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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선생님 하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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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가 공익 실현을 위해 만든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운영을 맡으면서 청소년들과 함께 지역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여름에는 청소년 기자단으로 우리 지역 일곱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사회적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원자력발전(=핵발전)의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와 76만5000볼트 초고압 송전철탑 설립 강행으로 주민들 고통이 극심한 밀양 용회마을 현장을 찾았습니다.

 

또 겨울인 지금은 수능시험을 마친 시점에서 지역 여러 고등학생들과 더불어 경남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11월 24일 김해경원고 학생들의 김해 탐방을 시작으로 15일까지 열다섯 차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앞으로 두 차례 더 탐방을 나갈 예정이랍니다.

 

이렇게 아이들과 더불어 탐방을 하면서 아이들이 선생님 영향을 생각보다 크게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현장에서 보이는 선생님들 태도를 갖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이라도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은 작지 않게 차이가 난답니다.

 

한국수력원자력고리원자력발전소를 찾은 창원 문성고 학생들.

 

이를테면 청소년기자단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사회 현장을 실감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참여한 학생들은 신문·방송에서나 보던 현장을 찾아 구체적인 모습을 보고 듣고 만지는 취재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태도가 좀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어 있어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는 얘기도 저는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76만5000볼트 초고압 전기가 흐르게 될 밀양 용회마을 현장을 찾은 창원 문성고 학생들.

 

지금 진행하는 고장 사랑 지역 역사·문화 탐방을 통해서는 자기가 사는 고장 또는 가까운 이웃 고을의 역사 현장과 문화재를 찾아 그 숨겨진 의미와 가려진 아름다움 따위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기 사는 지역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랍니다. 그래서 같이 돌아다니다 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아이들 소리가 "우와~ 우리 지역에 이렇게 멋진 데도 있었어요?"랍니다.

 

발굴하고 있는 하동읍성을 둘러보는 하동고등학교 학생들.

 

이렇다 보니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헤어질 때는 "고마워요"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또 하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이렇게들 말해주곤 합니다. 물론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정도라면 프로그램이 내용도 나름 알차고 재미도 충분히 있다고 여겨도 무방하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교에서는 스스로 이런 프로그램을 찾아내어 담당 선생님더러 아이들 데리고 다녀오라고 등을 떼밀기도 하는 교장 선생도 있지만 또다른 어떤 학교에서는 담당 선생님이 이런 프로그램을 찾아내어 실행해 보겠노라 보고를 해도 그런 따위는 아이들이 보고 듣고 할 필요가 없다며 학교 울타리를 걸어 잠그는 교장 선생님도 있다고 합니다.

 

박경리기념관에서 도전! 골든벨 문제 풀이를 하고 있는 통영 동원고 학생들.

사람이 다 같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물론 그 반대되는 현상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경험하게 하려는 선생님을 만나면 청소년들은 그에 걸맞게 좋은 몸공부를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을 만나면 그런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그런 기회를 한 번 더 찾아 누리는 것과 누리지 않는 것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보기에는 또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함양 운곡리 은행나무를 찾은 산청 덕산고 아이들.

 

하지만 아이들은 콩나물콩과 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시루에 들어앉은 콩나물콩에게는 그냥 한 번씩 주루룩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 자기한테 필요한 것은 빨아들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이 또 콩나물콩입니다.

 

어쨌거나 올해는 아무래도 세월호 참사 여파가 여전히 크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기회 한 번 더 마련해 주는 것보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학교 선생님들 반응이 많은 경우 그랬답니다.

 

올해는 올해고 내년은 내년입니다. 내년에는 학교 밖에서 진행되는 이런 프로그램에 많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교장 선생님 등 여러 선생님들이 좀더 애를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훤주

 

※ 2014년 12월 16일치 경남도민일보 '데스크칼럼'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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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행 트렌드, 책 들고 시장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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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행 트렌드가 생겨나고 있는 걸까? 이번엔 '시장여행'이다. 최근 출간된 <시장으로 여행가자>(권영란 지음, 도서출판 피플파워)를 들고, 그 책에 소개된 전통시장으로 떠나는 것이다. 책에 나온 가게, 책에 나온 식당, 책에 나온 사람을 찾아 거기서 사고, 먹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책의 독자가 된 최지수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과 사진을 올렸다.


"‪#‎시장으로여행가자‬ 보고 시장으로 여행감 ㅋ 가까운 김해전통시장으로! 외국인들이 많이오는 시장이라 신기방기한 것들이 많았다~ 책에 나오는 칼국수집 가서 칼국수 먹고 황창숙 이모께 싸인받고. ㅋㅋ.

다음엔 어떤 시장으로 가볼까나 ~~."


실제 진주상회를 배경으로 찍은 책속의 진주상회.@최지수진주상회에 진열된 동남아시아 채소와 과일들. @최지수


책을 들고 김해전통시장을 찾은 것이다. 김해에는 외국인노동자와 다문화 가족이 많다. 그래서 김해전통시장의 손님 60%가 외국인이라 한다.


최지수 씨는 책을 들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책에 나온 외국인 전용 채소골목의 진주상회에 갔다.


다음으로 간 곳은 역시 책에 소개된 칼국수 집이다. 김해전통시장의 칼국수는 유명하다. 역시 책과 가게를 함께 찍었다.


책에 소개된 손칼국수 8호점 황창숙 아지매.@최지수황창숙 아지매와 가게. @최지수


맛있는 칼국수를 먹은 것은 물론이다. 황창숙 아지매에게 책을 보여주고 해당 페이지에 사인도 받았다. 이 또한 시장여행의 즐거움과 재미 중 하나다.


김해전통시장의 인기 음식. 손칼국수. @최지수


이런 식의 여행 아이디어는 부산에 살고 있는 미디어활동가 복성경 씨가 제안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책 속 시장을 다녀보고, 그 가게에서 책을 보여 드리고 싸인 받는 행위는 제가 제안했습니다. 책 홍보도 되고... 언론과 시민이 만나는 뭐... 그리고 그 싸인이 모이면 그것도 의미있는 흔적이 될 것 같아서요. ㅎㅎ."


최지수 씨는 "책이 있으니까 책 보고 왔다고 하면 다들 놀라시면서 엄청 잘해주시더라구요. 책 덕을 좀 본 여행이었어요"라고 첫 시장여행 소감을 남겼다.


복성경, 최지수 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부산의 시장 탐방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저희는 인터뷰를 생생하게 담는 형식으로 해보려고요. 진짜 부산이 보이는 '크고 작은 부산 시장' 뭐 이렇게…."


멋진 계획이다.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준 최지수 씨의 모습이다. 김해전통시장 간판 앞에서 포스를 취했다.


@최지수


참, <시장으로 여행가자> 책 표지는 이렇게 생겼다. 이 사진은 거제의 독자 박보근씨가 제공했다. 책을 들고 있는 모델은 박보근 씨의 늦둥이 아들(초등 4)이다.


@박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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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여중 진로 강의 - 글쓰기와 기자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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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 정도 중학생 앞에서 신문기자가 무엇 하는지 등등을 떠들어댄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이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진로 교육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때 강의 준비 차원에서 썼던 원고입니다.

 

물론 이대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이대로 했다면 끝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삼아 중요한 몇몇을 짚어 구체적으로 일러줬습니다. 아울러 학생들 사는 데가 통영인지라 통영의 역사 문화 인물을 실마리로 삼아 이야기를 끄집어내 풀어나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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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통영여자중학교 1학년 여러분!

 

언론이 왜 중요할까요?

 

요즘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막연하게 호기심이나 환상이 있는 친구들이 간혹 보이는데 기자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언론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런 사회를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방송에 뉴스는 없고, 오락 프로그램과 드라마만 있고 신문은 없는 대신 잡지만 있는 세상을 말입니다. 즐겁고 신날 것 같지요? 그런데 아마도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는 온갖 '카더라'라는 말들이 돌아다니고 정치인은 물론 경제인이나 공무원 사회는 온통 부정부패로 가득할 것입니다. 범죄는 또 얼마나 많아질까요? 그런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감시하는 눈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강당에서 이렇게 앉아 강의를 듣는다는 데에 조금은 놀랐더랬습니다.

 

사람들은 짐승과 달리 도덕과 양심이 있기에 그런 도덕이나 양심 덕분에 또는 이성이 있어서 이 세상이 잘 유지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법이고 그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 시선입니다.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봅니다. 물건이 가득 쌓인 마트에 CCTV도 없고, 옆에 사람도 없고 주인도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갖고 나가는 사람이 정말 많겠지요.

 

다른 사람의 눈길을 느끼고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의식이 인간 행동을 훨씬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언론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크고 작은 일을 찾아 세상을 알립니다. 선행은 부추기고 악행은 더이상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지요.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언론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바로 언론이 자신들의 가장 큰 감시자라는 데 있습니다. "종교와 언론이 부패한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언론은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언론을 만들어내는 실핏줄 같은 역할을 바로 기자가 합니다. 각각 분야를 나눠 보도를 담당합니다. 정치부 기자 경제부 기자 문화부 기자 등등 말입니다. 제보를 받거나 중요한 일이 생기면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서 신문이나 방송으로 내보는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기자지요.

 

그런데 시절을 막론하고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훌륭하게 본분에 충실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기자+쓰레기'랍니다. 쓰레기 같은 기사를 쓰는 기자, 또는 기사를 담보로 개인 사리사욕을 차리고 비리를 저지르는 기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또는 소설 같은 데 보면 기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옵니다. 하나는 기자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기자 노릇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사회생활을 하는 데 그냥 직업이 기자일 따름이지요. 이런 경우 기자는 무척 여유롭게 그려집니다. 여러분한테도 기자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직업으로 비치시나요?

 

소설·영화·드라마에 나오는 기자의 또 다른 유형은 어떤 사회 문제 또는 특정 사건을 두고 끈질기게 파고들거나 정확하게 앞뒤 관계를 짚어 문제를 해결해 내거나 세상에 크게 알리는 모습입니다. 가끔 보도를 통하지 않고 직접 당사자가 돼서 문제를 해결하고 알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고 있는 기자 모습과 어쩌면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진짜 기자의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신문들마다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나요?

 

신문사가 여러 개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지요?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그리고 경남도민일보 등등 여러분들은 공부를 하느라 신문을 읽을 시간이 많지 않겠지만 신문을 들여다보면 비슷하기도 하도 다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다루면서 어떤 신문은 좋다 하고 다른 신문은 나쁘다 하고 어떤 신문은 대문짝만하게 싣고 어떤 신문은 콩알만하게 싣기도 하고 그런데 왜 그럴까요?

 

신문사에는 편집국이 있습니다. 편집국의 대표는 편집국장입니다. 편집국장은 신문 만들기와 직접 관련되는 모든 일을 주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편집국에서 권한과 책임이 가장 큰 사람이 편집국장입니다. 편집국장은 취재·보도와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하며 여러 부서 데스크를 지휘·통제합니다. 때로는 일선 기자에게 데스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지시하기도 합니다.

