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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와 여영국 '야한 동영상' 말싸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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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영국 "도의회에서 설치한 모니터가 영화 보라고 설치한 모니텁니까?"


홍준표 "그러면 모니터를 잠궈놔야죠. 내가 뭐뭐 일반 국회의원들처럼 야~한 동영상을 본 것도 아니고..."


여영국 "야한 동영상 아니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봐도 되는 겁니까?


홍준표 "난 그런 것 본 적이 없어요."


여영국 "지사님. 의원이 발언하는데 듣는 척이라도 해주셔야죠."


홍준표 (말을 끊으며) "내가 의원님 말씀하시는데, 안 들은 것도 아니고 내용 다 들었습니다."


여영국 "듣고 하세요."


홍준표 "아니, 내용 다 들었다니까요?"


여영국 "아니 제가 내용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요. 의원들이 발언하는데, 형식이나따나 좀 듣는 척이라도 해주셔야죠."


홍준표 "듣죠."


여영국 "아니, 영화 보는데 뭘 들어요."


홍준표 "아, 영화라는 게 그림이죠. 아 이거..."



여영국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의회 오셔서 의원이 발언할 때 영화 보는 것도 특별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오늘 지사님 답변 요지죠?"


홍준표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잘했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영국 "시간이 없으니까요."


홍준표 "그런 걸 가지고 시비 거는 것도 잘못된 것이죠."



여영국 "시비가 아니고 제가 부탁드린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홍준표 (이야기의 맥락과 뜬금없이) "흐흐.... 좀 질문하실 때 좀 제대로 공부하시고 제대로 근거를 갖고 질문하십시오."


여영국 "어~허~ 참?"


홍준표 "어허! 참. 거참."


여영국 "영화 본 것에 대해서...."


홍준표 "아이, 그것 잘했다고 안 했다고 했지 않습니까?"


여영국 "잘못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홍준표 "아이, 굳이 잘못됐다고는 내 보지 않는다고 얘기 했잖아요."


여영국 "그러니까요."


홍준표 "잘했다고는 하지 않았지마는."


여영국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제가 지금 부탁말씀 드리는 겁니다."


홍준표 "아니,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러니까 지루하죠."


여영국 "한 말 또 하든 뭐 하든 간에.."


홍준표 "허허허"


여영국 "영화 보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홍준표 "영화를 보는 자리가 아니지마는 듣기는 듣지 않습니까? 귀로."


여영국 "결국 잘했다?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홍준표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무능력(확실치 않음)하다는 거죠. 흐흐."


여영국 "그러니까, 의회 출석하셔서 의원 발언하는 중에 영화를 본 것도 특별히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 가입시다이?"


홍준표 (비웃는듯) "에이 추궁을 하시려면 좀 제대로 준비하고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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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김장하 선생의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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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동차를 가지지 않은 이유


나는 차가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차를 가질 계획이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계기는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1991년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노릇을 시작한지 1년이 좀 넘은 시기였다.


그분이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있던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수십억 원의 사재를 들여 고등학교를 설립, 명문으로 키운 사람’이고, ‘정부의 전교조 교사 해직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단 한 명의 교사도 자르지 않은 사람’이며. ‘워낙 검소하여 자동차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궁금했다. 한약방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사립학교 이사장이 어떻게 전교조를 인정하고 감싸 안았을까? 돈 많은 사람이 자가용도 없다고?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으나 그분은 또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학교를 통째로 헌납한 일 자체가 뉴스거리인지라 수많은 언론매체가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큰 후원자로 있는 <진주신문>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인터뷰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자동차가 없는 부자’라는 말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료기자들이 너도나도 할부로 차를 살 때도 나는 끝내 사지 않았다.



진주시 동성동에 있는 남성당한약방 건물. @김주완



두 번 부탁했다가 두 번 모두 거절당했다


이후에도 나는 김장하 선생한테 두 번의 거절을 당했다. 한 번은 1999년 <경남도민일보>를 시민주주신문으로 창간할 때였다. 그를 찾아갔다. 우리 주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이미 그가 민주화운동과 각종 시민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이야길 들은 터여서 당연히 주주가 되어줄 줄 알았다. 그리 길지는 않았던 내 설명을 듣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진주신문만 해도 저에겐 버겁습니다.”


<진주신문>은 1990년 역시 시민주주로 창간된 주간신문이었다. 진주지역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토호‧기득권세력에서 자유로운 독립언론이었다. 나는 짧은 그의 말에서 거절당한 서운함보다 <진주신문>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꼈다. 두 말 않고 이렇게 말하곤 바로 일어섰다.


“예. 알겠습니다. 진주신문 잘 키워주십시오.”


두 번째 거절은 최근이다. 재작년이었다. 내가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맡은 후 창간한 자매 월간지 <피플파워>에서 그를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 여전히 응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가 말했다.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이처럼 인터뷰에 거푸 실패했지만 시대의 어른을 소개하는 이 코너를 통해 그의 삶이 주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


김장하 선생은 언론 노출을 꺼리는 바람에 사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사진은 경상대학교에서 구했다. @경상대학교



최연소 한약종상 면허 합격, 재물을 모으다


김장하(金章河, 1944~). 경남 사천의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는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낮에는 약을 쓸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의 나이 열아홉에 한약종상(현 한약업사) 면허시험 공고가 났다. 매년 나는 공고가 아니어서 그는 미성년자임에도 응시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만 20세가 안 됐다는 이유로 면허는 1년 뒤인 1963년에 발급됐다.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열었고, 이내 명의(名醫)라는 소문이 나면서 그에게 약을 지으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진주시 동성동 지금의 자리에 남성당한약방을 옮겼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당연히 많은 재물도 쌓였다.


아픈 사람, 사회적 약자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는 생각했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결론은 ‘아픈 사람들에게 번 돈으로 내가 호의호식할 순 없다’였다.


남성당한약방에 걸려 있는 '남성문화재단' 현판. 세월의 두께가 느껴진다. @김주완


문형배(1965~) 판사도 그에게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마친 많은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김장하 선생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이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랬더니 선생의 말은 이랬다고 한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문형배 판사 블로그)


이처럼 김장하 선생은 누구를 ‘도왔다’고 하지 않는다. ‘돌려줬다’고 말한다. 다음은 재물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뉴스사천 보도)


국립 경상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주려하자 수차례 고사하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2008년 대학측과 지역사회 인사들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마지못해 받기로 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김장하 선생의 활짝 웃는 모습. @국립 경상대학교


재물에 대한 그의 이런 철학은 나누는 삶으로 이어졌다.그러나 본인이 말을 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나 단체가 그의 지원을 받았는지 숫자나 규모를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것만 해도 세간에 기부로 이름난 사업가들과는 뭔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병든 사람의 돈, 나를 위해 쓸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헌납했다. 그것도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다 지어놓고, 더 이상 확충할 게 없을 때 그랬다. 그 땅과 시설을 시가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고 있다.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이사장 퇴임사에 나와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명신고등학교 전경.


그렇게 설립한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이유는 이랬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김장하 선생이 사는 집이다. 그는 이 허름한 건물 3층에 산다. @김주완


그는 또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고,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창립해 인권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금은 폐간했지만 진주신문의 최대 후원자였고, (재)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다.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와 상임의장도 했고,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를 후원해왔다.


또 1억 5000만 원의 기금으로 ‘진주가을문예’를 신설, 매년 시와 소설 부분 수상자를 선정해 1500만 원의 고료를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20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밖에도 진주문화연구소를 창립 후원하고 있고,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김장하 선생이 1억 5000만 원을 출연해 제정한 2006년 가을문예 시상식 @진주신문


그가 가장 멀리하는 것 ‘정치’


그러나 김장하 선생이 유독 멀리하는 게 있다. 바로 정치다. 1995년 진주지역 시민사회에서 민선 진주시장 후보에 김장하 선생을 범민주 단일후보로 추대하자는 결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결국 범민주 후보는 내지 못했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그를 찾았다. 남성당한약방에서 약 50분 간 그를 만나고 나온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수행한 김성진(전 청와대 행정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말 좋은 분이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직후 부산 벡스코에서 ‘부산·울산·경남 민(民)에게 듣는다’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당선자측은 이 자리 1번 테이블에 김장하 선생을 초대했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은 아예 그 자리에 참석을 거부했다.


정치와 정치인을 멀리하는 것, 그리고 돈은 세상의 것이라는 철학 등 많은 부분이 앞서 소개한 풍운아 채현국 어른과 닮았다.


72세의 나이에도 얼굴 표정이 참 해맑다. @국립 경상대학교


이제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가 됐다. 지금까지 채현국, 장형숙, 방배추, 양윤모, 김장하 어른까지 소개했지만, ‘그저 이런 분이 있다’는 정도에 그쳤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김장하 선생을 직접 인터뷰하는 것도 실패했지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한 후 다시 찾아뵈려 한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제대로 기록하여 그의 삶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울림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포털 다음 뉴스펀딩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다음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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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군산시, 기억하지 않는 남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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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은 진포대첩을 기억하지만 경남 남해는 관음포대첩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진포는 군산의 옛 이름입니다. 진포대첩은 1380년 6월에 일어났습니다. 왜구들이 군산항 어귀에 몰려들어 타고온 배를 두고 뭍에 올라 약탈·살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500척이 넘었다고 하지요. 그 배들을 최무선 등이 화포로 모조리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물 위에서 벌어진 대부분 전투가 그렇듯, 군산에도 당시 자취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군산시는 군산항에다 표지판을 세웠습니다.

 

군산항에 있습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에다 "함선에서 화포를 사용한 세계 최초 전투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해상 전투로서, 해전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고 적어두고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문장으로는 "It was the first sea battl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in which cannons were used."라 새겼습니다.

 

 

안내판 부분입니다.

관음포는 남해 옛적 읍치인 고현면 앞바다를 이릅니다. 임진왜란 막바지에 이순신 장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이순신은 여기거 왜적을 대파했는데, 아깝게도 하늘은 그이 목숨까지 거둬 갔습니다.

 

관음포는 이순신 장군 승전 200년 전에도 고려 수군이 왜구를 쳐부순 승전지였습니다. 1383년 관음포 앞바다는 당시 해도원수 정지 장군이 함선 17척을 깨뜨리면서 숨진 왜구 2500명의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남해와 서해 바다에서 왜구가 본격 설치기 시작한 때는 1350년인데요, 당시 관음포대첩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남해 백성들은 정지 장군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석탑을 만들었습니다.

 

큼지막한 자연석 위에 크지 않은 몸돌과 지붕돌 5개씩을 번갈아 쌓아 올렸습니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승전 기념물로 만들어진 보기 드문 역사입니다.

 

남해에는 이처럼 아무 자취도 없는 군산과 달리 750년이 넘은 기념물까지 번듯하게 남아 있는데도 관음포대첩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고현면 탑동마을 정지석탑이 있는 데를 가면 아주 간략한 기록만 있을 뿐 관음포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밝혀놓고 있지 않습니다.(정지석탑에 담긴 역사·문화적 의미도 상당하다고 보지만, 여기서 그것까지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정지석탑.

화포를 사용한 세계 최초 해전은 군산 진포대첩이 아니라 관음포대첩입니다. 이는 여태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입니다. 이를테면 남해나 경남 지역 연사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일방적 주장이 아닙니다.

 

진포에서 고려 수군이 함포로 공격한 대상은 항구에 정박해 있던 왜구의 배들이었습니다. 타고 온 왜구들이 뭍으로 분탕질 떠나는 바람에 배는 대부분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포대첩은 "함선에서 화포를 사용한 세계 최초"는 될지라도 "세계 역사상 화포가 사용된 최초 해전(the first sea battl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in which cannons were used)"은 될 수 없었습니다.

 

관음포대첩은 달랐습니다. 정지 장군은 정박해 있는 배들을 때려부수려고 함포를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마다 200명씩이 타고 있던 왜구 해적선을 함포로 공격해 열일곱 척을 가라앉혔습니다. 명실상부한 해전(sea battle)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진포대첩은 전술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실패한 전투였습니다. 나중에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이성계는 진포대첩이 일어난 한 달 뒤 황산대첩의 주인공이 됩니다. 황산대첩의 전장은 지금 전북 남원 운봉 일대였습니다.

 

뭍에 올라 약탈하던 왜구들은 진포대첩으로 타고 온 배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퇴로가 끊어졌습니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저지르며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고려 왕조가 이성계 장군 등등을 내려보내 내륙에서 왜구를 물리쳤는데 바로 황산대첩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진포대첩에서 머리를 좀더 써서 몇 십 척이라도 배를 왜구들한테 남겨뒀다면 고려 백성들 피해를 좀더 많이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입니다.

 

남해는 당시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데도 아주 뜻깊은 과거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면 군산은 이렇듯 당시 자취가 전혀 없는데도 일부러 부풀려 가면서 과거 역사를 기억합니다.

 

같은 경남에 사는 저로서는 퍽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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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오카 탐방기① 봉순이와 제동이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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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날아온 황새 두 마리

 

일본 효고현(兵庫縣) 도요오카시(豊岡市)는 '봉순이'의 고향이랍니다. 암컷 황새 봉순이는 2012년 4월 6일 도요오카시 이즈시초(出石町) 인공둥지탑에서 태어났습니다.

 

효고현에서 가장 넓은 도요오카시는 인구가 8만9000명 수준으로 1955년부터 지금껏 60년 동안 황새 보전과 복원을 위해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봉순이는 발목에 'J0051'이라 적힌 가락지를 끼고 있습니다. J0051은 같이 태어난 수컷 'J0052'와 더불어 부모 둥지에서 두 달 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다 6월 11일 독립했습니다.

 

그러다 두 살 생일을 스무 날 앞둔 2014년 3월 18일 대한해협을 건너 김해 화포천과 봉하·퇴례 마을 일대에 날아들면서 '봉순이'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봉하마을을 찾아온 암컷 황새'라는 뜻이랍니다. 봉순이는 일본에서 태어난 황새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국경을 벗어났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올 3월 돌아온 봉순이.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앞서 2013년에도 일본 출신 어린 황새 4마리가 12월 12일 대마도까지 건너간 적은 있었습니다. 대마도는 부산과 거리가 49.5km뿐이어서 당시 일본서는 한국으로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눈길을 끌었지만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올 2월 8일 도요오카가 고향인 또다른 황새 한 마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사상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이 도요오카 출신 황새는 다리 가락지 'J0092'를 통해 2014년 6월 사육장에서 야생으로 풀려난 어린 수컷임이 확인됐습니다.

