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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 실린 채현국 선생 책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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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5-6월호에 《풍운아 채현국》과 《쓴맛이 사는 맛》에 대한 서평이 실렸습니다. 문학평론가 고영직 님이 쓰셨네요.


서평은 "우리사회에 어른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꼰대'와 '꽃대'로 어른을 나눕니다.


"소위 꼰대문화의 본질은 개인의 진실을 강변하고 강요하려는 마음의 태도와 습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고한 마음의 습관에서 후속 세대와의 대화와 소통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면서 "채현국 선생의 삶과 철학이야말로 '꽃대'라는 말에 값하는 우리시대의 어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녹색평론 142호


그는 또한 "《풍운아 채현국》과 《쓴맛이 사는 맛》에서 선생의 파격적이고 감동적인 생생한 육성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파격이란 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궤도를 이탈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점에 관한 한, 채현국 선생을 따라잡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만 같다"고 합니다.



그의 서평 중 몇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풍운아 채현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시시한 삶'을 적극 권장하고 예찬하는 대목이었다."


"실제 채현국 선생이 인생의 롤모델로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베트남의 호찌민을 꼽는가 하면, 우리나라 인물로는 임락경 목사, 권정생 작가, 박완서 작가, 김수영 시인 같은 분을 꼽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들은 "덜 유명해야 한다, 유명하면 자유롭게 살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멋있는 삶을 산 '반골'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시 말해 채현국 선생은 반골의 삶을 예찬하고 스스로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한 것이리라. 누군가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책을 보며 선생의 말투에서, 지식인 특유의 이른바 '먹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에 또다시 놀랐다. 초등학생조차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젊은 후배들과 대화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유혹하고 사로잡을 줄 아는 매혹의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선생은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거리에서 '철학하는 삶' 자체를 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채현국 선생에게서 저잣거리에 숨은 은자의 풍모가 물씬 느껴진다."



"채현국 선생이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고 한 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만의 아상을 고집하는 한, 젊은 세대를 비롯한 타자와의 만남과 차이의 철학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김주완과 정운현이 정리한 책들은 채현국 선생을 통해 '다시,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고 있는 일종의 '노년학 개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선생의 육성을 직접 더 많이 듣고자 한다면 김주완의 책을 권하고 싶고, 일종의 평전식 구성을 선호하는 독자라면 정운현의 책을 권하고 싶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말 좋은 책 녹색평론》에 이런 서평이 실리니 참으로 기분이 좋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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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파워]여러분의 단골서점을 추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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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6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였습니다.


"오빠가 있었어요. 어쩌다 집에 가면 '왔나', 가면 '가나' 이게 다였어요. 그 오빠가 술을 한 잔 먹고는 도끼를 들고 왔더라고요. 제가 막내다보니까 고등학교를 제대로 못 시킨 거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오빠로서 막내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에 측은함도 있었고, 오빠가 굉장히 미안한 마음으로 와가지고 '누가 니를 이렇게 하대? 당장 죽이겠다.' 이러는 거를 사람들이 말려가지고."


1988년 5월 마산수출자유지역 한국TC전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가 사측 관리직 기사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던 이연실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저는 막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엔 대학 캠퍼스도 연일 최루탄 가스냄새로 매캐했었더랬죠. 제가 교문 앞에서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 캠퍼스 안으로 쫓겨와 눈물 콧물을 흘리도 있던 바로 그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플파워 6월호 표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끼리 느끼는 연민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저는 이게 '사실의 힘'이자 '기록의 힘'이라고 봅니다. 기록자인 정윤 씨도 "기록되지 않는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썼지만, 사실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저에게 어떤 가치관이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그동안 읽은 역사기록물에서 말미암은 바가 가장 클테니까요.


한동안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던 수출자유지역 여성노동자의 삶을 기록해야 할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가 이 작업을 시작했고, 월간 <피플파워>에 이를 싣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저희는 기꺼이 지면을 내드리기로 했습니다. 창원은 산업도시, 기업도시이기도 하지만 사람을 중심에 놓고 보면 노동자의 도시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겁니다. 특히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이 있던 마산은 '여성노동자의 도시'였다고 해도 지나치거나 모자라진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언니에게 듣는다! 여성노동자들의 살아 있는 역사'는 지금 우리가 꼭 남겨야 할 역사기록입니다.


최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가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아예 이 곡을 '국가'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가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품과 삶의 괴리는 오랜 논쟁거리가 되어왔습니다. 이완용이 글씨를 잘 썼다지만 그 글씨에 감동받는 이가 없고, 이은상의 시조가 훌륭하다지만 기회주의적 삶으로 인해 그의 문학관이 고향에서 거부당한 것도 그때문이죠.


이번호 '역사에서 만난 사람-정판교'편은 글과 삶이 일치했던 선인의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고굉무의 음악이야기'에서는 서정적인 선율과 아름다운 목소리로만 기억되고 있는 존 바에즈의 'Donna Donna'라는 곡이 사실은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을 노래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억압된 민중의 저항을 선동한다'는 등 이유로 박정희 정권 시절 금지곡으로 묶였다지요.


음악평론가 강헌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폭력 집회를 연상하게 하므로 공식적인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의 한 구절을 제시합니다.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 행진하자 행진하자 / 적들의 더러운 피로 / 우리의 밭을 적실 때까지" ('La Marseillaise')


이번호에도 읽을 거리가 많습니다만 저는 특히 자연치유력을 믿는다는 한의사 김연민 원장과 통영에서 횟집을 운영하며 아너소사이어티에 합류한 것도 모자라 30억 원 규모의 장학재단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박택열 대표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한 '시간의 흔적'을 잘 보존해야 도시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김태훈 소장의 글도 도시공동체 구축을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볼만 합니다.


모바일로 정보를 얻는 사람이 늘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책 소비자의 60~70%가 수도권에 몰려있고, 그나마 30~40%의 비수도권 소비자들도 지역서점보다는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비율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힘겹게 지역서점을 지키고 있는 분들을 찾아볼까 합니다. 그 첫번째로 마산 합성동 대신서점을 서정인 기자가 찾아갔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이강래 대표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지만 책을 사랑하고 책에 빠져 힘든 줄도 모르고 분투하고 있는 분이더군요.


이번 기획을 준비하면서 지역서점 대표님들 중 인터뷰를 꺼리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애용하는 단골서점을 소개하고 싶다면 언제든 연락주십시오. (010-3572-1732 편집 책임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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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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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추신 : 요즘 조현오 전 청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군요. 그런데 뭔가 석연찮네요. 이거 한 번 읽어보시죠.

홍준표와 조현오 두고, 휘어진 검찰의 '대나무'

[여의도본색] 너무 다른 검찰의 '이중잣대'



구겨진 제복 9화. 조현오, 검-경 수사권 조정 어떻게?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인사정의 실현, 전·의경 가혹행위 근절, 경찰과 업주 통화 금지, 성과주의 등 개혁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전국으로 확대했다. 조직 정비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경찰청장 업무가 안으로 향하는 조직 정비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는 조직 처지를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경찰은 밖으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이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받은 것은 1991년 경찰청으로 승격되면서다. 이때부터 경찰은 치안에 대해 자율권을 보장받는다. 경찰 조직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사권이다. 조현오는 수사권에 대해 어떤 견해를 밝혔고 대응했을까. 그보다 먼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기 전까지 경찰과 검찰 관계는 어땠을까.

 

젊고 자부심 강한 경찰대 출신 수사과장이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피의자는 검찰 출신이었고 피해자는 일반 서민이었다. 경찰은 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과장이 거부하자 부장검사가 불렀다. 연륜이 풍부한 형사팀장이 걱정이 돼 수사과장과 부장검사실로 동행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196조(사법경찰관리) 제1항에는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었다. 부장검사는 수사과장에게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며 ‘잘못’이라는 문구를 넣도록 지시했다. 부장검사와 수사과장 사이에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사팀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경찰에 대한 검찰 특권 중에는 일반적인 수사 지휘권과 더불어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하거나 구속하는 유치장에 대한 감찰권이 있다. 만약 경찰이 검찰 눈 밖에 나면 유치장 감찰을 핑계로 경찰서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수도 있다. 형사팀장이 나섰다.


“부장님. 우리 과장님은 수사가 처음입니다. 비록 과장이지만 수사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반성문을 쓰겠습니다.”

“그럼 과장 대신 팀장이 쓸 겁니까?”

“네. 쓰겠습니다. 과장님 나가게 해주십시오.”

 

수사과장이 나가고 부장검사와 단둘이 남게 된 팀장은 살며시 물었다.

 

“부장님. 도대체 이게 왜 필요합니까?”

“주임검사가 반성문을 못 받아왔으니 내가 받아놓아야 다른 검사에게 ‘이런 것도 못 받는 너희들이 무슨 검사냐’라고 질타할 때 쓸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드릴게요. 검사들에게는 사경(사법경찰관) 불러다가 혼냈더니 잘못했다고 말하더라고 교육하면 되잖아요.”

 

조현오는 1990년 경찰서 과장으로 입문했다. 하루는 검사와 면담약속을 했다. 그렇게 검찰청으로 찾아간 조현오를 검사는 방 밖에서 한 시간 기다리게 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더니 검사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반면 유치장 감찰을 온 검사는 수사과장 자리에 앉았다. 수사과장 중에는 당연한 듯 자리를 내주는 이도 있었다. 한 경찰은 ‘형사소송법 망령’이라고 한탄했다.



경찰과 검찰은 서로 다른 기관이지만 검사는 경찰에게 협의 공문 없이 지시했다. 검사가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보고 싶으면 경찰서로 오면 된다. 하지만, 검찰은 굳이 경찰에게 피의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이를 ‘피의자 신병인치’라고 한다. 경찰은 검찰이 지원을 요구할 때마다 업무를 제쳐두고 가야했다. 검찰에 파견된 경찰은 검사가 미행이나 단속을 지시하면 수행하는 일을 맡았다.

 

형사과장이던 조현오는 검찰과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일에 신경 쓰자는 쪽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으로 따지면 경찰 조직도 검찰과 다를 바 없었다. 경찰서 생활안전과장도 일선 파출소에 가면 파출소장 자리에 앉는 일이 허다했다.

 

경기지방경찰청 시절 조현오에게 참모 역할을 하는 형사과장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락실 업주와 물 한 잔도 마시지 말라는 등 강경 조치를 펴는 이유가 뭡니까?”

“경찰 부패를 도려내면 국민이 경찰을 지지할 것이고 그런 여론을 바탕으로 수사권을 가져올 거야.”

 

형사과장 생각은 달랐다. 경찰조직에 힘을 실을 방법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직 부패를 도려내는 것보다 첩보가 들어오는 큰 사건에 바로 달려들어 국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사권 문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99년 DJ 정부 때다. 그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며 행동으로 옮긴 이는 황운하였다. 서울 성동경찰서 형사과장이던 황운하는 검찰에 파견된 경찰들에게 복귀지시를 내렸다. 당시 경찰과 검찰 관계를 고려하면 하극상이나 다름없는 반란이었다. 그 후 집중 논의 끝에 경찰청장 김광식은 검찰에 파견된 전국 경찰들에게 복귀 지시를 내린다.

그 후에 검찰은 정보국장인 박희원을 수사했다. 이후 경찰청장을 지낸 이무영, 이팔호, 최기문은 수사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 다음 경찰청장이 외교관 시절부터 조어능력이 탁월했던 허준영이다. 허준영은 경찰청에 수사권 문제만 전담하는 ‘수사구조개혁팀’을 만든다. 허준영이 하는 말은 종종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지구상에 없는 게 두 가지, 다케시마와 대한민국 경찰 수사권.”

“지금 경찰과 검찰의 관계를 ‘권검책경(權檢責警), 권한은 검찰에 있고 책임은 경찰이 진다인데, 이제는 권경책경(權警責警), 즉 수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경찰이 질 테니까 그에 따른 권한도 경찰에 줘야 한다.”

 

2005년 9월 8일 허준영은 한 손님이 청장실로 오는데 외사관리관 조현오에게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청장실로 들어온 손님은 세계적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그의 아내였다. 허준영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 경찰 최대 현안이 수사권 조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찰에게 수사권이 없다는 말에 앨빈 토플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답했다.


 

당시 수사권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경찰청 차장인 최광식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광식은 검찰 수사로 불명예 퇴진한다. 허준영도 퇴임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으나 때마침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를 받으면서 공천을 받지 못한다. 이후 경찰청장인 이택순, 어청수, 강희락은 수사권에 대해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2010년 8월 30일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 목표는 형사소송법 196조 개정이었다.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도움이 필요했다. 이 같은 작업은 경찰 모든 조직 부분에서 노력해야 했지만, 특히 정보 파트 역할이 중요했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은 모두 정보 분실을 운영한다. 정보 형사들을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구역을 정하고 배치해서 정보 수집 기능을 수행한다.


조현오는 충북청장이던 이철규를 2010년 9월 7일 정보국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2010년 12월 3일 서울청 정보과장인 김성근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고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을 맡긴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 수사가 시작된다. 2010년 10월 5일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압수수색이 시작된다. 이른바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이다.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는 2003년 결성된 단체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 회원인데, 이들은 처우 개선을 목표로 청원경찰법 개정안 통과를 추진했다. 회원이 낸 특별회비로 6억 5000만 원을 만들어 2008년 말부터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를 시작했다. 청목회 회원 가족과 친지 이름으로 진행한 ‘쪼개기 후원’을 통해 국회의원에게 전달된 돈은 500만~3000만 원 정도였다. 2009년 4월 발의된 청원경찰법 개정안은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다.


검찰 수사에 여야 국회의원은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당시 국회에서는 검찰이 국회의원을 옥죄려고 힘없는 사람들이 낸 소액 후원금까지 정치자금법으로 묶어서 건드린다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30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재석 의원 200명 가운데 찬성 175명, 반대 10명, 기권 15명이었다. 이 같은 압도적인 표차는 경찰청이 국회 내 반 검찰 정서 분위기를 잘 파고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내용을 보자.


형사소송법 196조 2항에 ‘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경찰도 수사 주체로 인정을 받았기에 수사에 들어가면 검사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조항만 보자면 경찰에게 매우 유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3항은 ‘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고 나온다. 경찰에 수사개시권이 있더라도 검사 지휘를 따라야 하므로 경찰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현오는 3항에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잘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도 3항에 크게 반발했다.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기 때문이다.


대통령령과 법무부령 차이는 만드는 주체다. 대통령령은 대통령 주재로 각 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만든다. 반면 법무부령은 법무부가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법무부 장관은 통상적으로 검찰 출신이라 법무부령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현오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형사소송법 시행령(대통령령)’ 제정을 앞두고 다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 나갈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전남 곡성서장인 장하연과 전북 정읍서장인 진교훈이 뽑혔다.


국무총리실 주재로 경찰과 검찰 측에서 대표들이 나와 논쟁이 시작됐다. 한쪽에서 문구를 수정하면 다른 한쪽에서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됐다. 경찰 쪽에서는 제2조(수사지휘의 원칙)에 ‘검사는 사법경찰관을 존중하고’라는 문구를 원하면 검찰은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제5조(수사지휘의 방식)로 넘어가자 경찰은 검사가 사건 지휘를 할 때는 서면 또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검찰은 “긴급한 경우에는 전화나 구두로 지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이 다시 “그렇게 전화나 구두 상으로 지휘할 때 다시 서면이나 형사사법정보시스템에 기록을 남기는 방식으로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받아쳤다.

 

국무총리실은 경찰과 검찰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 강제 조정안을 내놓았고 대통령령은 12월 27일 시행됐다. 의욕적으로 진행한 법률 개정이었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 평가는 박했다.

