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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청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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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4화. 조현오의 관운 경무관부터 경찰청장까지


외사 수사과(당시 외사3과)는 인터폴에 보내는 공문을 담당한다. 외국으로 도망간 피의자 범죄 내용은 외사과로 들어온다. 외사과 직원은 영어로 사건 개요를 작성해 피의자가 도망간 국가로 보낸다. 조현오가 외사3과장일 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2004년 4월 선배인 허준영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허준영은 2005년 1월 경무관 인사를 단행했다. 조현오도 인사 대상이었다. 경무관이 되면 보통 지방청 차장급으로 출발한다. 당시 경무관 ‘3대 보직’은 정보심의관, 외사관리관, 감사관이었다. 여기에 서울청 경무부장과 정보관리부장까지를 ‘5대 보직’이라고 한다.



조현오는 외사관리관이 됐다. 관리관, 심의관, 기획관 등 ‘관’이 붙는 직책은 기관 고유 업무가 아닌 기관장 보좌 역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업무성격과 관계없이 주로 ‘국’은 치안감이 ‘관’급 부서는 경무관이 맡는 식으로 구분됐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외사국 승격과 더불어 주재관 인원수를 30명 늘리라고 지시했다. 당시 교통관리관실도 교통국으로 승격하고자 애썼다. 먼저 움직인 교통관리관실을 제치고 외사관리관실이 승격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모양새도 나빴다. 주재관 인원을 갑자기 30명이나 늘리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조현오는 모두 해낸다. 2006년 외사관리관실은 외사국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정작 일을 시킨 허준영은 그 전에 경찰청장에서 물러난다.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에서 한미FTA 반대 집회 중 농민 두 명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2006년 2월 10일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취임한다. 이택순은 조현오에게 ‘감사관’을 맡기고자 했다. 감사관은 감사·감찰 업무를 맡는다. 주변 압력을 견뎌내야 하고 뒷거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택순은 신중하게 적임자를 수소문했고 조현오를 선택한다.


2006년 말 조현오는 치안감으로 승진한다. 보직은 경비국장이었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복 폭행을 저질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5월 한화 고문과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난다. 경찰청장 로비 의혹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이택순은 자기가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경찰청장이 경찰 치부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게 맡긴다는 건 조직 안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다. 경찰대 1기 출신인 황운하 총경은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징계를 당했다.


경찰 내부 논의체인 전국지휘관 회의에서도 같은 의견이 나왔다. 전국지휘관 회의에는 지방청장, 국관, 본청 직속 기관장 등이 참석한다. 치안감 급은 대부분 참석한다고 보면 된다. 이 회의에서 이택순에게 퇴진을 권한 사람은 네 명이었고 그 중 한 명이 조현오였다.


하지만, 네 명 가운데 이택순과 매일 마주치는 사람은 조현오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근무지가 서울 밖이었다. 이택순은 조현오를 ‘시저를 찌른 브루투스’라고 빗대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경찰청 직원은 청장 눈치 때문에 조현오를 멀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현오를 다독인 사람은 종합경찰학교장 김석기였다. 적어도 김석기는 조현오를 인정했다.


2008년 2월 11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취임한다.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보직을 옮긴다. 그해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열린다. 광화문 집회가 길어지면서 전국 전·의경 200개 중대가 집회에 투입된다. 청와대 바로 앞인 내자동 로터리가 뚫리자 어청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청수는 7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김석기에게 맡긴다.


2009년 1월 18일 서울지방경찰청장인 김석기는 차기 경찰청장으로 내정됐다. 김석기는 1월 29일 어청수가 퇴임하자 청장 역할을 맡는다. 공식 임명은 되지 않았지만 경찰청 수장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다. 김석기는 치안정감 명단에 조현오를 넣는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주상용. 경찰대학장 김정식, 경찰청 차장 이길범.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


하지만, 김석기는 2월 10일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뒤에 사퇴하면서 경찰청장에 오르지 못했다. 다음 청장 후보군에 눈길이 쏠렸고 조현오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그러나 치안정감이 되고 갓 일주일을 넘긴 조현오는 준비되지 않았다.


2009년 2월 15일 새 경찰청장에 해경청장인 강희락이 임명된다. 이후 조현오는 강희락 청장에게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쌍용자동차 노조 진압으로 청와대 인정을 받았다. ‘용산참사’처럼 사망자 없이 정리했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임명된다. 


조현오는 당시 서울청장 자리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 경비통이 필요했다. 2010년 11월 11일 G20 서울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찰은 요인 보호를 위한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 책임자가 조현오였다. 



2010년 8월 9일 조현오는 청와대 측으로부터 경찰청장으로 내정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8월 14일, KBS는 5개월 전 조현오가 서울경찰청 기동대 지휘관 내부 강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를 언급했다고 보도한다. 8월 18일 변호사 곽상언(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은 ‘사자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다. 경찰 안에서는 조현오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조현오 사퇴를 요구하는 야당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8월 30일 청와대에서 경찰청장 임명장을 받는다.


조현오에게 ‘빽’은 자신을 인정하고 등용한 상사였다. 하지만, 조현오가 자신을 인정한 상사 힘만 빌려 경찰청장이 될 수는 없었다. 역시 ‘관운’이 받쳐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 ‘관운’이라는 게 과연 뭘까.


허준영, 김석기가 자신을 아낀 것처럼 조현오도 ‘차기 경찰청장’ 후보를 키우고자 했다. 조현오는 2011년 11월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차기 경찰청장 후보들을 치안정감으로 전진 배치했다. 그는 그 치안정감 중에서 경찰청장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종준 경찰청 차장, 이강덕 서울지방경찰청장, 이철규 경기지방경찰청장, 강경량 경찰대학장, 서천호 부산지방경찰청장>


조현오가 기대했던 미래 청장들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경찰청 차장인 박종준은 2011년 12월 말 사퇴한다. 2012년 총선 출마를 위해서였다. 이철규(간부후보 29기)는 2012년 2월 29일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건으로 구속된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귀는 할 수 없었다. 이철규가 구속되면서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서천호가 맡는다. 하지만, 불과 1개월 뒤에 ‘오원춘 사건’이 터졌다. 조현오는 이 사건 책임을 지고 4월 9일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 뜻을 밝혔다. 하지만, 서천호에게 ‘오원춘 사건’은 악재로 작용했고 그 역시 경찰대학장으로 경력을 마감한다. 이강덕, 강경량 모두 경찰청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조현오가 자진사퇴를 했다면 봉하 쪽에서 차명계좌 발언을 더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누구보다 경찰청장이 되고 싶었다. 인사청문회에 나선 조현오는 의원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존경하는 위원님, 저에게 경찰청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하여 경찰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참모는 지휘관과 달리 자기 색을 드러낼 수 없다. 조현오가 참모시철 건의를 하면 경찰청장들은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 가지 충고를 덧붙였다.



“나 혼자 잘 되려고 이러는 줄 아느냐?”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너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다.”


조현오는 전임자 조언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경찰청장 해보니까 다 뻥이야.”


경찰 조직에서 가장 큰 권한인 인사권과 감찰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한 경찰은 조현오를 ‘황야의 무법자’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원 없이 다 누렸다는 얘기다.


다음에는 조현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과정을 짚어보겠다.


<다음 5화-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편은 5월 4일(월) 업데이트 됩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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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어리다고 반말하는 버릇 어디서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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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기자사회는 선후배간 서열 문화가 센 편이다. 나이 많은 후배라도 먼저 입사한 선배한테는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러야 한다.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과거엔 나이 어린 선배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후배에게 "○○야, 이리 와봐!"하며 함부로 말을 까기도 했다.


특히 경남도민일보는 기자 채용시 나이 제한을 없앴기 때문에 선배보다 나이 많은 후배들이 많이 들어왔다. 2000년이었던가? 내가 기자회장을 맡으면서 교통정리를 했다. "서로 동갑이거나 후배 나이가 더 많을 경우, 서로 존대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김훤주 기자와 지금도 서로 존대하는 이유다.


왜? 신문사는 민간회사이지 군대 같은 계급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우리 사회의 학연, 혈연, 지연 문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고향 친구들 모임 외에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데 거의 나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선 기자로 경남도청 출입을 할 때였다. 계장급 공무원을 상대로 뭔가 취재를 하던 중 내 고향이 남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랬더니 대뜸 그 공무원이 자신도 남해 출신이라며 바로 말을 까는 것이었다.


경남도교육청을 출입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교육공무원들은 기자를 처음 만나면 어느 학교 출신인지 물어보는 게 습관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교사로 있었던 학교나 지역을 엮으려 했다. 심지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학교라 해도, 그 학교에 재직했던 아무개 선생이 자신과 잘 아는 사이라는 식으로까지 엮으려 했다.


그런 식으로 엮이면 그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 분야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게 참 곤란해진다. 그래서 기자는 가급적 취재원과 사적인 관계로 엮이면 안 된다. 내가 마산 창원에 온지 25년이 다 됐지만 사적인 교분을 튼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 것도 그런 까닭이다.


김용택 선생. @경남도민일보


나는 공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결코 하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보나 아무리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도 내가 먼저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1945년생으로 올해 70이 넘은 김영만 선생이나 김용택 선생도 나에게 꼬박꼬박 존대한다. 나 또한 우리 아들 또래의 청년들에게도 꼬박꼬박 말을 높인다.


지역사회에 오래 살다보면 동갑내기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동갑내기들과도 '친구' 관계는 트지 않았다. 토끼띠 석영철 전 도의원, 여영국 현 도의원, 강창덕 전 경남민언련 대표와도 동갑인줄 알지만 서로 존대한다.


대개 기자사회는 남의 회사 후배기자에게도 하대를 하는 관습이 있다. 기자들도 자기보다 연배가 높은 타회사 기자에겐 '선배'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 회사 직속 후배들 외에는 거의 모두 존대한다. 예외도 있긴 하다. 예전 취재 일선 같은 출입처에서 친해졌던 몇몇 후배들이 그렇다.


윤성효 오마이뉴스 기자는 나보다 몇 살이나 어리지만, 서로 말을 놓는다. 예전 진주에서부터 알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만났는데, 알고보니 내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이더라도 바로 반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 후배라는 걸 아는 순간 바로 태도를 돌변하며 말을 까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한 후배가 어떤 목사님을 취재할 일이 있었는데, 한동안 목사처럼 점잖게 말씀하시던 그 목사님이 기자의 학교 선배라는 걸 아는 순간 목사스러운 태도가 싹 돌변하며 '선배스럽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목사님마저 학연으로 얽힌 권위에서 자유롭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현국 선생은 나이 어리다고 반말하지 않는다.


1935년생으로 올해 81세인 채현국 선생은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하대하지 않는다. 그게 일본 사람들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는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을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채현국 선생은 또한 "인류 나이로 치면 젊은이 나이가 노인보다 많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존대말을 쓴다. 기분이 좋아지만 "주완이 형~"하며 엉기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경제 양병훈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우연히 만나 "(자원외교 관련) 검찰 수사에 대한 입장이 어떠십니까?"하고 물었던 모양이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자네 어디 신문사야?"라고 받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자네 어디 신문사야?"…취재원과 기자의 줄다리기


자기보다 어려 보인다고 사적인 관계도 아닌 기자에게 저렇게 말을 까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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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여행 12 : 람은 무사할까? 아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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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부터 내리 아팠습니다. 몸살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일하고 놀고 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습니다. 25일 밤에는 앓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습니다.

 

이불과 담요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는데도 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온 몸 모든 뼈마디가 쑤시고 아렸고 머리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으며 허리 또한 마음 먹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리 아픈 가운데 네팔 지진재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처음에는 70명 남짓 사상(死傷)이라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랬으나 숫자는 기하급수로 불어났습니다. 숨진 사람이 800명, 1000명, 1500명, 2000명 3000명 이랬습니다. 몸살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사무실 나가 할일 좀 해놓고 봤을 때 그랬습니다.

 

치트완 가까운 타루족이 사는 마을에서 찍었습니다.

 

지금은 사망 6000명 이상에 이재민은 800만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 네팔은 인구가 2000만명 규모입니다. 800만이라면 전체의 40%에 해당합니다. 일가붙이나 친구들까지 치면 네팔에서는 하나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몸 또는 마음이 이재민인 셈입니다.

 

그동안 줄곧 들었던 생각은 ‘람은 무사할까?’, ‘눈동자가 더없이 맑았던 그 아이들은?’이었습니다.

 

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짧은 3박4일 동안 네팔 트레킹 일정을 함께했던 젊은이가 ‘람’이었습니다. 스물셋 람은 성실하고 친절하고 사려까지 깊었습니다.

 

빨간색 반팔옷을 입은 친구가 람입니다.

 

지친 우리를 늘 뒤에서 보살펴 주다가도 머물 자리가 가까워오면 언제나처럼 먼저 올라가 자기 짐을 내려놓고는 도로 내려와 우리 짐을 덜어주려 했습니다.

 

눈길 내려오는 발걸음이 디딜 곳을 찾지 못할라치면 자기 다 떨어진 운동화로 바닥을 슥슥 밀어 디딜 자리를 마련해 주곤 했습니다. 길 가다 아이들을 만나거나 함께 농담을 하거나 할 때 커다란 눈동자가 살짝 웃음을 머금으면 조금 슬픈 듯이도 보였습니다.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이와 더불어 즐거워하고 있는 람.

 

여느 때 같으면 지금 4월과 5월이 네팔 트레킹 성수기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네팔을 찾는 트레커들 대부분이 출발점으로 삼는 포카라(수도 카트만두에 이어 네팔 두 번째 큰 도시)가 근거지인 람은 이번에도 아마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산길에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트레킹에 나선 이들이 이번 지진으로 말미암은 눈사태 탓에 고립돼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뉴스에 제가 불안해지는 까닭입니다. 제발, 무사하기를 빕니다. 람의 그 선량한 웃음과 은근히 사람을 끄는 그윽한 눈동자가 여전히 빛나기를 빕니다.

 

가운데가 람, 오른쪽이 영주형, 왼쪽이 저랍니다.

