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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은 터진다 하고 터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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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①고리는 멀지 않았고 밀양은 가까웠다

 

2014년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한 일 가운데는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활동도 있었습니다. 물론 경남도민일보랑 공동으로 진행을 했었지요.

 

취지는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여러 현상들을 함께 알아보고 그 문제점과 대립·갈등·협력 양상들도 살펴보는 기회를 우리 지역 자라나는 청소년들한테 한 번 정도는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앞서 2013년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낙동강 창녕함안보와 주민들 자발적인 노력으로 도랑살리기를 성공시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마을을 초등학교 어린 친구들과 함께 둘러보는 어린이 기자단을 환경 생태 보전 차원에서 운영한 데 이은 두 번째 걸음이었지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이뤄진 이번 청소년 기자단 활동을 이렇게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본부 홍보관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휴대전화로 사진찍고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지난 7월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을 운영했습니다. 첫날은 전기에너지 관련 현장을 찾아가 취재를 하고 이튿날은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에는 창원 창덕중·문성고, 김해 김해여중, 진주 개양중, 통영 통영여중, 양산 양산여고, 밀양 밀양여중 등 모두 일곱 학교 200명 남짓이 참여했습니다.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는 2012년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사회적 기업으로 경남도로부터 2012년 9월 3일부터 2015년 9월 2일까지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사회·교육·문화·역사·생태 등에서 사회에 도움·보탬이 되도록 공익을 실현하는 데 목적이 있습지요.

 

경남도민일보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가치들을 그냥 주장으로 그치도록 놔두지 않고 현실에서 한 번 실현해 보자는 얘기랍니다.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도 같은 취지에서 비롯됐습니다.

 

취재 내용을 메모하는 모습.

 

지역 쟁점 현안에 대해 청소년들이 몸소 찾아보고 이를 깜냥껏 파악하고 설명하면서 가능하다면 해답까지 내놓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학교서도 학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교과서에도 참고서에도 나오지 않는 사안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산 공부'를 한 번 해 보는 셈입니다.

 

이번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처음은 에너지 생산·소비 관련 현장을 찾은 얘기를, 두 번째는 학생들이 모둠을 이뤄 기사 작성과 지면 구성을 해 본 얘기를, 세 번째는 학생들이 손수 만든 종이신문들을 펼쳐 보여드릴까 합니다.

 

첫날 기자단이 찾아간 데는 두 군데.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부산 기장)와 밀양 76만5000볼트 송전철탑 설치 현장이었습니다.(양산여고는 밀양 대신 부산을 찾아 에너지 과소비가 일어나는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학생들은 나름대로 녹음도 하고 사진도 찍고 취재노트에 메모도 했습니다. 고리발전본부에서는 1978년 우리나라 처음 만들어진 핵발전소 고리1호기를 비롯해 고리2·3·4호기와 신고리1·2호기가 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신고리3·4·5·6호기도 설치되고 있거나 설계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리본부 홍보관에서 직원 하는 얘기를 메모하는 학생들.

 

2011년 3월 11일 일본서 후쿠시마 사태가 터지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관심을 끌었던 원자력발전시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는 고리본부(6개)와, 한빛(6개, 전남 영광)·월성(5개, 경북 경주)·한울(6개, 경북 울진)본부에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밀양시 단장면 용회마을을 찾았습니다. 한국전력·중앙정부와 지역 주민들이 초고압 송전철탑 설치를 둘러싸고 2006년부터 2014년 현재 9년째 대립·갈등하고 있습니다. 고리본부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수도권 또는 대구·경북권으로 실어나르는 데 쓰일, 76만5000볼트짜리입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동네 어르신으로부터 송전철탑 설치 현장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날이 너무 덥고 시간 제약도 있어서 송전탑 설치하는 산마루까지는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은 송전탑 설치를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국 이기지 못했습니다.(2014년 9월 현재 송전철탑 설치 공사는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기자단 학생들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세부 구성이 지루하지 않도록 짜인 때문도 있지만 여태껏 전혀 마주하지 못했던 그런 현장을 둘러보고 얘기를 몸소 들은 덕분이 컸습니다.

 

비록 핵물질로 직접 전기를 만드는 고리1호기 같은 시설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홍보관 여러 시설과 안내를 눈에 담고 본부 직원 설명을 듣는 것만 해도 기자단 학생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송전철탑 반대 운동 경과를 담은 동영상을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보고 있습니다.

 

고리본부에서는 원자력발전을 두고 발전 과정에 폭발이 일어나는 공정은 전혀 없으며 게다가 설비도 완벽하기 때문에 바깥으로 새어나갈 수 없어서 △안전하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생산 과정에서 대기오염물질인 탄소가 거의 나오지 않으므로 △친환경적이고, 석탄이나 수력·햇볕 발전과 달리 △값이 아주 싸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수원이 내놓는 일반적인 주장이랍니다.

 

이를 청소년 기자단더러 옳고그름을 가늠하거나 그 근거를 따져 묻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대부분은 이런 얘기를 그냥 들어넘겼지만 낱낱이 따져 묻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양산여고 한 학생은 알차게 자료를 준비해 숫자까지 대가며 따졌으며 다른 학교에서도 그런 기자가 한둘은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꼬치꼬치'보다 더 힘이 센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아무리 안전하고 완벽하다 말해도 그런 얘기는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고들과 신문·방송에 종종 나오는 사고와 비리들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그래도 사고가 터지면…?", "비리가 있는데 어떻게 완벽해요?", "후쿠시마는 미리 터진다 하고 터졌나요?"

 

중저준위 핵폐기물을 담는 드럼 모형.(고준위 폐기물:발전에 직접 쓰인 우라늄 폐기물은 아직 처리 방안도 나와 있지 않답니다.)

 

대답은,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질 구조가 지진에 안전하고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과 시스템이 다르다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송전철탑 들어서는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도 학생들에게는 예전에 경험 못한 얘기와 모습이었습니다. '76만5000' 숫자로는 전혀 실감되지 않는 전자파 문제, 주민들 하소연이 무시당해온 사연, 고리본부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핵발전에 대한 다른 관점이 그러했습니다.

 

학생들은 송전철탑이 주민들에게 안겨주는 고통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용회마을 송전철탑은 오른쪽과 왼쪽 산마루 가까운 높은 지대에 설치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철탑에 76만5000볼트 전압으로 온도가 높아 껍질도 입히지 못하는 전선이 서른여섯 가닥이 걸쳐진다고 주민들은 말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는 보상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이 자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만 해 주면 돼요"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용회마을 한 주민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전자파도 걱정거리였습니다. 한전은 전자파 피해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민들은 이미 충남 당진 견학을 다녀왔는데 이미 76만5000볼트 송전선이 흐르고 있었고 갖은 암 발병이나 가축 폐사, 괴상한 소음 등등 전자파 피해가 심각했어요, 바로 용회마을에도 곧 닥칠 문제잖아요, 말했습니다.

 

그래서 살 수 없는 동네가 됐고 살던 땅을 떠나기 위해 토지를 처분하려 해도 살 사람조차 없는 실정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주민들은 송전철탑 반대투쟁을 하다 보니 철탑의 뿌리가 원자력발전에 닿아 있음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위험한 시설이라 사람이 적게 살고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전라 바닷가에 원자력발전소를 짓습니다. 그런데 전기는 가져가야겠기에 먼 거리를 이어주는 송전철탑을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용회마을에서 반대운동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원료 우라늄을 전기 만드는 데 쓰고 남는 폐기물은 핵폭탄 제조에 쓰이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보관해야 하는지는 아직 해답이 없는 상태며,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실수나 고장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얘기도 곁들였습니다.

 

첫날 프로그램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나중에 소감을 물었더니 "원자력발전 실체를 알 수 있어 좋았다", "밀양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서로 다른 얘기라서 헷갈린다", "공존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가장 많았습니다.

 

또 "전기소비나 소비생활 전체를 돌아보게 됐다", "주위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생각하고 쓰는 전기가 다른 사람들 희생 때문일 수 있다니 놀랍다" 등 생각을 넓혀가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물론, "기자 하기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는 좀 뜬금없는 반응도 나왔고요.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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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여행 03 : 참 좋은 인사 '나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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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하니 참 '거시기'했습니다. 네팔로 여행을 떠나면서 네팔에서 인사할 때 뭐라 하는지조차 알아보지 않았으니 말씀입니다. 아마도 네팔에 아홉 번씩이나 다녀온 영주형과 동행이어서 그랬지 싶은데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면 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네팔에서는 이랬습니다. 아침에도 나마스테, 점심 때도 나마스테, 저녁 때도 나마스테, 밤에도 나마스테, 나마스테 하나면 다른 것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꼬마를 만나도 나마스테, 청년을 만나도 나마스테, 어른을 만나도 나마스테, 남자를 만나도 나마스테, 여자를 만나도 나마스테, 불교 절간서도 나마스테, 힌두 사원서도 나마스테 높은 사람한테도 나마스테, 낮은 사람한테도 나마스테, 갑(甲)한테도 나마스테, 을(乙)이나 병(丙)한테도 나마스테.

 

트레킹 도중에 만난 어느 게스트하우스의 표정. 나마스테는 이처럼 웰컴이기도 하고 굿바이 또는 씨유어게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가게에서는 주인은 어서 오세요 하고 갑질하는 손님은 인사를 하지 않고 나머지는 그냥 안녕하세요 중얼거리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네팔은 손님이나 주인이나 나마스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술집서도 나마스테, 밥집서도 나마스테, 게스트하우스서도 나마스테, 찻집서도 나마스테.

 

영주형은 "네팔서는 '나마스테 하나면 된다. 손만 살짝 들면 된다. 상대방도 똑같이 나마스테 하고 인사를 한다'고 했는데 진짜 그랬습니다.

 

우리나라는 만날 때 인사 다르고 헤어질 때 인사가 다른데(또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다른 많은 나라도 그런데) 네팔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마스테로 만나고 나마스테로 헤어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탄생지 룸비니 근처 마을 테누하와에서 만난 아이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누군가 먼저 나마스테 하면 상대방도 금세 얼굴에 웃음기가 돌면서 나마스테 하고 답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표정이 생동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입과 눈은 물론 얼굴이 통째로 환해지는 그런 웃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입만 웃거나 눈만 웃거나 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이들 환한 웃음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높낮이 없고 ‘수구리’도 없는 나마스테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마스테라고만 하면 피어나는 선하고 환한 웃음도 좋았습니다.

 

네팔국립생태공원 치트완 가까운 마을 타루에서 만난 사람들. 이들과도 첫 인사는 나마스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대엿새 지나고부터는 제가 일부러라도 '나마스테' ‘나마스테’ 하고 다녔습니다. 네팔 사람은 대체로 우리보다 살결이 검은 편이고 눈은 좀더 동그란 편인데, 제가 그렇게 하면 그이들은 흰 이와 눈자위가 드러나도록 웃으면서 손을 들어 나마스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시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정교육은 나이가 자기보다 많은 사람한테 인사할 때는 대체로 공손해지도록 가르칩니다.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상대방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합니다.

 

룸비니 근처 테누하와중학교 학생들. 이들이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나마스테' 하며 다가왔습니다.

 

눈이 마주치면 어른을 공대할 줄 모른다고 불손하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경건해지기도 해야 했습니다. 웃어른에게 인사할 때는 이를 희게 드러내 보이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은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나 젊은 친구들 만나면 한쪽 손을 가볍게 들고 목소리도 맑게 해서 나마스테 했습니다만, '연세가 높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도 숙이고 손까지 앞으로 모으고 나마스테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시원찮았습니다. 저의 나마스테 인사를 받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이들과는 달리 낯설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인사에 아예 대꾸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한동안 뜸을 들인 뒤에 그것도 마뜩찮아 하면서 나마스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도 전통 사회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삶이 계산적이 되고 각박해지면서 나마스테가 시들해지고 있구나.'

 

카트만두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희고 노랗고 검은 돌덩이 같은 것은 암염(岩鹽=바위소금)입니다. 오른쪽 위에 얼굴이 보이는 영주형이 '나마스테' 하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말하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영주형이지만 결국 못 참겠는지 제게 말했습니다.

 

"훤주야. 나마스테 할 때는 웃어야 해. 상대방을 바로 쳐다보면서 말이야. 손짓도 크게 하는 편이 나아. 너처럼 웃지 않으면 안 되고. 손짓도 보일 듯 말 듯 그렇게 하지 말고. 고개를 푹 숙이고 나마스테 하면 네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해. 좀 미친 사람 아니야? 이런 식으로 말이야."

 

영주형 나마스테 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니 그랬습니다. 오른손을 벌쩍 치켜들었고 얼굴에는 반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 크고 분명하게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돌아오는 반응 또한 크고 분명하고 환했습니다.

 

나마스테는 단순히 만나거나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만나 반갑다는,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카트만두시장에서 구운 옥수수를 파는 아줌마. 대화의 시작은 역시 나마스테였습니다.

 

영주형이 일러준 뒤로는 저도 나마스테 할 때 웃음과 손짓을 크고 분명하게 했습니다. 상대방 반응도 예전 작게 웃고 희미하게 손짓할 때와 달라졌습니다.

 

저는 신이 났습니다.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손짓하면서 나마스테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 신기한 경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저한테서 저절로 막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여태 저는 얼굴 표정이란 마음에서 우러나는대로 생긴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얼굴 표정이 생기는대로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네팔 인사 나마스테에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트레킹하는 길에 만난 네팔 초등학교 아이들. 이들은 카메라가 신기했는지 제 것을 가져가 이렇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영주형 사진.

2월 6일 네팔 여행을 마치고 카트만두 공항에 들어갈 때도 때도 나마스테 했고 비행기를 타려고 건물을 빠져나오면서도 나마스테 했습니다. 얼굴은 분명하게 웃고 있었고 한 쪽 손은 확실하게 치켜들어져 있었습니다.

 

2월 7일 새벽 인천공항에서 도착한 뒤에는 주차장에서 한참 헤매다가 제 차를 찾아 나들머리로 몰고 나왔습니다. 유리창을 내리고 주차요금이 얼마냐 물어보려는데 하마터면 '나마스테' 소리가 나올 뻔했습니다. 손은 이미 엄거주춤하게 올라가 있었고 입가에는 웃음이 보일락 말락 물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네팔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동안은, 이를테면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나면서도 "안녕하세요" 이렇게 소리내어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이 좀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소리내어 '안녕하세요' 하는 경우는 잦아들었지만 하나만큼은 어지간하면 계속 해보려고 합니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눈과 입으로 가볍게 웃기 말입니다.