 

편집국장 권한이 큰 만큼 편집국장의 성향에 따라 신문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신문사 사장이 자신의 성향에 맞게 편집국장을 앉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신문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문은 무엇일까요? 반대로 가장 보수적인 신문은요?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것도 좋겠지요~~^^

 

경남도민일보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편집국에는 여러 부서가 있습니다. 시민사회부·자치행정부·문화체육부·논설여론부·뉴미디어사업부, 편집국장이 직할하는 국장석 등이 있습니다. 부서마다 영역이 있는데요, 일선 기자들은 대부분 특정 부서에 소속돼 있으며 부서 이름을 보면 그 취재·보도하는 영역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서를 관장하는 사람을 데스크라고 통칭하는데요, 데스크는 해당 부서 일선 기자들과 끊임없이 협력·논의하면서 무엇을 취재하게 하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주기도 하고 취재하는 기사의 비중을 정해주기도 하고 일선 기자들이 작성해 보낸 기사를 검토·보완하기도 합니다.

 

통영여중 담당 선생님이 찍어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이밖에 편집부도 있습니다. 편집부 데스크와 기자들은 일선 취재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들에 색깔을 칠하고 옷을 입히는 일을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기사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제목을 뽑아 독자의 눈길을 끄는 것입니다.

 

신문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데스크회의를 하는데요, 오전 데스크회의는 어제 보도해 오늘 날짜로 발행한 신문 내용을 점검하면서 오늘은 무엇을 어떻게 취재할지 회의를 합니다. 데스크회의 결과는 곧바로 모든 기자들에게 전달됩니다.

 

전달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자들은 현장을 뛰며 취재를 합니다. 취재한 내용을 데스크나 편집국장에게 보고하고 의논하면서 기사를 작성해 보냅니다. 오후 데스크회의는 오전 데스크회의에서 논의·결정된 대로 얼마나 취재가 됐는지 알아보는 한편으로 작성된 기사를 두고 중요도나 시의성 따위를 따져 내일 날짜 신문 지면을 어떻게 구성할까를 정하게 됩니다.

 

신문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마감 시간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한 기자가 마감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신문 전체를 만들지 못합니다. 기사가 한 꼭지만 들어오지 않아도 편집부에서는 지면 전체를 짤 수가 없습니다.

 

이 기사를 크게 하면 저 기사를 작게 해야 하고 저 기사를 돋보이게 하려면 다른 기사는 그에 걸맞게 죽이기도 해야 하는데 기사가 아예 들어오지 않으면 이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면이 비어 있는 채로 신문을 발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러니까 신문을 만드는 데서는 기자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편집국장 이하 데스크들의 판단력과 통제력 그리고 안목도 중요하고 모든 기자들의 협동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시스템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신문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역할을 나누고 의견을 모아내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문 안에는 세상이 담겨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신문은 차곡차곡 모아두면 그 자체로 우리 지역 또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됩니다. 또 해당 분야 특정 기획 기사는 모아두면 훌륭한 자료집 또는 단행본이 됩니다. 지역 또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생태·풍속 등등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매개가 바로 신문입니다.

 

최근에는 NIE라고 하는 신문활용교육이 학교서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그만큼 신문 안에는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창의력이나 사고력을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자료로 신문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문사는 이렇게 종이나 인터넷으로 신문을 만들어내는 일 말고 다른 일도 합니다. 출판을 병행하기도 하고, 다양한 여러 행사를 주관하고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기행·탐방·체험 같은 프로그램 기획해 지역 학생들이나 주민들과 함께 하기도 합니다.

 

기자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요?

 

이번에는 기자의 일상을 잠시 들여다볼까요? 아침에 가장 먼저 편집국이나 출입처에 나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고 오늘은 무슨 일이 예정돼 있는지 체크해 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출입처나 취재처가 하나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저 같은 경우 시민사회부에 있을 때 창원지법·창원지검·경남경찰청·낙동강유역환경청·민주노총·한국노총·시민단체 등 예닐곱 군데가 출입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때는 점심 먹을 틈조차 없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취재하고 보도 방향을 어떻게 잡아나갈지 구상하고 해당 부서 데스크나 편집국장과 의논하고 같은 부서 선·후배 기자들과도 의견을 나눕니다. 그리고 취재원을 섭외해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 취재합니다.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쓰고 취재·보도를 합니다. 원고지 여섯 장이 안 되는 짧은 기사 하나만 쓸 때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날마다 서너 꼭지, 정말 많을 때는 여덟 꼭지까지 쓴 적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미리 정해져 있는 일도 많지만, 갑자기 터지는 사건·사고도 많습니다. 나라 바깥으로 보자면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원전 사태가 그랬고 나라 안에서는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크지 않더라도 취재·보도 과정에서는 미리 알 수 없는 돌발 사태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던 일 다 미뤄놓고 취재하러 달려나가야 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이렇게 취재·보도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자료가 쌓이게 마련인데, 이를 분류·정리·보관하는 일도 만만찮습니다. 이런 자료 관련 업무는 취재 보도 활동이 많은 낮에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밤이나 아니면 쉬는 날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자들은 밤이나 쉬는 날에도 취재원을 만나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단신 보도 한 차례로 그친다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기획 취재·보도이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사건·사안일 경우는 사전·사후 취재가 필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자는 물 위를 헤엄치는 백조에 견줄 수 있겠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고니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요? 백조, 고니가 사람들 눈에 보이는대로 한가롭고 여유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먼저 몸통이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하고 또 이리저리 움직이기 위해서 물 아래 있는 두 발 갈퀴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해치는 존재가 다가오는지 잘 경계해야 하기도 하고 아울러 먹을거리가 어디에 있는 열심히 살펴서 주린 배도 채워야 합니다.

 

실제로는 아주 힘들고 피곤할 것입니다. 기자도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신문기자가 되면 무엇이 좋을까요?

 

먼저 자기가 쓴 기사가 신문 지면에 실립니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과 사건을 자기가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취재하고 보도함으로써 이를 비판하고 나무라거나 칭찬하거나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보도 활동을 통해서,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관계없이, 범위가 넓거나 좁거나 관계없이, 세상 돌아가는 데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는 보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울러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좀 더 깊이 잘 알 수 있고 세상을 이해하는 정도가 커질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한 가지 일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듣는 과정에서 사물이나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최근 눈과 귀가 많이 쏠렸던 '중고생 9시 등교'를 두고 보자면 학생·학부모·선생님·교육행정당국이 당사자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보자면 학원 같은 사교육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나 학교 근처에서 학생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런저런 사람들도 당사자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같은 학생이나 선생님이라 해도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처지나 관점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가 취재·보도를 하면서 학생만 만나거나 선생님만 만나거나 교육행정당국만 만나거나 하면 해당 당사자들에게 치우치는 결과가 나오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균형도 잡히지 않고 결과적으로 오보를 양산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잘못된 보도를 하지 않으려면 여러 사람들 얘기를 듣고 그 사람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 사회 사람·집단·세력 그리고 그 상관관계를 좀 더 잘 알 수가 있게 되지요.

 

관심이나 취미가 있는 분야를 계속 다룰 수 있습니다

 

기자는 그날그날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취재하고 보도하게 마련인데요, 그렇다고 그것만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기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자기가 관심이 있는 특정 분야를 꾸준하게 공부하고 취재·보도하는 기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넓혀갈 수 있는 것입니다. 환경·생태, 역사, 음악, 미술, 문학, 풍속, 문화재, 종교, 등산, 농업, 노동, 농민, 상공, 교육, 여행 등등 무궁무진합니다.

 

또 이런 것들은 다시 잘게 쪼개어 좀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환경·생태를 보기로 들자면, 습지, 식물, 동물은 물론 생활환경이나 노동환경도 포함이 되고요, 이것 또한 더 작게 나눠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습지는 늪, 하천, 갯벌 이런 식으로 분류가 될 수 있겠고, 이 가운데 말하자면 하천을 골라잡아 다시 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기 분야에서 대학교수나 전공 연구자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전문가가 된 기자들도 많습니다.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되면 기자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자기만의 특징과 장점을 써먹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문가들이 낸 책들보다 훨씬 쉽게 쓴 글이기 때문에   연구만 해온 전공 연구자, 대학생 가르치는 대학교수들보다 좀 더 읽기 좋고 편하게 이해되는 그런 책을 펴낼 개연성이 기자한테 훨씬 더 많은 셈입니다.

 

통영여중 NIE 담당 선생님이 챙겨 보내주신 학생 소감문. 아마도, 좋게 평한 소감문 가운데서도 가장 잘 쓴 글을 보내셨겠지요.

신문기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신문을 꾸준히 구독합니다. 신문을 꾸준히 구독하는 목적은 세상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두루 알고 이해하면서 신문과 친해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기사 보는데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는 것과 신문에서 기사를 읽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물론 간략하게 기사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이 신문에서 글을 읽어내려가는 것과 화면을 통해 글을 보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무엇보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물론 많은 이들이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를 통해 기사를 봅니다. 어느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와 제목을 쿡 누릅니다 그러면 그 기사를 읽기도 전에 온갖 광고와 또 다른 자극적인 기사들이 연이어 들어봅니다.

 

기사를 제대로 읽는 둥 마는 둥 벌써 거기에 달린 다른 기사들을 연이어 쿡쿡 누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은 없나요? 그렇게 해서는 좋은 글을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됩니다. 적어도 기자를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꼭 종이 신문을 정독하시라 권합니다.

 

둘째,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기자는 한자로 적을 기(記), 사람 자(者)자를 씁니다. 적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글을 잘 쓰면 기자 노릇 하기가 그만큼 쉽습니다. 그런데 글쓰기는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과는 크게 달라서, 나름대로 공부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반짝 한두 차례 한다고 글쓰기를 잘할 수는 없고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블로그가 적격입니다. 처음에는 글을 써도 앞뒤도 맞지 않고 분량도 많지 않겠지만 1년 2년 이렇게 꾸준히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어느새 늘 쓰는 솜씨도 늘어나 있고 생각도 깊어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블로그에 어떤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요? 책을 읽고 느낀 바를 써도 되겠고, 생활하는 속에서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봐도 되겠고, 아니면 과외활동을 하고 나서 거기서 든 느낌이나 생각을 써도 좋겠습니다. 교과서든 교과서 밖에서든 자기가 새롭게 알고 깨달음이 있었던 그런 것들을 써도 좋습니다. 일기를 쓴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가장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기자를 권력이나 명예에 이르는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무를 썰고 파를 다듬으면 칼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가 되지만 사람을 찌르면 흉기가 됩니다. 신문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하게 비판하고 합당하게 칭찬하면 세상을 맑게 하는 청량제가 되지만 부당하게 비난하고 부조리하게 미화하면 세상을 괴롭히는 독극물이 됩니다.

 

세상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지만 기자를 하면서 부자가 돼야지 생각하면 올바른 기사를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욕심을 갖고 신문기자를 하면 기자로서 제 노릇을 잘할 수 없고 나아가 본인까지 해치게 됩니다.

