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후라이밍
Viewing all 1163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영세중립통일추진위, 누가 이들을 아시나요?

$
0
0

해방 후 마산에서 영세중립통일운동을 하다 5·16쿠데타 정권하에서 옥고를 치른 고 김문갑(1909~2004년·사진) 씨와 고 김성립(1917~1982년) 씨가 52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형사부(부장판사 이흥구)는 고 김문갑 씨의 아들(62)과 고 김성립 씨의 아들(66)이 재심청구한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마산 통일운동가 52년 만에 명예 회복고 김문갑·김성립 씨 무죄 선고


제가 2009년 10월 "5·16쿠데타 직후 억울하게 죽거나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이 마침내 피해구제를 받을 길이 열렸다"는 기사를 쓴 지 햇수로 4년 만에 이뤄진 결실이네요.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는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법원의 재심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었죠.


60년대 진보인사 명예회복 길 열렸다


김문갑 위원장 생전 모습.


고 김문갑 선생은 살아생전 제가 두어 번 뵙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 분입니다. 저희 경남도민일보에 찾아오신 적도 있었죠. 그래서 얼굴을 잘 압니다.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회관 앞에서...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간판도 보입니다.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본부와 마산시위원회 발족 기념사진.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중앙위원들. 1961년 4월 29일이라는 날짜표시가 사진 뒷면에 있습니다. 이들은 5.16쿠데타 다음날 군부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무죄판결 소식을 접하고 제가 소장하고 있던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관련 사진을 찾았는데, 김문갑 선생 외에는 얼굴을 모르겠네요. 김성립, 김진정, 전인봉 등이 간부를 했다는 정도는 아는데, 각각의 얼굴을 모르니 답답합니다.


김문갑 선생이 살아계실 때 이 사진들을 보면서 설명을 듣긴 했는데, 기록해두지 않았던 게 크게 후회가 됩니다. 역시 기록이 중요합니다.


혹시라도 이 분들 얼굴을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기자는 견(見)하지 말고 관(觀)해야 한다

$
0
0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어디까지 사실인지 규명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기본 역할이지만, 종종 그것을 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바쁜 취재현장에선 그날 그날 발생한 일들을 챙기는데에도 급급해 '규명'에 소홀해질 수 있다. 그러다보니 첨예하게 상반된 주장이 나와도 기자가 사실 규명에 나서는 대신 한 쪽 주장과 다른 쪽 주장을 함께 싣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주의료원 사태에 대한 보도에서도 그랬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강성 귀족노조'라는 근거로 "1999년 의료원장이 노조에 의해 감금·폭행 당하기도 했다"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규명하려는 언론은 없었다.


그래서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기획을 통해 홍 지사가 연일 쏟아내고 있던 '강성 귀족노조론'을 규명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세 건의 보도가 나왔다.


14년 전, 주먹 휘두른 이는 의료원 원장이었다

[진주의료원 사태 진실 혹은 거짓](1)의료원장 감금 폭행 여부



직원은 모르는 "지사만 아는" 진주의료원 비리

[진주의료원사태 진실 혹은 거짓] (2) 노조 친인척 채용 비리


홍준표가 웃는다 '노조 혐오 정서가 나의 힘'

경남도의 '진주의료원 강성·귀족노조론'이 먹히는 까닭


NC 다이노스 야구단 창단 후 인터넷에 떠도는 '마산 아재 전설'도 마찬가지다. 많은 언론이 이 '전설'들을 인용하며 마산 야구팬의 높은 열기를 보도했고, 아직도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설'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보도가 나왔다.


마산아재 야구전설 어디까지 진실일까



오늘 명승은 벤처스퀘어 대표가 시사인에 쓴 글을 읽었다. 명 대표도 '확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언론인들은 ‘가장 먼저 이야기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팩트를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확인해주는 것’이야말로 저널리스트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SNS를 중계하지 말고 확인해야


앞으로 우리 신문은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진실 혹은 거짓'을 아예 고정코너로 배치해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니 모든 언론은 '진실 혹은 거짓'을 취재 보도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기자는 어떤 사안을 볼 때 견(見)하지 말고, 관(觀)해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전달할 게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노사 화해 협력 주장하던 홍준표, 지금은 왜?

$
0
0

"도시락을 싸가지 못한 나는 점심시간이면 우물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고 학교 뒷산에 늘 올라갔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교실로 들어오면 반찬 냄새와 밥 냄새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이 더 심했다."


"영하 15도나 되는 전하동 백사장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밤새 쪼그리고 앉아 경비를 서는 늙으신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보고 피눈물을 흘렸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2009년에 쓴 <변방>(형설라이프)이란 책에 있는 글이다. 이처럼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독하게 공부해 검사가 됐고, 4선 의원을 거쳐 경남도지사를 하고 있다.


강성 귀족노조론 근거 확인해봤더니...


그런 그가 연일 독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강성·귀족노조의 해방구' '노조 천국' 등의 표현이다. 그 근거로 이런 말을 한다.


"1999년 의료원장이 노조에 의해 감금·폭행 당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미 원장 위에 노조가 있는 노조 천국이다." "직원 숫자가 140여 명에서 250명으로 늘었는데 들어보니 친·인척을 비정규직으로 넣었다가 정규직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경남도민일보>의 확인 결과 모두 사실과 달랐다. 1999년 감금·폭행 사건은 오히려 원장이 노조원들에게 주먹을 휘두른 사건이었고, 친·인척 채용 사실도 없었다.


1999년 8월 9일 오후 진주의료원 원장실 앞 복도에서 조합원들에게 가로막힌 강모 당시 원장이 조합원 사이를 헤집고 빠져나가려는 와중에 한 조합원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는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그러자 경남도는 '강성·귀족노조'임을 입증하기 위해 단체협약을 제시하며, 전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향상과 의료원의 민주적, 자율적 발전을 도모한다'고 되어 있다는 걸 문제삼았다. 이게 왜 문제가 될까? 경남도민일보 단협도 '조합원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이 협약을 체결한다'고 되어 있다.


노조의 경영참여도 문제삼고 있다. △이사회에 노조 추천 1인을 선임하게 되어 있고 △이사회 소집 때에도 노조에 사전 통보토록 했으며 △각종 위원회에도 노조 대표 1인의 참여를 보장해놓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경남도민일보도 △이사회에 노조지부장의 배석을 허용하며, 이사회 안건과 회의결과 공개 △조합과 우리사주조합의 요청 시 회계장부 열람권 보장 △주례 간부회의에 노조지부장의 참석을 보장하고 회의결과 공개 △전체 사원 월례회를 노조와 공동 주최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회사의 경영 전반을 논의하는 '노사공동위원회'나 '인사윤리위원회'는 노사 동수로 구성된다. 대표이사와 이사·감사를 뽑는 과정에도 노조의 참여가 보장된다.


노조의 경영참여, 권장할 일 아닌가?


이런 게 '강성노조'의 근거가 된다면, 경남도민일보 노조는 '초울트라 강성노조'가 아닐까 싶다. 경남도민일보는 민간기업이지만 6200명의 시민주주가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소유의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기업에서 '참여민주 경영'을 기본으로 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진주의료원도 공기업이라는 점에서 노조의 경영참여는 오히려 권장할 일이 아닐까.


물론 노조원과 가족에 대한 진료비 감면 등 몇몇 조항은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과도한 특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은 노사가 잘 협의해 고치면 될 일이다. 홍준표 지사는 <변방>에 이런 글도 남겼다.

  

"대립과 투쟁의 시대를 넘어 노사가 공존하는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 노사가 공히 주인의식을 갖는 작업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현대조선소 비정규직 야간 경비원의 아들이 수많은 공기업을 관리·감독하는 자리에 올랐다. 화해와 협력의 리더십을 보고싶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엄숙 권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운조루

$
0
0

- 전라도 멋진 장터 구례장과 화엄사, 운조루 3

 

4월 13일 테마 체험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운조루가 차지를 했습니다. 시골 물산이 넘쳐나는 구례장을 거쳐 하한산장 참게수제비를 거쳐 화려장엄하면서도 소박·여유·자유·무애(無碍)스러운 화엄사를 거쳐 왔습니다.

 

1. 세상살이가 버거워 쉬려고 지은 운조루

 

운조루(雲鳥樓)는 뭐랄까,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양반 기와집 치고는 그다지 엄숙이라든지 권위라든지 이런 따위들이 잘 느껴지지 않는, 흐르는 세월 속에 있는 그대로 놓여 있는 그러한 옛 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오로지 저 혼자만의 기분이겠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일까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바로 '어울림'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날에도 지금과 같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랬으리라고 믿음직한 근거들은 몇 있습니다. 먼저 운조루라는 이름입니다. 사랑채 이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기 들어선 집을 통째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조선 영조 52년(1776) 유이주라는 무인 집안 사람이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지었다고 합니다. 중국 도연명이 쓴 ‘귀거래사’에 나오는, “雲無心而出岫(운무심이출수 : 구름은 무심하게 산골짜기를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 새는 날다 지쳐 문득 동지로 돌아오네”에서 첫 자를 땄다는 얘기입니다.

 

운조루 들머리. 왼쪽에 호랑이뼈가 걸려 있습니다.

이런 설명이 맞다면 귀거래사라는 시의 분위기에 비춰볼 때, 어렵고 버거운 세상살이를 접고 돌아와 지친 몸을 추스르는 그런 공간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운조루는 실제로 들판과 산기슭이 만나는 즈음에 펑퍼짐하고 드러나지 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2. 굴뚝이 있지 않고 뒤주가 나와 있는 까닭

 

다음은 굴뚝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양반집에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대느라 불을 때고 그 연기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면 둘레 살고 있는 없는 사람들 허기진 배를 더욱 허기지게 할 것이기 때문에 굴뚝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물론 굴뚝이 있고 그 높은 굴뚝을 통해 연기가 올라가면 한결 모양새는 도드라지겠습니다만, 굴뚝 하나를 두고서도 그렇게 위세를 세우기보다는 실제 불을 피우더라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처럼 만든 셈이 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힌 이 집 뒤주입니다. 다른 사람이 풀어헤쳐도 된다는 뜻이라는데, 이렇게 해서 뒤주를 내어놓음으로써 다른 배고픈 사람들이 와서 여기 들어 있는 쌀을 거리낌없이 퍼 나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둘레 이웃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곳간 주인이 하인을 시켜 퍼 주지 않고 운조루 집안이랑 아무 관련 없는 이들도 눈치 보지 않고 가져갈 수 있도록 사람의 자존심까지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인다고들 하지요.

 

이런 어울림이 실제로 운조루에 스며들어 있기에, 무인의 집이면서도 그 기상이 씩씩하게 솟아나 보인다기 보다는, 잘 사는 집안이면서도 마을 전체 모습과 어긋나지 않고 스르르 그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봤습니다.

 

3. 생활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죽음의 자리

 

저는 이 가운데 ‘타인능해’ 하나만 제대로 새겨도 운조루를 멀리서 찾아온 보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여깁니다만, 이밖에도 운조루는 볼만한 거리를 곳곳에 곰탁곰탁 품고 있습니다. 먼저 가빈터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행랑채 왼편 끄트머리에 있는데요, 옛날에 집안에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여기에 모셔두고 100일장을 치렀다고 합니다.

가빈터. 매트랑 공구, 보일러 등이 들어 있어 좀 어수선했습니다.

 

사흘 뒤 입관해서 여기 들였다고 하는데, 물론 옛날 양반집 있는 사람들이나 100일 동안 주검을 모실 여유가 있었겠지만, 저는 여기 이렇게 생활공간으로 죽음을 끌어들이려면, 죽음을 삶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기는 마음가짐이 먼저 생겨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 우리 삶은 죽음과 완전히 나뉘어져 있거든요.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스스로 자기 힘으로 죽을 능력조차 없어져 버렸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던데, 죽음을 다루는 공간, 심지어는 아픈 몸을 다스리고 치료하는 공간조차도 우리네 삶터에는 있지가 않은 실정입니다. 죽음이 완벽하게 추방당한 삶이고 그런 삶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4. 사랑채와 안채 곳곳에 곰탁곰탁 놓여 있는 것들

 

운조루라는 사랑채도 그럴 듯하지만, 저는 그 아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이 더 갔습니다. 이를테면 붙박이 돌확이라든지 나무로 만든 수레바퀴 따위들입니다. 저것들이 살아서 덜컹거리고 쿵덕거리던 시절이 확 제게로 끼쳐져 오는 그런 느낌입지요.

 

안채로 들어갑니다. 여기는 모두 문이 달려 있습니다. 문짝 아래 턱이 높은 데는 방이고 턱이 없는 데는 마루입니다. 마루는 사람이 움직이고 옮겨다니는 공간이기에 문턱이 없고요, 방은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니까 문턱이 있습니다. 방에 있는 문턱은 사람이 앉은 채로 팔을 괴기에 알맞은 높이라고 합니다.

 

앞쪽 마루는 문턱이 낮고 뒤쪽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와 있는 툇마루도 눈여겨보면 남다르다고 합니다. 옆으로 다닥다닥 붙인 녀석들은 짧게 잘렸지만 이것들을 모두 받아안으면서 앞으로 길게 놓인 나무는 둘 또는 셋을 이어붙인 것이 아니고 하나랍니다. 저렇게 긴 나무를 갖다 쓴 집안이라면 꽤나 살림이 넉넉했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이런 풍경들도 요즘은 무척 보기 드뭅니다. 놓여 있는 나무궤짝들은 무엇을 담았을까요? 저는 이런저런 곡식들 담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또아리는 뜻밖에 앙증맞은 느낌을 줍니다.

 

 

 

물론 저 또아리를 머리 위에 받치고 물항아리나 나락 따위 짐들을 이고 날랐을 아낙네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 땋아서 매어놓은 것이 제게 그런 느낌을 줍니다. 저 끝을 입에다 넣고 머리 위에 놓인 짐이 흔들릴세라 안간힘을 쓰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지요.

 

안채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도 충분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안쪽 시렁이 저는 멋졌습니다. 저기 올라 있는 대나무로 만든 것 같은 바구니들이 이 집 사람들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 안에 있는 것들, 요즘에는 대다수가 냉장고 신세를 지고 있겠지요.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나무지게가 눈에 띄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새끼로 등판까지 제대로 만들어 붙인 녀석입니다. 요즘은 이런 지게 드뭅니다. 바지게를 얹어 걸치는 뒤로 삐죽 튀어나오는 부분이 몸통에 제대로 붙어 있는 가지로 돼 있습니다. 요즘은 통째로 쇠로 만들어 이어 붙인 지게가 대세입니다.

 

 

대문을 나와 마을 한 바퀴 둘러봅니다. 뒤쪽으로 올라가니 이렇게 연둣빛 나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을 어귀에는 나름 오래된 나무가 서서 조금씩 잎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운조루 집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습니다. 맞은편 들판 건너로 보이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타오르는 불꽃 모양 화산(火山)이어서 그 불기를 막으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뿐이겠습니까? 실제로 여기 연못은 여러 모로 쓰임이 많았을 것입니다.

 

나오기 전에 하나 더, 암수재(闇修齋)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름 짐작하기에 어두운 곳에서도(또는 보이지 않는 데서도=闇) 몸과 마음을 닦는(=修) 집 정도가 되겠는데요, 그와 함께 거기 적혀 있는 주련이 그럴 듯했습니다.

 

논어 첫 머리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와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가 짝을 이룹니다. 공자가 늘그막에 했다는 말씀입니다. 논어 같은 대목에 나오는 다른 하나는 人不知而不愠不亦君子乎(인부지인불온불역군자호)인데, 앞에 두 가지가 되면 뒤에 이것은 절로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집 운조루 주인이 다다랐던 사람됨의 수준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봤습니다. 진정으로 저 글귀를 좋아하고 즐겼다면 말씀입니다. 배우고 그 배운 바를 익숙하게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지, 뜻 맞는 벗이 찾아오면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경지, 그러다 보니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고 괴로워하지 않는 경지…….

 

지금은 너무 많이 알려져 싫증이 나기까지 하는 이 글귀는 운조루 지을 당시에도 양반들은 너무 많이 입에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런 범상한 글귀는 쓰기를 삼갔을 것입니다. 찾기 어렵고 뜻이 깊은 그런 글귀를 골라 주련을 해서 다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도 이렇게 삼척동자도 웅얼거릴 수 있는 그런 글귀를 짝 맞춰 올렸습니다. 그 뜻을 제대로 새기지 못한 사람이면 이렇게 하기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주욱 이어집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사회적 기업입니다. 2012년 9월 경남도로부터 지정받았습니다.

 

저희 해딴에는 '잘 놀아야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노는 사람은 많지만 잘 노는 사람은 드문 현실입니다. 저희는 갱상도 사람들이 잘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만들며 잘 놀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을 합니다. ^^

 

같은 날 떠난 여정인데 앞에서 쓴 글들은 이렇습니다.

전라도 구례 멋진 장터와 화엄사, 운조루 2(http://2kim.idomin.com/2368),

그리고 전라도 구례 멋진 장터와 화엄사 운조루 1(http://2kim.idomin.com/2364) 입니다.

 

일이 있으시면 이리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김훤주 개인 010-2926-3543, 공용 전화 055-250-0125, 010-8481-0126. 메일 주소는 pole08@hanmail.net입니다. '해딴에'로 검색하시면저희 카페로 바로 연결도 됩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신문 창간기념호 특집 어떻게 보시나요?

$
0
0

경남도민일보가 지난 11일로 만 열네 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1일이 토요일이어서 13일자로 창간 14주년 기념호를 냈습니다.


대개 신문사의 창간 00주년 기념호는 평소보다 지면을 대거 증면해 특집기획기사를 쏟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 볼 때 한꺼번에 늘어난 대형 기획기사들을 다 읽으려면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추가로 투자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기획은 대체로 읽기에 부담스럽고 무거운 주제가 많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그런 창간 기념 기획특집 기사들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읽어야지' 하고 미뤄뒀다가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준비를 많이 했구나'하는 인상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효율적이거나 독자를 배려한 지면구성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좋은 기획, 좋은 특집은 평소에 잘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간기념호를 낼 때 딱 4개면만 증면합니다. 그리고 이 날을 맞아 1면에는 독자에게 드리는 우리의 다짐을 싣습니다. 다른 특집도 우리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목소리, 우리나라 언론 중 유일한 '독자모임' 대표들 인터뷰, 그리고 새로 시작되는 장기 기획시리즈(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에 대한 안내(프롤로그) 등으로만 꾸몄습니다.


2013년 5월 13일자 경남도민일보 1면


이번엔 1면을 좀 특색있게 만들어보기 위해 그동안 1면에 등장했던 사람들 사진을 중심으로 꾸미기로 했습니다. 이에 편집기자와 미술기자는 14주년을 강조하기 위해 나무의 나이테를 형상화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어떤 신문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싣기로 했는데, 편집기자는 200자 원고지 5매로 분량을 맞춰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제한된 분량으로 최대한 압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4돌 경남도민일보, 지역공동체 소통망이 되겠습니다


아래는 압축했던 글을 좀 더 풀어쓴 저희의 다짐입니다.


다른 신문과 다른 지면, 지역공동체의 소통망이 되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3년 전부터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부쩍 저희 지면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를 통해 저희들이 추구하는 것은 '이웃과 이웃을 연결시켜주는 소통망 같은 신문'이며, 궁극적으로는 '지역공동체(Local Community) 구축'입니다.


저희가 지역신문을 만들면서 가장 아쉬워하는 점은 서구(西歐)의 지역사회와 달리 우리나라는 여론과 담론이 형성되는 '지역공동체'의 전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신문을 통한 지역공동체 구축을 꿈꾸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올해는 독자 여러분과 좀 더 다양한 스킨십을 통해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내 가까이에서, 언제든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실을 수 있고,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친구 같은 신문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독자에게 더 친숙하고 재미있는 기사, 더 심층적이고 공익적인 콘텐츠로 독자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의제와 이슈 집중 = 단지 구색만 갖추는 지면 구성을 거부합니다. 저희가 굳이 1면에 요약문(digest)을 겸한 인덱스(index)를 싣는 까닭은 의제와 이슈에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는 가급적 인덱스에 소화하고, 이슈 중심으로 1면을 구성하겠습니다.


특히 최근 '진주의료원 사태 진실 혹은 거짓'에서 보여드렸듯이 양쪽 주장을 기계적으로 중계보도하는 데서 벗어나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이야말로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역할입니다. 이를 저희 신문의 존재이유로 삼겠습니다.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 강화 = 건조하고 딱딱한 스트레이트 기사는 꼭 필요한 지면으로 한정하고, '호호국수 송미영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편의점 이야기'처럼 재미와 감동이 있는 이야기 기사를 늘려나가겠습니다. 내러티브 기사는 무생물이 주어가 아니라 사람이 주어가 됩니다.


딱딱한 통계나 이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우리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모순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내러티브 기사가 독자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독자밀착·독자참여 확대 = 독자에게 사랑받는 북유럽 신문에는 1면에 한 평범한 중년 가장이 43번째 생일을 맞았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미국의 지역신문에는 동네 빵집 사장의 죽음이 1면 머릿기사로 올라갑니다. 저희가 '동네사람'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떠난 이의 향기'에 공을 들이는 것도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기 위한 노력입니다.


올해들어 1면에 실리고 있는 '함께 축하·응원·칭찬해주세요'나 '가족인터뷰'처럼 독자여러분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지면을 늘리겠습니다.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언제든 저희 신문을 이용해주십시오.


◇공익 콘텐츠 생산 공공자원화 = 신문은 뉴스산업일뿐 아니라 종합콘텐츠산업입니다. 지난 한 해 연재된 '경남의 재발견'처럼 우리지역의 공공자산을 질높은 콘텐츠로 만들어 공공자원화하겠습니다. '경남 먹거리 스토리텔링-맛있는 경남'을 비롯, 사회적 기업 '해딴에'를 통해 다양한 공익 콘텐츠 생산에 앞장서겠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창간사


오늘 우리는 두렵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존 신문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지역언론 하나를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6,000여명의 각계각층 도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일간신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경남 언론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거니와, 이를 위해 우리의 모든 정열과 노력을 쏟아 부었던 지난 6개월을 돌이켜 볼 때 벅찬 감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먼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경남도민일보 창간을 위해 기꺼이 피와 살점을 떼어 준 6,000여 주주들의 높은 기대와, 예사롭지 않은 신문에 쏟아지는 전국적인 관심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중압감 속에서도 우리는 경남도민일보의 창간이 경남의 역사는 물론 한국언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일로 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선 경남도민일보는 '신문'의 주인과 '신문사'의 주인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도민의 신문'으로서 특정 대자본의 이해관계에 흔들려 온 한국언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언론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국민들이 피흘려 쟁취한 언론자유를 소유자본이나 언론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왔던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과정에서 언론은 부도덕한 권력과 자본의 횡포를 감시하고 비판하기보다 스스로 권력화 함으로써 참언론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려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우리는 이런 문제의 근본이 언론의 잘못된 소유구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경남도민들은 전국에서도 유례가 드문, 전혀 새로운 신문의 소유구조를 창출했습니다. 


예로부터 경남은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병의 구국혼과 형평사운동으로 표출된 인간해방의 정신, 그리고 3.1독립운동과 3.15의거, 10.18항쟁으로 이어져온 자주.민주.정의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고장입니다. 


개혁언론의 기치를 든 경남도민일보가 이 고장에서 창간하게 된 것도 이처럼 불의를 용납치 않는 경남인의 혼이 살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찍이 경남도민일보는 지역언론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덕목으로서 도민에게 드리는 21가지 약속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스스로 깨끗한 언론만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원론적인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뒤틀린 현실 속에서 바른 길을 걷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첫마음으로 돌아가 스물 한가지 약속을 되새기겠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만이 경남도민일보에 쏠린 300만 도민의 관심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생각하며, 오늘의 이 두려움과 설레임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1999년 5월 11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윤창중 성추행 사태에 묻히는 것들

$
0
0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 미국 성추행 사건이 알려지면서 서울에 본사가 있는 매체들 대부분이 뒤집어졌습니다. 날마다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13일 대충 훑어봤더니 전국지 가운데 ‘윤창중’을 1면에서 다루지 않은 신문이 없었습니다.

 

국민일보인가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머리기사로 다뤘습니다. 고위직 공무원이 그것도 대통령 미국 순방길에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보도로 말미암아 중요하게 다뤄야 할 다른 사안들이 숨겨지고 사라지는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사라지고 숨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 지배집단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감춰지거나 감춰질 개연성이 높은 것들이 무엇인지 한 번 짚어봤습니다. 13일 저녁 MBC경남의 라디오 광장 세상읽기에서였습니다.

