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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당해도 국적 못 버리는 재일동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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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인생사나 가족사에 굴곡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노역 등 일제에게 끌려간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남북 대립이 심해지면서 겪게 된 어려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적을 바꿔 일본으로 귀화만 하면 겪어도 되지 않을 어려움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재일동포 2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4월 21일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마산으로 왔습니다. 이상재(62·일본 교토시)씨 일행입니다. 남자 셋 여자 넷 모두 일곱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이씨는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사회적 기업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에 자기들 고향 탐방을 기획하고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해딴에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이들과 의논해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고향을 중심으로 일정을 꾸려 일행을 맞았습니다. 탐방 지역은 고향 마을(임곡리·봉곡리·곡안리)과 둘레 역사유적지였습니다.

 

1. 굴곡진 역사만큼 복잡한 재일동포 국적

 

2007년 현재 일본의 외국인 등록 현황을 따르면 재일동포는 59만3489명입니다. 재일외국인 가운데 재일 중국인에 이어 두 번째인 27.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적으로 있다가 귀화한 사람(생존자 기준, 전체 귀화 인원은 재일본 대한민단 통계를 따르면 1952년부터 2011년까지 33만2206명)이 17만명 안팎으로 짐작되므로, 전체를 합하면 70만 명 규모랍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대한제국 신민(臣民)은 모두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국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이들의 국적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이태 뒤인 1947년 대일본제국 헌법 부칙에 따라 이들의 국적은 조선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경술국치 이전 상태로 일본이 제멋대로 돌린 셈으로, 쉽게 말하자면 남쪽 대한민국도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너희는 조선 사람’이라고 이른 셈이라 합니다.

 

아버지 집터로 짐작되는 자리에서. 앞줄 둘째 전삼조·이영순씨 부부, 뒷줄 왼쪽부터 셋째 이상재·이수자씨 부부, 첫째 김보광·이영자씨 부부, 그 옆에 눈물을 훔치는 이가 넷째 이지자씨.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뒤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꿀 수 있게 됐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은 일본이 아직 수교를 하지 않은 상태라 무국적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일동포 국적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으로 나뉩니다. 말하자면 조선적 재일동포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았을 뿐이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재일동포 본적을 보면 경남이 가장 많습니다. 재일본 대한민단 2005년 통계를 보면 전체 59만8687명 가운데 경남 출신이 17만2343명으로 비중이 28.8%에 이릅니다. 아무래도 일본과 가깝다는 사정이 크게 작용했겠습니다.

 

해방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은 재일동포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썼습니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200만 명 가운데 140만 명이 대부분 남쪽 그리고 소수는 북쪽을 골라 갔지만 생계·정치 문제 등으로 그대로 남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 1948년 제주도 4·3사태와 여순사건, 1950년 한국전쟁 등으로 목숨 부지조차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밀입국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1954년 제정된 경범죄처벌법 적용 대상에 밀항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그와 같은 밀출·입국이 잦았음을 거꾸로 일러줍니다. 지금이라면 무겁게 처벌을 받겠지만요…….

 

2. 여자형제 넷과 그 남편들인 고향 방문 일행

 

이상재씨 아버지 고향 마을 곡안리에 있는 성주 이씨 재실.

모두들 조금씩 우리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상재씨가 가장 잘했습니다. 이씨는 “한국말을 잘 할 줄 몰랐는데 어른이 된 다음 일부러 배워서 지금처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일행을 소개했습니다. 여자 네 명-이영자(64)·영순(62)·수자(59)·지자(56)씨는 모두 형제였고 남자 셋-김보광(69)·전삼조(66)·이상재씨는 그 남편들이었습니다.

 

남편들 가운데 넷째 동서는 일이 있어 동행하지 못했다는데, 이 씨는 자기가 동서인 남자들 가운데 셋째라 했습니다.(다섯째 부부와 여섯째도 있는데, 이번 걸음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전날 부산에서 묵고 21일 마산으로 왔는데 일제 강점기 이른바 적산 가옥이 남아 있는 두월동의 함흥집에서 냉면을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2000년 7월 불타기 전에는 함흥집도 적산 가옥이었으며 바로 위에 있는 집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 적산가옥이라 일러줬습니다.

 

일대를 신마산이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곳으로 위쪽 제일여고에는 지금도 신사 자리가 있으며 길가 벚나무도 당시 심었다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아내 어머니 고향이 진전면 봉곡리이고 아버지 고향도 가까운 임곡리입니다. 아버지 이시한(李時漢)은 1920년 생이고 어머니 이두수(李杜洙)는 1926년 생입니다. 또 호적에는 혼인 신고를 한 날짜가 해방 전인 1943년 3월 29일로 돼 있는데 일본에서 했는지 고향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첫 일정으로 진해현 관아를 둘러보고 돌아나오는 길에 이상재씨가 말했습니다. “장인·장모 고향집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해요. 가까운 비슷한 데라도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좋지요.”

 

막걸리를 들고 가는 둘째동서 전삼조씨.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째 동서였는데,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점심 먹는 식당에서부터 막걸리를 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서 진동현 관아에서 내릴 때는 막걸리를 들고 있지 않았는데, 다시 임곡리 장인 고향에서 내릴 때는 막걸리를 또 들고 있었습니다. 막걸리를 좋아해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하는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3. 차례로 둘러본 고향 마을 임곡·봉곡·곡안리

 

일행은 안내를 따라  아버지 이시한의 호적에 나와 있는 고향집 출생지인 임곡리 492번지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찾아 들었습니다. 대문 기둥은 남아 있었지만 문짝은 있지 않았습니다. 안쪽은 고랑을 타고 마늘을 심어놓았을 뿐 빈터였습니다.

 

 

대문 들머리 한켠에는 오래 된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감나무 밑둥 굵기를 보니 꽤 오래된 나무 같다. 이 나무는 아버지 모습을 지켜봤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일행 가운데 한 명이 까맣게 반들거리는 조약돌이 든 비닐봉지를 하나 끄집어냈습니다.

 

조약돌을 묻습니다.막걸리를 뿌립니다.

 

감나무 바로 아래 흙을 파더니 돌아가면서 봉지에서 조약돌을 몇 개씩 끄집어내어 조그만 구덩이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러고는 가져온 막걸리를 조그만 잔에 부어서 그 위에다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막걸리를 들고 온 까닭을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조약돌을 집어넣고 막걸리를 뿌린 위로 흙을 다시 집어넣어 다지는 여자형제들은 다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 뒤로 집이 한 채 더 있었습니다. 야트막하게 산을 배경으로 삼아 대숲이 뒤를 받치고 있고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였습니다.

 

뒤에 있는 집은 멀리서 봐도 옛날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살았음직한 집 모양이다.” 때마침 그 집에서 사람이 나오기에 ‘일본에서 부모 고향집을 찾아왔다’고 사정을 얘기하고는 잠깐 들어가 봐도 되겠느냐 물었더니 사람이 안 사는 집인데 자기도 관리 차원에서 잠깐 들렀다 가는 길이라며 마음껏 둘러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자형제와 남편들은 애잔한 눈길로 각진 기둥이나 대청마루를 쓰다듬고 우물 자리도 둘러보고 방문도 열어보고 했습니다. “일본 아버지 집에도 이렇게 대숲이 있고 산이 있고 들판이 보였다. 아버지가 고향집을 많이 떠올렸나 보다.” 그러고는 집을 뒤로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어머니 고향집이 있었던 봉곡리 도산마을로 향했습니다. 마을회관에 들러서 70년 가량 전에 옆동네 임곡리로 시집간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할머니가 기억해 냈습니다. 택호가 ‘대바구댁’이라고 했습니다. ‘대바구’는 도산마을을 이르는 우리말이랍니다.

 

하지만 호적에 적힌 출생지(봉곡리 188번지)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번이 분할되는 바람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텅 비어 있는, 분할되기 전 지번을 통째로 눈에 담고는 마을 당산나무가 있는 데로 돌아나왔습니다.

 

어머니 고향 마을에서 한 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일행은 나지막하지만 가파른 언덕배기를 힘들여 올라 당산나무 앞에다가 좀 전처럼 구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비닐에서 꺼낸 조약돌을 몇 개씩 집어넣고는 막걸리를 부었습니다. 몇몇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냥 조약돌이 아니라 일본의 아버지 어머니 무덤에 깔려 있던 돌이었습니다. 부모 두 분은 생전에 고향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향을 찾는 마지막 여정은 곡안리였습니다. 이상재씨 아버지 고향이 여기였습니다.

 

 

당산나무 아래에 조약돌을 묻고 나서.

 

“결혼할 때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아내 고향이 바로 제 고향 옆이었어요.” 여지껏 남아 있는 마을숲을 둘러보고 옛날 돌담길을 거닌 다음 산기슭에 붙어 있는 성주 이씨 재실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 무덤이 저쪽 위에 있기는 한데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안 돼요. 오늘은 여자들을 위한 날이야.”

 

“일본서 한국 국적으로 살려면 차별과 멸시 각오해야”

 

곡안리에는 슬프고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1일 새벽 곡안 마을 사람 150명 가량이 피란와 있던 여기 재실을 향해 미군이 기관총으로 사격해 86명이 숨지도록 만든, 이른바 미군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아버지 고향 마을 곡안리 정자에 나란히 선 이상재씨와 아내 이수자씨.

 

이상재씨는 자기 친척도 해코지를 입었다 했습니다. 이씨는 이태 전에 이 학살 사건을 처음 알게 됐다고 했습니다. 최초 보도는 1999년 9월 경남도민일보가 했습니다. 이씨는 이 또한 일본에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주 이씨 재실 가는 길.

 

총탄 자국이 뚜렷한 우물 콘크리트 둘레를 보여주니 모두들 소리를 지를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이씨 말고 다른 일행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뒤에 나올 때 여자형제 가운데 한 명은 오면서 꺾었던 자운영 꽃 한 송이를 우물 위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우물 총탄 자국을 살피는 일행.일행이 우물 위에 올린 자운영 꽃.

 

이씨는 경남도민일보의 보도를 두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80년대는 몰라도, 90년대 후반에는 가능한 일이었다며 용기가 꼭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나 이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피해가 뻔히 예상되는데도 이를 무릅쓰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한국 사람임을 숨기지 않고 살면서 깨친 이치라는 얘기였습니다.

 

이씨와 일행은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길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고만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민족의식이 뚜렷해 재일동포 2세 자식들을 한국인으로 키우셨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요즘 보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경화 바람이 이미 거세져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은 죽여도 되고 강간해도 되는, 냄새나는 열등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귀화를 한답니다. 귀화를 하면 사정이 달라진답니다. 그래서 재일동포 2세는 대부분 귀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2세인데도 이씨와 일행은 귀화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내외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귀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씨 등은 특히 한글에 대한 자랑과 자부가 대단했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습니다. 허투루 들은 내용이 아니고 책을 읽거나 해서 깊이 공부해야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4. 한국 정권 안보에 악용되면서도 국적 못 버리는 까닭

 

재일동포에 대한 핍박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도 주어졌습니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걸핏하면 터져나왔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 사건이 그것이었습니다.

 

마산 일대에서 처음으로 민족주의 신교육이 이뤄졌던 진전 오서리 경행재도 둘러보고.

 

일본에서는 특별한 제약 없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북한에 다녀왔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때로는 그런 건덕지도 없이 남한에 유학 와 있는 젊은 재일동포 2세 청년들을 붙잡아다 고문하고 징역을 살렸습니다. 1971년 터진 서승·서준식 재일동포 형제 유학생 간첩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한 해 전 북한에 갔다왔다는 이유만으로 붙잡아 수사했으나 증거가 모자라 갖은 고문을 했고 그 잔인한 고문을 이기지 못한 형 서승이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를 안고 뒹굴었습니다. 서승은 지금도 얼굴에 흉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도 형제는 감방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 안보를 위해 악용하는 정부가 행여 밉지는 않았을까요?

 

“민주주의 거꾸로 하고 독재하고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심심하면 터지는 것 일본에 있으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정권은 그렇지만 민족은 사랑합니다. 민족애, 민족의식 이런 것은 버릴 수가 없어요. 내 뿌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는 지키고 살아야 하잖아요?”

 

5. 조국과 고향의 역사도 되새기면서

 

이상재씨 일행의 이번 고향 나들이가 대단해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데 모여 비바람을 이기고 피어나는 들꽃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집안 한 가족이 한꺼번에 통째로 이렇게 ‘뿌리’를 찾아오기는 누가 뭐라 해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곡안리 마을숲을 거닐며.

 

게다가 그이들은 고향만이 아니라 지역 역사유적까지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갔습니다. 임곡리 들머리 있는, 김구 선생이 해방 이후 환국(還國)한 다음 가장 먼저 찾은 묘소였던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 무덤과 죽헌 선생을 비롯해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일제 강점기 신식 교육과 민족운동의 근거지였던 진전면 오서리 경행재(景行齋)를 들렀습니다.

 

앞서서는 진동시장 옆에 있는 진해현 관아에 들러 동헌도 보고 마방·형방 따위 딸린 건물도 봤으며 삼진중학교 마당에 있는 객사 자리도 훑었습니다. 나오는 길에는 선정비 빗돌을 쓰다듬으면서 “진짜 선정을 해서 선정비를 세웠을까” 읊조리기도 했습니다.

 

진해현 동헌.진동 비석거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592년과 1594년 두 차례 승리를 거둔 당항포해전의 현장인 진전면 속개 마을도 눈에 담았습니다. 또 고성군 동해면에 들어가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침한 일본 함대 주력이 숨어 있던 진해만 앞바다에도 머물렀습니다.

 

진해만 일대가 바라보이는 바다마루라는 카페에서. 여기는 평화를 애타게 바라는, 임진왜란 러일전쟁의 격전지입니다.

 

일본 함대는 1905년 5월 27일 새벽 발틱함대가 중국 상하이를 거쳐 쓰시마해협으로 들어가자 여기서 나아가 포격함으로써 승리했습니다. 당시 일본 해군 제독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 平八郞)였습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진정으로 존경했다고 합니다. 또한 발틱함대를 격침한 도고의 작전과 전술은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운 것이라고합니다.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동포 2·3세들의 고향 방문을 크게 반깁니다. ‘뿌리’의 역사문화아름다움을 찾는 걸음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경남은 모두 기획해 낸답니다. pole08@hanmail.net나, 010-2926-3543 또는 055-250-0126으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선 일행들.

 

나흘 뒤인 25일, 교토로 돌아간 이상재씨가 보내온 메일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훤주님 여행 때 정말 많이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덕택으로 인생 깊이 남을 좋은 여행으로 되었어요. 모두 감동하여 돌아왔고 이번 여행이 참으로 좋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저희 해딴에도 이런 재일동포 2세 여러 분을 만나 무척 좋았고 감동도 크게 받았답니다.

 

김훤주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창원 광려천 산책로가 부실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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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해도 안 돼 망가진 광려천 산책로

 

창원시 내서읍 롯데마트 앞 광려천교에서 동신아파트가 있는 중리교까지 왕복 5km 정도 되는 거리에 만들어진 광려천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곳곳이 금이 가고 깨져 있습니다. 2012년 10월 준공됐다고 하니 한 해도 못가 난리가 난 셈입니다.

 

경남도민일보는 5월 21일치와 22일치에서 이 문제를 짚었습니다. 여기에 창원시와 시공회사 관계자의 말이 나오는데, 문제가 된 광려천을 바로 옆에 두고 사는 저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거나 또는 인정할 수 없는 발언이 대부분입니다.

 

적어도 제가 살펴본 바로는, 잔금이 나 있지 않은 데가 거의 없었고 이른바 보수라고 해 놓은 것도 문제가 많았으며 특히 이음매 부분은 부실한 정도가 심각했습니다. 게다가 서로 높낮이가 다른 부분도 있어서 어떻게 이렇게 하고도 준공 검사가 날 수 있었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지기까지 했습니다.

 

광려천 산책로(녹색)와 자전거도로(붉은색).

 바로 옆 우레탄을 깐 도롯가 자전거도로는 이렇게 깔끔합니다.

 

2. 이해하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공무원과 업자의 말씀 

 

그런데 경남도민일보 21일치 보도를 보면 “콘크리트 포장을 맡았던 시공사 관계자는 ‘부실은 아니다. 재시공을 통해 보완할 수 있고, 차후에 대책을 세워놓은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콘크리트에 크랙(crack·금)이 생기면 그 틈새로 물이 들어가 구조적인 문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보수하게 된다. 구조적인 문제를 염려할 상황은 아니다’며 ‘실리콘 같은 충전재를 채워 크랙을 보수했고, 이렇게 표시된 구간에는 미관상 앞으로 다시 색깔 막을 씌운다. 도막 시공사도 그런 지시를 함께 받았다’고 해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관계자는 ‘2012년 상반기에 발견돼 그해 하반기 크랙 보수를 한 차례 했다. 시행착오를 했으니까 올 하반기 진행할 중리교 하류 공사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도록 하겠다’면서 ‘콘크리트는 여름철과 겨울철에 팽창·수축 때문에 보수를 한다. 온도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정확한 원인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지금 단정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고 했습니다.

 

이중으로 만든 도막형 바닥재조차도 서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도막형 바닥재 가운데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또 22일치 보도를 보면 “창원시 재난안전하천과 관계자는 ‘하천이 넓고 둔치가 확보된 곳으로 보행성, 미관, 평탄성, 경제성 등을 고려해 현장에 가장 적합한 재료로 선정했다’면서 ‘도막형 바닥재가 벗겨진 현상이 전반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국부적으로 생겨 재료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습기나 물이 스며 발생한 것인지 시공 자체 잘못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공무원과 업자의 말에서 제가 이해·인정할 수 없는 대목을 짚어보겠습니다. ‘콘크리트 포장을 맡았던 시공사 관계자’의 말입니다. 전반적으로 ‘콘크리트 포장에는 금이 가지 않아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부실은 아니다’ 하는 취지로 읽힙니다.

 

 

3. 부실인데도 부실 아니라 하고 문제인데도 문제가 아니라 하고

 

하지만 콘크리트 포장에 대해 제기된 문제가 아닙니다. 콘크리트 포장이 아니라 그 위에 ‘이중 타일 형태로 덮여 있는 도막형 바닥재’가 잘못 시공돼 들고 일어나고 금이 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자전거도로 따위에서 쉽게 보는 우레탄이나 아스콘처럼 단일하게 시공돼 있지 않고 세 겹으로 돼 있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인 셈입니다.

