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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미 이재오 정수성이 발의한 학살 규명 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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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5일) 오후 1시부터 창원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65주기 제8회 합동위령제가 있었다. 장소는 옛 부산형무소 마산분소 자리였던 천주교 마산교구청 강당이었다.


여기엔 이 지역구 이주영 국회의원(새누리당)도 참석해 추모사를 했다. "전쟁 당시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에 대한 추모와 명복의 뜻을 여러분과 함께하고자 한다. 국회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분과 뜻을 함께하면서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 길에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국회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일이란 현재 계류 중인 진상규명 법안이 통과할 수 있도록 적극 힘을 쓰는 것이다.


추모사 중인 이주영 국회의원 @구자환


그래서 어떤 법안이 계류되어 있는지 알아보았다.


2015년 9월 현재 국회에는 3건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및 보상 관련 법안이 계류 중에 있다.


제일 먼저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이 2013년 10월 11일 발의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있다.


이 법안에는 진선미, 이상직, 박원석, 윤관석, 박수현, 전순옥, 박지원, 원혜영, 윤호중, 심상정, 김제남, 정진후, 최원식, 장하나, 김광진, 김민기, 서기호, 임수경, 홍영표, 강기정, 김동철, 강창일, 부좌현, 이종걸, 이학영, 은수미, 신학용, 우상호, 인재근, 박영선, 김재윤, 민병두, 이해찬, 문병호, 설훈, 노영민, 김현미, 이석현, 홍종학, 최재천, 이인영, 남인순, 홍의락, 김태년, 서영교, 김기준, 우윤근, 최민희, 유인태, 유은혜, 박홍근, 박범계 의원(52인)이 함께 발의자 명단을 올렸다.


1907253_안전행정위원회_검토보고서.hwp


1907253_의사국 의안과_의안원문.hwp

과거사 기본법 제정 서명을 받고 있는 유족들. @김주완


두 번째로는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이 발의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있다.


이 법안에는 이재오, 전순옥, 이주영, 이만우, 신성범, 김재경, 김용태, 진영, 김영우, 김기선, 조해진, 박덕흠, 이군현, 성완종 의원(14인)이 발의자 명단을 올렸다. 이주영과 신성범, 김재경, 조해진, 이군현 등 경남출신 의원들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1907794_안전행정위원회_검토보고서.hwp


1907794_의사국 의안과_의안원문.hwp


세 번째는 4성 장군 출신의 경주 지역구 국회의원 정수성 의원이 발의한 개별법안 '경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이다.


여기에는 정수성, 정희수, 박명재, 장윤석, 이노근, 류지영, 나경원, 정갑윤, 이채익, 이운룡, 홍지만 의원(11인)이 발의자로 되어 있다.


경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은 대부분 악질 이협우에 의해 저질러진 게 많다.


1915473_의사국 의안과_비용추계서.hwp


1915473_의사국 의안과_의안원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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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교사가 불법주차 아줌마를 다루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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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교사가 상습 불법주차 아줌마를 대하는 방식'이 SNS에서 화제다.


10일 오전 11시 페이스북에 유치원 교사로 보이는 한 사용자의 글과 사진이 올라왔다.


"오전 등원시간. 유치원 골목에 2중 주차차량. 

상습범 아주머니. 또 전화를 걸었다. 

"진짜 짜증나네"라며 확 끊어버리신다. 

나 또한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쪽지를 쓴다. 작은 껌 한 통 넣는다. 

이제는 통화하지 않는 사이가 되기를..."


그는 이 글 아래에 "#YMCA유치원 #유치원버스 #아이들의안전이우선이다 #유치원버스를사랑으로봐라보는문화의식이 #그것이선진국일세"라는 샵태그를 붙였다.


함께 올린 사진에는 예쁜 글씨로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있었다. 메모지 위에는 껌 한 통이 놓여있었다.



"YMCA 유치원입니다. 아침마다 차량 문제로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전화 드리는 저희도 마음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오전 8시 50분~오후 5시 30분까지는 유치원 25인승 버스가 지나다닙니다. 그 안에는 2중 주차를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 보호구역'으로 차량, 어린이 사고의 위험이 있답니다. 시야 확보와 차량 진입 문제가 있어요.

넣어드린 껌 운전하실 때 드세요.

늘 안전운전하시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이 글에 대해 "살아있는 부처로군요" "글도 곱고 글씨도 예쁘고" "예쁜 마음 알아줄 거에요" 등 네티즌들의 댓글 응원이 잇따랐다.


한편 이 글을 올린 마산YMCA 유치원 허은미 교사는 "예전에도 다른 차량이 같은 자리에 계속 이중주차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이 방법으로 효과를 봤다"며 "그런데 또 새로운 차량이 이중주차를 해 다시 이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내일 아침이 되어봐야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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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평화인증샷 협찬이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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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증샷‬ 이벤트 상품이 더 푸짐해졌어요.


경남도민일보가 드리는 10만 원, 5만 원, 3만 원 상품권과 함께 전국적으로 유명한 경기도 군포 ‪#‎고재영빵집‬ 오너쉐프 고재영 님께서 '가장 많은 인원이 나온 사진'에 직접 만든 빵 한 박스를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고재영님의 강권(?)으로 햇빛을 즐기는 농부 양형두 님이 백향과도 협찬한다고 합니다. 두 분은 페이스북의 이벤트 공지를 보고 자발적으로 협찬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지합니다]


경남도민일보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저지하기 위해작은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사진 예시입니다. 김서현 님이 보내주신 평화인증샷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추모조형물(마산 인권자주평화 다짐비, 남해 평화소녀상, 통영 정의비, 거제 평화소녀상 등)은 물론 전국의 '위안부' 관련 조형물과 함께 찍은 #평화인증샷 을 보내주세요.


*보내주신 사진 중 좋은 작품을 골라 세 분에게 각 10만 원, 5만 원, 3만 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가장 많은 인원이 나온 사진을 보내주신 분께는 고재영빵집에서 빵 한 박스를 드립니다.

*또 특별히 의미있는 사진에 대해서는 햇빛을 즐기는 농부 양형두 님께서 백향과를 드린다고 합니다.


*혹 이 이벤트에 상품을 추가 협찬하고 싶은 분은 저에게 연락주세요. (010-3572-1732 김주완)


*보내실 기간 : 9월 23일까지

*사진 보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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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간 성관계가 부른 살인? 증거없는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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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의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이 작업은 우연히 시작됐다. 몇 해 전 지금은 은퇴한 전직 검찰 수사관과 만났다. 수사관 시절 이야기를 하던 그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글로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당시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렸던 글도 제공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이 사건에 대한 취재는 이렇게 시작했다. 전직 검찰 수사관이 작가에게 이 사건을 추천한 이유는 뭘까. 우선 이 사건을 되짚어보자.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은 지난 2009년 7월 6일 전남 순천시 황전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사건 발생 마을은 순천 시내에서 버스로 30, 40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우선 이 사건에 등장하는 가족관계도를 살펴보자. 수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명으로 표기했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1화, 자백뿐인 증거



청산가리 섞인 막걸리 먹고 두 명 사망


이 사건은 바로 부모와 막내딸,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던 집에서 발생했다. 당시 아버지는 60세, 어머니는 57세, 막내딸은 26세였다.



사건 현장인 집 구조를 살펴보자.


마당에는 창고 2개와 화장실, 화단이 있다. 그리고 화단 옆에서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이제 사건 발생 당일 아침으로 가보자. 경찰 조사에서 남편 백경환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2009년 7월 6일 백경환씨는 오전 5시경 일어났다. 세수하고 풀을 벨 때 쓸 낫을 갈았다. 당시 남편 백경환씨는 산림 하청을 받아 풀 베는 작업을 했으며, 부인 최명자씨는 순천시청에서 하는 희망 근로를 다녔다.


남편 백씨는 집을 나서기 전에 대문 옆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주차한 봉고 트럭 뒤에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봉지 안에는 막걸리병이 보였다.



백씨는 비닐봉지를 뜰방(토방)에 놓고 부엌에 있는 아내를 불렀다.


"막걸리병이 차 뒤에 있데. 누가 갖고 가라고 한 건가? 그곳에 있데."

"예."


남편은 바로 트럭을 몰고 일터로 향했다.


부인 최씨도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향했다. 한 아주머니가 현장에 먼저 나와 있었다. 그는 최씨가 자전거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는 것을 보고 무엇인지 물었다.


"아침에 누가 갖다놨네요."

"자네가 애쓴다고 누가 갖다놨나 보네."


곧 풀베기가 시작됐다. 오전 일을 하는 중 최씨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한 잔' 마실 것을 재촉했다고 한다. 오전 9시경 휴식이 시작되자 최씨는 막걸리 한 병을 가져왔다. 두 병 가운데 '염색한 놈'이었다. 최씨는 둘러앉은 세 명에게 막걸리를 먼저 따랐다. 막걸리 색이 갈색인 것에 대해 사람들은 '고급술', '칡술'이라며 추켜세웠다. 최명자씨가 먼저 마셨다.


잠시 후 119가 출동했다. 네 명이 가까운 구례병원으로 실려 갔다. 최씨를 포함해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순천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약 45일이 지난 시점에 범인을 찾아낸 것은 바로 검찰이었다. 사건을 맡은 순천경찰서가 한 달 넘게 뚜렷한 물증을 찾지 못하자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강력사건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당시 순천지청은 순천경찰서에 수사 중단과 모든 사건 관련 기록을 요구했다. 물론 경찰 처지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검찰이 신속하게 남편 백경환과 그의 막내딸에게 자백을 받아낸 것은 사실이다.


수사 결과, 살인의 동기는 놀랍게도 부녀 간 성관계가 원인이었다. 검찰은 남편 백경환과 그의 막내딸 백희정 부녀가 약 15년 전부터 성관계를 해왔는데, 죽은 최씨가 이를 알고 부녀를 나무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밝혀낸 부녀의 범행과정을 살펴보자.


검찰은 사건 발생 나흘 전부터 부녀가 범행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하루씩 살펴보자.


나흘 전부터 범행 준비했다는 부녀의 자백



7월 2일,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백경환씨는 오후 6시쯤 부인 최명자씨를 태우고 순천으로 향했다.


약 40분을 달려 순천 시내 한 식당에 도착했다. 백씨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평소 부인이 잘 먹는 국밥을 사줬다. 국밥을 먹고 막걸리 3병을 구매했다.


마을 앞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면 범행이 쉽게 발각될 수 있어 순천에서 산 것이다. 오후 8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구매한 막걸리 3병 가운데 2병만 부엌 냉장고 안에 보관했다. 나머지 한 병은 거실에서 나눠 마셨다.



이튿날인 3일 금요일, 남편 백경환씨는 부엌 냉장고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냈다. 마당을 지나 막걸리를 창고로 가져간 백씨는 창고 왼편 선반 구석에 보관한 청산가리 봉지를 꺼냈다.


청산가리는 약 17년 전에 구매한 것이다. 벌레를 잡을 때 한 번 사용하고 나서 남은 것을 선반 구석에 그간 보관해뒀다. 그리고 아버지는 막내딸 희정에게 창고에 가보라고 했다. 희정씨는 창고 안에서 청산가리와 막걸리 두 병을 확인했다. 지문이 남을까 싶어 만지지는 않았다.



4일 토요일 오후 8시, 희정씨는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숨겨둔 면장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를 옥상 한쪽에 두고 창고에서 막걸리와 청산가리를 챙겨왔다. 


면장갑을 양손에 낀 희정씨는 청산가리 두 숟가락을 막걸리병 안에 넣고 흔들어 섞었다. 그 막걸리는 부엌 냉장고 채소 보관실에 숨겼다. 그날 희정씨는 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5일 일요일 오후 8시 30분, 희정씨는 마을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돌아온 것이다.


6일 오전 2시 30분쯤 잠에서 깬 희정씨는 냉장고에 보관했던 막걸리 두 병을 꺼내 지문을 없애고 마당 화단 앞에 내려놓았다. 그 시각이 오전 3시쯤이었다. 희정씨는 집 밖으로 나가 하천에 청산가리 봉지를 버렸다. 그리고 면장갑은 마당에 있던 종량제 봉투에 버렸다. 



이상이 부녀가 검찰에서 자백한 내용이었다. 검찰은 부녀를 기소했다. 검찰은 이미 유죄입증을 자신했다. 피고인들의 쌍방자백은 'X자' 형태로 서로 보강 증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막내딸 진술 증거는 아버지 자백이며, 아버지 진술 증거는 딸의 자백인 셈이다.


재판은 판결을 위해 피의자 자백 내용이 얼마나 타당한지 먼저 검토한다. 1심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검찰에 한 자백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판결은 무죄였다. 하지만 1년 뒤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는다. 피의자 자백이 타당하다며 각각 무기징역과 20년 형을 선고한 것이다. 대법원도 피의자가 검찰에서 한 자백이 타당하다고 보고 유죄를 확정한다.


자백 외에 증거 없어...가족도 재수사 원해


이처럼 '순천 막걸리 사건'은 이미 수사 단계에서 자백을 받았고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끝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판결했지만,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 주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자백 말고 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 틈새 때문에 지난 2013년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을 놓고 부녀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부녀와 가족은 재수사를 원하고 있다. 가족과 친척 반응도 비슷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전직 수사관 또한 이들 부녀가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도 자백 말고 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수사 정당성에 논란이 될 불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궁금했다. 피의자 자백을 받은 검찰이 어떻게 증거를 하나도 찾지 못했을까. 오히려 피의자는 범행을 일체 부정하고 검찰이 증거로 압박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게 상식적이지 않은가. 이 사건은 증거 없이 자백만 나왔고 법원은 그 자백을 증거로 채택했다.


필자는 아버지 백경환을 면회했고 그를 통해서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재판서류들을 모두 넘겨받았다.


필자는 사건 기록과 현장을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혼자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았다. 전직 판사 출신 변호사와 전직 형사과장도 사건 기록 검토에 동참했다. 이 연재를 통해서 현장에서 찾은 증거를 펼쳐 놓겠다. 왜 수사단계에서는 그런 증거들을 지나쳤을까. 혹시 수사 체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글은 현재 독자를 비롯한 검찰과 경찰 모두에게, 현 수사체제 문제점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이해를 돕고자 사건 쟁점을 하나씩 점검하겠다. 먼저 범행에 쓰인 막걸리와 청산가리 구입처부터 가보자.


(제2화 '범행도구들' 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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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청산가리' 납득할 수 없는 검찰 공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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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의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2화, 범행도구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범행도구는 막걸리와 청산가리다. 용의자 백경환(가명)씨는 검찰에서 막걸리와 청산가리 구입처를 자백했지만, 검찰은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자. 


검찰은 백경환씨가 7월 2일 순천 시내 아랫시장, 장원식당에서 막걸리를 샀다고 했다. 이곳은 순천 시내에서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는 장원식당 남자 주인에게 국밥과 작은 막걸리(750㎖) 3병 값을 계산했다. 백경환씨의 자백은 과연 현실 타당할까?