 

1. 윤창중 사건을 호기심 자극 수단으로 삼는 종편

 

서수진 아나운서 :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미국에서 한 행동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 모든 신문 방송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윤창중 대변인이 대사관 인턴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느냐 아니면 손을 댔느냐, 아침에 인턴이 호텔 방에 찾아왔을 때 옷을 입고 있었느냐 아니냐 등등 갖은 얘기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

 

 

김훤주 : 이야기가 지나치게 나가는 경향도 보입니다. 종합편성채널, 종편이 그런 편인데요, 어제 우연히 보니까 심리학자인지 정신분석학자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분야 전문가를 불러 앉혀놓고 윤창중 대변인이 어떤 심리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겠느냐 얘기를 주고받더라고요.

 

장삿속이 빤히 들여다보입니다. 말초신경이나 호기심을 자극해 어떻게 해서든 대중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저질 방송입니다.

 

진 : 그러면서 점점 본질은 흐려지고 사건을 구성하는 시시콜콜한 장면들이 더욱 많이 부각되기 십상이겠지요.

 

2. 원인은 그런 인간을 그런 자리에 앉힌 인사에 있다

 

주 : 그렇습니다. 어떤 심리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사태의 본질도 아니고 해결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못되거든요. 물론 진상이 하루라도 빨리 명백하게 밝혀져야 하겠지만, 그런 소소한 부분으로 치달아 정작 핵심을 놓치는 식이 돼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진 : 그러면 핵심은 무엇일까요? 다 알려진대로 그런 덜떨어진 사람을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고위 공직에 앉힐 수 있는 시스템이 문제겠지요?

 

주 :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요. 그런 면에서 오늘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실망스럽습니다. 진상을 밝히고 문책을 하겠다는 말만 해지,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거든요.

 

진 : 벌써 그런 지적들이 곳곳에서 나오잖아요? 문제가 수그러들기는커녕 박 대통령의 사과로 오히려 더욱 커지게 생겼습니다.

 

3. 남양유업과 우리 사회 갑-을 관계 문제

 

연합뉴스 사진.

 

주 : 그 탓에 덕 보는 사람이 더 많아지게 생겼습니다. 바로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런 상황을 패러디한 이미지들이 인터넷에 많이 뜨지 않았습니까? 전사적인 물량 밀어내기로 말썽을 빚고 사과까지 했던 남양유업이, 다시 기자회견을 해서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 고맙습니다” 하고 큰 절을 하는 장면 말이지요.

 

진 : 그렇네요. 이렇게 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 관심을 끌어왔던 여러 문제들이 묻히게 생겼어요.

 

주 : 말씀하신대로, 남양유업이 잘 보여준 우리 사회 갑과 을 사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갑의 횡포에 대책없이 당하기만 하는 을을 보호하는 방안들이 이른바 경제민주화 법안에 담겨야 하는데, 이미 재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대부분 중단돼 있는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윤창중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관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4. 박근혜 방미, 통상임금 문제 그리고 남북 관계

 

진 : 이밖에 어떤 것들이 더 있을까요?

 

주 :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까지 건너가서 그 나라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 방미 결과가 가장 먼저 묻히게 됐습니다. 이른바 한미 동맹과 안보에 치우친 측면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를 갖고 볼 때 성과도 있고 한계나 잘못도 있을 텐데, 그에 대한 홍보나 평가가 묻히고 있죠.

 

박근혜 대통령 일행과 미국 상공회의소의 만남.

 

진 :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 기업가들을 만났지요. 거기서 통상 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되는 등 문제를 두고 불만이 제기됐는데,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이 해결해 드릴 테니 투자를 하라고 한 것도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겠네요.

 

주 : 저는 그 보도를 보는 순간 박 대통령이 대법원장까지 겸임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어요. 사법부인 법원에서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를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해결하겠다고 나섰으니까요. 게다가 대법원에서는 행정부와 달리 대법원장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않고 또 그게 통하지도 않습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정기적·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급여는 모두 통상임금이라는 대법원의 일관된 판결에 반할 뿐 아니라 노사간에 날카롭게 맞서 있는 사안에 어느 한 쪽을 편드는 것이어서 크게 논란이 될 뻔했는데 일단 그냥 묻어가는 국면입니다.

 

진 :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비롯한 남북 문제도 당분간 관심에서 사라지겠어요.

 

208년 2월 8일 부산항에 들어오는 니미츠호.

 

주 : 게다가 오늘(13일)은 이틀 일정으로 9만7000톤급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인 니미츠호가 참여하는 한미 연합 해상 훈련이 시작되는데 이 또한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북한이 ‘엄중한 군사 도발이며 따라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면 일부 매체들은 그것을 부풀리기까지 해서 떠들어댔을 텐데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5. 진주의료원 폐업과 현대제철 산재 사망 사고, 국정원 댓글질

 

진 : 우리 지역 사안인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도 잠잠해지지 않았나요?

 

주 : 일단 오는 22일까지 진주의료원 정상화를 위한 노사 교섭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조용할 수밖에 없겠다고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돌발변수가 생겼는데도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10일 진주의료원에서 열린 민주당 현장 최고위원회의. 경남도민일보 사진.

 

진 : 사용자 쪽에서 명예퇴직과 조기퇴직을 추진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씀이지요? 이미 공고는 지난 10일 나왔고 16일이 신청 마감이라던데요.

 

주 : 그렇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는 전국 대부분 매체들이 진주의료원 폐업을 크게 보도를 했는데 앞으로는 잘 해야 경남 지역 매체들만 보도하게 생겼습니다.

 

진 : 그렇다면 앞으로는 전국적으로는 노출이 되지 않을 테네 홍준표 도지사로서는 훨씬 부담이 가벼워지는 측면이 있겠습니다.

 

주 :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제 뜻대로만 밀어붙이려 하면 노동계와 지역 시민사회의 반발을 키워서 사태는 더욱 꼬이게 될 것입니다.

 

진 : 이밖에는 또 어떤 일들이 있을까요?

 

주 : 제가 보기에는 국정원 댓글 사건과 현대제철 당진공장 산재 문제가 있습니다.

 

진 : 어느 것부터 한 번 얘기해 볼까요? 현대제철 사안은 어쩌면 윤창중 성추행 사건이 터지지 않았어도 크게 눈길을 끌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한데요.

 

2010년 4월 8일 준공식 장면

주 : 노동 관련 사안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현대제철 당진공장은 지난 10일 새벽 한꺼번에 노동자 다섯 명이 죽어나가는 등 지난해 9월 이후 여덟 달 동안 산업재해로 숨진 사람이 열 명이나 되는데다가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도 한 명입니다.

 

이렇게 숨진 대부분은 또 하청업체 노동자입니다. 원청업체는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고용노동부는 이렇게 많이 사람이 죽었는데도 현장감독만 하고 특별근로감독은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번 5명이 숨진 참사는 작업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규정을 어기고 아르곤 가스를 집어넣었다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 모순이 현대제철 한 곳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진 : 국정원 댓글 사건도 만만치 않지요. 그런데 오늘(13일) 보니까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을 제보한 전직 직원을 검찰이 소환 조사했다는 기사가 떴더군요. 또 우익단체들이 국정원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지나치다고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어요.

 

검찰 참고인 조사를 받은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 수사 축소 압력을 받았다는 당사자.

 

주 : 국정원 댓글 사건은 누가 뭐라 해도 국정원이 해서는 안 되는 국내 정치에 개입한 사건입니다. 국정원이 조직을 동원해 우리나라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한 것은, 백 번 양보해서 보더라도 안보 관련 정보 수집이나 방첩 활동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지금 상황에서는 국정원 댓글 달기가 어느 정도 규모로 얼마나 광범하게 진행됐는지 전모를 파악하는 것과 원세훈 전 원장이 사건에 얼마나 개입돼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여론의 관심이 수그러들면 덩달아 검찰 수사가 쪼그라들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장영달 전 의원 "나는 한광옥과 다르다"

$
0
0

전라도에서 국회의원을 4선(16년)이나 했던 정치인. 그가 경상도에 와서 다시 2012년 4·11총선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난 그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저 전라도의 자기 지역구에서 밀려나자, 또 다른 연고지를 찾아 온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질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


어? 그런데 뭔가 달랐다. 2011년 7월 14일, 그가 어릴 때 살았고, 지금도 노모 조판이(93) 여사가 살고 있는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전입신고를 한 그는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게다가 4·11총선 야권단일화 경선에서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밀리자 깨끗하게 승복하고 사무실과 집기까지 제공하며 힘을 보탰다. 경선 과정에서 상대후보 측이 인터넷에 올린 근거 없는 인신비방 글을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야권후보 승리를 위해 불문에 부치는 대인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총선이 끝나고 본격 대선 국면이 시작됐지만, 그는 경남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5월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추대된 그의 첫 일성은 ‘현장 밀착 정치’였다. 18개 시·군 민생 현장 방문에 나선 그는 8월 들어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 농성장에 아예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농성장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투쟁하는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다.


장영달 전 국회의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왔는지, 뭘 하려는 것인지 기록해두고 싶었다. 장영달(1948년생) 전 국회의원 이야기다.


그를 만난 건 10월 8일 월요일 오전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리제스타워 2층에 있는 경남도당 사무실에서였다. 전날이 일요일이었지만 그는 밀양 천막에서 자고 아침에 창원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약속시간에 30분쯤 늦은 그는 “병원 가서 물리치료 좀 받고 오느라고 늦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천막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목 디스크가 왔다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투쟁에 올인하는 까닭은?


-추석 연휴에도 병원에 있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이틀간 병원에 있었는데, 밀양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 결국 이틀 있다가 밀양으로 돌아왔지.”


-밀양 송전탑 현장에서 투쟁하는 할배·할매들이 이젠 다 아시겠네요.

“다 알죠.”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지난 주말(지난 10월 5일)에 왔다 갔잖아요. 해결방안이 보입니까?

“시골 어른들 세 명에게 10억 원씩 배상하라고 손배소송을 내놓은 게 있거든요. 1000만 원도 내놓을 능력이 없는 분들에게 10억을 내놓으라는 건데, 그걸 취하했다는 게 우선 다행이죠. 주민들에게 또 업무 방해한다고 매일 100만 원씩 배상하라는 것도 있었고, 반대하다가 부딪히고 충돌이 생기면 그걸 갖고 또 경찰서에 고발을 하니까 매일 주민들이 잡혀가고 했는데, 그걸 이번에 모두 취하를 해서 주민들이 우선은 좀 잠시라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죠. 그리고 한전 사장이 지금까지 충분히 대화를 못한 데 대해서 사과를 하고 처음부터 다시 대화를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소득이고, 한전 사장과 통할 수 있는 부사장이나 전무급으로 실무협상을 하겠다고 했으니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긴 한데, 저 사업이 국책사업이다 보니 사업을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을 거란 말이죠. 주민들은 이 사업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한전도 포기할 순 없다는 입장이니 그 접점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죠.”



-해결방안이라는 게 사업을 아예 철회하는 겁니까? 아니면 노선을 바꾸는 겁니까?

“신고리원전에서 나오는 전기를 수송하는 것은 지금 있는 송전탑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예요. 그런데 한전은 미래 수요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이걸 만든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주민들은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걸 갖고 왜 이리 주민들을 괴롭히는가, 이런 싸움이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애시당초 처음 설계가 지금의 노선이 아니었다. 변경사유를 대라, 이것도 큰 입장 차입니다.”

  

-한전 입장은 여러 노선 중에서 사업비가 적게 드는 노선을 택하려다 보니 그렇다는 거죠? 유력자의 딸 소유 땅이 있다는 말도 있고….

“그렇죠.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한 그 마을의 경우, 상식적으로 봐도 마을 뒷산으로 가도 되는데, 굳이 마을을 휘감고 가느냐는 거였어요. 그 산 너머에 유력인사의 조카딸 땅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마을 이장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집에 5갤런 짜리 휘발유통을 준비해두고, 가을걷이 끝난 뒤 다시 공사를 하면 뒤집어쓰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거든요. 주민들이 승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예요.”


-그나마 국정감사도 앞두고 있고, 이게 전국적인 이슈가 된 것도 위원장 님의 역할이 컸던거죠?

“6월인가? 밀양에서 주민들이 집회를 한다기에 가봤어요. 저는 적어도 제 나이 정도는 된 사람들이 올 줄 알았죠. 그런데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할매들이 오는 거예요. 이 더운 날 저런 노인들이 왜 오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양반들이 주력이라 이게. 아휴~. 얘길 들어보니 지난 겨울 엄동설한에 80 넘은 할매들이 싸웠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이, 백성이 저토록 살겠다고 절규를 하면 그건 나라에서 해소를 해야지, 그걸 짓밟는 건 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들어갔는데, 이 정도라도 대화국면이 트이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은 해요. 그리고 주민들이 아주 훈련이 잘 되어서 논리가 정연해요. 식견도 대단하고, 그래서 협상이라든지 그런 것은 주민들이 알아서 해도 돼. 다만 폭력이라든지 그런 문제가 안 생기도록 우리가 방어막, 울타리를 쳐주는 역할 정도만 하는 거죠.”


-국회의원이 아닌 원외 정치인 입장에서 이런 투쟁현장에서 함께 해보시니 좀 어떤가요?

“더 힘들고 더 서럽고 더 고통스럽죠. 그러나 당하는 주민들의 고통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죠. 그래도 제1야당이라는 정당이 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싸우는 것보단 훨씬 낫죠. 원외의 서러움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해야죠.”


그가 끝까지 반성문을 쓰지 않은 이유



-지금 원외가 아니라 현역 국회의원이라면 뭘 하고 있을까요?

“아마 민주당 진상조사단 단장으로 와있겠죠. 현재 조경태 의원이 단장으로 해서 얼마 전 왔다 갔는데, 제가 국회의원이라면 선임이니까…. 특히 경상남도는 제 어머니가 52년째 여기 함안에 살고 계시니….”


-52년째라고요? 서울에 계시다가 몇 년 전에 오신 게 아니고?

“내가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들이 어리고 하니까 서울 우리 집에서 아이들 키워주시는 동안 서울과 함안을 왔다 갔다 하셨죠. 52년 전 함안으로 이사 온 이후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도 평생 그 집에서 살고 계시죠. 올해 93세예요.”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제가 74년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처음 구속이 됐다가, 75년 형집행정지로 잠시 나왔는데, 같은 해에 다시 구속이 됐어요. 처음 구속됐을 때 함안경찰서 앞에 가셔서 그랬다더군요. ‘박정희가 빨갱이지, 왜 내 아들을 잡아 갔나’라고 항의를 하셨대. 그래서 체포되어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그 때는 계엄령 하여서 박정희를 비난하면 군사재판을 받아야 했어요. 서울로 송치될 상황이었는데, 내가 나중에 듣기론, 함안에 계시는 1500세대의 농민들이 진정서를 올렸대요. 아들이 구속되어 아버지가 화가 나서 한 번 외친 건데 아버지까지 군사재판에 회부시킨다는 건 가혹하다, 이런 내용으로…. 그 덕분에 20일간인가? 구류를 살고 나오셨대요.”


-그 때 아버지 연세가?

“음, 55세 정도 되셨죠. 그러다가 중간에 내가 석방됐는데, 9개월 만에 다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재구속됐어요.”



-9호가 뭐였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거지. 긴급조치에 대한 비판 자체를 금지시킨 조치였는데,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 중 거기서 인혁당 사건으로 들어온 사람을 만났어요. 어찌나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내가 ‘대체 무슨 사건으로 이렇게 당했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우리도 인혁당이 뭔지 모르겠는데, 우릴 인혁당이라 몰아대면서 이런다’라고 대답을 해요. 그 분도 사형 당하진 않았지만 대구 영천에 살다가 결국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나는 형집행정지로 나왔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라고 폭로하고 다녔던 거지. 그 죄목으로 다시 잡혀 들어가 7년을 꼬박 채운 거지.”


-7년 동안 석방될 기회가 전혀 없었나요?

“다시 1년을 살고 나니까 중앙정보부에서 네 번을 나와서 반성문을 쓰라더라고. 나는 반성할 게 없으니까 쓸 수 없다고 버텼지.”


-적당히 반성문 좀 쓰시고 나오시지 그랬어요?

“사람이 투쟁을 하다가 자기 소신이 옳았다면 끝까지 소신을 지켜야지, 반성문을 써버리면 나중에 변절자가 되어 투쟁의 영속성이 없어지는 거지. 처음엔 반성문 쓰라고 했다가 각서 쓰라 했다가, 반성문이란 제목이 기분 나쁘면 그냥 나의 입장이란 제목으로 한 줄 쓰고 나가라더라고. 그것도 못하겠다니까 국방부장관 서종철 이름으로 재집행 지휘서라는 게 날아오더구만. 그래서 꼬박 살았지 뭐.”


7년 감옥살이 후 다시 감옥행을 선택하다


출소한 후에도 그는 1983년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곧바로 구속됐다.


기록에 따르면 1883년 9월 30일 저녁 7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카톨릭 상지회관에서 치러진 창립대회에서 장영달 부의장이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지 않은가?’라는 발기문을 낭독한 데 이어 ‘민주․민중․민족통일을 우리 모두에게’라는 창립선언문을 김근태 의장이 낭독함으로써 민청련은 공개대중정치투쟁단체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1986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 민주통일민중연합(민통련) 총무국장으로 5․3인천사태를 주도한 혐의로 세 번째 구속되어 다시 1년의 감옥 생활을 했다.



-김근태 의장과는 같은 연배인가요?

“나이는 한 살 위였는데, 학번은 3년이나 빨랐어요. 우리 같은 촌놈은 늦게 들어가고 했지만, 근태 형은 일곱 살엔가 들어가서 우등생으로만 좍 다니고.”


-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보안대 서빙고, 83년 민청련 사건 때는 남산 안기부, 86년 인천사태 때는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 이렇게 다녀오셨는데, 각각의 특징이 있던가요?

“각각 특성이 달라. 그래도 남산은 나름대로 과학수사를 한다는 시늉을 해. 처음부터 두들겨 패고 하진 않아요. 나중에 자기들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패는 거지. 그런데 보안대는 들어가자마자 작살을 내.”


-남영동에서 고문은 안 당했나요? 김근태 의장도 거기서 당했고, 박종철 열사도 거기서 살해당했잖아요.

“남영동에는 글쎄. 김근태․박종철이 왜 그렇게 당했느냐면, 취조실마다 욕조가 있어요. 물을 찰랑찰랑 받아놓고, 여차하면 욕조에 머리를 들이박는 거야. 민청학련 때 보안대에서도 혹독하게 당했지만, 남영동에선 특별한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물고문이 전통이고, 칠성판이라는 데에 딱 묶어놓고 물을 먹이기도 했고. 김근태는 전기고문까지….”


-민청학련 때 보안대에서는 어떤 고문을?

“몽둥이로 매타작하고, 주전자로 물 먹이고….”


-정해진 각본을 끼워 맞추려고 고문을 했을 텐데, 그 때 인혁당 이야긴 안 하던가요?

“인혁당이란 건 아예 있지도 않았지. 그러니까 민청학련 사건 다 만들어놓고 국민에게 발표를 하는데, 어린 학생들만 갖고 갑자기 빨갱이라 하기엔 논리가 약하니까, 4․19혁명 때 활동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인혁당이라고 끼워 맞춘 거지.”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통산 8년을 감옥에서 청춘을 바쳤는데, 그거 둘 다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지정받았다면 보상금이 상당하겠는데요?

“상당히 받아서 민주화운동단체에 기증한 부분도 있고, 마누라에게 양평에 조그만 집도 지어줬고….”


-얼마 받았나요? 몇 억 원은 될 텐데.

“형사보상금을 3억 정도 받았는데, 그걸로 내가 전주에서 나올 때 1억을 투자해서 교회를 하나 만들어놓고 나왔어요.”


-그 돈으로 교회 설립이 되나요?

“전주 외곽의 시골이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내가 목포교도소에 있을 때 절도범으로 들어온 사람이었어요. 절도죄로만 16년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분인데, 나중에 정식으로 연세대 신학대를 나와서 목사가 됐죠. 그 분이 그 교회 책임자죠. 교도소에서 만나 알게 되어 내가 책을 많이 줬는데, 그걸 읽고 그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교도소에서 검정고시를 시작해서 정식 목사가 되신 분이죠. 지금도 각 교도소 교정담당 활동을 해요. 또 교도소 있다가 출소하면 공부를 시키고…. 우리나라에 둘도 없는 분이죠.”


-교회 이름이?

“늦봄교회.”


-문익환 목사님 호 아닌가요?

“우리가 늦게 이런 일을 시작했다는 뜻도 있고, 문익환 목사님을 기리는 뜻도 있고. 법인으로는 요셉선교회로 되어 있죠.”


함석헌 선생과 함께.


아들 때문에 울화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가 옆으로 좀 빠졌는데, 아버지는 그래서 언제 돌아가신 거죠?

“내가 민청학련 구속됐을 때 함안경찰서에서 고함을 질렀다가 잡혀 들어갔다 나오셨잖아요. 그런 뒤에 내가 또 재수감되었거든? 그러니까 그 때부터 그냥 술로 세상을 비관하며 사신 거예요. 평생 농사만 짓던 분인데, 두 홉짜리 소주도 비싸다고 됫병으로 그냥 드셨다더만. 그러다 57세 때 내가 목포교도소 있을 때 돌아가셨어요. 화병, 술병으로….”


-그 때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아버지를 명대로 살지도 못하게 하는 죄인이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두 살 연상이신데, 원래 우리 외가가 함안인데, 산청 함양 고개 넘으면 남원이잖아요. 그런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산청에 우리 이모와 함께 살았어. 우리 이모부가 산청 함양 남원을 오가면서 무슨 장사를 했는데, 그래서 인연이 되어 중매를 했나봐.”


-태어나긴 남원에서 태어났다가 초등학교를 나온 후, 함안으로 가족 전체가 이사를 온 건가요?

“4학년까지는 남원 송동초등학교를 다녔고, 큰형이 전북대학교를 나와서 교편을 잡으니까 거기 따라가서 전주 동초등학교 5․6학년 졸업을 하고, 중학교 1학년 때 함안으로 와서 함안중학교에 입학했죠.”


-왜 함안으로 이사 오게 된 거죠?

“내가 중학교 1학년 첫 여름방학 때 남원 집에 왔는데, 그 때 네 살 먹은 남동생이 바가지 우물에 빠져 죽었어요. 우리 어머니가 목화밭을 메고 저녁에 와서 우물물을 떠서 밥을 해서 저녁에 멍석 깔고 먹으려는데, 네 살 먹은 아들이 안 보여. 알고 보니 동생이 거기 빠져 죽은 거지.”

 

-우물이 원래 좀 턱이 좀 높지 않나요?

“거기는 물이 철철 넘치는 바가지 우물이라니까.”


-팔남매 중에 남동생도 포함된 건가요?

“아니죠. 살아있는 형제가 팔남매죠.”


-그래가지고요?

“그래가지고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정신분열이 왔어요. 아들 죽은 우물물을 떠서 밥을 해먹으려 했으니까. 그 때만해도 우리가 좀 부농이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리려면 아무래도 이곳을 떠나야 겠다 해서 논밭을 헐값으로 막 팔았어요. 그래서 원래 외가가 있던 함안으로 온 거죠. 그 때가 61년도야.”


-그래서 온 곳이 가야읍….

“가야읍 말산리. 지금 살고 있는 집이죠.”


-그래서 함안중학교를 나온 거로군요.

“처음엔 바로 전학이 안 돼서 군북중학교에 한 학기 다니다가 왔어요.”


-그러면 축구는 함안중학교 와서 시작하게 된 건가요?

“오다가다 하다 보니 한 해가 꿀려졌어요. 내가 좀 덩치가 컸던가봐. 그래서 체육교사가 골키퍼하라고. 그래서 축구선수가 되었어요.”


-그 때 함안중 축구가 제법 유명했죠?

“진주남중, 통영중, 마산동중, 함안중학교가 라이벌이었죠.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축구를 했죠.”


당시 졸업앨범에 실린 함안중 축구부 사진(상단 중앙)./임종금 기자


-고등학교는 큰 형이 있던 전주고등학교로 갔는데, 당시 전주고가 좀 세지 않았나요?

“쎘죠. 그 땐 함안중에서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많이 시켰어요. 마산고도 많이 갔고….”


-대학은 왜 국민대학교로 갔나요?

“전주고 마치고 서울대 낙방을 하고 재수를 했는데, 그러니까 군대에서 입대 영장이 나왔어요.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입학을 해야겠다고 해서 잡지를 사다놓고 보니까 국민대 고문이 김구 선생, 설립자가 신익희 선생이어서 바로 거기 원서를 넣었죠.”


“민청학련 사건도 조작이었다”


-입학을 해놓고 군대를 가신 거네요? 그런데, 제대하고 왜 학생운동을 하게 됐나요?

“제대하고 1학년 2학기 복학을 하니 기독교학생회라는 게 있어요. 우리 누님 따라 교회에 다녔던 계기로 거기 가입을 했는데, 3학년 때 내가 회장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전국조직이 있더라고. 종로에. 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산하단체로 기독학생연맹이 있었고, 거기에 박형규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단체가 유신반대를 했어요. 그 당시 우리가 볼 때 박정희 독재는 하나님 말씀에 반하는 거였거든. 그래서 막 대든 겁니다.”


