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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아는 몸과 고통을 아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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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을 읽었습니다. 아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에 핵피폭자가 2만 명 넘게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그이들이 낳은 자식(핵피폭2세)이 적어도 1만 명 가까이 되는데 그들 또한 ‘핵피폭에 따른 유전 (위험)’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들 핵피폭1세와 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거의 전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사실 또한 제게는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하나씩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폭탄이 터진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김형률은 핵피폭2세입니다. 1970년 태어나서 서른다섯 해 살다가 2005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김봉대는 1938년 합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이곡지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1940년 조선 사람을 부모로 삼아 태어났습니다. 

 

1. 핵피폭 1세의 존재


어머니는 1945년 8월 9일 미군이 핵폭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렸을 때 부모 일터에 있다 핵에 노출됐으며 아버지와 언니까지 여의야 했습니다. 함께 피폭된 어머니는 어린 곡지와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해방된 뒤 외가가 있던 합천으로 돌아갔습니다. 버지가 없는 탓에 친척들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어머니 이곡지는 그나마 일본에 있는 외숙부 도움으로 국민학교는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와 달리 합천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쳤으며 군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김형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결혼을 했습니다. 군대 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신부감을 찾았으니 그리 알거라” 하는 연락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곧이어 ‘합천읍장 직인이 찍힌 결혼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맺어진 김봉대·이곡지 부부는 60년대 들어 부산 수정동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자식을 여섯 봤습니다. 김형률을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형이 둘이고 누나가 하나, 여동생이 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김형률은 넷째 자식이면서 셋째 아들입니다. 

 

2. 대를 이어 유전되는 핵피폭


김형률에게 쌍동이 동생도 하나 있었는데, 태어난 지 1년 반만에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건강했지만 김형률은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원인은 ‘핵피폭에 따른 유전’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 등 때문에 심하게 앓아야 했고 커가면서는 그런 고통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김형률은 국민학교와 중학교만 그것도 겨우겨우 마칠 수 있었을 뿐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형률은 주저앉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면서도 대학 입학을 목표로 1989년부터 야학에 나갔고 열심히 공부하고 어울리고 생활했습니다. 어떤 여자를 두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으나 자기 건강하지 못함이 상대방한테 해로움과 괴로움이 될까봐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견뎌야 했습니다. 


짐작건대, 김형률의 몸은 김형률 본인한테도 굉장한 의문거리였지 싶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에 나가서 일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누구나 다 하고 사는 생활을 할 수 없는지?” 


그런 의문을 풀 실마리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1995년 25살 김형률은 폐렴으로 세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부산침례병원 특별 혈액검사 결과 ‘면역글로불린M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 병명이었고 증상은 면역력이 신생아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약해 폐렴이나 기관지확장증 등 갖은 합병증을 앓을 위험이 언제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핵피폭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나 병원은 그 이상 얘기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몸이 이런 정도라면 보통은 몸도 마음도 다함께 지치고 잦아들어서 그냥 흘러가는대로 지낼 법도 하지만 김형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3. 핵피폭2세의 '열정페이'


몸을 적게 움직이면서도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로 컴퓨터 관련을 꼽고 대학 진학을 위해 애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으며 졸업반 시절에는 학과 연구실에서 일할 기회를 잡아 스스로 학비도 벌면서 컴퓨터 실력도 키워나갔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1999년에는 창원 한 벤처기업에 들어가지기도 했습니다. 업무용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였습니다. 집이 있는 부산에서는 버스를 갈아타고 두 시간 거리였습니다. ‘일정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요즘 말로 ‘열정페이’ 취직이었습니다. 


일이 바빠지자 자기 돈을 제법 들여서 회사 근처에서 자취까지 했습니다. 납품 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김형률은 이렇게 해서 애써 얻은 직장으로부터 돈 한 푼 받아보지 못하고 퇴사해야 했습니다. 


김형률의 삶은 그 뒤로도 2005년까지 이어지지만, 그리고 이 때 삶이 훨씬 할 이야기가 많지만 저는 김형률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멈추겠습니다. 대신 제가 읽은 <나는 反核人權에 목숨을 걸었다-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의 책날개에 적혀 있는 일부를 옮기겠습니다. 

 

 

4. 핵피폭2세의 고통에 대한 최초 공개 증언


“어린 시절 시작된 잦은 병치레와 거듭된 생사의 고비들이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병 때문이며, 그 원인이 원폭피해에 있다는 게 밝혀진 후 원폭피해2세 환우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쳤다. 2002년 3월,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후유증을 지닌 원폭피해자2세임을 공개하고, 이후 원폭피해2세환우회를 결성하여 한국 원폭피해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일에 마중물이 되었다. 


2004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를 이끌어냈고, ‘한국 원자폭탄 피해자와 원자폭탄2세 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원폭피해자2세 환우들의 인권을 위해 애쓰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2005년 5월 29일 짧았던 생을 마감했다.” 


저는 우리나라 소설가 누군가가 이런 김형률을 소설로 다뤄 주면 좋겠습니다. 김형률은 잘만 형상화하면 이른바 ‘상품성’도 있다고 저는 봅니다. 시사성 또는 사회성은 물론 지나치게 풍부할 정도로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성’은 쓰는 작가가 스스로 담보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씀입니다. 

 

5. 끔찍함이 유전된다는 끔찍함

 

김형률은 자기 삶을 통해 우리들 대부분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지경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핵피폭2세의 삶과 죽음입니다. 핵피폭으로 말미암은 유전의 끔찍함입니다. 그것은 핵피폭 3세 4세 5세…… 이렇게 대를 이어 내려가는 끔찍함입니다. 


핵피폭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서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현실이 이런 끔찍함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는 그 끔찍함이 이제 핵피폭2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괴로움입니다. 


김형률이 살아간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합니다. 김형률 본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글감으로 아주 휼륭하다고까지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밋밋해 보일는지 몰라도 솜씨 있는 작가라면 충분히 또 훌륭하게 살려낼 수 있는 다이나믹한 구석이 있습니다. 

 

스물다섯 시절 김형률은 어떤 여자한테 뜨거운 연애 감정을 품었으면서도 자기 병약한 몸 탓에 그 뜨거움을 안으로 속으로 삭혀야 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 보려고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도 하고 하려고 애쓴 처절한 청춘도 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 영원한 병약함의 영원한 근원임을 알고도 절망하지 못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 핵피폭에 따른 유전 때문임을 알고 난 뒤 자기자신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핵피폭2세라고 밝히는 과정도 퍽 역동적입니다. 핵피폭1세와 2세 단체들은 김형률의 이런 커밍아웃을 반대했습니다. 

 

6. 하루하루 삶을 이어간다는 것의 피말림

 

1945년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폭탄을 맞은 피폭자와 그 자식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무지와 무관심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형률은 아버지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자기가 바로 핵피폭2세라고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고상한 논리나 천상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지상에서 날마다 치러야 하는 전투처럼 피말리는 생활 문제였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병들어 있었던 몸과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돈이 김형률과 그 가족에게는 없었습니다. 


병든 육체와 정신을 가난이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가난은 고단한 그 식구들까지 피고름을 쥐어짰습니다. 그래서 김형률은 자기가 핵피폭 때문에 유전병을 앓고 있는 2세임을 밝히고, 그를 바탕삼아 미국과 일본과 한국에 책임과 의무를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은 핵폭탄을 터뜨린 나라입니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징용 등으로 끌고간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명색 국가를 참칭하고 있으면서도 여태껏 이들을 한 번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를 비롯해 당시 김형률을 안팎으로 둘러싼 여러 조건과 상황들도 잘 살펴보면 나름 예술적으로 그럴 듯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적지 않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김형률이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을 때 어쩐지 허전하고 무엇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평화가 강조돼 있고 일본의 피해자 측면만 도드라져 보이도록 돼 있었으며 반전(反戰)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표현이 없더라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김형률은 거의 본능으로 이를 알아차렸을 것 같습니다. 


김형률은 자기 몸과 마음이 바로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책임에 대해 거의 말이 없는 평화기념공원입니다. 어쩌면 거기서 김형률은 머리로 생각이 거부하기 앞서 몸이 먼저 DNA가 거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또한 충분히 긴장감·현장감 있게 형상화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김형률이 삶을 마감한 마지막도 어찌 보면 기가 막힙니다. 2005년 5월 김형률 일정을 보면 건강한 사람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김형률은 그야말로 ‘병구(病軀)를 이끌고’ 우리나라 여러 지역은 물론 일본까지 오가며 열성으로 활동을 벌였습니다. 


꼭 ‘죽기를 각오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 저는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이 몸 어디에 있는 어떤 에너지가 왜 하필이면 그 때 그렇게 용송음쳐 올랐을까……, 저로서는 아주 궁금한 대목입니다. 저는 제대로 된 소설가라면 이런 대목에서 감수성이 힘차게 작동해서 상상력을 풍성하게 펼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7. 기쁨을 아는 작가와 고통을 아는 작가


아울러 김형률 그리고 김형률의 삶이 일본 그리고 일본 사람들과 안팎으로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에서 끊어질 수 없도록 이어져 있는 대목도 눈썰미 있는 작가라면 제대로 알아보고 소설 창작에 시공을 뛰어넘는 훌륭한 모티브로 삼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여깁니다. 시간 배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한정없이 열려 있고 공간 배경 또한 한국과 일본과 미국으로 마음껏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에서 생각해봅니다. 소설가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표현 가운데 하나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고통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표현이 인기를 끌기를 저는 바랍니다. 물론 이는 가능하지 않은 바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 꼼지락거리는 모든 존재는 기쁨을 좋아하지 고통을 즐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은-사실은 문학만이 아니라 세상에 가치로운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 스스럼없이 자기를 내어놓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저는 압니다. 나아가, 기쁨을 제대로 알려면 그에 앞서 고통을 제대로 아는 몸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反核人權에 목숨을 걸었다-반핵인권운동에 목숨을 바친 원폭2세 故 김형률 유고집>는 2015년 5월 18일 행복한출판사에서 1만원짜리로 출판됐습니다. 김형률이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를 맞아 세상에 태어난 책입니다. 


지은이 김형률과 엮은이 아오야기 준이치(靑柳純一)는, 설령 누군가가 이 책 어느 대목을 표절한다 해도, 그 뜻이 나쁘지 않다면 그다지 문제 삼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소설가들에게만이 아니라 희곡작가들이나 시나리오작가들에게까지 두루두루 부탁드려 봅니다. 제대로 한 번 오지게 ‘고통을 아는 몸’이 되어 보시라고요. 


김훤주 


※ <경남작가> 제27호에 실은 글을 새로 조금 다듬었습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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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4화. 조현오가 오버했던 이유


한 참여정부 인사는 경찰청장 시절 조현오 행동을 ‘또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11년 7월 21일 조현오가 해군기지 경비 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를 방문해 제주해군기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지시했다. 당연히 MB 눈에 들려는 행동으로 해석됐다. 서울지방경찰청장 시절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도 마찬가지다.


조현오는 언제부터 정치적 행보에 능했을까. ‘불법행위 엄단’ 발언은 울산남부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관용차량을 의경이 운전했는데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현오는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주문했다. 지시를 어기면 법규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2006년 12월 1일 경비국장으로 승진하면서 이 같은 특징은 도드라진다. 당시 한미FTA 집회를 비롯해 각종 시위가 줄을 이었다. 조현오는 집회 현장에서 불법행위자 검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보고를 접한다. 조현오는 실무자를 다그쳤다.


“왜 법대로 안 하느냐?”

“그렇게 못합니다.”

“왜 못하냐?”

“시위대와 경찰이 엉키면 사고가 납니다.”

“왜 사고가 나냐?”

“집회·시위 관리를 전·의경이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집회·시위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해서 생긴다. 그동안 집회·시위 관리 주체는 20대 초반인 전·의경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치한 전의경을 국가 권력으로 보고 공격적으로 모욕을 주곤 한다. 자극을 받은 전·의경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진압에 들어가면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게 무리한 추적이다. 진압 상황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피해 도망가면 일단 법 위반 행위가 시정된 것으로 보면 된다. 무리하게 끝까지 쫓아가 검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감정 통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압대는 방어용 방패를 공격적으로 쓰기도 한다.


조현오의 근본적 사고


2005년 허준영이 경찰청장일 때 한미FTA 반대 집회 중에 농민 2명이 사망한다. 조현오는 법대로 조치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전·의경 폐지를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조현오에게 집회·시위 관리 모델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직업 경찰관 부대가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대략 100개 중대로 중대마다 250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버스, 승합차, 자동차로 이동하며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집회·시위를 관리한다.


조현오는 전·의경 폐지를 주장했고 이를 대체할 경찰 인력 협상을 기획재정부와 진행한다. 하지만, 2008년 ‘촛불집회’가 터지면서 전·의경 폐지 불가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현오가 경비국장을 하던 시절 기자들은 예정된 집회·시위에 대한 대응 방안을 묻곤 했다. 조현오는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고 답했고, 기자들은 “이번 주 족족 잡아들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2011년 7월 21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해군기지 경비문제로 제주를 방문했다. 조현오는 강정마을 관내 서귀포경찰서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불법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한 매체를 통해 서귀포경찰서 밖에 있던 주민도 실시간으로 이 정보를 접했다. 흥분한 주민은 조현오가 탄 버스를 에워싸며 이동을 막았다. 7분 정도 흘러서야 버스는 움직일 수 있었다.


조현오는 제주를 떠나기 전 서귀포에 있는 한 횟집을 들렀다. 제주경찰청장인 신용선을 비롯해 제주지방청 참모들이 모였다. 조현오는 식사 전에 이번 불법사태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경찰청장 한마디에 제주지방청 참모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제대로 회를 먹는 사람은 조현오 뿐이었다.



사람들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현오 발언은 청와대를 의식한 것으로 봤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자 차명계좌 발언을 했고 이런 발언으로 MB 눈에 들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라는 분석도 뒤따랐다. 하지만, 이 같은 단정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이 시기 조현오가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다는 보도도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2월 국제범죄수사대가 창설됐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14회계연도 재정사업 성과 평가’ 보고서를 보면 2015년 4월 기준 지역경찰(지구대·파출소 근무 인력)은 정원(4만 5490명)보다 1705명이 적다. 반면, 경찰청과 경찰서 근무 인력은 정원(6만 5579명)보다 848명이 많다. 이 통계를 접한 언론은 민생안전 현장 일선을 책임지는 지구대·파출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부족한 일선 경찰서 인력을 더 줄여서 지방청 인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를 조정한 이가 조현오다. 국제범죄수사대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1991년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당시 대공과장)이던 때부터 시작한다. 부산동부경찰서 보안과장은 조현오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보직이기도 하다. 보안과는 이른바 간첩을 잡는 곳이다. 그리고 경찰서 보안과에는 외사를 담당하는 직원들도 소속돼 있다. 아침마다 보안과 직원은 보안 및 외사첩보를 작성했다. 보고서 출처는 노조 소식지나 신문 등이었다.