식당 주인은 막걸리 큰 병(900㎖)을 주로 취급하고 작은 병은 취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큰 병이 이윤이 더 남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식당 주인은 장원식당 장부를 제출했다.


검찰은 장원식당이 정말 큰 병만 취급하는지 확인하고자 현장으로 나갔다. 사건이 일어나고 두 달이 채 안 지날 때였다. 그런데 현장으로 나간 검찰은 이 식당 냉장고에서 작은 막걸리 8병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900㎖ 막걸리만 취급한다는 식당 주인 주장과 달랐다. 식당 주인은 이 작은 막걸리는 정상적인 유통경로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범행 도구였던 막걸리, 왜 용량이 달랐을까



8월 15일 순천만 갈대밭 축제 때 행사에 쓰인 막걸리가 남아 통장이 구매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병을 1만 원에 주고 샀다며 장부를 보여줬다. 하지만 검찰은 750㎖ 막걸리가 납품 과정에서 섞여 들어올 가능성에만 주목했다. 게다가 7월 2일은 손님이 붐비는 아랫장날이었다.


검찰은 아랫시장 국밥집 가운데 주로 900㎖ 막걸리를 취급하는 대송순대국밥 주인을 증인으로 불렀다.


대송순대국밥집은 자신들도 큰 막걸리를 주로 취급하지만 7월 2일은 900㎖ 막걸리가 다 떨어져 작은 막걸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장원식당에 대해서도 대송순대국밥집과 같은 가능성을 제기했다.



검찰은 이처럼 단지 '작은 병이 섞어 들어왔을 가능성'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 두 번째 핵심쟁점인 '청산가리'를 살펴보자. 검찰은 청산가리 구입처를 명확하게 밝혀냈을까? 당시 변호인은 검찰이 청산가리에 관한 자백을 받으면서 정작 추궁해야 할 것은 지나쳤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사건이 더욱 복잡하고 난해해졌다는 것이다. 대체 그건 무슨 말일까?


부녀는 범행에 쓰인 청산가리를 어디서 구했던 것일까? 검찰 공소장에는 백경환씨가 17년 전에 청산가리를 이강춘(가명)씨에게 얻었다고 한다.


변호인은 주변에 나이가 제법 든 선배들에게 예전에 유통되던 청산가리에 관해서 물어봤다고 한다. 선배 변호사들은 17년 전에 유통되던 청산가리는 가루 형태가 아니라 덩어리였다고 했다.



17년 보관했다는 청산가리 가루,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 사건과 같은 해 발생했던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에 등장하는 청산가리도 덩어리 모양이었다. 충남 보령에서 독극물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09년 4월 29일이다. 사건 당일 마을 사람 6명은 태안 안면도 꽃 박람회 구경을 다녀왔다. 그날 밤 한 노부부가 거실에 나란히 누운 채 죽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추가 사망자를 확인한다. 아랫집에 사는 정씨 할머니도 밤새 혈압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정씨 할머니 남편은 사건 초기부터 유력한 용의자였다. 형사들은 정씨 할머니 남편에 대해 캐기 시작했다. 과거 다른 지역에서 살 때 가입했던 친목단체 회원 명부까지 파악했다.


이후 8월이 되자 경찰서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철공소를 운영한다는 그는 사건 전 정씨 할머니 남편에게 청산가리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청산가리는 철공소 안에 있는 분유통에서 발견했다. 그 분유통에는 수십 년이 지난 청산가리 덩어리가 있었다. 청산가리 표면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변질한 듯했다. 서리가 낀 것처럼 꽃이 핀 모양이었다. 


반면 백경환씨가 17년 동안 보관한 청산가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부녀의 진술에 따르면 17년간 보관한 청산가리는 백색 가루 형태였다.


이들 부녀는 17년 동안 청산가리를 신문지와 비닐봉지에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비닐봉투는 고분자 물질이다. 백경환씨가 17년간 허름한 창고 안에 보관한 청산가리는 여름 장마철을 17번 겪어야 했다.



청산가리(KCN)는 조해성이 강한 물질이다. 조해성은 고체가 공기 중 수분을 흡수해 스스로 녹는 성질을 말한다.


여름 장마철 수분을 흡수해 녹은 청산가리는 이산화탄소(CO2)를 흡수해 시안화수소(HCN)와 탄산칼륨(K2CO3)으로 변한다. 기체인 시안화수소는 산이고, 고체인 탄산칼륨은 염기다. 산과 지속해서 접촉한 비닐은 손상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종이는 산이나 염기와 접촉하면 변색하고 부서진다.


변호인은 청산가리 가루가 17년간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을 표했다. 이에 검찰은 신문지와 비닐봉지로 청산가리가 17년 동안 잘 밀봉됐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공기에 노출된 청산가리 가루는 약한 살구색 또는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즉 백희정(가명)씨가 막걸리에 탄 청산가리 가루는 결코 백색일 수가 없다.


검찰 주장은 과연 타당할까? 그런데 백경환씨는 조사과정에서 단 한 번도 17년 전에 청산가리를 얻었다고 말한 바가 없었다. 백경환씨는 검찰이 현장검증할 당시에도 17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4~5년 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17년 전으로 시기가 조정이 됐을까? 청산가리를 주었다는 이강춘씨가 10년 전인 1999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를 백경환의 착오로 설명했다. 여기서 검찰 조사에서 나타난 당시 막걸리와 청산가리를 희석하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검찰 공소장에는 백희정씨가 사건 이틀 전인, 2009년 7월 4일 오후 8시쯤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고 했다. 실제로 백희정씨는 검찰 현장검증 때는 막걸리 병에 청산가리를 넣던 당시 캄캄해서 라이터를 켰다고 했다.


막걸리에 청산가리 타던 시각, 한 손으로는 폰 뱅킹을?


그녀의 자백은 과연 납득 가능할까? 백희정씨는 오후 8시쯤 면장갑,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 막걸리, 청산가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면장갑을 착용하고 캄캄한 곳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 이에 변호인은 7월 4일 백희정씨 통화기록을 제시했다.



통화기록에는 당일 오후 7시 55분부터 8시 48분까지 9회에 걸쳐 폰뱅킹을 한 것으로 돼 있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백희정씨는 한 손으로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면서 다른 한 손으로 휴대전화를 쥐고 계좌를 계속 확인한 셈이다.


변호인이 의문을 제기하자 검찰은 공소장에 기재한 시간을 '오후 7시 30분경부터 7시 50분경'으로 조정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KASI 천문우주지식정보 자료를 검색하면 이날 일몰 시각은 오후 7시 48분이다.



공소장에는 청산가리가 하얀 비닐봉지와 신문지 조각으로 감싼 채 보관됐다고 나온다. 이는 아버지 주장이다. 막내딸은 검은색 비닐봉지라고 주장했다가 검찰이 추궁하자 어두운 데서 봤기 때문에 착각했다고 진술을 바꾼다. 검찰이 조정한 시간대로라면 비닐봉지 색깔을 착각할 정도로 어두운 때가 아니었다. 


변호인은 검찰 조사에서 밝힌 이들 부녀 공모 과정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 조사대로라면 계획적인 범행을 공모했는데, 부녀 사이에 구체적인 소통 과정이 없다는 점이다.


(제3화 '소통 없는 공모' 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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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선물 공개선언이 중요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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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희 거제시의원을 응원한다


곧 추석이다. 최양희 거제시의원이 공개적으로 명절 선물을 거절했다. 그는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해 시의원이 되고 나서 추석 때 일면식도 없는 기업과 기관으로부터 도착한 선물을 보고 당황스러웠고 마음이 무거워 직접 쪽지를 적어서 모두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한테는 선물 안 보내셔도 된다. 보내면 되돌려보내고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화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정치인이 워낙 드물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13년 전(2002년) 경남도의회에 딱 한 명의 의원이 있었다. 지금은 작고한 이경숙 도의원이다. 그는 당시 경남농협이 보낸 제기(祭器) 세트를 50명 도의원 중 유일하게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공개하진 않았다. 기자가 역추적을 하여 돌려보낸 한 명의 도의원이 그였음을 밝혀냈다. 그는 확인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동료의원 입장도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며 밝히길 꺼렸지만, 거듭되는 질문에 사실을 털어놨다.


최양희 거제시의원


그렇다. '동료의원들의 입장'이라는 건, 내가 돌려보냈음을 공개하는 순간 동료의원들이 받았음을 알리는 결과가 된다는 뜻이다. 최 의원의 공개선언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동료의원 질시와 힐난, 왕따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면 어렵다. 또 온갖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있는 지역사회에서 그런 기관과 기업 선물을 거절한다는 것은 오로지 양심에 따라 의정활동을 하겠다는 선언이고, 나 또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뇌물도 아니고 고작 명절 선물 안 받겠단 말에 뭘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겠지만, 나는 한국 정치개혁, 행정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은 일부터 거리낌이 없어야 모든 일에 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 의원이 인용한 목민심서의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아무리 작아도 은혜로운 정이 맺어지면 이미 사사로운 정이 행해지는 것'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업무상 알게 된 취재대상 기관이나 기업에서 보내온 선물은 내 것이 아니다. 그걸 내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미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도민일보는 선물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두고, 들어온 선물은 노동조합이나 기자회에서 모아 아름다운 가게에 기탁하고 있다. 기탁한 선물은 일일이 영수증을 받아 애당초 보내온 기관이나 기업에 우편 발송을 해드린다. 그렇게 처리한 선물 목록은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독자에게 공개한다.


경남도민일보가 선물을 기증한 후 보내는 편지와 영수증.


모든 반란은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일어난다. 신영복 선생도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공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주류언론이나 국회의원에겐 아예 기대하지도 않는다.


최 의원의 선언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지방의원들이 경남에서부터 점점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동안 공개하진 않았지만 선물을 거절하거나 경남도민일보처럼 처리하는 양심적인 의원들도 제법 있는 걸로 안다. 이젠 공개하자. 또 어떻게 아는가. 경남발(發) 선물 공개선언이 한국정치와 한국사회를 바꾸는 단초가 될지.


참고로 나는 최 의원과 '일면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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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증샷 협찬 상품이 또 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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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인증샷 이벤트에 상품이 또 늘었습니다. 평화인증샷 취지에 공감한 분들의 상품 협찬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 경남도민일보가 드리는 10만 원, 5만 원, 3만 원 상품권 외에 다음과 같은 상품이 추가되었습니다.


‪#‎고재영빵집‬ 오너쉐프 고재영 님께서 '가장 많은 인원이 나온 사진'에 직접 만든 빵 한 박스를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햇빛을 즐기는 농부 양형두 님께서 백향과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은성농원 윤성중 대표님께서 은성 배즙 한 박스(30개들이)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고창 농부의아침 농부의아내 김성자 님께서 올댓베리 아로니아 음료 30포 1박스, 올댓베리 아로니아 원액 1리터 1병을 협찬하기로 했습니다.


#명품수제프레시하우스 고옥희 님께서 수제돈까스 3팩 +소스, 등심 5장(한팩당 500g)을 2명에게 드리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횡성새말양봉 김화선 님께서 아카시아꿀 1kg 육각 유리병 1병을 협찬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평화인증샷 이벤트는 경남도민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만행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저지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추모조형물(마산 인권자주평화 다짐비, 남해 평화소녀상, 통영 정의비, 거제 평화소녀상 등)은 물론 전국의 '위안부' 관련 조형물과 함께 찍은 #평화인증샷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보내실 기간 : 9월 23일까지

*사진 보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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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저씨 성추행 고소했다 왜 번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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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의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3화, 소통없는 공모


변호인은 부녀의 범행 공모과정에도 의문을 표했다. 대체 어떤 점에서 그럴까?


아버지 백경환(가명)씨는 창고 선반에서 청산가리 봉지를 꺼내 막걸리 봉지 옆에 가져다 놓고, 딸 백희정(가명)씨에게 "창고에 막걸리를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백경환씨는 이 말이 "월요일(7월 6일) 새벽에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서) 화단 앞에 갖다 놓으라"는 의미였다고 했다.



아버지 말에 백희정씨는 창고에 와서 그냥 막걸리와 봉지를 바라만 봤다고 진술했다. "이게 청산가리인지 어떻게 알았어?"란 수사관 질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라고 답했다.


백희정씨는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타고 나서, 사용했던 면장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를 종량제 봉투에 버렸다고 했다. 백희정씨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아침 아버지가 종량제 봉투를 인근 버스정류장에 갖다 놓았고, 쓰레기 수거 차량이 싣고 가버렸다고 했다.


변호인은 부녀의 공모 방법을 가리켜 '이심전심'이라고 표현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소통도 없는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읽은 듯이 증거물을 은폐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변호인은 다음 대목에서 더욱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백희정씨는 7월 4일 저녁에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타고 나서, 채소 냉장고 칸에 보관했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기상청 기록을 보면 2009년 7월 4일 순천은 29.8도를 기록했다.



하지만 정작 백희정씨가 창고에서 막걸리를 확인한 것은 7월 3일 저녁이었다. 공소장 내용에 따르면 막걸리를 이튿날 저녁까지 밀폐된 창고에 방치했다. 무더운 여름에 24시간 가까이 막걸리를 실온 보관했다는 얘기다. 냉장고에 넣기 전에 이미 막걸리가 상하지는 않았을까?


개가 짖지 않았다는 증언, 현장검증 두고 엇갈리는 의견


변호인은 백희정씨 자백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계속 꼬집었다. 사건 발생 당일, 새벽에 막내딸 백희정씨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마당에 갖다 놓을 동안 어머니가 인기척 소리에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백희정씨 자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건 당일인 2009년 7월 6일 백희정씨는 오전 2시 30분경에 방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집 뒤편 풀숲으로 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통해 다시 집 안 부엌으로 들어왔다.



다시 현관문을 열고 마당 앞에 막걸리를 내놓았다. 그리고 마을 주변 하천에 청산가리를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새벽 백희정씨는 현관문을 총 4회 열었다. 백희정씨는 당시 엄마가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고 했다. 과연 엄마가 자는 동안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1심 재판부에서 현장검증에 나섰다. 재판장은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열어봤다. 쇠문 소리가 어느 정도인지, 문을 열었을 때 바람은 얼마나 거실로 들어오는지도 확인했다. 그리고 백희정씨 방에서 말을 하면 다른 방에서는 얼마나 들리는지도 확인했다. 창고 문도 열고 닫았다. 재판부도 어머니가 깨지 않았다는 증언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당시 현장검증에서도 검찰과 변호인 의견이 갈렸다. 이를테면 범행 당일 개 짖는 소리. 사건 당일 새벽 개가 짖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이웃집 사람 진술이 있었다.



검찰은 집에 개 두 마리를 키우는데 새벽에 누군가 집에 들어갔다면 개가 짖었을 것이고, 연쇄적으로 다른 집 개들도 짖었을 것이라고 했다. 개가 짖지 않은 것을 외부로부터 '침입'이 없었다는 근거로 보았다.