-박형규 목사가 KNCC에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 때도 박형규 목사는 원로목사였어요. 기독학생연맹의 고문 격이었어요. 젊은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컸죠. 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신반대 활동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민청학련 사건까지 이어진 거군요.

“그 때 단일학생조직으로선 가장 많이 잡혀간 게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이었어요. 영어로는 KSCF, 지금 내가 거기 이사장이예요. 그런데 처음 우리가 잡혀갔을 땐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은 듣지도 못했어. 학생들을 잡아다 놓고 보니 우리조직 학생이 50명 정도로 제일 많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기독학생총연맹사건이라고 이름 붙이려고 했어. 그런데 이게 세계본부도 있고 종교단체여서 세계 여론이 문제가 되니까 그 계획을 접은 거지. 그래서 다른 이름을 붙이려다 보니 어디에 민청학련이라는 소그룹이 있었던가봐. 그게 민청학련 사건이 된 거지. 그렇게 하여 민청학련 수괴를 이철, 유인태 이렇게 만든 거지.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지.”


-그것도 일종의 조작사건이군요.

“그 때 잡혀간 사람이 5000여 명이었고, 재판 받은 사람만 330명.”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받은 분도 만난 적이 있나요?

“다른 분은 못 봤고, 사형수 여덟 명 중에 경북대 여정남이란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인혁당이 아니고 민청학련 사건이었어요. 아이러니한 게 박정희가 그 때 자기 고향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요.”


-정치에는 어떻게 입문하게 된 건가요?

“86년도에 감옥 갔다가 87년도 6월항쟁 직후 이한열 장례식 직전에 나왔어요. 그러고 민통련 활동을 계속했는데, 그해 연말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떨어지고 단일화 못한 책임을 몽땅 뒤집어 써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다음 4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그 때 문익환 목사가 민통련 의장이었고, 내가 사무차장이었어요. 민통련에서 계속 회의를 했는데 ‘그래도 김대중 총재를 살려야 민주화운동을 이어갈 수 있다’고 결정했어요. 그래 가지고 문익환 목사님 동생 문동환 목사, 지금 안철수재단 이사장을 맡은 박영숙 여사, 국회의장을 했던 임채정, 이해찬, 장영달 등 재야인사 100여 명이 조직적으로 입당을 합니다. 이 때 거기에 반발해서 뛰쳐나간 사람이 이재오, 박계동 이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견해를 달리한 거죠.”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온 거네요.

“아뇨. 저는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원래 입당계획에 없었어요. 그런데 김대중 총재가 동교동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가서 만났더니, 그 때 전주 국회의원이 이철승이었는데, 김대중 총재가 ‘이철승 의원이 사꾸라 대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걸 극복하려면 장 동지가 나가주셔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못나갑니다’ 했더니 ‘야당 총재들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3월 1일 모든 정치범 사면복권 약속을 받았습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입당을 했죠. 그런데 문익환 장기표 이창복은 사면복권이 됐는데, 저만 쏙 빠졌어요. 그래서 출마를 못했죠.”


-그런데 국회의원도 아니면서 그 때 평민당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네요.

“그 땐 김대중 총재가 임명하던 때니까. 정당 사상 기획조정실장이란 직책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라서 초대 실장을 맡았죠.”


“나는 한광옥과 다르다”


-그 후 92년에 전주에서 초선 국회의원이 되시고, 내리 4선을 하셨는데, 왜 장관은 한 번도 못했나요?

“2006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 장관 내정을 받았어요.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필요하다는 차원이었는데, 그해 10월 4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바람에 무산된 일이 있었죠.”


-전주에서 국회의원에 떨어지고, 결국 밀려서 올해 총선 때 경남 함안으로 온 것 아니냐는 의심도 있는데.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2010년 정세균이 당 대표였는데, 수도권으로 갈 선언을 했고, 당에서는 부천시 소사구가 사고당부여서 거기서 출마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런 때 같은 시기에 함안에 있는 무지개연대와 노사모, 그리고 김두관 경남도지사로부터 요청이 있었어요. 장 선배는 함안에 어머니도 계시고 고향이나 마찬가지니까 영남권 강화를 위해서, 정권 교체를 위해서 이쪽에서 출마해주십시오 하는 요청이었어요. 고민을 했죠. 대의를 위해서 후배가 부탁을 하는데, 그걸 거절하고 편한 길로만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후자를 택한 거죠.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극복하려고 했던 지역주의를 한 번 깨보자는 의지도 크게 작용을 했죠.”


-경남도당 위원장을 맡은 후, ‘현장정치’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데, 특별히 이런 행보를 하는 까닭은?

“제가 전주에서 국회의원할 때도 계속 그렇게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금귀월래’를 반드시 지켜라는 거죠. 금요일에는 지역구에 갔다가, 월요일에 서울로 오라는 말이죠. 금요일 귀향해서 월요일 국회로 돌아온다는 뜻인데, 정치인이 지역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경남은 민주통합당으로선 특히 어려운 지역이잖아요. 그러면 더 열심히 현장을 살펴야죠.”


-박정희 유신시대의 피해당사자로서 최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사과를 보는 심정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철저한 철권통치를 했던 선친의 후광까지 받아 대통령이 되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희생된 사건이 인혁당 사건뿐 아닙니다. 그런 희생자가 수두룩해요. 저는 그걸 사죄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런 걸 모르지 않을 텐데,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왜 박근혜 캠프로 갔을까요?

“그 분은 개인적으로도 제가 친하고, 학교도 저에게 선배고, 퍽 점잖은 정치인 중에 한 분이예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 참모로 거의 정치일생을 보냈는데, 그렇게 평생을 보스 밑에서 참모로만 있다 보니 자연적인 연령이 70세가 넘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한이 있는 겁니다. ‘참모 인생만 하다가 그만둘 내가 아닌데’ 하는 한이 있어요. 미련이죠. 그런데 그게 시대가 지나면서 유권자와 부딪혀보니까, 지난 4․11 총선 때도 (정통민주당을 창당해) 출마했고, 그 전에도 전주에서 출마시도를 하다가 떨어지고 했는데, 국민들은 이미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버린 겁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자기네들의 미련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대단한 울화가 있어요. 그 울화가 엉뚱한 정치행위로 나타난 것이죠. 그래서 이건 새누리당에도 도움이 안 돼요. 민주통합당에서 이미 용도가 사라져버린, 소멸돼버린 사람이거든요. 그런 인물이 새누리당에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호남을 커버해보겠다는 건데, 호남에서 이미 평가가 끝난 인물이죠.”


-위원장 님도 경남에 와서 뭔가 해보려 하다가 결국 안 되면 혹시 한광옥 씨처럼 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정치적으로 화려한 길로 가려 했다면 여기 안 왔죠. 당선 안정권에 있는 지역구를 마다하고 이곳에 온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거죠. 저는 이미 정치적으로 해볼 만큼 해봤다고 생각해요. 국회 국방위원장도 했고, 문재인 후보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할 때 제가 원내대표를 하면서 거의 매일 만나 국정을 논의하기도 했고, 장관 취임은 못했지만 국방부 장관 내락을 받기도 해본 사람으로서 자리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것은 장영달이가 호남이 아닌 경남에서도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첫째 지역주의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고, 둘째는 그걸 통해 정권교체에 일정 역할을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국회의원을 한두 번 더 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도당 위원장과 지역위원장을 맡아 뛰는 것에 대해서 몹시 행복하게 생각해요.”


-한광옥 씨와는 다르다는 거군요.

“한광옥 씨의 경우는 화병의 돌출적인 현상인데, 저는 화병 날 일이 없기 때문에….”(웃음)


-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특별한 비법이 있습니까?

“역사에 복종한다는 자세. 그게 제일 크죠.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지금 여기 있는 게 대단히 행복해요. 그래서 여기서 뭐 내가 실망하고 돌아간다거나 할 일이 없죠.”


그가 가장 하기 싫었던 일 한 가지



-지금까지 64년을 살아오시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나요?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랜 감옥살이를 했지만, 독재권력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잘 극복하면서 그 어마어마한 독재에 항거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자부심이예요. 그런데 이라크 파병 문제를 제가 국방위원장 때 방망이를 때렸어요. 그게 제가 참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데…. 그러나 한미관계에 있어서, 이건 처음 말씀드리는 큰 문제인데, 그 때 내가 국회에서 이라크 파병을 가결하지 않으면 노무현 정권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위기의식을 가졌어요.”


-그럴 정도로 미국의 영향력이 크나요?

“그보다 더 커요. 제가 미국 국방성을 가본 일이 있었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표현하기에 자존심 상할 정도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의 힘이 미국에게 있단 말입니까?

“있죠. 20여 년 전에 파나마라는 나라에서 노리에가라는 대통령이 당선됐는데, 미국에서 관리하던 파나마 운하를 국유화하면 재정의 상당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어요. 그걸 노리에가가 국유화를 선언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현직 대통령이 미국 형무소로 잡혀갔습니다. 지금까지 못 돌아오고 있어요.”


-옛날엔 64세면 노인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60세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 하잖아요. 남은 인생 3막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12월 19일 정권교체는 민족의 국운을 좌우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제 인생에서도 그래요. 만일 이번에도 정권교체가 안 되면 평화체제 구축이 불가능해요. 이명박 대통령의 예에서 보듯 강대국의 비위에 맞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긴장관계로 갈 수밖에 없어요. 10년의 노력을 이명박 대통령이 5년 만에 되돌려놨잖아요. 북한의 모든 자원은 중국으로 가버리고…. 그래서 12월 19일 정권교체에 제 모든 걸 걸고 싶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지금 밀양 가서 하듯이 진짜 힘없는 서민대중을 대변하면서 살다가 죽는다면 더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아요.”


-국회의원이나 다른 자리를 한 번 더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복종해야겠지만,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해서 뭘 해보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사실은 국회의원이 그렇게 행복한 건 아니었다 이런 생각도 많이 하기 때문에….”


-경남도지사 보궐선거도?

“도당위원장으로서 대선과 보선을 잘 관리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봐요.”


-특별하게 재미있는 일은 없나요? 취미라든지.

“내가 축구선수니까 운동할 때 재밌고….”


-혼자 계실 때 주로 뭐하십니까?

 

“옛날에 못 읽었던 책을 주로 읽어요. 요즘은 권운상이라는 후배가 쓴 <녹슬은 해방구>를 읽고 있어요. 그 놈이 암에 걸려서 죽었거든. 참 아까운 놈인데.”



인터뷰는 여기까지다. 두 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든 생각은 ‘경남에 이런 정치인 한 명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든 말든, 힘없는 서민과 현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정치인 말이다. 대화 도중에도 나왔듯이 어설픈 보상심리에 사로잡혀 화병에 걸린다든지, 선거병에 걸려 권력만 탐하다가 정치 낭인으로 전락하는 전철만은 밟지 않으면 좋겠다. 그의 진정성을 좀 더 지켜봐야 할 이유다.


※2012년 10월에 했던 인터뷰를 뒤늦게 기록으로 남깁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커피 향기로 만드는 마을 공동체의 꿈

$
0
0

경남 양산 물금 범어리

 

카페 소소봄 주인 이우석씨.

 

1. 자유로운 대중에 바탕하는 카페의 힘

 

카페와 살롱이 있었습니다. 살롱은 귀족 사교장이었고 카페는 서민 공간이었습니다. 살롱의 주인은 귀족의 아내들이었고 카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살롱은 주인이 초청하는 인물만 올 수 있었지만 카페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살롱은 절대주의 왕정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사상이 싹튼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지성인들이 상롱을 주도한 덕분이었습니다. 카페는 선술집과 더불어 근대 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나아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게까지 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들이 많이 드나든 덕분이었습니다.

 

살롱에서는 술을 마시지만 카페에서는 커피를 마신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사교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살롱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뒤인 19세기 시들해졌습니다. 17세기 중반 생겨나기 시작한 카페는 같은 시기 흥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카페 소소봄 들머리.

 

이런 카페를 바탕삼아 공동체 만들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981년 출생으로 아주 젊습니다. 그이는 마을기업이나 사회적 기업이 제대로 자리잡고 성공하려면 공동체가 뒷받침이 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모여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만들어질 수 있다고 여깁니다.

 

2. 카페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에서 카페 ‘소소봄’을 운영하는 이우석씨는 지난 7일 만났을 때 카페(cafe)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길게 얘기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근대 정신을 형성하고 확산한 근거지라는 얘기입니다.

 

 

귀족이나 명사만 출입할 수 있었던 살롱과 달리 드나듦에 차별이나 장벽이 없었고 거기 파는 커피가 비싸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도 손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카페는 새로운 소식과 정견 따위를 나누는 장소였고 갖은 상업 거래도 이뤄졌으며 공연·전시도 여기서 펼쳐졌습니다. 또 집집마다 우편물이 배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소포나 편지를 배달하는 거점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유럽에서 카페는 사회와 문화를 담는 그릇이었고 지금도 그릇입니다. ‘자유롭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곳, 겨울에는 공짜로 몸을 따뜻하게 녹일 수 있는 곳, 모르는 사람과 사쉴 수도 있고 책이나 신문도 읽을 수 있는 곳’이 카페입니다.

 

이런 설명에 이우석씨가 만들고 싶어 하는 카페의 모습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름 ‘소소봄’도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소소봄’을 왜 하느냐고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지요. 공동체가 없는 데서는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있는 데서는 더 잘 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3. 사회적 가치=복지와 수익을 함께 추구

 

또 공동체가 운영도 돼야 하잖아요? 사회적 가치=복지와 수익을 동시 추구합니다. 소소봄은 ‘마을 카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마을 카페라는 말, 사람에게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 듣는 개념은 이밖에도 더 있습니다. 모두 자기가 하는 일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저는 ‘카페 사회사업’을 하는 ‘카페 사회사업가’입니다. 카페를 통해 사회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카페는 담론, 이야기, 소문, 협의, 논의, 논설이나 해설 같은 것들이 떠다는 그런 공간입니다.

 

소소봄 천장에 붙여 놓은 사진들.

 

18세기 시민혁명이 발생할 수 있도록 한 아지트 같은 공간입니다. 시민들 남녀노소 구분없이 신분에 관계없이 말을 하는 공간입니다. 카페 하나가 지역 주민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요. ‘마을 공동체’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소소봄’이라 지었어요.

 

밝을 소(昭), 작은 소(小), 밝은 봄이 머무는 공간, 소박한 공간, 소소한 소시민들이 어울리는 사랑방 같은 공간…. 그렇게 모이는 사람들이 마을을 잘 살게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공간…….”

 

밝은 공간은 맞는 것 같습니다. 오후 햇살이 곱게 퍼지면서 창문을 넘어 안으로 스며듭니다. 게다가 여기 들어와 있는 사람들 표정도 다들 편안해 보입니다. 어린 아이랑 젊은 어머니가 함께 들어와 책을 읽거나 얘기를 나눕니다, 오랫동안.

 

 

4. 정부 지원 없이 자립 자활할 수 있어야

 

“정부 지원을 받는 사회적 기업이나 마을기업들이 지원이 끊어지면 망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요. 보니까 망하는 기업들은 공동체가 없었어요. 공동체를 먼저 만들어야겠다고 싶었어요.

 

물론, 모이는 공간으로는 밥집도 있고 술집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데는 행위가 단순한 공간이거든요. 게다가 술집은 술을 마시니까 단점들이 있을 수 있어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카페가 제격이라고 봤어요.

 

이렇게 생각하고 바리스타(Barista, 커피를 전문으로 만드는 사람) 공부를 했어요. 제가 대학 입학 00학번인데 사회복지학과를 다녔어요. 학교 다닐 때 사회복지정보원에서 주최한 캠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벤처사회사업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에스프레소 마스터 과정 수료증(위)과 사회적 기업 스쿨 수료증(아래).

 

복지관 같은 기관이 있지 않으면서도 복지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이우석씨는 사회적 기업을 해보려고 2010년에 SK그룹에서 하는 ‘사회적 기업 스쿨’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개인 사업자로 국세청에 등록했습니다. 말하자면 자영업자입니다.

 

창업 전에 부산YMCA와 동원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면서 주민 조직 사업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을 공동체 만들기로 복지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고 보고 창업에 나섰습니다.

 

5. 카페사회사업이라는 개념도 만들고

 

카페사회사업가라고 적혀 있는 명함.

 

“저 이전에도 카페를 통해 사회사업을 한 분들이 있었겠지요. 다만 ‘카페 사회사업(가)’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뿐이고요. 그런 분들이 일을 하면서도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고 자기 정체성이 헷갈려하셨을 것 같아요.

 

창업을 준비하면서 그런 분들을 만났는데, 이론과 실천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과정에서 도움주신 분들이 오히려 자기 하는 일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요.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처럼……. 저보다 먼저 한 선배인 그 분들이 좋아해 주시고 알아봐 주시니 고맙고 좋았습니다.”

 

카페를 내어 한편으로는 복지를 실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익을 내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는 얘기입니다. 수익 자체, 복지 자체, 그리고 그 사업의 유지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매우 협소해진다고 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이라는 얘기겠습니다.

 

6. 카페를 지역 사회에 내어놓기도 하고

 

이런 생각에서 이우석씨는 소소봄을 지역에 종종 내어놓습니다. “27일 ‘잠옷 입는 날’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마을 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미국식이랄 수 있겠네요. 무료고 이날은 장사 안 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건데요, 잠옷 입고 와서 책 읽어주는 소리 듣다가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면 부모들이 그대로 안고 집으로 가는 겁니다. 아홉 번째 공연이네요. 2011년에 두 번했고, 지난해 2012년은 여섯 번, 올 들어는 처음.”

 

 

이우석씨는 이미 유명해져 있습니다. 4월에 나오는 부키출판사의 직업 소개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라는 책에도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름이 나면서 찾아오게 되는 이런저런 사람에게 자기 경험과 생각을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그이의 카페 운영이 눈길을 끈 덕분이겠지요. 그렇다면 카페 소소봄 매출은 어느 정도일까요? 행여 비밀은 아닐까요? “네이버에서 ‘소소봄’ 치면 다 나와요. 공개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것을 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7. 그래도 아직은 모자란 구석이 많아

 

2011년은 문을 연 5월부터 5000만원, 2012년 8000만원, 2013년은 석 달 동안 3000만원. 지난해 4월부터 올 3월까지 12개월 동안 1억원입니다. 순이익은 25%. 전세금이 30%, 인건비가 30%, 자재비가 15%.”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1년 일해 챙기는 몫이 2500만원뿐인 셈입니다. 자기 인건비밖에 안 되는 수준입니다.

 

“매출도 더 많아져야 하고 순이익도 올라가야 합니다. 카페 시장은 전쟁터이기 때문에 커피로만 살아남기는 힘든 세상입니다. 창업할 때 여기서 두 번째였어요. 지금은 스무 군데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1등이지만요.

 

가장 먼저 스스로가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지금은 로스팅한 커피를 가져오지만 앞으로는 직접 로스팅할 생각입니다. 곧 좀더 넓은 데로 옮길 계획인데요, 옮기면 그렇게 하려고요.

 

 

자본이 많으면 자본으로 성공할 수 있고, 기업가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기본인데요, 공동체가 필요한 다른 까닭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없으면 운영 주체가 자기 공(功)이 크다고 여기며 성과를 자기 몫으로 댕길 가능성이 큽니다. 사적 욕심이 발동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죠.”

 

8. 기부나 복지가 아닌 커피로 이름나고 싶어

 

기부는 적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지난 3월 왔을 때는 기부 내역이 적힌 종이가 공간 한 켠에 붙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부 내역을 인터넷에 올려놨습니다. 지역 아동센터나 장애인 시설 같은 데요. 원래는 공개하지 않았어요. 보이지 않게 하려고…. 그러다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보여드릴 필요도 있겠다, 그랬더니 좋아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기부나 복지로 이름이 나는 카페가 아니라, 카페다운 카페로 이름이 나는 그런 카페를 만들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안 알리고 ‘쪼대로’ 합니다. 편한 쪽으로, 하고 싶은 쪽으로요. 착하고 싶을 때 착하고, 착하고 싶지 않을 때 착하지 않게 하고…. 공개를 하면 기부를 스스로에게 자꾸 강제하는 측면도 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기부만 복지로 여기는 경향이 큽니다. 주는 사람 따로 있고 받는 사람 따로 있는 그런 복지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우석씨는 그게 아니라 합니다. “이런 식이에요. 지난해 양산 복지 박람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커피 교육을 무료로 하면서 꽃농사 짓는 분을 동참시켰어요. 교육에 오신 분들께 꽃이 심긴 화분을 하나 1000원에 팔았습니다. 화분 하나에 500원씩 남았는데 후원금으로 냈습니다. 복지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우석씨는 복지를 특정 형태로 묶어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명함에서 이름 앞에 ‘카페사회사업가’라고 새긴 까닭도 관련이 있습니다. 30대 초반인 이 젊은이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습니다.

 

9. 드림 팩토리 공장장이 되고 싶다는

 

“공부를 안 해 공고를 갔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생 때 꿈이었던 사회복지사가 지금 돼 있습니다. 그래서 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꿈을 꾸고 있어요. 제가 이승환 광팬인데…, 드림 팩토리(Dream Factory 꿈 공장), 소셜 웰페어(Social Welfare 사회복지) 드림 팩토리 공장장이요. 다양한, 새로운 복지 형태 방법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노래만 부르는 줄 알았던 가수 이승환씨가 다른 사람들 제대로 꿈꾸도록 도와주는 그런 일도 하는 모양이라는 짐작이 이 대목에서 들었습니다.

 

 

“‘소소봄’이 안락하지도 않고 풍경이 뛰어나지도 않고 맛도 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처음 시도해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여전히 되게 부족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많지만 그래도 공개합니다.

 

카페를 하면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이랑 마을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요. 참고해 주시고요. 실패하거나 이해가 안 되거나 이게 아니다 싶거든 찾아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저는 혼자일 때 되게 힘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무엇인가?’ 깜깜해 블랙홀 같은 그 때 도움 받을 데가 없었는데, 그 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손잡아 주니까 많이 편합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단속사지·남사마을이 개울가에 있는 까닭

$
0
0

5월 15일 올해 들어 세 번째 생태·역사기행은 물 좋고 산 높은 산청으로 떠났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가 있는 집에다 밑반찬을 대어주고 마찬가지 어르신들에게도 쌀을 드리는 등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꽃들에게 희망을’이 함께했습니다.

 

‘꽃들에게……’를 통해 할머니들이 대거 참여하신 것입니다. 봉사자까지 쳐서 모두 서른여섯 분이셨습니다. 덕분에 다르게 참여하신 이들에게는 조금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들 서로를 위하는 태도로 길을 나섰습니다.

 

3월과 4월에는 밀양 동천 둑길과 진주 남강 상류 둑길을 걸으면서 쑥 같은 나물도 더불어 캤습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연세 높은 할머니들이 많으셔서 오래 걷기는 어려웠습니다.

 

먼저 들른 데는 겁외사였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80년대와 90년대를 청년으로 살아낸 세대는 대부분 다 아는, 성철 스님 생가 자리에 들어선 절간입니다. 성철 스님을 기리려고 성철 스님 세상 떠난 뒤에 만든 새 절입니다.

 

다른 절간 같으면 일주문 자리에 들어서 있는 겁외사 정문. 기둥이 열여덟 개입니다.

 

절간 들머리에서 일행을 맞은 성순용 문화관광해설사는 성철 스님 생가 대청 마루로 이끌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진 탓인지, 기와지붕 아래 그늘에 드니까 시원한 기운이 좋았습니다. 어르신들은 여기 앉아 편안하게 해설을 들었습니다. 성철 스님 일생에 대해섭니다.

 

율은고거(栗隱故居)라 적혀 있습니다. 율은은 성철 스님 아버지의 호 정도가 되겠습니다.

 

성철 스님 일생은 여기 대웅전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고 여러 사람들을 위해 법어를 베풀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 몸이 불태워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바깥 뜨락에는 성철 스님 전신상이 있습니다.

 

 

 

적혀 있기로 전신상이 아니라 탑입니다. 성철 스님 사리를 담은 사리탑입니다. 탑이란 원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는 물건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대웅전에도 있습니다. 가운데 비로자나부처님이 있고 그 오른편(우리가 보기에는 왼쪽)에 성철 스님이 석장을 짚은 채 앉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가운데 부처님한테 절하는 사람보다 오른편 성철 스님한테 절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겁외사 건너편에는 이런 장터도 있습니다. 여기서 국산 칡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돌아나와 버스를 타고 남사마을로 갔습니다. 돌아다니시기 버거운 어르신들은 여기서 내리시고 나머지 일행은 단속사지로 갔습니다. 단속사지에는 유홍준 선수의 ‘구라’로 갑자기 이름이 높아졌던 대숲이 있습니다.