일본 야쿠자, 중국 삼합회, 외국 조직폭력단, 인신매매단, 간첩 등을 막고 검거하려면 일선 경찰서에 배치된 1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는 불가능했다. 첩보를 입수한다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조현오는 경찰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방청 인력이 많고 파출소 지구대 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국회에서 경찰 지휘부를 압박하는 단골 메뉴였다. 그러다보니 경찰도 비난을 의식해 한발씩 나가지 못했다.


권한을 갖게 된 조현오는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부터 조직을 개편했다. 안산 등 외국인 밀집 지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조폭 등을 관리하려면 경찰서 단위 외사 인력으로는 대처에 한계가 있었다. 각 경찰서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지방청으로 불러들여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계를 만들었다. 통상 ‘외사분실’이라고 부른다. 실무를 맡은 계장(경정) 중에 총경 승진자를 배출하도록 하면 동기부여가 된다. 승진 의욕이 있는 유능하고 젊은 직원도 선발된 외사경찰이 활동하면서 효과가 나타났다.


청와대와 마찰 빚은 까닭


이듬해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계장급이 대장을 맡는 국제범죄수사대를 만들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조현오 행보 때문에 난처했다. 민정수석실은 검찰을 앞세워 외국인 범죄를 대처할 계획이었다. 2009년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 주도로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경찰이 먼저 치고 나간 모양새였다. 민정수석실이 경찰청장 강희락에게 경고성 전화를 했다는 보도가 나갔다. 물론 이후 이야기는 없다.



민정수석실은 바로 조현오에게 전화해 질책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경찰청 허가를 받으면 지방청에 계 단위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다고 받아쳤다. 질책성 전화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돼서도 눈치를 보지 않는 행보를 이어갔다. 경찰 인사에 주도권을 쥐었고 검찰과 맞서기도 했다. 민정수석은 차명계좌 발언 수사를 언급하며 조현오를 압박했다. 조현오는 이에 언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과연 조현오 행동과 발언 배경에는 MB에 대한 믿음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될 욕심으로 치밀하게 계산해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고 여긴다. 차명계좌 발언에 대해 한 전직 참모는 계획적이라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고 무심코 나왔다면 조직 안에서 파워가 커지다 보니 거리낄 것이 없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했다.


연재 시작부터 밝힌 대로 조현오 행위를 선의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조현오가 경찰청장 시절 터진 ‘함바 비리’ 사건에 대처한 방법을 살펴보겠다.


건설현장에 있는 식당을 ‘함바집’이라고 부른다. 유상봉은 함바집 운영권과 인사 청탁 명목으로 전임 경찰청장인 강희락을 비롯해 고위 공무원에게 금품을 건넨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2010년 말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함바 비리에 전·현직 경찰 간부가 대거 엮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총경 급 연루자가 상당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지휘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전직 간부들은 보통 검찰 수사를 지켜보든지 조용히 정보나 감찰을 동원해 내부적으로 진상 파악을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조현오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조현오는 총경 이상 간부 560명에게 자진신고를 지시했다. 유상봉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만났는지, 금품·향응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을 적어 내라고 했다. 자진신고를 하면 최대한 선처하지만 검찰 수사나 보도를 통해 연루 사실이 밝혀지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가혹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수사와 구형을 담당하는 검찰이 보기에 황당했다.


조현오의 경찰 사기 진작 방식


조현오 발언을 이해하려면 그가 지휘관이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지휘관은 조직 구성원 사기 진작에도 책임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를 가나 분위기가 중요하다. 조직 구성원의 99.999%는 함바 비리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 99.999%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조현오는 지휘관이 손 놓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유상봉과 관련된 경찰이 극소수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관련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자 감찰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검찰에서 수사하는데 감찰까지 풀어서 구성원을 다시 조사하면 조직 사기가 추락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수’를 지시한 것이다. 유상봉과 접촉을 인정한 경찰은 41명이었다. 유상봉에게 금품을 받은 경찰은 2명이었는데 내용물은 각각 와인과 홍어였다.


조현오가 지휘관이 된 2008년부터 조직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적은 3번 정도를 꼽을 수 있다. 2007년 12월 경기도 안양에서 발생한 혜진·예슬 양 사건이 터지고 경찰은 거센 비난을 받았다. 국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2008년 부산청장이던 조현오는 경찰 사기 진작을 위해 밤새 범인 검거 소식이 들리면 아침마다 상과 상품을 들고 현장에 나갔다. 낮에도 검거 소식이 들리면 바로 전화하며 치하했다.


노무현 차명계좌 발언의 배경


조현오가 서울청장이던 2010년 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1주기를 앞두고 있었다. 경찰도 노무현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사망 1주기 즈음 열리는 집회 참여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기 일에 대한 정당성에 의심을 품기 마련이다. 이는 조직 내 사기 문제로 이어진다. 2011년 3월 서울청 2층 강당에서 조현오는 기동대 지휘관을 모아 교육을 진행했다.


내가 만난 한 전직 청장은 자기가 강의를 했다면 “막는 게 우리 숙명”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현오는 5월부터 경찰 사기가 떨어진다면 그 분위기가 그해 11월에 있을 G20 서울정상회담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현오는 원고 없이 강의했다. 대한민국 경찰이 얼마나 유능한지 계속 강조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어디선가 들은 내용이 떠올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1주기 집회 참가자보다 이를 막는 경찰에게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근거였다. 그리고 ‘차명 계좌’ 발언이 이어졌다. 조현오는 경찰도 뇌물 받으면 바로 파면당하고 형사입건 당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휘관으로서 부대 사기 진작노력을 아래와 같이 약속하며 강의를 마친다.  



“여러분 사기 관리를 위해서 저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근무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였고, 특히 전·의경 사기관리를 위해 필요 이상으로 억압하고 규정하는 이런 것은 안 하려고 그럽니다. ...(중략)... 다른 식으로라도 사기 관리를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해 8월 조현오가 경찰청장으로 지명되자 암투가 시작됐다. 당시 강연을 찍은 동영상이 유출됐고 KBS가 이를 보도하면서 조현오는 ‘공공의 적’이 됐다. 2011년 말 문재인을 비롯한 친노 정치인들이 검찰청 앞에서 조현오를 처벌하라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나꼼수>도 왜 중앙지검 형사1부는 조현오를 부르지 않느냐며 성토했다.


당시 조현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회적 비난과 별개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의성’과 ‘허위 인식성’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의성’은 보통 선거에서 후보자끼리 비방을 할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가 ‘노무현 차명계좌’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다는 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제 조현오와 마지막 현장검증 장소로 가보겠다. 바로 서울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다음15화-전폭적 권한위임)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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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서점·지역출판물 우선구매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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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피플파워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뭘까요. 이임호 간디고등학교 교사가 최근 <소소책방 책방일지>(소소문고)에 쓴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스무 가지 단상’의 한 대목을 소개할까 합니다.


“심리적인 건강을 위해서 독서가 얼마나 유용한지 생각해볼 수 있다. 책의 좋은 점은 마음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슬픈 일, 괴로운 일을 겪을 때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츰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에 담긴 내용보다도 읽기라는 행위가 아픈 마음을 매만져주는 것 같다. 읽는 행위 속에는 분명 신비한 치유력이 있다. (… …) 말없이 지내고픈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나누기를 갈망하는 욕망, 그 사이에 책이 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치미는 분노를 어쩌지 못할 때, 서러움이 복받칠 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닥쳤을 때, 타인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찾아 읽으며 위안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책을 읽고, 남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불만 없이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도 굳이 책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그래서 책 읽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채우려는 자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같은 이유에서 <피플파워> 독자 여러분께 무한한 사랑과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번호에 실린 김해 오복당서점 이수복 씨는 편리한 대형마트 대신 전통시장을 이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장에서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우리 서점에 올 고객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마트 안 대형서점의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이렇게 단언합니다.


“장사 논리를 앞세워 책을 구비하는 곳이죠.”


그렇습니다. 대형마트는 전 국민의 소비행태와 생활양식을 획일화시키고, 대형서점은 잘 팔리는 책만 더 잘 팔리게 만들어 전 국민의 사고와 정신까지 획일화시킵니다. 팔리지 않는 책은 금방 자리를 비워야 하는 대형서점과 달리 동네서점은 그런 책에도 기회를 줍니다. 팔리지 않고 몇 년을 자리만 차지하더라도 이 책이 꼭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내어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역공동체 정신이고 문화의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이미 서울·부산의 각 구청과 부천·성남시 등 각 지자체와 서울시교육청에서 하고 있는 지역서점 도서구매 정책과 더불어 지역출판물 우선 구매 정책이 경남에서도 시행되면 좋겠습니다. 전통시장 살리기에 드는 예산의 몇 퍼센트만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지난 7월호 이 지면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지역 출판이 없으면 지역 콘텐츠도 없습니다. 지역 콘텐츠가 없으면 정신문화도 사라집니다.” 지역서점 역시 단순한 판매시설이 아니라 문화공간입니다. 각 지자체와 교육청, 지역 대학이 나서 공공도서관은 물론 학교도서관, 마을도서관에 이르기까지 도서구매를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의 문화공간과 정신문화가 살아납니다.


이번호에도 경남의 각 분야와 일터에서 지역공동체를 살찌우기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고 있는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특히 ㈜다린 김정수 회장의 입지전적 이야기와 ‘거창 이수미팜베리’ 이수미·박창구 부부의 성공 정착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 톱 연주자 진효근 씨와 돌아온 광대 노정욱 문화예술협동조합 예술나무 대표의 파란만장한 삶도 흥미롭게, 하지만 가슴 아파하며 읽었습니다. 요즘 흔히 들판에서 볼 수 있는 황새와 두루미, 학, 백로, 왜가리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친절하게 일러준 윤병렬의 생태이야기도 읽어둘만 합니다.


참, 사과 말씀 올립니다.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와 공동기획으로 연재해왔던 ‘언니에게 듣는다! 여성노동자들의 살아있는 역사’ 시리즈는 이번호에 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이와 일정 조정에 여의치 못해서였는데요. 기다리고 계실 독자님들께 죄송합니다.


편집 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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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총싸움 놀이 의외로 긴장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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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기 전에는 그랬다. '다 큰 어른들이 애들처럼 전쟁놀이가 뭐야.'


대체 왜 저런 쓸데없고 유치한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이 하는 총싸움 놀이 '서바이벌 게임'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직접 이걸 해볼 기회가 생겼다. 사회적 기업 해딴에(대표 김훤주)가 합천군의 의뢰로 주최한 '합천 황강 여름 팸투어'에 참여했는데, 그 프로그램 중에 서바이벌 게임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내심 귀찮았다. 더운 날씨에 군복을 껴입어야 한다는 것도 그랬고, 플래스틱으로 된 안전조끼와 고글이 달린 헬멧까지 착용해야 했다.


그러나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이게 대체 뭐길래 동호회까지 만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이걸 즐기나 싶었던 것이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주의사항을 듣고 있다. @실비단안개


페인트 볼이라 할 수 있는 총알 100개가 장전된 공기총을 받았고, '우로 어째 총' 자세로 게임장에 입장했다. 6대 6으로 팀을 나눠 각자 은폐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페인트 총탄 @실비단안개


저쪽 상대편의 머리와 몸이 잠깐 잠깐 노출될 때마다 나름 군대에서 배운 조준사격을 가했다. 좀 멀어서 정확히 내가 쏜 총에 상대방이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이게 무슨 심리일까? 총알이라고 맞아봤자 잠시 따끔하고 군복에 페인트가 터지는 데 불과한데, 마치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느낌이었다. 


몸에 총알 2발을 맞으면 전사로 간주하고 저렇게 손과 총을 올리고 나와야 한다. @실비단안개


그런데 상대편이 너무 오합지졸에다가 훈련 경험이 없는 자들이어서일까? 총을 열 발도 발사해보기 전에 게임이 끝났다며 나오라고 했다. 상대편 6명이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너무 싱거웠다. 그래서 삼세 판은 해봐야 해본 느낌이 든다고 한 것인가?


한 판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지만, 다음 일정도 있는 상황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들 @이춘모


해봤더니 확실히 묘한 긴장감과 스릴, 재미가 있었다. 이 재미 때문에 동호인들이 그리 많은 걸까? 그런데, 반전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사람 죽이는 게임을 즐겨도 되는 건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느낀 스릴과 재미는 뭔가? 어쨌든 참 묘한 느낌이었다.  


마친 후 기념촬영 @실비단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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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조현오가 무능한 간부를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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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5화. 조현오가 무능한 부하를 다루는 방식


조현오에게 현장검증 3차 장소는 청담동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이다. 길게 나 있는 복도 양편에 모든 공간이 룸으로 돼 있다. 조현오도 출소 후 이곳이 궁금해 처음 와봤다고 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수백 명이 면회를 왔고 대부분 경찰이었다. 조현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자기 사람 잘 챙긴다'는 비판을 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걸핏하면 "경찰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곤 했다. 얼핏 보면 규칙과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사람 챙기면서 겉으로만 대의를 외친 듯하다.


실제 한국 경찰 정체성에 관심을 보인 경찰청장은 허준영이었다. 2005년 허준영은 한국 경찰 주체성을 파고들면서 수사권 독립을 강하게 외쳤다. 한국 경찰 마크로 참수리를 쓴 게 이때다. 그동안 한국 경찰 상징은 미국 흰머리 독수리였다. 게다가 참수리는 독수리와 달리 죽은 시체를 건들지 않는다. 이게 당시 경찰이 상징을 독수리에서 참수리로 바꾼 이유였다.



허준영에 이어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된다. 두 번째 외무고시 출신이다. 조현오는 회의시간에 경찰이 왜 존재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12월 20일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그동안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학교 폭력으로 말미암은 자살이 잇달아 터지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보통 이런 사건이 터지면 교육 당국이 대책을 세우고 경찰도 대책에 맞춘 대응 방안을 내놓곤 한다. 하지만, 조현오는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주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자 사회적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교권 침해를 비롯해 학교 폭력 해결 주체는 교사, 학생, 부모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부정적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일선 경찰서에 올라오는 불만 중에는 주취자 신고를 112로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취자, 노숙자 등에 대한 조치는 지방자치단체 몫이다. 경찰은 '범법행위'가 발생해야 나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현오는 한국 경찰 구조가 이런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다고 판단했다.


조현오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 있다. "한국 경찰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한탄이었다. 한국에서는 경비작전은 국방부, 수사는 검찰, 정보는 국가정보원, 경호는 경호실에서 주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찰은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을 하기 마련이다.


조현오는 "경찰이 왜 존재하냐"고 물었다. 자살하는 아이들 인권은 누가 지킬 것인지 따졌다.


교사가 성인 조직과 연계된 일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현오는 경찰청에 학교폭력전담TF팀을 만들어 대책을 만들도록 했다. TF조직은 행정학상 비정규조직이다. 어느 한 기능이 담당하기 부적절하거나 일정 기간 특정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TF조직을 만든다.


