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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강타한 남강유등축제 이 한 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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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벼운 기사 하나 썼습니다. 여기서 '가볍다'는 말은 취재 과정이나 기사 쓰는 게 그렇다는 것이지, 결코 사진이나 내용은 가볍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 아픈 내용이죠.


진주 남강유등축제 입장료가 1만 원으로 결정되고, 입장료를 내지 않는 이는 멀리서 남강을 바라볼 권리마저 박탈하는 가림막(펜스)을 치면서 이 축제는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진주시는 노인이나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1만 원은 그들에게 결코 적지 않은 돈이죠. 4인 가족이라면 4만 원이 됩니다. 또한 입장했다가 축제장을 나오면 아예 재입장이 안 되는 것도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진주시의원 한 분이 찍은 사진이 SNS를 강타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링크만 해도 10만 명 이상에게 도달했고, 해당 기사에는 2000여 명이 좋아요를 클릭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다음은 해당 기사입니다.


올해부터 유료화한 진주 남강유등축제에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5일 류재수 진주시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한 장의 사진이 누리꾼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확인 결과 이 사진은 동료의원인 강갑중 진주시의원이 진주성 앞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인근 시골마을에서 8명의 일행이 남강유등축제 나들이를 왔다가 멀리서나마 남강을 쳐다볼 수도 없게 되자 저렇게 한 분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후 다른 한 명이 등을 밟고 올라가 남강을 내려다 봤다. 저렇게 차례대로 역할을 바꿔가며 남강을 보는 모습을 촬영했다."


5일 저녁 시골에서 올라온 할매들이 가림막 앞에서 한 사람은 엎드리고 한 사람은 올라서고 있다. 이들은 입장료 만원이 아까워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갑중 진주시의원.

8명의 할매들이 가림막 앞에서 한 사람은 엎드리고 한 사람은 올라서서 번갈아가며 차례대로 구경을 했다.@강갑중 진주시의원


강갑중 의원은 이분들에게 다가가서 사정을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아까워서"였다고 전했다.


남강유등축제 입장료는 1만 원. 노인이라고 해서 경로우대할인이 없다. 8명이 입장하려면 8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노인들로선 아까운 돈이다.


강 의원은 "관광버스를 타고 40~50명 단위로 광주 대구 부산 대전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입장료 때문에 유등축제 관람을 포기하고 가는 모습이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류재수 의원은 이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며 이렇게 썼다.


"어젯밤 시골에서 오신 관광객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유등을 구경하는 장면입니다. 참담합니다. 돈내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마라는 놀부심보에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뭘 얻을겁니까?"


서은애 진주시의원도 역시 같은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씁쓰레한 축제의 뒷모습. 아니 우리들의 일그러진 축제의 현장입니다. 셔틀버스 문제, 교통 문제, 무너진 경로우대, 심지어 타지역에서 진주로 유학와서 대학 다니는(초대권 하나 받지 못한)그 수많은 학생들의 문제 등. 원망섞인 목소리의 전화통은 쉴새없이 울리고 ~~~ 늘 오며가며 보아왔던 그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한 이 사진은 축제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지역 인터넷신문 단디뉴스 또한 '남강유등축제 진풍경 등장 사다리를 빌려드립니다'는 기사를 통해 이번 축제부터 생겨난 새로운 풍경들을 사진으로 소개했다.


진주남강유등축제 유료화 반대를 주장하며 '축제는 유료이지만 사다리는 공짜로 빌려 드립니다'라는 퍼포먼스. @단디뉴스


"남강유등축제는 유료. 사다리는 무료로 빌려드립니다."


남강유등축제가 열리고 있는 진주성 촉석문 앞 가림막 앞이다. 4일 진주성과 남강 풍경을 볼 수 없게 가로막는 가림막에 항의하는 퍼포먼스 시위가 등장했다. 사다리를 가림막에 걸쳐놓고, 지나가는 관람객에게 남강 유등을 구경하라고 권한다.


퍼포먼스 1인 시위의 주인공은 백인식(35. 진주 신안동) 씨. 백 씨는 “진주시장 이름이 이창희다. 이 가림막을 시민들이 창희산성이라고 말한다”며 “돈 내지 않으면 보지도 말라는 건데 타지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들한테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겠다”고 말했다. 또 백 씨는 “길도 막고 강도 막고 담을 쌓는 축제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느냐”며 반발했다.


한 시민이 찢겨진 가림막 사이로 남강을 훔쳐보고 있다. @단디뉴스


한 가족이 가림막 넘어 또는 가림막 뚫고, 남강유등을 구경하고 있다. @단디뉴스


요런 자세로도 보고. @단디뉴스


요런 자세로도 보고. @단디뉴스

요런 자세로도 보고. @단디뉴스

요런 자세로도 본다. @단디뉴스


한 사진작가(?)가 가림막 위로 카메라를 치켜들고 촬영하고 있다. @류재수 진주시의원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지역자연환경과 지역언론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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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인가에, 대구 북구에 있는 지역 주간 신문 <강북신문> 구성원들한테 강의할 때 썼던 교안입니다. 제가 30년도 넘게 전이기는 하지만 대구에 조금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강북'은 제가 처음 마주하는 낱말이었습니다. 강북이라 하면 서울에 있는 지역 개념으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금호강 북쪽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옛적 칠곡군이었던 지역이 강북이라 일컬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옆길로 좀 새고 말았는데요, 강의에서 할 말을 모두 옮겨적자니 너무 길 것 같아 요점을 정리하는 식으로 교안을 짰더랬습니다. 기자와 대표는 물론 영업직 사원 그리고 이사까지 모두 강의를 들으셨는데요, 죄다 진지해서 제가 좀 놀랐습니다. 경험이나 지식은 많지 않지만 패기와 열정은 무척 대단한 신문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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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와 생태에 대한 기본 이해 


1. 습지가 기본이다. 


생명이 움트는 최소 조건이 바로 물과 흙. 물과 흙이 버무려져 있는 데가 습지. 

생물다양성=여러 가지 생물이 살고 있다는 뜻. 


기본 순환 구조는 습지(물+흙)→식물→미생물→풀·나무→물 속 벌레·유충→물고기·조개 따위→들짐승. 그리고 그것이 다시 썩어 물이랑 흙과 버무려짐.

삶↔죽음의 순환 구조 : 삶이 없으면 죽음이 없듯이 죽음이 없으면 삶 또한 없다.(죽음을 바탕으로 해서 삶이 생긴다. 자기가 먹는 음식을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2. 강·도랑·개울·하천을 따라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유기물·무기물도 따라 흐른다. 유기물은 썩는 것, 무기물은 썩지 않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됨. 썩는 것은 한 때 생명체의 일부였던 것들이고 무기물은 그렇지 않은 것들임. 


흐름이 약해지면 유기물과 무기물은 쌓임. 

첫째 물줄기가 좁았다가 갑자기 넓어지는 데. 보통 선상지(扇狀地)라 함. 

둘째 물줄기 둘 이상이 만나는 지점. 팔거천·신천·동화천 따위가 금호강과 만나는 지점이 됨. 

습지는 대체로 이런 데에 형성이 됨. 


지형과 습지 이해의 첫 걸음→“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3. 낙동강은 저 혼자 낙동강이 된 것이 아니다. 


금호강 또한 저 혼자 스스로 금호강이 된 것이 아니다. 낙동강으로 또는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그보다 작은 숱한 물줄기가 없었다면 낙동강이나 금호강이 지금처럼 커다란 물줄기가 되지는 못했음. 


이런 인식은 실천적으로 아주 중요함. 보통 사람들은 ‘낙동강’이라 하면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해 부산 하단 하구에서 끝나는 단선으로 여김. 이렇게 되면 낙동강에 물을 대는 숱한 지천·지류들이 머리에서 지워짐. 곧바로 보호 대상 또는 관심 영역의 단순화로 이어짐. 


‘낙동강을 살리자’ 또는 ‘금호강을 살리자’고 했을 때 그 지천·지류까지 함께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함. 큰 물줄기만 깨끗하면 되고 큰 습지만 보전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어지기 십상임.  



4. 습지와 사람의 관계. 


사람이 가장 먼저 살기 시작한 데는 언덕배기(구릉丘陵)가 아님. 바로 습지임. 거기에 먹을 것이 가장 많았기 때문. 


물론 낙동강 본류처럼 강물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센 데는 살지 않았음. 위험하기 때문임.(지금처럼 본류 끼고 살게 된지는 오래지 않음. 제방을 높게 쌓을 수 있게 된 일제강점기 1920년대부터임.) 


지금도 사람 삶터 기본이 습지이고 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음. 따라서 지나치게 당연한 말이지만, 습지·물을 살리려면 습지·물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행동을 먼저 관리해야 함. 


동화천에 대해 


1. 강북인터넷뉴스에서 동화천으로 검색해 봤더니 10개 정도 기사가 떴음. 동화천의 실상 실태를 다룬 기사는 없음. 금호강·팔거천 또한 마찬가지였음. 그러므로 동화천이든 뭐든 백지상태로 보임. 



2. 동화천은 동화천 혼자서 존재하지 않음. 동화천 또한 다른 개울이나 하천과 마찬가지로 사람 삶터였으며 그래서 그 둘레에는 이런저런 문화의 축적이 있을 것임. 

이를 두고 5월 20일 주민토론회에서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가 “동화천 일대는 소중한 생태자원임은 물론이고 문화·역사자원도 즐비한 대구를 대표하는 생태공간”이라고 했을 것임. 안타깝게도 그 즐비한 역사·문화자원을 소개하는 기사가 강북인터넷뉴스에는 없었음. 전영권 교수는 “동화천에 보기 드문 왕버드나무 군락지가 있다”고도 했는데 이에 대한 기사도 없었음. 


3. 김부섭 대구시 녹색환경국장이 같은 토론회에서 “금호강 생태하천 복원사업의 전반적인 계획”을 언급했으나 그 내용을 알리는 기사는 보이지 않음. ‘생태하천 복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국 대부분은 생태적인 ‘토목’공사임. 


대구서도 2013년 마무리된 ‘수성못 생태복원사업’(범어천 포함)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음. ‘동화천 생태하천 복원 사업’ 계획도 입수 검토할 필요 있음. 


강북인터넷뉴스의 지역에 대한 이해·애정 


1. 지역 역사·문화·생태·인물을 다루는 기사가 보이지 않음. 지역밀착형 기사, 지역밀착형 글쓰기는 따로 있지 않음. 지역의 역사 지역의 문화 지역의 생태 지역의 인물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지역밀착임. (물론 지역의 현실도) 


2. 하중도 관련 기사는 한 차례 있음. 금호강이 북구 권역에서 지류·지천과 만나 만드는 습지 관련 기사, 동화천·팔거천이 지류·지천과 만나 만드는 습지들 관련 기사도 보이지 않음. 


3. 지역에 어떤 문화재가 얼마나 있는지 신문사 차원에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함. 지역 명물로 무엇을 꼽고 있는지 지역 주민과 지면을 통해 얼마나 공유했는지도 궁금함. 


그동안 팔거산성이나 구암동 고분군 관련 기사가 충분하다고 보시는지? 그밖에 다른 문화재 관련 기사도 확인해 보셨는지? 와룡산 상리봉? 지역 명물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해보셨는지? 지역 명물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셨는지?(어떤 블로거는 팔달교 다릿발이 아름답다고 했음.) 



4. 현장을 찾아가 보고 쓴 기사가 썩 드묾. 


결론삼아 말씀드리자면 앞에 말씀드린 인간 역사·문화와 습지의 관계에 대한 기본 인식을 전제로 삼아 말씀드리자면(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로 좁혀서) 


1.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에 대한 광범한 문헌조사 

2.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에 대한 독자적인 답사 

3. 동화천 생태하천 복원 사업 계획 내용 확인·검토 

4. 전문가 동반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 답사 

5.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 습지 생태 종합 

6.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 문화재 현황 종합 

7. 동화천과 그 둘레 일대 습지 생태와 문화재 재구성, 등이 필요할 것 같음. 


- 이렇게 기초를 구축한 다음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보도를 할 필요가 있고 

- 그 뒤로는 순차로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기를 바람. 

- 지역사회에서 이를 지원하는 후원자(기관·단체 포함)를 발굴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함. 

- 지역주민과 생활 속에서 함께할 때 습지생태와 문화재를 아끼고 지키는 일에 큰 힘이 생김.  

- 스토리텔링까지 가능하면 금상첨화임. 


※ 잘해 보려고 막 너무 애쓰지는 마세요. 오래 못 감. 설렁설렁 대충대충, 할 수 있는 만큼, 욕심 없이 하면 됨.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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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가 말한 ‘당사자 동의 합숙 수사’의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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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잇따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고영주 이사장이 내놓은 발언과 생각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까 제가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별로 짚지 않은 대목이 있어서, 그에 대해서만 한 마디 올릴까 합니다. 부림사건 재심 결과를 두고 당시 담당 검사였던 고영주가 한 발언입니다. 


부림사건은 전두환 집권 초기 1981년 경찰·검찰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교사 등 22명을 영장 없이 붙잡아 불법 감금·고문한 사건입니다. 2014년 2월 대법원은 재심에서 진술서가 오랜 기간 지난 뒤에 작성됐고 불법 구금 기간이 오래된 점 등에 비춰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었습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자 고영주 이사장은 “좌경화된 사법부의 판단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 학생들의 진술에 임의성이 의심된다’고 판단한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술의 임의성, 임의로운 진술이라면 억지로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말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비록 부림사건보다 4년 뒤이기는 하지만, 제가 고영주 검사한테 수사 받은 경험을 토대로 “고영주 검사가 ‘진술의 임의성’을 보장해 줬을 리가 없다”는 말씀을 한 차례 올린 적이 있습니다.(고영주가 진술의 임의성을 입에 올렸다고?http://2kim.idomin.com/2527


여관 합숙 수사에 당사자 동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고영주 이사장이 문제가 되고나서 보니 부림사건 당시 가장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 감금한 데 대해 “여관에서 당사자 동의 아래 합숙하면서 수사했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0월 2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방문진 국정감사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한겨레 사진.