 

유홍준 선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여기 대숲에 들어가 드러누우면 일렁이는 댓잎도 좋고 대숲 사이로 살라지면서 내려오는 햇살도 더없이 좋다, 대충 이런 식으로 적었더랬습니다. 이게 인기를 탔는데, 이제는 이 또한 20년이 다 된 옛날 얘기가 됐습니다.

 

 

단속사지에는 동·서삼층석탑과 당간지주, 그리고 정당매가 물건입니다. 동탑 서탑 모두 균형도 잘 잡혀 있고 미끈하게 오르내리는 태가 좋다는 얘기를 듣습니다만,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동탑이 보기도 좋고 기상도 씩씩합니다.

 

가까이 동탑 멀리 서탑.

 

가까이 서탑 멀리 동탑.

 

정당매는 신라시대 만들어진 여기 단속사가 고려 시대까지는 멀쩡했음을 입증하는 나무입니다. 고려 말기 정당 벼슬을 했던 강 아무개 형제가 여기서 요즘으로 치면 고시 공부를 하던 때에 심은 매화나무가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몸통은 죽고 뿌리 가까운 데서 나온 곁가지가 새로 솟고 있습니다.

 

 

당간지주를 보면 절간 규모도 함께 보입니다. 여기 당간지주는 제 기억대로라면 영주 부석사 정도는 됩니다. 적어도 그쯤은 되는 규모를, 한 때 자랑했던 단속사입니다. 우리는 이날 당간지주 근처에서 머구(머위)를 땄다가 동네 젊은 할매한테 지청구를 듣기도 했습니다.

 

논이나 밭에 나 있지 않아서 그냥 주인이 없는 줄 알았는데, 머구는 원래 그렇게 기른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한 움큼 되는 뜯은 머구를 드렸습니다. 이 할머니는 그랬더니 싱긋 웃으시면서 “뜯은 머구는 가져가시고……”라 했습니다.

 

당간지주 있는 데는 솔숲이 좋습니다. 물론 그다지 길지는 않습니다. 솔숲 가까운 바닥에는 꽃잎이 크고 하얀 녀석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행은 무슨무슨 꽃이라면서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지금 떠올려 보니 으아리라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속사지에 와서 이렇게만 둘러보고 가면 제대로 누렸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속사지에서는 절터 자체가 얼마나 훌륭한 데 자리잡고 있는지를 느끼는 보람이 있습니다. 단속사지가 지금은 마을이 돼 있습니다.

 

 

동탑 서탑이 마주보고 있는 바로 앞쪽은 아마도 단속사 으뜸 법당이 있었을 것입니다.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앞에 서서 둘레를 둘러보면 무척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완전히 복 받은 자리입니다.

 

으뜸 전각 자리에 들어선 민가의 속살. 콘크리트 장독대가 정겹습니다.

 

골짜기이면서도 움푹 꺼지지 않고 살짝 도드라져 있습니다. 마을 전체를 두 줄기 개울이 양쪽에서 감싸는 가운데 둔덕처럼 가만히 솟아오른 데가 절터입니다. 그리고 양쪽 개울 건너편으로는 높고 낮은 산악이 빙 둘러서 있습니다.

 

절터(마을)는 남쪽을 향해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골짜기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꺼지지 않은 데는 정말 찾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꺼지지 않고 솟아올랐기에 아침해는 일찍 뜨고 저녁 해는 늦게 집니다.

 

합천 모산재 아래 영암사지가 화려하고 환하고 장하고 씩씩하다면, 여기 단속사지는 따사롭고 밝고 정겨우면서도 점잖은 절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숲은 마을을 세로질러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습니다. 유홍준 선수 ‘구라’만큼 멋지지는 않습니다. 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아늑한 느낌은 대단합니다. 여기에는 단속사지에서 나온 여러 석재들도 써서 지은 민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주추가 남았습니다.

 

 

일행 가운데 스스로는 ‘촌년’이라 이르는 한둘은 찔레순을 질러서는 껍질을 벗겨 먹습니다. ‘촌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찔레순이 무슨 맛이냐?’고요. 아무 맛도 안 나고 비릿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냥 풀맛으로 먹는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버스를 타고 나오는 길에 광제암문(廣濟嵓門)을 들렀습니다.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드나드는 바위문쯤으로 보면 됩니다. 옛날 단속사가 제대로 서 있던 시절에는 여기가 출입문이었겠습니다. 광제암문으로 내려가는 옛길은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누리다 남사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찍 자리를 잡은 어르신들은 여기 평상으로도 모자라 마을회관에 들어가 누우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행 보기 드뭅니다. 걷다가 쉬고, 쉬다가 눕고, 누웠다가 일어나 점심 먹고…….

 

 

 

예담원이라는 밥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돼지고기도 나오고 뜰깨죽도 나오고 토종 쌈장도 나오고 상추쌈도 나오고 갖은 나물 반찬 절임 반찬들이 나왔습니다. 막걸리도 나왔는데 뒷맛이 무척 개운했습니다.

 

단체 손님을 위한 1만원짜리 맞춤 밥상이라는데, 이래 갖고는 남는 이윤이 거의 없겠습니다. 게다가 우리 일행은 너나없이 모두들 쌈이라들을 몇 차례 더 날아다 먹었습니다. 특히 어르신들 입맛에는 더없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고는 1시간 남짓 남사마을 여기저기를 거닐었습니다. 남사마을은 돌담과 돌담장, 그리고 오래 된 기와집으로 이름높은 동네입니다. 담장 높이가 좀 높아서 둘러보는 이에게는 좀 걸리적거리기는 하지만 그냥 둘러보기만 해도 썩 멋집니다.

 

 

 

그리고 여기 이 남사마을은, 다른 모든 오래된 마을이 다 그렇듯이, 남사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U자 모양으로 휘감은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 개울 따라 거니는 걸음은 시원하기만 합니다. 물길 좋은 데라야 좋은 마을이 들어설 수 있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70년대에는 꽤나 잘 살았을 것 같은 집 대문에 붙어 있는 표준농가 표지. 70년대 시골 마을에 이렇게 초인종을 해달 정도면 상당한 집안입니다.

여기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당시 하룻밤 머물렀던 집도 있습니다. 1597년 모습 그대로는 당연히 있지 않고 지금은 무슨 니사재(尼泗齋)라는 재실이 돼 있습니다. 당시는 박호원인가 하는 이의 노비 노릇을 하는 이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장암과 니사재 사이에 있는 나무. 감나무가 아니라 뽕나무입니다. 오디가 맺히고 있었습니다.

니사재.

 

바위 위쪽에 丈岩(장암)이라 적혀 있습니다.

 

 

돌담 위에 놓인 화분들. 가꾸는 이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골목에 피었다가 진 민들레들. 바람이 불지 않는지 그 홀씨가 날리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어르신들 때문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발했습니다. 창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목화시배지에 들렀습니다. 간단하게 볼일도 보고 전시관도 둘러보고 기념 단체 사진도 찍는 겸사겸사였습니다.

 

목화씨를 중국서 가져온 문익점에게 내려진 호칭이 부민후(富民候)임을 저는 오늘 여기서 알았습니다. 여기 ‘부민’은 ‘부유한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목화로 만든 솜이 상민·천민에게까지 골고루 미치지는 않았지만, 그 공로는 대단하게 인정된 모양입니다.

 

현판이 부민각입니다.

 

 

이날 동행하신 어르신들께,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꽃들에게 희망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고마움을, 불편함을 참고 기꺼이 함께해 주시고 때로는 도우미 구실까지 해 주신 다른 참가자 여러분께 올립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지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공동 주관·주최하는 생태역사기행은 6월 19일로 이어집니다. 남해 바래길, 풍경이 가장 아름답고 시원한 대량마을 일대를 걷습니다. 상주해수욕장과 그 시원한 솔 그늘도 누립니다.

 

대량마을은 아니지만, 남해 풍경. 홍현마을 전경입니다.

푸짐한 점심은 당연히 준비합니다. 자연 생태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보람과 즐거움을 주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루트입니다. 참가비는 3만원이고요 문의·상담·신청은 055-250-0125나 010-8481-0126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북극 얼음 녹으면 남해안 물고기 못 자란다?

$
0
0

올 겨울 우리나라 남해안 바닷물이 차가워졌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태까지는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바닷물이 더워지고 있다는 얘기만 나왔는데, 올 겨울 혹한을 겪고 보니 사람뿐 아니라 바닷물도 그리 됐나 봅니다.

 

어쨌거나,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바닷물이 더워지기도 하고 또 차가워지기도 하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이런 현상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올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당장은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지 않겠지만, 이런 바닷물 온도 변화는 아무래도 우리 인간한테도 좋지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대략 난감’입니다. 이를 두고 지난 5월 6일 월요일, MBC경남에서 저녁 무렵 방송하는 라디오 광장 세상 읽기에서 조금 얘기를 해 봤습니다.

 

1. 차가워진 바닷물에 제대로 못 자란 물고기

 

서수진 : 5월입니다. 봄이 시작되는 3월부터 날씨가 변덕을 부리더니 5월에도 초순은 예년보다 쌀쌀하다는 예보가 있습니다. 오늘 얘깃거리는 이런 기온이랑 관련돼 있다고요?

 

마산 바다.

 

김훤주 : 예, 날씨 자체보다는 남해안에서 나는 물고기들이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나왔는데요, 이를 근거로 삼아 날씨까지 한 번 짚어보려 합니다.

 

진 : 예에…… 요즘 남해안 물고기에 대해 어떤 자료가 나왔어요?

 

주 : 국립수산과학원 남서해안수산연구소가 전남 여수에 있는데요, 여기서 지난 겨울 한파와 3~4월 꽃샘추위 같은 이상 저온이 지속되는 바람에 남해안 물고기들이 제대로 자라고 있지 못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진 : 이상 저온으로 물고기가 제대로 못 자란다고요? 그러면 올해는 수산물 가격이 많이 높아지겠어요. 어떤 내용인가요?

 

주 : 남해 연안에는 멸치나 전어 같은 고기가 주로 나잖아요. 이런 고기들 성숙도(成熟度)가 다른 해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월 4일부터 12일까지 9일 동안 조사해 봤더니, 중간 단계 이상 성숙한 개체들의 출현율이 대부분 평균치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멸치는 지난해 같은 시기 46.6%에서 27.7%로, 보구치는 86.5%에서 49.1%로, 성대는 6.5%에서 0.7%로, 전어는 40.4%에서 10.7로 떨어졌습니다. 청멸이라는 어종은 지난해 23.1%였는데 올해는 0.0%였고요, 황아귀는 15.6%에서 2.1%로 낮아졌습니다.

 

다만 반지라는 물고기만 지난해 69.7%와 비슷한 64.3%를 기록했습니다.

 

진 : 조사한 일곱 개 어종이 남해안의 대표적 상업 어종이라지요? 대부분 어종이 성숙도가 처지는 것으로 나타났군요. 원인이 뭐라고 합니까?

 

2. 바닷물 온도는 왜 낮아졌을까?

 

주 : 바닷물 온도 때문이라 합니다. 물고기 성숙도를 조사한 남해 연안은 올해 4월 깊이 10m 평균 수온이 13.5도로 예년과 비슷했지만, 남해안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려고 내려가 지내는 제주도 서쪽 바다 수온이 크게 낮아진 탓이라고 합니다.

 

거제 바다. 와현해수욕장 전경.

 

그쪽 해역 표층 수온이 올해는 2~3도 낮았는데, 이런 겨울철 한파가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진 : 겨울에 바다가 차가워지고 그것이 오래 계속되는 바람에 물고기가 알을 충분히 낳지 못했거나 알을 낳았다 해도 그것이 제대로 부화하지 못했다는 얘기이군요.

 

주 : 그렇습니다. 결국 지구온난화로 겨울이 길어지고 혹독해지면서 바닷물도 덩달아 차가워진 탓이 물고기들 산란과 생장에 악영향을 끼친 셈이 됩니다. 이런 변화가 지구온난화와 관련돼 있고, 우리 인류가 지구온난화를 멈추지 못하고 있는 데에 원인이 있는 셈입니다.

 

3. 한 해의 3분의1이 겨울인 현실

 

진 : 지구온난화로 북반구 겨울이 길어지고 있다는 얘기는 예전부터 심심찮게 나왔던 얘기지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지구가 갈수록 더워지는데 어떻게 겨울이 길어져?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지금은 지구가 더워지는 탓에 북극 얼음이 녹는 바람에 그 차가운 영향이 북반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지요.

 

유난히 추웠던 올 겨울, 눈 덮인 창녕 들판에 내려 앉은 독수리들.

 

주 : 그렇습니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지난 겨울과 널뛰기를 거꾸로 했던 올해 3~4월 날씨도 그렇게 설명이 됩니다. 5년 전만 해도 2월 하순에는 때 이른 봄꽃이 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올해는 4월에도 봄기운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기상학에서는 평균기온이 5도 이하인 기간이 겨울입니다. 2009년 114일, 2010년 124일, 2011년 113일이었습니다. 올 겨울은 지난해 11월 16일 시작됐는데 아마 조사 결과가 나오면 가장 긴 겨울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겨울 길이가 102~104일 정도였습니다. 이상고온도 많이 나타났고요.

 

진 : 3월과 4월의 날씨도 만만찮았지요?

 

주 : 부산·울산·경남의 올해 3월 평균기온이 8.7도였습니다. 40년만에 최고였습니다. 어떤 날은 5월 같은 기온을 보여 기상대 관측 이래 가장 높은 3월 기온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널뛰기도 심해졌습니다. 어제는 따뜻한 봄날씨였는데, 갑자기 20도 넘게 떨어지는 바람에 오늘은 차가운 겨울로 돌아간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4월은 추웠습니다. 4월 평균기온이 10.3도로 지난 40년 사이에 세 번째로 낮았다고 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진눈깨비나 눈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원인 가운데 커다란 부분을 지구온난화와 그에 따른 북극 바다얼음이 녹는 현상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4. 북극 얼음이 녹으면 남해안 물고기가 못 자란다?

 

진 : 그런데 이런 지구온난화가 남해안 물고기한테까지 영향이 간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거세차게 물결 치는 겨울 제주 바다.

 

주 : 그렇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미리 알고 있었겠지만 저 같은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 :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당장 물고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 바다에서 물고기가 적게 잡힐 것이니까요.

 

주 :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래도 일단은 물고기가 알을 낳는 산란 시기가 늦춰지고 있다고만 보는데요, 5월 들어 바닷물 온도가 정상을 되찾으면 다시 산란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된다 해도 많으나 적으나 줄어들기는 마찬가지이겠습니다.

 

5. 남해안 해양생태계 교란도 예상되고

 

진 : 다른 영향은 없을까요? 바다에도 육지와 마찬가지로 먹이사슬이 존재하니까, 이를테면 멸치 같은 것을 먹고사는 다른 물고기들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경남도민일보 사진.

 

주 : 제가 알기로는 바다 속 먹이사슬에서 1차 소비자가 멸치인데, 말씀하신대로 이 멸치를 잡아먹는 물고기로는 고등어가 대표적입니다. 멸치가 줄어들면 고등어가 당연히 제대로 먹지 못하겠지요.

 

진 : 그런데 여태까지 지구온난화로 바다가 더워지고 있다, 남해안에서 온대성 어류가 줄고 난대성 물고기들이 자주 출현한다, 이런 보도들이 많았지 바닷물이 식고 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주 : 이번 남서해안연구소의 조사 결과 발표도 바닷물이 식고 있다는 부분까지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바닷물 이상 저온이 올해만의 일인지 아닌지를 바로 가늠해낼 수는 없고요, 다만 지구온난화 탓에 여름과 겨울은 자꾸 늘어나는 반면 봄과 가을은 줄어드는 현상과 매우 관련이 깊기 때문에, 바다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지 않겠나 짐작해 볼 뿐입니다.

 

진 : 그렇다면, 바다 생태계에도 엄청난 변화가 몰려올 가능성이 높은데요.

 

주 : 전혀 생각 못했던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도 영향을 크게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서해수산연구소도 어종별 자원생물학적 특성과 환경변화를 살피고 이런 변화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분석해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6. 오염과 남획에 온도 저하까지 겹친 수산업

 

진 : 이미 바다 속 어족 자원은 많이 줄어들어 있는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닷물 온도를 비롯한 해양 생태계 변화가 밀어닥친 셈이네요.

 

주 : 갖은 오염 물질로 바다가 더러워지고, 거기에 더해 탐지·어획 기술 발달로 지나치게 고기를 많이 잡은 탓이 크다고 합니다.

진 : 그래서 이제는 우리 밥상에 국내산보다 수입산 물고기가 더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수입산 참조기가 국내산 영광굴비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터져나오고요.

 

주 : 그렇습니다. 지난해 6월 현재 통계인데요, 수협중앙회가 개설·운영하는 공판장에서 취급하는 수입산 수산물의 비중은 34.4%로 나타났습니다. 2011년 35.7%, 2010년 37.8%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30% 초반이었던 2008년과 2009년에 견주면 늘어났습니다. 수협 공판장을 거치지 않고 시장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치면 수입산 비중이 더욱 늘어나겠지요.

경남도민일보 사진.

 

7. 갈수록 늘어나는 수입 물고기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따져보겠습니다. 수협 공판장 물량입니다. 고등어는 중국과 노르웨이에서 수입하는데 비중이 21.3%로 낮았습니다. 이밖에 50% 이하 수입 수산물은 아귀 26%, 게 35%, 가자미 45%, 참조기 39%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절반을 웃돌았는데, 명태 81%, 새우 96%, 낙지 77%, 포장 바지락 86%, 쭈꾸미 70%, 갈치 53%, 새우살과 코다리 명태가 똑같이 99%, 임연수어 97%, 꽁치 78%, 명태포 92%, 바지락 64%, 홍어 51%였습니다. 미꾸라지도 92%가 수입산이었고요, 해파리는 100% 수입산이었습니다.

 

진 : 이미 상황이 이렇게 수입산이 대세인데요, 바닷물 온도까지 출렁거리니까 국내산 물고기는 앞으로 더욱 얻어먹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주 : 때깔 좋고 몸집까지 그럴 듯한 물건을 좋아하는 소비 행태도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물건은 대부분 수입산이거나 아니고 국내산이라면 값이 매우 비쌉니다.

 

그러니까, 마산을 보기로 들자면, 진동장 같은 어항 가까운 데 있는 전통시장을 찾아서 때깔도 그저 그렇고 몸집도 좋지 않은 잡어를 사면 100% 국내산입니다.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시내버스 타고 가면 교통비도 빠집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전교조 진주지회의 담양 숲길 나들이

$
0
0

5월 11일, 전교조 진주지회 조합원 가족 60명 남짓의 담양 탐방을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기획하고 진행했습니다. 정헌민 지회장님이 믿고 맡겨주신 덕분입니다. 저희 해딴에가 잘했다고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어쨌든 기록으로 남겨 놓습니다.

 

1. 숲의 미덕을 일러주는 교과서 같은 고장, 담양

 

전라도 담양은 숲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복 받은 고을입니다. 1970년대 도로를 따라 들이세웠던 메타세쿼이아가 가로수 숲길로 남았습니다. 일부는 아스팔트를 아예 들어내고 사람이 걸어서만 누릴 수 있도록 바꿔놓았습니다.(자전거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장승들.

조선 말기 만들어진 관방제림(官防堤林)도 있습니다. 잎이 넓은 큰키나무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담양 사람들은 청춘남녀 시절 누구나 여기서 그럴 듯한 사랑 얘기를 하나씩은 품었음직한 숲입니다. 고장 사람들과 오랜 시절 함께해 온 숲입니다.

 

게다가 예전부터 대나무로 이름난 이 고장은 2003년 들어 야산 하나를 통째로 대숲으로 꾸몄습니다. 죽녹원(竹綠園)입니다. 누구든지 여기 들어가면 대숲이 어느 정도까지 멋들어질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담양은 정자로도 이름나 있지만, 저는 이런 숲들이 더 좋습니다. 이런 숲들을 보고 즐기고 누리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서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잘은 몰라도, 담양에서 이런 숲 덕분에 이뤄지는 소득 창출이 다른 무엇보다 많을 것입니다. 잘 키운 숲 하나 열 공장 안 부럽다, 입니다.

 

2. 운수대통마을 : 쥘부채 만들기와 마을 자연밥상

 

일행의 담양 탐방은 운수대통 마을에서 시작했습니다.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입니다. 10시 30분 즈음 가닿아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은 다음 먼저 쥘부채 만들기를 했습니다.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체험장에 모인 전교조 진주지회 조합원 가족들.

 

부채살에다 그에 맞게 오린 종이를 하나하나 붙이는 작업이 그랬습니다. 앞에 놓인 나무토막 위에 먼저 풀을 칠하고 거기에 가장 바깥쪽 두꺼운 부채살을 두드려 풀을 칠한 다음 종이를 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이어서 바로 옆 부채살에다가 똑같은 방식으로 풀칠을 하고는 종이를 다시 붙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붙인 다음에는 조금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준비해 놓은 먹과 붓으로 자기가 바라는 글이나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끝까지 다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했고, 아이들은 논두렁을 타거나 개울에 들어가 다슬기를 잡았습니다.

 

 

 

 

 

마치고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대통마을 할머니들이 마련해 준 밥과 반찬이었습니다. 싱싱한 상추가 쌈으로 나왔습니다. 더불어 마을에서 기른 콩으로 만든 쌈장과 여러 가지 나물도 나왔습니다. 장에 가서 사와 요리했음이 분명한 돼지고기도 나왔습니다.

 

저는 쥘부채 만들기 체험에 신경쓰느라 늦게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맛나게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어서 사진찍는 일을 놓쳐 버렸습니다. 풋고추는 아주 싱싱하고 탱글탱글했을 뿐만 아니라 톡 쏘는 매운 맛이 독특했습니다.

 

 

3. 걸어다니도록만 하는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

 

이어지는 여정은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입니다. 앞에 말씀 드린대로, 아스팔트 바닥을 들어내고 사람이 걸어서만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거리입니다. 도착한 오후 1시 즈음에는 전혀 붐비지 않았는데, 나중에 2시 30분 정도가 되니까 넘칠 지경이 돼 있었습니다.

 

봄을 맞은 메타세쿼이아는 연초록을 이파리를 내어뿜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에 이 길은 더욱 무성해진 잎으로 뒤덮여 아래로는 햇살이 조금밖에 들지 않아 어둑어둑할 지경입니다. 아직은 봄이라 햇살이 좋았고요, 그늘도 짙지 않고 밝은 편이어서 여름과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길가에 보리가 심겨 있습니다.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너르게 나 있는 찻길을 가로지르면 관방제림이 이어집니다. 관방제림은 조선 말기 담양 고을 수령들이 영산강 홍수를 막으려고 쌓은 제방 위에다가 심었던 나무들로 이뤄진 숲입니다.

 

4. 자전거나 수레도 탈 수 있는 관방제림

 

모두 잎 넓은 나무들인데, 그러다 보니 잎이 가느다란 메타세쿼이아보다 그늘이 훨씬 짙습니다. 햇살이 그대로 쏟아지는 바깥은 눈이 부시게 환하지만 안쪽 그늘 있는데는 적당하게 어둑어둑합니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여러 모습으로 노닙니다.

 

관방제림 들머리.

 

닭 쫓던 개와 지붕에 올라간 닭. 관련 설화가 여기 담양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긴의자 위에다 저렇게 대로 지붕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놀기 좋고 시원하고 상큼하며 햇살도 그늘도 좋다는 점은 앞서 걸은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전거나 발로 움직이는 수레를 탈 수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다만 걸어다니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게 자전거길이 따로 있습니다.

 

부부나 연인은 2인용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아들딸을 데려온 어른들은 4인용 자전거나 수레를 타고 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놀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가장 좋은 즐기는 방법은 가다 쉬다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에는 생활이 없지만 관방제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방제림은 바로 옆에 마을이 있기도 하거니와 주민들 삶이 여기 있는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관광객을 위해 부러 만든 의자도 있지만 동네에서 쓰는 평상도 나와 있습니다.

 

관광객이 다리품을 쉬기도 하지만 여기 주민이 오토바이로 물건 배달하러 가다 지친 몸을 쉬기도 합니다. 관광객들 웃음소리도 차고 넘치지만 동네 어르신들 바둑돌 내려놓는 소리나 장기알 두드리는 소리, 심지어는 동네 할마시들 고스톱 치고 화투짝 던지면서 내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런 뚝길을 어떤 아저씨가 어린아이를 안고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 끌면서 지나갑니다. 그런 앞으로 외지에서 왔음이 분명한 청춘남녀가 어깨동무를 하고 걷습니다. 물론 이렇다고 해서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이 관방제림보다 나쁘다거나 덜 좋다는 전혀 얘기는 아닙니다.