경찰청은 전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학교폭력 현장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청 종합대책은 2012년 1월 26일, 정부 종합대책이 2월 7일에 나왔다. 조현오는 16개 지방청에 다니며 토론회 등으로 학교 폭력 문제를 중요 이슈로 만들었다. 경찰은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가 따라오도록 수레바퀴를 돌리는 동력을 만들었다. 경찰이 앞장서자 학교폭력 피해경험률이 2012년 초반 9.5%에서 2013년 하반기에는 1.8%까지 떨어진다.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생긴 것은 2005년이다. 그해 부산청장이던 어청수는 여성청소년과 업무로 학교전담경찰관(스쿨폴리스)를 운영한다. 하지만, 한 경찰이 맡는 학교 수가 너무 많아 세심한 관리는 버거웠다.


조현오는 스쿨폴리스 인력 확충과 동시에 학교폭력예방상담사 교육을 통해 스쿨폴리스가 학교폭력 문제에 전문성을 갖추도록 했다.


조현오는 일진 불량서클 해체만큼 선도에도 신경을 썼다. 제대로 훈방조치가 되는지 학교폭력점검대응반이 이를 점검했다. 2012년 경찰서부터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됐고, 2013년에는 각 지방청에도 여성청소년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청장인 김용판이 서울경찰 100여 명을 스쿨폴리스로 전환했다. 여성청소년 업무가 발전하면서 경찰 인력자원이 몰리기 시작했다. 경찰 치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물꼬를 튼 것이 조현오다.


한 경찰은 조현오가 이슈가 생기면 문제 근본을 건드리는 데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찰과 같은 계급 조직에 이 같은 문제 해결 방식과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결합하자 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현오가 물었다.


"경무과, 수사과, 정보과, 보안과 이런 것은 뭐 때문에 나눕니까?"


궁극적으로 경찰업무를 잘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어느 조직이나 칸막이 행정이 될수록 일이 바로 가기 어렵다. 다른 경찰 간부 역시 칸막이 행정에 대한 문제의식은 조현오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다.


다른 이들은 칸막이 행정은 책임 문제만 정확하게 선을 긋고 종합적인 의견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울산남부서장을 할 때는 업무 분담과 상관없이 수사과장을 불렀다. 살인사건 현장은 보통 형사과장이 책임을 진다. 사건 원인 파악부터 대책 마련은 정보과와 경비과가 맡는다. 하지만, 조현오는 수사과장을 불러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사안이라면 가장 업무역량이 뛰어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 능력이 부족한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경찰 간부들은 일을 주기 전에 사람 능력에 따라 방향을 정하기도 하며,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을 하나 맡겨놓고 어려운 일을 맡길 때 간단한 일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조현오는 어땠을까.


고시계장 시절 조현오는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을 처음에는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실수가 되풀이되면 조현오는 아예 결제 라인에서 뺐다.면박과 무안을 주는 정도는 보통보다 강했다.


울산남부서장일 때 조현오는 아침마다 참모회의를 열었다. 과장에게 업무 관련 질문을 했다. 질문은 알고 던지기도 했고 논리적으로 궁금하면 물어보기도 했다. 막힘없이 답하는 것은 업무를 잘 챙긴다는 뜻이다. 보통 서장들은 대답을 잘 못하는 과장에게 다음부터 잘하라고 넘기고 나서 담당 계장에게 내용을 확인한다. 반면 조현오는 과장에게 들어오지 말라 하고 계장을 보내라 했다. 이 광경을 본 직원은 '권위적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했다. 


'조현오 방식'이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왔다. 경찰은 계급 조직인 만큼 수평 질서와 수직 질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사회는 보고, 의전, 모양새, 형식 등을 유난히 따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관직은 사유물이 아닌 만큼 업무를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첫인상부터 '독일병정' 같은 조현오가 업무 역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니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직원은 사람 좋은 것도 필요 없고 공무원은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조현오 철학이라고 말했다.



서울종암경찰서장 시절에도 업무에는 칸막이가 없었다.


교인 헌금으로 지은 한 교회가 있었다. 목사가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놓으면서 일반 신도와 목사 쪽 신도가 충돌했다. 주말에 양측에서 서로 예배를 보겠다며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경비과장이 대책을 세우고 진압한다. 그런데 조현오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형사계장에게 권한을 전폭적으로 위임했다. 형사계장이 경비과 전의경 100여 명과 정보과, 형사과 인원을 이끌고 지휘했다.


조현오는 지방청장이 돼서도 업무역량이 떨어지는 직원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부분 지방청장은 참모인 과장을 의식해 무난하게 결제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조현오는 경비 지휘를 할 때조차 정보과장에게 작전을 맡겼다.


조현오 이미지 형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시기는 경찰청장 때다. 조현오는 인사정의, 부패척결 등을 내세우며 '7대 개혁과제'를 내놓았고 전담 TF팀을 구성했다. 한 고위간부는 TF팀이 해당 과에서부터 낮은 단계 협의가 이뤄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국장이 청장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오는 ‘개혁’을 원했다. 하지만 계급이 높아질수록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을 보인다. 경찰이라는 계급조직 하에서 눈치 안 보고 개혁을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적임자를 TF팀장 자리에 앉혔다. 조현오는 국장이 모두 결제한 내용을 TF팀을 통해 청장에게 가도록 했다. 중요한 보고서 자료는 모두 TF팀장을 통하게 했다.


사람들은 조현오가 경찰 조직 질서를 수평과 수직 모두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국장이 만나야 하는 팀장 직위가 경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호불호가 강한 조현오 성격도 한몫을 했다.


관리자 한마디는 격려든 질책이든 조직 안에서 더 큰 의미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조직 안에서 불만이 번지기 시작했다. 경찰청 국장(치안감)이나 부장(경무관)에게서 나오는 한마디는 힘이 실려 더욱 퍼졌다.



조현오는 이듬해 TF팀장도 총경으로 승진시킨다. 조직 내 비판 세력은 이 역시 조현오가 챙긴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조현오에게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이었다.보직에는 그 업무에 맞는 사람을 앉혀놓으려 했다.


황운하를 경무관을 승진시키고 나서 경찰청 수사기획관으로 배치한 것도 한 예다. 수사 기획관은 그 자리가 주는 무게로 봐서는 경무관 3년 차 정도가 어울리는 자리라고 보통 생각한다. 조현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경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현오가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 업무 역량 뛰어난 사람이었고 인사권을 쥐자 그런 사람들을 그 자리에 꽂았다.


그렇다면, 조현오가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업무역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일까?


먼저 2010년 정보국장을 지낸 이철규를 보자. 그는 조현오가 경찰청장이 되자 충북청장에서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11년 말 조현오 체제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조현오와 3차 현장검증을 한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이 바로 이철규와 깊게 얽힌 곳이기도 하다.


(다음16화-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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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원한 합천 황강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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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물이 다르다. 색다르게 즐겨라!' 합천군이 이번 여름 8월 16일까지 황강 일대를 물놀이 관광상품으로 꾸미고 내건 표어랍니다. 실제 체험해 보기 전에는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이틀 동안 황강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에 들어가 놀아보니 정말 노는 물이 달랐습니다. 풍덩 몸을 통째 물에 담갔을 때는 이런 찌는 더위에도 입술이 파래질 정도였고 강변 흐르는 물에 다리를 집어넣었을 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목이 시려질 만큼 차가웠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자회사로 문화사업을 주로 벌이는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지난 25~26일 1박2일 일정으로 '합천 황강 체험 팸투어'를 진행했습니다. 창원권과 진주권 '맨파워 있는 주부'와 경남과 부산에서 활동하는 블로거 등 17명이 함께했습니다.

 

ATV(전지형 자동차, 어떤 지형(地型)에서도 달릴 수 있는 사륜오토바이=시골 할매·할배들이 타고 다니는 네 바퀴 차를 뻥튀기한 정도) 타기와 서바이벌게임에서부터 황강 래프팅까지 합천의 명물 황강과 주변에서 즐길 수 있는 체험들을 했고 로컬푸드를 비롯해 합천서 맛볼 수 있는 여러 먹을거리들도 누렸습니다.

 

올해로 스무 번째를 맞은 황강수중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등 제2회 황강레포츠축제도 진행 중이어서 이 또한 그럴듯한 구경거리가 됐습니다.

 

합천군은 합천읍 들머리 황강변에 옐로 리버 비치(Yellow River Beach)라는 물놀이장을 조성해 놓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황강은 정말 물이 다르답니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지리산 골짜기조차 물이 미지근하지만 황강물은 시릴 정도로 차답니다.

 

상류 합천댐 햇빛을 받은 표층 물이 아니라 아래 햇빛을 볼 수 없는 심층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라 합니다. 따라서 시원한 정도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다릅니다. 바로 이렇게 찬 물이 합천 황강 물놀이장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발만 담가도 그냥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옐로 리버 비치, 우리 말로 하면 '황(黃)강(江)모래사장'쯤 되겠는데요 여러 가지 물놀이 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황강레포츠공원에서 8월 16일까지 운영되는데 물론 돈을 내야 합니다.

 

 

안에 들어가 전후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면서 모래밭으로 내려가는 커다란 공도 있고 흐르는 물과 더불어 미끄러져 내려가는 시설도 있고 아이들 놀이터처럼 꾸며놓은 데도 있고 뛰어내리고 튀어오르고 하도록 만드는 물건도 있습니다.

 

돈이 들기는 하지만 한나절 아이들이 재미나게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물론 황강레포츠공원에는 돈을 내지 않아도 들어가 시원한 물과 더불어 놀 수 있습니다. 물놀이 시설을 사용하는 데만 돈이 드는 것입니다.

 

 

 

합천은 황강이 규정합니다. 여러 가지 놀이시설도 황강 그 둘레에 꾸며져 들어서 있고 자연생태도 황강 그 자체이거나 그 둘레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으뜸은 아무래도 정양늪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름날에는 해뜨기 전 아침이 좋습니다.

 

 

물안개가 수북하게 쌓였다가 걷혀나가는 모습이 이채롭고 조용한 가운데 수련·노랑어리연·억새·갈대·부들·속새·줄 따위 흔들리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멀리서 붉게 꽃을 피운 연들도 그럴 듯하고 초록빛으로 몽글몽글한 버들들도 보기 좋습니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언제나 물이 흘러넘치는 징검다리도 있고 꾸민 티가 별로 없는 흙길도 제법 거닐 수 있습니다. 정양늪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람들 모여 사는 곳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점입니다. 합천읍내에 바로 붙어 있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찾아갈 수 있다는 미덕까지 갖춘 셈입니다.

 

더불어 황강래프팅도 꼽을 수 있겠습니다.(모아레벤트) 이번 팸투어 일행은 합천댐 아래에서 2km 남짓 래프팅을 했습니다. 래프팅은 박진감·긴장감 이런 느낌과 관련이 깊은데 황강은 이를테면 산청 경호강처럼 흐름이 아주 빠르고 물살이 거세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벼락을 맞거나 물에 빠지는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업체에서 알아서 장만해 준답니다. 편을 갈라 누가 빨리 가는지 또 흘러내려가며 군데군데 물싸움을 벌이는 재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강래프팅의 남다른 즐거움은 조용한 흐름에 있는 듯합니다. 물살이 빠르지 않은 데에 머물러 먹고 마시고 하면서(배를 타고) 놀 수 있는 조건이 된답니다. 강변 이쪽저쪽 왕버들 우거진 풍경과 깎아지른 듯 다가오는 절벽 따위 경치가 안겨주는 즐거움도 제법 쏠쏠합니다. 내려오는 내내 일행들은 그런 풍경에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배를 타는 지점 있는 공원에는 이주홍어린이문학관이 있는데 이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합천 출신 이주홍은 창원 출신 이원수 못지않게 우리나라 어린이문학에서 대단한 인물인데요 여기 문학관은 그에 걸맞게 잘 차려져 있어서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러볼만했습니다.

 

합천댐 바로 아래 합천영상테마파크는 여름을 맞아 고스트 파크(Ghost Park)로 변신했습니다.(유료) 우리나라 여러 영화·드라마를 촬영한 세트장이 통째 귀신들 소굴로 바뀌어 있습니다.(~8월 16일)

 

 

요즘 귀신들은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 깜짝이야!' 하고 놀라게 하는 정도로 그칩니다. 사람들은 합천영상테마파크 곳곳에 출몰하는 귀신들과 더불어 사진을 찍고 얘기를 나누며 심지어는 게임을 하면서 즐기기까지 합니다.(물론 제법 무섭게 하는 곳도 없지는 않습니다.) 밤 10시까지 하는데, 아무래도 해가 지고 나서 찾으면 무서운 정도는 더하겠지요.

 

 

어린 여학생 코끼리코 돌리는 저승사자.경찰관 귀신과 사진을 찍는 탐방객.

 

합천댐 둘레에는 합천 임란 창의사(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이들이 옛적 합천에 엄청나게 많았고 창의사는 그이들을 한데 모아 기리는 사당)가 있고 그 바로 뒤쪽에는 서바이벌게임과 ATV 타기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습니다.(화랑레포츠)

 

지난해 들어섰는데 캠핑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즐긴 일행들은 그냥 바라만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실제 해 보니까 묘한 재미와 즐거움이 있더라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슨 총싸움 놀이야?' 여겼다는 이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물감총알이 터지는 총을 잡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생기더라" 했고요, '자동차보다 빠르지도 않은 ATV가 무슨 재미야?' 생각했다는 사람은 "달리면서 물방울을 튀기고 언덕배기를 올랐다가 내려오는 순간 느껴지는 짜릿함이 남달랐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런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먹는 즐거움이랍니다. 첫날 점심부터 이튿날 점심까지 네 끼를 농민부페레스토랑(055-933-9680) 부자돼지(055-931-5885) 황강식당(055-931-0303) 북어마을(055-934-0666)에서 해결했습니다. 다들 반응이 괜찮았다는 쪽이었습니다.

 

농민부페레스토랑

 

농민부페레스토랑은 재료·양념이 조금 세었지만 유기농 로컬푸드에 값까지 비싸지 않아서 좋았고 부자돼지는 주인이 손수 잘라주는 독특하게 숙성한 꽈배기 통삼겹과 색다른 양념들이 그럴듯했습니다.

 

부자돼지는 꽈배기 통삼겹을 주인이 몸소 잘라줍니다.

 

황강식당 담백한 시래깃국과 조용한 반찬들은 차분한 아침상으로 그만이었고 북어마을 또한 짜지도 맵지도 않으면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북어마을 깔끔한 상차림.

