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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기재~고제원, 거창 옛길의 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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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 따라 달라지는 길의 경제학

 

길은 시대마다 적용되는 경제학이 달랐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농지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길은 농사를 짓는 평지를 달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을조차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었습니다. 농지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길은 농지와 산지가 만나지는 데로 났습니다. 농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덜 불편하게 걸을 수 있는 산자락이었습니다. 산이 가로막을 때면 길은 달라졌습니다. 꾸불꾸불 흐르지 않고 골짜기와 등날을 최대한 곧게 오르내렸습니다. 거리를 최소화해 걸리는 시간을 줄인 것입니다.

 

옛길의 경제학이랍니다. 오늘날은 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내던 때와 해방 이후 신작로 위로 국도를 닦던 시절까지는 옛길의 경제학이 나름 적용됐습니다. 당시까지는 농지가 대접받았기 때문이겠습니다. 토목공학 등 길 닦는 기술도 자연 상태를 무시하면 안 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거창 옛길 고곳에서 만나는 마을숲과 정자.

 

요즘은 기술 제약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농토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습니다. 반면 옮겨가는 데 드는 시간과 노동력과 에너지를 ‘물류 비용’이라며 중시하는 세상이 됐습니다. 길에 적용되는 경제학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빠르기만을 최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길은 언제 어디서나 직선을 지향하게 됐습니다. 꾸불꾸불 옛길은 묻히거나 토막이 났고 마을은 도로에 붙어 있지 않고 그 너머 어딘가에 있습니다. 국도 3호선도 다르지 않답니다.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평안북도 초산군까지 이어지는 남북 간선도로인 이 국도는 옛 국도도 있고 새 국도도 있습니다.

 

탐방 루트

 

삼산마을~0.7km 바래기재~2.2km 쌀다리~2.7km 창촌~1.8km 말흘리~1.8km 창촌~2km 학동~1.2km 영승마을~3.4km 풍계마을~2.5km 당산마을~3.1km 무월마을~1.3km 넘터마을~2.3km 원농산~1.1km 고제(원)

 

거창 금원산(1353m)이 남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자락에 있는 바래기재는 경남 함양군(안의면)과 거창군(마리면)의 경계를 이루는 바, 넘는 방식이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서로 다릅니다. 옛 국도 3호선은 이 재를 넘는 옛길을 덮어썼지만 새 국도 3호선은 이와 무관하게 그 오른쪽에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길을 내었습니다.

 

삼산마을 들머리.

 

바래기재 바로 아래에 함양 안의면 대대리 삼산마을이 있습니다. ‘삼산’은 마을을 에워싼 청태·월암·아미산이랍니다. 바래기재의 바래기는 이 삼산을 마주 바라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삼산마을은 조용합니다. 그럴 듯한 솔숲이 마을 앞에 있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으나 사람이 없습니다.

 

2. 새 국도가 나면서 휑뎅그렁해진 바래기재

 

바래기재에는 반락원(反樂院)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신 밥집이 있습니다. 밥집조차 새 국도가 나면서 찬밥 신세가 됐습니다. 빠르기의 경제학을 따라 옛길과 옛 국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래기재로 가려면 함양 안의면까지 새 국도와 옛 국도가 일치하는 구간을 따라오다가 새 국도가 옛 국도와 갈라지는 용추교차로에서 옆으로 새어 나와야 합니다.

 

옛 국도 바래기재.

 

옛날에는 장승도 있었고 사람들 머무는 원(院)도 있었지만 지금은 휑뎅그렁합니다. ‘반락’은 중국 이태백의 한시 “삼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三山半落靑天外)”라는 대목에 따왔다는데,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이 서울 가서 치른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는 귀향길에 들렀습니다. 여기서 먹고 잤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우기며 탐탁찮다는 뜻으로 반락(反樂)이라 했다 합니다. 그 뒤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이들조차 이곳을 피해 거창 남상면의 관술령 고개를 넘었다고 합니다.