 

2012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첫 번째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였다.혐의는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였다. 두 번째는 ‘룸살롱 황제’ 이경백이었다.이경백은 1심 판결 전까지 자신과 유착한 경찰을 불지 않았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자 항소심에서 자신과 유착된 경찰을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2012년 3월 말부터 이경백과 유착한 현직 경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18명이 옷을 벗었다.‘비리 경찰’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고, 이경백은 2012년 7월 17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다.


조현오는 퇴직하고 나서 차명계좌 발언으로 재판을 받았다.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울구치소로 들어갔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사자 명예훼손죄’에서 8개월 실형이 타당한 양형인지 제기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조현오가 간 곳에는 이경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백은 2013년 5월 11일 집행유예 기간에 불법 사설 카지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됐다. 조현오는 구치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는데 조현오는 해고 노동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루는 면회 대기 중 옆에서 누군가 조현오를 불렀다. 고개를 돌렸더니 누군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김광준 검사입니다.” 


(다음 10화- 황운하와 디도스 사건)


서형 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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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인 금양체질 이승만의 자과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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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 의학이라는 게 있다. 진주 동산한의원 장승환 원장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개념이었는데, 이후 이강재 한의사가 쓴 <8체질이 뭐지? 내 체질은 뭘까>(좋은땅)라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8체질은 사상의학이 좀 더 발전하면서 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인은 다시 금양체질과 금음체질로 나뉘고, 태음인은 목양체질과 목음체질, 소양인은 토양체질과 토음체질, 소음인은 수양체질과 수음체질로 나뉜다.


체질에 따라 맞는 음식도 있고, 해로운 음식, 아예 받지 않는 음식이 있다. 병에 대한 처방도 체질에 따라 다르게 하는 게 8체질에 의한 한의학 진료방법이다.


8체질 건강관리 법. 동산한의원.


책을 읽던 중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체질에 따라 사람의 성격도 특징이 있는데, 금양체질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서태지, 이소룡, 스티브 잡스, 그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을 금양체질로 본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스티브 잡스를 표현하는 단어는 독선, 창의, 직관, 직설, 무례, 왜곡, 변덕, 고집, 아이 같은 능력, 자신만의 세계, 채식, 이런 것들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분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해놓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사편찬위원장은 유영식 선생이다. 한국근대사가 전공인 유영익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다. 그가 2002년에 펴낸 <젊은 날의 이승만>에서 이승만의 특징을 말했는데 흥미로운 항목이 있었다. 바로 자과벽(自誇癖)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스스로 자랑하는 버릇이다. 자기의 장점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똑똑하고 뛰어나다면 좀 자랑을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벽(癖) 자가 들어가면 보통은 좋지 않은 의미다. 여기에는 자기의 자랑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자만과 통한다. 자과벽을 가진 사람은 부가적으로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 일이 잘되면 자기가 잘 나서 잘되는 것이고, 일이 안 되면 모두 남이 잘못해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책임을 돌린다.이런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칭찬에 아주 인색하다."


결국 이런 자과벽 때문에 한국전쟁 때 혼자 도망가고도 태연히 거짓말 방송을 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남아 있던 서울시민을 학살했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수많은 민간인학살을 자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다가 4.19혁명으로 쫓겨나는 운명을 맞았던 것일까?


이 책은 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금음체질, 김영삼 대통령을 수양체질로 본다. 그러면 현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체질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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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실험 지역출판에 도전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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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출판사업을 해보니 대충 알겠다.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60~70%가 서울·경기 등 이른바 수도권에 있다. 나머지 30~40%의 다른 지역 소비자 중에서도 상당수가 예스24나 알라딘, 인터파크,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인터넷서점이나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입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역 서점은 갈수록 살아남기가 어렵다. 2003년 228개였던 경상남도의 서점 수는 2013년 147개로 10년 만에 35.5%가 줄었다. 옛 마산지역만 보더라도 80~90년대 50~60개가 있던 서점은 현재 24개만 남았다. 이마저도 문구점를 겸한 서점이 대부분이고 순수 서점은 6개뿐이다. 게다가 함양·산청·의령군의 경우 각 1개씩의 서점만 살아남아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아예 서점이 없는 지자체도 곧 나올 것 같다.


아예 서점 없는 지역도 곧 나올 듯


게다가 인쇄·제본소는 물론 배본사나 총판, 심지어 DM 발송대행사도 경기도 파주 고양 일대에 모두 밀집해있다. 실력 있는 북 디자이너나 편집자도 서울에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인쇄를 비롯한 모든 비용도 서울 이외의 지역이 훨씬 비싸다. 인쇄 기술과 품질도 그렇다.


우리가 그동안 냈던 책 중 일부. @도서출판 피플파워


그래서일까. 경상남도에 출판사나 인쇄사로 등록된 업체는 1500개가 넘지만, 전국 서점 유통망을 통해 판매되는 책을 내는 출판사는 3~4개 정도밖에 없다. 내가 알기론 우리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피플파워, 경상대학교 출판부, 그리고 지난 2011년부터 통영에 터를 잡고 지역 출판을 시작한 남해의 봄날 정도가 고작이다. 그 외 대부분 출판사는 말이 출판사이지 자비 출판이나 관급 인쇄물을 찍어주는 인쇄대행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지역 출판사가 상당히 많았고, 전국 사회과학 전문서점들을 통해 그런 출판사가 낸 책들이 상당히 많이 팔리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점점 서울 집중이 심화하면서 지역출판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서울로 옮겨갔다. 대구에 있던 녹색평론사도 언제인지 서울로 가버렸다. 그래도 버티고 남아 있는 건 제주도의 도서출판 각이나 부산의 산지니 정도가 내가 아는 다른 지역 출판사다. 이들마저 안 되면 지역출판은 씨가 마를 지경이다. 그러면 지역콘텐츠도 더 이상 생산될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역출판 지원 정책도 없다. 지역콘텐츠 진흥 차원에서라도 필요할 법 한데, 이런 데 관심을 갖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은 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남도민일보는 2014년 하반기부터 본격 출판사업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지역콘텐츠의 가치를 믿었다. 예전에는 지역에서 책을 내면 그걸 알릴 수단이 없었지만, 지금은 SNS가 있다. 지역콘텐츠로 지역에서 책을 만들어 SNS를 통로삼아 서울로 치고 올라가보자는 거였다.


지역콘텐츠에 대한 여전한 푸대접


출판사 블로그와 페이스북 페이지, 카카오스토리 채널을 열었다. 또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그 책의 제목으로 페이지를 개설하고, 저자와 우리가 가진 SNS 인맥을 총동원해 마케팅에 나섰다. 이들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독자들의 서평이나 리뷰, 저자의 근황, 책 판매 상황, 이벤트 등 소식을 올리고 있는데, 포스트 1건당 평균 도달 수가 2000여 회에 이르고 있다. 그 중 <풍운아 채현국> 페이지 팬은 2600명이 넘었고, 그들이 다시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책을 알려줬다. 내 개인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도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낸 책 6종은 모두 2쇄 이상을 찍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지역콘텐츠에 대한 언론의 푸대접이다. 최근 부산·경남 여성창업자 열두 명의 이약기를 모은 <나는 취업 대신 꿈을 창업했다>는 단 한 군데의 언론에도 소개되지 못했다. 1983년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경남편의 30년 후 버전이라 자부하는 <경남의 재발견>도 그랬고, 경남 전통시장 20곳을 스토리텔링한 <시장으로 여행가자>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지를 지향하는 매체들이 왜 지역콘텐츠는 외면하는지 참 안타깝다.


한 나라의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다양한 지역콘텐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홈플러스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는 전 국민의 소비형태를 획일화·평준화시킨다. 그러나 전통시장에는 그 지역 고유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살아있다.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것만 가치 있는 것이고, 지역콘텐츠는 촌스럽고 수준 낮은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씁쓸하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 칼럼으로 썼던 글을 약간 가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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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옐로아이디 사용 불편한 점 8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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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카카오톡 옐로아이디가 유용한 마케팅 수단이 되고 있다기에 가입해봤다. 법인 이름으로 가입하려면 사업자등록증 사본도 올려줘야 비즈니스 계정이 등록된다.


비즈니스 계정이 등록되면 옐로아이디를 사용할 수 있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기능도 제공된다.


우선 옐로아이디는 친구를 모으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유료광고를 하거나 링크를 여기 저기 퍼트려 친구맺기를 권유할 수 있고, 기존의 자기 카톡 친구에게 추천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경남도민일보 카카오톡 바로가기 클릭


그렇게 하여 맺어진 전체 친구에게 일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이게 핵심 기능이다.그런데 유료다. 한 명당 11원이다. 100명이면 1100원, 1000명이면 1만 1000원이다.


카카오 비즈 계정 센터


일대일 대화도 가능한데, 보낼 수는 없고 상대방이 대화를 해오면 거기에 답할 수만 있다.


그런데 사용해보니 몇 가지 불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1. 친구 숫자만 볼 수 있을 뿐 친구 목록(이름)을 볼 수 없다. 왜 그렇게 해놨는지 모르겠다.


2. 미니홈에 공지사항을 올릴 수 있지만, 메시지로 전송되는 건 아니어서 친구가 일부러 홈에 들어와 클릭해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다. 그래서 실제 노출 수는 미미할 것 같다.


3. 관리자의 개인 카톡 친구들에게 옐로아이디 친구추천 메시지를 하나하나 보낼 수 있지만, 그때마다 두 번의 창이 뜨고 두 번을 클릭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000에게 옐로아이디 경남도민일보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창을 클릭하고 나면 '000에게 추천하였습니다'라는 창이 뜨고 그걸 클릭해야 완료된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


4. 친구 그룹을 만들어 그룹별 타켓팅을 할 수 있지만, 친구 목록을 볼 수 없다보니 그 그룹에 특정 계층 친구를 추가할 수 없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전화번호를 입력해야 한다.좀 황당하다.



5. 처음엔 메시지 전송을 위한 캐시 충전에 애를 먹었다. 아무리해도 기능이 작동되지 않았다. 나는 크롬을 쓴다. 하도 이상하여 혹시나 싶어 익스플로러로 해봤더니 그제서야 된다. 크롬에선 작동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크롬에선 안 된다'는 안내문구도 전혀 없다.


6. 캐시 충전에서 카카오페이, 신용카드(법인카드는 안 됨), 무통장입금 세 가지 방법이 제공된다. 같은 회사인데 다음캐시 사용은 왜 안 되는지, 핸드폰 결제는 왜 안 되는지 궁금하다.



7. 카톡에서 '경남도민일보'를 검색하면 안 나온다. '@경남도민일보'를 검색해야 한다. 그냥 '경남도민일보'를 검색해도 나오도록 하는 게 그리 어려운 기술은 아닐텐데 굳이 @를 붙여야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8. 관리자 페이지가 기본적으로 웹 기반이다. 모바일 관리자 앱도 있지만, 거기선 전체 메시지 전송 등이 안 된다. 충전도 할 수 없다.일대일 대화에 답하는 것만 가능하다. 카톡 자체가 모바일 기반인데, 웹에서만 그런 기능이 가능하다는 게 의아하다.


혹이 왜 그런지 아시는 분 한 수 가르침 기대한다.


오늘은 이쯤 하고 천천히 사용해보면서 추가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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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의 계절, 다시 언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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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도 그냥 지나갔다. 우리나라에서 3·4·5·6월은 민주항쟁의 계절이다. 3·15의거, 4·3항쟁, 4·19혁명, 5·18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등이 모두 이 계절에 일어났다.


지난 5월 16일 광주에서 '5·18 진실 왜곡과 언론의 역할'이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이 가슴을 저몄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참혹한 사진 한 장이 신문에 보도되고,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되면서 마산에서 시작된 항쟁이 4·19혁명으로 전국에 번질 수 있었다. 만일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학살하는 사진 다섯 장 정도만이라도 신문에 보도되었더라면, 과연 우리나라의 양심적 시민들이 가만히 있었겠느냐. 그게 광주만의 고립된 투쟁으로 끝났겠는가."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김주완


그랬다. 당시 언론은 계엄군의 통제 아래 정부 발표를 받아쓰기만 했고, 광주시민은 '폭도'가 되었다. 1960년만큼이라도 언론이 살아 있었더라면 과연 그 무자비한 학살이 가능했을까.


1987년 6월항쟁 때도 그랬다. 6월 10일 마산종합운동장에서 대통령배 축구대회 한국-이집트 경기가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중단되자 3만 여 관중이 시위대와 합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유일한 지역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韓)·에(埃)축구경기 중단 / 차량방화 기물 파손' '마산서도 시위…시민반응 냉담' 


1991년 10월 10일이었다. 나는 당시 진주전문대(현 한국국제대)에서 일어난 집단폭력 사건을 취재 중이었다.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C동 101호 강의실에 대기 중이던 경상대 학생 30여 명을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 등 무기로 무차별 폭행하고 감금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모든 방송과 신문은 경찰의 발표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를 180도 바꿔 보도했고, 피해자인 경상대 학생들은 '지리산결사대'라는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 조직원으로 둔갑해 19명이 구속됐다. 이 또한 '취재' 없이 '받아쓰기'만 했던 결과였다.


2013년 4월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 노조를 '강성 귀족노조'라 매도하면서 "1999년에는 노조가 원장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언론은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볼 생각은 않고, 그대로 '받아쓰기'만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오히려 원장이 주먹을 휘둘러 간호사 노조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홍 지사의 말과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는 어땠나. 거기에도 '취재'는 없었고 '받아쓰기'만 있었다. 기자들은 '기레기'가 되었다.


2015년 5월 6일 종편 채널A는 세월호 추모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2008년과 2003년 사진을 세월호 집회 사진으로 둔갑시켜 내보냈다. '받아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사실을 '조작'까지 한 것이다. 만일 영국BBC가 이런 짓을 했다면 사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이 모두 물러나고 사법처리까지 받을 일이다.


한국언론은 60년, 80년, 87년을 겪어오면서도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퇴행하고 타락했다. 언론인의 양심과 자정에 맡겨둬서 될 일이 아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93세 노인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 독립적인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참여하는 일, … 그건 비단 정치인들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전투이다."


이제 시민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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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주말 할증료가 부당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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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요일과 공휴일에 고속도로를 달리다 빠져나오면 그때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도로공사가 원래 통행료에 5%를 더 할증요금으로 물려서 받기 때문입니다.

 

평일 통행료가 1000원 미만이면 주말 할증료가 없지만 1000~2900원은 100원, 3000~4900원은 200원, 그리고 1만1000~1만2900원은 600원, 1만3000~1만4900원은 700원 더 받습니다.

 

'고속도로 통행료 주말 할증제'는 2011년 12월부터 실행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교통수요 분산을 통한 공공인프라의 효율적 이용'이라 합니다. 쉽게 풀자면 고속도로 주말 통행은 줄이고 대신 지방도나 국도 같은 도로로 분산시키자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냥 한 눈에 보기에도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통행료를 조금이라도 더 걷어보려는 수작입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통행료를 5% 더 물린다 해도 주말이 아닌 평일에 볼일을 보러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타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왼편은 평일 영수증이고 오른편은 일요일 영수증입니다.

 

주말 할증제는 주말에 자동차로 볼일을 보더라도 고속도로 말고 다른 도로를 타고 달리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아닌 다른 도로들을 타고 특정 목표 지점까지 가려면 대부분 거리도 멀고 시간도 더 걸리고 기름도 더 많이 듭니다.