 

룸비니 근처 마을에서 만난 꼬마 여자아이. 이 친구도 사진 찍(히)기를 좋아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나라는 인사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유치원에서도 가르칩니다. 손을 모아 배꼽 언저리에 대고는 고개를 크게 숙이는 배꼽절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인사가 아니고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의범절은 대형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인사가 아닌 감정노동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네팔 인사말 나마스테를 수입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남녀노소 관계없고 밤낮 구분도 필요없고 상하 구분도 필요없습니다. 만날 때 헤어질 때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나마스테가 수입되면 한 쪽 손을 드는 몸짓과 상대를 보며 환하게 웃는 얼굴 표정도 함께 들어오겠지요. 그러면 우리 인사를 불편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고개 숙임이나 꾸민 듯한 엄숙·경건 등등이 사그라들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상하 구분도 불편한 갑을 차별도 덩달아 많이 줄지 싶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원자력이든 핵이든 마감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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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② 정해진 시간에 보기 좋게 만들자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2014년 7월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진행한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은 사회 현실을 학생 청소년이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들 말해댑니다. 하지만 이번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활동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에서 아이들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태 이후 더욱 중요한 현안이 된 원자력 발전과 그 안전 여부에 크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창원 창덕중학교 기자단 활동에서 제가 신문 편집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즐겁습니다.

 

밀양 용회마을서는 한국전력과 중앙정부가 주민 반대를 뿌리치고 초고압 송전철탑 설치를 밀어붙이는 이유를 궁금해했습니다. 용회마을은 고리본부에서 수도권 또는 대구·경북권으로 전기를 실어나르는 76만5000볼트짜리 송전선이 지나갈 예정 지역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으로서 기본 덕목인 연민하고 동정하고 공감하는 힘이 작지 않음도 보여줬습니다. 사회 약자라 할 수 있는 용회마을 주민들이 겪은 괴로움과 외로움과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고 또 송전철탑을 꼭 세워야 한다 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주민들은 한전 쪽에서 주겠다는는 백만원 단위 보상금 몇 푼 말고는 완전 무권리 상태입니다.

 

모둠별로 돌아가며 취재 내용이나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아이들이 사회 현실에 관심이 없고 세상물정을 모르게 된 원인은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학교서도 학원서도 집안서도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물음이라도 던질라치면 "공부나 좀더 하라"고 핀잔 듣기 일쑤입니다. 지금 힘들여 공부하는 까닭이 나중에 세상에 나가 제대로 사람답게 사는 데 있는데도 말씀입니다.

 

이번에 아이들이 경험한 '사회 현실'은 그야말로 아주 조그만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새롭게 나타난 사실들에 호기심을 빛내며 온 몸 세포마다 심겨 있던 감수성을 스스로 일깨웠습니다.

 

첫날 취재 현장에서부터 나타난 이런 호기심과 감수성은 이튿날 신문만들기 과정에서 상상력이 더해지며 구체적으로 표현됐습니다. 아이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활짝 피어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지 않고 이렇게 엎드려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잘 만들면 그만입니다.

 

둘째날 프로그램은 이랬습니다. 먼저 전날 취재하면서 느낀 바를 모둠(5명씩이 기본)별로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무엇에 귀를 기울였고 어디를 눈여겨봤으며 관심이 가는 대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다른 모둠과 자기 모둠이 어떻게 다른지 서로 알아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자료집과 취재 현장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 가운데 기본·필수가 되는 것들을 뽑은 문제들로 '도전! 골든벨'을 하며 되새겨 볼 수 있도록도 했습니다. 모두 13문제였는데, 일곱 학교 통틀어 11문제를 맞힌 학생 두 명이 으뜸이었고 이들을 비롯해 3등 정도까지는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줬습니다.

 

신문만들기에 앞서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종이신문에 매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창원 문성고등학교에서 신문 편집의 실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신문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낡은 직사각형에 갇혀 있으며 딱딱하고 빽빽합니다. 여러분이 사회를 책임지는 30~40대가 됐을 때 신문은 지금 신문하고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완전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상상력과 감수성을 최대한 펼쳐 완전히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봅시다."

 

전지 절반 크기 종이를 모둠별로 나눠주고 나서 편집회의에서 광고 배치까지 신문 만드는 전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취재와 기사 작성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편집은 절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회의를 통해 무엇을 머리기사로 쓰고 다음은 무엇으로 할지 등등 지면 구성을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합니다. 또 서로 역할을 잘 나누고 자기 맡은 일은 마감 안에 어떻게든 해내야 합니다."

 

양산여고 아이들의 취재 내용 소감 발표 시간.

 

전날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은 미리 출력해 오도록 일러놓았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 신문 만들기는 신문활용교육(NIE) 차원에서 자주 이뤄집니다. 이번에 청소년 기자단 진행을 하면서 학교에서 만들어진 이런저런 신문들을 들춰봤더니 그냥 기사를 쓰고 죽 늘어놓은 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편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습니다.

 

"편집이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르는 일입니다. 도드라지게 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독자 눈길을 사로잡을 기사와 그렇지 못한 기사를 가려내는 일입니다. 큰 것을 크게 하고 작은 것을 작게 하는 일입니다.

읽을 사람을 늘 의식하면서 그이들 눈에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하고 자연스레 들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입니다. 편집은 평면인 종이를 입체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신문 만들기에 열중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를 재빨리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삼았습니다. 종이를 울퉁불퉁오톨도톨하게 하는 작업이 바로 편집이라는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아울러 신문 만들기에 드는 시간을 2시간 남짓으로 제한했습니다. 신문 특히 일간신문은 오늘 만들지 못하면 내일 신문이 없습니다. 기자 개개인이 마감시간을 지키지 못해도 마찬가지랍니다.

 

회의를 하고 지면 구성 계획을 하고 기사를 쓰고 교정을 거친 다음 실제로 앉히기까지 모두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치우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런 연습은 글쓰기 실력을 기르는 데도 보탬이 됩니다. 대부분 학교에서는 집에서 써오게 하거나 시간을 아주 많이 주거나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러면 글쓰기 실력이 잘 늘지 않습니다. 석 달 열흘 시간을 주고 쓰라고 하면 누구나 게으르지만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반면 시간을 정해놓고 그 안에 글쓰기를 마치도록 연습하면 긴장감 속에서 속도감 있게 생각·취재·정리·집필을 연속적으로 해내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처음에는 글의 완성도가 좀 떨어지겠지만 말씀입니다. 이런 까닭을 대면서 "지금부터 두 시간 안에 모두 끝내야 합니다" 말했을 때 아이들 그 난감해하는 표정이란!

 

"평소 동아리에서 써본 서평이나 신문만들기와는 달리 짧게 주어진 시간 안에 종이 한 장을 글로 채우고 꾸며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함이 밀려왔다."(창원문성고 우지혜 학생) 그러나 아이들은 적응하는 능력이 대부분 뛰어났습니다.

 

편집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신문 만들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습니다. "분야를 정해 한 명씩 맡으면 효율적이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진행했더니, 마간시간보다 몇 분 늦었지만 두 번째로 빠르게 신문을 제작할 수 있었다. … 직접 취재를 하고, 마감시간을 정해 신문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고 좋은 경험이었다."(같은 학생)

 

게다가 이런 과정에서 발현된 아이들의 능력과 재치는 처음에 품었던 기대를 훌쩍 뛰어넘기 일쑤였습니다. 현직 기자들조차 만들기 어려운, 어쩌면 현직 기자이기에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지면 구성을 척척 해낸 것입니다.

 

이번에 참가한 일곱 학교(창원 문성고·창덕중, 통영여중, 양산여고, 밀양여중, 진주 개양중, 김해여중) 학생들의 작품 소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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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4 : 백두산보다 300m 높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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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부터 2월 6일까지 11박12일 가운데 우리는 3박4일을 히말라야 트레킹에 썼더랬습니다. 27일 아침 카트만두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동쪽에 있는 포카라공항까지 간 다음 곧바로 택시를 빌려타고 푼힐을 목적지로 하는 트레킹 출발 지점까지 갔습니다.

 

지금 돌아와 지도를 더듬어보니 해발 1100m 지점 나야풀이 거기였던 것 같습니다. 와서 보니 트레킹을 하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길과 사람이나 조랑말만 다닐 수 있는 길.

 

원래 트레킹 루트에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비록 비포장이기는 하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네팔도 산악 구석구석에 사람이 살고 있기 마련이기에 그 편리를 보자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걸어 올라가면서 만난 조랑말들.

 

하지만 트레커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길은 매력이 없습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흙먼지도 고약하지만 조용한 가운데 한땀한땀 걸어나가는 그런 분위기랄까 풍경이 깨지기 일쑤이지요. 그래서 우리 일행도 여기서 다시 지프를 빌려타고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걸어가면 네 시간은 걸렸을 거리를 한 시간도 채 안 돼 주파했습니다. 지프를 타고 달리면서 차창 밖으로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걷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좀 거시기해지면서 미안하기는 했습니다. 거기가 아마 1500 고지 힐레이지 싶습니다.

 

힐레에서부터는 줄곧 걸었는데요, 오르는 길이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트레킹 첫날은 울레리(2100m), 이튿날은 고레파니(2800m)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잡아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푼힐 올랐다가 돌아오는 여정에서.

겨울인 때문에 일찍 어두워지고 늦게 밝아왔습니다. 저녁 여섯 시 정도부터 이튿날 아침 일곱 시까지는 어둠 때문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걸었으니 피곤해 오래 잘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끼니를 때우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군것질을 하고 하더라도 밤 열 시 즈음이면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네댓 시에는 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추위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을 잘 몰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탓에 옷을 입는대로 껴입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영주형은 한국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추위에 단련돼 있었고,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시 온다면 성능 좋은 버너는 꼭 챙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핫팩에 담아 품고 자면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주형은 푼힐(3100m)이 히말라야 3대 조망처(view point) 가운데 하나라고 했습니다. 고레파니에서 푼힐까지는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습니다. 푼힐에 오르면 북쪽으로 우뚝 솟아난 설산들이 열병하듯이 펼쳐져 있다고 했습니다.

 

푼힐에서 보는 설산들. 아래쪽 만국기 같은 데는 우리로 치면 성황당쯤 된다고 합니다.

 

영주형은 날씨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여태까지 이틀 동안은 아주 맑았는데 내일 날씨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씨가 푼힐에서 보는 전망을 결정합니다.

 

영주형은 전날 밤 조그만 손전등을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올라간다. 길은 험하지 않다. 대신 캄캄하다.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길 잃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면서 함께 움직이면 된다.”

 

푼힐 전망대.

 

영주형은 푼힐에서 조망할 수 있는 히말라야산맥 8000m를 넘는 봉우리 이름들을 읊었습니다.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칸첸중가, 다울라기리, 마나슬루, 낭가파르바트 뭐 이런 정도였지 싶습니다.

 

무슨 봉우리는 삼각형으로 생겼으고 어디는 물고기처럼 보이며, 어떤 산은 아주 신성시하는 데여서 등반 자체가 금지돼 있으며 등등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그런 특징과 면모를 낱낱이 고르고 나누고 살피는 일에는 의지도 안목도 없었던 터라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냥, 만년설에 뒤덮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으로 족했던 것입니다. 푼힐 마루에 올라 차고 센 바람을 맞으며 조금 기다렸더니 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밝아오는 미명 가운데 북동쪽으로 설산들이 보였습니다.

 

푼힐에서 보는 설산들.

 

햇살은 날씨가 흐린 탓인지 설산에 크게 많이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함께 오른 사람들은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젊을수록 어릴수록 감탄 소리가 컸습니다. 프랑스 영국 일본 노르웨이 네덜란드 한국 중국 등등 사람들 국적은 여럿이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였습니다. “우와!!”

 

영주형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언러키(unlucky)’라고 되풀이 말했습니다. 날씨가 맑아 구름이 없었으면 푼힐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봉우리를 빠짐없이 봤을 텐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였습니다.

 

네팔을 아홉 번씩이나 찾은 영주형은 지식과 경험이 많다 보니 그런 불운(unluck)을 바로 알아차렸습지만 하지만 네팔에 대해서는 초짜인 저는 그런 불행조차도 행운(luck)으로 ‘착각’했습니다.

 

바라보이는 모든 봉우리들이 좋았고 산악과 구름에 얼비치는 붉은 햇살도 좋았으며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숨은 모습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제 '착각'이 별로 싫지 않았습니다.

 

푼힐에서 보는 설산들.

 

해가 남김없이 뜨고 나니 덩달아 감흥도 사그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갔습니다. 우리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곧바로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입니다. 물론 줄곧 내려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산 하나는 됨직한 가파른 오르막도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아마 타다파니(2700m)였지 싶습니다. 우리는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멋진 설산을 눈에 담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어쩌면 푼힐에서보다 풍경이 더 좋았습니다.

 

게스트하우스 창으로 보이는 설산들.

 

아침에 일어나 바깥을 서성대다 2층 방으로 도로 들어왔는데요, 북동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해가 솟으면서 설산을 비추는 장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방 안에 앉아서 이렇게 멋진 풍경을 누리는 행운(luck)이 제 몫이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우와!"라고 살짝 내지른 다음 얼른 사진을 한 장 찍고는 곧장 밑으로 내려가 축대 끄트머리에 서서 해 뜨는 모습 햇살이 설산에 어리는 모습을 느긋하게 즐기고 누렸습니다. 좀 있다 보니 영주형도 옆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더군요.

 

 

 

 

 

행운은 하나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타다파니를 출발한 우리는 간드룩(1900m)이라는 데서 잠깐 쉬면서 점심인가를 먹었는데요, 거기 우리가 들었던 게스트하우스(이름이 ‘외로운 행성(Hotel Lonely Planet)’이었습니다)는 바로 마당에서 전혀 힘들이지 않고 멋진 설산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안나푸르나 남벽, 힘출리, 강가푸르나, 안나푸르나-3, 마차푸추르.

 

 

영주형은 네팔에 대해서만큼은 참 아는 것이 많습니다. 거기 앉아 쉬면서 영주형은 간드룩에 우리하고 같은 몽골족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구릉족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몽골고원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이 골짜기로 스며들었다는 것입니다.

 

구릉족 마을 전시관 물건들. 우리나라 대로 만든 바구니나 광주리 같습니다.

 

그이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 말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고 전승되는데, 우리는 ‘엄마’라 하고 구릉족은 ‘아마’라 한다 했습니다.(이렇게 글로 적어놓으면 ‘엄마’와 ‘아마’가 별로 같지 않은 듯 여겨지지만 나중에 구릉족을 만나 실제로 발음을 들어보니 꽤 비슷했습니다.)