 

바래기재를 넘어 700m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망한 주유소가 나타납니다. 새 국도 3호선이 뚫리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겠습니다. 여기서 200m 가량 나아가면 왼편으로 옛길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옛길이랍니다.

 

3. 평범한 병항마을에 비범한 쌀다리

 

이리로 650m쯤 들어가면 병항마을이 나옵니다.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앞에 놓인 다리는 비범합니다. 마을에서 길을 따라 대략 200m 나간 지점 개울가에 있습니다. ‘쌀다리’인데, 중심 받침돌 위에 커다란 돌 두 개를 이어붙인 널다리랍니다.

 

쌀다리와 효열각.

 

1758년 오성재·성화 형제가 쌀 1000석을 들여서 놓았습니다. 당시 안의현감 이성중이 들러 “어찌 오씨 가문이 번창하지 않겠는가” 칭찬하며 세운 설교사적비(設橋事蹟碑)도 있고 1910년과 1911년 세워진 오세안·오석규 공덕비도 있습니다.

 

고단함을 덜어주려고 다리를 놓은 데 대해 서울로 이어지는 이 길을 오가던 보부상들도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있지 않습니다. 쌀다리를 건너 용원정이 있습니다. 용원정은 병항마을 입향조(入鄕祖)인 구화공 오수 선생을 기리려고 후손이 세웠답니다.

 

앞에 착한 일을 했다는 오씨 집안 사람은 죄다 이 오수 선생의 후예입니다. 둘레에 좋은 바위가 많습니다. 옛날 길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쉼터였겠습니다. 여기서 북으로 가는 옛길은 사라졌습니다. 일부 남아 있으나 이어지지 않으니 소용이 없습니다.

 

4. 옛길 따라 붙어 있는 오래 된 마을들

 

마을에서 옛 국도로 나와 3.7km 가량 달리면 마리면 사무소 소재지 말흘리가 나옵니다. 말흘리에는 가야 시대 자취가 있습니다. 국도 3호선과 국도 37호선이 갈라지는 마리삼거리 오른쪽 언덕에 가야 고분이 있습니다. 최근 발굴에서 접시·항아리·쇠도끼·화살촉 등이 나왔답니다.

 

말흘리 고분군에서 내려다본 마리면소재지 풍경.

 

북서쪽에는 창촌(倉村)이 있습니다. 창촌은 옛적 안의현의 동창(東倉)이 있었기에 얻은 이름인데 여기 사람들은 지금도 ‘창말’이라 이릅니다. 마을 남쪽 200m 지점에는 커다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모퉁이에 장승이 있었기에 장승배기다리라 했습니다. 지금은 같은 마을 뒤쪽에 있던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거창박물관으로 옮겨가 있습니다.

 

고제 가는 길은 여기서 국도 3호선을 버리고 37호선을 따릅니다. 37호선은 경남 거창군과 경기도 파주시를 잇습니다. 창촌에서 나와 북쪽으로 3.3km 가면 왼쪽에 학동 마을이 나옵니다. 소나무로 이뤄진 마을숲도 있고 1640년(인조 18) 옆에 있는 영승 마을에서 옮겨와 마을을 연 전시언(全時彦)을 기리는 우수재도 있습니다.

 

바로 북쪽 왼편 영승(迎勝) 마을은 매우 큽니다. 역사도 오래 됐습니다. 조선 초기 정선 전씨가 가장 먼저 옮겨왔고 뒤이어 광주 이씨·선산 김씨·파평 윤씨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됐다고 합니다.

 

영승서원.

 

영승이 처음에는 영송(迎送)이었습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여기서 맞이하고(迎) 보냈다(送)고 붙은 이름인데, 퇴계 이황이 1543년 영승이라 고쳤답니다.

 

개울가 영승숲이 멋지고 사락정이라는 정자도 있습니다. 사락(四樂)은 농사·누에치기·고기잡이·나무하기와 같은 농촌 마을의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답니다. 영승숲은 전통 수구막이 노릇도 합니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띠 모양을 이뤄 마을 앞쪽의 트임을 막아주는 것이지요.

 

장풍숲.