 

5% 할증료를 더 물려도 고속도로 통행량이 줄어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한국도로공사가 남 먼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통행료를 5% 더 내게 해도 고속도로에 차량이 줄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2014년 10월 국회에 제출된 한국도로공사 자료를 보면 이렇습니다.

 

주말·공휴일 하루 평균 통행량이 주말 할증제 시행 전 18개월(2010년 6월~2011년 11월)은 323만 1000대였고 시행 후 18개월(2011년 12월~2013년 5월)은 319만 3000대였습니다.

 

할증제를 시행한 뒤 통행량이 2.0% 줄었지만 이는 시행 후 통행량 집계에 여름휴가철이 한 차례 빠진 데서 오는 착시 현상이라고 합니다.

 

반면 이로 말미암은 순수익은 한 달에 27억 원, 한 해 300억 원 넘게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2013년까지 자료이니 지금은 더 많아졌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대부분 고속도로는 주말에도 크게 막히지는 않습니다. 204년 9월 9일 추석 다음날 남해고속도로 사진입니다. 경남도민일보.

물론 고속도로 통행료는 일부 고속도로 건설비는 물론 통행료 거두는 인건비도 충당해야 하고 평일 출퇴근 50% 할인 같은 여러 요인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주말·공휴일이나 돼야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있는 ‘일부’ 사람(대부분은 직장인=노동자)에게 많이 부담을 지우는 것이 마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완구 3000만 원설이나 홍준표의 1억 원설, 그리고 박근혜의 5억 원 넘는 대선자금설에 대해서는 말도 못하면서, 우리 주머니 100원에 대해 한 마디 해 봤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에 나오는 첫 구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가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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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후원하면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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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포털 다음에서 '뉴스펀딩' 서비스가 시작됐다. 크라우드 펀딩(대중 모금) 방식으로 취재비를 모아 좋은 뉴스 콘텐츠를 생산, 제공하는 것이다. '아~, 이거 괜찮은데?' 하는 생각과 함께 '과연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6개월 만에 7만 명, 9만 건, 10억 원이 달성됐다. 나도 지난 2월 2일부터 3월 24일까지 '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뉴스펀딩에 참여했다. 그 결과 당초 목표액 300만 원을 훌쩍 넘어 918만 원이 모금됐다.


'아, 이거 대안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포털이니까 이만큼 되는 거지. 과연 개별 언론사 플랫폼에서도 성과가 나올까'라는 회의였다.


그래서 다음을 통한 실험을 좀 더 해보자 싶었다. 그리고 미디어오늘에 이런 칼럼도 썼다.


☞뉴스는 공짜? 뉴스펀딩 실험해보니 




지역신문이 다음 뉴스펀딩이란 플랫폼을 적극 활용해보자는 얘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후배기자 두 명에게 제안하여 다음과 후속 프로젝트 협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 다 무산됐다.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겠다. 우리와 다음 측의 아이템을 보는 관점이 조금 달랐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나는 위 칼럼에서 그럼에도 다음 뉴스펀딩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를 이렇게 쓴 바 있다.


"우선 ‘뉴스는 공짜’라는 인식이 당연시되어 있는 웹 생태계에서 좋은 콘텐츠를 후원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다음이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단돈 1000원이라도 뉴스펀딩에 후원해본 경험자라면 그는 또 다른 콘텐츠에도 후원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면 어느 순간 다음이 뉴스펀딩 서비스를 접더라도 다른 플랫폼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다. 대형포털이 이 서비스를 반년 이상 진행해 오면서 7만 명이라는 펀딩 경험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후에도 의미있는 프로젝트에 후원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래서 '이걸 우리가 자체적으로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 경남도민일보 독자는 특히 수준 높고 정의감이 강한 열성 독자가 많다. 해볼만 하다고 판단했다.


경남도민일보 뉴스펀딩


먼저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임종금 기자로 하여금 프로젝트별 결제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휴대폰과 신용카드, 계좌이체 세 가지 방법의 결제방식이었고, 모바일과 PC웹, 그리고 크롬과 익스플로러 모두에서 결제가 가능해야 했다. 이걸 만드는데 시간이 좀 많이 들었다.


첫 오픈에 앞서 프로젝트 소개글을 미리 작성하여 올리고 결제 테스트를 해봤다. 무리가 없었다. 인터페이스도 몇 번을 바꿨다.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고자 했다. 해당 본문페이지에는 광고도 없앴다.


오픈은 월요일 오전 9시로 했다. 프로젝트를 웹 머릿기사로 올린 후, 페이스북에 다음 코멘트와 함께 링크했다.


[자체 뉴스 펀딩 실험]

경남도민일보가 또 하나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뉴스펀딩입니다. 거대 포털의 플랫폼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우리 독자를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첫번째 프로젝트는 광복 70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악인 열전입니다. 1화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길 원했던 살인마 김종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토호,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해외친일파 등이 해방 후에도 어떤 악행을 해왔는지를 생생히 고발할 예정입니다.

좋은 기사에는 기꺼이 후원해주실 독자님들이 있을 걸로 믿고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성원 부탁드립니다.


풍운아 채현국에 공유한 경남도민일보 뉴스펀딩


페이스북 내 계정지역언론을 고민함 페이지에 올리고, 반응을 본 후 경남도민일보 페이지, 풍운아 채현국 페이지에 한두 시간 틈을 두고 올렸다. 물론 코멘트는 약간씩 달리했다. 우리가 운영 중인 카카오스토리채널과 트위터에도 송고했다.


가잠 많은 도달율과 클릭수를 보인 곳은 역시 페이스북, 그 중에서도 풍운아 채현국 페이지였다. 도달율 1만 9000여 회, 클릭수는 1200회에 이르렀다. 다른 페이지와 계정까지 합치면 훨씬 많겠지만...


페이스북 소셜댓글도 많이 올라왔는데, 필자인 임종금 기자가 일일이 답변을 달았다. 하룻동안 페이스북 좋아요는 1700회가 넘었다. 공유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펀딩 실적은 어떻게 될까. 하루 집계만 보니 30명에 25만 원 정도 된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우리가 언제 기사 한 건에 이 정도 원고료를 받아본 적이나 있었나.


독자가 후원하며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글이란?


이 프로젝트는 모두 7회를 예정하고 있다. 최종 프로젝트 마감일까지 얼마나 펀딩이 이어질 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하룻동안 반응을 보면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 문제는 앞으로도 독자들이 기꺼이 펀딩에 참여할만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느냐다.


관건은 (1) 독자가 후원을 하면서 뿌듯해 할 수 있는 기사 (2)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는 기사 (3) 깊이 있는 취재와 기자의 필력이다. 이번 임종금 기자의 프로젝트가 이만큼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들 악인 열전이 역사교과서는 물론 다른 어떤 언론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뉴스 펀딩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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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 기자는 경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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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 회고록을 읽으며


격월간지 《녹색평론》에 언론인 대선배 임재경 선생(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의 회고록이 연재되고 있다. 벌써 7회째다.이번 5·6월호에 재미있는 일화가 실렸다.


1961년 6월 <조선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1년 만에 사회부를 거쳐 경제부에 배치됐을 때였다. 이 분은 영문학과를 나왔다. 경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희망부서도 아닌 경제부로 덜컥 배치되었으니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발령 며칠 뒤 통화개혁(1962년 6월 10일)이란 청천벽력이 닥쳤다. 마침 그의 취재 담당이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었다.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는데 "금융기관의 대출 쿼터를 늘려 기업활동을 돕겠다"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이 글을 쓰는 나도 모른다.) 신문사에 돌아와 수첩에 메모한 대로 써낸 기사는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때 상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채현국 선생과 임재경 선생. 두 분은 사돈지간이다. 지난 3월 20일 서울에서. @김주완


"데스크는 어느 신문사인가에 전화를 걸어 '마감시간인데 담당기자가 아직 안 들어와서 그런다'며 '총재 기자회견 내용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땅에 구덩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죽고 싶었다. 저녁때 신문사 사옥을 나서며 다음 날 사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문기자 초년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죽고 싶었다'니, 사표를 쓸 생각을 했다니….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하거나 자괴감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행동은 퇴근길에 서점에 가서 책을 산 것이었다. 이정환의 《경제원론》과 성창환의 《화폐금융론》을 샀다고 한다. 며칠 동안 두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깡그리 읽었다. 그러나 두 책이 우리 경제현실을 설명하는데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미국 MIT 교수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독파했다. 600~700쪽 부피와 큰 사이즈의 이 책을 이를 악물고 읽었단다. "승수효과를 해설하는 대목은 압권"이었다고 그는 평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기사 작성과 경제담론 참여에 큰 보탬이 되긴 했으나 한국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들춰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녹색평론에 연재되고 있는 임재경 선생 회고록.


그래서 다시 읽은 책이 케인스와 슘페터의 저술이었다. 하지만 이 책도 "지적 호기심을 어루만져 주는 보람은 적지 않았"으나 "후진국 민중의 가난한 이유를 '낮은 저축률, 낮은 투자율, 낮은 성장률'에서 찾는 자본주의 경제이론이 과연 맞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의 경제발전이 약소국들의 자원 강탈, 식민지 착취, 노예(흑인) 노동에 뿌리 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데는 구역질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좌파 이론가와 경제사가들의 저술에 끌리기 시작했고, 모리스 돕, 폴 바란, 폴 스위지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술회했다.


사실 나도 경제에는 문외한이어서 여기서 언급된 책 중 끝까지 읽은 건 한 권도 없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다.


다만 임재경 선생의 회고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과연 요즘 경제부 기자들 중 이렇게 공부하고 고민하는 기자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한 경제부 기자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기자의 고민이다.


기자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임재경 선생의 자세는 오늘날의 기자들도 본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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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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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10화. 조현오와 황운하, 디도스 사건 수사


조현오는 서울구치소 안에서 이경백과 마주쳤다. 구속된 김광준 검사도 거기 있었다. 조현오 구속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 중에 황운하도 있다. 그는 경찰 안에서 ‘수사권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경백, 김광준과 관련이 깊다.


황운하는 경찰대 1기 출신으로 1985년 입문했다. 2003년 용산경찰서 형사과장일 때 경찰이 검찰 비리를 직접 수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법조브로커 ‘오달이’ 사건이다. 수사는 체포, 압수수색 등 강제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인신구속, 압수, 수색에는 반드시 법원 영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찰은 법원에 영장을 신청할 수 없다. 반드시 검찰 힘을 빌려야 한다. 수사권 핵심은 경찰이 피의자를 구속하거나 증거물을 압수하기 위해 영장청구권을 갖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황운하가 신청한 ‘오달이’ 계좌 추적 영장을 수차례 기각했다.


2005년 경찰청장인 허준영은 황운하를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으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이 공약했던 경찰수사권은 국회 입법화 과정에서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경찰이 부당함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는 주문도 불거졌다. 황운하는 2005년 전국 경찰에 공문을 보낸다. 공문에는 검찰과 잘못된 관행을 14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거부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 중에는 ‘검사 면전 인치 요구 거부’도 있었다. 공문은 수사구조개혁팀장 이름으로 뿌렸다. 청장인 허준영에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공문을 받고 일선에서 나설 사람이었다.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충남지방경찰청 소속 경감 한 명이 시발점이 됐다. 대전지방검찰청이 전화로 긴급체포한 용의자를 데려오라고 하자 거부한 것이다. 경감은 피의자 인적사항에 검찰 관련자가 눈에 띌 때부터 거부감이 들었다. 마침 경찰청에서 온 공문도 힘이 됐다. 검사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검찰에 직무유기 등으로 기소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2006년 9월 5일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이 두 번째였다. 그는 2006년 이택순이 경찰청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찰청 수사권개혁팀장에서 대전서부경찰서 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황운하였다. 그는 다시 경찰·검찰 사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경찰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좌천된다.



2007년 4월 한화 회장인 김승연이 보폭 폭행을 저지른다. 이후 한화 고문과 경찰청장인 이택순이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고, 이택순은 결백을 증명하고자 검찰에 수사를 맡기겠다는 뜻을 내비친다. 황운하는 경찰 내부 게시판에 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고 다시 징계를 당했다.


2010년 대전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과장이던 황운하를 서울청 형사과장으로 발탁한 이는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자 황운하를 경무관으로 승진 인사하고 경찰청 수사기획관에 전진 배치한다. 수사기획관은 수사국이 맡는 중요 사건에 대해 수사 업무를 챙기는 자리였다. 당시 대검찰청도 중수부장이 수사기획관을 거느렸다. 경찰청 수사기획관은 지능수사대와 범죄정보과 등을 지휘한다. 모두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면서 만든 새로운 기능이다. 조현오는 검찰 중수부와 범죄정보과 역할을 맡을 부서가 경찰에도 있어야 서로 감시·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능범죄수사대는 고위공무원 비리, 경제사범과 같은 대형 사건을 인지해 직접 수사한다. 범죄정보과 역시 검사 등 비리 공직자 범죄 정보를 캐내고자 만든 기구다.


황운하가 수사기획관으로 처음 맡은 사건이 이른바 ‘디도스 사건’이다. ‘디도스 사건’은 2011년 10월 26일 보궐선거 당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와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홈페이지가 사이버테러를 당한 사건이다. 사건 당일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에서 수사에 들어갔다. <나꼼수>는 10월 29일 26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짚었다. 선관위 홈페이지 전체가 마비된 것이 아니라 일부 메뉴만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단순 사이버테러가 아니라 선관위 내부자 공모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경찰은 12월 1일 디도스 공격을 한 강 씨와 일당 3명, 이를 지시한 공현민을 검거했다. 공현민은 한나라당 국회의원 최구식의 수행비서관이었다. 형사소송법을 보면 경찰은 피의자 구속 열흘 안에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야 한다. 이쯤이면 누구나 예상하는 앞날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는 경찰과 검찰이 ‘수사권 조정’을 놓고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경찰 수사 허점을 놓칠 리 없었다.



선거 부정 관련 사건은 여야가 날카롭게 맞설 수밖에 없고 언론도 중요하게 다루는 사안이었다. 만약 경찰 수사 결과가 각종 의혹을 잠재울 만큼 명확하지 않으면 야당은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한다.


경찰은 2011년 12월 6일 국회의장인 박희태의 전 비서 김태경을 소환한다. 공현민과 김태경은 분명히 돈거래가 있었다. 사건 발생 전에 1000만 원, 사건 발생 후 9000만 원 등 모두 1억 원이 오갔다. 김태경은 사건 관련성을 모두 부인했다. 경찰은 사건 이후 오간 9000만 원은 범죄와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사건 직전에 건넨 1000만 원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 했다. 그러나 공모 증거가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황운하는 이를 ‘대가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제 수사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 민감한 사안이인 만큼 누구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줘도 안 된다.


황운하는 12월 9일 자신감 있게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시간제한이 있었던 점을 상기하거나 미흡한 부분은 검찰 수사에 넘기는 출구 같은 것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다.


“공 씨 단독범행이며 우발적인 사건입니다.”


이 발표가 나가자 여론은 경찰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한다고 몰아붙였다. 경찰과 다른 검찰 판단도 축소·은폐 비난 여론을 부추겼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되자 서울중앙지검은 첨단범죄수사2부를 주축으로 40여 명이 참여하는 수사팀을 꾸린다. 검찰은 2011년 12월 30일 박희태의 전 비서인 김태경을 구속한다. 당시 <나꼼수>는 32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며 경찰 수사를 비판한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렸을 때 이미 뭔가 잡은 것이 있다. 1억은 검찰이 거둔 쾌거.”


하지만, 황운하가 예상한대로 검찰이 기소한 김태경은 2013년 3월 29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때는 사건에 대한 관심이 이미 사라진 시기였다.