 

이 황새는 'J0092'는 '제주도를 찾은 수컷'이라는 뜻으로 '제동이'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제동이는 봉순이한테 조카뻘이 된다고 합니다. 도요오카에서 김해까지 거리는 대략 800km입니다.

 

일본 도요오카시의 황새.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봉순이는 봉하마을에 9월까지 머물다 섬진강이 있는 경남 하동과 천수만이 있는 충남 서산으로 옮겨가 지냈습니다. 봉순이는 올해 3월 9일 봉하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은 중국 북동부나 러시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한반도를 찾은 황새(철새) 서너 마리 그리고 충북 청원군 한국교원대 청람황새공원에서 탈출(2014년 4월 28일)한 암컷 황새 '미호'와 함께 지냈습니다.

 

◇봉하마을은 봉순이의 ‘새 고향’이 될 수 있을까?

 

1955년부터 황새 보호와 증식 활동을 벌여온 도요오카시는 봉순이를 두고 반가움과 안타까움을 한꺼번에 쏟아냈습니다. 도요오카시는 인공사육장에서 길러오던 황새를 2005년부터 야생에 풀어(2014년 3월 현재 87마리) 왔는데 JI0051이 처음으로 한국까지 날아간 것이어서 반가워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도요오카 야생에 황새가 많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먹이가 모자라진 탓에 대한해협을 건너지 않았을까 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실제로 먹이가 모자라지 않으면 갖은 비바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널 필요는 없는 것입지요.

 

철새 황새들은 3월이면 북쪽으로 돌아가는데 '봉순이'도 그들과 동행하지 않을까 여겨졌으나 3월 9일 그런 예측을 깨고 봉하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봉순이가 보기에 봉하마을과 화포천 일대는 자기가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인공둥지 위에 앉은 황새 두 마리.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실제 화포천 일대에는 황새 먹이가 많고 봉하마을에서는 농약 쓰지 않는 농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본 도요오카시가 고향인 봉순이에게 봉하마을과 화포천 일대가 새로운 고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황새가 불러온 한-일 교류

 

도요오카 황새가 김해에 날아들자 도요오카에서는 2014년 7월 25일 기노사키초등학교 등 7개 학교 아이들이 화포천을 찾았습니다. 10월 11~12일에는 마노 츠요시 부시장 일행이 와서 '일본의 황새 복원과 미래' 강연도 했습니다.

 

봉순이의 한국행은 일본 사람들의 한국 방문만 불러오지는 않았습니다. 2015년 2월 도요오카시는 '황새를 통한 생태관광 활성화 방안 모색'을 위해 습지 보호·생태 교육·환경 보도를 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번에 초청을 받아 일본 도요오카시를 찾은 한국 일행.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이쯤 되면 도요오카 일본 사람들이 처음부터 황새를 팔아먹으려고 보전과 복원에 나섰고 이제 상품화에 본격 나선 것 아니냐고 미심쩍어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요오카시 황새 관련 활동은 세 가지가 주축입니다. 하나는 황새 증식·복원을 위한 연구·실행이었고 둘째는 황새가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연 환경 조성이었으며 마지막은 그런 가운데 인간도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조건 마련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황새와 인간의 공생을 최고 상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황새 관련 생태관광 활성화란 목적을 충족시키는 수단일 따름이지 그 자체로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2월 12~14일 2박3일에 걸친 도요오카 탐방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도요오카시 황새 야생 복원 역사

 

도요오카시는 황새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지역입니다. 1930년대만 해도 100마리가 넘엇는데 30년도 안돼 절반 아래로 줄었습니다.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1955년 사카모토 마사루 효고현 지사는 황새보호협찬회를 조직해 명예회장을 맡고 토요오카 시장에게는 회장을 맡겼습니다. 협찬회는 초·중학생과 교사 행정 관계자들에 대한 홍보와 교육을 먼저 진행했습니다. 특히 도요오카고교 생물부는 58~63년 후쿠다(福田)에 둥지를 튼 황새를 날마다 찾아 기록했습니다.

 

1958년 협찬회는 다지마황새보존회로 이름을 바꾸고 어른 황새 14마리 어린 황새 1마리를 확인했고 이듬해에는 어른 황새 2마리를 더 찾아냈습니다.

 

1959년 도요오카시 유루지(百合地)에 인공둥지탑 2개도 설치했습니다. 첫 인공둥지탑이었는데 곧바로 황새가 여기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고 1971년 죽은 도요오카시 최후 야생 황새도 여기를 사용했습니다. 황새 야생 번식은 1959년 도요오카시 후쿠다에서가 마지막이었습니다.

 

1962년 황새보존회는 인공사육과 인공부화 필요성을 처음 거론했습니다. 1963년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와 효고현 교육위원회가 모여 황새 인공부화·사육 방침을 정했습니다. 1964년 도요오카시 노조(野上) 골짜기를 황새사육장(지금 황새고향공원 보호증식센터) 터로 정했습니다.

 

1965년 2월 11일 황새 한 쌍을 사로잡아 인공 번식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도 일본 전역에서 11마리를 잡아 인공 번식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박사 사진.

1985년 7월 27일 러시아(당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야생 황새 수컷 4마리와 암컷 2마리를 들여왔고 1988년 도쿄다마동물공원에서 알 3개가 부화하는 첫 성공을 거뒀습니다. 1989년 도요오카시 황새사육장도 두 번째로 인공 번식에 성공했습니다.

 

16년이 지난 2005년 9월 24일 오후 2시 황새고향공원에서 3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새 다섯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인공 번식으로 태어난 황새가 100마리를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야생 방사는 2009년까지 행해졌습니다.

 

2007년에는 방사된 황새 한 쌍이 자연 상태에서 번식에 성공했습니다. 야생 번식은 1959년 이후 48년만이었습니다. 2012년에는 방사 2세대 황새들이 야생 번식해 3세대 황새가 태어났습니다. 3세대 황새는 야생에서 태어난 부모가 자연스레 짝을 지어 태어난 진정한 야생이었습니다.

 

2014년 2월 현재 도요오카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새는 72마리이며,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 부부는 9쌍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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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오카 탐방기② 황새 위해 만든 습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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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인 2월 12일 일행은 간사이공항과 교토를 거쳐 도요오카시로 옮겨갔습니다. 본격 황새 탐방은 이튿날 시작됐습니다.

 

안내는 도요오카시청 황새공생부(共生部) 직원이 맡았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局)에 해당되는 부서 같았는데 그 아래에 다시 과(課)가 있었습니다. '일개' 황새 보전·복원을 위해 독립적으로 국을 두는 시청이라니요!

 

◇가야 습지 재생 사업 현장

 

눈이 내리는 가운데 처음 찾아간 데는 가야(加陽) 습지 재생 현장이었습니다. 버림받은 논을 15ha 가량을 습지로 되돌리는 사업인데 국토교통성이 주체였습니다.

 

가야재생습지. 묵정논을 그대로 두고 군데군데 둠벙을 만들었습니다.

 

도요오카시를 관통하는 본류인 마루야마가와(円山川)강과 지천인 이즈시가와(出石川)천이 합류하는 일대 묵정논으로 논은 그대로 둔 채 물길을 내고 작은 웅덩이도 네댓 개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안내문에는 "가축을 기르는 풀밭이 가까이 있는데 폐쇄형과 개방형 습지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생물과 사람이 공생하는 상징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목적이 있으며 황새의 중요한 서식 거점 기능도 기대됩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도요오카 시가지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면서 동해(일본해)로 빠져나가는 마루야마가와강 둘레는 2012년 7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람사르협약당사국총회에서 람사르습지로 지정됐습니다.

 

풍광이 그다지 빼어나지는 않았고, 쏟아지는 눈 탓에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자체로서 값어치보다는, 야생으로 풀려난 황새들이 크게 기대며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점이 많이 작용했지 싶었습니다. 양쪽 언덕에 형성돼 있는 습지의 넓이나 경관이 우리나라 낙동강이나 남강·밀양강 또는 그 지류보다 썩 나아 보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봉순이 태어난 인공둥지와 재일동포 3세 동화작가 김황씨. 김황은 부리가 잘린 채 발견된 황새를 주인공 삼아 동화를 썼습니다.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 봉순이 태어난 이즈시초 인공둥지

 

이어서 이즈시초(町)에 있는 황새 인공둥지탑을 찾아갔습니다. 황새공생부 직원은 "'봉순이'가 태어난 둥지를 찾아가는 길"이라 했습니다. 13m 높이로 전봇대처럼 생겼는데 꼭대기는 지름 4m 정도로 위쪽이 평평한 비행접시 모양이었습니다.

 

거기에 황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200m 바깥에서 망원경으로 보던 일행은 조금 있다 50m 전방으로 다가갔습니다. 황새공생부 직원은 "한국에서 온 탐방객들한테 특별하게 서비스를 하나 보다" 하며 웃었습니다. 황새는 둥지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봉순이가 태어난 이즈시초의 인공둥지. 황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더 다가가면 사람이 무서워서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돌아오면서 보니까 네모반듯한 논에는 저마다 겨울인데도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도요오카는 우리나라보다 남쪽이라 겨울에도 물이 쉬이 얼지 않는답니다.

 

겨울인데도 논에 물이 담겨 있습니다. 황새를 기르는 농법 논입니다.

 

여름과 가을철 논에서 살던 많은 생물들이 그대로 살고 있을 터였습니다. 논에는 미꾸라지·논고동을 비롯한 동물과 피·촉새 같은 식물 등 5668가지 생명이 산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황새는 그래서 논을 좋아합니다.

 

도요오카시 인정 '황새의 춤' 농산물 딱지.

 

둥지 근처 논들은 '황새를 키우는 농법'을 실천하는 저농약·무농약 고시히카리쌀 '황새의 춤' 브랜드 생산지였습니다. 일반농법 쌀보다 최소 30% 비싸게 지역 농협 JA다지마에서 모두 사들인다고 합니다.

 

◇하치고로 도시마습지

 

다음은 하치고로 도시마(戶島)습지. '하치고로'는 2002년 대륙에서 도요오카시로 날아든 수컷 황새 이름입니다. 찾아온 날자가 8월 5일이라 하치고로(八五郞)가 됐습니다.

 

하치고로 도시마습지 사무실에서 일본 환경단체 사람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하치고로는 도시마 습지에서 먹이를 먹고 나중에 둘러볼 황새고향공원 산자락 소나무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도요오카 일대 자연 환경이 야생 황새도 터잡고 살 만큼 매력적이라는 증거였습니다.

 

도시마습지 전경.

 

도시마습지 또한 가야습지와 마찬가지로 마루야마가와강 기슭에 있습니다. 3.2ha 넓이 도시마습지는 원래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짓기 어려운 묵정논이었습니다. 하지만 생물들한테는 산에서 내려오는 민물과 바다에서 들어오는 짠물이 섞이는 지역이기까지 해서 살기 좋은 지대였습니다.

 

도요오카시는 일대를 사들이고 황새 서식 거점으로 삼아 습지를 꾸몄습니다. 비영리(NPO) 황새습지네트워크가 운영을 맡아 생물 조사와 습지 체험·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본 환경단체 사람들이 긁어온 도시마습지 바닥을 갖고 생물 조사도 해 봤습니다.

 

사다케 세스오 대표는 13일 "도시마습지를 황새가 찾기는 하지만 여기 조사해 보면 황새가 충분히 먹을 만큼은 되지 못한다. 왜 이런 간격이 생겨 있는지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하치고로는 도시마습지를 비롯한 야생에서도 먹이를 먹었지만 황새고향공원 보호증식센터에서 주는 먹이도 많이 먹었습니다. 도시마습지 등이 아직은 황새 먹이터로서 생물 자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증표라 하겠습니다.

 

도시마습지에 설치된 인공둥지탑.

 

도시마습지 사무실.

 

여기 인공둥지탑에도 황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흩날리는 눈발이 시야를 가리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은 단정한 실루엣이 꽤 인상깊었답니다.

 

◇황새도 살리고 마을도 살리는 다이습지

 

도요오카시에는 황새만을 위한 인공습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이(田結)습지입니다. 도요오카 북부 바닷가 마을 뒤편에 있는 여기를 찾았을 때는 바닷바람이 아주 심해 제대로 둘러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다이습지 들머리. 국가 지정 마루야마가와강 하류 유역 조수보호구 특별보호지구. 환경성 푯말이 꽂혀 있습니다.

 

하지만 골짜기를 따라 펼쳐진 습지는 한 눈에도 매우 그럴 듯해 보였습니다. 맑은 물이 곳곳을 흘러내리고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있었으며 12ha 가량 전체가 모두 물에 젖은 상태였습니다. 다랑논은 적당하게 허물어져 아래위가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활기차 보였고 자주 웃었습니다. 주민들 나이가 많아져 2002년부터 논들이 버려졌고 2006년에는 마지막까지 농사를 짓던 두 집마저 손을 뗐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2008년 봄 도시마습지에 둥지를 틀고 있던 황새 한 마리가 여기를 찾았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묵정논이 황새가 먹을 여러 동물들이 살기 좋은 터전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이습지를 황새한테 좋도록 최적화하는 작업을 연구자와 자원봉사자와 마을 주민이 함께 진행했습니다.

 

중간에 보면 철망을 둘러친 부분이 있습니다. 사슴이나 멧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서, 그렇지 않은 지역이랑 토양과 식생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서랍니다.

 

황새가 마을 주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셈이었습니다. 황새가 날아든 습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2014년에는 1300명 안팎이 찾았습니다. 이는 주민보다 10배 많은 숫자라 합니다.

 

다이마을은 황새가 날아들지 않았으면 아무도 찾지 않았을 반농반어 마을입니다. 주민들은 다이습지 이모저모를 일러주고 안내하며, 찾아온 이들은 황새를 위해 습지를 조성하는 자원봉사활동을 벌입니다.

 

다이마을회관에서 주민들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민들은 금전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황새를 비롯해 생태계의 다양한 생물 보전을 위해 활동한다고 자부합니다.

 

◇황새복원노력의 결정판 황새고향공원

 

사흘째에는 황새고향공원을 찾았습니다. 황새고향공원은 효고현과 도요오카시가 황새를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정체라 할 만했습니다.