 

5. 새로 만든 죽녹원과 국수거리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 2km, 관방제림 2km 해서 모두 4km 정도를 걷고 나면 다리가 나옵니다. 담양향교가 있는 데입니다. 우리 목적은 향교가 아닙니다. 죽녹원입니다. 다리를 건너고 도로를 건너면 나옵니다. 죽녹원 있는 데가 원래는 대밭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저 그런 야산이었는데, 새롭게 대숲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담양에 대밭이 많고 널리 이름이 알려진 정자 둘레에도 대숲이 있겠지만 담양 대나무가 대단함을 일러주는 대중적 지표로는 이만한 데가 없지 싶습니다.

 

봄철이나 여름철 햇볕이 성할 때 여기에 들면 댓잎 사이로 햇살이 잘게 쪼개져 흩어져 쏟아져 내려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햇살도 쪼개지며 함께 흔들립니다. 대숲 저 너머가 환하게 들여다보일 때도 있는데요, 저쪽은 아무래도 너머 멀리 떨어져 있어 영영 가닿지 못할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죽녹원에는 대나무로 만든 여러 물건들을 전시 판매하는 데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죽물(竹物)로 이름이 높은 담양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갖은 죽물이 다 나와 있는데요, 인간문화재 장인들이 만든 녀석은 200만원 300만원도 더 합니다. 물론 값싼 죽물도 많이 있습니다.

 

요즘 시중에 나도는 죽물은 대부분 중국이나 베트남 대나무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죽물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담양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행 가운데는 여기서 부채나 죽비 같은 것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죽녹원 맞은편, 그러니까 관방제림이 끝나는 자리에 국수거리가 있습니다. 맛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담양 명물입니다. 국수 한 줄기 먹어도 좋겠고, 갖은 약재를 넣어 삶은 달걀(세 개 1000원)을 맛보셔도 좋겠습니다. 파전 따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 넘기는 재미도 쏠쏠할 것입니다.

 

6. 담양 탐방 진행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여정이 끝났습니다. 오후 4시 즈음 진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몇몇 아쉬움이 남습니다. 쥘부채 만들기를 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것 말고 좀 손쉬운 체험거리도 더불어 준비했으면 좋았겠습니다. 그냥 종이를 펴서 앞뒤로 붙이기만 하면 되는 둥근 부채를 만든다든지…….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관방제림~죽녹원을 줄이어 걷는 과정에서는, 해딴에의 진행에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관방제림에서 죽녹원으로 발걸음이 이어지도록 안내하는 흐름이 부분적으로 매끄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마을에서 장만해 내놓는 ‘자연밥상’ 개념으로 마련한 점심은 아주 좋았습니다. 도시에 사는 보통 사람들 밥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멀겋고 심심하게 내놓은 된장국은 색다르기까지 했습니다. 쌈장도 대부분이 좋게 평가했습니다.

 

실수하거나 잘못한 대목은 당연히 고쳐야겠다고, 체험거리를 물색하고 골라잡는 것도 더욱 신중하게 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잘 놀아야 잘 산다’는 저희 기치에 걸맞게, 더욱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세심하게 살피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민간인학살 구술증언록을 공개합니다

$
0
0

얼마 전 한 연극인으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한 이 분은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증언을 찾고 있다고 했다. 9월에 올릴 연극이 '민간인학살'에 관한 공동창작 작품이라고 했다. 아래는 메일 중 일부다.


"제가 찾고 있는 자료는 민간인 학살 유언자들의 증언들입니다.


지역별로 유족증언대회들이 열렸던걸로 압니다 ..경남지역도 유족증언대회가 있었던걸로 아는데 혹시 김기자님이 가지고 있으신 자료중에 증언대회 영상자료나 피해자 분들 인터뷰 자료가 있으신가요?..


혹시라도 제가 찾는 자료가 없으시다면 제가 그런 자료들을 찾을수 방법이 있을까요..?


왜 굳이 인터뷰 자료가 있어야 하느냐?그런 기록들을 남긴 글들도 있지 않느냐,그리고 유족분들을 직접찾아 가서 인터뷰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의문을 가지실 것 같습니다..


이유는 그분들의 모습을 재연하기 위해서 입니다...


글로 읽고 저희가 판단하고 상상하는 모습이 아닌 그분들의 진정한 말과 회상을 그대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 입니다.


유족분들을 몇몇찾아 뵙기도 했지만..이미 오랜 시간 많은 인터뷰에 그리고 과거의 상처들을 더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신분들, 그리고 이미 역사에 묻혀 돌아가신 분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겪은 분들은 이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네요...


방속국에서 만든 많은 영상 자료들이 있지만 모두 편집이 되어 나오니 사실상 그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가 없어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던 중 김 기자님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렇게 연락을 해봅니다."


메일을 받은 후, 답변을 통해 취재한 지 워낙 오래되어 증언 자료들이 모두 유실되고 남아 있는 게 없다고 전했다. 그러고 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리 저리 파일을 뒤져보니 2008년 함양군에서 구술증언을 받은 자료들이 다행히 남아 있었다. 음성파일도 일부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컴퓨터 하드디스크에만 보관하고 있다간 언제 또 유실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은 김에 한 명씩 포스팅을 해두려 한다. 이 중요한 기록을 그동안 왜 갖고만 있었나 모르겠다.


구술증언록 전체는 파일 용량이 36메가바이트에 달했다. 그래서 티스토리에서 첨부가 되지 않는다. 결국은 한 명씩 나눠 올릴 수밖에 없겠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함양 치라골 민간인학살 구술증언록

$
0
0

성명 임이택

생년월일 1938년 9월 15일

주소 경남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내산마을

조사 일시 및 시간 2008년 10월 2일 / 46분

주요 연보

 - 1938. 함양군 수동면 내산마을 출생

 - 2006~  함양군 수동면 치라골 양민학살 유족회장


◦ 구술자 : 임이택

◦ 면담자 : 김주완 공동연구원

◦ 면담주제 : 1949년 치라골 민간인학살 사건

◦ 면담일자 : 2008년 10월 2일

◦ 면담장소 : 함양군 수동면 죽산리 내산마을(치라골) 자택 아랫방



(면담 상황)


구술자 (자문사례비 영수증을 작성하며) 통장계좌번호는 또 봐야 알겠는데...다소 작고 말고 간에 돈이라쿠는 거는 참, 명목이 있어야 되는데, 무신 명목으로 날 주는지 모르겠지만, 계좌번호 적어드릴께요. 팔삼일공칠오...


면담자 제가 좀 여쭙겠습니다. 어르신 성함이 임이택 어르신이고요. 몇 년생이십니까?

구술자 38년생이요.


면담자 그러면 칠십하나.

구술자 예 칠십하나.


면담자 우리나이로 칠십하나가 되신다 그지예?

구술자 예.


면담자 그때 사십구년돕니까?

구술자 예 사십구년이제.


면담자 형님께서 돌아가신 게 도북마을보다 빠릅니까? 비슷합니까. 날짜가.

구술자 하루상관이요. 도북은 하루먼저 경찰에 잡혀갔고, 여기는 하루뒤에 잡혀갔고, 죽는 것도 도북은 하루 먼저 죽고, 여기 사람은 하루 뒤에 죽고. 장소도 그때는 한 장소요, 구딩이만 아래 위로 틀리제, 한 장소고.


면담자 도북은 그 때 이발사하던 정주상이란 사람이 그래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 동네는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치라골은


구술자 대처, 그 당시는요. 참 주사들은 잘 모를끼요마는, 해방 직후 이 골짝 토지가 전부 다 부자 몇몇 사람 토지요. 그래갖고 전부 다 농사 지어가지고 지주들, 논 주인 말이요. 그때 도지가 한마지기에 보통 한 섬이라. 그럼 수확은 얼마나 나느냐. 한 섬 쪼금 더나고, 두 섬 난다쿠모는 농사 참 잘 지은 농사고, 서른말 나모든 보통농산데, 한섬 주고나면 한 열말 얻어먹는기요. 너머논을 갖다가...그것도 머슴들이 지어. 그리 살다가 해방이 척 되고 나서 어쩌는 게 아니라, 공산주의, 있는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같이 분배한다 그리됐었소. 이북의 정치가. 그런께능 전부다 그 정치가 좋다 이리된기요. 군 치고도 부자집 그저 한 몇몇 사람 제외하고는 전부다 그 정치가 좋다. 이래가지고 여기 저저 함양은 상림, 거기 전부다 깃발 들고 가고 만세 부르고 뭐 이래샀소. 그때 그러나 그 당시에는 경찰이고 누구간에 간섭을 안했소. 우수수하게 해방직후 이래산께 이기 좋은가 저게 좋은가 경찰이든 누가 알끼요. 그러다가 차차 세월이 가니께능 우짜능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제. 대한민국을 미국이 잡고 있고, 이북을 소련이 잡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기요. 그래가지고 통일하겠다고 서로가 이래 샀고, 되나요? 뿌리를 벌써 미소가 딱 잡고 있는데? 그렁께능 어쩌는 게 아니라, 그 때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 뭐 초대국회 출마되고, 이래갖고는 안되겠다, 질서를 잡아야겠다고 해가지고, 저 좌익에, 이북에 머리를 쓰는 사람 전부 다 체포를 해라 이렇게 된기요. 잡아들이라 지서로. 잡아들일께능, 사실상 그 사람들이요, 무신 죄가 있나요. 이기 좋다 저기 좋다, 아니 사실상은 그리 못먹고, 있는 사람의 종질하다가 농사 지어갖고 거기 바치고 하다가, 아니 공평하게 갈라먹자는 그 정치가 좋다 카는데 누가 반대할끼요 말이제. 그런께는 이게 안되겠다 이래 가지고 좌익에 머리 쓴 사람 체포를 했소. 경찰에 잡아들였어. 잡아들이니 어쩌는게 아니라, 그때 머리 박힌 사람은 산으로 튀었소. 안 잡혀 갈라꼬. 그게 빨갱이요 말하자면. 그게 빨갱이라.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나가 가지고는,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요. 내나 먼데 사람도 아니라 지방 사람이라, 지방 몇몇 사람이라. 와가지고 밥 좀 도라. 내나 아는 사람들이요. 밥 좀 도라 이러카먼 밥 안주고 어쩌요. 그때는 인제 밥을 안주게 되면, 그 사람들 말 안듣게 되면 반동자다 이래가지고, 반대에 움직인 사람이다, 반동자다 이래가지고, 그 사람에겐 인자 행패를 주는기요. 그런께는 밥 도라 카는데, 뻔히 아는 사람이, 밥을 주는기요. 밥 주고 나면은, 그 차차 법이 좀 조아드는기요. 지서에서 밥을 주면은 지서에 와가지고, 보고를 해라, 보고를 안하면은 또 보고를 안한 법으로 걸리는기라. 그러니 보고를 하는기요. 보고를 하면은, 지서에 가면 뒈지게 맞는기요. 그마. 밥은 몇 번 줬느냐, 빨갱이 심부름 몇 번 했느냐, 두들겨패면, 매에 장사 없다고, 그 사람들에게 밥을 한 번 줘도 열 번 줬지 이러쿠먼 아이고 줬지요. 매에 못이기니 어쩨야. 그리 하는 세월이 한 몇 개월 흘렀어요. 여기 사람들이 처음에 가서 그리 맞고 와가지고, 인제 한 며칠 고생하다 살아나고, 또 한 일 이개월 흘렀던가 몰라, 또 한 사람이, 그 사람들이 밥을 해달라 해서 주고, 또 지서에 가서 보고를 하는기요. 또 두들겨 팬거야. 밥은 몇 번 해줬느냐, 양식은 얼마나 줬느냐, 그 사람들 심부름 얼마나 했느냐, 두들겨 패니까, 그 당시에는 몇 번 했지 하면 고마 예예, 저거들 말 하는대로 예예 하는거여. 두들겨 맞으니까. 두 번째 갈 때 지서에서 너거 동네 젊은 사람들이 30대 미만이 몇이나 되노. 그래 몇 명 될끼다 하니 이름을 다 적고 실컷 두들겨 패고 보내 준거요. 한 세 번째이거거마. 세 번째, 그때 날이 비음하게 샜어 음력 윤칠월이니까, 아 동네를 순경들하고, 그때 강청단이라고 있었어, 민간인이 말하자면 관에, 말하자면 협력 주동자라 할까, 뭐 움직이는데 협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강청단이라고.



면담자 대한청년단 말하는 겁니까?

구술자 하모. 하모. 그 사람들하고 와 가지고 동네를 포위해가지고, 우리는 그때 어렸으니까, 눈비비고 일어나니까 총소리가 한 서너번 나더니 호각소리가 막 여기저기 나고 그래. 그러다가 동민을, 젊은 사람을 싹 집합시키는거요. 집합시켜가지고는 호명을 불러요. 호명 불러가지고는 착착 엮는거요.


면담자 엮었다는 건 손을 묶었다는 말입니까.

구술자 그렇제. 그때는 포승줄도, 포승줄이 그리 있는가. 한 사람이 그 가운데서 자기 처족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가고 없었었소. 없으니 그 사람 부인을 데리고 간거요. 그 사람 대신. 그래 가가지고 참, 오래도 안걸렸어. 한 삼일만에 그만 전부 다 죽었어.


면담자 그러니까 음력 윤칠월 이십칠일 잡혀가가지고 이십구일 돌아가신 겁니까?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그럼 그 때 마을 총 가구수가 몇 가구나 되었습니까?

구술자 이 동네 하고, 여기 안치라고일라고 있는데, 두 동리가 아마 30호? 한 30호 이상 됐을거요.


면담자 그러니까 바깥치라골하고 안치라골 하고 다 합쳐서 30호 정도. 30호 중에서 열 여덟가구가 다 잡혀갔단 말입니까?

구술자 죽은 사람은 십칠명이제. 잡혀간 사람은 열여덟이 잡혀갔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나왔어요. 한 사람이 살아나왔는데, 그 사람이 경호생인데, 올해 칠십아홉인가.


면담자 지금 살아계십니까?

구술자 아, 한 칠팔년 전에 죽었고마. 칠팔년 전 죽었는데. 그 분이 평소에는 자기가 같이 갔다가 자기 혼자 살아나왔으니 좀 그런 얘기를 안하는데, 술한 잔 먹고 나면 그런 얘기를 하는거요. 우리들한테. 그 당시에 그리했다고, 거 죽은, 잡혀간 이야기, 고문 받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 저런 이야길 하는거요.


면담자 그 분 이름이 뭐라고요?

구술자 임기택이.


면담자 임기택?

구술자 네. 근데 전번에.


면담자 그런데 그 때 잡혀간 명목이 빨치산들에게 밥 주고 협력을 했다 그 명목이네요.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그래가지고 일차로 어디로 끌려갔습니까. 경찰서로, 아니면 군 부대로.

구술자 처음에 잡아가기는 지서에서 잡아갔고, 지서에서 잡아갖고 경찰서로 넘기고,


면담자 함양경찰서로?

구술자 응, 경찰서에서 두들겨가지고 빨갱이라는 죄목에다가 군인에게 넘겨준거요.


면담자 아, 거기서 고문을 해가지고 자백을 받아서 군인에게 넘겨준거네요.

구술자 하모 하모, 죽이기는 군인이 죽였고.


면담자 군대는 어느 소속인줄 혹시 아십니까?

구술자 남원, 소속이 남원이라고 해. 남원인데 뒤에 들어보니까 34연대니 뭐니 하던데 그게 몇 연댄지 나도 모르고. 사실상.


면담자 그래가지고 윤칠월 29일날 죽었네요. 돌아가신 장소는 어딘지 아십니까?

구술자 거기 저 함양 이인당?


면담자 쓰레기매립장 있는데.

구술자 하모, 거기 보면 도북사람하고 치라골 사람하고 죽은 사람 비가 길가에 서 있어.


면담자 네, 봤습니다.

구술자 거기 도북사람하고 치라골 사람하고 같이 있소.


면담자 딱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그 인근이다 그죠?

구술자 그 당시 이야기 듣기로 아래 위의 구덩이로 그리 죽였다, 장소는 같은 장손데 구덩이만 틀린다.


면담자 17명이 어쨌든 그 한자리에서 당한거네요.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그 다음날 도북사람들 죽은 다음날. 죽인 군대도 똑 같은 군대고?

구술자 그렇지. 내나 남원의 그 군대지.


면담자 총살로?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그리고 나서 돌아가신 분들 시신은 언제 수습을 했습니까? 수습을 못했습니까?

구술자 그 당시는요. 고마 아니, 우리는 어렸었고, 부모네들이 자식 죽은 데 거기 가보자 해서 가다가 거기, 그것도 경찰서에 어찌 그리 신고가 빠른고, 그래 가지고 여기 뒤지면 전부 다 죽일 거니 가라 이래갖고 꼼짝도.


면담자 접근을 못하게 했네요? 경찰이?

구술자 하모, 그렇게 안했으면 시신이라도 찾제. 그 당시는 뭐. 어찌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빨갱이를 죽였다 이리 된거라. 그러니까 죄인, 말하자면 반역자 아닌가배? 빨갱이를 죽였응께. 그래가지고 시신 찾고 그런 생각도 하지도 못했고.


면담자 그러면 열 일곱명 돌아가신 분들 성함은 다 있습니까?

구술자 있제.


면담자 돌아가신 분들 유족들이 모여서 유족회라든지 그런 걸 구성한 건 있습니까?

구술자 했제. 한 삼 년 넘게 됐나?


면담자 회장은 누가 맡았습니까?

구술자 회장은 처음에 날보고 맡으라 해서 안할란다 했는데, 명칭은 날 넣어놓고, 내 당질이 임채길이라고 저 산청 살고 있거마는. 네가 해라. 실제 일은 내 당질이 하고 있지.


면담자 이름이?

구술자 임채길이라고, 산청 택시회사도 하고 있고 거기 산청에 잔잔한 가옥들도 몇 개 갖고 있거마능.


면담자 돌아가신 형은 성함이?

구술자 임한택이.


면담자 그 당시 몇 살이었습니까?

구술자 그 당시에 스물 두 살.


면담자 그 당시에 집에 어른은 안계셨습니까? 부친은?

구술자 왜 없어. 우리 부친, 조부님 다 계셨지.


면담자 그런데 임한택 어른은 당시 결혼한 상태였습니까?

구술자 결혼해가지고 한 2년 됐던가.


면담자 재금이 난 상태였네요?

구술자 아니지, 한 집에 같이 살았지.


면담자 그런데 왜 집에 어른이 안 잡혀가시고 형이 잡혀갔습니까?

구술자 그 때는 죽은 사람이 다 스물 두 살 세 살 그런 정도지 나이많은 사람은 (없었지) 삼십대 미만으로 아까 내가 이야기한 것이 두 번째로 잡혀갈 때 경찰서에서 삼십대 미만이 몇이나 있느냐, 그때 명단을 전부 누구누구 몇 살 먹은 거까지, 그래갖고 잡아간기라.


면담자 혹시 그 당시 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중에서 이 동네 출신도 있었습니까?

구술자 없었지.


면담자 도북 사람들은 있었다고 하던데.

구술자 하모, 도북은 있었제. 도북도 있고 저기 가성도 있고, 그렁께 내나 다 이 부근 사람들이라.


면담자 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의 숫자가 얼마나 됐는지는 잘 모르십니까?

구술자 모르제.


면담자 그 때 군대가 와서 빨치산들하고 전투도 하고 했습니까?

구술자 아이가. 전투라니.


면담자 없었나요?

구술자 없었고.


면담자 그럼 애매하게 주민들만 희생을 당한거네요.

구술자 군인들은 어쩐게 아니라 경찰을 시켜서 하여튼 두들겨패서 빨갱이 심부름했다 동조자가 그거만 받으면 빨갱이로 그걸 갖다가 서류를 해가지고 군인에게 넘겨주면, 군인은 어쩌는게 아니라, 그건 내가 뒤에 소문을 들으니까 그랴. 이 이박사에게 보고를 하기를 사실상 양민 죽이는데, 오늘 빨갱이 몇 몇 잡았다 이리 보고를 한다네.


면담자 전과로 보고를 하는 거군요.

구술자 그렇지. 빨갱이 몇 명 잡았다 이리 보고를 한다는거야. 그러면은 그 성과가 자꾸 올라간다는거여. 아 이놈들이 그래서 그렇게 했는가, 사실상은요, 내가 전번에도 그런 얘기 했소만은 진실위원단인가 그 사람한테, 광주사태 난 것이 그 정권 잡기 위해서 났고, 사실상은 여기 해방직후 질서가 나라에 안 잡혀가지고 어수선할 때 죽은 사람들이 빨갱이 동조자가 이래갖고 죽였고, 그 뒤에는 이 보도연맹, 보도연맹 조직하기를 내나 정부에서 조직해가지고 그걸 놔두고 후퇴를 하면은 인민군에게 도움이 될거다 하는 거기서 다 죽였고, 말하자면 정부 질서를 잡는데 희생양이다. 앞서 빨갱이로 죽은 사람들 전부 다. 그 사람들이 왜 빨갱이. 무슨 죄고 말이제. 그런 걸 갖다 정부에서도 뻔히 알건데, 조사받고 지랄하고, 해줄 마음이 없으면 아예 치우제. 억시 그걸 가지고 팔자 고칠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의리가 있제, 그런 식으로 하면 감정이 더 생겨여. 차라리 양민회복을 해주고, 그러면 양민회복을 해주면 틀림없이 너 보상해내라 이렇게 할 것 아닙니까? 그럴때는 그 당시에 정부시책이 그랬었고, 좀 줄여서 이름이라도 걸어가지고 그러는게 낫제, 어째서 그 때 사람들이 죄가 있니 없니, 그런 멍청한 놈의 자슥들, 노무현이가 그 당시에 집권당에 숫자가 많고 적으나 그렇게 했으면 그때 해결을 했을낀데 집권당이 숫자가 적으니 그 때 해결을 못하고 어수선하게 있다가, 지금 이명박씨가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줄낀데, 그걸 갖다가 무슨 묻고 어쩌고 참 한심합니다. 내가.


면담자 그럼 지금 정부에 바라고 싶은 게 있다면 뭡니까?

구술자 아, 양민,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질서를 잡는데 희생양이라. 그런데 죽였으면 그 사람들 양민회복 시켜주고.


면담자 그러니까 죄없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 명예회복을 시켜주고?

구술자 그래 명예회복을 시켜주고, 그 뒤에 보상문제는 줘도 좋고 안줘도 좋은데, 그래도 안 주려고 하면 그것도 경우가 아니니 이름이라도 걸어주고 그렇제. 어째서.


면담자 이름이라도 걸어준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구술자 금액은 적더라도 다문 얼마라도.


면담자 상징적으로라도?

구술자 하모, 그런식으로 해야지, 어째서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 질서가 안잡히고 어수선할 때 희생양으로 죽인 사람들을 어째서 죄가 있니 없니, 이걸 묻고...


면담자 그 때 돌아가신 형은 자식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결혼하고 한 2년 됐으니 형님이 죽고나서든가 여식애가 하나 태어났어. 그런데 사람 죽이고 나서 어쩌는게 아니라 음력 윤칠월 이십구일날 죽였는데, 2일만인가 소개를 시켰어. 저기 큰동네로. 완전히 동네를 싹 다 비웠소.


면담자 어느동네로 갔습니까?

구술자 여 아랫 동네,. 교항 오산 이 아래동네. 전부 다 소개를 시키고 동네가 텅비었었소. 그러니 그거 뭐 사는 것도 아니고 아이고.(한숨)


면담자 그러면 남의 집에?

구술자 그렇제. 그 작은 방에, 참 아이고, 거기 참, 그래.(한숨)


면담자 그래갖고 한 몇 개월 정도 남의 동네에 살았습니까?

구술자 윤칠월에 소개해가지고 가을도 그 아래서 거두고, 그 이듬해 농사철 올라왔다가 농사지어가지고 또 소개를 시켰어. 그러니 참.(한숨)


면담자 그러면 남의 동네에서 6개월이 넘게 살았네요?

구술자 그렇제. 두 번 소개를 했으니.


면담자 혹시 그 당시 국군 말고 빨치산에게 피해를 당한 분은 이 동네에 없습니까?

구술자 빨치산에 피해당한 일은 없고, 사실상...사실상 거 빨치산 땜에 당한거지.


면담자 그 이후에 보도연맹으로 피해당한 사람은 없습니까?

구술자 젊은 사람 다 죽어버렸는데 보도연맹 할 사람이 누가 있소? 보도연맹 조직하기 적에 싹 다 죽어버렸는데 뭐.


면담자 그래서 지금 아직까지 열 일곱 분에 대한 명예회복도 안되고 있고.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그런데 도북은 시신이라도 수습해서 합장묘라도 만들어잖습니까?

구술자 그래서 우리도 시신을 찾아보자 이래서 한 번 갔었소. 가서 보니 거기 농지가 되어 있고, 그 주위에 정비손가 뭔가 있고, 통 모르겠어요. 근데 도북 사람 팠다는데, 거 아래 위에 있다고 해서 도북 사람 판 위에 보니, 개울인가 네모가, 위에 물 반듯하니 파가지고 확 패여나갔너니만.