 

간드룩 빠져나가는 지점.

 

영주형은 이렇게 묻기도 했습니다. “훤주야, 백두산이 높이가 얼마냐?” “글쎄 2744m라고 배운 것 같은데요?” “우리가 올랐던 푼힐은 얼마야?” “3200m 고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맞다.  푼힐이 무슨 뜻일 것 같아?” “모르겠는데요.”

 

“그 일대에는 푼(Poon)이라는 종족이 살고 있거든. ‘푼족의 힐(hill)’, 언덕이라는 말이야. 말하자면 네팔에서는 백두산보다 높은 3200m짜리조차 그냥 언덕인 셈이지.” 사소하고 조그맣지만 전체의 특징을 제대로 담고 있는 부분을 잡아내는 영주형의 이런 능력이 저는 부럽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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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보는 안목 생각하는 능력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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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에너지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③시원하게 한 눈에 들도록 만들자

 

에너지지킴이청소년기자단에 참여한 학생들은 대부분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았고 자세는 또 능동적·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프로그램 전체가 탱글탱글하고 알차고 재미있게 진행됐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와 76만5000볼트짜리 초고압 송전철탑이 들어서는 밀양 용회마을을 취재하는 과정도 만족스러웠고, 그것을 신문으로 표현해 본 결과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창덕중학교는 창원 동읍에 있습니다. 무척 수줍어하는 아이들입니다.

 

취재한 결과를 그냥 평면적으로 늘어놓아서는 안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생각하면서 독자가 보기 좋고 읽기 쉽도록 해야 한다는 편집 원칙에 대한 이해도 빨랐고,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제대로 구현해내는 감각도 남달랐습니다.

 

딱 두 시간만 주고 신문만들기를 그 안에 마쳐야 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 짧은 동안에 만든 신문이 맞는지 미심쩍은 작품도 적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문에서 청소년기자단은 원자력 발전이나 송전철탑 같은 사회 현안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만든 신문을 스스로 품평해 보고 있습니다.

 

물론 초고압 송전철탑이 지나가는 밀양 용회마을 같은 경우 여태껏 그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그리고 당하는 주민이 힘없는 약자인 때문에 한전보다는 주민들을 좀더 동정적으로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바꿀 수 없는 확고한 기준으로 돼 있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이나 민주주의 원칙이 무시된 데 대해서는 더없이 날카롭고 따끔하게 짚었지만, 원자력 발전·송전철탑 설치 그 자체의 가치 여부와 찬반 여부에 대해서는 대체로 유연하고 신중하게 접근했습니다.

 

진주 개양중학교 아이들.

 

찬성과 반대 어느 한쪽을 선택한 경우도 대립하는 주장과 논리까지 나름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이를테면 제목은 "후쿠시마보다 무서운 고리원자력발전소",

글은 "오는 2017년 폐쇄 계획인 고리 1호기의 처리 문제나 방사성 폐기물 처리를 방법만 제시할 뿐 실질적 해결 방법조차 정확히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이미 10년을 더 쓴 고리 1호기의 잦은 고장이 있는 상황에서 밀양 주민과 반대측은 '고리1호기의 노후화는 세월호처럼 재앙이 될 수 있다'며 고리1호기의 빠른 폐쇄와 원자력 사용 자제를 주장하고 있다.

고리 원자력 관계자는 '설계는 30년 이용 계획이었지만 안전성만 확보되면 계속 가동할 수 있다'며 모호한 대답을 하고 있다. 원자력은 과연 미래지향적인가? 이제는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창원 문성고 아이들은 아주 발랄했습니다.

 

양산여고는 이번에 유일하게 밀양 용회마을을 찾지 않은 기자단입니다. 대신 부산에서 전기 에너지 절약·낭비 사례를 살폈는데 또한 편벽되지 않았습니다. 우승희·최아현·박화정·한비아 학생이 만든 〈和正신문〉이 보기입니다.

 

양산여고 친구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화정신문 만든 팀은 아닙니다.

 

"남포동 시장 곳곳을 다니다 보니 에어컨(바람)이 문 밖으로 그대로 나오는 경우가 있나 하면 쓸데없는 조명을 더해 전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에너지를 절약하고 효율있게 사용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

… 마트에 들어가니 과일·야채 코너에 신선도 유지를 위해 냉장고가 가동 중이었는데 거의 다 열린 채였다. 하지만 다른 매장을 보면 비닐 같은 얇은 종류의 문을 이용해서 더욱 신선하게 유지하고 전기도 덜 쓰는 방법이 있었다."

 

아울러 기성 보도매체에 대해서는 아프게 꼬집었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악마의 속삭임으로 왜곡된 언론'이라는 김해여중 학생들의 만평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전이 기자 뒤에 있고 그 뒤에는 다시 경찰과 정부가 있습니다. 다리 아래쪽에는 인권위원회와 지역주민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고요.

 

 

편집에서는 파격에 가까운 시도를 해 보였습니다. 기본으로 두 번 접은 위에 비스듬히 한 번 더 접어 지면을 여럿으로 활용한 친구들도 있었고 기사나 광고를 두세 겹으로 입히거나 입체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해여중 이 친구들은 지면 분할과 구성을 색다르게 했습니다.

 

압권은 통영여중에서 나왔습니다. 밀양 용회마을을 둘러싼 송전철탑에 걸쳐질 전깃줄을 그려넣고는 그 전깃줄을 공책에 쳐져 있는 줄처럼 삼아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도 되면 거기에 적어넣은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송전탑과 전깃줄이 대신 다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압권을 만든 아이들입니다.

활동을 마치고 몇몇 학생이 소감을 보내왔습니다. 현대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기라는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현장을 둘러보고 전기를 둘러싼 갈등·대립과 이해·협력 문제에 대해 청소년들이 들여다보고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취지가 나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취지는 같지만 내용은 좀더 알차게 만들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2015년은 주제가 우리 강 지킴이입니다. 4대강사업이 벌어진 낙동강과 4대강사업이 벌어지지 않은 남강을 찾아 비교 대조하고 무엇이 진짜 강과 물을 지키는 일인지 알아 봅니다.)

 

학생들 만든 신문을 이리저리 짚어보는 모습입니다.

 

"…… 단순하게 에너지 문제의 심각성이나 에너지 절약 실천 따위만 가르쳐주지 않고, 에너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 이와 관련한 문제가 있다면 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진행 과정에서 질문할 기회가 많았다는 점 또한 참 좋았다. 학교에서 받았던 단순 암기, 주입식 교육과 달리 능동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망설였지만 프로그램에 빠져들수록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줄어들었다."(창원문성고 2학년 우지혜)

 

"이틀간의 에너지지킴이청소년기자단 경험은 에너지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보람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원자력 발전 기술을 더 발달시켜야 한다', '위험성이 있는 원자력 발전을 지양해야 한다'라는 두 가지 입장을 취재하면서

원자력 발전과 송전탑 건립에 대한 갈등에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갈등의 원인인 전력소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의 소비생활에 대해서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창원문성고 2학년 김보령)

 

통영여중은 뭐랄까,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쉬운 구석이나 모자라는 대목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생들 탓이 아니었습니다. 이런저런 우리 사회 현안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현실이 어쩌면 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 참여 한 번으로 기사를 잘 쓰게 되고 편집을 잘 하게 되리라고 기대했다면 그것 또한 처음부터 잘못이겠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냥 감수성을 기르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않겠습니까.  <<끝>>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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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5 : 귀족 트레킹과 더 큰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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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 트레킹을 한지 네댓새 정도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살짝 미쳐버린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즐겨 먹던 김치·된장·고추장 이런 것들이 못 견디게 먹고 싶어지는 때문입니다.

 

네팔에는 한국인 트레커가 많았습니다. 푼힐 트레킹을 하는 도중에도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5월 봄날 성수기하고 견줄 정도는 절대 아니라지만, 길 가다 만나지는 트레커들 가운데 3분의2 정도는 동양사람이었고 동양사람 가운데 적어도 절반은 한국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게스트하우스에서 점심이나 저녁 끼니를 때울라치면 옆 테이블에서 나는 김치 냄새를 심심찮게 맡아야 했습니다. 냄새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보면 김치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 옆에는 고추장을 담은 플라스틱통이 있기 일쑤였습니다.

 

접니다.

 

우리 일행이 네팔에 가져간 반찬은 김 하나, 기름을 바르거나 굽거나 소금을 치거나 등등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생김 한 톳이었습니다. 우리는 김치나 고추장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한국서부터 그런 데에 크게 중독돼 있지는 않았었기에 주어지는대로 아무거나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푼힐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첫 게스트하우스에서 영주형은 김치 냄새 풍기는 옆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저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네팔 음식을 먹으면서 김치나 고추장을 곁들이는 정도니까. 충분히 봐줄 만하고도 남아.”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팔에 와서도 한국 음식을 그대로 먹는 경우도 있어요?” 영주형은 말했습니다. “그럼, 있지.” “어떻게요?” “돈 많은 사람들이야. 포터뿐만 아니라 시중드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까지 거느리고 트레킹을 하지.”

 

“식민지 지배자가 네팔 사람을 메이드(maid)로 삼고 누리는 꼴이야. 아침에도 몸만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면 된다. 고용된 현지인들이 이부자리도 치우고 텐트도 걷어주지. 전망 좋은 자리에서 잘 요리된 아침을 먹고 안락의자에 길게 기대어 있으면 현지인이 따끈한 커피를 바치고. 손만 내밀면 돼.”

 

트레킹 도중에 만난 아이들. 사진기가 신기한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눈이 똥그래졌습니다.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으니까요. “게스트하우스에서 안 자고 텐트를 쳐요?” “그 사람들 텐트는 게스트하우스보다 훨씬 낫지.” 하기야 게스트하우스 잠자리는 겨우 나무판자로 안팎 구분만 해 놓았을 뿐 한데나 마찬가지니까요. 게다가 요즘 고급 텐트가 좀 좋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 배낭도 지고 다니지 않아. 포터가 그런 것까지 다 져다 날라 주도록 돼 있거든. 그냥 맨 몸으로 정해진 루트대로 걷기만 하면 돼.”

 

“그래요? 자기 배낭도 안 지고 트레킹이라…….”

 

“점심 먹기로 미리 정한 장소에는 포터 하고 요리하는 사람들이 먼저 가서 자리도 깔아놓고 밥과 반찬을 다 해 놓거든. 다 먹고 나면 디저트로 커피랑 과일까지 갖다바치겠지. 밤에도 미리 쳐놓은 텐트에 깔아놓은 잠자리에 들어가 자기만 하면 돼. 다른 건 다 해주니까.”

 

“밤에 술자리도 똑같겠네요. 마음껏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그대로 손 털고 일어서면 고용된 사람들이 다 치워주고.”

 

“그렇겠지.”

 

“그러면 포터라든지 같이 움직이는 네팔 사람들이 엄청 많겠네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네팔 사람들.

 

“맞아. 보통 단체로 오는데, 총감독이 한 명이고 음식 파트, 텐트 파트, 배낭 파트, 기구 파트 등등 분야별로 감독이 한 명씩 또 있어. 그 아래에 일꾼들이 다시 줄줄이 딸려 있고. 전문 산악인들 에베레스트 원정대 수준이야. ”

 

네팔이 언제 다른 나라 식민지가 된 적은 없습니다만, 네팔은 인도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더불어 영국 영향도 지금까지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우와, 굉장하네요!”

 

“그럼 굉장하지. 트레킹하는 한국 사람보다 시중드는 네팔 사람이 대여섯 배는 많아.”

 

네팔 산길에서는 이처럼 조랑말이 요긴했습니다. 조랑말은 사람을 태우기도 합니다.

 

귀족 트레킹을 하면 분명 편하기는 엄청나게 편할 것 같았습니다. 걷는 것 말고는 별로 고생도 하지 않는 반면 누리는 것은 거의 대부분 한국 현지 돈 많은 사람 수준 그대로니까요. 달라진 음식 때문에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갑갑할 까닭도 없고요.

 

그런데 이렇게 트레킹 내내 한국식 밥과 김치와 고추장·된장을 먹고, 또 때로 돼지고기·소고기 한국식으로 요리해 먹고 하면 네팔 음식은 언제 어디서 먹어볼까요?

 

값진 좋은 음식이야 트레킹 마치고 카트만두나 포카라 같은 큰 도시서 먹을 수 있겠지만, 산악 지대 현지 음식은 손도 대지 못해 볼 것 같았습니다. 카레를 얹거나 채소를 올리는 것 말고는 굽거나 삶거나 절이거나 할 뿐인, 그 원형질 같은 소박함은 맛보지 못하겠지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네팔 사람들.

저는 그이들이 일껏 시간 내어 네팔까지 오는 보람은 무엇일까, 네팔 와서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느끼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네팔 트레킹을 하는 맛이 날까요?”

 

“그야 모르지.”

 

“그냥 네팔 가서 멋지게 잘 놀고 왔다, 만년설 덮인 설산 정말 대단하더라, 닷새 트레킹하는데 하루에 200만원씩 썼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정도? 좋고 편하기는 해도 네팔은 제대로 못 느낄 것 같은데요?”

 

“그 사람들도 나름 생각하고 느끼고 누리는 바가 있겠지. 어쨌든 눈 쌓인 설산이야 네팔 말고 다른 데서도 볼 수 있잖아. 네팔에 왔으면 네팔 음식도 먹어보고 네팔 잠자리에서 잠도 자고 네팔 마을에 들어가 사람들이랑 얘기도 나누고 해야 맛이 나지.”

 

푼힐에서 본 설산들.

 

“그렇죠. 눈은 우리나라 겨울 설악산도 좋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기껏 네팔에 와서 더 큰 설악산밖에 못 보고 가는 셈이네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요, 이렇게 네팔에 와서도 눈에 담는 풍경만 네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한국 것인 이런 사람들을 네팔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 트레커들보다 더 환영한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영주형이 일러줬습니다. “돈이 되니까. 그렇게 트레킹하면서 쓰는 돈이 보통 트레킹하는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되니까. 돈이 많이 벌리니까 포터들도 좋아하고.”