 

1964년 효고현과 도요오카시는 노조(野上) 골짜기를 황새사육장 터로 정했습니다. 노조는 농약으로부터 안전하면서도 도로가 정비돼 있어 먹이 공급이 쉬우며 묵정논과 도랑과 산기슭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어우러져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구석 눈 덮인 나무 밑에 황새가 있습니다.

 

1965년 2월 11일 도요오카시 후쿠다에서 황새 한 쌍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면서 인공 번식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1985년 7월 27일 러시아(당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야생 황새 수컷 4마리와 암컷 2마리를 들여오면서 1989년 황새사육장도 인공 번식에 성공했습니다.

 

사육장에 지붕이 없습니다. 대신 여기 황새들은 날개깃을 잘랐습니다. 한 해만 지나면 다시 돋는다고 합니다.

 

1991년 황새보호증식센터로 이름을 바꾼 데 이어 1999년 효고현립 황새고향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모두 165ha인데 사람들이 찾고 구경할 수 있는 공개지역과 그렇지 못한 비공개지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비공개지역은 황새를 기르고 새끼치고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훈련을 하는 사육 존(zone)과 풀려난 황새들이 둥지를 틀거나 하는 자연존으로 구분된답니다. 일행은 특별 배려로 비공개지역 사육존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야생으로 돌아가는 황새의 고향으로 걸맞은 지역이고 시설이었습니다.

 

널리 알려져 한 해 평균 35만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합니다. 일행이 찾아간 2월 14일이 토요일이기는 했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찾아와 시설을 둘러보고 황새를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고 차를 마셨습니다.

 

황새고향공원과 황새문화관은 입장료가 없습니다. 대신 이렇게 100엔 황새보호협력기금을 임의롭게 받고 있었습니다.

 

아이 어른 구분없이 이런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황새문화관을 찾은 사람들이 접은 종이황새들입니다.

황새고향공원 공개 방사장 옆에는 2000년 만들어진 도요오카시립 황새문화관이 있습니다. 황새 보전 관련 자료가 있고 한쪽 면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황새를 지켜볼 수도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일행이 도요오카시 공무원과 탐방 결과를 두고 한 시간 남짓 토론한 공간도 여기였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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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오카 탐방기③ 황새관광 성공 가능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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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00만 명 이상이 탐방

 

도요오카시는 이미 해마다 500만 명 이상 관광객이 찾아드는 꽤 이름난 관광도시입니다. 으뜸 자리에는 일본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기노사키(城岐)온천이 있습니다. 기노사키온천은 헤이안(平安)시대(794~118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가 오랜 온천입니다.

 

조메이(舒明) 천황 시절(629~641) 기노사키 온천 자리는 논이었답니다. 어느 날 황새가 소나무와 논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농부가 보게 됐습니다. 다리를 다친 황새가 논에서 솟아나는 따뜻한 물에 다리를 대고 있었던 것인데 며칠 뒤 황새 다리가 말끔히 나았답니다. 이 따뜻한 물이 영험한 줄 알게 된 농부는 온천수가 나오는 옆에 작은 집을 짓고 틈날 때마다 목욕을 했습니다.

 

기노사키는 소토유메구리(外湯めぐり)로 유명합니다.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갖춘 노천탕 일곱 군데를 돌아다니며 즐기는 온천욕이라 합니다.

 

고쇼노유.

 

그 일곱 가운데 하나가 '고노유(鴻の湯)'입니다. '황새의 온천'이라는 뜻인 고노유는 기노사키 온천의 유래 전설에서 황새가 다리를 치료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일행은 황새 관련 습지 말고 기노사키온천도 이튿날 탐방했습니다. 금요일로 평일이고 낮 시간인 데도 일행이 찾은 노천탕은 너무 붐비는 바람에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손님을 더이상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일본 최고 수준답게 수질도 좋았고 온도도 적당했습니다.

 

옛날 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늘어서 있는 길거리 또한 일본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손색이 없었다. 거리 한가운데로 개울이 나 있었고, 그 위를 다시 벚나무가 덮어쓰고 있었습니다. 봄철이 되면 벚꽃 또한 대단한 볼거리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거리에는 유카타(浴衣)를 입고 게다를 신은 사람들이 둘씩 셋씩 무리지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한국 사람들 눈에는 색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자체로 관광자원인 셈입니다.

 

황새의 온천 '고노유'는 정원노천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원 속 작은 연못에서 온천을 즐기는 느낌을 주며 가장 깊숙한 데 자리잡고 있어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밖에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그대로 들어오는(그러나 매우 붐비는) '고쇼노유(御所の湯)', 동굴 속에서 즐기는 '이치노유(一の湯)', 분위기가 차분하고 따뜻한 '야나기유(柳湯)' 등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노사키온천만 둘러봤지만 도요오카시에는 이밖에도 대단한 관광자원이 꽤 있습니다. 먼저 겐부도(玄武洞). 160만 년 전 화산활동으로 마그마가 흘러내리면서 형성된 주상절리입니다. 에도(江戶)시대부터 채석장으로 쓰여오다가 그 지질학적 가치와 절리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등으로 193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굴이 다섯인데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

 

기노사키온천에도 이런 주상절리가 있었습니다.

 

이즈시성(出石城) 유적도 있습니다. 신코로(辰鼓樓)는 북을 매달아 한 시간마다 울리는 누각으로 1871년 지어졌는데 1881년부터 시계가 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료관(史料館) 건물은 실(絲)을 사고파는 호상(豪商)이 1876년 이즈시를 불태운 대화재 직후 세웠다는데 꽤 큼직한 일본 전통가옥이라 합니다.

 

1901년 지어진 극장 이즈시 에라쿠칸(永樂館)은 지금도 가부키 같은 전통극을 공연한답니다. 독특한 적갈색 흙벽과 크고 넓은 지붕이 인상적인데, 공연이 없을 때는 배우 대신 무대에 올라가 볼 수도 있고 무대 장치를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봉순이가 태어난 이즈시초의 인공둥지.

 

이즈시의 또 다른 명물은 사라소바. 작은 접시(皿)에 소바를 조금씩 나눠 담아 먹어서 사라소바(皿そば)라 합니다. 다섯 접시가 기본이고 추가 주문도 가능합니다. 마지막 날 점심을 여기서 먹었는데 열 접시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양이 모자랄 것 같았지만 탱글탱글한 면을 이리 적시고 저리 비비고 해서 먹고 나니 적당하다 싶었습니다.

 

다지마규(坦馬牛)도 도요오카 특산물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횡성한우처럼 도요오카 토착 소고기 브랜드로 일본에서 무척 유명합니다. 일행은 이튿날 호텔에서 뷔페로 다지마규를 비롯해 도요오카에서 생산되는 축산물과 채소·쌀로 만든 저녁을 먹었습니다.

 

황새문화관 기부금 내도록 하는 장치.

도요오카시는 가방 산지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버드나무 껍질을 전통 방법으로 엮어 만드는 가방은 아베 신조 수상의 아내 아베 아키에가 들어 관심을 크게 끌기도 했습니다. 베로 만든 가방, 소가죽으로 만든 가방 등도 있고 가방이 아닌 생활소품도 크게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도요오카 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가방관에서는 쇼핑도 할 수 있고 전통공예사의 가방 제작 실연도 볼 수 있고 가방 만드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자판기 천국답게, 자판기를 통해서도 가방을 살 수 있습니다.

 

◇전통 관광에 황새와 생태를 더하면

 

이처럼 도요오카시의 황새 관련 습지와 시설물, 도요오카 고유 관광자원, 먹을거리와 가방 등 특산물을 모아 놓고 도요오카시에서 가능한 황새생태관광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이 황새생태관광은 한국사람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과 일본 사이 거리와 한국 사람의 특징이 됩니다.

 

일본에서 일본 사람이 도요오카를 찾아간다면 예사롭게 마음먹어도 되겠지만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 도요오카까지 찾아간다면 경남에서 전라도 구경가듯이 나서기는 어렵겠지요.

 

기노사키온천에서 본 진재(震災=지진재해) 기념물. 일본 곳곳에서 이런 기념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됐든 뚜렷한 동기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도요오카에서 눈에 담은 황새 관련 습지와 시설물은 그 경관이나 자연 상태가 한국 사람들 눈길을 확 끌어당길 정도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된 일정은 전통 관광자원으로 채우고 부수적으로 황새생태관광을 생각하는 편이 현실적일 것 같았습니다. 2박3일 정도로 생각한다면 기노사키온천이나 이즈시성 유적, 겐부도 주상절리 등이 이국적이고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도요오카 특산물 가방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가방관도 괜찮겠지 싶습니다. 특히 가방 만드는 공정을 일정 부분 체험도 할 수 있다니 몸을 움직이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체질에 잘 맞을 듯도 합니다.

 

다이습지.

 

 

그러고 황새생태관광 자원으로는 도요오카시가 효고현과 더불어 50년 넘게 인공 사육·번식을 위해 피땀을 흘려온 황새고향공원이 들어가야 하겠고요, 다음으로는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 해설도 하고 안내를 하는 다이습지를 덧붙이면 괜찮겠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또 무슨무슨 둘레길 이러면 좋아하니까요, 다이습지를 그렇게 산책하도록 길을 다듬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도시마습지.

 

중고생 수학여행을 두고 본다면 도요오카에서 3박 4일 정도 일정은 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 국경을 처음 넘어 우리나라 봉하마을을 찾아온 '봉순이' 태어난 둥지가 있는 일대 들판을 둘러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거기 논에 사는 5668가지 다양한 생물을 조사하는 활동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무농약·저농약으로 농지가 먼저 살아나고 벌레가 살 수 있어야 사람도 황새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요.

 

하치고로 도시마습지에서 했던 생물 조사 활동.

 

황새고향공원도 유용하겠지만 하치고로 도시마습지나 다이습지는 그보다 훨씬 더 유용할 것 같았습니다. 자기 몸을 움직여 습지에 사는 생물을 조사하거나 물길을 내고 습지를 만들어보는 활동을 그 같은 습지들에서 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처럼 200명 300명 대규모로 진행하기보다는 30명 안팎 작은 규모로 움직여야지 재미가 쏠쏠하겠습니다. 기노사키온천·겐부도·이즈시성 유적 등도 함께 둘러볼 역사·문화유적입니다.

 

◇봉순이 '스토리텔링'이 관건

 

한 가지 더 말한다면 '스토리텔링'입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에서 황새는 '스토리텔링'이 되는 새입니다. 먼저 일본에서 60년 넘게 이어온 황새 보호와 보전·복원을 위한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스토리텔링 감입니다.

 

이에 더해 봉순이와 제동이가 한국과 일본 사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런 소재를 갖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욕창 안이 매우 혼잡하다고 알리는 글귀가 나붙어 있습니다.

 

황새가 스토리텔링에 성공하면 도요오카시 생태관광은 절로 성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요오카시는 황새 관련이라면 무엇이든 황새공생부에서 주관을 했습니다.

 

이번 황새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한 한국 인사 초청·탐방도 황새공생부에서 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잘해야 기획실에서 하거나 대부분은 문화관광과에서 했을 것입니다.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황새공생부를 둔다는 것은 황새와 인간의 공생을 위해 분야도 여럿이고 성격도 다르지만 체계적으로 진행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입니다.

 

우리나라도 환경생태 관련 사업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좋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창녕군 따오기가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통합적으로 일관되게 애쓴 결과 창녕 전역에 따오기가 날아다니게 되고, 생태관광자원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는 고민을 하고 그래서 일본 서부 지역 보도 매체 종사자 등을 초청하는 그런 날들이 어서 오면 좋겠습니다.<끝>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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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서 꼭 해결해야 할 3가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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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창립했다가 1961년 5.16쿠데타로 강제해산되었고, 2009년 재창립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네요.


2009년 바로 이 자리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마산유족회' 재창립을 논의하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그 후 마산 창원 진해 통합으로 '통합 창원유족회'가 되었고, 오늘은 또 사단법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네요.


창립 당시부터 쭉 같이 해왔었는데, 해마다 참석하는 유족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참 뿌듯합니다.


엊그제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한 연구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역사적으로 단죄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며, 나머지 하나는 우리 군경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학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2015년 4월 11일 오전 11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 정기총회 및 사단법인 설립 총회'. @김주완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우리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친일부역자 문제와 민간인학살 문제다. 반면 일본군 '위안부'는 국제적인 문제인데다 일본이라는 상대 나라가 있다.


우리 국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가 무슨 낯으로 일본과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할 수 있겠나."


그런 점에서 유족 여러분은 단지 개인의 억울함을 푸는 차원이 아니라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비극적이고 반인권적인 국가범죄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고 증언자료집을 출간하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족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응원합니다.


※창원유족회 총회에서 '격려사'를 해달라고 하여 말씀드린 내용을 글로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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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정대연, 기록없는 역사는 복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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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이지영 전임연구원(정치학박사)이 나를 찾아왔다. 1997년부터 약 5년 간 활동했던 '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경남정대연)'을 취재해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성가족부 프로젝트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활동하는(했던) 시민운동의 흐름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창원 이경희 선생이 나를 꼭 만나보라고 추천했다고 한다.


경남정대연 창립에서부터 해산까지 깊이 관여했던 나를 찾아온 건 나름 번지수를 잘 짚은 것이지만, 기록해두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만만찮았다. 물음에 나름 성실히 대답하고, 당시 신문기사들도 찾아 복사해주었지만 체계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라 못내 아쉬웠다.


그를 보낸 후 집에 가서 당시 경남정대연 관련 기록이 있나 찾아보았다. 다행히 2000년 초쯤에 만든 단체 소개 리플렛이 남아 있었다. 스캔하여 이지영 박사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여기에도 기록으로 남긴다.


박성현, 이수영, 우수영, 정봉화, 안현주, 윤정일 등의 이름이 참 새삼스럽다. 2000년 말~2001년 초 공식 해산할 때 나는 그 단체의 집행위원장이었고, 박성현은 사무국장이었다.


경남정대연 리플렛.


경남정대연 리플렛.


기록하지 않은 역사는 참으로 복원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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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여행 11 : 박근혜한테 선물하고픈 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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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家畜)은 집에서 기르는 짐승입니다. 날개가 달려 있기도 하고 네 발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짐승을 기르는 용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먹이로 삼거나 일을 부리거나 데리고 놀거나……. 진정한 가축은 이 셋을 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가축이 거의 멸종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고기(바다나 강물에서 나는 것은 빼고)는 대부분 공장에서 생산됩니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은 대부분 가축이 아니고 반려동물이 된 지 오래입니다.