 

다음으로는 ‘창원시 재난안전하천과 관계자’의 발언입니다. ‘바닥이 벗겨진 현상이 국부적으로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전반적으로’ 생겨나 있습니다. 4.5km 구간에 금이 가지 않은 데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재료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100% 재료 문제로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보통 보는 자전거도로처럼 우레탄이나 아스콘 같은 단일한 재료로 했다면 적어도 표면이 들고 일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가장 아래 콘크리트를 깔고 그 위에 아주 얇게 2~3mm 되는 이른바 ‘도막형 포장재’를 그것도 2중으로 깔았습니다. 그러니까 3중이고, 이렇게 3중으로 깔린 재료들이, 기온이나 물기 정도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정도가 같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단단하게 붙여놓았다 해도 언젠가는 떨어지게 마련이라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무엇에 찍혀서 움푹 이렇게 패인 데도 있습니다.

 

‘창원시 재난안전하천과 관계자’의 이어지는 발언도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이는 도막형 바닥재가 들고 일어나거나 금이 가는 현상이 ‘습기나 물이 스며 발생한 것인지 시공 자체 잘못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은 이렇습니다. ‘습기나 물이 스며들어도 바닥이 들고 일어나지 않고 금도 가지 않도록 해야 제대로 시공한 것’입니다. 습기나 물이 스며들면 바로 들고 일어나도록 한 자체가 잘못된 시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이 공무원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광려천에 내려앉은 왜가리. 이 새도 광려천 산책로 자전거도로 공사가 한심하다고 할 것 같습니다.

 

4. 이 비 그치면 광려천 서러운 틈들이 더욱 벌어지것다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그쳤습니다. 고려 시대 시인 정지상의 ‘송군(送君)’이라는 한시가 생각나네요. 첫 구절이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입니다. ‘비 그치니 긴 둑에 풀빛이 많아지네’ 정도가 되겠네요.

 

이를 1954년 이수복이라는 시인은 ‘봄비’라는 시에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고 멋들어지게 변주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바꿔 놓고 싶습니다. ‘이 비 그치니/ 광려천 긴 언덕 산책로에/ 서러운 틈들이 더욱 벌어지것다’.

 

5. 갈라지고 벌어지고 깨어진 데가 이렇게 많은데

 

같이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먼저 곳곳에 금이 나 있고 틈이 벌어져 있는 현장입니다. 제게는 단지 손가락과 볼펜밖에 없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들어낼 수 있는 데가 억수로 많았습니다. ‘콘크리트 포장’과 ‘도막형 바닥재’의 접착 부분이 그만큼 허술했습니다.

 

 

 

 

 

 

 

 

 

 

 

 

6. 높낮이를 맞추는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공사

 

다음은 높낮이가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가장자리를 이루는 부분과 안쪽 콘크리트 포장을 한 데가 거의 1cm가량 차이가 나는 데가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이런 것은 시공의 기본입니다.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7. 특히 심각하게 잘못된 이음매 부분

 

특히 심각한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포장’과 ‘도막형 바닥재’는 대략 4m 정도 간격으로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 끊어진 부분에 틈이 벌어져 있게 마련인데요 이를 ‘실리콘 같은 충전재’와 시멘트 그리고 청색 테이프로 메워놓았습니다. 이렇게 해놓았으니 여기서부터 금이 가는 현상과 들고 일어나는 현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음매를 중심으로 금이 가거나 깨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메움도 동일한 방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청색 테이프만 발라놓은 데도 있고 ‘실리콘 같은 충전재’만 채워 넣은 데도 있습니다. 물론 ‘실리콘 같은 충전재’를 채워넣은 위에 청색 테이프를 발라놓은 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밑을 보면 시멘트가 들어 있는 데도 있고 아니면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데도 있습니다. 게다가, ‘도막형 바닥재’까지 발라놓은 위에 이렇게 ‘실리콘 같은 충전재’를 바른 데도 있고 아니면 ‘실리콘 같은 충전재’를 바른 틈새 위에다 ‘도막형 바닥재’를 깔아놓은 데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렇게 이음매가 부실하다 보니, 이 부실한 이음매에서부터 ‘도막형 바닥재’가 갈라지고 벌어지고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음매 문제만 해결을 했어도 지금 드러난 현상이 절반은 줄었을 것입니다.

 

8. 보수 공사를 한 부분도 문제

 

마지막으로, 이른바 ‘보수’랍시고 한 대목입니다. 창원시와 시공업체는, 지난해 상반기 문제가 나타나 하반기에 보수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것은 보수가 아니라 ‘땜질’입니다. 임시 처방이고,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기까지 합니다.

 

제가 이 보수 공사 부분은 크게 신경써서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요, 만약 지금 올려놓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있으면 바로 광려천 산책로에 내려가 좀더 찍어오겠습니다. 어쨌건 보수한 부분을 중심으로 잔금이 계속 가고 있거나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보수는 그러니까 갈라진 금을 따라 ‘실리콘 같은 충전재’를 바르거나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르거나 집어넣는다고 해도 이 갈라진 금이 완전히 아물지 않고, 나아가 이렇게 먼저 난 금을 중심으로 삼아 다시 잔금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땜질’이고 그것도 잘못된 ‘땜질’입니다.

 

9. 마지막까지 성의없이 작업했다?

 

또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사람 모습입니다. 웃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름 디자인이나 성의가 들어 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해당되는 비용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이런 우스운 꼴은 아예 만들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저는 봅니다. 자전거도로 표지는 벌써 지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색깔이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10. 도대체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알려진대로, 여기 이 광려천을 둘러싼 갖가지 공사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2009년에 여기로 이사 왔는데, 새벽 두세 시에도 굴착기가 공사하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잔 적이 많습니다.

 

이렇게 지역 주민들한테 괴로움을 끼친 결과가 엉뚱하게도 하천 둔치 산책로와 자전거도로의 부실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009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광려천 환경정비사업’은 135억원 예산을 들인다는데, 엉뚱한 사람 엉뚱하게 배만 불리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걷기 행사 모습. 안홍준 선수 모습이 보입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누군지는 모르지만, 밟아주고 싶었답니다.

 

2012년 10월 6일 여기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준공에 때맞춰, 이 지역 출신 안홍준 국회의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광려천을 사랑하는 걷기 행사’를 했습니다. 안홍준 선수는 여기 예산을 따오는 데 크게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에는 이토록 무신경해도 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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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밀 밀사리, 추억과 체험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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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에게는 추억을 되살려 볼 기회가 됐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합천·사천 같은 데서 농사짓는 생산 농꾼들과 창원·진주 같은 데 사는 소비 도시민이 서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25일 합천군 초계면 관평리 합천 우리밀 산물 처리장 일대에서 대략 1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2013년 우리밀 밀사리 문화한마당' 얘기랍니다.

 

아이들은 재잘거립니다. "눈이 따가워 더 못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어른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래? 이 쪽 바람부는 반대편으로 서렴. 이렇게 대충 훑어서 손으로 싹싹 비벼 껍질을 벗긴 다음 후후 불어서 알맹이를 먹으면 되거든."

 

 

아이들은 짚으로 살짝 그을린 밀을 들고는 일러주는대로 따라합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른이 대신 비비고 까서 먹입니다. 아직 덜 익어 푸른빛이 세게 도는 낱알이 입 안으로 털어넣어집니다. 덕분에 입 가장자리는 검댕으로 금세 까매집니다.

 

바로 옆 밀밭에서 이런 사람 풍경이 펼쳐지지만 우리밀 산물 처리장 마당에서는 합천 가회면 나무실마을에 사는 서정홍 농부시인의 사회로 개회식이 진행됩니다. 하창환 합천군수도 왔고 허홍구 합천군의회 의장도 왔습니다. 그밖에 경남도의원도 왔는데, 이런 손님들이 줄줄이 소개됐습니다.

 

사회 보는 서정홍 선수.인사말하는 김석호 서누.오른쪽 합천군수, 그 옆 합천군의장.

밀사리 행사를 주최한 김석호 경남우리밀생산자협의회 회장은 나와서 인사말을 했습니다. 제가 귀기울여 듣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충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식량자급률이 쌀은 80%대이고 밀은 2%밖에 안 되며 전체적으로는 20%대인데 더욱 높여야 합니다", "60년대 70년대만 해도 우리밀은 쌀·보리와 더불어 주식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밀을 제2 주식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이 농사짓고 먹도록 합시다".

 

행사장은 흥겨운 잔치마당이었습니다. 개회 행사도 크게 격의 없이 잘 치러졌지만 둘레에 늘어선 천막 아래 공간마다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했습니다.

 

우리밀국수는 공짜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밀로 만든 파전과 붕어빵과 술빵, 그리고 합천산 쌀막걸리 등은 1000원에 한 장씩 하는 식권과 바꿔 먹을 수 있었습니다. 볶은밀과 뻥튀기밀은 체험거리로도 제공되는 한편으로 한 움큼씩 사람들에게 나눠졌습니다.

 

아이들이 도리깨질을 하고 있습니다.저도 한 번 도리깨를 잡아봤습니다.

우리밀 관련 업체에서 만든 갖은 상품들은 친환경 음식을 찾는 이들에게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밀짚으로 여치 같은 곤충들 집이나 밀피리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따라해 보는 공간도 있었고 그 옆에서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 도리깨를 돌려 밀 타작을 해볼 수 있는 자리도 있었습니다.

 

밀짚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개회식은 박을 매달아놓고 오미자를 던져 터뜨리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곧이어 국수가 나왔습니다. 어른들은 그 때부터 좀더 본격적으로 곳곳에 모여 막걸리 잔을 기울였습니다. 밀사리에 열심인 아이들 입은 좀더 까매졌겠지요.

 

진해 샘바위공부방 홍진옥 선생님과 아이들.

 

경남우리밀생산자협의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오후 3시 조금 넘어 마쳐졌습니다. 경남도·합천군·농촌진흥청·국산밀산업협회·도투락식품·우리밀급식(푸르나이)·우리밀경남사업단·합천동부농협·우리밀빵마을·한국맥류산업발전연구원·안전한학교급식을위한합천생산자영농조합법인 등이 후원했습니다.

 

그런데요, 이날 행사장에서 농민들한테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낫·호미·가위·예초기 날·금속숫돌 따위를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50대 또는 60대로 보이는 장년이었는데요, 때때로 쌍말까지 섞어가면서 모인 구경꾼들한테 때로는 '형님', 때로는 '아버지' 해 가면서 친근 모드로 멋들어지게 잘 팔았습니다.

 

 

'할배들'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즐거운 때문입니다.

칼이나 낫이나 가위의 날을 가는 시범은 제비처럼 날렵했고요, 하나씩 덤으로 더 얹어주는 장사셈은 푸짐하고 또 푸짐했습니다. 저런 기세로 팔려나가다가는 '니야까'에 있는 것들이 1시간도 채 안돼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잘 팔립니다.가운데 플라스틱 통 아래 돈이 수북했습니다.

 

"하나 더 달라", "못 준다, 그러면 장사 밑진다" 이런 실랑이조차 흥겨웠는데요 대부분은 이 장사하는 사람이 지고야 말았습니다. 여기 모인 어르신 농꾼들한테는 더없이 재미진 자리였습니다. 구경하고 있던 저도 흥에 겨워져 양손 가위를 셋씩이나 사고 말았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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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려천 환경정비가 부실인 또다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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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려천 산책로는 시공 잘못으로 부실해졌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롯데마트 삼계점 앞 광려천교에서 시작해 동신아파트가 있는 중리교까지 이르는 왕복 5km정도 되는 거리에 대한 광려천 환경정비사업에서 또다른 부실을 하나 짚어보려 합니다.

 

29일 저는 블로그를 통해 여기 둔치에 놓인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곳곳이 깨어지고 틈이 벌어지는 잘못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시공을 잘못한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근본 원인은 재료 또는 공법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우레탄이나 아스콘 같이 단일한 재료를 써서 아래위 구분 없이 통째 하나로 깔았다면 지금처럼 갈라지거나 깨어지거나 벌어지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광려천 산책로(녹색)와 자전거도로(붉은색)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아래에 ‘콘크리트 포장’을 한 다음 그 위에 ‘도막형 바닥재’를 2중으로 깔아 붙이고는 경계석으로 가장자리를 둘러 마감했습니다. 그래서 접착을 두 차례 해야 했습니다. 콘크리트 포장과 도막형 바닥재 사이, 그리고 도막형 바닥재와 도막형 바닥재 사이…….

 

광려천 둔치 산챌와 자전거도로. 오른쪽에 창포가 보입니다.

 

이런 방법이 당장 드는 돈은 적을는지 몰라도 단일한 재료로 통째 시공했을 때와 견주면 훨씬 튼튼하지 못한 결과를 내올 것은 바로 뻔히 보입니다. 접착을 두 번 했다는 말은, 나중에 떨어져 갈라질 수 있는 틈이 두 군데 있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게다가 여기는 둔치입니다. 언제라도 강물이 넘쳐흐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물기에 충분히 강한 재료와 공법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더욱이나 큰물이 지면 그 홍수가 머금는 엄청난 에너지와 자갈·모래·바위 따위에 부딪히는 충격까지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단일한 재료가 아니라 두 가지 재료를 썼습니다. ‘콘크리트 포장’과 ‘도막형 바닥재’가 물기나 열기 여부에 따라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정도가 같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언제라도 쉽게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실제로 진행된 현실도 그러합니다.

 

2. 변소도 쓰레기통도 하나 없다

 

 

그런데 산책로만 놓고 보면 이런 정도에서 문제가 그치고 말지만, 이른바 ‘광려천 환경정비사업’ 전체를 두고 보면 곳곳에 부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2004년부터 올해까지 10년 동안 수해 방지 또는 생태하천 조성 같은 여러 명목으로 적지 않은 예산을 들인 뒤끝이 이렇습니다.

 

먼저 작은 문제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눈높이를 지역 주민들에게 맞추지 않은 결과입니다. 롯데마트 삼계점 광려천교에서 동신아파트 중리교까지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광려천 양쪽으로 둔치에 나 있습니다.

 

대략 4.5km라고 하는데요, 이 구간에 쓰레기통도 하나 없고 급할 때 오줌을 눌 수 있는 변소도 하나 없습니다. 물론 관리가 어렵다는 측면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민을 위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는 충분히 문제로 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각진 마감도 보기가 좋지는 않습니다.

 

3. 나무도 그늘도 없이 바위만 덩그라니

 

둔치 조경이 허술해 보이는 부분도 짚어 마땅하다고 저는 여깁니다. 여태 이를 두고 주민 의사를 확인하고 반영하는 작업이 있었던 것 같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둔치 곳곳에 일부러 갖다 심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여기 앉아 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곁에 나무가 있어서 그늘을 만들어줘야 좋을 텐데, 그런 식으로 궁합을 맞춘 바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평평하게 다듬은 둔치에 심어놓은 잔디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렇게 메마른 잔디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을는지도 미심쩍습니다만, 제대로 된다 해도 문제는 있습니다. 인공으로 잔디밭을 만들면 사람이 관리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비용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대와 여러 잡풀들이 이미 들어와 자라고 있는데 이것들은 번식력이랄까 생명력이 매우 왕성해서 잠깐만 내버려둬도 곳곳에서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고 맙니다. 지금도 이미 그런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보입니다.

앞쪽에 잔디가 듬성듬성 무리지어 앉아 있고 멀리서 잡풀들이 왕성하게 자라면서 앞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심겨 있는 잔디들 아래로 하수구 같은 물이 흘러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잔디밭을 잔디밭으로 유지하려면 이런 것들을 끝없이 걷어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게 들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자연 생태 그대로 둬서 갈대 따위가 생겨먹은 성질대로 자라게 하면 보기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들 것입니다.

 

4. 정화식물 창포도 엉뚱한 데 꽂혀 있고

 

마지막으로 광려천으로 흘러드는 물길 부분에 대한 처리입니다. 아마 원래는 실개천 자연스런 모습이었겠습니다만 지금은 하수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설계상으로는 생활하수가 이곳으로 섞여 들어오지 못하게 돼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특히 여름철에는 여기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심해 평소에도 사람들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물은 당연히 깨끗하지 않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라든지 따위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부영양화(富營養化)됐다고들 한답니다.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 탓에 영양가가 많아졌다는 뜻인데요, 이는 이 일대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좋지 않은 냄새의 원인도 이 부영양화에 있는데요, 영양가를 머금은 것들이 썩으면서 냄새가 난답니다.)

 

광려천으로 흘러드는 하수구 같은 물줄기. 원래 창포는 저기 돌 틈 사이 같은 데에 심어야 정화 효과를 낸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물에서는 원래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고 더러워진 물에서만 이렇게 무성한 풀들이 확인되는데, 이는 정화가 필요함을 일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포를 정화식물로 삼아 물가에 많이 심습니다.

 

하수구 같은 물줄기가 흘러드는 효과가 미치지 않는 구간에서는 풀들이 무성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창포가 뿌리를 내리고 활동이 왕성해지면 이런 부영양화가 많이 가셔집니다. 음식물 쓰레기 같은 데에 섞여 있는 오염물질이 많이 정화돼 물이 맑아지는 셈입니다.

 

지금 광려천에 가 보면 엉뚱하게도 이런 창포가 둔치에 조경용으로 심겨 있습니다. 이래서는 정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물가에 또는 물 속에 심어야 창포가 오염물질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야 창포도 잘 자랍니다.

 

그런데 창포가 숮ㄹ 정화에 좋다고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이처럼 창포를 가져다 심기는 했지만 정말 제대로 심지 않고 엉뚱한 데에 품을 들인 꼴입니다.

 

물가가 아니라 둔치에 심겨 있는 창포.

 

그래서 지금도 하수구 같은 물줄기가 광려천으로 흘러드는 언저리에는 저토록 무성하게 잡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광려천 환경 정비 사업’이 엉터리로 진행됐음을 일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잘못이 바로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둔치에 심겨 있는 어린 창포들.

 

환경을 정비했다는데도 그 결과를 보면 수질 정화에는 아무 효과도 없고 그 쪽으로는 업자나 관련 공무원이나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공한 업체에도 잘못이 있겠지만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창원시에도 잘못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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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광려천 산책로가 부실이 아니라고?’ http://2kim.idomin.com/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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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제주 여행 19만9000원은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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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면서도 비지떡이 아닌 해딴에 제주도 여행

 

해딴에의 1박2일(1박4식) 제주도여행 비용은 19만9000원입니다. 다른 여행업체에서 하는 2박3일 제주도여행도 19만9000원 하지만 내용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기존 여행업체가 값싼 여행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는 비밀은 청소년들 수학여행에도 나오지 않을, 부실한 음식에 있습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쇼핑하는 데를 몇몇 군데 들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또 사흘째는 아침만 먹고 다른 일정이 없는 데도 있습니다.

 

해딴에의 제주도 여행 밥상은 푸짐합니다. 해물매운탕, 흑돼지 바비큐, 성게 미역국, 해초 비빔밥 등으로 제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으로 차렸습니다. 쇼핑 따위는 마땅히 일정에 없습니다. 해딴에의 다른 여행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제주도 여행 또한 널널하면서도 빈틈이 없습니다.