 

처음에는 식민 지배자를 모시는 하인처럼 구는 일을 왜 좋아할까 싶었지만, 듣고 보니 그 이치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영주형이 이렇게 네팔에 대해 다방면으로 많이 알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시간·장소 구분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재미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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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6 : 지상 최대의 개판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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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은 정말 ‘개판’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반드시 개가 있었습니다. 첫날밤을 묵은 네팔 수도 카트만두 도심에서도 개를 볼 수 있었고 이튿날부터 3박4일 일정으로 푼힐을 목적지로 삼아 트레킹을 하는 곳곳에도 개가 있었습니다. 오르내리는 산길에도 우리가 머무는 산골마을에도 개는 있었습니다.

 

트레킹을 마치고 나와 1월 30일 하룻밤을 지낸 두 번째 큰 도시 포카라에도 개들은 넘쳐났습니다. 포카라에서 우리는 저녁 무렵과 새벽녘에 대로를 따라 산책을 하곤 했는데요, 여기서는 개 여러 마리가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날 석가모니 탄생지 룸비니로 옮겨갔는데요, 거기 광장을 중심으로 바닥에 길게 벽돌을 깔아놓은 길에도 개들이 많았습니다. 여기 개들은 성지 순례 등등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먹이를 종종 던져주는 때문인지 포카라 개들보다 훨씬 줄기차게 따라다녔습니다.

 

룸비니 광장의 개.

 

치트완 국립공원 가까운 풀밭에 만난 개.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피부병이 심합니다.

룸비니 둘레 테누하와를 비롯해 두 군데 마을에도 들어가 봤는데요, 여기도 개들은 차고 넘쳤습니다. 야생 호랑이가 있다는 치트완 국립생태공원과 그 둘레 마을, 옛적 힌두사원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오래된 도시 박타푸르에도 개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카트만두로 와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세계 최대 불탑과 불교 사원 같은 데도 개판이었습니다. 불탑 앞에 서너 마리가 한꺼번에 뒹굴기도 했고 힌두사원에서는 개들이 탑 위에 올라가 엎드려 있기도 했습니다.

 

힌두사원 탑 위에 올라간 개들.

 

영주형한테 물었습니다. “네팔에는 개들이 참 많네요.” “네팔에서는 개를 기르지 않아. 그래서 저렇게 마음대로 어디든 돌아다녀.” 네팔에 온 뒤로 개가 목줄을 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었고 사람과 동행하는 개도 본 적이 없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습니다.

 

네팔에서는 개를 사람이 먹는 고기로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키워서 잡아먹을 일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개를 소유하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습니다. 개들은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사람이 버리거나 던져주는 먹이가 있으면 주워먹고 암캐 수캐가 때맞춰 교미해 새끼도 낳습니다.

 

도시의 밤은 거리의 개들이 짖고 으르릉대는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개소리가 하도 심해 게스트하우스에서 잠들었다가도 순간순간 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들은 밤새 싸움을 했습니다. 길거리의 개들한테도 자기 영역이 있는데요, 이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는 다른 개와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시장거리에서 서로 장난치고 있는 개들.

 

포카라에서 밤중에 들른 허름한 술집에도 개가 있었습니다. 문 밖에만 있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술집 주인한테 “당신 개냐?”고 물었더니 아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고 남은 고기조각을 개한테 던져줬습니다. 그러니까 그 술집이 자리잡은 일대를 자기 영역으로 삼은 개였습니다.

 

네팔 도시 곳곳에는 크고작은 힌두사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고 빌고 하면서 여기에 제물을 바칩니다. 이런 제물도 개들에게 먹이일 것입니다. 이런 사원 또한 개들은 서로 영역을 나눠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네팔 개들은 눈여겨보지 않아도 쉽게 알아챌 정도로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털이 벗겨져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경우는 모두 피부병에 걸려 살갗이 짓물러져 있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이쪽저쪽을 긁어대는 어떤 개는 정도가 심해서 진물이 흘러내리기도 했습니다.

 

힌두사원 안에 드러누운 개들.

 

아무도 개를 소유하지 않고(요즘 들어서는 애완용 또는 호신용으로 소유하는 경우가 조금씩 생겨나는 모양이기는 했습니다) 아무도 개를 보살피지 않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래서 네팔은 구속(拘束) 구금(拘禁) 구인(拘引)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나라입니다. 개(狗)처럼 묶는 것이 구속이고 개(狗)처럼 가두는 것이 구금이며 개(狗)처럼 끌고가는 것이 구인입니다. 네팔에는 구속되는 개도 없고 구금되는 개도 없고 구인되는 개도 없습니다.

 

네팔에서 개는 자유(自由)입니다. 자유는 단순히 ‘자기 뜻대로 행동함’이 아닙니다. ‘스스로 말미암음’입니다. 다른 무엇에 기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존재하는 존재라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네팔에서 개들은 자기 힘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먹이를 기대지 않으면 존재하지 못합니다. 근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현실에서 자유롭다 보니 비참해졌습니다. 사람의 소유가 되지 못하니까 당연히 사람의 보호도 받지 못합니다. 소유하다는 보호하다와 같은말이고 보호받다는 소유당하다와 같은말입니다.

 

치트완국립공원 근처 타루족이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데 개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네팔에서 이렇게 사람과 개의 관계를 보고 있으려니 대한민국과 그 국민의 관계에 문득 생각이 미쳤습니다. 사람과 개 사이에는 ‘소유’가 성립되지만 국가와 국민 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를 소속으로 바꾸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소속되다는 보호받다와 같은말이 되고 소속시키다는 보호하다와 같은말이 되지 싶습니다. 소속되는 국민은 국가에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소속시키는 국가 또한 국민에게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국민은 삶터·일터에서 일하며 세금을 내고 국가도 지키며 교육까지 받는 의무를 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런 국민이 병들지 않고 굶주리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 두 사람과 네팔 개 한 마리.

 

네팔에서 개들은 소유당하지 못해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소속돼 있어도 보호받지 못하는 다수가 있습니다. 네팔에서 개들은 그나마 사람한테 먹이는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상남도라는 광역자치단체는 여태 줘왔던 아이들 점심 밥그릇을 빼앗았습니다.

 

국면이 이렇다 보니, 이런 것도 한 번 따져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네팔 개가 팔자가 더 좋을까요? 대한민국 국민이 팔자가 더 좋을까요? 네팔이 더 개판인가요? 대한민국이 더 개판인가요? 개들은 뭐라 할까요? "멍멍, 그런 건 알아서 하시고, 피부병이나 치료해 주세요. 그게 당신들한테도 이로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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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7 : 젊은 히말라야가 선물한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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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200m 푼힐에 올랐다 돌아오는 트레킹에 처음 접어들었을 때 저 멀리 길이 보였습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바닥에 무엇인가 깔려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푸르게도 보이고 희게도 보였는데, 저는 그냥 콘크리트를 쳐서 바닥에 깔았겠거니 지레짐작하고 좀 낙담을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대한민국에서도 질리도록 밟고다닌 콘크리트고 아스팔트인데 여기 네팔 히말라야까지 와서도 저런 콘크리트 계단을 타고 올라야 한다니…….

 

그러고 있는데 영주형 얘기가 들렸습니다. “저기 길에 바닥에 뭐가 깔려 있지? 저게 돌이야. 히말라야가 젊은 지형이라서 저런 돌이 많아. 살짝만 쳐도 편평하게 옆으로 잘 갈라져서 계단으로 쓰기에 아주 좋아. 우리나라로 치면 청석쯤 될까?” 역시 영주형이었습니다. 네팔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좀 엉뚱하지만, 돌 이야기를 하니까 문득 중학교 때 어느 소설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누가 쓴 무슨 소설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강한 역설과 대비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때문인지 지금도 한 번씩 툭툭 떠오르는 글귀입니다.

 

평평한 돌을 박아 이쪽저쪽을 갈라놓고 아래에 홈을 냈습니다. 물은 여기를 통해 흐릅니다.

 

“돌, 이보다 단단한 결속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부딪히면 깨어질 정도로 단단한 결속인 것이다.” 서로 아끼고 위하는 한 가정이 어찌어찌 해서 무참하게 망가져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로 기억됩니다만, 돌은 단단하기에 깨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진흙은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돌이 지나치게 단단해도 히말라야서는 곤란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 많은 화강암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쉽게 깨어지지 않을 뿐더러 정교하게 때려도 일정한 방향을 타고 갈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히말라야는 젊은 지형이어서 지층의 압력을 오래 받지 않았기에 그 돌들이 화강암보다 덜 야문 모양입니다.

 

나무그늘 아래 납작돌을 쌓아 만든 쉼터. 앞쪽 돌을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 고누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보기에 네팔 으뜸 문화유산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돌계단입니다. 힌두사원 불교유적 이런저런 자연공원이 있지만 그 내력과 사연과 지금껏 이어지는 쓰임새와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등으로 보자면 돌계단이 제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늘로 날아서 실어나른다면 몰라도, 모든 물자가 이 돌계단 돌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유통될 수 없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온갖 도구, 집짓는 자재, 학교에서 아이들 공부하는 문구,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트레커들한테 파는 갖은 음식 이런 오만 것들이 돌계단을 오르내립니다.

 

게다가 전화 같은 것이 없었던 시절에는 이 돌계단 돌길은 정보가 유통되는 가장 유력한 통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귀고 연애하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무엇을 꾸고 갚고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죽어서 장례하고 하는 모든 교류와 행사가 돌계단 돌길을 통했을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 처지에서는 없으면 안 되는 목숨줄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면 생기는 자연스런 산길은 언제나 걷기가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한 번 걸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비탈이 심한 가풀막 같은 데에 디딜 돌이나 붙잡을 나무가 없고 바닥은 흙(그것도 모래흙)만 깔려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람한테도 버거운 이런 비탈을 소나 말은 아예 지나다닐 수가 없습니다. 돌계단은 그렇게 비탈이 많이 지고 가파른 데는 돌계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물론, 돌계단이 아닌 데도 없지 않습니다.

 

깔린 돌이 좀 색다릅니다.

 

평평하거나 조금밖에 비탈지지 않은데도 깔려 있는 돌계단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흙바닥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늘 젖어 있거나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돌계단을 놓는 일은 아주 고된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거의 대부분 산길에대 돌을 깔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위치나 각도 등을 섬세하게 배려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노동의 고단함을 뛰어넘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넓적돌을 고쳐 까는 작업 현장.

 

깨진 데를 들어내고 깔 새 넓적돌이 오른편에 기대어져 있습니다.

 

앞에 여자들말고 뒤에 남자들 지고 가는 물건이 바로 돌들입니다.

돌계단은 사람한테도 유용하지만 소나 말이 다니는 데는 더욱 유용합니다. 특히 조랑말(pony)을 빼고는 히말라야 산악지대 사람살이를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조랑말은 걷기 힘든 사람도 태우고 사람이 감당 못하는 무거운 짐도 옮깁니다.

 

 

조랑말은 흙비탈을 다니지 못합니다. 반면 돌계단이 놓여 있으면 따각따각 발굽소리 내며 쉽게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조랑말은 히말라야형 택시 겸 트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돌계단이 없었으면 조랑말도 없습니다. 조랑말이 없었다면 히말라야 사람들은 훨씬 더 팍팍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조랑말이 다니도록 하려고 돌계단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퍽이나 넉넉한 돌계단 너비가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히말라야 젊은 지형이 만들어낸 이 잘 깨어지는 돌은 돌계단 말고도 여러 군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다른 데로 빼돌리는 물길을 내는 데도 쓰입니다. 물길은 우리가 걷는 길을 가로지르기도 하고 길을 따라 위아래로 나 있기도 했습니다.

 

물받이통. 아래쪽 진펀한 데 옆으로 나란한 돌들은 물길 뚜껑 노릇도 합니다.

 

현지 사람들이 논밭을 오가는 데 쓰임직한 오솔길도 비탈진 데는 얇고 평평한 이 돌을 박아 딛도록 해 놓았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 목을 축이는 데 요긴했을 옹달샘이나 물받이통도 재료가 돌입니다. 곳곳에 들어선 쉼터 또한 얇게 저민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들었습니다.

 

오르내릴 때 디디라고 박아넣은 넓적돌.

 

쉼터.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악지대다 보니 평평한 땅에 바로 지은 경우는 드물고 아래쪽 3~4m를 이런 돌들로 쌓아올린 위에 지은 집들이 많습니다. 지붕도 이 얇고 널따란 돌로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이은 너와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돌판이었습니다.

 

돌축대와 돌마당.

 

유리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지붕이 모두 넓적돌입니다.

 

심지어 대문조차도 그랬습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보는 정낭 같은 모양인데 양쪽에 이런 얇게 떼어낸 돌을 세우고 가운데 대나무를 가로질렀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으면 가운데 대나무를 빼놓습니다.

 

 

콘크리트 만드는 데도 돌은 쓰입니다. 히말라야에는 아직 나무 집이 많지만 콘크리트 집도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콘크리트는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을 섞어 만듭니다. 깊은 산골에 모래가 많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모래를 적게 쓰기 위해 사람들은 이 돌을 더욱 잘게 쪼개어 시멘트·모래와 함께 버무린다고 합니다.

 

일가족이 돌을 잘게 깨고 있습니다. 영주형은 "이 일을 하도록 돼 있는 '카스트'"라 했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히말라야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돌과 더불어 살아왔습니다. 돌로 길을 내고 돌로 계단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고 돌로 지붕을 이고 돌로 문을 세우고 돌로 물을 가두고 물길을 냈습니다. 젊은 히말라야가 만든 돌들은 2000년 3000년 동안 사람살이를 떠받쳐온 자연의 선물이었습니다.

 

화단조차 돌을 꽂아 구분지었습니다.

 

특히 돌길 돌계단은 히말라야 사람살이를 대표하는 역사 유물입니다. 대부분 유물은 삶과 멀찌감치 떨어져 감상하는 대상이기 십상입니다만, 히말라야 골짜기 많은 마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돌계단은, 지금도 사람과 가축이 오가며 때로 부서지고 때로 고쳐지는 사람살이의 현장이었습니다.

 

나중에 고치는 데 쓰려고 갖다 놓은 넓적돌들.

 

걷는 내내 "이것도 돌이네", "우와 축대 봐라. 5m는 되겠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영주형하고도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크게 멀리 앞서가버린 상태였습니다. 

 

점심 먹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런 소감을 말했더니 이랬습니다. "그럼! 돌계단이야말로 수천 년 내려왔으면서도 지금껏 살아 있는 피땀어린 문화유산이지. 그런데 4000m 넘으면 길도 좁고 돌계단도 없단다." "왜요?" "거기는 사람이 안 살거든." 제가 참 멍청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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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채현국 "우등생은 아첨꾼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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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라.”


“우등생은 아첨꾼이 되기 쉽다.”

“서울대가 97%의 아첨꾼을 키운다.”