당시 언론은 12월 16일 조현오가 준비한 기자간담회를 주목했다. 보도를 보면 조현오가 기자간담회에서 함께 앉은 황운하를 질책했다고 나온다. 조현오가 배후를 거론하며 단독범행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려 하자 황운하는 경찰 수사가 옳다고 받아친다. 조현오는 “가만 좀 있어봐라”며 황운하를 면박했다. 이를 언론은 ‘극단적 언쟁’, ‘적전 분열 양상’ 등으로 정리했다.


조현오와 황운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경찰 조직 안에서는 황운하를 인사 조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미숙한 발표가 조직에 너무 큰 부담을 줬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황운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황운하는 자신이 발표한 수사 내용 근거를 더 설명하려는 듯했다. 길게 얘기해봤자 부작용이 더 커질 듯했고 조현오는 말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화살은 조현오를 겨누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경찰 수사 발표 전인 12월 7일 청와대 정무수석인 김효재와 나눈 두 차례 전화통화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경찰은 행정안전부 소속이고 행정안전부는 정무수석 소속이므로 김효재가 조현오에게 전화한 게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당장 청와대가 돈 거래 부분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압박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청와대 압력을 받은 조현오가 황운하에게 지시했고 막판에 혼자 살겠다고 황운하에게 모든 책임을 씌웠다는 해석이 나왔다. <나꼼수> 32회 방송 내용이다.



“경찰이 수사를 잘 해놓고 마지막 발표를 하는데 있어서 망가지고 있습니다.”(주진우)

“조현오 청장 때문이야. 청와대에서 오더가 왔어도 조현오 청장이 막았어야지.”(김어준)


그러나 황운하 예상대로 검찰 수사도 경찰과 차이가 없었다. 2012년 3월 26일 디도스 특검이 출범한다. 특검보 3명과 파견검사 10명을 비롯해 100여명이 특검에 참여했다. 특검도 윗선이 수사 과정에 개입했는지 파악하고자 4월 19일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직원 2명을 불러 조사했다. 그리고 5월 21일 수사국장 강신명과 수사기획관 황운하, 마지막으로 5월 23일 조현오를 불러 조사한다.


조사 순서에는 의도가 있다. 우선 수사진을 조사한 내용은 상급자를 캐는 데 활용된다. 조사는 계단식으로 진행됐지만 언론이 원하는 건더기는 나오지 않았다. 특검은 2012년 6월 21일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먼저 김효재를 불구속 기소했다. 수사 상황을 국회의원인 최구식에게 알려줬다는 혐의였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의혹 무마용’, ‘혈세 낭비’라는 비난이 특검을 향했다.


당시 사건 관계자는 여전히 디도스 사건을 ‘공현민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당시 <나꼼수>가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됐던 증언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일반적으로 수사 담당자는 ‘진술’보다 과학을 우선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물속으로 가라앉은 후에도 탑승한 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경찰이 통신기록을 조회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전 세모그룹 회장인 유병언이 변사체로 발견된 시점을 둘러싼 의혹도 떠올려보자. 유병언 변사체가 6월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견됐다는 진술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경찰 수사를 불신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하지만, 경찰은 전산으로 남은 112 신고 시각과 사건 처리 기록을 바탕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디도스 사건에서 <나꼼수>가 선거관리위원회 내부 공모 의혹을 제기한 근거가 된 진술을 보자. 이용자는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서버에 접속한다. 화면에서 늘 같은 부분은 홈페이지 서버에 저장돼 있고, 바뀌는 부분은 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와 화면에 표시된다. 당시 <나꼼수>는 디도스 공격 중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화면 일부(데이터베이스 서버에서 가져오는 ‘투표소 정보’ 부분)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누군가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연결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가 분석한 결과는 홈페이지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서버 사이 통신은 정상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검찰수사와 특검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됐다. <나꼼수>가 ‘선관위 내부 공모’를 의심한 것은 일부 화면은 보이고 일부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는 진술이 ‘진실’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경찰이 말하는 과학수사를 바탕으로 검토하면 거꾸로 그런 진술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공현민을 비롯해 몇 명이 모여 벌인 일이 여야 정쟁, 종편 출연 같은 변수를 맞으며 순식간에 정국에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황운하에게는 권력을 비호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경찰 수사에서 윗선으로 지목된 박희태, 최구식 모두 디도스 사건과 관련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황운하조차도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다. 황운하가 첩보를 입수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수사가 바로 ‘김광준 검사’ 사건이다.


(다음11화-형사소송법 개정 그 이후)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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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 황새보다 아이들 돌아온 게 더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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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는 동안 한결같은 노력으로 절멸했던 황새를 되살려낸 도시가 일본 도요오카시입니다. 도요오카시의 나카가이 무네하루 시장이 5월 20~22일 2박3일 일정으로 경남을 찾았습니다. 


'생물다양성 보전을 통한 생태관광 활성화 사례와 지역 차원의 적용을 위한 포럼' 등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생물다양성의 날을 맞아 마련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1일 오전 10시30분 경남도청 옆 '디자인 이노' 사무실에서 만나 재일동포 3세인 김황 동화작가의 통역으로 1시간 남짓 얘기를 나눴습니다. 


오른쪽부터 김황 작가, 나카가이 시장, 저, 그리고 도요오카시 시장 수행원.

뒤편에 서 있는 사람은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이찬우 사업지원팀장.


- 경남도민일보 독자를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91년 효고현(도요오카시가 소속돼 있는 광역자치단체) 현위원이 됐습니다. 줄곧 황새를 보호하자고 말해 왔습니다. 1989년 30년 만에(1959년에 마지막 번식이 있었음) 도요오카 사육장에서 황새가 태어났을 때 잘 키워 하늘로 돌려보내자, 친구들과 성공시키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본서는 1971년 마지막 황새가 죽어 야생에서는 멸종된 상태였습니다. 최대 원인은 환경 파괴였고 '최후의 일격'은 농약이었습니다. 


당시 다시 황새를 돌려보내자고들 말은 했으나 실현을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황새'도' 살 수 있는 풍요한 자연이 어디에도 없었고, '농약 안쓰는 농사는 있을 수 없다'고 다들 말했습니다. 


웃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김구연 선배 사진.


그렇지만 반대로 보면 황새는 풍요한 자연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황새'도'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자>를 표어로 내걸었습니다. 


"황새도"에서 '도(も)'는 정치가로서 저의 최대 발명이라 생각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황새만이 아니라, 황새'도', 인간'도', 다른 생물'도', 다함께 살 수 있는 마을……. 이 '도'는 사람과 황새와 다른 생명이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마음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70마리 넘는 황새가 야외에서 날아다닙니다. 한국까지 날아간 황새도 나타났습니다. 화포천 봉하마을 김해시까지 날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놀랐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제동이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풍요한 자연의 상징을 만들자는 사람들이 있어서 연대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현위원 때는 별명이 황새위원이었고 시장이 된 2001년부터 15년 동안은 황새시장이 됐습니다. 하하." 


김해 봉하마을 전깃줄에 앉아 있는 봉순이. 이찬우 박사 사진.


도요오카에서 김해까지 날아간 황새는 봉순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2012년 4월 6일 도요오카 한 인공둥지에서 태어난 암컷 황새는 2014년 3월 18일 대한해협을 건너 김해 봉하마을에 내려앉았습니다. 


하동 들판과 충남 서산 천수만 일대에 머물렀고 올해 3월 9일 봉하마을로 돌아오더니 얼마 뒤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대한해협을 오간 최초 일본 황새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아든 두 번째 황새 제동이는 올해 2월 8일 제주도에서 발견됐습니다. 2014년 6월 사육장에서 야생으로 풀려난 수컷으로 봉순이한테 조카뻘이 된다고 합니다. 


- 21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포럼에서는 직접 기조발제(도요오카시의 황새복원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하셨습니다. 이번 경남 방문 목적을 말씀하신다면? 


"자연 재생과 자연 보호를 위한 의견 교환이 으뜸 목적입니다. 둘째는 도요오카시에서 태어난 봉순이가 아주 좋아했던 장소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봉순이가 김해에서 오래 머물렀던 장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으로 돌아와 습지 재생을 하고 유기농을 하기 시작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생전에 도요오카시를 방문하고 싶으니 준비하라고 비서진에게 시켰던 노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도요오카에서는 사람들이 친환경농업으로도 충분히 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고 싶다, 그렇게 얘기하셨다고 합니다. 갑자기 서거하셔서 아쉽게 됐는데, 이런 사연을 알 리도 없는 황새가 바로 거기를 찾고 노 전 대통령 고향에 갔다니 매우 신기하고 믿기지 않는 심정인 것입니다. 


지난해 봉순이가 날아와 앉은 장소를 봤더니 도요오카랑 아주 닮았습니다. '황새(봉순이)를 통해 우리와 한국이 이어지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껴졌습니다." 


- 경남 사람들한테는 도요오카시가 낯선 도시입니다. 자랑을 겸해 도요오카시를 소개하자면? 


"인구 8만 6000명이 살고 바다와 닿아 있으며 황새가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도시이고 마을입니다. 


노트북컴퓨터 모니터로 논에 내려앉은 황새를 보여주는 나카가이 무네하루 시장.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노사키온천이 있으며 전통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오래된 마을 '이즈시'도 있습니다. 다지마규(但馬牛)라는 유명한 소고기와 바다에서 나는 유명한 대게도 먹을 수 있습니다. 


간사이공항이 있는 오사카나 도쿄에서 2시간 반이면 올 수 있습니다. 멀지 않습니다. 자연뿐 아니라 역사·문화·전통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도시입니다. 


세계 여행을 안내하는 '론리 플래닛(http://www.lonelyplanet.com )'에서도 평가받는 기노사키온천은 일본서도 '베스트'로 꼽힙니다. 기노사키도 1925년 지진재해로 무너져서 복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효고현에는 (그렇게 파괴된 데가 도요오카 말고) 고베도 있고 한데요, 서양식으로 재건하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노사키 사람들은 일본 전통 방식대로 나무로 새로 집을 짓겠다 해서 지금 모습을 잃지 않고 갖추게 됐습니다. 


전통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면서 잃어버렸을 때 헤매는 일 없이 바로 되찾도록 한 결과입니다. 


이즈시도 에도시대(1603~1867) 분위기가 그대로지만, 실은 1876년 큰 불이 나서 3분의 2가 없어졌었더랬습니다. 그때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고 원래 있었던 것을 복구하는 방향에서 재건했습니다. 


그리고, 황새도 한 번 멸종했으나 도요오카시는 그 또한 살려냈습니다. 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을(도시)에 중요한 것이 없어졌을 때 고민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바로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것은 과거 조상들이 만들어 대대로 이어온 것이기에 미래 세대에 그대로 넘겨야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도쿄 도심처럼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쓰면서 새롭게 가다듬는 도요오카 스타일입니다. 


봉순이가 태어난 인공둥지. 도요오카시 이즈시초(町) 들판에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온 세계가 글로벌화로 말미암아 똑같은 얼굴 표정으로 되고 있습니다. 글로벌화는 세계 공통 기준으로 나가면서 로컬화를 없애치우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아주 재미없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똑같아지면 파리도 한국도 (따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요오카는 진정한 도요오카의 얼굴로 단장하려고 합니다. 갈수록 글로벌화되는 세상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전략입니다." 


- 도요오카시는 1950년대부터 지금껏 흔들림없이 황새 복원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런 놀라운 일관성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합니다. 


"어려운 질문인데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생명에 대한 공감'이 아닐까요……. 같은 생명인 황새를, 같은 생명인 인간이 멸종시켰습니다. 황새를 되살려 자연으로 돌려보내자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마음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퍼져나가서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도요오카시 들판에서 볼 수 있는 황새. 이찬우 박사 사진.


황새 복원 당사자가 아닌, 제3자 대학교수 몇몇이 도요오카시의 황새 야생 복귀 프로젝트를 분석·평가한 자료가 있습니다.(2014년 7월 발표) 거기서도 첫 번째 이유가 생명에 대한 공감이었습니다. 


2005년 황새를 야생에 풀어놓았을 때와 2007년 야생에서 처음 새끼가 태어났을 때 보도매체들은 물론 시민들도 날마다 현장에 나와서 함께했습니다. 


어미는 매우 야위어서 죽을 듯하면서도 새끼를 위해 먹이를 물어왔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어미는 날개를 펴서 (자기는 햇살을 그대로 맞으면서도) 새끼한테만큼은 그늘을 만들어줬습니다. 이렇게 새끼가 독립할 때까지 두 달을 보살폈습니다. 


이런 모습을 많은 시민들이 생생하게 들여보면서 어머니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오버랩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것들이 바로 '생명에 대한 공감'이다 싶습니다. 


아이들이 논에서 모내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황새가 돌아온 것도 좋았지만 아이들이 돌아왔다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아이들이 논에서 모내기하고 가을걷이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황새농법(친환경으로 벼를 기르면 보통은 논에 생물 가짓수가 주는데, 황새농법은 오히려 늘며 겨울에도 논에 생물이 산다고 한다)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어른들한테 듣고 배웠습니다. 황새농법이 퍼질수록 자연환경이 좋아진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가을걷이하는 아이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황새농법을 확산할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간단한 결론, 황새농법으로 생산한 황새쌀 소비를 늘리면 좋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아이들은 학교 앞 가게(사진에서는 '미니스탑' 체인점)를 찾아가 주인한테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파는 주먹밥을 황새쌀로 만들면 우리 환경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체인점 주인은 권한도 없고 황새쌀은 비싸고 해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미니스탑 체인점을 찾아가 피케팅을 하는 모습이 모니터에 담겨 있습니다.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학교급식에 황새쌀을 쓰면 어떨까, 누구한테 부탁하면 좋을까, 토론을 했습니다. 얻어진 결론은 시장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요오카시청으로 아이들이 시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아이들 행동이 현실 사태를 바꿔낸 것입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발자국을 내딛는 용기, 이런 것을 아이들이 가르쳐줬습니다. 


황새쌀 학교급식을 지난해까지는 매주 두 차례 하다가 올해는 세 차례로 늘렸다고 합니다. 일반쌀과 황새쌀 차액은 전국 각지 여러 사람이 보내온 기부금으로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생각과 행동 사이에는 홈이랄까 벽이랄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손쉽게 그것을 넘어섭니다. 이런 아이들이 도요오카시의 자랑이고 긍지입니다. 황새가 이런 똑똑한 이이들을 키워냈습니다." 


- 경남에는 도요오카시와 비슷하게 따오기 복원사업을 하는 창녕군이 있습니다. 앞서 실천하고 경험한 자치단체장으로서 도움말을 주신다면?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자칫 잘못하면 따오기를 좋아하는 사람만으로, 환경을 지키자는 사람만으로 한정될 수 있습니다. 


따오기를 자연 야생에 되살리면 사람한테도 득이 됩니다.(도요오카 황새쌀은 일반쌀보다 30% 넘게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이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도록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발짝 한 발짝 욕심내지 말고 착실하게 착실하게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루빨리 성과를 내고 싶다, 이렇게 초조해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도요오카에서 민과 관이 합동으로 재생해낸 다이습지.


-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자연생태 복원을 위한 한일 교류 협력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요? 


"일본과 한국이 서로 잘 아는 것에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포럼에 와서 많이 알고 돌아갑니다. 한국사람도 그렇게 많이 알고 활동하고 공유하고 자극을 받으면서 계속 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황새는 국경이 없습니다. 한국이고 일본이고 가리지 않고 자연환경이 좋은 데에 내려앉습니다. 국경이 없는 황새처럼 한국과 일본 사람들도 서로 자연환경이 좋아지도록 나라를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아이들 교류는 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등에서 아이들 교류를 기획하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됩니다. 이번 포럼에는 도요오카 애들이 (한국 경남에) 왔고요. 