      

반면 변호인은 검찰 주장대로라면 백희정씨가 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하천까지 가서 남은 청산가리를 버렸을 때 동네 개들이 짖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개가 짖지 않은 것을 증거물(청산가리) 은폐를 위한 '출입'이 없었다는 근거로 보았다.


부녀가 지능범이라는 공소장, 동네 주민은 "정신상태 정상 아니다"


계속해서 변호인과 검찰은 백희정씨 지능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검찰은 공소장에 '피고인 백희정은 ... 범행에 사용할 목적으로 흰색 장갑을 구입하여 ... 그 후 피고인들은 나름대로 구체적인 범행방법을 모색하던 중 ... 청산염과 막걸리를 마련하여 준 다음 이를 이용하여...'라고 적었다. 이렇듯이 검찰은 부녀가 머리를 쓴 지능범이라고 주장한다.


존속살인에서 지능범죄 예는 2013년 8월 16일 발생한 인천 모자 살인사건을 들 수 있다. 차남 정씨는 재산을 노려 어머니와 형을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 수사과정에서 차남 정씨의 거짓말 탐지기 반응이 거짓으로 나오고, 여러 정황 증거들이 발견됐다. 하지만 정씨는 경찰이 사체를 찾지 못한다면 절대로 혐의를 입증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반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공범인 부녀는 사건 발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7월 6일 희망 근로현장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간신히 살아난 한 할머니는 "남정네와 딸이 어머니를 죽일 거면 저녁에 둘이 술을 주고받고 하면서 죽이면 될 텐데 왜 밖으로 갖고 오게 해서 이 피해를 주느냐?"며 의문을 표했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러한 의문점을 풀어냈다. 이들 부녀는 범행방법을 1차와 2차에 나누어 모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제1차 범행방법은 피해자 최OO이 냉장고에서 청산염이 든 막걸리를 꺼내 마시고 사망하는 것이고, 사망하지 아니하면 2009년 7월 6일 새벽에 마당에 마치 다른 사람이 막걸리를 가져다 놓은 것으로 위장하여 피해자 최OO으로 하여금 공공근로사업장에 가져가도록 하여 이를 마시게 한다는 것으로 판단.'


하지만 두 부녀의 검찰진술은 좀 다르다. 최씨가 공공근로 사업장에 막걸리를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후 부녀에게는 분명 서로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백경환씨의 2차 계획은 숨진 최씨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것, 백희정씨의 2차 계획은 공공근로 현장에서 최씨가 마시도록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막내딸 계획은 다른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희정씨는 "그래도 엄마를 없애는데, 이 방법이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희정씨는 왜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사건 당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은 동네 사람들 말을 빌려서 막내딸 백희정씨의 정신상태가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내보냈다. 법정에 제출된 부녀의 정신감정 결과는 막내딸 아이큐는 74, 아버지 아이큐는 86이었다.


즉, 뭔가 치밀하게 '계획'을 하기에는 부녀 모두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일축했다. 막내딸이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전혀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리고 검찰은 기자회견에서 백희정씨가 머리를 써서 수사에 혼선을 주려 했다고 주장했다. 


수사가 한창 진행되던 당시 경찰은 의심 가는 사람이 없느냐고 계속해서 가족들에게 물었다. 죽은 최씨 여동생(백희정씨의 이모)은 언니가 죽기 전 "막내 딸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동네 누구하고..."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때 마침 백희정씨 언니가 이모에게 전화를 해 동네 아저씨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모에게 동네 아저씨에 대해 동생에게 한 번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백희정씨가 이모를 더 잘 따랐기 때문이다. 이모는 백희정씨에게 이를 물어봤고, 백희정씨는 동네 아저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를 고소했다. 


하지만 백희정씨는 검찰 조사에서 성추행은 없었다고 번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동네 아저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것이다.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한 지능범이라고 하기엔 너무 쉽게 증언을 뒤집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말이다.



이렇게 해서 백희정씨의 혐의는 '존속살인'에 '무고'죄가 하나 더 추가됐고, 백희정씨 언니들은 '무고교사'로 기소가 됐다. 물론 이 무고교사 사건을 수사한 검사도 살인사건 담당 검사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기록을 검토했던 한 변호사는 검사 태도가 이율배반적이라고 했다.


"검찰 입장에서는 백희정씨가 동네 아저씨를 왜 고소하게 됐는지, 그게 필요해요. 자기 범행을 무마하기 위해서 고소를 했다는 취지에요. 그런데 이 살인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머리를 쓴 계획적 범행이거든요. 그렇다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어요. 백희정 자신은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언니들이 백희정씨를 교사했다는 말이잖아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사건의 가장 핵심쟁점으로 들어가 보자. 모든 살인사건에는 동기란 게 있다. 부녀가 살인을 저지른 동기, 부녀 성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제4화 '살인 동기' 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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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다짐비가 소녀상이 아닌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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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 건립 과정에 대한 생각 


-애초 추진위원회 명칭에서 ‘추모조형물’ 대신 ‘추모비’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다 보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비석이라면 산이나 공원 등 외곽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약간의 혼선이 있었다.


-그러나 터 선정 과정에서 있었던 잡음과 마찰은 결과적으로 다짐비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애정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SNS에서 많은 시민과 타 지역민들이 오동동 다짐비를 응원하며 좋아요를 눌렀고 널리 공유해주었다.


SNS를 통해 ‘마산 오동동에 일본군 ‘위안부’ 추모 조형물을 세운 까닭’을 올리고 공유한 것도 주효했다. 또한 발빠르게 조형물 앞에 ‘이곳에 세우는 의미’ 안내판을 세운 것도 적절했다. 많은 행인이 안내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목격했다.



또 코아양과 맞은편 도로에 건립하려던 것이 무산된 것도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본다. 너무 좁고 복잡한 곳인 데다 주변의 시설물 등과 조화롭지 않아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었다.


추모조형물은 저잣거리에서 뭇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영웅의 동상이 아니라 행인들과 같은 높이에서 마주보거나 어깨동무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산합포구 해운동 방송통신대 학습관 옆 근린공원에 생뚱맞게 서 있는 부마항쟁 기념조형물을 보라. 왜 그것이 거기에 서 있는 지 아무도 모른다. 그 장소와 부마항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왜 거기 서 있을까? 마땅히 세울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조형물이 됐다.


다짐비는 다르다. 학생과 시민과 취객들도 왜 다짐비가 오동동에 서 있는지 안다. 그래서 더 가슴아파한다.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 작명은 잘 되었다고 본다. 그냥 ‘다짐비’ 또는 ‘마산 다짐비’ ‘오동동 다짐비’ 등으로 자연스럽게 불려질 것으로 보인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역성이 드러나지 않는데다 타 지역의 소녀상과 변별력이 없다. 또한 ‘소녀’를 내세워 순결을 강조하려는 느낌이 있다. ‘순결하지 않은 여성은 인권을 유린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민간인학살’도 애초에는 ‘양민학살’로 불렸다. 그러나 ‘양민’ 즉 착한 백성=빨갱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빨갱이는 재판도 없이 저렇게 학살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간인학살’로 통일하게 되었다.



-작명과 건립취지문, 안내판 문구 등을 다소 급하긴 했지만, 카톡방을 통해 회람하고 다수의 의견을 취합해 확정한 것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건립 이후 잡음과 지적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모 방식을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으로 한 것도 적절했다고 본다. 작품 선정이 아니라 작가 선정 방식도 효과적이었다.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과 작가들이 수차례 만나 토론하고 협의하면서 건립 취지와 의미를 잘 살린 작품을 만들었다. 덕분에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잘 표현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다만 바닥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 달리 평평하고 밋밋하게 처리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안전사고 위험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안전성이 고려된 새로운 디자인을 사후에나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잘 활용하고 잘 보전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경남도민일보가 #평화인증샷 이벤트를 하고 있는 것도 그런 취지다. 23일까지 받고 있으니 적극 참여해주시길 바란다.



#참고 자료 1 : 설립취지문


20세기 초 마산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 기지이자 수탈도시였다. 또한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위한 중간집결지였다. 경남 각지에서 끌려온 수많은 여성이 마산을 거쳐 중국과 동남아 등 일본군의 전쟁터로 배치됐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조선을 비롯한 전쟁점령지의 어린 여성들을 제국주의 군인의 성노예로 삼은 20세기 최대의 반인륜·반인권 국가범죄이다. 그렇게 인간의 삶을 무참히 유린한 일본 정부는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배상은커녕 인정조차 않고 있다. 한국정부와 사회도 그들의 피해와 고통을 외면해왔다. 


이러한 일본의 책임을 끝까지 묻고, 우리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미래세대에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일제 수탈의 현장이자 반제국주의 항일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를 세운다.


2015년 8월 15일 


일본군위안부창원지역추모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조형물 안내


이 조형물은 일본군 ‘위안부’로 참혹한 고통을 겪은 소녀를 통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꽉 쥐고 있는 두 손은 지키려는 의지를 나타내며 천은 한과 희망,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의미한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우리 국민들의 제대로 된 이해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얼굴 표정에서 발가락 끝까지 역사적 증인으로서의 긴장감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참여작가 : 하석원, 조란주, 윤귀화, 한경희


2015년 9월 21일 평가토론회


#참고 자료 2 : 인권 자주 평화 다짐비를 이곳에 세우는 의미


일제강점기 마산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위한 중심 전진기지이자 중간집결지였다. 뿐만 아니라 이 일대는 일제시대 주민운동의 센터였던 마산민의소, 각종 혁신정당과 사회운동단체가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3·15의거, 부마항쟁, 6월민주항쟁 등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들이 일어난 곳으로서 창원지역 그 어느 곳보다도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또한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잘 보이면서도 차 없는 거리로 혼잡하지 않고 오동동 시민문화광장 입구로 시민과 늘 함께 할 수 있어 대중접근성이 높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앞골목에는 3·15의거 발원지가 있고, 부마민주항쟁과 6월민주항쟁이 일어난 불종거리와 육호광장, 3·15의거탑,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 등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 등과 인접해 있어 근현대사 탐방코스로 가치와 교육연계성도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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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임금피크제의 진짜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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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노동개혁을 한다면서 임금피크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다 아시는대로 55살이 되는 해 임금을 최고로 삼아 정년이 되는 60살까지 해마다 10%를 줄여서 월급을 주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임금피크제를 하면 먼저 그에 해당되는 노동자들 노후 대비 여력이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나이에 해당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한 지가 30년 안팎입니다. 결혼한 지 30년 안팎이면 그동안 작으나마 집 한 칸 장만하고 자식들 낳아 기르고 공부시키고 출가시키고 하는 데에 자기가 버는 돈 대부분을 썼거나 쓰고 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지난 세월 땅이나 주식 투자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거나 아니면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하거나 하지 않으면 자기자신을 위해 모아놓은 재산은 거의 없기 십상이라는 얘기입니다. 


9월 16일 창원고용노동지청 앞에서 임금피크제 등 정부 노동 개편 정책에 반대해 삭발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경남본부 지도부. 경남도민일보 사진.


말하자면 이제 자식들 독립시키고 정년까지 남은 세월 일하면서 버는 돈은 노후 자금으로 삼으려 하는 세대인데요, 난데없이 다른 대책 없이 임금피크제를 한다면 참 난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난감함은 개인 문제로 끝나면 좋으련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인이 자기 힘으로 자기 노후를 책임지지 못한다면, 그것도 한둘 개인의 잘못이나 일탈이 아니라 정부 노동정책 탓에 그렇게 됐다면 결국 그에 대해서는 사회나 국가가 막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박근혜 정부 임금피크제를 두고는 현재 제기된 문제를 겉으로는 해결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더 크게 곪아터지도록 해서 미래로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밖에요. 


이처럼 중년 노동자한테 임금피크제를 강요해 그 여력으로 청년 고용을 늘이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작지 않습니다. 


8월 6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임금피크제 등을 밀어붙이겠다고 밝히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경남도민일보 사진.


임금정책은 기본이 노동과 자본 사이 소득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생산의 두 주체인 노동과 자본이 협력해 같이 생산한 재화를 얼마나 자기 몫으로 삼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바로 임금이고 이윤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피크제는 자본의 몫(이윤)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로(어쩌면 더 큰 자본의 몫을 상정하면서) 지금 주어져 있는 노동의 몫(임금)을 갖고 노동자들끼리 나눠가져라 하는 식입니다. 현재 임금 수준이 충분히 높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될 리가 절대 없습니다. 


청년 고용 문제의 해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임금피크제가 아닙니다. 규모와 업종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크게 전체로 보자면 지금 자본의 곳간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나는(특히 재벌이 더 그렇다) 반면, 노동의 지갑은 엄청나게 쪼그라들어(특히 비정규직이 더 그렇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본 특히 재벌의 곳간을 풀어 노동 특히 비정규직의 지갑으로 흘러들어가도록 해야 순리입니다. 재벌한테서 이윤을 줄이고 그것으로 청년 고용을 늘여야 맞다는 얘기입니다. 


이 뻔한 해법을 두고도 박근혜 정부는 줄기차게 중년노동자에게 노후 빈곤을 강요하는 임금피크제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정부가 앞장서 노동자들끼리 세대싸움을 부추기는 셈입니다. 


이 싸움에 세상 눈길이 온통 쏠리도록 함으로써 문제의 근원(재벌 문제)을 숨기는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태까지 감싸온 자본(특히 재벌)을 더욱 감싸고 돌면서 그 이익만 늘려주려 한다는 비판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훤주 

※ 경남도민일보의 9월 1일치 ‘데스크칼럼’으로 실은 글입니다. 시기가 조금 지난 듯하지만 그래도 일단 옮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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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자는 고용되지 않고 임금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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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개성공단 사람들(김진향 외 3명 지음, 내일을여는책, 279쪽, 1만 5000원)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사실 북한에 대해 별 흥미가 없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져오는 세습정권이자 1인독재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던 탓이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뜬금없는 '통일 대박' 발언도 그렇고, 그 상대편에 있는 민족주의 통일론자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성공단 사람들>을 읽은 건 순전히 친구 송성기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개성공단상회에 들러 셔츠와 속옷 등 몇 개를 샀는데, 이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 후 한동안 방치해뒀던 책을 오늘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은 김진향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교수가 강승환 이용구 김세라 등 인터뷰어들과 함께 쓴 책이다. 김진향 교수는 북한과 통일 문제를 전공한 학자로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5년간 대북정책을 수립, 집행했으며, 개성공단에서 4년간 대북협상을 담당했다고 한다.



책은 3개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파트 1은 김진향 교수가 쓴 '개성공단에 대한 기본 이해 : 오해와 진실'이라는 해설이고, 파트 2는 개성공단에서 직원 또는 주재원, 법인장 등으로 근무한 9명을 인터뷰한 것이다. 파트 3은 인터뷰어들의 방담과 김진향 교수가 개성공단 근무시절 에피소드를 일기체로 엮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동안 북한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던가를 깨달았다. 나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만 북한을 이해하려 해왔던 것이다.


