사를 썼구나' 하고 흐뭇해한다. 물론 출입처 관계자도 독자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이해관계인'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해관계인과 일반 독자의 관심이 같을 순 없다. 그렇게 출입처 사람과 동료 기자들만 만나다 보면 날이 갈수록 일반 독자의 관심과는 괴리될 수밖에 없다. 


기사는 출입처 뿐 아니라 시민 속에서 나와야 한다. 시민의 아픔과 슬픔, 분노와 요구, 그리고 미담과 화제, 즐거움과 행복이 담겨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출입처를 벗어나 일반 독자, 일반 시민을 만날 수 있을까?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신문을 들이대며 '무슨 기사에 제일 관심이 갑니까?'라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럴 때 나는 1차적으로 가족을 활용하라고 말한다. 아침에 신문이 배달되어 오면 아버지든, 어머니든, 아내든, 남편이든 가족에게 신문을 주고 그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떤 기사에 눈이 멈추는 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신문을 구독해야 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내가 만드는 신문, 내 기사가 실리는 신문 한 부를 내 돈 내고 구독할 애정조차 없다면 기자로서 자격이 없다. 월급받고 일하면서 한 달 구독료 1만 원이 아까운가? 그 정도 내 직장에 대한 애정조차 없다면 직장인으로서 자격도 없다.


두 번째로는 자신이 쓴 기사에 달린 댓글에 성실히 답하라는 것이다. 지적에는 겸손하게 인정하거나 설명하고, 칭찬에는 '감사합니다' 한 줄이라도 달아야 한다. 별 의미 없는 댓글에도 '관심 고맙습니다' 정도는 달아줘라. 그러면 그 독자는 기자의 우군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심지어 페이스북에 자기 기사에 대한 피드백이 올라와도 답변은 커녕 모른체하는 기자들도 있다. 마치 그런 댓글에 초연한 게 멋있어 보일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그렇게 기자생활하려면 왜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혼자 초연하게 깊은 산속에서 도사나 하시지.


세 번째로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를 활용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그날 자신이 쓴 기사를 간단한 코멘트(취재 배경 설명 등)와 함께 링크하고 페북 친구들의 반응과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내 기사를 내가 링크하려니까 민망하다'는 기자들도 가끔 있는데, 자기가 쓴 기사에 자신이 있다면 친구에게 읽어보라고 당당히 권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자기 직업, 자기가 하는 일에 그만한 자신감이나 자부심도 없이 기자질은 왜 하나?


어차피 페북에서 맺은 친구들은 내 직업이 기자라는 걸 알고 맺은 것 아닌가? 기자가 기사를 큐레이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SNS 친구들과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라


그 다음 네 번째 차례는 SNS에서 맺은 친구들과 오프라인 독자 커뮤니티를 형성해보는 것이다. SNS 친구와 예전부터 오프라인에서 알던 친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오프라인 친구들은 지연이나 혈연, 그리고 직장 일로 맺어진 사이다. 그러나 SNS에서 새롭게 맺은 친구들은 나와는 전혀 이질적인 일을 하거나 연령층도 모두 다르다. SNS라는 도구가 없었더라면 평생 죽을 때까지 만날 기회가 없었을 사람들도 많다. 그런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SNS가 만들어 준 것이다.


그런 독자 커뮤니티를 통해 기자로서 나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들을 통해 내가 쓰는 기사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면 기자로서 그만큼 뿌듯한 일이 있을까? 그들의 반응과 그들이 주는 피드백을 바탕으로 출입처를 벗어나 새로운 독자의 시선과 시각으로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면 나의 발전과 회사의 발전에도 더없이 좋은 일 아닌가?


지역신문이 그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모든 기자들이 이런 독자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신문이나 기자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그것도 아주 친밀한 관계로 있으며, 언제든지 내가 손을 내밀면 잡아줄 존재가 지역신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각종 제보나 아이템도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이런 게 기삿거리가 될까'라고 생각만 하지 않고, 바로 가까이에 있는 기자에게 물어보고 제보하고 불편을 호소하고, 그게 신문에 기사가 되어 실리고 그건 순환구조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도 귀찮고 싫다.' '그냥 예전에 해왔던 대로 출입처에 안주하여 홍보관계자들 대접이나 받으며 편하게 기자생활하겠다'면 그냥 나가서 1인미디어나 해라. 당신은 회사 발전과 언론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될 인간이니까.


경남도민일보 '독자와 기자의 만남'이 중요한 이유


권범철 기자가 만든 웹 포스터.


이번에 경남도민일보 편집국(국장 이수경)이 아주 의미있는 행사를 하나 계획했다. '제1회 독자와 기자의 만남'이 그것이다. 취지문을 한 번 읽어보자.


'이 기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걸까?' '지면에는 차마 담지 못한 뒷얘기가 궁금하네.'


경남도민일보 지면을 보면서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때로는 '기사 이 따위로밖에 못 쓰나'라는 답답함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경남도민일보가 '제1회 독자와 기자의 만남' 시간을 마련합니다. 기자와 직접 만나 올 한 해 동안 보도됐던 기사, 지역 현안, 취재 뒷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만날 기자는 7명입니다. 독자는 선착순 20명만 신청받습니다. 맛있는 커피와 다과, 기념품도 있으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사람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친해진다.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은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는 게 아니라 친하려고 말한다"고 한다. 친해지고 나면 소통과 교감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독자와 기자가 자연스레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늘상 소통하고 교감하는 신문사라면 지역에서 성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이번 행사 한 번으로 경남도민일보가 바로 그런 신문사가 될 수는 없다. 기자 한 명 한 명이 앞서 말한 그런 독자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런 공식적인 만남 행사도 1회, 2회, 3회를 거듭하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1회 행사에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다. 독자님들의 성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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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히는 입장에서 찍는 사람들을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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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2시 우리 신문사 주최 경남 어린이 글쓰기 큰 잔치 우수작 시상식이 있었다. 경남도민일보는 2000년부터 어린이 글쓰기와 청소년 글쓰기 큰 잔치를 해오고 있다.