자연이라는 공통 테마를 갖고 같이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한일 교류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도요오카는 황새를 통한 생태관광 활성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전망은 어떤지, 한국 또는 경남 사람들에 대한 부탁이 있다면? 


일본 황새가 절멸한 상태에서 중국에서 황새가 날아와 앉았던 도시마습지. 그날이 8월 5일이어서 그 황새는 하치고로우(八五郞)가 별명이 됐는데 여기 습지도 그래서 하치고로우습지라 하기도 합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전통·문화·역사를 함께 나누고 그런 가운데 자연생태를 한국과 일본이 상의하며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기억일 텐데, 누구랑 만나고 어떤 얘기를 했느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여행에서 큰 목적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끼리, 농부는 농부들끼리 주민은 지역주민들끼리 아이는 아이들끼리 교류가 지금 단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마습지 인공둥지에 황새가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도요오카 시장 일행은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자치단체장한테서도 이처럼 생태와 역사와 문화에 대해 나름 생각을 갖추고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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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장승포신사 ‘곤피라’는 어떤 일본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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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생태체험

거제어촌민속전시관~학동해수욕장

 

5월 생태체험은 회원한솔·샘동네·옹달샘·느티나무·어울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물고기를 주제로 삼아 진행했습니다. 경남에서 물고기잡이가 가장 성한 데를 꼽으라면 거제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거제 가까운 통영이 중앙시장·서호시장의 엄청난 활기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어업 관련 유통물량이 많기는 하지만,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건져올리는 등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거제가 더 많겠습니다.

 

창원에, 그리고 마산과 진해에 바다가 있는데도 굳이 거제를 찾아 생태체험을 나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제어촌민속전시관이라는 훌륭한 시설이 다름 아닌 거제에 자리잡은 까닭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번 둘러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전시돼 있는 물고기(박제 등)들 대부분이 거제 바다에서 잡은 것들이고 아니면 거제 사람들이 기증한 것들이랍니다.

 

이처럼 거제 바다에서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이유는 여기 바다가 차가운 한류와 따뜻한 난류가 몰려 뒤섞이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데 사는 물고기는 물론 따뜻한 데 사는 물고기까지 해류를 타고 흘러드는 거제 바다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어업 이민을 가장 먼저 한 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제입니다. 지세포라든지 장승포라든지 하는 데가 그런 일제 어업이민의 거점이 됐던 지역입니다.

 

그런 때문으로 장승포항 동쪽 야트막한 마루에 일제가 들이세운 신사에는 바다에 나간 배의 안전을 지켜주는 곤피라(金毘羅)라는 일본신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일제의 침략 정책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 어업 이민 얘기를 들려줬더니 뜻밖에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보입니다.

 

거제어촌민속전시관에 도착해서는 미션수행을 했습니다. 두세 명씩으로 팀을 이뤄 한 나절 봉사하러 나온 두산중공업 선생님과 함께 손을 잡고 둘러보며 주어진 문제의 해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이렇게 선생님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퍽 좋아합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쓰는 소감문을 보면 '같이 다닌 일'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미션 문제는 전시관 전체를 두어 차례 찬찬히 둘러보면 모두 알아낼 수 있는 것들로 모두 스무 개를 내었습니다. 거제를 비롯한 남해안 지형(섬이 많고 물이 적당하게 깊음)에 알맞은 그물질이 무엇인지, 모터로 움직이는 배가 나오기 전에 거제도에 있었던 배를 무엇이라 했는지도 물었습니다.

 

아울러 전시관에 나와 있는 물고기 이름을 특징에 맞게 찾아 적게도 했는데요, 이는 여러 물고기들을 한 번이라도 살펴보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1층과 2층 전시실을 서너 차례 오르내리는 열성을 보이는 친구들도 있고 미션과 무관하게 이리저리 오가면서 자기들 보기에 재미있는 거리를 찾아 즐기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즐기는 동안 정해진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전시관 여기저기를 바삐 오가며 소리를 내던 아이들이 전시관 바깥 정자 그늘 아래에 모였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며 문제 풀이를 합니다.

 

그런 다음 다들 얼마나 맞혔는지 헤아려봅니다. 모두 스무 문제 가운데 열일곱 개를 맞힌 팀이 셋이었습니다. 크게 어렵지는 않은 내용이고 또 선생님과 같이했다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은 가운데 이만큼 맞혔으면 기대 이상입니다.

 

세 팀 가운데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한 팀에게 격려 차원에서 '쥐꼬리 장학금'이 들어 있는 봉투 셋을 건넸습니다. 지금껏 열심히 공부했으니 이번에는 열심히 먹고 놀 차례입니다. 몽돌로 이름높은 학동해수욕장으로 옮겨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곧장 해수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물수제비 뜨는 아이들.

 

바다는 파도가 들이치며 물결이 일렁이는 데 따라 크고작게 소리를 내었고, 아이들도 곧바로 그런 바다에 호응해 즐겁고 기쁘게 소리를 내지릅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내맡기는 아이, 파도 따라 왔다갔다 하며 물결 밟기 하는 친구, 물수제비 뜨려고 바다로 돌멩이를 던지는 친구, 바다 풍경에 흥이 겨워져 마냥 노래하는 친구, 한쪽 모퉁이에 쌓인 모래를 퍼내며 물길을 만드는 아이…….

 

파도는 아이들한테만 소리를 내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파도는 몽돌한테까지 소리를 내도록 했습니다. 몽돌들은 파도가 쓰다듬어 올리고 내리는 데 따라 몸을 뒤척이고 휩쓸리면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흉내내지 못할 음악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감동적입니다. 물소리와 뒤섞여 들려오는 "촤르르 촤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는, 아이들 울려퍼지는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와 비슷한 듯 닮아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소감문을 씁니다. 자기 깜냥에 맞춰 쓰거나 말거나 하고 그림도 그립니다. 나름 느낌이 잘 표현된 셋을 골라 쥐꼬리 장학금을 안겼습니다. 학동해수욕장에서 흠뻑 젖어가면서 했던 물놀이가 좋았다는 아이들도 많았고요 어촌민속전시관에서 보낸 시간이 즐거웠다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퀴즈(미션) 푸는 게 재미있었고 쥐꼬리장학금도 재미있었다. 퀴즈에서 아쉽게도 우리가 졌지만 다음에 이기면 되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우승은 필요없었던 것 같았다. 우승이라는 빈자리에 재미가 대신 있어주어서 아주 좋았다." 등등.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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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십계명 : 2015년에 새로 정리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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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지망생)을 위한 글쓰기 십계명은 절대 아닙니다. 의사 표현과 전달을 위해 글을 쓰기는 해야 하는데 글쓰기가 두렵거나 자신없어하는 이들을 위한 글쓰기 십계명입니다.

 

저도 스스로가 글쓰기를 잘한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 물어오고 주문해 오는 일이 있어 시간을 내어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다 들어맞는 십계명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든 한 번 읽어보시고, 써먹을 만하다 싶으면 가져가시고, 그렇지 않거든 가져가지 않으시면 그만입니다.

 

1. 띄어쓰기나 문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름난 글쟁이들도 종종 비문(非文)을 씁니다.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조정래, 시인 고은의 글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수(高手)인데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고수이니까 그렇습니다.

 

그이들은 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글쓰는 기본 목적은 의사 전달과 소통입니다. 뜻을 전하고 나아가 감동을 주는 데 도움된다면 비문을 써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의사만 주고받을 수 있다면 문법 띄어쓰기 정도는 틀려도 됩니다.

 

2. 잘 쓰지 않아도 뜻만 통하면 됩니다

 

글쓰기에서 가장 큰 장벽은 '잘 써야 한다',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글쓰는 목적이 아니라 글쓰는 방법만 가르친 탓이 큽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헤엄치는 방법을 익힌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틀려보지 않고 바르게 쓰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틀리기도 쉽지만 고치기도 쉽습니다. 컴퓨터가 바로잡아 주기도 합니다.

 

인터파크에서 가져왔습니다.

 

3. 처음부터 짧게 쓸 필요는 없습니다

 

문장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전달하려는 뜻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문장이 길면 글이 꼬이기 쉽습니다. 문장이 짧으면 읽는 사람이 쉽게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짧게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정리돼 있어야 짧게 쓸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글이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짧게 쓰려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됩니다.

 

먼저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길게 써 놓습니다. 이런저런 꾸밈말도 여기저기 달아봅니다. 그러고 나서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호흡이 길다 싶으면 툭툭 잘라주고 꾸밈이 지나치거나 거치적거린다 싶으면 지워줍니다.

 

4. 어깨에 힘주기는 글을 망칩니다

 

처음 글쓰기를 하면서 종종 저지르는 잘못이 '어깨에 힘주기'입니다. 권위주의적인 표현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안 되는 시절입니다.

 

무겁고 권위가 잔뜩 들어간 글은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친절하고 편하면서도 내용이 알찬 글이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깨에 힘을 주다 보면 자기가 잘 모르는 낱말을 갖다 쓰기도 합니다. 어려운 낱말을 써야 무게가 나간다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잘 모르고 어름하게 아는 낱말을 쓰면 뜻이 제대로 전해질 리 없습니다.

 

5. 논리가 아니라 감성입니다

 

사람은 논리보다는 감성에 따라 더 많이 움직입니다. 논리는 상대방을 꺾는 데 유용하지만 감성은 상대방을 품는 데 유용합니다. 글쓰기도 논리적이기를 지향하는 대신 감동적이기를 지향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잘 맞아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글은 가치가 덜합니다. 이제는 논리조차 감성과 마음을 움직이는 데 쓰도록 해야 좋은 시대입니다.

 

6.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은 편견입니다

 

생각을 정리한 다음 글을 쓰겠다는 얘기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소설가들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인 나를 끌고 다닌다." 작가의 지향이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풀려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고백입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글 끄트머리에 빠져나오면서 적어야 할 글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글쓰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의 장벽, 생각의 장벽일 따름입니다.

 

어지간하면 글을 써가면서 생각도 더불어 정리하는 식으로 해야 좋습니다. 들어가는 한 마디만 있으면 족합니다. "그이는 자신의 결정을 곧바로 후회했다." 이런 식으로요. 들어가는 글 한 마디도 끝까지 고집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써나가면서 보고 적당하지 않거든 버리면 되고 어쩌면 오히려 버려야 합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만 소용이 됩니다. 강을 건넌 다음 뗏목을 지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시작이 끝까지 유지돼야 한다는 생각은 또다른 무의식의 감옥입니다.

 

마찬가지, 인터파크에서 가져왔습니다.

7. 사진은 이제 필수, 꼭 곁들이도록 합니다

 

지금 대세는 비주얼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커지고 또 뚜렷해졌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글자가 아니라 사진이 주인공인 시대입니다. 글자는 조역일 따름입니다.(하지만 아주 중요한 조역입니다.)

 

처음부터 사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사진 찍는 방법을 일러드릴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글에 담을 내용과 맞아떨어지도록 찍고, 나아가 그런 내용을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진이 주재 하나만 담아서는 밋밋합니다. 저는 주재와 부재를 각각 하나씩 담기를 권합니다. 인물이 주인공이라 해도, 인물을 앵글 한가운데 덩그마니 놓고 찍어서는 인물조차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럴 듯한 배경으로 받쳐줘야 마땅할 것입니다.

 

8. 마지막 마침표는 또다른 시작입니다

 

문인은 아니지만 글을 아주 잘 쓰는 어떤 사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문학적·예술적으로 잘 쓰는 글이 아니라 말하려는 요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입니다.

 

동료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잘 쓸 수가 있느냐?'고요.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글 쓰고 나서 스무 번을 고쳐."

 

어쩌면 글은 들여다볼 때마다 고칠 데가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정확하고 세련된 표현은 생각하면 할수록 샘솟듯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신자들 앞에서 강론을 아주 잘 하기로 유명한 신부(神父)가 있었습니다. 신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강론 원고를 쓴 다음에는 꼭 어머니에게 읽어드리고 어떤지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잘 모르겠다면 고쳐 썼습니다.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고 하면 그 대목을 손질했습니다. 어머니가 잘 알아듣겠다 하시면 기뻐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부는 어떻게 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자기가 어머니가 돼서 스스로 읽고 고쳤습니다. 어머니라면 이해했을까? 어머니한테 어려운 표현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고 따졌습니다.

 

9. 막판에 한 번 정도 되풀이는 서비스입니다

 

옛날에는 되풀이가 쓸데없는 노릇이기만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사람들이 대체로 글을 꼼꼼하게 읽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 등등에 갖은 정보가 넘쳐나면서 더욱 그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낱낱이 따져 읽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썼다 해도 끄트머리에서 한 번 되풀이해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독자들은 인상이나 기억을 뚜렷하게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10. 상투(常套)를 쓸 때는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상투'는 늘 쓰는 투라는 뜻입니다. 상투가 상투가 된 데에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이 표현이 산뜻하고 또 강렬했을 것입니다. 어떤 참상이 있다 했을 때, 참상 그 자체를 그려보이기보다 그냥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더라는 표현이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낱말 또는 표현이 이런 산뜻함이나 효과를 갖춰야만 상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투는 되도록 쓰지 않아야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 상투를 제대로 골라서 알맞게 써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상투라 해도 무슨 피해야 하는 나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상투적(常套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뻔하다'입니다. 처음에는 산뜻함도 있고 강렬하고 효과적이다 보니 자주 쓰였겠지요. 하지만 자주 쓰이다 보니 원래 산뜻함과 강렬함은 퇴색되고 효과도 잃었습니다.

 

뻔한 말과 사연은 사람을 질리게 하고 관심이 없게 만듭니다. 지금 쓰려는 '상투'가 '상투적'이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덧붙임 : 우리 말글을 위한 최소한의 에티켓

 

'갖다' 따위 낱말은 적게 쓸수록 좋습니다. 기자회견을 가졌다, 경기를 가졌다, 행사를 가졌다, 협약식을 가졌다, 수료식을 가졌다, 발대식을 가졌다, 견해를 갖고 있다, 시간을 가졌다, 활동을 가졌다, 간담회를 가졌다, 피로연을 가졌다…….

 

영어 take 또는 have에서 나온 표현들입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주범이 일어였다면 지금은 영어입니다. '가졌다'는 다른 낱말들이 많이 쓰이지 못하도록 합니다. 획일화가 되면서 다양성을 빼앗습니다.

 

우리말 곳간은 갈수록 썰렁해집니다. 얼핏 생각해도 이렇습니다. '행사(경기)를 치렀다', '피로연을 베풀었다', '시간을 누렸다', '생각하고 있다(또는 여기고 있다)'.

 

시간에 쫓기든 어쨌든 어쩔 수 없이 영어식 또는 일본식 표현을 쓰더라도, 달리 좀더 나은 표현은 없을까 고민까지 거두지는 말아야겠습니다. take나 have 말고도 이런 강도 노릇을 하는 영어가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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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딴에’식으로 지역밀착하고 보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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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생태 사람은

파도파도 끝이 없는

지역밀착의 보물창고

 

1. 지역을 정말 잘 알고 있는지요?

 

지역을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지역을 많이 아는 사람은 있어도 지역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모른다는 얘기이지 않을까요?