 

이런 람과 더불어 네팔 히말라야 산길을 걸으면서 숱하게 많이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집이 가난하고 옷은 남루했지만, 웃음 하나만큼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구나 해맑았습니다.

 

살갗은 비록 트고 갈라진 데가 없지 않았지만, 눈동자 하나만큼은 티조차 하나 없이 그야말로 투명했습니다. 눈동자에 사람 표정이 비칠 정도로 투명해 오히려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아이들과 서로 얼굴을 어루만지고 손바닥과 손등을 쓰다듬고 했던 손길 감촉이 아직 제 손에는 남아 있습니다. 카메라를 같이 들고 사진 찍으며 웃었던 순간, 사탕을 나누고 과자를 나누며 눈길을 주고받았던 순간들도 제 눈에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깔깔거리며 웃고 떠듬떠듬 서툰 영어로 얘기를 나눴던 그 음성과 숨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히말라야 산악에도 많았지만 도시에서는 더 많았습니다.

 

평원 지대 농촌에서도 그런 아이들 해맑은 웃음 해맑은 눈동자는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순수였습니다. 제게는 너무 새롭고 보지 못했던 즐거움이고 보람이었던 때문에 때로는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그런 순수였습니다.

 

오른쪽 사진과 같은 아이입니다.왼쪽 사진에 이어지는 표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아이들한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기를, 일어났다 해도 제발 큰일이 아니기를, 몸으로 마음으로 빌 수밖에 없을 따름입니다.

 

원래 생각 같았으면 지금껏 열한 차례 이어온 네팔 여행기 연재를 쉰 차례도 더 해나가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제가 사람 도리를 벗어나지 않는 첫걸음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네팔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제가 외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나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소꼴 베는 기계가 있기에 찍으려고 하니까 이 아이가 뛰어들어 함께 담을 수 있었습니다.

 

네팔을 여행할 수 있었던 자체가 여태 살아온 삶에서 축복이고 은총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상, 또 바로 그만큼 네팔 자연과 네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이상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저희 여행이 서너 달 뒤에만 있었더라도 이번 지진 참사는 바로 다름 아닌 제 몫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남과 내가 이렇게 다를 수 없는 것이고 다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국면입니다.)

 

일부러 그럴 듯한 표정을 지어준 네팔 아이들.

 

그러고 보니,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가까운 데에 있었습니다. 한겨레 4월 29일치에 “한국 사는 네팔인 성금 모금 나서 - ‘서포트 네팔 파운데이션’ 설립” 기사가 실렸습니다. 최상원 기자가 쓴 이 기사를 일부 옮겨보겠습니다.

 

한국에 사는 네팔인들이 대규모 지진 피해를 당한 고국 동포를 돕기 위해 구호단체를 설립해 성금 모금에 나섰다. 수베디 여거라즈(43) ‘김해 이주민의 집’ 대표는 28일 “네팔 교민들이 지난 26일 긴급히 모여 고국에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이를 위한 비영리단체 ‘서포트 네팔 파운데이션’(Support Nepal Foundation)을 설립했다.”고 밝혔다.

 

주한네팔인협회, 주한네팔유학생회, 부산·대구·경남 진주 네팔모임 등 30여 네팔인 모임이 참여했다. 현재 국내 네팔인은 이주노동자 2만6000여명, 유학생 1000여명, 결혼이민자 1000여명 등 2만9000여명에 이른다.

 

사무실은 ‘김해 이주민의 집’에 두고, 대표는 수베디 여거라즈 대표가 맡기로 했다. 그는 1996년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와, 2009년 12월 결혼이민자가 아닌 네팔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 네팔 교민들을 대상으로 먼저 모금을 시작해 28일 현재 400여만원을 모았고, 1000여만원을 약정받았다.

 

다음달 1일 노동절엔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대형마트와 번화가 등에서 모금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3일엔 경남 창원시 팔용동 ‘금담부락 옛터’ 공원에서 열리는 노동절 기념 경남이주민대회에 참여해 모금을 하기로 했다. …… 성금 계좌는 우리은행 1006-701-422191(예금주: 스포트네팔모금단체)이다.

 

아울러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도 네팔을 위한 모금 계좌를 열었다고 합니다. 농협 355-0028-3783-13(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랍니다.

 

우리도 "아이 러브 네팔!"입니다.

 

유니세프나 페이스북 또는 한국 정부를 통해 기금을 내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저는 이런 네팔(출신) 민간단체 또는 네팔 사람들을 돕는 우리나라 민간단체를 통해 내는 보람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렇게 성원하는 뜻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잘 전달되지 싶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다음 하나로는 네팔에서 한국으로 와서 사는 네팔 사람들한테도 작으나마 기운을 돋우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더불어 들었습니다.

 

저는 일단 이 단체에 10만원을 보냈습니다. 제 통장에 남아 있는 잔액이 20만원을 넘지 않아서요. 다음 주에 월급을 받으면 몇 푼 되지 못하더라도 한 번은 더 보낼 요량입니다. 그래야지 제 마음이 조금이나마 더 편안해질 것 같아서요. 끝

 

김훤주

 

네팔 지진 피해 극복을 위한 민간단체 모금 계좌 안내

우리은행 1006-701-422191(서포트네팔모금단체)

농협 355-0028-3783-13(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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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가 삼대사찰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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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 번째 역사탐방은 4월 18일 마산에서 이뤄졌습니다. 의림사와 창동 오동동을 찾아간 것입니다. 의림사를 찾아가는 버스에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나라 3대 사찰은 어디 어디 어디일까요?" 그러면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3대 사찰이라는 것이 있었나? 뭐 이런 반응들이지요. "3대 사찰 가운데  두 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경남에 있어요. 양산 통도사하고 합천 해인사……. 그러면 나머지 하나는 어디일까요?" 이쯤하면 쏟아져 나오는 대답은 정말 간단하답니다. "경주 불국사~~~!!요."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절간이 경주 불국사이다 보니 다들 으뜸으로 꼽고 당연히 3대 사찰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경주 불국사가 아니라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송광사라 이야기하면 다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다는 그런 표정을 짓습니다.

 

 

이는 뭐 이렇게 꼽히는 3대 사찰이 중요하다 해서 일러주는 것은 아니고요, 절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면서 좀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편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의림사는 그렇게 화려하고 잘난 절은 아니에요. 규모가 크고 격식을 잘 갖춘 그런 절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마산이라는 지역에도 역사가 오래된 절이 있다는 사실을 이런 기회를 통해 한 번 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혹시 절을 교회처럼 종교적인 장소라고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나 성당인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절간이 종교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선조들의 삶과 철학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소랍니다.

 

 

무슨 세밀한 설명보다 이렇게 크게 보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설명을 마치자 아이들과 더불어 한 때를 보내려고 출동한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 선생님 한 분이 슬그머니 물어오십니다. "저 있잖아요 경주 불국사가 3대 사찰이 아니었어요? 나도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좀 머쓱해하는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이 어쩌면 귀엽기까지 하십니다. 물론 토요일 하루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지만 아이들과 더불어 봉사를 나오신 선생님들도 함께 역사탐방을 하고 작으나마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면 모두에게 다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이들과 여러 절을 많이 다녀봤지만 의림사가 가장 좋은 점은 마음껏 뛰어다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절간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이 '정숙'이지요. 그런데 의림사는 정숙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주어진 미션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아 좋았습니다.

 

 

스님들조차도 마당을 가로지르다가 아이들 앞에 멈춰서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기까지 했습니다. 봄날 아이들의 방문으로 시끌벅적해진 절간 분위기를 부처님도 이해를 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대웅전 처마에 매달린 풍경에 물고기가 있는 까닭이며, 석탑 층수를 세는 방법과 삼성각에서 산신령을 모시는 까닭 등등을 아이들은 모두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줄기를 하나씩 벗기다 보면 나중에는 양파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에서 무아(無我)의 경지를 상징한다는 파초 이야기도 일러줍니다.

 

 

이렇게 미션 문제를 풀어가며 부처님의 제자들을 일러 나한이라 한다는 얘기도 덧붙입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겠지만 한 번 들었던 이야기들이 훗날 불현듯 추억처럼 떠오를 수 있을 정도만 돼도 좋겠지 싶은 마음으로 말씀입니다.

 

점심은 창동에서 해결을 했습니다. 쌍둥이집에 들어간 아이들은 돼지두루치기를 맛봤고 피노키오에 들어간 친구들은 돈가스를 먹었습니다. 이처럼 창동 오동동에는 그대로 남아 있는 오래된 음식점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런 데서 밥을 먹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맛있게 점심을 먹은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창동·오동동 근·현대 문화유적 미션을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과 짝을 이뤄 3.15 의거 발원지, 남성동 파출소, 조창 터, 옛 시민극장,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과 떡볶이집·분식집·레코드 가게 등을 사진에 담아오는 미션이랍니다.

 

요즘 들어 창동과 오동동을 찾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풍을 오는 학교도 있고 동아리 활동이나 체험 활동에 나서는 팀들도 많아졌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개인적인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고 또 근·현대 역사의 흔적이 많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창동·오동동은 적당하게 쇠락한 작은 도시의 중심가쯤으로 여겨져 왔던 곳입니다. 그런 인식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션 수행을 위해 뛰고 달리는 아이들에게는 정답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찾아다니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아이들은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런닝맨>을 하는 기분이라며 신이 났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조창터' 표지석입니다. 옛날 조창이 있던 데여서 창동이 됐습니다.

공부도 좋고 역사도 좋지만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게 최고입니다. 그냥 엄마 아빠랑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곳일 뿐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 몰랐다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창동예술촌 아고라 광장에 모여 미션 수행 일등 팀에게 쥐꼬리장학금을 전달했습니다.

 

창동아고라광장에서 소감을 쓰고 있습니다.둥글게 모여 앉아 소감문을 쓰고 있습니다.

 

아쉽게 상금을 놓친 친구들에게 마지막 남은 기회는 오늘 하루 소감문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소감문의 대부분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의림사가 무엇인지 창동·오동동에 왜 오는지 몰랐는데 오늘 하루 너무 즐거웠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을 쓴 친구 두 사람한테 다시 쥐꼬리장학금을 건넸습니다. 아이들에게 작은 격려가 된다면 좋은 일이겠지요. 멀리 떠나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람있게 역사 탐방을 마무리한 하루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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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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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5화. 조현오, 전의경 구타 근절 어떻게 했나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에서 경찰청장으로 내정되어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던 시절, 한 전직 참모 증언이다.


당시는 양천경찰서 고문사건, 경찰 성과주의를 문제 삼은 채수창 서장 항명 파동,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 등으로 야당이 경찰 조직을 압박하던 때였다. 조직 안에서는 조현오가 더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조현오가 대뜸 물었다.


"전의경 구타 사고는 왜 안 없어지는 거지?"


참모는 조현오가 그렇게 몰린 상황에서 전의경 구타 문제를 고민하는 게 놀라웠다.


조현오가 첫 보직인 부산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일을 할 때부터 '전의경 가혹행위 금지'는 경찰청장 단골 지시 사항이었다.



전투경찰은 1961년 창설됐는데, 당시는 직업경찰이었다. 1971년부터 현역병으로 대체됐고 2013년 9월 폐지됐다. 의무경찰은 1982년 치안 업무를 보조하고자 만들었는데, 전경과 의경은 구분 없이 시위 진압에 동원됐다.


전경이 폐지되고 의경만 남으면서, 시위진압을 담당하는 부대로 직업 경찰관으로 바뀌고 있다. 

직업 경찰관을 100명 단위로 묶으면 경찰관 기동대가 된다. 기동대장은 경정이 맡는다. 전국에 경찰 부대는 51개 정도 운영한다.


의경 부대는 소대 3개를 묶어 중대 단위로 구성하는데 한 소대 인원이 30명 정도다.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방범순찰대를 포함해서 200여개 중대가 있는데 서울에서 운영하는 부대만 100개 정도 된다. 보통 중대장은 경감, 소대장은 경위가 맡는다. 경찰대 졸업자는 2년 동안 소대장을 맡는 것으로 병역을 해결한다.


소대장, 중대장 등은 지휘요원이다. 지휘요원은 평소 방범근무 때는 현장 상황을 점검한다. 집회나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을 지휘한다. 대기 상황일 때는 승진 공부에 매달리기도 한다.


숙소에서 대원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그런데 당시 대원관리를 부대 고참에게 맡기는 지휘요원이 많았다. 고참은 조직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조현오가 부산동부서 형사과장 때는 경찰서 내 한 의경이 목을 매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가혹행위 때문에 자살하는 전의경 소식은 항상 들렸다.


조현오는 사천경찰서장 시절 가혹행위를 막고자 서장 판공비를 들여 영어책을 샀다. 



경찰서 회의실에서 하루 한 시간씩 전의경을 모아놓고 영어 공부를 시켰다. 고참일수록 숙제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신참을 괴롭힐 시간이 줄었다.


2007년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할 때는 '전의경근무 총량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지방청과 일선 경찰서에서는 현장 상황을 앞세우며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경비국장을 거치고 부산과 경기, 서울에서 청장 자리에 올라서도 늘 지휘요원에게 부대 관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관행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현오는 인사권과 감찰권을 쥔 경찰청장에 오르면서 그 한계와 맞서기 시작한다.


2011년 1월 23일 강원도 307 전경대 부대원 6명이 집단 탈영한다. 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조현오는 사건 발생 다음 날 강력한 조치를 단행했다.


"구타나 가혹행위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으로 이어져 온 부대는 해체하겠다."


강원도 307부대를 비롯해 가혹행위가 심한 부대는 모두 해체 수순을 밟았다. 2월 23일 <추적60분>은 이 같은 조치를 '보여주기 식', '무의미한 대책', '이벤트 성 홍보'라며 비판했다. 조현오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조현오는 조직이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충격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건이 생길 때마다 보내는 정형화 된 공문은 조직에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행정 처벌', '관리감독 강화', '적절한 징계' 같은 문구로 몇 페이지를 채운 공문은 조현오가 보기에는 그저 관행적인 것이었다.