풍계(豊溪)마을은 북쪽 2.2km 되는 지점 오른쪽으로 위천과 당산천이 만나는 자리에 장풍숲과 함께 있습니다. 위천을 지르는 다리는 장풍다리라 했습니다. 옆에 주막도 있었으니 주막과 다리와 숲이 어우러지는 풍경이었습니다.

 

원래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1960년대 들이세운 콘크리트 다리가 남았습니다. 국도가 나면서 다리는 기능을 다했고 자동차 말고 사람만 걸어서 지나다닙니다. 국도 위에 나 있는 새 다리에서 바라보는 옛 장풍다리는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느낌이 묻어납니다.

 

5. 그 바로 옆에 있는 수승대와 황산마을

 

서둘러야 하는 걸음이 아니라면 여기 즈음에서 하룻밤을 묵어도 되겠습니다. 여기에 민박이나 여관 따위가 없는지라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영승마을과 함께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수승대(搜勝臺)가 맞춤이랍니다.

 

여기는 잠자리가 많이 있습니다. 퇴계는 여기 이름도 수송(愁送)에서 수승으로 바꿨습니다. 아니면 바로 그 옆 황산마을도 괜찮겠습니다. 옛적 기와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거든요.

 

이튿날 둘러보는 시작은 당산마을입니다. 상율·도동 마을을 지나 2km 남짓 떨어진 당산마을로 들어섭니다. 여기는 마리면이 아닌 위천면이랍니다. 당산마을 또한 역사가 오래 됐다고 합니다.

 

6. 당산마을 당송과 무월마을 오장군 사적비

 

들머리 당송(거창 당산리 당송 천연기념물 제410호)이 증명합니다. 600살 정도 됐고 일부 가지가 꺾였으나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는 등 각별하게 보살피는 정성이 여기 있습니다.

 

 

당송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웅’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줬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송(靈松)이라고도 한답니다. 1910년 경술국치, 1945년 국권 회복, 1950년 한국전쟁 때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당산마을에서 마주친 한 아이.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산·모전·원당마을을 거쳐 4.7km 정도 떨어진 왼쪽에 무월 마을이 있습니다. 들머리에 오장군 사적비가 있는데 옛것과 요즘것이 함께 놓였습니다. 요즘것은 드높고 크며 옛것은 조그맣습니다. 하지만 눈길은 옛것에 훨씬 많이 간답니다.

 

오장군은 조선 선조 대에 부사를 지냈다는 오적(吳勣)을 이릅니다. 오장군은 전북 무주구천동에서 뼈재를 넘어 여기로 다니며 호랑이도 제압할 만큼 기상이 대단했다는 인물입니다. 그이가 여기에다 돌지팡이를 꽂았습니다.

 

오장군사적비. 왼편이 새것, 오른편이 옛것.

무월마을 무월재(舞月齋). 춤추는 달이라니~~

 

7. 넘터 마을에 새겨진 사실과 전설

 

이어지는 주상면 넘터 마을은 1.8km 떨어져 고개 너머에 있습니다. 넘터는 마을 앞 고개 월치(越峙)를 이르는 토종말입니다. 마을에는 문의공 김식(金湜) 관련 자취가 있습니다.

 

김식은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를 제거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개혁 정치를 펼치다 1519년 기묘사화를 맞아 여기로 몸을 숨겼습니다. 들머리 동구바위 아래 숨어 지내다 바위에 백암(白巖)이라 써 놓고는 이듬해 6월 16일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헌종 때 이 마을에 그를 기리는 완계서원이 들어섰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모정비가 서 있습니다.

'白巖' 글자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본인의 '결백'을 새긴 것일까요?

