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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만뿐인 의령이 인물을 내세우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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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역사탐방

의령 곽재우 생가~백산 안희제 생가~정암진·정암철교

 

5월 역사탐방은 의령입니다. 의령은 경남 중심 도시인 창원과 진주 가까이 있으면서도 사람들 발길이 잦은 곳은 아니랍니다. 거제나 통영·남해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인구가 3만 가량인 의령은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의령에서 가장 내세우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번 역사탐방은 회원큰별·안영·정·이동·샘바위·자은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의령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곽재우 생가 장독대.

 

아이들에게는 홍의장군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임진왜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면서 그이들의 삶을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들른 곽재우 생가에서는 사랑채에 모여앉아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에 대한 이야기 등을 풀어놓았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아무 벼슬도 하지 않았으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자기 가진 재산 전부를 털어서 의병을 모으고 누구보다 먼저 전투에 나섰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곽재우 생가 안채 마루에서.

 

그이가 그렇게 모든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배경부터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영향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곽재우 장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이의 생각과 삶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은 남명 조식(1501~72) 선생입니다. 곽재우는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앎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남명 조식의 제자였습니다.

 

남명은 제자 곽재우를 어여삐 여겨 자기 외손녀를 곽재우의 아내가 되도록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아무래도 아이들은 물론 함께 온 선생님들까지도 재미있어 합니다.

 

곽재우 생가만큼 유명한 것이 집 앞에 있는 500살 넘은 은행나무입니다. 가을이면 둘레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는 나무는 짙어진 녹음으로 한결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습니다.

 

600살 넘는 느티나무 현고수에서.

 

또 마을 한가운데 느티나무는 곽재우 장군이 거기다 북을 매달아놓고 쳐서 의병으로 나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데 은행나무보다 100살은 더 연세가 높으십니다.

 

우리 사람은 책을 통해서나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여기 서 있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곽재우 장군의 실제 모습과 당시 벌어진 일들을 생생하게 봤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이들은 과연 새삼스러운 마음이 드는지 이들 나무를 올려다보고 만져보았습니다. 당시 느티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북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마냥 즐겁게 칩니다.

 

북치는 아이들.

 

다음으로 찾아간 데는 가까이에 있는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아이들은 생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미션 수행을 했습니다.

 

백산 생가에서 미션 수행 중인 아이들과 두산중 선생님들.

 

백산 생가는 왜 문화재로 지정이 됐을까요? 정답을 맞힌 팀이 없었습니다. 다들 안희제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문화재로 지정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백산 선생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된 까닭은 백산의 삶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독특한 가옥 구조 때문입니다.

 

 

안채는 가운데 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조그만 방이 다섯, 다락도 따로 있습니다. 안채라 하면 보통은 안방과 건넌방이 모두인데 여기는 이렇게 방이 많습니다. 당시 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모습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 감시를 피해 숨기 좋으라고 이렇게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안채는 기와를 이었지만 사랑채는 초가집으로 검소합니다.

 

백산 생가 사랑채 앞에서.

 

 

거듭 말하지만, 의령이 인구는 적어도 가장 내세우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으뜸으로 꼽히는 한 사람이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병철입니다. 요즈음은 곽재우 생가나 안희제 생가보다 이병철 생가를 찾는 발길이 훨씬 많습니다. 물질이 중심인 현실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한 노릇이라 할 수도 있겠습지요.

 

삼성을 만든 이병철에 견주면 같은 자산가였지만 안희제 선생이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해서 번 돈은 아주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병철보다 안희제가 더 역사에 빛나는 인물일 것입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보다 돈을 어떻게 가치롭게 썼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친구들도 어른이 되면 번 돈을 가치있게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조금은 교과서적인 얘기도 살짝 곁들였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정암진을 찾았습니다. 오전에 곽재우 생가를 돌아보고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곽재우 장군이 전투를 벌이고 크게 승리를 거둔 장소인 정암진을 한결 친근하게 생각합니다.

 

정암루에서 느낌글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정암루에서 내려다보는 남강은 옛날 그 치열했던 역사를 껴안은 채 평화롭게 흐르고 있습니다. 왜적을 속이기 위해 홍의장군 모습 허수아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을, 지금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늑한 옛날의 뻘밭을 마음으로 상상해봅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전! 골든벨'로 문제 풀이도 하고 느낌글도 쓰는 정암루에 5월의 화사한 봄바람이 날아들었습니다.

 

500살이나 먹은 은행나무가 인상 깊었다는 얘기, 북을 치는데 왠지 가슴이 뚫리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는 얘기, 다음에 부산에 가면 안희제 선생을 기리는 백산기념관에 꼭 들르고 싶다는 얘기, 상으로 주는 쥐꼬리 장학금은 못 받았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즐거웠다는 얘기 등등이 아이들 손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어서 바로 옆 정암철교를 걸었습니다. 일제강점기 1935년 세워졌다가 6·25전쟁을 맞아 망가졌으나 1958년 되살려낸 다리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오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감탄들, "아 너무 멋진 풍경이다~!!" 봄은 그렇게 아이들 가슴에 안기며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핵피폭2세 김형률의 삶과 반핵=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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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부산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 불러주는 바람에 부산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몇몇 블로거들을 더 불렀던 모양입니다. 가기에 앞서 이메일로 일정을 받아봤습니다.

 

노동조합 기자회견 하나, 농성 현장 방문 하나, 그리고 김형률 생가 방문과 추모문화제 참가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형률이라……, 부산에서 여러 모로 대단하게 활동을 펼치다가 세상을 떠난 유명 인물이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산 가기로 돼 있는 날 아침 <한겨레>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원폭 피해자 2세’ 김형률 아시나요?” 몰랐습니다. 이름은 부산지하철노조가 보낸 메일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이가 핵폭탄 피해자 2세인 줄은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기사를 따라 읽어내려가면서 저는 제가 참 무심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고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쉬고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실감은 제 삶에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핵폭탄 피해 2세대와 3세대에 대해서는 더욱 심해 그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2세와 3세들이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쉬고 부대끼며 살고 있다는 생각 또한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형률 추모 문화제 기사를 읽으면서 스스로가 참담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았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런 사람 이런 일생을 전혀 몰랐을까? 왜 나는 손톱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못했을까? 그러면서도 반핵이 어쩌고 탈핵이 저쩌고 뻔뻔스럽게 씨부랑거릴 수 있었을까?

 

 

이런 느낌은 그날 저녁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치러진 추모문화제 내내 이어졌습니다. 이런 참담한 느낌이 저로 하여금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를 사서 읽게 만들었나 봅니다.(그날 추모문화제는 이 유고집 출판기념회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읽어도 반핵과 인권이 함께 붙어 있는 까닭이 잘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핵이 핵폭탄이나 핵발전처럼 추상적인 모양으로 머릿속에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조금씩 넘기면서, 그런 제 머릿속 생각이 차갑게 식어 딱딱하게 굳은 관념 덩어리임을 깨달았습니다.

 

핵은 인권 파괴이며 반핵 없이는 온전한 인권이 있을 수 없음을 조금씩이나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인권은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개개인이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김형률(1970~2005)이라는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원폭(핵폭탄 피폭) 후유증, 그 유전으로 말미암아 끝없이 대물림되는 질병과 고통이 그랬습니다.

 

인권을 두고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권리’라고 한다면, 김형률을 평생 괴롭힌 원폭2세 유전병(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과 폐렴)은 인간을 인간 이하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면역글로불린은 갖은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세포를 없애거나 맞서는 물질이라 합니다. 이게 없으면 온갖 질병에 매우 손쉽게 걸립니다.)

 

더군다나 이런 질병과 고통은 그 어머니가 다섯 살 어린 나이에 1945년 8월 6일 핵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에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니 이는 김형률에게도 그 어머니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라고나 하겠습니다.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원폭2세 환자라고 밝히면서 ‘핵폭탄 피폭에 따른 유전 문제’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까지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추모문화제 행사장 모습.

 

그 뒤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이끌면서 인권위원회가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건강실태조사와 그 결과 공개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 핵폭탄 피폭자 1·2·3세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알려졌습니다.

 

김형률은 ‘한국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특별하게 노력했으며 반핵을 위한 국제 연대에도 힘쓰다가 2005년 5월 29일 그야말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견주면 절대 길지 않은 삶의 세월 동안, 김형률은 얼마나 많이 질병을 앓고 고통을 겪었는지를, 그이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에서 그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치가 정리한 내용을 통해 한 번 알아봤습니다.

 

아버지 김봉대.

 

김형률은 1970년 7월 28일 부산 수정동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형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봉대(鳳大)는 32살, 모친 이곡지(曲之)는 30살. 김형률은 네 번째 자식이자 세 번째 아들이었다.

 

쌍둥이 동생은 몸이 약해 한 살 반이 되던 해 폐렴으로 죽었다. 형 둘과 누나·여동생 같은 다른 형제들은 건강했지만 김형률은 항상 병에 잘 걸리고 어릴 때부터 1년에 몇 번씩 병원을 다녀야 했다.

 

모친 이곡지는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는데, 1945년 8월 핵폭탄이 떨어진 중심에서 3km 정도 떨어진 후나이리카와구치초(舟入川口町)에서 피폭돼 부친과 언니를 잃었다. 귀국해서는 마찬가지 피폭된 모친·여동생과 함께 모친 고향인 합천 근교 농가에서 살았다.

 

남존여비사상이 뿌리깊은 농촌사회에서 아들이 없었던 이곡지의 모친은 항상 친척들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외숙부 도움으로 이곡지는 국민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 이곡지.

 

국민학교 시절 김형률은 학기마다 감기에 걸려 한 달 이상 결석을 해야 했다. 어떤 때는 예방주사를 맞은 다음날부터 감기에 걸려 1개월 이상이나 자리에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3살 위 누나도 같은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왜 자기만 심한 감기에 걸리는지, 꽤나 슬퍼했다고 한다.

 

중1 때 급성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후 몇 번이나 폐렴에 걸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입원할 때마다 드는 비싼 병원비는 가계를 압박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아픔 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형률은 1989년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다녔던 ‘새마음야학’은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인 부산시 남구 대연동 경성(慶星)대학교에 있었다.

 

20세 전후 야학 시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였음과 동시에 병약한 자신의 육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뇌의 시기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여성이 생겼으나 고백을 할 수도, 사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무장해도 병약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병약한 자신이 어떻게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갈 수 있겠는가. 당시 일기장에는 자제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적혀 있으며, 고은의 ‘비 맞으면서’의 한 구절도 적혀 있다.

 

한편으로는 쓸쓸합니다.

 

내가 한 일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저 가난한 지붕 아래

불 하나 도란도란 밝혀주지 못한 채

이 역사의 20년을 따라 왔구나

그래도 쓰러지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부친 김봉대에게 김형률은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인지?”라고 묻곤 했었다.

 

1995년 25살 김형률은 폐렴으로 세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부산침례병원에서 한 특별 혈액검사 결과 병명은 ‘면역글로불린M의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인데 면역력이 신생아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약한 상태였다.

 

 

이즈음 김형률은 계절마다 몸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 정도로 피곤하면서도 “이렇게 나태해서는 안된다”고 일기장에 적으면서 자신을 고무시키고 필사적으로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일기가 띄엄띄엄 씌어진 것을 보면 글자를 쓰는 것도 어려워졌음을 알 수가 있다. 컴퓨터학과 진학에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체력적으로 자신이 없는 김형률은 컴퓨터를 배우는 것이 언젠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26살 되던 1997년 3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동의공업전문대학 전산학과에 입학하였고, 신체의 아픔도 잊은 듯 공부에 매진하였다. 마지막 학년 2학년 때에는 학과 연구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졸업 후 취직을 대비하여 컴퓨터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김형률은 건강문제가 있는 늦깎이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취직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반년만에 창원시의 벤처기업에 취직을 하고 업무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정도 거리였는데, 경력을 쌓는 것만으로도 좋다면서 열심히 일했다. 이윽고 회사 일이 바빠져, 회사 근처에 방을 빌려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일정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조건여서 자기 돈을 들여야 했지만, 그는 몸상태도 신경쓰지 못하고 일했다.

 

프로그램 개발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도 마지않았던 그는 회사 업무에도 적응이 된 5개월째, 결국 과로로 쓰러져버렸다. (요즘 문제가 되는 '열정페이'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선특히 고용한 이의 악덕이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 김형률의 분투만보여주고자 할 뿐입니다.)

 

합천원폭지부장의 김형률에 대한 회상.

 

2000년에는 농협 지점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업했다. 하지만 2개월이 지날 즈음, 열이 나고 기침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부모님은 일을 계속하면 아들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본인도 직장에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재택근무가 가능한 웹디자인 전문학교에 등록하였다. 작품 만들기에 몰두해 밤샘작업을 하던 중, 피로로 감기에 걸려 열이 나게 되었다. 작품 완성을 눈 앞에 둔 5월의 어느 새벽녘, 그는 갑작스럽게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다. 급성폐렴의 재발이었다. 김형률은 2001년 6월까지 한 달 남짓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2002년 3월 22일의 스스로를 유전으로 말미암은 핵폭탄 피해 2세임을 밝힌 커밍아웃 이래 그가 사망한 2005년 5월 29일까지 활동기간은 38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스스로가 전력을 다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16개월 정도였다.

 

그는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결성에 전력을 기울이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조건에서 분투의 나날을 보냈다. 특히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말까지의 시기에 그의 입원 생활은 다 합해서 6회, 합계 220일에 가까웠고 이는 반 년 넘는 기간을 입원했던 셈이다.

 

합천에 대해 해인사 말고 다른 것도 생각해 달라는 김형률,

 

2002년 9월 부산대학병원에서 검사받은 결과 폐기능이 일반인의 20% 정도로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9월 25일부터 10월 12일까지 입원했으며 퇴원 후에도 통원 치료가 필요했는데 폐렴 치료는 호흡기내과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은 혈액종양내과에 다녀야만 했다. 게다가 선천성 결핍증은 한국 의학계에 임상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암중모색 상태가 이어졌다.

 

10월 17일 저녁 저녁 피를 토하기 시작해 좀처럼 그치지 않고 출혈량이 너무 많아지자 소리쳐 도움을 구했다. 달려온 부친이 구급차를 불렀으며 일하던 모친도 부산대학병원 응급치료실로 달려갔다. 응급처치로 출혈은 멈췄으나 피섞인 가래는 2주 정도 더 계속 나왔다.

 

객혈의 원인은 기관지 주변 모세혈관이 증가했다가 터진 데 있었다. 그래서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받았는데 수술 이후에도 가래에 고름이 섞여나와 항생제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해서 입원은 길어졌다. 11월 29일 2개월에 걸친 입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에게는 먼저 건강 유지 차제가 ‘투쟁’이었다.

 

그러는 동안 ‘김형률을 지원하는 모임’이 준비되었는데 본인의 희망도 있고 해서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으로 이름을 바꿔 12월 하순 결성됐다.

 

2003년 초에 39도까지 열이 올라 해열제를 볻용하고 겨우 열을 내렸다. 며칠 뒤 골수 검사에서는 혈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 기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는 결과를 들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왼쪽 귀에서 고름과 점액이 흘러내려 고막에 구멍이 생겼고, 이대로 방치하면 청력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전에도 나온 사항이었지만 비용이 크게 부담돼 수술을 미뤘었는데 이제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환우회’ 활동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3월 16일, 김형률은 다시 폐렴으로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다음날 응급치료실에서 항생제 쇼크로 한 때 의식을 잃었다.