“시시하게 살아라.”

“돈 권력 명예를 멀리하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 자식이 성공하고 출세하길 바라는 부모들은 싫어할지 모르겠다.


장의사적 직업으로 살고 싶은가?


채현국 어른은 우리 사회의 직업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산파적인 직업’과 ‘장의사적인 직업’이 그것이다.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채현국 어른 세대간 대화. @김주완


“남의 갈등, 남의 불행, 남의 불안을 이용해서 자기가 서는 인간들은 장의사적인 직업, 남과 함께 하면 산파적 직업입니다.


목사, 스님, 신부, 학교 선생이라 할지라도 자기 재미 보려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순간 장의사적 직업이 되는 거죠. 대통령 해먹고 총리 해먹고, 장·차관하는 놈 중에 장의사 아닌 놈 몇 놈이나 있을까요?


대학총장, 대학교수, 중·고등학교에서 날리는 선생 중 몇 명이나 장의사가 아닐까요? 의사 중에서는 또 몇 사람이나 장의사 아닐까요?”


이에 누군가 물었다. “우리사회에서 인기 있는 직업들이 선생님한테는 대체로 장의사로군요.”


그러자 채현국 어른이 말했다.


“자식이 그런 직업 되기만 바라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네 어머니들이야. 엄마는 안 그런데 학부모 엄마만 되면 그래. 꼭 그런 장의사 직업이 되기만 바라면서….”


그렇다. 자기 자식이 비록 ‘장의사적 직업인’이 될지라도 돈·권력·명예를 지닌 사람이 되길 원하는 분이라면 이 글을, 이 영상을 보지 말기 바란다.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채현국 어른 세대간 대화. @김주완



“확실한 건 없다.

모든 것을 다각도로 의심하라.”




지난 2월 26일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세대간 대화’ 자리였다.


먼저 고3 여학생이 물었다. “(채현국 어른은) 인문학 열풍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데요. 그러면 저희 같은 젊은 세대가 학문을 할 때 과연 어떤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받은 채현국 어른은 “자, 이게 고등학생의 질문입니다. 뽑아오기를 우등생을 뽑아왔거든요. 우등생이 뭡니까? 고정관념과 기존 교육, 기성 지식과 정보에 밝은 아이 아닙니까?”라고 말해 이 여학생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면서 이런 화두를 던졌다.


“남이 좋다는 책은 의심부터 하지 않으면 인문학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은 남의 지식에 달린 게 아니라 나의 태도에 달렸습니다.”


채현국 어른의 자세한 말은 영상으로 확인하기 바란다.


다행히도 이 여학생은 채현국 어른의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대화를 마친 후 여학생이 밝힌 소감이다.


“사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말씀하시고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또 저도 약간의 우등생 계열에 속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말씀 듣다 보니까 과연 우등생이란 게 뭔지, 정말 전형적인 교육에 길들여진 게 우등생 아닌지, 제 주변에도 그런 우등생이 많은데요. 그런 우등생들이 채현국 이사장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채현국 어른은 젊은이들에게 기성교육의 포로가 되지 말고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말했다. @김주완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르다.

깨달아야 아는 것이 된다.”




다음엔 대학생이 ‘배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채현국 어른은 “배운다는 것은 뭔가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배움은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다각도로 의심할 수 있느냐. 의심할 수 없으면 영혼의 자유는커녕 지식의 자유도 없습니다. 의심만이 배움의 자유, 지식의 자유를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질서만 가르치지, 방황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의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과학도 믿으면 미신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등생은 아첨꾼이 되기 쉽다.”




서울대학교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서울대학은 97%의 아첨꾼을 키워냅니다. 왜냐면 ‘우수하다’ ‘똑똑하다’는 것은 먼저 있는 것을 잘 배운 것이니, 잘 배웠으니 아첨 잘할 수밖에요.


그래도 그 중에 몇몇은 호루라기 부는 놈이 가끔 나와요. 그건 참 신통해. 제일 아첨꾼 많은 서울대학에서 호루라기 부는 놈도 또 나와요.”



마지막으로 한 젊은이가 물었다. “어떻게 그리 자유분방하게 생각하고 살 수 있느냐. 용기를 가진 지적호기심에 대해 듣고 싶다.”


채현국 어른은 “시시한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전제한 뒤, 이렇게 말했다.


“똑똑한 체 안 하고 잘난 체 안 하고 늘 순박할 수 있어야 호기심이 제대로 살아남습니다. (내가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는데) 교수가 철학도 외워서 가르치는 걸 보고 실망했습니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이 되려면 자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 나의 지식은 과연 깨달아서 아는 걸까, 아니면 외워서 기억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순간 나 또한 기성 지식의 포로가 되어 체제 순응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력에 아첨하는 우등생이 되어 내 영달만 추구하는 장의사적 직업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뉴스펀딩에 연재했던 글입니다.뉴스펀딩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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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블로그에서 자동으로 넘어가는 페이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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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우리 티스토리 블로그가 이 페이지로 자동 전환되어 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글을 클릭해 읽고 읽던 중 갑자기 이 페이지로 넘어가 버리고, 검색을 한 후 리스트 페이지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티스토리 블로그 쓰시는 분들, 거기서도 이런 일 발생하나요? 악성코드에 감염된 걸까요? 티스토리 블로그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요.


혹 원인과 대책을 아시는 분 있으면 꼭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주소는 이겁니다. http://cubestar.com/?redir=frame&uid=cubestar550e695e8a0e03.86836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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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은 세상의 것, 세금은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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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재)남성문화재단 김장하 이사장의 말입니다. 이분에게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문형배 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문 판사가 사법고시 합격 후 김장하 이사장을 찾아가 이렇게 인사를 드렸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에 대한 김 이사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김장하 선생 @경상대학교


저희가 기록한 책 <풍운아 채현국>의 주인공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도 이렇게 말합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이처럼 앞장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힘들여 번 돈이라 하더라도 세상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월간 《피플파워》 4월호에 첫 순서로 소개되는 오춘길 (주)현대정밀 대표도 비록 가업은 자식에게 물려주겠지만, 자신이 가진 재산 대부분은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오춘길 대표 역시 요즘 무상급식 중단으로 학부모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 못지않게 어려운 성장과정을 거쳐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그러나 한 분은 국민의 세금으로 거둬들인 아이들 밥값을 자기 마음대로 줬다 빼앗았다 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 분은 자기 돈을 세상에 나눠주고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이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 중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 불행한 부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부자가 아니어도 나눔과 봉사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 이들은요?


월간 피플파워 4월호 표지


역시 이번호에 소개되는 창원우체국 임성준 집배원을 보십시오. 임 씨는 자신의 선행으로 받은 상금 500만 원을 선뜻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은 제가 가져도 되겠지만, 상금은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돼서요."


임 씨 또한 홍준표 도지사보다는 10여 년이나 연배가 어리지만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자랐다고 합니다.


이처럼 <피플파워>에는 각자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득합니다. 못된 정치인들로부터 얻은 짜증을 이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날려버리시길 바랍니다.


참, 저는 요즘 모두에 거론한 김장하 이사장을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워낙 자신을 내세우길 싫어하셔서 자료나 어록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혹 이분에 대한 기록을 갖고 계신 분은 연락주시길. 소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관련 글 :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김장하 선생의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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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8 : 따뜻한 날씨의 선물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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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은 도시도 시골도 집을 짓는 현장이 많았습니다. 대충 볼 때 도시는 이미 지은 1층 위에 새로 2층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시골에서는 1층부터 새로 짓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네팔은 벽을 치고 나서 천장을 콘크리트로 이어붙인 다음 그것이 굳을 때까지 받쳐두는 자재로 대나무를 쓰는 것이 색달랐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처럼 세로로 잘 갈라지기 때문에 대나무는 무거운 물건을 떠받치지 못하는데요 네팔서는 길게 잘라 그렇게 쓰고 있었습니다.

 

 

네팔 대나무는 우리나라 대나무보다 훨씬 굵게 훨씬 높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우리나라보다 많이 따뜻한 덕분이지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대나무는 집 뒤 언덕배기 따위에 무리를 이루지만 네팔 대나무는 집 뒤보다는 들판이나 산비탈에 수십 그루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대나무를 보고도 대나무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나라 대나무와는 모양이 많이 달랐습니다. 키가 아주 높이까지 자라나 있었고 또 위쪽 끄트머리는 마치 잎을 늘어뜨린 파초 또는 우리나라 길가 수양버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땅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작 재어놓은 데를 받치고 있는 대나무. 앞에는 밑둥이 빠진 대나무 광주리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무리 높게 자라나 있어도 그 끝은 다만 조금 수그려져 있기는 할 뿐 그 기색은 아무래도 하늘을 향하는 분위기인데 말씀입니다.

 

저는 이런 네팔 대나무를 보면서 우리 옛사람 고산 윤선도가 조선이 아니라 네팔에 태어났다면 아무리 오우가(五友歌)를 짓고 대나무를 노래했어도 ‘꼿꼿하다’거나 ‘곧다’고는 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하면서 속으로 슬쩍 웃었습니다.

 

왜,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조.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더러코 사시에 프르니 고를 됴하하노라.’

 

텃밭 울타리도 이렇게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습니다.

 

온대인 우리나라서는 대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 뻗는 느낌이 나기에 무슨 지조나 절개의 곧은 상징이 될 수 있었지만, 아열대인 네팔에서는 너무 많이 자라는 바람에 끝이 아래를 향해 처져 있기에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나무가 이렇게 지천으로 있으니 네팔에서 대나무가 사람들 삶에 깊숙하게 들어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합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자기 가까운 데서 먼저 쓸만한 거리를 장만하려 드니까요.

 

아마도 대나무가 없었다면 적어도 네팔 히말라야 골짜기 사람살이는 지금과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기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는 물론 어떤 바퀴도 굴러다니지 못하는 길이 아직도 많기 때문에 사람 힘이나 조랑말을 써서 물건을 나릅니다.

 

대나무 광주리를 이고 진 아이들. 사람 크기에 따라 광주리 크기도 다릅니다.

 

그런 때 쓰는 광주리를 바로 이 대나무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나무 껍질을 벗겨 쪼개면 부드럽고 탄력이 있으면서도 질긴 재료가 됩니다. 부드러워서 얼기설기 짜기 좋고 탄력이 있어 짜고 나면 꽤 큰 공간이 안으로 만들어지며 질기기 때문에 낡아서 헤질 때까지 오래오래 쓸 수 있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이런 광주리를 천으로 묶은 다음 이마에 두르고 산길을 오르내리는데요, 요즘 배낭과도 견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짐이 그 안에 들어간답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대나무가 있지 않았더라면 네팔 사람들 물건 나르는 수고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해지리라 짐작되 것입니다.

 

 

대나무는 이밖에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집 앞 텃밭 울타리로도 쓰이고 게스트하우스 앞마당 빨랫줄에도 대나무는 걸쳐져 있었습니다.(다만 죽부인(竹夫人)은 보이지 않았는데, 여름 날씨가 우리나라처럼 찌는 무더위(물+더위)가 아니어서 쓸모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마당 한 쪽 구석 ‘어리’는 참 정겨웠습니다. 짐을 나를 때 쓰는 광주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이 생긴 것이 바로 어리입니다. 우리랑 같은 몽골리안인 타루족이 사는 마을 농가 안마당에서 발견하고는 슬몃 들여다봤더니 어미 오리 한 마리와 새끼 오리 여러 마리가 바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농사짓는 시골 출신인지라, 어린 시절 병아리를 어리에 가두고 풀어주고 하면서 그 조그만 닭의 새끼 품고는 따뜻한 체온을 주고받고 했던 기억이 새삼 돋아났습니다. 그러다 어떤 날은 아침에 닭장에 가보면 닭은 사라지고 깃털만 몇몇 남아 허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면서 범인으로 족제비를 지목하곤 했었습니다. 닭을 잃고 나서 바로는 물론 아니었지만, 엄마가 그런 족제비를 잡아 가죽을 벗겨내고는 빨랫줄에 말린 적도 있었으니 일진일퇴 공방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같은 짐승과 사람 사이 가축을 둘러싼 공방이 네팔에서는 지금도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겠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라진 아련하지도 않은 옛날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말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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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삶을 소개한 인쇄물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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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모친상 조문을 갔다가 특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조문보'라는 것이었는데요.


고인 박봉순(1922~2015) 여사가 어떤 분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조문객들이 알 수 있도록 소개한 A4 한 장짜리 인쇄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장례문화는 '고인이 배제된' 행사로 전락해버린 측면이 많죠. 많은 조문객이 모이긴 하지만, 정작 돌아가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오로지 남아 있는 상주와 관계에만 관심이 있죠.


그래서 이날 빈소에서 배포된 이 조문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A4를 두 번 접은 표지격 페이지에는 이렇게 고인의 영정이 있습니다.



펼치면 고인의 약전(略傳)이 이렇게 나옵니다. 어디에서 몇째 딸로 태어나 몇 살에 남편을 만나 몇남 몇녀를 두었고, 남편을 마흔 일곱에 여의었으며, 47년간 홀로 살아왔다는 내용입니다. 그 자식들이 장성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면을 뒤집으니 이렇게 유족들 이름과 나이, 가족사진도 실었습니다. 장례 일정도 있고, 조문객들에 대한 인사말도 있습니다.


사실 십 수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결혼신문' '칠순신문' 등을 해보겠다고 한 지인이 있었는데, 결국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수요를 개척하지 못했고, 결혼이나 칠순, 사망 등 정보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부모 중 누군가 사망했을 때 상주들은 사실 정신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찾아가 '이런 조문보를 만들어보자'고 이른바 '영업행위'를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또 고인의 삶을 취재하는 것도 어렵고요. 그걸 빠르게 글로 정리하고 인쇄 배포하는 작업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번 조문보를 만든 곳은 '협동조합 은빛기획'이란 곳이더군요.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더니 그간 10여 종의 조문보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은빛기획 조문보 소개 바로가기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습니다. 예상대로 지인들 중심으로 그동안 만들어왔고 앞으로 저변을 넓혀가려 한다네요. 그동안 성유보 선생, 가수 신해철, 김기원 교수 조문보도 여기서 냈더군요.