 

 

한꺼번에 많이 떠나는 대신, 20명 정도 규모로 가까운 이와 떠나는 오붓하고 느긋한 여행입니다. 상담·문의는 055-250-0125나 010-8481-0126로 하시면 됩니다. 6월 26~27일(수~목)과 7월 9~10일(화~수) 떠나는 제주도 여행을 좀 소개하겠습니다.

 

3. 작지만 깊고 멋진 섬, 우도

 

첫째 날은 먼저 우도에 들어갑니다. 제주도에 딸린 섬 가운데 우도가 있습니다. 제주도의 동쪽 끝 성산포항에서 배를 타고 20분남짓이면 가 닿습니다. 우도를 두고 제주도 축소판이라고들 합니다. 제주도에 있는 모든 것이 우도에 작지만 모두 갖춰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고운 모래밭이 우도에 있습니다. 한라산처럼 높지는 않지만 멋지기로는 못지 않은 우도봉이 있습니다. 작은 해수욕장이 두 개나 있고요, 말 키우는 목장도 있습니다. 

 

 

딸린 섬도 하나 있습니다. 비양도라 합니다. 올레길도 있는데 길지도 짧지도 않아 사람에 따라서 2~3시간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노선 버스도 있으며 자전거나 스쿠터로 돌아다녀도 됩니다.

 

제주도에 온 사람 대부분이 우도에 들어가 봅니다. 오전에 들어가 오후 서너 시 나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참 맛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낮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섬에서 조용히 거닐며 오붓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에는 다 빠져나가고 없습니다.

 

우도의 참맛은 저녁 무렵과 아침나절, 파도 소리만 들리는 캄캄한 한밤중에 있는데, 낮에 사람들과 부대끼다 나가면 이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데다 이런 분위기와 맛일랑 아예 모르고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해딴에는 시끌벅적한 여행을 하지 않습니다. 수평선으로 해가 지고 해가 뜨는 모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다 한 바퀴 유람 보트조차 사람 없는 때를 골라 조용히 제대로 즐깁니다. 해질 무렵 우도봉에 올라 고즈넉한 섬을 내려볼 수 있습니다.

 

갯가를 어루만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바다를 거닐 수도 있습니다. 새벽녘 말갛게 솟는 해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우도 올레길도 차분하게 넘치도록 바다와 마을과 들판을 걸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 가득하다 저녁이면 썰물처럼 빠져나는 섬 우도의 참맛을 제대로 알고 누리도록 준비했습니다. 기존 우도 여행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납니다.

 

4. 뻔한 데 말고 숨은 명소를 안내

 

해딴에의 1박2일 제주도 여행은 이튿날 여정도 다른 데와 다릅니다.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은 일제강점 말기 일본군이 가마오름 지하에 만든 요새입니다. 3층 구조인데 밀폐돼 있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돼 있습니다.

 

평화박물관을 품은 가마오름 마루에서 본 풍경.

복원한 지하 요새 내부 모습.

 

좁은 땅굴 속에서 작업하기 쉽도록 반대편 괭이를 잘라낸 곡괭이.일제 지배 당시 지하 요새 출입구로 썼던 곳.

유물 전시 공간도 따로 있지만, 요새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와 제주도가 어떤 고난을 겪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박물관과는 품격이 다릅니다. 교훈을 주려고 애쓰는 그런 공간은 절대 아니며 참 재미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참고 글 : 제주도에서 섹스는 가깝고 평화는 멀다 http://2kim.idomin.com/1854)

 

엉또폭포도 들르는데요, 폭포로 여기시면 오해입니다. 난대 수목이 울창한 골짜기입니다. 비가 오면 폭포가 되지만 보통 때는 깎아지른 절벽입니다. 눈맛이 그윽합니다. 울창한 수림이 풍성함을 안겨줍니다. 제주 사람들 일상도 있습니다. 무인카페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무인카페 내부.

 

환해장성도 둘러봅니다. 제주도만의 유물입니다. 처음은 고려 정부가 백성을 동원해 몽골에 항전하는 삼별초를 막으려고 바닷가 둘레에 돌로 쌓은 성이랍니다. 지금은 환해장성이 사람들 눈맛을 즐겁게 해주는 명물이 돼 있지만 원래는 이랬습니다.

 

파도가 들이치는 환해장성은, 그 검은 빛과 바닷물의 어우러짐만으로도 그럴 듯합니다. 6월 26~27일(수~목)과 7월 9~10일(화~수) 두 차례 준비돼 있습니다.

 

 

5. 19만9000원에 제주 1박2일이 가능한 까닭은?

 

1인당 기본 경비만도 19만9000원에 육박합니다. 장흥~성산포 왕복 배삯 7만4000원, 창원~장흥 버스비 왕복 3만원, 제주 안 버스 임대 1만5000원, 1박4식에 줄잡아 5만5000원 입장료·우도 배삯 1만500원, 우도 버스 하루 이용권 4000원, 유람 보트 승선권 1만원. 도합 19만8500원입니다.

 

음식과 즐기기를 제대로 차려내면서도 이렇게 싸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저희 해딴에가 머리가 아닌 몸을 움직여 장만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르는 탐방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편하지 않게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우도 바다인 것 같은데, 자신은 못합니다.^^

 

일정은 이렇습니다. 03:40 창원시청 출발 04:50 진주시청 출발 08:00 장흥 노력항 도착 11:30 성산포항 도착 13:00 우도 도착 13:30~18:00 우도 통째로 즐기기(버스 하루 이용권과 유람보트 승선권 제공) 18:00~20:00 제주도 흑돼지 바비큐 파티 20:00~ 우도 밤바다 즐기기.

 

이튿날 일정은 이렇습니다. 06:00~07:00 아침 바다 즐기기 08:30 성산포항 도착 09:30~11:30 평화박물관 관람 13:00~14:30 엉또폭포 즐기기 14:30~15:30 환해장성 즐기기 16:00~17:00 성산포항 승선 대기 휴식 19:30 장흥 노력항 도착 22:30 진주시청 앞 도착 23:30 창원시청 앞 도착.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경남도민일보가 만들었습니다. 2012년 9월 경남도로부터 경남형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이익의 3분의2를 지역사회를 위해 쓰도록 정관으로 정해 놓고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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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십리벚꽃길 걸으면 뭣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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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천권과 창원·마산권에 사는 

잘 놀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한

하동 십리벚꽃길 그늘 누리기 이벤트

 

1. 꽃진 자리에 내려앉은 그늘을 온전히 누리는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마련하는 두 번째 이벤트입니다. 6월 15일 토요일 벌이는 ‘기차 타고 하동 십리벚꽃길 그늘 누리기’입니다. 하동 읍내에서 다시 화개 또는 쌍계사까지 들어간 다음 십리벚꽃길을 온전히 걷습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사회적기업입니다. 경남도민일보 독자 여러분을 위한 서비스 이벤트이기도 합니다. 십리벚꽃길 양 끄트머리에는, 아시는대로 쌍계사와 화개장터가 고맙게도 매달려 있습니다. 둘 다 꽤나 잘 알려진 명소입니다.

 

보이는 만큼, 들리는 만큼, 느껴지는 만큼 누리고 즐기면 그만인 나들이입니다. 이 십리벚꽃길은 꽃피는 봄이면 밀려드는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만 이렇게 여름이 가까워오면 고요하리만치 사람들이 찾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었던 꽃들 다 진 자리에는 장한 그늘이 들어섭니다.

 

4km남짓한 거리에 그늘이 우거지지 않은 대목이 한 군데 빼고는 없습니다. 화개천 흐르는 물소리도 좋고요, 화개천이 섬진강에다 몸을 섞는 장면도 즐겁습니다. 여기저기서 맛볼 수 있는 차와 술과 밥과 안주(또는 반찬)은 여기 아니고 다른 데서는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2. 참가비 없고 실비만 챙겨오시면 되는

 

참가비는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먹고 마시고 들어가고 움직이는 데 들 돈만 챙겨 오시면 됩니다. 해딴에의 이번 이벤트에서 핵심은 ‘따로 또 같이’입니다. 큰 틀에서는 같이 움직이지만 낱낱은 저마다 따로 합니다. 가다가 마주쳐서 함께할 수도 있고 함께하다 헤어져서 따로 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좋으실대로 하시면 그만입니다.

올해 들어서 마산 창원에 사시는 분들을 상대로 1월 11일 처음 이벤트를 했더랬습니다. 크게 알리지도 않았는데 마흔 넘게 신청해 주셨습니다. 마산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진동 바닷가까지 간 다음 좋은 해물로 점심을 먹고 고즈넉하고 소담한 다구마을까지 내쳐 걷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는, 저희 준비가 충분하지 못해 가는 도중에 길을 잃기까지 했는데도 참여해 주신 분들이 만족스러워해 주셨습니다. 이번 두 번째 이벤트에서는 그런 실수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1월 11일 첫 번째 이벤트에서 걸었던 바닷가 갯길.

 

3. 진주사천이나 함안에서도 쉽게 함께할 수 있는

 

이번 이벤트는 또 창원·마산권을 벗어난다는 데에 특징이 있습니다. 창원·마산에서도 참여할 수 있지만 진주·사천권에서 좀더 손쉽게 참여할 수 있으면서도 멋진 여정을 뽑아냈습니다. 함안에 사시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아침 9시 20분에 마산역을 출발하는 경전선 열차가 하동역까지 갑니다.(10시 53분 도착) 도중에 중리(9시 27분)·함안(9시 35분)·반성(9시 53분)·진주역(10시 3분)을 거칩니다. 그러니까 마산에서 진주를 거쳐 하동에 이르는 구간에 사시는 이들은 가장 가까운 역에서 타시면 되겠습니다.

 

반면, 창원중앙역이나 창원역에서는 이 기차를 탈 수가 없으니까 창원에 사시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마산역까지 나오셔야 하겠습니다.

 

4. 그러면 실제 경비는 얼마나 될까

 

기차삯은 이렇습니다. 경로는 만65살 이상입니다. 마산역 : 어른 6000원 어린이 3000원 경로 4200원. 중리역: 어른 5600원 어린이 2800원 경로 3900원. 함안역 : 어른 5000원 어린이 2500원 경로 3500원. 반성역 : 어른 3700원 어린이 1800원 경로 2600원. 진주역 : 어른 2800원 어린이 1400원 경로 2000원.

버스 요금은 그것이 공용버스냐 농어촌버스냐 따위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만, 대충 이렇습니다. 하동버스터미널~화개장터 2100원, 쌍계사~화개장터 1200원, 화개장터~진주 6800원, 진주~마산 4400원, 진주~창원 4900원입니다. 쌍계사 입장료는, 어른 2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대체 일정도 잡아봤습니다. 10:53 기차 타고 하동역 도착~11:10(또는 11:30) 버스 타고 하동버스터미널 출발~11:50(또는 12:00) 화개장터 도착~점심·장구경~13:00(또는 13:10) 화개장터 출발~15:00 쌍계사 입장~16:30 쌍계사 나옴~17:00 버스 타고 쌍계사 출발~17:10 화개장터 도착~17:50 하동 터미널 도착.

 

 

물론 들어갈 때 화개장터에서 내리시지 않고 쌍계사까지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쌍계사를 구경한 다음 거기서 화개장터까지 거꾸로 걸어내려오시면 되거든요.

 

돌아오는 차편은요, 쌍계사 출발 17:00 18:45, 화개 출발 17:20(진주 종점) 17:35(하동 종점) 18:45(하동 종점) 18:50(하동 종점), 하동역 출발 17:58 19:38이었습니다.

 

5. 신청하시면 좋은 맛집과 즐길거리 정보 제공

 

문의·신청·상담은 haettane@gmail.com또는 055-250-0125 010-8481-0126으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신청해 주신 분에 한해 해딴에 저희들이 현장에서 안내·소개를 해드리고요(알아보시기 쉽도록 배낭에다 꽂고 다니려고 ‘해딴에’ 깃발까지 이참에 맞췄답니다.)

 

그럴 듯한 맛집과 술집과 찻집도 추천해 드립니다. 그리고 쌍계사에 가서 눈에 담거나 누리거나 하면 좋을 몇몇 포인트도 일러드립니다.

 

저희가 연락드릴 수 있도록 성함이랑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됩니다. 이를테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6월 15일 이벤트 참여 신청 김훤주 010-2926-3543” 이렇게 찍어주시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고맙습니다.

 

신청 문의 상담은 다시 알려드릴게요. haettane@gmail.com 055-250-0125 010-2926-3543으로 하시면 됩니다. 더불어 쌍계사와 화개장터 십리벚꽃길에 대한 블로그 글 두 꼭지를 여기 뽑아 놓겠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6월 하동 십리벚꽃길, 봄꽃보다 좋더라 (http://2kim.idomin.com/1944)

2. 빗속을 걸으며 누린 하동 십리벚꽃길 풍치 (http://2kim.idomin.com/2249)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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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나라 백성 걱정과 술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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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딴에의 맞춤형 통영 가족 나들이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행복한 나들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5월 26일 밤에 이런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날 낮에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한 ‘통영 가족 나들이’에 함께하신 분이 보내셨습니다. 어쩌면 빈말일 수도 있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앞서 계모임 회원들 가족 나들이를 아내랑 아이들 중심으로 통영 당일치기 프로그램을 기획·준비·진행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습니다. 해딴에는 조금 널널하게 다녀오는 프로그램과 알차게 하는 방안 두 개를 내었고 그이들은 알찬 쪽을 선택했습니다.

 

동피랑마을~케이블카·미륵산~해저터널~중앙시장과 한산도 제승당~케이블카·미륵산~동피랑마을~중앙시장 가운데에서 두 번째를 고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산도 제승당을 다녀오느냐 마느냐였는데요, 여기 들어가면 대기 시간까지 쳐서 2시간 30분은 잡아야 하거든요.

 

1. 반드시 앞서 답사를 해야 하는 까닭

 

나름 잘 아는 통영이지만 저희 해딴에는 한 번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몸은 빠뜨리고 머리로만 계획을 굴리다 보면 반드시 적어도 한 군데서는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요일 19일에 다녀왔는데요, 길이 엄청 막혔습니다.

 

유람선 뒷편에 모여 앉은 일행들.

 

그리고 유람선터미널도 미륵산 케이블카도 무척 붐볐습니다. 미리 전화를 걸어 이리저리 알아봤을 때도 대충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진주시청 출발 시각을 아침 8시 30분에서 30분을 앞당겼습니다.

 

늦어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아니면 제승당 들어가는 유람선을 타지 못하는 상황보다는 차라리 일찍 가서 조금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또 유람선은 예매는 못해도 하루 전 예약은 할 수 있지만 케이블카는 이마저도 안 되고 당일 현장 티케팅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한 준비도 미리 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티켓을 끊고 나서도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점심 먹을 밥집과 저녁을 먹을 횟집도 미리 들러 좋은 자리로 예약을 했답니다.

 

2. 여객선 아닌 유람선 타고 제승당 가는 보람

 

26일 당일은 일찍 서두른 덕분에 또는 탓으로 통영 도남동 유람선 터미널에 9시 10분남짓에 닿았습니다. 9시 30분 즈음에 가닿았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늦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배를 탈 때 내야 하는 승선자 명단은 오는 길에 작성해 두었기에 티켓만 끊으면 됐습니다.

 

 

터미널 안팎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9시 45분에 배를 타고 10시에 출발을 했습니다. 여덟 집 스물여섯 일행은 다들 유람선 뒤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유람선은 제승당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한산도 앞바다 그러니까 한산대첩 격전지를 둘렀습니다.

 

40분 가량 이어진 뱃길에서 배를 모는 사람이 해설도 겸해 들려줬습니다. 여기저기 바위나 섬 따위에 얽힌 이름이나 사연을 일러줬고 한산대첩 당시 상황도 설명해줬습니다. 경륜이 느껴지는 해설이었습니다. 갱상도 지역말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던 것입니다.

 

창 밖으로 거북 등대 밑둥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북등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제승당 입구 바다 암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1963년 12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걷어 세웠습니다. 등대 기능은 않고 대신 한산대첩 자리를 일러줍니다. 드디어 한산도에 닿아 제승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티켓을 끊고 미리 신청해 놓았던 문화 해설을 부탁드렸습니다. 젊은 남자가 한 명 나오셔서 제승당 앞에서 보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천천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는 길에 울창한 솔숲과 거북선 모양 식수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산만 그윽한 바닷물도 조용해 좋았습니다.

 

한산대첩기념비 알림판. 멀ㄹ 마주보이는 산의 마루에 기념비가 있습니다.

 

3. 이순신 당대에는 없었던 제승당, 그리고 충무사

 

제승당(制勝堂)은 여기 유적의 대표입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 생전에 지어진 건물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몸소 머물며 작전을 짜고 회의를 진행하고 했던 운주당(運籌堂)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처음 만들어져 들어섰던 1593년부터 1597년까지만 있었습니다.

 

 

아시는대로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아 서울로 끌려갑니다. 이어서 통제사가 된 원균 장군은 그해 여름 칠천도 앞바다에서 수군 거의 모두를 잃어버리고 본인도 숨이 끊어집니다. 바로 그 때 여기 통제영은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승당은 107대 통제사 조경이 1739년 옛 운주당 자리에 세운 건물입니다. 난중일기 1491일치 가운데 1029일치가 여기서 쓰여졌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활 가운데 80%가 여기서 이뤄졌다고 해설사는 말해 줬습니다.

 

이어서 충무사(忠武祠)로 갑니다. 일행은 해설사의 인도 아래 충무공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립니다. 1978년 정형모 화백 작품이랍니다. 전두환을 비롯해 김대중·이명박 두 대통령의 초상도 그렸습니다.

 

묵념.

이순신장군 표준 영정이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데 여기 영정은 박정희 뜻대로 표준 영정과 무관하게 그려졌다고 해설사는 말했습니다. 표준 영정은 무인으로서 기상이 넘쳐나는데, 박정희는 대신 충무공의 전체 인격이 표현된 영정을 바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 화백이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결국은 이순신 집안인 덕수 이씨들의 골격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이순신의 친구 서애 유성룡이 쓴 책 <징비록>에서 이순신 풍모에 대한 기록 석 줄을 찾아내어 그를 바탕삼아 영정을 그렸다는 얘기였습니다.

 

다네 사진도 찍고.

4. 이순신 장군의 나라 백성 걱정과 술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그냐말로 요즘 노래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에게 당신은 나라와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두고두고 끙끙 앓았는데요,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술에 기대어 잠도 자고 통증도 다스리고 했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들.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른바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잤다거나 하는 기록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심오한 무엇이 있는 줄을 '예전엔 미쳐 몰랐"답니다. 하하하.

 

이밖에도 일행은 제승당을 지은 조경 통제사가 여기가 원래 통제영 터임을 알리려고 세운 유허비랑 이순신의 후손인 198대 통제사 이규석이 그 138년 뒤 세운 유허비도 눈에 담고요, 해방 뒤 지역 주민들이 물심을 모아 세운 한글 유허비도 봤습니다.