나도 일선 기자 시절 당일치기로 개성공단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북한 노동자와 잠시 대화를 나눠볼 일이 있었는데, 자기네들 체제에 대한 확신과 우월감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만큼 개성공단에 차출된 노동자는 당성이나 사상이 확실히 검증된 이들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북한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들이 왜 그렇게 정신무장이 되어 있는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개성공단 기업의 한 법인장이 한 말이다.


"그들이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마다 갖는 '독보회' 시간입니다. 독보회는 신문을 비롯한 교양자료를 전체가 함께 모여 읽으면서 국가정책과 시사문제 등을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해주는 모임이에요.


언젠가 급히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날도 아침 독보회를 하고 있어서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이 중요하지 않는가?"라고 큰소리를 쳤더니 오히려 저에게 면박을 주더군요. "지금 당의 지령을 받고 있는데 몰상식하게 무슨 말씀을 하는 거냐?'고. 그래서 "아, 그런가? 몰랐다. 일이 긴박하니 답답해서 그런 거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 하고 말았죠.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집단주의의 한 모습을 본 거죠."


5만 3000여 명에 달하는 북측 노동자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200여 대의 통근버스(5만 명)와 자전거(3000명)으로 개성에서 공단까지 출퇴근한다. 6시쯤 공단에 도착한 이들은 각 공장별로 6시 40분부터 식당에 모여 '독보회'라는 생활총화를 한다고 한다. 북측 간부가 신문이나 책을 읽어주거나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또한 남측 법인장이나 주재원이라고 해서 북측 노동자에게 직접 지시를 하지는 못한다. '직장장'이라는 북측 노동자 대표를 통해 업무 지시를 해야 한다. 그만큼 집단주의가 체화해 있는 것이다.


개성공단에 오는 북측 노동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개성시와 인근의 가용노동력 대부분이 개성공단에 근무한다. 특별히 타 지역에서 선발되어 오지 않는다. 개성공단의 가장 큰 문제는 만성적 노동력 부족이다. 즉 기업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근로자를 공급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장군님의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큰 뜻을 받들고 어려운 남측 중소기업들을 도우러 온 것"이라는 것이다.


북측 노동자와 남측 노동자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도 있다.


"북측 근로자들은 기업-근로자 관계를 '고용-피고용' 관계로 설명하는 것에 당혹해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돈으로 사람의 노동력을 산다는 고용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개인 근로자들은 지역단위 인민위원회나 당이 지역 실정에 맞게, 개별 인민의 역량과 소질에 따라 기업소나 각종 기관, 사업소에 행정적 공적 차원에서 배치하는 것이다. 개인은 인민위원회와 당의 조치를 받들어 기업소에서 일할 뿐이다.


'임금을 주고 노동을 산다'는 자본주의 개념은 북측에서는 '돈으로 사람을 산다'는 불쾌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기업주들이 '임금을 주고 내가 고용한 사람'으로 북측 근로자를 인식, 간주하면 반드시 갈등관계에 빠진다."


그래서 한 남측 주재원의 이런 고백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직장과 직업, 노동의 개념이 우리하고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국가적 조치에 의해 직장에 배치받는 거니까요. 이것 외에도 회사는 원칙을 갖고 북측 근로자들을 대하려고 하지만 북측을 몰라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처음엔 우리 기준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요. 오해도 많았죠. 그런데 물질적 문제로 제가 화를 내면 그들은 쩨쩨하고 인색하고 괴팍하다고 생각하더군요. 심지어 '초코파이를 덜 줬다' 이런 것 때문에 쩨쩨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웃음)"


임금에 대한 개념도 우리와 다르다.


"임금의 대부분은 상품공급권으로 주어진다. 북측 근로자들의 임금은 자신들이 근로한 만큰 정확히 산정되어 달러 가치로 계산되며 매일 전체 근로시간에 대한 확인을 근로자들이 스스로 서명, 확인한다.


일반적으로 북측에서는 임금이라 하지 않고 생활비-노동보수(생황비와 가급금, 상금, 장려금 등으로 구성)라고 한다. 노동보수의 30%는 사회문화시책비(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시책운영기금)으로 공제하고 나머지 70%의 금액은 대부분 상품공급권으로 지급된다. 그 나머지만 북측 화폐(조선 원)로 지급된다.


상품공급권은 개성공단 근로자 대상 전용 상품공급소에서 쌀, 밀가루, 채소 등의 식료품과 생활용품으로 교환할 수 있다. 상품공급소에서 교환되는 상품은 국정가격이라 장마당 가격보다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상품공급권은 대부분 먹거리와 기본적인 생활용품 구매로 사용한다. 기타 생활비는 집단주의가 강한 체제 특성상 각종 상호부조(생일, 잔치, 장례 등)나 추가 생필품 구입 등에 쓰인다."



2013년 개성공단이 6개월간 가동 중단되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북측 노동자들은 그냥 쉬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다시 만났을 때) 보니까 살이 빠지고 많이 꺼칠해졌더라고요. 마음고생 많이 해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그렇다고 하는데, 그동안 집단근로하느라 힘들어서 그랬을 거에요. 보통 특근 없는 주말에는 집단근로에 동원되는데 월요일에 보면 얼굴 살이 축나 있곤 했거든요."


이 정도만 해도 북한 사회가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또한 개성공단은 어떤 곳인지,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개성공단의 진실은 무엇인지, 통일 여정에 개성공단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등을 설명해준다.


김진향 교수는 우리가 북한을 알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행복의 전제 조건인 평화를 위해서다. 평화와 안보는 국민생존권이 걸려 있는 절대국익의 영역이기에 이 문제를 둘러싼 사실관계들은 어느 영역보다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애초 계획대로 개성공단을 창원공단 규모의 거대 공단도시로 만들고, 이런 공단을 10개만 더 만들어 성공시킨다면 통일은 저절로 온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통일은 '통일비용'이 한 푼도 들지 않는 흑자통일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리 언론이 개성공단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 기사를 무책임하게 써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기자들부터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그리고 인건비 절감을 위해 동남아 진출을 고민하는 기업가, 통일을 고민하는 운동가, 아니 평화를 바라는 모든 국민이 읽으면 좋겠다.


개성공단 사람들 - 10점
김진향 외 지음/내일을여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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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경호실과 국정원에 대한 조현오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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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8화. 대통령 경호실과 국정원을 대한 조현오의 자세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경호는 어디서 하나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경호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경호 개념이 처음 나온 것은 1949년 내무부 훈령 제25조(경호 규정)다. 1945년 해방 이후 경호는 내무부 직속기관이었던 경찰 몫이었다. 청와대 경비와 대통령 경호 업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대통령 직속기관인 경호실을 만든다. 대통령 직속 경호실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나라에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하지만 경호실은 미국도 우리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과연 미국이 한국 경호실과 닮은 경우일까? 미국 예를 살펴보자. 미국 대통령 경호는 미연방보안업무(United States Secret Service)가 맡는다. USSS는 원래 대통령 직속 조직이 아니었다. 19세기 남북전쟁 때 주마다 화폐가 달라 위조지폐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했다. 화폐 위조범을 잡는 연방경찰 필요성은 점점 높아졌다. USSS는 위조지폐를 단속하고자 1865년 재무부 산하에 만든 조직이다. 그리고 1901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대통령 경호 업무를 맡게 된다.


USSS는 수사와 경호를 겸한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전에 경호팀은 수사로 돌아가고 다시 경호팀을 꾸리는 구조다. 경호 업무는 정권과 함께 순환한다. 클린턴을 경호했던 사람이 부시에게 고자질할 가능성을 굳이 남길 이유가 없다. 또 순환하지 않는 조직에는 기득권이 생긴다. 경호실장이 업무 영역을 넘어 권력 구조에서 정점이 될 수도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차지철이 대표적인 경우다. 정권 2인자로 군림해 군과 경찰 인사에 개입하고 국회까지 친위세력을 심어 정권을 농단하다 비극을 불렀다.


최근 사례를 보자. 대통령 퇴임 후 거주할 사저를 사들이는 것은 대통령 비서실 업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는 경호처장인 김인종이 사저 매입 업무를 도맡았다. 경호처장 힘이 정점을 찍었던 셈이다.


미국경호팀 현장근무요원은 45세 이상이 없다. 그런데 한국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2000년 김대중 정권 시절 경호실법 개정으로 경호실 직원 정년이 보장된다. 그러자 내부적으로 인사적체와 고령화 문제가 불거졌다. 젊은 인재를 뽑으려면 조직 확대가 필요하다. 조직이 확대되려면 업무가 그만큼 늘어야 했다. 마침 기회가 왔다. 2006년 5월 20일 한나라당 대표인 박근혜가 선거 유세 중 피습을 당했다. 국회는 여야 없이 '중요 정치인'도 경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을 제외한 인사 경호는 경찰이 담당했다. 전국 지방청과 경찰서 인력을 활용하고, 경호 행사는 관할 서장이 책임지고, 서 단위를 넘는 경비는 지방청 경비과장이 지원한다. 경찰청 경호과장은 지방청과 경찰서 사이에서 조율과 협력을 맡는다.


그런데 대통령 경호실법을 고쳐서 대통경 경호실이 대통령선거 후보, 국무총리, 국가 주요 인사에 대한 경호를 맡도록 법안 개정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관심은 대선 주자 경호 주체에 쏠렸다. 한나라당 의원인 김정훈이 발의한 '요인 경호법'에서 경호 주체는 경찰이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의원인 강성종은 '대통령 경호실법 개정안'으로 대통령 경호실 편을 들었다. 이러면 경찰과 경호실 관계는 수사에서 검찰과 경찰 관계가 되는 것이다. 외국에서 수상이 한국에 오면 경찰은 경호실을 뒷바라지하는 모양새였다. 경찰은 울화통이 터졌으나 경호실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경호실은 경찰청 경비국 인사에도 개입했다.


2006년 12월 4일 조현오가 경비국장으로 취임한다. 현재 경찰청 경비국은 경비과, 경호과, 항공과와 대테러 업무를 다루는 위기관리센터로 나뉜다. 그 중 경호실은 경호과장 인사에 개입하고자 했다. 조현오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이 상황을 경호실과 갈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인사 개입 자체가 부당한 것이었다. 조현오는 경호실, 검찰뿐 아니라 국가정보원과도 부딪혔다.


2010년 12월 평창동계올림픽유치단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대회 유치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에는 행사 안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겼다. 안전관리통제본부를 설치하고 안전대책위원회 위원장과 본부장은 국무총리와 경찰청장이 맡도록 했다. 보통 안전 문제는 경찰 조직이 컨트롤타워를 맡는 게 국제적인 관례였다. 테러가 발생하면 상황을 통제하고 폭발물을 처리하는 현장 조치는 기본적으로 경찰이 책임진다. 아울러 경비, 교통 관리, 화재 예방, 재난·재해 발생 시 구조·구급 활동까지 경찰 업무에 들어간다.


하지만 국정원은 '북한 위협'과 '테러 방지'를 앞세워 자기 조직이 총괄하겠다고 나섰다. 법적으로 대테러 업무를 맡는 기관은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러에 예민한 미국도 중앙정보국(CIA)이 국제경기대회 안전을 총괄하지는 않는다. 조현오는 이렇게 반발했다.


"그런 식으로 경찰 지휘하려고 하지 말고 경찰을 내줄 테니 가져가라."


국정원이 '북한 위협'이나 '테러'에 별로 반응하지 않던 때도 있었다. 2007년 말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 민주당 후보는 정동영이었다. 북한은 방송으로 보수 꼴통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여러 번 전했다. 북한은 오직 이명박만 공격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북한은 이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에게 늘 이런 공격을 했다. 북한이 선거에 개입하려면 어떤 방법을 쓸까.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쟁이 있겠지만 이는 군대가 맡을 영역이다. 폭발물 테러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방법에는 극소수 인원이 동원될 것이다. 조현오가 또 나섰다.


 

조현오는 대선 후보 경호인력을 늘렸고 경찰특공대도 투입했다. 또 선거 유세 장소 외곽 건물 옥상에는 저격수를 배치했다. 북한을 향한 위용 과시 목적으로 장갑차를 배치하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경호실을 차관급인 경호처로 낮췄다. 2013년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경호처장을 장관급인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승격했다.


2014년 제정한 '평창겨울올림픽 지원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은 안전 총괄자가 국정원장으로 돼 있다.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안전 관리 주체는 국정원이다. 경찰은 국정원 지휘에 따라야 한다.


조직에서 권한과 자긍심은 비례한다. 조현오는 어릴 적부터 경찰을 동경했고, 잘 나가던 외무부 생활을 접고 경찰로 옮겼다. 하지만 경찰 구성원도 조현오만큼 경찰 조직원으로서 자긍심이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로 살기에는 여러 가지 환경이 열악했다. 조현오는 경찰청장이 되고 시간외 수당, 수사비 등을 정비해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춰주고자 했다.


성과를 외부에 선전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장자연 사건 수사는 경찰이 완벽하게 해냈고 쌍용차 진압 작전도 경찰이 변수 없이 잘했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발언은 국민정서와 멀었다. 장자연 사건은 장자연 사망으로 경찰 수사 한계를 인정해야 했고 쌍용차 진압 작전도 경찰특공대에게 몽둥이세례를 당한 해고 노동자에게 유감을 표하며 고개 숙여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 거론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비판도 일었다.


공권력을 향한 국민정서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 집회가 불법사태로 번지면 경찰은 진압할 수밖에 없다. 경찰 진압을 충돌이라고 하고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영미법계에서는 없는 일이다. 영미법계는 공권력이 무척 센 편이며 법에 대한 도전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대륙법계는 상대적으로 공권력이 약하다. 그렇더라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 시위는 강도가 약한 편이다. 2011년 유럽에서 시위 현장을 목격한 한 경찰은 프랑스 시위 강도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처럼 조직적이지는 않지만 경찰에게 돌을 던지거나 시위 현장에 총기가 등장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2005년 프랑스에서는 이민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적으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시위자들은 자동차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고 경찰을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내무부장관인 사르코지는 강경하게 대처했다. 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을 발사했고 경찰 진압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불거지는 경찰을 향한 비판 역시 우리와 비슷하다. 법 준수보다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는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시민을 때리는 것보다 시민이 경찰을 때리는 게 훨씬 건강한 사회 아닌가요? 인권이 진전된 것이지요."


하지만 경찰을 지휘하는 조현오 생각은 달랐다. 그는 두 가지를 항상 강조했다. 공권력이 절대 밀리면 안 되고 경찰과 시민 모두 다쳐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2007년 경비국장이던 조현오는 경비과장으로 장전배를 요청한다. 장전배는 조현오가 부산동부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있을 때 같은 경찰서에서 경비과장을 했다. 일을 다부지게 잘했고 추진력이 좋았다. 장전배는 2010년 치안감 승진 명단에도 포함됐다.