면담자 결국 못찾았네요?

구술자 못찾았지.


면담자 형님 아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구술자 죽었제. 소개당해가지고 가을철에, 칠월에 그랬으니, 가을에 추수하러 와가지고 그 쪼끄만걸 눕혀놓고 옷가지 하나 덮어주고 나락을 베는거요. 거기 뙤악볕에 어쩌면...거 참. 그러니 감기가 든거요. 요즘은 의사에게 가고 하지만, 그때는...집이 참, 못죽어서 사는기라.


면담자 그러면 제사는 각자 지냅니까?

구술자 각자 지내지.


면담자 위령제는?

구술자 합동으로 묘도 못했고, 시신도 못찾겠고, 그래서 군수한테, 사실상 우리가 시신을 못찾으면 초혼장이라도 해서 묘지를 조성해야겠는데, 판에다 써서 하는 게 있거마는. 돈도 모아놓은 사람도 없고, 많이도 말고 한 오백만원만 보태달라 했는데, 군수 하는 말이 오백만원이 그리 큰돈도 아니고 보태줄 순 있는데, 그게 무슨 명분이 있어야 된대. 그걸 할려고 하면 군 사회과에 가서 이야길 해가지고 그것이 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해주겠다. 사회과에서 이야기해보니, 지금 정부에서 하고 있는데, 이게 양민회복이 되면 전부 다 될거니 걱정할 것 없다고...


면담자 그러니까 정부에 다 미뤄버리는 거네요.

구술자 그렇지. 시신만 나오면 기자들 소집해가지고 떠들썩하게 해볼테니 시신을 찾아라 하는데, 시신을 못찾고. 그런데 한 삼년 전 추석인데 비가 많이 와서 수해가 한 번 났었어. 그때 막 떴다는거야. 그 주위에 사람들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바가지라고 돌멩이로 패기도 하고, 떴는가 우리가 못찾았는지는 모르겠고....


면담자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북은 시신이라도 찾았는데.

구술자 지금 우리는 생각이 그렇소. 도북에 서른 둘인가 서인가 그런데, 라면 일곱박스라는데, 훼손이 좀 됐다 하더라도 사실상 일곱박스밖에 안되느냐 말이지, 그래서 우리는 도북사람들이야 그렇게 믿든가 말든가 우리뼈가 거기 묻혔다 이렇게 보요.


면담자 섞였을 수도 있겠죠.

구술자 아니 구덩이가 다르니. 그러니까 열일곱도 일곱박스는 더 됩니다. 시신을 담으면, 라면박스에 안접고 편 상태에서 일곱박스라고 하거든, 두구씩 들어가도 이칠이 십사, 한 열 네구. 그러면 우리는 생각이 이렇소. 아이구 뭐 저거 시신이건 우리 시신이건, 우리 시신이 거기 가서 대접 잘 받으면 다행이제 그런 생각만 하고, 일부는 그걸 DNA검사, 그걸 해보자는데 그러면 또 돈 들어가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또 원수지간 되고. 그럴 필요 있나. 어쨌든 안 뜨고 거기 묻혔으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면담자 그러면 어쨌든 이 동네선 열 일곱집의 제삿날이 같겠네요.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그 열 일곱 집이 다 이 동네 살고 있습니까?

구술자 나갔지.


면담자 떠난 사람들이 많네요?

구술자 많지.


면담자 그럼 몇 집이 여기 살고 있습니까?

구술자 한 대여섯집 되나? 다섯집인가배.


면담자 다른 집은 다 객지로 나갔네요?

구술자 그러니 어지간하면 자식 살던 동네 그만 눈에 좀 안보는 게 낫다. 그래가지고 막 뜬기요.


면담자 혹시 그 일로 죄인취급 당해 자식들 출세에 피해 입은 게 있습니까?

구술담자: 피해 입을 게 없지. 입을 게 없는 게 그 당시는 집이 벌써 망했거든. 망할 대로 망했지. 먹고 살기에 바쁘고, 공부라는 건 생각도 못했어. 그래서 뭔가 좀 고위직에 앉아야 피해를 입든지 말든지 하지. 밥먹고 살기 위해 허덕이는데 거기 뭔 피해를 줄거요. 그 자녀들이 다 먹고 사는데 근근히 그리 지냈지, 공부해갖고 무신, 그런 거 어찌 생각하요. 그런 건 없었지.


면담자 혹시 더 하고픈 말은.

구술자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사실상 우리가 여기서 그래봐야 구들방에 앉아서 저 정부에 눈흘기는거요. 아무 소용없는거요. 소용없고. 그나저나 내가 생각하는거는, 진실조사 뭐 위원단? 그분들 활동비가 있는 모양인데, 활동비가 뭐 줄어들었단 말도 있더만, 사실상 그 활동비 그거 보고 다닐려고 해서는 이거 규명 못합니다. 그 뭐 의지가 좀 있어갖고 그리 해야 하지, 그 뭐 요새 활동비 줄었지, 나온다고 해서 활동비 보탤 사람 없지. 그래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아까 임기택이 살아나왔다고 했는데, 그분이 살아나온 이야기를 저번에 진실규명 위원단인가 와서 그 사람에게 그런 이야길 했어요. 그 사람이 잡혀가가지고 16명은 죽이려고 차에 태우고, 1명은 사는 길로 나왔다. 그 사람을 누가 살렸느냐 묻더구만. 그래서 임주례라고 당시 형사대장이라 카는데, 우리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형사대장이라 하더라. 그러면은 그 분의 가족이 있느냐. 형사대장이라는 사람. 가족도 없고 자기 부인은 있는데를 아는데, 그런데 부인도 형사대장과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도중에 헤어졌다더라. 그런데 살고 있는 데를 안다. 그러니 그러면 그걸 알려달라 하더라, 자기에게. 자기들이 열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이것이 증거로 중요하니까. 말하자면 경찰서까지 가서 잡혀갔다는 것은 확실히 알 것 아니냐. 이 사람이 거기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확실한 것 아니냐. 그래서 전화번호랑 알아서 알려드리죠 하고 그 이일날까지 조사를 받았어. 살려줬다는 임주례의 안식구가 내나 이 동네 사람이라. 이 동네에 자기 친정조카가 아직 있어. 그 조카에게 물어 주소를 알아서 그 사람을, 그 부인을 데리고 조사하는 그분에게까지 데려와서 사실을 물어봐야겠다고 하여. 밥을 먹고 임주례 안식구 사는데 찾아간다고 차를 타고 가는데, 임채길이라는 내 당질이 진실위원단인가 이 뭐라는 (이원균?) 그 사람이 뭐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데리고 오면 데려오는 도중에 그에게 돈을 주고 유리한 쪽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법에서 인정이 안된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타고가다가 나는 내렸다. 주소하고 그거는 다 가르쳐 줬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 찾아갔는지 안갔는지 궁금한거야. 명함을 하나 받았는데, 그게 궁금해.


면담자 열 일곱 명 중에서도 한 명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겁니까?

구술자 아니 열 여덟명 중에서.


면담자 그러면 살아난 사람이 임기택 어른을 살려준 사람이 그 형사대장이란 말입니까?

구술자 그렇지.


면담자 그 형사대장은 임기택씨를 어떻게 알고 풀어준 겁니까? 돈을 쓴 겁니까?

구술자 뭘 돈은 썼는지 모르겠고, 임기택하고 형사대장하고는 맺어진 처남 남매간이라. 임주례의 안식구라는 사람이 여기 살았는데, 임기택하고 임주례 안식구와 동갑이라. 임기택이라는 사람이 낳고 나서 자기 엄마가 젖이 없어. 그래서 임주례 안식구와 젖을 같이 먹고 큰 거여.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은인이지. 그래서 처남 남매간으로 맺어진 인연인데.


면담자 그러니까 형사대장은 죽었고, 그 부인은 살아있는데...

구술자 그렇지, 그런데, 이 증거라고 한 그 분이 그 부인에게 안 찾아간 거요. 이게 중요한 증거다 이렇게 해놓고, 그런 게 있으면 우리가 직접 찾아간다 해놓고 안 찾아간 거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 활동비만 받아먹고 다닐라 해서는 안 된다 그말이요. 그런 게 있으면 자기가 직접 가서 알아보고 해야지, 그래가지고 되느냐 이 소리요. 그런 참, 일을 맡았으면 정직하게 밝혀봐야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지.


면담자 그 부인이라는 분이 함양에 있습니까.

구술자 저 남원에 있지.


면담자 아마 가보려 했는데 연락이 안 됐든지 그러지 않았을까요?

구술자 연락처는 다 있지. 저녁에 친정 조카라는 사람과 나, 내 당질과 전화를 했는데, 우리가 아니고 친정 조카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내가 뭐 아무것도 모른다. 그 당시에 죽어나가는 마당에 당주양반이, 임기택이 어른 택호가 당주양반이라. 당주양반이 이야기해서 그 때 빼줬다 하더라. 그래 그거면 증거가 되거든? 친정 조카가 그러는거야. 당주양반이 이야기해서 빼줬다 하네. 그게 증거지.


면담자 이번에 우리 조사원이 왔을 때는 가르쳐 줬습니까. 김준순씨.

구술자 그 얘기까진 안했는가 모르겠구만.


면담자 그러면 그 전화번호를 아직 갖고 있습니까?

구술자 나는 안 가지고 있어도, 내 당질은 가지고 있을 꺼구만.

(※추후 확인 결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임주례의 부인 증언을 확보했다고 함)

(인터뷰 종료)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여덟 살 때 일가족이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
0
0

◦ 구술자 : 권순정

 1942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출생

 1953년~ 함양읍 기동마을로 이사 후 농사

◦ 면담자 : 김주완 연구원

◦ 면담주제 : 좌익 아버지로 인한 할아버지, 어머니, 누나, 여동생  학살사건

◦ 면담일자 : 2008년 11월 1일

◦ 면담장소 : 함양군 교산리


(면담 상황)

면담자 성함을 한자로 하나 좀 적어주십시오.
(잠시중단)

면담자 그 때 그럼 어르신이 42년생이십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그 때 오십년이었지요? 희생을 당한 게?
구술자 예.

면담자 그러니까 우리나이로 여덟 살 때?
구술자 예.

면담자 그럼 그때 아버지는 연세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구술자 연세는 잘 모르겠는데요. 

면담자 아버지는 성함이?
구술자 아버지는 권창현.



면담자 어머니는?
구술자 한선이.

면담자 그러고 할아버지는요?
구술자 권재성.

면담자 누나는요?
구술자 권순희.

면담자 권순희? 권순이가 아니고 희다 그죠? 형님은요?
구술자 권순봉.

면담자 여동생은?
구술자 여동생은 이름을 몰라요. 젖먹이여서 이름도 어떻게 썼는지.

면담자 젖먹이였습니까? 그럼 한두 살 밖에 안됐습니까?
구술자 네. 이름은 있었을 텐데 내가 몰라요.

면담자 호적에도 안 실려 있던가요? 그 이후에?
구술자 안 실렸지.

면담자 원래 그럼 집에 조부님이나 부친이 그 당시에 이집에 살았습니까?
구술자 아니죠.

면담자 아닙니까?
구술자 교산리라카는데.

면담자 교산리?
구술자 네.

면담자 교산리가 읍입니까?
구술자 네. 함양읍.

면담자 대대로 거기서 살아오셨습니까?
구술자 네. 거기는 종가집이고.

면담자 어디 권 씨입니까?
구술자 안동.

면담자 대대로 거기서 농사지으셨습니까?
구술자 네. 농사

면담자 농사는 좀 많으셨는가요?
구술자 아뇨. 별 많지는 않았지.

면담자 근데, 어떤 일로 그렇게 그런 희생을 당하셨습니까?
구술자 아버지가 좌익에 가담하셔서.

면담자 권창현?
구술자 네. 권창현.

면담자 구체적인 내용을 아십니까?
구술자 모르죠.

면담자 좌익에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구술자 모르죠.(여덟 살 먹으니 뭘 알겠어.)

면담자 어렴풋이 뒤에 전해들은 이야기가 그렇습니까?
구술자 아버지가 피해 다니고 한 건 알죠.

면담자 피해 다니고 한 건 기억나시고요..
구술자 네.

면담자 그런데 그래도 그 당시 나이로서는 아버지가 무슨 좌익에 가담해서 그런지 잘 알기 힘드실 것 아닙니까?
구술자 그때, 경찰들이 잡으려고, 아버지를 잡으려고 한 것 그런 건 알지.

면담자 그 뒤에 나중에 희생당하고 나신 뒤에?
구술자 아버지 어데서 희생당하셨는지 모릅니다.

면담자 그것도 모릅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아버지는 쫓겨 다니시다가 돌아가셨는지, 그냥 행방불명인지 모르시는 거네요? 
구술자 예. (어머니 산소에다 나무로 모형 만들어 같이 무덤 썼지.) 

면담자 그럼 6․25 터지고 나서. 
구술자 아버지는 6․25 사변 전에 돌아가셨지.

면담자 전에 돌아가셨습니까?
구술자 예. 45년에 해방 안 됐습니까. 해방되고 나서 좌익우익이 안 생겼어요? 근데 아버지는 6․25사변 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육이오 사변전이라. 

면담자 그러면 돌아가셨는지 안 돌아가셨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구술자 근데 나가 백 살이 넘었는데.

면담자 아니, 그러니까 육이오 전에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그 시기에 살아계셨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구술자 그렇죠.

면담자 어쨌든 육이오 전에 경찰에 쫓겨서 집을 나가시고 안계셨네요? 육이오 전부터?
구술자 네.

면담자 거기, 언제쯤 아버지가 쫓겨 나가신 겁니까? 그거는 기억나십니까?
구술자 기억을 못하죠.

면담자 어쨌든 육이오 전부터 아버지는 경찰에 쫓겨 다니시면서 집에는 못 들어 왔다? 그러고 그 이후에 소식도 없고, 어떻게 된 지도 모른다? 그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시네요.
구술자 나머지 가족들은 아버지 때문에 다 돌아가시고.

면담자 나머지 가족들은 어떻게 그렇게 되신 겁니까?
구술자 아버지 때문에.

면담자 언제 어떻게 되신 겁니까?
구술자 요. 본티라고 경찰서 끌려가 있다가 다 끌려가 가지고 학살 당하셨지.

면담자 그때가 언제 쯤이었습니까?
구술자 육이오사변 직전인가 나고 나선지 그건 모르겠는데요. 제삿날은, 사망신고는 오십년도라 되어 있어요.

면담자 예. 그게 어디 제적부에 그리 되어있다는 말입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사망일시가 오십 년도로 되어 있다고요?
구술자 예.

면담자 오십년 몇 월 몇 일 이런 거는 없고요?
구술자 유월 칠일 날, 음력 유월 칠일 날, 그거는 확실하고 날짜가.

면담자 사망일자가 그렇게 되어있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그때 그럼 경찰서에 잡혀가가지고.
구술자 경찰서에 있다가 끌려가가지고 한 구덩이에서 여러 수십 명이 총살을 당한거지.

면담자 본티라면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구술자 수동 밑에 본통이라고.

면담자 거기 지금도 수동면 소속입니까? 본동이라고 하죠?
구술자 본통.

면담자 거기가 무슨 산골짜기입니까?
구술자 저도 몰라요. 안 가봤어.

면담자 거기에 유월 칠일 날, 음력 유월 칠일 날 끌려가가지고 총살을 당하셨다?
구술자 예. 그날 돌아가신 게 확실하지. 제사를 그날 모시는데. 유월 초여샛 날.

면담자 그때 왜 끌려가셨죠?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찾아내라 이래가지고 끌려가셨습니까? 
구술자 그때, 그렇게 돼서 가족 다 끌고 갔지 않습니까?

면담자 그때 보도연맹 이런 것도 아니고 무조건?
구술자 아버지 때문에 다 끌려 간 거라.

면담자 보통 그런 식으로 하더라도 예를 들어서 조부님이나 어머니 같으면 그럴 수 있는데, 아직 어린 아이들까지 끌고 갔다는 게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구술자 그렁게 너무 억울한 거지.

면담자 그때 형님은 몇 살이었습니까?
구술자 초등학교 오학년인가 그랬어요.

면담자 형님이?
구술자 예. 초등학교.

면담자 그 권순희 누나는요?
구술자 중학교 2학년.

면담자 조부는 그 때 연세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시죠?
구술자 그 돌아가신 그 이듬해 환갑이 있으니까. 육십 그럴 거구마. 돌아간 그 이듬해 환갑 찾는다고 하는 걸 기억을 하거든요.

면담자 아버지는 그럼 그 당시 몇 살 때였습니까?
구술자 모르겠어요.

면담자 어머니는요?
구술자 어머니도 모르고요.

면담자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호적에, 제적부에 있을 거 아닙니까?
구술자 있죠.

면담자 거기에, 생년월일이 있긴 있을 건데요 그죠?
구술자 지금 그런, 자세한 기억이...

면담자 그래 가지고.
구술자 서른 몇 살 됐을끼구만.

면담자 그때 음력 유월 칠일 날 본통이라는 데 끌려가가지고 거기 골짜기에서 다 총을 맞아가지고 희생을 당하셨다. 그런데 그때 어르신 가족들 말고 다른 사람들도 거기서 같이 희생을 당하셨습니까?
구술자 여러 수십 명 당했죠.

면담자 거기에 같이 당한 사람들이 다 좌익 활동한 사람의 가족들이었는가 봐요.
구술자 그렇죠.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여동생까지 학살당한 권순정 씨.

면담자 보도연맹은 아니고요?
구술자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면담자 거기서 여럿 수십 명이 돌아가셨다면은, 그 이후에 남은 가족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가서 시신을 수습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나요?
구술자 우리는 시신을 수습해 왔습니다.

면담자 해왔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누가 작은아버지가요?
구술자 네, 작은아버지가...

면담자 그럼, 아버지를 뺀 다섯 분의 시신을 모두 다 수습을 해왔네요?
구술자 네.

면담자 그래 가지고 어디에?
구술자 우리 선산이 있거든요.

면담자 어디에 있습니까?
구술자 함양읍 이은리요.

면담자 이은리?
구술자 이은리. 남산이라 하는데.

면담자 거기에 다섯 분의 봉분을 다 따로 해가지고 모셨습니까?
구술자 형님하고, 형님도, 형님은, 아버지 따라 가셔 가지고 어디 가서 당하셨는 지는 모르고, 누님은 마 그 근처에 본통 그 근처에 그마 결혼하지도 않았으니 선산에 오지도 안하고 그건 그 근처에서 없애버맀구요. 애기하고...

면담자 누님은?
구술자 누님도 실제로 처녀인께.

면담자 결혼도 안하고 했으니까?
구술자 예. 중학교 2학년이니.

면담자 따로 봉분도 안 만들고?
구술자 그 근처에 애기장처럼 한 것이지.

면담자 젖먹이 여동생도 마찬가지일거구요?
구술자 마찬가지.

면담자 어쨌든, 어머니하고 조부님..?
구술자 만 모시고...

면담자 어머니 묘 옆에 가묘를 아버지 썼었습니까?
구술자 합장을 했어요.

면담자 그럼 봉분이 하나입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아버지는 그럼 뭘로 했습니까? 밤나무 깎아서 했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밤나무 깎는 그걸 뭐라 하죠?
구술자 그건 난 모르겠는데.

면담자 혼백을 모신다고 하나? 혼백을 합장했다. 아버지 제사나 어머니 제사나 같은 날 모십니까?
구술자 같은 날 모시지.

면담자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당장 음력 유월 초이레?
구술자 초 6일, 7일 날 가셨으니.

면담자 그럼 어르신이 지금 아시는 내용은 지금까지 얘기하신 그 내용밖에 더 이상 아시는 게 없네예?
구술자 없죠. 뭐.

면담자 그럼 작은아버지한테라도 그 이후에도 이야기 들으신 건 없으십니까?
구술자 작은아버지는 내나 아는 것이 그것밖이지 뭐.

면담자 작은아버지는 지금 살아계십니까?
구술자 돌아가셨어.

면담자 혹시 그때 작은아버지가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본통 골짜기에서 같이 희생당한 사람들이 총 몇 명이었다. 이런 이야기하신 건 없고요?
구술자 어린 데 그런 이야기 할 턱도 없고. 알아도. 몇 명인지도 알 수 없지. 여럿 수십 명이지 뭐.

면담자 그런데 어르신은 그때 어떻게 해서 살아나오셨습니까?
구술자 나이가 좀 들었으면 그렇게 됐을 거구만. 난 너무 어렸기 때문에.

면담자 젖먹이는 어머니가 업고 갔으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누님은 조금 크다고 같이 데리고 갔고?
구술자 예.

면담자 형님은 아버지를 원래 따라갔어요?
구술자 예.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버지가 약간 좀 뭐라 할꼬. 좌익 중에서도 좀 우두머리였어요. 그래가지고 난리가 난다 하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던 모양이래요.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래서 형님은, 나는 너무 어리니까 여덟 살이면 초등학교 1학년인데 뭘 알겠어요. 형님은 5학년쯤 되니까는, 난리가 날 걸 알고 있으면 죽는다는 걸 알고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형님도 시신이 없어요.

면담자 그러면, 아버지는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지금은 살아계셔도.
구술자 살아계실 나이가 넘었지.

면담자 나이가 넘었고, 형님은 그래도 혹시 살아있을 지 모르겠네요?
구술자 아이, 돌아가셨지.

면담자 확인이 안 된 사실 아닙니까?
구술자 그건 그렇죠. 이북에 넘어가셨을랑가는 몰라도, 살아계실 택이 없어.

면담자 혹시 이북에 살아계실 수도?
구술자 이 근방에 돌아다니셨는데 뭘. 의용군에라도 갔다든가 이러면 후퇴해가지고 살아있을랑가 모르지만은.

면담자 어쨌든, 그해 음력 유월 칠일 날 그런 일을 당하시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가족이 아무도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자다가 일어나보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그때 상황이 기억이 좀 나십니까?
구술자 어떤 기억이?

면담자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도 없어서 황당했던 기억이 지금 없습니까?
구술자 그때 할아버지하고는 따로 살았죠. 우리가 따로 살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누나하고 없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요 왜 없어졌는지도 모르죠. 자는데 나가버렸으니까. 몇 일 있으니까, 그날 그런께 할머니가 우릴 데리러 왔더라구요. 그런께 잡혀 갔는 줄 알고 데리러 왔던 모양이지요. 몇 일있으니까 초상 치르러 간다고, 나는 어려놓으니 따라 가도 안했고. 초상 치르고 뭐하는지도 아무것도 몰랐죠.

면담자 할아버지댁 하고는 같은 마을에 가까이 있었습니까?
구술자 예. 가까운 마을에.

면담자 같은 교산리에?
구술자 예.

면담자 그러면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살고 있었고?
구술자 예. 근데 할아버지도 잡려가 버렸고.

면담자 아버지가 큰아들이었습니까?
구술자 하모. 큰아들이었지.

면담자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 따로 살고, 아버지 어르신 가족 다 따로 살고, 작은 아버지 따로 살고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끌려가고, 어머니 누나 젖먹이 이렇게 끌려가고, 그렇게 돼서 할머니하고 어르신하고 작은아버지 집안은 살았고 그죠?
구술자 작은아버지는 작은집에 살고 할머니하고 나는 같이 살았죠.

면담자 나중에 그 일 있고나서 어르신은 할머니댁에 가서 살았습니까?
구술자 예. 살다가 작은아버지가 또 저를 키웠죠.

면담자 할머니 댁에 몇 살까지 살았습니까?
구술자 열 한 살?

면담자 할머니가 나중에 돌아가셔 가지고 나중에 작은아버지 댁으로 가신 겁니까?
구술자 아니, 안 돌아가시고 갔어. 할머니는 계조모라. 아버지를 놓은 할머니가 아니고, 할머니 일찍 돌아가셔서 새장가 가셔가지고.

면담자 그럼 그 할머니는 끝까지 혼자 살다가 돌아가셨고요?
구술자 예.

면담자 어르신은 할머니 댁에 살다, 열한 살 때쯤 되가지고 작은 아버지 집으로?
구술자 예.

면담자 작은 아버지도 교산리 사셨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거기서 어른될 때까지 살으셨네요?
구술자 교산리 살다가 이 동네에 이사를 왔지.

면담자 작은아버지 댁에서 사시다가 학교는 어디까지 가셨습니까?
구술자 초등학교밖에 안나왔어.

면담자 초등학교 마치고는 뭐하셨습니까?
구술자 농사지었지.

면담자 계속 작은아버지 집에서요?
구술자 예.

면담자 나중에 커서 결혼하면서 재금이 난 겁니까?
구술자 예. 분가했지.

면담자 결혼은 몇 살 때 하셨습니까?
구술자 스물 네 살에.