 

유허비들.

또 수루(戍樓)를 놓치지 않습니다. 제승당 오른편에 있습니다. 여기 서면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대첩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의 무대입니다.

 

수루.수루에 오른 이들.수루에서 보이는 바다.

5. 미륵산케이블카를 많이 기다리지 않고 타려면

 

돌아나오니까 꼭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둘러 버스를 탑니다.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남동에 있는 멍게가로 갑니다. 아까와 달리 길이 막히는 바람에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어졌습니다. 바쁘게 그러면서도 맛있게 멍게비빔밥을 먹고는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러 갑니다.

 

미리 티켓을 끊어놓고 얘기를 해놓았기에 많이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습니다. 여기 케이블카는 8인승입니다. 뿌리에 매달린 감자 같은 케이블카가 로프를 붙잡은 채 끊임없이 오르내립니다. 한꺼번에 사람이 많이 탈 수 있는 밀양 얼음골 케이블카와는 다릅니다.

 

여기 케이블카는 끝에서 끝까지 거리가 1975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조금 덜했지만, 맑은 날은 오르내리면서 보는 풍경이 대단하겠다 싶었습니다. 환경 파괴 또는 훼손 논란과 무관하게 말씀입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자리.

날씨가 흐렸던 이날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아련한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그것들을 느껴보는 다른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저는 온 김에 산마루까지 내쳐 걸었습니다.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몸에 땀이 나기는 했지만 바람이 불어대서 상큼했습니다.

 

사람들은 곳곳에 들어서 있는 이런저런 전망대에서 눈길을 아래 어디론가 던집니다. 길은 온통 나무계단으로 돼 있었습니다. 산이라기보다는 공원입니다. 이어 동피랑 벽화마을로 옮깁니다. 길은 적당하게 막힙니다. 버스는 중앙시장 끄트머리 동피랑 들머리에 섰습니다.

 

미륵산 봉수대 자리.내려오는 케이블카.

6. 동피랑에서는 벽화보다 사람 구경을 더하고

 

일행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로 걸어들어갔고요, 저는 남자 일행 몇몇이랑 예약해 놓은 횟집으로 함께 갔습니다. 미리 실물을 보고 주문을 해 놓으면 나중에 편하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별것 아닌 그림 같이 보이지만자세히 보면 꽃눈이 지고 있습니다.

 

 

26일이 일요일인지라 동피랑 마을이 찾아온 사람으로 온통 바글거립니다. 이럴 때는 벽화 구경도 좋고 여기 사람들 사는 모습 구경도 좋지만 기를 쓰고 찾아와 여기저기 구경하는 사람들 구경도 좋습니다. 젊은 사람들 노는 모양 눈여겨 보기도 하고, 남녀 짝짝이 찾아온 이들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청년들 사진 찍으며 노는 모양, 아이들 뛰어다니며 노는 모양, 어린 자식들한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려고 애를 쓰는 젊은 부부들 노는 모양, 천사 날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담벼락을 따라서, 길게 줄지어 자기 사진 찍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양…….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 없이 그야말로 무심히 바라봅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거닐다 보니 동피랑 마을 우뚝한 정자나무 있는 데까지 왔습니다.

 

7. 중앙시장에서 장만한 통영 빼때기 5000원 어치

 

중앙시장으로 들어갑니다. 온 김에 장을 좀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집에서 술 마실 때 안주 삼으면 좋겠다 싶어 노가리를 만 원어치 샀습니다. 이런 것 술집에 가면 적어도 한 마리에 천 원씩은 하는 것들입니다. 손 큰 아저씨가 한 움큰 더 얹어주는데, 모두 한 마흔 마리는 되겠습니다.

 

동피랑마을 커다란 정자나무.

다음으로는 멸치를 샀습니다. 제가 멸치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수협 가게를 골라 들어갔습니다. 다시물 내는 멸치 가운데는 최상급인데 한 상자에 2만5000원이라 합니다. 저는 반만 달라고 했습니다. 많이 사봐야 냉동실 한 구석만 오래 차지할 따름이니까요. 1만3000원을 건넸습니다.

 

다음으로는 통영 명물을 하나 골랐습니다. 통영 욕지도는 고구마가 이름나 있는데, 그 날 산 녀석이 욕지도 고구마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날고구마를 썰어서 햇볕에 바짝 말린, 빼때기를 샀습니다.

 

달라는대로 5000원을 할머니께 드리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많이 좀 주이소.” 이랬더니 “내가 원래 마이 주는 사람 아이가” 하면서 듬뿍 더 얹어줬습니다. 다른 데서 생고구마를 샀어도 같은 값으로 이만큼은 못 살 것 같은 그런 분량이었습니다.

 

8. 등대회초장 횟집 주인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

 

저녁 5시가 다 돼 갑니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가 중앙횟집에서 이 때 시작하도록 예정돼 있었습니다. 앞서 예약해 놓은 3층 전망 좋은 자리로 올라갔더니 일행이 모두 오셔서 이미 들고 있었습니다. 같이 앉으라고 권하셨기는 했지만 저는 따로 나와 등대회초장으로 갔습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고 계모임 하는 가족끼리 편하게 즐기시라는 뜻도 있었지만 다른 생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대형 버스 두세 대씩 해서 많이 올 때 들어갈 수 있는 횟집이랑 인사를 해놓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횟집.

회랑 초장이랑 쌈을 주문하고 등대횟집 주인아주머니랑 명함을 주고 받았는데,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에서 함께 오래 근무했던 선배 기자 한 명이랑 오빠 동생 하는 사이라 했습니다. 이래저래 나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통영 가족 나들이는 끝이 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흥이 오른 일행들이 차 안에서 어울려 춤추고 노래부르며 놀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불문가지(不問可知),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겠지요.

 

나름으로는 큰 탈 없이 치렀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날 해딴에를 믿고 함께해 주신 이들도 그렇게 여겨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내놓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점심을 멍게비빔밥 하나로만 한 것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워 하셨고 반찬과 국까지 더 주문해 먹기도 했지만 아이들 같은 경우는 낯설어 하며 먹지 않거나 못하기도 했거든요. 그 집에 다른 메뉴가 없는 것도 아닌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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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생태관광 살 길과 '태고의 신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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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창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창녕에서 나셨습니다. 창녕이 고향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댁이 있던 유어 한터 소벌과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살던 읍내 솔터나 옥만동 장터를 돌아다닌 기억이 지금도 뚜렷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고향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저는 창녕이 좋습니다. 

창녕이 제가 국민학교 다니던 옛날에는 국보 33호인 진흥왕 척경비로 이름을 알렸지만, 나중에는 부곡온천으로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는 창녕 이름이 우포늪(소벌)에 힘입어 널리 알려지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1억4000만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같은 관형어를 앞에 단 채로 말씀입니다.

어느 봄날 소벌의 안개속 아침.

며칠 전 젊은 영화 감독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포늪(소벌)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포늪(소벌) 곳곳으로 길이 나고 사람이 거리낌없이 다니도록 돼 있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사람 다니는 길에는 풀도 자라지 않는다. 그런 길이 곳곳에 있다면 소벌이라는 생태계는 토막토막 잘린 셈이다. 생태계는 순환이 단절되면 힘을 제대로 못쓰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보전 대상인 습지를 통째로 인간에게 내어놓는 데는 없다고 들었다. 돈이라도 되면서 그러면 낫겠는데, 입장료를 받지 않으니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연둣빛으로 봄을 머금은 소벌 나무들.

창녕은 우포늪과 생태관광을 주요한 발전 전략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생태관광은 생태계를 갉아먹지 말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가능합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생태계를 가꿔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조금씩 퍼 마셔도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디 가면 가로수부터 눈여겨 봅니다. 제가 사는 동네 가로수도 무심하게 넘기지는 않습니다. 가로수가 풍성하고 멋지면, 신기하게도 거리뿐 아니라 동네까지 통째로 멋지고 풍성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잘 가꾼 마을숲이나 너른 강둑에 심긴 나무들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창녕이 생태적으로 풍성해지면 좋겠습니다. 우포늪이 안겨주는 '태고의 신비' 이미지를 이런 풍요로움을 만드는 데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우포늪과 같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것들 가운데는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어가 있습니다.

 

은행나무와 메타세쿼이아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은행나무는 우포늪(소벌) 생성 시기보다 더 오래된 2억년 전에 나타났는데 지금 나무가 그 때와 거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행나무 가로수. 함안.

메타세쿼이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940년 발견 당시만 해도 멸종됐다고 알려져 있었던 나무입니다. 우포늪(소벌)이랑 나이가 비슷합니다. 1억3600만 전~6500만년 전인 백악기에 아시아·북아메리카에서 살았습니다. 그 화석은 지금 나무와 아주 닮았습니다.

 

 

이밖에도 두 나무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먼저 빨리 잘 자라는 속성수입니다. 아주 크게 뻗어나간다는 점도 닯았습니다. 생명력이 매우 센 편이어서 공해에 쉽게 무릎꿇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점도 같습니다. 잎이 무성한 봄과 여름과 가을은 물론 잎이 죄다 지고 없는 겨울에도 멋지다는 것까지 닮았습니다.

 

저는 창녕이 이 두 나무를 가로수 주종으로 꼽아 창녕 전체를 '태고의 신비' 분위기로 가면 좋겠습니다. 이런 가로수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는지, 또 지역 주민 소득 창출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는지는 전남 담양에 있는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이 잘 보여줍니다.

 

2011년 재작년과 2012년 작년에 이어 올해 5월 11일 토요일 오후 세 번째로 거기 다녀왔는데요, 잎이 아직 풍성하게 나지 않았고 입장료까지 1000원을 받는데도 저는 밀려드는 사람들 탓에 밟혀 죽는 줄 알았답니다.

 

5월 11일 찾았던 담양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 사지에서는 붐비지 않지만 실제는 굉장했습니다.

같은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가로수길과 이어지는 관방제림.

 

옛날에 쓴 글도 있답니다. 단체장과 지방의원은 꼭 가 봐야 할 담양(http://2kim.idomin.com/2258). 곁들여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아름다운 가로수를 어떻게 경남에서는 그리고 창녕에서는 가꿀 수 없는지가 매우 궁금합니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5월 28일치에 실린 칼럼에다 조금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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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역사의 마지막을 수놓은 창녕과 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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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을 두고 ‘제2의 경주’라고도 합니다. 규모나 내용으로 보면 둘은 비교 대상이 못 됩니다. 그러나 경주와 견주는 그것만으로도 창녕이 지닌 가치와 의의가 크다는 얘기가 됩니다. 신라·백제 문화보다 훨씬 덜 알려진 가야문화가, 500년대 들어 신라·백제의 각축 사이에서 거점 노릇을 했던 창녕에, 지나간 역사의 보석 같은 흔적이 되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창녕은 태백산맥을 등으로 삼고서 서쪽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합천, 남쪽으로 같은 창녕의 영산과 밀양·함안 등 주변 지역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요지랍니다. 창녕을 확보하면 낙동강 본류를 가운데 두고 함안의 안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이 가야 진출의 교두보로 창녕을 병합하고 척경비를 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탐방 루트

 

영산석빙고→0.8km 영산만년교→2.8km 창녕 관룡사→0.5km용선대(다시 관룡사)→1.2km옥천사터→14.4km창녕박물관→바로 옆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0.6km 창녕진흥왕척경비→0.5km 창녕석빙고→바로 옆 창녕 장터→바로 옆 술정리동삼층석탑(석빙고에서 0.6km)→8.6km, 조민수장군 무덤→17.5km 현풍 석빙고→23.2km 대가야박물관(대가야 역사 전시관)→바로 옆 대가야 왕릉전시관→0.9km 지산동고분군(돌아나오면서 전시관을 지나)→4.6km 우륵기념탑

 

영산석빙고

옛 무덤 같은 외부, 과학적인 내부

 

창녕과 고령을 찾아 떠나는 기행은 영산석빙고에서 시작됩니다. 밖에서는 옛 무덤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땅을 판 다음 벽은 석재로 쌓고, 바닥은 앞이 높고 뒤가 처지게 기울어지도록 해서 물이 잘 빠지게 했습니다.

 

바깥 모습.안쪽 모습. 창녕군 제공.

 

천장은 기다란 장대석으로 무지개 모양을 만들었고 바람이 잘 통하게 돌을 얽고 지붕을 얹어 구멍을 냈습니다. 겨울에 강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내 여름에 쓸 수 있도록 저장했습니다.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습니다.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안동석빙고(보물 제305호)·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청도석빙고(보물 제323호)·현풍석빙고(보물 제673호)·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등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경상도에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신라 때부터 만들었다지만, 지금 남은 것은 모두 조선시대 산물입니다.

 

영산석빙고 아래에 만년교가 있습니다.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입니다. 하천 양쪽의 자연 암반 위에 화강석으로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처럼 다리를 쌓은 위에 자연석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선암사 승선교· 벌교홍교와 함께 보기 드문 유물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 지역의 홍예 축조기법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다리에만 눈길을 주지 말고 꼭 하나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데, 들머리 ‘만년교’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 그것입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밤 고을에 살고 있는 신통한 필력을 가진 열세 살 신동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신이 내려준 필력이라던데 내가 다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구나. 다리 이름은 만년교니라”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관룡사

잘 생긴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창녕 하면 관룡사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산 통도사에서 보관하는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에 따르면 신라 흘해왕(訖解王) 40년 가락국 이시품왕(伊尸品王) 4년(349)에 창건됐습니다.

 

지리산 자락의 하동 칠불암과 함께, 불교가 가야를 통해 남방에서 바다 건너 전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종종 꼽힙니다.

 

가운데 옴폭한 데가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관룡사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본다. 이 때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처음 짓고 나중에 신라 8대 사찰이 돼서 원효 스님이 제자 1000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했다는 것입니다.

 

관룡사 가는 길은, 이제 쉽게 보기 어려운 예스러운 정취가 남아 있습니다. 눈길을 붙잡는 명물 석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도 만날 수 있습니다. 왼쪽 키가 큰 장승은 영감이고 오른쪽 작은 이는 할멈입니다. 영감은 입술 밖으로 나온 이가 아래로 향하고 할멈은 위로 솟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영감은 깐깐하고 할멈은 호탕합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솔길을 걸어 관룡사에 이르면 사람들은 대게 탄성을 내지릅니다. 뒤편 병풍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단하기 때문이랍니다. 돌문과 돌계단도 다른 절에서는 보기 드문 운치와 멋이 있습니다.

 

특히 돌문은 흔히 보는 일주문 불이문과는 판이합니다. 오래 된 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성황당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규모는 작아도 품 안에 지닌 보물은 많은 절입니다.

 

세월의 끼침이 느껴지는 대웅전(보물 제212호) 단청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기품이 묻어납니다. 약사전(藥師殿)(보물 146호)에서 빌면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룡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과 마주해 전각 안에 들어앉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묘하게 닮은 느낌을 줍니다. 튼실하고 우직한 남정네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이 약사전은 고려 말에 만들어진, 관룡사에 하나뿐인 임진왜란 이전 건물입니다.

 

약사전 3층석탑. 약사전 안에 석조여래좌상이 보입니다.

 

전체로 보면 하지만 호젓한 맛이 예전만은 못합니다. 원음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은 그런 아쉬움이 가장 큽니다. 사물(목어·운판·범종·법고)을 걸었다는 이 건물은 지금 막혀 있습니다. 드나듦에 걸림이 없어 사물 소리로 중생을 구해야 할진대 사방을 막아 놓았으니…….

 

 

원음각에 있어야 마땅할 목어는 대웅전 부처님 뒤쪽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법고는 어설피 새로 만든 범종각 새로 만든 범종 옆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 새겨진 괴수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관룡사의 화룡점정은 용선대입니다.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얼굴이 두툼하고 아주 잘 생겼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세계적인 명물 석굴암 본존물에 못 미친다고 해서 아무렇게 여겨도 될 부처님은 아닙니다.

 

 

용선대는 절간 마당에서 2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습니다. 정작 용선대에 오르면 부처님이 아니라 한 눈에 담기는 확 트인 세상이 눈길을 잡습니다. 부처가 바라보는 동쪽 동짓날 해뜨는 데도 좋지만 그 오른편 사람 사는 속세 풍경도 괜찮습니다.

 

 

여기 앉아 세상을 껴안으면 부처가 되지 못할 이 없겠다 싶습니다. 용선대 부처를 그럴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용선대 일대가 아니라 관룡사 마당이라는 점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마당 끄트머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아득한 가운데 불상이 조그맣게 놓여 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그대 마음 속에 있다. 너무 가까이서 매달리지 마라. 그것이 그대들이 반야용선으로 이르고 싶은 극락이다. 용선대 석가여래가 관룡사 마당을 내려다보며 이런 깨달음의 이치를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옥천사터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

 

관룡사에서 나오다 화왕산 정상 가는 길과 관룡사 가는 길이 갈라지는 왼편 언덕배기에 옥천사지(玉泉寺址)가 있습니다. ‘향토문화재’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1371)이 태어나 자란 데입니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가 기록합니다.

 

권문세가의 횡포 속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만들어 빼앗긴 토지와 강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한 쪽에서 보면 성인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눈엣가시입니다. 결국 역모로 처형당한 신돈을 승자들은 ‘요사한 중(妖僧)’이라고 역사에 적었습니다.

 

 

신돈이 망가지면서 옥천사 또한 송두리째 망가졌습니다. 석탑·석등 따위는 죄다 부서졌고 기단석이나 장대석 또는 주춧돌 몇 개만 겨우 남았습니다. 정으로 깬 자국이 60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뚜렷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망가진 절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권력무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권력입니다. 망가진 옥천사를 돌아보며, 신돈에 대해 나쁘게만 덧칠된 이미지만큼은 이제라도 벗겨져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창녕박물관

교통 송현동 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 신라 유물

 

다음은 고분군과 함께 있는 창녕 박물관입니다. 창녕박물관은 바로 옆 교동·송현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신라시대의 유물을 주로 보여줍니다. 고인돌도 있습니다.

 

계성고분 이전 복원관에는 창녕 계성면에 있는 계성고분군의 대형 고분 하나를 여기로 옮겨 복원해 내부를 살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제80호)은 도로 바로 건너편 위쪽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과 함께 가야시대 만들어졌습니다. 금동관을 비롯해 귀금속 장신구와 철제무구, 토기 등으로 미루어 5~6세기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고분군과 창녕박물관.

 

일부에서는 순장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송현동고분군 15호분에서는 순장됐으리라 짐작되는 사람 뼈가 4인분이 나왔습니다. 열여섯 살 여성도 있었습니다. 꽃다운 여린 소녀는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 어린 소녀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누나 언니 또는 동생이었을 테니,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보내고도 살아내야 했던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생목숨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처절함이 사무칩니다.