 

기사 좋게 써달라거나 나쁜 기사 빼달라면서 들고 오는 돈을 뿌리칠 수 없고, 나아가서는 그런 돈을 스스로 찾아 헤매게 됩니다. 아울러 취재·도·편집하면서 쌓은 연줄을 타고 정계나 관계나 재계로 권력을 찾아 나가는 기자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기자를 두고도 '기레기'라 합니다.

 

마치면서

 

어떤 직업이든 보람과 고뇌는 다 함께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면 그 직업을 잘 수행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할 기자라는 직업은 더욱 그렇습니다.

 

언론의 역할과 기자의 임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길을 꼭 가고 싶은 생각이 있는 학생들은 신문읽기와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꼭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년 9월 24일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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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 활로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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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라는 지역 신문에 몸담고 있으면서, 또 경남도민일보가 공익 실현을 위해 만든 자회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운영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하게 된 이런저런 생각들입니다. 짧은 생각(短想)이기도 하고 끊어진 생각(斷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실마리는 되는 셈입니다.

 

 

1. 지역신문에게 지역 밀착은 무엇일까요?

- 지역신문 앞에 놓여 있는 유일한 살길입니다. 그냥 하는 헛말이 아닙니다.

- 지역신문을 단순히 보도나 하는 매체로만 여기는 바로 그 순간 지역신문은 발전할 가능성을 잃어버립니다.

- 말하자면 지역신문이 살 길은 신문(인터넷신문이든 종이신문이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살 길은 신문 밖에 있고, 그 길을 헤쳐나가는 힘은 신문 안에 있을 때는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경남도민일보 2015년 1월 2일치 첫 신문.

 

2. 지역신문이 붙어먹을 데는 지역밖에 없습니다.

- 지역 말고 다른 것은 이미 다들 다른 무엇과 붙어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지역에서 누구랑 어떻게 붙어먹을까요?

- 여태까지 다른 보도매체랑 붙어먹지 않은 사람들하고 붙어먹어야 합니다.

-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 아울러 붙어먹는 대상을 사람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4. 지역 역사와 지역 생태 등은 무한한 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뻔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 이미 익히 알려진 이야기도 색다른 시각에서 제기하면 재미있어 합니다.

- 역사든 생태든 지역 사람들의 삶이랑 연관을 지을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 과거에 묶이지 않는 현재화, 사람(또는 삶)과 일체가 되는 자기화가 필요합니다.

 

- 특히 역사에서는 '화려찬란했던 지난날 얘기'에서 멈추고 마는 경향이 큰데요, 반드시 극복해 내야 합니다.

 

- 나아가 하나를 더 꼽는다면, 그것이 역사가 됐든 문화가 됐든, 그것을 개별화까지 할 수 있으면 아주 좋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외국인이라 꺾이고 신라에서는 신분이 낮아 자빠진 한 최치원의 행적을 갖고  오늘날 그런 처지에 놓인 특정 인간 개인과 동일화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자기가 지역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 내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이 아무리 크다 해도 지역이 품고 있는 콘텐츠 그 자체보다는 언제나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늘푼수(늘품)가 없어집니다.

 

경남신문 2015년 1월 2일치 첫 신문.

 

6. 사람/역사/생태는 파고들어야 하고 이슈는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 사람에게는 누구나 아흔아홉 구비 절절한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을 얻으려면 먼저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 자연이나 역사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있다 싶으면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보일 때까지 깊고 넓게 찾아다니고 해야 합니다.

- 이슈를 놓치면 흐리멍텅해 보입니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엿바꿔 먹었다는 오해까지 받아야 합니다.

 

7. 지역밀착 보도는 지역밀착의 전부가 아닙니다

- 보도는 신문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유일한 활동이 아닙니다.

- 보도 말고도 지역신문이 할 수 있는 일-활동 또는 역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8. 지역신문을 사랑방처럼, 보도 기사를 이야기처럼 

-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끓어야 합니다.

- 제대로 읽히려면 '살아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 역사·문화·생태·사람은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개발해 낼 수도 있습니다.

- 지금 지역신문이 지향할 수 있는 최선은 '독자 공동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남일보 2015년 1월 1일치 첫 신문.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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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시민단체가 청소년역사탐방 하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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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해양 방위 요총 거제에는

 

140년 전 마지막 쌓은 전통 성곽도

 

지역시민사회단체가 아이들과 더불어 지역 역사와 문화를 알아보는 프로그램을 본격 시작했습니다. 거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대표 허철수)이 10월 18~19일(제1기)과 11월 15~16일(제2기) 1박2일 일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을 진행한 것입니다.

 

거제경실련은 그동안 해마다 청소년 프로그램을 치러왔는데 지난해까지는 주로 '어린이 경제교실'을 운영했습니다.

 

주제는 제1기가 '거제에 남아 있는 성곽'이었고 제2기는 '거제·통영 일대 임진왜란 유적'이었습니다. 거제경실련이 이처럼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에서 초점을 '지역의 역사와 문화'로 맞춘 데는 학교 안팎에서 이뤄지는 교육 현실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 청소년 교육은 대학 입학이 중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나 학원은 물론 가정에서도 대입수능시험에 나오는 것들만 가르치고 배웁니다. '수능'은 전국적 것이나 세계적인 것만 다룰 뿐입니다.

 

지역의 역사·문화·자연·생태·인물은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은 자기가 터잡고 사는 지역을 잘 모르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생겨나기 어려운 현실인 것입니다.

 

거제경실련은 거제시 지원금과 자체 기금에 참가비(한 차례 2만 원씩)를 받아 이번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거제뉴스광장과 경남도민일보가 후원했고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경남도민일보 자회사·경남형 예비 사회적 기업)가 진행을 함께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는 지역시민단체들의 관심과 참여 촉진을 위해 두 차례(12월 11·18일치 20면)에 걸쳐 이번 탐방을 다뤘습니다. 2014년에는 임진왜란과 성곽에 대해 알아봤고요, 이어서 2015년에는 일제강점기 군사시설과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 관련 유적 등 거제 일대에서 이뤄진 근대 역사·문화를 아우르는 일정을 마련할 예정이랍니다.

 

◇스무곳 넘는 훨씬 거제의 성곽들

 

10월 18일(토) 아침 10시 거제 초·중학생 20명 남짓이 거제시공공청사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거제 일대 성곽 둘러보기를 통해 지역 역사·문화를 알아가는 거제경실련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거제를 두고 땅이 너르고 물도 풍부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 수 있었다거나 풍경이 아름답지만 좁다란 해협으로 떨어진 섬이라 외로웠으며(유배) 육지와 바다가 만나지는 터전이라 괴롭기도(임진왜란·일제강점) 했던 지역이라는 전체 흐름을 먼저 익혔습니다.

 

 

성곽의 구조와 명칭·목적·방법 등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아울렀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문화재는 조금이나마 알고 마주할 때랑 모르면서 볼 때는 그 느낌과 재미가 크게 다르기에 마련된 시간이었습니다.

 

초점을 맞춘 짧은 설명에 이어 '도전! 골든벨' 게임 형식을 통해 배운 내용 복습까지 지겹지 않게 마쳤습니다. 아이들은 가까운 밥집에 들러 가볍게 점심을 먹고 본격 성곽 탐방에 나섰습니다.

 

 

거제에는 대충 주워섬겨도 남아 있는 성곽이 스물을 넘는답니다. 영등포성·옥포성·조라포성·지세포성·율포성·오량성·아주현성·중금산성·탑포산성·수월리산성·율포산성·다대산성·장목산성·하청성·성포산성·사등성·가배량성·고현성(거제읍성)·둔덕기성(폐왕성), 그리고 왜군이 쌓은 견내량왜성·영등왜성·송진포왜성·장문포왜성…….

 

이 모든 성을 빠짐없이 둘러볼 수는 없는 노릇, 대표성과 상징성이 높은 몇몇을 골라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중에 쌓은 옥산금성, 가야시대 거제에 있었던 나라 독로국의 도읍으로 알려진 사등성, 한때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가배량(오아포)성 세 곳이 선택됐습니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도 둘러보는 일정에 더해졌습니다.

 

◇'통영'이 될 뻔했던 거제

 

통영보다 거제에 먼저 통제영이 있었다는 사실이 거제 사람들한테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바로 오아포인데요, 지금 동부면 가배리 일대 산마루를 따라 가배량성이 있는 가배리 일대랍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처럼 거제가 '통영'이 될 뻔했었던 얘기를 들려줍니다.

 

가배량성에 올라.

 

아이들과 더불어 언덕배기 마루금을 따라 올라가 많이 허물어지지 않은 가배량성을 눈에 담았습니다. 공격을 위해 불쑥 튀어나온 치(雉)도 보고 통제영 시절 군선으로 가득했을 앞바다도 내려다봤습니다.

 

가배량성에서 앞바다도 내려다보고.

 

1593년 초대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여기 오아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뒀다가 이듬해 8월부터 한산도 등지로 옮겨다녔습니다. 1597년 3월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원균은 통제영을 오아포로 다시 옮겼습니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전사한 뒤 복귀한 이순신은 전세에 따라 남해바다 서쪽 끄트머리 전라도 고금도 등에 통제영을 설치했습니다. 오아포는 임진왜란 뒤 다시 통제영이 됐습니다만, 1602년 5대 통제사 류형이 춘원포(통영 광도면 안정만)로, 6대 통제사 이경준이 다시 두룡포(지금 통제영 자리)로 옮겼습니다.

 

 

 

이어서 사등성을 찾았습니다. 민가나 논밭이랑 뒤섞여 있는데 한길에서는 돌담장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고즈넉함과 아늑함으로 푸근한 평지성이랍니다. 치라든지 옹성 그리고 성문 따위가 제법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데가 많습니다.

 

원래 모습은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들녘과 마주한 성벽 거뭇거뭇한 색깔은 옛날 분위기를 물씬 풍긴답니다. 아이들은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도 벌였습니다.

 

사등성 옹성 있는 데에 올랐습니다.

사등성을 둘러본 일행은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처절한 싸움이 두 차례 치러진 역사 현장입니다. 1592년 10월 5~10일 첫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과 3800 군사가 3만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이듬해 1593년 6월 22~29일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경상 우병사 최경회·창의사 김천일·진주목사 서예원·충청병사 황진 등 3000 관군과 백성이 10만 왜군을 맞아 죽음으로 지켜냈습니다. 왜군은 진주성이 함락이 됐지만 스스로도 손실이 커서 전라도로 들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 때 왜군은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살륙했다고 합니다.

 

의기사에서.

 

일행은 촉석루·의기사·의암을 들른 뒤 성벽을 따라 전체를 한 바퀴 두른 다음 정문 공북문 바로 옆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일대에 퍼질러 가장 인상 깊은 하나를 골라 그림을 그렸습니다. 포근한 잔디밭이나 반듯한 계단 등에 앉아서요.