 

누구든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앎이 아무리 크다 해도 지역이 품고 있는 전체 콘텐츠 그 자체보다는 언제나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늘품이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갈수록 아는 것이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해딴에가 진행한 도랑살리기를 보도한 경남도민일보

 

지역 역사와 생태 그리고 사람은 무한한 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뻔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는 이야기도 색다른 시각에서 보여줘야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 지역 역사와 생태를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연관짓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지역 역사를 다룰 때는 '화려찬란했던 지난날'에서 얘기가 멈추는 경향이 큽니다. 그 화려찬란한 지난날을 지금 여기로 불러내어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경남에는 최치원 관련 유적이 많습니다. 최치원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외국인이라 꺾였고 모국 신라서는 신분이 육두품밖에 안돼 자빠졌습니다. 최치원의 이런 행적을 갖고 오늘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지역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2. 지역밀착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지역밀착 보도는 지역신문이 할 수 있는 지역밀착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쩌면 보도는 아주 작은 한 분야일 따름입니다.

 

왜일까요? 지역에 지역밀착을 하는 주체가 없거나 적으면, 당연히 지역밀착 보도를 꾸준히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역밀착을 하지 않거나 못하거나 되지 않은 사실들을 찾아 비판하는 보도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원봉사+여행=볼룬투어라는 해딴에의 새로운 시도를 보도한 경남도민일보.

 

사람들은 또 흔히들 신문·방송·통신이 ‘심판’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착각은 보도매체 종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보도매체는 절대 심판이 아닙니다.

 

보도매체가 하는 역할 가운데 사실 전달 말고 시시비비도 있기에 생기는 착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심판만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지는 않습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하면서 살아갑니다.

 

더군다나 어느 누구도 보도매체한테 심판 역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신문·방송·통신은 시시비비를 가려 말하는 여러 주체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그러나 잘 알려지지는 않은 거제초교 본관 건물을 둘러보는 생태역사기행 일행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지역신문이 보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지역밀착을 하려 할 때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이 심판 노릇은 않고 운동장에 직접 뛰어들어 경기를 하려 한다."

 

저는 지역신문이 자기 역할을 보도로 한정하면 지역밀착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신문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지역밀착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3. 진정한 지역밀착은 보도에 있지 않습니다

 

지역신문이 가치롭게 여기는 바가 있다면 그것을 보도를 통해 주장만 하지 말고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역신문이 보도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그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 실행해야 하고, 그런 과정과 결과를 다시 신문 보도로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남과 호남 사이 심리적인 거리를 줄이자는 취지로 했던 '이웃 고을 마실가자'에 대한 경남도민일보 보도.

 

경남도민일보는 이런 사업을 실행하는 주체로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해딴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를 뜻하는 경상도 지역말입니다. 해딴에는 캐치프레이즈가 ‘잘 놀아야 잘 산다’입니다. 공공성과 영리를 동시에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는 일은 이렇습니다. 잡다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합니다. 마을 만들기와 도랑 살리기를 합니다. 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나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합니다.

 

4. 4년 동안 벌여온 이런저런 밀착

 

함양군 휴천면 임호마을 한 곳에서 2012년에는 마을만들기를 했고, 2013년에는 도랑살리기를 했습니다. 2014년에는 도랑살리기를 창녕군 계성면 명리 마을과 함양 백전면 망월마을 두 군데서 진행했습니다.

 

망월마을 도랑살리기 현판식 모습.

 

다른 민간 역량을 끌어들일 때도 있습니다. 자원봉사(Volunteer)와 여행(Tour)을 합한 볼런투어인데요, 자원봉사의 보람에 더해 여행의 즐거움까지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 벽화도 그리고 솟대도 만들고 버스 정류장 단장도 하고 원두막 쉼터도 들였습니다.

 

경남자원봉사센터와 더불어 함양신협 직원들 참여로 진행한 볼런투어. 벽화를 그리는 모습입니다.

 

볼런투어 도중 떡메롤 몸소 떡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사업 결과는 경남도민일보에 보도합니다. ‘지역 밀착’의 본보기를 스스로 만들고 이를 보도로 알려나갑니다.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도 2013년과 2014년 이태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수능시험 끝난 뒤 경남도교육청 지원을 받아 고3 학생들을 상대로 벌입니다.

 

나라(고장)사랑 청소년 역사문화탐방에서 발굴 중인 하동읍성을 찾는 쉽지 않은 발길을 한 아이들.

 

아시는대로 지금 교육은 지역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현실입니다. 학교도 학원도 전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만 가르칩니다.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에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만지고 누리고 즐기게 하자는 취지로 제안해 성사시켰는데,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하며 선생님들도 썩 만족스러워합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 경남도민일보에 기획연재로 실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나고 자란 고장의 정체성을 찾는 내용을 탐방에 담았습니다.

이런 청소년 역사·문화탐방활동에 지역 중견기업 한 군데에서 가치를 인정하고 돈을 대주는 일도 생겼습니다. 덕분에 2014년 통합 창원시 지역 다섯 학교 학생들에게 탐방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이 벌이는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함께하는 토요동구밖 교실’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두산중공업은 지역사회 기여 차원에서 형편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합천 삼가 삼가장터삼일만세운동기념탑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두산 토요동구밖 교실 역사탐방 프로그램입니다.

 

2014년에는 모두 일곱 가지 프로그램이었고 2015년에는 다섯 가지로 줄었는데요, 이 가운데 생태체험과 역사탐방 두 가지를 해딴에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해딴에에서 제안한 것이 아니고 두산중공업에서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저희한테는).

 

두산중공업은 2014년 사업이 성과가 좋았다고 판단했는지 2015년에 새로 시작하는 진로체험 프로그램도 해딴에에 맡기려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결과는 보도를 통해 지역사회에 알리고 공유하고 있습니다.

 

에너지를 주제로 삼아 진행했던 2014년 청소년 기자단 활동을 담은 경남도민일보 지면.

 

지역사회 쟁점이나 현안을 찾아가는 어린이·청소년 기자단 운영도 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도랑 살리기를 주제로 삼아 어린이들을 모아 진행했고 2014년에는 밀양 초고압송전탑 반대운동과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 핵발전소를 한 데 묶어 중·고생 에너지지킴이 기자단 활동을 벌였습니다.

 

청소년 기자단 활동 도중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 직원의 설명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 학생들.

 

초고압송전탑 설치로 심각한 갈등이 일어난 밀양 용회마을을 찾아 주민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는 청소년 기자단.

 

청소년 기자단은 첫날에 현장을 돌아보고 이튿날에는 이렇게 학교에서 신문만들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손수 만든 신문.

 

자기 팀이 만든 신문을 들고 발표하는 모습입니다.

 

2015년에는 낙동강과 남강 등 우리 강들을 둘러보고 그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는 ‘우리 강 청소년 기자단’을 운영합니다.

 

이처럼 공익성이 인정되는 분야에서는 사업 공모를 하는 이런저런 기관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해딴에는 적극 참여합니다.

 

2012년에는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지역문화 초록아카데미 사업’에 응해 해딴에의 ‘버스 타고 함양 속으로’ 프로그램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함양 모든 명소를 군내버스를 타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3년짜리였는데, 홍준표 도지사가 쌩까는 바람에 1년만에 접었습니다.)


 

지역 손막걸리를 찾아 떠난 이야기탐방대 활동.

 

 

2014년에는 경남문화예술진흥원과 함께 ‘경남·부산 이야기 랩 - 경남이야기탐방대’ 프로젝트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 제출해 선정됐는데, 2016년까지 이어지는 3년짜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경남 대표 선비 남명 조식을 찾아 떠난 청소년 이야기 탐방대. 남명 제자 곽재우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으려고 북을 매달았던 나무인 현고수를 찾았습니다.

 

손막걸리를 찾아 떠난 예술인 이야기탐방대. 남해 남면집. 농주가 걸쭉합니다.

 

이밖에 경남 지역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한테 경남 역사·문화유산을 탐방하게 하는 프로그램도 공모에 응해 선정이 됐습니다.

 

5. 지역밀착보도로 얻게 되는 보람

 

전남 장흥으로 '이웃 고을 마실가자'를 나선 일행들이 보림사 지장전 벽화를 관심깊에 보고 있습니다.

 

전남 장흥 통합의학박람회 경연대회에 나선 전남 무안 80대 어르신들의 무대.

 

이렇게 지역밀착을 보도 바깥에서 하다 보면 지역 밀착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여럿 만나게 됩니다. 아울러 지역밀착을 하고 싶고 또 돈이나 다른 것은 갖출 수 있는데 방법이 없는 그런 사람 단체들과도 알게 됩니다.

 

지역밀착 기삿거리를 일부러 찾아나서는 대신, 지역신문이 나서 지역밀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역신문이 평소 가치롭게 여겨왔던 내용을 다룬 보도를 바탕삼아서 보도를 벗어났다가 다시 보도로 돌아오는 지역밀착사업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로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윈-윈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루 보탬이 되고 고루 보람이 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 누이도 계속하고 싶은 사업이고 매부가 도중에 그만둘 리도 없는 사업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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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들이 챙기는 촌지 얼마나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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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지식공방).


우연히 이 책을 봤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자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책이다. 연합통신(현 연합뉴스)과 문화일보, 아시아투데이 등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일했던 김영인 기자가 썼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기자를 하고, 기자를 그만두면서 언젠가는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이 '촌지 이야기'였습니다. 기자들의 촌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라고 집필동기를 밝혔다. 당초 목표는 지난 세기인 20세기 과거사 위주였으나 21세기 현대사에도 촌지는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면서 오히려 '뽑기' 또는 '추첨식'의 진화된 촌지까지 생기고 있다고 꼬집었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기자실 출장비는 어디서 만드나

2부 '기자'라는 단어를 한자로 쓰면?

3부 누드쇼 구경이 취재라고?

4부 21세기에 진화된 검찰총장의 '추첨식 촌지'

5부 성골기자, 진골기자, 평민기자 순이다.


제목만 봐도 한국사회의 기자실 기자단 문화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방 출장과 해외 취재를 핑계로 각종 기관과 기업으로부터 이른바 '슈킹'(슈킨 集金의 일본말)과 콜(call)로 '낑'(촌지)를 끌어모으는 수법은 물론 어김없는 호화 술판과 성매매까지 이어지는 추악한 기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통해 기록하는 기자(記者)가 아니라 기자(欺者)가 되고, 기자(忌者)가 되며, 기자(棄者)까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자! 당신은 과연 기록하는 기자인가, 속여먹는 기자인가, 기피대상이 되는 기자인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기자인가?



책은 술술 읽힌다. '기레기'라는 가명의 기자를 내세워 그가 겪은 상황을 짤막짤막한 손바닥 소설처럼 풀어냈기 때문이다. 나도 한 시간 만에 읽어버렸다.


나도 지난 2007년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커뮤니케이션북스)라는 책에서 지역신문 기자 사회의 촌지 실태를 고백한 바 있다. 김영인 기자의 이 책은 소위 '중앙지'라는 서울지역신문과 통신, 방송사 기자들의 촌지 실태를 까발린 책이다.


읽는 동안 내 얼굴이 후끈후끈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울수록 더 까발려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런 기자(棄者)놈들은 매장시켜야 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한국기자협회가 나서 기자윤리를 위반한 기자를 제명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기자협회 회장과 임원들부터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추신 : 이 책에는 내가 재직 중인 <경남도민일보> 이야기도 나온다. 다행스럽게도 부끄러운 사례가 아니라 좋은 사례로 소개된다. 그 결정을 할 때 내가 해당부서 데스크였다. 그때 정부의 500만 원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거나, 그걸 까발리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책에 시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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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잘 찍어선 안 된다는 사진기자 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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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 박수현. 현재 국제신문 사진부장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를 잘 모른다. 2~3년 사이 그의 사진 강좌를 두 번 들어본 게 고작이다. 알고 보니 그는 글도 되고 사진도 되는 기자였다. 


과거 사진기자는 사진만 잘 찍으면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땐 사진이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워낙 비쌌다. 그래서 사진을 업으로 삼는 이가 아니면 카메라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국민이 DSLR을 갖고 다니는 시대다. 그만큼 고급카메라가 많이 보급됐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스마트폰 카메라의 화질이 이미 DSLR급이기 때문이다.


콘텐츠 생산력을 가진 펜(pen) 기자도 디지털 기술을 알아야 하고, 기술자는 콘텐츠 생산력을 가져야 하는 시대다. 또한 기자라면 사진, 영상, SNS 활용까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 사람들도 수준과 기량의 차이는 있지만 다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 중인 박수현 기자. @김주완


이런 시대에 사진기자도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중에서도 박수현 기자는 좀 특출하다. ‘기자란 모든 걸 조금씩 알아야 하지만, 그 중 한 가지 정도는 아주 깊이 알아야 한다’고 나는 배웠다. 박 기자는 사진만 잘 찍어선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물, 풍경, 사건 취재도 하지만 그 중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을 개척했다. 바로 수중촬영, 해양생태 전문가다. 국제신문에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그 분야 수많은 기획기사가 전문성을 입증한다.


그는 또한 몇 년 전부터 ‘국제신문 대학생 사진기자단’을 조직해 그들의 성장을 돕는 한편 신문지면을 한층 풍성하게 하고 있다. 이건 독자를 조직하는 능력이다.


사진과 글쓰기 두 가지 무기로 콘텐츠 생산력을 갖추고,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독보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독자 커뮤니티를 만들어 그들을 신문제작에까지 참여시킬 수 있는 기자는 흔치 않다. 게다가 그는 이 모든 걸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기자협회보 [기자가 말하는 기자]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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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남부시장 61호 가게와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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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 남부시장에 가면 61호 가게가 있습니다. 순천에서는 남부시장을 아랫장이라고도 하더군요.(북부시장은 대신 웃장이라 하고요.) 다른 가게에서도 비슷한 먹을거리를 만들어 팔지만 언제나 가장 붐비는 데는 여기였습니다.

 

붐비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게에서는 튀김을 미리 해뒀다가 내어놓지만, 61호 가게는 주문 받은 다음에 튀김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데보다 훨씬 신선하고, 또 영양으로 따져도 썩 낫습니다.

 

식용 기름은, 참기름이든 들기름이든 아니면 해바라기기름이든 포도씨기름이든 공기와 접촉하면 바로 그 순간 산폐(酸廢)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렇지만 대부분 가게는 이런 데에는 무신경합니다. 다른 밥집에서도 저는 참기름 따위를 뚜껑으로 밀폐하지 않고 내놓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제가 사진찍는 깜냥이 모자라서, 배추는 지나치게 크고 찔룩게 튀김은 작게 나왔습니다.

 

어쨌거나 이태 전에 여기서 우연히 찔룩게튀김을 먹어보고는 그 고소함을 쉬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같은 전남의 화순 운주사 답사 갔다 오는 길에 부러 걸음을 해서 순천남부시장 61호 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

 

역시 맛이 좋았습니다. 깔끔하게 해서 한 접시 담아내오는데 바삭바삭 씹히는 느낌이 좋았고 그 맛 또한 고소해서 좋았습니다. 게다가 철을 잘 맞춘 덕분인지 알까지 배여 있는 찔룩게가 적지 않아 맛이 더욱 그럴 듯했습니다.

 

 

저는 찔룩게가 무슨 순천 특산물이라도 되는지 싶어서 슬쩍 물었습니다. “‘찔룩게’라는 게가 따로 있나요?” 튀김을 탁자에 내려놓은 아줌마는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보더니 이랬습니다. “다른 데서는 ‘칠게’라 해요.” 그랬었군요.

 

수도권 지역말로는 ‘칠게’라 하고 전라도 지역말로는 ‘찔룩게’라 하고 이를 경상도(경남 지역 바닷가)에서는 ‘뻘떡게’라고 하지요.