 

2003년 8월 4일(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전날) 담당의사 만류를 뿌리치고 ‘외출 허가’를 받아 부친과 함께 서울로 향했고 다음날 아침 서울시청 근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홀에서 한국 원폭2세 환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기자회견을 열고 이어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김형률의 건강을 위해 저렴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독자적으로 설립한 녹색병원에 입원하도록 제안했다. 10월 19일 바쁜 일정으로 피로가 쌓여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형률은 녹색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동안 간절히 바랐던 대로 ‘치료비 걱정 없이’ 한 달 반 동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건강이 좋아졌다고 여겨 부산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퇴원하고 보름 정도 지나 엄청나게 객혈을 해 부산대학병원 응급치료실에 입원해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다시 받아야 했다. 수술 후 지혈제와 항생제가 투여되어 가까스로 출혈이 멈췄고 연말연초를 병원에서 보낸 후 2004년 1월 하순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2004년 7월 21일 일본 나가사키현이 의사단을 합천에 보내 한국 피폭자에 대한 건강진단을 했으나 김형률과 원폭2세 환우 6명 그리고 가족 15명은 건강상담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 9월 1일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첫 번째 공식 모임이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열렸다. 김형률 이후 2대 회장인 정숙희씨 현재의 3대 회장인 한정순씨 등 14명이 참가했다. 한정순 회장은 당시 김형률에 대해 “작고 마른 체구로 무더위 속에 점퍼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 수건을 감고 기침을 계속하면서 준비한 자료를 나눠주고 힘들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김형률은 2003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면역글로불린 제제(製劑) 주사를 맞았는데, 2004년 9월 9일 그 주사 직전에 과잉반응을 억제하는 주사를 맞는 순간 쇼크를 일으키고 혈약이 급격하게 떨어져 쓰러지는 바람에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다가 보름 정도 지나 퇴원했다.

 

2004년 12월 크리스마스 저녁 갑자기 객혈이 심해졌고 연말에는 기관지동맥 색전술을 또 받아야만 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이뤄진 이 수술은 긴 시간을 요했으며 2005년 1월 11일까지 연말연시를 김형률은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었다.

 

2005년 1월 김형률은 호흡기장애 1급으로 인정되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가입하고 의료보호 1종 자격을 얻었다. 7월부터 장애자복지법 시행규칙이 개정돼 호흡기계열 등의 중병인도 장애인으로 등록돼 의료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출판기념회 준비 모습.

장애인수당도 나라에서 5만원 부산시로부터 6만원을 받았다. 의료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라 ‘사회보장’이라 하기는 너무나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는 제3의 인생이 열렸다고 기뻐했다.

 

2005년 3월 31일 김형률은 서울 활동을 위해 경기도 군포시 한 숙소에 들었다. 부산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정귀순 대표가 마련한 공간이었다. 김형률은 4월 11일부터 대략 50일 동안 여기 아버지와 머물면서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5월 초순 이래 20일 남짓은 지독한 강행군이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로 이동하는 동분서주의 나날들이었으며, 설명회에 공청회에 발표 등 육체적 정신적으로 그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24일 귀국한 뒤 5일째 되는 아침 김형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김형률은 이 때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피를 토하는 등 고통을 겪었으며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이상으로 계속 심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본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삶을 두고 어느 누구도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고통과 질병입니다. 지긋지긋한 고통과 질병의 연속입니다.

 

이런 질병과 고통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진 핵폭탄이 유전을 통해 안겼습니다. 핵폭탄을 터뜨린 미국이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물론 그대로 팽개쳐둔 한국도 책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김형률이 온 몸으로 일생을 통해 보여준 끔찍한 참상이, 김형률 개인 또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피폭자 1세로도 한정되지 않고 앞으로는 그 자손만으로도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후쿠시마핵발전소 폭발과 소련 체르노빌핵발전소 사고는 참상을 이미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스물이 넘는 바닷가 핵발전소들 또한 앞으로 그런 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반핵이 바로 인권이라고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핵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인권도 온전하게 보장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 건강을 갉아먹고도 모자라 그 고통과 질병을 대물림까지 시키는 것이 바로 핵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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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어울려 더욱 멋진 옛집과 절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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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충북 보은으로 떠난 생태·역사기행(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후원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주관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 주최)은 법주사와 선병국 가옥을 찾았습니다.

 

선병국 가옥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134칸이나 되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대단한 옛 집이고 법주사는 신라시대 들어선 이래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지금도 명찰로 이름높은 대단한 절간이랍니다.

 

법주사와 선병국 가옥은 이런 대단함 말고 다른 공통점도 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숲을 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병국 가옥 안채.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한 버스는 10시 40분 즈음 선병국 가옥에 닿았습니다. 잡초가 곳곳에 우묵하게 자라 있고 농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등 잘 가꿔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씩 들르는 관광객에게는 어수선한 모습이겠으나 여기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다 사람 사는 자취가 되겠습니다. 그 너른 터에 돋아나는 풀들을 어떻게 날마다 가지런히 할 것이며 경운기랑 트랙터들은 논밭에 쓰고 나서 가져와서는 또 어떻게 보이지 않게 갈무리할 것인가 말씀입니다. 그냥 쓰기 알맞고 관리가 되는 그만큼 두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지 싶었습니다.

 

솟을대문.

 

당주(堂主)가 만석지기였던 만큼 집채도 담장도 모두 대단했습니다. 솟을대문은, 요즘으로 치자면 자가용 자동차에 해당하는 말을 타고서도 드나들 수 있으리만치 높지막했고, 사랑채·안채·행랑채·사당채 모두 단단하게 잘 짜여 있었습니다.

 

사랑채에는 문이 둘 있었습니다. 솟을대문 쪽에 있는 문은 빗장이 안쪽에 있었지만 여기 이 안채와 가까운 문은 빗장이 바깥에 있었습니다. 밥상을 들고 나르는 등 안채 사람이 드나들 때 쓰는 문인 까닭이랍니다.

 

바깥담은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덮여 있었는데 두툼하고 높다란 기세는 과연 지킬 것 많은 부잣집다웠으며 사랑채·안채와 사당채를 두르는 안담은 나지막하지만 제법 단단한 느낌이었습니다.

 

선병국 가옥 높다란 바깥담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솔그늘 속에서 사랑채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한자 工(영문 H) 모양으로 독특했는데 한가운데는 널찍한 대청마루 차지였습니다. 전통을 벗어나 효율성을 더 추구한 결과라는데요, 마루만 통하면 사방 모든 방으로 한달음에 건너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조선시대라면 선병국 가옥은 규모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조선 왕조는 여염집은 아흔아홉 간을 못 넘게 했고 둥근기둥도 못 쓰게 했습니다. 선병국 가옥은 여염집이라도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 지은 때문에 이런 규제를 벗어나 크기도 134칸에 이르고 사랑채는 물론 안채까지 동근기둥을 썼습니다.

 

군데군데 콘크리트와 벽돌도 썼고 양철로 이은 지붕도 있습니다. 그러나 압권은 커다란 규모 유별난 구조가 아니었고 곳곳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었습니다.

 

선병국가옥 팔도 장독대.

 

보기 좋게 알맞추 굽은 소나무도 괜찮았고 여러 가지 보리수나 풋열매를 매단 커다란 산수유, 해당화를 닮은 인가목, 얼핏 주목과 비슷해 보이는 비자나무도 멋졌습니다.

 

이렇게 정원·마당은 물론 담장 모퉁이나 장독대 둘레까지 나무가 많은 덕분에 집안이 통째 싱그러웠으며 흙바닥에서 오르는 열기까지 슬몃 누질렀습니다. 일행들은 여기저기에서 보리수나 앵두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대문 바깥에는 선씨 집안에서 경영하다 일제 말기(1944년) 탄압으로 문을 닫은 서당 '관선정(觀善亭)' 자리가 나옵니다. 바로 옆 이 집안 효자와 열부를 기리는 효열각 뒤로 돌아가면 오솔길로 접어드는데, 거기에도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선병국 가옥 효열각.

 

 

솔숲이 하늘을 가리는 아래로는 멍석딸기·산딸기 등이 붉은 열매를 매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열매 새콤한 듯 달콤한 맛을 200m 정도 걸으면서 즐겼습니다. 오랜 가뭄에 지친 이파리들이 살짝 안쓰럽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우와!" 소리를 내지르기 바빴습니다.

 

이윽고 법주사 들머리 덕림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법주사에 들렀습니다. 팔상전을 비롯해 여러 국보와 보물과 문화재로 이름이 높으며 미륵신앙의 본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답니다.

 

법주사 팔상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하나뿐인 목탑입니다.

신라가 기울기 시작하는 770년대 고쳐지었는데 이때 여기에 미륵신앙이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당시 미래불인 미륵을 으뜸으로 치는 신앙은 수도권 왕족이 아닌 비수도권 호족의 것이었고 평민·노비도 이를 따랐습니다. 현실은 왕족 너희 것이지만 미래는 우리 것이라는 그런 심정으로 말씀입니다.

 

이 미륵은 법주사와 창원을 잇는 징검다리이기도 합니다. 창원 백월산에서 노힐부득·달달박박 두 사람이 성불(成佛)해 제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현신(顯身)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답니다. 인도산 수입 부처가 아닌 우리나라 국산 부처의 탄생이라 하겠습니다.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안에 돋을새김으로 표현돼 있는 노힐부득(오른편)과 달달박박(왼편) 이야기.

어떤 이는 이런 얘기가 허망하다 하지만, 당시 경덕왕은 이를 기려 백월산 기슭에 '남사(南寺)'를 짓게 했으며 요즘 들어 출토된 기와조각에는 이 절간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덕왕은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도 창건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지어낸 허튼 수작은 아니며 오히려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액면 그대로는 아니라 해도) 백월산에서 있었음은 사실로 여겨야 하겠습니다.

 

법주사는 옛적 용화보전 자리에 33m짜리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하면서 이런 우리나라 최초 성불(成佛) 사건을 돌팍에 돋을새김했습니다.

 

법주사가 미륵신앙의 본산이기에 이렇듯 미래불 미륵과 내세불 아미타로 현신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형상화할 수 있었지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법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빼면 미륵불과 아미타불만 모셔져 있을 따름입니다.

 

창원 백월산과 속리산 법주사의 인연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법주사 나무그늘 너럭바위에 앉아 이런 인연에 대해 짧게 얘기하고는 경내로 들어서 군데군데 드문드문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하지만 설명은 설명일 뿐이고 법주사를 법주사답게 만드는 보배는 따로 있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과 청동미륵대불.

 

팔상전과 잣나무와 보리수입니다. 우리나라 하나뿐인 목탑(5층)인 팔상전은 법주사의 드높은 위상을 두말없이 상징합니다. 천왕문 앞 잣나무는 자칫 늘어지기 쉬운 절간 분위기를 푸름과 우뚝함으로 일신합니다.

 

법주사 대웅보전과 보리수.

 

대웅보전 앞 보리수 두 그루는 그 우람한 자태를 마주하는 이에게 옛적 석가모니 해탈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잣나무와 더불어 시원하게 공중을 가르는 보리수의 이런 모습, 다른 절간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보배가 있으니 바로 법주사 오가는 오리숲길입니다. 2㎞ 안팎이라 '오리(五里)'인데 여느 절간 다른 숲은 대부분 소나무가 주종이지만 이 숲은 솔뿐 아니라 잎 넓은 나무도 퍽 많습니다.

 

 

솔만으로 이뤄진 숲은 아래가 메마른 편이지만 활엽수가 많이 섞인 숲은 은근히 촉촉합니다. 물기가 많으면 그 은덕으로 살아가는 생명도 많은 법, 이날 숲길에서 난생처음 살진 오소리를 볼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 있었지 싶습니다. 게다가 이런 물기는 증발하면서 더위까지 한풀 누그러지게 한답니다.

 

절간을 둘러본 일행들은 둘씩 셋씩 무리지어 얘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산책을 했습니다. 냇가나 길섶 바위에 걸터앉아 오리숲 푸근한 분위기도 즐겼습니다. 나무나 풀을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숲 속 풍경을 추억거리로 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처음 출발한 데로 돌아와 끼리끼리 모여 앉아 남은 먹을거리까지 풀어헤쳤습니다.

 

선병국 가옥 숲길 들머리.

 

이번 나들이에서 앞서 들른 선병국 가옥은 시내를 따라 굽이지며 둘러싸고 있는 솔숲 덕분에 더욱 그럴듯했고 뒤이어 찾은 법주사는 여러모로 풍성한 오리숲길이 어우러져 더욱 보람찼다고 하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정이품송을 둘러본 발길은 덤이라 하면 알맞겠고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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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공공기관 정상화는 사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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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부산시청에서 ‘부산지역 공공기관 노동조합 협의회’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오후 2시 즈음으로 기억돼 있는데, 이 자리에 부산지하철노동조합이 몇몇 블로거들을 초청하는 바람에 저도 덩달아 끼였습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구분없이 부산에 있는 공공기관 노조면 모두 참여한 모양이었는데 그런 때문인지 협의회 대표는 한국노총 공공노조연맹 부산본부 의장(도용회)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부산본부장(석병수)이 공동으로 맡고 있었습니다.

 

공공기관이라 하면 우리 사회 유지·발전에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일 텐데 이를테면 전기·철도·환경·가스·교통·고용보험·연금·의료 등등이 되겠습니다. 부산 지역 24개 조직 1만3000명 조합원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협의회를 따르면 공공기관 노조들이 지역 차원에서 조직 실체를 갖고 한 데 모여 조직을 꾸리는 일이 전국 처음입니다. 여태 서울 중앙 단위에서 상부 또는 지도부끼리 연대·협력은 있었지만, 실제 특정 국면이 닥쳤을 때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체의 결집은 전국은 물론 지역 어디서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모인 데에는 다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부터 밀어부치고 있는 이른바 ‘공공기관 정상화’였습니다. 공공기관 노조들은 박근혜 정부 ‘정상화’를 ‘가짜 정상화’로 규정하고 이에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임금피크제·성과연봉제·2진아웃제 등으로 공공기관 정상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공공기관 정규직은 고용이 불안해지고 비정규직이 크게 늘게 되며, 지역 사회 주민들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저급하고 저질인 공공서비스를 받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초청받은 블로거들입니다.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봉제는 다들 아실 텐데, 박근혜 정부는 이 둘을 연동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일정 나이(말하자면 60살)를 넘으면 급여를 해마다 10% 20% 30% 깎고, 그렇게 남겨지는 예산은 성과연봉제로 돌린다는 얘기입니다.

 

이러면 공공기관끼리는 물론 개별 공공기관 내부서도 경쟁이 심해지게 마련입니다. 2진 아웃제는, 업무 평가에서 두 차례 잇달아 최하위 등급을 받으면 면직·퇴출 내쫓아 버리는 제도로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현행 법률은 정리해고와 징계해고 둘만 가능하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묻습니다. 나이가 들면 효율이 떨어지고 생활에 필요한 비용도 줄기 마련인데 임금피크제가 뭐 문제냐? 성과를 더 내는 사람한테 더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한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데 성과연봉제와 2진아웃제가 뭐 문제냐?

 

가까운 카페로 옮겨 진행한 얘기자리. 왼편 모자 쓰고 서 있는 사람이 블로거 거다란입니다. 부산지하철노조 간부이기도 합니다.

 

공공기관노조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공공기관 노동자 고용안정을 해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지역 사회 일반 주민들한테 돌아가는 공공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먼저 꼽습니다. 경쟁을 제도화하면서 지표로 삼는 것은 예산 절감과 수익 증대 두 가지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덜 쓰고 더 챙기자는 얘기입니다. 의료기관을 보기로 들자면 예전부터 항생제를 많이 쓰는 병원이 있고 제왕절개를 많이 하는 병원이 있어서 사람들이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항생제 사용은 예산 절감과 직결되고 제왕절개 출산은 수익 증대와 관련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공공기관 이익을 위해 그 소비자들을 명백하게 위험하거나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아가기 십상이라는 얘기입니다. 핵(원자력)발전소 갖고 보자면 매우 높은 수준에서 안전이 담보돼야 하는 시설임에도, 경비 절감을 위해 설비에 들어가는 부품을 덜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부산지역 공공기관 노동조합 협의회 출범 당시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지금 국가재난이라고까지 얘기되는 메르스 같은 질병을 두고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노총 쪽 도용회 의장.민주노총 쪽 석병수 본부장.