 

 

어떤 아이는 성벽을, 어떤 아이는 동상을 그렸으며 성문을 그림으로 옮기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다 그린 다음 아이들 스스로 평가해 잘 그린 그림을 몇몇 뽑아 선물로 문화상품권을 한 장씩 안겼습니다.

 

 

저녁은 통영 도남식당에서 먹었고요 짐은 그 바로 옆 통영청소년수련관에 풀었습니다. 자기 소개를 겸한 소감 발표를 간단히 한 데 이어 이날 돌면서 듣고 보고 익힌 바를 되짚어보는 시간도 마련했지요.

 

 

이 또한 설명하듯 하면 집중도 되지 않고 재미도 없으므로 '도전! 골든벨' 형식에다 담았답니다.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만 재미도 있어하고 관심도 보인답니다. 아이들에게 던져지는 설명과 아이들 스스로 찾아나가는 문제풀이는 이렇듯 차이가 납니다.

 

◇ 화포에 맞서 전통 산성을 쌓았다?

 

이튿날 아침을 먹은 뒤 거제면소재지 '기성관'을 찾았습니다. 조선 시대 거제현 객사랍니다. 임금 위패를 모셔두고 수령이 한 달에 두 차례 임금 받드는 의식을 꼬박꼬박 치른 장소입니다. 임금을 대신해 내려오는 사신이 묵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거제 기성관은 이렇듯 통영 세병관·밀양 영남루·진주 촉석루에 이어 경남서 네 번째로 큰 전통 목조건물이라 합니다. 거제가 옛적에도 작은 고을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라 하겠습니다. 이어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대학교 건물 같은 거제초교 본관을 눈에 담으면서 옥산금성에 올랐습니다.

 

거제초교 운동장 그늘에서. 본관 건물이 멀리 보입니다.

 

이 산성은 1873년 완공됐습니다. 근대 화포 제작기술이 발달해 전통 산성이 이미 효력을 잃은 시점이었지요. 거제부사 송희승이 관아 읍성을 쌓겠다고 하자 고종은 백성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송희승은 대신 산성을 쌓기로 하고 백성을 동원해 여덟 달만에 다 쌓았으나 그 탓에 파직되고 말았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산마루에 서면 크고작은 바위들이 잘 어우러져 있고 올려다보이는 계룡산과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두루 괜찮습니다. 또한 아래 마을에서 산성을 바라보는 풍경도 퍽 그럴듯합니다. 아이들은 여기서 노닐다가 기념사진까지 찍고 내려왔습니다.

 

옥산금성서 내려와 기성관에서 수료식을 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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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승전과 참패가 엇갈리는 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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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경실련 2014 청소년 역사문화탐방(2)

 

◇ 해양 방위의 요충 '거제 바다'

 

거제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제2기 청소년 역사·문화 탐방(11월 15~16일)은 임진왜란 유적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첫 번째 나들이 주제인 거제에 (산)성이 많은 까닭(지역시민단체가 청소년역사탐방 하는 뜻 http://2kim.idomin.com/2729)과 임진왜란 당시 중요 해전이 거제 일대 바다에서 벌어졌던 까닭은 다르지 않습니다.

 

거제가 우리나라 해상 방위에서 으뜸 요충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욱더, 뭍에서 떨어진 바깥바다는 조금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도 위험했기에 뭍(통영·고성)과 섬(거제) 사이 잔잔한 바다를 찾아다녔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제 바닷가 일대에 (산)성을 쌓았던 것이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거제 앞바다에 배를 띄웠던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거제 일대 바다에서는 옥포해전(조선 수군 최초 승리), 한산대첩(전쟁 판도를 바꾼 해전), 칠천량해전(조선 수군 유일 대패) 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관 앞에서 미션 문제 풀이를 했습니다.

 

◇ 설명보다는 직접 체험

 

15일 아침 10시 거제공공청사 회의실에는 앞서 제1기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1기 탐방에 참여했던 아이들도 많았고 새로 참가한 아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제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자기 사는 고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커지는 법이랍니다.

 

 

전체 진행은 제1기와 마찬가지로 했습니다. 참여 학생들이 자율성과 능동성이 발현되도록 하면서 설명은 최소한으로 하고 몸소 찾거나 만져보도록 했습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에서는 전시관을 미션 수행식으로 돌아봤습니다. 전시 유물과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설명을 지루해하고 못 견뎌합니다. 더욱이 내용이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하고 싶은 얘기라면 더하답니다.

 

 

 

5월 7일 조선 수군은 옥포만에서 노략질하던 왜군을 포위하고 함포를 쏴서 26척을 깨뜨렸으며 탈출한 왜선은 얼마 되지 않았고 배를 못 탄 왜군은 뭍으로 달아났습니다. 이순신 전승·불패신화는 이처럼 옥포에서 시작됩니다. 거제 사람들은 옥포해전을 '대첩'이라 이르면서 크게 기려왔습니다.

 

1996년 들어선 옥포대첩기념공원 기념관은 판옥선 모양이고 옥포루에서는 옥포만이 한 눈에 든답니다. 미션을 마친 아이들 몇몇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왔을 때는 10분만 해도 다 둘러보고 남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한 시간 가까이 둘러봤어도 지루한 줄 모르겠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랍니다. 백 번 들어봐야 한 번 보는만 못합니다. 또 백 번 들여다봐도 한 번 만져보느니만 못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머리에 억지로 새겨넣어봐야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몸과 마음에 새겨야지 오래 남는 법이랍니다.

 

 

◇이순신 장군과 통제영

 

이어서 칠천량해전공원으로 옮겨갔습니다. 제2대 통제사 원균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참패했습니다. 본인은 물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숨졌고 남은 것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한산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면서 챙긴 배 12척이 전부였답니다.

 

 

조선 해상 방어선도 경상도 거제 일대에서 남해가 끝나고 서해가 시작되는 전라도 서쪽 끝으로 밀려났습니다.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은 선조 임금의 무리한 명령에서부터 처참한 패배까지 당시 전투를 재구성해 놓고 있습니다.

 

임금·고관대작·장군이 아니라 일반 수군이나 백성 관점에서 다룬 동영상 애니메이션도 보여준답니다. 임금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투에 동원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괴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칠천량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이루려 했던 대륙 침략을 아직도 노리고 있습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 강점을 지금 일본 정부가 반성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일본의 그런 의도를 제대로 꿰뚫어 읽고 대응하지 못하면 칠천량의 엄청난 패배가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조선 수군 유일 패전 장소 칠천량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겨울에 들어선 탓에 두 군데 둘러보고 나니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통영청소년수련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이들의 이튿날 첫 일정은 복원된 통제영 탐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통영에 있는 통제영이 이순신과 관련이 깊은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영청소년수련관 숙소에서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둡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지금 자리에 들어선 때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603년이랍니다. 임진왜란 터진 당시에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책조차 없었습니다.

 

통제영 들어가기 전에 서포루에 먼저 올랐습니다.

 

서포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눴습니다.

 

경상·전라·충청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 수군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삼도수군통제사와 통제영은 난리 이듬해 들어서야 생겨났습니다. 통제영이라면 죄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해 왔던 아이들은 이런 얘기를 처음 듣습니다.

 

 

 

지난해만 해도 세병관 건물 하나만 있었으나 통제영은 올 3월 복원된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여러 군수 물자와 생활용폼을 만들어내던 십이공방도 나름 재현했고요, 통제사가 묵던 내아나 업무를 보던 경무당 같은 건물도 새로 들이세웠습니다. 장군기를 꽂았던 기삽(旗揷)석통과 청황적백흑 오방기를 들었던 돌인형 석인도 발굴돼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전소 자리에서.

 

이런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끌만한 존재는 주전소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화폐를 만드는 공장=조폐창에 해당될 텐데요, 옛적 통제사한테 엽전을 생산할 권한이 주어져 있었음을 일러주는 유적이랍니다. 이렇게 주전소 터가 발굴된 데는 우리나라에서 통제영 한 군데뿐이라 합니다.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어른들 설명 없이 미션 수행을 통해 스스로 힘으로 찾아냅니다. 해답을 자기 힘으로 찾겠다는 의지가 굳센 몇몇은 거의 뜀박질 수준으로 돌아다닙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역시 이렇게 바삐 움직인 아이들이 더 많이 맞혔고 문화상품권 또한 그 친구들 차지가 됐습니다.

 

세병관 마루에 앉아 미션 문제풀이를 했습니다.

 

수료증을 나눠주는 모습입니다.그러고 나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세병관 대청마루에 올라 미션 문제 풀이를 한 다음 거제로 돌아오는 길에 한산대첩이 벌어졌던 견내량을 한 번 내려다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뭍에서는 전쟁 당시 성곽이나 건물이 자리를 지키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배든 사람이든 무기든 바다는 모두 삼키거나 아니면 처음 출발했던 포구로 돌려보냅니다.

 

예나 이제나 바닷물은 조류를 따라 흐를 뿐입니다. 통영과 거제 사이 좁은 바다 견내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익진으로 유명한 한산대첩을 치른 바다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유물·유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통영타워에 올라 멀리 한산도 앞바다까지 견내량 일대를 눈에 담았습니다. <끝>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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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념관에 가해자 명단과 악행을 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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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제화를 막으려면...


나는 '기념'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무슨 기념관, 무슨무슨 기념사업회도 그렇다. 특히 어떤 역사를 기념한다는 것은 거기서 교훈을 얻어 좋은 일은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나쁜 일은 단죄하여 근절시키자는 게 본래 취지일 터. 실제 그런 기념을 제대로 하고 있는 꼴을 본 적이 없거니와 도리어 박제화(剝製化)만 하고 있는 꼴을 무수히 봐왔기 때문이다.


박제화란 더이상 발전하거나 본질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굳은 상태가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역사를 과거에만 가둬놓고, 오늘의 시대에 계승·발전은커녕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데, 그걸 과연 '기념'한다고 할 수 있는가? 가령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했던 3·15의거 주역들이 오늘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뭐, 좋다. 그분들도 세월이 흐르니 나이가 들었고, 예전의 열정과 패기가 사그라졌을 수도 있다. 그때의 독재와 지금의 독재는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 명백한 독재자에 빌붙어 민중을 상대로 갖은 악행과 살인을 저질렀거나 동조했던 앞잡이 가해자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는 왜 그리 미적지근한가? 독재자의 편에 서서 자기 고향 시민들의 민주의거를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라고 몰아붙였던 이은상에 대해선 왜 또 그리 관대한가?


지난 2일 우리지역의 재야사학자 박영주 형과 함께 국립 3·15민주묘지 안에 있는 3·15기념관에 다녀왔다. 26억 원을 들여 전시실을 개·보수하고 전시물 또한 대폭 바꿨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바뀐 기념관은 과연 앞잡이 가해자들을 어떻게 단죄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혹 그나마 있었던 가해자들의 명단마저 지워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다행히 예전에 어렵사리 들어갔던 명단은 그대로 있었다. △자유당 정권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자유당 국회의원 이용범 △이용범에게 매수돼 민주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국회의원 허윤수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발포 경관 김종복 이종덕 주희국 이종한 △발포명령자 서득룡 부산지검 마산지청장과 손석래 마산경찰서장 △고문 경관 강상봉 마산경찰서 사찰계장 △시민을 공산분자로 모는데 앞장섰던 왜곡보도의 주범 이필재 서울신문 마산지국장 △시위진압을 지휘한 최남규 경남경찰국장 등이 그들이다.