전의경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주체는 경비부서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경비부서에 맡길 수는 없었다. 강원도 307부대 사건 다음 날, 조현오는 경찰청 감찰과장을 불러 감찰 직원을 전국 지방청에 풀라고 지시했다. 지방청 차원에서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를 미리 막으려는 조치였다. 조현오는 적절한 조치만 취하면 가혹행위는 발붙일 수 없다고 믿었다.


가혹행위는 입대 6개월 미만인 전의경에게 집중된다. 조현오는 6개월 미만 전의경 수천 명을 지방청 강당에 소집했다. 경찰청 감찰 직원은 가혹 행위 사례를 수집하며 현장에서 소원수리를 받았다. 가해자는 처벌할 것이며 피해자는 원하는 지역에 모두 보내겠다고 했다. 혼자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어색하다면 동기들과 묶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의경이 빠져나가 인원이 얼마 남지 않은 부대는 모두 해체 수순을 밟았다.


다음 조치는 복무점검단 구성이었다. 고참이 신참에게 일을 떠넘기지 못하게 한 만큼 이를 지휘요원이 책임지고 관리해야 했다. 복무점검단은 관리요원이 부대를 제대로 관리하는지 파악하는 일을 했다. 전의경 관리에 소홀한 직원에게는 징계가 떨어졌다.


징계는 형사 처벌과 다른 행정 처벌이다. 견책, 감봉, 정직, 강등, 해임, 파면까지 6가지 종류가 있다. 징계는 행위책임 또는 감독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행위책임은 자기 잘못으로 벌어진 일인 만큼 후회, 반성, 모멸감이 상당하다. 전의경 가혹 행위 관련 징계는 대부분 감독책임이었다. 감독책임은 통상 행위책임보다는 처벌이 약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전의경 구타가혹행위와 관련된 감독책임을 행위책임과 동등한 수준으로 형량을 매겼고 심지어 책임이 무거운 경우 ‘형사입건’까지도 시켰다. 


사고를 은폐한 직원에게는 '파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징계를 받은 직원이 순식간에 170명을 넘어섰다.


경찰 조직에서 징계는 어떤 의미일까.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 건으로 실형 8개월이 확정되자 이 보도를 접한 한 경찰관은 "이런 새끼는 더 살아야 해"라며 적의를 드러냈다. 



조현오에 대한 적의는 감독책임 징계에 대한 불만 위에 쌓인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전의경 감독책임 징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때문에 당사자 입장에서는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씌우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당시 조현오는 모두에게 책임을 지울 기세였다. 가혹행위가 발생한 경찰서 서장은 직위해제였다. 직위해제는 우선 직무 수행을 못하도록 하는 조치로 대부분 직위해제는 바로 징계로 이어진다.


2011년 2월 인천남부경찰서 의경 한 명이 이메일로 'TV 시청을 못한다'는 민원을 조현오에게 보낸다. 조현오는 인천남부경찰서장을 바로 갈아치워버린다. 당시 곳곳에서 치안 총책임자를 파리 목숨 취급한다는 불만이 불거졌다.


조현오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만큼 가혹행위 역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했다. 조현오는 학교폭력을 주목했다.


2010년 12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을 각목으로 구타한 사건이 벌어진다. 경찰 관련 학과에서 벌어지는 가혹행위는 고질적인 악습이었다.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한 학생 상당수는 경찰관이 된다. 조현오는 수사국장에게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학생 장래'를 거론하며 만류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강경하고 단호했다.


“그런 폭력적 성향을 가진 학생은 경찰 조직에 필요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의경 지원율이 20대 1로 급상승했다. 최근에는 의경 합격을 청탁하는 전화를 받는 이도 있다고 한다. 조현오는 당연히 이런 변화에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자부심과 별개로 인사청탁은 조현오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다. 그는 경찰 생활을 하면서 의경 보직에 대한 청탁을 종종 받았다. 하지만, 인사청탁은 가혹행위만큼 뿌리 뽑아야 할 악습이었다.


2007년 경비국장으로 부임한 조현오는 의경 보직 배정 방법을 이렇게 지시했다.


“의경들 군번 돌려!”


경비국장 권한으로 의경 보직 청탁 정도는 간단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경찰 인사 청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찰청장은 통상 총경급 이상 고위직 인사권을 행사한다. 조현오는 조직 기강을 잡으려면 경찰청장이 인사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사가 외부 청탁에 휘둘리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어요? 윗사람에게 아첨은 기본이고, 외부 빽을 잡으려고 온갖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래서야 지휘권이 확립될 수 있겠어요?”


문제의식은 아주 타당하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조현오는 외부 인사 청탁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다음 6화- 인사청탁 경찰관 명단 공개 편은 5월 7일 업데이트됩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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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섬갯벌이 생태체험에 알맞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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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곤양면 서정리 비봉내마을에는 대숲고을이 있습니다. 대나무는 사람의 삶과 함께하는 나무랍니다. 일대 언덕배기 아래위에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는 대나무들을 위해 마을 유지 한 분이 나섰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했습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 들여온 맹종죽(孟宗竹)이 1만 평에 걸쳐 심겨 있습니다.

 

대나무는 전남 담양이 옛날에도 유명했고 지금도 잘 가꾼 대숲공원 '죽녹원'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지만 거기 공무원들이 죽녹원을 조성할 때 여기 대숲고을을 벤치마킹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월 18일 두산중공업이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함께하는 토요동구밖 생태체험 세 번째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대나무를 본 적 없는 친구는 손을 들라 했더니 몇몇이 손을 듭니다.

 

 

아마 보기는 했을 텐데, 무심하게 그냥 지나쳤을 것 같습니다. 주택가나 아파트단지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나무이거든요. 그렇기는 해도 대나무숲을 보고 거기 들어가 거닐어 본 친구는 적을 것입니다.

 

대나무가 사람한테 주는 즐거움과 보람은 규모와 비례한답니다. 한두 무더기가 주는 감흥은 조그맣습니다만, 하늘을 뒤덮을 듯 빽빽하게 모여 있는 감흥은 정말 엄청나답니다. 여기 대나무들은 대부분 크고 굵은 맹종죽이랍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려 비탈길을 거쳐 대숲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봄철 바닥에는 죽순들이 막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대나무로 새 삶을 막 시작한 죽순, 그런 죽순을 한 번씩 쓰다듬는 아이들은 손길이 조심스럽습니다.

 

아이들이 죽순을 쓰다듬어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랑말랑하지만 얼마 안가 딱딱해질 이 죽순들은 한 번 쑥 치솟아 마디를 이룬 다음에는 매우 빨리 자랍니다. 최대 성장 속도가 하루 60~100cm이고 빠르면 60일만에 성장이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부피도 길이도 자라지 않고 다만 조금씩 더 단단해지는 노력을 합니다.

 

대나무는 또 여러 방면으로 쓸모가 있습니다. 어린 죽순은 나물해 먹고요 댓잎은 차로 끓여도 마십니다. 마디 맞춰 잘라낸 대통은 밥지을 때도 쓰이고요 세로로 쪼개 평편하게 저미면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 붓글씨를 썼던 그런 편지 노릇도 했습니다.

 

활과 화살, 창·작살로도 변신해서, 먹을거리 장만하는 도구로도 쓰였고요 요즘은 여인네들 살결을 곱게 만드는 화장품 재료로 대나무 수액을 씁니다.

 

 

대숲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생물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달개비, 제비꽃, 민들레, 개불알풀 등등이 손쉽게 눈에 띄고요 대숲 사이로 난 길바닥에는 질경이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질경이 또한 대나무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씨앗을 곳곳으로 퍼뜨리는 존재가 바로 질경이를 밟고 다니는 사람인데요, 질경이 주된 번식 경로는 사람·수레·자동차 바퀴가 어디로 가느냐로 결정된답니다.

 

새들에게는 대숲이 안전하고 따뜻한 숙박지이기도 합니다. 대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고 대나무는 또 표면이 매끄러워 천적들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무성한 잎사귀는 바람을 잠재워서 조용하고 따뜻하게 해줍니다.

 

 

여기 대숲고을에는 딱다구리도 산답니다. 크기가 작은 편이라 쇠딱다구리라 하는데요, 이날 아이들은 쇠딱다구리들이 대나무에다 구멍을 뚫어 마련한 둥지들도 눈에 담았습니다.

 

대나무와는 차나무도 잘 어울렸습니다. 둘 다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데 차나무는 또 그늘에서 자라야 좋습니다. 그 잎으로 녹차를 비롯해 여러 전통차를 만드는데요, 그늘에서 자랐을수록 더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이치랍니다.

 

그래서 대밭에서 대와 함께 자란 차나무를 고급으로 친답니다. 대나무(竹) 이슬(露)을 먹는 차(茶)라 해서 죽로차가 됐습니다.

 

 

대숲을 도는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자기보다 20~30배나 더 높이 뻗은 대숲이 주는 청청한 느낌에 흠뻑 젖었습니다. 가지와 잎을 붙잡아서 흔들어도 보고 귀를 대고 두드려도 봤습니다.

 

두드리면 소리가 비슷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굵은 정도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또 단단한 정도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아이들한테는 이런 다름이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돌아와서는 2명씩 팀을 이뤄 '대나무 도전, 골든벨!'을 했습니다. 대나무는 나무일까요, 풀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굵은 대나무 종류는 무엇일까요? 풀과 나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나무는 몇 년만에 꽃이 필까요? 대나무를 집에 기둥으로 썼을까요, 쓰지 않았을까요? 등등 10문제를 냈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이 정답 맞히기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대나무에 대해 알게 되고 나중에 아파트단지에서 대나무를 봤을 때 한둘이나마 떠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대부분 흥미와 긴장을 놓지 않고 끝까지 풀었고요, 쥐꼬리장학금은 여섯 개를 맞힌 팀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어서 곤양시장 가까운 덕원각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은 다음 비토섬으로 향했습니다. 설화 <별주부전> 탄생 배경지역입니다. 풍경도 그럴 듯하고 이어질 듯이 흩어져 있는 섬들도 좋습니다.

 

 

 

비토섬 일대 갯벌은 사천 다른 갯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진흙갯벌입니다. 그런데 진흙갯벌에는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옷을 버려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들어가 찾아볼 수 있는 생물은 종류가 많지 않습니다.

 

다만 비토섬에서도 월등도(용궁에 갔던 토끼가 살아돌아온 장소라는)갯벌은 그렇지 않고 모래·자갈·바위·진흙이 알맞게 섞여 있습니다. 옷은 적게 버리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생물은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여기서 어린 물고기, 게, 쏙, 조개·소라 따위를 어른보다 더 많이 찾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자기가 잡은 망둥어 새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사진에 담고 있는 모습.

 

한 시간 가량 노닐다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서는 오늘 하루 생태체험 소감을 썼습니다. 여기에도 쥐꼬리장학금이 내걸렸습니다.

 

자세하고 길게 쓴 한 친구, 대숲을 돌아보고 '대나무 도전 골든벨'을 하는데 "많이 틀려도 많이 웃었다"는 친구, "게를 집에 들고 오고 싶었지만 불쌍해서 놔줬더니 이상하게 상쾌했다"는 친구 셋에게 돌아갔습니다. 갯벌과 대숲에서 시원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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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교육감 "홍준표와 강공으로 맞서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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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블로그공동체(경남블공)가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을 만났다. 지난 4월 30일이었다. 최근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무상급식 지원 중단을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일반 언론에는 나오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번 무상급식 지원 중단 이슈가 정치적으로는 과연 박종훈 교육감에게 덕이 될까, 실이 될까를 놓고 가볍게 나눈 대화 내용이다.


정치적으로는 손해보는 것도 아니지만


-교육감 님이 보시기에 홍준표 지사가 왜 저러는 것 같습니까?

"급식 지원 중단 선언 말씀이죠?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도 그 점에는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홍준표와 박종훈. @경남도민일보


-정치적으로 자기가 이슈를 주도함으로써 잊혀지지 않으려는, 그럼으로써 보수층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의도?

"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 분이 강하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경남에서는 조금 지지율이 빠지기도 하지만 전국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중단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그렇다면 우리 교육장 세 분을 고발한 것은 자기 득표율이나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는데, 왜 그렇게 강공을 하는지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교육장 세 명을 고발한 것은 정치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네. 교육장 세 분 고발은 세 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걸 조사하기 위해서 경찰이) 열여섯 개 시군 교육장을 다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굳이 그럴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아직도 우리 교육청 안에 적군이 득실거린다


-그런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교육감 님께는 도움이 된 부분도 있을 것 같네요. 교육계 내부 결속이라든지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홍 지사가 오히려 도와준 측면도 있지 않나요?

"아. 저도 그렇게 봅니다. 일단 제가 교육청 안에서 리더십을 확보하는데는 도움이 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안에서 언론사 쪽에 제보하는 그런 걸 보면 아직 우리 안에 적군이 득실거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웃음) 아직도요?

"전임교육감 때도 내부에 그런 분들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충고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더라고요."


박종훈 교유감 블로거 간담회. @김주완


-그렇군요. 그런데 노이즈 마케팅 측면에서도 보면 홍 지사가 저렇게 함으로써 교육감 님도 좀 더 노출될 기회가 많아졌고, 학부모들의 결속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부분으로 보면 교육감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니지 않나요?

"선거를 관심있게 보는 분들이나 그런 쪽 전문가들은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일상적으로 교육감이 언론에 노출될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그런데 언론 노출 빈도나 이런 걸 봐서는 여느 유력정치인에 못지 않을 정도니까.(웃음) 그래서 손해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들 하시는데, 저는 그걸 아직 즐길 수 있는 내공은 아직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힘듭니다. 또 정치인으로서 판단과 교육자로서의 판단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학부모와는 계속 만나겠다


-이제는 정치인이잖아요.