 

네팔에서는 가축이 살아 있었습니다. 쨍쨍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시골 농가 마당에서는 오리랑 닭들이 종종거리고 있었습니다. 시골 농가 마구간에서는 염소나 소 따위가 여물을 씹고 있었습니다.

 

 

코끼리도 여기서는 가축이어서 우리는 콩 비슷한 곡물을 싸담은 볏짚 뭉치를 코끼리 코에 물려주는 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코끼리가 비를 가릴 수 있는 움막도 지어놓았습니다.

 

 

들판에서도 염소나 물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철 풀이 지나치게 나지막해서 그런지 무릎걸음으로 옮겨다니며 배를 채우는 염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나 염소는 어른도 몰고다녔지만 대부분은 어린 아이들 몫이었습니다. 저는 네팔 아이들 웃음이 해맑은 까닭이 적어도 절반은 이런 가축 돌보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네팔은 어른들도 웃음이 좋고 해맑은데 그 까닭도 저는 이들이 어릴 적 가축을 돌보며 자란 덕분이라고 믿습니다.

 

근거가 무엇이냐고요?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경험이나 느낌에 비춰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네팔에서처럼 가축을 돌보며 지낸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웃음이 해맑아지리라 저는 여깁니다.

 

네팔 이 엄마도 아침마다 염소 젖을 짤까요? 궁금했습니다.

 

가축은 눈이 맑습니다. 바라보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가축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과는 달리 함께 있어도 몸이나 마음이 부대끼지 않는 이유입니다.

 

가축을 제대로 기르고 돌보려면 저 녀석한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낱말을 쓰자면, 가축 돌보기는 바로 ‘배려’인 것입니다.

 

가축은, 개나 고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는 물론 닭이나 오리조차도 따뜻합니다. 사람도 따뜻하지만 가축과 달리 털이나 깃이 없습니다. 가축은 품으면 바로 온기가 느껴지지만 사람은 품어도 바로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 품에 안긴 가축은, 그 녀석이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더한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선물합니다. 가축을 안고 가만히 있으면 심장 뛰는 움직임도 느껴집니다. 가축이랑 이렇게 교감하고 배려하며 사는데 어떻게 웃음이 해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네팔 시골에서, 저녁나절 염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한 무리를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입가에 웃음이 물려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염소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바라보노라니 저도 저절로 어린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어릴 적 우리집은 가축을 여러 가지 길렀습니다. 어릴 적 추억은 많은 부분 가축 관련입니다. 가장 보드라운 추억은 염소입니다. 작은형과 저는 봄여름가을 염소를 앞장세우고 들로 산으로 풀 뜯기러 돌아다녔습니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가 언제나 대여섯 마리는 됐던 것 같습니다. 들판 나가면 작은형은 제게 염소를 맡기고 다른 데로 가곤 했습니다. 물론 여기저기 나무에 비끌어매는 일까지는 끝내 놓고 그랬지요.

 

쓸쓸해진 저는 염소 새끼를 보듬고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새끼 염소는 ‘매애매애’ 울며 제게 따뜻한 체온을 넘겨줬습니다. 염소 눈동자는 바라보고 있으면 속절없이 슬퍼지고 말 정도로 크고 맑았습니다.

 

염소는 몸을 떨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서워 그러나 하며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끼는 내 마음을 몰라주니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안고 있던 염소를 휘~익 집어던지기도 했는데 염소는 ‘매애매애’ 울면서 떨어지는 도중에 용케도 중심을 잡았습니다. 저는 엎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엎어지지 않아 괘씸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습니다.

 

염소는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를 좀더 바쁘게 했습니다. 염소는 식물성만 먹습니다. 겨울에는 풀이든 나무든 잎사귀가 없습니다. 가을에 부지런히 풀잎 나뭇잎을 뜯고 베고 찌고 날라서 말리기까지 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촉새 강아지풀 벼나 보리처럼 생긴 풀은 말리면 쪼그라들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잎이 넙적한 녀석이 우리는 좋았습니다. 우리는 개울가나 산기슭이나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꼴을 뜯었습니다.

 

염소는 아카시아 잎사귀를 아주 좋아합습니다. 여름에 아카시아잎이 좋은 데를 눈여겨봐 뒀다가 가을이 되면 작정하고 땄습니다. 다행히도 아카시아나무는 곳곳에 많았습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사방(砂防) 효과를 보려고 뿌리가 무성하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이 나무를 심어댔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어린 저는 아카시아를 곳곳에 심어준 박정희가 고마웠습니다. 우리 염소는 박정희 덕분에 아카시아잎을 많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카시아잎과 다른 풀들을 구분해 말렸습니다. 아카시아잎 건초는 말하자면 최고급 먹이였습니다. 다른 풀도 깨끗하고 큰지를 따져 따로 구분해 광에 넣었습니다.

 

풀이 마르는 것도 절로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덩이가 진 그대로 말리면 안에서 뜨기 십상이었습니다. ‘갑빠’를 펼치고 고르게 늘어놓은 다음 시시때때로 뒤집고 돌리고 하지 않으면 금세 그렇게 됐습니다. 이런 노동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염소를 위한 일이었기에 즐거웠습니다.

 

네팔 이 엄마도 아침마다 염소 젖을 짤까요? 궁금했습니다.

 

엄마는 그런 염소에게서 아침마다 젖을 짜내 다른 집에 팔았습니다. 염소가 돈까지 장만해줬던 것입니다. 젖 잘 때 저는 염소 뒷다리를 꽉 붙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염소는 힘이 셉니다. 어설프게 잡았다가는 뒷다리에 얼굴이 걷어차이기 일쑤입니다.

 

엄마는 나무랐습니다. 제가 다칠 뿐 아니라, 짜던 젖도 쏟아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선잠이 깨어 눈을 비비며, 추운 겨울에는 오돌오돌 떨어가면서, 염소 뒷다리를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엄마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먼저 뒷다리를 잡아줄 자식을 깨워야 했습니다. 저나 작은형이나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찌 그리 힘들던지요. 손수 젖을 짠 다음 생젖을 솥에 부어 연탄불로 끓이는 일도 엄마 몫이었습니다.

 

염소젖을 배달할 유리병을 끓는 물로 소독하고 깨끗하게 씻는 일도 있었습니다. 코카콜라 350ml 작은 병을 썼는데요, 뜨거운 물로 소독하는 와중에 쩍쩍 갈라터지기도 했습니다. 소금으로 간도 맞춰야 했습니다.

 

젖 배달은 우리 몫이었습니다. 가까운 데도 있었고 먼 데도 있었습니다. 모르는 집은 적었고 대부분 아는 집이었습니다. 국민학교 같은 반 여자아이가 나와 젖병을 받아갈 때면 좀은 부끄러웠습니다.  엄마는 염소젖 배달해 생기는 돈은 우리 학자금으로 쓰겠노라 말씀했습니다.

 

염소를 모는 네팔 아이들과 맞닥뜨린 그 짧은 순간에, 옛날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저도 염소를 한 번 안아보고 싶었습니다. 아이한테 염소를 건네받아 안았더니, 염소가 발버둥치면서 ‘매애’ 울었습니다. 주인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라 그랬겠지요.

 

아이는 저를 보며 웃었고 그런 웃음을 마주하는 저도 웃었습니다. 염소는 밭으로 가더니 마른 풀 꽂아두는 나무막대 있는 쪽으로 기웃거렸습니다. 막대에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습니다. 염소랑 함께 노니는 듯했습니다. 네팔에서 지낸 나날 가운데 어느 하루가 이렇게 저물었습니다.

 

 

저는 성격이 모질고 차가운 편입니다. 우리 집안 내력도 좀은 그런 편입니다. 이런 성질을 조금은 눅여준 존재가 이런 염소와 가축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염소를 비롯해 여러 가축들과 함께 지낸 나날들이 없었다면 더욱 모질고 차가운 인간이 됐을 것입니다. 어쩌면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 놈이 돼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세월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소녀’ 박근혜나 ‘소년’ 홍준표한테, 하얀색 어린 염소를 한 마리 선물하고 싶습니다. 선한 눈동자 보드라운 느낌 따뜻한 체온을 염소와 나누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한국 국민과 경남 주민들한테 이토록 험한 세상살이를 시키지는 않았으리라 여기는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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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지사, 사법처리 싫죠? 저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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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주의료원 폐업 때는 싸움꾼 모습

 

2013년 진주의료원을 없앨 때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정치도 행정도 아니고 싸움이었습니다. 정치도 행정도 그 출발이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있을 텐데,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것이 당시도 지금도 홍준표 스타일입니다.

 

또 그런 자기에 맞서면 귀족노조 운운하거나 색깔이 어떠니 저쩌니 함으로써 상대 인격을 모욕했습니다. 비판 기사가 나오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어 사실 보도와 의견 개진조차 때려잡으려 했습니다. 경남도청 출입문까지 걸어잠갔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홍준표 도지사는 그러니까 정치인도 행정가도 아니고 싸움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경남도청 출입문은 여럿이 쇠사슬로 잠겨 있었고 그렇지 않다 해도 낱낱이 확인한 다음 출입을 시켰습니다. 경남 유권자들은 이런 싸움꾼을 정치인 또는 행정가로 착각할 만큼 눈이 나빴습니다.

 

2. 무상급식 지원 철회 핵심은 약속 깨기

 

2014년부터 지금껏 벌어지고 있는 아이들 점심 급식비 지원 철회는 선별 복지 전환이 아닙니다. 자기가 했던 약속의 파기일 뿐입니다. 몇몇은 홍준표 도지사의 약속 파기를 두고 보편 복지와 선별 복지의 대항전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약속을 지키느냐 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홍준표는 경남도지사가 되는 과정에서도 당선된 뒤에도 무상급식을 그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상급식 지원 철회 처음 시작도 선별 복지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경남도교육청이 감사를 받지 않으면 경남도는 무상급식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홍준표 도지사의 얘기였습니다.

 

무상급식 지원 대신 서민자녀 교육 지원을 하겠다고 돌려치는 홍준표 도지사. 경남도민일보 사진.

 

지금 입에 오르내리는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 논란은 그러니까 국면 전환에 따라 또는 국면 전환을 위해 홍준표 도지사가 말을 바꾸고 초점을 흐려온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준표 도지사는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한 번 ‘뜨’보려고 약속을 어긴 싸움꾼입니다.

 

공익보다 사리를 앞세우는 이런 나쁜 사람을 경남 유권자들은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오히려 60%에 가까운 지지를 안기며 2014년 지방선거에서 재선 도지사로 만들었습니다. 

 

3. 홍 지사가 뻔뻔해 보이는 원인은 무엇일까?

 

며칠 전 여영국 경남도의원의 질문에 대한 홍준표 도지사의 답변 녹취록을 봤습니다. 앞서 홍준표 도지사는 미국에서 업자랑 업무 시간에 골프를 치다가 들킨 일을 두고 몇 마디 했는데요, 저는 그 말들이 무척 뻔뻔해보였습니다.

 

2015년 4월 1일 현재. 경남도민일보 자료.

 

그런데 그렇게 뻔뻔한 이유를 여영국 도의원에 대한 그이 답변을 보면서 조금 눈치를 챘습니다. 홍준표 도지사나 대변인은 ‘사실상 휴일인 금요일 오후’에 골프를 쳤다 했고 “업자가 접대한 것이 아니라 도지사가 접대했다”고 했으며 “비용 지불도 업자가 아니라 도지사가 했다”고 했습니다.

 

길게 따져볼 시간도 가치도 없으므로 잘라 말하자면, 주관 주장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객관 사실로 인정하라고 다그쳤습니다.(이런 경우 경상도에서는 ‘쎄운다’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서 홍준표 도지사는 자기 주관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능멸하고 모욕하고 무시합니다.

 

미국 출장 골프 관련해서 자기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학교 급식을 둘러싼 복지 논쟁을 하려면 꼬투리 잡지 말고 격에 맞게 하라”고 내지른 대목에서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여영국 도의원 질문에 대해서도 보면 대답은 제대로 않고 군데군데 중얼거리듯 상대방을 능멸·모욕·무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홍준표 도지사 본인의 주관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존재를 곧바로 무시·모욕·능멸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노트북컴퓨터로 영화 감상을 하는 혼준표 도지사. <시사인>사진.

 

홍 지사는 앞서 경남도의회에서 의원이 질문할 때 노트북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장면이 <시사인>에 보도됐습니다. 여 의원은 이런 잘못된 태도를 짚었는데 홍 지사는 잘한 것은 아니지만 잘못 또한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이렇게 경우 없이 말하면 경상도에서는 ‘씨부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홍준표 도지사는 “흐흐……. 좀 질문하실 때 좀 제대로 공부하시고 제대로 근거를 갖고 질문하십시오.”까지 했습니다. 도지사가 업무 시간에 영화를 본 잘못을 짚는데 무슨 육법전서라도 꿰차야 한다는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끄트머리에서도 “그런 식으로 하니까 무능력(확실치 않음)하다는 거죠. 흐흐.” “(비웃는 듯) 에이 추궁을 하시려면 좀 제대로 준비하고 하시지…….”라 덧붙였습니다.(갱상도에는 이럴 때 ‘씨부렁댄다’는 말도 씁니다.)

 

이번에 나온 사진은 아닙니다. 여영국 의원이 서류를 챙기는 모습이 흐리게 잡혔고 자리에 앉아 있는 홍준표 도지사는 표정이 압권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어떠신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내 말은 단순한 주장이나 주관이 아니라 객관 사실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능멸·모욕·무시하겠다.’ 홍 지사가 뻔뻔해 보이는 원인이 저는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능멸·모욕·무시와 뻔뻔함이 바로 홍준표 도지사의 인격입니다. 그 인격이 비열하다거나 저급하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지사로서는 모든 면에서 많이 모자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경남 유권자들은 그이 중앙정치 경력만 보고 또 새누리당 공천만 보고 도지사로 뽑았습니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유권자들입니다. 두 차례나 그리했으니 고생을 해도 한참을 더해야 마땅한 덜 떨어진 유권자들입니다.

 

4. 홍준표 돈 받았다는 메모 나왔지만

 

이런 와중에 홍준표 도지사한테 1억원을 줬다는 메모가 나왔습니다. 성완종이라는 정치인 겸 기업인이 그 주인입니다. 4월 9일 자살할 때 몸에 지니고 있었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검찰 수사도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홍 지사가 1억원을 받았다고 확인된다 해도, 사법 처리는 받지 않기 바랍니다.