 

교동·송현동 고분군 출토 유물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 이미 5세기에 창녕 지역이 신라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고도 합니다.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는 창녕이 정치·군사상 요충지임을 말해줍니다. 임금의 두루 살피며 돌아다님을 기리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글자가 빗돌에 있지 않아 영토 개척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라 합니다.

 

가까이 있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 멸망 한 해 앞선 진흥왕 22년(561)에 세웠는데, 진흥왕에 대한 사실 기록과 지명, 신하들의 명단과 직위가 적혀 있답니다. 진흥왕의 창녕 순수는 이듬해 대가야 점령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길 만한 작품

 

창녕 읍내에는 5일장이 섭니다. 3일·8일 장날에 맞춰 가면 수구레국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방송을 타면서 유명해진 음식인데 수구레는 소가죽 안쪽에 붙어 있는 질긴 고기를 이릅니다. 바로 이 장터 둘레에 창녕석빙고와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 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영산 석빙고와 더불어 경남에 남은 조선 후기 얼음 창고로 규모는 작지만 구조는 경주와 안동의 석빙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령 가는 길에 현풍석빙고를 둘러보며 이들 셋을 비교·대조해볼 수도 있습니다.

 

술정리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고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각각 돌 하나로 구성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긴장도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수법도 정교해 그 기품이 석가탑으로 알려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하며, 경주의 석탑 양식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도 보여준다는 평을 받습니다. 지금은 둘레에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대합면 신당마을 언저리 1080번 지방도가 왼쪽으로 휘어지는 들머리에는 ‘향토문화재’ ‘조민수 장군의 묘’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무덤은 1962년 발견됐습니다. 조민수는 같은 창녕 출신 신돈과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신돈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고 조민수는 권문세가 출신이어서 그대로 갖고 있으려 했습니다. 조민수는 요동을 정벌하러 떠난 5만 고려군이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현지 최고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좌군도통수 조민수는 군사를 돌리자는 우군도통수 이성계의 설득을 따라 1388년 5월 22일 압록강을 도로 건넌 다음 6월 3일 개경에 이르러 팔도도통수 최영을 몰아내고 우왕도 폐합니다. 우왕에 이어 조민수 지지를 받은 창왕이 등극하지만 이어진 전제(田制)개혁 국면에서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귀양보내졌습니다.

 

그러다 곧바로 특사를 받았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세력이 창왕을 죽이고 세운 공양왕 아래에 다시 창녕으로 귀양보내져 숨을 거둡니다. 창녕은 개혁파 신돈과 수구파 조민수를 동시대에 낳은 땅이랍니다.

 

경남 창녕에서 경북 고령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을 지납니다. 여기에는 현풍석빙고가 있습니다.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었는데 당시는 얼음 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되지는 않았음에도 크지 않은 현풍고을에 들어서 있으니 눈길을 끕니다.

 

대가야박물관

지산동 고분군 44호분 등 왕릉전시관이 중심

 

여기서 영산·창녕의 석빙고와 한 번 견줘본 다음 발길을 서둘러 대가야의 고장 고령으로 넘어갑니다. 대가야박물관의 중심은 대가야 왕릉전시관입니다.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고분군 44호분 내부가 실물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까지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순장 풍습 등을 보고, 느끼고, 겪어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박물관을 좋아라 하지 않는 이들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옆에는 대가야역사관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야라 하면 김해, 가락국만 떠올리지만,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여서 방어하기도 쉽고 바로 옆 합천에서 손쉽게 철을 가져올 수 있었던 고령의 대가야는 후기 가야의 맹주였습니다.

 

낙동강 덕분에 교통도 좋았으므로 합천과 의령·창녕·현풍까지 함께 아울렀습니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세력이 절대 만만하지 않았음을 일러줍니다. 규모가 큰 것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아직 발굴도 안 된 채 머리에 나무를 인 작은 고분까지 꼽으면 200기를 훌쩍 넘습니다.

 

무엇보다 1977년 발굴된 크고 작은 널 35개는 우리나라 순장의 역사를 처음으로 확인해 줬습니다. 저승에서 주인공이 먹고 쓸 것을 넣었던 남·서 석실에도 창고지기가 한 사람씩 순장돼 있었습니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

 

부부로 보이는 30대 남녀가 한 구덩이에 들어 있기도 하고 10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같이 넣은 석실도 있으며 30대 아버지와 8살가량 된 딸도 함께 있습니다. 주인공을 위해 파묻은 석실이 무려 32개라니 인간이 휘두르는 권력 앞에 또다른 인간은 그저 무기력할 뿐입니다.

 

우륵 기념탑은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加耶琴)을 탔다는 금곡(琴谷) 언덕배기에 있습니다. 옆에는 우륵 초상을 모신 영정각도 있다. ‘정정골’이라고도 하는데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합니다.

 

 

기념탑이 규모는 큰데 가야금 현이 휘어 있습니다.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가야금 12곡을 제작한 3대 악성의 한 사람인 우륵의 생애를 기리기에는 조잡한 느낌이 든답니다. 정정한 느낌을 너무 기대했던 탓입니다. 

 

 

어쨌거나 우륵은 가야 멸망의 전조곡이었습니다. 대가야 직할지인 성열현(省熱縣: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인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한테 항복합니다.

 

진흥왕은 국원(國原:충북 충주)에 머물게 하고 대나마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 전수받게 했습니다. 전해 받은 세 사람은 뒤이어 새로운 곡을 만들었는데, 우륵은 이를 두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뛰어넘은 곡임을 인정하고 맙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이름만 남았습니다.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 그것입니다.

 

김훤주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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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도 나물캐기도 다 좋은 밀양 동천 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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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생태역사기행

밀양 동천 둑길 걷기


3월 20일 그날은, 한여름 날씨를 보이는 지금 돌이켜 봐도 무척 추웠습니다. 날이 특별하게 차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들판에서 거의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게다가 동천 둑길을 걷는 일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열을 길게 늘어뜨렸고, 저는 그 마지막까지 지켜야 했기에 운명처럼 추위에 덜덜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첫 걸음은 표충사로 잡았습니다.

 

표충사 들머리.

왼쪽이 수충루. 절간 첫 건물이 누각인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1. 오전에 가면 빗자루 자국이 고운 표충사

 

사실 표충사는 여러 차례 들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러도 새로운 절간이 표충사입니다. 게다가 아침에 일찍 온 편이다 보니 그 고즈넉함이 좋았습니다. 빗자루로 곱게 쓸어놓은 마당이 보기 좋기도 했고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자기 가고 싶은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랑 같이 거닐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놓게 됐습니다. 사천왕문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징벌을 받고 있는 모습도 입에 올렸지요. 아름다우니까 죄악이다, 죄악은 원래부터 매혹적이고 매혹적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들 까닭이 없다, 따위 어쩌면 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씨부렁거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천왕문 올라가는 길.

 

여기 으뜸 전각이 대광전인데, 대광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과 달리 지혜의 으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화루, 부처님 말씀을 꽃비(雨花)라 하는데 대광전 부처님 우렁우렁 울려나오는 말씀을 듣기에 가장 좋은 자리가 여기다, 그런데 세속으로 보면 꽃비는 꽃비일 따름인데 여기만큼 쉬고 놀기 좋은 데가 씨부렁거림도 있었습니다.

 

왼편이 우화루.

절간 마당에서 활짝 꽃을 피운 매화.

지붕 기와도 여러 색깔이 어울려 자연스럽고 멀리 산아도 그럴 듯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고 대광전이 마주 보이는 데 더해 앞으로는 재약산이 높다랗게 눈에 들어오고 뒤로는 저 위쪽 산들늪에서 흘러들어오는 단장천이 시작되는 물 흐르는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참 시원합니다.

 

그런데 하나 아쉬운 바가 있었습니다. 표충사로 올라올 때 솔숲을 거니시라고 얘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솔숲 오솔길은 아스팔트 잘난 길을 버리고 오른쪽 어디쯤에서 산책로를 골라잡아야 하는데 그랬으면 훨씬 아늑한 느낌을 누릴 수 있는데 그렇게 재가 하지 못함에 따라 잘난 아스팔트길을 걸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솔길 솔숲.

오솔길 솔숲을 거닐다 보면 만나게 되는 다비장.

다비장 안쪽 모습.

 

2. 점심 먹고 밀양댐 찍은 뒤 동천으로

 

한 시간 정도 지나 돌아나왔습니다. 산나물이 좋은 밥집 안동민속촌에 들어갔습니다. 잘 차려진 밥과 반찬을 먹고 동동주까지 걸칠 수 있는 사람은 걸쳤습니다. 여기 동동주는 조심해야 합니다. 마실 때는 괜찮았다가 일어날 때 어질어질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밀양댐으로 갔습니다. 밀양댐 그윽한 높이를 즐겼습니다. 여기 서면 밀양댐 물이 저기 배내골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배내골은 멀리 보이는 반면 밀양댐은 가까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은 배내골 물이 이곳 밀양댐으로 흘러듭니다.

 

밀양댐 들어선 자리에 있는 망향비.

 

여기 물은 밀양 창녕 양산 등지에 먹는 물로 공급이 됩니다. 좋은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호박 동동주를 비롯해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파는 행상들이 몇몇 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비까지 내릴 듯 말 듯하고 바람이 세게 보는데도 아직 판을 접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주말이 아니라 평일이라 여기를 찾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런 을씨년스런 풍경 가운데에서, 인간들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을 한 번 더 들여다봅니다.

 

마지막, 동천으로 흘러듭니다. 동천 둑길을 걷는, 이 날 생태·역사기행의 핵심입니다. 원래는 용전마을 들머리 다리에서 산외면사무소가 있는 금곡마을까지 6km 남짓을 걸으려 했으나 날씨가 뜻 같지 않아 가운데를 분질렀습니다.

 

 

그보다 금곡리에 가까운 희곡마을 있는 데서 3.5km 가량을 걷기로 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나들이는 걷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쑥이나 달래 같은 나물을 둑길에서 뜯는 데 있었습니다. 날씨가 조금은 추웠지만, 함께한 이들은 열심히 나물을 캤습니다.

 

3. 나물캐기 알맞았던 동천 둑길

 

동천은 명물 호박소가 있는 가지산 등등에서 가장 먼 줄기를 시작합니다. 얼음골에서 나오는 물도 여기에 줄기를 더합니다. 이렇게 해서 흘러가다가, 금곡마을에서 단장천이랑 몸을 섞습니다. 골 깊은 밀양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개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는 봄입니다. 길가 나무나 풀들이 푸릇푸릇 돋아나는 봄 기운을 머금기는 했지만, 아직은 겨울 기운이 좀더 셉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동천 둑길은 아무래도 황량한 기운이 셉니다. 

 

 

그래도 봄빛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파랗거나 연둣빛으로 솟아나고 돋아나는 잎사귀들이 봄을 증거합니다. 그 봄을 사람들은 캐어내 담습니다. 들고간 봉지들이 조금씩 수북해집니다. 저는 날선 칼들을 몇몇 준비했다가 미처 챙기지 못한 이들에게 나눠드렸습니다.

 

 

동천이라 하면 사람들은 조그만 도랑쯤으로 여기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양쪽으로 너른 들판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곳에 따라서는 그럴 듯한 풍경까지 만들어냅니다. 너비도 아주 넓은 편입니다.

 

지난해 여름 비가 많이 왔을 때 오른편 풀들을 저리 눕혀 버린 모양입니다.

 

그럴 듯한 풍경은 들판보다 골짜기에 많습니다. 그런 골짜기 가까운 데에는, 오토캠핑장이나 모텔이나 밥집 따위가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먹고사는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참 어쩔 수 없습니다.

 

 

4. 동천이 단장천이랑 합해지는 금곡마을

 

이제 금곡마을 들머리입니다. 여기서 동천은 단장천이랑 합해집니다. 단장천은 표충사 재약산 산들늪에서 시작돼, 여기서 동천을 받아안고 줄곧 흘러나아가 밀양강이랑 만날 때까지 자기 이름을 갖고 갑니다.

 

동천이 단장천이랑 몸을 섞는 지점.

풍성합니다.

 

동천이 단장천이랑 만나는 여기는 여느 이름 있는 강과 다름없이 너비가 상당히 넓습니다. 그 잔잔한 품이 연못이나 호수 같은 느낌을 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풍성하다 보니, 여기 금곡마을에는 갖은 물고기를 잡아 어탕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맛이 좋습니다.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이렇게 골짜기가 멋지다 보니까, 살려고 또는 장사하려고 땅을 장만하려는 이들이 많은가 봅니다. 시세가 어느 정도인지는 제가 알아보지 못했는데요, 여기저기 들어선 이른바 ‘부동산’들이 그 수요와 공급이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채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금곡에 있는 한 '부동산'의 유리창.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행 가운데 앞서 온 사람들과 뒤에 온 사람들 사이 간격이 꽤 벌어졌습니다. 저는 처진 이들을 기다리며 길을 안내하느라 추웠습니다. 먼저 온 이들은 여기 가까운 찻집에 들어가 시간을 노닥거렸습니다.

 

처진 이들 기다리다 들렀던 비각.그리고 거기 흙돌담.

 

일찍 온 이들은 대체로 남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물을 그다지 많이 캐지 않은 축이었습니다. 반면 조금 늦은 이들은 여자들이 많았고 나물도 상대적으로 많이 캤습니다. 일찍 온 이들은 찻집에서 여유로움을 누렸고 늦게 온 이들은 좀더 많은 나물을 보상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2013년 들어 생태·역사기행의 첫 나들이는 이렇게 마쳐졌습니다. 경남람사르환경재단이 후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가 주최합니다. 저희 해딴에는 ‘풀뿌리’랑 걸음을 맞춰 이런 기행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6월의 생태·역사기행은 19일(수) 남해로 떠납니다. 멋진 금산 보리암을 들렀다가 남해 명물 멸치쌈밥을 먹은 다음 대량마을에서 시작되는 숲 속 오솔길과 바닷가 갯길을 3km정도 걷습니다. 끄트머리에는 상주해수욕장이 울창한 솔숲을 거느리고 기다립니다.

 

참가비는 3만원입니다. 신청·문의·상담은 haettane@gmail.com, 055-250-0125, 010-8481-0126으로 하시면 됩니다. 무척 시원하고 즐거우면서 동시에 습지 또는 물이 우리 인간에게 끼치는 이로움과 즐거움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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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려천 산책로, 보수 공사조차 부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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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 2일 낮에 광려천으로 나가 산책로를 훑어봤습니다. 5월 21일치 경남도민일보에 처음 보도됐고, 이튿날 22일치에서 창원시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 내달까지 보수를 마무리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달은 6월입니다.

 

군데군데 하얗게 땜질이 돼 있었습니다. 물론 땜질이 되지 않은 데도 많았습니다. 잇달아서 땜질이 돼 있는 곳은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구간일 테고요, 꽤 긴 거리에 이르도록 땜질된 데가 없는 구간은 잘못·하자가 없거나 아직 보수 공사에 들어가지 않은 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보수가 시작되지 않은 구간은 그냥 두고 보수를 하고 있는 구간으로 보이는 데에 들어가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지금 하는 공사는 보수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한 땜질일 뿐이었습니다.

 

 

실리콘 모래(Silicon Sand)를 개어서 바르는 이상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줄곧 이어서 땜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는 ‘부실 확장 공사’였습니다. 물론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음매를 따라 금이 나 있습니다.금 가운데는 들고일어난 녀석도 있습니다.

이렇게 구멍처럼 깨어진 부분도 그냥 지나쳐져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 보수의 손길이 피해갔습니다.

 

이런 보수를 한다면, 제가 생각할 때에는, 얼마 안 가 들고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부분은 미리 떼어나고 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해 이미 잔금이 가서 부서져 있는 부분 또한 깔끔하게 치운 다음 해야 합니다.

 

땜질한 아래쪽 붉은 부위에 잔금이 많이 나 있습니다.

여기 땜질한 왼쪽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진행은 그렇게 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땜질한 사이사이에 그렇게 얼마 안 가 들고일어날 데가 그대로 팽개쳐져 있었고요, 잔금이 나가 있는 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데는,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말씀드린 그런 땜질이 돼 있는데, 제가 손으로 건드렸더니 서슴없이 들고 일어나 버리는 그런 데도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사진 다섯 장이 다 같은 자리랍니다.

 

 

 

 

이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보수라 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에 또 보수(또는 보수라는 이름으로 해대는 땜질)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집어넣었던 실리콘 같은 재료를 없애지 않고 땜질한 부분입니다. 위쪽 지저분한 것은 제가 발로 밀어 떼어낸 것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지금 이렇게 보수한답시고 땜질을 하면 나중에 끊임없이 보수(=땜질)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제 곧 이어 장마철이 다가오고 비가 오면 제대로 땜질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지금은 이런 공사를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장마를 이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겪은 다음 부실한 부분들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종합적으로 공사를 하면 좋지 않을까…….

 

보시는대로 부실은 가장자리 또는 이음매 부위에서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가장자리와 이음매 부위를 금이 나 있는데도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손을 댔더니 이렇게 바스라졌습니다. 가로로 금이 간 부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둔치에 난 길들은 비가 많이 오면 넘쳐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 길은 홍수와 그 홍수랑 뒤섞여 흐르게 마련인 자갈과 모래와 돌과 바위가 주는 충격도 견딜 정도로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그런 자연의 검증을 받은 다음에 전면 보수를 하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통째로 하자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지금 하고 있는 보수 공사는 보수라기보다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하는 땜질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로 말미암아 앞으로 계속해 보수 또는 땜질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임도 더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족(蛇足) 하나. 광려천변에 이런 표지판이 있는데, 뜬금없이 죽동천(가운데 타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나옵니다. 죽동천은 창원 대산면에 있다고 저는 아는데, 언제 여기로 이사왔는지 모르겠네요. ^^

앞에 쓴 글에서 변소조차 하나 없다고 했더니 이런 안내판을 두 군데 세웠더군요. 이런 대목은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김훤주

 

관련 글

창원 광려천 산책로가 부실이 아니라고?(http://2kim.idomin.com/2393)
광려천 환경정비가 부실인 또다른 까닭(http://2kim.idomin.com/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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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할매들이 복면 쓰고 윗옷 벗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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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76만5000볼트짜리 송전철탑 건설 공사가 일단 멈춰섰습니다. 5월 29일 한국전력과 주민들이 ‘전문가협의체’를 구성하고 40일 동안 협의하며 이 기간에는 공사를 하지 않기로 합의한 덕분입니다. 20일 공사를 새로 시작한 지 열흘만입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 공사는, 주민들 처지에서 볼 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떨어졌습니다. 사실상 토지 강제 수용입니다. 전자파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그 탓에 한 평생 살아온 터전을 잃게 됐습니다.

 

송전탑이 지나가는 땅은 농협조차 재산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 담보로도 잡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주민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돼 있었습니다. 다만 피해를 강요당할 뿐이었습니다. 일흔·여든 되신 어른들이 몸을 던져 싸우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1. 누가 할매들의 윗옷을 벗기는가?