"그래도 저는 도지사와 교육감이 무상급식 문제를 갖고 이렇게 다투는데 있어서도 지사가 하는 것처럼 저렇게 하면 도민들이 '에이 교육감이 왜 저러나' 하며, 지사를 보는 관점과 교육감을 보는 관점이 좀 다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 점에서 좀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같이 강공으로 가게 되면 더 손해를 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델리케이트하게 맞서는 것은 안 하고 싶습니다."


박종훈 교육감과 블로거 간담회. @김주완


-그래도 학부모는 계속 만나실 거죠?

"네. 그동안 많이 만났습니다. 지역별로 사천, 하동, 거창, 함양, 산청, 고성, 양산, 김해, 마산 내서…. 집회를 지금까지 10여 군데 다녔는데 집회에서 보는 학부모님들의 정서가 평균적인 학부모들의 정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균적인 학부모들은 좀 더 온건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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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에 대한 박종훈 교육감의 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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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제도 개선은 한국 교육계의 해묵은 논란거리다.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은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물론 대학입시 제도는 교육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박 교육감도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훈 교육감은 이에 대해 어떤 소신이나 해결방안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이에 대해 박 교육감은 수학능력시험 자체를 없애버리고 내신성적 100%를 성적자료로 삼으면 된다고 말했다. 아래는 지난 4월 30일 경남블로그공동체와 박종훈 교육감 간담회에서 나온 일문일답이다.


박종훈 "수능을 아예 폐지하고 내신 100%로 하면 된다"


블로거들과 간담회 중인 박종훈 경남도교육감. @김주완


-임종금 : 연합고사 폐지하면 사교육비가 좀 줄어들지 않을까요?


박종훈 :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좀 줄어들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대신 학부모들과 교장 선생님들 중에서 '공부 안 시키려고 하는 교육감'이라는 공격이 지금도 간헐적으로 들어옵니다."


-정성인 : 내신성적 문제인데요. 예전에 제가 클 때는 2년 동안 죽을 쒀도 나머지 1년 동안 미친듯이 열심히 하면 일종의 패자부활전처럼 일어설 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 내신만 가지고 평가를 하면 한 번 엎어진 후에는 일어설 기회가 없어진다는 문제가 있죠.


"서로 다른 시험제도 2개가 있으면 1개로 자빠진 사람이 다른 1개로 만회할 수 있다는 그 순기능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고입의 경우에는 선발고사로서의 기능이 전혀 없거든요. 100% 짜리도 합격하니까요. 선발의 기능이 없는데 굳이 하는 것은 스트레스만 줄 뿐이라는거죠."


-정부권 : 모든 문제의 끝은 대학이거든요. 대학입시 문제인데, 이 문제는 교육감님이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대학입시 제도가 바뀌어야 해요. 대학평준화라든지 제도적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정말 대통령이 제대로 된 분이 딱 해가지고 대학입시 제도의 개혁을 하면 되죠. 대통령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학입시 제도 개혁 없이는 우리 교육정상화 안 된다고 했더니 최근에 와서는 기업체에서 사원 선발하는 제도가 안 바뀌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지금은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입사 시험 치기 위한 학원이 되어버렸으니까."


박종훈 교육감과 경남블로그공동체 간담회. @김주완


(잠시 다른 이야기로 흘러서 중략)


-김주완 : 입시제도는 제대로 된 대통령이 결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교육감님이 대통령이라면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저는 프랑스의 대학 제도 정도로 가면 대학의 서열화라든지, 굳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 위해 지방에서 경제적인 손해를 보는 이런 문제도 해소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예전에 우리가 대학 갈 때만 해도 지방대학 중에서 부산대학교는 서울의 연세대학교, 경북대학교 하면 서울의 고려대학교 정도 이렇게 국립 지방대학을 쳐줬는데, 지금은 대학 서열이 완전히 달라졌죠."


-김주완 : 그건 대학서열화 문제 해소방법이고요. 입시제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입시제도는,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 내신을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셨지만 내신 100%로 대학에서 뽑으면 교육과정 정상화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내신의 비중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지방에 상대적으로 유리해집니다. 그렇게 하면 고등학교 평준화도 이루어지고 고등학교 교육과정 정상화도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지금 대학은 끊임없이 고등학교를 서열화하고 있거든요. 그 해에 고등학교의 특정대학 합격자 숫자나 수능 점수 분포나 뭐 이런 걸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는지 모르지만, 공식적으로는 서열화를 부인하지만 실제로는 서열화를 시키고 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내신 100%로 뽑으면 그런 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김주완 : 해결책은 간단한 거네요?


"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이 저는 고등학교 교육과정 정상화를 할 수 있는…."


-정부권 : 좀 모순적인 이야긴데요. 내신 100%가 되면 학교 자체가 경쟁의 장이 되고, 주관식 평가도 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것이 교육정상화인가 이런 문제도 생기는데요?


-김주완 : 물론 지금도 학교 자체가 경쟁의 장이 되어 있지만 더 심해질 것이라는?


"내신 100% 안 한다고 해도 경쟁은 하고 있거든요. 학교 안의 경쟁과 함께 학교 간의 경쟁, 두 개를 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신 100%를 하면 학교 안의 경쟁은 존속되어도 학교 간의 경쟁은 없어지겠죠."


-정부권 : 내신 100%가 되면 매번 시험 칠 때마다 그게 입시인거죠. 입시를 3년 내내 하는 거죠.


"그런데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대학입시는 다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적만 갖고 대학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적 외에 학생의 개별적인 스펙 하나하나가 다 모여서 학생부 종합전형의 자료가 되기도 하고요. 오히려 지금은 학생부 종합전형과 수시 전형이 정시보다 비중이 높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공부성적이 대학입시에 차지하는 비중 100%일까요? 선생님들마다 조금 다르겠지만 50% 미만이라는 것은 모두가 합의된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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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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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6화. 조현오의 인사청탁 간부 명단공개


조현오는 2010년 1월 27일 서울청 참모회의에서 경정급 직원 이름 16명을 공개하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조현오는 “승진할 수 있는 보직으로 가고자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찰관”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빽’을 통해 인사 청탁을 하면 명단을 공개하겠다던 경찰 간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한 사람은 조현오가 처음이었다.



경찰은 경위 계급이라 해도 정보 쪽 분야에서 일한다면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해 막강한 실세들과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2014년 기준 전국 경찰 가운데 경정은 2171명이며 총경은 507명이다. 총경 승진이 안 된 경정은 14년 근무를 마치고 퇴직해야 한다. 이를 ‘계급정년’이라고 한다. 총경 이상 인사권은 경찰청장에게 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인사권만 있는데 왜 지방청장에게 총경 인사 청탁이 들어올까?


총경 승진 과정을 살펴보자. 승진 1단계는 인사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 업무 능력을 증명해야 승진 후보 대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아무래도 업무 능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보직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보직 청탁이 생기는 이유다. 또 지방청장이 예상 밖 인물을 승진시키는 게 불가능하지도 않다. 지휘관이 평가 점수를 매길 때 특정인에게 최고 점수를 몰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경찰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맥을 동원하면 경찰 기강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 경험이 근거였다. 생활안전과장으로서 성과를 냈지만 형사과장으로 가지 못했던 조현오는 보안과장 시절 외부 인사 청탁으로 형사과장이 되면서 부조리를 느꼈다. 이 같은 관행을 막고자 들고 나온 방법이 외부 인사 청탁자 명단 공개였다.


조현오는 첫 보직인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 시절 파출소장에게 청탁을 받곤 했다. 경위 이하 인사권은 경찰서장에게 있지만 생활안전과장(경정) 추천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파출소장은 유흥업소가 밀집된 파출소로 가고 싶어 했다. 조현오는 이런 직원을 살짝 불러 무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울산남부서에서는 외부 인사 청탁 전화를 두 번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에게 선택권을 강요했다. 옷을 벗든지 울산을 떠나 다른 경찰서에서 근무할 것인지 고르라고 했다. 조현오는 한 명은 다른 지역으로 보냈고 다른 한 명은 울산 내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직원 부인이 서장실로 찾아와서 남편과 함께 무릎 꿇고 빌더라. 아이를 등에 업은 부인이 애원하니까 차마 울산 밖으로 보내지 못했지.”


2008년 부산청장이 됐을 때도 외부 청탁을 받았다. 조현오는 해당 직원을 불러 혼내는 정도로 넘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기자들과 회식 중에 총경 승진 후보자 이야기가 나왔다. 기자들은 경찰관 한 명을 지목해 승진 가능성을 물었다. 조현오는 승진 연도가 늦다며 인사는 원칙과 공정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은 노무현 정부 때 승진한 총경을 거론하며 형평성을 따졌다. 누구는 이상득·이재오 등을 언급하며 ‘빽’을 거론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향신문>은 조현오 부산청장이 고위직 승진을 원하면 이재오·이상득 의원을 통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기자는 <경향신문> 기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조현오 청장 발언 취지는 ‘안 된다’는 뜻이었어요. 만약 문제 있는 발언이었다면 다른 기자들이 왜 후속 기사를 안 썼겠어요?”


부산에서 한 지인을 만났을 때 조현오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산청장이던 조현오에게 술자리에서 인사 청탁을 했다.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청탁을 거부하겠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며 출입구 앞에 드러눕고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아무 반응이 없어 살며시 눈을 뜨니 조현오가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안 됩니다.”


지인에게는 그 상황이 매우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이때부터 외부 인사 청탁이 들어오면 해당 과장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참모회의 참석자는 20여명이다. 조현오는 당사자를 세워놓고 다그치곤 했다.


“인사 청탁하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 청장 지시가 잘못인가?”

“잘못 없습니다.”

“지시가 정당하면 왜 불복하느냐? 지시를 위반한 이유가 뭐냐?”


당시 직원들은 이를 ‘인민재판’, ‘자아비판’이라고 표현했다. 



1년 뒤 조현오는 서울지방청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은 ‘빽’ 수준과 체급이 달랐다. 참모회의에서 직원을 불러 질책하는 정도로는 효과가 없었다. 작심하고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 16명을 실명 공개했다. 한 경찰은 당시 실명 공개 파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방청장이 회의 중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언급하면 그날 지방청 화두는 그 사람이에요. 청장이 한 사람을 칭찬하면 승진 대상자라며 시끌시끌하지요. 청장은 누구를 딱 집어서 질책도 잘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받는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니까요.”


조현오식 실명 공개는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 조현오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그렇게 실명을 공개했는데도 ‘빽’을 쓰는 사람이 있는 거야.”


조현오는 외부 인사 청탁을 한 경정을 참모회의에 불렀다. 서울청 참모회의 참석자 규모는 30~40명 정도다. 그 자리에서 조현오는 경정을 호되게 질책하며 몰아붙였다. 이후 조현오는 분위기가 잡혔다고 판단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경찰청장은 감찰권과 총경 이상 인사권을 행사한다. 외부 인사 청탁에 대한 자기 관점과 대응은 조직 안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조현오는 스스로 최악이라고 할 만한 인사 청탁을 받게 된다. 인사 청탁 자체도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하필 청탁한 외부인이 검찰 출신이었다. 당시는 수사권 조정 문제로 경찰과 검찰이 첨예하게 맞붙던 시기였다. 조현오는 당장 감찰 조사를 지시했다.


조현오는 경정급 외부 인사 청탁은 명단 공개로 대응했다. 경무관급 이상 인사 내막은 ‘경찰청장 지휘’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까지 조현오에게 청탁을 했다는 외부 인사는 누굴까. 공개적으로 질책을 당했다는 경찰은 MB 정부 시절 어떤 인물을 동원했을까. 조현오는 몇 명을 언급했지만 이들을 밝히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외부 인물 가운데 한 명은 MB 정부 때 언론에 자주 등장한 종교인이다.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 이너서클’에서 온갖 루머와 견제로 시달릴 때 두둔해줬다고 한다.


조현오가 ‘빽’을 공개하는 방식은 정당했을까? 동의하지 않는 시선이 많았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었다면 조현오가 선례를 만든 만큼 계속 이어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면 굳이 명단을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왜 주변에 적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을까.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 시절 훗날 법조 브로커로 유명해진 K씨를 알게 된다. K씨는 어떤 회사와 관련된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자 서장실을 찾아와 조현오에게 봉투를 건넸고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K씨는 청렴한 조현오에게 호감을 보였다.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에서 거둔 성과와 상관없이 3급지인 사천경찰서장으로 발령받는다. 그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K씨는 사천경찰서에 찾아와 조현오에게 원하는 보직을 물었다. 조현오는 원하는 보직을 말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조현오가 돈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현오가 거친 보직은 썩 좋지 않았다.


소식이 뜸하던 K씨가 허준영이 경찰청장이 되자 연락이 왔다. K씨는 경찰청 간부를 다 아는데 허준영만 모른다며 조현오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조현오는 알겠다고 답해놓고 허준영을 찾아가 오히려 K씨가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며칠 뒤 K씨는 전화로 조현오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이후 연락이 끊긴 K씨와 다시 연결된 것은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으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 K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판검사가 구속했다며 면회를 오겠다고 했다. 조현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현오는 K씨가 사천경찰서로 찾아와 원하는 보직을 말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K씨에게 기대려 했던 자신이 굴욕스러웠다. 이후 직급이 오를수록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사 기준 마련은 조현오에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외부 인사 청탁도 막고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도 뺀다면 승진 기준은 뭐가 돼야 할까. 조현오는 ‘성과’ 말고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다음7화- 성과주의 편은 11일(월) 업데이트됩니다.>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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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출판사의 SNS를 활용한 출판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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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출판을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책 소비자의 60~70% 이상이 서울과 경기에 있고, 출판사의 95%도 서울에 있다. 아마도 연간 100권 이상 책을 내는 좀 규모 있는 출판사는 100% 서울에 있다.