거짓말이다 아니다 할 것 없이 그냥 제가 겪은 바를 적겠습니다. 저는 1985년 7월 시골 고향집에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까만 승용차를 타고 온 네 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운전하고 한 명은 조수석에 앉고 다른 두 명은 뒷자리 한가운데 저를 태운 다음 양옆에서 저를 끼고 앉았습니다. 


그이들은 저더러 고개를 깊이 숙여 바깥을 보지 못하도록 했는데요, 그렇게 해서 끌려간 데가 처음에는 서울 어느 한 경찰서였습니다. 거기서 구둣발과 주먹으로 좀 얻어맞은 다음 끌려간 데가 말하자면 고영주 이사장이 입에 올린 ‘여관’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이나 검찰이 여관에 사람을 가두면서 ‘당신 여기에 있지 않을래요?’ 이렇게 물어보는 경우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판단은 그이들 몫이었고 제게는 지시도 명령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몫은 다만 그이들이 끌면 끄는대로 끌려가는 일뿐이었습니다. 


여관에 들어가서도 제게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물론 채워져 있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떤 수사를 받고 어떤 협박이나 폭행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밤에 누워 잘 때, 저를 가운데 눕히고 경찰 두 명이 양옆에 누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수갑 한 쪽은 제 왼손 팔목에 끼워져 있었고 나머지 한 쪽은 자기네 오른손 팔목에 끼워져 있었습니다.(지금 생각해 보면, 당서 저를 맡았던 경찰들로서도 참 할 짓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잘 때 저는 옷을 팬티 한 조각도 남김없이 홀라당 벗어야 했었는데, 그게 참 난감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했었습니다. 벗겨진 옷가지는 경찰들이 자기네 깔고 자는 담요 밑에 집어넣어졌습니다. 


당사자 동의가 있었는데도 경찰들이 여관방에서 제 손목에 수갑을 채웠을까요? 당사자인 제가 동의를 했는데도 제 몸에서 옷을 모두 벗기고 그것을 자기들 등짝에 깔았을까요? 


제가 여관에서 경찰과 같이 자면서 수사를 받는 데 동의를 했다면 ‘아, 이 친구가 몰래 도망칠 수도 있지!’ 이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잘 때도 제게 수갑을 채우거나 옷을 벗겨 깔고 잔다든지 하는 일 또한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관 합숙 수사는 무조건 불법


이와 더불어 더 짚어둘 하나는, 경찰·검찰 같은 사법 기관은 수사 대상이 되는 사람의 ‘신병’을 법률로 정해진 장소에만 ‘유치’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불법입니다. 


법률로 정해진 장소란 이를테면 경찰서 유치장, 교도소, 구치소 이런 데가 되겠는데요, 이렇게 정하는 까닭은 인권 보호(최소한이나마)에 있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법률로 정한 장소·공간을 벗어나 아무 데나 가둘 수 있다면 관리·감독이 되지 않고 따라서 경찰·검찰·안기부(지금은 국정원)가 불법으로 사람을 폭행·린치한다 해도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당사자 동의 아래 여관에서 합숙하며 수사했다’는 고영주 이사장의 발언은 이처럼 이미 그 자체로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사법기관의 불법은 당사자가 동의해도 불법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더욱더 불법인 것입니다. 


부림사건 터진 81년은 더 끔찍한 시절


제가 고영주 검사를 겪은 때는 1985년 7월입니다. 85년 7월은 지금 돌아보면 여전히 끔찍한 시절이지만, 당시를 두고 보면 그래도 학원자율화 조치도 있고 미국·일본을 비롯한 국제적 관심도 있고 해서 ‘상상초월’ 끔찍은 아니었습니다. 


한겨레 사진.


그러나 고영주 검사가 부림사건을 맡았던 1981년 9월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학살자 전두환의 철권통치가 그대로 통하던, ‘전두환’에서 ‘ㅈ’만 입에 올려도 바로 끌려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고영주 이사장은 바로 이렇게 끔찍이 ‘초절정’인 시절이었는데도 자기 담당한 부림사건만큼은 ‘진술의 임의성’이 보장됐고 ‘당사자 동의 아래 여관 합숙 수사’가 이뤄졌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고영주 이사장의 이런 이번 ‘진술’은 정말 ‘임의’로운 상태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로서는 정말 ‘동의’하기가 쉽지 않네요. 


제가 이듬해인 1986년 1월 서울지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 제작 배포)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국가 공인 빨갱이’가 되는 처음 시작이 이랬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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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안타까움을 신문 지면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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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강 지킴이 청소년기자단 ③ 


올해 '우리 강 지킴이 청소년 기자단'은 지난해 청소년 기자단보다 진행이 조금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지난해는 주제도 '에너지 지킴이'로 묵직한 편이었고, 취재하러 찾아간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와 밀양시 단장면 용회마을 두 군데도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고리본부는 핵발전을 하는 곳이고 용회마을은 그 핵발전 전기를 실어나를 76만5000볼트 초고압 송전철탑 설치를 두고 대립·갈등이 벌어지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청소년 기자단이 찾아간 의령군 지정면 낙동강 호국의병의숲 공원과 하동군 하동읍 섬진강 송림공원·모래밭은 어렵지 않고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물론 이 두 장소가 상징하는 바까지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강이 망가지며 어떻게 해야 강이 강다워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망가진 강은 사람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고 강답게 잘 관리된 강은 또 사람에게 어떤 보람을 안기는지도 함께 보여줬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취재한 내용을 신문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당사자들의 관점이 들어가게 마련이랍니다. 기사를 중요도와 무관하게 죽 늘어놓기만 해서는 신문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하게,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 취급해야 맞습니다. 큰 것은 크게 하고 작은 것은 작게 하는 편집이어야 하겠지요. 


첫째 날 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이튿날 해당 학교에서 진행한 신문 만들기 전체를 두고 보면 이런 가치 매김을 제대로 못한 듯한 편집도 때로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해보는 작업임에도 재빨리 취지를 알아차리고 그에 걸맞게 기사를 작성·배치하는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양산여고 학생들이 만든 <큰빛일보>를 보기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지면을 세로로 둘로 나눠 왼편에는 낙동강을 다루고 오른편에는 섬진강을 실었습니다. 왼편은 크게 보이고 오른편은 작게 보인답니다.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는 섬진강보다 참담하게 망가진 낙동강이 학생들 마음에 좀더 뚜렷하게 새겨졌던 모양입니다. 섬진강 쪽 기사에다 붙인 제목 '어쩌면 마지막 모래들'은 문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섬진강에다 4대 강 사업을 할 계획을 정부가 세우고 있다니까 그런 절실함이 느껴졌나봅니다. 


진주 개양중 학생들의 <개양도민일보> 경우는 사진을 큼지막하게 써서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풍겼습니다. 큰 기사에는 큰 사진을 쓰거나 두 장을 쓰고 작은 기사에는 작은 사진 하나씩 썼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도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이 밖에 삼가고 학생들의 <4대강신문>은 내용을 가장 골고루 담았습니다. 머리기사로 낙동강 4대 강 사업의 문제점을 짚은 다음 섬진강의 현재와 미래 모습까지 나름 담아냈습니다. 


이렇게 만든 신문들에는 대체로 두 가지 심정이랄까 생각이랄까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학생들 스스로가 그런 느낌을 품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입니다. 창원 창덕중 학생들이 만든 <남한신문> 1면 머리기사는 아이들이 섬진강에 들어가 잡은 재첩을 손을 모아 함께 모은 사진을 쓰면서 큰 제목을 "살아 숨쉬는 섬진강"으로 잡고 작은 제목은 "낙동강의 재첩은 어디로 갔나"로 적었습니다. 


합천 삼가고 학생들이 만든 <우리 강을 부탁해>를 비롯해 여러 신문들도 볼수록 참담한 낙동강과 보기에도 그럴듯한 섬진강을 대조시키는 기사를 머리에 올렸습니다. 


'수철이 공원에 가다'라고 하는 만화도 있었습니다. '어제 수철이가 낙동강 수변에 가족끼리 소풍을 갔는데 풀이 무성하고 관리도 돼 있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 어제 수철이의 상처받은 마음에서 낙동강이 받은 상처도 보이는 것 같다.' 



김해여중 학생들의 <꿀잼일보>는 낙동강을 다녀온 소감과 섬진강을 다녀온 소감이 얼마나 다른지를 만화로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김해여중 학생들의 <화장실에서 보고 싶은 신문>은 조그마한 소재로 문제의 핵심을 표현하는 솜씨를 보여줬습니다. "아이들의 비명, 낙동강에 무슨 일이……?!"는 호국의병의숲 공원의 관리되지 않은 화장실을 통해 사람이 손쉽게 찾아갈 수 없는 데 들이세운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섬진강 관련 기사를 쓰면서는 새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모래밭을 사진으로 담아 '사람과 다른 생명의 공존 현장'을 실감있게 보여줬습니다. 


한편으로 이른바 '4대 강 살리기 사업'을 밀어붙인 장본인에 대한 재치있는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 창원 문성고 학생들이 만든 <문성일보>의 4컷만평은 이랬습니다. 


"4대 강 사업은 사기(士氣)보다는 사기(詐欺)를 보여주고 생태계의 왕 사자보다는 사자(死者)를 부르고 (우리는) 사재(私財)보다는 사죄를 바랍니다." 



양산여고 학생들의 <짜요일보>는 문제의식이 넘쳤던 모양인지 1면 전체를 이런 비판으로 깔았습니다. 지면 전체가 좀 빡빡하기는 하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부터가 남달랐습니다. 


"死대강 死대악 과연 이대로 괜찮은가?"가 머리기사 제목이고 그 아래에는 "4대 강 사업 왜 했니?" 기사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장본인들을 비판했습니다. 


물론 한 번 이렇게 해 본다 해서 당장 무슨 변화·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하지만 실제 한 번 겪어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차이가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2015년 7월과 8월 10대 시절 어느 여름날, 망가져 본모습을 잃은 강과 본모습이 제대로인 강을 대조해 본 경험은 학생들한테 두고두고 어떤 자연생태를 바라보는 지침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또 스스로 기자가 돼서 어설프지만 그래도 열심히 신문을 만들어봤던 기억은, 신문을 보는 안목 또는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조금이라도 키워주지 않을까요. <끝>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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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청산가리 막걸리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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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부러진 화실]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6화, 남편은 청산가리 막걸리 알고 있었다


남편 백경환(가명)씨가 사건 발생 직후 보인 행동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당일 상황을 살펴보자.


백경환씨는 오전 11시경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일터에서 백씨는 전화를 받은 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뭔 막걸리를 줬는데 그게 잘못 되었는갑소."



백씨는 일터에서 고향 마을로 달렸다. 당시 아내가 실려 간 병원으로 가려면 구례역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백씨는 동생 집으로 갔다. 동생은 우선 장례식장으로 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백경환씨는 현장으로 가서 막걸리병을 찾아 나섰다.


물론 현장은 이미 노란색 폴리스라인(경찰통제선)이 쳐진 상태였다. 그 후 백씨는 병원으로 갔다. 친척들도 모여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장모는 "술 먹으면 백 서방에게 많이 맞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네"라며 통곡했다.


이처럼 사건 당일, 최씨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에 백경환씨가 바로 '막걸리'가 문제였다고 여긴 점, 장례식장으로 곧장 가지 않고 사건 현장으로 간 점, 장모가 사위의 폭력적인 성향을 거론한 점 등을 검찰은 문제 삼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경환씨는 딸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백희정(딸, 가명)씨 검찰 자백에 의하면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경찰들에게 말조심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찰이 부녀를 범인으로 지목하자 죽은 최씨 식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검찰은 죽은 최씨 여동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왜 언니가 죽었는데도 용의자 편을 드느냐는 것이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사망한 최씨쪽 식구들은 필자에게 사건 당일 있었던 일을 더욱 상세히 들려줬다.


당시 친척 사이에 장례 절차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고 한다. 순천 시내 병원보다는 동네와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백경환씨는 돈이 없다며 난처해 했다고 한다. 백경환씨는 부인이 죽은 상황에서 돈 걱정을 먼저 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장 주변에는 경찰이 모였다. 조문객이 한 명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문객들이 부조금을 건네자 그걸 일일이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례 마지막 날 관이 나올 때 백씨는 대성통곡을 했다.


"나 두고 가면 어쩌냐!"


이 장면을 본 사돈 쪽 식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시 백경환씨가 범인이란 의심을 했을까? 친척들은 백씨의 이런 모습이 결혼 초기부터 늘 봐 왔던 장면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 시선에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는 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장모가 통곡한 내용에는 친척들이 어떤 입장을 보일까? 당시 장모의 통곡 소리는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들었다고 한다. 사돈 쪽 식구들은 장모가 이런 통곡을 한 것은 이들 부부가 장모 앞에서도 싸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친척들 대부분은 동네 사람들을 초대한 장인 회갑 때를 비롯하여, 딸 결혼식 전날에 벌어졌던 부부 간 다툼을 기억했다.