 

홍 지사가 사법처리를 받게 되면 도민 대다수를 적대시하는 싸움꾼 도지사, 약속을 마음대로 깨는 도지사, 유권자를 무시·모욕·능멸하는 나쁜 도지사를 경남 유권자들이 자기 힘으로 몰아낼 수 있는 길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경남 유권자들이 자기 손으로 나쁜 도지사를 뽑은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정과 반성이 잘못 뽑은 도지사를 몰아내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3일 출근길에 취재진과 만나는 홍준표 도지사. 경남도민일보 사진.

 

그렇지 않고서는 무한 악순환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홍준표 도지사가 사법처리를 받아 물러난다 해도 다음 선거는 결과가 뻔합니다. 정치나 행정에서 나름 경력이 있고 새누리당 공천을 받는 인물이 무조건 당선됩니다.

 

5. 유권자 각성 없으면 무한 악순환뿐

 

황철곤 전직 마산시장이 잘 보여줍니다. 1995년 당선된 김인규 마산시장은 한일합섬으로부터 공장터를 아파트터 등으로 바꿔주는 대가로 5000만원 뇌물을 받았습니다. 99년 창원지법과 부산고법은 징역 5년 5000만원 추징을 선고했고 2000년 3월 대법원 확정 판결로 시장직을 잃었습니다.

 

뒤를 이은 마산시장이 누구인지는 다들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황철곤이라는 인물이 한나라당 공천으로 마산시장이 됐는데, 이 때 수정만 매립지 STX조선기자재공장 설치 등등으로 마산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는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수정마을 할매들은 황철곤 당시 마산시장이 주민 무시 행정으로 마을 한가운데 조선 관련 공장을 들이려 하는 바람에 이렇게 윗옷까지 벗어제껴야 했습니다.

마산 유권자들은 이런 인물을 3선까지 시켜줬고 황철곤은 황제처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전임 시장보다 훨씬 더했습니다. 황철곤 시장은 재임 중에도 뇌물 혐의로 재판을 받더니 2010년 퇴임 뒤에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음 등이 인정돼 징역까지 살았습니다.

 

이런 참화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경남 유권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더 나아가 나쁜 도지사를 자기 힘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힘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되면, 그것은 또다른 홍준표를 예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경남에 사는 모자란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해보는 생각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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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말도 무조건 잘 들으라는 채현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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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생태·역사기행 2015년 첫 나들이를 마치고 곧장 창원대학교 봉림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하는 ‘풍운아 채현국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거기서 저녁 7시부터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뜻밖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채현국 선생은 금방 도착하셨는지 들머리에서 앉지도 않으신 채로 자기 일대기를 다룬 책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 피플파워 발행)에 사인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가 기념으로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며 요청을 하니까 어깨동무하듯이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향해 웃어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책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는 않았습니다.

 

단행본 <풍운아 채현국>에 사인을 해주는 모습.

 

책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기념사진을 찍는 채현국 선생(모자 쓴 이)

 

안에서는 어떤 분이 이날 행사를 위해 식전 행사로 톱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이 크게 손뼉을 치면서 “한 곡 더”를 외치니까 못 이기는 척 한 곡 더 연주하고 손을 흔들며 내려갔습니다.

 

톱연주를 마친 뒤 한 손을 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채현국 선생 말씀은 다들 새겨들을 만했습니다. 가진 바를 많이 비웠고 그 덕분에 현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인 때문인지 많이 공감됐습니다. 일상에 갇혀 사는 우리들이 놓치거나 제대로 못 본 그런 대목도 많아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말씀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얘기는 김주완/채현국/김지윤/이인식(왼쪽부터) 네 분이 나눴습니다.

 

김지윤 인제대 3학년 학생이 일어나 자기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채현국 선생은 무슨 이야기 끝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언론기관은 언론기관이 아닙니다. 광고업잡니다!” 이렇게 내질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안팎으로 지당하고 또 지당한 지적이라 여기면서 짧으나마 머리와 가슴이 둘 다 시원해지는 느낌도 누렸습니다.

 

그러다 또 무슨 끝인가는 모르겠는데, 본인이 취재를 거절한 사연도 들려줬습니다. 2014년 1월 4일치 <한겨레>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기사, 그리고 경남도민일보 피플파워 발행 <풍운아 채현국> 단행본으로 새삼 널리 알려지면서 그이 취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겠지요.

 

 

채현국 선생은 이리 말했습니다. “싸움 붙이는 거야, 이게. SBS에서 연락이 왔어. ‘선생님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이래 말했지. SBS는 광고 팔아서 잘 먹고 잘 사는 방송국 아니냐? 나는 SBS 광고 팔아먹는 데 들러리는 못 서겠다.

 

기자 양반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SBS가 바뀌기 전에는 그런 거 못한다. 그러니까 기자들하고 방송사하고 싸움 붙이는 거지. 그래 갖고 신나게 한 번 싸워보라고 말이야.” 그러자 자리에서는 감탄하는 소리와 손뼉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사회를 맡고 있던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출판미디어국장이 “그런데 <뉴스타파>하고는 찍고 계시잖아요” 하니까 “거기도 전에는 어디서 싸우다 짤렸다고만 알고 무슨 일 하는지는 몰랐는데. 하하” 채현국 선생이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국면에서 망설이기 십상입니다. 모든 보도 내용을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극악한 매체라 해도, 어떻게든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알리려면 아무래도 수락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채현국 선생은 한 마디로 잘랐습니다. 제가 보기에, 채현국 선생은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버리고 자기 생긴대로 한 평생 살면 그것으로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할 바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 같았습니다.

 

 

자기가 깨달았고 또 자유를 얻었으면 그 깨달음과 자유가 일러주는 대로 그냥 실천하면서 살면 그만이지 그게 널리 알려지고 다른 사람한테 영향을 주고 말고 하는 것은 내 권한과 의무 바깥에 있다고 여기지 싶었습니다.

 

언젠가 현대 중국의 사상가 노신이 일러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지도자라는 것들을 믿지 말라’시는 노신 말씀 요지는 이렇습니다.


‘앞에 나서 갖고 이리로 가야 살길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떠드는 헛소리에 절대 흔들리지 마라.’

‘진리나 살길을 진짜 아는 이들은 저렇게 떠들 시간이 없다.’

‘진리와 살길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벌써 진리와 그 살길을 따라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얘기하고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상업적 목적과 무관하게 마련된다면 모르되, 그악스럽게 그런 돈벌이에 활용되면서까지 다른 사람 앞에 나서 눈을 현혹시킬 일은 없다는 것이 채현국 선생 뜻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단상에서 내려와 자리에 있는 한 어른과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불어, 채현국 선생 말씀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하나가 있어 한 번 적어볼까 합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나이가 마흔인데 예전 아버지 시절 같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 그러고 있지는 못합니다, 선생님께서 꼰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꽉 막힌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저보다 어리면 나무라고 때려서라도 할 수 있겠는데 나이 든 어른은 난감합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 무조건 잘 들으세요. 사람 하는 말이 다 다릅니다. 겉으로 같아 보여도 속은 저마다 다릅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를 놀리고 화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듣지 않으면 절대 속뜻을 알 수 없습니다.

 

채현국 선생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만드세요. ‘영감님, 영감님은 얼마 안 있으면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 텐데, 그런 말은 염라대왕도 좋아하지 않을걸요.’ 이런 식으로요.”

 

채현국 선생은 이날 이런 화조도도 한 폭 선물로 받았습니다.

저는 이 가운데 ‘잘 새겨들어라’는 말씀이 쏙 들어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하는 식대로 생각해서 상대방이 그런 꼰대 같은 말을 했다고 선불 맞은 짐승처럼 설쳐댄다면 그보다 더한 꼴불견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꼰대 같은 얘기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별 영향력도 없거든요. 그런데 자기 생각이 옳다고, 그 옳다는 자기 생각에 갇혀서 상대방 말까지 마음대로 가두고 자르고 붙이고 열내고 하면 오히려 보는 사람 같잖기만 하지 싶은 것입니다. 

 

상대방을 우스갯거리로 만들라는 얘기는, 저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있는 듯 없는 듯 여기고 (자기 삶이나) 제대로 살아보아라.’ 이런 우스개는 또 한 순간 짧은 국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무리짓는 손쉬운 방편도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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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부석사 수학여행 아이들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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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진행하는 '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은 올해로 4년째입니다.

 

습지의 아름다움과 유용함을 사람의 삶과 역사·문화 현장에서 찾아보고 이를 누리는 한편 널리 알리는 데 취지가 있습니다. 습지 또는 생태가 저 홀로 떨어져서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오랜 옛날부터 사람과 어울리면서 공존해 왔음을 발품으로 체득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올해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첫 걸음은 경남도민일보 자유로운광고 등을 통해 함께할 이들을 모은 다음 4월 8일 경북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으로 떠났습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래서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았음직한 명승고적입니다. 고등학생 수학여행도 많아서 이 날도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경기도 용인 태성고 학생들로 말미암아 활기가 돋아나 있었습니다.

 

어쩔꺼나, 세월호 참사를 우리는 아직도 대부분 떨치지 못했습니다. 수학여행 온 이 태성고 아이들 밝은 웃음소리와 활달한 발걸음에서조차 그 짙은 슬픔과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씀입니다. 세월호를 한 해가 지나도록 여태 건져 올리지 못한 못남에 대한 자책도 없지 않았습니다.

 

수학여행 온 경기 용인 태성고 아이들한테 부탁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그래도 봄날은 꽃으로 피고 봄산은 새 빛으로 물듭니다. 진입로 양쪽 은행나무도 어김없이 새싹을 틔웠고, 풀꽃도 군데군데 내려앉아 종종거리는데 산수유나 목련 같은 나무들도 저마다 자기 색깔 꽃대를 곳곳에서 머금었습니다.

 

은행나무 가로수 진입로를 지나 오른쪽 당간지주 둘러보러 가는 일행들.

 

사람들은 꽃그늘 아래 스며들어 삽상한 가운데 그 풍치를 즐깁니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은 선생님과 더불어 아니면 자기들끼리 사진으로 추억을 만듭니다. 우리 일행이 사진 좀 찍어달라면 그 또한 즐겁게 찍어줍니다.

 

이번 생태·역사기행을 준비하면서 대부분 한두 차례는 다녀온 곳이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안내문에는 부석사가 무량수전 본존불이 현세(現世)를 관장하는 석가모니가 아니고 아미타불인 까닭과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바라보고 쳐다보는 전망이 뛰어난 절간이라는 사실만 간단하게 일렀습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길에 누군가가 "배흘림기둥이 어디 있어요?" 물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다들 한 번씩 들렀다 해도 그 밀도가 색채가 한결같지는 않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이들에게는 좀 중복이 되더라도 하나하나 필요한 만큼은 알려드려야 맞겠구나 싶었습니다.

 

무량수전을 받치는 기둥이 모두 배흘림기둥이다, 가운데가 볼록하게 틔어나와 있다, 밋밋한 1자 기둥은 아래위로 짓눌려 가운데가 오히려 홀쭉하게 가늘어 보이는 현상을 보완하기 위해서라 한다, 그런 미묘한 차이까지 알아차리는 고려 시대 건축가들의 미적 감각이 배흘림기둥에 담겨 있는 셈이다 등등 얘기했습니다.

 

무량수전 앞에서.

 

또, 무량수전을 두고 고려 건축의 소박·검소함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고려 건축이 그랬겠느냐, 수도 개경에 있던 많은 절간과 궁궐 건물들이 모두 수수·검박했겠느냐, 아니고 화려찬란했으리라고 봐야 맞지 않겠느냐,

 

부석사가 있는 영주는 지금도 당시도 산간오지였다, 무량수전 검박함은 이런 데에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 오히려 무량수전 건축의 대단함은 산간오지라는 입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개경서 멀리 떨어진 비수도권 내륙 건축기술인데도 600년 넘게 버티는 무량수전을 만들 정도로 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부석(浮石=뜬돌)

 

이밖에 선묘각·조사당과 부석(뜬돌)까지 둘러본 일행은 무량수전 앞과 안양루 어귀에서 비록 궂은 날씨에나마 소백산 굽이굽이 여울져 나가는 눈맛을 누린 다음, 셋씩 모여 커다란 하나를 이루는 돌계단 세 모둠(이렇게 아홉이 된다)을 되밟아 내려갔습니다.

 

안양루 옆에서 소백산 뻗어나가는 산줄기도 눈에 담았습니다.

 

돌계단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화엄종 진리가 들어 있다는데, 9품만다라라 일컫는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장쾌한 느낌이 대단합니다.

 

커다란 자연석들이 직각을 이루며 쌓여 있는 사이로 잔돌을 박아 안정되게 했고 커다란 자연석도 가만 보면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쪼개고 다듬은 자취가 나타납니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가미한 인공이라 하겠지요.

 

수학여행 온 아이들 손을 빌려 자목련 백목련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이 날은 안양루 아래 자목련이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한 바퀴 절집을 거닌 다음 버스를 세워놓은 데 종점식당에 들러 안동간고등어와 함께 차려진 청국장비빔밥을 맛나게 버무렸습니다.

 

이제 소수서원 차례입니다.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고려 시대 안향 선생을 위해 신재 주세붕이 세웠는데 그 뒤 퇴계 이황이 명종임금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 새겨진 편액을 내려받음으로써 최초 사액서원이 됐습니다.

 

소수서원 들머리는 소나무가 좋습니다.

 

 

서원은 사립 중·고등교육기관이고(향교는 공립) 임금 편액을 받으면 조세·군역 따위가 면제되니 요즘으로 치면 여러 특혜를 받는 특수목적고 또는 자립형사립고쯤이 되겠습니다.

 

소수서원이 여기 들어선 까닭은 절반 이상이 죽계천과 그 둘레 풍광에 있을 것입니다. 앞을 흐르는 죽계천은 고려 선비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어 노래했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덕분에 처음 숙수사 절간이 들어섰을 테고, 절간이 몽골 침략으로 스러진 뒤에는 소수서원 주춧돌을 놓는 데 안성맞춤 자리였겠습니다.