김주열 열사를 살해 유기한 박종표(맨 오른쪽)와 발포 경관들.


이 명단은 2001~2002년 기념관 전시설계를 할 때 당초 기획안에는 없었던 것을 내가 줄기차게 주장하여 정말 어렵게 넣은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시 패널 한 장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이들 한 명 한 명의 죄상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특히 최남규와 박종표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했던 왜놈 경찰관과 악질 헌병보조원이었다는 전력도 추가했으면 좋겠다.


젊은 시절의 이은상은 이렇게 놀았다.


더불어 독재에 들러붙어 민중을 배신한 이은상의 이름과 함께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알려주자. 또한 3·15 주도세력과 당시 사회운동세력이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 쿠데타 정권으로부터 어떤 핍박을 받았는지도 새겨 넣어야 한다.


그래야 못된 짓을 하면 그 오명이 길이 남아 후세의 지탄을 받는다는 교훈이라도 될 것 아닌가. 피해자만 부각시키고 가해자는 슬쩍 숨겨주는 식의 역사기념사업은 박제화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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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재단 할 일이 장학금 지급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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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장학회를 운영하는 한 인사에게서 며칠 전 들은 얘기입니다. "올해 10년째인데 갈수록 힘이 빠져요. 기금 내시는 분들도 썩 내켜하지 않고요."

 

이유를 물었더니 이러셨습니다. "요즘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잖아요. 고등학교도 시골서는 거의 돈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60만원 안팎 줘봐야 말만 장학금이지 그냥 용돈일 뿐이니까요."

 

의무교육 확대로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경우는 크게 줄었다 했습니다. 지역에서 어지간히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집안이 대부분 먹고살만해 장학금이 아쉬운 실정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여러 명목으로 주어지는 장학금이 적지 않아 중복도 잦다고 했습니다.

 

좋은 생각으로 장학회를 만들고 뜻있는 이들로부터 돈을 모아 장학금을 주는데 그 돈이 장학보다는 아이들 일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쓰이니 맥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장학금 지급이 전혀 쓸모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런 장학금이 옛날에는 효과도 보람도 있었지만 지금도 과연 그럴까요. 소득수준이 많이 오르면서 크게 보면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시대는 이미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육하고 공부하는 목표가 좋은 시험 성적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격 구현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금만 둘러봐도 장학사업이 장학금을 주는 데서 벗어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문제의식을 달리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여러 장학사업을 펼치는 것입니다.

 

전국 규모 장학재단들을 보면 견문을 넓히고 세상물정도 익히라는 취지로 여행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사회에서 받은 도움을 환원하도록 봉사 프로그램을 내놓은 데도 있습니다. 또 학생한테 혜택을 주는 데서 나아가 그 멘토나 선생님의 자질·수준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것도 있습니다.

 

남해 고현면 탑동마을 정지석탑. 고려 말기 관음포 앞바다에서 정지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담아 지역 주민들이 세운 석탑. 남해 사람들도 이런 내력을 잘 모릅니다.

 

물론 지역 장학재단(장학회)이 전국 규모 장학재단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 또는 문제의식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역 교육이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유학가는 아이가 적어서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적어서 문제인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고장을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형제나 이웃·친지가 작으나마 그런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도 학원도 수능시험에 집중하느라 지역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성군 마암면 석마. 암말입니다. 농경문화 한가운데 있는 북방 기마문화 자취입니다.

 

이러니 아이들은 자기 고장을 '별것 없다'며 비하·무시하기 일쑤입니다. 군 단위 지역은 아이들 대부분이 늦어도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깥으로 나가는데, 돌아오는 경우는 좀처럼 드뭅니다.

 

이런 장학사업은 어떨까요? 자기 고장 역사·문화·생태·인물을 체험·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지역 모든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군 단위 지역은 초등학교가 한 학년이 400명을 넘는 경우가 드물고 고등학교는 한 학년이 800명이 되기 어렵습니다.

 

거창 정장리 최남식 가옥. 지역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최남식 어른이 오래 전에 지은 네덜란드풍 건물입니다. 거창 시민사회 역량이 남달리 탄탄한 데 대한 설명을 해주는 건물입니다.

 

따라서 한 해에 40인승 버스로 열 차례만 해도 족합니다. 특정 학년(이를테면 초등학교 5학년)을 정해 해마다 돌리면 됩니다. 특정 개인 몇몇이 아닌 지역 아이 모두를 장학 대상으로 삼는 보람도 누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하는 데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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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巨富)에서 신용불량자까지 거침없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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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채현국 ▶ 젊은 세대를 향한 경고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오척단구 거한, 당대의 기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 열 손가락에 들었던 거부(巨富),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이 시대의 어른….


채현국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책 속에서 마주하는 그의 삶은 다양한 수식어 못지않게 흥미롭다. 철학을 나눴고 사업을 일구었고 사람을 도왔고 스스로 부(富)를 놓았고 많은 친구와 어울렸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는 일갈은 앞뒤 막힌 노인 세대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그들을 욕하는 젊은 세대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똑같은 꼴이 된다는 경고였다.


이처럼 백발의 채현국은 젊은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 그의 80년 인생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자서전이나 평전이 아니다. 4차례에 걸친 긴 인터뷰 끝에 얻은 내용을 가감 없이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채현국의 삶 속에는 철학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사람이 있었다. 늘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녔던 ‘풍운아’ 채현국의 삶을 이 책에 담은 이유일 것이다.

풍운아 채현국 표지.


▶ 거부(巨富)에서 신용불량자까지 거침없는 인생

 

부채의식 때문일까. 채현국이란 인물과 그의 삶을 탐구해보고 싶었다. 한 때 24개 기업을 경영하며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으나, 지금은 특별한 소득도 없는 신용불량자. 그 많던 재산은 다 어떻게 했을까? 재벌급 부자로 살다 어느 순간 무일푼에 신용불량자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라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 책은 모두 4차례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인터뷰마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6~7시간씩 이어졌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내가 보기에 그는 거부에서 신용불량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인생을 살아온 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그만큼 그의 삶은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녔고, 지금도 그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울림은 계속되고 있다.


채현국 이사장은 인터뷰 조건으로 ‘절대 훌륭한 어른이나 근사한 사람으로 그리지 말 것’을 내걸었다. 그래서 들은 이야기 그대로, 조사한 내용 그대로, 사람들이 그를 언급한 그대로 풀었다.

 

- 저자 머리말 중 

 

주제어: 채현국, 흥국탄광, 효암학원, 민주화운동

분류: 인물, 철학자, 사상가, 사회운동가


목차


1부 아버지 채기엽과 탄광사업 합류


기록에 나타난 채현국과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 채기엽, 상해에서 큰 돈을 벌었으나

중국군에게 재산 빼앗기고 집도 선배 부인에게

형님의 죽음, 부모님의 충격

흥국재단이 인수한 경남대, 박종규에게 넘어간 까닭

양산 개운중학교 개교 및 인수 비화

중앙방송(현 KBS)에 입사했으나 때려치운 사연


2부 사업 성공과 정리, 친구들이 남았다


아버지와 함께 기업을 일으키다

우연한 기회에 아접(芽椄) 기술을 개발하다

번창하던 기업과 부동산을 모두 정리하다

흥국탄광과 박윤배,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

대학 동기생에게 청혼 “나에게 시집 오이소”

이(齒)가 없어도 임플란트를 하지 않는 까닭

효암학원에는 전교조 해직교사가 없었다

리영희·임재경과 친하지만 언론인은 쓰레기다


3부 비틀거리며 왔지만 그래도 수지맞은 삶


신용불량자로 살아도 불편하지 않다

평생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해온 이유

그가 신문·방송을 안 보는 까닭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홍명희·박완서·권정생

스필버그와 인문학 열풍에 대한 생각

신이 없다는 건 모르지만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저자 소개


* 김주완 


1990년 기자 노릇을 시작해 25년 동안 기자로 살아왔다. 역사 속에서 사람을 찾는 일을 계속해 199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훈’ 할머니(한국명 이남이)의 혈육을 찾았고, 중국 동북 3성에 남아 있던 이옥선 할머니 등 10여 명의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을 찾아내는 등 근·현대사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2010년 6월부터 6200여 명의 시민주주가 창간한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판미디어국장을 맡아 사람 냄새 나는 신문, 사람 중심의 지역공동체 구축에 힘써왔다.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2008년부터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을 운영해 누적방문자가 14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언론·보도부문 TOP10, 개인부문 TOP50에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마산·창원 역사읽기>(공저, 2004, 도서출판 불휘), <토호세력의 뿌리>(2005, 도서출판 불휘),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2007, 커뮤니케이션북스), <SNS시대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남기>(2012, 산지니),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 인생>(2014, 피플파워) 등이 있다.  


블로그 http://2kim.idomin.com

트위터 http://twitter.com/kimjoowan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kimjoowan

이메일 kjw1732@gmail.com


제목 풍운아 채현국

펴낸날 2015년 1월 7일

가격 12,000원

반양장본 | 176쪽 | 140*200mm

ISBN 979-11-950969-9-2 (03990)


펴낸곳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삼호로 38(양덕동)

       055-250-0100

       www.idomin.com

기록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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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풍운아 채현국'을 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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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蔡鉉國, 1935~)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약 10여 년 전 이 분에 대한 말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양산에 가면 지금의 경남대학교가 박종규(전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 씨 소유로 넘어가기 전 이 대학을 운영했던 노인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근·현대 지역사(史)에 관심이 많은 필자에게 지인이 준 중요한 정보였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잊어버렸다.


그런데 2014년 초 이분의 인터뷰가 <한겨레>에 실렸다. 인터뷰의 울림은 컸다. 7만여 명이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공유하며 그의 어록을 인용했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 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와 같은 그의 수많은 어록은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하면 수없이 회자되고 있는 중이다.


지역신문 기자로서 부끄러웠다. 내가 사는 이곳 경남 양산에 계시는 어른이 내 게으름 탓에 서울 매체를 통해 먼저 알려진 것이다.


채현국 이사장과 필자. @김구연 기자


그로 인한 부채의식 때문일까. 채현국이란 인물과 그의 삶을 더 탐구해보고 싶었다. 한 때 24개 기업을 경영하며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巨富)였으나, 지금은 특별한 소득도 없는 신용불량자. 그 많던 재산은 다 어떻게 했을까? 재벌급 부자로 살다 어느 순간 무일푼에 신용불량자로 산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라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래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진 학교법인 이사장이니 재산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학교법인은 말 그대로 법인일 뿐 개인 재산이 아니다. 사고 팔 수도 없게 되어 있다. 거기 이사장이라고 해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학교 회계에서 이사장이 돈을 한 푼이라도 가져가면 횡령이 된다.