넘터 마을에는 바래기재에서 고제원을 넘어 서울로 이어지는 옛길과 관련된 전설도 있습니다. 여기 살던 남매 얘기입니다. 동생은 과거 급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누나는 그런 동생을 정성껏 보살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누나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내일 아침 너와 동생의 신에 보리를 심어 동생것에 먼저 싹이 나면 과거를 보러 가고, 네것에 먼저 나면 동생이 과거에 떨어질 운명이니 과거를 보러 가지 말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동생과 누나는 제각각 신발에 흙을 담아 보리를 심었는데, 사흘 뒤 누나 신에서만 싹이 났답니다. 동생은 오히려 화가 나 과거를 보러 황산을 거쳐 모동으로 해서 서울로 넘어가는 길로 갔는데 웬 일인지 보름이 지났어도 산을 넘지 못했답니다.

 

보름 동안 헤매다 겨우 넘어 갔지만 이미 과거는 끝난 뒤였습니다. 동생이 넘지 못한 그 고개를 그래서 보름재라 하는데 동생은 그 뒤 문과는 포기하고 무술을 닦아 장군이 됐고 그로써 마을 뒷산을 넘어 갔다고 해서 마을을 넘터라 이르게 됐습니다.

 

8. 옛길 주요 지점이었던 고제원

 

마지막 고제원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제원에 앞서 고제면 원농산 마을에 잠시 들릅니다. 원농산 마을은 넘터 마을과 2.9.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용원정과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냇가 언덕에 있는 이 정자는 둘레 숲과 아래 시내, 그리고 펼쳐진 들판과 먼 산이 눈맛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돌무더기에는 옛날에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원농산마을 들머리 정자.

 

종점 고제원은 원농산 마을에서 1.3km 정도 더 가야 합니다. 옛날 역원인 고제원은 사라졌지만 원터라는 땅이름은 남았습니다. 아울러 여기가 옛길 중요한 지점임을 일러주는 높은다리와 음각선인상과 영세불망비도 남아 있습니다.

 

고제 마을 북바위(鼓巖)와 고암(鼓巖)정.

 

옛날 한 도승이 골짜기 시내에다 큰 돌로 다리를 놓아 길손의 고달픔을 덜었다고 합니다. 높이가 6m 길이가 11m였다는 ‘높은 다리(高梯)’의 유래입니다. 높은 다리는 마을과 면(面)의 이름이 됐습니다. 돌로 된 높은 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콘크리트 다리가 있습니다.

 

콘크리트 높은 다리를 지나는 경운기.

 

지금 이 다리도 보기에 그럴 듯하답니다. 아래로 자연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물이 낙차 있게 떨어져 흐르는 품도 좋습니다. 다리 옆 높직한 데에 입석(立石 선돌)이 있습니다. 음각으로 선인(仙人)상까지 새겨져 있어 거창 농산리 입석 음각 선인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324호)이라 일컫습니다.

 

음각선인상. 선인은 신선이 아니고 앉아 있는 부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입석은 이정표 또는 수호신 노릇을 했겠습니다. 자연 화강암인데 높이 2.2m, 너비 1.5m, 두께 30cm 정도에 좌불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입석 왼쪽 아래에 알구멍(性穴) 자취가 있습니다.

 

높은 다리와 입석 사이에 있는 영세불망비도, 여기 옛길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랍니다. 영세불망비 따위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는데, 그러려면 사람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9. 단순히 길만은 아니었던 우리 옛길

 

옛길은 다만 통로로서 길 이상이었습니다. 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고 문화였습니다. 과거길이 그랬고, 장터길이 그랬습니다. 길과 길이 이어지는 고개는 저마다 사연을 한 자락씩 품고 있습니다.

 

옛 장풍다리와 새 장풍다리.

 

옛길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사라지고, 버스 정류장이 되어주던 시골 점방도 덩달아 사라졌습니다. 이제 길의 주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랍니다. 함양 삼산마을에서 바래기재를 거쳐 고제원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옛길은 그저 희미한 자취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더딤과 느림에 대한 향수는 더 강렬해집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 옛길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편리함만큼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무엇에 대한 가치를 되살펴 보게 합니다.