조현오는 장전배에게 2008년부터 신형 진압복을 보급하도록 지시한다. 신형 진압복은 프랑스 경찰관 기동대 보호복을 참고했다. 두께가 4밀리미터인 플라스틱 보호대를 두꺼운 섬유로 옷처럼 이어 붙여서 가슴, 어깨, 팔, 무릎을 보호하도록 한 것이다. 가슴 보호대는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전까지 경찰이 입었던 것은 대나무 진압복이었다. 두꺼운 솜옷 사이에 대나무 조각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이 진압복을 입은 경찰은 모양새는 둘째 치고 쇠 파이프를 견딜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조현오도 경찰이 되고 이 대나무 진압복을 입었다.


1997년 5월 31일 한양대에서 한총련 사태가 벌어졌다. 출범식에 참가하려는 학생이 전날부터 전국에서 모였다. 경비를 담당할 경찰 중대(부대)도 전국에서 모였다. 전의경 중대 인원은 150명 정도였다. 각 중대는 경감이 통솔했고 3~4개 중대를 격대장이 맡았다. 조현오는 격대장이었다. 경찰은 한양대 주변에 전의경 53개 중대 6400여 명을 배치해 학생 출입을 차단했다. 학생들은 출입을 막는 경찰에게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포위된 부대도 있었다. 조현오가 한양대 전철역에 고립된 부대를 구출하라고 지시했다. 조현오는 부대원들에게 이렇게 외치며 앞장섰다.


“나를 따르라!”


전철역사 사방에서 화염병과 돌이 날라 왔다. 목적지에 도착한 조현오가 뒤를 돌아보자 끝까지 따라온 이들이 없었다.



경찰서에 돌아온 조현오는 진압복을 하나씩 벗었다.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2005년 경찰청장인 허준영은 경찰 직원을 유럽에 보냈다. 프랑스 경찰관 기동대 보호복은 접한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보호복을 입고 맞았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보호복은 ‘로보캅’ 그 자체였다.


(다음 19화 –장비개발. 덧붙임: 이 연재는 총 20화입니다. )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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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과 섬진강,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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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① 


경남도민일보가 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한 '우리 강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활동이 지난 7월과 8일 두 달 동안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첫 날은 낙동강과 섬진강을 찾아가 취재하고 이튿날은 취재한 내용을 가지고 몸소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언론재단이 지원한 이번 프로그램에는 창원 창덕중학교(7월 2~3일) 진주 개양중학교(7월 9~10일) 창원문성고등학교(7월 15~16일) 김해여자중학교(7월 22~23일) 양산여자고등학교(8월 11~12일) 합천 삼가고등학교(8월 13~14일) 학생들이 함께했습니다.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는 2012년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사회적 기업으로 경남도에서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역사·문화·생태·교육·사회 등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도록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경남도민일보가 보도를 통해 우리 사회에 요청이 된다고 말해온 가치들을 단지 주장만으로 그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현실에서 작으나마 한 번 실천을 해보자는 취지입니다. 


걷기 어려울 정도로 진창이 된 낙동강 호국의병의숲 공원(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우리 강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은 먼저 의령군 지정면 창녕함안보 북쪽 낙동강 호국의병의 숲 공원과 하동군 하동읍 섬진강 송립공원·모래밭을 둘러보고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아봤습니다. 


공통점은 간단했습니다. 이 강이든 저 강이든 모두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 손을 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연 그대로인 강은 없었습니다. 당연한 이치랍니다. 사람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은 사람이 자기들 삶에 이롭도록 자연을 이리저리 바꿀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요. 


블록을 깔아놓은 데에도 우묵하게 풀이 자라 있는 낙동강 호국의병의숲 공원.


하지만 손대는 방법과 태도는 크게 달랐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4대강 사업으로 자연성을 잃었지만 다른 하나는 자연성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찾은 낙동강 호국의병의 숲 공원에서 학생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4대상 사업의 결과로 들어선 호국의병의 숲 공원은 자본이 많이 투자되기는 했지만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까운 이웃에 사는 사람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고 이따금 자전거가 지나칠 뿐이었습니다. 


4대강 사업에 쓰였을 준설선과 굴착기가 녹슬고 있었고 길은 우레탄이 깔려 있는 데는 걸을만했지만 나머지는 우묵하게 자란 잡초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4대강 사업에 쓰였던 준설선이 낙동강 호국의병의숲 공원에 내버려져 있습니다.


일대가 원래는 수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편으로 굴곡이 있는 땅이었지만 지금은 수면보다 제법 높은 상태에서 평탄해져 있었습니다. 4대강 사업으로 생겨난 준설토를 들이붓고 고른 때문이지요. 그래도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서 한 번씩 들르는 모양인지 육각 정자는 때로는 깔끔해져 있었습니다. 


호국의병의 숲 공원은 남강이 낙동강과 합해지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두 물이 만나는 어귀에는 그래도 자연 그대로 자라난 왕버들이 몇 그루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새로 심은 나무들이었습니다. 의자를 놓고 천막을 치고 무대를 만들고 한 자리에는 잡초가 억새와 더불어 무성했습니다. 


옛날 건너편 창녕 남지로 배를 타고 건너는 나루였던 자리에는 나무 데크가 깔려 있었습니다. 강물 흐르는 데로 사진을 찍으러 갔던 학생 몇몇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물이 깊어서 조금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 보여요." 


이 또한 당연한 노릇입니다. 2010년부터 이태 동안 4대강 사업을 하면서 강물에서 바닥까지 6m가 되도록 파낸 결과였습니다. 


낙동강 호국의병의숲공원에 있는 화장실을 학생들이 사진에 담고 있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안은 완전 더러웠습니다.


돌아나오는 길에 들른 화장실은 또다른 놀라움이었습니다. 겉보기는 그럴 듯했지만 내부는 완전 파리와 굼벵이 천지였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은 무심결에 들어갔다가 "으앗!"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기 일쑤였답니다. 학생들은 그래도 취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들어가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현장에 가기 앞서 취재하는 데 쓰일 지표를 세 가지 일러줬습니다. △사람이 찾아오기 쉽겠는지 △관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겠는지 △다른 생명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현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모습을 찾아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으면 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현장도 단순했고 학생도 단순했습니다. 학생들은 왜 이렇게 사람이 찾아오지도 않는 데다가 굳이 돈까지 들여가면서 공원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원을 학생들은 무더위도 아랑곳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취재했습니다. 


섬진강 모래밭에서 모래를 갖고 노는 학생들 모습.


점심을 먹고 찾아간 섬진강 모래밭과 송림공원은 학생들한테 "우와!" 감탄을 안겼습니다. 학생들이 버스에서 내리면서 가장 반가워한 것은 솔숲 시원한 그늘이었습니다. 의령 낙동강 호국의병의 숲 공원에는 그늘이 없었던 것입니다. 


잘 자란 소나무가 늘어선 송림공원에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느긋하게 한 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앞서 들른 호국의병의 숲 공원에도 하동 섬진강 송림공원과 마찬가지로 운동기구가 있었지만 거기 매달려 운동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 바퀴 돌아보면서 사람과 나무와 바닥과 시설을 취재했습니다. 


하동 섬진강변 송림공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셀카를 찍고 있습니다.


하동 섬진강 송림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


모래밭은 또다른 느낌을 선물했습니다. 강물에 잠긴 땅과 이 쪽 언덕배기를 부드럽게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호국의병의 숲 공원에서 본 '단절'이나 '차단'은 없었습니다. 대신 ‘연결’과 ‘순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모래가 갖는 느낌을 몸소 누려보기도 했습니다. 햇볕을 받아 뜨거웠으며 고슬고슬 작은 모래는 부드러웠고 함께 박혀 있는 자갈은 좀 아팠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살짝 따가우면서 간지러웠습니다. 


김해여중 학생들의 모래밭 체험 취재.

창원문성고 학생들의 모래밭 체험 취재.


물가에까지 뛰어간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낙동강 그 어디예요? 호국의병의 숲은 물이 흐렸는데, 여기는 너무 맑아요. 물 속에 사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아요." 강물에 첨벙첨벙 들어가 모래를 휘젓고 뒤집으며 재첩도 잡았습니다. 물이 주는 즐거움과 시원함을 온몸으로 취재한 셈이었습니다. 


다섯 또는 여섯씩 모둠을 이룬 학생들은 잡은 재첩을 한 군데로 모았습니다. 죽 늘어놓고는 가장 많이 재첩을 잡은 팀에게 과자를 선물로 안겼습니다. 작은 즐거움인데도 내지르는 환성은 컸습니다. 


이렇게 잡은 재첩을 사진으로 담은 뒤에는 함께 뒤섞여 재첩을 잡던 할머니들한테 넘겨주고 돌아나왔습니다. "적선 잘~ 했다." 뿌듯해진 학생들이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또 한 번 웃음보를 터뜨립니다. 


하동 섬진강에서 학생들이 재첩 잡는 즐거움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이 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첩 으뜸 산지는 섬진강이 아니고 낙동강이었었지요. 그러다 낙동강하구둑을 지어 강물 흐름이 막힌 뒤로는 재첩을 찾아보기 어려운 강이 됐고, 이번 4대강 사업으로 아주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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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에는 왜 지방자치 전문기자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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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 된다.”


요즘 내가 종종 인용하는 신영복 선생의 말이다.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에서도 변방이 창조 공간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이 8대 2에 머물고 있는 ‘2할 자치’에선 가능성조차 없다.


세금뿐 아니다. 온 나라 각 지역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 코 묻은 돈까지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 편의점이 싹쓸이해가는 시대다. 전통시장은 대형마트가, 동네서점과 동네식당도 대형서점과 프랜차이즈가 장악했다. 병에 걸려도 서울로 간다. 2014년 지역 환자 266만 명이 약 2조 8000억 원을 수도권 원정진료에 사용했다. 10년 전 1조 1000억 원과 비교해 2.6배나 늘었다.


시장·군수, 시·군의원, 도의원들은 공천에 목이 매여 국회의원의 하수인이 된지 오래다. 도지사쯤 되면 대통령병에 걸리거나 중앙정치에 진입하려고 역시 목을 맨다.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은 ‘인 서울’에 목을 매고, 부모들 역시 아이를 서울로 보내기 위해 돈을 펑펑 쓴다. 서울 진입에 성공한 아이들은 부모가 지방에서 번 돈을 쓰며 학교를 졸업한다. 그들 대부분은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수도권에 남는다. 한 조사에서 부산 출신 서울 학생의 회귀율은 9.5%에 불과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출세하면 ‘개천에서 난 용’이 된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그렇게 용이 된 이들에 대해 “자신이 놀던 개천을 고맙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흉보고 깔보는 못된 버릇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전국의 지자체들은 ‘인 서울’에 성공한 대학생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서울에 기숙사를 짓고 운영한다.


우리나라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8대 2인데 비해 독일은 연방정부 42%, 지방정부 53%다. 스위스는 연방 34%, 광역지방정부 42%, 기초지방정부 25%다.


얼마 전 토론회에서 만났던 이기우 인하대 교수는 “국가가 모든 권한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과부하로 인해 어느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는 기능마비에 걸려 있다”면서 세월호 참사를 예를 들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40분 동안 지시권을 가진 중앙정부는 너무 멀리 있었고, 현장에 있는 진도군수와 전남지사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국가는 골목길 주차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의욕도 없으면서 지방자치단체가 차고증명제 조례를 제정하면 권한이 없다 무효라고 한다는 예도 들었다.


국가가 돈을 틀어쥐고 지역발전도 국가가 주도한다. 지역개발사업에 엄청난 돈을 퍼부었지만 정작 투자한 만큼 지역발전이 이뤄진 건 없다. 지방에 그 돈을 주었더라면 그 사업에 쓰지 않을 일이 너무 많다. 대표적인 게 내가 살고 있는 창원 가포신항 사업이다. 3269억 원을 들이부었지만 드나드는 배가 없다. 게다가 그 사업으로 나오는 준설토를 처리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해 인공섬을 만드는 ‘뻘짓’까지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교수는 “지방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지방에 입법권과 집행권을 넘겨주고 국가는 국방이나 외교, 금융과 같이 정작 국가가 나서 해결할 수 있는 큰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권론자들은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을 만들어 분권형 개헌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안타까운 건 전국 지역신문에 ‘지방분권·지방자치 전문기자’가 없다는 것이다. 강원도민일보 김중석 사장이 있지만, 그는 지금 기자가 아니다. 서울 언론에는 ‘정치전문기자’가 널렸는데, 왜 지역신문엔 왜 이 분야 전문기자가 없을까. 나는 전국의 모든 지역신문 기자는 지방분권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책과 논문도 읽고, 강의도 들어야 한다. 당장 강준만 교수가 비분강개하여 쓴 <지방식민지 독립선언>(개마고원)부터 읽자.


신영복 선생은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그게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이라고 했다. 기자들부터 분권정신으로 무장해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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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이어준 아름다운 인연 정도선-박진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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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10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아름다운 부부가 있습니다. 산청에 살고 있는 정도선·박진희 부부입니다. 정도선 씨는 진주문고라는 서점에서 일합니다. 박진희 씨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정도선 씨가 서점지기가 된 것은 열 살 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산에서 충남 홍성으로 이사를 했는데, 낯선 곳에서 그의 마음을 채워준 곳이 동네서점이었다고 합니다. 서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볼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그때 늘 바닥에서 책을 보는 아이가 안쓰러웠던 서점 주인아저씨가 체구에 맞는 등받이 의자를 갖다 줬답니다. 그때 어루만져진 마음이 '서점 주인'이라는 로망을 갖게 해줬다는 겁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나왔을 때 이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쓴 천문학적인 비용을 고발하는 책 <MB의 비용>을 나란히 진열하면서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는 문구를 적어놓아 화제를 낳은 장본인입니다. 또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했을 때는 '경남도지사에게 권하는 책'이라는 문구와 함께 <개념원리 수학1>, <밥값 했는가>,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잡놈들 전성시대>,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는 책을 진열하기도 했죠.


그는 서점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서점에서 이런 걸 하느냐'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이게 서점의 역할이라고 봐요.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닌 지역 현안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곳,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획을 하고 유익한 행사가 열리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도선 박진희 부부. @경남도민일보 서정인


정도선 씨는 아내 박진희 씨와 함께 최근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마음의숲)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은 책을 매개로 운명처럼 만나 숙명처럼 결혼하게 된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결혼 2개월째 청천벽력과도 같은 '희귀 척추암' 판정을 받은 아내와 함께 세계일주여행을 떠났고, 이후 산청에 터 잡고 진주에서 일하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는 슬프기보다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이 부부를 '피파'(<피플파워>)가 만났습니다. 이들의 가슴 아린 이야기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강오백리 스토리텔링 마무리합니다


혹 지난해 지방선거 때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윤원필 씨 기억하시나요? 명함에 추레한 얼굴과 말끔해진 얼굴 사진을 함께 싣고 '이만큼만 서울을 바꾸자'는 슬로건을 배치했던 그 후보. 알고 보니 창원 출신이었군요. '피파'가 만나봤더니 음반을 낸 음악인이기도 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지면에 유일하게 '노동자'라는 직업명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박보근 씨를 다시 만나봤습니다. 시(詩) 쓰는 농민에서 조선소 사내하청 그라인더 노동자로 변신한 그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김태훈 소장의 '도시와 스토리텔링'은 스포츠를 다루었습니다. 운동으로 연결된 시민들 또한 연대와 소통의 커뮤니티이며, 시민들의 체육활동은 따라서 현대 도시의 중요한 스토리텔링 인프라인데 우리나라의 체육 정책은 그걸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시의 시민 공동체를 재건하고, 시민의 연대감과 결속을 강화하는 관점에서 도시의 체육 정책을 리모델링해야 한다"는 김 소장의 말은 경청해볼만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알고 사랑하며 가꾸어나가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공익콘텐츠 발굴기획 '남강오백리'가 이번호를 끝으로 마무리됩니다. 남강댐과 남강 수계를 관리하고 있는 정의택 K-water 남강댐관리단 단장을 만나 그 가치를 알아봤습니다. 이번호로 마무리되는 '남강오백리' 시리즈는 남강을 스토리텔링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물이라 자부합니다.