백씨의 '욱'하는 성격, 친척들 "정상이 못 된다"



백경환씨는 이처럼 '욱'하고 성질이 뻗치면 주변 시선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친척들은 이런 백경환씨를 '부족하다',' 정상이 못 된다'라고 생각했다. 즉 이런 범행을 계획할 만큼 지능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히 아내 최씨가 술에 취해 말수가 많아지면 부부 싸움이 나곤 했다. 자녀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술을 마시면 말수가 많아지고 언성이 높아졌는데, 아버지 백경환씨는 "시끄러워!" 하면서 물건을 집어 던지며 다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정도 부부싸움은 흔한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장례식장에서 장모 통곡을 접했던 친척들은 전체적인 맥락상, 장모가 사위를 용의자로 놓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내딸은 아버지가 "경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당부했다고 검찰 조사에서 털어놨다.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부분 역시 친척의 생각은 검찰과 많이 달랐다. 죽은 최명자(가명)씨 여동생도 형부가 백희정씨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아버지와 딸 둘이서 나눈 귓속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이 오고 간 것일까? 당시 한 친척은 막내딸이 장례식장에서 엉뚱한 소리를 해대니 아버지가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킨 취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검찰은 이러한 보강증거와 더불어 살인 발생 원인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검찰은 이 살인사건 동기가 반드시 부녀 성관계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이 사건도 다른 존속살인들처럼,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장기간을 두고 복합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검찰은 해당 사건이 백씨 집안에서 '가정환경, 성폭행 배경, 인터넷 채팅, 부부간의 다툼, 모녀지간의 갈등, 피고인 백희정의 비관적 삶의 한탄, 가족 간 경제적 어려움, 가족 간 우애 상실' 등이 오랜 시간을 두고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형사합의부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러한 논리에 동감했다. 변호사는 여러 누적된 갈등이 내재한 상태에서 어느 순간 격분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우발적으로 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은 계획범죄에 가깝다. 계획적인 범죄들은 동기가 뚜렷한 법이다. 보통 살해 동기는 금전, 치정, 원한 이 세 가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그 복합적 원인 중 하나가 "실제 백경환은 은행권에 채무를 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3년에 발생한 인천 모자 살인사건에서도 사채라 불리는 제2금융권 대출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백경환씨에게는 어떤 채무가 있었을까? 경찰은 초기에 백경환씨 빚을 조사했다. 큰딸 카드 값과 오이 하우스 등 이유로 농협에 집을 담보로 4천만 원을 대출받았고, 2008년 12월경부터는 연체되고 있었다. 이는 농협에 농사자금을 빚진 것이다. 농사자금은 저금리에 속한다.


부조금 일일이 챙긴 남편, 과연 금전 문제가 살인 동기였을까


검찰 주장처럼 저금리 농사자금이 살인사건 동기 중 일부로 작용했을까? 한 형사는 만약에 부인이 농협에서 농사자금을 빌려서 그걸 엉뚱한 데 써버렸다면 부부 간 갈등이 됐을 것이라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 집안은 금전 문제로 인한 부부 갈등이 어느 정도였을까? 사건이 발생한 2009년, 백경환씨 집안의 경제적 여유를 살펴보자. 


2009년은 오이 하우스 농사를 접었기에 돈이 궁해졌다. 2009년 4월경 백씨 부부는 집 전화와 휴대전화 요금을 연체하기도 했다. 게다가 자녀 빚까지 갚아주는 실정이었다. 부부는 나락 농사와 동네 품팔이를 시작했다. 백씨는 이웃 사람과 함께 다니며 집 짓는 일을 거들기도 했다. 최씨는 순천시청을 찾아 희망근로사업장 근무를 신청했다. 농촌 품삯과 비슷한 일당이 나왔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최씨는 일터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백경환씨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백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거리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마을 식당 주인이 친척 한 분을 소개했다. 산림청 하청을 받아 풀 베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일터까지 차로 40분 거리였다. 백씨는 2009년 7월 1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만약에 부인이 없어진다면 남편 백경환씨에게는 어떤 경제적 이익이 생길까? 백경환씨가 혼자 농사를 지어야 하며 은행 빚도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 게다가 막내딸은 훌륭한 농사 파트너가 아니었다. 지난 기사에서 말했듯이, 백희정씨는 일에 서툴고 의지가 없어 농사와 집안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즉, 딸과의 자유로운 성관계를 위해 아버지가 평생 혼자 일하며 딸의 밥상까지 차려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부녀가 살인했을 때 상대적으로 돌아오는 이익을 생각해보면 살해동기를 납득하기는 어렵지만, 백경환씨와 백희정씨는 경찰 조사에서도 초기에 유력한 용의자였다. 하지만 경찰은 부녀로부터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백희정씨는 검찰 조사에서 자신이 경찰을 철저하게 속였다고 털어놨다. 경찰도 막내딸의 말을 그냥 믿어줬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통화내역 등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압박해 부녀가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검찰은 백경환씨가 경찰 조사에서 진술을 번복한 사실에 의심을 품었다. 백경환씨 진술을 살펴보자. 우선 기상 시각이 오락가락했다. 또 막걸리를 토방에 올려놓을 당시 아내가 방 안에서 자고 있었다고 말했다가 부엌에 있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사건 당일 식당 주인은 백경환씨가 가게에 온 시각이 오전 5시 10분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백씨 주장은 오전 5시 30분이었다. 백씨는 또 일터로 바쁘게 가야 해서 막걸리병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마을 식당에서 커피 마실 시간은 있었다는 진술도 있었다.


사실 경찰도 검찰처럼 백경환씨와 백희정씨를 의심했다. 하지만 한 달 이상 수사에 진척이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경찰은 왜 검찰처럼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이제부터 경찰수사를 한 번 점검해보기로 하자.


(제7화 - '경찰수사 점검'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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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천륜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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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탐방대-사천 고자치


아들 쪽으로 돌아봤다는 고개 고자치


고려 현종(992~1031)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애틋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관련 이야기들에서 그 증거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습니다. 


바로 ‘고자치’에 얽힌 얘기입니다. 사천 정동면 학촌 마을 뒷산 고개에 얽힌 지명 생성 설화입니다. 고자치는 한자로 돌아볼 고顧 아들 자子 고개 치峙를 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아보는 고개가 되는데요, 태조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 욱郁(?~997)이 자기 아들순詢(뒷날 8대 현종顯宗)이 있는 쪽으로 이 고개마루에서 돌아보곤 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수현 귀룡동(지금 사천시 사남면 화전·우천리 일대로 비정比定)에 귀양살이 와 있었고요, 아들은 배방사(지금 정동면 장산리로 비정)에 와 있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고자치 마루에 들어선 조형물과 정자. 제가 보기에는 참 얄궂습니다.


현종 아버지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왕욱입니다. 어머니는 5대 임금 경종(955~981)의 아내 헌정왕후입니다. 경종이 죽은 뒤 임금 자리는 사촌동생 치治(961~997)한테 넘어가 성종이 됐는데요, 이렇게 되니까 헌정왕후는 궁궐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게 됐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기사에서 가져오겠습니다. 이렇습니다. 


“처음에 경종의 비 황보씨(헌정왕후)가 궁궐에서 나와 사제私第에 있었다. 하룻밤에는 곡령鵠嶺(개성에 있는 고개, 여기 산줄기에서 태조 왕건이 태어났음)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도성에 흘러넘쳐서 모두 은銀바다로 되는 꿈을 꾸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한 나라에 임금이 될 것이요.’ 하니, 비는, ‘내가 과부인데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였다. 


종실宗室 욱은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사는 집이 비의 사제와 가까웠다. 그리하여 서로 왕래하다가 사통하여 임신하였다. 성종 때 비가 욱의 집에서 자는데, 그 집 사람이 뜰에다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관리들이 달려가 구원하고 성종 또한 황급히 가서 불이 난 이유를 물었다. 


그 집 사람이 사실을 아뢰니 비는 부끄러워 후회하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와 문에 이르자 말자 산기産氣가 있어 문 앞 버드나무를 부여잡고 몸을 풀었으나 비는 죽었다. 그 연유로 욱은 사천현에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보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길러서 마침내 욱에게 돌려보냈는데 이 아이가 곧 현종이다.” 


그러니까 왕욱은 종친으로서 선왕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지었고 그로 말미암아 개성에서 머나먼 사천으로 유배를 오게 됐던 것입니다. 


성종은 자기한테 아저씨뻘 되는 왕욱을 위해 사천으로 아들도 뒤따라 보냈지만, 같이 살게는 하지 않았답니다. 왔다갔다 하려면 산기슭을 빙 돌고 고개(고자치)를 하나 넘어야 하는 건너편 산자락 배방사에다 아들을 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기를, 993년부터 자기가 죽는 997년까지 5년 동안 자기 귀양처와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갔으며 또 돌아올 때는 그 산마루峙에서 아들子이 있는 곳을 돌아보며顧 여기서 내려가면 볼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는 얘기입니다. 극진한 아들 사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아들을 위해 당대 발복도 도모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사천현’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습니다. “왕욱은 또 지리에 정통하였다. 일찍이 현종에게 금(金) 한 주머니를 몰래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地官에게 주고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하여라. 그리고 반드시 엎어서 묻도록 하라.’ 하였다. 


욱이 귀양살다 죽은 뒤 현종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매장할 무렵에 엎어서 묻도록 청하니, 술사가 ‘무엇이 그리 바쁜가.’ 하였다. 다음해 2월에 현종은 서울로 돌아갔다. (1009년) 즉위하여서는 욱을 추존하여 효목대왕이라 하고 묘호를 안종이라 하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죽은 사람을 엎어서 장사를 지내면 발복發福이 빨라져 당대에 혜택을 볼 수 있다고 하나 봅니다. 현종이 그렇게 아버지를 엎어서 장사한 덕분에 당대 발복해 임금 자리에 올랐다는 결론이 됩니다. 


학촌 고자실마을 뒷산 고자치를 넘어가면 왕욱 묻혔던 자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 정황을 잠깐 살펴보니 왕욱이 아들을 통해 그런 욕심을 낼 만도 했다 싶었습니다. 자기를 귀양 보낸 임금 6대 성종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앞 5대 임금 경종 또한 자식이 귀해서 겨우 자기가 죽기 한 해 전(980년)에야 아들(송訟, 나중에 7대 목종이 됨)을 하나 겨우 얻었습니다. 


사촌지간인 경종과 성종한테는 다른 사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헌정왕후 사이에서 난 아들 현종은 왕실 전체를 통틀어 왕위 계승 서열이 두 번째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엎어 묻도록 한 것도 어쩌면 이와 같은 지극한 아들 사랑의 또다른 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 임금이 된다 해도 대단하고 귀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고생길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현종 출생을 지금 천륜으로 보면?


9월 21일, 배방사가 있던 건점골짜기에서 고자치를 넘어 왕욱 귀양처였던 성황당산성까지 둘러봤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 첫 걸음을 사천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둘러보는 동안 과연 인륜人倫을 넘어선 천륜天倫의 귀결이라 해야 마땅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과연 그럴까 하는 미심쩍음도 같이 들었습니다. 


인륜은 사람이 정한 윤리이고 천륜은 하늘이 정한 윤리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인륜일 뿐 천륜이 아니어서 사람이 임의로 끊을 수도 있는 것이라 하고 부자관계는 인륜이 아닌 천륜이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고 하지요. 


학촌 고자실 마을숲. 팽나무도 있고 고용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왕욱-현종의 부자관계는 처음부터 성립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왕욱은 태조 왕건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입니다.(아울러 왕욱한테는 바로 위에 형인 욱旭의 딸로 조카가 됩니다.) 


당시는 이런 근친혼이 예사(비록 두 사람이 정식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로 이뤄졌으나 이런 관계를 지금 기준으로 보면 바로 천륜을 어긴 짓으로 욕을 먹게 돼 있습니다. 


신분 따라 달라지는 부모자식 사이 천륜


더불어 이런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정녕 천륜이라면 신분이 바뀌어도 달라지지 말아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왕욱과 아들 현종은 서로가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로 여겼고 세상도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모자식관계도 있습니다. 양반 아버지와 종년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그것은 아들도 딸도 아니고 종놈이거나 종년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심했다는데, 고려시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황당산성에서.


<홍길동전>에 나오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는” 사정은 괜히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지요. 천출 자식은 아예 자식이 아니어서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달랐고 재산 상속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천륜은? 아이들 천륜은?


이렇게 사람 신분에 달라지는 윤리인데 어떻게 부모-자식관계만 꼭 집어 하늘이 정한, 사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천륜이라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분이 사라진 지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천륜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 천륜이 어떻게 바뀔까요? 자식 버리는 부모 많아지고 부모 버리는 자식 넘쳐나는 세태여서 이미 천륜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어떻게 시각을 달리해 보면, 지금 풍토가 자식은 부모한테 기대고(부모가 보살피고) 부모 또한 자식한테 기대는(자식이 보살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다 보니까 오히려 이렇게 ‘버린다’는 표현이나 생각이 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런 보살핌과 기대기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부모자식이 서로 남남 같이 산다 해도 ‘버린다’는 표현은 못하겠지 싶습니다. 


한편으로 옛날에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버리지 않고 보살피고 기대야 살아지는 세상이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면(또는 해도) 살아지지 않는 세상이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황당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지금 저 들판은 옛적 바다였거나 갯벌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아들딸한테는 어떤 천륜이 있을까요? 아들딸에 대한 우리의 천륜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리 시대 천륜의 천변만화가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참 궁금해지는 탐방길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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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유등축제 22억 입장료, 득실 따져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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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1만 원을 받는 2015 진주남강유등축제가 막을 내렸다. 나도 아들과 함께 진주를 찾아 2만 원을 내고 남강유등축제를 구경해봤다.


진주시는 총 입장객 수는 40만명으로 이 중 유료입장객 25만 명, 시민 초대권 등을 활용한 무료 입장객이 15만 명(다른 보도자료에선 14만 500명)이라고 밝혔다.