 

질병 예방을 위해서는 특별한 시설과 별도 대응 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지만, 예산 절감과 수익 증대에 목을 매면 당장 돈이 되지 않고 지출만 늘리는, 그렇지만 공공성으로 볼 때는 반드시 갖춰야 하는 그런 장치·시설을 소홀하게 만들도록 하는 제도가 바로 성과연봉제 같은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노조 쪽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보면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바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이런 얘기를 실감나게 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정상화’라는 프레임을 먼저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공공기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나쁘게 만들고 공공서비스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을 벌이면서 ‘공공기관 정상화’라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대표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뒤 장소를 옮겨 도용회 한국노총 공공연맹 부산본부 의장 석병수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부산본부장 이의용 부산지하철노조 위원장 등과 얘기를 주고받았는데요, 가장 큰 주제가 바로 이 ‘정상화’였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집권 2년째인 2014년부터 ‘부채·적자 해소를 위해’ ‘공공기관 정상화’를 들고 나와 지금껏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 노조는 이를 두고 ‘가짜 정상화’라 할 뿐 딱히 달리 규정을 못하고 있다고 이들은 말했습니다.

 

공공기관 노조들이 정부 ‘가짜 정상화’에 맞서 조금 나서려 해도 정부가 일반 국민들을 향해 ‘귀족노조가 기득권 지키려고 투쟁을 벌인다’고 한 마디 던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다들 걱정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호소하고 설득해도 ‘정상화’ 틀에 갇히면 끝장이기에 정말 어렵다는 얘기였습니다.

 

가장 오른쪽 안경 쓴 이가 부산지하철노조 이의용 위원장.

 

그러는 가운데 부산지하철노조 이의용 위원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공공기관 정상화는 바로 공공기관을 사기업화하는 정책이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공공기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 어떤지는 잘 모르고 그래서 세세한 부분까지 이래라저래라 할 깜냥이 못 됩니다. 다만, 분명한 알고 있는 사실은 박근혜 정부가 ‘정상화’라는 그물을 던져놓은 이상, ‘그것은 가짜 정상화’라 해서는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쩌면 이의용 위원장이 말한 ‘사기업화’라는 규정이 지금 사태의 핵심을 찌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정상화’ 그물을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사유’ 또는 ‘사유화’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유’ 또는 ‘사유화’라 하면 대부분은 ‘공리민복’은 도외시하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행태(실제로도 그렇습니다.)라고 여기면서 싫어하거나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 공공기관 정상화는 가짜 정상화가 아니고 바로 사기업화다’라는 얘기고 이렇게 분명히 표명해야 그 대치가 선명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공공기관 정상화가 아니고 사기업화다’라 한다 해도 그 성패 또는 승패가 단박에 정리되고 갈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른편 세 사람은 블로거들입니다.

공공기관 노동자들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데, 이에 대한 일반 국민들 상대적 박탈감과 반감을 어떻게 다독거리고 달랠지 하는 변수도 있고 공공기관 노조가 일반 국민들과 일상 속 거리를 어떻게 좁힐는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 손쉬워 보이지 않는 어려운 국면입니다만, 어쨌든 박근혜 정부의 비정상의 정상화=공공기관 정상화라는 프레임 또는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가짜 정상화’라고만 해서는 안 되고,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 ‘대자본을 위한 사기업화’라고 규정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지금 메르스 국면을 보면서도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공공기관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터지거나 더 심해진 사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바닥에는 ‘나중에는 어찌 될 값에 지금 당장은’ 조금이라도 더 싸게 공공서비스(수준은 저질·저급이지만)를 제공해 대자본·대기업 원가를 절감시켜 주고 대자본·대기업의 활동 영역을 확장해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해도해도 안 되는 경우는 ‘공공기관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그 전부 또는 일부를 대자본·대기업에 넘기는 ‘사유화’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를 해결 못하는 이상 겉모습만 다를 뿐 본질은 완전 똑같은 그런 재난이 앞으로도 줄줄이 이어질는지도 모른다 싶은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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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이 온몸으로 보여준 ‘핵피폭의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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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기록을 보면 1945년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떨어진 핵폭탄 관련 통계는 대충 이렇습니다. 전체 피폭자 69만1500명에 폭사자가 23만3500명(33.77%)입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처음 듣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7만명이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4만명이 죽고 나머지 3만명 가운데 2만3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7000명은 일본에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2만3000명은 대부분 이북이 아닌 이남에 연고가 있었습니다. 일제 식민지 수탈과 전쟁물자 강탈로 먹고 살 터전을 잃어버린 조선 사람들이, 남쪽은 주로 일본으로 가고 북쪽은 주로 만주로 갔다는 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온 2만3000명 가운데 한 사람이 김형률(1970~2005)의 어머니(이곡지)입니다. 부산지하철공사노조 요청으로 5월 22일 김형률 추모 문화제에 가서 알았습니다. 이곡지는 나가사키 피폭 당시 다섯 살(40년생)이었습니다. 

 

김형률 어머니.

 

경남 합천에서 국민학교만 나왔는데 남편 김봉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해 부산에서 살면서 자녀 여섯을 낳았습니다. 70년생 김형률을 기준으로 보면 형이 둘 누나와 여동생이 하나씩 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로 같이 태어난 남동생은 1년 반 만에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다섯 가운데 선천성으로 질병과 고통에 시달린 사람은 김형률 하나였고 ‘핵피폭 유전’이 원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핵피폭 1세대도 적지 않게 많지만 김형률과 같은 핵피폭 2세대, 그리고 3세대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2세대와 3세대에는, 김형률의 형제자매처럼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많고 김형률 자신처럼 질병과 고통을 유전으로 받은 사람도 많습니다.

 

2004년 인권위원회가 조사해 2005년 2월 발표한 자료를 따르면 핵피폭2세대가 5000명가량 됩니다. 물론 이는 전수(全數)조사가 아니었으며 질문에 대답해온 숫자일 뿐이므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모릅니다.(저도 바로 그랬습니다.) 심지어, “(핵피폭자와 그 2세·3세들이) 그렇게 많다면 이토록 알려져 있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아, 핵피폭자가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핵피폭자와 그 2세·3세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미국·일본·한국 정부의 잘못과 책임이 클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무시하고 방치하고 숨기고 가리고 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정부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질병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들은 왜 가만히 있었지?’ 하고 궁금해합니다. 어쩌면 김형률이 2002년 3월 22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기가 갖은 질병과 고통을 겪고 있는 핵피폭2세’임을 밝혔던 때로 돌아가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정황은 이렇습니다. ‘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28~33쪽에서 가져왔습니다. 당시 김형률은 질병과 고통을 온통 감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자립을 위해 취업에 목숨을 걸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밤샘을 마다 않고 작업하던 2001년 5월 어느 새벽녘, 갑작스레 심각한 가슴 통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급성폐렴의 재발이었다. 


6월 퇴원한 김형률은 부친과 함께 부산지방법원에서 미쓰비시 관련 재판(조선인 강제 징용)을 방청하고 ‘미쓰비시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에 자신이 ‘한국원폭2세’임을 스스로 밝히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김형률이 입원해 있는 동안 부친은 원폭1세 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를 찾아 아들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2002년 2월 김형률의 모친은 자기 여동생을 비롯한 한국인 피폭자 열네 사람과 더불어 일본 히로시마를 찾아가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았다.-수첩이 있으면 일본 안팎에서 건강 검진과 치료를 받을 수 있고(비(非)일본인에게는 의료비 상한이 있음) 의료보험료 본인부담분과 건강관리수당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친이 히로시마에서 돌아온 뒤 김형률은 자신이 원폭2세임을 밝힐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한국에 온 2002년 3월 22일 김형률은 ‘자기가 원폭피해 2세’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이 기자회견은 고민 끝에 내린 김형률의 ‘인권선언’이었다.

 

김형률 생전 모습.

 

대구의 ‘미쓰비시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의 모임’이 이런 기자회견을 제안했을 때는 정작 당사자인 김형률이 주저했었다. 모친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여동생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또 원폭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차별·편견을 두려워하는 다른 원폭2세나 단체의 반발도 예상됐다.

 

기자회견은 여러 가지 보도매체에서 잇달아 다루는 등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기대했었던 다른 원폭2세의 연락도 없었으며 오히려 ‘협회’ 간부의 반발만 사게 됐다.

 

그렇습니다. 원자폭탄(핵폭탄)을 맞았다고 하면 웬지 꺼려지고 어쨌든 피하거나 외면하고 보는 사회 분위기, 그이들을 무시·멸시하고 차별하는 사회 전체 차원의 무의식, 이런 것들이 핵피폭1세대는 물론 그 2세와 3세까지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실정은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나는 反核人權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251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2005년 2월 (한국)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공표한 ‘건강실태조사’는 한국 원폭2세에 대한 건강 실태조사로는 처음인데, 이런 정도 규모 조사조차 일본에서는 원폭2세에 대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원폭2세에 대한 조사 자체가 사회 전체에 피폭자 차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피폭자단체에서 오히려 조사를 기피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한국과는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싶은 일본도 원폭2세에 대해서는 거의 방치 수준이라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피폭자1세와는 달리 피폭자2세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는 구체적인 원호대책이나 법률은 별도로 없는 실정이다. 대신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피폭자2세를 대상으로 의료지원이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조례를 시행하고 있다.”(270쪽)

 

이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이 우리나라 핵피폭1세대는 물론 2세대나 3세대의 실정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현실을 깨고 나온 김형률의 기자회견이 대단할 따름입니다.

 

김형률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탔다고 합니다.

 

이 책을 펴낸 아오야기 준이치씨는 바로 이런 이유로 이렇게 적었습니다.(250쪽)

 

“사회가 강제하는 ‘침묵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어버린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의 증거이기도 한 ‘생존권’을 선언하여 살아남을 것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기 시작한 시점에, 김형률은 명확하게 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부가 후쿠시마의 피해를 가능한 최소화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덮거나 방사능 오염의 무서움을 말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일본의 현황을 생각하면, (그래서) 그의 용기와 결의에 기반한 ‘인권선언’, 즉 커밍아웃의 고결함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김형률은 한국인 원폭2세라는 압도적 소수파였으며 게다가 당시 한국 사회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인식 수준을 생각하면 후쿠시마의 피해자들에 비해 훨씬 어려운 처지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자손들이 ‘유전적 영향의 심각함’을 스스로 고백하지 못하는 것처럼, 후쿠시마의 피해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 없이 ‘침묵의 어둠에서 어둠으로’ 묻혀져갈 가능성이 높다.(그런 이유로 이 책은 일본어판을 먼저 출간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까지도, 스스로 핵피폭2세임을 밝히면서 ‘핵피폭의 유전적 악영향’을 앞장서 주장하는 주체는 오로지 김형률(그리고 김형률이 초대 회장을 지낸 ‘한국원폭2세환우회’)밖에 없는 현실이 됐습니다.

 

이와 같은 핵피폭2세에 대한 김형률의 문제제기는 단지 김형률 본인을 비롯한 핵피폭2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니지 싶습니다.

 

5월 22일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 한 장면.

김형률의 삶이 보여주는 그대로 핵피폭으로 고통과 질병이 유전되고 대물림을 한다면 그것은 한국 사람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는 과정을 대를 이어 되풀이하는 가운데 ‘핵피폭의 유전적 악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보면 이렇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에 조사하고 2005년 발표한 ‘원폭피해자 2세 건강실태’입니다.

 

“1000세대 이상 4000명 이상 원폭2세를 조사했는데 3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고 그 중 절반 이상(52%)이 10살이 채 되기 전에 죽었다. 또 같은 세대 일반인과에 비해 심장관계 질환은 80배 이상, 우울증은 70배 정도, 조현병은 20배 정도로 심각했다.”(251쪽)

 

이런 현실을 두고 김형률은 생전에 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봐도 아주 온당한 내용입니다.

 

“원폭2세에 대해 현재 수준에서 검사 가능한 분자유전학적 조사를 하고 동시에 미래 유전학 지식이 보다 발전할 경우를 대비해 원폭2세의 유전자 샘플을 채취·보관할 필요가 있다.”

 

김형률 한 사람보다 못한 대한민국 정부이고 일본 정부입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가 일어난 직후부터 후쿠시마현 의사들은 철저하게 관리돼서 사고 피해조사조차 이루어질 수 없게 됐다.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오염이 심각한 지역으로 지정되면 주민들을 퇴거·피난시켰는데 일본은오히려 원래살던 데로 돌아가게 하는 정책이 시작되고 있다. 


게다가 사고 직후초기 단계에서 피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피해조사를 한다 해도 이전 조사와 비교·검토가 불가능하여 방사능 오염의 유전적 영향은 확인할 수 없게 됐다.”(252쪽)

 

그러나 방사능 오염의 유전적 악영향은 아주 확실한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게다가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피폭은 일상이 됐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현실이 됐습니다.

 

“2015년 2월 현재에도 12만 명이 넘는 후쿠시마의 이재민들이 방사능 오염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또 방사능 오염물질이 바다와 하늘로 계속 방출되고 있음에도 원자로 등의 피해실태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291쪽)

 

폭탄이 됐든 발전이 됐든, 원자폭탄이라 하든 원자력발전이라 하든, 핵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우리 인간에게 미래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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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장 재첩으로 길어올린 옛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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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첩. 


70년대 중반 부산 서대신동 산동네 살 때, 잠을 깨우는 새벽 소리는 "재치꾹 사이소~~ 재치꾹 사이소, 재치꾹~"이었습니다. 


그 때 이미 경남에서 부산으로 편입돼 있었던, 하단에서 온 아지매들이었습니다. 

 

하단(下端)-그러니까 낙동강 가장 아래 끄트머리라는 뜻인데 바다의 짠물과 육지의 민물이 뒤섞이는 장소(기수역汽水域이라고들 합니다만.)였습니다. 


윗섶이 날리지 않도록 허리 위를 끈으로 동여맨 아지매들은, 양동이를 머리에 이었으면서도 산동네 그 가파른 골목길을 잘도 헤치고 다녔습니다. 


"재치꾹 사이소~~~" 소리에 선잠이 깬 우리는, 그 소리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대문이라 하기에는 퍽이나 초라하지만, 그래도 달리 부를 이름은 없는 곰삭은 나무문을 삐걱 열고 나가 50원 어치 100원 어치를 양푼에 받아 와서는 형이랑 누나랑 식구들이 함께 아침밥을 말아먹곤 했습니다. 


보기만 해도 알이 아주 실한 줄 알겠습니다.


그러다 제가 마산·창원에 와 있던 80년대 중후반에는, 재첩국이 가장 유명한 데가 부산 하단이 아닌 섬진강 일대 하동으로 이미 바뀌어 있었는데요. 


어떤 이는 하동 섬진강이 '예부터 줄곧' 가장 유명했었다고 기억하기도 합니다만, 실은 70년대 후반 낙동강 하구가 둑으로 막히면서 하단 일대 뻘들이 예전처럼은커녕 그보다 엄청나게 적게조차도 생명을 품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들어서 압니다. 


6월 17일 합천 삼가장에서 재첩을 샀습니다. 국밥으로 점심을 먹고, 시장통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아직 덜 늙고 더 젊은 할매 난전으로 갔습니다.

 

이런 내륙 한복판 장터에 재첩이라니! -대부분은 재첩이 민물이 갱물과 만나는 하구 기수역에서만 나는 줄 알지만 실제는 민물서도 난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으로 먹은 원조돼지국밥집 국밥(6000원)과 수육(5000원). 오른쪽 국물은 덤입니다.