'지역출판이 없으면 지역콘텐츠도 없다. 지역콘텐츠가 없으면 지역의 정신문화도 사라진다'는 모토로 꾸준히 지역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저희가 최근에 두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남석형 외 3명 지음, 716쪽, 도서출판 피플파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유족 증언자료집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박영주 기록, 275쪽, 도서출판 해딴에)가 그것입니다. 이 책들도 많이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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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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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후마니타스)의 작가 서형이 이번엔 조현오를 만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허위발언'으로 8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바로 그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다.


서형 작가는 사법피해자 취재를 전문으로 해왔다. 취재 중 조현오 전 청장의 다른 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의 진면목을 취재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현오'라는 이름 석자는 차명계좌 발언 하나만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있는 사람. 이명박 정부의 경찰청장이었다는 것으로도 다른 쪽 진영에선 공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몇몇 매체에 연재를 타진해보았으나 모두 난감한 기색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블로그 '지역에서 본 세상'은 그런 세간의 시선에 개의치 않기로 했다. 글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니까. 근거없는 비난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글만 아니라면 이 블로그는 글쓰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편집자 김주완]



[구겨진 제복]19화. 조현오가 도입한 시위 진압 장비들


조현오가 경찰에 입문한 1990년에는 전국에 집회·시위가 많았다. 1990년 1월 22일 대통령 노태우와 민주당 총재 김영삼, 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며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생긴다. 전국에서는 3당 합당 반대 시위가 잇달았다. 부산도 마찬가지였다. 조현오는 금정경찰서 생활안전과장이었지만 시위가 열릴 때마다 경비를 담당했다. 부산대학교 옛 정문이 조현오 담당 구역이었다. 조현오는 당시 전·의경이 불편한 군화를 신는 것이 이상했다. 집회·시위를 관리하려면 움직이기 편한 운동화가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변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냥 경찰청에서 주는 거 입고 먹고 할 것이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당시 경찰 경비 복장은 대나무 진압복과 방석모, 알루미늄 방패였다. 방석모는 1963년 미제 군용 헬멧이다. 헬멧에 얼굴을 보호하는 철망을 붙였고 머리 뒷부분에 보호덮개를 붙였다. 1996년 눈 부위만 철망 대신 투명판으로 바꿨으나 쓰기에 여전히 무거웠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경찰이 사용하는 알루미늄 방패는 시위자에게 위협적이었다. 경찰청도 이를 개선하고자 휘어지면서 방어 기능을 할 수 있는 소재로 방패를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부품 생산부터 시작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2006년이 되자 '안전방패'가 출시됐다. 청장은 이택순이었고 조현오는 감사관을 할 때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정두언이 안전방패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신제품은 본체와 손잡이를 나사 두 개로 연결해서 고정했다. 그런데 일정한 압력을 주자 손잡이가 분리됐다. 정두언은 불량을 지적하며 국정감사에서 유착 의혹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뉴스가 나오자 방패 개발을 담당했던 직원을 대상으로 경찰청 자체 감사가 시작됐다. 개발 과정에서 유착이 없더라도 사소한 실수가 지적돼 물의를 일으키면 경찰 위신이 떨어질 게 뻔했다. 이것만으로 인사 조치나 문책이 따르는 사안이었다. 이런 감찰 결과는 경찰청장에게 보고된다. 청장도 실무에서 올라온 의견에 이견이 없으면 결제할 것이다.


보고 계통이라는 게 이렇다. 경찰청장에게 보고는 실무 책임자인 과장(총경) 몫이다. 업무를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청장 처지에서도 계급 차이가 나는 과장에게 지시하는 게 편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택순에게 보고서를 들고 나타난 이는 감사관인 조현오였다. 조현오는 비리가 없는데 문책을 하면 누가 적극적으로 장비 개발에 나서겠느냐고 되물었다. 정두언을 설득하는 것도 책임지겠다고 했다.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조현오는 정두언에게 조사 결과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안전 방패는 나사를 2개에서 3개로 늘려 약점을 없앴고 지금도 잘 쓰고 있다.


2007년 경비국장이 된 조현오는 전·의경을 포함한 경찰관 부상자 통계를 접한다. 2005년 893명, 2006년 817명이었다. 조현오가 경찰이 되고 17년이 지났지만 장비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조현오는 장비 개발을 서둘렀다. 경찰청 장비과에서 맡는 일이지만 모든 장비를 개발하도록 맡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통 경비·교통 분야는 장비를 자체 개발하는 편이다.


2008년 프랑스에서 접한 진압복을 참고한 신형 진압복 보급에 매진했다. 또 전·의경이 신는 군화를 운동화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2007년 10월에는 신형 방석모를 개발했다. 철망을 모두 제거한 자리에는 투명 플라스틱판을 부착했다. 그래도 조현오가 보기에는 부족했다. 여름철 집회·시위를 관리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장비였다. 조현오는 방석모 안에 소형 선풍기를 설치하든, 냉매를 부착하든 아이디어를 내라고 재촉했다.


살수차를 본격적으로 보급한 것도 이 시기다. 살수차는 생산은 예전부터 했지만 현장에 투입하지는 못했다. 살수차 투입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한 경찰은 집회·시위 관리에서 조현오가 아주 질색하는 장면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현장 폴리스라인에 여경을 배치하는 것이다. 집회·시위 참석자가 움츠러들게 해야 하는데 여성을 내세우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뭘까.


"명박산성? 조현오는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을 아주 싫어하지요. 막아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그 단계로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쪽이에요."



물론 집회·시위를 관리할 때 시민과 경찰이 모두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경찰이 집회 참석자를 상대로 무리하게 대응한다는 비판은 언론이 단골로 다루는 내용이었다. 조직 상부를 비롯해 청와대에서 나오는 검거 지시에 맞추려면 변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경찰이 서로 피해를 줄이면서 검거할 방법으로 개발한 게 채증이다. 조현오는 경비국장을 하면서 채증 장비와 인원을 대폭 늘린다.


조현오는 직원에게 안전하게 시위자를 검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물을 던지면 시위자가 잡히는 그물을 개발해보라고 한 것이다. <수호지>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이라는데 당시 지시를 받은 직원은 무모한 아이디어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물이 서로 피해 없이 시위 참가자를 검거하는 방법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봉을 잘못 휘둘러도 폭력으로 규정하는 분위기에서 그물망으로 시위자를 검거하는 방법이 용납될 리가 없었다. 당시 기자실에서 기자와 얘기하는 것을 즐겼던 조현오는 장비 개발 이야기도 꺼냈다. 그 직원은 조현오가 그물망 이야기를 불쑥 꺼내자 “이건 아이디어다, 스케치하는 차원이다, 절대 개발하지 않는다, 계획에 없다”며 뒷말을 막느라 혼을 뺐다.


조현오는 이런 아이디어도 냈다. 2007년 <황우화>(장예모 감독)가 개봉됐다. 황제(주윤발)를 몰아내고자 황후(공리)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영화 후반부 모든 것을 꿰뚫었던 황제는 반란군이 궁 안으로 쳐들어오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차벽으로 진입을 막고 화살로 반란군을 몰살한다. 이 영화를 본 조현오는 바로 집회 현장에 적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온 게 '차벽 트럭'이다.



스위치를 켜면 트럭에 접혀 있던 방호벽이 작동하면서 폭 8.6미터, 높이 4.1미터 '이동식 장벽'으로 변신한다. 이 방호벽은 쇠 파이프나 대형 망치로 내리쳐도 손상이 없었다.


조현오 경비국장 시절, 2007년 연말, 대통령 선거를 치뤘다. 당선자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은 노동자보다 기업 이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금속노조 전체 판을 예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시작이 쌍용자동차 사태다. 2009년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된다. 2009년 5월 22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총고용보장, 정리해고 불가와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경찰과 해고 노동자 양쪽 모두 총역량을 쏟아부었다. 우선 노동자부터 살펴보자.


금속노조는 핵심사업장인 쌍용차 지부를 지원하는 투쟁에 들어간다.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 2001년 대우자동차 사태를 거치면서 학습한 게 있었다. 현대자동차 사태는 강성 투쟁으로 사측을 압박해 정리해고 인원을 줄일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우자동차가 공권력에 밀린 원인은 도장 공장을 점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됐다. 쌍용차 지부에는 모든 투쟁 전술이 전수됐다. 쌍용차 노조는 2009년 5월 21일 총파업 선언, 22일부터 공장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8월 6일까지 77일 동안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 쪽을 보자. 경찰은 2005년 오산 철거민 망루 시위에 대응하면서 배운 게 있었다. 농성이 54일 동안 진행되면서 철거민은 옥상에서 경찰을 향해 새총을 쏘고 골프공을 날렸다. 그러자 경찰도 똑같이 새총을 만들어 철거민을 향해 쐈다. 한 소대장은 골프채를 갖고 와서 철거민이 던진 골프공을 놓고 샷을 했다. 그 일로 소대장은 승진하지 못한다. 법이 규정한 장비를 쓰지 않으면 승진이 막힌다는 사실이 경찰 조직에 각인됐다.


2009년 1월 19일 용산사태가 벌어졌다. 망루 시위 하루 만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고 철거민 5명과 경찰관 한 명이 사망했다. 경찰 작전이 무리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찰은 작전을 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명분과 여론을 등에 업는 게 중요했다.


쌍용차 노동자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볼트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은 불법행위로 규정했지만 여론은 '밥그릇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라며 동정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경찰 지휘부는 경찰이 피해를 당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노동자에게 최루액을 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론은 '인체에 유해하다', '한 해 소비량 90%를 쏟아부었다'며 비판했다. 경찰은 최루액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장비 관련 규정에 근거한 장비이며 그해에는 최루액을 쏠 다른 시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경찰도 지키고 작전 수행에도 효과적이며 언론 비판도 피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첫 장비가 바로 조현오가 ‘트로이목마’에서 착안한 '방패막'이었다. 방패막은 상단은 투명판, 하단은 철판을 부착하고 방패 아래에 바퀴를 부착해 이동할 수 있었다. 경찰은 볼트총과 화염병 공격에도 방패막을 움직이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장비만으로 안전한 집회·시위 관리가 가능하지는 않았다. 전·의경도 시위자가 휘두르는 쇠 파이프에 대응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경찰봉으로 시위자를 때리고 발로 밟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무엇보다 부대원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했다. 경비국장 시절 조현오는 집회·시위현장에서 지휘관을 소대원 앞에 세웠다. 부대원 30명 정도는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조현오는 부대 운영을 계속 고민했다. 1997년 한양대 한총련 사태 때 경험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조현오는 당시 고립된 부대를 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현오는 부대장을 모아놓고 따라오라 지시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에 도착하니 고립된 부대가 없었다. 혼자 실컷 돌만 맞은 조현오는 부대장들에 지방청에 보고하겠다며 화를 냈다. 물론 말뿐이었다. 부대장 처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에서 부대가 모였는데 현장에서 만난 부대장과 격대장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충성심이 생기기는 어려웠다. 조현오는 경비국장 시절 격대장과 단위 부대장은 서로 신뢰하는 사람을 묶어 부대 배치를 하도록 했다.


부대 사이 의사소통도 중요했다. 조현오는 경기지방경찰청장 시절 무선망을 복수로 운영한다. 한총련 사태 때 고립은 결국 단일 회선에서 무선을 남발하며 소통이 막힌 게 원인이었다. 조현오는 총경이 사용하는 망은 따로 운영했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은 쌍용차 진압작전에 총투입됐다. 조현오는 1998년 현대자동차 사태도 겪었다. 여기에 2006년 평택 미군기지 이전 작전에 투입됐던 참모도 뒤를 받쳤다. 계획을 세울 때 현장을 답사해 거리 계산, 도로 상황 파악, 이동 방법, 차단 방법, 장애 요인 등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쌍용차는 워낙 공장이 크고 공간도 복잡해 더 많은 분석과 판단이 필요했다.


(다음20화. 최종화-쌍용자동차 진압작전)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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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따라 여탕에 들어갔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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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절 치레가 많았던 시절 


추석 이틀 전인 9월 25일 경남 창녕 부곡온천에 가서 ‘추석 치레’로 목욕을 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이런 ‘치레’가 많았습니다. 가난이 넘치고 모자람이 많았던 때문이겠습니다. 


옷도 설과 추석에 치레로 장만했습니다. 평소 임의롭게 사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평소 입는 옷은 그야말로 남루해서 설이나 추석 때 입고 나가기 민망할 정도였기 때문일 테지요. 신발 장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연히 머리 깎는 이발도 명절 치레였고 목욕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치레로 때 밀러 간 공중목욕탕이 참으로 썰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예닐곱이었습니다. 25일이 금요일 평일이고 제가 있었던 때가 오전임을 감안한다 해도 무척 적은 숫자였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목욕을 ‘명절 치레’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새삼스럽지도 않게 실감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또한 설 치레 추석 치레로 공중목욕탕에 간 기억이 30년 안쪽으로는 없더군요. 


2. 목욕탕에서 마주친 같은 반 여자아이 


어쨌거나 목욕을 마치고 옷장 있는 데로 나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몸에서 훔치는데, 그야말로 뜬금없이 국민학교 3학년 때 목욕탕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엄마 따라 여탕에 갔었는데, 전에도 엄마 따라 여탕에 간 적이 통 없지는 않았지만, 그날따라 별나게 국민학교 같은 반 여자애랑 마주친 것입니다. 



지금 그 친구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친구 표정은 기억에 뚜렷합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좀 놀란 듯한 것이었고요(그런데 저는 저 친구가 왜 저러나, 속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 똑바로가 아니라 비켜선 듯이 지긋하게 꽤 오랫동안 쳐다봤다고 기억돼 있습니다. 눈이 좀 큰 편이었지요. 