 

김훤주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선암사 매화에 매이니 매화밖에 못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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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들어도 피어나지 않았다는 선암사 매화

 

3월 27일 수요일 전남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 사회적 기업’인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2013년 처음 마련한 테마 체험 여행이었습니다. 5일장인 남부시장이 서는 날이고, 이 때쯤이면 선암사 홍매화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들머리 주차장 둘레에 심긴 매화나무에 꽃이 화알짝 벌어져 있기에 절간 매화나무도 그러려니 짐작이 됐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가볍게 무너졌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몇 송이만 피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올 3월 날씨가 예사롭지 않게 추웠기 때문인 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태까지는 이맘때 열렸던 ‘선암사 홍매화 축제’도 4월 6일(토)과 7일(일)로 열흘 뒤에 치러졌고, 그랬는데도 매화들이 그 때조차 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매화가 아무리 좋아도 매화에 매이지는 말 일입니다.

 

들머리 주차장에 활짝 피어 있던 매화.

승선교.

 

매화에 매이면 매화만 눈에 들어옵니다. 매화 말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무에 매화가 피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꽃이 채 피어나지 않으면 매화나무 둘레만 두리번거리다 아쉬워하는 입맛만 다시고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선암사 들머리 시냇물에 나무줄기가 비쳐 있습니다.

 

2. 아름다움이 깜찍하게 숨어 있는 원통전

 

매화에 매이지 않는 일행 두 사람을 봤습니다. 그이들은 호젓하고 삽상한 선암사 자체를 통째 즐기는 것 같았고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도 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를 보면서도 지금만 떠올리는 대신, 다닥다닥 꽃눈과 잎눈에서 튀어나올 그런 녀석들까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삽상한 푸르름.

 

그이들 또한 활짝 핀 매화에 대한 기대가 없지는 않았겠으나 제대로 피지 않은 매화나무(선암사 백매, 천연기념물 488호)를 보더니 ‘음, 그렇군!’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볍게 발길을 돌려 바로 위 원통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이들은 원통전 앞에서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홍매화가, 띄엄띄엄 피어나 있습니다.띄엄띄엄도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원통전은 생긴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끕니다.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너른 보기 드문 구조 때문입니다. 들기는 어렵지만 한 번 들고 나면 그 안은 너르다는 따위, 이를테면 진리 또는 구도에 관한 어떤 뜻이 이런 모양새에 스며 있을 법도 한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이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문짝이었습니다. 문짝에 새겨져 있는 꽃무늬에 그이들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그이들은 여기 꽃무늬가 나무 여러 조각을 이어붙여 만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널찍한 나무를 통으로 내고) 낱낱이 파고 뚫고 조각해 넣었네!”

 

 

듣고 나서 가만 들여다봤더니 과연 그랬습니다. 그 꽃무늬가 주는 두툼하고 확실한 질감을 이이들은 손바닥 전체로 누렸습니다. 그러고는 그 아래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와 방아찧는 토끼에게도 눈길을 던졌습니다.

 

달나라 계수나무.방아찧는 토끼들.

 

그이들 따라 저도 내려다 봤는데요, 고졸(古拙)한 느낌이 났습니다. 어린아이가 새긴 듯한 장난기도 어려 있는 것이, 당시 옛 사람들이 맛봤을 조각 새기는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습니다. 그이들 조금 전 내지르던 탄성이 죄다 이해가 되고 인정이 됐습니다. 선암사 찾은 보람을 여기서 다 누렸습니다.

 

절하는 이에게 냉큼 자리를 내어줬습니다.

 

3. 김훈의 가엾은 수사학과 여기 이 뒷간

 

선암사 절간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개울을 거스르며 오릅니다. 얼마 가지 않아 대각암이 나타납니다. 절간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사는 살림집을 닮았습니다.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절간을 한 눈에 담습니다. 그윽하고 서늘하고 상쾌합니다.

 

선암사 어디 있는 연못.그 가운데 인공섬에 쌓인 동전.

 

돌아나오는 길에는 부뚜막에 들르려 했지만 스님들한테 가로막혔습니다. 뒷덜미에서 “거기는 들어가시는 데가 아닙니다!” 두 말 않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이름도 높은 뒷간에 들어가려 했는데 수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디가 무너져 있나 봅니다. 바깥에서 봐도 표시가 났습니다. 여기 해우소는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바지를 내리고는 쪼그려 앉은 채로 눈부시게 환한 바깥을 내려다보는 그윽한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그 맛을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자전거 여행> 머리글 첫 줄에서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라고 썼던 김훈은 같은 책에서 선암사 뒷간을 두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가엾은 수사학’입니다.