재첩이 두 대야로 나뉘어 담겨 있었습니다. 요즘은 이런 재첩 하동에서도 보기 어렵습니다. 큰 것은 500원짜리 돈짝 만하고요 작은 녀석도 대부분 그래도 100원짜리나 10원짜리 만은 합니다. 제가 멈춰 서서 스윽 눈길을 내리까니까 말을 걸어옵니다. 


"아재, 7000원에 가지 가이소~~" 

"한 대야에 7000원이지예?" 

"아이라, 두 개 7000원, 점섬 전에는 (한 대야에) 5000원썩 했는데~~~" 

"와 이래 쌉니꺼? (두 대야) 7000원이면 공짜다, 공짜." 

"와 아이라. 어지 이거 잡니라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아이가. 돌 가리내니라 어깨는 둘러빠지는 줄 알았고. 

미나리는 안 사나? 2000원 하던 거 1000원에 가 가소." 

"와 이래 쌉니꺼? 정말 거저다, 거저." 

"시장시러바서, 집에 좀 일찍 갈라고~~~~" 


이렇게 해서 재첩 두 대야랑 미나리 두 단을 샀습니다. 

재첩국에는 정구지 또는 미나리를 잘게 썰어서 적당히 넣어야 씹는 맛도 있고 냄새도 좋습니다. 

미나리 볏짚으로 묶은 자태가 정겹습니다.


값을 따지면 9000원이지만 1만원짜리 드리고는 거스름돈은 주지 말라 했습니다.

할매가 '고맙다'고 했으나 정말 고마운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집에 가져와 이틀 동안 뻘물이 땟국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쉬엄쉬엄 문질렀습니다. 

대충 헤아려도 쉰 차례는 더 물을 갈아가며 치댄 것 같습니다. 그제야 씻은 물이 좀 맑아졌습니다. 


옛날 서대신동 산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누비던 하단 아지매들, 전날 저녁 때까지는 아마 물에 들어가 재첩을 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 먹고 나서는 잡은 재첩을 이렇게 치대고 문지르고 했겠지요. 


제가 했던 쉬엄쉬엄 쉰 차례와 아지매들 했었을 일삼아 쉰 차례를 두고 어느 쪽이 더 힘들겠느냐 물으면 어리석다 소리를 듣겠지요. 


그이들 귀찮음과 성가심과 고달픔과 힘듦은 아마도 어쩌다 한 번씩 허리 펼 때 뼈저리게 느껴오는 끊어질 듯한 아픔으로 나타나곤 했겠지요.



말갛게 끓여진 재첩국을 봅니다. 미나리 썰어서 동동 띄운 재첩국을 봅니다. 처음 해 보는 겨를에 물을 지나치게 부은 탓으로 조금은 싱거운 김훤주표 재첩국을 맛봅니다.

 

그러면서 그 맛에 어리어 옛날과 오늘날 기억을 이렇게 떠올려 봅니다.


어떤 때는 옛 기억이 새 기억을 끌어오고 또 어떤 때는 새 기억이 옛 기억을 밀어가면서 때로는 말려오고 때로는 펼쳐지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삶인 모양이다, 이런 생각을 한 번 해 봤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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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도 일본 포병에게 동백꽃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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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으로 이름높은 섬 거제 지심도. 아울러 일제 군사시설 잔재가 가장 밀집돼 있는 데가 바로 이 지심도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태 나름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여러 가지가 빼곡하니 남아 있는 일제 군사기지 유적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5년)을 앞두고 진해만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지금 창원시 진해구 우리나라 해군 시설이 있는 데는 물론이고 거제도 일대가 모두 포함됩니다. 방어와 공격에서 요충임을 알아챈 일본은 1903년 거제 송진포에 방비대를 설치한 이래 거제 전역을 군사 지역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심도에는 원래 살던 조선 사람들을 죄다 쫓아내고 1936~38년 3년에 걸쳐 포대(100명 규모)를 설치했습니다. 2003년인가에 이를 말해주는 일본군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적산(敵産) 건축물들은 모두 이 때 지어졌습니다.

 포대장=중대장 관사. 동백하우스. 현관 들머리가 아주 권위롭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켰고(괴뢰 만주국) 1937년 중·일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가운데 들어선 지심도 포대는, 조선 방어용이기도 하고 일본 본토 방어용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 왜구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까지 남해 바다는 오랜 옛날부터 침략의 바다였고 방어의 바다였습니다. 미래에도 이런 침략과 방어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제주도 강정 해군군사기지 설치가 이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전쟁이 넘치는 바다는 동시에 평화를 바라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심도는 일제 강점기 당시도 돌아보고, 임진왜란과 그 이전 왜구까지 떠올리며,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맞붙을지도 모르는 미래 바다까지 아울러 볼 수 있는 전쟁 역사 전망대인 동시에 평화 역사 전망대입니다.(물론 그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바라고 애써야 하겠지만.)

 

이런 뜻에서 본다면 지심도 포대 유적을 단순한 일제 잔재로만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여기를 4월 22일 둘러봤습니다. 두 달 가량 지나 기억이 희미해진 대목도 있습니다. 당시 현지에서 보고 주민들한테 들은 바를 최대한 그대로 옮긴다고 했습니다만, 행여 잘못이 있으면 그 책임은 모두 제게 있습니다.





포진지 유적입니다. 모두 네 군데 있었습니다. 아마 대포를 올려놓고 사방 360도 돌릴 수 있도록 이렇게 콘크리트로 시설을 만들었나 봅니다. 지금은 이렇게 옆으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나 있지만 당시는 이렇게 두지 않고 시야 확보를 위해 나무를 베어냈었겠지요.


탄약고입니다. 포진지 가까운 데 두 군데 있었지 싶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내부에 이런저런 사진과 설명글을 달아놓고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말 그대로 탄약을 비롯해 포탄 총알 따위를 여기에 재어놓았을 것 같습니다. 




방향표지석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가운데 동그랗게 돼 있는 자리에 밤에는 아마도 서치라이트가 놓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180도로 방향을 표지했을 것입니다. 절영도는 지금 이름이 영도(부산)입니다.


서치라이트(탐조등) 보관소.



배급소=포대 식당. 숲 속의 향기. 그런데 지금 모습은 그냥 흉내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병 막사. 앞에서 본 중대장 관사랑 견줘보면 현관 위쪽이 다릅니다. 사병 막사의 그것은 빗발이나 햇살을 가리는 정도에서 멈출 뿐 권위로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왼쪽에서 앞으로 달아내어 지은 건물은 일제 잔재가 아닙니다. 요즘 들어 민박용으로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아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내판에 태극기게양대라 적혀 있었고 실제로도 거기에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태극기를 올려야 할까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인데, 옛날 일본 포대가 욱일승천기를 올렸던 장소입니다. 저는 태극기가 학대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전등소 소장 관사(위쪽 사진)에서 좁다란 오솔길 건너 바로 위에 사는 할매를 만났습니다. 아주 전망이 좋은 자리(아래 사진)인데 민박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 할매한테서 여러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할매는 시집을 지심도로 왔다고 했습니다. 


할매 말씀을 따르면 전쟁 중에 미군이 한국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솰라솰라 하면서 발전시설을 뜯어갔다 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아마도 통역용으로 붙였겠지요. 발전시설은 아래 사진 두 장에서 뒤쪽으로 보이는 2층 건물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진 속 건물은 요즘 새로 지은 것입니다. 


할매는 이런 얘기도 해줬습니다. 당시 발전을 수력(水力)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냥 막연히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갖고 온 석탄이나 베어낸 나무를 갖고 화력발전을 했겠거니 여겼는데 아니었습니다. 할매는 섬이 작아도 여기 이 자리는 사철 끊임없이 물이 난다고 했습니다.(아래 사진 세면대)


오고가는 가운데 한 켠에 있는 콘크리트 시설물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예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일제 지심도 군사기지 건설 얘기를 듣고 보니 보였습니다. 물길 같은데요, 물이 잘 빠져야 길도 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군사시설로서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군사시설이 끼치는 느낌이 나름 있었지만 아름답지는 못했습니다. 역시 아름다움은 자연의 몫이었습니다. 4월 하순이지만 동백은 이미 동백이 아니고 춘백이었습니다. 지지 않은 채 나무에 매달린 꽃도 예뻤고 이미 져서 바닥을 뒹구는 꽃들도 예뻤습니다. 




당시 여기 와 있던 포대 장졸들도 이런 꽃을 봤을 텐데, 과연 감흥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또 일부 일본 인사들이 얘기하듯이, 당시 극한상황에서 극악한 생각만 했을 수도 있겠고 단체생활 규율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순간 떨어지는 꽃잎에 마음이 출렁출렁 흔들이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는지, 또 쏟아지는 햇살에 동백 빨간 꽃잎 푸른 잎사귀가 반짝일 때 같이 반짝인 것이 그 100명 그 마음 가운데 단 한 순간도 없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과연 일본군대 장졸들은 수풀이 가득히 그늘을 내려주는 길을 걸으면서도 전쟁 생각만 하고 사람 죽일 생각만 하고 영미(英米) 귀축(鬼畜) 때려잡을 생각만 했을까요. 아무래도 모를 노릇입니다. 저 푸른 바다 시린 끝으로 눈길을 던지면서도, 두고온 친구나 애인 생각에 눈물 흘리는 일은 아예 없었을까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동백숲은 동백숲이고 대숲은 대숲이었습니다. 햇살은 그 사이를 가르며 바닥까지 들어왔습니다. 사람만 난리를 칠 뿐 대도 동백도 꽃도 잎도 햇살도 빗발도 그냥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할(然) 뿐인 것 같습니다. 전쟁이 무엇이냐 승패가 무엇이냐 되묻는 자연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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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는 거제를 어떻게 바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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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로수용소가 왜 거제도에 있었을까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알리는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남침을 개시하여 서울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국군은 미군 및 유엔군의 지원을 얻어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00만여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전쟁 중에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1951년부터 거제도 고현·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인민군 포로 15만, 중국군 포로 2만 등 최대 17만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는데 그 중에는 3000여 여자 포로도 있었다.

 

1951년 최초의 휴전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겪었다. 특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유혈살상이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돗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 갈등의 축소현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1953년 6월 18일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났고,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지금은 일부 잔존 건물과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전쟁 역사의 산 교육장 및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자리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는대로,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선 까닭은 거제도가 크고 넓으면서도 육지와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립돼 있기에 가둬두기 좋았고 너르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다크 투어리즘은 아닌 것 같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드는 느낌은 "'다크 투어리즘'은 아닌 것 같다"였습니다. 전체 꾸밈새는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벌어졌던 전쟁도 나름 알차게 보여주고 포로수용소 당시 모습과 현황도 그럴 듯하게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 슬픈 현장을 둘러보며 굳이 교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현장에 걸맞게 무엇인가가 마음이나 머리에서 느껴지고 새겨지도록 돼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놀이터 같이 여겨지기도 했고, 실제로 놀이 삼아 재미 삼아 둘러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아쉽다거나 안타깝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무엇이 됐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들렀을 때 헛되지 않았다는 느낌만 갖게 해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요. 저 또한 이번 걸음에서 처음 듣고 보고 해서 배운 내용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시설이 모자라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 현재에 대한 응시가 모자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응시'라 하니 대단한 무엇 같지만, 다름 아니고 우리나라가 한반도가 아직 전쟁이 걷히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보이지 않더라는 말씀입니다.

 

3. 한반도에 진행 중인 전쟁을 걷어내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전쟁은 더없이 끔찍하고 잔인하고 비정하고 괴로운 실체이며 거제도 포로수용소 또한 그런 전쟁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조차도 어쩌면 전쟁 그 자체였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북 대치 휴전 상황으로 아직 전쟁이 걷히지 않은,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곳곳에서 전쟁에 버금가는 살상이 벌어지고 긴장 국면이 만들어지는 이 한반도입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넘어서려면 어떤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지 정도는 조금 알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면, 그런 생각이나마 해 볼 수 있는 단초라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아울러, 역사를 되짚어보면 거제 일대에는 여러 산성과 임진왜란 또는 일제강점기 전쟁 관련 유적이 많은데요, 왜 이렇게 됐는지도 얘기해 주면 더욱 좋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에 걸맞은 어떤 장치랄까 시설이랄까 설명이랄까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북한에 대해 적개심을 돋우는, 말하자면 전쟁에나 걸맞을 뿐 반전이나 더 나아가 평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부분이 돋보이기까지 했습니다.

 

4.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 끼친 영향은?

 

하나 더 짚는다면 이 포로수용소가 거제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끼쳤는지 하는 부분이 충분하게 보여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그 자체와 포로수용소 안과 밖에서 포로수용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전개는 무척 다이나믹했습니다.) 

 

 

포로수용소를 짓는 데는 무엇보다 먼저 땅이 필요했을 테고 그 땅에는 이미 거제 사람들이 사는 집과 농사지어 먹는 논·밭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그런 집과 논·밭을 강제 수용하면서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았을 텐데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을까 싶습니다.

 

또 거제도 바깥으로는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도록 돼 있었고 이를 위해 포로수용소 전용 항구도 따로 있었지요. 그러면 그런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도 다른 데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이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포로수용소 없어지고 나서는 또 어떻게 했을까요?

 

 

어쨌거나 '최대 17만3000명 포로'를 수용했다니까, 그렇게 엄청나게 포로가 들어오면서 거제가 겪어야 했던 희로애락과 변화·발전·퇴보 등등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포로수용소를 짓는 데 들어간 물자와 인력이 어느 정도였고 어디서 어떻게 조달했을까요? 그리고 그런 일에 거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얼마나 동원이 됐는지도 저는 궁금합니다.(바로 옆에 전통시대 고현읍성이 있는데, 이 또한 포로수용소 지으면서 많이 허물어지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규모가 엄청난 포로수용소를 유지 관리하는 데 거제 사람들은 어떤 쓰임을 받았을까요? 포로들과 미군들이 먹고 입고 쓰고 했던 물자들 가운데 거제 사람들이 생산하거나 유통했던 것들은 또 얼마나 될까요? 포로수용소 미군들한테 채용된 거제 사람(요즘 말로 군무원)은 없었을까요?

 

또 포로들과 거제 사람의 접촉은 없었을까요? 미군들이 거제 지역사회와 만나지면서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포로들한테 면회 오는 사람들과 만날 권리는 보장이 됐을 성 싶은데 그 관련 이야기나 풍경도 한 장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비대장 숙소 들머리. 서양풍입니다. 그리고 대장 격에 어울리게 천장쪽을 둥글게 장식 처리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 유적공원에 전쟁을 넘어서는 이를테면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어떤 메시지 같은 것이 좀더 뚜렷하면 좋지 않을까, 포로수용소가 거제 지역에 미친 영향의 실상(좋든 나쁘든)이 담겨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냥 놀이터 비슷하게 돼 있는 데에 그런 것들이 더해지면 여기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보람있어 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냥 와서 웃으며 여기저기 돌아다 보다가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가는 지금보다 재미도 더 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군 어떤 장병 순직기림비.

 

5. 입장료 등이 너무 비싸다 싶은데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짚자면, 관련 비용이 좀 많이 비싸다 싶었던 것도 있습니다. 유지 관리 그리고 알맞은 이윤을 위해서는 그만큼 비싸게 받아야 한다 해도 말입니다.

 

입장료가 이렇습니다. 어른:개인 7000원 단체 5000원, 청소년·군인:개인 5000원 단체 3500원, 어린이:개인 3000원 단체 2000원, 노인(만 65살 이상):개인·단체 불문 3000원.

 

4인 가족이 왔다고 치면 어른 2명 1만4000원, 청소년 5000원, 어린이 3000원 해서 입장료만 2만 2000원이 됩니다.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더 내야 할 다른 요금도 있습니다.