○ 또 전체 축제 수입은 32억원이며, 이 중 입장료는 22억원, 입장료 외 수입은 10억원으로 축제의 재정자립도는 43%에서 80%로 높아졌다고 밝혔다. ※ 입장료 외 수입 : 소망등 3.5억원, 광고 3.5억원, 체험료 1억원, 기타 2억원


그런데 언론사 기자들이 따지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진주성 입장료'와 '부교 통행료' 문제다. 진주시는 축제를 유료화하면서 입장료 1만 원 안에는 부교 통행료와 진주성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


진주성 안 유등 @김주완


진주시가 올해 유료화를 시행하면서 내놓은 논리. 부교 통행료와 진주성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진주시 보도자료


그렇다. 여기서 따져봐야 할 게 그것이다. 진주성은 평소 외지 관광객에 입장할 때 '진주성 입장료' 2000원을 받는다. 만일 축제를 유료화하지 않고 평소대로 진주성 입장료만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작년(2014년) 진주시는 축제가 끝난 후 공식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축제기간인 12일간 진주성에 입장한 인원은 76만 명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작년 축제기간 76만 명이 진주성에 입장했다고 밝힌 진주시. @진주시 보도자료


만일 76만 명에게 2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고 계산하면 진주성 입장료 수입만 15억 원이 넘는다. 물론 진주시민의 경우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다. 따라서 76만 명 중 진주시민이 올해 초대권으로 입장한 진주시민 숫자 정도라고 보고 16만 명을 빼더라도 60만 명 12억 원이 진주성 입장료 수입이 된다.


작년 진주시 보도자료. 유료 부교 통행 인원이 5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진주시 보도자료


또 있다. 올해는 입장료 1만 원 안에 부교 통행료가 포함돼 따로 부교 통행료를 받지 않았다. 작년에는 입장료가 없는 대신 부교 통행료를 받았는데, 유료 부교 통행 인원만 50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1000원씩만 받는다 해도 5억 원이다.


즉 축제를 유료화하는 대신 진주성 입장료+부교 통행료만으로 17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매년 진주성 입장료를 뺀 수입이 15억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진주시 보도자료


실제 진주시는 축제를 유료화하기 전에도 매년 부교 통행료와 유등 만들기 및 띄우기 체험, 협찬 등을 통해 15억여 원을 벌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여기엔 진주성 입장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 진주시는 올해 입장료 수입 22억 원을 추가로 올렸다고 했다. 그 대신 축제 자체를 유료화하지 않고도 올릴 수 있었던 진주성 입장료 12억 원과 부교 통행료 5억 원을 포기했다.


웃기지 않는가? 무료 축제로도 벌 수 있었던 17억 원을 포기하는 대신, 유료화하여 22억 원을 벌었다? 고작 5억 원 정도를 더 번 셈이다. 이러고도 유료화가 성공했다고 한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입장료를 받는 출입구를 8군데나 만들었다. 이 비용도 상당했을 것이다. @김주완


뿐만 아니라 유료화하면서 추가로 들어간 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가림막 설치비와 입장권 인쇄비용, 입장권 판매소 설치, 판매요원과 입장권 수거 요원들의 인건비만 해도 유료화하지 않았다면 들지 않았을 비용이다. 이것까지 감안하면 유료화로 인한 손실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돈도 잃었고 시민의 마음도 잃었다. 관광객도 1/7로 확 줄었다. 고작 이런 결과를 보려고 펜스를 치고 시민을 소외시켜 모욕감을 주고 그런 난리를 떨었나. '대박'이나 '성공'은 커녕 완벽한 '실패'라고 봐야 할 것이다.


행사 운영 면에서도 총체적 부실이었다. 치졸한 가림막도 그랬고, 처음엔 유료입장객의 재입장이 안 된다는 방침이었다가 항의가 빗발치니 시뻘건 도장을 손등에 찍어주는 걸로 번복하더니, 마지막날 축제를 하루 더 연장해서 진주시민을 위해 무료로 운영한다고 발표한 후 다시 번복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관련 글 : 돈 받는 남강유등축제의 본질을 묻는다


@진주시 보도자료


게다가 진주시는 작년 축제에 280여만 명이 찾았고, 지역산업 연관분석에 의한 경제적 파급효과가 1600억 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280만 명이 찾은 축제의 파급효과가 1600억 원이면 방문객이 1/7(40만 명)로 줄어든 올해의 파급효과는 얼마일까? 아무리 많게 잡아도 1000억 원 이상의 파급효과는 공중에 날려버렸다고 볼 수 있다. 280만 명이 아무리 부풀려진 숫자라고 해도 파급효과가 줄었다는 건 확실하다.


실제 축제장 인근 식당과 야시장 등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료화로 인해 손님이 작년의 1/3 이하로 줄었다고 말하고 있다. 아래 영상은 내가 야시장 상인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다.



경제 파급 효과 1000억 원과 부가 수입 17억 원을 날려버리는 대신, 22억 원의 입장료 수입을 올린 진주 남강유등축제.이거 확실히 규명해야 할 문제 아닌가? 진주시는 이에 대한 확실한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진주시는 아래와 같은 자화자찬 보도자료를 계속 내고 있다. 낯뜨겁지 않은가! 기자들은 왜 이걸 따지지 않는가!



※오류 수정 : 당초 부교 통행료를 2000원으로 계산했는데, 알고보니 1000원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행료 수입을 수정합니다. 따라서 유료화하지 않고도 벌 수 있었던 수입은 17억 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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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유등축제 유료화 성공을 위한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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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진주 남강유등축제는 '유료화 원년'보다는 '실패한 가림막 축제'로 기억될 것 같다. 흉물스럽고 조잡한 가림막이 남강 일대를 온통 가로막고 있었고, SNS에는 이에 대한 원성이 빗발쳤다.


가림막 너머 남강을 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엎드린 할머니의 등을 밟고 올라간 사진을 보도한 경남도민일보 기사에는 페이스북 '좋아요' 반응만 4200개가 넘을 정도로 반향이 컸다. 경남도민일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도달'한 숫자만도 27만 명에 이르렀다.


관련 기사 : 돈내는 남강유등축제 가슴 아픈 한 장의 사진 


축제가 끝난 후 진주시는 스스로 '성공' '대박' '승부수 통했다'느니 하면서 자화자찬하는 보도자료를 뿌리고 있지만, 시민들은 냉담하다.


실제 축제 현장에서 '금 토 일요일'에는 진주시민 무료초대권을 쓸 수 없다며 입장을 제지당한 노인들이 화를 내며 초대권을 갈갈이 찢어 뿌리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아래 관련 영상)



진주시는 작년(2014년) 축제 때 280만 명이 방문하여 1600억 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봤다고 했지만, 올해는 고작 40만 명이 입장했을뿐이다. 그나마 유료입장객은 25만 명에 불과했다.


관련 기사 남강유등축제 22억 입장료, 득실 따져봤더니...


이걸로 진주시는 22억 원을 벌었다며 '성공'이라 자평했지만, 작년과 달리 올해는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22억을 벌기 위해 주변 상권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한 번 축제장을 벗어난 사람은 같은 날에도 '재입장'을 허용하지 않은 것도 큰 실책이었다. 축제장 바깥의 식당에도 갈 수 없게 만든 것이다.(뒤늦게 허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사실 22억 원은 예전 관람객 수준이라면 축제 기간 중 부교 통행료(편도 1인당 1000원)와 진주성 입장료(외지인 2000원)만 제대로 받아도 벌 수 있는 돈이다.


특히 남강변에 둘러쳐진 가림막은 '돈 내지 않은 사람은 남강도 보지마라'는 모습으로 비춰져 관광객과 진주시민이 모욕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진주같이'라는 단체가 연일 진주성 앞에서 벌인 '가림막 철거요구 시위'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박수를 치고 구호를 따라 외치는 등 호응을 보였다.(아래 관련 영상)



그래서인지 이창희 진주시장도 축제 후 기자회견에서 가림막의 문제점은 인정했다고 한다. 어떻게 개선할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내년에는 흉물스런 가림막을 보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


나도 하루 일정을 투자해 관람해본 입장에서 본다면, 가림막을 치지 않고도 충분히 유료화는 가능하다고 본다. 진주성과 남강 축제현장으로 내려가는 몇몇 통로에 매표소를 설치하고 표를 받아도 충분해보였다. 어차피 진주시민은 무료이고, 축제를 보러 진주를 찾아온 외지 관광객들이 관람료 아끼려고 밖에서만 쳐다보고 떠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돈이 아까워 입구가 아닌 쪽으로 숨어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까짓 거 모르는 척 해줘도 뭐 대순가.


진주성 안 유등 @김주완


게다가 이번에는 남강보다 진주성 안에 설치된 유등이 훨씬 볼만 했다. 그 부분을 집중 홍보하고 진주성 입장료만 평소(2000원)보다 좀 올려 3000~5000원 정도 받아도 올해 번 22억보단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올해 25만 유료입장객보다는 훨씬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진주시민은 '월 화 수 목'요일에만 무료관람이 가능토록 한 것도 시민들의 소외감과 상실감을 부추겼다. 전체 진주시 인구를 모두 합쳐도 35만 가량인데, 굳이 '금 토 일' 관람을 제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래 축제란 지역민과 외지관광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것 아닌가.


축제의 주인은 시민이고, 관광객은 말 그대로 손님일 뿐이다. 주인이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안내하면서 자기 고장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낌으로서 시민의 화합과 결속을 꾀하는 게 원래 축제의 목적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이창희 진주시장은 이번 '가림막 축제'에서 정치적으로도 잃은 게 적지 않을 것이다.


부디 올해의 실패를 거울삼아 내년에는 시민과 관광객 모두가 만족하는 멋진 남강유등축제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나도 진주시에서 10여 년을 살았고, 지금도 진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는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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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의 활로는 신문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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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날과 오늘날을 입체적으로 연결하기 


지역 신문이 지역 역사를 다룰 때는 '화려찬란했던 지난날'에서 얘기가 멈추는 경향이 큽니다. 그 화려찬란했던 지난날을 지금 여기로 불러낼 때는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날을 지난날 그대로 둔다 해도 나름대로 새롭게 인과관계를 따져서 구성까지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입체적으로 알아야 하고 나름대로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경남에는 최치원 관련 유적이 많습니다. 최치원은 뛰어났지만 중국에서는 외국인이라 꺾였고 모국 신라서는 신분이 육두품밖에 안돼 자빠졌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외롭고 고달팠습니다. 


최치원이 아직도 지리산이나 가야산에 신선이 돼서 살아 있고 놀라운 초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시골 할매 할배들의 믿음은 어쩌면 최치원의 이런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뛰어나지만 고달프고 외로웠던, 옛날 위인에 대한 연민과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동일화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최치원의 이런 행적을 갖고 오늘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지역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거제로 좁혀서 보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한산도대첩이나 옥포해전 같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해전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해전들이 죄다 안바다에서 벌어졌는데, 그 까닭은 별로 생각지 않습니다.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의 중학생 진로체험단 활동 장면.


바깥바다는 바람이나 물결이 세어서 당시 기술이나 동력으로는 배를 띄우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깥바다에 있는 지심도는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배가 뜨지 않습니다. 반면 안바다에 있는 안섬(내도)은 어지간하게 바람이 불어도 배가 뜹니다. 


또 이렇습니다. 옥포해전 승리와 고현읍성 함락은 어떻게 관련돼 있을까요? 옥포해전에서 깨진 왜적들이, 이순신 함대가 남은 배까지 싸그리 불태우는 바람에 돌아갈 길이 없어지자 그 길로 북진해 7일 뒤에인가 고현읍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바람에 지금 거제면사무소 일대로 읍치가 옮겨갔지요. 옥포해전이 거제현 읍치를 고현에서 거제로 옮기게 한 셈입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


보기는 또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거제도포로수용소 그 자체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알기로 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 최대 17만3000명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인원은 여기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 거제 인구는 과연 얼마나 됐을까요? 아무리 많아도 거기 포로 숫자보다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 거제도포로수용소가 거제에 끼친 영향 또한 여러 방면에서 크고 세었겠지요. 이런 이야기가 실은 관심을 많이 끌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보도는 지역신문 다양한 역할 가운데 하나일 따름 


지역밀착 보도는 지역신문이 할 수 있는 지역밀착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쩌면 보도는 신문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한 분야일 따름인지도 모릅니다. 보도가 지역신문의 전부이거나 아니면 가장 중요한 으뜸으로 여기는 이상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지역신문이 역할을 보도로만 좁히면 지역신문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밀착도 온전하게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신문 바깥으로 나가야만 살길도 생기고 지역밀착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역신문이 자기 독자한테 이런저런 가치를 제시해 왔다면 그것을 보도를 통해 얘기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런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 사업을 벌여야 맞지 않을까 하는 말씀입니다. 


지역신문이 보도 주장을 통해 가치롭게 여기는 바를 뚜렷하게 내세운다면 그에 머물지 말고 스스로 실행해야 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다시 신문에 보도로 담는 일을 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경남도민일보는 이런 사업과 활동을 벌이는 주체로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별도 독립돼 있는 법인이지만 사실상 자회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해딴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를 뜻하는 경상도 지역말입니다. 해딴에는 캐치프레이즈가 '잘 놀아야 잘 산다'입니다. 


공공성과 영리를 동시에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는 일은 이렇습니다. 잡다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합니다. 생태+역사+여행을 기본으로 합니다. 마을 만들기와 도랑 살리기도 합니다. 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나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합니다. 



3. 해딴에가 벌여온 이런저런 밀착들 


함양군 휴천면 임호마을 한 곳에서 2012년에는 마을만들기를 했고, 2013년에는 도랑살리기를 했습니다. 2014년에는 도랑살리기를 창녕군 계성면 명리 마을과 함양 백전면 망월마을 두 군데서 진행했습니다. 


올해는 김해 진례면 용전마을에서 도랑살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올해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김해시에서 좀 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 바람에 하게 됐습니다. 



다른 민간 역량을 끌어들일 때도 있습니다. 자원봉사(Volunteer)와 여행(Tour)을 합한 볼런투어인데요, 자원봉사의 보람에 더해 여행의 즐거움까지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 벽화도 그리고 솟대도 만들고 버스 정류장 단장도 하고 원두막 쉼터도 들였습니다. 


결과는 경남도민일보에 보도합니다. '지역 밀착'의 본보기를 스스로 만들고 이를 보도로 알려나갑니다.(적어도 저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문화 탐방'도 2013년과 2014년 이태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수능시험 끝난 뒤 경남도교육청 지원을 받아 고3 학생들을 상대로 벌입니다. 