면담자 그때는 뭐 중매로 하셨고?
구술자 네.

면담자 결혼하시면서 이 동네로 오신거네요?
구술자 아니, 이 동네 살면서 결혼했죠.

면담자 작은 아버지댁도 교화리에 있었다고 안했습니까?
구술자 교화리가 아니고 교산리, 이 동네로 작은아버지가 이사를 오셨어요. 이 동네에서 크다가, 이 동네에서 전 결혼을 했고.

면담자 작은아버지도 계속 이 동네에 사셨네요?
구술자 예.

면담자 이 동네에서 사시다가 결혼해가지고, 지금 재금이 나면서 이 집으로 그 때부터 결혼하고 나서부터 계속 여기 사셨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작은아버지는 언제쯤 돌아가셨습니까?
구술자 한 이십 년 정도 넘었는가베. 이십 사 년째인가?

면담자 어쨌든, 친아버지, 친어머니 없이 작은아버지라 하지만 부모님 없이 어릴 때부터 살아오시면서 겪었던 고통이랄까. 어려움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구술자 부모 없는 그 뭐. 뻔한 것 아닙니까? 작은아버지가 상당히 사람이 좋았어요. 그래가지고 정신적인 애로는 없었는데, 그래도 친부모만 하겠어요?

면담자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하셔가지고, 나를 빼고 모든 가족이 그 당시 몰살을 당하다시피 희생을 당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성장해 오면서, 커오면서, 이것은 뭔가 억울한 거다, 여기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신적은 있습니까?
구술자 그런 거는 가져본 적도 없고, 마땅히 잘못됐다 해야 하나, 좌익 우익 그게 우리같이 판단하기는 좌익은 빨갱이다 이렇게 하는데, 그런 게 아니거든요.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거지. 도둑놈이라고 하는 것 하고는 틀리잖아요. 질이. 정치적으로 나나 놓은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좀 지식층이 이었어요. 군청에 다니시고, 그러시다가. 

면담자 군청 공무원 하셨습니까?
구술자 예.

면담자 학교는요?
구술자 학교는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면담자 살아오시면서 좌익의 자식이다, 이런 걸로 인해가지고 혹시 주변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그런 건.
구술자 그런 건, 제가 뭐 공무원이나 해먹고 그랬으면 그런 일 당했을지 모르지만, 농사만 짓고 그러니까 그런 일 당해본 적은 없어. 자식들 취직하는데 지장이 있다거나 그런 것도 없고.

면담자 동네에서 저 애는 빨갱이 아들이다, 빨갱이 자식이다, 말도 없었습니까?
구술자 아니.

면담자 혹시 아드님이 커오면서 취직이나 신원조회를 통해서 드러나서 불이익을 받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구술자(아들): 저희 때는 그런 게 거의 없어요.

면담자 몇 년생이십니까?
구술자(아들): 저는 칠십 오 년생.

면담자 그러니까 없겠죠. 예전에 전두환 시절 때 연좌제가 없어졌잖아요?
구술자 박정희 때부터 없어졌잖아요.

면담자 아뇨. 전두환이가 집권하면서 그때 헌법 고치면서 표면적으로는 연좌제를 그때 없앤다고 했거든요?
구술자 몰라, 그 앞에도.

면담자 박정희때까지는 연좌제가 있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거나 시험을 치거나 또는 경찰학교 또는 사관학교 이런데 시험을 치면 신원조회 걸려가지고 못들어 갔어요. 합격취소 되고 했거든요. 
구술자 모르겠습니다.

면담자 자제분이 몇 분이십니까?
구술자(아들): 딸 넷 아들 둘입니다.

면담자 장남이십니까?
구술자(아들): 예.

면담자 정확히 인권차원에서 또는 법치차원에서 생각을 한다면 아버지하고 형님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우리나라 군인이나 경찰이 잡아서 총살을 했다든지 이런 증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어머니하고 할아버지하고 누님하고 젖먹이 동생하고는 아무리 그 당시가 전시라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법치주의 국가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사형을 시키거나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재판을 거치도록 되있거든요.
구술자 그 때는 무법천지 아니었습니까?

면담자 이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수단으로서 총을 들거나 이런 무기를 갖춘 사람들이 아닌 아무런 저항수단 없는 순수 민간인들인데, 단지 남편이, 또는 아버지가 좌익활동에 가담했다고 해서 이 사람들을 재판도 없이 산골짜기 데리고 가서 처형을 시키는 것는 명백하게 국가가 불법을 저지른 거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구술자 좀 억울하죠. 그땐 무법천지이니까. 법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한방에 가는 건데 뭐.

면담자 그때는 무법천지라 하더라도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도 서로 총 들고 싸우는 군인들끼리라도 제네바협정이라는 게 있고, 총들고 서로 총질을 하다가도 잡히면 그 포로를 제네바협정에 의해서 보호해줘야 되는 그런 의무가 있는 게 국제적인 인권 개념 아닙니까?
구술자 지금은 그렇죠.

면담자 그 당시에도 사실 그랬거든요?
구술자 에이, 그 당시 무법천지죠. 다 뭐, 아무리 죄 없는 사람도 사감정만 있어도 개인적으로 밀고를 해가지고 잡아가가지고 그만 총살시켜 버리고.

면담자 그때 집에 가족들 말고, 교산리에 다른 사람도 그런 식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구술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려서. 교산리에서 제가 지금 열 한 살 정도 떠나 왔으니까, 잘 모르겠어요. 어리놓은께.

면담자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당시 일에대해서 우리나라 정부가, 국가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있습니까?
구술자 인제 뭐, 오래 돼서 연좌제 법이나 그런 게 있으면 그런 걸 해줬으면 좋겠다 싶은데 그런 것도 없고 큰 바람은 없습니다. 마땅히 억울하죠. 아버지는 일단 좌익활동을 하셨으니 그렇다 치고 나머지 가족들은 정말 억울하죠.

면담자 앞으로 국가에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습니까?
구술자 글쎄요. 허허. 바란 게 뭐 있습니까. 다 보상 문제지 뭐.

면담자 그때 국가에서 법적인 것 없이, 절차 없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죽이고 한 것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하고 이런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구술자 예. 필요하죠.

면담자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 마을에 노인회장하시는분 있죠?
구술자 네.

면담자 그분이 이 마을에 희생 당하신 분들 이야기를 좀 아신다고 그러데예?
구술자 의용군에 끌려가고 그런 걸 좀 알지, 그분은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면담자 그분이 권영덕씨인가?
구술자 네.

면담자 그분 계속 이 동네서 사시던 분입니까?
구술자 예. 이 동네서 나서 이 동네에서.

면담자 그 분 댁에 혹시 전화번호 있습니까?
(인터뷰 종료)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박근혜가 님을 위한 행진곡 부르게 하려면

$
0
0

박근혜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 제33주년 기념식에 참석은 했지만 ‘님을 위한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는 않았다는 보도를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국가보훈처가 합창은 하지만 제창은 않겠다는 국가보훈처의 결정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정부가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꺼려한다는 사정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담은 노래이기 때문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내심은 그런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5.18 행사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려면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 행적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5.18기념식에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고요, 2005년과 2006년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렇지만 참석해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동참했음을 일러주는 기록이나 영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 노래를 부르려면 어떤 강력한 힘이 작용을 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힘입니다.(물론 그런 힘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있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대통령 노릇을 하고 있는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겠습니다.)

 

다수 대중이 5.18을 진정으로 그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부르기 싫어도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20일 MBC경남의 라디오 광장 세상 읽기에서 짚어봤습니다.

 

------------------------------------------------------------

 

님을 위한 행진곡 합창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사진.

 

서수진 아나운서 : 그저께 5.18민주화운동 제3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고 합창한 사실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날 행사에 참석은 했으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김훤주 :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려고 작정을 했다면 국가보훈처가 아예 처음부터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제창을 하게 되면 행사에 참석한 사람이면 대통령이든 아니든 다함께 불러야 하거든요.

 

2. 님을 위한 행진곡 부르기가 부담스러웠던 박근혜

 

진 : 합창과 제창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전을 보면 ‘합창은 여러 선율로 이뤄진 노래를 여러 사람이 서로 화성을 이루면서 부르는 것’이고 ‘제창은 단일한 선율로 이뤄진 노래를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부르는 것’인데요.

 

주 : 사전적으로 보면 그렇고요, 현실에서는 합창은 합창단이 주로 부르고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 의지대로 따라 부르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라면 제창은 참석한 사람이 모두 부르는 것입니다.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할 때 합창은 합창단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제창을 하면 가장 중요한 인물 그러니까 대통령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창 아닌 합창 결정에 반발해 정부 기념식에 사람들이 많이 불참하는 바람에 생겨난 빈 자리. 연합뉴스 사진.

 

진 : 2008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5.18 기념 행사에 참석한 이래 현직 대통령으로는 5년만에 함께한 자리인데, 박 대통령이 전체 국민이 보는 앞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는 부담스러웠을까요?

 

주 : 그렇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님을 위한 행진곡 합창 결정이 겉으로는 국가보훈처가 했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가 했다고 봐야 합니다. 청와대와 박 대통령이 제창해도 괜찮다고 했는데도 국가보훈처가 굳이 합창으로 하겠다고 버틸 까닭은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경우 중요한 사실은,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공통되게 부르기를 바라는 노래가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점입니다.

 

3. 님을 위한 행진곡에 담긴 5.18의 역사와 정신

 

진 : 님을 위한 행진곡이 어떤 노래인가요? 왜 그렇게 부르기를 원할까요?

 

주 : 이 노래에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노래의 탄생 자체가 5.18민주화운동과 맞닿아 있다고 합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

 

1980년 5월 27일 새벽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남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게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년 광주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하다가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두 유족은 82년 2월 망월동 묘지에서 영혼결혼식을 치렀고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를 기리려고 5월에 노래극 '넋풀이굿'을 제작했는데 그 마지막에 이 노래가 들어가 있었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면 뜨거운 맹세”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당시 광주 살던 황석영 소설가가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만들었고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습니다. 91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3집 앨범에 실리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진 : 그렇군요. 그러면 여태까지 치러온 5.18 기념행사에서는 이 노래가 어떤 대접을 받았지요?

 

주 : 5.18은 1997년에 공식으로 국가 기념일이 됐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5.18 기념식에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제창 형식으로 불러왔습니다. 그 절반인 2003년부터 여섯 차례는 중앙정부가 주관했습니다. 물론 지정 이전 시민사회단체들이 주관한 행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2년째인 2009년부터 이태 동안은 본행사에서 빠지고 식전행사 때 제창을 했고요, 2011년과 2012년에는 본행사에서 합창으로 처리됐습니다. 올해와 같습니다.

 

4. 궁색한 국가보훈처의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이유

 

진 : 그러면 5.18 기념식에서 제창을 하게 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나왔겠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 제창 거부 이유가 좀 궁색하지요?

 

연합뉴스 사진.

 

주 :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첫째는 5.18 기념행사의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일부 노동·진보단체에서 민중의례 때 애국가 대신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고 셋째는 정부 기념식에서 주먹을 쥐고 흔드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진 : 첫째 이유라면 국가 기념일 지정 이후인 1997년부터 2008년까지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것이 틀렸다는 얘기가 되나요? 게다가 2003년부터는 중앙정부가 행사를 주관했잖아요? 또 2008년은 같은 정당 소속인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기도 하고요.

 

주 : 앞뒤가 맞지 않지요. 억지로 갖다 붙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 5.18은 공식 기념곡이 없는데, 그렇다면 앞으로도 5.18 기념식에서는 5.18을 기리는 노래를 제창할 수 없다는 얘기밖에 안 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까닭도 좀 우습습니다.

 

거꾸로 생각해서, 70년대와 80년대에는 시위 현장에서 애국가도 많이 불렀는데, 그렇다고 정부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을 뺄 일은 아니거든요. 또 주먹을 쥐고 흔드는 것도 제각각 알아서 하는 것이지 모두 해야 한다고 강제돼 있지도 않고요.

 

진 : 그러면 답이 빤히 보이는데요. 그래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5.18민주화운동 공식 기념 노래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한편에서 일고 있기도 하고요.

 

5.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못한 진짜 까닭

 

주 : 맞습니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밑바탕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희생과 피해,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 발전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성취를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망월동 묘역에서 치러진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사람들. 연합뉴스 사진.

 

진 : 5.18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요? 1995년 5.18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돼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고 피해 보상도 이뤄졌고요, 1997년 4월에는 광주 학살의 장본인인 전두환·노태우 등에 대해 대법원이 반란 내란, 내란 목적 살인과 상관 살해 미수 등으로 유죄 확정 판결이 나기도 했거든요.

 

주 :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지배층은 물론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시대정신은 되지 못한 것 같아요. 걸핏하면 5.18을 깎아내리는 보도가 나오고 심지어 채널A와 TV조선 같은 종편에서 5.18이 북한 간첩과 관련돼 있다는 얘기까지 퍼뜨리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헛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남아 있고요.

 

진 : 박근혜 정부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고 합창만 하겠다는 선택도 그런 현실과 관련돼 있다는 얘기군요. 사실 희생자와 피해자 처지에서 생각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고, 5.18은 국가권력이 저지른 학살 사건이기도 한데, 희생자와 피해자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라면 노래 아니라 그 이상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말씀입니다.

 

6. 5.18을 전라도 광주만의 지역적 사안으로 여기는 사람들

 

주 :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정부만 탓할 수 없는 까닭이, 물론 지배집단의 분할통치 전략도 크게 구실을 했지만, 5.18을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전라도나 광주에 국한된 사안으로 보려는 일반 대중의 시각도 작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아직도 저는 언뜻언뜻 그런 얘기를 듣는데요, 5.18을 두고 폭도들이 저지른 일이라거나 전라도 사람들이 별나서 터진 사건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상도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습니다.

 

진 : 지역감정을 악용하거나 또는 지역감정에 사로잡혀 그렇게 5.18을 우리나라 전체와 관련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별난 지역에서 일어난 별난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말씀이죠?

 

연합뉴스 사진.

주 :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관계를 꼼꼼하게 따져 보면요, 5.18민주화운동이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거든요. 한 해 전인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이 없었으면 5.18 또한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의 위기가 확실하게 드러났고, 그 와중에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는 권력 균열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1980년 민주화의 봄도 가능했던 것이고 5월 광주 항쟁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진 : 그렇게 따지고 보니 마산과 광주, 경상도와 전라도가 하나로 연결이 됩니다.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향한 추구에는 지역 구분이 없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주 : 그렇습니다. 인권이나 민주주의 앞에서 광주 사람과 마산 사람,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런 정도로나마 민주화가 돼서 적어도 권력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대통령 욕을 하고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정도로 바뀐 것은 5.18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대웅전이 둘인데도 석가불상은 왜 없을까?

$
0
0

5월 9일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충남으로 역사기행을 떠났습니다. 마산박물관 답사 모임에서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꽤 먼 거리라서 다른 때보다 일찍 나섰습니다. 수덕사와 장곡사와 모덕사를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1. 노래 <수덕사의 여승> 주인공은 누구일까?

 

수덕사(修德寺)라 하면 대부분 대웅전이랑 여승을 떠올립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알려진 유일한 고려 시대 건축물입니다. 그리고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1960년대에 유행한 대중가요가 유명합니다.

 

‘수덕사의 여승’은 누구일까요? 일제 강점기 조선 여성 3걸로 일컬어지는 윤심덕·나혜숙·김일엽 가운데 김일엽이랍니다. 김일엽은 비구니 스님이고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질 당시 여기 수덕사에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덕사에서 여승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수덕사에 소속돼 있는 견성암이라는 암자가 비구니 수도처라 합니다. 하지만 이 견성암도 옛날 모습 그대로가 아니고 새로 지은 건물이 많다고 하니 노래에 매이면 그것은 허상이 되겠지요.

 

2. 수덕사 대웅전의 눈맛 좋은 벽면 

 

어쨌거나, 수덕사의 공식 으뜸 보물은 대웅전입니다. 연대가 알려진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어졌다니 올해로 705살입니다. 같은 고려 시대 건물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있습니다만 정확한 나이는 모릅니다.

 

 

이들 고려 시대 건물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셋 다 수더분하고 간결하면서도 튼튼합니다. 그러면서 차이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부석사 무량수전은 화사하고 봉정사 극락전은 섬세하며 수덕사 대웅전은 가장 꾸밈이 없습니다.

 

가만 들여다봤더니 노란 벽면이 이채로웠습니다. 다른 절간 다른 전각에는 이런저런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둥이 그런 벽면을 간결하게 나눠주고 있을 뿐, 어떤 보탬도 더함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눈맛이 좋았습니다.

 

 

3.  죄악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죄악이다

 

돌아나오는 길에는 천왕문에서 예사롭지 않은 천왕을 만났습니다. 이런 천왕과 이런 죄악상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천왕이 짓밟고 있는 죄악상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적나라합니다.

 

천왕 발 밑에 놓인 벌거벗은 여자그와 짝을 이루는 천왕의 발 아래 존재.

 

 

아름다운 여인이 죄악상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경우는, 밀양 표충사를 비롯해 여러 절간에서 봐 왔습니다만, 그것들은 죄다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얀 속살이 통째로 드러나 있습니다.

 

죄악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죄악…… 죄악과 아름다움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아름다우니까 죄악이다? 죄악의 본바탕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답지 않으면, 또는 아름다움에 버금가는 다른 무엇이 없으면 사람이 죄악으로 끌려들지 않는다?

 

 

수덕사에는 수덕여관도 있습니다. 아주 이름 높은 사람인 줄 아는데, 이응로라는 화가가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지금 복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켠에는 이응로가 바위에 새겨넣은 추상 무늬 ‘그림’이 있습니다.

 

 

4. 대웅전이 둘인데, 정작 석가모니 부처는 모시지 않는 절

 

수덕사를 떠나 점심을 먹고는 장곡사로 갑니다. 수덕사 앞 식당들은 차림이 한결같습니다. 우리는 수덕식당에 가서 나름 깔끔하고 잘 차려진 음식을 먹었지만 다른 식당에 가도 같은 산채비빔밥이면 같은 반찬이 나오고 값도 7000원으로 같습니다.

 

장곡사(長谷寺)는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이 아니라 이웃 청양에 있습니다. “콩밭~~ 매~~는 아~낙~네”로 널리 알려진 칠갑산 자락입니다. 이름 그대로 골짜기(谷)에 길게(長) 늘어서 있습니다.

 

수덕사는 절간 건물이 좋고 돋보이지만 장곡사는 그보다 둘레 경관이 매우 빼어납니다. 때마침 비가 내린 뒤끝이라 더욱 산뜻하고 함초롬합니다. 함께한 일행들도 자꾸 눈을 씻고 다시 봅니다. 그러고는 길지 않은 길을 따라 내쳐 걷습니다.

 

장곡사는 별난 절간입니다. 대웅전이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다른 절간 대웅전에는 보통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는데 이 두 대웅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별나게도 위쪽 대웅전은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 아래 대웅전은 약사여래가 있습니다.

 

대웅전이 왜 둘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웅전에 석가모니 아닌 다른 부처들을 모신 까닭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칠갑산을 비롯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불상을 모아 놓다 보니 이렇게 됐지 싶고, 그런 부처들을 위아래 구분 없이 모시다 보니 대웅전이 하나만으로는 모자라 두 개를 짓게 되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5. 부뚜막과 조왕신을 볼 수 있는 장곡사

 

위쪽 대웅전에서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내려옵니다. 수덕사에서 색다른 볼거리를 천왕문이 갖추고 있었던 것처럼 장곡사도 색다른 볼거리를 하나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순천 선암사에 가면 그 곳 부뚜막 들여다보기를 즐겼습니다. 연기에 검어진 공간이 다시 햇빛이 알맞게 걸러져 더욱 어둑해진 가운데 아궁이가 위에 조왕신(竈王神)이 모셔져 있습니다. 부처는 이렇게 모든 존재를 품어버립니다.

 

하지만 지난 3월에 갔던 선암사에서는 부엌 구경을 못했습니다. 전에는 열려 있던 부엌문이 닫겨 있었는데다 스님까지 지키고 앉아 들어가지 못하게 말렸습니다.

 

부엌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아쉬움이 장곡사에서 녹아 스러졌습니다. 마음껏 넋 놓고 구경을 했습니다. 선암사처럼 규모가 크고 가지런히 제대로 갖춰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절간 부엌 분위기는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북이 언제나 동그랗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장곡사의 그것.

6. 최익현은 이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을까?

 

이어지는 발걸음은 모덕사(慕德祠)로 갑니다. 조선 말기 항일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비판해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때 이완용 따위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했고 이듬해 1월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면암 최익현이 살았던 옛집.

 

 

최익현 옛집 뒤뜰.

 

아마도 최익현은, 이기기 위해 싸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이가 몸을 일으켰을 때 나이가 일흔셋입니다. 시쳇말로 ‘당장 죽어도 호상(好喪)’이었습니다. 태인→정읍→순창→곡성을 순조롭게 접수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이는 선비였습니다. 위정척사였습니다. 정(正)은 왕이 다스리는 신하의 나라였고 사(邪)는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이에게는 일제도 나쁘지만 1894년 떨쳐 일어난 동학농민군도 나빴습니다. 같은 양반이고 선비였지만 농민과 함께한 전봉준과는 달랐습니다.

 

어쩌면 매천 황현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동학농민군을 보는 관점도 둘이 같습니다. 또 매천은 조선 정부를 비판했고 그 망함에는 한 치 아쉬움도 없다고 했습니다. 최익현도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정책을 비판했고 그 탓에 귀양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매천은 조선이 500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그 망함을 맞아 따라 죽는 선비가 하나도 없다면 참 허망하지 않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까닭입니다. 최익현도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 해도 최익현이 죽기 위해 싸웠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일본군에 넘겨진 최익현은 남의 땅 대마도에 유배됩니다. 보통은 최익현이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으로 순국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았는데, 이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단발 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큰 줄기는 다르지 않지만 세부 내용은 다릅니다.

 

면암 최익현은 집안이 영 못 살지는 않았나 봅니다. 여기 모덕사는 늘그막에 최익현이 머물러 살던 집 옆에 있습니다. 모덕사는 1914년 지어졌고, 살던 집은 중화당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데 1900년 경기도 포천에서 이리로 옮겨올 때 지었습니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든 생각입니다.

 

어쨌든 분위기가 아주 좋습니다. 그이 살던 옛집도 느낌이 그럴싸하고 덕을 그리는 사당도 그럴 듯합니다. 게다가 그 앞에 들어앉은 커다란 못까지 함께 어울리면서 그 전경이 아주 대단한 울림을 안기면서 눈길을 멀리까지 이끕니다.

 

모덕사 전경.

옛집 전경.

해딴에의 역사기행은 6월에 쉽니다. 대신 7월 6일(토) 충북 충주로 갑니다. 단호사 철불좌상~탑평리 칠층석탑~충주박물관~중원 고구려비~미륵대원지를 둘러봅니다. 참가비는 4만5000원인데, 신청·문의는 055-250-0125, 010-2926-3543으로 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저희 회사의 사내 부부 수칙을 공유합니다

$
0
0

선남선녀의 만남과 사랑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자 결정일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같은 회사,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료나 선후배가 연인 관계로 발전해 결혼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른바 사내 부부가 되는 거죠.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직장의 신'에도 사내 부부가 있더군요.


모든 일이 그렇듯 사내 부부의 좋은 점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저희 후배 이승환 기자가 동료들의 의견을 수렴해 안을 잡았습니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볼 건 아니지만, 한 번쯤 생각해보고 공유할 필요도 있겠다 싶어 저희 회사의 '사내 부부 수칙'을 공개합니다.


혹 여러분의 회사에도 이런 수칙 있나요?


제가 주례를 섰던 한 결혼식 사진 @정부권


경남도민일보 사내 부부 수칙


성문법상 효력은 없지만, 편집국장 훈령 1호를 발표합니다. 업무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호칭 & 지나친 애정 행각 조심

: 회사에서 자기야~, 달링~ ... 이런 거 안 됨. 차라리 서로 부르지 않는 것도 방법임. 애정 행각은 말할 것도 없음.

 

2. 동료 품평 금지

: 일 하다 보면 스타일이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한쪽 의견 만으로 동료를 함께 미워하면 안 됨. 같이 좋아하는 것은 허용함. 아예 동료 선후배에 대한 품평은 서로 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

 

3. 집안 일은 함께 생각, 회사 일은 각자 생각

: 집에서는 부부지만 회사에서는 각자 기자 1명임. 배우자 의견에 고민 없이 쏠리지 말고 늘 먼저 스스로 판단하기 바람.

 

4. 돕는 것은 집안일만

: 집안일만 서로 돕기 바람. 회사 일은 각자 스스로... 귀찮다고 한 명이 줄창 당직을 대신 서준다거나 하면 안 됨. 행사 때 둘 중 한 명만 참석하면 된다 여기는 것도 착각임.