시상과 심사평, 격려사를 모두 마치고 수상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순서가 왔다.


그런데 수상자들의 숫자가 좀 많았다. 단상 위 아래에 수상자들이 몇 겹으로 서고, 앞쪽 책걸상을 뒤로 밀었다.


단체 사진을 우리 박일호 사진기자가 찍으려는데, 학부모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찍기 경쟁을 벌였다.



나도 사장을 대신해 상장을 전달한 입장에서 수상자들과 함께 사진이 찍히는 대열에 서 있었는데,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다.



순간 거꾸로 사진 찍히는 쪽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해봐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찍은 게 아래 사진이다.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이폰 5S를 꺼내 사진 찍는 학부모들과 박일호 기자의 모습을 찍었다. 어떤가? 재미있는 사진이지 않나? ㅎㅎㅎ


클릭하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그렇게 하여 나와 아이들이 찍힌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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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 출근길에 도로재포장 공사 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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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각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퇴근시간은 적당히 융통성을 부려도 되지만, 출근시간이란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을 뜻한다. 모두가 함께 출근하여 새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는데,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의 업무 분위기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지각을 했다.


오늘(12월 22일) 오전 9시 40분에 택시를 탔다. 우리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평소 같으면 회사까지 5~7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이 날은 이상하게도 마산합포구 해안도로가 막히고 있었다. 한동안 영문을 모른체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택시 기사도 답답해하면서 "여기가 밀릴 곳은 아닌데... 사고가 났나?"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의문은 마산관광호텔을 지나 자유무역지역 정문에 가까워지면서 풀렸다.


엄동설한 추위 속에 도로의 아스콘을 걷어내고, 다시 아스콘 포장을 하는 도로 재포장 공사가 출근시간대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시설도 제대로 없다.


굉장히 위험해보인다.


발주처인 창원시(또는 마산합포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창원시는 왜 연말을 앞둔 동절기에 이 공사를 발주한 것일까?


공사업체는 또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이런 공사를 무리하게 하고 있는 걸까?


안전시설은 제대로 갖춘 걸까? 내가 보기엔 차량들이 공사로 파헤쳐진 도로에 오른쪽 타이어를 걸치고 운행하고 있었다.


안전 펜스도 잘 보이지 않았다. 우선 급한대로 택시 안에서 영상을 찍었다. 영상 속에 나오는 택시 기사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기 바란다. 이런 공사에 대한 일반의 생각이 다들 그럴 것이다.



결국 이 공사로 인해 평소 4000원 정도이던 택시요금이 6500원으로 2500원이나 많이 나왔다. 또 회사에는 10분 정도 지각을 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이곳을 지난 수많은 사람들이 추가로 시간비용과 금전비용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마산합포구 산호동 쯤에서 보도블럭 교체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엄동설한에 토목공사를 하면 아무래도 부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한겨울에 이런 공사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예산을 써버리기 위한 목적이 아닐까 싶다.


혹 이글을 보는 분들 중에서도 이런 도로 재포장 공사나 보도블럭 교체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걸 보셨다면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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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통영 도남식당을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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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아이가 밥을 먹고 나오더니 말했습니다. "선생님, 행복해요! 너무너무 행복해요!!" 아주 몸을 아래위로 흔들어 대면서 말입니다. 그래, 제가 물었겠지요. "왜?" "점심 밥이 너무너무 맛있어요. 멸치무침도 맛있고요, 반찬도 깔끔하고요, 찌개도 맛있었어요! "

 

아이 얼굴에서는 웃음이 가실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경남도교육청 지원을 받아 지역 역사와 문화를 수능 시험을 마친 지역 고3 학생들에게 알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하는데요, 나라 사랑의 핵심은 지역 사랑이고 지역 사랑은 지역을 제대로 아는 데서 출발한다는 취지입니다.

 

12월 19일 사천 경남자영고등학교 아이들과 더불어 통영 통제영을 아주 재미나게 둘러본 다음 점심을 먹으러 들른 도남식당에서였습니다. 저도 그날 도남식당 음식과 주인장 마음씀에 내심 적지 않게 감탄을 한 터여서 곧바로 아이 손을 잡고 끌었습니다.

 

점심이 맛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면서 팔짝팔짝 뛴 친구는 왼쪽 여학생이랍니다.

 

"그래? 그렇지! 그러면 여기 서서 사진 한 장 찍자!" 그러면서 금방 밥을 먹고 나오는 한 아이도 불러세워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왜요?" "너희들 점심 맛나게 잘 먹었지?" "예!" "고마워서, 도남식당 홍보하는 데 좀 쓰려고 그런다." "아! 알았어요!" 둘은 아주 적극적으로 이렇게 자리를 옮겨가며 찍혀줬습니다.