물론 부인이 국립대학 교수 출신으로 정년퇴임했으니 부인의 연금이라든지 기본 수입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는 것 자체는 그리 곤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예전처럼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다든지, 민주화운동 진영에 거액의 후원을 해준다든지 그런 선심은 쓸 수 없을 터. 서울에 오래된 주택이 있지만, 그는 양산 개운중학교 뒤편 햇볕도 들지 않는 작은 골방에서 침대도 없이 생활하고 있다. 그 사람이 한 때 우리나라에서 세금 납부액이 10위권 안에 드는 거부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역신문 기자의 의무감으로 그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풍운아 채현국 표지.


내가 재직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의 비상근 감사로 계시는 환경운동가 이인식 선생을 통해 채현국 이사장과 연락이 닿았다. 2014년 8월 28일 그를 경남도민일보로 초청해 '쓴 맛이 사는 맛, 그게 함께 사는 길이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이어 9월 4일 양산으로 그를 찾아갔다.


이 책은 모두 4차례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인터뷰마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6~7시간씩 이어졌다.


오척단구 거한, 당대의 기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이 시대의 어른….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내가 보기에 그는 거부에서 신용불량자에 이르기까지 거침없는 인생을 살아온 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그만큼 그의 삶은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녔고, 지금도 그가 우리 사회에 던져준 울림은 계속되고 있다.


채현국 이사장은 인터뷰 조건으로 ‘절대 훌륭한 어른이나 근사한 사람으로 그리지 말 것’을 내걸었다. 그래서 들은 이야기 그대로, 조사한 내용 그대로, 사람들이 그를 언급한 그대로 풀었다.


2015년 1월 7일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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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는 지역신문의 위기일까 기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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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경남 창원의 한 카페에서 좀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제1회 경남도민일보 독자와 기자의 만남. 편집국이 주최한 이 행사는 휴먼라이브러리(Human Library) 방식으로 진행됐다. 6명의 기자 이름과 프로필을 미리 공지하고, 이들 기자와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를 모집했다.


그렇게 만난 20명의 독자들은 6개 테이블에 나눠 앉아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중에 전체적인 소감을 발표했다. 초반 어색함을 풀기 위해 지역가수의 노래공연도 있었고, 친밀감을 높이기 위한 테이블별 스피드퀴즈도 있었다.


반응이 좋았다. 독자들은 이 만남 덕분에 기자와 신문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졌고, 앞으로 신문을 더 꼼꼼히 읽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오늘 만난 기자가 쓴 기사는 꼭 찾아 읽고 피드백도 하겠노라고 말했다. 신문에 대한 충고와 덕담도 이어졌다.


18일 오후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가로수길 카페 비바에서 열린 제1회 경남도민일보 독자와 기자의 만남 '얼굴 한번 봅시다'에서 이혜영(오른쪽) 기자와 한 독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구연 기자


'바심마당'에 쓰는 첫 원고를 이런 자화자찬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속에 지역신문의 살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독자와 친밀감을 높이는 것이다.


과거 SNS가 없을 땐 독자가 신문사 또는 기자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가 일상 소통수단이 되면서 기자와 독자, 신문사와 독자가 서로 알고 지낼 수 있는 판이 생겼다. 이전까지 독자들은 신문이 재미없거나 볼만한 기사가 없으면 구독을 중단하는 것 외엔 달리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수시로 자신과 알고 지내는 기자의 페이스북 담벼락이나 메시지를 통해 피드백을 보내고 내가 궁금한 사안을 취재해달라고 요청한다.


기자 입장에서도 그렇다. 예전에 아는 사람이라곤 혈연·학연·지연이나 직장 동료, 출입처 취재원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SNS에서 새롭게 맺은 친구들은 나와는 전혀 이질적인 일을 하거나 연령층도 모두 다르다. 그런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SNS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로써 기자도 자신의 팬(fan)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페이스북을 유심히 보면 대체로 자신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페친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아는 친구'가 많은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지역신문의 기회다. 기자가 자기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페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들과 지속적으로 소통·교류하다보면 자연스레 기자로서 자신의 브랜드가 형성된다. 기자 개개인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 그가 속한 신문사의 브랜드도 저절로 상승한다.


기자가 자신의 독자 커뮤니티를 통해 나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들을 통해 내가 쓰는 기사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면 기자로서 그만큼 뿌듯한 일이 있을까? 그들의 제보, 제안, 취재요청을 바탕으로 출입처를 벗어나 새로운 독자의 시선과 시각으로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면 나의 발전과 신문 발전에도 더없이 좋은 일 아닌가?

독자의 입장에서도 신문이나 기자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그것도 아주 친밀한 관계로 있으며, 언제든지 내가 손을 내밀면 잡아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신문을 구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기자가 페이스북을 활용하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의 경우 이미 브랜드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독자층을 형성해가고 있는 인기 기자들이 제법 눈에 띈다. 나도 지난 연말 페이스북에 '우리 신문 좀 구독해주십시오'라는 글을 올렸더니 30여 명의 페친이 구독신청을 해주셨다.


기자와 독자의 친밀감이야말로 지역신문만이 할 수 있는 강점이자 활로다. 소위 '전국지'라는 서울지역신문들이 해마다 독자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경남도민일보 독자는 매년 완만하게나마 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김주완(경남도민일보 이사/출판미디어국장)


※미디어오늘 1월 7일자 '바심마당'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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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채현국의 새옹지마 임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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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나서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은 드문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읽은 책 네 권은 모두 그랬습니다. 김효순 <간도특설대>, 한홍구 <유신>, 성석제 <투명인간>, 김주완 <풍운아 채현국>입니다.

 

<간도특설대>는 새롭게 제시된 사실 관계가, <유신>은 사실과 사실 사이 맥락을 이어주는 설명이, <투명인간>은 그 능청스런 표현에 담긴 삶의 절절함이, <풍운아 채현국>은 채현국 선생이 보여주는 거침없는 인식과 행동이 그리 마음먹도록 만들었습니다.

 

<풍운아 채현국>이라는 책이 보여주는 채현국 선생이 살아온 일생의 다양한 구비구비가 사실 제게는 별로 관심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삶이란 사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채현국 선생처럼 살고 싶다고 한들 그렇게 살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물론 <풍운아 채현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어떤 국면에서는 대리만족 또는 카타르시스라 할만한 그런 것들이 넘쳐나기도 하는 그런 매력이 가득차 있습니다. 더군다나 툭툭 던져지는 한 마디씩은 촌철살인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제 눈길이 오래 머물고 생각 또한 더불어 한참 하게 만든 대목은 그이가 이가 없는데도 임플란트를 하지 않는 까닭을 밝히는 부분이었습니다. 지은이인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가 묻고 채현국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첫 물음은 "73년에 탄광하고 사업을 정리하고 79년 정도까지 친구들 강권에 못 이겨서 또 흥국통상을 하다가 넘겨주고 나온 뒤로는 아무런 사업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겁니까?"

= 그럼요. 그때는 할 수 없이…. 그런데 내가 병이 났어요.

 

"그 때도 위궤양이었나요?"

= 위궤양이 나았다고 하는데 미열이 또 나더라고요. 내가 감기, 독감을 굉장히 잘 앓습니다. 친구 의사는 심지어 장질부사 같은 병으로도 의심을 해요. 그렇게 열병이 잘 나고 하니까. 잇몸도 나쁘답니다. 축농증도 잘 생기고…. 35살에 당뇨란 소리가 나오면서 그 때 이가 다 빠졌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음식을 씹고 하는 데 불편하지 않나요?"

= 그만 처먹으라고 이 빠진 건데 그걸 또 해넣을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뇨라는 게 많이 먹어서 나는 병인데…. 이를 안 해 넣었기 때문에 적게 먹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

이를 해 넣었으면 훨씬 빨리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잇몸으로 먹으니까 불편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이렇게 배 나오고 했는데. 허허허.

 

경남도민일보 사진.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얘기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들 상식으로는 이가 빠지면 어떻게든 새로 해 넣어야 옳거든요. 제대로 골고루 먹어야 건강할 수 있는데, 이가 없으면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지고요.

 

그런데 이런 상식을 거스르고 이를 해 넣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그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둘러대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이가 빠지고 나서도 이를 해 넣지 않은 것과 1935년생인 채현국 선생이 2015년까지 지금껏 살아 있는 사실과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는데도 그냥 갖다붙인 억지로 보일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자세 또는 인식이야말로 채현국이라는 인물의 품격이 남다른 근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런 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안타깝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제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해 볼 따름인데요, 문득 새옹지마가 떠올랐을 따름입니다.

 

많이들 입에 오르내리는 중국 고사인데요, 변방에 사는 늙은이가 자기 말이 달아났을 때 슬퍼하지 않았고 그 말이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으며 자기 아들이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장애를 입었어도 나쁘게 여기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병역이 면제돼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어도 좋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변방에 사는 그 늙은이는 자기한테 닥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고 그로 말미암아 희로애락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를 비롯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날뛰지 말고 항상심을 지키라는 가르침 정도로만 여깁니다.

 

본인이 법인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 복도에서 아이들과. 뒤에 김주완 이사 모습이 보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하지만 채현국 선생은 이런 정도에서 머물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은 머리로만 그것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삶의 진실을 채현국 선생은 온 몸으로 깨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40대 전후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말씀입니다.

 

이렇습니다. 보통 생각으로 보면 변방 늙은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나쁜 일에도 휘둘리지 않고 좋은 일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길게 보면) 세상에는 좋은 일도 없고 나쁜 일도 없다는 성찰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말이 좋고 나쁨을 넘어선 부처님 같은 소리로 여겨진다면 달리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 어떤 일도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러니 당장 두드러져 보이는 한쪽 측면만 갖고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노릇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이런 생각은 어지간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자기 아닌 남의 일일 때는 더욱 그러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들 수 있는 보기가 있습니다. 부자 부모를 둔 자식들 경우입니다.

 

그런 자식 형제들이 그 재산 덕분에 행복해지기는커녕 눈으로 볼 수 없는 꼴을 보이면서 불행해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봐 왔습니다. 없던 다툼도 형제 사이에 생겨나고 상속을 둘러싼 신경전도 심해지고 우애가 끊어지는 정도는 그래도 다행이고 나아가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하지 않을 짓을 형제들끼리 서슴없이 해대는 따위 말이지요.

 

그러다가 결국 이르는 데가 살인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는 신문이나 방송이 자주 전해주는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재산을 많이 상속해 줄 부모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게 결국은 화근이 되고 말지…… 이렇게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화근(!)이 자기한테 닥쳐도 똑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나중에 어찌 될 값에라도 일단 당장은 그 화근 덩어리를 자기 옆으로 끌어댕겨오는 일이 우선이다, 이렇게 여기지 않을까요? 아마 저부터도 그렇지 싶습니다.

 

이는 아픈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참 쉽게 세상을 통찰한 듯이 말하는 사람도 정작 같은 일이 자기한테 닥치면 크게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채현국 선생이 대단합니다.