게다가 인쇄·제본소는 물론 배본사나 총판, 심지어 DM 발송대행사도 경기도 파주 고양 일대에 모두 밀집해있다. 실력있는 북디자이너나 편집자도 서울에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인쇄를 비롯한 모든 비용도 서울 이외의 지역이 훨씬 비싸다.인쇄 기술과 질도 그렇다.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의 판매 비중이 갈수록 늘어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등이 출판업계의 갑(甲)이 되어 있는 마당에 서울 아닌 지역에서 출판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사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출판사가 상당히 많았고, 전국 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을 통해 그런 출판사가 낸 책들이 상당히 많이 팔리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점점 서울 집중이 심화하면서 지역출판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서울로 옮겨갔다. 대구에 있던 녹색평론사도 언제인지 서울로 가버렸다. 그래도 버티고 남아 있는 건 제주도의 도서출판 각이나 부산의 산지니 정도다. 그 외에 지역 출판사들은 말이 출판사이지 자비 출판이나 관급 인쇄물을 찍어주는 인쇄대행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모하게도 서울에서 350km나 떨어진 창원에서 우리가 출판을 해보겠다고 나선 것은 SNS의 힘을 믿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도서출판 피플파워 블로그와 페이스북 페이지, 카카오스토리 채널을 열고,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책의 제목으로 페이지를 열어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런 실험과 시도의 과정이다. 《풍운아 채현국》 페이지 좋아요는 2500명이 넘었고, 《시장으로 여행가자》는 600명이 넘었다. 도서출판 피플파워 페이지는 1000명을 조금 넘었다.


이들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간간이 올라오는 독자들의 서평과 리뷰, 신간 소개, 저자 소개, 책 판매 상황, 이벤트 알림 등 소식을 올리고 있는데, 포스트 1건당 평균 도달 수가 2000여 회에 이르고 있다. SNS가 없던 시절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낸 책은 대부분 2쇄 이상을 찍었따.


이번에는 그간 《풍운아 채현국》에 대한 독자들의 블로그 리뷰와 서평에서 핵심문장을 뽑아 이렇게 카드로 만들어봤다. 문장 발췌와 제작은 서정인 기자가 수고해주었다.













지금까지 우리 출판사(도서출판 피플파워) 이름으로 낸 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취업 대신 꿈을 창업했다》(글 윤거일, 캘리그라피 안다원)

《천개의 바람》(김유철 시집)

《풍운아 채현국》(김주완 기록)

《시장으로 여행가자》(권영란 지음)

《사람 사는 대안마을》(정기석 지음)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인생》(김주완 지음)

《경남의 재발견-해안편》(이승환 남석형 지음)

《경남의 재발견-내륙편》(이승환 남석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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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은 박근혜와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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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8일치 <한겨레> 1면에 실린 곽병찬 대기자의 칼럼 '재보선, 참사를 기억하라'를 5월 1일 뒤늦게 읽었습니다. 그 칼럼에서 곽병찬 대기자가 새정치민주연합을 감싸면서 천정배·정동영 등을 몰아쳤고, 그것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지었기에 더욱 적절하지 못하다는 얘기들이 많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읽으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곽병찬 대기자는 지금도 오로지 야권분열 때문에 야권이 이번 재·보선에서 졌다고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틀리지 않는 인식이겠지요. 그러나 원인이 그것뿐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런 '분열'을 무릅쓰고 또 그에 따른 부담까지 무릅쓰면서 출마한 사람(세력)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곽병찬 대기자가 말하는 '야권 분열'말고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아울러 곽병찬 대기자의 글에서 또 다르게 틀린 대목을 보고는 이런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물고기 '꼬시래기'(문절망둑을 이르는 경상도 지역말)가 들어가야 맞는 자리에 '뽀시래기'(바스라기의 센 말로 널리 쓰임)라는 글자를 써 넣었더군요.

 

"저희들에게 배지를 안겨줄 것 같은 선거구에서 재보선이 열리게 되자 뽀시래기 제 살 뜯어먹듯이 저를 낳아준 곳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이 하나를 두고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명색 한겨레의 대기자가 꼬시래기와 뽀시래기 구분도 못해? 그러고도 대(大)기자야? 대기나 하라 그래!"

 

 

그러고 보니 경남 창녕에 있는 '성씨 옛집'을 두고 지난해 2월에 곽병찬 대기자가 쓴 '향원익청' 칼럼에도 틀린 대목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그런 따위가 본줄기가 아니라 곁가지다 싶어서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까지 좀 '거시기'하게 여겨집니다.

 

1. (성씨 옛집이 있는) 석동 앞으로 토평천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들판을 두고 '어묵리들'이라 했는데, 실은 '어물리들'이랍니다.(“토평천은 석리로 들어서면서 남으로 활처럼 크게 휘어져 어묵리들을 빚어내고,)”

 

2. 이어서 "(토평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면서 정지들을 펼쳤다"고 적었는데 제대로 모르는 얘기입니다. '정지들'은 석동 마을에서 바로 북쪽으로 언덕배기 너머 소야마을 앞을 흐르는 대곡천이 토평천으로 흘러들면서 그 어름에 만들어낸 들판입니다.

 

그리고 ‘토평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면서’ 펼쳐낸 들판은 없습니다. 다만 토평천이 갑자기 확 넓어지면서 우포늪(소벌)으로 됐고 그 여러 둘레에 들판이 이뤄져 있을 따름입니다. 소벌(우포늪)은 쪽지벌을 지나면서 다시 좁아지는데요 이는 낙동강 합류 지점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성씨 옛집의 경근당. 변소가 건물 안에 있어 이채롭습니다.

 

3. 또 “입향조(마을에 들어와 처음 자리잡은 조상) 성규호 선생이 유원면 회룡에서 그곳(석문동)으로 옮긴 것은 1850년대.”라면서, ‘회룡’이라는 마을이 ‘유원면’ 소속이라 했습니다. 회룡 마을은 지금 '유어면'에 들어 있습니다. ‘유원’이라는 면(面)은 옛날에도 지금도 창녕군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잘못들이 그 칼럼에 있다 할지라도, 곽병찬 대기자가 얘기한 창녕 성씨 옛집 곡절 많은 사연까지 잘못됐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처럼 창녕이 고향이라서 또는 창녕에 대해 나름 공부를 해서 좀 아는 사람한테는, "한 번이라도 와서 보고 이 칼럼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자아내게 만들 것입니다.

 

또 땅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어물'을 '어묵'으로 만들어버린 이 '향원익청'의 잘못이 아주 작은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씨 옛집 뒤뜰의 대숲.


제가 이리 말씀드리는 요지는,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를테면 야권 분열)을 가장 중요하게 보지만 너는 그것(별도 야권 세력 구축)을 더욱 중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른 생각과 사람도 저마다 나름대로는 타당한 근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할 줄 모르는(또는 인정하기 싫어하는) 대한민국 대표선수가 지금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박근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번 사안을 두고라면, 곽병찬 선수는 자기가 박근혜 선수하고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곰곰 생각해 봐야 맞지 않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훤주



※ 5월 7일 페이스북에 같은 취지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일부 잘못이 있어서 바로잡고 다른 표현도 조금 보완해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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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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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7화. 조현오 식 성과주의의 성과는?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경찰관 4명이 구속됐다. 이들은 피의자에게 자백을 받고자 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수갑을 채워 팔을 꺾어 올리는 이른바 ‘날개 꺾기’ 같은 폭력을 행사했다는 게 사회적으로 충격을 줬다.


6월 29일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무리한 성과주의가 양천경찰서 고문을 부추겼다며 서울청장인 조현오가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청장인 강희락과 조현오는 불편한 사이였다. 하지만, 경찰 조직에서 하극상에 대한 대응은 단호했다. 강희락은 조현오 퇴진 요구를 기강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채수창을 직위해제한다. 이후 채수창이 제기한 성과주의 비판은 일선 경찰서 직원도 공감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보직과 승진 인사 기준은 오직 성과’. 조현오가 내세운 ‘성과주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언론은 조현오가 MB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고 갑자기 실적 위주 평가를 도입한 것처럼 접근했다. 물론 MB 정부가 행정 효율성을 유난히 강조했고 ‘성과주의’는 그 방향을 잘 따른 방침처럼 보이기는 했다. 조현오는 그저 정부 기조를 잘 따랐을 뿐일까.


경찰 조직에서 실적에 집착하는 관행은 이전부터 있었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일 때는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대부분 경찰서 형사과장실에는 각 팀별 실적을 표시하는 막대그래프가 걸려있었다. 당시 전체 수사 활동비로 지급하던 돈이 430만 원 정도였는데 조현오는 수사비 절반은 형사 수만큼 나눴고 나머지 절반은 한 달 동안 팀별 성과에 맞춰 지급했다.



조현오가 성과를 강조한 것은 울산남부서장 때부터 도드라진다. 경정 이하 인사는 시험과 심사로 승진을 결정한다. 심사는 경찰서장의 주관적인 판단과  ‘빽’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였다. 조현오는 심사 과정에서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자 했다. 한 번은 승진 대상자를 모아놓고 이런 말도 했다.


“자신이 왜 승진해야 하는지 설명해봐라. 조직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자기 업무를 어떻게 열심히 했는지 증명해봐라.”


순위는 모두 보는 앞에서 성과를 중심으로 결정됐다.


조현오는 2003년 서울종암서장 때도 여전히 성과를 중시했다. 당시 종암서 형사과 실적은 서울지역 31개 경찰서 중 상위권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과에 자주 들러 형사들을 격려하곤 했다. 그런데 한 번은 조현오가 생활안전과장에게 서울종암서 관할 파출소 직원 200여명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성과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검거 실적이 전혀 없는 직원이 70여명이었다.


해마다 경찰청은 다양한 치안 관련 통계를 내놓는다. 범죄 발생을 월, 요일, 시각, 장소, 기상 등으로 구분해 통계를 낸다. 이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치하는 참고 자료가 된다. 70여명이 1년 동안 실적이 없다는 것은 인력 배정이 문제거나 직원이 일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조현오 판단이었다. 조현오는 형사계장에게 일주일 동안 재교육 운영을 지시했다. 소매치기 식별 요령부터 수배자 검거 방법까지 전반적인 교육이 진행됐다. 재교육 성과는 서서히 나타났다.



최근에도 경찰청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가 있다. 2007년 조현오가 경비국장일 때 일이다. 이때도 승진 기준은 성과였고 순위는 공개한다는 게 인사 원칙이었다. 경비국 회의실에서 조현오는 참석자에게 ‘우리가 합의한 내용’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승진 순위를 밝혔다. 이 순번은 조현오가 보직 이동을 한 뒤에도 어김없이 지켜진다. 조현오가 떠났을 때 ‘빽’이 개입할 틈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조현오도 이를 의식했는지 이듬해 부산청장으로 옮기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순번을 어기는 사람은 내가 경찰청장이 되면 가만 안 두겠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청장으로 부임한다. 오랜 참모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휘관으로서 이력이 시작됐다. 부산에서는 지금도 조현오를 두고 ‘추진력은 최고’라는 평가가 많다.


조현오는 오전 6시 30분쯤이면 출근했다. 간밤에 주요 수배자 검거 소식을 들으면 즉시 검거 직원이 있는 경찰서로 향했다. 조현오가 움직이면 지방청 인사계에서도 함께 움직였다.



부산지방청에서 가장 먼 부산강서경찰서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조현오는 언제나 8시 전에 도착해 공을 세운 경찰을 격려했다. 인사계에서 준비한 상과 상품도 함께 전달됐다. 낮에도 주요 검거 소식이 들리면 경찰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 사기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2007년 말 혜진이, 예슬이 사건, 2008년 3월 일산 엘리베이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 등으로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고 있었다.


2014년 기준으로 부산에는 경찰서 15개, 파출소 40개, 지구대가 50개 있다. 조현오는 치안 체계를 점검하고자 각 팀별로 실적 통계를 내라고 지시한다. 그 결과 최고 실적과 최저 실적 차이는 1224배나 됐다. 조현오는 당장 성과를 근거로 인력을 배정하고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내부 게시판에서는 성과주의를 향한 불만이 쏟아졌다. 조현오 역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토론하고 싶은 사람은 당장 다 와라. 결론 나올 때까지 토론하자. 내가 잘못했으면 깨끗이 거두겠다. 내가 맞으면 내 방침을 따라라.”


끝장 토론으로 불평·불만을 돌파하는 방식은 일선 경찰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하다. 최근에도 그 일화를 떠올리는 경찰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이 같은 대응을 두고 실적을 바탕으로 차기 경찰청장 자리를 노린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한 경찰 취재기자 생각은 달랐다.


“청장으로 와서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런 정책이 인기를 얻으면 차기로 가는 디딤돌이 되지요. 하지만,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다양한 정책을 통해 인기를 얻고자 하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자기 권한으로 잘못된 것을 뜯어고치겠다는 쪽이었지요.”


조현오는 권한이 커질수록 징계 수위도 높였다. 비리를 도려내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경찰 조직 안에서는 1985년부터 경찰대 출신들이 입문하면서 조직을 깨끗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이처럼 아래에서는 ‘경찰개혁의 첨병’이라는 자부심으로 뭉친 젊은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위로는 모든 청장이 유착 근절을 부르짖었다.


조현오도 부패 경찰 척결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과격했다. 일반적으로 유착에 대한 징계는 ‘사후 조치’였다. 경찰이 업주에게 돈을 받은 게 나와야 징계로 이어졌다. 하지만, 조현오는 단속 대상자인 업주와 업무 외 전화를 아예 금지했다. 물 한 잔도 얻어먹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경찰에게는 여지없이 징계가 떨어졌다.



이 같은 조치에 대해 한 기자가 내린 평가는 박했다. 단순 통화는 통신 자유에 해당하며 설사 지시를 어겨 징계를 하더라도 행위에 비례하는 문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현오가 징계한 직원 중 일부는 소청심판이나 행정소송을 거쳐 살아나기도 했다. 조현오가 내세운 ‘일벌백계’는 명료했지만 분명히 지나친 면도 있었다.


지방청장은 경정 이하 승진과 전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보통 경찰서 간 전보 인사는  인근 경찰서로 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성과를 기준으로 인력 배정을 진행한 조현오에게 관례는 관례일 뿐이었다. 해운대경찰서에서 강서경찰서로 옮기게 된 직원들 불만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해운대와 강서는 부산에서 경찰서 사이 거리가 가장 먼 곳으로 이동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2009년 경기지방청장으로 부임한 조현오는 징계 차원에서 평택에 근무하는 직원을 포천으로 보내기도 했다.