 

그 가운데 한 분인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 자결한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밀어부치는 정부와 한전이 이 어르신들을 싸움꾼으로 만들었습니다.

 

5월 20일 한전의 공사 강행이 다시 시작됐을 때, 또 사람들 죽고 다치는 일이 어쩌면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모로 험한 꼴을 보고야 말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지만 다치는 일은 많았나 봅니다.

 

주민대책위원회와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이 연신 보내오는 문자에는 다치거나 실신해서 실려갔다는 내용이 줄을 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창진환경연합은 사진도 보내줬는데요 참 눈물겨운 장면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굴착기 삽날에 들어가 있는 할머니나 기계 아래에 들어가 쇠사슬을 두르고 자물쇠를 한 사진은 오히려 낫습니다. 한전 직원 같아 보이는데, 무리를 이룬 그이들 앞에서 윗옷을 벗은 할머니가 일어서서도 있고 쪼그리고 앉아서도 있습니다. 무슨 장면인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힘없는 할머니가 무엇인가를 지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옷을 벗은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렇게 옷을 벗기고 다치게 하고 죽게 하는지요? 당장은 한전과 중앙정부입니다.

 

2. 이런 일이 밀양이 처음이 아니다

 

핵발전이 필요하냐 아니냐 논란이나 초고압 송전에 따른 전자파 피해가 있느냐 없느냐 따위를 거론하기 앞서, 밀양 이 할매들 의사를 존중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앙정부와 한국전력은 밀어부치기만 했습니다.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배제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번 결정되고 나서는 다른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없었습니다. 한전과 정부가 결정하면 주민은 따라야 한다, 입니다.

 

저는 우리 경남 지역 할매들이 이렇게 웃통을 벗어젖힌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STX가, 마산시와 짜고, 해당 지역 주민은 무시한 채로 강행하려 한 이른바 ‘STX조선기자재 공장 수정만 진입 기도’ 사건입니다.

 

수정 주민 찬반투표 개표 현장. 황철곤 당시 마산시장이 마이크 앞에 있습니다. 당시 마산시는 노골적으로 개입하고도 절반조차 얻지 못했으나 결과를 왜곡해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마산 구산면 수정 마을 주민들은 2007년 10월부터 4년 가까이 STX의 수정만 매립지 진입에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2011년 5월 16일 (한 해 전에 마산시와 통합한) 창원시가 ‘STX 중공업(주) 수정산업단지 조성 포기 입장 표명’을 했습니다.

 

이로써 중학교와 바로 붙은 공장,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장, 마을과 왕복 2차로로 붙은 공장이 들어서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마산시는 주민을 분열시키려 했습니다. 기득권 세력은 수정 마을 사람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치고 ‘마산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라 규정했습니다.

 

2011년 6월 치러진 수정 마을 숭리 축하 행사에서 도와준 이들을 위해 앞쪽 마을 주민들이 큰절을 막 하려는 장면입니다.

 

이에 앞서 마산시 행정 역량은 관제 집회와 관제 데모를 조직 지원했고 관변단체들은 얼씨구나 집회를 했을 뿐 아니라 일 있을 때마다 맞춰 나타나 자기네만 지역 여론을 대변하듯이 굴며 수정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3. 2009년 마산 수정 마을 할매들이 이미 겪은 일

 

물론 그 모든 어려움을 뚫고 수정 마을 주민들이 이겼습니다. 지역과 전국에서 뜻있는 이들이 보이게 보이지 않게 많이 도운 덕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무시당하고 핍박받았을 때 할 수 있었던 행동 가운데 하나가 윗옷 벗기였습니다.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만, 2009년 6월 5일 열린 경남도 산업단지계획심의위원회가 수정만 매립지의 수정 일반 산업단지 건설 계획을 조건부 가결한 일을 들겠습니다. 주민에게 약속한 26개 사항을 잘 지키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26개 약속은 들어서기 전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11년 5월 16일 포기에서도 잘 나타났듯이 STX는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조건부 허가로는 약속을 지키도록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심의위원회는 비공개로 열렸고 회의록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수정 주민들은 6월 8일 도지사(지금 새누리당 국회의원인 김태호)를 찾아갔습니다. 항의하고 면담하기 위해서였는데 경찰에게 가로막혀야 했습니다.

 

젊은 경찰들에게 늙은이들이 맞설 힘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할머니 20명 가량이 윗도리를 벗은 채로 나섰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험한 몰골을 보여야 했는지요? 창원시도 STX도 아직까지 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4. 감물리 할매들은 2006년 복면을 해야 했고

 

시골 어르신이 복면을 뒤집어써야만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결국 막기는 했는데, 밀양시 단장면 감물리 할매들이 거기 들이세우려는 생수 공장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생수공장을 지으려는 쪽에서는 갖은 사진을 찍어 주민을 고소·고발했습니다.

 

 

그 탓에 2006년 11월 23일 40·50대 주민 다섯이 구속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발단은 이랬습니다. 그해 9월 6일 아침 김모(82)·다른 김모(72)·박모(77) 할매 3명이 공사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들머리는 경운기 여러 대를 동원해 예전부터 차단해 놓고 있었답니다.

 

이어지는 증언입니다. “갑자기 용역들이 한 40명 가량 몰려왔어. 그래 팔을 쫙 펼치고는 ‘못 들어간다’ 이랬지. 그랬더니 용역들이 내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 휙 집어던져 버리데? 그 길로 자물시고(까무러지고) 말았어. 눈 떠보니까 병원이데.” 김(82)씨 할매입니다.

 

“허리랑 목을 다쳤습니다. 두 분은 전치3주가 나왔고 한 분은 전치2주 나왔습니다. 어른을 이렇게 만든 용역들을 고소했는데 경찰이 그 수사는 않고 동네 위해 일하는 사람만 집어넣었어요. 편파수삽니다. 편파수사!” 당시 이장의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자 동네 사람들이 달려나와 맞섰는데 이를 두고 이렇게 구속 사태를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그해 11월 24일 찾아갔을 때 마을 주민 모두 남녀노소 구분 없이 까만 복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궁금한 마음이 일어 날씨가 추워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데가, 저것들이 카메라·비디오로 찍어서 자꾸 고소·고발을 해대니 젼딜 수가 있어야지!”

 

앞으로도 이런 일이 더 일어나야 할까요? 고향산천을 지키며 살아온 이 어르신들에게 복면을 또 씌울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이 할매들이 윗옷을 다시 벗어 던지고 마지막 저항에 나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야만일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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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왜 민가보다 장터에 더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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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라디오 광장에서는 시사와 동떨어져 보이는 소재로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처음 진행되는 제비 조사 관련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제비를 조사해서 어떻게 하자는 얘기냐고 따지겠지요. 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분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이 돈 되는 일로만 짜여 있지도 않고 남들이 알아주는 일만 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데에 매이지 않고 지낼 수 있을 때,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수진 아나운서 :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한 번 해 볼까요?

 

김훤주 : 여태까지 진주의료원, 밀양 송전탑, 학생 자살 같은 무거운 주제가 많았는데, 오늘은 조금 가벼운 얘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제비입니다.

 

 

1. 대중가요로도 많이 불리는 제비

 

진 : 제비요? 제비가 요즘 많이 줄기는 했지만 우리 한국인 정서에는 매우 친근하잖아요? 부러진 다리 고쳐준 흥부한테 보답으로 박씨를 물어다 줘서 팔자를 고치게 했다는 얘기도 있고요.

 

주 : 노래도 많습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으로 시작하는 가수 윤승희의 ‘제비처럼’도 있고요, 가수 조영남의 ‘제비’도 있습니다. 김건모도 ‘제비’를 불렀습니다. “룰루랄라~ 강남 갔던 제비도~ 다~시 돌아오는데~, 룰루랄라~ 날 버리고 간 님은 언제 돌아오려나~”라고 말입니다.

 

진 : 그만큼 인간이랑 친숙한 존재라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그런 제비가 많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예전에는 전깃줄이나 사람 사는 집 처마 밑에서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주 : 문화재청에서 제비가 사는 서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일 정도가 됐습니다. 2011년 얘기인데요. 문화재청이 제비가 많이 오는 전북 남원 금지면, 전남 여수 돌산면, 제주도 서귀마을 가운데서 한두 군데를 천연기념물로 정하고 문화재 보존구역으로 삼겠다고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를 찾아오던 제비의 99%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진 : 20년 전인 1993년에 100마리가 왔다면 올해 2013년에는 한 마리밖에 오지 않는 셈이네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줄어드는 것 같아요. 원인이 뭘까요?

 

2. 사람의 생활이 바뀌면서 사라져 가게 된 제비

 

주 : 제비가 주로 민가에 집을 짓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동반자였던 사람들이 생활이 크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어린 제비.

 

한옥을 버리고 양옥이나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둥지를 틀 마땅한 장소도 사라졌고, 또 농사를 짓지 않게 되면서 먹이를 잡아먹을 터전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집도 없고, 먹이도 모자라니 사람으로 치자면 의식주 가운데 식과 주가 곤란해진 상황입니다.

 

이밖에 환경 오염도 원인이겠고, 농사도 비닐하우스를 많이 하게 된 것 등도 원인이겠습니다.

 

진 : 사람들이 제비를 좋아하는 정도도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자기 집 처마에 둥지를 지어도 일부러 뜯어내거나 훼방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단독 주택에 사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비 둥지를 가만 두지 않는 것 같아요.

 

대나무로 제비가 둥지를 틀 여지를 막아버린 모습.

 

주 : 아무래도 세태의 반영이지 싶습니다. 아시는대로 제비는 벌레를 잡아먹고 삽니다. 옛날 농사를 많이 지을 때는 이게 바로 논밭에 병충해 피해랑 직결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제비가 고마운 새였는데, 지금은 농사를 적게 짓는 데 더해 벌레를 방제하는 기술이나 약품까지 많이 쓰니까 제비를 더 이상 고마운 존재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당연히 늘어납니다.

 

진 : 게다가 겉으로만 보자면, 제비가 둥지를 들면 집이 여러 모로 보기도 좋지 않고 위생상으로도 문제가 있잖아요. 제비 배설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둥지 짓는 진흙이랑 지푸라기 때문에도 지저분하지요. 그런데 제비는 왜 꼭 사람 사는 집에만 둥지를 틀까요?

 

주 : 제비가 수천 수만 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비한테 천적은 족제비 같은 야생동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사람한테도 해로운 동물이라서 집이나 닭장 같은 데 드나들지 못하도록 방비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한테 얹혀살면 이런 천적의 공격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 : 그렇군요. 제비는 또 농부가 써레질을 하거나 하는 논에 많이 모여든다고 들었어요.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주 : 써레질을 하면 논바닥이 뒤집어지고요, 그렇게 되면 밑에 있던 벌레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라고 봐야겠지요. 알고 보면 이렇게 사람이나 농업이랑 공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황로라는 새가 있는데요, 옛날에는 풀 뜯는 소들을 따라다니면서 놀라 튀어나오는 벌레들을 잡아먹었다 하고요, 요즘은 트랙터를 따라다니면서 먹이를 찾아먹는다고 합니다.

 

진 : 머리가 좋기로는 까치도 꼽힌다고 들었어요. 호두 같은 딱딱한 것을 아스팔트 도로에 떨어뜨렸다가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깨뜨리면 내려가 주워 먹는다고 말입니다.

 

3. 전국 최초 유일의 경남 지역 제비 총조사

 

주 : 이런 여러 경우를 보면 뭘 잘 까먹는 사람을 두고 새대가리라고 놀리는데, 그게 썩 잘 맞는 표현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갈수록 보기 어려워지는 제비를 관찰하고 조사하는 움직임이 우리 경남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1년 시작됐는데 올해 들어 사업이 본격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비르 위해 둥지 아래 배설물 받침대를 만들어 붙인 모습.

진 : 제비 조사 관찰을 우리 경남에서 하고 있다고요? 특별하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소식 같은데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하고 있나요?

 

주 : 경남도에서 습지 보전을 위해 만든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있습니다. 람사르환경재단이 후원을 하고 환생교,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경남 교사 모임이 진행을 맡았습니다. 경남 전역에서 제비 총조사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워크숍이나 발표회를 하면서 정해진 지역을 선생님과 초등학생들이 함께 나가 둥지나 제비를 찾아다닙니다.

 

아이들 발품을 팔아 모은 자료는 경남 지역 제비 서식 현황을 보여주고 제비와 우리 인간의 주변 환경 보전 정책을 수립하는 기초 자료로 쓰이겠지요. 그런데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효과는 학생들 생태 감수성을 키워준다는 데 있습니다. 교과서나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것들을 몸소 찾아다니니 친근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살고 있는 지역의 다른 아이나 어른이랑 자주 만나 얘기까지 나누게 되니까 소통능력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진 :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나요? 더구나 아이들이라면 어디 찾아가서 조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4. 아이들 관찰력이 중요한 구실

창원 진동면 진동시장에서 제비를 찾아나선 아이들.

주 : 선생님과 학생이 함께 미리 정한 구역을 찾아갑니다. 아이들이랑 같이 활동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 있는데요, 아이들 관찰력입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모른 채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조금 지나면 신통하게도 둥지나 옛날 둥지가 있던 자리, 날아가는 제비, 앉아 있는 제비 따위를 잘 찾아낸다고 합니다. 아이들 덕분에 조사가 원활하게 잘 진행되는 셈입니다.

 

진 : 그러면 지금 조사가 진행 중이겠네요.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요? 경남 전역을 빠짐없이 할 수 있을 만큼 인원은 충분한지 궁금합니다.

 

주 : 람사르환경재단에서 지원하는 예산이라는 것이 한 해 1000만원 안팎으로 적은데다 환생교 선생님들이 담당할 수 있는 지역도 한정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생각으로 이제 조그맣게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5. 민가보다 장터에서 더 많이 발견된 제비들

 

진 : 올해 조사에서 특징이라 할만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주 : 시골 민가들보다 시골 장터에서 제비나 둥지가 더 많이 발견됐다는 사실입니다. 전통시장인 창원 진전면 진동장터랑 밀양시 무안면 장터와 삼랑진읍 송지시장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둥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진 : 그래요? 보통 상식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다들 민가에 제비가 둥지를 주로 튼다고 알고 있잖아요.

 

주 : 아무래도 옛날과 환경이 달라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데요, 제비가 인간이랑 같이 살려고 하는 까닭이 천적을 물리치고 보호를 받는 데 있잖아요.

 

그런데 요즘 시골 농가는 대부분 70대 80대 어르신이 둘이 또는 혼자 사는 경우라 인기척조차 드문 반면 시골 장터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자주 드나드니까 천적이 없거나 적고, 그래서 그렇게 바뀌지 않았을까 짐작을 합니다.

 

6. 자치단체의 도움이 절실한 제비 조사

 

진 : 나름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는 활동인 것 같은데요, 앞으로 제대로 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주 : 뭐니뭐니 해도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관심과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경남도나 경남도교육청 같은 자치단체가 전혀 관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공문만이라도 하나 보내줘도 ‘제비 총조사’를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5월 11일 열렸던 경남의 제비 총조사 활성화 포럼.

진 : 일본에서는 이런 제비 총조사가 올해로 42회에 이르는 현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처음 시작이 1972년인 셈이네요.

 

주 : 이번 경남 총조사도 말씀하신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진행되는 ‘고향의 제비 총조사’를 벤치마킹한 것인데요. 이시카와현은 1972년부터 모든 공립 소학교를 조사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현 차원에서 공식으로 적극 지원하고 협조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지역 브랜드로 자리잡았을 정도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진 : 그렇군요. 일본 하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본받을 만한 것이 있으면 적극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파친코 같은 나쁜 것은 따라 하지 말고 말씀입니다.

 

김훤주

 

※ 사진은 경남 환생교와 경남람사르환경재단에서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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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으로 만든 홍차 - 그 맛과 향과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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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일요일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하는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이 있었습니다. 야생차로 이름 높은 하동의 매암다원으로 가서 전통차 체험을 하고 섬진강을 걸었습니다.

 

이날 매암다원 차 체험 프로그램은 모두 여섯이었는데 하나 같이 수준 높고 잘 준비돼 있었습니다. 아마 굳이 돈으로 치자면 5만원 어치는 넘고도 남음이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이 날 아이들 체험을 거드느라, 그리고 아이들 물놀이 장소 지키느라 홍차 만들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이들을 도우면서, 어떻게 만드는지는 익힐 수 있었습니다.

 

 

먼저 찻잎을 두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치 뭉칩니다. 이 때 찻잎은 하루 정도 그늘에서 시들린(시들게 한)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손으로 힘을 주어 꾹꾹 누릅니다. 스무 차례 정도 되풀이한 다음 다시 펼쳐 안팎을 뒤섞습니다.

 

그래야 골고루 눌러질 수 있으니까요. 대략 20분쯤을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찻잎에서 진물이 하얗게 나와 질퍽거릴 정도가 되고 둥글게 공 모양으로 뭉친 찻잎이 저절로는 펼쳐지지 않을 만큼이 되면 대소쿠리 바닥에 펴서 문질렀다가 뭉쳤다가를 여러 차례 거푸 합니다.

 

그러고는 펼쳐서 햇볕에 말립니다. 볕은 쨍쨍할수록 좋습니다. 한 이틀 정도 바짝 말리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한 열흘 가량 그늘에서 말립니다. 바삭바삭해지도록 말리면 이제 끝입니다.

 

 

이 날 아이들은 이렇게 만든 홍차를 한 서너 시간 말린 녀석을 집으로 갖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버스 안에서 “이틀 더”를 여러 차례 외쳤습니다. 홍차는 발효차입니다. 제대로 발효되지 않으면 제 맛이 날 리가 없습니다. 여기 ‘이틀 더’는 발효에 필요한 시간의 최소한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그 날 매암다원에서는 홍차를 만들지 못하고 찻잎만 조금 따 왔습니다. 딴 찻잎이 처음에는 적지 않았지만, 적게 딴 아이들한테 조금씩 나눠주고 나니 그야말로 한 움큼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문득 생각이 나서 배운 그대로 홍차를 만들어봤습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쪼물락쪼물락 만든 다음 출근할 때 창밖에 내다놓았습니다.

 

오른쪽 말린 홍차, 왼쪽 끓여 마셔서 잎이 원래대로 펴진 홍차.

비가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흐린 날씨였습니다. 그래서 이틀이 아닌 사나흘을 바깥에 내뒀다가 다시 방안으로 옮겨 열흘 정도 말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홍차를 끓였더니 이런 맛이 향이 색이 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혓바닥을 톡 쏘는 느낌이 있습니다. 향기는 조금 자극적이면서 달콤합니다. 맛은 부드럽습니다. 색깔은 은은합니다. 찻잎 어디에 이런 향과 맛과 색이 숨어 있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찻잎을 잡았을 때, 그 녀석은 비릿한 풀냄새만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차레 주물리는 과정을 겪더니 이렇게 바뀌어 태어났습니다. 아마도, 몸소 찻잎을 따서 자기 손으로 주물러 차를 만드는 일이 즐거운 까닭이 여기 있나 봅니다. 저는 이 홍차가 없어질 때까지, 아니 없어지고 나서도 이런 맛과 향과 색이 신기할 것 같습니다.