 

옛 절터에 들어선 서원이다 보니 불교 관련 유물들도 당간지주를 비롯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원 주춧돌이나 계단돌로 재활용된 석탑·석등 부재도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 특목고를 자기 자락으로 끌어들인 죽계천은 핏빛 역사도 안았습니다.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한 세조는 자기 동생 금성대군과 그 일파를 이 상류에서 처단했습니다. 순흥(지금 영주)으로 유배온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한 때문이었습니다.

 

맞은편 경(敬)자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당시 흘린 피는 10리를 흐른 끝에 소수서원 앞자락에 멈춰 '피끝'을 이뤘다는데,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주세붕이 경(敬)이라 붉게 새긴 바위가 거기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계천이 거기 있었기에 사람들이 모여 들어 마을도 이루고 절간이나 서원을 세워 자연과 어울렸고, 그러다 보니 세속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다툼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잔인한 역사도 자취를 더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소수서원은 이제 관광지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옛사람들 정취까지 누릴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 자락에 조성된 선비촌은 따뜻한 남쪽에서 온 일행들한테는 색달라보였습니다.

 

한 분이 징검다리에 올라 죽계천 그윽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습니다.

영주 이곳저곳에 있는 옛집들을 재현한 건물들인데 살펴보면 하나같이 똘똘 뭉쳐 있습니다. 남쪽 옛집은 죽 늘어서 흩어져 있다면 여기 옛집들은 바깥담 안쪽에 한 번 더 담장을 둘렀다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안채·사랑채·곳간·마굿간 등이 빈틈없이 모여 있습니다.

 

겨울이 매우 추운 기후 때문일 텐데, 이 또한 인간이 자연과 어떤 식으로 마주하고 어울리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하겠습니다.

 

김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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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엄마, "해병대 참사 남일로 여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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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 우리 큰형은 나이 스물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막내인 제가 대여섯 살 때 일어난 일이라 제 기억 속에서는 큰형이 어디에도 없을 정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큰형 세상 떠난 지 10년 20년 30년 40년이 됐을 때도 큰형 생각하면서 눈물지었고 때로는 눈가가 짓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다시 봤습니다. 2015년 4월 15일 오전,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숨을 거둔, 경기도 안산 단원고 박성호 학생의 어머니 정혜선씨였습니다. 속으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정혜선씨는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한겨레> ‘잊지 않겠습니다’ 연재를 찾아봤습니다. 2014년 6월 24일치 1면에 나와 있더군요. “‘사제’ 꿈꿨던 박성호군”.

 

 

“화가 나면 글을 쓰며 마음을 가라앉혔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아이였다고 엄마는 기억했다.” “침몰 사고 7일만인 4월 23일 가족 품에 안긴 성호는 사흘 뒤 안산 선부동성당에서 그토록 입고 싶던 사제복 대신 수의를 입고 잠들었다.”

 

엄마는 기사에서 이렇게도 얘기했습니다. “그 짧은 삶, 고작 고것 살고 살 걸…. 정작 ‘사랑한다’ 말해주었어야 했는데, 왜 그리 그 말에 인색했는지 후회만 남는구나. 걱정쟁이 엄마는 치마폭에 너를 꼭꼭 싸고 다칠라 걱정하며 뭔 보호를 하겠다고 네게 짐을 지웠웠는지….”

 

 

엄마는 아마도 짐짓 겉으로는 엄한 듯이 하면서 마음으로는 많이 보살피고 했는가 봅니다. 이런 엄마 정혜선씨가 이날 강연에서 3년 전 중학교 3학년 시절 아들 성호가 정부가 벌이는 4대강 사업을 두고 한 말을 일러줬습니다.

 

“아들은 ‘우리 강과 물이 썩어가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볼 수 있나. 저것이 돌고돌아 다시 우리한테 돌아올 텐데, 가만히 있어도 해결이 되나.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아이가 열 번 말하면 한 번 정도 나갔습니다. 일상이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내 아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참 성숙한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살이 인과관계를 폭넓게 짚을 줄 아는 소견이 일찌감치 생기기는 어려운 노릇이거든요. 그런데 이 말보다는 이어지는 정혜선씨 얘기가 정말 제 가슴을 때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한 해 전 2013년 7월 충남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공주사대 아이들이 훈련 받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 있잖아요. 그 며칠 전에 성호가 같은 장소 같은 훈련을 받고 왔거든요. 보도를 보면서 아들이 ‘아, 죽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저기 선생님들 참 나쁜 사람들이에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아들이 너무 곱게 자라고 힘든 줄 모르고 커서 저렇게 말하는구나 했지 정말 그게 잘못됐고 또 위험한 일이구나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경남도민일보 강당 정혜선씨 강연 모습.

 

 

그리고 또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일어나기 두 달 전 2014년 2월 17일 경주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오리엔테이션을 하던 부산외대 신입생을 비롯해 10명이 죽고 205명이 크고작게 다치는 손해를 입었습니다.

 

성호 누나는(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부산외대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 신입생이었는데 이 때문에 무슨 리조트 같은 데 가지 않고 캠퍼스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했습니다.(그냥 그랬을 뿐 안전 문제나 경주 참사 해결을 위한 행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바로 세월호로 이어졌습니다. 우리 아들 박성호한테로 이어졌습니다. 태인사설해병대캠프참사가 터지고 경주마우나리조트참사가 벌어졌을 때 우리가 좀더 신경을 쓰고 함께 대처하지 않은 잘못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 함께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물론 안전 문제를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저로서는 참 옳게 여겨지는 말씀이었습니다. 호미질로도 막을 수 있는 앞선 사고 하나하나를 허투루 여기고 넘기다 보니 뒤에는 정말 가래질로도 막지 못할 커다란 사고가 터진 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제 생각에 적어도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성호 엄마가, 사설해병대참사를 보면서 보인 반응만큼은 절대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아들은 이미 지나갔다고, 내 딸은 저런 일 안 당한다고, 눈앞에 벌어져 있는 이 참사를 남의 일로 밀어버리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와 성격이 같은 참사가 포장만 달리해서 더 큰 규모로 우리를 덮쳐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참사의 역사가 일러주는 바가 바로 그렇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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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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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그는 지난 2010년 3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재직 중 한 강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 차명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뛰어내린 겁니다"라고 발언, 사자명예훼손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받았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1화- 조현오를 만나다



조현오 전 청장(이하 호칭 생략)은 차명계좌 발언으로 많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소 후 2014년 말,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관련 기사에는 수행원이 3명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호위호식 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2015년 2월 말, 조현오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수행원 정체를 밝혔다. 바로 그 수행원 가운데 한 명이 필자다.

오마이뉴스 인터뷰 보기


조현오를 알게 된 것은 <나꼼수>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서다. <나꼼수>에서 다룬 조현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장자연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나꼼수 30회)’, ‘검경 수사권 조정을 검찰에 유리하게 한 장본인이고(나꼼수 31회)’, ‘디도스 수사에서 경찰 수사를 망친 장본인이며(나꼼수 32회)’, ‘경찰에 최시중 관련 첩보를 줬음에도 수사를 방해한 인물(봉주 2회)’이었다.



2013년 중반까지 조현오는 관심 밖 인물이었다. 당시 경찰을 취재 중이었고 한 형사에게 자신이 수사하던 사건을 윗선에서 덮으려던 일을 듣게 됐다. 그는 사직서를 준비하고 윗선에 들이댔다.


“만약 사건을 가져가면 사표를 내고 조현오 청장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사건을 묻으려던 시도는 한순간에 없던 일이 됐다. 형사에게 ‘경찰청장 조현오’는 어떤 상징이었을까.


“검찰과 붙었을 때 그만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이 흔치 않거든요. 위에 눈치 안 보고 내부 비리에는 굉장히 부정적이지요. 바로 날려버려요. 숙청하듯이.”


이어진 경찰 취재 과정에서 접한 조현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조 파면’이라는 별명을 거론하며 독재자로 보는 시선도 있었고 인사문제에 대한 불만은 상당했다. 반면 긍정적인 평가는 그동안 <나꼼수>에서 접했던 조현오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상반됐다.


“역대 경찰청장 중 허준영과 조현오를 존경해요. 아이러니한 것은 외무고시 출신들이 조직에 들어와서 비전을 줬다는 것이지요.”


“경찰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분이에요.”


“역대 청장 중 청와대와 관계에서 가장 강한 목소리를 냈어요. 검·경 수사권 다툼이 벌어질 때 자기에게 큰 타격이 올 수도 있어요. 통상적으로 검찰 조직은 자기 조직에 대항하거나 해를 입히면 반드시 보복합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상대 힘을 빼지요. 대표적인 대상이 경찰 수장이고요. 차명계좌 고소 건 외에는 걸릴 게 없는 분이잖아요. 국민이 갖는 가장 큰 이미지는 차명계좌 발언이지만 큰 줄기는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고 사명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지요.”


“카리스마 있어요. 추진력과 조직 장악력이 있고 가차 없지요. ‘조 파면’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조직 내 비리를 완전히 쓸어버리면 조직은 깨끗해질 것 아니에요?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조현오> 책 표지에 멍든 사진? 그것은 이제석 디자인인데, 그런 디자인 쓴 것에 대해 쿨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에요. 보기에는 수구적이고 권위적일 것 같지만 생각이 대단히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이들은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으로 저평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꼼수>가 제기한 내용이 과연 진실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사전조사를 마치면서 경찰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그건 ‘조현오’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조현오를 몹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처를 비롯해 그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조현오는 당시 ‘차명계좌 발언’으로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죄’로 기소돼 항소심 재판을 받았다. 이런 죄는 보통 양형이 벌금 100만 원 정도다. 항소심 재판에서 그는 차명계좌 발언 진원지로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 임 씨를 지목했지만, 임 씨는 부인했다. 2013년 9월 26일 그는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다시 구속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즐거웠다.정보가 하나도 없는 것과 소재를 알고 있는 것은 큰 차이다. 서울구치소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이 평소 생각하는 바를 적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편지를 받는 족족 찢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조현오는 누군가를 한 번 믿으면 그냥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젠가 그에게 재판기록을 요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기록을 조건 없이 보내줬다.


조현오는 2014년 5월 중순 만기 출소했다. 그에게 연락을 받고 만나기로 하면서 부탁한 것은 재판부가 하지 않았던 현장검증이었다. 그가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이야기를 들었다는 한 서울역 인근 호텔 식당을 현장으로 지목했다.


조현오는 서울청장으로 부임해 2010년 3월쯤 이 호텔 식당에서 임 씨를 만났다고 한다. 지금까지 언론은 임 씨를 MB와 독대할 수 있는 핵심 실세 가운데 한 명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정보력이 막강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문은 당시 임 씨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임 씨가 조현오를 만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임 씨를 만났다는 식당은 호텔 지하에 있는 고급 다다미방이다. 음식 값은 1인당 최하가 10만 원 선이다. 단아한 옷차림으로 머리를 깨끗이 뒤로 동여맨 아가씨들이 음식 시중을 든다. 조현오에게 임 씨에 대한 기억을 더듬도록 했다.


임 씨는 음식을 나르는 아가씨에게 ‘기프트 카드(Gift Card)’로 결제가 가능한지를 물었다고 한다. 아가씨는 결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임 씨는 카드 유효기간을 두고 아가씨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조현오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결제할지 고민하다가 예의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했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이었다. 막강한 정보력이 있다는 사람이 자기 상품권 카드로 결제가 되는지도 모르는 식당에 서울지방청장을 불러냈다? 애초부터 불러낸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정도로 허술할까? 법정 진술도 이런 식이었다면 재판부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듯했다.


조현오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서울지방청장 시절 내부 강의였을 뿐이고 허위 인식과 고의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문제가 있다.


그는 당시 현직 서울지방경찰청장이었다.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발언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고위직 공무원은 그만큼 말과 행동에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가 받은 판결이 부당한 면이 있다는 점을 짚어야겠다. 조현오는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징역 8개월로 감형됐다. 감형 이유는 경찰직 공무원으로서 끼친 사회적 공헌을 고려한 것이다.


경찰 안에서 조현오를 싫어하는 이도 동의하는 점이 있다. 그가 매우 청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이도 있다. MB가 임명한 경찰총수이기 때문이다. 차명계좌 발언까지 했을 정도면 눈치 보기와 아부에도 능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라스트 캐슬>에서 어원(로버트 레드포드) 장군은 교도소장에게 군 형무소 수감자를 대하는 태도가 왜 서로 다른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은 그들의 최악인 면을 바라보지만, 나는 최선의 면을 보고자 한다.”


1차 현장검증에서 조현오에게 ‘최선의 면’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과 정치적 색채가 맞지 않다면 모두 부정적으로 색칠하는 오늘날 사회상에 대한 반발로 조현오를 다시 보게 됐다. 물론 조현오는 여러 정치적인 논란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이 글은 분명히 선의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대상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작가가 책임을 져야 할 영역이다.


조현오와 첫 만남이 끝날 즈음 2차 현장검증을 제안했다. 장소는 서울시청 근처에 있는 코리아나호텔 중식당이었다. 이곳에서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 당시 청와대 ◯◯ 수석과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한 달 뒤에 조현오와 다시 만났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내는 식탁이 있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청와대 ◯◯ 수석에게 어떤 일로 화를 냈는지 물었다. ◯◯ 수석이 “검찰에 차명계좌사건이 수사 진행 중인데, 조청장이 수사권 관련해서 그렇게 강하게 발언해도 되는 건가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칠 쯤 <나꼼수>에서 주진우 기자가 망쳤다고 주장한 사건이 떠올랐다.


“여기 왔으니 안 물어볼 수 없네요.”


코리아나호텔 사장은 방용훈이며,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형제이다.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있었던 ‘장자연 사건’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다음 제2화-장자연 편 수요일 올립니다.>


이 연재를 계속 보고싶다면 아래 '밀어주기'로 서형 작가에게 취재비를 보태주세요. 100원, 500원, 1000원, 3000원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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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어른이 SBS와 OBS 출연 거절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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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1935년생, 81세) 어른은 최근 여기저기서 강연 초청을 많이 받는다. 웬만하면 다 참석하신다. 원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 어른도 딱 잘라 거절하는 곳이 있다. 최근 두 군데 언론사의 취재와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한 군데는 SBS 스페셜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고, 또 한 군데는 OBS의 명불허전이라는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명불허전은 알고 보니 유인촌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니 벌써 100회가 넘었다.