 

세상에는 좋은 일도 없고 나쁜 일도 없다, 그러니 거기 따라 기뻐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다, 다만 그런 국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그만이다. 이를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몸을 써서 실천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러니 세상이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보이고 무슨 일을 하든 걸리적거림이 없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쉰셋인데, 지금 이가 빠져 달아난다면 채현국 선생처럼 이러나 저러나 그대로 두고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참 많은 저로서는, 온갖 경우의 수를 가지가지 다 생각해 보다가 머리가 터져 죽을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풍운아 채현국>. 175쪽. 1만2000원. 김주완 지음. 도서출판 피플파워 펴냄.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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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사는 사람, 고향 떠나 출세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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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경남 출신으로 일찍이 고향을 떠나 서울서 출세하여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만 고향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사람. 비록 외지 출신이지만 경남에 뿌리내리고 살면서 지역사회를 윤택하게 하기 위해 돈과 열정과 재능을 아낌없이 기부하는 사람.

이 둘 중 누가 더 소중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후자일 겁니다. 물론 서울에서 출세한 사람 중에 고향을 위해 큰 역할을 해주는 분들도 많겠지요. 그런 분과 비교하더라도 과연 후자가 덜 소중한 존재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묘한 기류가 있습니다. 출신만 우리지역일 뿐 서울서 출세한 사람은 우대하고, 외지 출신이지만 우리지역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은 인정해주지 않는 습성 말입니다. 아주 잘못된 텃세의 일종이자 배타성이겠죠.


피플파워 2월호 표지.


이번호 표지인물로 만난 김길화 정다운요양병원 이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학연, 지연 때문에 설움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경주 출신이지만 본적은 경남 마산시 산호동 463번지입니다. 이제는 마산이 제 고향입니다."


그는 비록 이처럼 완곡하게 말했지만, 외지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경남에서 각 분야의 선구적인 사업을 일구면서 겪었던 차별과 설움을 짐작해봅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피플파워> 2013년 7월호를 통해 만났던 이재욱 전 노키아티엠씨 회장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제가 10년 동안 장학회를 운영해왔는데, 나는 경남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서 학교도 안 나왔어요. 이렇게 객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장학회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10분의 1이라도 따라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지 않아서 불만이에요."


그래서 제안해 봅니다. 외지 출신으로 경남에 살면서 우리지역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는 분들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를 만들어보자고 말입니다. 동의하시나요?


이번호에도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함경남도 출신이지만 경남에서 ㈜거산을 경영하며 기부에 앞장서고 있는 고대웅 대표이사도 앞서 말한 분 중의 한 분입니다. <피플파워>는 고대웅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앞장서 실천하고 있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또 이번호부터 영화광 우보라 기자가 쓰는 '우보라와 영화보라' 연재가 시작됩니다. 매년 수많은 영화가 쏟아지지만 또 수많은 영화는 묻히거나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그렇게 지나간 영화에 빠져 연간 300편 이상을 봤다는 우보라 기자의 영화 큐레이션입니다.


프랑스 잡지 <샤를리 엡도>에 대한 유혈테러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 논란이 뜨겁습니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타 종교나 문화에 대한 조롱의 자유도 포함되느냐는 거죠. 그래서 이번 '역사에서 만난 사람'은 이슬람 인문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이븐 할둔을 통해 이슬람 문명에 접근해봅니다.


최근 저희 출판사가 낸 책 <풍운아 채현국>을 통해 다시 그의 삶이 주목받고 있는 채현국 어른은 이렇게 말했죠. "세상에 정답은 없다. 틀리다는 말도 없다. 다른 게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과 여유가 아쉬운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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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채현국》을 읽은 89세 할머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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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생 89세의 할머니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제가 기록하여 출간한 《풍운아 채현국》을 읽고 보내온 편지였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김주완 씨.


고맙습니다. 기록한 책 보고 너무 고마워서 몇 자 적는 27년생 할머니입니다. 썩은 세상에도 풍운아가 아니라 복된 人生이 보석처럼 우리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고 신통력까지 준 것 같습니다.


구절구절 대화하신 內容으로 代理 만족을 느끼면서 감격하였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일을 하셨지만 좋은 기록 많이 해주십시요.


주소 몰라서 출판사로 보냅니다.


042-000-0000

010-0000-0000

수전증이 있어서 亂筆입니다.


1. 23 대전에서 장형숙 할머니"


장형숙 할머니의 편지.


편지는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의 <한겨레> 칼럼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복사한 종이 뒷면에 볼펜으로 한자 한자 눌러 쓴 것이었습니다.


링크 ; 장형숙 칼럼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 


편지는 이 칼럼 뒷면에 적었다.


김현정 칼럼에도 강조하고픈 부분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칼럼과 편지를 두 번 세 번 읽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대전 갈 일 일부러라도 만들어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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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전면허를 따지 않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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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車)가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면허를 따거나 차를 살 생각은 없다. 그동안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자가 왜 차를 사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밝히자면 이렇다.


뭐 환경문제를 생각해서라든지 그런 거창한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였다. 1990년 마산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발령받고 나니 차를 사라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다. 실제 그때 취재기자들은 모두 차를 몰고 다녔다. 당시 내 월급은 50만~60만 원 정도였다. 그 월급으로 어떻게 차를 사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취방 월세만 10만 원, 겨울에 난방 겸 취사용 LP가스 네 통 가격이 10만 원인데…. 게다가 밥도 사먹고 술도 마시고 옷도 사 입고 친구도 만나고, 가끔 부모님과 조카들 용돈도 줘야 하는데…. 결국 '촌지'라는 뒷돈을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는 한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우연히 진주 명신고등학교 설립자인 김장하 선생 이야길 들었다. 민주화운동과 문화운동에 많은 후원금을 댔고 명신고등학교의 모든 재산도 국가에 헌납해버린 그분도 차 없이 자전거만 타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맞아! 그런 분도 차가 없는데…. 월급 100만 원이 넘기 전엔 사지 않겠어.'


그 후 내서농협 창고 신축공사장이 붕괴돼 7명이 숨진 사고가 터졌고, 그 현장에 내가 택시를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함으로서 '기자의 신속성'은 차량 유무와 무관하다는 걸 입증할 수 있었다.


월급 100만 원이 넘은 후에도 차 없는 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터라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고 있다. 사실 좋은 점이 더 많다. 장거리 여행 땐 버스나 기차 안에서 미뤄뒀던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여유롭게 생각에 잠길 수도 있다. 술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고, 주차할 곳을 못 찾아 뺑뺑이를 도는 수고도 없다. 과거 경남도청 앞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김혁규 경남도지사의 관용차를 얻어 타는 호사를 누린 적도 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당시 김종하 국회의원,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김두관 경남도지사 등 수많은 사람과 동승한 적이 있다. 이게 다 내 차가 없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운전면허는 없지만 경운기 운전은 많이 해봤다. 군을 제대하고 고향에 있을 때였는데, 이게 요상했다. 습관이 드니까 고작 500미터 거리에 있는 담배 가게에 가면서도 경운기를 몰고 가게 되더라는 거다. 그때 운전 중독이라는 걸 알게 됐고, 지금도 운전을 배우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물론 차가 없으니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일도 있다. 거리 곳곳의 불법주차가 우선 못마땅하다. 아파트 1가구당 1대의 주차공간을 '기본'으로 주는 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차가 없는 사람에게 관리비를 깎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자기 차가 있는 사람은 주행 중이든 주차 중이든 항상 주차 1면 공간(2.3×5m 이상, 약 4평) 만큼의 공용면적을 점용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욕심이 많은 나라에서 불법주차에 대해선 왜 이리 관대한지 모르겠다.


더 기분 나쁜 건 매일 차량 배기가스를 내뿜고 다니는 사람들이 길거리 간접흡연의 피해를 주장할 때다. 얼마 전 이런 만화를 봤다. 굴뚝에서 엄청난 매연을 뿜어내고 있는 화학공단의 길목에 '금연' 표시가 붙어 있었다. 과연 담배연기가 자동차 배기가스보다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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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지역신문이 적극 활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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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뉴스펀딩’이라는 걸 실험하고 있다. 포털 다음에서 서비스 중인 기획취재 후원 프로젝트다. 내가 하는 프로젝트는 ‘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진행 중인데, 당초 목표액 300만 원을 넘어 600만 원에 육박하고 있다. 또 조회수는 알 수 없지만 공감 1만 4000개, 공유 2900개 등 수치를 보면 꽤 많은 사람이 읽었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사 하단에도 ‘원고료 주기’ 버튼이 있고, 티스토리 블로그에 ‘밀어주기’라는 후원 기능이 있지만, 둘 다 실험해본 결과 그 효과에 비하면 뉴스펀딩의 성과는 고무적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만일 이 프로젝트를 대형 포털이 아닌 기존 미디어에서 하더라도 이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아마 그건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다 콘텐츠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널리스트로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다음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다음의 입장에선 게이트키핑과 데스킹 과정이 따로 없다보니 오보나 왜곡에 대한 위험요소도 있고, 그래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플랫폼을 무제한 열어주긴 부담스러울 것이다. 또한 그간 포털이 보여온 행태를 보면 이 서비스 또한 언제 접을지 모른다.


2015년 2월 17일 다음 뉴스펀딩.


그럼에도 내가 뉴스펀딩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뉴스는 공짜’라는 인식이 당연시되어 있는 웹 생태계에서 좋은 콘텐츠를 후원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다음이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단돈 1000원이라도 뉴스펀딩에 후원해본 경험자라면 그는 또 다른 콘텐츠에도 후원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어느 순간 다음이 뉴스펀딩 서비스를 접더라도 다른 플랫폼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다.


또한 뉴스펀딩은 실력 있고 양심적이며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브랜드 저널리스트를 키우는 데에도 한 몫하고 있다. 소속된 매체의 영향력에만 기대어 정작 기자 개인의 존재감은 없는 한국언론의 현실에서 브랜드 저널리스트의 출현은 저널리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메이저 언론사 소속 기자들보다는 지역신문이나 인터넷신문 기자, 프리랜서는 물론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된다. 이는 또한 황용석 건국대 교수의 말대로 뉴스콘텐츠의 다양화에도 기여한다.


이미 뉴스펀딩에는 주진우 같은 스타기자나 김제동, 차범근 등 유명인사 외에도 오마이뉴스 박상규·박준영 기자, 뉴스타파 황일송·오대양 기자,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 인터뷰 작가 지승호, 수의사 김선아, 사진가 임종진 등 다양한 분야의 저널리스트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 제작비 모금을 위해 한겨레21일 송호진 기자와 조정래 영화감독이 시작한 프로젝트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는 무려 2억 5000만 원이 모였다. 이처럼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지역신문 기자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아마도 내가 유일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직 서비스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작년 9월 30일 오픈),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일 것이다.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의뢰하기’라는 메뉴가 있으니 거기에 프로젝트 제안을 하면 된다. 사실 지역신문은 다음이나 네이버 등에 검색제휴만 되어 있을뿐이어서 지역이슈를 전국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뉴스펀딩을 활용하면 쉽게 지역의 이슈를 전국화할 수 있고, 좋은 인물을 전국에 알릴 수도 있는 좋은 기회다. 게다가 후원금이 들어오면 취재비로 활용해 더 풍부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고, 회사의 재정에 보탬이 될 수도 있으니 지역신문 기자들의 적극 활용을 바란다.