 

제 손으로 이런 맛과 향과 색을 내었다는 즐거움이 더없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준 매암다원과 거기 강동오 관장(매암다원에는 매암차문화박물관-물론 거창한 그런 따위는 전혀 아니고-이 있는데 그 또한 그럴 듯합니다.)이 정말 고맙습니다.

 

여기 다원에서는 찻값 2000원만 내면 잘 지은 건물에서 또는 참 좋은 감나무 그늘에서 하루종일 질리도록 마음껏 차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강동오 관장을 비롯한 여기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편안하게 맞이해 줍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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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기 드문 남해 해물집과 함안 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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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미조해물촌'과

함안 법수의 '소나무집'

 

5월 25일 토요일 합천 초계에서 우리밀 밀사리에 참여해 점심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고는 남해로 길을 돌려잡았습니다. 6월 19일로 예정돼 있는 생태·역사기행 네 번째 여정을 답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리암과 바래길과 상주해수욕장을 거치니 저녁 6시가 다 됐습니다.

 

돌아나오는 길에 미조에 들렀습니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채널A 이영돈 PD가 진행하는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 식당으로 지정됐다는 전복죽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확장을 하는 모양입니다.

 

저으기 실망하는 마음을 안고 나와 밥집 한 군데를 들렀습니다. 해물탕을 주문했더니 해 놓은 밥이 없어서 내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밥이 아닌 전복죽은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냥 나와 다시 다른 밥집에 들어갔습니다.

 

해물탕은 하지 않는 해물 전문점 '미조 해물촌'

 

‘미조 해물촌’이었습니다. 여기서도 해물탕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옮겨가기 귀찮아서 그냥 해물 모둠 하나랑 전복죽을 주문했습니다. 전복죽도 알알이 국물이 배이고 전복 맛이 배인 것이 나쁘지 않았지만 해물 모둠이 더욱 좋았습니다.

 

 

킬링(killing=죽여주는) 해물 모둠이 제 몸을 힐링(healing)해주는 그런 느낌이었지요. 그렇지만 해물탕을 주문했는데도 먹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왜 하지 않을까?’ 스스로 묻고는 ‘아마 이문이 적어서 그러겠지’ 스스로 답했습니다. 어쨌거나 마뜩찮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 먹고 계산까지 마치고 짐짓 지나가는 말투로, “해물탕은 왜 안 해요?” 물었습니다. “중국산밖에 쓸 수 없어서 안 하는데요.” 이랬습니다. 저는 그러려니 여기면서 나오는데 다른 일행이 들어오면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해물탕을 주문했습니다.

 

당연히 해물탕 안 하는데요, 라는 말을 들었겠지요. 일행은 물었습니다. “해물촌에서 해물탕을 안 한다니 말이 돼요?” 그러니까 주방에서 제대로 된 답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해녀들은 조개나 게 같은 것은 안 잡거든요. 해물탕에 넣으려고 그런 것을 사려 해도 중국산밖에 없어서 하지 않습니다.”

 

일행은 바로 떠나갔지만 저는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남해 바닷가 미조에서 이러나저러나 해물탕을 내놓으면 대부분은 그 바다에서 나는 해물로 만든 줄 여길 텐데도 그랬습니다. 그 밥집 차림표를 보니 원래는 해물탕이 메뉴로 올라가 있었는데 요즘 들어 지웠는지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싶었지만 크게 궁금하지은 않았습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손님 주문은 채워 주지 못할지언정 속일 요량은 하지 않겠노라 여기는 밥집을 만나 좋았습니다. 다음에 또 오고 싶은 기분이 확 들었습니다.

 

이런 밥집도 만났습니다. 한 주일 뒤인 6월 2일 일요일입니다. 함안 법수 소나무집에 저녁 나절 들렀습니다. 6월 16일 치르는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 답사 걸음이었습니다. 애초에는 들깨국수를 먹어야지 작정을 했더랬습니다. 예전에 와서 먹어본 혓바닥이 그리 이끌었습니다.

 

소나무만큼 청정한 재료를 쓴다는 함안 소나무집

 

그랬더니 주인은 가을철인 10월 1일부터 들깨국수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봄철 또는 여름철입니다. 대신 ‘아싸가오리비빔국수’를 권했습니다. 같은 여름철 음식인 콩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으나 지금은 준비가 안 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오늘 장만해 둔 콩국이 있기는 하지만 적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집 주종목이라는 ‘아싸! 가오리 비빔국수’를 주문했습니다. 금세 나왔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비빔국수에 섞여 가오리 무침이 나왔는데 제 입에는 좀 센 편이었습니다만 면발 양념은 조금 심심한 것이 딱 좋았습니다.

 

 

맛나게 훑어 먹었습니다.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점심만 합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손님이 끊어지지 않고 줄곧 이어져서 아직도 접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손님이 찾아왔으니 바로 내놓았습니다.” ‘이런 가로늦게 찾아왔는데도 호강을 한 셈이로구나.’

 

“오늘 장만한 콩국은 어지간하면 맛이라도 보시라 권하려 했는데 버려야겠어요. 녹은 물을 보니 지나치게 묽은데다 상했는지 아닌지 위생 상태도 알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자칫 잘못했으면 상한 콩국수를 먹고 배탈을 할 뻔 했구나.’

 

물었습니다. “콩은 무슨 콩을 쓰세요? 국산 콩을 쓰세요?” “옆집 할머니한테 사서 써요. 농사를 제법 크게 짓거든요. 국적을 알 수 없는 콩가루를 물에 타서 내놓는 집도 많지만 저희는 아침마다 콩을 삶고 그렇게 삶은 콩을 다시 갈아서 내놓아요.”

 

“그러면 들깨는요?” (물론 여름철인 지금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말도 마세요. 들깨는 한 말을 사도 갈아 놓으면 얼마 안 돼요. 옆집 할머니 농사 지은 것을 사는 것은 똑같아요. 어쨌든 그것도 날마다 갈아서 씁니다.”

 

그렇지, 하나를 하더라도 저렇게 제대로 하면 잘할 수 있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 들으셨나 봅니다. “맞아요, 옛날에 진짜 어려울 때는 이런저런 욕심에 열 가지도 넘게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 합니다. 일손도 덜합니다.”

 

그러면서 모자라면 더 달라고 주문하라고 합니다. 여기 소나무집은 꼽배기가 없답니다. 그냥 더 달라고 하면 한 덩어리 더 삶아서 내놓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를 돈으로 더 받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은 이런 것이 제대로 하는 장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밥집 다른 데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6월 가기 전에 함안 법수 갈 일이 또 있는데 그 때는 일부러라도 소나무집에 들러야겠습니다. 10월 지나서도 꼭 함안에 갈 일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래야 핑계 대고 ‘한 말을 갈아도 얼마 안 되는’ 들깨 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을 수 있겠거든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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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바다 역사 문화 체험, 연대도서 통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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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의 2013년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은 여행 체험으로 잡았습니다. 지난해는 역사체험단이었습니다. 공부보다는 놀이를 중시해야 맞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해서 문제고 제대로 놀지 못해 문제인 세상입니다.

 

제대로 놀아본다 해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개개인이 잘 사는 능력, 세상을 제대로 즐기고 누릴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사실 아이들 교육은 목표가 출세 따위가 아니라 잘 살기에 놓여져야 마땅합니다.

 

해딴에는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을 통해 아이들 감수성과 상상력과 활동력이 많이 나아지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서로에 대한 서로의 이해와 배려가 커지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 개인의 삶도 좋아지고 세상 사람 전체의 삶도 나아지겠거니 여깁니다.

 

어릴 때 이런 체험이 인생 항로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1. 통영 연대도는 어떤 곳일까?

 

2013년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은 통영에서 시작했습니다. 오랜 옛날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견됐던 연대도를 찾았습니다. 연대도는 이른바 에코 아일랜드입니다.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 소비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고, 마을 만들기로 동네를 새로 꾸미기도 했습니다.

 

연대도에는 에너지 소비가 제로(0)인 마을회관이 있습니다. 더우나 추우나 열기나 냉기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차단한 패시브(Passive) 하우스입니다. 일부러 환기를 하지 않으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정도라고 합니다.

 

게다가 햇빛 발전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동네 사람들이 한 해에 내는 전기요금이 1만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햇빛 발전을 통해 생산되는 전기는 이 동네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까지 공급이 됩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무척 신이 났습니다. 연대도 들어가는 배를 타면서부터 그랬습니다. 바닷가나 섬이 아닌 뭍에 사는 아이들이다 보니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는 자체가 재미있고 신기한 것입니다. 연대도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2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습니다.

 

 

2. 화석 에너지 소비가 거의 없는 연대도

 

그 거리를 달리면서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너울대는 갈매기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맞지 않으려고 기관실로 들어가 앉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연대도에 가닿았습니다. 오늘 설명을 해 주실 선생님이 맞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먼저 우리나라 최초 공공건물 패시브 하우스인 마을회관으로 이끌었습니다. 마을회관은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공기를 100%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차단하니까 차가운 바깥 날씨가 안으로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마을 햇볕발전시설도 일러주셨고요, 그 덕분에 전기가 절약돼 패시브하우스는 전기요금을 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을을 둘러봅니다. 집집마다 대부분 문패가 붙어 있습니다. 문패는 연대도 섬처럼 모양이 생겼습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납니다. 고샅고샅 둘러보니 재미난 거리들이 많습니다. 여기 우물도 그런 하나입니다. 무슨 대학교가 언제 와서 이렇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개를 좋아하나 봅니다. 하나 같이 이 털북숭이 커다란 개를 쓰다듬고 사진 찍고 법석입니다. 개도 이렇게 아이들이랑 어울리니 좋은 모양입니다. 길다란 꼬리가 쉴 새 없이 흔들립니다. 기다리다 못한 제가 어서 가자고 서두릅니다.

 

 

마을을 세로 질러 올라가면 낭떠러지가 나타납니다. 섬에 자리잡은 마을은 대체로 남향을 하지 않고 북향 또는 북서향을 한답니다. 태풍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목적입니다. 여기 연대도도 그러한데 태풍은 대체로 남동쪽에서 몰려옵니다.

 

3. 조그만 몽돌해수욕장과 호젓한 지겟길

 

여기 낭떠러지도 섬의 남동쪽에 있습니다. 여기 서면 아래로 20m넘게 까마득합니다. 그런데 2003년 태풍 매매 때는 해일이 이 절벽을 넘어 마을을 덮쳤다고 했습니다. 엄청납니다. 어쨌거나 여기 풍경이 매우 멋집니다.

 

 

오른편으로 가면 낭떠러지를 왼편으로 두고 줄이어 걸을 수 있는 길이 이어집니다. 이를테면 벼랑길, 비리길입니다. 연대도에서는 옛날 지게 지고 걷던 길이라 해서 이름이 지겟길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함께하기 때문에 여름에도 바람이랑 그늘이 시원합니다.

 

 

앞으로 곧장 내려가면 몽돌해수욕장입니다. 손바닥만합니다. 조그만 섬에 어울리는 크기입니다. 이런 데 와서 보면 압니다. 여기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기 때문에 몽돌 같은 자연물을 들고 나가면 안 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정해져 있고 그래야 자연생태가 다치지 않는단다, 일러주면 그대로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무리 일러줘도 자기 욕심만큼 기어이 들고나갑니다. 아이들도 욕심이 없지 않지만, 침이 꼴딱 넘어가도록 군침이 돌지만, 꾸욱 참고는 맙니다. 어떤 때는 옆에 있자면 어금니 깨물리는 소리가 진짜로 들리기까지 할 지경입니다.

 

4. 체험 센터에서는 에너지 생산의 힘듦을

 

여기서 조금 노닐다가, 능선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해서 에코아일랜드체험센터로 가 점심을 먹습니다. 옛날 연대초등학교 자리입니다. 학교가 문을 닫고나서 새롭게 태어난 공간입니다. 마당에는 발전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들이 놀이를 겸하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여기 있는 시소나 자전거를 타면 전기가 생깁니다. 타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힘이 듭니다. 그렇게 힘이 들어야 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절전으로 이끕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여기 있는 모든 것이 그렇게 되도록 돼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습니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먼저 타겠다고 다툴 법도 한데, 그런 아름답지 못한 일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5. 동남아시아 사람도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연대도

 

선생님은 이런 조그만 연대도에, 7000년 정도 전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얘기도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귀를 쫑긋 모읍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얘기여서 관심이 가나 봅니다. 그런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땅을 파도 바로 쏟아져 나오는 그릇 조각들이 그 증거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신석기 시대 사람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키가 작았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조사해 봤더니 지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조상이 아니고 동남아시아에 사는 사람 조상이더라고 했습니다. 연대도 신석기 시대 당시에는 무역기지였던 셈입니다.

 

또 화살촉도 나왔는데, 흑요석(黑曜石)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까맣고(黑) 반들반들한(曜) 화산암(石)인데, 화산이 폭발할 때 만들어지기 때문에 저마다 성분 구성이 다르다고 합니다. 성분을 따져보면 바로 출신지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나온 흑요석은 일본에 1800년대 후반 점령당한, 큐슈 북부 사가현 코시타케가 원산지로 밝혀졌습니다. 그 먼 옛날에 이런 문물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아이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감흥이 부풀어 오른 모양입니다.

 

저마다 막대를 하나씩 구해 땅을 비집습니다. 거기서 이런저런 그릇 조각들을 찾아냅니다. 집에 가져가고 싶지만 여기는 그런 반출이 금지돼 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입니다.

 

아이들 간절한 눈초리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슬쩍 딴전을 부립니다. 그 틈을 타서 저는 이 친구들 귀에다 대고 “괜찮지 않겠나, 하나쯤은?” 부추깁니다. 아이들 얼굴이 환해집니다.

 

6. 게나 고동이나 해안 체험

 

마지막으로 해안 체험입니다. 에코센터 넘어 밭두렁을 타고 성큼 더 들어간 거기 바닷가에서 센터까지 다시 걷습니다. 선생님은 이런저런 설명을 끼얹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마냥 모래랑 바위랑을 건너다니며 놀기에 바쁩니다.

 

신석기 시대 이야기를 들은 뒤끝이라 이렇게 돌을 돌로 갈아보는 모습입니다.

설명과 놀이가 버무려집니다. 들으면서 메모까지 하는 친구도 있고 바위까지 뒤집어가며 게나 고동 같은 것 찾는 재미에 빠져버린 친구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조그만 생물들이 생태계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일러줍니다.

 

이런 조그만 생물들이 있지 않다면 더러워진 물이 정화되는 일도,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어치우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바다는 바다가 아니게 됩니다. 또 먹이사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답니다. 하늘을 나는 철새나 바다 속에 있는 크고작은 물고기들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렇게 찾아와 놀지도 못하게 됩니다. 하하.

 

7. 통영해양수산과학관에서도 체험하고

 

배를 타고 돌아나옵니다. 마지막 통영해양수상과학관에 들릅니다. 여기서는 통영의 어업을 시대별로 훑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이라도 더 자기 몸을 써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돌아나오는 길에 만난 연대도 아저씨. 조개를 캐시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몸이 기억을 하면, 그 기억은 어쩌면 평생토록 이어질 정도로 강력하고 끈질깁니다. 바로 이게 남는 것입니다. 통영해양수산과학관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했습니다.

 

8. 6월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은 함안 남강에서

 

 

돌아오는 길까지 즐겁고 뿌듯한 까닭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싶습니다.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마련하는 6월의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은 16일 셋째 일요일 함안 법수 남강으로 갑니다. 거기에는 악양제 기다란 둑과 길이 있고 토끼풀 따위가 왕성하게 피어 있는 둔치가 아주 너릅니다.

 

둑과 길에는 갖은 꽃들이 줄지어 피어나 있고요, 둔치에는 일부러 심지 않고 저절로 피어나서 더욱 아름다운 야생 풀꽃들이 지천입니다. 또 악양제 끄트머리에는 크지는 않지만 아이들 어울려 놀기에는 그지 그만인 공원이 하나 달려 있습니다.

 

 

이번에 아이들 보내실 때는 여벌 옷을 하나 꼭 챙겨주셔야 하겠습니다. 촛대로 쓸 수 있는 솟대를 만드는 체험도 진행합니다. 남강 넉넉한 물길을 통째 눈에 담을 수 있는 악양루에도 오릅니다. 문의·신청·상담은 055-250-0125, 010-8481-0126. 참가비 4만5000원.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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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에게 건널목 신호등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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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반송동 대동그린코아아파트 앞 건널목입니다. 왕복 7차로 도로를 세로지릅니다. 오늘 6일 창원천을 살펴보러 왔다가 이런 모습을 눈에 담았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일이지만, 다리가 좋지 않아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이 여기 건널목을 건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작심한 듯이 서둘렀지만 녹색 신호등이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도로 위 건널목에 걸쳐 있어야만 했습니다.

 

기억 속 풍경에서 그 어르신 둘레는 조용했습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 맞은편에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많이 늙으신 듯했습니다. 걸음걸이가 불편하시겠지, 정해진 시간 안에 건널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이런 생각에 앞뒤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신호등 색깔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주 보고 건너기에 앞서 할머니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왼편에 파란색 옷을 입은 분입니다. 도로 가운데쯤에서 스쳐지나갔습니다.

 

 

할머니가 출발했던 그 맞은편에 닿아서 돌아봤습니다. 신호등이 다시 녹색에서 빨갆색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는 건너야 할 차로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가운데 차로에 서 있던 자가용이, 할머니가 지나가자마자 휘리릭, 달려나가 사라지고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장 바깥 차로에 있는 자가용은 할머니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조금 뒤에 할머니는 건널목을 다 건넜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할머니랑 함께 길을 건너던 다른 사람은 모두 제 갈 길로 가느라 풍경에서 없어졌습니다.

 

도로를 건넌 할머니는 가로등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냥 지탱하려고 잠깐 붙잡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한참을 그렇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서둘러 건너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할머니에게, 건널목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녹색과 빨간색을 되풀이 오가는 신호등은 무엇일까요? 쌩쌩 갖은 자동차 내달리는 도로는 무엇일까요? 네모꼴로 쌓아올려진 건물과 가로세로 쫙쫙 뻗은 도로로 상징되는, 이 도시는 또 과연 무엇일까요?