지난 4월 8일 창원 북토크에서 말씀 중인 채현국 어른.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인권변호사 1세대라는 이세중 변호사도 출연했고, 한국 시민운동을 이끌어왔다는 손봉호 교수도 있다. 소설가 김홍신, 김원기 전 국회의장, 조순 전 서울시장, 소설가 조정래등 쟁쟁한 분들이 그동안 출연했다.


채현국 어른께 프로그램 작가를 연결시켜 드린 후, 며칠이 지나 물었다. "OBS 출연요청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명불허전 소개 페이지.


"유인촌이란 친구, 배우할 땐 괜찮나 싶더니 장관할 때 보니까 영 아니더군. 난 그런 친구 싫어. 그래서 싫다고 했어."


그러면 SBS는 왜 거절했을까?


"SBS에서 다큐멘터리인지 뭔지 맨든다 한다는 거 듣고 이렇게 말했지. '광고 장사가 언론인 체 하고 돈 벌어 들이는데 (내가) 이용당하거나 동원될 일은 없다. 기자 당신한테는 미안하다. 당신에겐 직업인데. 당신이 정말 언론을 위해서 싸우면, 광고 장사에 언론을 써먹지 않도록 싸움을 시작하면 그때가서 함께 하겠다. 싸워라.'"


에스비에스 스페셜 소개 페이지.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SBS는 광고장사라서 다큐멘터리를 거절을 하셨는데, 뉴스타파는 왜 승낙하신 겁니까?" 그랬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뉴스타파가 뭔 지도 몰랐어. 기자들 튕겨져 나온 건 알아요."


해고된 기자들이 만든 매체이기에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채현국 어른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국민 텔레비전도 있고 뭐도 있고 많아요 사실 헷갈립니다. 우리들이 연대하지 못하는 이 꼬라지가 또 드러나는 거죠."


비슷한 성향의 매체끼리 왜 뭉치지 못하고 따로 하는 거냐는 말씀이었다.


지난 4월 8일 경남도민일보 주최로 열린 채현국 어른 창원 북토크쇼.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보수적인 놈들은 똘똘 뭉쳐서 잘도 해 먹는데, 조금은 남을 생각하고 조금은 우리가 그래도 조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연대를 못합니까? 제발 우리 좀 너무 판단 자꾸 앞세우지 말고 판단 조금 유보하고 남의 말 좀 열심히 듣고, 의견 다르다고 해서 특히 정치의견 다르다고 해서 원수지지 말고… 그랬으면 좋겠어."


여러 모로 생각해볼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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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장자연 사건 부실수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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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그는 지난 2010년 3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재직 중 한 강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날 10만 원권 수표가 입금된 거액 차명계좌가 발견됐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뛰어내린 겁니다"라고 발언, 사자명예훼손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받았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2화. 장자연 사건


필자가 다시 조현오를 만난 곳은 서울시청 근처 코리아나 호텔 식당이었다. 이곳에서 조현오는 경찰청장 시절 당시 청와대 ◯◯ 수석과 언쟁이 있었다고 했다.


식사를 마칠 쯤 <나꼼수>에서 주진우 기자가 망쳤다고 주장한 사건이 떠올랐다.


“여기 왔으니 안 물어볼 수 없네요.”


2009년 ‘장자연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바로 조현오다.


2009년 3월 7일 배우 장자연 씨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검시 결과 타살 혐의점은 찾지 못했다. 경찰 결론은 ‘우울증’으로 말미암은 자살이었다.


연예인 자살로 마무리될 사건은  매니저 유장호 씨가 이른바 ‘장자연 문건’을 공개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문건은 소속사 대표 김 씨가 성접대를 강요한 정황을 드러냈다. 장자연 씨 유족은 매니저 유장호 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더불어 소속사 사장 김 씨 등도 고소했다.


조현오는 “경찰 자존심을 걸고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자살로 매듭지은 사건을 재수사하기 위한 본부가 분당경찰서에 설치됐다. 실력이 출중한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장까지 투입됐다.


사람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문건에 나온 ‘조선일보 방 사장’이었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코리아나 호텔 방용훈 사장’, ‘스포츠조선 부사장 방성훈’ 등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방 사장은 그저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성매매 혐의는 증명되지 않았고 당연히 처벌도 없었다. ‘부실 수사’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한 정치인은 ‘장자연 사건’ 진실을 은폐하는 주도자로 조현오를 지목했다. 조현오가 이 사건에서 주목했던 것은 뭘까.


“장자연 변사 사건 수사에서 핵심이 뭘까요?”

“자살이냐 타살이냐?”

“그렇지요. 타살 혐의가 없으면 경찰은 자살 동기까지 반드시 밝혀야 하는 부담은 없어요. 게다가 장자연 씨가 죽은 상황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혐의를 부인하면 진술 신빙성을 어떻게 밝혀내요?”


경찰은 국내 언론 보도 행태에 나름 불만이 있다. 경찰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을 극성스럽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찰이 장자연 사건 수사가 부실하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현오니까 그 정도 밝혀낼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장자연 씨 소속사 대표 김 씨는 일본에 있었다. 김 씨는 이미 2008년 12월 일본으로 출국했고 사건이 터지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용의자가 경기지방경찰청 관할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 씨를 어떻게 잡아들여야 할까.


결국, 일본 경찰 손을 빌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외국 경찰 힘을 빌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으로 국제기구인 인터폴(Interpol)을 거치는 방법이다.경찰청 외사국을 통하면 되는데 역시 시간을 제법 들여야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간보다 더 큰 문제가 따로 있다. 어느 나라 경찰이든 우선순위는 자국 범죄다. 일본 경찰이 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일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터폴로 수배가 들어온 범죄 사안이 살인이나 국제적 사기 혐의도 아니다. 김 씨에 대한 혐의 내용은 ‘강요와 상해’다. 일본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시급한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두 번째 방법이 바로 주재관을 통하는 것이다.주재관으로 나간 한국 경찰이 평소 일본 경찰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럴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건 용의자를 빨리 검거할 수 있도록 일본 경찰 관심을 끄는 게 주재관 역할이다. 김 씨를 잡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2009년 3월 30일 경기지방경찰청은 외교부에 여권 반납 명령을 의뢰했다. 김 씨를 불법체류 신분으로 만들어 압박하는 것이다. 결국, 김 씨는 6월 24일 일본 도쿄에 있는 P호텔에서 붙잡힌다.


지휘관이 모든 내용을 꿰뚫고 지시하는 것과 아랫사람이 파악한 내용대로 끌려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장자연 사건’은 전자였다. 지휘관이 외무고시 출신으로 외사경찰 업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무고시 출신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경찰에 온 것일까?


조현오는 어릴 적부터 제복을 동경했다. 까만 경찰복을 입고 금테 두른 모자를 쓴 부산 동래경찰서 직원들이 무리를 지어 걸어가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당시 조현오가 고등학생 시절 즐겨 본 연재만화에서 경찰서 형사과장은 권력의 정점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정 형편 때문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다. 1981년 외무부 근무를 시작한 조현오는 그곳에서 선배인 허준영을 알게 된다. 88올림픽을 계기로 경찰은 ‘국제화’를 위해 외무고시 출신을 수혈하고자 했다. 이때 조현오는 특채로 선발된다. 허준영은 그보다 앞서 경찰로 자리를 옮겼다.


경찰서 계급 구조는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이다. 고시 출신은 교육을 거쳐 경정으로 시작한다. 즉 형사과장, 생활안전과장, 경비과장 같은 참모 역할이다. 하지만, 지방청으로 가면 직급은 한 단계 낮아진다. 일선 지방청 계장급은 경정이다. 총경은 일선 경찰서에서는 ‘서장’이지만 지방청에서는 참모인 ‘과장’이 된다.


경찰대와 간부후보생 출신은 ‘경위’에서 시작한다. 조현오는 간부후보생 39기와 함께교육을 받았다. 실습교육 장소는 부천경찰서였다. 부천경찰서 형사계장(경감)은 조직폭력배를 상대하다 무릎에 남은 흉터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 조현오는 저런 멋진 형사보다 한 계급 위로 갈 수 있어 뿌듯했다. 19년 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를 가르쳤던 형사계장은 장자연 사건에 투입된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장으로 만나게 된다.


조현오 첫 보직은 부산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었다. 직원들은 외무고시 출신 과장이 신기했다. 사실 경찰 입문 교육을 받을 때부터 고시 출신에 대한 대접은 남달랐다. 그리고 그후로도 조직 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조현오는 자신이 좋아서 경찰을 선택한 만큼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경찰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조현오에 대한 직원들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 이 같은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 한 몫을 했다.



한 지방청에 근무하는 과장이 들려 준 경험담이다. 이 과장은 조현오 청장과 일을 하면서 초반에 눈 밖에 났다.


“보고서를 들고 가니 왜 들어오느냐고 바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계장과 광수대장을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내 보고는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다른 두 명에게 보고를 받는데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고….”


이후에도 조현오가 직원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장면은 종종 목격됐다.


반대로 서울구치소 수감 중에는 어쩌다 마주친 해고노동자들로부터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들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운동시간에 무심코 지나가다가 조현오 어깨를 살짝 건들기라도 하면 그 사람에게 경고를 보내는 이가 있었다.


“운동시간에 젊은 사람이 다가와서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고요. 같이 목욕하기 전에는 그냥 예의 바른 젊은이인 줄 알았지요.”


그는 조폭이었다.



역설적으로 조현오는 경찰시절 조폭을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부산청장 시절 조폭이 공중목욕탕을 이용하는 것을 막았고 자금줄도 차단했다. 부산청장 시절 “조폭이 흉기를 들고 공격하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총으로 쏴버려라.”란 발언을 한 것도 그였다. 그런 그에게 조폭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현오 청장님을 제일 좋아하고요. 두 번째는 김석기 청장입니다.”


조현오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한참 생각하다 “화끈한 사람을 좋아하나”라며 되묻는 정도였다.


조현오는 경정으로 입문하여 20년만에 경찰청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외무고시 출신이고 명석한 사람이다. 그를 결국 감옥으로 보낸 ‘차명계좌’ 발언도 우발적이라기보다 충분히 계산하고 한 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강할수록 고위직 인사의 능력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실력보다 눈치, 아부에 능해야 고위직을 차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조현오 역시 그런 의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어떻게 경찰청장까지 올랐을까. 경정에서 치안총감까지 5개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다음 3화-관운 편은 27일 업데이트 됩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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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경남도지사를 어찌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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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남사람으로서 대놓고 하소연 좀 하자.


10여 년 전 나는 <토호세력의 뿌리>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경남 마산지역 기득권 세력의 기원과 행적을 추적한 책이었다. 거기서 나는 기득권 세력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 우리는 그동안 친일-친미-반공-독재로 이어져온 이력을 근거로 그들을 ‘우익’으로만 대접해왔다. ‘우익’은 정치적 입장에 따른 분류법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진짜 속성은 ‘기회주의자’였다. … 만일 그들이 북한에 살았더라면 열렬한 ‘김일성주의자’가 되었을 게 틀림없다. … 그래서 필자는 단언한다. 지역현대사는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아니라 기회주의자와 비기회주의자의 싸움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이 생각에 변함이 없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무상급식 지원을 중단하면서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진보·좌파·종북’ 딱지를 붙였다. 무상급식 자체를 ‘좌파 정책’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지 않는다. 자신을 보수의 대표주자로 각인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프레임으로 그걸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애초부터 그는 진보도 아니었고 보수도 아니었다. 검사 옷을 벗고 정치에 입문할 때도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무관했다. 애초 민주당에 입당해 강남에서 출마하길 희망했으나 답이 오지 않자 민자당으로 갔던 사람이다.


무상급식 지원 중단으로 대립하고 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박종훈 경남교육감. @경남도민일보


그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서 당선되고 원내대표가 되자 스스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선언했다. 이후 당 대표까지 했으나 총선에서 낙선하고, 경남에서 도지사를 하고 있는 지금 그는 다시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 관심을 받아야 한다. 아니 당장 잊히지 말아야 한다.


변방의 경남에서 궁리해낸 최고의 수는 무상급식 이슈였을 게다. 그 전에 이미 진주의료원 폐쇄에서도 재미를 본 터다. 전체 국민의 여론이 어떤지는 지금의 관심사가 아니다. 새누리당 안에서 대표주자가 되는 게 당면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당내 후보만 되면 대통령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약속 파기’라는 비난도 대수가 아니다. 그는 “아랫사람의 약속 위반은 배신으로 규정되고 비난의 새상이 되지만, 지도자의 약속 위반은 정치적 선택으로 존중받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대선 후보가 되기만 하면 무상급식에 대한 지금의 입장 정도는 간단히 번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 자신은 이미 ‘지도자’이니까. 그러면 국민들이 ‘자신의 잘못된 결정도 인정하고 정책을 바꿀 줄도 아는 훌륭한 지도자’로 봐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따라서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그 자체가 오히려 그가 짜둔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에겐 보수적 소신도, 진보적 소신도 없다. 오직 어떻게든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보겠다는 강렬한 권력욕, 출세욕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기회주의적 욕심을 채우는데 보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민생민주 수호를 위한 경남 315원탁회의가 20일 경남도청 현관 앞에서 불법 정치자금 엄정수사와 함께 홍준표 도지사, 이완구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홍 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지금 경남에서는 주민소환 추진 여부를 놓고 뜻있는 분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성공 여부를 떠나 독선적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압박하는 차원에서라도 주민소환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오히려 보수층을 결집시켜 그의 입지만 키워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다.


경남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고민이 깊다. 성완종의 폭로와 검찰의 칼자루만 보고 있는 우리가 무기력하다. ‘민중이 정신 안 차리면 절대로 정치 수준은 안 올라간다’던 얼마전 채현국 선생의 말마따나 잘못 뽑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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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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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3화. 조현오의 관운, 경정에서 총경까지


조현오가 처음 맡은 직무는 부산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다. 생활안전과 주 업무는 범죄 예방과 검거로 파출소와 지구대가 하는 일을 떠올리면 된다. 1990년 말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때다. 범죄가 잦은 유해업소 단속이 생활안전과 주요 업무였다.


주당 80~100시간을 근무하던 때다. 경찰은 야간 근무도 해야 했다. 같은 여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근무하는 직원이 있었고 순찰 시간에 산자락이나 주유소 뒤편에 운전석을 뒤로 젖혀 자는 직원도 있었다. 조현오는 교육과 순시를 병행하며 조직을 다그쳤다.