 

 

주차요금도 별도로 따로 받습니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안에도 별도로 요금을 더 받는 프로그램에 여러 있었습니다.

 

사격체험장:2000원, 거울 미로&착시미술:개인 3000원 단체 2000원, 아바타포:개인 9000원단체 7000원. 단체는 30명 이상입니다. 이런 요금 다른 데서는 정말 보기 어렵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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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과 지역출판 중간보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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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경남도민일보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는 김주완입니다. 요즘 저희가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일을 알려드리려고 메일 올립니다.


1. 저희는 최근 '뉴스펀딩'이라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포털 다음에서 이미 뉴스펀딩을 하고 있고, 저도 '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프로젝트를 다음의 플랫폼에서 연재했고, 나름의 성과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포털에 의존한 뉴스펀딩은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고 한계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아예 자체적으로 뉴스펀딩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오마이뉴스나 민중의 소리 같은 매체도 이미 '좋은 기사 원고료 주기' 등 이름으로 기사에 후원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저희는 좀 다르게 해보기로 했습니다.


모든 기사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있게 독자에게 내놓을 수 있는 기사에 한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려면 (1) 독자가 후원을 하면서 뿌듯해 할 수 있는 기사 (2)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는 기사 (3) 깊이 있는 취재와 기자의 필력이 뒷받침되는 기사여야 하겠죠.



그 첫 번째 프로젝트는 광복 70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악인 열전입니다. 1화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길 원했던 살인마 김종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화는 경주 출신으로 무고한 고향사람 200여 명을 살해하고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희대의 악인 이협우 이야기였습니다. 앞으로 토호,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해외친일파 등이 어떤 악행을 해왔는지를 생생히 고발할 예정입니다.


1화. '백두산 호랑이' 별명을 즐겼던 살인마 김종원


2화. 무법천지 시대 희대의 악인 이협우


이들의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습니다. 한 번쯤 읽어보시고 정말 가치있는 기사인지 여러분이 판단해주십시오. 괜찮다 싶으면 주위에도 널리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두 번째는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희가 출판사업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프라와 소비가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역출판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의 출판사 중 99%는 자비 출판이나 관급 인쇄물을 찍어주는 인쇄대행업자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지역콘텐츠와 저희 독자들, 그리고 SNS의 힘을 믿고, 지역에서 출판한 책으로 서울을 공략해보기로 했습니다. ☞관련 글 무모한 실험 지역출판에 도전한 까닭 


다행히 지금까지 저희가 낸 책들은 다들 반응이 좋아 모두 2쇄를 찍었고, <풍운아 채현국>의 경우 3쇄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희가 낸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남의 재발견-내륙편-발품으로 찾아낸 역사·문화 인문지리지(이승환, 남석형 지음). 품절

*경남의 재발견-해안편-발품으로 찾아낸 역사·문화 인문지리지(이승환, 남석형 지음). 품절

*김주완이 만난 열두 명의 고집인생-유명하기에 오히려 잘 몰랐던 그들의 인생 비하인드 스토리(김주완 지음)

*사람사는 대안마을(정기석 지음) 

*시장으로 여행가자-꼭 가보고 싶은 경남 전통시장 20선(권영란 지음)

*풍운아 채현국-거부에서 신용불량자까지 거침없는 인생(김주완 기록)

*천개의 바람(김유철 시)

*나는 취업 대신 꿈을 창업했다(윤거일 지음)-행복하게 일하는 여성창업자들 이야기(윤거일 지음)


※위의 책들 중 품절된 경남의 재발견 두 권의 책은 아직 알라딘이나 교보문고, 인터파크, 예스24 등 인터넷서점에는 재고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 책에 걸린 링크는 저희가 자체적으로 구축한 책 쇼핑몰입니다. 회원가입 없이도 인터넷 구매가 가능합니다.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저희들의 도전을 격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충고와 지적도 환영합니다.


김주완 올림.


※이 글은 저와 명함을 나눈 분, 뉴스펀딩에 후원해주신 분 등 4000여 명께 보내드린 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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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 인공번식은 동물원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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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창원 주남저수지 람사르문화관에서는 ‘습지 생태계 생물 다양성 증진 및 멸종위기종 복원을 위한 서식처 관리 전략 수립 전문가 회의’가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습지·생태 전문가 스물 남짓이 모였습니다.(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주최) 

 

이 날 저는 ‘사도시 따오기 야생 복귀를 위한 서식처 관리 방안’에 눈길이 갔습니다. 일본 니이가타대학 부설 필드(フィ―ルド·Field, 야생? 들판? 현장?)과학교육연구센터의 홈마 고스케(本間 航介)씨가 발표를 했습니다. 


일본 사도시는 인공 번식지에서 자라난 따오기를 2008년부터 해마다 야생에 풀어놓아 2013년 현재 142마리가 됐습니다. 홈마씨는 이번에 사도시 사례를 통해 따오기의 움직임, 생존 환경, 먹이, 둥지 등이 어떤지 보여줬습니다. 


아울러 서식지 전체에 대한 역사적 고찰(또는 고증)과 계절에 따른 생태 변화 등도 다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발표가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에서 사람들이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일러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홈마 고스케씨 발표 장면.


하지만 여러 생물들이 살고 있는 논이 중요하다든지 논을 논만이 아니라 둘레 보·도랑이나 두렁까지 함께 봐야 한다든지 농경지와 산을 이어주는 숲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큰 틀에서는 별로 새삼스럽지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따오기 야생 복원을 시도 중인 경남 창녕군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처럼 따오기가 살 수 있는 환경 그 자체를 다룬 것보다는 사람과 교육(또는 학습)에 대해 일러주는 부분이 더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알아본 범위에서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사도시 환경 부교재 제작.’ 



“환경을 지키는 주체가 초고령화되고 있는 섬-니가타현에 포함돼 있는 사도시는 일본 혼슈(本州) 북서쪽 일본해(동해)에 있는 섬입니다.-에서 자라는 젊은이들에게 지역 자연의 가치를 이해시켜 주는 수단이 없고, 교사들 자신조차 사도를 알지 못한다. 


2007년에 사도시 위탁사업으로 부교재 제작을 시작해 2008년 5월 세 권으로 완성했다. 교육현장에서 활용하는 데 더해 교사의 기능향상(スキルアップ)용과 생태관광 가이드 양성에, 그리고 시민환경대학 교재로 쓰이고 있다.” 


지난해까지 우포따오기복원센터에서 56마리 따오기를 키워낸(올해 태어난 새끼는 31마리라 합니다.) 창녕군은 2017년을 따오기 야생 방사 첫 해로 잡고 있습니다. 사도시가 환경 부교재 제작에 들어간 2007년은 사도시에서 따오기가 야생에 풀려나기 한 해 전이 되는데, 그렇다면 창녕군은 2016년 내년에는 부교재 제작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따오기의 섬 환경 재생 지도자 양성 절차


더불어 사도시는 ‘따오기의 섬 환경 재생 지도자 양성 절차’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렇습니다. “마을에 있는 땅과 산의 환경을 되살리고 유지·관리하는 데 새로운 인센티브를 도입한다.” “(지역) 농산물의 프리미엄화와 순환형 농업의 기술론을 확립한다.” 


“풍요로운 자연을 활용해 인원은 적지만 부가가치는 높은 생태관광을 정착시킨다.” “다음 세대 사도 환경을 담당할 아이들에게 그 중요성을 체험으로 이해시킨다.”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말해놓았습니다. “따오기 야생복귀의 본질은 중산간(들판과 산이 맞물려 만나는) 지대 생물 다양성 보호와 농림업의 지속적인 시스템의 구축에 있다.” “서식지 만들기뿐만 아니라 사람 만들기와 경제시스템 만들기를 한꺼번에 실행하는 것이 진짜 야생복귀다.” 


우리나라 경남 창녕보다 따오기를 앞서 야생 복원하고 있는 사도시가 내린 결론입니다. 뒤를 따라가는 후발주자의 이점은 앞서간 선발주자의 경험을 보고 잘한 것은 따라 하고 잘못한 것은 피해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창녕군은 그런 후발주자의 이점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따라할 줄도 모르고 따라하지 않을 줄도 모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창녕군은 따오기 인공 번식만 하고 있습니다. 인공 번식은 창녕군 따오기복원센터 아니라 다른 아무 동물원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알기로는 따오기 서식지 만들기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른바 ‘1억4000만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소벌)에 기대고만 있을 따름입니다. 나아가 사람 만들기-따오기 야생 복귀를 위한 환경 부교재 제작이나, 친환경경제시스템 만들기-생물다양성 보호를 통한 고부가가치 생태관광 정착과 순환형 농업 마련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게 보면 이렇게 해야 득이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저는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결국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성과에만 매달리는 자치단체장의 속 좁음과 안목 없음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렇게 창녕군이 제대로 못할 까닭이 없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이날 회의에는 창녕군 공무원이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적어도 명단에는 없었습니다.) 함께한 이인식 따오기복원위원회 위원장과 김경 소벌생태문화연구소 대표는 민간인이고요, 토론자로 초청받아 온 김성진 따오기복원센터 주무관 또한 공무원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홈마 고스케씨 발표가 끝난 뒤 질문하는 이인식 따오기복원위원장.


반면 창원시에서는 두 사람이 왔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창녕 우포늪과 따오기와 창원 주남저수지를 다룬 비중을 견주면 창녕 것이 창원 것보다 크게 무거웠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하는 태도가 이런 정도밖에 안 됩니다. 때로는 하나를 보고도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창녕군이 우리나라에서 멸종된 따오기를 되살리는 엄청난 사업을 진행한다지만 본청에는 이를 담당하는 독립된 부서도 하나 없습니다.(그러면서도 따오기 이미지를 팔아먹는 데는 열성입니다.)



다만 우포늪관리사업소에 따오기 담당이 있는데요, 이는 서식지 만들기나 사람 만들기나 경제 시스템 만들기 같은 정책을 기획·판단·실행하는 부서가 아니라 그냥 따오기복원센터 일상 업무(현재 주된 업무는 인공 번식)를 보는 조직으로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다 쓰고 나니까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창녕이 고향이다 보니까 나름 관심과 사랑을 품고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좀더 잘하면 좋겠다거나 좀더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제대로 되지 않는 구석이 보이면 왜 그렇게밖에 못하나 싶어 싫은 마음이 먼저 생기고, 이어서 그 까닭을 잠깐이라도 따져나가다보면 미운 털 박히는 싫은 소리를 어쩔 수 없이 참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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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진실의 힘 인권상 강기훈 씨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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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이라고 하는군요. 이날을 맞아 재단법인 진실의힘이 '진실의 날 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이번 제5회 수상자로는 유서를 대필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 씨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블로그에 보도자료 전문을 올립니다.




강기훈씨, ‘제5회 진실의힘 인권상’ 선정!

2015년 6.26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기념


한국의 고문생존자들이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힘은 매년 6월 26일 유엔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United Nations Day in Support of Victims of Torture)'을 기념합니다. 특히 <진실의힘 인권상>을 시상하여 고문과 국가폭력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고문의 재발방지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 제5회 진실의힘 인권상 강기훈

 

올해 제5회 진실의힘 인권상은 강기훈씨로 선정했습니다. (*결정문 참조) 강기훈씨는 1991년 고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자살방조죄를 선고 받아 3년형을 복역했고, 24년이 지난 올해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선고 받았습니다.



심사위원회가 강기훈씨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24년을 맨몸으로 버티며 고통스런 삶과 진실을 향한 투쟁을 통해 권력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냈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는, 우리가 믿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주는 동력이었습니다. 또한 무죄판결이 확정된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반성이나 사과가 없는 현실에서, 또 다른 ‘죽임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사법부, 정부, 지식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심사위원회는 강기훈씨를 버티게 해줬던 힘, 그의 어머니와 아내, 두 동생, 두 자녀 그리고 그의 동지,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진실을 향한 용기를 기리며, ‘고통을 견디게 한 힘’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이제서야 자신의 유서를 찾은 고 김기설씨, 투쟁의 길을 같이 걸어온 전민련 동지들, 총 2,700여쪽 분량의 <유서사건 총자료집>을 만들어 진실규명운동의 굳건한 토대를 쌓은 서준식, 염규홍씨, 그리고 강기훈씨와 함께 불행하고 비통했던 한 시대를 살아온 이들,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찾아 머나먼 수고로운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 진실의힘 인권상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강기훈씨는 24년 동안 ‘유서대필사건 강기훈’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루도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인권상 결정 소식에 강기훈씨는 “상징이고 싶지 않고, 그럴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런 의미를 새기자면 오랜 시간 진실을 위해 애쓰신 많은 분들의 것”이라며 한사코 사양했습니다. 진실의힘은 피해자로서 삶을 가볍게 내려놓고, 자유롭고자 하는 강기훈씨의 뜻을 존중합니다.

 

강기훈씨와 가족들의 희생과 고통이 변화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의무입니다. 24년의 피눈물 나는 세월에 우리 사회가 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강기훈씨가 원하는 “아침에 해 뜨고 해질 때까지 아주 시시한 것들이 반복되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오래도록 누리기를 우리는 응원합니다.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내고, 인간이 폭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강기훈씨,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 <진실의힘 인권상>은?

 

(재) 진실의힘은 ‘6.26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고문과 국가폭력의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인권상을 만들었습니다.


2011년 첫 수상자는 서승 교수(리츠메이칸대학 특임교수, 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19년 복역)이며, 제2회 수상자는 김근태 선생입니다. 제3회 수상자는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인권변론의 길을 걸어온 홍성우 변호사이며, 제4회 인권상은 버마(미얀마)의 최장기 양심수 우윈틴 선생과 한타와디 우윈틴 재단U Win Tin and Hanthawaddy U Win Tin Foundation 입니다.

 

<제5회 진실의힘 인권상 심사위원회>는 심사위원장으로 조은(동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심사위원으로 권인숙 (명지대학교,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소장), 김선주 (언론인),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이삼성 (한림대 정치외교학과) 님과 강용주(광주트라우마센터장) 박미옥(간호사) 조용환(변호사) 진실의힘 이사로 구성했습니다. 심사위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한,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 그리고 고문과 국가폭력의 예방, 피해자의 구조와 치유, 재발방지에 헌신해온 국내외 개인 또는 단체”를 추천 받았습니다. 심사 결과 강기훈씨로 정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29-6(원서동)에 있는 진실의 힘 사무실. @진실의 힘


● 2015년 626 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1997년 12월, 유엔총회는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6월 26일을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United Nations Day in Support of Victims of Torture)로 선포하고 1998년 6월 26일 첫 번째 기념행사를 열었습니다. 코피 아난 당시 UN 사무총장은 “오늘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 역설하며 “이토록 잔악한 현상에 좀 더 주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코피아난의 호소에 호응하여 수많은 나라, 조직들이 고문피해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문 방지 세계 최대 조직인 국제고문피해자재활센터(IRCT)는 2015년 6.26의 주제를 ‘재활할 권리’(R2R: Right to Rehabilitation)로 정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세계 140여 나라에서는 고문생존자들의 재활권을 실현하자는 하나의 목소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울려 퍼지도록 행동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낸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고문과 국가폭력에는 대항의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 수 많은 이들의 연대와 지지의 힘이 시간과 함께 성장해 갈 것을 믿습니다.

 

(재)진실의힘은 그 목소리에 화답하며, 이미 100여개 이상의 나라가 고문방지협약을 비준했고, 수많은 나라들이 법적으로 고문을 금지했지만, 고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단 하루만이라도 고문생존자들을 기억하고 지원하는 일에 온전히 바치기를 희망합니다. 고문과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 받는 세상을 함께 만들고자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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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막후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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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11화. 수사권 조정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암투


2011년 6월 20일 아침 조현오는 청와대에서 급한 호출을 받는다. 청와대 조정회의에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조현오는 수행자 없이 청와대에 갔다. 회의에는 대통령실장 임태희, 민정수석 권재진, 법무부장관 이귀남, 검찰총장 김준규 등이 참석했다.