 

아래서 쳐다본 뒷간. 2층서 똥오줌을 누면 1층에 쌓입니다. 맞은편에서는 2층이 1층이고 1층은 지하.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 행위는 겸손해진다.” 그러면서 겸손해지는 까닭을 이어나갑니다. 여기 측간은 이런 김훈 덕분에 더욱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어쨌거나 여기 측간에서는 코를 찌르는 나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은 냄새가 나지만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견딜만하다는 말이 알맞은 표현은 아닙니다. 얼핏 여겨지기에는, 똥 냄새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냄새가 무릅니다. 이것이 좀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겠습니다. 

 

똥이 오줌과 함께 떨어지는 아래칸으로 갑니다. 일부러 문을 비시고 들여다봅니다. ‘비시고’는 살짝 어긋나게 틈을 낸다는, 경상도 지역말입니다. 등겨들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쌓여 있습니다. 똥오줌 냄새가 코를 찌르지 않고 부드러운 까닭입니다.

 

엉덩이 까고 앉아 똥오줌 떨어뜨리는 네모 구멍이 위에 보입니다.

 

똥으로 하여금 스스로 삭게 해주는 장치인 셈입니다. 여기서 완성된 똥과 오줌의 운명은 아주 풍성하고 수명이 오래갑니다. ‘운명’이라는 표현은 김훈에게서 차용(借用)해 왔습니다.

 

4. 선암사 못지 않게 이름난 밥집 길상식당

 

절간 들머리까지 돌아나와 선암사 못지 않게 이름난 길상식당으로 갑니다. 푸짐하게 차려져 나온 깔끔한 밥과 맛있는 반찬·안주을 누립니다. 묵무침에 동동주까지 한 잔씩 걸칩니다.

 

블로거 선비님입니다.

 

해딴에는 밥집에 가서 밥값을 깎는 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 몫을 누려야 한다는 이치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런 것만 생각해도 예사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밥값을 깎으면 밥과 반찬이 야박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정한 이치가 그렇습니다. 밥값을 제대로 쳐 주면 만사가 풍성해집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여기 이 날 길상식당처럼 주문하지도 않은 안주가 덤으로 나오기까지 합니다.

 

선암사 오면서 기대했던 매화를 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그 빈 자리를 길상식당 그럴 듯한 음식들이 조금은 채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5. 남도 동부 육군에서 가장 큰 순천남부시장

 

다음은 남부시장입니다. 2일 7일 서는 이 장은 순천 사람들 말을 빌리면 ‘동부 육군에서 가장 큰 시장’입니다. 동부 육군은 구례·광양·여수·순천·보성·고흥을 말하고 그 한가운데 순천이 있습니다.

 

 

육군의 산물이 모조리 여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산것과 들것과 물것과 바다것들을 여기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여서 그런지 아니면 날씨가 아직 덜 풀려서 그런지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면서 장구경을 했습니다. 고구마·감자를 비롯해 몇몇 먹을거리와 천리향 어린 나무를 한 그루 장만했습니다. 챙겨간 장바구니 제법 무거웠습니다.

 

장터 끄트머리 매화나무.거기 매달린 꽃봉오리들.

 

점심을 먹은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터 한 쪽 구석에 스며들어 순천 명물이라는 팥칼국수도 한 그릇 해치웠습니다. 매우 맛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국산 팥으로 만든다는 주인 아줌마 말을 보람으로 삼았습니다.

 

6. 순천만 나들이 나온 김승옥과 정채봉

 

걸음이 순천만으로 이어집니다. 하루에 세 군데를 돌려니 걸음이 조금 바쁩니다. 그런데 마음은 느긋합니다. 창원으로 돌아가기로 한 시간까지 두 시간 남짓 남았는데 거기 맞춰 두르고 누리고 즐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행 몇 분.