 

언젠가 경남 사천 바닷가에 갔다가 그쪽 사람한테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뻘떡게라 하는 까닭이 뭐냐?’고 물었더니 사람좋은 얼굴을 한 그 사람은 웃으면서, “뻘로 떡칠을 하고 있으니까 뻘떡게라 하지” 했었지요.

 

머리전.정구지전.

 

어쨌거나 이날 우리는 찔룩게 튀김 말고 ‘정구지전’이랑 ‘머리전’까지 더 시켜서는 막걸리도 두 통을 비웠습니다.

 

정구지전도 싱싱하고 퍽퍽하지 않아 맛있었으며(오징어 같은 해물을 넣는 까닭이 거기서 물기가 배어나오기 때문이랍니다), 명태대가리를 넣어 부친 ‘머리전’ 또한 꼬들꼬들한 살점을 발라먹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터지게 먹었는데도 가격은 1만4000원밖에 안 됐습니다. 찔룩게 튀김이 5000원으로 가장 비쌌고 정구지전과 머리전은 각각 2000원이었습니다. 막걸리도 한 통에 2500원으로 헐해서, 1만5000원도 못되는 1만4000원이었습니다.

 

순천남부시장 61호 가게 풍경. 다 먹고 나오는 길에 찍었는데, 저녁 5시를 살짝 넘은 시간대였는데도 이렇게나 사람이 많았습니다.


다음에 또 들르야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드는, 순천 사람들은 조~옿겠다 하는 타령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런 순천남부시장 61호 가게였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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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생 황새 복원 6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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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요오카시와 효고현의 황새 복원 관련한 역사입니다. <황새, 자연에 날다>(박시룡·박현숙·윤종민·김수경 지음, 지성사, 2만원)를 바탕으로 삼아 나름으로는 길어지지 않게 정리해 봤습니다.

 

들여다보시면 바로 아시겠지만 일본은 길게 보고 천천히, 조금씩조금씩 진행했습니다. 자치단체장도 당장 실적 도출을 위해 정치·행정적으로 서두르지 않았고 지역 주민들도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사회·경제적으로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요오카와 효고현이 황새 보전을 위해 가장 먼저 벌인 사업이 학생을 비롯한 지역사회 구성원에 대한 교육·홍보였다는 사실 또한 퍽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눈에 내려앉은 황새를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는 나카가이 무네하루 도요오카시장.

 

1.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는 황새와 관련이 깊습니다. 도요오카시는 일본 혼슈(本州)의 효고현 북부에 있고 효고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기초자치단체입니다. 북쪽으로 동해(일본해)와 이어지고, 동쪽으로 교토부(京都府)와 붙어 있습니다. 마루야마가와(圓山川) 강이 도요오카를 가로질러 동해로 빠져나가는데 시내 중심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2.도요오카시는 우리나라 충북 음성군처럼 일본에서 황새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이랍니다. 1930년대만 해도 100마리 넘는 황새가 도요오카에서 살았는데 30년도 채 안돼 절반 아래로 줄어들었습니다. 도요오카시의 황새보호운동은 1955년에 시작이 됐습니다.

 

3.1965년에는 야생 황새를 인공 둥지로 끌어들여 인공으로 번식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서 야생 황새는 1971년 절멸했고 이후 러시아에서 황새 여섯 마리를 들여와 1989년 인공 번식에 성공했습니다.

 

2005년 우리(cage)에서 기르던 황새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해 2014년 현재는 72마리가 야생에서 살고 있습니다.

 

4.도요오카에 가면 야생 황새도 있고 황새 조각과 그림, 황새 관련 상품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도요오카역과 시청(市役所) 건물 벽, 상점가와 간판, 버스와 기차, 보도블록에 황새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울러 술과 쌀과 빵과 물과 식초에 이르기까지 황새 관련 상품이 있습니다. 도요오카 시민들에게 황새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삶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 기노사키온천.

 

5.효고현 그리고 도요오카시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온천이 바로 기노사키(城岐)입니다. 기노사키온천에는 황새 관련 전설이 있습니다. 조메이(舒明) 천황 시절(629~641) 지금 기노사키 온천 자리가 당시는 논이었답니다.

 

논을 지나던 농부 눈에 황새 한 마리가 소나무에서 논으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되풀이하는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눈여겨봤더니 황새는 다리가 다쳐 있었고 내려와서 하는 일은 논에서 솟아나는 따뜻한 물에 다리를 담그는 것이었답니다. 이렇게 해서 황새 다리는 며칠 뒤에 원래처럼 말끔해졌습니다.

 

농부는 이 따뜻한 물이 영험한 줄을 알아채고 그 옆에 작은 집을 짓고는 일을 마치는대로 틈틈이 들어가 건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기노사키 온천의 유래입니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85년)부터 지금까지 역사가 오랜 온천탕 일곱 군데를 순례하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온천입니다. ‘고노유(鴻の湯)’, 황새의 온천이라는 뜻으로 전설 속 황새가 다친 다리를 치료했던 바로 그 장소라 합니다.

 

돌아온 봉순이. 일본 도요오카에서 경남 김해 봉하마을까지 날아온 녀석입니다.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6.에도(江戶)시대(1603~1868년) 일본 도후쿠(東北)~규슈(九州) 지역에 황새가 살았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도요오카시 관련으로는 다지마이즈시번(但馬出石藩)의 3대 번주 센고쿠 마사토키(仙石政辰)가 1744년에 매를 풀어 사냥한 학의 고기로 국을 끓여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학으로 끓인 국은 진미였으며, 길조인 학을 사냥할 수 있었던 집단은 번주급 귀족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타지마에는 학(두루미)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여기서 학이라고 한 것은 사실 황새라는 점도 함께 밝혀놓았습니다.

 

그 뒤 7대 번주 센고쿠 히사토시(久利)는 자기 소유 사쿠라오야마(櫻尾山)에 둥지를 튼 황새를 길조라 여겨 산 이름을 쓰루야마(鶴山)로 바꾸고 황새 사냥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7.메이지(明治 1868~1912년)시대 초기에는 황새·따오기 같은 큰 새에 대한 수렵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렵규정이 공포된 메이지 25년(1892)까지 25년 동안 무분별한 황새 사냥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황새는 급작스레 사라지게 됐고 다지마(다지마는 지금 도요오카시의 한 부분임)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892년 마련된 수렵규정에서도 학이나 제비 등은 보호 대상이 됐지만 황새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황새가 논에서 미꾸라지·개구리 따위를 먹을 때 어린모를 짓밟는 해로운 새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지마 지역 쓰루야마가 황새 번식지로 지정돼 여기서만큼은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8.메이지·다이쇼시대를 지나면서 황새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황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자연스레 늘어났습니다. 쇼와(昭和 1926~1989년) 초기에는 전성기라 해도 될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1930년 효고현 조사에서 도요오카시에 살고 있으리라 예상되는 황새는 100마리 정도였습니다.

 

당시 도요오카시에 사는 황새가 50~60마리로 확인됐는데 둥지 번식 상황과 견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였습니다. 서식 환경 악화와 먹이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해 태어난 어린 황새들이 도요오카를 떠났기 때문으로 짐작됐습니다.(새끼보다 힘이 센 어른 황새들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논에서 아이들이 모내기하는 모습을 노트북 컴퓨터 모니터로 보여주면서 얘기를 하는 나카가이 시장.

 

9.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성기는 끝났습니다. 1943년 전쟁 물자로 송진과 목재를 공급하려고 쓰루야마의 소나무를 벌채한 데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벌채는 천연기념물 담당인 문부성 허락없이 진행됐습니다.

 

정식 벌채 신고서는 이듬해 제출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큰 소나무들도 모두 자빠졌으며 서식처를 잃은 황새는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게다가 농부들은 황새가 어린모를 밟는다며 논에서 쫓아냈고 가난한 사람들은 황새를 잡아 먹었습니다.

 

전쟁은 이동 경로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러시아 아무르강 중·하류, 중국 동북·남부지역, 조선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중간중간에 있는 서식 환경까지 죄다 파괴돼 버렸던 것습니다.

 

10. 1955년 일본조류보호연맹 이사장 야마시나 요시마로(야마시나 조류연구소 소장)는 효고현 사카모토 마사루 지사에게 절멸 위기 황새 보호를 위해 현(縣) 차원에서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앞서 1951년 조사에서는 다지마의 천연기념물인 황새 번식지 쓰루야마에 황새가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11.사카모토 지사는 황새보호협찬회를 만들어 자기는 명예회장을 맡고 도요오카시장은 회장을 맡도록 했습니다. 두 단체장의 적극 지지를 바탕으로 협찬회는 활발하게 움직였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 교사와 행정 관계자들에 대한 홍보와 교육을 진행했는데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즈시중학교 황새연구부는 1957~59년 이즈시(이즈시 또한 지금은 도요오카시의 한 부분임)에서, 도요오카고교 생물부는 1956~63년 황새를 관찰·기록했습니다. 특히 1958~63년은 도요오카시 후쿠다(福田) 황새 관찰·기록은 날마다, 그리고 1분 단위로까지 둥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도요오카시 마지막 황새가 둥지를 떠날 때까지 기록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시 중고생들은 도요오카의 60~80대 노년층이 됐는데 지금도 황새 보전 운동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니다.

 

다이습지를 만들고 가꿔가는 다이마을 주민들.

12.협찬회는 황새 가만히 두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 황새는 번식기에 예민해지므로 놀라지 않도록 조용하게 지켜주자.’ 미꾸라지 한 마리 운동도 벌였습니다. ‘논을 빌려서 미꾸라지와 붕어 등을 황새가 먹도록 풀어주자.’ 아울러 황새가 먹이를 먹는 장소를 만들고 그 관리인까지 배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모금운동 : 황새 먹이 값 모으기’도 펼쳤습니다.

 

13.황새보호협찬회는 1958년 다지마황새보존회로 이름을 바꾸고 실태를 조사해 어른 황새 14마리와 어린 황새 1마리를 찾아냈습니다. 이듬해에는 어른 황새가 2마리 늘어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존회는 1959년 도요오카 유루지(百合地)에 인공둥지 2개를 처음 설치했습니다. 황새는 곧바로 여기에 둥지를 틀었고 그 가운데는 도요오카 최후의 야생 황새(1971년 죽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요오카시 황새 야생 번식은 1959년 후쿠다에서 이후로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4.도요오카 분지에는 논이 있는데 지형이 물이 좀처럼 빠지기 어려운 진창이었습니다. 사람 허리까지 빠지다 보니 농사짓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논에 사는 여러 물 속 생물들한테는 가장 좋은 환경이었고 당연히 황새한테도 아주 소중한 먹이터였습니다.

 

황새농법을 실천하는 논이라는 표지.

 

그런데 경지 정리와 하천 공사로 도요오카 분지 일대 지루논이 사라졌고, 강(마루야마가와) 주변 자연 습지도 덩달아 줄었습니다. 미꾸라지·붕어·개구리들이 먼저 줄어들자 먹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황새도 먹을거리에서 크게 곤란해지게 됐습니다.

 

15. 도요오카에서는 또 1958년부터 국가 보조로 헬리콥터로 농약을 살포해 왔습니다. 정부는 농약과 비료 사용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덕분에 농민들은 힘든 농사일은 줄이고 생산량은 늘릴 수 있었지만, 그 탓에 여러 생물이 죽었고 황새의 생활과 그 자손의 탄생도 어려워졌습니다.

 

16.이런 가운데 황새보존회는 ‘황새 총합 보호대책 다지마 지구 연구 간담회’를 1962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인공사육과 인공부화 필요성이 처음 거론됐습니다. 1963년 문부성 문화재보호위원회와 효고현 교육위원회는 황새 인공부화·사육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17. 1964년 인공사육용 케이지 설치를 위한 협력회가 꾸려지고 도요오카 노조(野上) 골짜기를 황새사육장(지금 황새고향공원 부속사육시설 보호증식센터) 터로 정했습니다. 노조는 농약 위험에서 비껴나 있으면서도 먹이 공급을 손쉽게 하는 조건인 도로 정비가 잘 돼 있었습니다.

 

황새고향공원 비공개지역.

 

이듬해 1월 사육장에 황새가 날 수 있는 플라잉 케이지(flying cage)가 만들어졌고 2월 11일에는 후쿠다에서 황새 한 쌍을 사로잡는 데 성공해 인공 번식을 위한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다지마 지역 8마리, 후쿠이현 오바마시 2마리, 구마모토동물원 1마리 등 일본에 있던 황새 11마리까지 모두 사로잡아 인공 번식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18.이처럼 황새를 사로잡는 과정에서 적극 활동한 사람이 바로 마쓰시마 고지로(松島興治郞)씨입니다. 그이는 일생을 황새와 함께한 인물입니다. 도요오카시 전설의 사육사인 셈입니다.

 

도요오카고 생물부 부원으로서 후쿠다 둥지에서 황새 번식을 직접 관찰했고, 졸업 이후에도 가방공장에 다니면서 황새 보호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65년 28살 때 황새사육장 2대 전속 사육사로 들어가 지금껏 황새 보호와 증식에 힘쓰고 있습니다.

 

도요오카 아이들이 황새쌀로 학교급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나카가이 시장.

 

19.1966년 4월 도쿄교육대학 농학부 일본응용동물곤충학회가 ‘특별천연기념물 황새의 죽음’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황새 몸에 수은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농약에 심각하게 중독돼 병까지 들어버린 황새가 새끼를 제대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황새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는 농약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20.이런 조건에서도 황새 보호 노력은 계속됐습니다. 1970년 후쿠이현 다케후시에서 부리가 부러진 채 나타난 야생 황새를 붙잡았습니다. 나중에 이름이 ‘다케후’로 붙여진 이 황새는 1963년 사라졌다가 7년만에 나타났었는데, 34년 동안 케이지에서 보살핌을 받다 2005년 죽었습니다.

 

1971년에는 야생 황새가 개한테 쫓겨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사람에게 넘겨지는 일도 있었는데, 곧바로 장폐색과 만성감염으로 숨졌습니다. 그 뒤로 일본에서는 야생 황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21.이래서 야생 황새를 수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85년 7월 27일 러시아(당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야생 황새 수컷 4마리와 암컷 2마리를 들여왔습니다. 당시 나이가 한 살로 짐작했었는데 그래서 4년 뒤부터는 알도 낳고 새끼도 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봉순이가 태어난 인공둥지. 도요오카시 이즈시초(町) 들판에 있습니다.

 

88년 도쿄 다마동물공원에서 알 4개 가운데 3개가 부화하는 첫 성공이 있었습니다. 도요오카 황새사육장(1991년 황새보호증식센터로 이름 바꿈)은 두 번째로 성공합니다. 세워진지 24년만인 89년 5월에 태어난 두 마리가 7월 중순 어미 품을 벗어나 독립을 한 것입니다.

 

22.이런 진척이 있는 가운데 1994년에는 효고현이 황새 장래 구상위원회를 열어 황새 야생복귀를 위한 구상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시설 설치 계획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목적은 이랬습니다. ①황새의 보호와 유전적 관리 ②황새 야생복귀를 위한 과학적 연구 ③지속가능한 황새 보전을 위한 지역 시민·농민의 이해 증진 ④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지역 환경 창조를 위한 교육·문화·학술 발전.

 

23.이를 바탕으로 99년 황새고향공원(165만㎢, 도요오카 상운지祥雲寺)이 효고현립으로 들어섰습니다. 2000년에는 황새고향공원 공개 방사장 옆에 황새문화관이 도요오카시립으로 세워졌습니다.