김준규는 검찰총장을 하면서 큰 위기를 두 번 맞는다. 2010년 4월 MBC <PD수첩>이 ‘검사와 스폰서’를 방영한다. 부산에 한 건설업자가 25년 동안 검사에게 금품과 향응, 성접대 등을 제공한 내용이었다.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김준규는 대국민 사과에 이어 자체 개혁안을 발표한다. 개혁안 가운데 하나가 비리 검사를 수사하는 ‘특임검사제’ 도입이었다. 이 특임검사가 임용된 첫 사건이 바로 2010년 11월 ‘그랜저 검사’ 사건이다. 한 건설업자가 검사에게 사건을 부탁하면서 승용차 구입비를 대납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위기가 바로 청와대 조정회의였을 테다. ‘형사소송법 196조’를 개정하고자 국정 운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 열린 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평검사회의는 검찰 근간을 흔드는 긴급 현안이 있을 때마다 열린다. 2003년 참여정부가 검찰 출신이 아닌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할 때도 평검사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는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법률 개정은 검사 작성 조서가 지닌 증거 능력을 제한하는 쪽으로 진행됐다. 검찰이 자백만 받으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컸다. 하지만, 검찰은 평검사회의를 열어 반발하며 형사소송법 312조를 지켜낸다.



법률 개정은 국회의원 입법, 정부 제출 등 다양한 통로로 이뤄진다. 형사소송법 196조 법률 개정 논의는 2010년 2월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가 시작했다. 그해 10월 법원과 검찰 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청목회’ 입법로비 사건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한 압수수색을 진행한다. 검찰을 향한 정치권 반감은 깊어졌다.


사법제도개혁특위는 특별소위원회를 구성해 2011년 3월 10일 여야 합의안을 발표한다. 주요 개혁안으로 경찰수사권 독립이 있었다. 이 발표는 검찰 출신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이 주도한다. 검찰출신이 경찰을 돕는 상황이지만, 조직입장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세력이 막강한 검찰에 맞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다. 경찰 안에서는 차라리 수사권 독립을 차기 대선 공약에 집어넣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본격적으로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변경을 위한 특별소위원회가 가동됐다. 경찰과 검찰이 벌이는 신경전은 언론을 탔다. 조현오는 5월 26일 전국 지방청장 화상회의에서 총경 이상 간부에게 “직을 건다는 자세로 임하라”고 말했다.


김준규 검찰총장이 주재한 검사장급 이상 간부회의에서 즉각 반응했다. 대검 차장인 박용석은 “조직을 위해 직을 건다는 것은 조폭이나 하는 말”이라고 받아쳤다.


5월 31일 검사인 윤대해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경찰 수사개시권 명문화와 관련해 깊은 우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동안 특별소위원회 단위에서 논의가 진행됐지만 조문 합의안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인 주성영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동료 의원 반대가 심하다. 그 배후에는 법원과 검찰이 있다. 국회의원을 조종하고 협박하고….”


형사소송법 196조 조문 작업은 총리실로 넘어간다. 총리실에서 검찰과 경찰 수사권 조정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사구조개혁팀원이, 검찰은 검사들이 참석했는데 윤대해 검사도 눈에 띄었다.


논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6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평검사회의는 수사개시권 명문화 반대 분위기를 조성한다.


6월 20일 청와대에 국정운영자들이 모였다. 6월 14일 대통령 이명박은 총리실이 적극적으로 조정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 이명박은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수사하는 현실을 개선하라”고 말했다. 김준규는 평검사회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해야 한다’는 형사소송법은 결코 고칠 수 없으며 경찰 수사개시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정회의를 마친 조현오는 경찰청으로 돌아와 말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BH(청와대) 최종 합의안에 서명하고 왔다.”


조현오는 196조 조항에 ‘경찰의 수사개시와 진행권’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가 합의한 내용에는 ‘경찰은 모든 수사에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는 조항도 있었다. 게다가 검사 지휘에 관한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조현오는 ‘모든 수사’에 경찰 내사가 포함되지 않고 법무부령 제정도 경찰과 합의하기로 국정운영자와 약속했다고 내세웠다. 조현오는 그 약속을 실제 믿었다. 하지만, 경찰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비난했다.


합의안을 발표한 이튿날인 6월 21일 검찰 반응에 경찰 내부 분위기가 격앙됐다. 대검 기획조정부장인 홍만표는“조 청장 주장대로라면 구두합의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후 국무조정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실장 임태희, 안전행정부장관 맹형규, 법무부장관 이귀남은 국회에서 내사는 수사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확인해준다. 국회도 청와대 조정안에 나온 ‘모든 수사’에 대한 해석을 제한한다. 민주당 의원인 박지원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든’을 삭제하고 검사 지휘는 법무부령이 아니라 대통령령이 근거가 돼야 한다는 게 여야 공통의견이라고 밝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찰청 나름대로 애쓴 결과였다.


6월 30일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 ‘법무부령’은 ‘대통령령’으로 바뀌었다. 검찰은 잇달아 자리에서 물러나며 개정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대검 기획조정부장인 홍만표를 비롯한 검사장들이 먼저 물러났다. 검찰총장인 김준규도 사표를 냈다.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한상대다.



한상대 검찰총장에게 경찰과 ‘대통령령’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졌다. 그 해 12월 27일 대통령령이 시행되기까지 검찰에 비난 여론은 계속됐다. ‘벤츠 여검사’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11월 30일 이창재 안산지청장을 특임검사로 임명했다. ‘그랜저 검사’ 이후 2번째다.

 

여검사 A씨는 모 변호사 부탁을 받고 다른 검사에게 사건을 청탁한 의혹이 있었다. A씨는 내연관계였던 모 변호사에게 벤츠 승용차 등을 받아 ‘벤츠 여검사’로 불렸다. “국산차는 이제 저리가라”라는 비난이 인터넷을 달궜다. 여검사 A씨는 12월 7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된다.


이듬해 검찰수사가 시작된다. 2012년 2월 28일 경기지방경찰청장인 이철규가 제일저축은행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그는 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경찰청 정보국장으로 국회의원 설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날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 주성영을 ‘성매매 의혹’으로 소환통보한다.



주성영은 사법개혁을 주도한 자신에게 검찰이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현오가 4월 퇴임하자 검찰조사가 시작됐다.


조현오는 경찰청장 재직 당시 경찰청 범죄정보과와 지능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경찰에 ‘김광준 검사’사건이 걸려든다. 한 기자는 ‘김광준 검사 사건’을 두고 “유사 이래 경찰이 검찰을 향해 날린 최고의 빙엿”으로 표현했다. 


이 사건은 2008년 12월 9일 금융다단계를 하던 조희팔이 회사 돈을 챙겨 중국으로 밀항한데서 시작된다. 당시 투자자가 3만여명 피해액은 4조원 정도로 추정됐다. 오래 전부터 금융감독원이 유사수신행위를 포착하고 수사당국에 정보를 줬으나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오히려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수사당국과 조희팔 사이 유착관계였다. 뇌물 혐의로 수많은 경찰이 사법처리 됐고, 조희팔을 비호하는 세력으로 권력층 이름이 나돌기 시작했다.


수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에 있는 조희팔을 잡아들이는 것과 조희팔이 국내에 숨겨둔 자금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범죄정보과에서 조희팔 관련 정보를 넘겨받아 수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검사 김광준이었다. 서울고검 검사인 김광준의 차명계좌를 발견한 것이다. 자금줄은 조희팔 측근이었다.


김광준은 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였다. 특수부는 청와대가 맡긴 사건을 담당하는데 당시 환경재단 최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당시 최열은 MB정부가 추진한 4대강 사업에 걸림돌이었다. 여론은 당연히 ‘표적 수사’를 의심했다. 검찰은 최열과 주변인 계좌를 샅샅이 뒤졌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최열은 주변에 차명계좌가 뭔지 묻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김광준이 차명계좌로 검은돈을 받았다는 정황을 경찰이 포착한 것이다.



경찰이 김광준을 조사했다는 사실은 11월 8일 보도된다. 당시 검찰총장 한상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장인 최재경이 이미 보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상대는 김광준 검사와 통화해 사정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11월 8일 일부 매체 기자가 김광준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김광준은 중수부장인 최재경에게 기자 대응 요령을 묻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최재경은 강하고 단호하게 실명을 보도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대처할 것을 조언한다. 이튿날 한상대는 경찰 반발에도 특임검사 카드를 꺼낸다.


황운하는 당시 특임검사인 김수창이 최선을 다해 수사했다는 점은 동의했다. 당시 검찰은 경찰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찰이 김광준 사건 조사 과정에서 소홀한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파고들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11월 중순 서울 동부지검 성추문 검사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동부지검에서 실무수습 중이던 검사가 여성 피의자를 검사실로 불러 성관계를 한 것이다.


검사인 윤대해는 24일 내부게시판에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기소배심제, 검찰 직접수사 자제, 상설특검도입 같은 검찰 개혁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모두 대검 지침으로 가능했다. 지침으로 가능한 일을 개혁안이라고 들고 나왔으니 한쪽에서는 ‘위장 개혁’이라는 빈정거림이 불거졌다. 끓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은 윤대해가 동료에게 보내려던 문자메시지였다.


‘○○아. 대해다... 내가 올린 글이 벌써 뉴스에 나오고 있구나.... 우선 어떤 방안이든 검찰이 조용히 있다가 총장님이 발표하는 방식은 그 진정성이 의심받는다... 내가 올린 개혁방안도 사실 별거 아니고 우리 검찰에 불리할 것도 별로 없다. ....언론에서 그런 평검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고 이후 일선 청에서 평검사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중앙은 극적인 방식으로 평검사 회의를 개최하고....이런 분위기 속에 총장님이 큰 결단을 하는 모양으로 가야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받은 이는 언론사 기자였다. 예정된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회의는 이 사건 여파로 취소된다.


검사들은 오히려 총장 집무실로 몰려가 사퇴를 촉구했다. 한상대가 중수부장인 최재경을 감찰한 게 발단이었다. 한상대는 김광준과 최재경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을 문제 삼는다. 한상대는 검찰 위기를 중수부 폐지 카드로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최재경은 반대파였다. 결국, 한상대는 2012년 11월 30일 최재경을 손보려다 축출당하는 모양새로 사표를 냈다. 하지만, 한상대는 자기 임기 동안 검사가 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받는 것은 막았다.


‘카톡’


스마트폰 카카오톡에 한 여성 사진이 올라왔다. 성추문 검사 사건 피해 당사자였고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추적 결과 검사 10명을 포한한 검찰 수사관이 해당 전산망에 접속한 게 확인됐다. 검찰도 더는 여론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해 마지막 날, 현직 검사가 최초로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다.



경찰 구성원이 검경관계를 다시 인식한 계기는 형사소송법 법률 개정보다 검찰과 경찰이 다투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 조직에서 조현오가 추진해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황운하는 어떤 견해를 드러냈을까. 그는 2011년 6월 20일 조현오가 청와대 합의안에 서명을 했을 때도, 경찰이 만족하지 못하는 대통령령을 만든 직후에도 조현오 퇴진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런 황운하에게 왜 이택순 퇴진은 요구해놓고 조현오는 그냥 두느냐는 질문을 하는 이도 있었다.


“조현오는 최선을 다해 진일보한 조정안을 만드려는 과정에서 문제가 비롯됐고 내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의견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경찰은 황운하 발언 배경에는 조현오식 조직 관리법이 있다고 했다. 조현오는 조직 내 비판 세력을 항상 곁에 둬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면서 비판 세력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아서도록 했다. 황운하 기용도 결국 조현오식 ‘파퓰리즘’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파퓰리즘 전략으로 조직을 장악했다는 조현오가 정작 경찰 직원들에게 폭넓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음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력, 감찰활용)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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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7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저는 요즘 언론비평 전문지 <미디어오늘>에 매월 고정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 5월 말 '무모한 실험, 지역에서 출판하기'라는 글에서 저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다양한 지역 콘텐츠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홈플러스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는 전 국민의 소비 형태를 획일화·평준화시킨다. 그러나 전통시장에는 그 지역 고유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살아있다."


그렇습니다. 최근 <담론>이라는 책을 펴낸 신영복 선생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변방'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 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우리가 월간지를 내고 출판을 하는 까닭


마침 엊그제는 경상대학교 출판부 '지앤유'에서 뉴스레터를 발행한다며 짧은 축하 글을 써달라기에 이렇게 보냈습니다.


"지역 출판이 없으면 지역 콘텐츠도 없습니다. 지역 콘텐츠가 없으면 정신문화도 사라집니다."



어떤가요? 동의하시나요? 정신문화가 사라지면 신영복 선생이 말한 '창조성'도 나올 데가 없겠지요. 저희 도서출판 피플파워는 이런 믿음과 사명감으로 월간 <피플파워>를 만들고 저자를 발굴하고 책을 출판합니다. 저희가 지역의 사람과 문화,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남강오백리 같은 지역자원을 스토리텔링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도시와 스토리텔링도 마찬가지고요.


이번호에는 BNK금융그룹 성세환회장을 특별히 모셨습니다. 경남은행을 인수해 부산은행과 함께 경남·부산·울산 광역경제권 상생과 발전에 촉매제가 되겠다는 그의 구상을 들어봤습니다.


6월호 한국TC전자 이연실 씨에 이어 이번호에는 한국소니전자 여성노동자 하영란씨의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립니다. 마산·창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자 도시입니다. 그들의 80년대를 기록하는 것도 <피플파워>의 역할입니다.


이번호에도 척박한 문화예술계의 현실에서도 꿋꿋이 자기 세계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도예가 성낙우씨, 연극인 김정희씨, 화가 배우리씨 등이 그들입니다. 또한 스스로 어려운 삶을 살아왔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김일석진주 EXR스포츠센터 대표의 이야기도 읽어볼 만 합니다. 특히 그가 꼭 실현하고 싶다는 진주성 순국선열 7만 의총 건립사업도 관심이 필요하겠군요.


평범한 엄마로 살다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허문화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마을도서관운동으로 시작해 마을방송으로 지역공동체 구축에 나서고 있는 이재균경남정보사회연구소 소장 같은 분들도 우리 사회의 창조성을 만들어나가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이들의 작은 움직임이 모여 세상을 바꾸리라 믿습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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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노조와 기자협회에 드리는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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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심마당]연감 강매, 이것만이라도 해결해보자


김영인 아시아투데이 전 논설위원이 쓴 <촌지>(지식공방)라는 책을 봤다. 제목 그대로 기자들이 받아먹거나 뜯어먹는 추악한 촌지 실태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지방 출장과 해외 취재를 빙자한 호화 술판과 성매매에 이르기까지 인간이길 포기한 기자(棄者)의 적나라한 맨살을 드러낸다.


기자의 이런 고백이나 고발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김 전 위원이 일선에서 일하던 시절과 지금의 언론 환경은 많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촌지’에 관한 한 그때보다 훨씬 맑아졌다고 본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언론계의 구습이 있다. ‘연감 강매’다. 출입처 취재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가장 광범위한 피해자를 양산한다. 구습이라 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사기나 공갈이다.


업계에선 다 아는 일이지만 신문사의 연감은 행정기관이나 단체, 학교, 기업의 각종 현황·통계 자료를 이것저것 짜깁기하여 만든다. 애초 자기들이 생산한 저작물이 아니다. 거기에다 자료를 제공한 기관·단체·학교·기업의 광고를 붙여 1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린다.