아시는대로 지금 교육은 지역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현실입니다. 공공기관인 학교도 사설기관인 학원도 전국적인 것이나 세계적인 것만을 가르칩니다. 왜냐 지역적인 것은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에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역아동센터 역사탐방 모습.


이런 아이들에게 지역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만지고 누리고 즐기게 하자는 취지로 제안해 성사시켰는데,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하며 선생님들도 썩 만족스러워합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 경남도민일보에 기획연재로 실었습니다. 


이런 청소년 역사·문화탐방활동에 지역 중견기업 한 군데가 가치를 인정하고 돈을 대주는 일도 생겼습니다. 덕분에 2014년 창원 지역 다섯 개 중학교 학생들에게 탐방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이 벌이는 '창원시지역아동센터연합회와 함께하는 토요동구밖 교실'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두산중공업은 지역사회 기여 차원에서 형편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모두 일곱 가지 프로그램이었고 2015년에는 다섯 가지로 줄었는데요, 해딴에의 몫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지난해와 올해 모두 생태체험과 역사탐방 두 가지를 해딴에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두산중공업은 2014년 사업이 성과가 좋았다고 판단했는지 올해 들어서는 중학생 진로체험 프로그램도 해딴에에 개발과 실행을 맡겼습니다. 이 또한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결과는 보도를 통해 지역사회에 알리고 공유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 쟁점이나 현안을 찾아가는 어린이·청소년 기자단 운영도 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도랑 살리기를 주제로 삼아 어린이들을 모아 진행했고 2014년에는 밀양 초고압송전탑 반대운동과 한국수력원자력 고리발전본부 핵발전소를 한 데 묶어 중·고생 에너지지킴이 기자단 활동을 벌였습니다. 


2015년에는 낙동강과 남강 등 우리 강들을 둘러보고 그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는 '우리 강 청소년 기자단'을 운영합니다. 


섬진강 송림공원 취재 모습.


이처럼 공익성이 인정되는 분야에서는 사업 공모를 하는 이런저런 기관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해딴에는 적극 참여합니다. 2012년에는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공모한 '지역문화 초록아카데미 사업'에 응해 해딴에의 '버스 타고 함양 속으로' 프로그램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함양 모든 명소를 군내버스를 타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3년짜리였는데, 홍준표 도지사가 경남문화콘텐츠진흥원을 경남문화예술진흥원으로 통합하면서 '지역문화초록아카데미사업'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1년만에 접었습니다.) 


올해는 언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지역 역사문화풍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와서 일하는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 속살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 내용 결과를 보도하면, 그 자체로 기획기사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신문 바깥으로 나와야 가능한 지역밀착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은 지역신문이기 때문에 갖출 수 있었습니다. 먼저 경남 지역 그럴 듯한 습지와 생태에 대해 기획 보도를 하면서 나름대로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줄곧 지역 산과 강과 바다를 찾아가는 보도를 하면서 여행에 대한 기본 감각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좀 하다 보니까 테마 여행을 진행해 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펼쳐 보인 것이 '시내버스 타고 우리 지역 10배 즐기기'였습니다. 대중교통편을 활용하고 나머지는 걸어서 다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경남 곳곳 숨은 명품들을 좀더 잘 알게 됐습니다. 


역사 문화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경남 18개 시·군 20개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찾아다니는 기획보도를 했습니다. 


익히 알려진 누구나 뻔히 아는 그런 사실들은 되도록 피하고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그런 역사 사실과 문화유산을 찾아내고 보도했습니다. 또는, 잘 알려져 있는 내용이라 해도 여태까지와는 다른 각도 시각에서 살펴보는 식으로 했습니다. 


이런 보도는 그 자체로 지역 밀착이 되고 지역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되며 지역 주민들한테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는 일이 됩니다. 이처럼 역사 문화 자연 생태 그리고 사람은 아무리 파내어도 마르지 않는 지역밀착의 보물창고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지역신문에서는, 정치·사회·경제 분야 보도는 없으면 허전한 그런 정도에서 그치는 존재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자고 말씀드립니다. 이런 기본 실력을 바탕으로 삼아 그런 내용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해서 실행해 보자는 얘기입니다. 신문 바깥으로 나가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뜻밖에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생태체험.


또 저희 경남도민일보도 더 많이 알릴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지역신문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특히 기자들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신문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문 바깥으로 나가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줌마들 서른 가까이 모인 자리에 저희 프로그램을 홍보하려고 간 적이 있었는데, 경남도민일보를 집에서 받아보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고, 한 번이라도 경남도민일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네 사람이었으며, 나머지는 경남도민일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가 그렇게 프로그램 홍보차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아마 경남도민일보를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진행한 내용과 결과는 다시 신문으로 들어옵니다. 기획 보도 기사가 되는 것입니다. 지역 밀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프로그램을 하면 적든많든 돈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해딴에가 전부는 아닙니다. 해딴에가 하는 일이 지역신문이 신문 안팎을 넘나들면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닌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서 없이 몇 마디 말씀 드려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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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아저씨에게 성추행당했다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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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진 제복] [부러진 화실] 서형 작가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살인사건 추적기다. 이 연재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린다.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나흘간의 기억]제7화, 동네아저씨에게 성추행 당했다던 딸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도 백경환(가명)·백희정(가명) 부녀를 가장 먼저 의심했다.


죽은 최씨 집은 마을 큰 도로에서 골목길을 따라 200m 들어간 곳에 있다. 사인이 된 막걸리는 최씨가 평소 즐겨 마시던 술이었다. 형사들은 현장을 보자 면식범의 소행으로 예상했다. 



순천경찰서는 남편 백경환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남편 백경환씨는 경찰서에서 사건 당일부터 계속 조사받았다. 유가족과 친척은 장례 절차를 마치고 조사가 시작됐다. 한 친척은 "조사를 받아보니 이미 백씨의 보험·금융·통신 내용은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당시 범행에 사용된 막걸리를 만드는 공장은 순천 시내에 있었다. 생술이라서 그날 만들어 바로 소비해야 하므로 순천지역에서만 판매됐다. 형사들은 그 막걸리가 순천에서 황전마을로 오려면 자가용·택시나 버스 중 하나를 통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루 열 번 운행하는 33번 버스에는 CCTV 4대가 부착돼 있었다. 따라서 승객이 버스를 탄 곳과 내린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사들은 백경환씨에게 수사 협조를 부탁했다. 형사가 백경환씨를 3일 동안 데리고 그 막걸리를 파는 슈퍼·식당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형사는 주인에게 '백씨에게 막걸리를 판매한 적이 있는지' 확인했다. 당시 백씨는 3일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경찰은 백씨가 '배가 고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식사 때면 밥을 걸신들린 것처럼 먹었다고 한다.


막걸리 생산 일자는 7월 2일이었다. 범인이 막걸리를 샀다면 분명 7월 2일 이후였다. 순천과 황전 사이에 있는 도로 CCTV를 최대한 뒤졌다. 또 7월 2일부터 행적도 모두 조사했다. 백경환씨 일터 작업일지를 모두 제출받았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게 조사 대상에 올랐다. 경찰은 백씨 집과 동생 식당도 압수 수색을 했다. 형사들은 사건 전날 백씨 가족이 외식을 한 식당을 찾아 직원에게 당시 분위기를 물었다. 당시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백씨 아들은 아버지가 걱정돼 일을 접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가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갈 때면 동행했다. 경찰은 백씨에게 여자관계를 묻기도 했고, 오이 농사에서 병균을 죽일 때 무엇을 쓰는지도 물었다. 백씨는 오이 농사에 석회질소를 쓴다고 답했다.


백씨는 혐의를 부인했고 조사 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 평소 무척 말이 없던 백씨는 조사 과정에서도 형사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결국 경찰은 백씨에게 자백을 받지 못했다. 자백을 받아낼 명확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반경을 점점 넓히며 조사 범위를 확대했다. 마을 사람 알리바이와 동선도 확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7년 동안 치매로 누워 있던 할아버지도 조사 대상이었다.


경찰은 남편 백경환씨만 의심한 게 아니었다. 막내딸 백희정씨 역시 유력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한 형사는 백희정씨 언니 진술에서 감이 왔다고 했다. 언니의 진술 내용은 뭐였을까.


"제가 집에 오면 엄마와 희정이가 여러 번 다퉜거든요. 서로 악을 쓰면서 싸웁니다. 그러면 옆에서 제가 희정이를 혼냅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에 제가 희정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서 '엄마가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병원으로 민수 데리고 가보라'고 하니까, 희정이가 자고 일어난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고 제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까,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2009.7.23. 2회 진술조서)


엄마 사망 소식에 놀라지 않은 딸 백희정



이 대목은 검찰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당시 백희정씨는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지도 않았고, 택시를 잡아타고 황급히 (장례식장에) 가지도 않았다. 이에 형사는 백희정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백희정씨는 7월 4일 남자친구를 만나러 부산에 갔다고 했다. 형사들은 (백희정씨의) 돈 출처가 궁금했다. 백희정씨 계좌와 통신내역을 추적했고 그가 일하는 마을도서관 컴퓨터를 조사했다.


둘째 언니는 사건 전날 식당에 가는 길에 마주친 백희정씨가 가방 같은 것을 메고 걸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형사들은 가방에 막걸리가 들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백희정씨는 사건 전날 부산에서 바로 순천으로 오지 않았다. 7월 5일 오전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동했다. 형사들은 백희정씨 당시 이동 경로를 확인했고, 버스를 타거나 편의점에 들렀다면 그곳에 부착된 CCTV를 확인했다고 한다. 또 그동안 백희정씨와 채팅을 한 남자를 만나러 전국을 돌기도 했다.


백희정씨가 엄마에게 질책을 받자 남자친구를 시켜 살해할 수도 있다는 게 또 다른 가정이었다. 수많은 용의자가 눈을 사로잡다가 용의 선상에서 사라져 갔다. 경찰은 이처럼 백경환·백희정씨 부녀에게서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거짓말탐지기도 모두 통과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살인 사건과 관련해 받은 질문은 세 가지였다. 백경환·백희정씨 부녀는 모두 부정했고 거짓말탐지기 반응은 모두 '진실'이었다.


1. 당신이 그 당시 집에 청산가리를 막걸리를 탄 막걸리를 놔두었습니까?

2. 당신이 집 마당에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놔두었습니까?

3. 그 당시 집에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갖다 놓은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수사본부 사건 경험이 있는 형사과장들은 거짓말탐지기를 신뢰한다고 했다. 신뢰하지 못한다면 왜 그런 시스템을 국민 세금 축내면서 구축 하느냐고 되물었다. 과연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진실과 거짓 중간에 '판단 불능' 구역이 있다. 진실 또는 거짓이 얼마든지 판단 불능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이 거짓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7월 27일 경찰청에서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를 투입한다. 프로파일러는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범인의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피해자 주변인으로 범인의 입장에서 피해자보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우월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었다. 또 범인은 대인관계가 미숙해 위축돼 있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공격성과 폭력성이 내재해 가족 등 자신의 영역에서는 폭력성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특성이 있는 인물로 판단했다.


프로파일러는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프로파일러는 필자에게 수사에 관한 사항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사건 정황을 비롯한 종합적인 상황을 분석한 것임을 강조했다. 내가 만난 형사과장들도 프로파일러 실력은 인정했다. 그러나 프로파일러 의견이나 거짓말탐지기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증거라고 했다.


순천경찰서 형사들은 가족들에게 계속 의심되는 사람을 물었다. 이에 아버지와 딸 의견이 엇갈렸다.


백경환씨는 경찰 조사 때부터 아내가 사망 직전 갈등을 빚었던 마을 아주머니를 꼽았다. 백경환씨와 달리 딸들은 다른 마을 아저씨, 장영환(가명)씨를 지목했다.


경찰이 장영환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삼은 데에는, 죽은 최씨 여동생과 최씨 동네 할머니 증언도 한몫했다. 사건 전에 최씨로부터 "희정이가 동네 어떤 남자랑 알고 지내는 것 같다. 미치겠다"는 하소연을 들었고, 동네 할머니는 그냥 막내딸을 시집보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여기에 최씨 딸들 진술까지 가세했다.


초상집에 각티슈 들고 온 이상한 조문객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최씨가 청산가리 막걸리를 마시고 죽은 사건 당일, 백경환씨 집에 친척들이 모여들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충격에 친척이 토방에 앉아 허탈하게 있는데, 첫 조문객이 들어왔다. 조문객은 각티슈 묶음을 들고 있었다. 죽은 최씨 여동생은 당시 '시골에서는 초상집에 티슈를 들고 오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조문객은 두리번거리다가 그냥 대문 밖으로 나갔다.


최씨 장례를 치르고 열흘 정도 지나 최씨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죽은 최씨 둘째 딸이었다.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이튿날 찾아와 물었다.


"이모, 그때 각티슈 들고 온 사람 기억나세요?"

"왜?"


그게 시작이었다. 둘째 딸은 그 조문객이 수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경찰 조사에서 각티슈를 들고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조문객은 바로 마을 아저씨 장영환씨였다.


둘째 딸은 자신과 언니가 예전에 그에게 성추행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막내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는지 걱정했다. 이모는 백희정씨를 만나 이에 관해 물었다. 희정씨는 (그런 적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엄마를 죽인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자신도 당한 적이 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경찰이 백희정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성추행과 더불어 성폭행 여부도 물었다. 처음에는 (성폭행을 당한 적이) 없었다던 희정씨는 결국 피해 사실을 인정했다.



2009년 7월 26일 경찰은 백희정씨에게 물어보면서 고소장을 작성했다.


'장영환은 2008년 11월 15경부터 2009년 5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서 고소인을 강간하거나 강제로 추행하였으니 이를 처벌해 달라.'