 

할머니의 이런 현실에 대해, 할머니의 이런 보행권에 대해, 우리 사회는 우리 행정은 얼마나 관심을 갖고 배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사회 지금은 쌩쌩한 인간들(저를 비롯해서)은, 저렇게 저기 저 할머니처럼 늙어지는 일 없이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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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려천 부실 공사 창원천과 견주면 더 뚜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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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6일 창원천을 다녀왔습니다. 같은 창원(하지만 예전에는 마산)의 내서읍 광려천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엉터리로 돼 있는데, 창원천도 그런지 한 번 따져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원천도 광려천과 마찬가지로 아직 그런 따위 공사가 다 끝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른 데는 모르겠으나, 이 날 둘러본 반송동 대동그린코아 일대는 분명 광려천 롯데마트 삼계점 앞에서 동신아파트까지 이르는 구간보다는 나았습니다. 여기 창원천은 둔치에 자전거길만 있고 산책로는 없었는데, 군데군데 손질한 데가 있지만 광려천처럼 자글자글 조각난 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원천 자전거길은 광려천 자전거길이나 산잭로와 달리 한 번 보수로 끝낼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창원천 자전거길과 광려천 산책로·자전거길은 공법부터가 달랐습니다.

 

자글자글 갈라지는 광려천 산책로.

깨어지고 들고 일어나고 난리법석인 광려천 산책로.

들고 일어나는 광려천 산책로 바닥.

손만 조금 대도 떨어져 나가는 광려천 산책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창원천은 자전거길이 단일한 방법으로 시공됐습니다. 그래서 보수를 할 때 그냥 원래 썼던 재료를 원래 했던 방법 그대로 덧칠만 해도 됐습니다. 해당 부분이 조금 두툼해지기는 했어도 그 밖에 다른 문제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창원천 자전거길.

 창원천 자전거길 보수한 자취들.

광려천과 다른 대목입니다. 광려천 자전거길과 산책로는 가장 아래에 콘크리트를 깔아놓은 다음 그 위에다 2~3mm 되는 도막형 바닥재를 두 차례에 걸쳐 붙였습니다. 얇으니까 깨어지기 쉽습니다. 붙였으니까(말하자면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고 두 개 세 개이니까) 떨어지기 쉽습니다.

 

지금 이것이 광려천 산책로·자전거길 엉터리 공사의 본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5월 22일치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광려천은 실시설계 때부터 도막형 바닥재로 결정됐다. 이후 입찰을 통해 도막 공사만 별도로 발주해 서울의 한 시공사가 작업을 벌였다.

 

이에 대해 창원시 재난안전하천과 관계자는 ‘하천이 넓고 둔치가 확보된 곳으로 보행성, 미관, 평탄성, 경제성 등을 고려해 현장에 가장 적합한 재료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누더기가 된 광려천 산책로.

 

보행성·미관·평탄성은 사실 지금 이 국면과 관련해 볼 때 무슨 뜻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뒤에 경제성은 대충 값이 싸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제대로 하려거든 죄다 뜯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경제성이 무슨 보람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창원천도 그 생태하천 복원 공사가 그리 썩 잘해 놓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광려천이 얼마나 엉터리로 됐는지는 반면교사로 일러줬습니다.

 

창원천을 보면 둔치에 자전거길을 내면서 그 양쪽에 잔디를 빽빽하게 한 줄씩 깔았습니다. 그런 다음 하천 쪽으로 필요한 풀들을 듬성듬성 심었고, 거기서 하천에 이르는 구간은 자연스럽게 자라나온 풀들이 그대로 자라도록 했습니다.

 

 창원천 자전거길. 오른쪽에 식물들 심긴 차례를 눈여겨 봐 주시기 바랍니다.

창원천. 가장 아래에 자전거길이 있고 그 바로 위에 두툼하게 잔디가 심겨 있으며 그 너머로 풀이 듬성듬성 심겨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훨씬 더 이치에 합당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광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전거길이나 산책로 둘레에 그렇게 잔디를 빽빽하게 갖다 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너른 둔치에다 듬성듬성 잔디를 가느다랗게 심어놓았습니다.

 

성기게 심겨 다른 잡풀들의 침공을 쉽게 허용하는 광려천 잔디.

성기면서도 넓게 심겨 관리가 더욱 어려울 것 같은 광려천 잔디.

 

그 결과는 이미 나오고 있습니다. 창원천처럼 빽빽하게 심어 놓으면 거기로 다른 잡풀들이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창원천 빽빽하게 심긴 잔디는 거기를 전진기지 삼아 다른 쪽으로 퍼져나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광려천처럼 저렇게 성기게 심어놓으면 거기로 다른 풀들이 손쉽게 들어와 결국은 잔디를 압도하게 됩니다. 잔디를 심은 보람이 사라지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관리하는 데 드는 노력이나 비용만 불리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창원천은 또 창포도 제대로 심겼습니다. 물론 하숫물이 흘러나오는 데마다 심겨 있지는 않아 100% 제대로는 아니었습니다. 광려천과 견주면 그나마 낫다는 얘기입니다. 광려천은 둔치 높은 데에 창포가 심겼습니다.

 

둔치 높은 데에 심긴 광려천 창포.

창포가 심겨 있지 않고 잡풀만 무엇한 광려천의 하숫물 나오는 물줄기.

광려천 하숫물 흘러나오는 데지만 창포는 심겨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원천은 때로는 하숫물이 흘러나오는 데 심겨 있었고요, 그렇지 않다 해도 물길이 흐르는 천변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광려천 창포는 그래서 전혀 수질 정화를 하지 못합니다. 창원천 창포는 물가에 심긴 그만큼 물과 만나 수질 정화 작용을 합니다.

 

창포가 심겨 있지 않은 창원천 하수 물줄기.

물가에서 자라고 있는 창원천 창포.

창원천 창포가 심겨 있는 하수 물줄기.

 

왜 이렇게 광려천 환경 정비 사업이 엉터리로 됐는지요? 주어진 자연생태 조건은 광려천이 창원천보다 훨씬 나은데, 창원시는 왜 이렇게 창원천보다 광려천에게 나쁜 손찌검을 해대는지 그 까닭을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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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은 진해 어디가 보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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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가키시 죽순회 진해 탐방 창원청년회의소(회장 이상구)가 국제 민간 차원에서 일본 오가키(大垣)시 죽순회(竹の子會) 회원 가족 18명을 2박3일 일정으로 초청해 ‘진해 한일관계사의 현장 탐방’ 등 행사를 치렀습니다.

 

5월 31일 입국한 죽순회 일행은 창원청년회의소 회원 집에서 묵은 다음 6월 1일 창원 삼정자초교를 찾아 이 학교 관현악단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회원 가족과 더불어 웅천읍성과 웅천도요지전시관·제황산공원 등을 둘러봤습니다. 이 진해 탐방을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맡아 진행했습니다.

 

1. 멀리서 왔을수록 사람 사는 모습이 궁금하다?

 

 

먼저 이번 일본 사람들의 진해 탐방을 진행하면서, 먼 데서 온 이들일수록 여기 사람 사는 구체 모습에 대해 호기심이 많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훌륭한 전시물이 있는 데가 아니라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사람 사는 자취나 냄새가 남아 있고 묻어나는 그런 데를 좋아했습니다.

 

석환(石丸). 돌 탄환인 셈입니다.

삼정자초교 교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 일행들. 오른쪽이 일본 죽순회 회원들입니다.

 

낮 1시부터 6시까지 다섯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기에 일정이 빠듯했습니다. 먼저 들른 데가 웅천읍성입니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수군절제사영(水軍節制使營)입니다. 1407년 삼포 개항으로 늘어난 일본인 불법 입주를 막으려고 1439년(세종 21) 쌓았습니다.

 

웅천초교 정문에서.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왜구에게 일시 함락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머물렀습니다. 동문을 비롯해 동쪽 부분만 복원이 돼 있습니다. 안에는 웅천초등학교와 웅천고등학교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 둘레 3514척, 높이 15척이며 우물이 2개 있다고 나옵니다.

 

 

고등학교 자리에 동헌을 비롯한 관아가 있었고, 초등학교 자리에는 객사가 있었습니다. 수령이 업무를 보는 동헌은 지역 읍치(邑治)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읍성 전체의 중심은 객사였습니다. 조선 시대 객사는 단순히 길손이나 손님이 머무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임금을 대신해 서울에서 오는 관리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궐패(闕牌)가 있었습니다. 궐패는 대궐을 상징합니다. 대궐은 임금을 상징합니다. 고을 수령은 한 달에 두 차례 여기다 대고 절을 하는 예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고을과 읍성의 중심이 됐습니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둘레에는 지역 역사가 묻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우뚝 솟은 오래 된 나무는 옛적 관아 앞 자리입니다. 이 나무는 여기서 이뤄진 갖은 행위들을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동쪽 울타리는 읍성의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애쓴 이들을 기리는 빗돌 따위도 여기 있습니다. 어른인 일본 죽순회 회원들은 이런 설명을 귀담아 듣습니다. 여기 사람 살았던 자취를 떠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2. 웅천읍성,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놀이터

 

아이들은 한국과 일본 구분 없이 뒤섞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닙니다. 복원된 읍성 위 바위들이나, 거기 지어진 누각이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입니다. 어른들은 위에 올라가 성곽은 물론 해자나 옹성 따위를 눈여겨봅니다.

 

읍성 전체를 일러주는 안내판에도 그이들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옛날 사람살이가 여기서 이뤄졌습니다. 웅천읍성 남쪽 바닷가에는 남산이 있고 남산에는 웅천왜성이 있습니다. 이 왜성은 남아 있는 형태가 거의 원래 그대로여서 우리나라 왜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또 읍성에서 바닷가를 따라 왼편으로 나아가면 도롯가 왼편으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웅천으로 해서 일본군을 따라 들어온 군종신부였습니다. 역사에 기록돼 있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서양 사람입니다.

 

남산 서쪽으로 나 있는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제포는 조선 시대 일본 사람에게 문을 연 세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제포성도 있었고 제포왜관도 있었습니다. 왜인들은 고개를 넘어 웅천읍성 있는 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이들은 거기서 먹고 살고 무역하고 배 타고 했습니다. 제포성은 자취가 남아 있고, 제포왜관은 자취조차 없습니다. 제포성·왜관 아래로는 바다가 펼쳐져 일본에까지 이릅니다. 그 가운데 대마도도 있습니다.

 

3. 도요지는 어떤 자리에 들어설까?

 

웅천도요지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나름대로 잘 지어져 있습니다. 웅천도요지는 조선 시대 전기에 경영됐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예나 이제나 그릇은 사람살이에 필수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이런 도요지가 있었습니다.

 

기념사진도 한 장 찍고.

 

도요지가 들어서려면 거기 필요한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먼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흙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릇을 굽는 데 쓸 수 있는 땔감이 풍부해야 합니다. 아울러 만들어진 그릇을 대처(大處)로 갖고 나갈 수 있는 좋은 물길이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웅천도요지는 이런 조건을 갖췄었답니다. 골라 쓸 흙이 많았고, 바로 위 보개산은 나무를 내줬으며 깊숙이 들어온 바닷물은 동쪽 낙동강 하구나 서쪽 바닷길이랑 손쉽게 이어지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웅천도요지는, 일본에서 국보로 모셔지는 이도다완(井戶茶碗=조선찻사발)을 만들었을 개연성이 있는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잘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만든 수법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여기 웅천 도요지 그릇 만드는 기술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 꽃을 활짝 피웠다고 합니다.

 

 

4. 맞잡은 손을 서로 놓지 못하는 아이들

 

다음으로는 창원해양공원입니다. 여기는 해양생물테마파크와 군함전시관·해전사체험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미리 부탁해 놓은대로 해설하는 이가 나와 구석구석 안내를 해줬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와 어른이 뒤섞여 여기 나와 있는 여러 거리들을 듣고 보고 누립니다.

 

검은 옷이 일본 아이들.

 

한 서너 시간 이렇게 노니는 사이에 일본과 한국 아이들이 무척 친해졌나 봅니다. 아이들 서로 붙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장난도 하고, 걸핏하면 서로 꼬리를 무는 뜀박질을 해댑니다. 저런 우정이 오래 가거나 줄곧 이어질 개연성이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렇게 나라 구분 상관없이 서로를 위하며 서로를 좋아하며 하루를 보냈던 기억은 오래도록 이 아이들을 즐겁고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 이런저런 행사나 탐방은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저런 마주 잡음과 그 마주 잡음의 기억이 핵심입니다.

 

창원시민대종이라 돼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진해시대종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5. 제황산에서는 풍경이 아닌 추억을 찍고

 

이어서 제황산공원으로 갑니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일본이 1905년의 러일전쟁 전승을 기리는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해방 이후 헐렸다가 1967년 해군 군함을 상징하는 진해탑이 높게 들어섰습니다. 높이 28m에 9층인데 시가지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중원로타리 방향에서 제황산에 오르는 계단이 있는데 모두 365개여서 1년계단이라고도 합니다. 일행은 여기서 모노레일카를 타고 올랐습니다. 올라서 활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이들 몇몇은 1년계단으로 빠르게 내려갔습니다.

 

죽순회 회장입니다.

모노레일카로 오르내리면서는 대부분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멋진 모습이 잡히지는 않았습니다. 날씨가 흐려 멀리 풍경이랑 모습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관은 없습니다. 이날 어른이랑 아이들이 카메라에 담은 것은 한국과 일본 사람의 어울림과 그런 어울림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출발했던 창원 삼정자초등학교로 돌아오니 딱 6시였습니다.

 

저희 해딴에는 여기까지 진행하고 떠났습니다. 일정이 좀 빡빡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나고 짜임새 있는 탐방이었다고 생각해 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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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일당의 역사 왜곡과 의병장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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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눈길을 끌고 있는 전두환

 

요즘 전두환이 다시 사람들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원흉입니다. 1987년까지 정권을 쥐고 군사독재를 하면서 숱한 영혼과 육체를 괴롭힌 잘못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금 전두환이 사람들 눈길을 끄는 까닭은 돈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두환은 나라에 내야 할 돈(추징금)은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야 할 돈을 부정불법하게 빼돌렸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전두환 아들이 국제 조세 회피 지역에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사실까지 확인됐습니다.

 

전두환은 이처럼 골고루 죄인입니다. 전두환이 끼친 폐해는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 폐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 조상과 관련된 역사 왜곡입니다.

 

앞장서 역사를 왜곡한 더러운 이름들. 여기 적힌 글을 써준 이는 이가원(李家源)이라는 인간입니다.

 

경남 창녕 영산면에 가면 만년교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지어진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둥글게 봉긋 솟아오른 다리를 건널 때면 마치 그네를 탈 때와 같이 상승감이 입체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보면 갖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영산 남산호국공원’입니다. ‘호국공원’은 1982년 5월 여기에 전국 처음으로 들어섰는데, 그 뒤 다른 데서 이 같은 호국공원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제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남산호국공원에 있는 기념물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인물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단한 영웅인 마냥 그려놓았습니다. 이마저도 어쩌면 세월이 흐른 뒤에 문화재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왼쪽 영산현감전제장국충절사적비와 오른쪽 임진왜란호국충혼탑, 그리고 가운데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그래서 전혀 엉터리 인물은 아닌) 전제(全霽) 장군이 장본인입니다. 바투 있는 산꼭대기에는 영산 3·1운동기념비와 봉화대, 그리고 6·25전승기념탑이 있고 아래에 ‘영산현감 전제장군 충절사적비’·‘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등이 있는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호국충혼탑. 앞에 놓인 국화들은 이런 역사왜곡을 알고 있을까요?

 

이런 사적비와 충혼탑에 적힌 내용을 비롯해 안내문까지 죄다 거짓을 이르고 있습니다. ‘사적비’에는 전제 장군이 △1591년 영산 현감으로 부임해 임진왜란 당시도 현감이었으며 △의병을 모은 의병장이고 △박진·정암·화왕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거짓맗는 사적비.

 

하지만 합천군에서 발행한 <임란사>를 따르면 전제는 당시 △합천군 초계에 있는 당숙 전치원의 아래에서 장정을 모았으며 △조호장(調護將)을 맡아 낙동강 적선 차단을 위해 곽재우와 호응했고 △무계·마수원·성주 전투에 참가했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전제 장군이 영산현감으로 부임한 때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크지는 않으나마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감 자리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전제가 큰 공을 세웠다는 박진·정암 전투는 의령 출신 의병장 곽재우가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전제가 화왕산성 전투에서도 크게 공을 세웠다고 돼 있는데, 사실 화왕산성에서는 이렇다 할 전투가 아예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도지사 이규효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1597년 일본이 다시 침략해 왔을 때 민관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곽재우 주도로 농성(籠城)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충혼탑에 적혀 있는, “임진왜란 때 영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휘하에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잘못이랍니다.

 

<임란사>를 따르면 당시 합천(지금 초계·삼가면까지 포괄하는)과 고령·성주를 총괄하는 의병장은 정인홍이었습니다. 전제는 전제 출신 지역인 초계까지 총괄하는 의병장인 정인홍의 직계도 아니었습니다. 합천 초계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치원·이대기 아래에서 조호장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휘 계통이 달랐던 의령·창녕 의병장 곽재우와는 상하 관계가아니라 서로 협조하는 관계만 있었습니다. 전제가 곽재우 휘하에 있었던 것은 1597년 봄 화왕산성 쌓을 때와 7월 21일~8월 21일의 수성(守城) 때뿐입니다.(아마도 전제가 영산현감으로 있던 시기일 것입니다.)

 

다섯 해 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전제의 활동상은 전치원·이대기 휘하에서 “(창녕군) 남지의 산성들과 낙동강 유역 박진 등에서 성을 고쳐 쌓고 북상하는 왜병에 저항”(<창녕군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선조실록>은 전제 장군에 대해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전투에서 싸움을 피하다가 권율에게 참수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영산 남산호국공원의 충혼탑 옆에 있는 부조를 보면 전제 장군이 크게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전제입니다. 옆에 군기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반면 총대장 곽재우는 한 쪽 구석에 쪼그라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남 출신 인물 58명 전기를 모아 1999년에 발행한 <경남인물지>에는 전제 장군이 아예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노릇입니다. 전제는 조전장(助戰將)-그러니까 주장(主將)이 아닌 부장(部將)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당시 대통령으로 권력을 오로지하던 전두환의 14대 조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자기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주인공 전봉준조차 같은 전씨라는 이유만으로도 기리는 사업을 많이 벌였습니다. 그러니 14대 조상이 되는 전제 장군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전제 장군은 죽고 나서 더 불행해졌습니다. 비록 권율에게 참수당했다고는 하지만, 전제 장군의 공적은 크든 작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지나치게 크게 포장됨으로써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두고두고 사게 됐습니다.

 

전제 장군은 경남도청 대회의실에도 ‘향토 출신 선현’ 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상이 봉안돼 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걸려 있는 문익점·김종직·조식 선생이나 사명당·정기룡 장군이랑 견주면 아무래도 품격이 크게 떨어집니다.

 

당시 지역 위정자들의 과잉 충성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과잉 위선(爲先)이 빚어낸 합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애씀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거나 사소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일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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