문제는 그 이후다. 공공기관 자료를 자기 저작물로 둔갑시켜 그만한 광고수익을 남겼으면 그 책은 무료로 배포하는 게 최소한의 염치라도 보이는 일이다. 되레 고가의 가격을 매겨 팔아먹는다. 19만 9000원 짜리도 있고, 그보다 훨씬 비싼 것도 있다. 방식도 고압적이다. 출입기자들을 동원해 각 출입처에 수십 권씩 떠안기거나, 판매대행업체를 통해 일방적으로 택배를 보낸 후 기자를 사칭하며 전화를 걸어 입금하라는 식이다. 이런 피해자는 내 주변에도 널렸다.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중소기업주, 관변단체나 직능단체는 물론 시민단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연감을 산다.



신문사만 이런 게 아니다. 기자들도 모르는 ○○기자클럽, △△기자연맹, ××기자연대 같은 언론단체들도 이런 식으로 책을 판다. 한국조사기자협회처럼 실제 현직 기자들이 가입해 활동 중인 곳도 ‘연감부’라는 걸 만들어 그런 짓을 한다. 이 단체는 매년 <기자가 본 남극 그리고 북극>, <기자가 본 대한민국 땅 독도>와 같은 책을 만들어 일단 택배로 보낸 후 전화로 입금 요청을 한다. 그 연감부가 판매대행업체인지 실제 조사기자협회 소속부서인지 질의해봤지만 끝내 답을 받지 못했다.


이런 단체들은 심지어 남의 신문사 기자를 사칭하기도 한다. 우리 신문에 맛집으로 소개됐던 한 식당 업주는 경남도민일보 기자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신문에 나온 뒤 효과는 좀 있느냐”고 천연덕스럽게 생색을 내더란다. 보내온 책은 <세계테마기행 유럽편 Ⅰ, Ⅱ>이었는데, 택배 상자에는 ‘사단법인 한국기자연대’라는 단체명이 인쇄돼 있었고, 택배 운송장의 보낸이 이름은 ‘도민’, 주소는 ‘한국기자클럽’이었다. 또 황당하게도 책 발행처는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이었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당해본 사람은 모든 언론을 싸잡아 사기꾼 또는 공갈꾼으로 본다. 언론 전체의 신뢰가 걸린 문제다.


언론노조나 기자협회가 나서야 한다.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신문사나 단체가 자정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노조와 협회가 ‘언론사 및 언론단체 책 강매 신고센터’를 열고 사례를 수집해 공개하는 한편 경찰에 고발하는 작업을 병행한다면 오래지 않아 근절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게만 된다면 노조와 협회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물론 언론 전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소속 지부나 지회가 자기 회사의 그런 짓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급단체가 나서서 그런 활동을 하는 게 부담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론노조와 기자협회마저 그걸 끊어내지 못한다면 언론을 빙자한 사기꾼과 공갈꾼을 역시 방조·묵인하는 결과가 된다. 초창기 전교조가 촌지 근절 운동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듯이 우리 내부 문제부터 도려내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포크레인 타고 해저 42미터까지 내려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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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레인에 사람이 타고 35~40미터 해저에 들어가 바닷속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실제 가능성이 확인됐다. 지난 6월 28일 태종대가 보이는 부산 앞바다 5마일 해상에서 포크레인을 개조한 해저 유인탐사정 '해마1호'가 실험 결과 35~44미터 해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왔던 것이다.


이 휘귀한 실험을 우연히 내가 지켜보게 됐다. 지인을 통해 이런 실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호기심이 일어 크레인선에 동승했던 것이다.


해양개발사업 법인 Inner Space Won Jung 정도현 대표는 "이번 실험으로 몇 가지 개선해야 할 점이 있었지만, 일단 공기통 없이 대기상태와 똑같은 조건에서 해저까지 내려가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1. 포크레인 엔진 열로 인해 내부가 더웠다는 점 2. 엔진 소음이 심해 외부와 통화하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점 3. 라이트가 생각보다 약해 시야가 밝지 않았다는 점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꼽았다. 그러나 엔진과 조종실 사이에 공간을 두고 열을 식히는 장치를 추가하는 한편 라이트도 더 밝게 보강한다면 개선 가능할 것으로 봤다.


해저 유인탐사정 '해마1호'와 이걸 만든 정도현 씨.


그는 이 탐사정을 순전히 개인 비용으로 개발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심해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일에 빠졌어요. 2012년, 2013년에도 사비로 제작한 장비를 통해 수심 2200미터 해저를 탐사하기도 했죠. 물론 그건 무인 탐사였지만."


입수 직전 포즈를 취한 정도현 씨.

해저에서 올라온 후 조종실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정도현 대표.


이번 '해마1호'가 기존의 해저 탐사선이나 잠수정과 다른 것은 무었일까?


"기존 잠수정이나 탐사선의 경우 탐사는 가능하나 해저에서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작업을 할 경우 잠수사가 산소 공급장치를 소지해야 하며 작업시간도 단시간에 그치는 한계가 있죠. 하지만 이건 육상에서 포클레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해저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게 차이죠."



밀폐된 포클레인 내부에서 호흡은 어떻게 할까?


"지상과 연결된 호스를 통해 일반 공기를 주입하고 빼냅니다. 그러면 대기상태와 같은 1기압이 유지됩니다. 전원도 지상과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공급되죠."


바닷속에서 지상과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


그렇다면 '해마1호'가 상용화할 경우 어떤 일에 활용할 수 있을까?


"해저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사가 가능해요. 포크레인 앞의 팔(arm)과 각종 부속 장비를 이용해 해저 시설물 설치나 환경오염물 제거, 해저케이블작업, 보 설치 등도 가능하죠. 세월호 인양작업 때도 뭔가 쓰임새가 있을 겁니다."


다음은 정도현 대표가 포크레인을 타고 해저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과정을 촬영한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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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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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12화. 조현오의 조직장악 비결은 '감찰'


조현오는 울산남부서장으로 취임하면서 첫 지휘관 생활을 했다. 울산은 팽창하는 도시로 교통사고와 강력 사건이 잦았다. 사건·사고를 줄이고자 조현오가 주목한 곳은 검문소였다. 검문소에서 인적사항을 미리 노출한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기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현오는 검문소를 직접 챙겼다. 자리를 비운 직원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청문감사관이 나섰다.


청문감사관은 일선 경찰서에서 감찰과 감사를 총괄하는 보직이다. 감사 대상은 행정적인 일상 업무다. 감찰 대상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행위가 된다. 즉 개인 행위와 관련한 비위는 감찰 영역이다. 단, 사무감사 중 발견된 계약관계 등으로 말미암은 배임이나 횡령 같은 비위는 감사에서 처리한다. 물론 지휘관이 상황에 따라 감사 쪽 업무라도 감찰 부서를 활용하는 일은 자주 있다.


조현오는 새벽에 파출소를 순시했다. 당시 관용 차량은 의경이 운전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내지리를 익힐 겸 의경을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했다. 차량 이동 중 무전으로 112신고가 접수되면 현장으로 바로 차를 돌려 초동조치를 확인했다.



업무를 세심하게 챙기자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 직원들은 조현오를 ‘조순경’이라고 부르곤 했다. 조현오는 경찰서 과장들에게 주어진 감독순시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산남부서장 시절 하루는 전국 일제검문검색이 진행됐는데 조현오는 과장에게 현장에서 직원 근무를 지켜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나이가 한참 어린 과장 한 명이 근무한 것처럼 거짓말했다. 조현오는 과장을 다그쳤다.


“지방청에 보고해서 징계받을래? 아니면 일주일 동안 교통외근과 근무복 입고 심야음주운전단속 할래?”


과장은 현장 단속을 택했다. 과장이 도로에서 현장 단속을 하자 다른 직원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조현오는 2006년 경찰청 감사관을 지낸다. 감사관 아래로 감찰과장과 감사과장을 뒀다. 당시 감사과에 순경 출신으로 강직하며 다부지게 일을 잘하는 직원이 있었다. 2008년 조현오가 치안감으로 승진하여 부산지방경찰청이 됐을 때 그 직원은 은퇴를 몇 년 앞둔 총경이었다. 조현오는 2009년 그에게 경기청 청문감사담당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부탁을 받는 순간 ‘일을 많이 시킬 텐데…’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한다.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방청에서 경무과 기획계는 치안 수요에 맞게 인력을 배정하는 일을 한다. 경찰관 전출은 경무과 인사계 업무다. 조현오는 당시 경기지역 경찰에게 업주와 통화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강조했다. 감찰은 업주와 통화한 경찰에 대해 1~3단계 등급을 정해 전보 조치했다. 또 첩보를 바탕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경찰은 다른 경찰서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진술서와 근거를 남겨 항의가 들어오면 사유를 밝혔다.


생활안전과 업무에도 감찰 기능이 섞였다. 조현오는 경기청에서 성과주의를 내세웠다. 하지만, 성과주의는 과잉 단속 부작용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막는 일도 감찰에서 맡았다.


조현오가 경기청으로 오기 전, 2009년 1월 평택 쌍용자동차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쌍용자동차 운명은 법원과 채권단 손으로 넘어갔다. 4월 사측이 발표한 구조조정안은 전체 인력의 37%를 해고하는 것인데, 희망퇴직서를 제출하지 않은 976명을 정리해고한다. 5월 22일부터 쌍용차노조는 평택 공장을 점거해 파업을 시작했다.


6월 25~26일 정리해고에서 벗어난 직원과 임직원 3000여 명이 공장 안에 진입하여 노조와 충돌하며 부상자가 속출한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투입돼 양쪽이 접촉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사측을 비롯해 누구도 공장 안팎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수십 개 중대가 교대로 근무했다. 경비국 처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전에 기강을 잡는 것이다. 오랜 기간 경비 근무를 하면 음주, 졸음 같은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다. 쌍용자동차 사태 때는 그런 사고가 없었는데 그만큼 조직이 장악됐다고 볼 수 있다. 밤마다 무전으로 근무 확인을 점검하는 것도 감찰이 맡은 일이었다. 여기에 국정감사보고서까지 조현오는 청무감사담당관에 넘겼다. 조현오가 끌어들인 총경은 모든 일 처리가 야무졌다.


이듬해 조현오는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다. 조현오는 총경에게 1년만 더 함께 일하자고 부탁한다. 당시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어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조현오가 서울에서도 ‘성과주의’를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묵묵하게 뒷받침한 총경 덕이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밀어붙였을 듯한 조현오도 경찰청장이 될 때까지 참았던 것도 있다. 경찰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보통 사람 시각에서 기본적인 것들이 경찰 조직 안에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 관할 경찰서장은 휴일이 없었다. 서울종로경찰서장은 북한산을 앞에 두고도 등산 한 번 하기 쉽지 않았다.



업무에 소홀하다는 질책을 받을까 걱정했다.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까 싶어 휴가를 가지 못하는 직원도 많았다. 대부분 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조현오는 감찰을 풀어 정시 퇴근 문화를 정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청장 시절에는 가능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청장 지휘방침과는 달라 경찰청 감찰 등을 통해 간섭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청문감사담당관은 열심히 했지만, 인사권을 가진 경찰청에서 견제를 받아 본인희망과 관계없이 2010년 경찰대학 교육과정으로 발령난다. 경무관이 되는 필수 과정이었지만 은퇴를 고작 1년 남짓 앞둔 총경에게는 불필요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된다. 통상 청장이 바뀌면 중요 보직은 자기 뜻을 잘 파악하는 사람으로 채우기 마련이다. 정기인사 때 교체하는 보직 가운데 청장이 중요시하는 자리는 인사·감찰·경무·정보과장 등이다. 조현오는 감찰과장을 비롯해 주요 과장을 바꾸지 않았다. 업무역량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참모 중에는 청장이 지시하면 대답만 하고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름대로 이해관계를 따지기 때문이다. 조현오는 청장이 되기 전부터 지방청이 하달한 공문을 읽지도 않고 넘어가는 직원을 수없이 봤다. 청장 지시를 적극적으로 따르게 하려면 자극이 필요했다. 조직에서 감찰은 효과 좋은 침 같은 역할을 한다.



감찰은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도 한다. 2011년 4월 20일 광화문 사거리를 비롯해 서울시내 11개 교차로에 별다른 홍보 없이 3색 신호등이 작동했다. 5월 7일 3색 신호등이 설치된 서울시청 앞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언론은 신호 체계를 지적했다. 문제 파악을 위해 교통과에 감찰 직원이 투입됐다.


물론 잘 돌아가는 기능까지 감찰을 동원해 관리하지는 않았다. 조현오는 해당 기능 보고를 바탕으로 정보 기능도 동원해 사실을 교차 확인했다. 다만, 해당 기능 국장이나 과장이 청장 지시에 미온적이라면 여유롭게 기다려 주는 일은 없었다. 경비과에서 발생한 전의경 가혹 행위 관련 지시가 대표적이다. 이럴 경우는 가차 없이 감찰을 동원했다.


10월 21일 길병원 조폭 난투극 사건을 이튿날 SBS가 보도한다. 인천시 구월동 길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폭력조직끼리 유혈 난투극이 벌어진 사건이다. SBS는 당시 현장에 시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력반 형사 5명이 있었지만 유혈 난투극을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시민은 경찰의 허술한 초동 대응으로 두 시간 넘게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조현오는 방송을 접하고 바로 감찰과장에게 전화했다. 본청 감찰팀이 바로 출동해 최초 112신고를 접수한 시점부터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감찰 조사가 모두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됐다. 조현오는 “조폭 겁내는 경찰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26일 현장에 출동했던 강력3팀장이 조폭 앞에서 비굴하지 않았다며 경찰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온라인에서 급속하게 퍼졌다. 조현오가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괜히 엄한 경찰만 잡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으면서 남 탓하며 징계만 하는 청장이라는 사설까지 나왔다. 조현오는 결국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 대한 징계를 거둔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다음 13화-조폭과의 전쟁)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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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은 수평폭력 심리를 어떻게 이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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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는 속담이 있다. 강자에게 당한 설움을 엉뚱한 약자에게 푼다는 말이다. 프란츠 파농이 제시한 '수평 폭력'의 심리적 기제와 비슷하다. 자신을 억압하는 거대 권력의 수직 폭력에는 저항하지 못하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만만한 상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심리다.


권력자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통치술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조선인과 중국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 내무성은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경찰에 지시한 내용을 언론에 흘렸다. 이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거짓 소문으로 번졌고, 분노한 일본인 지진 피해자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무차별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렇게 학살된 조선인이 2만여 명에 달했다.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인들을 학살한 일도 있다. 1931년 만주로 이주한 우리 농민들과 중국 농민 사이에 수로 공사를 둘러싼 충돌이 발생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큰 피해자는 없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는 데 이용했다. 허위정보를 제공해 <조선일보>가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는 국내에 있는 조선인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해 부산 천안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습격사건이 벌어졌다. 중국인 상점과 가옥이 파괴되고 127명이 학살됐다. 부상자도 400여 명에 이르렀다.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 1931년 7월. @한국어 위키백과


그랬다. 1923년 관동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지진피해자들에게 만만한 상대였고, 1931년 우리나라에서 중국인은 또한 만만한 상대였다.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일본정부에는 모두들 침묵했다.


이런 심리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나도 그랬다. 8남매 중에서 다섯 번째인 나는 열 살 터울의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집의 3대 독자였다. 귀한 아들이었고, 누나들도 내 앞에서는 쩔쩔 맸다. 그러나 운동신경이 둔해 친구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은커녕 졸병 신세를 면치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내가 누나들에게 또 어떤 횡포를 부렸나보다. 누나 중 한 명이 말했다. "바깥에선 힘도 못쓰면서 집안에서만 대장이네."