2010년 서울청장 때는 비리 온상으로 지목된 강남경찰서 수사팀을 뒤엎었다. 당시 강남 유흥업계가 단속을 돈으로 무마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조현오는 업주와 엮인 경찰을 서슴없이 징계하기 시작했다.


한 언론은 조현오가 차기 경찰청장 임명을 앞두고 ‘자기 관리’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강력한 내부 비리 척결로 청와대 관심을 끌고자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현오가 청와대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맞다. 민정수석실도 나름 움직이기 시작한 듯 했다. 


(다음 8화-‘룸싸롱 황제’ 이경백 사건은 19일 업데이트됩니다.)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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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관련 통계와 예스24 판매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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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출판시장은 어떨까.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발표한 <출판산업동향> 2013년 통계


- 신간도서 발행량 : 2013년에 6만 1548종, 월평균 5129종을 발행하였으며 교육 관련서가 1/4(27.4%)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함

※ 전년 대비 5256종, 7.9% 감소


- 발행실적이 있는 출판사 : 2013년에 5740개사로 1종을 발행한 출판사는 31.3%(1794개),

5종 이하가 65.0%(3730개)를 차지함

※ 전년 대비 482개사, 7.7% 감소


주요 판매처 비중은 대형서점 30.4%, 인터넷서점 26.9%, 도매 총판 14.0%, 기관판매 11.8%, 중소형서점 6.5%, 직판 4.4% 순이었다. 또 다른 조사결과를 보니 도서 구매자가 선호하는 유통 경로별 비중은 ‘대형서점(34.8%) > 인터넷서점(22.3%) > 동네서점(16.9%)’ 순이라는 통계도 있다. 


인터넷 서점 판매 비중이 아직 30%가 안 된다는 통계는 약간 믿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인터넷서점 매출 1위라는 예스24를 기준으로 우리가 펴낸 《풍운아 채현국》(도서출판 피플파워) 3개월간 판매 경향을 분석해봤다. (예스24 SCM에서는 3개월간 검색밖에 안 된다. ㅠㅠ)



3개월간 총 판매권수는 531권이다. 지역별로는 서울 25.6%, 경남 24.1%, 경기 22.4%, 전라 10.5%, 충청 9.4%, 강원 2.4%, 제주 1.5% 순이다. 서울과 경기를 합치면 48%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나마 채현국 선생이 대구 출신으로 경남 양산에 살고 있다는 연고 덕분인지 경상도 비중이 높아서 이렇게 나마 나온 것이다. 또 출판사가 경남지역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일반적인 단행본 판매는 서울 경기지역 소비량이 60~70%에 이른다고 한다.



남녀 비율은 남자 261명 / 여자 234명으로 남자 비중이 좀 높지만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는 아닌 것 같다. 다만 20대에서 여자 비중이 월등하게 높다는 게 이채롭다. 연령별로는 아무래도 중년에 들어서는 40대가 가장 많고, 30대와 50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2014년 상반기 출판 통계는 이렇다.


- 신간도서 발행량 : 2014년 상반기에 3만 4281종, 월평균 5714종을 발행하였으며 교육 관련서가

1/3(32.4%)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함

※ 전년 동기 대비 1025종, 3.1% 증가


- 발행실적이 있는 출판사 : 2014년 상반기에 4409개사로 1종을 발행한 출판사는 34.4%(1516개),

5종 이하가 72.8%(3206개)를 차지함

※ 전년 동기 대비 191개사, 4.2% 감소


● 상반기 발행 실적이 있는 출판사 중 1종을 출간한 출판사의 비중은 34.4%(1,516개), 1~5종

이 72.8%(3,206개), 1~10종이 85.8%(3,783개)로 소규모 출판사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함


● 상반기 도서발행 실적이 있는 출판사 수는 4,409개로 전년 동기 대비 191개사(4.2%)가 감소함.

실적별 출판사 수가 전체적으로 소폭 감소세를 보이는 가운데 1종 발행 출판사가 158개 줄어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함. 1~5종이 152개, 6~10종이 23개, 11~30종과 31~101종 이상이 각각

8개사가 줄어들어 중소 출판사의 어려운 경영 환경을 시사함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교육서가 약 32.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이어서 문학(17.5%),

사회과학(11.9%), 인문(11.8%), 유아동(8.6%), 과학기술(7.3%), 실용(6.9%), 예술/대중문화(3.5%)의 순임. 전분야가 소폭 증가나 하락세를 보인데 비해 교육서만 2.3%p 증가하여 무려 전체 신간도서의 1/3을 차지함


2013년 말 기준 출판사 수는 4만 4148개이며, 지역별로는 서울 60.4%를 비롯해 수도권(서울・인천・

경기) 소재 출판사가 79.1%로 대다수 출판사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펴낸 <2014 출판산업 실태조사-2013년 기준>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에 신고된 출판사 4만 4873개 중 출판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사업체 6414개, 2013년 기준 출판 관련 매출 실적이 있는 사업체 3933개다.


이 중 서울이 2424개(61.6%), 경기 629개(16%), 인천 77개(2%)로 수도권이 79.6%(3130개). 경남은 62개(1.6%)였다.


일반 단행본 초판 평균 발행부수 1451부로 5년 전 2261부에 비해 64.2%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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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동규 토크드라마 역사적 오류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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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월) KBS-TV 인순이의 토크드라마 <그대가 꽃>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조선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동규(방배추) 선생을 방송했더군요.


'[19회]전설의 방패주먹, 배추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으로 방송된 프로그램을 오늘에야 다시보기로 봤습니다.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입대해 실종된 형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가슴 아팠습니다.


또 익히 <배추가 돌아왔다>는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부분에서는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가 있더군요. 이 또한 기록이므로 이미 방송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바로잡아야 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씁니다.



드라마에서 방동규 선생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김태홍의 피신을 도와준 혐의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사건이 1987년으로 나오는데요. 실제로는 1986년 9월쯤이었습니다. 김태홍은 보도지침사건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는데요. 그는 1986년 12월 13일 광주에서 체포됐죠.


방동규 선생은 광주까지 그를 데려다 준 후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경찰에 붙잡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보름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죠.




방송화면 캡처


그런데 드라마에선 그 때가 1987년이라고 나옵니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도 나오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사실도 나오는데, 그 사건도 1987년이었죠. 그 해 방동규 선생이 붙잡혀 갔다고 나오는 대목이 잘못된 사실이라는 겁니다.


방송에서는 "그 때 내게 도움을 청했던 후배이자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도 당국에 의해 수배 중이었다."라는 나레이션이 나오는데요. 이것도 잘못입니다. 시점도 틀렸을 뿐더러 사무국장이 아니라 의장의 신분이었습니다.


어쨌든 방동규 선생은 당시 고문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후유증을 겪었죠.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몸이 거의 으스러진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이 어느 정도였냐면, 혹독한 고문으로 쩍 하고 벌어져버린 항문이 도무지 닫히지 않았다. 항문이 풀렸다는 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얘기다. 이후 몇 개월 동안 아내는 내 곁에 붙은 채로 똥오줌을 받아내야 했다.


망가진 건 몸 만이 아니었다. 고문후유증으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한참 심했을 때는 바깥나들이도 못했다. 자폐증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겪고도 그는 이근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지만, 그런 그를 아주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의 그물망에 걸린 사람인 건 그나 나나 마찬가지일 테니." 


얼마 전 방동규 선생을 뵈었습니다. 5월 1일 그가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양산 개운중학교에서였습니다. 그는 학교 현관 옆에 있는 교사 휴게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방동규(가운데) 선생과 함께. 오른쪽은 여태전 상주중학교 교장. @김주완


방동규 선생. @김주완


방동규 선생. @김주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헬스클럽에 다니며 보디빌딩으로 몸도 단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디빌딩 관련 잡지도 사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전국대회 노년부 우승이 목표라고 합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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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버림받은 삼성테크윈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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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저녁 삼성테크윈 노동자들과 경남블로그공동체(경남블공) 회원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삼성테크윈은 삼성이 버리기로 한 회사다. (주)한화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테크윈 지회' 간부들이었다.


약 두 시간 동안 간담회를 해본 결과 그들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데 대해 크게 상처를 받은 듯 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새롭게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각성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삼성테크윈에는 또 다른 노동조합이 생겼다. '삼성테크윈노동조합'이라는 기업별 노조가 그것이다. 그 노조에는 회사의 차장-부장급 간부인 '그룹장'들이 가입을 종용해 현재 1800여 명의 조합원이 있다고 한다.


반면 이들이 만든 금속노조 지회에는 1300명 정도가 가입해 있다. 그래서 대표 교섭단체는 기업별 노조가 맡고 있다. 따라서 금속노조 지회는 교섭권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회사가 매각을 강행하여 (주)한화로 넘어가든, 혹시라도 매각이 무산되어 삼성에 그대로 남게 되든 현재의 금속노조 지회는 끝까지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삼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했다.


노조를 만들고 지켜가려는 과정에서 벌써 60여 명이 징계를 받았고, 그 중 1명은 해고통보를 받았다.


그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은 (주)한화로 매각된 후 구조조정 등의 명목으로 직장을 잃는 것이었다. (주)한화는 인수하더라도 '5년간 고용을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5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냐는 거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정년까지 고용 보장'을 받아내겠다는 게 당면 목표다. 그 교섭 상대가 삼성이 되든, 한화가 되든 그게 가장 큰 목표다.



그럼, 당장 교섭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협약을 맺을 수 있을까. 그들은 '기업별 노조가 현재 사측과 협상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그 노조의 한계와 실체가 드러나면 조합원들이 이탈하여 금속노조 지회 쪽으로 넘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여 과반수가 넘으면 대표 교섭단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재 기업별 노조가 벌이고 있는 '위로금 협상'에서 차라리 '위로금을 적게 받더라도 정년까지 고용 보장만은 반드시 따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언론은 '위로금이 마치 쟁점인양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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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보리밭에서, 경남엔 경관농업 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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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진행하는 '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은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습지를 비롯한 생태자연의 아름다움과 생태자연이 사람에게 끼치는 바람직한 영향을 몸으로 누리는 한편 지역사회에도 나름 알리는 일을 하자는 취지로 4년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5월 6일 떠난 올해 두 번째 생태역사기행은 전북 고창으로 향했습니다. 2003년 우리나라 제1호로 학원(鶴苑)관광농원이 일궈낸 경관농업이 고창군 공음면 선동리 일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면 청보리, 여름이면 해바라기, 가을이면 메밀을 심어 농사도 알차게 지으면서 그 꽃과 잎사귀가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까지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올해로 열두 번째인 청보리밭축제는 4월 18일 시작해 5월 10일 끝났습니다.

 

고창에는 또 선운사가 있습니다. 오래된 천연기념물 동백숲이 이 오래된 절간을 감싸고 있습니다. 게다가 건물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움'도 보통 미덕은 아니고요 선운천이 흘러내리는 둘레 풍경도 빼어나답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축대가 대표하는 소박함 또한 놓칠 수 없는 매력이라 하겠습니다.

 

선운사 대웅보전과 육층석탑. 석탑이 원래는 구층이었답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해 11시 20분 조금 못 미쳐 선운사 들머리에 닿았습니다. 개울을 끼고 오르는 진입로는 여름철 피어나는 꽃무릇과 가을철 물드는 단풍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8월에 잎이 지고 나서야 붉게 꽃이 피기 시작하는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만 한다 해서 상사화(相思花)라 한답니다. 여기 단풍나무는 가을을 맞으면 흐르는 냇물에 되비치면서 이름값을 한껏 드높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 없는 봄철에 갔어도 진입로는 좋았습니다. 미나리냉이 하얀 꽃, 애기똥풀 노란 꽃, 개불알풀 자주 꽃 등등이 곳곳에 피어 있어 고개 숙여 살쳐보지 않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새롭게 돋아나 푸른빛을 더해가는 단풍나무들도 잎사귀 싱싱함이 멋졌던 것이랍니다.

 

자연 속에 들앉은 선운사의 '자연스러움'은 대웅보전 맞은편 널찍한 만세루가 대표합니다. 하지만 대웅보전 오른편 관음전도 뒤지지는 않습니다.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세로로 세운 기둥은 물론 가로로 걸친 목재조차 인공을 더하지 않은 채 구불구불한 원래 몸매 그대로이거든요.

 

관음전.

 

게다가 불전이 아니라 여염 살림집처럼 들마루를 내어 임의롭게 아무나 엉덩이를 걸칠 수도 있게 해 놓았습니다. 그 마음씨가 넉넉하지 않습니까. 이름은 관음전이지만 안에 모신 주불이 지장보살(관음보살은 요즘 들어 탱화로 모셨음)인 점도 색다릅니다.

 

좌우로 넓고 앞뒤로 좁아 느낌이 한결 여유로운 대웅보전은 자연석 축대 위에 있습니다. 더없는 지혜를 뜻하는 비로자나불이 주불이고요, 좌우협시는 아픈 사람 고쳐주는 약사불과 죽은 이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아미타불이 맡았습니다.

 

163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40년이 채 안 된 시점에 조성된 불상임을 떠올리면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신 뜻이 좀더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엄청난 전란으로 죽거나 다친 일반 백성들을 위했던 것입니다.

 

일행은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지나 팔상전과 산신각까지 둘러보면서 그 자연스러움을 눈과 카메라에 담느라 바쁩니다. 몇몇은 기둥이나 가로로 쓰인 목재들을 손으로 쓰다듬어 봅니다.

 

대웅보전 옆에서 동백숲을 바라보는 일행들.

 

뒤편에 우거진 동백숲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 그 꽃그늘에 들어가 보는 호사는 이제는 누리지 못하는 옛날 일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송이송이 매달린 붉은 꽃잎은 멀리서 봐도 선연했습니다.