 

이렇듯 요즘 곳곳에서 물축제가 한창입니다. 서울서는 한강축제가 벌어지고 전라도는 장흥에서 탐진강 멋진 물길을 밑천 삼고 토요시장 여러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얹어 세련되게 물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경남 합천 물축제는 이번이 두 해째라 합니다. 물론 합천에는 서울의 엄청난 인구가 없고 장흥의 다양하고 풍성한 먹을거리와 장볼거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합천은 서울도 장흥도 갖추지 못한 시원한 황강물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 타고난 황강물에다, 해를 거듭해 경험을 쌓아가면서 다른 여러 요소들을 잘 버무리기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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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황강래프팅의 미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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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배를 타고 급류를 헤쳐나가는 놀이를 래프팅(Rafting)이라 하나 봅니다. 급류를 타기 때문에 짜릿한 긴장감이 흐르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정해진 방향으로 노를 저어 나가야 하기에 협동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 안전함 또는 편안함


경남 합천 황강은 가까운 산청 경호강·덕천강과 달리 급류가 없습니다. 그래서 래프팅에 적당하지 않다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때문에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할 수도 있습니다. 짜릿한 긴장감이 안전보다 더 좋으면 경호강에서 하고 그보다 안전함(또는 편안함)이 좋으면 황강에서 즐기면 되겠습니다. 


7월 26일 오후 황강 합천댐 보조댐이 있는 데서 2km 남짓 래프팅(모아 레벤트)을 했습니다. 과연 황강은 흐름이 거세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그렇다고 물에 빠지고 배가 뒤집어지고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비단안개 사진.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함께 한 배에 한 명씩 타고 가는 운영요원의 솜씨에 달려 있었습니다. 열한 사람이 두 척에 나눠타고 누가 먼저 가나 경주를 했는데요, 요원들이 서로 상대방 배에 갑자기 뛰어들어 흔들어놓기도 하고 사람을 물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빠뜨리기는 같은 배를 탄 사람들끼리 더 많이 했습니다만)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50대로 나이가 많고 또 여자도 많은 편이어서 그리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물어보니까 배를 통째 뒤집어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물에 빠뜨리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즐기고 놀면서 흐름을 따라 내려왔는데요, 함께한 모든 이들이 입을 맞춘 듯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거친 물살이 안겨주는 짜릿한 긴장감은 없었지만, 대신 배를 편안하게 타고 내려오면서 시원한 강물을 제대로 누리는 즐거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팸투어 1박2일 전체 일정에서 맨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끝에다가 가장 즐거운 거리를 배치한 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실비단안개 사진.


2. 시릴 정도로 찬 강물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황강물은 정말 시원했습니다.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금세 이가 떨릴 만큼 시렸습니다. 


황강 래프팅 이틀 뒤에 산청 삼장면 송정숲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갔는데요, 거기 물은 햇볕에 데워진 때문인지 그냥 미지근하기만 해서, 제 몸에 기억돼 있는 시릴 정도로 차가운 황강물과 바로 대조가 됐습니다. 


황강이 물이 이토록 찬 까닭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 물었더니, 합천댐 덕분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합천댐에서 물을 방류를 할 때 위로 넘치면서 흘려보내지 않고 아래에 수문을 열어 빼내기 때문에 더워진 표층 물이 아니라 차가운 심층 물이 나온다는 얘기였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황강물의 차가움 덕분에 황강 래프팅이 좀더 즐거울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주는 깜찍함이 더해져 있었으니까요. 황강 래프팅에는 이런 편안함과 차가움에 더해 다른 즐거움이 또 있었습니다. 


실비단안개사진. 물에 빠졌습니다.실비단안개 사진. 물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3. 중국 장강 같은 멋진 풍경


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눈이 즐거웠을 정도로 풍경이 좋았습니다. 저는 아직 중국 장강 여행을 한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에서 여행 광고를 할 때 나오는 중국 장강과 같은 그런 풍경들이 황강에서 래프팅을 하는 내내 펼쳐졌더랬습니다. 


실비단안개 사진. 구름도 아주 멋집니다.


푸르게 우거진 숲은 기본이고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 비슷한 물풀이라든지 몽글몽글 부드럽고 정겨운 버들 무리들과 크지는 않아도 맞은편 언덕배기 깎아지른 절벽 따위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나타났습니다. 


그런 가운데 백로와 왜가리 같은 새들이 이리저리 가로세로 지르며 날아다니는 장면은 우리들 입에서 ‘우와!’, ‘우와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이 날은 구름들이 아주 예쁘게 깔려주기까지 해서, 고개를 돌리고 눈길을 던지는 곳 모두가 그럴 듯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그런 경험이 없어서 아무 준비도 못했지만, 황강 래프팅을 종종 즐기는 이들은 이런 편안함과 경치 좋음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 통닭이나 돼지수육 또는 돼지족발 같은 안주와 소주나 맥주 따위 마실거리를 챙겨오기도 한답니다. 


정성인 사진.


정성인 사진.


정성인 사진.


사방 경치가 좋은 데에 자리를 잡고는 한 쪽 발이나 아랫도리는 그 찬 강물에 담근 채 한 잔씩 들이키고 안주도 뜯으며 노니는 장면입니다. 겨울 빼고 봄 여름 가을 세 철 그렇게 할 수 있다니까, 가을 햇살 좋을 때 뜻 맞는 사람끼리 한 번 더 황강에서 래프팅 하며 놀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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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답사 끝에 고른 합천 맛집 네 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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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투어 같은 행사를 맡아 진행할 때 들으면 가장 기분 좋은 말이 바로 '음식 맛나게 잘 먹었다'입니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해당 지역에서 나는 좋은 재료로 맛을 제대로 낸 먹을거리를 맛보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7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여름철 물놀이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합천 황강 체험 팸투어를 하면서도 그랬습니다. 


첫째 날은 점심을 농민부페레스토랑(055-933-9680)에서 저녁을 부자돼지(055-931-5885)에서 먹었습니다. 둘째 날은 아침을 황강식당(055-931-0303)에서 점심을 북어마을(055-934-0666)에서 먹었습니다. 


일행 열일곱 사람 모두에게 듣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이 네 군데 밥집 음식맛이 괜찮았다고 했으며 나빴다고 말하는 이는 전혀 없었습니다. 기분이 은근히 좋았습니다. 답사를 두 차례씩이나 하면서 여러 의견을 듣고 몸소 맛도 보고 하면서 고른 밥집들이었습니다.


1. 로컬푸드로 음식 만드는 농민부페레스토랑


농민부페레스토랑은 합천영상테마파크에 있습니다. 1층이 합천로컬푸드직매장으로 쓰이는 건물 2층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미리 충분히 짐작하신 그대로 여기는 합천에서 나는 로컬푸드를 재료(양념까지도)로 삼아 농민들이 손수 요리를 해서 음식을 내놓습니다. 


1층 합천로컬푸드직매장.갓 딴 옥수수도 삶아 팝니다.


우리는 이날 수제왕 돈까스가 포함되는 부페를 먹었습니다. 돈까스가 들어가지 않은 부페는 6000원, 들어간 부페는 8000원을 받고 있었는데요, 저는 가격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층 농민부페레스토랑.


물론 농민들이 손수 만드는 때문인지 조금 센 듯한 느낌은 있었습니다. 열무 같은 재료도 좀 세고 간도 좀 세어서 맛이 약간 자극적이고 입에서 씹는 식감이 억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건강하게 기른 음식을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6000원짜리 부페.돈까스가 더해지면 8000원짜리.


게다가 돈까스 같은 경우는 양이 많아서 여자들은 대부분 혼자서 다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조금 투박하기는 하지만 시골 넉넉한 인심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돈까스였다 하겠습니다. 


김재중 점장 사과 깎는 모습. 우리 일행한테 덤으로 주려고 말입니다.


2. 꽈배기 통삼겹은 물론 밑반찬과 양념도 좋은 부자돼지


이어서 저녁을 먹은 부자돼지는 이른바 '꽈배기 통삼겹 구이'를 하는 집이었습니다. 주인이 몸소 개발한 비법으로 양념을 하고 숙성을 시킨 삼겹살이 나왔습니다. 넙적한 녀석으로 가로세로 칼로 다진 흔적이 나 있었습니다. 

부자돼지 겉모습.부자돼지 안 모습.


주인은 이것을 손님들이 굽도록 하지 않고 손수 불판에 올려주고 또 때가 되면 뒤집어주기도 하고 알맞게 익게 되면 가위를 들고 다니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줍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요, 마늘이랑 콩나물 따위도 불판에 얹어 이리저리 뒤적여주기까지 합니다. 


꽈배기 통삼겹 구이 초기 화면.

꽈배기 통삼겹 구이 중기 화면.

최종 화면. 마늘이 올라가 있습니다.더 최종 화면.


그러면서 오른손을 보여주는데, 엄지손가락이 시작되는 부위에 굳은살이 동그랗게 박혀 있었습니다. '부자돼지'를 운영한지 올해가 8년째인데 6년째 되는 해에 이렇게 굳은살이 생기기 시작하더라 했습니다. 그동안 많이 애쓴 흔적이겠지요.



익은 고기가 입 안에서 촉촉하고 고슬고슬하니 부담스럽지 않고 부드럽게 씹혀 좋았는데요, 이 집은 고기를 받혀 먹도록 곁들여 나오는 음식들도 아주 독특하고 좋았습니다. 먼저 된장이 집된장이었습니다. 절인 깻잎도 나왔는데요 식초도 같이 썼다는데 그다지 시지는 않으면서 상큼했습니다.



또 소금을 집어넣은 기름장 대신 나오는 간장에는 잘게 썬 절인 고추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미 절였기 때문에 억세지 않았고 고추 톡 쏘는 매운 맛은 간장맛의 밋밋함을 잡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더불어 김치 묵은지는 전혀 늘어지지 않아서 씹는 느낌도 좋았고 거북하지 않을 정도로 시어서 좋았습니다. 


3. 편하게 들러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황강식당


이튿날 아침 일행은 해가 뜨기 전에 조용하면서도 단정한 정양늪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밥을 먹었습니다. 황강식당은 그러니까 황강 물줄기가 낳은 합천 명물 정양늪 바로 옆에 있었는데요, 전날 밤 술을 마신 이들에게는 차분하고 부드럽게 속을 달래주고 다스려주는 그런 음식이었습니다. 


블로거 김주완 선배 사진.


한 끼에 6000원으로 특별한 상차림은 아니었지만, 더불어 나온 시래기국이 그렇게 좋더라고 여러 아줌마들이 말해줬습니다. 차분하고 단정한 정양늪과 닮은 음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합천 오셔서 전날 밤 술을 마셨다면 일부러 무슨 해장국 잘하는 식당 따로 찾을 필요 없이 여기 황강식당에 가면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하다 보면 쉽게 느끼는 점인데요, 이처럼 지역에 맛난 음식 먹어봐야지 작정하지 않고 편하게 들러 맛나게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오히려 귀한 편입니다.  


4. 쪄서 나온 살점이 쫄깃하고 부드러운 북어마을


이어서 이날 점심은 북어찜으로 먹었는데요, 합천댐 둘레에는 북어 또는 황태를 요리해 파는 음식점이 꽤 여럿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이랬습니다.(물론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합천댐이 생기고 나서 일대가 단체 손님이 많이 오는 관광지가 됐고 그래서 음식점도 여럿 생겨나게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고기·소고기 음식점은 어디나 다 있기에 식상한 편입니다. 그렇다고 합천댐에서 나는 붕어·잉어 요리는 사람에 따라 싫어하고 좋아하고가 뚜렷하기 나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두루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북어나 황태를 재료로 골라잡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잘 마른 상태니까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어쨌거나 이렇게 찾아간 북어마을은 합천댐 물가 바로 옆에 있는 북어찜만 하는 일품(一品) 음식점이었습니다. 


블로거 장복산 사진.블로거 장복산 사진.


먼저 쪄서 나온 북어살이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 좋았습니다. 함께 나온 두부(국산 콩으로 만들었는지 여부 확인은 못했습니다)도 젓가락을 댔을 때 탄력이 느껴지면서도 입에 들어가서는 부드러웠습니다. 그리고 다른 반찬들은 소박하고 간결하게 차려져 있어 북어찜에 집중하고 있음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반찬들은 아주 간결하게 차려 내놓았습니다.


음식간은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았습니다. 버무려 놓은 고춧가루도 잘못하면 이리저리 엉겨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젓가락으로 훑어도 얼마 붙어 나오지 않을 만큼 괜찮았습니다. 밥은 씹는 느낌도 좋았고 맛도 괜찮았는데요, 찹쌀을 조금 섞어서 지은 것이었습니다. 


합천으로 여행가서 해인사(가야·야로면)나 영암사지(가회·삼가면) 말고 합천읍내 중심으로 머물 경우라면 적어도 한두 끼는 이 네 군데 맛집에서 먹으면 정말 안성맞춤이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고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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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에서 먹은 꽈배기 통삼겹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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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고기류는 뭘까요? 아마도 치킨이겠죠. 그 다음으로는 단연 삼겹살일 겁니다.


도시의 술집은 물론이고 요즘 같은 휴가철 피서지에서도 온통 삼겹살 굽는 냄새가 요동을 칩니다. 그러나 삼겹살이 흔해진 만큼 맛있는 삼겹살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최근 경남 합천에 팸투어를 갔다가 모처럼 정말 맛있는 삼겹살을 먹었습니다. 사회적 기업 해딴에(대표 김훤주)가 합천군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블로그 팸투어 중 들렀던 합천읍에 있는 부자돼지라는 식당의 삼겹살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꽈배기 통삼겹'이라는 이름이었는데요. 먹어보기 전에는 왜 '꽈배기'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없었죠.



150g 1인분에 8000원이면 가격도 비교적 저렴한 편입니다. 그런데 식탁에 나온 고기를 보니 비주얼이 보통이 아닙니다.



껍데기도 붙어있는 고기에는 말 그대로 '삼겹'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두께도 만만찮죠. 그래서 통삼겹입니다.


고기는 주인장이 직접 구워줍니다. 그래서 손님이 어설프게 굽다 태워먹을 염려가 없습니다.



잠시 고기굽는 모습 영상으로 볼까요?



이렇게 구운 고기를 손님은 아래처럼 가지런히 정렬했다가 하나씩 먹으면 됩니다.


완성된 '꽈배기 통삼겹'의 모습입니다. 어떤가요? 마치 '꿀꽈배기'라는 과자가 연상되지 않나요? 신기, 신통합니다. 미리 칼집을 준 통삼겹을 이렇게 구우니 꽈배기 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과자와 달리 여기에 육즙이 적당히 배여있고, 고기가 딱딱하거나 질기지도 않고 부드러워 제 입맛에도 딱 맞더군요.


고기를 다 먹고 나면 된장에 공기밥을 먹을 수도 있지만, 저는 국수를 먹었습니다. 아래 사진과 같이 국수도 깔끔하게 맛있습니다. 육수가 제대로입니다.



영업시간은 오후 9시 30분입니다. 저녁에 먹으려면 좀 일찍 가셔야 느긋하게 드실 수 있습니다. 오후에는 2시부터 5시까지 준비시간이라 손님을 받지 않는군요.



합천에는 황강 레포츠 공원도 있고, 합천호와 합천댐도 있어 물놀이 피서에 제격인 지역입니다. 특히 황강은 아이들과 함께 가면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기기 좋습니다.