그렇다.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가장은 바깥에서 대접이나 존경 받을 일이 없는 '찌질이'일 가능성이 높다. 여성과 장애인, 전라도 등 소수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이들일수록 스스로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콤플렉스에 사로잡인 이들이 많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봐도 그렇다. 국무총리 황교안의 병역면제 비리엔 관대하지만, 가수 유승준의 병역기피에는 게거품을 품는 사람들, 국가의 세월호 구조 실패와 진실 은폐에는 침묵하면서 유가족의 보상금에 비난 목소리를 쏟아내는 사람들도 눈여겨보면 사회적 약자들이 많다. 메르스 방역에 실패한 국가권력과 대통령을 감싸면서 오히려 피해자인 메르스 환자에게 원망을 돌리는 심리도 그렇다.


앞서 두 역사적 사건에서도 봤듯이 국가권력이나 기득권세력은 이러한 수평 폭력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조장한다.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여기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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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해주고 못 받아도 된다는 은행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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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한국나이로 올해 64세라고 하니 1952년생 용띠일 것이다. 근 10년 전 54세에 기업은행 마산지점장 자리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나왔다. 그 후 경실련과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운동을 열심히 해왔고, 얼마 전까지 마창진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그를 경남블로그공동체(경남블공)가 초청해 '은퇴 후 재미있게 사는 법'이란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지난 6월 25일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이었다. 1시간정도 강당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통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간담회를 계속했다.


박종권 씨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는 아주 솔직하고 소탈하고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은행 지점장으로서 대출에 대한 그의 소신이 우선 인상적이었다. 그는 '열심히 사업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게 은행의 역할'이며 '빌려간 사람이 그 돈을 빼돌리지 않고 열심히 사업하는 데 썼다면 못 갚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과연 이런 소신을 갖고 있는 은행가나 지점장이 있을까? 그의 육성을 그대로 들어보자.


박종권 전 기업은행 마산지점장. @김주완


"제가 (은행에서) 명퇴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건데, 제가 IMF때 지점장을 했습니다. 저는 지점장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게 했습니다. 은행이란 것은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고, 그 사람이 열심히 사업해가지고 갚으면 되고, 열심히 사업했는데 못 갚는 상황이 되어도 그 사람 잘못은 아니다, 저는 그런 주의에요. 그 사람이 열심히 갚으려고 노력했는데 부도가 났다? 은행 돈을 가져가서 했단 말이죠?"


"그러면그 돈이 어디 갔느냐? 외국으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빼돌리지 않고 잘 썼다면 그건 괜찮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다 돌아갔으니까요. 그죠? 그 돈 가지고 월급도 주고 했을 거잖아요."


"그가 나쁜 마음으로 사기를 치기 위해서 돈을 빌려서 떼먹었다면 이건 막아야죠. 그래서 저는 건전하게 사업하는 사람은 무조건 대출해줘야 한다는 생각이고, 담보도 필요없어요. 담보를 잡고 대출해주면 그건 전당포지요.저는 그런 생각을 해가지고 천만 원, 이천만 원 빌려달라고 하면 딱 보고 사업을 열심히 한다면 다 빌려줬어요."


-그게 조직에서 용납되나요?


"그래서 제가 소액대출을 많이 해줬는데 그냥 신용으로 해준 것도 있고요. 신용보증기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내가(지점장이) 보증서를 끊어서 해준 것도 있습니다. 보통 지점장들 그걸 잘 안 해줘요. 왜 안 해주냐? 그렇게 해서 만약 잘못 되면 내가 변상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핸들링만 잘하면 되니까 조건만 갖추면 다 해줬습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신용대출해줬어요."


"그때 신용대출 상담을 밤 12시까지 받는다고 은행 게시판에 붙였어요. 그때만 해도 은행대출을 신용으로 받는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전화도 잘 못해요. 조그만 사업하는 사람들이. 밤에 전화로 상담해준다니까, 눈에 안 보이니까 뭐 막 전화 오잖아요. 딱 전화상담 해보면 알거든요. 핸드폰으로 전화 착신을 해놓는 거라."



"그리고 마산지점장 할 때는 신문에 광고를 내가지고 신용대출 원하는 사람은 다 은행으로 오라. 날짜를 사흘간인가 정해가지고 상담 박람회를 했습니다. 그렇게 대출을 엄청 많이 해줬어요.그렇게 소액대출을 많이 하다 보니까 이게 연체가 좀 생기잖아요. IMF때였으니 더욱 더. 그래서 나 덕분에 엄청 크게 된 사람도 있지만, 소액대출을 못 갚은 사람이 많아 가지고, 은행에서 통계를 낸 거라. 대출을 많이 해줘서 연체가 생긴 거랑 대출을 안해줘가지고 연체가 없는 걸 비교해야 하는데 그냥 단순비교를 해가지고 내가 연체지수가 높은 지점장에 속했어요. 그래가지고 어느날 지점장 교육을 받으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왜 교육을 받느냐고 물었더니 통계를 보여주면서 '네가 연체비율이 높다'고 해요. 그때 내 연체비율이 3쩜 몇 프로 되었어요. 평균이 2프로 정도 되었는데. 그런데 연체비율이 10프로나 20프로라면 높다고 하지만 그 정도라면 별거 아녜요. 사실 돈으로 따져보면.그래서 내가 화가 나가지고 "나 명퇴한다. 이런 은행이 다니기 싫다." 명퇴하고 확 나와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일찍 좀 나왔어요."


-그걸 결과적으로 후회하시나요?


"절대 후회 안 하죠."


-그게 언제였습니다.


"딱 10년 전입니다."


경남블공 간담회 뒤풀이. @김주완


한편 이날 간담회는 경남블공 회원이 아닌 사람에게도 오픈했는데, 참가비로 2만 원씩을 받았다. 모두 17명이 참석했는데, 17명 모두 뒤풀이에도 함께 했다. 참가비보다 술값이 좀 많이 나와 초과된 9만 원을 블로거 선비(홍성운) 님이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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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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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 13화. 조현오는 조폭과 어떻게 싸웠나


2011년 10월 22일 오전 조현오는 전날 밤 인천길병원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보고받는다. 장례식장 앞에서 조직폭력배끼리 단순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당일 저녁 SBS 뉴스는 전혀 다른 영상을 내보냈다. 화면에서는 인천 조폭 130여 명이 도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조현오는 허위·축소 보고를 받은 것이다.


격노한 조현오는 감찰과장에게 바로 전화했다. 경찰청 감찰팀은 인천남동경찰서 사무실 CCTV를 면밀하게 살폈다. 112 신고 접수가 되자 경찰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파악했다. 조사가 끝난 23일 인천남동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됐다. 남동서 형사과장, 강력3팀장, 상황실장, 지구대 순찰팀장 등도 중징계를 받았다.


조현오는 “경찰이 조폭에게 위축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질책했다. 이에 현장에 출동한 강력3팀장이 반박하는 글을 내부 게시판에 올린 게 외부로 공개됐다.


‘저는 사무실에 있다가 상황실 연락을 받고 테이저건 등 장비를 챙겨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저는 현장책임자로서 동료 직원과 더불어 흉기를 소지한 범인을 제압하고 피해자를 구조 후송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경찰 주장은 이렇다. 상황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고 조폭이 집결하자 경고 방송을 보냈다. 형사 5명이 칼부림을 한 가해자를 제압했고 집결한 조폭과 대치했다. 칼에 찔린 피해자를 후송하고 사건 현장을 채증했다. 그런데 SBS가 형사를 조폭으로 잘못 보도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경찰청 감찰팀이 반박했다. 경찰이 아무리 활약했다 해도 초동 대응 실패를 덮을 수 없다고 했다. 2011년 10월 21일 현장 상황은 어땠을까.


인천 폭력조직인 크라운파 조직원 부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빈소가 인천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어 빈소에 인천 조직폭력배들이 문상을 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신간석파 K씨와 크라운파 L씨가 만났다. L씨가 K씨를 향해 빈정거린 게 발단이었다. 각자 자기 조직원을 소집하면서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졌다.



10시 18분 1차 112신고가 접수됐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 엘리베이터 앞에 몰려 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남동경찰서 강력반과 상황실이 동시에 신고를 접수했다. 조폭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은 겁을 내지 않는다. 조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찰은 강력계 조폭 담당 형사다. 하지만, 최초 신고 당시 강력팀 형사는 출동하지 않았다. 현장에 먼저 도착한 쪽은 구월지구대 순찰차였다. 순찰차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며 그냥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다.


10시 51분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싸운다는 2·3차 신고가 들어온다. 순찰차가 추가로 도착했다. 지구대 순찰팀장은 조폭끼리 싸움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현장에서 순찰차 두 대가 철수한다.


11시 18분 조폭들이 싸우니 빨리 와 달라는 4차 신고가 접수된다. 11시 45분에 출동한 인천남동경찰서 형사 5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100여 명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K씨가 L씨를 흉기로 찔렀고 형사들이 K씨를 제압했다.


조현오는 사건 현장에 형사 5명만 있었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집단폭력 대처 매뉴얼에는 사건 발생 즉시 관할 서장에게 보고해 초기에 경찰을 집중 투입하여 전원 검거하도록 돼 있다. 출동 인원만으로 제압하기 어렵다면 상황실에 기동타격대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관할 경찰서 인력으로 진압이 어렵다면 지방청에 요청할 수도 있다. 지방청은 폭력계와 광역수사대를 운영한다. 폭력계는 폭력조직을 수사·관리하며, 광역수사대는 경찰서 2개 이상이 관련된 사건을 처리하고자 만든 것이다. 조현오는 활용 가능한 경찰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채 공권력이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대대적인 감찰이 진행됐다. 감찰 결과 강력3팀장은 형사과장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팀장이 과장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면 맡은 임무는 다한 것이다. 강력3팀장에 대한 징계는 일단 거두게 된다.


조현오는 폭력조직과 전쟁을 선포한다. 조폭에게 인권은 고려하지 않겠다고 했고 조폭이 폭력을 행사하면 총기라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겨레>는 10월 30일 자 ‘조현오 경찰청장의 처신 경박하고 무책임했다’는 사설을 통해 조현오가 ‘조폭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여론을 의식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1990년대 형사과장 시절부터 총기 사용 발언을 했다.


조현오는 1990년 부산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은 해운대와 항만이 있다. 항만은 마약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마약과 조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여름 치안 로드맵 중심에는 해운대가 있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에도 조폭은 있다. 부산 최대 폭력조직은 ‘칠성파’였다. 조현오가 형사과장이던 때도 ‘조직 폭력과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형사들 사이에는 총을 던져서 범인을 검거한다는 한탄이 떠돌았다. 검거 과정에서 총을 쏘면 손해배상과 감찰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칠성파 두목 이강한을 비롯해 간부급 조폭이 구속된다. 그렇다고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이강한은 1999년에 출소한다. 그 사이 신흥 조직인 ‘신20세기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칠성파와 영역 다툼이 본격화됐다. 유흥업소 등을 놓고 벌인 주도권 다툼은 1992년 7월 칠성파 조직원이 20세기파 간부를 살해하면서 불거졌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가 소재로 삼은 사건이다.


2006년 1월 신20세기파가 보복에 나섰다. 부산 내 반 칠성파 세력을 규합해 60여 명이 흉기를 들고 칠성파가 모인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에 난입했다. 이 사건 이후 2년이 흐른 2008년 조현오가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온다. 조현오는 경찰에게 조폭 검거 과정에서 위협을 느끼면 과감하게 쏘라고 지시한다. 일선 경찰에게는 놀라운 발언이었다.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누가 책임지겠다고 하나요? 주변에 다 책임 안 지려는 사람들뿐인데….”


당시 이강한이 부산에 있는 한 호텔 사우나에서 목격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부산지역 사우나에 조폭 출입을 금지했다. 전신 문신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어서 경범죄 처벌 사유가 됐다. 형사들은 목욕탕에서 나오는 조폭에게 5만 원 과태료 스티커를 건네며 사우나에 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사우나에 조폭을 출입금지 하는 조치는 이전 부산 청장들도 했던 단속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현오는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총기 사용과 더불어 조직 자금줄을 추적해 차단한 것이다. 조폭은 오락실 수익금 상납금을 바탕으로 조직을 관리했다. 다른 자금 확보 방법으로는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잔치, 고희연, 생일잔치 등을 활용했다.



잔치는 보통 호텔에서 열렸고 조폭은 관할 구역 영업소 사장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형사들은 하객을 대상으로 참석 경위와 강압 여부를 조사했다. 조현오는 조폭 행사는 경찰이 확실하게 관리하겠다고 선언했다.


호텔에서 행사를 하더라도 민간인처럼 조용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건장한 남자가 깍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90도 각도로 절하는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조현오는 조폭들이 위력을 과시하면 공권력을 발휘했다.


행사에는 부산지방청 광역수사대, 강력수사계, 폭력수사계, 기동대, 관할 경찰서 강력팀 형사 등을 배치했다. 조현오는 조폭을 상대하면서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단위로 분산된 형사 인력으로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경찰 조직 내 최강 부대인 경찰 특공대를 호텔 행사장에 투입했다. 경찰특공대는 일선 경찰관들이 버거워하는 일들, 가령 조폭이 집단으로 흉기를 휴대해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지방청장 허가를 받아 출동한다. 조현오 지시를 받고 출동한 특공대원은 어떤 일을 했을까.


경찰특공대는 조폭이 타고 온 차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차 안에 칼이나 야구방망이 같은 흉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경찰직무집행법에 따르면 도검류는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된 도검류에는 레이저로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조현오는 다른 청장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언행이 있었다.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언행을 언급하며 ‘또라이’라고 비난했다. 2011년 1월 불거진 ‘함바 비리’ 사건에서 조현오가 취했던 방법도 이전 경찰청장들과는 전혀 달랐다.


(다음14화-근본적 사고)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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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의 힘은 강하다는 걸 보여준 영화 레드 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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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버지란 사람이 원래 없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좀 커서 보니 다른 아이들 집에는 아버지가 있는 거에요. 그때서야 우리 아버지만 없다는 걸 알았지요."


엄마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를 잃었던 한 강병현 진주유족회장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이승만 정권의 불법적인 민간인학살로 살해됐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보통 우리는 부모를 잃고 1년 만 지나도 슬픔을 잊는다. 아버지 제사가 돌아와도 우는 경우는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영화 <레드 툼>(감독 구자환)에서는 나이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65년 전 헤어진 사람을 그리며 서럽게 운다. 빗속에서 진흙탕에 막걸리를 뿌리며 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원통하게 했을까?



영화 <레드 툼>은 어설프게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무심한 듯 들어준다. 기억조차 끔찍한 학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 아직 숨이 남아 있던 사람까지 생매장했던 기억들, 학살된 아버지, 남편의 시신을 어떻게 찾아왔는지, 왜 아직 시신도 못찾고 있는지…. 의령에서 마산으로, 마산에서 진주로, 밀양으로, 거제도로, 통영으로 카메라는 옮겨다닌다.


한홍구 교수가 그랬듯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학살 암매장된 민간인 희생자의 무덤'이다. 그런 암매장 터도 영화는 보여준다. 거기서 발굴된 유골들의 모습도 참으로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재미를 더하기 위한 어떤 기교나 기법도 없다. 그냥 정직한 영화다. 그래서 심심하기도 하다. 액션이나 드라마에 익숙한 이들은 '재미없는 영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팩트의 힘은 강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가 아닌 실제인물의 실제 행동과 실제 육성이서일까. 가슴이 아린다. 울컥하게 한다. 그리고 나중엔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민다.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낯과 속살을 접하고 싶다면 9000원을 내고 이 영화를 보길 권한다. 특히 영화 제작과 개봉을 위해 후원금을 한 푼이라도 낸 사람은 엔딩 크레딧에서 꼭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기 바란다.


참고로, 여기 중간 즈음에 못났지만 내 얼굴도 나온다.



아! 그리고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더 보고 싶은 사람은 오늘 출간된 증언자료집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도서출판 피플파워, 1만 7000원)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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