 

이어서 강당 건물인 만세루에 올라 차탁을 앞에 두고 앉으니 어디서 보살이 한 사람 나타나 차를 권합니다. 선운사 자생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만들었다는데요 향기가 독특하고 또 짙었습니다.

 

만세루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한 모금씩 머금고 심신이 흐뭇해져 있는데 같은 일행이 또 어디서 흰떡을 상자째 얻어와서는 나누기 시작합니다. 다들 웃음을 한 입씩 베어무는데 누가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따, 누가 보시를 오지게 한 모양이구먼!" 만세루 트여 있는 앞뒤로 시원한 바람이 소리없이 흐릅니다.

 

절간 들머리 빛고을식당에서 마주한 청국장 비빔밥은 아주 맛깔스러웠습니다. 배부르게 먹고는 30분가량 걸려 청보리밭 축제장으로 옮겨갔습니다.

 

보리를 심는 밭은 물을 담지 않는다는 점에서 벼를 기르는 논과 다르지요. 논은 물을 담아야 하기에 평평해야 하지만 밭은 그렇지 않아 제 멋대로 울퉁불퉁해도 그만이랍니다. 축제장으로 마련된 고창 청보리밭이 그랬습니다. 높은 데는 높고 낮은 데는 낮았습니다.

 

황토가 뒤덮은 언덕배기에서 그대로 자라나는 청보리였습니다. 높고 낮음이 있고 튀어나오고 들어가는 입체감이 있어서 밋밋하지 않고 다채로움이 있었습니다. 논은 드넓게 펼쳐지는 광활함이 매력이라면 밭은 이와 같은 입체감이 매력이겠습니다.

 

사람들은 청보리밭으로 흩어져 들어갔습니다. 사방이 온통 푸른 보리는 이제 막 이삭이 팼고요, 틈틈이 자리 잡은 유채에는 조금씩 지고 있는 꽃이 노랗게 매달려 있습니다.

 

두 갈래 탐방 루트를 따라 걷던 이들이 노란빛과 푸른색이 어우러지는 데를 골라 단체로 또는 혼자서 사진을 찍습니다. 셀카봉을 높이 쳐든 사람도 있고 예술 사진을 찍듯 여러 각도 맞춰가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축도 있습니다.

 

 

걸음은 다들 느긋하고 표정 또한 한껏 여유롭습니다. 보리밭 사잇길을 가르며 둘씩 셋씩 짝지어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이들도 있고 군데군데 마련된 긴의자에 앉아 양산을 활짝 펴 햇살을 가리고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대는 이들도 있습니다.

 

노란 양산을 배경으로 삼아 예복을 입은 채 결혼 사진을 찍는 남녀 한 쌍은 꽤 많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청보리밭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거닐고 뽕나무 감나무 따위를 지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10년 전 15년 전에 경관농업의 가치를 남먼저 알아보고 푸른색 여울지는 청보리밭을 가꾼 이 지역 사람들이 고마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몇몇은 다시 가게로 스며들었습니다.

 

동네에서 빚어낸다는 동동주가 파전·두부와 함께 나왔습니다. 동동주는 특별하지 않았고 파전은 여느 지역에서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두부는 손맛이 남달랐습니다. 지역에서 거둔 두부를 지역 사람들이 만들었다는데요, 간간한 맛이 조금 센 듯하면서도 살이 부드럽고 씹는 맛이 고소했던 것입니다.

 

 

지형에 알맞게 작물을 기르는 농업이 남부럽지 않은 경관을 창출했고 그 경관은 다시 주민들에게 이렇게 수익을 안기는 것입니다. 오후 3시 30분, 경남에도 이처럼 경관과 농업과 수익이 공존하는 그런 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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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묘역 울고 있는 어머니 "이 원수를 어이 갚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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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가 울고 계셨습니다. 5월 16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였습니다. 묘비명을 보니 '이정연'이란 이의 묘소였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말을 붙여봤습니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상업교육학과 2학년 재학 중 광주항쟁이 발발했고, 시민군으로 참여해 전남도청 사수투쟁을 하던 중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된 이정연(1960년생) 열사의 어머니 구선악(1941년생) 여사였습니다.


이정연 열사는 장남이었습니다. 계엄군의 전남도청을 압박해오던 1980년 5월 25일 저녁 집에서 나가 27일 도청 현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숨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정연 열사의 어머니. @김주완


그의 묘비 뒤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헛됨은 없어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 괴로움 당했던 것, 아무 것도 헛됨은 없어라. -이정연의 일기 중에서.


이정연 열사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선두에서 투쟁하시다가 5월 27일 도청 사수를 위한 최후의 결전에서 장렬히 산화하셨다."


제가 마침 구선악 여사를 인터뷰하고 있던 중 지나가던 분이 찍어 보내준 사진입니다.


이런 열사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저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언젠가 제가 펑펑 울며 봤던 마당극 <금희의 오월> 실제 주인공이 이정연 열사였습니다.


이정연 열사 어머니를 영상으로 만나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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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가두방송 주인공 차명숙 만나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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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6일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추모관에서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정찬용)가 주최한 '김용근 민족교육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이 수상자였는데요. 이 자리에서 유난히 밝고 활달해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을 보았습니다.


시상식을 마무리할 때쯤 채현국 선생이 참석자들을 소개했는데요, 그때 이 아주머니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때 시민들을 상대로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들 중 한 명인 차명숙(1960년생)이란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명숙 씨는 항쟁 이후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른 후, 광주에선 살 수 없어 서울로 갔다가 카톨릭센터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지금은 남편의 고향인 안동에서 홍어 전문식당 '행복한 집'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2007년 시민사회신문이 정리한 차명숙 씨의 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채현국(가운데)선생과 팔짱을 낀 차명숙 씨. @김주완


차명숙 씨는 = 5·18당시 거리방송을 통해 항쟁의 불씨를 일으킨 주역 중 한 사람인 차명숙씨.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광주항쟁 당시 그녀의 나이 열아홉, 광주에 있던 이종사촌 오빠의 사진관 일을 도우며 양재학원에 다녔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성당을 다니면서 어렴풋이 군부의 그늘아래 있는 사회상을 깨달았다고 한다.


5월 19일 차씨는 자신이 다니던 국제양제학원에 갔으나 문이 잠겨 있어 시내로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된다. 19일 도청 앞 공수부대원들과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옥주(58) 씨와 몇몇 남학생들과 시민군들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이 시작되면서 광주시민들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야 겠다고 마음 먹고, 그들은 마이크를 잡았다. “계림전파사를 가서 ‘아저씨 앰프 좀 빌려달라’고, 방송을 안 하면 지금 광주 시민이 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빌려주시면 내일 이 시간쯤에 갖다 드리겠다고.” (「5·18 항쟁 증언자료집」전남대 5.18연구소, ‘차명숙의 이야기’에서)


차씨는 22일 거리방송을 하다가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간첩 20만명을 동원해 2백명을 사살하게 한 장본인’으로 몰려 9월 19일 계엄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의 죄목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0월 27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시민사회신문 기사 원문 보기


차명숙 씨가 석은 김용근 선생의 부인(휠체어에 앉은 분)과 아들을 배웅하고 있다. @김주완


차명숙이 주남마을을 찾아가는 까닭


차명숙 씨는 이날 시상식이 끝난 후 채현국 선생을 모시고 1980년 군인들의 무차별 총기 난사로 17명의 무고한 주민이 학살된 주남마을을 찾아가기로 했다더군요.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주남마을에는 왜 가시나요?


"주남에서 군인들이 열다섯 명을 죽이고, 부상자 세 명 중 두 명을 또 사살하고, 한 명은 살았는데, 이후로 군은 군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거길 봉쇄하고 감시대상이 되었죠.(복받치는 듯 갑자기 목이 메이며 '아이고' 하며 울먹였다.)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방에 있던 사람도 총을 맞았더라고. 그래서 저는 그 마을을 생각하면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한 10년 넘게 감시대상이 된 거죠.


그건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요. 그 분들이 지금 70이 넘었고, 80, 90이 다 됐죠. 그때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지금 오십 세 살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방안에서 총을 맞았어요. 그런데 별로 광주에서 관심이 없죠.작년에 저희가 대구 인혁당 피해자들과 가봤어요. 인혁당 사형수 송상진 선생 아들 송철환 씨와 갔는데, 오십 세 살 먹은 여성분이 혼자 그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거에요.그래서 올해도 저희가 가보기로 약속을 했어요."


주남마을 학살사건이란 뭘까요?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위키백과에서 찾아봤습니다.


+[위키백과]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또는 주남마을 학살 사건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 외곽에서 광주 시외로 나가던 버스에 탑승한 시민 17명이 공수부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의 전남도청 집단 발포 후, 전남도청에 배치된 7공수부대, 11공수부대는 21일 16:00에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지원동 주남마을,녹동마을에 주둔하며 지나가는 차량의 차량 통행을 봉쇄하였다.


주남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5월 23일 오전 주남마을을 지키던 11공수부대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지나가던 버스에 발포를 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 (11공수 보안 부대는 15명을 사살했다고 보고) 이 버스는 광주와 화순을 오가던 버스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손옥례, 고영자, 김춘례, 박현숙 등 10대 여성 4명도 포함되었는데, 당시 손옥례의 시신에서는 대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좌유방자창이, 박현숙의 시신에서도 자창이 발견되었다. 


23일 오후 11공수부대 62대대 5지역대 소속 병사 몇 명이 부상자 3명 중 남자 2명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국방부 과거사위의 관련자 면담에 따르면, 본부의 모 소령이 부상자를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지대 모 중사 등 3명이 부상자를 처리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리어카를 몰고 간 병사는 누군가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지원동에서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이외에도 적십자 활동을 하고 있던 차량에 대한 발포한 사건, 트럭 운전사를 살해한 후 너릿재 터널에 트럭을 밀어 넣고 소각한 사건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담양으로 나가는 광주교도소, 장성으로 나가는 광주 톨게이트, 나주로 나가는 송정리 공군 부대의 시외곽을 봉쇄하였고, 시민들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였으며, 여기서 평소 시외를 드나들던 시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시상식 참석자들과 식사 후 기념촬영. @김주완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채현국 선생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영주에서 1년에 서너 번씩 좋은 분들이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서 채현국 선생님이 계속 저를 데려오라고 하셨나봐요. 그렇게 알게 됐죠. 좋으시죠. 저 연세에 젊은 아이들을 배려한다든가, 저런 게 쉽지 않죠."


-80년 그날 이후 35년이 지났지만, 주남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차 선생님도 그 트라우마가 만만치 않을텐데요.


"그래서 겉으론 이렇게 항상 웃어요. 거기에 빨려들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면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안 들어가려 하죠.


우리는 개인적으로 감시를 당했지만, 주남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마을 모두가 고립되고 감시를 당했는데….


보수적인 곳으로 소문난 안동에서도 이명박 시절에 (5.18추모제를) 시작했어요. 젊은 아이들이 잘 해요. 걔네들이 누구냐면요. 당시 5월에 전국에서 열두 명의 열사들이 민주화를 부르짖다가 죽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안동대에서 분신을 했죠. 그 때 스무 명이 안동대에서 잡혀들어갔는데, 경찰에서 스스로 분신이 아닌 걸로 조작하려 했는데, 이 스무 명이 너무 순진한 거야. 결국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분신으로 판명이 났죠.


그 때 그 친구들이 안동 상주 영주에서 이걸(5.18추모제) 하고 있는 거에요. 너무 잘해요. 작년이었나? 버스 세 대가 (광주에) 왔어요. 그렇게 안동이 안 하던 일을 하게 되었어요."


-예전에 가두방송을 했던 여성분들이 몇 분 더 계시잖아요. 그 분들과는 교류를 하시나요?


"작년에 만났어요. 34년만에. 기념재단에서."


-왜 그동안에는 연락이 안 됐나요?


"되는 사람은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안 되고. 서로 연락처는 알고 있는데 서로 만나기가 싫죠. 왜냐면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으니까."


김용근 민족교육상 시상식장에 앉아 있는 차명숙 씨. @김주완


-80년 당시에 양재학원을 다니셨다고요?


"예. 지금은 안동에서 '행복한 집'이라고 홍어 팔고 있습니다."


-다니셨던 양재학원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계시네요.


"에이. 인생은 항상 꼬이게 되어 있고, 가는대로 가면 돼요."


이처럼 자신도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자신보다 더 힘든 분들을 챙기는 차명숙 씨였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주남마을 가는 길에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김종철) 광주순례단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못 갔지만 저도 언제 한 번 꼭 주남마을에 가보려 합니다. 그리고 안동 갈 일 있으면 '행복한 집'도 꼭 찾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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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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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추신 : 요즘 조현오 전 청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군요. 그런데 뭔가 석연찮네요. 이거 한 번 읽어보시죠.

홍준표와 조현오 두고, 휘어진 검찰의 '대나무'

[여의도본색] 너무 다른 검찰의 '이중잣대'



구겨진 제복 8화. 조현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 어떻게?


서울과 경기는 스케일이 다르다. 연쇄살인이나 토막살인 사건 같은 강력 사건이 아니라면 경기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디어 관심을 끌기 어렵다. 반면, 서울에서는 작은 사건과 집회도 어떻게 엮이느냐에 따라 정치적 이슈로 발전하기도 한다.


조현오는 2010년 1월 8일 서울지방청장으로 부임한다. 조현오는 바로 역대 서울청장 리더십 분석·평가한 내용을 접한다. 직원 여론과 불만을 수렴해 정책을 추진한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조현오가 밝힌 소감은 이렇다.


“다 좋은데… 이렇게 가자니 시간이 어디 있냐?”


보통 참모를 비롯해 지휘관 임기는 1년이다. 외사관리관, 감사관, 경비국장, 부산청장, 경기지방청장 등 조현오가 거친 곳에서는 어김없이 직원들 곡소리가 났다.


@삽화 공갈만


처음 3개월 동안 새로운 틀을 짜고 나머지 기간 강하게 추진해 그 틀을 정착하는 게 조현오 방식이었다. 조현오가 조직에 심고자 한 틀은 당연히 ‘성과주의’였다


조현오는 인사 과정에서 주관적인 지휘관 평가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통상 인사는 심사위원회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서울청장으로 취임한 조현오는 바로 승진하고 싶은 직원을 강당에 모이도록 했다. 경정·경감 승진 대상자 225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7시간 남짓 면접이 이어졌다.