 

5. 회식은 함께 참여하되 될 수 있으면 멀리 앉기를.

 

6. 서로 일과 상대 부서를 존중하시오.

 

7. 둘이 의견이 같다고 해서 구성원 전체 의견으로 착각하면 곤란.

 

8. 한쪽에게는 선배고, 한쪽에게는 후배인 동료는 셋 다 존중.

 

9. 배우자가 딲인다고 회사를 원망하지 말 것이며.

 

10. 회사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배우자에게 민원 넣지 말 것.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간접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고?

$
0
0

충격적인 글을 읽었다.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허현회 지음, 맛있는 책)에 나오는 글이다.


'간접흡연이 위험하다는 것은 코미디다'라는 글인데, 이것은 미국의 화학자본 제약자본이 만들어낸 허구의 가설일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비흡연자의 폐암 발병률이 높게 나타나고, 시골보다 도시의 공업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폐암 발병이 늘어나자 이를 가리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주장이라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흡연율이 계속 하락하고 있지만 폐암 환자는 급증하고, 또한 폐암 환자의 70퍼센트 이상이 비흡연자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주류의사들과 화학업계, 제약업계, 식품업계, 원자력업계 등은 당황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매년 폐암으로 사망하는 환자 22,000명 중에서 평생 한 번도 흡연을 하지 않은 환자는 15,000명이다. 이는 평균치일뿐이고 폐암 발병자나 사망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폐암은 시골보다 도시의 공업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도로에서 생활하는 트럭 운전수들에게서 높게 나타난다. 도로는 벤젠, 아스팔트 등 유해물질이 가장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담배공포가 시작되는 1950년부터 1955년 사이에 여성의 폐암 사망률은 5배 증가했다. 특히 1999년 미국에서는 유방암으로 사망한 여성보다 폐암으로 사망한 여성이 23,000명 많았고, 2000년에는 여성의 폐암 사망자가 유방암 사망자의 1.5배인 68,000명이었다. 특히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은 85퍼센트가 비흡연자에게서 발병하며, 흡연자의 단지 15퍼센트만이 발병한다.


이렇게 비흡연자의 폐암 발병이 급증하자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ACSH(미국건강과학위원회) 등은 세계보건기구, 미국심장협회, 미국폐협회, 미국암협회 같은 주류단체에 재정을 지원하며 전 세계적으로 매년 300만 명이 '간접흡연' 때문에 폐암으로 사망한다고 발표한다. 간접흡연으로의 확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간접흡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논문들이 모두 제약회사와 화학회사가 재정을 지원한 것이며, 또한 단순 설문조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폐암에 걸린 환자들에게 '과거에 흡연한 사실이 있는지'를 묻는 형식의 설문 말이다. 그리고 많은 논문은 화학회사가 책상에 앉아 대필하고 주류의사들이 더러운 돈을 받고 이름만 빌려준 것이었다."


의사를 믿지 말아야 할 72가지 이유 - 10점
허현회 지음/맛있는책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하동으로 떠나는 차 체험-섬진강 눈맛은 덤

$
0
0

차 체험 관련 얘기를 드리기 앞서 먼저 일러둘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녹차나무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차나무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비유하기를 “차나무더러 녹차나무라 하는 것은 밀을 일러 빵나무라 하는 것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1. 녹차나무는 없다, 단지 차나무가 있을 뿐

 

밀을 갖고 만들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국수도 뽑을 수 있고 수제비를 만들 수도 있고 빵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하나를 갖고 밀을 빵나무라 하지는 않습니다.

 

차나무도 마찬가지, 녹차는 찻잎을 갖고 만들 수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일 따름입니다. 그밖에 청차, 홍차, 흑차 따위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방법에 따라 차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이름도 달라질 뿐인데 이렇게 녹차라 하면 맞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녹차’는 일본에서 만든 말이기도 합니다. 박희준 동국대 차문화컨텐츠학과 교수의 얘기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중국 청나라에서 차를 수입해 갈 때 블랙티(=홍차)와 구분할 필요가 있어 그린티라는 말을 썼다. 이를 일본이 중국보다 먼저 녹차(綠茶)라 상품화했다.

 

지금은 우리도 녹차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됐지만 널리 쓰인 때는 1980년대부터다. 앞서서는 차, 작설(雀舌), 작설차라 했다. 일본 가루차 옥로(玉露)가 19세기 우리 문헌에 등장했는데 녹차라 하지 않았다.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가 거기서 마시는 차를 두고 작설차와 비슷한데 푸른빛이 좀더 돌더라 해서 청(靑)작설이라 적었다. 중국서 가져온 검은 차는 흑작설이라 했다. '작설'이 그만큼 중요한 이름이었다. <동의보감>에도 '녹차'는 없다. 녹아다(綠芽茶)라는 말은 썼다.

 

‘녹차’가 처음 쓰인 것은 우선 이상적(1804~65)이라는 역관 출신 시인의 한시에서다. 그이는 중국과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1845년에 ‘천향시녹차(泉香試綠茶=샘이 향기로우니 녹차를 시음할거나)’라는 구절을 남겼다.”

 

매암다원 전경.

 

2. 하동 매암다원에서 여러 차 체험을 한 아이들

 

하동은 전남 보성과 달리 야생차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래서 차가 대량 생산은 안 되지만 개별 품질은 뛰어납니다. 하동에는 여러 다원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악양 정서마을 매암다원은 차문화박물관도 두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수리조합인가 하는 공공기관 건물을 60년대에 그 아버지께서 사들였습니다. 아들 강동오씨가 이어서 이 공간을 꾸미고 차와 관련된 유물과 문화재를 모아 박물관으로 꾸몄습니다.

 

매암차문화박물관(http://www.tea-maeam.com)입니다. 매암(梅巖)은 강동오 관장 아버지의 호(號)가 됩니다. 실제로 이 다원에 가면, 바위(巖) 틈새에 매화나무(梅)가 솟아나 있기도 합니다.

 

 

박물관은 때때로 공부나 체험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19일 일요일 우리 일행이 찾아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마루 위에 다다미가 깔려 있는 대청에 다탁을 빙 둘러놓고 찻잔 차호(茶壺) 따위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눈높이에 맞춰 달려 있는 팻말을 보니 ‘차훈(茶熏) 명상’이라 돼 있습니다. 차훈은, 말린 찻잎을 그릇에 넣고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거기서 나오는 기운을 살갗으로 받아들이고 코로 들이쉬고 내쉬어 온 몸에 퍼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눈은 감아야 하니 저절로 생각이 가라앉고 잦아들고 하면서 가지런해집니다. 차를 갖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 다스리기 방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지요.

 

서로 절을 한 다음 빙 둘러앉아 한 손으로 찻잎을 집어 다른 손에 올려놓습니다. 그런 다음 찻잎 냄새를 그윽하게 맡습니다. 어떤 아이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 하고 어떤 아이는 짠 냄새가 난다 합니다. 풀 냄새가 난다는 아이도 있고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어쨌든 대부분은 한 마디씩 걸쳤는데, 제가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손에 있는 찻잎을 커다란 그릇에 담습니다. 그러고는 그릇을 흔들면서 거기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라 합니다. 잎이 굴러다니면서 무슨 소리든 내기는 할 테니까요. 구슬소리나 쇠소리가 난다는 아이도 있고 바람 소리가 난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면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살갗으로 느끼는 오감(五感)이 더욱 예민해지고 많이 열리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았습니다. 조금 있다 보면 아시겠지만, 아이들 하는 말과 행동이 이를 입증하게 됩니다.

 

이제는 펄펄 끓는 물을 붓습니다. 이에 앞서 체험을 진행하는 선생님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게 하고는 입이 아니라 코로 들이쉬고 내쉬는 연습을 하도록 이끕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호흡법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듭니다.

 

 

김이 숭숭 나는 대접 위쪽을 두 손으로 감싼 다움 얼굴을 들이댑니다. 물론 눈은 감아야 합니다. 뜨거움이 확 끼쳐 오는지 잠깐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들어올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진행하는 선생님은 3분만 그렇게 하고 있자고 합니다. 뜨거움 때문에 고기처럼 해대던 아이들 자맥질도 조금씩 줄어듭니다.

 

3분 내내 고개를 떼지 않은 친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3분이 이렇게 길 수도 있나 봅니다. 조용한 가운데 흐르는 시간은 더욱 길게 느껴집니다. 아이들 차훈명상 하면서 하는 움직임까지 잦아드니 더욱 그렇습니다. 대접에다 얼굴을 들이댄 아이들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 싶습니다.

 

이윽고 다들 고개를 들었습니다. 기분이나 느낌을 말합니다. “너무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웠어요.” “피부가 보드라워졌어요.” “처음엔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좋아졌어요.” “살결이 좋아졌고 막혔던 코도 뚫렸어요.”

 

차훈 명상을 한 소감을 얙하는 아이들.

 

차 대접 속을 가만 들여다보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야, 찻잎이 매우 커졌어요. 물에 부풀려지면서 쪼그라져 있던 것이 풀어헤쳐졌나 봐요!” 이런 체험을 진행하면서 느낍니다. 어느새 아이들 세밀하게 관찰해 보는 능력이 부쩍 자라나 있습니다.

 

3. 우리나라에도 예전부터 홍차가 있었다네

 

차훈 명상을 하는 데 쓴 찻물을 마시고는 홍차 만들기 체험장과 차(茶) 블렌딩 하는 공간으로 옮깁니다. 오늘 체험을 굳이 금전으로 치자면 5만원짜리는 되고도 남음직합니다. 진행도 짜임새가 있고 내실도 알찹니다. 체험을 맡은 선생님들의 진행도 섬세합니다.

 

 

우리한테는 홍차가 없었는 줄 아는데 전혀 아니라고 합니다. 하동 악양에 사는 농민들 사이에서는 옛날부터 홍차가 대세였다고 합니다. 홍차는 녹차와 달리 발효차입니다. 발효는 찻잎을 비빌 때 나오는 끈적한 물 같은 성분 때문에 이뤄집니다.

 

홍차 같은 발효차는 녹차 같은 비(非)발효차보다 오래 간직할 수 있고 맛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답니다. 아이들은 찻잎을 한 움큼씩 뭉쳐서 두 손으로 꼭꼭 눌러줍니다. 스무 차례 정도 힘껏 반복한 다음 풀어헤칩니다. 그렇게 골고루 눌러지도록 해서 같은 작업을 되풀이합니다. 이런 작업은 찻잎에서 끈적거리는 물기가 잔뜩 흘러나올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 물기가 나오면 이번에는 대소쿠리에 대고 안으로 살살 모으면서 찻잎을 비벼줍니다. 그렇게 한 10분 남짓 한 다음 펴서 말립니다. 적어도 이틀 정도는 쨍쨍한 햇볕에 말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틈틈이 더 말리면 되고요.

 

차 블렌딩도 번갈아 치러집니다. 메밀·박하·자소엽 같은 다른 재료를 차와 함께 섞습니다. 물론 자기가 누리고 싶은 맛을 내는 재료를 골라 넣어야겠지요. 그런 다음 집에 가서 맛볼 수 있도록 기계를 갖고 티백까지 만들어줍니다.

 

취향대로 블렌딩한 차를 티백에 담는 모습.

티백 입구를 밀봉하는 장면.

 

선생님들 진행으로 녹차까지 한 모금 마신 다음 싸갖고 온 점심 도시락을 먹습니다. 감나무 그늘 아래에서입니다. 한 그릇 뚝딱 헤치운 아이들은 너른 차밭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놉니다. 어떤 아이들은 울타리를 벗어나 바로 아래 개울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동생은 폴짝 뛰고 언니는 그런 동생을 사진에 담고.

 

평상에서는 아이들 만든 홍차가 말라가고, 아이드른 그늘에 앉아 쉬고.

 

네 번째 체험은 찻잎 따기입니다. 보기는 아무렇지 않고 별것 아닌 듯이 여겨지지만, 이것 은근히 중독성이 센 편입니다. 가운데가 뾰족하게 나오고 양옆으로 잎이 달린 1창2기(一槍二旗) 여린 잎을 골라 따면 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1창2기.

 

처음에는 아이들 손길이 머뭇머뭇거립니다. 그런 여린 잎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옆에 다른 사람이 어떤 찻잎을 따는지 보면서는 조금씩 손길이 빨라집니다. 처음에는 “이것 맞아요?” “야 땄다!” 등등 소리가 나오지만 갈수록 잦아듭니다.

 

 

1시간쯤 지나자 바깥에 개울에 나가 놀아도 되느냐고 누가 묻습니다. 하고픈대로 하렴, 말이 나오기 무섭게 남자 아이들 중심으로 소리를 지르며 우루루 몰려나갑니다. 아이들은 그렇게도 물이 좋은가 봅니다. 물장군도 잡고 어린 다슬기도 잡습니다.

 

 

4. 섬진강 강물 따라 걸어가기가 이렇게 좋을 수 있다니

 

이번에는 섬진강을 따라 나 있는 데크로드를 걸을 차례입니다. 알차게 체험을 할 수 있었던 매암다원을 떠납니다. 하동읍도 지나고 하동송림도 지난 하류 쪽에서 풍성한 강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데에다 버스를 세웠습니다.

 

길지는 않습니다. 한 30분만 하면 충분히 걷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 끼인 3일 연휴의 마지막날입니다. 자칫 잘못해서 늦어지면 집에 아주 늦게 돌아가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섰던 것입니다.

 

 

재잘재잘 얘기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합니다. 찔레꽃 흐드러진 데서는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보는 친구도 있습니다. 조그만 하늘소를 풀섶에서 찾아낸 아이는 잡아가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휴대전화 사진으로 만족해 합니다.

 

 

맨발로 내달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죽순을 뽑아들고 칼처럼 휘두르기도 합니다. 참가한 아이들끼리는 어쩌면 우정 비슷한, 영어로 하자면 프렌드십(Friendship) 같은 무엇이 형성돼 있나 봅니다. 장난을 쳐도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그런 것만 합니다.

 

 

나무막대를 휘둘러도 그냥 시늉만 합니다. 그러면 그 맞은편 상대도 같은 시늉으로 맞은 척만 합니다.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으려니, 아이들이 어울려 무슨 춤판을 벌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끝으로 다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일찍 마쳤습니다.

 

데크로드 걷기를 마친 데 있는 솔밭.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의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은 6월에도 이어집니다. 함안 법수 남강가에서 모래 체험을 진행합니다. 전기를 아끼고 에너지를 적게 쓰자는 취지에서 솟대촛대를 만드는 체험도 곁들입니다. 6월 16일 셋째 일요일이 그 날입니다.

 

문의·상담·신청은 010-8481-0126 또는 055-250-0125로 하시면 됩니다. 평소에는 반복되는 공부에 찌들릴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연 속에서 뛰어놀 수 있게 해주고 싶은 ‘착한’ 어버이들의 관심과 신청을 기다립니다.

 

‘잘 놀아야 잘 산다.’ 저희는 이런 자연 속 체험과 놀이가, 콩나물시루에 부어지는 물과 같은 구실을 단단히 한다고 믿습니다. 물은 콩나물시루를 그냥 훑어지나갈 뿐인 것 같지만, 돌아보면 어느새 콩나물은 부쩍 자라나 있습니다. ^^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핵발전소 최적지는 전기 많이 쓰는 서울

$
0
0

5월 27일(월) MBC경남의 라디오 광장 세상읽기에 나갔습니다. 한 주에 한 차례 월요일마다 마련돼 있는 방송 자리인데요, 이번에는 밀양 송전철탑 문제를 짚어봤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우리나라 핵발전(=원자력 발전)의 문제와우리 사회 에너지 정책의 문제 전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1. 20일 송전탑 공사를 다시 시작한 까닭은?

 

서수진 아나운서 : 안녕하세요? 지금 밀양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76만5000킬로볼트 송전탑을 한국전력이 주민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하는 공사를 20일 재개했기 때문인데요. 봄답지 않게 더운 날씨 속에 70대 80대 어르신이 대부분인 주민들이 날마다 끌려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김훤주 :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가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 이런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일흔 넘은 어르신이 공사를 막으려고 굴착기 밑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작업기계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주민들이 몸을 쇠사슬로 묶고 자물쇠를 채우고 있어요.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헬리콥터로 건설장비를 실어나르는 장면.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심지어 늙으신 어르신들이 윗도리를 벗고 반나체로 나서는 사진까지 있는데요, 한전 직원이나 경찰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진 : 지역 주민들은 송전탑이 내 땅 위에 들어서지 못하겠다는 얘기고요, 한전은 전력 수송을 위해 반드시 세우고야 말겠다는 의지고요. 이런 갈등이 2006년 시작됐다고 하니까, 올해로 벌써 8년째입니다.

 

주 : 여태 밀양 송전탑 문제가 주민 반대와 한전의 공사 강행으로 널리 알려지는 과정에서 서로 맞서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함께 잘 알려졌습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지역 주민들 동의를 얻기는커녕 똑바로 알리지도 않고 초고압 송전탑을 세우려 한 데 원인이 있는데요, 요즘 들어 새로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진 : 한전 고위 간부의 발언이 있었지요? 지난 23일에요. 한전 변준연 부사장이 그날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송전철탑이 하루빨리 건설돼야 하는 까닭을 밝혔는데, 그게 한전이 지금껏 말해왔던 건설 이유와는 크게 달랐다고 들었어요.

 

2. 전력난 타령은 거짓말, 진짜 이유는 핵전 수출

 

주 : 지금까지는 전력난 해소를 위해 새로 지어지는 원자력 발전소인 신고리 3호기를 밀양 송전철탑 건설을 통해 서울 같은 수도권으로 이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요, 이번에 변준연 부사장은 한전이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출하면서 같은 모델인 신고리 원전 3호기를 예정대로 가동하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겠다고 계약서에 적었고, 그래서 순조롭게 가동이 되게 하려면 밀양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진 : 한전이 여태까지 지역 주민을 비롯해 국민들을 속인 셈이 되나요? 꼭 지어야 하는 새로운 이유가 하나 추가된 셈일 수도 있겠네요. 이런 발언 때문에 장본인인 변 부사장은 자진해 사표를 냈고요. 사실은 해임이라 봐야겠네요.

 

정말 이런 생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주 : 이렇든저렇든 한전이 잣아서 매를 벌고 있습니다. 전력난 때문에 공사를 서둘러야 한다는 한전 주장은 그동안 줄기차게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한전은 올해 12월부터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전체 전력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10월 100만킬로와트 규모로 경북 경주 신월성 2호기가 가동되는데 더해, 정부의 내년 전력예비율 전망치는 16%가 됩니다. 그런데 예정대로 된다 해도 신고리 3호기의 발전량은 140만킬로와트로 총량 8100만킬로와트의 1.7%밖에 안 된다는 것이지요.

 

진 : 아랍에미리트 원전을 수주할 때 신고리 3호기가 모델이 됐기 때문에 밀양 송전탑 문제는 꼭 해결돼야 한다, 2015년까지 신고리 3호기가 가동되지 않으면 페널티, 그러니까 위약금을 물도록 계약돼 있다는 것이 변 부사장의 발언입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주 : 한전에 따르면 신고리 3호기는 한국이 자체 개발한 가압경수로형 APR1400 방식을 처음으로 상용화한 모델이랍니다. 그리고 2009년에 UAE와 186억달러로 원전 수출을 계약하면서 신고리 3호기 가동을 통해 안정된 모델임을 입증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진 : 위약금과 원전 수출을 밀양 지역 주민 재산 피해와 생존권을 맞바꾼 셈이 되네요. 한전이 이에 대해 해명이나 부인을 하지는 않았나요?

 

 : 변 부사장이 밝힌 내용이 계약에 들어 있지 않다는 얘기를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계약이 적용되는 시점이 2015년부터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밀양 초고압 송전탑 건설과 관련이 적다는 얘기는 하고 있습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3. 진짜 세뇌는 한전과 정부가 하고 있다

 

진 : 전력난 해소를 위해 밀양 송전탑 건설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군요. 어쨌거나 한전은 이번 변 부사장의 발언을 두고 돌출적인 행동으로 여기고 있지요?

 

주 : 변 부사장이 밀양 송전탑 문제를 두고, 어르신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 반핵단체와 천주교에 세뇌당한 데 원인이 있다는 말도 같은 자리에서 했거든요. 밀양이 터가 좀 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 : 한전이 곧바로 사과를 하기는 했다고 들었어요. 변 부사장의 개인적인 돌출 발언으로 지역 주민과 해당 종교인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 깊이 사과 드린다, 앞으로도 지역 주민들과 진정성 있는 대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말입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주 : 저는 이 기회에 좀 따져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뇌는 과연 누가 하고 있는지, 이른바 반핵단체나 특정 종교집단이 하는지, 아니고 정부와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가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원자력 발전이 절대 값싸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으며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세계적인 상식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2011년 저 끔찍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 눈 뜨고 보고 나서도 64%가 원자력에 호의적이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정부와 한전이 우리 국민 전체를 세뇌한 결과라고 봐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진 :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지나치지 않은가요? 우리 국민을 정부나 한전의 선전에 휘둘리기나 하는 존재로 얕잡아보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요.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주 : 그렇게 보인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부 원자력 홍보 비용을 보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2011년 지식경제부의 에너지 분야 홍보비가 전체 265억 5100만원 집행됐는데 그 절반에 가까운 125억원이 원자력 분야였습니다. 반면 정작 필요한 에너지 절약 홍보비는 101억 5100만원으로 24억원이 적었고요, 신재생에너지 분야 홍보비는 3억5000만원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진 : 원자력 발전이 안전하다거나 깨끗하다는 광고가 다 그런 데서 나오지요. 그런 홍보를 진행하는 원자력문화재단이 정부 산하 기관이거든요. 원자력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다시 밀양으로 돌아가 보지요.

 

4. 산업용 전기요금에 누진제 적용해 소비 줄여야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주 : 밀양 송전탑과 연결되는 신고리 3호기가 원자력 발전, 그러니까 핵발전소거든요. 여기서 생산되는 전기를 다른 지역으로 뽑아가기 위해 송전탑이 필요한 셈인데요.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전기 절약이고요, 다른 하나는 소비 지역과 생산 지역의 일치입니다.

 

진 : 전기 소비를 줄이거나 최소한 지금보다 늘리지만 않는다면 전기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새로 건설할 필요가 없겠지요. 또 전기 생산지와 소비지가 다르지 않다 해도 마찬가지 효과가 나겠고요. 그런데 지금 실정은 어떤가요?

 

주 : 먼저 전기 절약을 짚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1인당 전기소비량은 8970킬로와트입니다. 일본은 75% 수준인 6739킬로와트, 독일은 63%인 5644킬로와트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낭비입니다.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에서 보내온 사진.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정용과 산업용 가운데 산업용 전기가 지나치게 낮기 때문입니다. 가정용은 1킬로와트당 평균 120원인데 반해 산업용은 3분의2수준인 평균 80원입니다. 게다가 산업용은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정용은 누진제 때문에 700원까지도 올라가지만 산업용은 아무리 많이 써도 80원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굳이 절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산업용에 누진제만 도입해도 산업체들의 전기 절약을 위해 크게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소비 많은 데 핵발전소 지으면 송전탑도 필요없다

 

진 : 소비와 생산의 일치에 대해서도 말해 주시지요.

 

한겨레 신문 2012년 8월 25일치.

주 : 서울은 소비가 서울 4만6903기가와트인데 반해 생산은 1384기가와트입니다. 전력자급률 3%입니다. 경기와 인천 포함해 수도권 전체를 보면 16만5988기가와트를 쓰는데 생산은 9만4127기가와트입니다. 56.7% 전기 자급률입니다.

 

반면 경남은 소비가 3만3071기가와트인 반면 생산이 6만9579기가와트입니다. 전기 자급률이 210%에 이릅니다. 여기에 울산·부산까지 포함해도 소비 8만1830기가와트에 생산 11만 9458기가와트로 자급률 146%입니다. 수도권으로 빼내가려고 더 생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송전탑이 필요하게 됐고 그 때문에 지역민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게 하려면 이를테면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한 수도권에 더 많은 발전소를 지어야 합니다. 정부 주장대로라면, 원자력 발전소가 매우 안전하기 때문에, 건설을 기피할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진 : 가까운 지역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주로 사 먹자는 로컬푸드운동처럼 전력에 대해서도 로컬발전운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얘기 고맙습니다.

 

김훤주

 

참고 자료 지역별 전기 소비량과 생산량(단위 : 기가와트) 그리고 자급률

 

인천 22241/68952 310%

경기 96844/23791 25%

충남 42650/118041 277%

대전 9059/156 1.7%

충북 20453/1580 8%

전북 21168/7181 34%

전남 27316/69480 256%

제주 3710/2878 78%

강원 15876/12046 76%

경북 44167/71706 162% 

대구 14822/198 1.3%

대구·경북 58989/71904 121.9%

울산 28198/10749 38%

부산 20561/39130 190% 

경남 33071/69579 210%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Viewing all 1163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