경찰은 희정씨에게 장영환씨 집 구조를 그리게 했다. 희정씨 그림에는 실제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묘사가 있었다. 경찰은 장영환씨를 긴급체포했다. 경찰은 살인사건 수사를 진행하는 와중에 백희정씨 강간과 강제추행 등 피의사건 조사를 끝내고 8월 18일 광주지검 순천지청으로 구속 송치했다.


그런데 검찰이 8월 24일 백희정씨로부터 (어머니 살해) 자백을 받아낸다. 단 일주일 만이다. 



대체 일주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이 당시 경찰과 검찰의 수사 동선을 살펴보겠다. 


(제8화 - '막바지 경찰 수사 상황'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블로그 4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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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와 독재가 당연한 줄 알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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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피플파워> 11월호 독자에게 드리는 편지


“시어머니는 아들과 따로 밥상을 차리셨어요. 남편은 혼자 독상을 받았고 저와 시어머니는 부엌 한켠에서 밥을 먹었죠. 어린 시절 친정엄마와 함께 한 자리에서 밥 먹던 저에겐 충격이었죠. 태어나 27년 만에 가부장적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에요.”


이번호에서 박민국 기자가 인터뷰한 시민운동가 이경희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정에서 60~70년대를 지낸 사람들이라면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식사를 했을 겁니다. 저희 집도 그랬으니까요.


장남인 저는 아버지와 겸상을 받았고, 누나와 여동생들은 둥근 도레상에서 따로 밥을 먹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계란이나 생선 등 귀한 반찬은 아버지와 제가 받은 겸상에 놓였습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와 연결된 샛문을 오가며 음식을 날랐고, 부뚜막에서 대충 때우거나 도레상 귀퉁이에서 남보다 늦은 밥을 먹기도 했죠.


저는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바래(갯벌과 갯바위에서 해산물을 캐는 일) 가서 캐온 백합 조개나 피조개 등은 당연히 아버지와 제 몫이었고, 심지어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도 제 몫이었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진학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우연히 읽은 성평등 관련 글 한 편, 여성학 관련 책 한 권이 20년 넘게 제 의식을 지배해왔던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고에 균열을 줬던 것이죠.


저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경희 대표는 민주적 가정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시집살이에서 겪은 가부장적인 집안 환경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거죠. 이렇듯 순서는 어찌되었든 잘못된 것은 결국 바로잡히게 됩니다.


피플파워 11월호 표지.


잘못된 역사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저희 세대가 다 그렇듯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역사관과 국가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정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역사의 진실을 한두 개만 접해도 그 전까지 배웠던 모든 역사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역사교육은 그만큼 토대가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현 정부가 왜 이런 무모한 일을 밀어붙이는지 참 딱한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딱하다고만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건 이대로 가다간 국민들도 서서히 독재와 불의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저부터 마음속에 점점 기대를 포기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역사에서 만난 사람’ 코너에 소개되는 세계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독재자였던 아이티의 뒤발리에 부자(父子)이야기는 한심함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아들 뒤발리에.


이번호에는 이경희 대표처럼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다 역경의 인생을 살아온 이상익 새길동산 원장의 삶도 소개됩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사유집 <이상익의 시적 사유>를 저희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도 독자 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향우로 소개되는 김범준 부산광역시청 서울본부장은 비록 경남 출신의 부산 공무원이지만, 그의 ‘무능한 중앙정부, 무력한 지방정부’에 대한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 합니다. 그는 지금의 중앙집권체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과거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규모가 작고 국민생활이 단순했던 당시 중앙집중 시스템은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경제규모가 성장했고 민간의 수준과 효율성이 공공부문을 압도하는 지금에는 과거와 같은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방위적인 정보화 시대에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지시하고 관리, 통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지역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지방정부에 맡기고 중앙정부는 외교와 국방, 보건과 안전 등 중대한 국가사무에 집중하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작동했더라면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의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번호부터 시인이자 조선소 노동자인 박보근 씨가 쓰는 ‘700리 갯길따라 걷는 거제 섬이야기’가 연재됩니다. 권영란 기자의 ‘남강 오백리’ 연재가 끝난 후 우리지역을 깊이 들여다보는 기획이 아쉬웠는데, 박보근 씨의 감칠맛 나는 필치와 따뜻한 시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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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근대도시 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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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에 무지했던 마산·창원시장들

방치돼있는 헌병분견대를 역사기록관으로


벌써 두어 달 전 이야기다. 마산역사문화유산보전회가 '마산헌병분견대(등록문화제 제198호)의 의의 및 활용방안'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발표자인 허정도 박사(도시학)는 "현재의 건물 면적이 좁으므로 인근 부지를 추가 확보하여 지금보다 공간을 넓힌 후, 제2의 건물을 신축하여 '마산 근대역사관'이나 '기록관' 혹은 '인권과 민주주의 기념관' 등 역사문화 전시공간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나도 적극 동의했다. 하지만 언감생심(焉敢生心), 부지를 추가 확보하자는 말은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비록 작은 공간이나마 지금 건물에서 우선 역사기록관을 시작부터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고 이름에서부터 뮤지엄(museum․박물관)인지 아카이브(archives․기록관)인지 개념이 모호한 '역사관'이나 '기념관' 보다는 아카이브로서 의미가 명확한 '역사기록관'으로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뮤지엄으로 시작하면 아카이브의 기능을 더하기 어렵지만, 아카이브로 시작하면 뮤지엄의 기능을 겸하는 건 언제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빈 건물로 방치되어 있는 마산 헌병분견대 건물.


인근 부산시 중구에만 해도 일제강점기 동양척식회사 건물을 활용한 부산근대역사관, 독립지사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를 활용한 백산기념관, 그리고 부산민주공원에 있는 민주항쟁기념관, 40계단문화관, 보수동 책방골목문화관이 있다. 중구는 특히 이런 시설물을 테마로 묶어 '역사문화거리'로 명명하고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또 바로 옆 서구에는 옛 경남도지사 관사를 활용한 임시수도기념관이 있고 옛 경남도청 건물에 동아대학교 박물관과 임시정부청사 기록실은 물론 부산 독립운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부산광복기념관도 있다. 동래에 가면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 생가도 잘 정비․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경남의 대표적인 근대도시였던 마산에는 무엇이 있는가. 3․15국립묘지 안에 있는 기념관 말고는 근현대 역사를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없다. 그나마 하나 있는 3․15기념관은 부산민주항쟁기념관과 달리 오로지 3․15에 대한 전시물만 보여주고 있다. 개항 이후 일제의 수탈도시로써 마산은 어떠했는지, 당시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사라든지, 해방 이후 현대사는 물론 3․15와 부마민주항쟁, 6월민주항쟁, 노동운동에 이르기까지 민주성지와 노동운동의 메카로서 마산의 역사는 없다.


비록 60평(200㎡) 정도밖에 안 되는 건물이지만 근대도시 마산의 역사기록관으로 쓰기엔 이곳만큼 적절한 곳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구청 이름으로만 있는 '마산'의 역사를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의미 깊은 일이기도 하다.


공무원들은 비워있는 건물을 활용하자고 하면 인력과 예산 문제로 먼저 난색을 표한다. 걱정하지 마시라. 인력 채용 필요 없다. 거창한 전시시설도 미리 갖출 필요 없다. 최소의 예산으로 민간에 위탁을 주면 된다. 내 돈을 보태서라도 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가진 사람과 단체들이 있다.


그렇게 하여 우선 여기저기 개인이나 단체가 보관하고 있는 기록물을 수집하는 일부터 하도록 하자. 지금은 그런 공간이 없기 때문에 기증하고 싶은 자료가 있어도 그냥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록관이 생기면 내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부터 무상 기증하겠다.


지금까지 마산시장이나 창원시장은 역사와 문화에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가치나 중요성도 알지 못했다. 시민이 자기 고장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은 도시공동체 구축의 시발점이요, 시민의 자긍심과 애향심의 원천이 된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이전의 시장들과 다를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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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광고 실은 한겨레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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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내가 편집국 자치행정부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우리 신문에 이런 제안을 해왔다. 500만 원을 취재협찬금으로 줄 테니 자신들의 주문대로 특집기획기사를 신문에 실어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신문들에도 그렇게 하여 기사가 실렸으니 ○○일보 몇 일자 몇 면을 참고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황당했다. 이건 국가기관의 ‘언론 매수’였다. 고민 끝에 그들이 주문한 기획기사 대신 이 사실을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 결국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지켜온 ‘건전한 대언론관계 형성’ 원칙에 역행한 것으로 국민 여러분께 정중히 사과드린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런 식의 언론 매수 행위가 비일비재하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지난 3월 매일경제가 보도한 ‘노동시장 개혁’ 시리즈 기사는 5500만 원의 정부 돈을 받고 써준 기획기사임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었다. 문화일보, 머니투데이, 한국경제, 중앙일보 등도 그랬고, 심지어 조선·중앙·동아일보에 실린 전문가들의 정부 정책 홍보성 칼럼도 정부가 돈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드러난 역사교과서 국정화 ‘TF 구성 운영계획(안)’에 적혀 있는 ‘기획기사 언론 섭외, 기고·칼럼자 섭외’라는 문구도 그런 짓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국가기관과 언론이 짜고 국민을 속이는 짓이다. 정부 정책을 홍보하려면 당당히 해당 부처를 광고주로 명기한 광고를 내면 된다. 정책홍보 광고는 노무현 정부 때 한미FTA 광고,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광고 등 모든 정부에서 해왔고,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도 하고 있다. 그 정책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국민을 설득하려고 낸 광고가 오히려 역풍을 맞아 국민에게 욕을 먹는다면 그건 온전히 광고주인 정부가 감당할 몫이다.


한겨레 10월 19일자 1면


그런데 광고주보다 광고를 실어준 한겨레가 욕을 먹는 일이 벌어졌다.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교육부 광고를 실었다는 이유였다. 경향신문이 ‘광고도 지면의 일부’라며 이 광고를 거부한 것과 비교되면서 비난이 증폭된 이유도 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선 얼마든지 언론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한겨레 비판이 ‘신문의 논조와 배치되는 광고를 실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귀결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싣지 말아야 할 광고의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 게다가 나와 다른 입장이면 광고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파쇼이자 폭력으로 연결된다. 한겨레가 특정 진영의 기관지가 아닌 한 반대 입장의 광고도 허용해야 한다.


한겨레는 이번 광고를 실으면서 ‘광고와 기사는 다르다’고 밝혔다. 그렇다. 한겨레가 정부의 광고 공세나 회유에 굴복해 비판논조가 무뎌졌거나 바뀌었다면 당연히 욕먹어야 한다. 또한 앞서 거명된 신문들처럼 돈을 받고 위장된 기사를 실었다면 신문의 존폐를 논해야 할 정도로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거야말로 독자를 우롱한 것이고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광고와 기사는 구분할 줄 안다. 한겨레에 실린 광고를 보고 그게 한겨레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독자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본다. 또한 적어도 한겨레를 봐온 독자라면 그 광고에 설득당할 이도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광고를 다 실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서구 신문들도 인종 차별이나 나치 찬양 등 광고는 싣지 않는다. 또한 실정법 위반이거나 허위사실임이 명백한 광고도 실어선 안 된다. 그러나 이번 교육부 광고가 거기에 해당하는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아마도 한겨레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일을 미리 허위라고 예단할 순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각 정당과 후보자의 장밋빛 정책·공약 광고처럼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경향의 선택도 존중하고 한겨레의 판단도 존중한다. 진짜 욕먹어야 할 신문들은 따로 있다.


※미디어오늘 '바심마당'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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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내도 거칠 것 없는 산·바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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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5) 


8월은 혹서기라 건너뛰고 9월 16일로 날을 잡아 떠난 생태역사기행이었습니다. 목적지가 원래는 거제 지심도였어요. 지심도는 알려진 대로 천연으로 이뤄진 동백나무숲이 그지없이 아름답고 멋지답니다. 


아울러 진해만 들머리에 툭 튀어나와 있다는 지형 특성으로 말미암아 일제강점기 1930년대 들어선 일본군 포대 군사시설도 잘 남아 있습니다. 근대역사유적지이기도 한 셈입니다. 


지심도는 또 물이 적지 않게 나고 줄곧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원래 살던 조선 사람들을 쫓아낸 일본군이 그 물을 갖고 수력발전을 하기까지 했다고 하네요. 덕분에 지심도를 도는 탐방로 어느 어귀에는 내륙 산골에서 볼 수 있는 습지 생태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지심도는 이렇듯 생태적으로 아름답고 독특할 뿐 아니라 역사유적까지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주관하는 생태역사기행의 취지와 딱 들어맞는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습니다. 일행의 지심도 탐방을 허락지 않는 날씨를 안겨줬습니다. 장승포에 있는 동백섬지심도여객선터미널에다 예약까지 했건만, 바로 전날만 해도 아무런 기상특보도 없었는데, 당일 아침이 되자 바람이 세고 물결이 높아 배가 뜰 수 없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이럴 때는 사전 대비가 없으면 난감해지는 법이지요. 지심도 가는 뱃길이 뜻하지 않게 자주 끊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꿩 대신 닭으로 내도(안섬)를 예비 탐방지로 꼽아두고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탐방로 들머리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이러면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지 않나요? 같은 날씨인데도 어째서 지심도 가는 배는 뜨지 못하고 내도 가는 배는 뜰 수 있을까? 답은 뜻밖에 간단하답니다. 지심도는 바깥바다에 있고 내도는 안바다에 있기 때문이지요. 


바깥바다는 같은 날씨라도 물결이 높게 일고 바람이 세게 불지만 안바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장승포에서 지심도 가는 뱃길은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드는 물결을 걸러줄 만한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조라에서 내도 가는 뱃길은 서이말(鼠耳末=쥐귀끝)의 반도처럼 튀어나온 지형이 그 막아주는 구실을 톡톡히 해준답니다. 


내도 대숲길.