 

황새문화관 내부

 

황새 보전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고 한쪽 면은 공개 방사장을 들여다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들으르면서 황새가 먹이를 먹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비공개지역은 황새를 기르고 새끼 치게 하는 한편으로 야생화 훈련을 하는 장소로 개체사육장·번식사육장·야생화사육장·오픈사육장 등이 있습니다. 둘레 지역은 황새가 풀려났을 때 야생에서 둥지 틀고 살아가기 맞은 환경을 갖추고 황새들이 드나들 때 저어하지 않아도 되도록 사람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24.이런 가운데 2002년 8월 5일 야생 황새 수컷 한 마리가 대륙에서부터 황새고향공원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날아온 날짜를 따서 ‘하치고로(八五郞)’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치고로는 도요오카 자연 환경이 야생 황새도 터잡고 살아갈 만한 매력적인 장소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치고로 도시마습지 사무실.

 

하치고로는 지금껏 황새 보전을 위해 노력해온 도요오카 사람들에게 작으나 보람 있는 보상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하치고로에게 관심을 쏟아 그 모습을 관찰하는 시민들의 황새팬클럽 결성(2004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치고로는 마루야마가와강 오른쪽 기슭에 있는 3만8000㎡ 도시마습지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원래는 묵정논으로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바람에 농사짓기 어려워 버려진 지루논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에서 내려오는 민물과 바다에서 들어오는 짠물이 뒤섞이는 지역으로 그래서 여러 가지 생물들에게는 살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도요오카시는 하치고로가 날아들자 일대를 사들여 황새 먹이 공급 장소로 활용하는 인공습지로 만들었습니다(2009년 완공, 도시마습지는 마루야마가와강과 일대 논들과 더불어 2012년 7월 람사르협약당사국총회(루마니아)에서 람사르습지로 등록됐음).

 

‘하치고로 도시마습지’라 일컬어지는데요, NPO환경단체인 황새습지네트워크가 주로 생물 조사와 체험·교육 등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도시마습지 물 속 생물 숫자 조사.

 

25.그런데 이 하치고로는 도시마습지를 비롯한 야생에서도 먹이를 얻었지만 황새고향공원 보호증식센터에서 주는 먹이도 자주 먹었습니다. 도요오카 일대가 아직은 황새의 먹이가 되는 생물들이 충분히 많지는 않음을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이에 황새 야생복귀 추진협의회는 2003년 ‘황새 야생복귀 추진계획’을 세웠습니다. ①황새가 살 수 있도록 먹이가 풍부한 환경 조성, ②황새가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많은 자연환경 조성, ③황새와 사람이 공생할 수 있는 체계 마련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환경창조형 농업 추진, △하천과 마을 산림 친환경적 정비, △황새 브랜드 쌀과 관광 상품 개발 등이 진행됐으며 2003년에는 황새 야생복귀 추진연락협회도 발족이 됐습니다.

 

눈 내린 도시마습지.

 

26.2005년 9월 24일 오후 2시 황새고향공원에서 3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쇠우리에 갇혀 있던 황새 다섯 마리가 풀려나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황새고향공원 등에서 인공 번식으로 태어나 사육하고 있던 황새가 100마리를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풀려난 황새들이 두 달 동안은 황새고향공원 근처 논에서 먹이를 먹거나 인공둥지에 올라 쉬거나 잠자는 등 멀리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석 달째인 12월에는 3마리가 남쪽으로 7.5km 떨어진 지역까지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사는 2009년까지 행해졌습니다.

 

27. 2007년은 이렇게 야생으로 풀려난 황새(한 쌍)가 야생에서 번식 성공한 첫 해였습니다. 야생 번식은 1959년 이후 48년만이었습니다.

 

이어서 2012년에는 야생에서 태어난 2세대 황새들이 다시 야생 번식을 통해 3세대 황새를 출생시켰습니다. 이 3세대 황새는 야생에서 태어난 부모가 야생에서 자연스럽게 짝을 지어 새끼를 친 진정한 야생 황새였습니다. 2014년 2월 현재 도요오카 야외 황새는 72마리이고, 번식하는 황새쌍은 모두 아홉입니다.

 

도요오카 황새.

 

28.도요오카에는 황새만을 위한 인공습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다이(田結)습지입니다. 도요오카시 북부 바닷가 옛적부터 반농반어 생활을 해온 다이마을 뒤편에 있습니다.

 

이 또한 지루논으로 농촌에 경지정리 바람이 불 때도 원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좁은 골짜기에 끼여 있어서 경지정리를 하는 기계가 거기까지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농사짓기 어려워지자 논들이 버려지기 시작했고 마지막까지 농사를 짓던 두 집이 마침내 2006년 손을 뗐습니다.

 

이 버려진 논에 황새가 찾아왔습니다. 2008년이었습니다. 다랑논은 논두렁이 무너지면서 부드럽게 비탈이 졌고 산에서 흘러드는 물은 논바닥을 거쳐서 절반쯤 흘러나가는 상태가 됐습니다.

 

다이습지. 물길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슴과 멧돼지가 풀을 뜯고 파헤쳐 키가 큰 식물들은 자라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기저기 구덩이가 만들어졌 있었습니다. 버림받은 묵정논이 황새 먹이가 되는 여러 동물들에게는 살기 좋은 터전으로 바뀐 셈입니다.

 

그 뒤로 이런 자연 상태를 최대한 해치지 않으면서 황새한테 좀더 좋도록 하는 작업을 황새습지네트워크 연구자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마을 주민이 한 뜻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다이마을과 다이습지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에는 1300명 안팎이 찾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다이습지 이모저모를 일러줍니다. 찾아온 이들은 습지를 만들고 가꾸는 자원봉사활동으로 환경보전 체험을 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황새 덕분에 마을이 활기를 되찾고 주민들은 다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주민들은 자부심을 갖고 금전적 이득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황새를 비롯해 생태계의 다양한 생물 보전을 위해 활동합니다. 다이습지는 오늘날 도요오카시 사람들한테 자랑이고 또 희망입니다.

 

29.황새를 야생으로 처음 풀어준 2005년 이후 그렇게 풀려난 황새와 그 새끼들이 서식지를 넓혀나가고 있습니다. 교탄고시(교토부)는 2세대 황새 부부가 다지마 지역 밖에서 처음 야생 번식에 성공한 지역입니다. 이 황새 부부는 2011년 교탄고시에 스스로 정착해 2012년 새끼를 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도시마습지 인공둥지에 황새가 한 마리 올라서 있습니다.

 

도요오카 출신 황새가 교탄고시에서 번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치단체 사이에 황새마을 조성사업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효고현 야부·아사고시는 물론이고 후쿠이현 에치젠(越前)시, 지바현 노다(野田)시 등 30개 자치단체에서 황새 보전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2012년 가을 도요오카시는 같은 효고현 소속인 아사고시와 야부시에 방사 시설을 만들고 황새 부부를 보내 사육을 시작했습니다. 그해부터 어린 황새를 단계적으로 야생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2013년 12월 12일에는 아사고시에서 풀려났던 어린 황새 네 마리가 대마도까지 건너간 적도 있었습니다.

 

교탄고시는 황새가 자연스럽게 날아간 지역인 반면 아사고·야부시는 황새 서식지 확대를 위해 인간이 일부러 야생으로 풀어주는 근거지로 삼은 지역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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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자연의 순환·상생 터전인 도요오카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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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새

 

황새는 사람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해당 지역의 사회·경제적인 구조와 황새 보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황새는 사람이 좋아서 또는 사람을 잘 따라서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농사짓는 데 좋은 자연 환경이 황새한테도 먹이를 구하며 살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황새는 미꾸라지·미꾸리·동사리·붕어 같은 물고기를 많이 먹습니다. 잠자리·메뚜기·딱정벌레·벌 같은 곤충, 개구리, 뱀·무자치·들쥐, 복족류, 지렁이, 작은 새, 논우렁이·새우·말똥게 같은 동물은 물론 대나무·나문재·줄말·이삭물수세미·붕어마름 같은 식물까지 하루에 400~500g을 먹습니다.

 

나카가이 무네하루 도요오카 시장. 경남도민일보 사진.

 

황새는 우리나라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199호,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1971년까지 우리나라 야생에서 살아 있었다고들 합니다.

 

2. 논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10%, 경작지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논은 황새 보전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최근에는 논습지 생태계에서 생물이 5668가지 산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생물 2만9800가지의 25%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논은 고립돼 있지 않고 산림과 하천과 연결돼 있는 생태계입니다. 이를테면 숲 속 바위틈에서 겨울을 보낸 개구리는 논으로 내려와 알을 낳고, 하천에서 자란 물고기들은 논으로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요즘은 보통 논에다 봄에서 가을까지만 물을 채우기 때문에 생애주기가 1년 이상인 물고기는 겨울에는 논을 떠나야 하며 시기에 따라 논, 하천, 봇도랑, 둠벙을 오가며 지냅니다.

 

황새를 키우는 농법을 쓰는 논이라는 표지판. 겨울인데도 물이 채워져 있습니다.

 

옛날 논은 봇도랑이 크게 기울어지지 않은 채 이어져 있고 윗논과 아랫논도 이어져 있어 물이 천천히 흘러내려갔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들이 봇도랑에 있다가도 논으로 쉽게 올라올 수 있었고 또 다른 논으로 옮겨가는 데에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962년 농촌진흥법이 제정(우리나라)되면서 경지정리를 통해 기계화 등으로 유지관리가 편리한 형태로 논이 정비됐습니다. 이로써 쌀 생산이 1967년 360만톤에서 1976년 520만톤으로 34% 늘어났습니다. 다수확 신품종 개발, 농지 확장, 용수 확보, 경지 정리, 비료·농약·농기구 개발·보급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물빠짐이 잘 되도록 논과 봇도랑(배수로)의 낙차를 크게 경지 정리를 하는 바람에 봇도랑과 잘 연결되지 않고 끊어지는 바람에 생물들이 여기저기 옮겨다니기 어려워졌고 그 탓에 논과 봇도랑에 사는 생물들 가짓수가 줄어들었습니다.

 

70년대에는 농약과 화학비료로 생산성을 높이는 관행농법이 시작됐습니다. 모와 모 사이 간격을 좁혀 어린모를 여러 포기 심었습니다. 이처럼 모를 빽빽하게 심은 탓에 병해충 발생이 많아지자 살충제·살균제 같은 농약을 많이 뿌려댔고 화학비료로 토양에 영양분을 공급했습니다.

 

논에 들어가 있는 황새를 보여주는 나카가이 시장.

 

이 때문에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이른바 생물다양성은 줄었습니다. 요즘 들어 오리농법·종이멀칭법·왕우렁이농법 같은 친환경농법을 쓰고 있는데 이는 환경오염은 막을 수 있지만 생물다양성이나 생태계 보전에는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3. 일본 도요오카

 

도요오카시는 ‘황새를 키우는 쌀’이라는 생물 브랜드 농산물을 만들어내었습니다. 2002년 효고현은 (단순히 환경오염을 억제하는 데서 더 나아가) 생물다양성까지 중시하는 황새농법(황새를 키우는 농법) 개발을 황새프로젝트팀을 꾸렸습니다.

 

일본 도요오카 황새.

환경창조형 농업기술 개발이라 할 수 있겠는데, 도요오카농업개선보급센터·도요오카농림진흥사무소(농정과·임업경영과)·도요오카토지개량사무소의 중견 직원으로 구성됐습니다.

 

역할 분담은 이랬습니다. 농정과 : 지원사업 전반 검토, 임업경영과 : 황새가 둥지를 틀 소나무를 심고 산을 가꾸기, 토지개량사무소 : 봇도랑이나 어도(魚道) 설치 등 논 환경 정비, 보급센터 : 황새농법 기술 확립.

 

2006년에는 지역농협 JA다지마가 ‘황새를 키우는 쌀 생산부회’(우리로 치면 작목반)를 만들어 황새농법을 도요오카 전역에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새농법은 생물이 한 해 내내 논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소출까지 높이는 농법이랍니다.

 

물 관리가 가장 큰 특징인데 모심기 한 달 전부터 논에 물을 채우고 심은 뒤에도 깊은 물 관리를 해서 물 속 생물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고 잠자리 유충이 잠자리가 되는 7월 상순까지 물을 채워놓고 거둔 뒤에도 미생물 먹이가 되는 쌀겨와 거름을 뿌리고 물을 채웁니다.

 

겨울철에 물을 대면 물새가 살 수 있게 되며 실지렁이도 계속 살 수 있어서 잡초를 억제하는 효과도 납니다. 방귀벌레·멸구·벼바구미 같은 해충을 잡아먹는 개구리·나비·사마귀도 알맞게 살도록 해서 해충의 번식·피해를 줄입니다.

 

한편 피는 깊이 8cm 이상 되도록 물을 관리해 발생을 억제하며 대신 물이 깊을 때 생겨나는 물옥잠은 유기산을 뿌려 없애준다는 것입니다.

 

4. 황새농법

 

도요오카시 인정 '황새의 춤' 농산물이라는 딱지. 아래에는 '효고(현) 안심 브랜드'라 적혀 있습니다.

 

논에 일찍 물을 대면 물벼룩과 실지렁이가 늘어나고 미꾸리 같은 물고기와 개구리가 많이 살게 됩니다. 미꾸리 같은 물고기는 해충인 곤충 유충을 잡아먹고 개구리는 벼멸구와 노린재들을 잡아먹습니다.(앞 내용과 좀 겹치기는 합니다^^)

 

이런 생물들이 많이 들어 있는 논은 제비·백로·황새·기러기 같은 새들의 먹이터가 됩니다. 황새는 논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식자로서 양서류, 파충류, 어류, 설치류 등 다양한 생물들을 두루 잡아먹습니다.

 

모내기 전에 물을 가둬뒀다가 잡초가 싹을 틔우면 진흙을 갈아엎어 잡초를 묻어버립니다. 그 뒤 25cm 이상 키운 큰 모(어린모가 아니라!!)를 심고 물을 깊이 댑니다. 그러면 잡초는 깊은 물 속에서 광합성을 제대로 못해 자라지 못합니다.

 

반면 물을 깊이 대면 붕어·메기·송사리들이 살아가는 데는 알맞은 논이 됩니다. 이에 더해 논과 봇도랑 사이에 어도까지 설치하면 봇도랑에 사는 붕어· 미꾸리·메기·버들치 같은 물고기들이 논으로 올라오고 둠벙을 만들어 두면 논물 빼는 시기에 생물들이 옮겨와 둠벙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나카가이 시장이 보여주는 컴퓨터 모니터에 아이들이 모내기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논의 생태계 다양성을 높이는 황새농법은 야생 황새한테 안정적인 서식 환경을 마련해 주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5. 대접받는 황새쌀

 

도요오카에서 황새농법으로 생산한 ‘황새를 키우는 쌀’의 2007년 생산량은 이랬습니다. 무농약 고시히카리 45톤, 저농약 199.5톤. 금액으로는 대략 1억3923만엔이며 이로써 황새 브랜드 이전보다 36% 수익이 더 발생했습니다.

 

황새농법으로 짓는 황새쌀의 생산량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동참하는 농민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늘어날까요? 수고는 덜어지고 소득은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농민은 농약을 덜 씀으로써 논의 생태계를 지키는 한편으로 안전한 쌀을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어서 좋습니다. 소비자는 환경을 생각하면서 생산한 쌀을 믿고 안심하며 소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일본에서는 무농약 ‘유기농쌀’보다 저농약 ‘에코쌀’이 인기가 더 좋습니다. 에코쌀이 유기농쌀보다 값이 싸고 관행농법 생산 쌀과 견줘서는 더 안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농민들도 생산은 줄고 노동은 느는 무농약 유기농쌀보다 그렇지 않은 저농약 에코쌀 재배가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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