 

도남식당, 먼저 음식이 푸짐했습니다. 버무린 양념이 부담스럽지 않아 반찬도 맛깔스러웠습니다. 해물된장이 찌개로 나왔는데, 바로 전날 다른 밥집에서 먹었던 해물된장이랑 어쩌면 그렇게 대조적일까요? 전날 다른 밥집은 지중해담치 몇 쪽, 바지락 몇 알, 게 반 토막이 전부였는데, 도남식당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빼먹어도 끝이 나지 않았을 정도로 조개들은 푸짐했고요, 게도 그냥 아주 알차고 푸짐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멸치무침은 덤으로 나왔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중심 메뉴로 나온 해물된장을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점심을 먹을 때 이런 칭찬글을 쓸 생각이었으면 그럴 듯한 사진을 찍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이렇게 대충 찍은 교육청 보고용 사진을 얻어 씁니다.

 

밥상에 차려진 크기가 푸짐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맛까지 좋았습니다. 멸치 생살은 무척 부드러웠고 함께 버무려진 무는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좋았으며 식초가 살짝 들어간 양념맛도 퍽 그럴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장면은, 도남식당 주인장이 손수 반찬 가득한 양푼이랑 멸치무침 듬뿍 담긴 양푼 둘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뭐라 하지 않아도 해당 접시가 빌 때마다 몸소 팔집게를 들어 반찬이랑 멸치무침을 아낌없이 담아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인장 얼굴은 은근한 웃음이 물려 있었고요.

 

이렇게 푸짐하고 맛이 있으니 아이들은 신이 날 수밖에요. 게다가 나이 열여덟 열아홉 그야말로 피끓는 청춘이다 보니 반찬 따위 맛이 없어도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기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기보다 쉬운 노릇일 텐데, 반찬까지 좋으니 따로 더 말할 나위가 있었겠습니까!

 

오른쪽 남학생은 모든 프로그램에 그지없이 능동적이었답니다.

 

모두 서른여덟 사람이었는데, 원래 주어진 하나씩 말고 더 들어간 밥이 마흔 그릇을 넘었는데 추가 밥값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저랑 마주보이는 자리에 앉은 아이는, 여학생이었는데, 비운 밥그릇이 옆으로 넷이나 놓여 있었답니다.(그러니 몇몇 폭식족 남학생 얘기는 보탤 필요조차 없는 것입지요)

 

둘이서든 혼자서든 통영 가서는 종종 들러 맛있게 먹곤 하는 밥집이 바로 도남식당입니다만, 저는 이날 단체로 점심을 먹으며 도남식당과 그 주인장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밥집은 반찬 더 달라면 젓가락을 발발 떨면서 가리고 재는데, 도남식당 주인장은 요구하기도 전에 듬뿍 집어줬습니다.

 

박경리기념관 박경리 선생 무덤 앞에서.

 

도남식당과 그 주인장 덕분에 아이들 배불리 잘 먹였습니다. 밥먹고 나와 버스를 타고 박경리기념관으로 떠나면서 아이들 얼굴을 보니 다들 한결같이 하나같이 발그레한 얼굴에 만족스런 느긋함과 웃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도남식당과 주인장, 정말 고맙습니다.

 

덧붙임 : 흥정도 가능합니다. 거짓없이 진정으로 대하면 도남식당과 그 주인장도 진정으로 대해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자기 (식당) 찾아주는 손님들한테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하도 고마워서, 점심 밥값으로 2인분을 더 얹어 드리고 나왔습니다.(그래도 우리가 엄청 이득이었지요.)

 

도남식당 전화 055-643-5888.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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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가면 국산 신발 단돈 만원에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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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길거리 짐차에 늘어놓고 파는 신발들도 1만원으로는 사기 어렵습니다. 2만원 3만원이 예사인데다가 신발 밑창 생산지 표시를 보면 대부분 중국산입니다.

 

그런데 함양 상아치과 건물 1층 한 가게에서는 국산 신발만 팔고 있습니다. 그것도 99% 이상이 1만원짜리고, 1% 정도만 2만원짜리입니다.

 

국산 신발과 중국산 신발은 신어보면 차이가 납니다. 어떤 이는 바깥으로 보이는 겉모습에서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얼마 못가 뒤틀리고 튿어지고 하기 일쑤인 중국산과 달리 국산은 이름난 상표가 붙어 있지 않아도 꽤 괜찮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신발 가게를 만나는 즐거움이 함양에 있었습니다. 이런 국산 신발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장만해 내놓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여기 가셔서 주인 아주머니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왼편에 살짝 보이는 이가 주인입니다.

 

어쨌거나저도 내년에 봄이 오시면 신으려고, 가벼운데다 디자인까지 그럴 듯한 단화를 두 켤레 여기서 장만했답니다. 하나는 1만원짜리, 다른 하나는 2만원짜리. 가게 가득 신발이 진열돼 있는데, 구색도 그럴 듯하게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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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탐방대가 만난 남명·곽재우, 집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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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공동으로 주최·주관하는 경남이야기예술인탐방대에 함께한 이는 모두 다섯입니다. 문인으로는 하아무·박래녀 소설가와 손남숙 시인 등 셋이고요 미술 쪽에서 신희경·미란 화가가 동참했습니다.

 

'이야기'와 미술은 어쩌면 궁합도 맞지 않는 색다른 결합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 그 결과물을 보면 그리 잘못은 되지 않았지 싶습니다. 다음에는 성악이나 악기를 하는 음악인과도 함께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두 화가가 내놓은 그림들은, 바라보면 한 마디로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마음을 울리는 무엇이 느껴지거든요. 음악인들도 '경남' '이야기' '탐방'을 하면 마찬가지 감흥이 일어 소리로 그것이 표현되지 않을까요?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은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감흥이 솟고 말씀입니다.

 

남명 생가가 있는 합천 삼가 외토리 들머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정해식 문화해설사 설명을 듣는 얘술인들.