합천에 가시면 꽈배기 통삼겹도 한 번쯤 먹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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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풍성함이 함께하는 화순~담양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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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이 7월에는 전남 화순과 담양을 찾았습니다. 


전남 지역은 대체로 들판이 너르고 산지가 적은 편이지만 화순만큼은 유일하게 석탄탄광이 있을 정도로 산악지대입니다. 일행은 그런 화순의 산골짜기에 있는 운주사터를 먼저 찾았습니다. 


이어서 찾은 같은 전남의 담양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긴 영산강이 흘러가는 언저리에 아름답고 풍요로운 숲자리 관방제림을 품고 있습니다. 


7월 1일 아침 창원을 떠난 일행은 화순의 신비로운 절간 자리를 먼저 찾았습니다. 가서 보면 갖은 불상과 불탑을 비롯해 유적이 번듯하게 남아 있는데도 역사 기록에는 운주사는커녕 그 언저리를 스치는 이야기조차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왼편으로 불균형한 불탑이 우뚝하고 오른편 이래로 못생긴 불상이 보입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유적들은 여기 아닌 다른 데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불상은 대부분 얼굴을 비롯한 몸통은 균형 잡힌 비례를 갖추고 불꽃이나 빛을 뜻하는 무늬를 새긴 배경이 있으며 연꽃을 새겨넣은 앉음자리까지 갖추기 마련이지만 여기 불상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좌대(座臺)는 아예 없거나 제대로 꾸미지 않았고요 광배(光背) 또한 마찬가지여서 처음 만들 때부터 그런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석탑이라 하면 대체로 3층·5층 안정된 규모와 균형 잡힌 몸매가 떠오르지만 운주사터 불탑들은 정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와불이 벌떡 일떠서면 세상이 뒤집어질까요?


또 구름·천왕·연꽃 등으로 장식돼 있기 십상인 다른 불탑들과 달리 여기 것 몸통들에는 불교와 무관한 빗금무늬가 무성합니다. 한때는 천불천탑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유물들이 넘쳐나는 운주사지만 그런 유물에는 전통이나 정형 등 단서로 삼을 만한 거리가 제대로 내장돼 있지 않습니다. 


관련 기록 또한 없으니 이른바 육하원칙에서 어디서(운주사터에서), 무엇을(천불천탑을) 두 가지를 뺀 나머지(누가, 왜, 언제, 어떻게)가 완전하게 백지 상태로 남겨진 절터이지요. 사람들 상상력은 이런 국면에서 더욱 커지고 발랄해지는 모양입니다. 


운주사 여기 땅바닥에 누우신 와불이 벌떡 일어나면 가진 이들 판치는 세상이 뒤집어진다든지, 56억7000만 년 지나야 도래할 미륵세상의 현신을 빌며 이 땅 가난한 백성들이 만들었다든지, 백제 망한 뒤 유민(流民)들이 옛 땅 회복과 나라 재건을 기원하며 세웠다든지……. 


이번 생태·역사기행 일행도 궁금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언제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 천불천탑을 조성했을까? 도대체 여기 있는 부처들은 과연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롭게 솟은 이 돌탑을 옛사람들은 무슨 바람으로 만들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는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더 부처들 돌탑들 둘러싼 시원하고 예사롭지 않은 풍경에 금세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이 더 크다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언덕배기에 올라 둘레 경치를 눈에 담고 마주오는 바람을 받으며 소리를 내지릅니다. 나이 지긋한 이들은 다른 데는 오르지도 않은 채 "운주사 왔으면 와불 친견은 해야지!" 하면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맞은편 야트막한 산마루에까지 오른 이들도 와불 거꾸로 누워 있는 자리까지 다시 오르느라 발길을 서둘렀습니다. 


와불 자리에 올랐더니 둘러싼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만든 그늘이 좋았고 그런 사이로 보이지 않는 바람이 빠르게 휘돌아나갔습니다. 옛날 와불을 조성하던 석공들도 이런 바람을 쐬었으리라 싶네요. 


와불.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운주사 천불천탑은 화순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일대는 흙으로 된 토산이 대부분인 전남 다른 지역과 다르게 산 자체가 통째로 석산입니다. 말하자면 탑·상을 만드는 재료를 가까이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화산활동으로 생긴 화성암이어서 무른 편입니다. 이런 점도 탑상의 손쉬운 조성에 보탬이 됐을 것 같습니다. 화강암이면 깎고 쪼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솜씨도 좋아야 했겠지만, 무른 화성암이라 솜씨가 덜한 사람도 빠른 시간에 이렇게 넉넉하게 많이 만들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가까운 밥집에서 청국장 점심을 바삐 먹고는 이웃 고을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을 찾았습니다. 아스팔트 바닥을 들어내고 사람이 걸어서만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거리입니다. 자전거도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숲을 제대로 가꾸면 그 숲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이 베풀어 주는지 알려주는 본보기라 하겠습니다. 



1970년대, 여기는 국도였고 사람들은 이 가로를 따라 메타세쿼이아를 심었습니다. 30년 뒤 울창해지면 거기서 무엇이 생기리라 기대 따위는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숲이 2000년대 들어 아름다움과 즐거움으로 알려지면서 빼어난 관광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1.8km 정도를 흙길로 만들고 굴다리 갤러리와 여기저기 긴의자 따위를 덧입혀 입장료 2000원이 아깝지 않도록 만든 것입니다. 메타세쿼이아길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관방제림으로 이어집니다. 조선 말기 담양 고을 수령들 지도 아래 영산강 제방 위에다 나무들을 심어 이룩한 숲이라 합니다. 


모두 잎넓은나무들이라 잎이 가느다란 메타세쿼이아보다 그늘이 훨씬 짙습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바깥은 눈부시도록 환하지만 안쪽 그늘은 어둑어둑할 정도로 아늑합니다. 메타세쿼이아길과 더불어 '잘 키운 숲 하나 열 공장 안 부럽다'는 사실을 아주 잘 느끼게 해줍니다. 



관방제림이 메타세쿼이아길과 모두 같지는 않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메타세쿼이아길은 자전거가 다닐 수 없도록 돼 있지만 관방제림에서는 자전거나 수레가 다닐 수 있습니다. 2인용 자전거도 탈 수 있고 4인용 자전거나 수레도 빌려줍니다. 


짙은 그늘과 함께하는 관방제림의 일상.


사람들은 둑길을 따라 이런 것들을 타고 즐겁게 노닙니다. 그러니까 메타세쿼이아길보다 좀더 활동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관방제림에는 지역주민들의 일상이 들어 있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메타세쿼이아길과 달리 관방제림은 옆에 마을도 있고 주민들 삶도 그대로 나와 앉아 있습니다. 


관광객을 위해 만든 별난 의자도 있지만 동네 사람들이 예로부터 써 왔던 평상도 있습니다. 그늘 아래에는 걸어다니거나 2인용·4인용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관광객도 있습니다. 더불어 부채 하나 들고 뒷짐 진 채 길을 가는 동네 할배도 있습니다. 


주민들 타고 나온 여러 가지 교통수단들이 눈길을 끕니다.


또 오토바이 타고 가다 평상에다 고단한 몸을 부린 젊은 아재도 있습니다. 이처럼 관광객들 웃음소리도 넘치지만 동네 주민들 바둑돌·장기알 두드리는 소리나 고스톱 화투짝 던지는 소리도 울리는 데가 관방제림입니다. 


사람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섞이거나 말거나 옆으로 영산강에서는 게으른 물이 멈춰 선 듯이 천천히 흐릅니다……. 또 건너편 국수거리에는 국수 한 그릇 달걀 한 알 막걸리 한 사발에 즐거워진 웃음들이 흐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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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 불꽃무늬토기가 신기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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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으로 날씨가 고르지 못한 7월 역사탐방은 가까운 실내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지난달 18일 회원큰별·안영·정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먼저 간 곳은 주남저수지가 있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입니다.(이동·샘바위·자은 지역아동센터는 함안박물관 먼저 탐방) 


다른 공립 박물관·전시관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어느 곳보다 아이들이 열광하는 곳입니다. 여기 전시돼 있는 물건들은 공립 박물관 유물들보다 좀 더 친숙합니다. 


할머니·할아버지집에서 한 번은 본 듯한 것들은 아이들의 눈길과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습니다. 이제는 시골에 가도 다들 집을 신식으로 뜯어고쳐서 옛 물건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퍽 높은 편입니다. 


풍금을 만져보는 아이.


풍금을 두고 피아노라 하는 아이에게 그게 아니라 풍금이라 하자 '풍금'이라는 낱말을 굉장히 낯설어합니다. ‘피아노’라는 영어 발음보다 '풍금'이라는 우리말이 주는 정겨움도 이제는 시절을 따라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재봉틀을 돌려보고 컴퓨터 자판기 같은 타자기를 재미있게 눌러보는 친구들의 표정이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모양들입니다. 인두를 두고 프라이팬 같다는 친구도 있고, 꽃이 꽂혀 있는 요강을 보며 꽃병이라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박정희·육영수 모습이 담겨 있는 달력 밑에 적힌 '새정수회'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물었더니 "'바를 정(正)'에다 '지킬 수(守)'를 합해 바른 것을 지키자는 뜻"이라고 기막히게 해석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다들 전통놀이를 한바탕 유쾌하게 즐긴 분위기입니다. 


보전도 발전만큼 중요합니다. 오늘은 내일의 역사가 됩니다.


점심을 먹으러 옮겨가는 버스 안에서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전시관을 만드신 분이 박정희 대통령을 무척 좋아하시는가 봐요." 그렇게 물을 법도 합니다. 전시관 양해광 관장은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했으며 박정희 열혈 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전시관은 박정희 사진과 그때 그 시절 얘기들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국면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아온 양 관장의 열정과 물건들의 소중함에 비긴다면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 해야 하지 싶습니다. 


점심은 소고기로 만든 뚝배기 불고기로 먹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정말 배터지게 먹었습니다. 역사탐방을 다니다 보면 움직이는 장소가 한정적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이들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준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늘 좋은 것, 맛있는 것만 먹고 살 수야 있겠느냐만은 그래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니 어찌나 마음이 가볍고 즐겁던지요……. 역시 잘 먹고 잘 노는 게 최고랍니다. 


미션 수행 중입니다.마찬가지. 미션 수행 중.


마지막으로는 함안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함안박물관은 지금 이 때가 가장 좋습니다. 아라홍련이 그윽한 자태로 한창 피어나는 때입니다. 여느 연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빛깔이나 용모가 한결 기품이 높습니다. 


이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없는 흥그러움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700년 전 고려시대 씨앗에서 피어난 꽃인 것입니다. 아이들이야 그런 빛깔 구분보다는 700년 전 연꽃이라는 사실에 더 신기해하지만은요. 



함안박물관은 앞쪽 너른 광장이 참 밝고 화사합니다. 광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노라면 마치 한 폭 그림 같습니다. 


여기 찾아온 아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불꽃무늬토기입니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불꽃무늬토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보기 힘든 그런 무늬이면서도 아주 단순한 품이 현대적인 감각과도 통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함안박물관 하면 불꽃무늬토기! 그에 더해 고려시대 씨앗에서 태어난 아라홍련! 이 둘만 알아도 아이들은 정말 유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부담 없음을 아이들은 좋아합니다. 너무 많이 담으려 하면 흘러넘쳐서 담겨 있던 것마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아이들 마음에 한 가지씩만 분명하게 새겨진다면 정말 훌륭한 역사탐방이 아닐까요.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가 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토요동구밖교실 역사탐방'은 두산중공업이 후원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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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숲길, 충익사 나무, 의령천 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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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날씨가 절묘했습니다. 일기예보는 비가 쏟아진다느니 태풍이 불어닥친다느니 했지만 아침에는 살짝 흐렸다가 낮이 되면서 좀더 맑아졌습니다. 바깥에서 걷고 뛰고 노닐기 딱 좋은 날씨였던 것입니다. 


먼저 아이들과 더불어 잣나무숲길을 걸었습니다. 의령군 가례면 쪽에서 의령읍 쪽으로 의령천 물길을 따라 만들어져 있는 산책로입니다. 한가운데 우레탄이 깔려 있는데 5~6m 높이 잣나무가 양쪽에 심겨 있는 덕분에 햇볕을 받지 않으면서 걸을 수 있는 푹신한 길입니다.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천변 풍경도 나쁘지 않았지만 길 그 자체로만 봐도 썩 훌륭했습니다. 길섶에 나 있는 달개비·개망초·민들레 같은 풀들은 잣나무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회원한솔·샘동네·옹달샘·느티나무·어울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아이들은 뜀박질을 하기도 하고 가다가 멈춰서 길섶 풀들에 눈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 얼굴에는 웃음이 한 뼘 달려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 손을 맞잡은 채 걸어가는 지역아동센터 한 선생님도 그늘이 사뭇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참 그럴듯하네요. 도대체 이런 길을 어떻게 찾아냈어요?" 



500m 남짓 이어지던 잣나무숲길이 끝나는 자리에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 구분 없이 우르르 몰려갑니다. 뛰어가면서 쿵쾅쿵쾅 내딛는 걸음에 가득 힘을 실었습니다. 


구름다리가 조금이라도 더 출렁거리도록 만들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두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굴러대는 아이들 덕분에 구름다리가 또 한 번 제대로 출렁댑니다. 


이렇게 웃음과 탄성이 터지는 옆에는 조심조심 발걸음도 있습니다. 살짝 무서운 기분이 드는 바람에 선생님 손을 잡은 조막손에 힘이 좀더 들어가기도 하지만, 얼굴에 웃음기는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구름다리에서 내려서면 바로 충익사입니다. 충익사가 어떤 데냐 하는 설명은 타고오는 버스 안에서 마쳤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 최초 승전의 주인공 홍의장군 곽재우와 그 부하 장수들까지 열일곱 영령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충익사 뜰은 나무가 참 좋습니다. 1978년 12월 22일 치른 충익사 준공식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도 참석했습니다. 그이가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때 그이가 기념으로 심은 나무 선주목(누워 있지 않고 서 있는 주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의령에서 가장 오래 된 모과나무입니다. 멋지게 솟아 있습니다.


이렇게 대통령까지 참석한 때문인지 충익사 뜰을 조성할 때 의령에서 좋고 오래된 나무들을 많이 가져다 심었습니다. 감나무·모과나무·배롱나무·주목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밖에 대나무도 그럴듯한 풍경을 안겨줍니다. 


간지럼 잘 타게 생긴 배롱나무도 멋집니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미션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를 헤집고 다니면서 아이들은 미션 수행을 했습니다. 충익사 뜨락 이런저런 나무 이름을 알아보고 그 특성이나 성질도 함께 새겨볼 수 있도록 하는 문제를 아이와 자원봉사 선생님이 함께 풀어보는 것입니다. 