저는 엄마 등살에 밀려 탕 안에 들어가 살갗이 벌겋게 되도록 있다가 나와서 엄마 손길을 따라 이쪽저쪽 ‘이태리타올’로 때밀이를 당해서 살갗이 벌겋게 돼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포 돌기가 좀 상해서 피가 나기 직전인 상태로 통째 빨갛게 돼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목욕탕 안은 온통 뿌옇게 수증기가 피어올라 사람 분간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는데, 그 여자애 얼굴은 어째서 제게 그렇게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그 까닭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마도 그 뒤로는 제가 엄마가 억지로 가자 해도 여탕 ‘출입’을 삼갔지 싶은데요,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애 지긋한 눈길의 ‘이건 아니잖아’ 그 뜻하는 바를, 뚜렷한 지각(知覺)으로는 아니지만 어렴풋한 눈치로는 알아차리지 않았나 싶기는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때 저는 남자가 아닌 아이였는데, 여탕에서 같은 반 여자애랑 만나지고나서부터는 같은 아이라도 남자가 다르고 여자가 또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제게 희미하게나마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3. 누가바 열여섯 개를 살 수 있었던 목욕비 


어쨌거나, 제가 국민학교 3학년일 어름에는 목욕비가 800원이었다고 기억돼 있습니다. 어떻게 기억하느냐면, 엄마가 저를 목욕탕 아닌 집에서 목욕 시킬 때, 가슴짝을 밀고 등짝을 밀고 다 씻기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 갈아입어라 이럴 때 엉덩짝을 툭 두드리면서 “아따, 오늘 800원 벌었다!” 이러시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좀 외설적인가요? 하하.


추운 겨울에는 그것도 두 달에 한 번 꼴로 목욕탕 신세를 졌지만, 좀 따뜻해진다 싶으면 그 때부터는 거의 언제나 집에서 빨간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목욕을 했었습니다. 추울 때도 적지 않게 집에서 목욕을 했는데요, 참 추웠다는 기억이 아직도 있습니다.(엄마는 또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 때 800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제가 국민학교 4학년인 1973년에 해태제과에서 누가바가 처음 나온 줄로 아는데요, 그 때 그것 하나에 50원을 했습니다. 그 때 새로 나온 해태제과 롯데제과의 아이스크림은 읍내 얼음집에서 팔던 아이스케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맛이었습니다.


당시 목욕 한 번 가는 돈으로 그러니까 그렇게 멋지고 맞나는 누가바를 열여섯 개씩이나 살 수 있었는데요, 지금 누가바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 차례 목욕비로 열여섯 개를 먹을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4. 우리는 왜 목욕을 싫어했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때 공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일은 설이나 명절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호사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우리가 그런 호사를 좋아했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목욕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아마 자유롭게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목욕을 할 수 있었다면, 때를 밀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랐겠습니다. 우리는 목욕탕도 싫었고 목욕도 싫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고역이 바로 목욕이고 목욕탕 출입이었습니다.



지금은 같은 목욕탕이라 해도  보기 어려운, 뿌옇게 피어올라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김(=수증기)가 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 어렴풋하게 보일 때 호기심도 자극이 되고 궁금증도 커지는 법이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탕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틈만 나면 되풀이해야 하는 고역이었습니다. 저는 기억에 갈 때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었고요, 어떤 때는 그렇게 들어가 있던 끝에 너무너무 역겨워져서 구토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우리한테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래야 때가 잘 불어 일어나고 그래야 목욕비 안 아깝다 하면서 막무가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태리타올’이 제 손에는 잘 올라붙지 않았지만 엄마손에는 그야말로 착 달라붙었습니다. 


엄마의 이태리타올은 제 등짝 가슴짝 볼기짝은 물론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까지 샅샅이 낱낱이 훑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뜨거운 물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제 살결은 빨갛게 바뀌어 갔습니다. 아주 따가웠습니다. 


그 때 목욕탕에서는 반드시 아이 울음소리가 쨍쨍하게 울려퍼졌습니다. 그렇게 울어대는 아이 등짝이나 볼기짝을 엄마들이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소리 또한 쨍쨍하게 울려퍼졌습니다. 그러면 아이 울음소리는 한 옥타브 더 높아졌습니다. 물론 저는 그 때 이미 그렇게 울기에는 너무 커버린 아이였고요. 


5. 언제나 붐볐던 공중목욕탕 


제 기억으로는, 목욕탕은 언제나 붐볐습니다. 설 추석 같은 명절이 아니라도 늘 그랬습니다. 앉을 자리조차 없을 때가 많았고요, 이른바 탕 안에는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려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머리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탕 바깥에도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잡고서는(말하자면 거울이 없는 자리에도) 다른 데는 여념 없이 때 미는 데 몰두해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들이 곳곳에서 빽빽 꽥꽥 울어대었으니, 그야말로 더없이 소란스러운 데가 바로 공중목욕탕이었습니다. 



물론 목욕탕이 가장 붐비는 때는 바로 명절 밑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과연 그 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신기할 정도였는데요, 이를테면 옷장이 마흔 개 쉰 개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꽉 다 들어차 있었고 임시 옷 그릇도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옷장 위에 올라져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공중목욕탕에서 한 번 쓴 수건 정도나 담아두는 플라스틱 그런 임시 옷 그릇이 서른 개든 마흔 개든 가득차 있었습니다. 때를 다 밀고 나왔을 때 자기 옷이 담겨 있는 통이 어디 있는지 찾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목욕탕을 나서면, 손바닥은 물에 불어서 더없이 쪼글쪼글했고, 열에 들뜬 얼굴 또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얼굴에는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이 가볍게 떠올랐고요. 제 눈에 비친 엄마 모습 또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더랬지요. 


몸에서 물기가 빠져나가 목이 말랐지만, 엄마한테 마실거리 뭐 좀 사달라는 말은 아예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800원씩이나 하는 목욕비가 어린 아이들한테는 물론 어른한테도 적은 액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집에 와서 숭늉 들이키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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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15년 부녀 성관계 아무도 몰랐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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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4화, 살인 동기


살인사건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다. 검찰 공소장은 15년 전부터 지속된 부녀 성관계를 살인 동기로 삼고 있다.


'피고인 백경환(아버지, 가명)은 피고인 백희정(막내딸, 가명)이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무렵부터 성추행을 하여 오다가 성관계까지 가지게 되었고, (중략) 계속하여 피고인 백희정과 성관계를 가져오면서, 이를 눈치챈 피해자 최OO과 지속적인 갈등을 겪어 오고 있었다.'


죽은 최씨(어머니)가 10년 전부터 이를 눈치챈 후, 백경환씨와 갈등이 누적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부녀 자백을 제외하고는 증거가 없다.



당시 검찰 기자회견에서도 기자들은 죽은 최씨가 부녀 성관계를 알고 10년간, 어떻게 한집에 사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해했다. 또 만약 백희정씨가 15년간 성폭행을 당해왔다면 살해대상을 아버지로 삼아야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가족이나 친척은 부녀 성관계를 어떻게 생각할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버지 백경환씨는 검찰 조사에서 사건 발생(7월 6일) 후에도 성관계를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 옆에서 잔 건 '나'다."

"방이 붙어있어 박수 한 대 쳐도 소리가 다 들린다."


또한 당시 방송에 나온 전문가들도 '부녀 성관계'에 의문을 표했다. '문장 완성 검사'에서 딸 백희정씨가 작성한 문장을 보면 성폭행당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성폭행했다면 아버지는 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부녀 사이는 그런 분위기의 정도가 약하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문장 완성 검사>

1.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2. 대개 아버지들이란?

- 무섭다.

3. 내가 바라기에 아버지는?

- 잘 대해줬으면 한다.



"성적인 행동이 지속적으로 있었다면 애착적 증상들이 나타나야 해요. 집착적 증상들이.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아버지가 딸을 통제하거나 감시하는 정도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거예요."(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서 전문가 의견)


부녀가 '성관계'를 자백했는데도 이렇듯 주변인과 전문가는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법원은 어떨까?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부녀 성관계'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부녀 모두 검찰에게 성관계를 자백했고, 무엇보다 막내딸이 아버지의 신체적 특징 중 하나인 포경 여부를 알고 있었다.


1심 재판부는 부녀 성관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무죄를 선고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부녀 자백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죽은 최씨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게 지속적 갈등 단계로 발전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사건 전날 상황을 보자.


'살인할 이유가 없다'는 1심 재판부, 증거는 자백뿐



당시 부부는 아침에 일어나 농약을 치고,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오후에는 땔감을 함께 주우러 나갔고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외식을 했다. 식사 분위기에서도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다는 진술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 대다수도 부부 금슬이 좋았다고 말한다.


이를 토대로 1심 재판부는 '갈등이 표면화 된 게 없는데, 살인할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부녀 진술이 믿을 만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부녀의 진술이 구체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피고인들이 이 사건 살인 범행에 사용한 청산염의 형태나 크기, 색깔에 대한 진술이 일치하거나 유사하고 실제로 청산가리를 보거나 취급해보지 않고서는 표현해내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인 점, ... (범행) 역할 분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점.'


냉정하게 따져보자. 자백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도 공범이 동시에 자백했다. 검찰이 고문이나 협박을 한 것도 아니었다.


형사들도 경찰과 검찰 조사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범인들 대다수가 경찰에서 부인은 하더라도 검찰청에 들어가게 되면 자백하게 돼 있다고 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검사가 가지고 있는 막강한 권한 때문이다.


법률에 정해진 권한만 보자.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독점 영장청구권, 독점기소권, 형 집행권 등이 있다. 피의자들에게는 '기소재량권'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도 막내딸은 "검사가 솔직히 말하면 '형량을 줄여준다'는 말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아무런 권한도 없는 경찰 수사단계에서 자백할까? 형사들은 사람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형사들은 계획범죄나 악질들인 경우 경찰에서 자백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또 있다. 이들 부녀는 경찰 조사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모두 통과했다.


필자가 만난 경찰 대부분은 거짓말탐지기를 신뢰한다고 했다. 물론 거짓말탐지기도 한계는 있다. 진실과 거짓 중간에 '판단 불능' 구역이 있다는 것이다. 진실 또는 거짓이 얼마든지 판단 불능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진실로 가려진 자백이 거짓으로 바뀌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녀는 왜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살해했나



이 사건의 살해 동기인 '부녀 성관계'도 의문이다. 부녀 성관계는 검찰 공소사실의 근간이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백희정씨가 아버지 신체 특징인 '포경 여부'를 알았다고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렇다)와 X(아니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답하면 되는 문제였다.


즉, 부녀 성관계를 뒷받침하는 직접 증거는 '부녀 자백'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백희정씨가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지속해서 당해왔다면, 왜 백희정씨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살해 대상으로 삼았을까? 이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고인 백희정(막내딸)의 입장에서 피고인 백경환(아버지)은 한편으로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인 만남으로 맺어진 이성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중략) 증오와 함께 (중략) 싹트는 이성적 사랑이 혼재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 부녀의 감정에는 '성범죄 피해자로서 느끼는 증오와 함께 오랫동안 성관계를 하면서 싹트는 이성적 사랑이 혼재'됐다는 것이다. 정말로 이게 가능할까?


성폭행 사건은 형사합의부 주요 사건이다. 형사 합의부 경험이 풍부한 판사 출신 변호사에게 물어봤다. 그는 이런 관계가 "흔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성폭행만 당했다고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딸 입장에서 아버지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밀접한 관계일 때 이런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의지 항목에는 '경제적 원조'도 포함이 된다. 그렇다면 백희정씨는 아버지로부터 어느 정도의 경제적 원조를 받았을까?


경찰은 아버지에게 '막내딸에게 용돈을 주는지' 물었다. 막내딸이 아르바이트해서 용돈을 벌면서부터는 달라고 하면 '1~2천 원' 정도는 준다고 했다. 그전에는 한 달에 주는 용돈이 평균적으로 5만 원이 안 됐다고 말했다. 


검찰은 백희정씨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는 까닭을 군대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혐오의 대상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아버지라는 넘지 못할 벽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자살로 연결시키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략) 실제로 군대에서 구타를 당한 사병은 상대방인 선임병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기보다는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높은 점을 감안하여야 할 것입니다.'


형사 합의부 부장 판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의 이런 논리에 동감했다. 단, 아버지가 집안에서 아주 강한 존재이고, 상하 계층 관계가 굳어진 경우에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경우 상대를 '살해'하기보다는 '자살'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들은 이런 검찰의 논리에 어떤 입장을 보일까? 모두 '불인정'이었다. 여러 진술을 종합한 이 집안의 역학 관계를 살펴보자.



위 관계도가 보여주듯이 백희정씨가 가장 싫어했던 대상은 두 언니였다고 했다. 결혼 후에도 친정에 올 때마다 늘 동생에게 잔소리했기 때문이다. "방 치워라", "머리 감아라" 등의 훈계였다.


백희정씨는 부지런하지 못했다. 집안일을 시켜도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도 언니들과 비슷한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백희정씨가 보이는 반발 정도는 약했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막내딸이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백희정씨 자술서에는 '자살'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런데 자술서를 보면 백희정씨에게 높은 절망의 벽은 이 집안에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 듯하다. 백희정씨는 엄마가 "다른 애들은 엄마를 도와주는데 너는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며 핀잔을 줄 때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백희정씨는 그런 엄마를 향해서 "내가 죽으면 되잖아"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언니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백희정씨가 훈계에 되받아칠 때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쓰잘머리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런 말 하면 혼난다"며 아주 강하게 나갔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 아닌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서 이 집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하자. 부녀가 오랫동안 성관계를 했다는데, 그 낌새를 알아챈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제5화 - '주변인 관찰'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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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 반응 "부녀 성관계? 어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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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부러진 화실]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5화, 부녀에 대한 주변 평가


주변 사람들은 왜 부녀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 것일까? 그것은 부녀가 '살아온 환경' 때문이다. 일단 아버지부터 살펴보자. 


백경환(가명)씨는 1950년에 태어났다. 그는 집에서 둘째 아들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나고 나서 3~4년 지나 출생신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사건 발생 15년 전부터 부녀가 성관계했다면 당시 백씨의 실제 나이는 45세가 아니라 50세 전후였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해당 연령대는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노년기라서 '육체적 관계를 갖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사건기록을 검토한 전직 형사과장은 설령 부녀가 진짜 범인이었다고 해도, 그들이 대응만 잘했으면 이 사건의 용의 선상에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에서 딸이 자백했어도 아버지가 부인했다면 상황은 두 사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자백이 엇갈린다면 자백을 증거로 채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버지 백경환씨는 왜 혐의를 부인하지 못했던 것일까?


변호인 생각은 이랬다. 백경환씨 집안에 정신병을 앓았던 가족력이 있어서 그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 백경환씨 부모님은 정신이상인 큰아들을 치료하고자 재산을 모두 쏟아 부었다. 정신질환 증세는 그다음 세대에도 나타났다. 


백경환씨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는지 초등학교 2학년 때 중퇴했다. 백경환씨는 35세에 마을 주민 소개로 아내 최씨를 만나 결혼했다. 1980년대 백씨는 동생이 운영하는 블로크 공장에서 일했다. 화물차에 블로크를 싣고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일이었다.