 

이번 탐방에서 문인 셋은 탐방한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임의롭게 오갔습니다. 화가들 그림은 그대로 올리고 문인들 글은 맛뵈기로 부분부분 싣습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나오면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전문을 보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합천 남명 조식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는 어른은 고향의 버팀목 같은 존재다. 지리산 아래 덕산(산청)은 창녕 조씨 집성촌이자 남명 선생의 산천재와 덕천서원, 세심정과 그 노후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덕천서원과 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낮은 담장을 넘나들며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마음을 씻는 샘이라는 세심정 샘가에서 걸레를 빨고, 샘물을 떠다 마시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커다란 포고나무의 굵은 뿌리 아래 아담했던 샘, 샘물은 늘 철철 넘쳐흘러 덕천강으로 스며들었다.

 

집에서는 할머니의 입담을 통해 남명 조식 선생의 기이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풍운조화를 부릴 줄 알았다고도 했고, 세발솥을 걸리며 다녔다고도 한다. 덕산 들입의 고갯길에는 남명 선생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 자랐다는 소나무가 있고, 양당 마을 뒤에는 그 분의 묘가 있다.

 

합천 남명 관련 유적을 탐방한 뒤 신미란님이 그린 그림.

 

이번 이야기 탐방에 참가해 그 자취를 다시 밟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분의 생가지나 외가가 모두 합천군 삼가면에 있었다. 삼가면 외토리 외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젊은 시절 부모를 따라 서울로 김해로 떠나 살다 48세가 되던 해 어머니 시묘살이를 끝내고 삼가현 토동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했다.

 

계부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하고, 제자들이 거처할 장소로 삼았단다. 61세 되던 해 산천재를 지어 덕산으로 옮겨 살기 전까지 13년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다니 등잔 밑이 어두워도 한참 어두웠다."(박래녀 소설가)

 

외토리 용암서원 앞 을묘사직소 새긴 빗돌.

"문득 남명 선생을 온 마음으로 흠모했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젊은 나이임에도 예의가 깍듯했고 부조리하고 부정한 일에 분노했으며 책상물림에서 비롯되는 온갖 공허한 소리와 힘센 자의 이율배반적인 작태를 질타하곤 했다.

 

작은 쓰레기라도 보이면 허리를 굽혔고,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아낌없는 도움과 친절을 베풀었다. 언제부턴가 권력을 받아쓰기하는 재주를 부리더니 낯두꺼운 일을 벌이며 제 욕심을 바락바락 채우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신을 두고 어떤 이는 본디 바탕이라 했고, 어떤 이는 불우한 시절에 겪은 모멸과 원망이 만들어낸 어리석은 결탁으로 보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부르짖던 생활 속의 유교, 실천하는 유교는 간 데 없고 남명을 말하던 입술은 약삭빠른 처세의 창구로 전락한 듯해 지금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

 

……1919년 3·1만세 운동 당시 삼가장터에 무려 3만 명이나 몰려 나와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만세운동이나 의병운동의 뿌리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만약 남명학파가 글로만 쌓는 학문을 했다면 결코 몸으로 행하는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삼가시장 입구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에 이르면 남명 정신을 계승한 이들의 죽음을 무릅쓴 결단과 희생에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손남숙 시인)

 

"남명은 스물다섯에 그동안의 공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6년 전 기묘사화로 칼바람이 불고 숙부가 파직되는 진통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젊은 도학자들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보수 집권세력의 살벌한 독재는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음에 분명하다.

 

합천 남명 관련 유적을 탐방한 뒤 신희경님이 그린 작품. 인걸은 간 디 없고.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합천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렀다. 이 시기에 남명은 그의 진로를 확정 짓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다. 현실정치권 진입을 포기하고 처사(處士)의 힘겹고 고달픈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암울한 시대상과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끝없이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것은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주저앉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 그런 의미에서 합천은 남명의 생애 가운데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남명과 비슷한 시기에 생을 시작했을 외토리 남명로의 느티나무도 그런 남명의 고뇌와 결단을 지켜보지 않았을까."(하아무 소설가)

 

◇의령 의병장 곽재우

 

"기강나루는 낙동강과 남강의 합수지점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군이 왜군에 맞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건너편으로 함안군 대산면과 창녕의 남지철교가 보이는 것이 무시로 깔짝거리는 적군과 대치할 만한 장소인 듯했다.

 

…… 길가에는 곽재우 장군의 전공과 유덕을 기리는 보덕각(報德閣)과 손인갑 장군과 아들 손약해의 충절을 기리는 쌍절각(雙絶閣)이 있었는데 나라의 위급함에 신속히 응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이토록 아련하게 들릴까, 씁쓸하게 곱씹어보기도 했다.

 

…… 유적지는 …… 그것을 이어보면 하나의 지도가 완성된다. 의병이 일어난 지역을 이으면 말 그대로 '곽재우 길'이 생길 것이다. 곽재우는 …… 내륙에서 승전을 이끈 장군이었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벼슬과 명예를 좇지 않고 현실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했다.

 

곽재우가 의병을 모을 때 북을 내걸었다는 현고수 느티나무.

 

…… 난세에는 훌륭한 옛 선인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망우정 볕 바른 마루에 서서 낙동강 푸른 물길을 굽어보았을 장군의 눈빛을 상상하노라니 어디선가 되비추는 마음인 듯 짱짱한 햇빛이 강물을 뒤채어 흔들어대는 듯했다. … 강물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손남숙 시인)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바라보는 기강나루는 쓸쓸하다. 그 곁, 곽재우의 공로와 그의 덕을 기린 불망비(不忘碑)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보덕각에는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강물은, 사람들이란 으레 그러하더라,는 듯 무심히 흐를 뿐이다.