은빛기획과 일종의 상조회사인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조문보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김두관 전 지사 모친 조문보는 500부 44만 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떨까요? 그 정도 비용 부담이라면 기꺼이 이런 조문보를 주문할 의향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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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09 :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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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치트완국립공원 근처에는 타루족이 사는 마을이 둘 있습니다. 우리는 소우라하라는 마을에 묵었는데 거기서 서남쪽으로 한 군데 있고 동북쪽으로 한 군데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돌아와서 지도를 찾아보니 동북쪽 타루족 마을이 타로울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는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져 있는 북쪽 산악지대와는 달리 지평선이 아스라한 평원지대입니다. 네팔에서는 이 평원을 ‘터라이’라 하는데 얼마 전만 해도 말라리아모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답니다.

 

타루족은 1000년도 더 전부터 터라이평원 북서에서 남동으로 길게 흩어져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 몽골리안인데요, 이들은 히말라야도 넘고 산악지대도 벗어나 여기 인도 국경 가까운 평원까지 내려온 데는 어떤 사연이 있었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짐작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습니다.

 

벼락을 자세히 보면 분홍색 무늬가 있습니다. 주먹 쥔 손으로 옆을 찍으면 나오는 무늬로 타루족임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어쨌거나 평원지대다 보니 집도 산골과 달랐습니다. 히말라야 산악지대는 집들이 모두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여기 집은 재료가 진흙이 기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흙집도 옛날 볏짚 같은 띠나 대나무를 잘게 쪼갠 살을 바른 위에 황토를 버무리기 일쑤였는데 여기 흙집도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지붕은 우리처럼 기와를 올린 경우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콘크리트 제품도 섞여 있었고 많은 경우는 구하기 쉬운 띠(이를테면 여기서 ‘카라이’라 하는 코끼리풀)로 이었더랬습니다. 이런 흙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타로울리 마을에 들어가면 한가운데 타루족 문화전시관 비슷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네팔 평원지대 기와집. 암키와 수키와 구분이 없습니다.

 

영주형은 그 옆 흙집 앞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랑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은 우리로 치자면 마을 이장쯤 되는 동네 유지 같았는데요, 문화전시관 비슷한 건물을 그 집에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시관을 먼저 들러 구경했습니다. 크지 않은 편이고 여러 물건이 나와 있지는 않았습니다. 따로 입장료나 관람료는 받지 않았지만 그 집 젊은 여자가 문을 따주고 옆에서 동행하면서 이래저래 설명해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기부(Donation)라 적힌 상자에 100루피 지폐를 한 장 넣었습니다.

 

문화전시관에서 무언가에 대해 제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영주형은 집 들머리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더니 몇 해 전에 총기사고로 한꺼번에 숨진 네팔 임금 일가라면서 이 집 주인은 그러면 왕당파일지도 모른다 했습니다.

 

영주형은 이런 사진과 그 옆 힌두신 시바 그림을 갖고 말을 섞었고요, 덕분에 우리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되도 않는 손짓 몸짓 말짓까지 곁들여 얘기를 나눴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형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집안에 한 번 들어가 보자. 허락을 받았어.”

 

우리는 우와! 함성을 내지르며 생각지도 않은 소중한 기회를 반겼습니다. 그 집 사람들은 이런 우리가 우리가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지는 모양인지 조금은 낯설어 하면서도 웃음 띤 얼굴로 맞아줬습니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좋아했고요.

 

타로울리 마을의 일상 풍경.

 

우리는 이처럼 옛날부터 있어온 흙집을 보면 그런 집안에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자제품 따위는 없으리라 거의 본능적으로 지레짐작합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방으로 보이는 한가운데에, 비록 뒤가 불룩한 구형(우리로 치면)이기는 하지만 그럴 듯한 텔레비전이 한 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리한테 스며 있는 선입견 또는 편견이란 이렇게도 대책없이 무차별적인 것이었습니다.

 

스스럼없이 둘러봐도 된다고는 했지만, ‘나름’ ‘문명인’인 우리는 그래도 속속들이 들춰볼 수는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더운 바깥과 달리 시원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갓 캔 듯한 고구마가 있었는데 알이 굵지 않아 토종 같고 씹는 맛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왼쪽으로도 집이 이어져 있었는데요, 이것이 바깥에서 볼 때는 아예 다른 집처럼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그 쪽 집에서 한 할머니가 보이기에 “Who?” 누구냐 물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습니다. “My father's first wife.” 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

 

잠깐이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대답을 했다면 두 사람은 아주 쌀쌀하고 냉랭한 사이라 여기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네팔입니다. 네팔 힌두교는 한 남편에 여러 아내가 공존 가능합니다.

 

네팔 평원지대 구멍가게 모습.

 

그러고 보니 아까 바깥 평상에 늙수그레한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 젊은 여자는, 자기가 그 배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기 아버지가 처음 결혼한 여자라는 뜻으로 말한 셈입니다. 잠깐 헤매던 저는 우리 식으로는 뭐라 해야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큰엄마?’ 비슷하지만 맞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를 맞이한 이 20대 초반 젊은 여자들은요, 가까이서 보니 그 까무잡잡한 살결이 어찌나 곱고 그 커다란 눈동자가 어찌나 맑던지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보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젊은 여자들과 또 한 세대는 아래임직한 꼬마 아이들이 우리랑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요 그 할머니 같은 father's first wife가 뭐라 한 마디 했는데 분위기가 갑자기 움츠러들면서 조용해졌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젊은 계집애들이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그렇게 떠들어!” 이런 정도로 짐작하며 살짝 웃었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어린 꼬마들이 바로 이 젊은 여자들의 자식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다들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밖에 안 되는 나이인데도 벌써 혼인을 해서(married) 아들딸을 낳은 것입니다. 그이들 가운데는 다시 아랫배가 살짝 볼록해져 있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간호사가 될 것(I will be nurse.)이라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공부도 했고 시험도 쳤다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이를 위해 진심으로 손뼉을 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며칠 있지 않았지만 네팔에서 여자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가 무척 어려운 일임이 넉넉하게 짐작됐기 때문이지요.

 

이어서 둘러본 뒤뜰은 다른 여느 네팔 집안처럼 너른 논밭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어 나는 소출은 앞쪽 대문이 아니라 이렇게 뒤뜰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는 셈입니다.

 

뒤뜰은 또 현대와 고대의 공존 무대였습니다. 인류가 구석기시대부터 써온 갈돌도 있고, 철기시대 만들어진 가스생산설비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도 갈돌은 본 적이 없고 고작 박물관 등지에서 봤을 뿐인데요, 여기 갈돌은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곡식을 갈고 껍질을 벗기는 모양입니다.

 

갈돌로 갈아보고 있습니다. 왼편 우물처럼 보이는 것이 가스생산설비입니다. 여기에 짐승 똥을 넣고 돌리면 나오는 가스는 제 머리 뒤쪽 튀어나온 콘크리트 기둥을 통해 파이프를 부엌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아주 제 원형질이라도 만난 듯이 이 갈돌을 보고 좋아라 했습니다만, 역시나 아는 것이 많고 관찰력이 남다른 영주형은 그 옆에 있는 쇠파이프에 먼저 눈이 간 모양이었습니다. 영주형은 좋은 볼거리를 일러줄 수 있게 됐다는 듯이 눈부터 먼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짐승 똥에서 가스를 뽑아내 연료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장치라고. 여기서부터 이 파이프를 따라서 저기 저 쪽 부엌으로 연결되지.” 그러면서 쳐다보던 젊은 여자들한테 뭐라 얘기하더니 곧바로 “예스”라는 답을 얻어내는 영주형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바퀴 두르고 돌아나왔는데 그냥 가기는 아쉬웠습니다. 특히 영주형은 어린아이를 좋아해 안고 어르고도 했는데요, 가방을 뒤져보니 아이들한테 줄만한 과자가 집혔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넷이고 과자는 셋이었습니다.

 

타로울리 들렀다가 소우라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는 수 없어서 셋은 그대로 주고 하나는 더 사서 주겠다며 따라오라(follow me) 했습니다. 우리는 마을 들머리 구멍가게까지 가서 20루피(200원)인가 40루피인가에 과자 하나를 사서 손에 쥐여 줬습니다. 젊은 엄마는 웃으며 ‘나마스테’라 하더니 돌아서 가는데, 줄곧 한 손을 들고 우리를 향해 흔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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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은 도요오카시를 따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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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는 멸종된 황새를 야생에 복원한 선구자입니다.

 

일본 야생에서 황새가 사라진 까닭은 논밭에 뿌려댄 농약에 있었습니다. 도요오카시는 1958년부터 헬리콥터로 무차별적으로 농약을 뿌려댔습니다.

 

황새는 사는 영역이 사람과 겹칩니다. 황새는 얕은 물에 사는 미꾸라지나 붕어나 논고둥 같은 생물을 먹고 삽니다. 먹는 양이 엄청나서 하루에 5㎏, 미꾸라지로 치면 80마리랍니다. 개울과 도랑이 실핏줄처럼 흘러다니는 야트막한 산기슭이나 들판이 황새들 먹이터입니다.

 

농약이 황새 멸종 원인임은 1966년 도쿄교육대학 일본응용동물곤충학회 '황새의 죽음' 연구·발표에서 확인됐습니다. 야생에서 죽은 황새 세 마리를 검사했더니 수은이 치사량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어미가 농약에 중독돼 있는데 새끼가 제대로 태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도요오카시는 이에 한 해 전 시작한 황새 인공 사육과 번식에 더욱 노력했으나 처음 20년 동안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1985년 러시아에서 야생 황새 여섯 마리를 들여오면서 사정이 달라졌고 이윽고 1989년 인공 번식으로 두 마리 황새가 태어나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도요오카 인공둥지탑과 황새들.

 

도요오카시는 상급 자치단체인 효고현과 더불어 황새 인공 사육·번식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야생 방사에 대비해 '황새를 키우는 농법' 개발·보급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황새농법은 황새가 자연 생태 하늘을 날아다니도록 하는 데 목표가 있었습니다. 도요오카 일대 논밭에다 사람들이 계속 농약을 뿌려대는 이상, 황새 방사는 시체 생산과 다를 바 없는 수작이었습니다.

 

황새농법 요지는 이렇습니다. 황새 먹이 생존 확대 농법, 무농약·저농약 농법, 일품이 관행농업보다 늘어나지 않는 농법, 소출이 줄어들지 않는 농법.

 

도요오카 이즈시초에 있는, 일본 야생에서 태어나 우리나를 찾아온 첫 황새 봉순이가 태어난 인공둥지탑. 2월 13일 찍었는데, 황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황새농법이 개발됐지만 실제 적용은 또다른 문제였습니다. 농민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보다 익숙한 것이 좋기 마련입니다. 낯선 농법은 더 큰 매력이 필요했습니다.

 

도요오카시는 지역농협을 통해 황새농법 쌀을 죄다 비싼 값에 사들이도록 했습니다. 수매가가 30㎏ 기준으로 일반농법 쌀은 6500엔 정도지만 황새농법으로 키운 쌀은 저농약이 8500엔, 무농약은 1만 1000엔입니다.

 

지역농협은 이를 '황새의 춤' 브랜드로 만들어 자체 유통망으로 파는데요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황새의 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우리나라라면 과연 꿈이라도 꿀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도랑 관련은 하천과에서 하고 농법 관련은 농업기술센터에서 하고 시설물 설치는 토목과에서 하고 유통은 또다른 어떤 부서에서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뉘면 엇박자가 나서 생태계 복원이나 사람과 자연의 공존 같은 가치는 현실이 아닌 머릿속이나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도요오카시에는 '황새공생부'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황새 관련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다른 부서 눈치 보지 않고 또 휘둘리지도 않는, 우리로 치면 '과'보다 높은 '국' 단위 부서입니다.

 

이런 부서가 있고 이런 부서를 운영하는 단체장이 있었기에, 1965년부터 1989년까지 20년 넘게 인공번식에 실패해 죽을 쑬 때도 휘둘리지 않고 황새 복원을 목표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따오기 박제.

경남에서는 창녕군이 따오기를 두고 도요오카시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녕군에는 이런 따오기공생국이 없고 따오기공생과도 없습니다.

 

이래 갖고는 따오기와 인간의 공생(共生)은커녕 물론 따오기 혼자만의 독생(獨生)도 이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3월 31일치에 실린 ‘데스크칼럼’을 조금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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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10 : 두 엄마와 세 아이의 행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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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완국립공원이 있는 소우라하라는 마을에 묵고 있을 때였습니다. 부처님 태어나신 룸비니를 거쳐 들어갔으니 2월 4일 즈음이지 싶습니다.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인 타루족이 사는 마을 타루올리를 찾아가는 길이었는데요 가다보니 우리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일행이 있었습니다. 여자 어른 둘이랑 아이 셋이었는데요, 철공소 같은 데서 자전거를 이어 붙인 손수레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손수레에는 우리나라 양배추 비슷한 채소와 치커리·브로콜리 비슷한 채소가 실려 있었습니다. 여자 어른 둘은 뒤에서 수레를 밀면서 가고 서너 살밖에 안 된 것 같은 가장 어린 아이는 수레에 타고 있었으며 앞쪽 자전거에는 형과 동생으로 보이는 터울이 세 살쯤이지 싶은 두 아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이들이 처음에는 우리보다 한참 뒤에 있었는데요 우리가 구경하느라 어슬렁거리는 사이 바짝 따라붙었습니다. 그이들은 모두 얼굴이 해맑고 웃는 표정이었습니다.

 

웃으면서 손을 들고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했더니 아이들은 더욱 웃음이 크게 벌어지면서 ‘나마스테’라 받고요, 여자 어른들은 살짝 고개를 숙이듯이 웃음과 더불어 ‘나마스테’, 했습니다.

 

우리는 손수레를 내려다보면서 무엇무엇이 있는지 살펴봤는데요, 그이들은 우리가 잘 볼 수 있도록 가던 길을 멈춰서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만 해도 그 사람들이 어디 밭에서 기른 채소를 수확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전거 바퀴를 돌리며 앞서 나아갔고 우리는 여기저기 눈길을 던지며 처져서 걸었습니다. 우리는 마을 어귀에서 이이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마을 사람 몇몇이 나와 이들 손수레 채소들을 훑어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놀고 있었고, 수레를 밀던 여자들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짐작건대 그이들은 밭에서 채소를 수확해 집으로 가져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도매상에게서 외상으로 받았을 채소를 싣고 팔러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보니까 100단위 루피도 아닌 10단위 루피(우리나라 돈으로 100원 정도) 몇 장과 채소 몇몇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저 초라한 채소를 팔아 일용할 양식을 마련할 돈 몇 푼을 얻는구나…….

 

여자 둘은 어떤 한 남자의 첫째 둘째 아내겠고 아이들 셋은 그런 부부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겠구나……. 가장인 남자도 남루하나마 끼니를 위해 어딘가에  나가 일을 하거나 일감을 기다리겠구나…….