이런 사정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이를테면 임진왜란 당시 주요 해전은 죄다 너른 바다가 아니고 좁고 암초도 많은 해협(=목)에서 벌어졌습니다. 저 유명한 한산대첩은 통영과 거제 사이 좁다란 견내량에서 일어났습니다. 


원균이 목숨을 거둔, 조선 수군 유일 패전인 칠천량해전도 그러합니다. 바로 뒤 전세를 단박에 뒤집은 명량(鳴梁=울돌목)해전도 마찬가지이며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승리를 일군 임진왜란 7년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도 똑같았습니다. 


당시 왜군이 너르디 너른 바깥바다를 버려두고 좁디좁은 안바다로 기어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이는 지형지물을 상대적으로 잘 알게 마련인 조선 수군한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던 것이지요. 


시원하게 펼쳐지는 바다.


이렇게 해서 '꿩 대신 닭'으로 골라잡은 내도였지만 그 '닭'은 결코 '꿩'에 못지 않았답니다. 바람이 평소보다 조금 거세졌다 하지만 오히려 시원함을 더해주는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맞은편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공곶이의 바닷가와 산자락 풍경은 지심도에서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또 공곶이 쪽을 버리고 계단을 올라서면 왼편으로 출렁출렁 바다가 한 번 바라봄에 거칠 것 없는 기세를 보여줍니다. 그러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나무로 옷치레를 하지 않고 거친 굴곡을 그대로 드러낸 바위들이 파도와 뒤엉기는 모습이 눈맛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내도 동백나무.


게다가 내도 동백숲은 지심도 동백보다 사람 손을 덜 탔기에 그 자연스러운 맛이 훨씬 더했습니다. 생태를 전공하는 이들로부터 내도가 지심도보다 생태면에서는 오히려 낫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는데,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이쪽저쪽 기웃대다 보니 그 말에 금세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굳이 더 좋다 못하다를 가릴 필요야 없지만, 동백이 충분히 잘 우거져 있으면서도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지심도보다 좀더 다양한 것 같이도 여겨졌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답니다. 창원 만남의 광장에서 아침 8시 출발해도 구조라보건진료소 앞에서 11시에 떠나는 배밖에 탈 수 없는데, 돌아나오는 배편이 촘촘히 있으면 좋으련만 오후 1시 다음에는 오후 3시였습니다. 그래 두 시간만에 한 바퀴 돌 수밖에 없어 너나없이 걸음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래도 할 일은 다해서 끼리끼리 그늘이 시원하고 경치도 좋고 자리도 평평한 데를 골라 앉아 가져간 김밥을 먹으며 얘기를 주고받는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발 빠른 어떤 이는 거기 바다에서 잡은 낙지를 삶아달래서 소주까지 한 잔 곁들였고 거기 사람들이 잡아 말린 멸치 등등도 몇 무더기 팔렸습니다. 시간이 30분만 더 있었어도 내도 사람들 매상이 좀더 올랐을 텐데. 


아주 한적한 내도 탐방로.


그렇지만 한적함은 아주 대단한 매력이었습니다. 아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내도지만, 그래도 휴일이나 주말에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밀려듭니다. 너무 많이 알려져 있는 지심도는 평일에도 사람이 쏟아지지만 내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전부였고 앞에도 뒤에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도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정한 국립공원 명품마을이라 합니다. 제1호 전남 진도군 관매도(다도해해상국립공원)와 더불어 2012년 2월 제2호로 올랐다지요. 


바람의 언덕이 있는 도장포마을 동백숲.


내도에서 일찍 나오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에는 시간 여유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예정에 없었던 도장포 바람의 언덕에도 잠깐이나마 들를 수 있었습니다. 길 따라 내려가 다시 한 번 바람을 쐰 다음 일행은 통영 중앙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중앙시장은 이웃한 동피랑마을이나 통제영 일대와 어울려져 있어 한층더 명품이 됐고 붐비게 됐습니다. 이날은 추석을 앞둔 때문인지 사람이 좀더 붐비고 활기가 좀더 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생선이나 건어물 따위 시장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고 일없이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잠깐이나마 동피랑에 올라갔다 오는 일행도 있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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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창녕 통나무배 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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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에

뺏어간 유산 돌려달라 목소리 내야 


서울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가야 우리 문화유산 전체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전국 각지 출신 문화유산들이 산더미처럼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인 관광객이나 수도권 사람에게만 좋은 일입니다. 


전시되는 지역 유물도 많지만 햇볕 한 번 못 본 지역 유물도 많습니다. 1965년 창녕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사리기·사리병 등도 여기 들어갔습니다. 


2000년대 들어 수장고 어디 있는지 한동안 찾지 못했을 정도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도 많아서 어디에 무엇이 처박혀 있는지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2005년 창녕 부곡면 비봉리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도 여기 들어갔습니다. 통나무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망태기 등입니다. 8000년 남짓한 세월을 견디고 당대 생활상을 우리한테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국립김해박물관.


특히 통나무배는 돌조각 말고는 연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불을 지피고 속을 파내어 만들었습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 유물이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2003년 창녕 말흘리에서는 쇠솥이 하나 땅에서 나왔습니다. 향로·금동판·구슬 등이 500개가량 들어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불교 장식공예품인데요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 가져갔습니다. 


창녕 말흘리 출토 병향로와 열쇠 꾸러미. 연합뉴스 사진.


이처럼 고급스러운 물건이 '수도권'(경주)이 아니라 비수도권에서 출토됐다는 점에서 1200년 전 창녕 지역의 독자적 문화 역량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작지 않지만, 결국 '수도권'으로 끌려갔습니다. 


의령에도 비슷한 보기가 있습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입니다. 1963년 의령 대의면에서 발굴됐고 이듬해 국보 제119호로 지정됐습니다. 신라·백제가 아닌 고구려 불상으로 그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던 한반도 남쪽에서 보기 드물게 출토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문화재청 자료 사진.


불상을 만든 까닭과 시기까지 새겨져 있어서 당시 더욱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의령박물관을 찾아갔었는데요, 거기서는 모조품도 아니고 복사용지에 인쇄된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창원 봉림사지에 있던 진경대사탑과 진경대사탑비도 국립중앙박물관에 끌려가 있습니다. 탑은 보물 제362호, 탑비는 제363호입니다. 일제강점기 1919년 절터에서 경복궁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아마도 일본 '내지'로 빼내갈 심산이 아니었을까요. 


문화재청 자료 사진.


문화재청 자료 사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前身)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이 탑과 비가 경내 뜨락에 있었습니다. 용산으로 옮긴 뒤 2014년에 가서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덩치가 커서 수장고에 넣지는 않았을 것 같고, 아마 더욱 초라한 한구석에 앉혔지 싶습니다. 


창원 동읍 다호리고분군에서 나온 통나무 널(목곽)도 마찬가지 신세입니다. 부채 붓 긁개 등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진품을 보려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창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그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는 창원 다호리고분군 통나무널 모조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창원 다호리고분군 통나무널 진품.


물론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됐는지도 따져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이런 '중앙 집중'을 벗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먼저 서둘러야 한다고 봅니다. 문화재는 원래 자리에 있어야 더 살아나는 법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그동안 지역 문화재들을 챙기고 값어치를 매겨준 측면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전체로 보면 푸대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끌려간 지역 유물들은 모두 해당 지역을 대표하고도 남음이 넉넉한 문화유산들이랍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절대 스스로 알아서 내어놓지 않습니다. 프랑스를 향해서는 빼앗아간 <직지심체요절>을 돌려달라 소리지를 줄은 압니다. 하지만, 자기네가 가져간 지역문화유산들도 <직지심체요절>과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할 줄은 모릅니다. 


해당 지역들이 나서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뜻을 모으고 실력을 쌓으면서 한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김훤주 


※ 11월 3일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칼럼에 내용을 조금더 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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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풀면서 우리 역사 배워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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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생태·역사 교실 (7) 

역사탐방: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전시관~학동해수욕장 


8월 22일 전원해운·마산늘푸른·SCL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 떠난 역사탐방 지역은 거제도였습니다. 거제도 하면 떠오름직한 역사적 장소들은 거제포로수용소, 옥포대첩기념공원, 칠천량해전공원 등입니다. 모두 다 전쟁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거제도는 제주도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아픈 역사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 마음에는 아픈 역사보다는 관광에 걸맞은 경관이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그런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제도 역사탐방의 의미가 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탐방에는 함께하는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 선생님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선생님까지 포함하니 어른이 14명, 아이들과 합하면 모두 마흔이 됩니다. 



설명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기보다 좀 평이하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른들에게도 이런 시간이 역사에 대해 이해와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된다면 일석이조가 되니까 말씀입니다. 



옥포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승리를 거둔 싸움이고 칠천량해전은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쩌면 이기고 지고는 전쟁에서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답니다. 


이기든 지든 수많은 희생자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남한과 북한이 군사대결 긴장 상황에 놓인 현실과 연결지어 전쟁을 좀 더 실감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역사탐방 때는 칠천량해전공원기념관과 옥포대첩기념공원전시관을 찾았더랬습니다. 두 군데를 한꺼번에 소화하기에는 아이들이 아직 어린 편이기도 하고 또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올해는 옥포대첩기념관 한 곳만 찾기로 했습니다. 



너무 욕심을 내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는 얘기는 언제나 어디서나 다 들어맞는 법입니다. 


옥포대첩기념공원전시관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팀을 이뤄 미션을 수행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션 수행이 즐거운 놀이가 된다면 그것은 짧으나마 역사를 공부하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아이들이 궁금해하거나 몰랐던 역사 이야기를 문제 풀이와 함께 헤쳐보이는 것입니다. 


문제 가운데 '임진왜란 때 중국의 어느 나라와 힘을 합쳐 왜군을 무찔렀을까요?'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답을 찾아 적은 아이들은 "명나라요!", 외칩니다. 다시 질문을 건넵니다. "그렇다면 명나라는 고마운 나라일까요? 아닐까요?" "고마운 나라요!" 다들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왜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다 고마운 일은 아니었어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우리가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당해야 했던 고통도 결코 적지 않았어요. 전쟁 중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 미국에 기대서 통일을 하게 되면 결국 미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 거예요.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 그래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다만 사실을 알거나 기억하는 것만으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애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어린 친구들은 아직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보고 들어 놓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조금이나마 더 생각이 자라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역사탐방을 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오전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학동몽돌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여름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늦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아이들한테는 역시 물놀이가 최고랍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끝에 서서 발을 담가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습니다. 



물에 들어가 수영은 하지 않는다고 미리 일러뒀지만 여벌옷을 챙겨온 몇몇 아이들은 어느새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자기 집이든 지역아동센터든, 좁은 실내에서 지내던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은 거기서 겪는 모든 것들이 몸과 마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쓰르르 쏴~아 쏴르르 쑤~아" 몽돌에 부딪치며 밀려가는 파도 소리가 시원합니다. 이와 함께 아이들의 여름도 잘 여물어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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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위 뒤집으니 게가 놀라 달아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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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생태·역사 교실 (7) 

생태체험: 사천 늑도~창원 거락숲 


아이들과 물은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물은 깨끗합니다. 쉽게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섞여 있는 것들만 걸러내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물이랍니다. 


아이들도 몸과 마음이 마찬가지여서 살짝 찌푸려졌거나 어두워졌더라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원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물만 만나면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무더위가 상기도 귀퉁이에 남아 있는 8월 22일 생태체험은 오전에는 바닷물을 찾고 오후에는 도랑물을 찾았습니다. 진해지역 누리봄다문화·좋은씨앗교실·경화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창원지역 팔용·메아리·창원행복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서였습니다. 


늑도는 사천에서 남해로 넘어가는 삼천포·창선대교를 타고 가다 보면 세 번째 나오는 섬이지요. 삼천포와 창선 사이 바다에서는 가장 큰 섬이기도 합니다. 



늑도는 기원전 2~1세기 청동기시대 우리나라 최대 유적지입니다. 일상 유물은 물론 낙랑·중국·왜(일본) 등 바깥 유물도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 장보고의 청해진에 견줄만한 청동기시대 해상 교역 지대인 셈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문화는 생태와 맞물려 돌아간답니다. 여러 해류가 뒤섞이는 지역이기에 각지에서 배를 몰고 오기 좋아 오래전부터 교역이 활발했다고 타고 가는 버스에서 간단하게 일러줬습니다. 


옛날부터 이런 해류를 나무와 그물로 막아 이를 따라 옮겨다니는 멸치를 가둬 잡아왔는데 이를 일러 죽방렴이라 한다고, 가다 보면 섬들 사이로 그런 시설이 있다는 얘기도 곁들였습니다. 


늑도에 닿아 버스가 멈춰서자 아이들이 앞다퉈 내립니다. 앞바닥에는 갯강구들이 바삐 움직이며 바글거립니다. "이게 뭐예요?" 묻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어떤 아이는 신기해하며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봤고요, 어떤 아이는 징그럽다고 질겁을 하며 펄쩍펄쩍 뛰는 걸음을 했습니다. 



썰물이 빠졌다가 다시 슬금슬금 차오르는 물때로 맞췄건만 날이 조수 간만 격차가 크지 않은 '조금'이라 드러난 바닷가가 크게 너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물을 만나 마냥 즐겁기만 하답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하던 갯강구에도 금세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까치발을 하고는 껑충껑충 건너뛰어 물가로 다가갑니다. 


한 친구는 고둥이나 게를 따라 바삐 걸음하고 또 다른 한 친구는 그런 것보다 바닷물이 더 좋아 첨벙첨벙 뛰어들기도 합니다. 바닷물이 물결을 이루며 바위며 모래를 핥아대는 언저리에서 크고작은 바위를 뒤집으며 게를 잡고 고둥을 땄습니다. 