 

망우정. 곽재우가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망우정은 삶의 비의가 진하게 서린 듯하다. 병을 이유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했는데, "고양이를 기르는 건 쥐를 잡기 때문인데,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이유였다. 이에 사헌부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현풍 비슬산에 들어갔다가 이곳 낙동강가에 기거하였다. 이곳에서 패랭이를 삼아 입에 풀칠하고, 나물과 솔잎을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곽재우 장군 최대 승전지이면서 동시에 의령 삼대 부자 전설과도 관련돼 있는 정암(=솥바위).

 

신희경님 작품. 꿈이런가 하노라.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곳 사람들의 묘한 태도다. 의령 사람들은 충의의 고장이라 하고, 의병의 날을 정해 축제를 벌일 정도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호암 이병철이니, 3대 부자니, 삼성·엘지·효성 등 3대 그룹을 배출한 부자의 고장이니 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럴 때마다 쓸쓸한 기강나루와 망우정이 떠올랐다."(하아무 소설가) 

 

◇남해 집막걸리

 

"농촌에 시집오니 어머님은 놉겪이를 위해, 새참으로 늘 농주를 담가 놓고 먹었다. 밀농사 지어 누룩을 띄우고, 동이 두 개를 번갈아가며 농주를 담갔다. 철없는 새댁일 때는 찹쌀로 가마솥에서 쪄낸 고두밥이 맛있어 들며나며 집어 먹다가 '나~는 오데로 무시꼬. 하는 짓을 보모 철딱서니라고는 없으이'라며 어머님 눈총을 받기도 했다.

 

농주 맛에 길든 것은 두 아이 키울 때다. 두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웠는데 어머님은 농주를 마시면 젖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어머님과 대작을 하다 보니 느는 것은 주량이요, 불어나는 것은 살집이었다.

 

남면집에 술상에 앉아 하모니카 부는 할배.

 

……남면집에서 잠깐 나는 주모가 되었다. 홍합 까다가 소주 마시러 왔다는 베레모 할아버지 덕이었다. 하모니카를 불었다. <여섯 시 내 고향>에도 몇 번이나 출연했단다. 옛 노래를 하모니카로 연주하는데 막힘없이 부드러웠다. 젊어 한때 한량이었나 보다. 할아버지라고 했다가 번번이 지적을 받았다. '오빠'라고 정정 보도를 했는데. 그 오빠란 말이 왜 그렇게 안 떨어지는지.

 

……주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벌어먹겠다고 남의 일 다닐 때면 세 아이들이 어미 올 때까지 배를 곯고 기다리다 잠들어 있어 보면 눈물 났다고 진짜 눈물을 흘리셨다. 한 생을 산 사람치고 소설 같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박래녀 소설가)

 

왼쪽 주인 할매랑 얘기 나누는 이가 소설가 박래녀.

 

"남해읍 시장통의 남면집 막걸리 …… 잔술로도 팔아서 읍내 볼일 보러 왔다, 지나가다 생각나 훌쩍 들어오는 단골이 꽤 되는 것 같았다. 한 사발 쭉 들이켜고 가는 술이란 막걸리 본래의 푸근함과도 같아서 누구나 밖을 내다보며 오라고 손짓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할머니 인심도 퍽 좋아 홍합을 다져넣은 부침개와 막걸리 한 사발이면 배가 벌떡 일어날 만했다. 어느 고장에나 있을 법한 흥 많고 말하기 좋아하는 노인이 술자리를 터주어 당신 지난 이야기도 듣고 하모니카로 구성진 옛날 가요도 들었다. 신나는 가락에 다들 손가락 장단을 맞추며 즐거워하였다.

 

요새는 막걸리를 담그는 집이 귀하고 특히나 장사하는 집에서 직접 담근 막걸리를 팔기는 어려운 일이다. 술 담그는 비법을 …… 알려 막걸리집도 전문으로 흥했으면 좋겠다. 볼그레하니 달아오르는 뺨, 희미하게 물러갔다 다시 다가오는 얼굴들 사이에서 막걸리는 이름까지 살갑다.

 

막 걸러내서 막걸리인가, 막 먹을 수 있어서 막걸린가, 막역하게 나누어 먹으라고 막걸린가,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그 옛날 젊디젊고 곱디고운 엄마가 달려드는 파리와 날름거리며 집어 먹는 내 손등을 쫓으려고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꼬두밥에 연신 부채질을 하던 것이 떠오른다.

 

신미란 작품.

 

그때 참 좋았지. 온 집안에 피어오르던 구수한 꼬두밥 냄새, 안방 문을 열면 발효되어 들쩍지근하게 맡아지던 술내, 술 좋아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새삼 그립다."(손남숙 시인)

 

"남면집은 사람 냄새 제대로 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오징어와 홍합 따위의 해물이 넉넉히 들어간 파전도 맛이 있었다. 그중에서 최고는 사람의 맛이었다는 이야기다. 주저앉아 한 잔 하노라면 아는 얼굴이 지나가고 그를 부른다.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아는 동생이 합석한다.

 

그러는 사이 지나가다 잔술 한 잔 꼴딱 마시고 가는 이도 있다. 술은 못 마셔도 옆에 앉아 말참례를 하다 가는 성님도 있다. 주인 할매는 외상이라고 해도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장부에 적어놓지도 않은 외상값을 주는 대로 받고 만다.

 

신희경 작품.