 

손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나마스테’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러면서 자전거에 앉은 아이들을 봤습니다. 둘 가운데 키가 작고 더 어린 아이는 앞쪽에 앉아 핸들을 잡고 방향을 가늠했습니다. 키가 크고 나이가 더 든 아이는 뒤쪽에 앉아 페달을 젓고 있었습니다.

 

네팔 평원지대 마을의 구멍가게 풍경.

 

저는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릴 때 집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집에서는 그 사람에게 자전거로 배달을 시켰습니다. 아이가 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커다랗고 시커먼 짐자전차였습니다.

 

그 사람은 동생이랑 사이가 좋았습니다. 동생도 그 사람을 잘 따랐습니다. 둘은 짐칸에 배달할 물건을 싣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지금 네팔에서 눈으로 보는 저 모습 저대로 동생은 앞에서 핸들로 방향을 잡고 그 사람은 뒤에서 페달을 저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여가 선용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일삼아 하는 일상 노동이었습니다. 둘은 그 때 함께 달리며 웃음을 날렸겠지만 그 웃음 끝자락에는 노동의 고단함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틈에 아이들은 손수레와 함께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머니를 뒤져 얼마 되지 않는 네팔 루피를 꺼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들어가 구멍가게에서 아이들 숫자대로 우리나라 ‘뿌셔뿌셔’ 같은 과자를 샀습니다.

 

앞서간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안쪽 이리저리 굽어 있는 골목을 따라갔더니 얼마 안 가 채소를 놓고 흥정하는 손수레와 아이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엄마들한테 다가가 아이들한테 과자를 주고 싶다고 손짓 몸짓 섞어 말했습니다.

 

뒤쪽에 실린 푸른색 물병이 보입니다.

 

어른들은 좀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웃었습니다. 과자를 받아든 아이들은 얼굴을 하늘로 향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봉지를 뜯어 과자를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보였습니다.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우리는 떠나가는 그이들을 향해 세 번째 인사를 했습니다. ‘나마스테!’ 그이들도 웃고 우리도 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아이들한테 무슨 죄가 있담, 가난한 부모를 만난 탓뿐인데……. 부모들한테는 또 무슨 죄가 있담, 가난한 나라 네팔에 태어난 잘못뿐인데…….’

 

멀어져 가는 손수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손수레에 실려 있는 푸르스름한 페트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행상에 나서면서 마실 물을 거기에다 담았겠지요. 그것 말고는 따로 점심 끼니도 챙겨져 있지 않은 손수레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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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항 벅수가 나무 아니고 돌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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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두 번째 역사 탐방은 통영으로 떠났습니다. 두산중공업과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마련하고 우리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주관합니다.

 

통영 하면 동피랑이나 케이블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뭐니뭐니 해도 중심은 통제영이랍니다. 통제영이 없었다면 통영이라는 도시도 있을 수 없거든요. 통제영은 가족 나들이나 현장체험학습으로 한두 번씩은 다녀올 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냥 다녀온 것과 제대로 둘러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제법 멉니다. 이번 통영 탐방의 핵심은 통제영 제대로 알기. 통제영이라 하면 다들 이순신 장군을 떠올립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에 임명됐을 당시 통제영은 한산도에 있었습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통제영은 고성이나 거제로 떠돌았습니다. 그런 통제영이 지금 자리에 들어선 것은 1603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 시절이랍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지금 통제영과 이순신 장군이 관련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고 물었더니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머지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통제영과 이순신 장군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무척 재미있어했습니다.

 

미션 수행을 하고 나서 풀이를 위해 세병관 마루에 올랐습니다. 세병관은 우리나라 국보입니다. 우리가 맨발로 디뎌볼 수 있는 국보는 많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쓴 아이들 소감 가운데는 "나는 그동안 통영에 있는 통제영 하면 당연히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활약을 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 나는 오늘 알게 된 사실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무척 유식해 보이겠지"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관성적으로 잘못 알기 십상인 한 가지를 제대로 알게 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이렇듯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답니다.

 

통제영에서 팀별로 미션 수행을 했더니 조금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통제영에 나와 있는 문화관광해설사도 문제를 훑어보더니 너무 많고 어렵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문제를 풀러 돌아다녔습니다. 마치고 나서 보니까 가장 많이 맞힌 팀이 세 개 틀린 열여섯 문제였습니다.

 

미션 수행을 위해 기삽석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통제영에서 미션 수행을 하는 아이들 표정.

점심을 먹고나서 당포성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통제영 미션 문제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던 친구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냈을까요?"

 

통제영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가장 큰 전통 목조건물인 세병관 앞에서 간단한 설명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바로 옆 십이공방을 들르거나 마당을 한 바퀴 도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통제사가 집무하고 생활했던 운주당·경무당이나 후원, 그리고 주전소(요즘으로 치면 화폐 제작 공장)는 잘 모릅니다.

 

미션 문제는 세병관을 중심으로 오른쪽 관아 건물에서 왼쪽 십이공방까지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풀도록 배치했습니다. 정답을 찾아내기도 좋지만 통제영 전체를 자세히 둘러보게 하는 데에 더 목적이 있다 하니 선생님들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통제영 엽전 만들던 자리(주전소터)를 둘러보는 아이들.

 

박경리·윤이상·유치환·김춘수·전혁림 등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된 뿌리가 292년 이어져온 통제영 문화와 닿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통제사가 자체적으로 엽전을 찍어낼 수 있었을 만큼 규모와 권력이 대단했다는 데 대한 설명을 덧붙이며 당포성이 있는 삼덕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삼덕항에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특징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비행기나 탱크가 없던 시절에 침략은 대부분 강이나 바다를 통해서였습니다.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당포성도 마찬가지랍니다. 당포성은 고려 말기 왜구를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이 쌓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일어난 해에는 이순신 장군이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당포해전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장군이 싸움을 했던 뜻깊은 자리라 얘기해 줬더니 아이들이 무척 흥미로워 합니다. 아이들은 역시 심오한 지식 보다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

 

당포성.

 

당포성에 올라 삼덕항 바다를 내려보면서.

 

바다로부터 말미암았지만 육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벅수입니다. 벅수는 들머리에 서서 마을과 사람을 지키고 액도 막아주는 액막이 역할을 하는 돌장승입니다. 삼덕항 벅수는 항구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바다 근처 장승이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진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다 근처 장승도 나무로 만들었는데 갯바람에 쉽게 상해 2년마다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장승 만들 사람이 구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습니다.

 

신성한 장승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테면 액이 없어야 한답니다. 몸도 마음도 정갈한 사람을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요! 그러다 보니 아예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돌로 만들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부풀어 오르는 풋나물과 새순 사이로 시원하게 부는 바람,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봄바다 내음 속에 당포성을 내려오는 아이들에게 이처럼 벅수 이야기를 들려주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는 이뤄진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벅수 앞에서 너도나도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몇몇은 무척 간절한 표정도 있었습니다.

 

삼덕항 돌벅수를 들여다보는 아이들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탐방소감을 썼습니다. 세 아이에게 ‘쥐꼬리’ 장학금이 돌아갔습니다. 글을 아주 잘 쓴 한 친구 그리고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열정으로 쓴 한 친구 그리고 또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누나'와 손을 잡고 미션을 했는데 마음이 너무 따뜻하고 좋았다…" 이런 글을 뽑지 않고 어떤 글을 뽑을소냐!!!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선생님들이 환호와 박수로 축하를 해 줬습니다.

 

오늘 하루도 잘 놀고 왔습니다. 3월 이번 나들이에는 누리봄다문화·좋은씨앗교실·경화(진해)·행복한·팔용·메아리(창원) 지역아동센터가 함께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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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캐다 가시 찔렸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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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중공업·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사회복지경남공동모금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2015 토요동구밖교실 3월 생태체험 나들이는 28일 합천으로 떠났습니다. 샘동네·옹달샘·회원한솔·느티나무·어울림 다섯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서였습니다.

 

합천은 가야산·황매산처럼 좋은 산이 많습니다. 저마다 골짜기를 이루고 개울까지 펼쳐보이는 산들이랍니다. 골짜기 개울을 타고 흐르는 물들은 모여서 강을 이룹니다. 사람들은 개울과 강줄기를 따라 마을을 만들고 논밭을 일구며 살아갑니다.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이 합천인 것입니다.

 

오늘 나들이는 나물 캐기와 습지 산책입니다. 가회면 나무실마을에서 쑥과 달래와 냉이를 캐고 합천읍내 가까운 대양면 정양늪생태공원에서 물 위를 걷고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황매산 자락 모산재 아래 시내를 끼고 들어앉은 나무실마을. 주차장이 널러 좋습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언덕과 논밭으로 스며듭니다. 언덕에는 아직 검불로 덮여 있고 논밭은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나물을 캐 본 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딱 한 친구가 손을 듭니다. 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랬더니 이번에는 셋입니다. 옛날 20년 30년 전에는 사람들 삶이 그래도 자연 속에 있었는데 이제는 나물캐기조차 이렇게 체험을 나와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답니다.

 

 

 

시절이 이렇다 보니 나물 캐는 방법도 아이들은 모릅니다. 함께 온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 선생님 가운데서도 젊은 몇몇은 그랬습니다. 잎을 뜯으면 안 되고 뿌리와 맞닿은 줄기 끄트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그 아래 흙 속으로 칼을 찔러넣어야 합니다.

 

쑥이랑 냉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이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양지바른 데 수북한 검불을 들추면 무리지어 나타나는 쑥입니다. 쑥은 쑥쑥 잘 자란다 해서 쑥입니다. 이런 데 쑥은 하야스럼한 보풀을 일구며 말끔하게 자라 있습니다.

 

쑥 같은 봄나물은 중금속을 잘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중금속은 사람한테 해롭습니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찻길 가까운 데서 캐는 쑥이 그다지 좋지 않은 까닭입니다. 나무실마을은 하루종일 꼽아봐야 지나다니는 자동차가 열 대 안팎입니다. 이런 데 봄나물은 거의 보약 수준이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아이들 나물 찾는 안목이랑 나물 캐는 솜씨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어떤 아이는 나눠준 봉지가 금세 불룩해져 있습니다. 점심에 때맞춰 불러모았지만 나물 캐는 재미에 맛이 든 아이들은 쉽게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돌려세워 한우로 유명한 합천 삼가에서 해인축산식당 불고기정식으로 배를 채운 뒤 정양늪으로 옮겨갔습니다. 그 들머리에서 제일 많이 나물을 캔 팀을 골라 선물로 '쥐꼬리 장학금'을 건넸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봄꽃 봄나물 이름 알아보는 시간. 대표선수로는 민들레·산수유·냉이·달래·개불알풀·광대풀·돌나물·꽃다지가 뽑혔습니다. 저마다 이름표를 붙이고 바닥에 늘어놓은 다음 일정한 시간을 주고 아이들에게 생긴 특징을 보면서 이름을 익히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름표를 싹 거둬들인 뒤 풀·꽃 이름을 적게 했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다 맞힌 팀이 넷씩이나 됐습니다.(뒤집어서, 하나 이상 틀린 팀도 열넷이므로 적지는 않습니다.) 가위바위보로 1등을 정해 '쥐꼬리 장학금'을 한 차례 더 전했습니다.

 

어쨌거나 봄꽃·봄풀은 하나같이 자그맣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쉴 새 없이 꽃대를 밀어올리는 민들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민들레라도 이른 봄에 피는 꽃은 낮은포복으로 거의 땅바닥에 붙은 반면 낮은 물론 아침에도 따뜻한 5월 이흐로는 꽃이 땅 위로 꽤 솟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봄꽃이 낮은 까닭은 공기보다 땅이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햇볕을 받아 데워진 땅과 가까울수록 꽃을 피우는 데 이로운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어여쁜 봄꽃들이 작은 까닭을 들판에서 눈과 손으로 새겼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물과 흙이 만나는 습지 정양늪을 거닐었습니다. 지난해 스러진 마름과 갈대 등은 아직 새 순이 돋지 않았는데 왼편으로 늘어선 물버들에는 새 잎을 머금은 눈들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봄은 봄인 듯 아닌 듯할 때가 어쩌면 가장 좋습니다. 잎으로 활짝 피어나기 전에 누군가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밝은 연둣빛으로 가지를 물들이는 이 때가 어쩌면 봄기운이 가장 잘 느껴지겠는 것입니다.

 

데크를 따라 깔깔거리며 오가던 아이들은 끄트머리에서 징검다리를 만나면서 한 번 더 즐거워합니다. 연한 물감을 칠한 듯한 버드나무 아래 그늘을 거니는 친구도 있었고요.

 

돌아오는 버스에서 체험 소감을 썼습니다. 정양늪에서 돌다리를 뛰어다녀서 좋았다거나 나물 캐기를 할 때 처음에는 쑥 모양이나 캐는 방법을 몰랐는데 하다 보니 알게 돼서 많이 캤다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으뜸은 이랬습니다. "나물을 캐다 가시에 찔렸는데 나물을 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가시에 찔렸을까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찡했다."

 

이보다 어린 한 친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쑥을 캐니까 재미있고 힘들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힘들게 쑥을 캔다."

 

즐겁게 놀고, 나물도 캐고, 봄꽃이 작은 까닭도 알고 봄풀 이름도 여럿 새긴 데 더해 엄마 생각 이웃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면 이보다 더한 공부가 어디 있을까요. 이런 친구들에게 한 차례 더 '쥐꼬리장학금'이 돌아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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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생업마저 포기한 양윤모 영화평론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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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 넘어 잘 나가던 직업을 버린 까닭


양윤모(梁允模). 1956년 제주시 출생. 한국 나이로 60이니 어른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앞서 여기서 소개한 채현국(81), 장형숙(89), 방배추(81) 어른들에 비하면 한참 젊은 나이다. 하지만 나이 50이 넘어 잘 나가던 직업을 훌쩍 내려놓고 고향 제주도로 낙향, 강정마을에서 전혀 다른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이 분을 언젠가는 꼭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바로 그 양윤모 선생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대안언론을 고민하는 제주도 사람들(가칭)’이란 모임이 있는데, 제주도에 와서 지역언론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3~15일 그래서 찾아간 제주도였다.


대안언론을 준비하는 제주도 사람들. 왼쪽 앞에 양윤모 선생도 보인다. @김주완


그는 2008년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눌러앉기 전까지 약 30년을 영화인으로 살며 서울 충무로를 벗어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서울예대 영화과를 나와 강우석필름아카데미 초대교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스크린쿼터영화인대책위원회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서울에서 살았다. 그냥 그렇게 영화평론가로 계속 살아도 괜찮은 삶이었다.