“자기가 승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봐라.”


조현오는 그 자리에서 담당 과장에게 면접한 직원마다 성과를 확인했다. 몇몇 직원은 승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약을 받기도 했다. 성과를 봤을 때 승진이 어려운 직원에게는 그 자리에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면접에서 탈락이 확정된 직원은 ‘빽’을 쓸 기회조차 사라졌다.


당시 직원들이 가장 힘들었던 게 이 같은 인사 방식이었다. 조현오는 2~3개월에 한 번씩 성과 우수자를 내부에 공개해 승진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경쟁에 내몰린 직원들은 안팎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2014년 기준 부산은 경찰서가 15개, 경기도는 41개, 서울은 31개가 있다. 지역이 넓으면 지방청장이 일일이 챙길 수 없으므로 각 경찰서 서장이 치안을 책임져야 한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경찰서 단위로 평가를 진행했다. 성과가 좋은 경찰서는 혜택을 받았고 성적이 나쁜 경찰서는 집중감찰을 받았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을 맡은 시기에는 이 같은 평가 시스템이 무르익는 단계였다. 조현오는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기 전에 개념을 구체화하고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서장들과 회의를 했다.


“방배경찰서는 치안 수요가 적은 곳인데, 우리는 성과를 많이 낼 수 없어요.”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는 경호와 행사가 빈번해 실적을 많이 올릴 수 없습니다.”


조현오는 불평·불만을 끝장토론, 공청회, 간담회로  돌파하고자 했다. 통상 서울지방청 직원은 2만 3000여 명, 경기지방청 직원은 2만여 명이다. 이 정도 규모면 아무리 청장이라도 직원 공감 없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 정도 규모면 서장이 직원을 마음먹은 대로 끌고 갈 수 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집중감찰 대상이 된다. 서장부터 일선 경찰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북경찰서장인 채수창도 이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조현오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채수창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실적주의에서 살아남으려고 제 직원이 검거 실적을 올리도록 굉장히 독려하고 채찍질을 했습니다.”


인사에 대한 불만과 성과주의로 말미암은 피로는 경찰 조직에 꾸준히 누적됐다. 2010년 6월 23일 서울 양천경찰서 소속 경찰관 4명이 구속된다. 피의자에게 고문·가혹행위를 했다는 혐의였다. 이 사건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는 2009년 8월에 시작된다. 조현오 인사청문회 위원인 정수성은 증인으로 참석한 채수창에게 이 점을 확인한다.


“증인은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에 조 청장 책임도 있다며 동반 사퇴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양천서 피의자 고문은 지난해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생긴 일이고 조현오 내정자는 올해 1월 서울청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양천서 고문 사건과 조현오 실적주의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양천경찰서 고문 의혹 사건은 결과적으로 조현오식 성과주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된다.


역풍을 맞게 된 조현오에게 악재가 이어졌다. 강남 룸살롱 업주 유착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출한 여학생 A양을 서초경찰서 실종팀이 성매매 업소에서 찾아내면서 시작된다. 가수 지망생인 A양은 미성년자였다. 업소 사장 이름은 이경백이었다. 웨이터 출신인 이경백은 2000년 북창동에서 룸살롱을 개업하고 강남 일대에서 유흥업소를 기업형으로 운영했다. ‘룸살롱 업계의 스티브 잡스’, ‘룸살롱의 황제’ 등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무엇보다 그간 경찰 단속반에 뇌물을 잘 바쳤기 때문이다. 


경찰 단속을 비롯한 유흥업계 정보는 이경백을 거쳤다. 2006년 한화 회장 김승연이 폭행을 저지른 것을 경찰에 흘린 것도 이경백이었다. 경찰은 이경백과 단단히 엉켰고 조직은 점차 곪아 들어갔다. 이경백을 수사한다는 것은 경찰 조직의 종기를 도려내는 일이었다. 그 전에 경찰은 이미 이경백에게 농락당한 적도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혐의를 포착해 이경백을 수사하려 했을 때 그는 오히려 수사관이 접대 받은 내용을 확보해 수사팀을 엎었다.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원래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은 생활안전과 소관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형사과에 이 사건을 맡긴다. 당시 형사과장은 황운하 총경이었다. 


통화기록 분석부터 시작했다. 이경백이 지난 1년 동안 휴대 전화 두 대로 통화한 기록은 몇 만 건이었다. 등록된 사람만 1500명이 넘었다.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과 적잖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검찰은 경찰이 긴급체포한 이경백을 풀어줬는데, 수사를 이끈 황운하는 언론 브리핑에서 검사 실명을 거론하며 불만을 드러냈다.


@삽화 공갈만


이경백도 만만찮았다. 구속되면 그동안 바친 뇌물 내용을 모두 검찰에 불겠다며 맞섰다. 조현오는 오히려 이경백이 검찰에 뇌물 관련 내용을 불기를 기대했다. 검찰 수사이긴 하지만 경찰 비리를 도려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이경백과 통화 기록이 있는 경찰관 63명이 적발됐다. 조현오는 이미 취임 할 때부터 업주관계자와 공무 외에 전화 한통, 물 한잔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을 소명하지 못한 경찰은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39명이 징계를 받았고 이 가운데 6명은 파면됐다.


“조현오가 범서방파 행동대장 출신과 의형제라더라.”

“조현오가 유흥업소에 10억 원을 투자해 월 2500만 원씩 배당금을 받는다.”


그즈음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조현오가 조폭과 의형제이며, 조현오 서울청장 비서실장도 연루됐다는 식으로 소문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인터넷에서도 조현오가 강남 유흥가 조폭과 수십 차례 통화했다는 글이 돌았다. 민정수석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조현오는 그를 옥죄는 의혹에 정면 대응하는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


@삽화 공갈만


“비서실장을 감찰해서 비위 사실이 있으면 엄하게 처벌할 것이고, 내 휴대전화 통화내역까지 모두 공개하겠다.”


조현오는 자신도 수사 대상에 넣었다. 서울청 수사부장인 박상용에게 자기 계좌열람동의서도 전달했다.


형사과장 황운하는 결국 이경백을 탈세와 성매매 혐의로 6월에 구속한다. 조현오는 이경백이 구속되고 두 달 후인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된다. 하지만, 이경백도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으며 유유히 빠져나온다. 


(다음 9화 –경검 수사권 조정 편은 29일 업로드됩니다.)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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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선생이 받은 김용근 민족교육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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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81) 효암학원 이사장이 김용근 민족교육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5월 16일 오전 11시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에서 시상식이 있었는데요. 저도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노무현 정부 인사보좌관-인사수석이었던 정찬용 씨가 이 상의 주체인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더군요. 정찬용 수석은 노무현 정부 첫 인사보좌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제가 담양군 자택에 찾아가 첫 인터뷰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 후 정말 오랫만에 만나뵈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부사장을 하셨던 언론인 임재경 선생도 여기서 다시 뵈었고요. 전교조 위원장을 하셨던 정해숙 선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용화 상임대표도 만났습니다. 또 5.18광주항쟁 당시 가두방송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차명숙 씨도 여기서 만났습니다. 은우근 교수님도 오랫만에 뵈었고요.


오른쪽에 정찬용 회장과 임재경 선생 등이 앉아 있습니다. @김주완


기념사업회가 채현국 선생을 21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는 아래에 나와 있습니다.


김용근 민족교육상

제21호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채현국 선생은 엄혹한 독재하에서 민주인사들을 남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효암학원을 설립하여 학생들이 흥미와 적성을 찾아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뭐든 하고싶게 만드는 선생님의 역할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으로 운영하여 우리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채현국 선생의 실천적 삶은 스승이신 석은 김용근 선생의 교육철학뿐 아니라 5.18민중항쟁 때 제자들을 피신시키다 감옥에 갇힌 김용근 선생의 실천적 삶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석은 김용근 선생의 정신을 살아가려는 제자들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드립니다.


2015년 5월 16일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정찬용



시상식이 시작되기 전 객석에서 정해숙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채현국 이사장. @김주완


그러면 석은 김용근 선생은 어떤 분일까요? 그날 행사장에서 낭독된 김용근 선생의 연보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석은(石隱) 김용근(金容根) 선생 연보


*1917년 10월 28일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현산리 죽현에서 부친 광산 김씨 문정공파 16대손 준수 님과 모친 윤소신 님 사이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선생의 유년시절 가족이 목포로 이사를 하여 영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양동교회 박현세 목사님의 추천을 얻어 1932년 평양숭실학교에 종교 유학하다.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동기 동창)

*숭실학교 기독청년회 종교부장으로 활약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와 관련되어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다.


김용근 선생 묘소. 광주 5.18민주묘지에 있습니다. @김주완


*숭실학교 졸업 후 1937년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소재 개량학당에서 야학을 지도하던 중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목포지방법원에서 6월의 실형을 선고받다.

*출옥 후 1939년 2월 2일 강진군 도암면 학장교회에서 조주일 여사와 결혼, 목포시 대성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목포 유달국민학교에서 첫 교직에 몸담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 사학과에 입학, 같은 해 장남 창중을 얻다.

*1942년 장남 창중의 돌 직후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다.

*1945년 1월 전주교도소에서 출옥하여 강진군 작천면 본가에서 요양하던 중 일제에 의해 징용영장을 발부받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도피하던 중 만주 신경에서 8.15해방을 맞다.


석은 김용근 선생. @김주완


*1945년 10월 강진 본가에 귀향,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다.

*1946년 연대 사학과에 입학 후, 재학 중 관현악단의 클라리넷, 호른 주자와 농구선수로 활약하다.

*1950년 연대 졸업 후 경복고 교사 취업과 대학원 진학이 이루어졌으나 한국전에 터져 귀향하다.

*1951년 초 경찰에 쫓기던 군·면 인민위원들을 자택에서 보호했다는 혐의로 강진경찰서에 연행돼, 장흥에서 약식재판을 받은 후 석방되다.

*1951년 육군 제20사단에 입대하다.(당시 사단장은 연희전문학교 동기동창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박병원 씨)


*1954년~196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로 국사과목을 강의하면서 농구부 육성. 시인 신석정 님과 같은 집에 살면서 두터운 교분과 사상적 교류를 갖다.

*1965~1972년 3월 광주고, 광주일고에 재직, 세계사를 강의하는 한편 농구부를 육성하다. 이때 광주일고 학생독서회 '향토반'의 지도교사를 맡다.

*1972년 교단을 잠시 떠나 서울에서 사업(분필공장)에 힘썼으나 대홍수로 인하여 실패하다.

*1973~1976년 전남고에 봉직, 유신체제하 긴급조치 상황에서 학생시위에 책임지고 사임하다.


김용근 선생 묘소에 참배하는 채현국 이사장. @김주완


*1977년 회갑을 맡아 제자들의 주선으로 광주YMCA 백제실에서 기념 강의.

*1978년 귀향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향토문화연구, 작천노인대학 창설, 지역교회 및 민방위 강연활동 등을 계속하다.


*1980년 6월 광주민중항쟁 관련으로 옥고를 치르다. 당시 선생은 지명수배 중인 제자 윤한봉, 정용화 등을 자택에 보호하여 범인 은닉죄를 적용받아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다.

*1983년 10월 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작천교회 장로로 임직하다.


*1985년 5월 22일 새벽 5시 30분 숙환으로 소천하다. 향년 69세.

*1987년 9월 18일 독립유공자로 추서되다.

*2002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추서되다.


시상식에 참석하신 분들. 왼쪽 휠체어 타고 계신 분이 김용근 선생 부인입니다. @김주완


석은 김용근 선생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그 제자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기념사업회 연보도 옮겨 적었습니다.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 연보


김용근 선생의 제자들은 선생께서 타계(1985년 5월 22일)하신 뒤 매년 묘소 참배(강진군 작전면 현산리)를 진행해오다


*1990년 5월 석은 김용근 선생의 타계 5주년에 선생을 기념하는 문집 발간을 결의함(위원장 황지우 시인)

*1991년 5월 석은 김용근 선생 문집 발간 후 봉정함.


*1995년 5월 김용근 민족교육상 제정.

의의 : 선생의 민족 자주독립과 민족통일, 민주화를 위한 교육, 계몽활동을 기리는 기념사업의 지속

재정 : 제자들의 성금과 유족의 지원

집행 : 교육, 노동, 농민 등 각 분야를 망라한 단체 또는 활동가(시상금 300만 원)

 -1995년 이후 20회 시상

기념사업회장 : 1대 이양현, 2대 윤한봉, 3대 김희택, 4대 현 정찬용


상을 받으러 단상에 오른 채현국 선생이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김주완


상패 전달 @김주완


꽃다발 전달 @김주완

채현국 선생이 수상자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김주완


이렇게 하여 제정된 민족교육상은 올해까지 모두 21회 수상자를 내었습니다. 그동안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역대 수상자


1995년 1회 윤영규 전교조 위원장

1996년 2회 풀무학교

1997년 3회 양동지 선생(교사)

1998년 4회 김연순 선생(교사)

1999년 5회 극단 토박이

2000년 6회 LA민족학교

2001년 7회 김현준 선생

2002년 8회 베를린 세종학교

2003년 9회 실상사 작은 학교

2004년 10회 한빛고등학교 교사회

2005년 11회 장석웅 전교조 위원장

2006년 12회 부천실업고등학교

2007년 13회 윤한탁 선생(교사)

2008년 14회 김명준(영화감독)

2009년 15회 양노린 수녀(성 요셉여고)

2010년 16회 이승요 교장(늦봄학교)

2011년 17회 허선행 교장(타쉬켄트 세종학교)

2012년 18회 김광수 상임이사(은행골 청소년공부방)

2013년 19회 김희용 목사(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2014년 20회 이계삼 국장(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사무국장)

2014년 21회 채현국 이사장(양산 효암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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