게가 나타났다가 아이들 손을 피해 사라졌는지 살짝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이내 잦아드는 기색도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높아진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제법 크기가 되는 게를 한 마리 잡은 친구들의 것이리라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위를 뒤집어도 좀처럼 게를 잡지 못하고 눈 앞 바위에 고둥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조금 지나자 이렇게 바로 알아보고는 쉽게 잡고 따곤 했습니다. 이윽고 한 시간가량 지나자 서로 모여 누가 더 많이 잡았는지 견줘보고 이긴 팀에게는 쥐꼬리장학금을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집에 가져가 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되도록 잡은 게와 고둥을 풀어주는 편이 좋겠다"고 일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뜻밖에도 아쉬워하는 표정 없이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한 아이가 다가오더니 웃으며 "통에 담은 것들 바다에 보내주고 나니 처음엔 아까웠지만 마음이 개운해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예쁜 마음에 아이들 눈여겨본 느낌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체험 소감을 쓰게 했는데 "게의 앞발이 우람한 근육 같았다"거나 "고둥을 손바닥에 올려봤는데 빨판이 잡아당기는 꼬물꼬물하는 느낌이 왔다" 등등 생생한 느낌이 들어 있는 글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이 친구들 또한 쥐꼬리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삼천포대교 가까운 밥집에서 점심을 맛나게 먹고는 창원 으뜸 물놀이 장소인 진전면 거락마을 진전천으로 옮겨갔습니다. 거락에는 아주 멋지고 오래된 마을숲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람하게 자라난 마을숲은 아이들이 노니는 도랑물 대부분에 나무그늘을 내려놓았습니다. 깊이와 너비가 적당한 물이어서 막바지 무더위를 한나절 씻어내리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물가에 아이들 데리고 가면 으레 조심스러운지라 선생님은 고생스러웠어도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생태체험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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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곤충 만지며 까르르, 자연에 흠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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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생태·역사 교실 8 

생태체험-김해 화포천~봉하마을 


느티나무·어울림·샘동네·회원한솔·옹달샘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떠난 이번 9월 19일 생태체험은 김해로 향했습니다. 김해에는 화포천 습지가 있고 옆에는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이 있습니다. 


화포천 습지는 하천이 흘러내리면서 만드는 습지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답니다. 여기에는 노무현 관련 이야기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2014년 3월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야생 황새가 날아온 적이 있습니다. 황새가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멸종된 상태였는데요, 일본서는 도요오카시가 민관 합동으로 50년 넘게 노력을 기울인 끝에 황새를 야생으로 복원해냈고, 그 1세대에서 태어난 암컷 새끼가 우리나라를 처음 찾았던 것이랍니다. 



화포천과 일대 들판은 그 황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공인받았습니다. 황새는 가장 큰 멸종 원인이 농약이었는데 일본 그 황새가 가장 오래 머무른 데가 화포천 일대와 봉하 들판이었던 것입니다. 


양버들이 높은 키를 뽐내고 냇가에는 왕버들과 수양버들이 자라는 화포천에는 이미 억새와 갈대가 피어나 있었고 줄이나 부들도 자라나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서울에 남지 않고 자기가 난 지역에다 삶터를 차린 최초 유일 대통령이 됐습니다. 이런 노무현이 가장 먼저 손댄 일이 화포천 살리기였고 봉하마을 친환경생태농업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날아온 황새가 바로 이것을 알아봤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은 깨끗한 봉하 들판이 좋았던 것이고 화포천은 풍성한 먹이터였던 것입니다. 이 황새는 나중에 봉하마을을 찾아온 암컷 황새라는 뜻을 담은 '봉순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한림면을 거쳐 영강사 앞 화포천 습지 들머리에서 버스를 내렸습니다. 야외체험학습장에서 봉순이를 버무려 화포천과 봉하마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습지 도전 골든벨!'을 했습니다. 문제를 함께 풀고 설명을 들으면 절로 습지와 화포천에 대한 기본 상식이 쌓이도록 구성을 했습니다. 


물이 어느 정도까지 차 있어야 습지라 하는지, 1년에 한 번만 젖어 있어도 습지라 할 수 있는지, 습지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국제협약이 무엇인지 등등을 재미있는 보기를 들어가며 풀어봤던 것입니다. 


철새들이 화포천 같은 습지를 찾아오는 까닭이 풍성한 먹을거리에 있다든지, 화포천을 찾는 겨울철새로는 오리·기러기 말고 고니와 독수리도 있다는 사실들을 재미있게 익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윽고 봉하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500m 남짓은 냇물과 함께했고 나머지 1km가량은 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끼고 걸었습니다. 


아이들은 메꽃이랑 달맞이꽃·쑥부쟁이·구절초·여뀌 등을 마주하며 함박웃음을 머금었으며 강아지풀·수크령 같은 것을 꺾어들고 서로를 간지럽히기도 했습니다. 또 군데군데 튀어나오는 여치나 메뚜기와 곳곳에 그물을 쳐놓고 있는 거미 따위를 잡거나 살펴보면서 재미있어했습니다. 


야외체험학습장에서 습지 문제도 풀어보고.


뜻밖에 마주친 도마뱀은 환호성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여럿이 애쓴 끝에 도마뱀을 손에 넣은 아이들은 꼬리를 만져보고 머리를 쓰다듬고 몸통을 건드리며 놀더니 얼마 안 가 이내 풀밭에다 풀어주고는 가던 길을 내처 걸었습니다. "도마뱀이 신기했어요!" "한 번 만져봤는데 이상하게 따뜻했어요!" 


봉하테마식당에서 점심으로 소고기국밥을 먹고는 봉하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에 들른 다음 고인돌처럼 평장을 한 무덤을 돌아봤습니다. 옛날에는 다 이런 식으로 가까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집을 지었어요. 



지붕은 들판에서 나는 볏짚으로 이었고 기둥은 뒷산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로 세웠고 바람벽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흙으로 만들었지요. 무덤은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사람들이 두루 고르게 사는 세상을 희망한 그 뜻을 따라 이렇게 평평하게 만들었답니다. 


노무현 대통령 묘역 판석에 적힌 글들을 살펴보는 모습.


이어서 그늘에 모여 오늘 하루 소감을 간단하게 썼습니다. 나중에 읽어보니 무덤과 죽음을 두고 쓴 글이 뜻밖에 많았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한 말이 없는데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감수성이 덜 무뎌져 있는 모양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


습지 생태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봉하마을도 한 바퀴 둘러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나름 생각을 가다듬어 본 가을 들머리 맑은 날이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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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 유배살이 들으며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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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생태·역사 교실 8 

역사체험 : 남해 유배문학관~이락사 


자은·이동·샘바위·회원큰별·정·안영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함께하는 9월 역사 탐방은 19일에 남해로 떠났습니다. 남해유배문학관과 이순신영상관 그리고 이락사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남해 관련 이야기를 할 때마다 꼭 꺼내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은 어디일까요?' '제주도!' 두 번째로 큰 섬은? '거제도!'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큰 섬은 어디일까요? 울릉도, 독도, 한산도, 진도 등등 '도'자가 붙은 지명은 다 끄집어내면서도 이상하게 '남해'라고 정답을 맞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남해가 섬인 줄 모르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유배문학관에서 미션 수행.


남해가 섬이라는 특징 때문에 만들어진 역사가 있는데 바로 유배입니다. 유배를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려면 형벌 이야기를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되는데 옛날에는 사형 다음으로 큰 벌이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보내지는 유배였답니다. 


이런 설명에 요즘 교도소처럼 좁은 방에 가두지도 않고 육체 고통을 주지도 않고 단지 멀리 보내는 것이 무슨 벌이냐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도 참기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자기가 살던 데서 계속 살지 못하는, 마음의 외로움이나 삶터의 고립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해하기에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아이들이기는 합니다. 하하. 


그래도 고마운 것은 세상이 어느 정도는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하고 행복하면 좋기는 하지만,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 또한 다 나쁜 것만은 아니거든요. 유배지에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견디며 알게 된 삶의 진실들, 낯선 곳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들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선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17년 유배 생활 동안 나온 다산 정약용의 수많은 저작만 봐도 그 시간들이 엄청난 보물이었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요! 남해에 유배를 왔던 서포 김만중도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빼어난 문학작품을 남겼습니다. 


유배문학관 앞마당 그네.


남해로 가는 버스에서 이런 설명을 들은 친구들은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신나게 미션 수행을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어떤 벌을 받았는지 직접 체험도 했습니다. 


곤장.


주리. 표정이 아주 '리얼'합니다.


유배지에서 그이들은 어떻게 삶을 꾸렸을까요? 방법은 여럿이었답니다.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도 하고, 글씨를 써 주거나, 서당을 열거나, 본가에서 지원을 받거나, 아니면 동냥질을 해서 연명하기도 했습니다. 


중죄인에게는 울타리를 치고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위리안치라는 벌이 더해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무척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습니다. 


유배문학관 미션 수행.


점심을 먹고는 이순신영상관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한 노량해전 동영상을 3D로 봤습니다. 아이들은 열광했습니다. 만약 3D가 아니라 일반 영화·만화였다면 감동은 덜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효과가 다름을 실감하게 하는 영상물이었습니다. 


이순신영상관에서.


이순싱영상관에서.


친구들 입에서는 탄성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 오늘 느낀 점은 쓸 내용이 많을 것 같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영상을 본 다음 간 데가 바로 옆에 있는 이락사랍니다. 이락사는 이순신(李) 장군이 떨어진(落=죽음) 곳을 기억하고 혼령을 모시는 사당(祀)이라는 뜻입니다. 관음포 바다에서 숨을 거둔 이순신 장군 시신이 육지로 처음 옮겨진 자리입니다. 


이락사.


방금 영상을 본 아이들이라 이락사가 좀 더 각별하게 눈에 담기는 모양입니다. 이리저리 살피는 아이들의 눈길이 무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소감글은 당연히 영상물에 대해서가 많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영상물도 좋았지만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알게 된 것이 많았고 보람도 있었다는 글들이 더 많았습니다. 


첨망대瞻望臺에서 이순신 장군 목숨을 잃은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들.


아이들이 제일 귀찮아하고 재미없어 하는 두 가지가 바로 글쓰기와 역사 공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역사탐방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 말미에 소감을 글로 쓰는 친구들의 적극성과 실력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역사탐방을 하는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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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사람 김원봉과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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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동구밖 생태 역사 교실 9

역사탐방 : 예림서원~밀양박물관 


가을 햇살이 맑은 10월 밀양 예림서원과 밀양시립박물관으로 17일에 역사탐방을 떠났습니다. 함께하는 지역아동센터는 전원해운·마산늘푸른·SCL·성동·중리·큰샘원 등이었습니다. 


두산중공업 사회봉사단에서 선생님이 무려 11명이 함께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선생님까지 포함하면 어른 반 아이 반이라 해도 맞을 듯 싶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살피러 나선 길이라지만 더불어 역사 공부를 하는 즐거움도 없지는 않겠지요. 밀양은 어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그리 낯선 곳은 아닙니다. 


예림서원에서 미션 수행을 위해 아이들이 물으니까 제사 지내러 오신 어르신에게 답해 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기대를 않고 어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밀양에 월연대를 아시는 분 손 한 번 들어보실래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림서원은요?"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여름에 가족들 물놀이를 다녀왔던 표충사 계곡이나 캠핑했던 밀양강을 떠올리는 정도. 월연대와 예림서원이 밀양에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공사 중이라 이번에는 가지 못했지만 밀양 어딘가에 월연대가 있는 줄 알게 됐다면 언젠가 한 번은 찾게 되는 기회가 있지 싶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서원과 향교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역사탐방 때 서원은 사립학교고 향교는 공립학교라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뿌듯해하던 봉사 선생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모두 웃었습니다. 


사당(예림서원에서는 김종직 모시는 육덕사)에 드나들 때는 계단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야 한답니다. 올라갈 때는 오른발이 먼저. 내려올 때는 왼발이 먼저. 이를 '취족'이라 한다지요.


왜 웃을까요? 대부분은 서원과 향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향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을 기리고 모신다면 서원은 해당 지역 출신 인물이나 학자를 모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같이 제사와 교육을 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설명도 무척 열심히 들었습니다. 


예림서원은 가을 한가운데에서 한결 고즈넉한 운치를 내뿜었습니다. "야~ 좋다" 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마침 제사 준비를 하느라 한복을 차려입은 어르신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시고 있었습니다. 


제사상에 올릴 제수를 장만하는 보기 드문 장면도 아이들은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미션 문제를 풀고 정문격인 독서루 2층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독서루에 오르니 서원과 들판 풍경이 한눈에 담깁니다. 학생들 공부하던 교실, 선생님이 묵던 방과 교무실, 그리고 기숙사와 책판 보관방 등을 하나하나 짚어갔습니다. 이렇게 몸소 눈으로 담는 것이 훨씬 더 마음에 새겨지지 않을까요. 


점심은 밀양에서 제법 소문난 태화루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었습니다. 오후 일정은 밀양시립박물관입니다. 몇 해 전 새로 지은 밀양박물관은 넓어서 아이들에게는 마치 운동장 같습니다. 미션을 수행하느라 이저저리 뛰어다녀도 번잡하게 느껴지지 않아 좋습니다. 


밀양시립박물관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미션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 빗돌은 흥선대원군이 전국 곳곳에 세우도록 했던 '척화비'.


밀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 많습니다. 밀양시립박물관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따로 두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 인기를 얻었던 영화 <암살> 덕분에 재조명된 인물 김원봉도 밀양 출신이랍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이 대사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덩달아 밀양도 유명해졌습니다. 미션 해답 풀이를 하면서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이나 윤봉길·안창호 같은 분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왜 김원봉은 모를까요? "유명하지 않아서요"라는 답이 나오기도 합니다. 


밀양시립박물관 미션 수행 모습.


정답은 '교과서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자나 또는 관심이 있는 특별한 몇몇을 빼면 대부분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배우게 됩니다. 


'독도는 일본 땅이다.' 이렇게 일본 교과서에 실으면 일본 학생들은 전부 그렇게 믿게 됩니다. 교과서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서도 다시 확인이 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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