잠시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찾았던 고향에서 강정마을에 건설되고 있는 제주해군기지 문제가 눈에 들어왔고, 이곳 주민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시작한지 8년째가 됐다. 주소도 아예 이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집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강정 투쟁과정에서 만난 ‘사회적 아들’ 부부의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산다. 세 끼 밥도 강정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보내주는 음식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삼거리식당’에서 먹는다. 옷도 전국에서 보내온 ‘구호품’ 중에서 골라 입는다.


삼거리 식당 앞에서 양윤모 선생과 필자. @김주완


가난한 자로 강정마을에 눌러앉았다


다른 재산도 전혀 없다.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형성한 재산은 모두 아내 명의로 줘버렸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고향의 집과 땅은 동생들에게 나눠줬다. 보행이 좋고 기계문명을 싫어해 자동차도 갖지 않았다. 물론 운전면허도 없다. 아들(26)과 딸(22)이 있지만 “아버지 인생에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자기 삶을 찾아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저는 사실 강정에 ‘가난한 자’로 온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 여기서 제가 온전히 몰입하는 걸 좋아해요. ‘온전한 몰입’ 그 다섯 단어를 좋아해서….”


그가 말하는 온전한 몰입이라는 게 뭘까?


“제가 제주시 건입동 출신인데요. 여기 강정마을은 딱 그 반대편이에요. 제주에 있을 땐 육지를 보며 동경하고, 수평선 너머 구름을 보며 세상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죠. 나이 50이 넘어 고향에 돌아와 길 찾기라고나 할까요?


이 현실(해군기지 반대운동)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정면충돌하자. 간디 선생이 진리실험이라 하잖아요. 저에겐 이 강정 투쟁이 그 진리실험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간디 선생 근처에도 못가겠지만 여기서 투쟁을 통해 모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다 보는 거예요.”


네 번의 구속, 세 번의 목숨 건 단식


그렇게 시작한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그는 네 번이나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했다. 가장 최근엔 2013년 2월부터 435일간 수감생활을 했고, 2011년 74일, 2012년 42일, 2013년 52일간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그에겐 ‘영화평론가’란 직함이 따라 다니지만 지난 8년 동안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대체 어떤 신념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걸까?


강정 투쟁이 이상하게 재밌다는 양윤모 선생. @김주완


“저는 이 강정 투쟁이 이상하게 재미있어요. 사실 저는 평화에 대한 감각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영화지식인으로 살아온 상식으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제주 해군기지라는 게 너무 터무니가 없는 거예요. 이 사업의 순수성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군도 하나의 이기집단이라는 거죠.


국제적인 전쟁괴짜들,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 하지만 껍데기 속을 들여다보면 군수산업체 패밀리들의 잔치라고 보는 거죠. 그들은 나중에 전쟁도 계획하게 되고 그것을 또 실행하게 되고…. 그런 국제적인 전쟁 괴짜들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런 악의 세력이 있다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선의 세력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연대해야 한다. 그런 연대가 이뤄지고 있어요. 지금 강정을 중심으로. 그런 행복감을 느껴요.”


영화 <플래툰>와 <7월 4일생>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받은 유명한 영화인 올리버 스톤 감독도 2013년 강정마을을 찾아 반대운동을 지원하고 수감 중인 양윤모 선생을 면회한 적이 있다.당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양 선생을 일컬어 “매우 훌륭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칭한 바 있다. 그는 올리버 스톤 감독을 어떻게 봤을까.


“교도소로 면회를 왔는데, 제가 평론가로서 작가 연구가 참 단편적이고 그 사람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눈이 부족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와 대화를 나눠보니 좋은 영화 만드는 사람이기 이전에 세계평화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깊은지 느꼈어요.


제가 마침 교도소에서 LA타임스 기자가 쓴 평화에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거길 보면 미국의 어느 예수회에 형제 신부님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구속만 26회인가? 그런 기록이 있어요. 올리버 스톤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알고 있더라고요. 형제 중에 한 사람은 죽었다고 말해주더군요. 미국이란 큰 땅에서 평화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그걸 알고 있는 거예요. 저는 평화나 사회문제를 아직까지 좀 낭만적이거나 자유주의적으로 접근한 게 아닌가 하고 반성했죠.”


그는 이처럼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해군기지 공사현장 출입구. @김주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되었던 사람들도 강정에 다녀갔는데, 그런 사람들과 연대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곳이 강정이에요. 그분들은 오면 우리나라 지식인들처럼 와서 쓰윽 구경이나 하고 사진 찍고 격려말만 주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구속을 각오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런 실천하는 모습들, 마치 자기네 일처럼 문제를 끌어안고 우리에게 동지애를 보여주는 것 있죠?


우리는 자칫 운동하다 보면 사람은 사라지고 논리만 발전하고 스펙만 쌓이잖아요. 그거 갖고 또 타인을 제압하잖아요. 소위 지도한다고 하면서….


그러기 쉬운데, 물론 제가 또 잘못 볼 수도 있겠고 자칫 저도 그럴 수가 있겠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평화운동 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라든가 문제를 공유할 때 경청하고 자기 경험을 녹여내서 함께 나누려고 하고 또 제안들도 많이 하고요. 그렇게 나온 제안을 또 실행하는 데 함께 하고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저는 이 투쟁이 고난인 것 같은데, 여기서 제가 과거 젊었을 때 누렸던 것보다 더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봐요. 공자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50에 하늘의 뜻이 보인다는….(웃음)”


해군기지 건설? 언젠가 쓰러질 허상일뿐


하지만 그와 문정현 신부, 마을 주민과 수많은 활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럼비는 파괴되었고 해군기지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사실상 해군기지 건설은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러면 이 투쟁도 결국은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실상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것은 하나의 물질로는 서 있을지 몰라도 저에겐 아무런 장애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것도 하나의 허상이죠. 언젠가는 쓰러질 허상이고. 그 어쩌면 그 자체가 사유의 대상이 되더라고요. 저게 있음으로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저게 없었다면 향후 삶을 살아가는데 새로운 동기부여가 없었을 거잖아요.어쩌면 진부한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되거나 연명하는 삶, 과거를 팔아먹고 사는 삶이 될 수 있었는데, 저걸 만나면서 과거가 다 날아갔어요. 늘 새로운 것이 열리는 거예요.”


언젠가 쓰러질 허상이라고?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환상이고 너무 이상적인 생각은 아닐까?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미 건설된 해군기지를 어떻게 하려는 거냐고.


“우리는 저걸 평화공원으로 만드는 획기적인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과격하고 성급해서 막 욕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열심히 지어라. 튼튼하게 지어라.’(웃음) 장차 평화공원으로 우리가 용도를 바꾸면 되니까. 그런 꿈을 꾸면서 싸우니까 즐거운 거예요.(웃음)”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해군기지 건설현장. @김주완


그랬다. 그는 강정마을에서 일생의 꿈을 걸고 있었다. 제주도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꿈이었다.


“‘비무장 평화의 섬’을 헌법 조항에 명시하는 운동을 할 겁니다. 제주도에는 일체 군사문화가 들어올 수 없도록. 그러기 위해 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하자. 그렇게 해서 이 제주도를 국제적인 평화의 섬으로 만들자.


노무현 대통령이 선언했던 ‘세계 평화의 섬’이라는 허구가 뭐냐면 군사기지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의 섬이라는 거거든요. 중앙정부가 제주도민들과 상의도 안 하고 마치 정책적인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선언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뒤따라온 것이 해군기지인 거죠.


그래서 이걸 계속 우리가 저지하지 않으면 공군기지가 곧 들어올 것이고 또 해병대 부대가 증설될 예정이에요. 이런 걸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 이런 눈앞의 미시적인 투쟁도 중요하지만 거시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게 뭐냐면 코스타리카처럼 군사문화가 없는 제주도를 만들자는 거죠. 꿈을 갖고 있고 멈추지 않고 의지를 모으면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비무장 평화의 섬 계획을 설명하는 양윤모 선생. @김주완


비무장 평화의 섬·올바른 언론 만드는데 ‘온전한 몰입’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러나 과연 실현가능성이 있을까?


“천만 명이 사실 쉽진 않거든요. 세월호가 천만 서명운동을 시도했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600만 명인가? 세월호라고 하는 정말 인륜에 관한 문제잖아요. 살아있는 아이들이 희망을 갖고 있는데 그걸 저버린 정부를 원망하는 사람이 뭉쳐도 그 정도 밖에 안 된 거예요.


제주도 비무장 평화의 섬? 이것도 사람들 또 시큰둥하겠죠.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눈 굴려가듯이 할 겁니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는 그런 사업들 많이 해봤잖아요. 천천히 지치지 않게 하려고 해요.”


나를 초청해 지역언론에 대한 강의를 들은 것도 그 꿈을 실현해나가기 위한 단계 중 하나였다.


“제주도 매체들은 전부 해군 광고를 실어요. 예를 들면 지난 1월 30일 행정대집행을 했잖아요. 그 다음날 민군복합관광 이미지 광고를 쫙 깔아요. 소통할 수 있는 공론장이 없는 거예요. 그런 언론이 너무 절실해요.


올바른 언론이 없다보니 제주도 지식인들이 사고가 멈춘 거예요. 교양도 없어지고. 언론이 교정이 안 되어서는 지식체계가 계속 흔들려요. 그래서 제주지역에 우리의 언론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거죠. 비무장 평화의 섬 건설과 올바른 언론을 만드는 것, 이 두 가지에 ‘온전한 몰입’을 해야죠.”


거의 준공단계인 강정 생명 평화 사목센터. @김주완


지금 강정마을 평화센터 뒤 해군기지 건설현장 앞에는 4층짜리 건축물 한 동이 늠름하게 올라가고 있다. 곧 준공단계다.


“저 건물은 문정현 신부님이 민주화운동유공자 피해보상금을 종자돈으로 해서 전국의 천주교와 연대해가지고 약정금 받아 건물 올리고 있는 거예요. 6월이면 완공되는데 해군은 지금 비상 걸린 거죠.바로 앞에 저 건물이 들어서니….


자기들은 8년 동안 해도 성과가 안 나오는데, 규모는 작지만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건물이 올라가잖아요. 강정 생명평화 사목센터가 될텐데. 그래서 비상 걸렸어요.(웃음)”


강정마을 곳곳엔 이렇게 거리 문고가 있고, 노란 깃발이 펄럭인다. @김주완


※포털 다음 뉴스펀딩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다음에서 보기☞ http://m.newsfund.media.daum.net/episode/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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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블로그를 운영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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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대세라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블로그를 최고의 소셜미디어로 친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은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냥 콘텐츠 유통 또는 소비수단일 뿐 콘텐츠 생산수단이 될 순 없다. 검색기능도 취약하고 휘발성이 워낙 강해 시간이 지나 아래로 밀리면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를 기업이나 공장에 비유한다. 나머지는 모두 백화점(페이스북) 또는 인터넷쇼핑몰(트위터), 동네슈퍼(카카오스토리) 등 소비·유통점이다. 기업이나 공장에서 상품(콘텐츠)를 생산하여 다양한 유통업체를 통해 판매한다는 의미다. 블로그에 글을 써서 저장해놓고, 이를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플러스, 빙글에 링크하며 간단한 코멘트를 달면 내 글이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소비되는 방식이다. 일일이 링크하기 귀찮다면 자동 연동해 송고할 수도 있다. 물론 포털에서도 검색된다.


한 곳에 체계적으로 모아둔 글은 그 자체가 훌륭한 데이터베이스다. 블로그는 워낙 저장기능이 뛰어나고 검색도 쉬워 훌륭한 콘텐츠 보관 창고이기도 하다. 내 컴퓨터 하드웨어에 보관해둔 콘텐츠는 기계고장으로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망실될 수도 있지만, 블로그는 훨씬 안전하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 어디에 있든 열어볼 수도 있다. 사진이나 문서파일도 꽤 큰 용량으로 저장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콘텐츠를 생산할 때 앞의 데이터를 참고한다든지, 나중에 재가공·재배열하여 책으로 출간하는 등 2차 활용에도 아주 용이하다.



게다가 블로그를 하다보면 매사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이 높아진다. 또 자기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독자가 원하는 정보가 뭔지를 알게 되고 공감능력도 생긴다. 그러면 독자의 눈높이에서 아이템을 찾고 쉽고 친근하게 글 쓰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이는 기자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큰 강점이다.


콘텐츠가 매력적이면 단골 독자들이 생기고 전국의 블로거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신만의 브랜드가 구축된다. 그 브랜드파워가 다른 SNS와 연동하면 시너지는 배가한다.


지금은 개인브랜드 시대다. 과거 기자들은 어느 매체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결정됐지만, 웹과 모바일로 뉴스를 소비하는 시대에는 기자 개인이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고 영향력을 가진다. 그러니 이 판에는 중앙과 지방, 소속 매체나 직위의 차이 같은 계급장이 없다. 누구나 자기 콘텐츠의 질과 소통·공감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돈도 생긴다.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 구글 애드센스 같은 광고를 블로그에 붙여 짭짤한 수익도 올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후배기자들에게도 블로그 운영을 적극 권유한다. 그러면 후배가 묻는다. ‘근무시간 중에 블로깅 해도 되나요?’ ‘회사 일에 차질만 없다면 얼마든지’라고 대답한다. 후배기자의 브랜드파워가 커지면 그런 기자들의 총합은 곧 우리 매체의 브랜드파워가 되니까.


‘신문에 실렸던 글을 블로그에 올려도 되나요?’ 하면 ‘단순 사실이나 속보를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기사라면 굳이 올릴 가치가 없지만, 나름 의미가 담긴 콘텐츠라면 신문과 좀 시차를 두고 올리는 게 좋겠지’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비단 기자뿐 아니라 글쓰기를 즐기는 보통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페이스북에 200자 원고지 5~10매에 이르는 꽤 진지한 글을 꾸준히 올리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안타깝기 짝이 없다. 자신의 마음과 가치를 담은 글을 왜 저렇게 휘발시켜버리고 마는지…. 검색도 안 되고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려도 찾기 어려운 게 페이스북이다. 중간중간 생략하고 보여주는 시스템 때문이다.


글쓰는 사람들아! 블로그를 콘텐츠 생산과 기록의 진지로 삼고, 다양한 SNS로 유통하고 소비하고 소통하자. 그게 내 콘텐츠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썼던 글입니다.

☞미디어오늘에서 보기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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