손님이라야 전부 '노땅'들인데, 어쩌다 우리 같은 새파란 것들이 그렇게 허름한 곳에 앉아 있는 게 신기하고 반가운 모양. 하모니카를 꺼내 앙코르까지 받으며 연주를 하고, 묻지도 않은 동네 이야기, 사람 이야기도 술술 풀어낸다.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막걸리의 참맛인 것이다. 남해에 있는 남면집이라는, 앉아 있기에도 서 있기에도 어중간한 목롯집에 가면 박재삼, 변영로, 염상섭, 오상순, 김관식, 이어령도 있고 잘 살펴보면 구석에 이태백도 있다. 그이들이 공평하게 앉아 막걸리잔 기울이고 있다."(하아무 소설가)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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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 비빔국수' 먹으러 함안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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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2015년 1월호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지난 12월 18일 저희로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열렸습니다. '제1회 경남도민일보 독자와 기자의 만남'이었는데요. 기자가 출입처 취재원(뉴스 재료 공급자)만 만나는 데서 벗어나 뉴스를 읽는 독자(수요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첫 공식행사라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이번 만남을 계기로 기자와 독자 간 커뮤니티를 형성해 늘 소통하고 교감한다면 독자에게 사랑받는 신문이 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간 몇 차례 말씀 드렸듯이 저희가 <피플파워>를 내는 이유 또한 거창한 게 아닙니다. 동시대, 같은 나라,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고 이해하고 지내자는 겁니다.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은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말하는 게 아니라 친하려고 말한다"고 하더군요. 알고 친해지면 이해하기 쉽고, 이해하면 소통과 공감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피플파워> 인터뷰는 현안과 이슈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함께 담으려 노력합니다.


피플파워 2015년 1월호 표지.


이번호 표지인물로 소개되는 무용가 장순향 교수는 저와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분이 그간 어떤 계기와 과정을 거쳐 무용가가 되었고, 무용가로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번 인터뷰를 읽기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마산에서 교사로 출발하여 80년대 교사협의회 고승하(현 한국민예총 이사장)·이순일(현 태봉고 교사) 선생과 인연, 전교조 활동, 현직 교사 신분으로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이야기 등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었습니다.


"저 집 아들은 빨갱이다 라고 소문이 나니까, 아버지가 함안경찰서 앞에서 '박정희가 빨갱이지, 우리 아들이 왜 빨갱이냐'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어요. 아버지도 잡혀서 구류 사시고, 그때 제가 사식을 넣어드렸던 생각이 납니다." 이 대목은 제가 지난 2012년 11월 장 교수의 오빠인 장영달 전 국회의원을 인터뷰할 때도 들었던 이야기여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장 전 의원에 따르면 1975년 민주화운동으로 자신이 구속되었을 때의 아픈 사연이었습니다.


함안에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홍해옥 씨는 한국사회에서 변변한 배경이나 인맥 없이 살아가는 서민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팍팍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소박하기만 합니다. 홍 씨는 '소나무집'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 불리는 사랑노래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고 합니다. 그의 사연을 읽으며 인터넷 포털에서 '함안 소나무집'을 검색해봤습니다. 함안읍에서 법수면을 거쳐 의령으로 건너가는 남강(南江) 근처에 있더군요. 꼭 한 번 가서 가오리 비빔국수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름선수로 출발해 평생 체육인으로 살아온 배희욱 경남체육회 사무처장의 인생 이야기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우연한 기회에 수의사가 되었다는 안병수 원장이 이야기하는 직업철학, 사규에서 학력, 성별, 연령에 따른 차별 조항을 모조리 없앤 미래테크 박희천 대표이사의 사연도 읽을 만합니다.


또 생계 때문에 준공무원이라는 오랜 외도에서 다시 시인으로 돌아온 강신형, 열 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민간인학살로 잃고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살아온 강진상, 허리 디스크 덕분에 종교인의 길로 들어선 권재도 목사 등 다양한 분들의 인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이 연재하는 '도시와 스토리텔링'이 슬슬 본론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김 소장은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도시 스토리텔링이 마케팅의 수단, 즉 돈벌이를 위한 하위 개념으로 전락했으며, 돈벌이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마케팅의 울타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체성과 공동체 회복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부디 2015년은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공동체 의식이 살아나는 원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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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들이 만난 조식 곽재우 집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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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수행한 경남이야기탐방대에는 블로거들도 함께했습니다.

 

모두 여섯 사람이 함께한 블로거탐방대는 예술가탐방대와 마찬가지로 의령 의병장 곽재우 유적과 합천 남명 조식 관련 유적 그리고 남해 두 군데 집막걸리를 둘러봤습니다.

 

블로거들은 자기 성향에 따라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나름 새로운 관점, 또는 그와 관련된 자기 생각이나 추억을 끌어내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옳음과 그름도 없고 잘함과 못함도 없고 나음과 모자람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스토리텔링을 위해 활용한다면 이런 사실들이나 관점들 또는 생각·추억들에서 그에 걸맞은 상상력이나 감수성을 풀어낼 수 있으면 족하지 싶은 것입니다. 블로거들의 글은 경남도민일보 인터넷신문 '경남이야기탐방대' 배너에서 모두 볼 수 있고요, 여기는 그 부분부분을 옮겼습니다.

 

◇합천 남명 조식 관련 유적

 

아내를 (김해에) 두고 합천으로 돌아온 조식 선생의 의식주 해결이 궁금해집니다. 그의 나이는 아직 48세입니다. 아내를 두고 여자를 얻었으니 재혼이 아니라 첩을 두는 것이지요. 상대는 스물여덟의 처자였답니다.