앞서 다음이 이 서비스를 언제 접을지 모른다고 했지만, 당장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지금은 다음 모바일앱과 웹으로만 서비스하고 있지만, 카카오와 연계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하니 그렇게 된다면 콘텐츠 유통범위는 훨씬 넓어질 것이다.


※미디어오늘 2월 11일자 '바심마당'에 실렸던 칼럼입니다. 약간 가필했습니다. 원문주소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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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이 블로그를 해야 할 15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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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거나, 업이 아니더라도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블로그는 필수다. 이런 사람들이 왜 블로그를 해야 할지를 정리해봤다.


○어차피 내가 생산한 글, 여기저기 흩어놓기 보단 한 곳에 모아놓는 게 낫다.

자신의 글을 카테고리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저장, 보관할 수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에 저장해둔 글은 한순간 망실될 수 있지만, 블로그 글은 안전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린 글은 검색이 어렵고 시간이 지나면 찾아보기도 어렵다. 휘발성이 워낙 강해 콘텐츠 유통수단일뿐 저장수단이 될 수 없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달리 블로그는 콘텐츠 생산기지이며 무한정 저장 가능한 보관창고다.

(그래서 나는 카카오스토리를 동네슈퍼, 페이스북을 백화점, 트위터를 인터넷 쇼핑몰로 비유하곤 한다. 약간씩 다르지만 결국은 유통업체라는 것이다. 반면 블로그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비유한다.)


블로그는 용량이 상당히 큰 사진이나 파일도 저장해둘 수 있다. 

블로그에 올려둔 글이나 사진은 관리자메뉴에서 언제든 백업받을 수도 있다.

블로그에 저장된 글은 내가 어떤 장소에 가더라도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찾아볼 수 있다.

블로그는 내가 관리자이므로 내 글을 언제든 수정, 가필하는 등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다.

○PC웹 뿐 아니라 모바일로도 손쉽게 글이나 사진을 올리고 관리할 수 있다.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글을 2차 활용함으로서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다.

블로그 글은 포털에서 우선적으로 검색된다.

블로그에 글이 쌓일수록 검색을 통한 유입이 많아지고, 이를 통한 광고수익도 얻을 수 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브랜드가 생긴다.

체계적으로 분류, 보관된 글은 연관 주제별로 정리, 가공하여 나중에 책으로 묶어내기에도 좋다.


추가.

○블로그는 카카오, 트위터, 페이스북, 빙글 등 여타 SNS와 연결성이 뛰어나다. 또 RSS 구독도 할 수 있고, 한 번 설정만 해놓으면 자동으로 SNS에 글을 송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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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블로그 개설, 너무 고민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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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았지만, 그 단계에서 블로그 개설도 못해보고 접는 사람이 간혹 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너무 고민이 깊은 탓이 크다.


그냥 부담없이 가볍게 시작해도 되는데, 지나치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나 뭔가 '뽀대'가 나야한다는 강박 뭐 그런 것 아닐까 싶다.


그런 사람은 초대장을 받고 블로그를 개설하려는 순간부터 고민하기 시작한다. 티스토리 블로그 초대장을 받으면 일단 회원가입하기를 해야 하는데, 약관 동의-회원 정보 입력만 하면 끝이다.


그러면 자동으로 블로그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흔히 '스킨'이라 한다)을 찾아 선택하면 블로그 생성은 완료된다. 


제목이나 필명, 너무 고민하지 말고 대충


문제는 '회원 정보 입력' 단계에서 고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블로그 아이디는 이미 초대장을 받은 이메일로 정해졌고 비밀번호 만들기까지도 했는데, 그 아래 '필명'을 기입하라는 난이 있다.


이때부터 고민한다. 뭔가 멋있어보이고 심오해보이는 그럴듯한 필명을 만들어야 하는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거기까진 어찌어찌 넘어왔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남는다.


블로그 제목을 입력하라는데, 이 또한 뭔가 있어보이는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블로그 제목이라면 신문으로 치면 '제호'가 되는데, 아무렇게나 만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고민하지 마시라. 블로그 필명이든, 블로그 제목이든 언제든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바꿀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을 필명으로 해도 좋고, 제목 또한 '즐거운 인생'이나 '행복한 인생' 뭐 이런 걸로 대충 임의로 해놓고 다음에 더 좋은 필명이나 제목이 떠오르면 고치면 된다. 유명한 시사블로그 '미디어몽구'도 키우는 개 이름 '몽구'로 시작했다.


블로그 주소도 마찬가지다. 그냥 기존 블로그와 중복되지 않은 적당한 영어 조합으로 만들어놓고, 나중에 여유가 되면 좋은 도메인을 하나 사서 포워딩을 할 수도 있다.


블로그 스킨도 일단 개설해놓고 언제든 바꿀 수 있으니 대충 선택해놓고 나중 더 좋은 걸 고르면 된다.


가급적 익명으로 시작하라


팁을 하나 드리자면, 가급적 필명은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익명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처음부터 블로그 주인장이 누구인지 밝히고 시작하면 은근한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순진하게 김주완이라는 실명으로 시작했다. 기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명으로 시작했다면, 내 블로그 글을 보는 독자들이 '도대체 누굴까' 하고 궁금해하고, 나는 그걸 은근히 즐기는 기분을 한동안이나마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게다가 실명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내 글쓰기 실력이 뽀록나는 건 아닐까', '나의 얕은 내공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뭐 그런 부담 말이다. 


그래서 익명으로 시작하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으므로 부담없이 막 쓸 수 있다. 그냥 그렇게 일기 쓰듯, 평소 드는 생각을 기록하든, 독서 노트를 쓰든 가볍게 생각하고 부담없이 운영하다가 어느날 기분이 내키면 '짠~'하고 내 정체를 공개하면 된다.


결론은 그냥 부담없이 시작해보라는 것이다. 블로그 운영의 가장 큰 적은 부담과 게으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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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추 어른 낚시질 기사, 제대로 알고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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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 또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 불리는 방배추(1935년생, 본명 방동규) 어른의 이야기를 다음 뉴스펀딩에 올렸더니 '방배추'와 더불어 그의 친구 '채현국' 어른까지 다음 실시간 이슈검색어에 올랐네요.


[다음 뉴스펀딩]4화. '전설의 주먹' 방배추 어른의 꿈


그래서인지 이런 저런 매체에서 어뷰징 기사를 만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벌써 뉴스엔과 민중의 소리, 더 팩트에서 기사를 썼는데요. 전혀 취재없이 기존 인터넷 검색에서 나오는 내용만으로 새로운 정보도 없는 기사를 쓰는군요.


그러다보니 사실관계가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더 팩트는 방배추 어른을 "현재 경복궁에서 야간 순찰요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썼는데요.


포털 다음 캡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방배추 어른은 작년 12월 31일 경복궁 관리사무소에 사표를 내고 그만뒀습니다. 현재는 백수이십니다.


또 대부분 매체는 '배추'라는 별명을 두고 "몸 형태가 배추처럼 생겨서 생긴 별명"이라고 쓰고 있는데요. 심지어 민중의 소리는 아예 '방배추, 요상한 별명은 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그렇게 썼군요. 이 또한 사실과 다릅니다.


방배추 어른의 말씀에 의하면 1952년 서울 경신중고등학교와 정신여학교 등이 합쳐 만든 전시 연합학교 시절 다른 학생보다 큰 덩치에 베 잠방이, 헐렁한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니다 보니 여학생들이 '배추장수 차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방배추 별명에 대한 해석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서 그리 말했던 것 같은데, 실제 방배추 어른 본인의 말씀이 이러하니 바로잡는 게 맞습니다. 


아무리 낚시질을 위해 베껴쓰기 기사를 쓴다 하더라도 제대로 좀 알고 씁시다. 


채현국(왼쪽) 어른과 방배추 어른.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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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장형숙 좋은 어른을 만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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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어른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월간 <피플파워>에도 연재된 바 있는 채현국 어른을 만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거침없이 살아온 그 어른의 인생을 기록한 <풍운아 채현국> 책이 발간되었고, 어른의 죽비 같은 말씀에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 어른의 말씀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포털 다음에서 뉴스펀딩 기사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도 지금까지 2만 명이 넘는 분들이 '공감'을 눌러주셨고, 5000여 명이 '공유'를 해주셨습니다. 펀딩으로 모인 금액도 700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팔순 노인의 말에 환호하는 걸까요. 아마도 우리시대에 진정한 어른이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번호에 실리는 장형숙 할머니도 저에겐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이었습니다. <한겨레> 신문을 매일 정독하면서 신문에 소개된 좋은 사람이나 좋은 책, 좋은 글을 발견하면 주소를 수소문하여 편지를 씁니다. 사실 저도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제가 쓴 글을 보고 '잘 읽었노라'는 반응을 얻으면 그때마다 큰 힘이 됩니다. 글뿐이겠습니까?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할머니의 격려 편지는 큰 위로와 힘이 되겠지요.


장형숙 어른 @김주완


그렇게 할머니는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편지를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이고 보내는 일을 10년 넘게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줄잡아 1000명은 넘을 겁니다. 장형숙 어른은 이렇게 말합니다.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나요? 편지라도 써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면 보람이지요."


이렇게 할머니는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일에 힘을 보태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런 어른을 계속 찾아뵙고 많은 분들께 알리고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면 저에게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010-3572-1732)


이번호 표지 인물인 신인규 도서출판 밀양 대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책이 사람과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됩니다. 신 대표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읽은 유일한 박사에 대한 책에 감명을 받아 그의 경영철학과 사회 환원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 사람이 돈이 모이면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이런 일들을 해야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생긴다고…."


또한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말해주는 사례도 있습니다. 강명상 마산 365병원 원장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밤새 어시장에서 생선상자를 나르며 밤참으로 나온 빵과 우유를 먹지 않고 가져와 아들에게 줬다고 합니다. 그 빵과 우유를 먹기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 공부하고 독서도 한 결과 오늘의 강 원장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월간 <피플파워>를 만드는 뜻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이 또 다른 누구에게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것입니다.


이번호부터 생태전문가 윤병렬의 생태이야기가 연재됩니다. 꽃과 나무, 그리고 동물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글입니다.


이서후 기자는 젊은이들의 자생적인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심가득 인터뷰'란 꼭지명을 달았지만, 그런 젊은 문화예술인들에게 힘을 주고 싶은 사심만 가득합니다.


설이 지나고 진짜 을미년이 밝았습니다. 올해는 갑(甲)질하는 사람보다 을(乙)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월간 《피플파워》 3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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