제수씨 기억에 아주버님인 백씨는 착하고 배짱이 없는 사람이었다. 백씨는 트럭 운전 중에 경찰이 보이면 먼저 당황했다. 당시 경찰은 교통법규 위반이나 과적 차량만 잡는 것은 아니었다. 용돈이라도 챙길 요량으로 괜히 차를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백씨는 차를 세우라는 경찰 신호를 볼 때부터 면허증을 제시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고 한다. 백경환씨는 경찰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옛날 젊었을 적에... 승용차 세차 일을 했는데 그때 다른 사람 차가 사고 나는 것을 보고 그 이후로 저는 절대로 (차를) 빌려주지도 않고 남의 차에 올라가지도 않습니다."



친척들은 백경환씨가 이런 성격으로 무슨 살인을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1984년 백경환씨는 막내딸을 얻고 1남 3녀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이웃 마을로 이사했다. 이들 부부는 집을 짓고 나락 농사를 지으며 새로 온 마을에 자리 잡았다. 


부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늘 베풀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막내를 제외한 딸들은 결혼해서 출가했다. 아들은 서울에서 일했다.


한때 장모와 함께 살기도... 부녀 성관계? 친척은 "어림도 없다"


1990년대 후반 백경환씨는 오이 하우스를 시작했다. 당시 부부의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세 걸음을 걸어도 함께였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 부부는 마치 바늘과 실 같은 관계였다. 마을 사람들이 '부녀 성관계'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성폭행은 은밀한 공간에서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고향 집에서 오직 세 식구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고 한다.


하우스 일손 부족으로 2003년경에는 장모가 와서 살기도 했다. 그때는 장모는 딸과 함께 잤고 남편 백경환씨는 하우스에서 주로 잤다고 한다. 2008년경에는 둘째 딸이 출산을 위해 와서 한 해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증언이 사실이라면 언니와 할머니가 함께 살면서도 부녀 사이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성폭행'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만약 강압적인 '부녀 성관계'가 있었다면, 막내딸은 왜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일까?


이제 딸 백희정씨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백희정씨는 1984년에 태어났다. 친척들에 따르면 그녀는 어릴 적부터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키는 106㎝, 몸무게는 15㎏이었다. 부녀 성관계가 시작됐을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상태는 어땠을까?


이 당시 키는 116㎝로 자랐고 몸무게는 18㎏이었다. 당시 막내딸 발육상태를 기억하는 한 친척은 부녀 성관계는 "어림도 없다"고 말한다. 


백희정씨는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생활기록부에는 '동화책에 많은 관심을 보임'이라고 적혀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도 백희정씨는 초등학생과 어울렸다.



백희정씨는 고등학교를 2003년 2월에 졸업했다. 이후 한 친척이 청소, 설거지 등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겠다며 백희정씨를 식당으로 불렀다. 친척은 장난치고 다독거리면서 일을 가르쳤다. 친척이 보기에 백희정씨는 식탁을 말끔하게 닦지 못했다. 설거지도 어설펐다. 식당을 찾은 손님이 나이라도 물으면 눈물부터 글썽였다.


백희정씨는 어머니에게 야단맞을 때도 자주 울었다. 아기가 울 때처럼 양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잉잉거렸다고 한다. 그럴 때면 아버지 백경환씨는 아이를 울린다고 아내를 나무랐다. 친척은 울지 말고 대답 크게 하라며 백희정씨를 다독였다.


친척은 백희정씨에게 통장을 만들어 2~3만 원씩 주면서 입금하도록 했다. 당시 친척은 백희정씨에게 자주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그게 제법 모이면 송아지를 사고, 그게 커서 다시 새끼를 낳는다"며 재산이 불어나는 원리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렇게 저축을 유도했지만 백희정씨는 돈이 제법 모일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집에서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며칠 지나서 돈을 모두 써버리고 다시 나타난 백희정씨. 친척이 그녀에게 어디 갔었냐고 물으면 백희정씨는 피식 웃기만 했다.


이처럼 백희정씨에게는 '계획성'이 부족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친척은 그녀가 계획범행을 할 능력이 안 된다고 여긴다.


무죄를 선고했던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백희정씨가 '허위진술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백희정씨는 법정에서 범행과 관련이 없는 부분도 허위증언을 곧잘 했다. 그중 하나가 가령 백희정씨가 동네 슈퍼에 가서 막걸리 심부름을 했다는 것이다. 이 법정진술은 백희정씨가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가족들 주장에 배치된다. 그런데 정작 슈퍼주인은 "희정이는 우리 가게에는 오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해당 슈퍼마켓)에는 과자가 없잖아!"


백희정씨가 애용했던 슈퍼는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구례구역 앞 슈퍼였다. 기차역에서 내린 관광객들을 위해 해당 슈퍼에는 과자와 음료들이 제법 있었다.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같이 일하면 답답하다'는 반응



당시 친척은 이런 백희정씨에게 최선의 미래는 먹고 사는 데 걱정 없는 곳으로 시집 보내는 거라 여겼다. 백희정씨에게 선을 주선하는 자리가 들어오기도 했다. 맞선 상대인 남자에게는 한 가지씩 결함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백희정씨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족과 친척을 제외하고 백희정씨를 가까이서 관찰한 사람은 김밥집 여사장 김미순(가명)씨다. 백희정씨가 김미순을 만나게 된 때는 2007년이다. 백희정씨는 순천 시내 김밥 가게에 우연히 들렀다가 일자리 제의를 받는다. 당시 여사장 집에서 잠자리도 제공한다고 했다. 사장인 김미순씨는 백희정씨 모습이 청순해 보였다고 했다. 


이 가게는 인근 유동인구가 많아 일손이 늘 부족했다. 하지만 백희정씨 능력은 곧 드러난다. 사장은 희정씨에게 야간 포장과 배달을 맡겼다. 백희정씨도 새 일자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답답하다는 반응이었다. 주문이 밀려와도 백희정씨는 천하태평이었다. 게다가 꾸준하던 매출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인은 백희정씨였다. 주문·결제·배달·수금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은 백희정씨가 금고에 손을 댄다고 당시 사장에게 말했다.


백희정씨는 여사장 김미순씨 집에서 머물렀다. 당시 백희정씨 대화 주제는 크게 조카 얘기 아니면 엄마 얘기였다. 하우스 안 도와준다고 야단쳐서 엄마가 밉고, 농약을 칠 때 줄을 잡아당기거나 오이 박스 포장하는 일도 하기 싫다고 했다. 엄마가 술 마시는 것도 싫다고 했다.


백희정씨 부모님은 종종 김미순씨 집을 방문했다. 부모님은 항상 함께 와서 오이나 나물을 건넸다. 어머니는 "애기(백희정씨)가 많이 모자란데 잘 부탁한다"며 고마워했다. 


당시 여사장 김미순씨는 백희정씨와의 대화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기억이 나는 게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만 따로 백희정씨를 만나러 오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곁에서 약 2년간 지켜본 여사장 김미순씨는 백희정씨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녀 또한 백희정씨가 이런 계획범죄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이렇다. 김미순씨도 백희정씨에게 나이가 제법 많은 친척과 중매를 주선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희정씨가 살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백희정씨는 나물을 사 오라면 싱싱한 것으로 골라올 줄도 몰랐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을 산다면 절반 가격에 판매하는 마트를 이용하지 않고 비싼 편의점 가서 사는 등, 김미순씨는 백희정씨가 돈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다고 했다.



김미순씨는 백희정씨 품성을 어떻게 평가할까? 김씨는 "백희정씨는 화가 나면 토라져서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했다. 그 정도지, 사람을 죽일 만큼 '악질'은 아니라고도 말했다.


이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김미순씨가 관찰한 내용을 살펴보자. 당시 김미순씨는 백희정씨를 알고 지낸 이래로 지금까지 그렇게 들뜬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백희정씨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2009년 초, 26세가 된 백희정씨는 틈만 나면 김미순씨를 가게 건물 뒤편으로 데리고 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물론 아버지 이야기는 아니었다. 백희정씨는 담배를 피우면서 "오빠 만나고 왔어, 오빠가 용돈 줬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돈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으면 백희정씨는 오른쪽 새끼손가락만 펴고는 "이게(애인이) 줬지"라고 말했다. 백희정씨는 채팅으로 만난 오빠가 용돈을 통장에 넣어준다고 했다. 김미순씨는 백희정씨의 통장을 대충 살펴본 적이 있다고 했다. 1만 원, 2만 원 등 금액이 잔잔했다. 그중에 40만 원으로 제법 큰 입금액도 있었다. 그 40만 원은 시청에서 주는 월급이었다.


2009년 봄부터 백희정씨는 마을도서관에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일을 했다. 도서관을 청소하고 대출일지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 아르바이트는 백희정씨 어머니가 동네 이장에게 부탁해서 얻은 일자리였다. 백희정씨는 주로 도서관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죽은 최씨(엄마) 여동생도 아주 오래 전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언니가 스쳐 지나가듯이 이혼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남편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건 발생 직전에 언니가 여동생에게 하소연한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당시 최씨는 같은 이야기를 동네 할머니에게도 했다. 이는 SBS<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도 소개된 바가 있다.


"막내딸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 동네 누구하고..."

"이모. 사건 난 날 OO아빠 우리 집에 온 거 알아요? 이모, 그 사람이 의심스러워..."


이처럼 주변 사람들은 사건 전 '부녀'사이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부녀가 보인 행동은 검찰이 보기에도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이에 대한 주변 사람들 입장은 어떨까?


(제6화 - '유력한 용의자, 남편' 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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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잘못할 때 세상은 더 어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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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지킴이 청소년기자단 


경남도민일보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지난 7월과 8월 모두 여섯 차례 진행한 '우리 강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 활동은 우리 자연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학생들이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람이 손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럼에도 유지·관리 비용은 많이 드는, 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이 어울려 살기도 어려운 낙동강과 그렇지 않은 섬진강을 모두 아주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걸어볼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감수성이 뛰어났습니다. 취재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거기 있는 현실을 바로 느끼고 받아들였던 것이랍니다. 아니 어쩌면 학생들이 찾아간 의령군 지정면 호국의병의 숲 공원 낙동강과, 하동군 하동읍 송림공원 모래밭 섬진강이 무척 뚜렷하게 대조적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학생들은 낙동강 현장에서는 마음 아파하고 섬진강 현장에서는 더불어 즐거워했습니다. 인간이 자연성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 있도록 관리한 자연과, 인간이 자연성을 망가뜨려버린 자연이 안겨주는 감정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낙동강이 망가진 사연을 궁금해했습니다. 2010년부터 이태 동안 진행된 이른바 '4대 강 살리기 사업'이 자라나는 학생들한테는 이미 현재가 아니라 과거가 돼 있었습니다. 강바닥을 강물 표면에서 6m 깊이까지 파낸 공사가 바로 '4대 강 사업'이라고 일러줬더니 더욱 어리둥절해했습니다. 


학생들 생각(평범한 어른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에는 그런 사업이랄 수도 없는 행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첫날 취재를 마치고 이튿날 신문 만들기를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물었던 것이 "도대체 낙동강을 왜 그렇게 만들었어요?"였습니다. 


학생들이 만든 신문을 살펴보는 양산여고 선생님 두 분.


대답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커다란 배가 다닐 수 있도록 하려고 그런 모양인데,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단다." 섬진강 모래밭과 송림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별로 궁금해하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연이, 바다를 향해 생긴 모양대로 흘러가는 강물이 모두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학생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이를 두고는 '취재를 빙자한 체험'이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체험을 빙자한 취재'라고 해야 할까요……. 덕분에 강물 모래 속에 파묻혀 살고 있던 재첩들이 고생을 제법 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상대로 신문 품평을 하고 있습니다. ㅎㅎ


"이런 섬진강에다가 우리 정부 국토교통부가 4대 강 사업과 같은 행위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어쩌면 이런 자연스러운 섬진강을 다시 못 볼 수도 있어요."라고 했더니 학생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낙동강에서 봤듯이, 이미 실패라고 판가름이 된 일을 왜 또 하려고 할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런 문답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무원은 공부 잘하는 사람이 해요, 못하는 사람이 해요?" "잘하는 사람이요." "고위 공무원일수록 더욱 그렇겠지요?" "예!"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가 잘못할 때 더 많이 세상이 어지러워져요,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이 잘못할 때 더 어지러워져요? " "대통령이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 가운데 공부 잘하는 친구가 높고 빛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할 개연성이 높아요, 공부 못하는 친구가 그럴 개연성이 높아요?" "우리 다 공부 잘해요!(폭소)" 


"그러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 좀 하는 축에 든다고 생각이 되면, 더욱 마음가짐을 반듯하게 하려고 애써야 해요. 그렇지요?" "예, 잘 알겠습니다!" 현장에서는 느낌도 생각도 이렇게 생생하게 주고받을 수 있나 봅니다. 하하. 


진주 개양중 학생들이 만든 신문들.


둘째 날 프로그램은 '도전! 골든벨'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태반이 '4대 강'이 무엇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낙동강이랑 한강까지는 그래도 아는데 나머지 두 개가 영산강과 금강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랍니다. '도전! 골든벨'은 그러니까 우리 강에 대한 기본 상식을 한 번 알아보는 자리였습니다. 


창원 창덕중 학생들의 도전! 골든벨 모습.


그러고는 신문 편집·제작에 알아두면 좋을 몇몇 사실을 일러준 뒤 곧바로 신문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 이를테면 신문 만들기는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디자인에서 기사 쓰기 그리고 앉히기까지 모두 서로 의논해야 좋은 신문이 나온다, 


크고 중요한 기사는 왼쪽 위에다 올리고 작고 덜 중요한 기사일수록 오른쪽 아래에다 놓는다, 지금 위아래로 길쭉하고 네모난 종이신문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형식이지만 여러분이 30대 40대가 됐을 때도 그럴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그런 틀에 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꾸며보자 등등이지요. 


개양중.


5명씩 짜인 모둠별로 전지 절반 크기 도화지와 기사를 적을 작은 종이를 나눠주면서 신문 만드는 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했습니다. 오늘 만들지 못하면 내일은 없는 것이 바로 신문이기 때문이지요. 신문을 만드는 개개인이 마감 시간을 어겨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 회의를 하고 기사를 쓰고 제목을 달고 광고까지 앉히는 모두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 제한은 학생들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도 보탬이 된답니다. 


학교에서는 대부분 이런 신문 만들기를 할 때 집에서 써오게 하거나 아니면 시간을 많이 주거나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하게 시간을 주면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창덕중.


그러나 빠듯하게 시간을 주면 좀더 긴장해서 생각하고 구성하고 정리하고 집필하고 하기를 좀더 빠르게 잇달아 해내는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적응하는 능력이 꽤 뛰어났습니다. 처음 편집회의를 해서 지면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한 다음에는 부분별로 한 명씩 맡아 하면 효율적이라고 일러줬더니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신문 만들기를 늦게 마치는 모둠도 없지 않았는데 그런 경우는 역할이 골고루 나눠져 있지 않았고 반면 꼭 몇몇 친구들한테 할일이 집중돼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신문은 대체로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학생들의 재치와 능력이 풍성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이번에 함께한 여섯 학교 학생들의 작품은 다음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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