 

용암서원 묘정비를 둘러보는 모습. 묘정은 사당(廟) 마당(庭)에 세운 빗돌로 그 사당의 내력을 적어두고 있답니다.

 

얼마 전 혼외 자식을 뒀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이 그만둔 일도 있었지요. 아무리 청렴결백해도 성추문에 휩싸이면 개망신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유독 남녀문제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심하게 엄격해졌습니다.

 

조식 선생은 첩을 두어 얻은 자식이 둘인데 그 자식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흔히들 자식에 대한 부모 마음을 천륜이라고 그러잖습니까.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들 삶을 더듬어보면 그게 꼭 천륜인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세가들이 첩을 두는 그런 경우야 허다하지만 평범한 벼슬아치들도 생계형 첩을 두었다고 합니다. 전국을 떠다니며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가족들이 움직이기는 불가능하기에 수발을 드는 몸종이 따라붙었습니다. 여기서 수발은 의식주는 물론 잠자리까지 포함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거기서 생겨나는 자식들인데 아버지가 거두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거지요. 어머니 신분과 마찬가지로 천했고 아버지는 그야말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로 치자면 천륜은 당연히 아버지의 몫인데 말입니다.

 

… 본처에서 난 자식만 천륜이라 여겼는데 이를 보면 인간만큼 이기적인 존재가 또 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지요. 조식 선생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 추앙을 받는 그를 지금 관점으로 보면 어떤 평판을 받을까요? 아마 그의 높은 학식과 덕망은 비도덕적이라는 비난 속에 묻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선과 악에서 절대적인 것이 있고 상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학대는 시대 장소 구분없이 절대악입니다. 여자 남자 문제만큼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처다부제가 있는가 하면 에스키모인 사이에는 손님에게 아내를 내어주는 풍습도 있으니까요.

 

어떤 시대에 사느냐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이러거나 저러거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훗날 여자들이 남자를 여럿 거느리는 것이 전혀 흉허물이 아닌 세상이 오려나요. 지금 상황을 봐서는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만 같습니다. 옛날 여자들이 재혼을 못했듯이 남자들이 마음대로 재혼 못하는 그런 시절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달그리메, 남명 조식의 평판이 요즘 같았으면 어땠을까?(http://dalgrime.tistory.com/222)

 

옛날 어느 풍수도인이 삼가 토(兎)동을 둘러보니 암토끼가 달에 있는 수토끼를 쳐다보며 누운 형상이라 토끼 배에 터잡은 집에서 1년 내 현자가 나리라 예언했는데 토끼 배 부분에 남명 외가가 있었고 1년 뒤 예언대로 남명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함천 삼가 용암서원에서 남명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바라보는 블로거들.

 

외조부는 친자인 이씨 자손에서 현자가 나기를 바랐는데 하필이면 그때 딸이 친정에서 해산하는 바람에 이씨 기운을 조씨가 앗아간 형국이 되어 못내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쯤 되면 명당과 그 주인공은 인연이 분명히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남명이 현자임은 틀림없으나 그 일생을 되짚어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팔자를 타고 났다고 할 것입니다. …… 넉넉잖은 살림살이에 벼슬도 없는 백수 선비의 삶이란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명당터의 덕을 본 당자는 터 주인인 외할아버지도 아니고 태어난 남명도 아닌 셈인데 그러면 도대체 누가 덕을 봤을까요?

 

재야에서 늘 나랏일을 걱정하고 공직자들 자세를 흩트리지 않도록 긴장시키는 상소문 돌직구를 날려 난세에 그나마 선비정신을 유지하게 하였고, 후학 지도도 잘해서 임진왜란에 50명 넘는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나서 나라를 지켰으니 결국 명당 덕을 본 당자는 나라인 것입니다.

-선비, 명당자리 임자는 따로 있다- 남명조식의 생가 터(http://sunbee.tistory.com/363)

 

뇌룡정-용암서원-남명 생가를 둘러보며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대비를 과부라 하고 임금을 고아라 했으니 얼마나 입바른 소리입니까? 요즘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청문회에 오르는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대통령의 장관직 후보 지명을 사양하면서 "비록 국민의 투표로 당선되었다지만 이는 비명에 간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나이 많은 노인들의 연민 덕분이며 본인은 시집 안 간 노처녀에 불과할 뿐으로……"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선비, 과부와 고아의 정치, 그리고 남명의 선비정신(http://sunbee.tistory.com/362)

 

◇남해 집막걸리 두 군데

 

할매 할배들이 흥겹게 노니는 남해 남면집.

 

남면집 풍경.

 

아흔 넘은 어르신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막걸리 한 사발 꿀꺽꿀꺽 들이켜십니다. 짬날 때마다 와서 이렇게 마시는 막걸리가 꿀맛이라 그러네요. 아흔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색이 좋고 건강해보입니다.

 

'행복이 거창한 게 아니네. 사는 게 참 정말 별 거 아니네.' 어르신들의 편안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들이 스치네요. 막걸리 한 잔 앞에 두고 농사 얘기도 하고 안부도 묻고 세상 얘기도 합니다.

 

남면집 할머니가 파는 것은 막걸리가 아니었네요.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건 외로움이라 그러더라고요. 남면집은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풀어내는 넉넉한 공간이지요. 사람 사는 온기가 있는 따뜻한 곳이지요. 젊은 사람과 어르신들이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소였지요.

-달그리메, 남해에 가면 남면집을 찾아가세요(http://dalgrime.tistory.com/227)

 

남면집 주인 할매 지짐 붙이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 실비단안개.