이윽고 의령 읍내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곧바로 의령천 물놀이장을 찾았습니다. 물이 깊이도 적당하고 넓이도 충분한 데다 위험해 보이는 구석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지역아동센터 선생님 말씀을 따라 가볍게 준비운동을 한 다음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웃고 고함지르는 소리도 끊이지 않고 첨벙 텀벙 물소리도 제법 났습니다. 아이들과 물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물은 깨끗합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물은 맑습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물은 쉽사리 더러워집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물과 썩 잘 어울리는 사이입니다. 지금처럼 더운 여름이면 더욱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한 아이가 물에서 바깥으로 걸어나오는데 추운 때문인지 입술이 파랗다 못해 거무죽죽합니다. 그러면 질릴만도 하련만 그늘을 벗어나 몸을 데우더니 곧바로 다시 물에 들어갑니다. 


이를 지켜보던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 선생님 한 명이 "참 좋은 데를 골랐네요. 지리산 골짜기 들어가도 이만한 데 없어요" 했습니다. 물론 풍경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겠고 아이들 놀기가 그렇다는 얘기이겠지요. 



의령천 좋은 물가에서 생태 공부도 좀 하면서 지역아동센터 즐거운 아이들이 한나절 잘 놀고 돌아왔습니다.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가 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진행하는 토요동구밖교실 생태체험은 두산중공업이 지원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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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단체가 이 영화에 침묵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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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과서는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나치의 유태인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가르친다. 적어도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랬다.


기자가 된 후 우리나라에도 그런 세계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에 버금가는 국가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취재하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그런 엄청난 사건이 반세기가 넘는 동안 철저히 은폐되고 유족 또한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는 사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쓰는 ‘골로 간다’(골짜기에서 총살 암매장) ‘물 먹인다’(바다에서 수장)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배신감이란….


1999~2000년 같은 마음을 가진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에 나섰고, 마침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됐다. 그때 우리의 역할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짧은 피해자 신고기간, 턱없이 부족한 홍보와 지방자치단체의 비협조 등으로 실제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극히 일부에 그쳤고, 그나마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위원회도 해체되고 말았다. 추가 신고와 조사기간 연장, 연구재단 설립, 배·보상특별법 제정, 유해안치시설 건립, 위령사업 전개 등 후속과제는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언론의 관심도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레드 툼>이 나왔다. 구자환 감독이 2006년부터 10년에 걸쳐 만든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영화다. 어디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혼자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찍었다. 막판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주변사람들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보탰다. 완성해놓고 보니 개봉도 난망했다. 이 때도 시민과 피해자 유족들이 후원금 1000만 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전국 16개관 46개 스크린에서 어렵게 개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영화 같은 현실이슈가 많아서인지 언론에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관객은 2000명 정도에 그쳤다. ‘개승만’(영화 속에서 한 할머니가 이승만을 이렇게 부른다)의 만행을 고발한 영화이지만,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침묵했다.


사실 우익 쪽에서 그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전 당시 인민군이 자행한 학살도 있지만 그들은 침묵한다. 함양 육십령 고개에서 철수하던 인민군이 진주와 서부경남 우익인사와 경찰 수백 명을 집단학살했지만 자유총연맹이나 경우회가 나서 진상규명을 요구한 일은 없다. 들추면 들출수록 이승만 군경의 학살이 훨씬 더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솔직히 드라마나 액션처럼 ‘화려한 재미’는 없는 영화다. 기억조차 끔찍했던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 아직 숨이 남아 있던 사람까지 생매장했던 기억들,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의 말을 무심한 듯 들어준다. 카메라는 의령에서 마산으로, 마산에서 진주로, 밀양으로, 거제도로, 통영으로 옮겨 다니며 학살 장소와 암매장된 유골, 그리고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을 비춘다.


보통 우리는 부모를 잃고 1년 만 지나도 슬픔을 잊는다. 아버지 제사가 돌아와도 우는 경우는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영화 <레드 툼>에서는 나이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65년 전 헤어진 사람을 그리며 서럽게 운다. 빗속에서 진흙탕에 막걸리를 뿌리며 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원통하게 했을까? 이 영화는 ‘역시 팩트의 힘은 강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가 아닌 실제인물의 실제 행동과 실제 육성이서일까. 가슴이 아린다. 울컥하게 한다. 그리고 나중엔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민다.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민낯과 속살을 접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꼭 보길 권한다. 아마 23일쯤이면 모든 극장에서 상영이 끝난다. 보려면 공동체 상영을 신청하면 된다. 50명 이하라면 20만 원, 이상이라면 30만 원이면 된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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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그의 이 모습을 기록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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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沈相奵, 1959년 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다. 이후에, 진보신당을 창당하여, 노회찬 등과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이정희, 유시민 등과 통합진보당을 창당하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를 맡았으나 부정 경선 사건이 발생한 이후 통합진보당을 나와 정의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경기 고양 덕양갑에 출마하여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5년 7월 제3대 정의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위키백과 심상정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재롱떠는 모습을 보면서 오글거렸다. 과연 이래야 하는지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시작하는 <님과 함께>와 <사랑으로> 따위의 노래를 율동과 함께 불렀다.


이 사진을 기록하고 남겨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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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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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본능과 집밥 신드롬이 불편하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와 검정색 사각형 상에서 겸상을 했고, 누나와 여동생들은 둥근 도레상에서 따로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와 연결된 샛문을 오가며 음식을 날랐고, 부뚜막에서 대충 때우거나 도레상 귀퉁이에서 남보다 늦은 밥을 먹기도 했다. 그렇게 밥을 먹다가도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놓으면 벌떡 일어나 숭늉을 떠다 바쳤다. 산이나 들에서 농사일을 하다가도 저녁때가 되면 30분쯤 먼저 가서 밥을 차렸다. 새벽에 눈을 떠도 어머니는 항상 먼저 일어나 정지에서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이게 이른바 '집밥'에 대한 내 기억이다.


나처럼 어린 시절을 보낸 남자들은 '집밥' 하면 으레 엄마가 해주는 밥으로 생각한다. 그걸 모성 본능에 따른 당연한 일로 여기기도 한다.


정말로 모성애는 여성의 본능적인 감정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 사전>에서 단호하게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19세기 말까지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녀들을 유모에게 맡겨놓고는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시골의 아낙네라고 해서 아기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아기를 얇은 천에 돌돌 말아서 아기가 춥지 않도록 벽난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벽에 매달아 두곤 했다고 한다.


집밥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TV 프로그램 포스터.


엘리자베스 바댕테르 또한 <만들어진 모성>에서 모성 본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 국가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노동력이 중요하게 되자 국가가 여성에게 모성을 강요하며 그것을 본능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장남인 나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평생 시어머니와 남편,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다"고. 나도 어머니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함께 울었다.


요즘 나는 집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을 봐와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고 상을 차리고, 먹은 후에도 남은 반찬을 담아 넣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쓰레기를 처리하는 과정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직접 사와서 해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 외엔 '집에서 먹자'는 얘길 절대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세간의 집밥 신드롬이 참 불편하다. 집밥을 해먹여야 좋은 엄마 혹은 좋은 부모라는 인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다.


베르베르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아이들이 좀 컸다 싶으면 어머니가 자기들을 제대로 돌봐 주지 않았다며 원망하기 일쑤"이며 "심지어는 정신분석가를 찾아가서 어머니에 대한 자기들의 유감과 원망을 마구 쏟아내기까지 한다"고 꼬집는다.


아이들아. 그냥 대충 먹어라. 특히 맞벌이 부모라면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집밥을 잘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란다. 엄마도 자기 삶이 있고, 아빠도 자기 삶이 있단다. 엄마 아빠가 행복해야 널 더 사랑해줄 수도 있지 않겠니?


그리고 부모들이여. 집밥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삶의 행복부터 먼저 찾아라. 자식에게 출세만 강요하지 말고, 부자가 아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가르치자. 내 자식만 챙기지 말고, 날 낳아 길러준 부모나, 나보다 힘든 이웃도 좀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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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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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6화. 대한민국 마당발 이철규와 조현오


2005년 1월 27일 경찰청장 허준영은 조현오를 경무관으로 승진시켜 경찰청 외사관리관으로 발령 낸다. 외사관리관실은 1과에서 3과까지 있다. 외사1과는 외사기획 국제협력, 2과는 외사정보, 3과는 외사수사로 나뉜다. 허준영은 2월 3일 총경 인사를 단행하며 외사1과장 자리를 잠시 비워두라고 지시한다. 그 자리는 2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와 법정투쟁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오는 총경 몫이라고 했다. 그 총경이 이철규였다.


강원도 출신인 이철규는 1981년 간부 후보 29기 출신으로 입학, 졸업을 수석으로 장식한 인재였다. 하지만 경찰 공직 생활은 자괴감과 함께 출발했다. 나이 든 경찰간부들이 젊은 검사를 모시는 모습을 접했고, 검찰은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든 요구를 하며 경찰을 통제했다. 1997년 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설때 이철규는 혜화경찰서 정보과장이었다.


경정 신분인 이철규는 정권인수위원회에 파견된다. 당시 김대중이 내세운 공약 중에는 '경찰 수사 독자성 보장'도 있었다. 경찰청이 ‘경찰수사의 독자성 보장’을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는 걸 검찰은 막아야했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추진하자, 얼마 후 경찰청 정보국장인 박희원과 특수수사과장인 박정원이 검찰에 구속된다. 경찰은 '수사권독립 요구에 대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으나 추진동력은 이내 소멸됐다.


이철규는 1998년 총경으로 승진했고,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안산경찰서장에서 자리를 옮겨 분당경찰서 서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즈음 참여정부가 법무부 장관으로 강금실을 임명하자 검찰은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2003년 3월 9일 평검사들은 대통령 노무현과 공개토론에서 맞장을 떴다. 그리고 검찰총장 김각영은 그날 대통령 비난 성명을 내고 사퇴한다.


3월 17일 검찰은 '권력형 비리 전담 수사기구'를 신설을 발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0일 분당경찰서장 이철규가 수뢰혐의로 구속된다. 2001년 안산서장 때 공사 비리 관련 진정이 들어온 사건을 2000만 원을 받고 무마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뇌물을 주었다는 심 모씨 진술 말고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당시 서울대병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찰서장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고 2번 졸도하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재발하였다'.



이처럼 검찰에서 허위자백만 받아내면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참여정부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통해 형사소송법 312조를 손보려 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형사소송법 개정은 흐지부지됐다.


이철규는 2005년 5월 10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사흘 뒤 경찰청 외사1과장으로 복귀한다. 당시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몇 가지 과제를 맡겼다. 그 중에 하나가 외사관리관실을 외사국으로 승격시키고 20명인 해외 주재관을 50명으로 증원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주재관은 계급이 어느 정도 있어야했다. 경찰 계급은 전 세계가 비슷하다. 계급에 대한 존중도 마찬가지다. 직급이 있는 경찰이 외국으로 나가야 그 나라에서 직급이 있는 경찰을 만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가 김선일 씨를 살해하면서 해외 교민과 여행객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외국민보호'처럼 문서에나 채울 논리가 아니다. 바로 결정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부분이다. 외사국 증원 1차 관문은 ‘외교부 영사국’이었다. 외교부가 필요성을 동의해야 행정자치부, 기획재정부로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행정자치부는 공무원 정원을 결정하며 기획재정부는 예산을 편성한다. 물론 행정자치부와 기획재정부 역시 만만찮다. 두 부처 모두 습관적인 칼질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철규 과장은 조현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훗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철규처럼 못한다"고 회상했다. 조현오는 이철규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마당발'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철규를 곁에서 지켜본 직원들은 그가 중앙부처를 드나들면서 관련 공무원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 공무원 아버지가 경주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이철규는 그 지역 서장에게 따로 부탁했다. 그러면 서장은 공무원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이 경찰을 위해 애써 주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또  이철규는 또 부모님이 일찍 사망해 형에게 키워 졌다는 기재부 공무원 얘기도 듣는다. 마침 그 형은 경찰공무원이고, 기재부 공무원은 전경 출신이었다. 이철규는 기재부 담당공무원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부대장 신상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부대장과 함께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조현오는 허준영이 이철규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철규는 상관이 원하는 부분을 해결 할 줄 알았다. 허준영은 경찰 생활을 하면서 외교관 출신이 느끼는 갈증이 있었다. 어느 날 이철규가 허준영에게 말했다.


"앨빈 토플러가 한국에 왔는데 경찰청으로 방문하도록 할 테니 한 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경찰청에 외빈이 오는 일은 많지가 않다. 리언 러포트 사령관이 허준영을 용산 미국기지에 공식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로 경찰청이 리언 러포트 사령관을 초대한 적은 있었다. 조현오는 리언 러포트 사령관 앞에서 PPT 화면을 가리키며 경찰업무를 영어로 브리핑 했다. 허준영은 조현오에게 앨빈 토플러 부부가 경찰청에 오니 배석하라고 지시한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8일 동안 한국 방문 일정을 빽빽하게 짜놓았다. 하지만, 이철규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앨빈 토플러가 출국 직전 경찰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변경시켰다.



2005년 9월 중국 북경에서 허준영과 중국 공안부장 저우융캉이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3일 앞두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회담일정을 변경했다. 공안부장이 바쁘니 공안부 상무부부장을 만나라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일정 탓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기관에서 중국 측에 한국 경찰청장은 차관급이라 중국의 부총리급인 공안부장이 직접 대화 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훼방을 놓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국은 경찰청이 행정자치부 소속이다. 법무부 장관이 지휘하는 검찰총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지만, 경찰청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허준영과 조현오는 중국에 구걸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면담은 이뤄져야 했다. 주한중국대사를 통해 중국 공안에 항의를 전하도록 했고 비공식 라인으로 등소평 장남인 덩푸팡과 접촉했다. 이철규는 덩푸팡을 잘 아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허준영은 한국 경찰청장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공안부장과 회담하고 공안부 주관으로 조어대에서 만찬을 한다. 조어대는 금나라 장종 황제가 낚시를 즐겼다는 곳으로 지금은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외국 국빈 공식 연회장이다. 허준영은 또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터폴 국제회의에서 대표 발표를 한다. 그때 허준영을 수행한 조현오는 2010년 8월 경찰청장이 됐다.


그동안 이철규는 경무관으로 승진해 강원도 차장 등을 지냈고, 2010년 초 치안감으로 승진해 충북청장으로 있었다.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열정과 여야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국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경찰의 수사개시, 진행권을 보장한 형사소송법이 국회에서 통과 된다.


2011년 초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을 무렵 부산저축은행을 비롯한 여러 저축은행들이 한꺼번에 영업정지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심사 과정 없이 부동산 등 위험 부담이 큰 사업에 무분별한 대출을 해주다가 부실채권을 떠안으면서 사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관 감독이 소홀해 이 같은 부실을 키웠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조현오는 정보국장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국회는 저축은행 사태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저축은행 국정조사특위'를 구성했다. 국세청, 감사원 등 기관장들이 불려나왔다. 경찰도 예외일 수 없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다그치면 기관장은 저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현오는 오히려 검찰 수사지휘를 문제 삼았다.