경찰 지휘부가 단속 실적을 다음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원하는 보직은 형사과장이었다. 경찰서 형사과장은 그가 외무부 생활과 바꿀 만한 ‘로망’이었다.


경찰서 과장이 현장을 챙기니 파출소장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해 조현오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실적과 성과를 낸다. 하지만, 그 대가는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조현오는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안과는 공안 업무, 즉 안보 분야를 담당한다.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인데,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는 보직이었다.


조현오는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였다. 주변에서는 ‘돈’과 ‘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렸다. 결국 조현오는 경찰고위급을 잘 아는 지인을 통해  빽을 썼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과장에 발탁된다. 그런데 조현오는 빽을 쓰면 돈을 갖다줘야 하는 당시 관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고맙다는 전화 한통만 넣었는데, 인사성이 없다는 말 뜻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경정 6-8년차가 되면 조현오도 ‘경찰의 꽃’이라는 총경 승진을 눈앞에 둘 것이다. 문제는 총경 이후였다. 총경까지는 부산에서 승진할 수 있지만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에서 근무해야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 승진 경쟁을 벌일 계장들이 조현오가 서울로 오는 것을 반길 리 없다. 조현오는 총경까지가 한계라는 생각에 서울 근무를 포기했다.


1995년 1월 느닷없이 사건이 터졌다. 누군가 경찰 승진시험 문제지를 몰래 유출하다 적발당한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해 시험 관리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야 했다. 경찰은 경무국장, 교육과장, 고시계장 등을 교체하면서 적임자를 찾아야 했다. 당시 박일룡 경찰청장은 전국을 뒤져 가장 청렴한 고시 출신 선발을 지시했다. 형사과장 시절 수사비 전횡을 끊어낸 조현오가 눈에 띄었다. 조현오는 경찰청 고시계장으로 근무하면서 시험 과목, 응시 방식, 채점 방식 등을 모두 전산화했다.



1996년 조현오는 치안비서실 근무를 맡는다. 이때 이택순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행정고시 출신으로 형사정보를 담당했다. 신참인 조현오는 교통, 외사, 보안, 해경 등 잡다한 영역을 맡았다. 상사는 빈번하게 조현오 업무 능력을 문제 삼았다. 조현오 역시 정보업무가 힘들었다. 치안비서관과 경찰청 정보국장이 모두 승진 대상이면 알력이 생길 수 있다. 알력이 생기면 정보 제공이 수월하지 않다. 또 정보 분야는 인적 네트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당시 경찰 조직은 간부후보생이 잡고 있었다. 경찰대 1기 출신은 1985년 경위로 시작해 1996년 경정으로 승진, 경찰청 계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상사에게 구박받으면서 이택순과 가까워졌다.


1997년 조현오는 총경으로 승진했다. 총경으로 승진하면 보통 지방청 참모를 1년 정도 하고 서장으로 나간다. 일반적으로 처음 나가는 지역은 ‘3급지’인데 경찰서 직원은 100명 정도다.


조현오가 총경이 되면서 맡은 첫 직무는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던 당시 울산 현대자동차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 바람은 심상찮았다. 1998년까지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 담당 지역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상황을 주시하며 경비 대책을 마련했다. 현대자동차 직원이 태화강 둔치에 수만 명이 모여서 궐기대회를 열었고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 나갔다.


당시 울산 지역 경찰서는 모두 ‘1급지’로 서장들은 조현오보다 나이가 많았다. 주변에서는 신참 경비과장인 조현오가 나이가 많은 서장에게 무전 점호하는 것을 말렸다. 누가 봐도 욕먹을 짓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업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양보가 없었다. 이런 당찬 모습을 눈여겨본 전병용 경남지방경찰청장은 김세옥 경찰청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1급지’인 울산남부경찰서장에 조현오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이다.


울산은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됐다. 도시가 커지면 그만큼 치안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외지에서 온 사람이 많고 유흥업소가 밀집한 도시에는 살인, 강도, 성폭력 사건 발생이 잦다. 대가를 받고 오락실이나 룸살롱 등 업주를 봐주는 경찰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울산은 경남지방경찰청이 있는 창원과 멀었다.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장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조현오가 울산으로 오기 전날인 6월 30일, 현대자동차 사측은 노동자 수천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울산동부경찰서 관할이다. 현대자동차 집회는 대치만 있었을 뿐 격렬한 상황은 아니었다. 조현오 서장은 경비를 담당했다. 그 사이 당 노사정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7·8월 울산을 방문했다. 8월 말 277명을 정리해고 하는 것으로 최종 노사 합의안이 나왔다.


현대자동차 사태가 진정되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해고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경찰 안에서 바로 소문이 돌았다.


“야, 너 조현오 서장 알아?”

“네, 좋으신 분입니다.”

“야! 조 서장이 다 자르고 있어.”

“돈을 먹었으니까 잘리겠지요. 그 분은 돈 먹는 거 봐주지 않아요.”

“야, 그래도 너무 캐더라.”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근무하면서 부패와 비리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조현오가 근무하는 1년 동안 음주운전 사망자는 120명에서 7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울산남부서 관할 3개 검문소 실적이 경남 전체 25개 검문소 가운데 1·2·3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는 아무리 봐도 3급지 발령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오는 이번 인사가 청탁을 하지 않아 생긴 결과라는 말을 듣게 된다.



조현오는 경남 사천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경무관으로 승진하려면 서울 근무가 반드시 필요했다. 경찰청이나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장, 형사과장, 정보과장 등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조현오는 그런 자리로 자신을 끌어줄 인맥이 부족했다.


2002년 1월 조현오는 경찰청 입성에 성공한다. 그가 맡은 일은 ‘사이버테러대응센터장’이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청 내 총경 가운데 딱히 아는 얼굴이 없었다. 서울 근무 경험도 적었고 고시 출신 중에서도 아주 드문 외무고시 출신이었다. 조현오가 인사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같은 외무고시 출신인 허준영이었다.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기다렸다. 그는 곧 서울지역 경찰서장을 맡게 되는 순서였다. 총경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조현오는 당시 최기문 경찰청장이 자신을 탐탁찮게 여겼다고 했다. 2003년 4월 조현오는 서울종암서장으로 부임한다. 아무도 견제하는 이가 없는 자리였다. 경쟁자들이 선호하는 보직은 종로서, 강남서, 서초서, 영등포서, 남대문서, 중부서, 송파서 서장이었다. 경무관 승진은 좋은 보직을 거쳐 실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서울종암서장 부임 1년째가 되자 조현오는 다음 보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소식이 들렸다. 허준영 치안비서관이 승진해 2004년 1월 서울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이어 서울경찰청 형사과장을 직위공모 한다는 공지도 떴다. 조현오는 당장 신청했고 허준영도 거들었다. 하지만, 최기문 경찰청장은 승낙하지 않았다.


조현오는 그 사이 특수수사과 면접도 했다. 당시 특수수사과는 청와대 조직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청와대가 원하는 수위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멈췄다. 면접 장소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었다. 승진이 급했던 조현오는 최대한 충성심을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특수수사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조현오는 최근에도 낙방 이유를 알지 못했다. 취재 과정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당시 조현오가 탈락한 이유를 들었는데, 청와대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달아 떨어진 조현오는 허준영에게 체념하듯 말했다.


“기동대장으로 갈까요?”

“그러지 말고 다음 인사 때 움직여라.”


당시 경비 담당인 기동대장(지금은 기동단장)은 총경 승진을 바로 한 사람이 가는 자리였다. 조현오가 서울종암경찰서에서 1년 반을 보내자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장) 직위 공모가 공지됐다. 누가 뭐래도 조현오는 외무고시 출신이다. 그가 외사수사과장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004년 7월 조현오는 경찰청 외사수사과장(당시 외사3과)이 돼 미근동으로 돌아왔다. 현재 경찰청 과장(총경)은 모두 46명이다. 경찰청도 사람 사는 동네라 경찰청 안에서 유명한 사람은 곧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특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장이 주요 비난 대상이었다.


조현오는 그런 쪽으로 포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식당에서 조현오 과장이 지나가면 직원들은 “자장면을 시켜먹어도 독상을 받을 분”이라고 소곤거리곤 했다. 그만큼 권위적이고 편하게 다가가기는 어려운 상관이었다.


<다음 4화-관운2 편은 29일 업데이트 됩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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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주민소환 어찌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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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5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요즘 홍준표 경남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추진 여부를 놓고 시민사회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진주의료원 폐쇄부터 무상급식 지원 중단, 그리고 최근 1억 원 수수 의혹에 이르기까지 불통과 독선을 유권자가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죠.

혹자는 지난 선거에서 홍준표 지사의 득표율을 거론하며 '그를 찍지 않은 41%의 유권자를 잘 조직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합니다. '홍 지사를 지지했던 학부모들 중에서도 무상급식 중단으로 단단히 화가 나 있으니 해볼만 하다'고도 합니다.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을 떠나 독선적 정치인에게 경종을 울리고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압박하는 차원에서라도 주민소환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군요.

인터넷신문 <단디뉴스> 이혁 기자는 "10%(서명)를 못 채우더라도, 또 33.3%가 투표하지 않더라도 주민소환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를 가진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한 우리의 투표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피눈물을 흘리며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권자의 각성을 위해서라도 주민소환은 추진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출근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블로거 오주르디 역시 "이번 무상급식 중단으로 밥 그릇을 빼앗긴 학생수는 대략 22만 명. 이들의 부모들은 소환운동에 적극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 수는 어림잡아 40만 명에 달한다. 밥그릇을 빼앗긴 학생의 부모들만 참여해도 홍 지사에게 부여된 권력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라며 가능성을 높게 봤습니다. 정락인 전 시사저널 기자도 비슷한 글을 썼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실 판단이 잘 안 섭니다.

며칠 전 오랫만에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한 친구는 자신의 선거에서도 이겨봤고, 남의 선거도 여러번 도와 이겨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모든 걸 걸만한 주체 역량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도 역시 "당위성만 볼 게 아니라 그걸 추진하는 쪽의 주체적 역량이 준비돼 있느냐를 잘 따져봐야 한다"더군요. 자칫 무력감만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저도 얼마전 <미디어오늘>에 쓴 칼럼에서 "오히려 보수층을 결집시켜 그의 입지만 키워줄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우리 기자들에게도 물어봐도 역시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이 많더군요.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참으로 암울하네요. 뉴스를 보니 홍 지사의 측근들이 1억 원 중간 전달자로 알려진 윤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만나 회유를 시도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우리는 검찰의 칼자루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요?

홍준표 지사는 검찰 수사에서 돈을 받은 혐의가 입증되어도 물러날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거취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국회의원이 그럼 기소가 돼 거취 표명하는 일이 있느냐"면서 "선출직은 재판이 확정 때까지 거취 표명을 하지 않는다"며 최종심까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우리 독자님들, 희망은 잃지 맙시다. 민주주의는 한판의 승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채현국 선생은 창원 강연에서 ‘민중이 정신 안 차리면 절대로 정치 수준은 안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역설적으로 우리 민중을 각성시켜주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민중이 각성되면 주체 역량도 만들어지겠지요.

이번 5월에도 《피플파워》에는 경남 곳곳에서 작은 희망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피플파워》가 절망적인 사회에 희망과 힘을 불어 넣어주는 매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더 열심히 만들겠습니다.

피플파워》 5월호에 쓴 글을 수정, 보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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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악질 경찰 2명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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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악질 경찰과 두 독립운동가


4·19혁명 55주년이다. 올해는 해방 7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 때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라는 아주 악질 헌병보조원이 있었다. 부산헌병대에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기로 유명했다. 다음은 해방직후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한 대목이다.


“곤봉, 죽봉, 죽검 등으로 난타하고 2, 3일간 굶기거나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화로를 머리 위에 들고 있게 하고, 두레박줄에 묶어 깊은 우물 속에 담구거나 이른 아침에 방화용 수조의 꽁꽁 언 물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깬 후 결박한 채로 얼음물에 앉히고는 머리부터 빙수를 내리붓고는 거꾸로 매달아 전신을 얼음굴에 처박곤 했습니다. 이로써 실신하면 부채질이나 발로 차거나 불로 지지는 등 이루 상상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잔혹한 방법이었습니다.”


맨 오른쪽 인물이 박종표 아라이 겐기치.


그러나 이승만의 조직적인 방해로 반민특위는 해체됐고, 그는 대한민국의 경찰이 됐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근무하던 그는 1960년 3월 15일 시위대를 향해 직격최루탄을 발사했고, 그 중 한 발이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의 눈을 관통했다. 직경 5cm, 길이 20cm에 달하는 미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참혹한 시신을 본 그는 지프차에 김주열을 싣고 바닷가로 갔다. 그리곤 시신에 돌멩이를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이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 떠올랐고,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시민의 분노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오야마 에이치(大山榮一)’라는 일본 경찰도 있었다. 1932년 순사부터 시작, 순사부장을 거쳐 1945년 해방 당시 경부모로 승진할 정도로 뼛속깊이 일제 경찰이었다.


한국 이름은 최남규.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된 그는 경부, 경감, 총경을 거쳐 경무관으로 고속 승진했고, 1960년 3·15의거 당시 경남경찰국장이었다. 그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군중을 용공으로 몰았고 고문경관을 비호했다. 또한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데 대해“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군중이 던진 돌멩이와 총알이 ‘키스’하여 되돌아와 군중의 뒤통수에 맞았다”는 당구의 ‘쓰리쿠션’ 원리를 강변했다.


국회조사단 앞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고 있는 최남규(가운데)


박종표는 혁명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을 받고 풀려나 부산에서 살다 죽었고, 최남규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대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죽었다. 형을 살기는 했으나 둘 다 나름 천수를 누린 것이다.


반면 독립운동가의 삶은 어땠을까? 창원 상남면 출신 안용봉 선생은 노동조합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지사 예우는커녕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독립운동가 안용봉 지사. 그는 젊은 나이에 학살당했다.


마산 진전면 출신 이교영 선생도 그랬다.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태형 90대를 받았던 그 또한 한국전쟁 당시 ‘곡안리 재실 민간인학살’ 사건으로 미군의 총탄에 숨졌다.


두 애국지사는 그 후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록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학살됐고,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남도민일보의 발굴, 입증보도와 유족의 노력에 의해 2006년에야 각각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지역 역사 인물 네 명의 예를 들었지만, 전국에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이게 대한민국의 맨얼굴이다. 억울하게 학살된 애국지사님들께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경남도민일보에 칼럼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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