 

날아가는 까마귀도 내 술 한 잔 먹고 가라시던 울 아버지. 집에는 항상 술이 마르지 않았다. 윗동네에서 술 추러(세무서 직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술을 찾아내는 일) 왔다고 소문난 어느 날, 술항아리에 용수레를 박아 전주(도수가 높은 진짜배기 술)를 빼두었던 엄마는 급해서 돼지먹이통에 쏟았는데, 그걸 먹고 돼지가 죽어 버렸다. 나중에 잡아보니, 창자가 꼬여 있더라는 것.

 

집안에 대소사나 경사가 있으면 꼭 술을 담그는데 그때는 세무서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골이라 누구네에서 어떤 일로 술을 담근다는 걸 모를 리도 없을텐데……. 대량화되어 공장에서 나오는 술이 아닌, 집집마다 맛이 다른 술, 그 술맛을 참 오랜만에 즐겨 본다.

 

찌짐을 찍어먹는 양념장에 좀 더 신경을 쓴 거 같다. 정성이 넘쳐 담아 참기름을 너무 많이 넣었는지 간장은 찍히지 않고 참기름만 찍히네요. 쥔장 할머니는 고소한 참기름에 정성까지 듬뿍 담아 뭐든 많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네 할머니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랄까? 어릴 때 우리 할머니는, 내게 주려고 홍시를 장롱 깊이 감춰 놓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의 상을 치르고 장롱을 정리하다 홍시가 터져 옷이 전부 못쓰게 되었었는데.

 

갑자기 우리 할머니와 쥔장 할머니가 자매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흉년에 업은 자식은 배불러 죽고 엄마는 배곯아 죽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다 그런 세상을 살아온 산 증인들이다.

-박상옥, 남해…… 막걸리가 막 끌리는 집(http://blog.daum.net/098oiu/6153732)

 

남해 설천면 문의마을 양모리학교 가는 길에 있는 집박걸리집에서 맛본 안주들,

◇의령 의병장 곽재우 유적

 

의병 활동을 하면서 곽재우는 그야말로 집안 재산을 홀딱 말아먹게 됩니다. 외가든 본가든 끌어올 수 있는 돈은 다 끌어모읍니다. 의병을 모으는 데 쓰기도 했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노비나 가난한 백성들을 모으면서 그 가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진데 그래도 식구들 배불리 먹는 게 가장으로서 훨씬 더 좋았겠지요. 너무 없으면 사회와 국가나 남을 위해 나설 수도 없다는데,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많아도 나서지 않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싶지요.

 

지금은 전시도 아니고 일제강점기도 아니니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에 비길 수는 없지만 가진 사람들이 온갖 불법과 편법으로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을 한 곽재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블로거들이 곽재우 생가 앞 세간리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내놓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누리는 것도 사회와 국가를 바탕으로 그 속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획득한 것이고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곽재우는 전쟁 후 이리저리 떠돌다 망우정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망우는 우환을 잊는다는 뜻이라 합니다.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사돈의 팔촌까지 그런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살고도 마지막까지 잊고 싶었던 우환은 무엇이었을까요?

 

많이 가진 것이 권력이 되는 세상을 살면서 곽재우의 생을 더듬어 보는 일은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더불어 가진 사람들이 져야 할 의무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더 크고 많다는 것도 거듭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곽재우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살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달그리메, 곽재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다(http://dalgrime.tistory.com/228)

 

첫째,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가장 큰 요인이 이순신 장군의 해전이 아니라 곽재우 장군의 민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 열기가 전국을 달구고 있습니다. 나도 …… 이순신 장군을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유일신쯤으로 알았습니다.

 

의령군 윤재환 선생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패전한 가장 큰 요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을 꼽았습니다. …… <광해군일기>가 '재물을 늘려 몇 만 금이나 되었다. 시골 사람들이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록할 만큼 구두쇠 소리를 듣고 근검절약하며 재산을 모았는데 아마 머지 않은 장래 큰 위난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곽재우 첫 번째 승전이 있었던 기강나루에 세워진 보덕각과 쌍절각. 그리고 블로거들.

 

그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힘은 재산이었습니다. 의병들 가솔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 처음에는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므로 10명 남짓뿐이었으나 5월 4일 기강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보니 이래저래 모여들어 2000이 넘었다고 합니다.

 

전라도로 향하던 왜군은 바다에서 이순신 해군에 막히고, 육지서는 생각도 못한 곽재우 민병에 막히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도 발톱 밑에 작은 가시가 박히면 절룩거리듯이 파죽지세로 나가던 10만 왜군이 곽재우의 민병에 걸려 발걸음이 무겁게 되었습니다.

 

블로거들은 이밖에 성황리 소나무를 비롯해 의령 명품을 몇몇 더 돌아봤답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까지 인정한 조선 으뜸 장수이건만 곽재우 장군은 본인은 물론 인척들 재산까지 나라에 바친 탓에 후손들이 크게 번성 못하고 썩은 조정에 의해 그 공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기에 지금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비, 임진왜란 일본 패인은 이순신보다 곽재우다(http://sunbee.tistory.com/364)

 

곽재우는 평민 신분이 아닌 양반가의 자제입니다. 생각이 바르지 않았더라면 양반댁 자제가 의병을 모집하지 않았을 것이며 활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스승인 조식 선생의 실천사상을 곽재우는 행동으로 옮겼는데, 사람이 살면서 부모 영향을 가장 많이 받지만 스승은 제2의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실비단안개, 정암철교를 걸으면 곽재우 장군이 더 크게 다가온다/정암루, 정암나루, 솥바위(http://blog.daum.net/mylovemay/15534122)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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