"2005년 10월 부산저축은행에서 발생한 575억 원 규모 부당 대출을 수사했는데 경찰은 관련자 8명을 전원 구속 의견으로 보냈지만 검찰이 1명만 구속의견으로 송치하도록 했다. 또 2007년 12월에도 검찰은 보해저축은행 부당대출 건을 불기소하라고 수사지휘를 했다."


저축은행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2011년 9월 18일 제일, 프라임, 에이스, 토마토, 파랑새 등 저축은행들이 잇달아 영업정지를 당한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검찰은 9월 22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을 꾸린다. 그리고 10월 14일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을 구속 기소한다.


유동천은 강원도 출신으로 이철규 고향 중, 고교 선배였다. 검찰은 파랑새저축은행 대표, 토마토저축은행 대주주, 에이스은행 차주, 프라임 저축은행 대표 등을 잇달아 잡아들인다. 이철규는 11월 11일 치안정감인 경기지방경찰청장으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2월 말, 검찰은 유동천에게 4000만 원을 받고 경찰수사를 무마한 혐의로 이철규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한다. 이철규는 3월 1일 구속됐다. 2012년 10월 19일 1심 법원은 이철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검찰은 바로 항소했다. 이철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초, 검찰청 출입기자에게 연락을 받는다.


“이철규 청장님 혹시 (강원도) 원주별장에 가본 적 있습니까?”


기자는 검찰청 기자실에 검사가 들어와 먼저 말을 꺼냈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별장 성접대 사건은 2013년 1월에 시작됐다. 김학의 당시 법무부차관이 건설업자 윤중천 소유인 원주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는데 이를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는 첩보를 경찰이 입수한 것이다. 바로 조현오가 만든 경찰청 범죄정보과였다.


범죄정보과가 수집한 정보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특수수사과, 각 지방경찰청 수사과 등에 이첩돼 내사 또는 수사로 이어지게 된다. 김광준 검사 비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검찰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은 3월 21일 사퇴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카카오톡과 트위터에 성접대 리스트가 나돌았다. 김학의 전 법무차관을 비롯해 실명 10명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에는 대한민국 마당발인 이철규도 모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건설업자 윤중천이었다.


리스트 10명 중 4명은 모두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경찰 전직 수뇌부급들이었다. 네티즌들은 성접대 명단 중 다수를 차지하는 경찰을 비난했다. 이철규처럼 강원지방경찰청 차장을 지냈던 허준영은 “사실이면 할복자살하겠다”고 받아쳤다.


이철규는 이를 유포한 네티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정보국장 출신인 이철규가 보기에 이러한 명단은 네티즌이 유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경찰에 돌려서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것으로 판단됐다. 경찰은 리스트를 최초 생산한 사람은 못 찾아냈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검찰은 성접대 동영상 속 인물을 특정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동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며 김학의 등을 무혐의 처분한다. 얼마 뒤에 원주별장 성접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나서서 성폭력 혐의로 김학의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김학의를 다시 무혐의 처분한다.

 

2013년 10월 31일 대법원은 제일저축은행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 이철규에 대해 무죄를 확정한다.하지만 이 뉴스는 ‘원주별장 성 접대 리스트’에 묻힌다. 법원은 제일저축은행 회장인 유동천이 한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심스러운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2008년 서울 청담동 고급 한정식집에서 조현오, 이철규와 식사를 했다는 부분이 있다. 2008년 조현오는 부산지방경찰청장이었는데, 통상 자기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현오는 이철규에게 2008년 서울에 온 적이 없다는 확인서를 하나 써준다.



하지만 조현오는 유동천보다 더한 ‘대한민국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조현오는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해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던 임경묵에게 그 내용을 들었다고 지목했다. 하지만 임경묵은 재판에 나와서 조현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경묵이 한 진술을 받아들여 조현오가 ‘차명계좌 발언’을 지어낸 것으로 판단했다. 조현오는 2013년 9월 26일 서울구치소에 재구속됐다. 조현오 재판에 참석했던 전직 형사과장은 판결에 유감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학교 다닐 때 영어단어 외우던 이야기를 하겠어요? 시국 이야기만 합니다. 그거 해야 재미있고. 임경묵 씨가 서울청장을 만나려면 그 이상 정보가 있어야 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현오는 지휘관 시절 관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부산청장 시절에는 서울로 온 적이 없었고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에도 서울 땅을 밟은 적이 없다고 했다.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주변 사람들은 차기 경찰청장이 되려면 서울에서 권력층을 만나야 한다며 조현오에게 서울 방문을 권했지만 원칙을 지켰다고 했다. 조현오가 서울지방청장이 돼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임경묵이다.



자기 정보력을 화려한 언변으로 펼쳐놓는 사람을 늘 봤다면 허풍과 과장을 솎아낼 감각이 있을 테지만 초보자 조현오는 마냥 귀가 솔깃했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을 모조리 기억에 새기고자 했다. 이와 비슷한 감탄은 1998년 경남지방청 경비과장 시절에도 있었다.


(다음17화- 경찰청장 지휘권)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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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자세히 알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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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파워 9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습니다.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써나가야 할 책이었습니다. 제목은 <Never Ending Story>, '아름다운 기록, 나의 엔딩노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프롤로그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날은 곧 죽음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많은 세상사 가운데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해마다 겨우살이 준비는 하면서 말입니다. (…중략…) 지나온 인생을 차분히 돌아보고 남은 삶을 충실히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 도우미 역할을 '엔딩노트'가 감당할 것입니다."


책의 내용은 '다시 써 보는 이력서', '나의 보금자리들', '나의 가족', '나만의 연표', '나의 좌우명', '나를 움직인 한마디', '내 삶을 이끈 격언', '바로 그 책', '바로 그 영화', '바로 그 사람', '바로 그 사건', '내 생애 최고의 장면 Top10', '남은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들', '나의 건강 상태-앓았거나 치료 중인 질병', '나의 치료와 개호는 이렇게', '미리 써두는 장례 의향서', '내 부음을 알릴 곳', '미리 써 두는 유언장', '나눔과 부탁', '나의 재산 목록', '가족과 친구에게 남기는 편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엔딩노트.


그렇잖아도 저는 요즘 들어 제 자신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굳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나를 알아야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고, 내 부족함을 메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를 설립한 고 구본형은 자신의 직업을 '조직과 사람들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가장 자기다운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홍승완,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의 자기분석 방법)


이번호 경제인으로 소개되는 박병훈 개집컴퍼니 대표도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고민을 하다 보니 정말 많은 것을 알게 되더라고요. 뭘 해야 할지,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뭔지 이런 고민을 정말 깊게 했고 그 과정 덕분에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는 직장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도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뭘 좋아하고, 뭘 해야 하지'라는 고민은 고난도 문제이기 때문에 기초부터, 좋아하는 색깔, 음식, 음악 등을 먼저 목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거제 외포초등학교 김용규 교장또한 자신의 고향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자신을 찾은 분이었습니다. 인터뷰어인 기자는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장점을 먼저 찾고, 다음으로 내 집의 장점을 찾고, 내 고향의 장점을 찾아간 사람이었다."


월간 피플파워 9월호 표지.


이처럼 저희 <피플파워>와 인터뷰를 통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유진종 사천 우리수산 대표는 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어렵게 자수성가한 분이더군요. 그런 만큼 그의 나눔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졌습니다.


예순이 다가오는 나이에 역사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교도소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노정 선생, 고 제정구 의원의 친형으로 동생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 살아왔다는 제정호 재경 고성군 향우회장, 탄광 경비원의 딸로 자라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을 늦게나마 살리게 된 가수 박경하,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노래를 불렀고 지금은 부부가 함께 '노래나무'를 심고 있는 우창수·김은희 부부의 삶도 흥미롭습니다.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의 기획은 옛 수출자유지역 한국스타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역시 삼미금속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박희근(작고) 씨를 만나 부부가 됐고, 지금은 혼자 남아 지역사회를 위해 할 일을 찾고 있는 손성란 씨를 끝으로 마무리함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월간 피플파워는 매달 3500권이 발행되어 가정독자와 경남은행 각 지점, 농협 각 지점, 각종 병원 휴게실 등에 비치되어 있으며, 구독료는 연간 5만 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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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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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7화. 조현오 경찰청장의 인사권 행사 방식


차명계좌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조현오를 향해 언론은 '공감능력'을 지적했다. 인간 감정에 대한 공감이 부족하지 않고서야 '차명계좌 발언'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조현오 주변 사람도 공감능력 부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 '외통수' 기질 덕에 역대 경찰청장 가운데 청와대를 향해 가장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했다고 한다.


조현오는 1990년 경찰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경찰청장이 청와대 수석 등 지휘계통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시받아야 하는 법적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마디 하면 통상 경찰청장을 거쳐 경찰 조직으로 하달됐다. 2010년 8월 30일 경찰청장이 된 조현오는 지휘권부터 바로잡고자 했다. 직원에게 전달되는 것은 오직 경찰청장 지시뿐이었다.


경찰청장 지휘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사권이다.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맹형규와 행안위원장이던 안경률은 인사에 일체 간섭이 없었다. 참여정부 시절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김두관도 인사에 개입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MB는 어땠을까. 조현오는 MB도 지휘권에 간섭이 없었다며 고마워했다. 조현오는 2년에 걸쳐 경찰 고위급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인사를 단행했다고 자부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2010년 치안정감(9월 7일), 치안감(12월 2일), 경무관(12월 3일) 인사를 단행하는 시점에 조현오는 여야 의원 10여 명에게 인사청탁을 받았다. 그때마다 조현오는 청탁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했고, 대부분 의원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전화를 끊었다. 경찰 고위직 인사는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인사비서관과 경찰청장이 논의한다. 민정수석은 승진자 적격 여부를 검증했다. 보통 민정수석은 검찰과 연락할 일이 많기에 검찰 출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검찰 눈 밖에 난 경찰은 승진하기 어려운 구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정수석에 맞서 경찰청장은 어떻게 인사주도권을 쥘 수 있을까. 조현오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당시 민정수석은 권재진이었다. 그는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후보자 적격 여부를 따졌는데 조현오가 이렇게 말했다.


"경찰청장 지휘권은 인사권인데 그것도 제대로 행사 못 한다면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조현오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인사를 했다. 이때 인사에서 나타난 특징을 보자. 조현오는 2010년 인사를 시작으로 경무관 자리는 서울총경 몫이라는 관행을 바꾼다. 이 같은 관행이 생긴 배경에는 '서울 치안이 곧 대한민국 치안'이라는 서울 중심 사고가 있다.


하지만 부산과 경기에서 지휘관 생활을 한 조현오는 치안 활동이 공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2010년에는 부산총경과 광주총경, 2011년에는 경기도에서 오래 근무한 총경이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그들은 조현오가 지방청장이던 시절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낼 만큼 업무역량이 탁월했다. 그러나 경무관 경쟁에 밀린 사람들에게는 조현오가 자기 사람을 챙기는 것으로 보였을 테다. 조현오는 '자기 사람 챙긴다'는 시선을 경찰 개혁 차원에서 발탁 인사였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들 중 일부가 나중에 친해졌을 뿐이며 꽤 많은 사람이 조현오가 감옥에 있을 때 면회를 오지 않았다고 했다.


2011년 초, 민정수석인 권재진과 코리아나 호텔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권재진은 2010년 인사에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서 꽤 불쾌해 했다. 그런데 인사가 끝나고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불거진다. 권재진은 당시 "검찰이 차명계좌 사건을 수사 중인데 조 청장이 수사권 관련해서 그렇게 강하게 발언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조현오는 언성을 높여 받아쳤다고 한다. 물론 조현오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코스 요리를 모두 끝까지 먹기는 했다. 



이후 '조현오는 통제되지 않는 사람이다', '조현오는 또라이다' 같은 소문이 나돌았다. 조현오는 이런 소문을 애써 막지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경찰청장 지휘권 발휘에 도움이 됐다. 누구도 조현오를 건들지 않았다. 외부 청탁 전화도 뚝 끊겼다.


2011년 연말 두 번째 경찰 고위직 인사 내용을 보자. 이때 민정수석은 정진영이다. 당시 정진영은 승진 후보자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비롯해 각종 자료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부동산 투기', '검찰 수사 중', '위장전입' 등을 언급하며 조현오가 낸 인사안을 반대했다. 이때 조현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민정 자료 못 믿겠다."


정진영은 발끈하며 "민정수석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조현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민정수석실 자료에 직접 당한 피해자 아닌가요? 민정수석실에서 조현오가 조폭 행동대장과 의형제 맺어 유흥업소에 10억 투자하고 월 2500만 원씩 배당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잖습니까?"


조현오는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이때 '수사권의 상징'인 황운하가 경무관으로 승진한다. 또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가 눈에 띈다. 바로 2010년 승진한 경무관 김성근(56년생)이 1년 만에 치안감으로 승진한 것이다.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이런 파격 인사는 자기 사람만 확실하게 챙긴다는 여론을 만들 수밖에 없다. 물론 조현오는 김성근과 처음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조현오가 김성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경남지방경찰청 경비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는 IMF 직후 현대자동차 사태로 노사관계가 악화하면서 경남지방경찰청도 나름대로 경비대책 준비단계에 들어갔다. 경비계장이 제출한 대책안을 본 조현오는 ‘경찰에 이런 인재가 있었나’ 싶었다고 한다. 문서 작성 능력이 돋보였던 경비계장이 바로 김성근이다. 김성근은 간부후보 31기로 입문해 경찰청 정보분실팀장을 지냈다.


정보와 경비는 밀접하다. 경비작전을 세울 때 집회 참가자 경로와 방어 중점 포인트를 찍으면 그만큼 부대 배치 등 경비 단계가 수월해진다. 조현오는 경남지방경찰청에 있을 때 김성근과 저녁을 먹으며 경험담을 나누곤 했다. 김성근은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인적 네트워크를 정보국 경험을 통해 꿰고 있었다.


김성근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12월 조현오가 경비국장이 됐을 때다. 경비국에는 경비과, 경호과, 항공과가 있다. 조현오는 경호과장으로 김성근을 요청했다. 다음은 당시 경비국에 근무한 한 직원이 들려 준 얘기다.


2007년 3월 12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조현오 출연이 예정돼 있었다. 주제는 'FTA 반대시위, 또다시 과잉진압 논란'이었다. 경비과 담당직원이 작가에게 질문을 미리 받아 답변을 준비했다. 3월 12일 출연 시각이 다가오자 경비과 담당직원은 경비국장실에서 조현오 옆에 앉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김성근이 경비국장실에 들어왔다. 김성근은 라디오를 허리춤에 차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어폰이 빠지지 않도록 볼에 테이프도 붙였다. 손석희가 조현오와 연결을 예고했다.



"경찰청의 조현오 경비국장을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네, 경찰청 경비국장 조현오입니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집 떠나는 사람부터 막은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인데요."


"저희 경찰에서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 범죄의 예방과 제지라는 그 근거 규정에 따라서 불법집회 참가하려는 시위대를 출발지에서 상경 차단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몇조라고 말씀하셨지요?"


"경찰관 직무집행법 6조의 범죄의 예방과 제지에 관한 규정하고요…."


조현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김성근은 손석희가 질문을 할 때마다 답을 적은 메모를 건네려 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직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경호과장이 경비과 업무로 준비해 오는 걸 보니 제가 담당자인데 부끄럽더라고요. 자기 일도 아닌데. 경비과장도 안 하는데…."


2010년 1월 조현오가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됐을 때 김성근은 정보1과장을 맡았다. 정보1과장은 집회나 시위 예상 정보를 파악해 대비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연초부터 농민회, 노동계가 그해 11월 11일에 있을 G20 행사 저지 조짐을 보인다는 정보가 올라왔다. 서울은 2008년 촛불집회 경험이 있어 서울 도심에 집회를 막았다. 2010년 조현오는 집회를 허용하는 쪽으로 나갔다. 이렇게 통제하면 연말에 더 폭발한다며 청와대를 설득했다.


조현오는 농민계와 노동계 대표도 직접 만나 설득했다. 당시 조현오 행보에 서울청장이 할 일이냐는 논란이 분분했다고 한다. 5월 12일 서울경찰청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중보다 싼 값에 판매하는 '우리 농산물 홍보 행사'를 마련한다. 경찰악대도 행사에 동원됐다. 경찰이 농민연합과 우리 농산물 홍보 협약을 맺고 직거래 구입에 나섰다. 2014년 쌀 시장 전면 개방 문제로 서울 도심에서 농민들이 집회를 벌였다. 9월 농민 대표들이 서울에서 집회를 하기 전 서울청장 구은수와 식사 자리를 했다. 이때 농민 대표로 참석한 사람이 "나는 조현오와 같은 함안 조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2010년 8월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됐다. 경무관 승진 인사에 앞서 경찰청, 서울청 총경을 대상으로 성과에 따른 상위 30% 명단을 공개했다. 김성근도 포함돼 있었다. 경무관 인사를 단행하면서 조현오는 김성근을 서울청 정보관리부장에 배치한다. 경찰청 정보분실팀장, 서울청 정보과장 등 정보 중요 보직을 맡아 능력 검증과 더불어 조직 장악이 가능했다. 앞으로 조현오가 경찰 개혁을 비롯한 수사권 문제로 청와대를 설득해야 할 텐데 서울청 정보과장 출신이면 그런 인맥을 갖게 된다. 또 서울청도 경찰청처럼 정보분실을 두고 있다.


정보 형사는 정부기관, 사회단체, 지역별 담당 구역을 정하고 배치해 정보를 수집한다. 2012년 '안철수 사찰 논란'이 일었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이 안철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사찰논란'이라는 타이틀로 공격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전직 경찰 정보과 출신들 생각은 달랐다. 경찰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다. 즉 경찰 정보 수집은 집회나 시위 관련 정보로 한정하는 게 목적에 어울린다. 그런데 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경찰관직무집행법> 제2조(직무의 범위)에는 '치안(public safety)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를 수행한다고 나온다. 그래서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치안이나 정보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 목적과 활용도다. 경찰은 당연히 위 규정을 확장해서 해석하려 할 것이고 언론은 축소해서 볼 것이다. 경찰 정보과 출신은 경찰이 전반적인 정보 업무를 모두 취급하는 한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조현오는 2011년 김성근을 치안감으로 승진시키고 정보국장에 임명했다. 네티즌은 정권에 잘 보인 대가라고 했다.


조현오는 왜 김성근을 초고속 승진시킨 것일까. 경찰청 정보과는 보통 사무실에서 정보를 분석한다. 하지만 정보국장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정보국장은 자기가 직접 움직이기도 하지만 전국에 정보관을 동원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당시 조현오는 경찰관 시간 외 근무수당과 사건 수사비 현실화 문제에 매진했다. 사건 수사비는 범죄를 수사하고 범인을 추적하고 검거할 때까지 들어가는 경비를 말한다. 수사비가 부족해 유류비, 통신비 등을 형사 개인에게 부담하라는 것은 국민에게 삥을 뜯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조현오는 수사 중 드는 비용을 모두 해결해줘야 반듯한 경찰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해당 부서가 논리를 마련하고 실무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정보는 입장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보국 업무 범위는 포괄적이다.


당시 조현오는 '수사권 조정'이라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그러려면 정보국장은 법률 개정 등을 위해 여야 중진을 만나야 한다. 한나라당은 황우여(47년생), 민주당은 박지원(42년생)이 원내대표였다. 1961년생 경찰대 1기 출신은 한국나이로는 52세였다. 조현오는 여야 중진을 만나려면 나이가 좀 더 있는 간부후보 출신들이 낫다 판단했다. 경찰청장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여야 중진과 관계도 원만해야 했다. 조현오는 김성근에게서 이러한 자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경무관이던 김성근을 승진시켜 정보국장으로 발령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현오는 김성근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바로 2007년 경비국장 때 청와대 경호실과 맞부딪힌 일이었다.


(다음19화-경호실과 국정원)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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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전폭포 일대 관리는 누구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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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8월 10일치 1면에 나갔던 기사입니다. 그 뒤 용전마을 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니 보도된 뒤 김해시가 나서서 해당 지역 청소를 하고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문제가 됐던 현장을 둘러보니 여전히 버려진 쓰레기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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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 진례면 용전마을 위쪽 용지봉 골짜기는 물도 좋고 경치도 그럴 듯합니다. 차가운 물이 알맞게 흐르고 바위가 낭떠러지를 이뤄 폭포를 만들어 내는데다 수풀까지 어우러져 풍경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용전마을 주민들은 여름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 합니다. 


용전폭포라고 일컬어지는 이곳을 요즘 같은 여름에는 평일에도 하루 70~80명 가량이 알음알음으로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용전마을 앞쪽 용전숲이 있는 데서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2km 가량 자동차를 타고 오릅니다. 용전폭포 바로 앞입니다. 



용전폭포.


자동차에서 곧바로 먹을거리와 마실거리 따위를 바리바리 내려서는 숲 속 골짜기로 스며든답니다. 8월 6일 오후 3시 즈음해 용전폭포를 찾아가 봤습니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교행할 만한 좁다란 임도 공간에 자동차가 스무 대 가량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습니다. 



골짜기에는 이미 돼지고기 굽을 때 나는 냄새가 짙게 배여 있었습니다. 들어서며 살펴보니 고기 굽는 데는 휴대용 버너가 주로 쓰이고 있었지만 LPG통도 소형이기는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텐트를 치고 며칠 묵은 듯한 사람들도 있었고 하루만 와서 발을 물에 담그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리를 깔고 드러누운 사람도 있었고 일행과 얘기를 나누며 고기를 굽고 술잔을 기울이는 축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카드와 화투를 돌리는 일행도 한쪽에 보였습니다.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은 축도 있었고 속옷만 입은 축도 있었고 윗통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축도 있었습니다. 



버려진 쓰레기는 눈길 닿는 곳마다 널려 있었습니다.(하지만 짐작보다 많지는 않았습니다.) 또 일부는 50ℓ나 100ℓ짜리 쓰레기봉투에 담겨 있기도 했고 돌아가는 몇몇 사람들 손에는 그렇게 쓰레기가 담긴 봉투가 들려 있기도 했습니다. 


눈길이 잘 닿지 않는 쪽에는 하얀색 물티슈가 제법 많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짐작건대 대변을 처리한 흔적들이었습니다. 


곳곳에서 보였던 물티슈들.


어쨌거나 여름 한 철이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 사람이 찾아들고 환경 오염 행위가 벌어지면 행정기관의 관리·통제가 있을 법한데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용전마을 주민들은 바로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용전폭포 골짜기에 아예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요구는 아니었습니다. 


돌로 화덕을 만들어 불을 땐 자취.


6일 용전마을회관에서 만난 할매·할배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더러 도랑에 쓰레기 버리지 말라 하지만 정작 바깥 사람들이 들어와 상류에서 더럽히는데 무슨 소용이요? 버리는 쓰레기도 만만찮고 대변도 아무데나 보거든. 진례천을 이루고 화포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우리가 먹는 바로 그 물입니다. 


해법은 여름 한 철 해당 구간 임도 폐쇄입니다. 차단 장치도 돼 있어요. 용전폭포 가려면 10분 정도 걸을 수밖에 없게 하면 먹을거리·마실거리를 그렇게 무겁도록 싸가는 일은 없어지겠지. 더불어 간이화장실도 설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민들 얘기에 호응하는 행정기관은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진례면사무소에 전화를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임도·산림 관리는 진례면사무소에서 하지 않고 김해시 장유출장소와 농업기술센터 공원녹지과에서 합니다. 개인 의견인데, 임도를 폐쇄하면 당장 해제하라는 민원이 쏟아질 것 같다." 



김해시농업기술센터 공원녹지과에서는 이랬습니다. 진례면사무소와 비슷했습니다. "겨울은 산불이라든지 때문에 폐쇄할 필요가 있지만 여름은 그렇지 않다. 산소를 찾는다든지 하는 이유로 자동차로 오는 경우가 있다. 


일대 청소는 7월에 한 차례 했다. 일이 바빠 8월에는 챙겨보지 못했는데 월요일(10일)에 청소하러 가겠다. 간이화장실 설치는 어렵다. 사람이 많이 찾는 데도 아니고 게다가 여름 한 철만 일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보니까 임도 차단장치가 돼 있는 어귀에 김해시장유출장소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있었습니다. "장유사~진례 구간 임도를 폐쇄하오니,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7월 1일~8월 31일". 그렇지만 차단봉은 내려가 있지 않았습니다. 자물쇠도 당연히 채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전화를 통해 김해시장유출장소 관계자 얘기를 들었습니다. "장유사에서 진례까지 임도 폐쇄 플래카드를 내건 것은 맞다. 하지만 대청계곡 쪽 장유사 일대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용전폭포 가는 길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장유사 쪽은 폐쇄돼 있다. 임도 폐쇄를 결정하고 알리는 일을 우리가 했지만 진례 쪽 임도 폐쇄는 우리 관할이 아니다. 진례면 사무소에 알아보시라." 


용전폭포 일대 임도·산림 관리, 과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쓰레기와 대·소변으로 말미암는 오염은 여름 한 철에만 벌어지는 것이면 내버려둬도 괜찮을까요? 용전마을 주민들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일 따름일까요? 


진례 쪽 여름 한 철 임도 폐쇄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요? '폐쇄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도 실제로는 폐쇄하지 않는 행정 조치가 주민들 눈에는 과연 얼마나 합당하게 비칠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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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현행 3명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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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별로 좋지 않다. 워낙 많기도 하지만(2014년 말 기준 5950개), 그로 인한 민폐·관폐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 지방자치단체의 홍보실 관계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하루 방문자 100~200명밖에 안 되는 인터넷신문들도 광고 달라고 찾아와서 아주 미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1000명이든 5000명 이상이든 기준을 만들어 그 이하이면 광고 집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표를 얻어야 할 단체장 입장에선 아무리 작은 신문사라도 악의를 품고 해코지를 하려 달려들면 골치가 아프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지역의 작은 인터넷신문들은 대개 기존 언론에서 퇴직한 기자가 기자직 유지용으로 만들어 운영한다. 상시 취재-편집 인력 3명 이상이 등록 요건이지만, 배우자나 자녀, 친구를 상시인력으로 신고해놓고 실제론 혼자 일하는 1인 인터넷신문이 대부분이다. 사무실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등록하면 그만이다. 비용도 월 유지비용 10만~20만 원이면 된다. 그러다 보니 지자체나 유관기관, 몇몇 기업체 배너광고만 개척해놓으면 언론사 퇴직 전에 받던 월급 정도는 벌 수 있다.


그런 인터넷신문에 언론 본연의 감시나 비판 기능 같은 건 없다. 거의 모든 기사는 기관, 단체, 기업의 보도자료다. 어쩌다 비판기사가 보인다 싶으면 영락없이 광고 거절에 따른 보복성 기사다. 이런 인터넷신문이 각 지역마다 수십여 개에 달한다. 얼마 전 방문했던 인구 30만도 안 되는 한 중소도시의 시청 출입기자는 120명이었다. 그 중 80여 명이 인터넷신문 기자였다.


이런 폐해 때문일까. 혹자는 등록 기준 상시인력을 현행 3명에서 5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한국언론진흥재단 김위근 선임연구위원이 그랬단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현행 3명을 유지하더라도 피고용인 2명에게 최저임금이나마 지급하고 있는지 입증토록 하면 그런 사이비언론은 충분히 정화할 수 있다고 본다.



작은 인터넷신문이라고 사이비만 있는 건 아니다.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단디뉴스는 시민언론이다. 기존 언론이 제기능을 못할뿐더러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폐간했지만 진주지역의 유일한 시민주주신문이었던 진주신문 편집국장 출신 기자가 '총대'를 매고 아이쿱생협과 시민단체, 개인 등 100여 명이 매달 후원금을 낸다. 게다가 이 신문의 취지에 동의하는 몇몇 사업자들은 광고도 걸어줬다. 돈 대신 글을 써서 부조하는 사람들도 수십 명은 되어 보인다.


감시 대상인 시청이나 유관기관 광고는 아예 요청하지도 않는다. 기사 또한 보도자료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쓰고 시민의 생활 속에서 나오는 뉴스를 지향한다. 적은 비용으로 좋은 시민언론을 만들어가는 모범적인 사례다.


전남 여수에 있는 여수넷통도 비슷한 방식으로 창간된 인터넷신문이다. 경남노동자민중행동이라는 단체는 필통이라는 팀블로그를 만들었다. 아직 인터넷신문으로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50명의 필진이 구성되어 있다.


좋은 언론을 갖고 싶다는 시민들의 열망은 언론협동조합 결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순천광장신문, 부천 콩나물신문, 인천 개미뉴스, 거창 한들신문, 영암우리신문등이 그렇다. 이들 신문은 인터넷뿐 아니라 주간 또는 격주간으로 종이신문도 발행한다.


인터넷 사용인구가 적은 지역이거나 재정적 여력이 있다면 종이신문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앞의 사례처럼 인터넷신문으로 해도 좋다고 본다. 손쉬운 인터넷신문 등록요건은 사이비언론의 창궐을 불렀지만, 거꾸로 시민언론운동의 기회이기도 하다. 주류언론이라는 조중동까지 온갖 쓰레기(어뷰징) 기사를 쏟아내는 이 판국에 이런 시민언론이 전국 곳곳에 생겨 더러운 언론판을 정화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쓴 글입니다. 공교롭게 이 글이 나온 후 문화관광부는 인터넷신문 등록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의 입법예고를 했습니다. 일부 사이비언론으로 인해 좋은 시민언론까지 싹을 자르게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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