 

일행 몇 분이 갈대 사이 보이지 않는 데로 들어가시더니 그리로 오라 손짓을 합니다. 조금 전 남부시장에서 산 술과 안주가 놓여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버스에서 내릴 때 무엇을 좀 집어들고 왔어야 했습니다.

 

 

아쉬운대로 잔을 기울이고 안주를 뜯습니다. 실은 술과 안주에 기대어 얘기를 나누고 가깝고 먼 풍경을 평하는 재미를 만들어내어 누립니다. 함께 술마시던 일행은 오늘 거기 앉은 자리에서 순천만을 보내려나 봅니다.

 

 

이제는 쌀쌀맞은 바람도 춥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흥그러워졌기 때문이랍니다. 저는 갈대 가득하고 그윽한 순천만 쪽으로는 눈길만 던지기로 했습니다. 발길은 순천문학관을 향해 몸을 싣고 나아갑니다.

 

순천만의 중심은 갈대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갈대만 있지는 않고 갈대와 별개로 존재하는 순천문학관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으리으리 웅장하지 않고 갈대랑 잘 어울리는 문학관입니다. 대상도 콕 집어 둘만 다룹니다.

 

 

소설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과 동화 <오세암>을 쓴 정채봉입니다. 정채봉은 순천 출신입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霧津)이 순천만입니다. 저는 순천만에 오면 어지간해서는 여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김승옥·정채봉이랑은 아무 인연도 없습니다.

 

하지만, 무진기행의 의미 따위는 찾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납작하게 엎드린 겸손함이 보기 좋고, 거기 마루나 마당 아니면 의자 아무 데나 앉아 긴장을 풀고 하염없는 눈길을 둘 곳 몰라 할 수 있어서 그럽니다. 둘 곳 모르겠는 제 눈길은 사람과 산천과 물건을 가리지 않고 아무 데로나 흘러갑니다.

 

김승옥관.

7. 7월 해딴에 테마체험여행은 전남 장흥으로

 

순천, 선암사, 남부시장, 순천만 그리고 정채봉과 김승옥……. 그 느낌과 이미지가 어딘지 모르게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없는, 성과 속의 구분이 있다면 그 둘을 ‘암시랑토 않게’ 넘나드는. 서쪽에서 뉘엿대는 햇살을 뒤로 받으며 버스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해 본 생각입니다.

 

해딴에의 테마체험여행이 4월에는 전남 구례로 갔습니다. 구례장 구경을 늘어지게 한 다음 섬진강 건너편 곡성 하한산장 참게수제비를 맛본 뒤 화엄사를 들렀다가 오미마을 운조루를 눈에 담는 걸음이었습니다.

 

토요시장은 여느 시골장터와 달리 오후가 더 활기찹니다. 외지서 오는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오는 7월에는 13일 토요일에 전남 장흥으로 떠납니다. 장흥은 정남진 토요시장과 편백숲으로 유명합니다. 장흥은 땅모양이 남북으로 길쭉합니다. 탐진강이 가운데를 타고 흐릅니다. 산에서도 들에서도 강에서도 바다에서도 물산이 나는 장흥입니다.

 

장흥 선비주조장.

장흥군은 김을 만드는 과정을 비롯해 바다에서 인공 화학물을 일절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흥 바다가 깨끗하다는 얘기를 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장흥의 풍물이 토요시장에 다 나와 앉아 있습니다.

 

말린 미역 한 뭉치가 5000원이었던가…….시골 장터다운 풍경입니다.

 

탐진강과 바다를 따라 넘나드는 장흥 바람의 시원함은 편백 산림욕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물산과 편백 가구들을 헐케 장만할 수 있는 덤도 따라 나옵니다. 참가비 4만5000원이고요 문의·상담·신청은 이렇답니다.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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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통합 갈등, 갑절로 죄를 짓는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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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이 시끄럽습니다. 통합을 했고 다시 분리하자고 난리입니다. 야구장은 마산과 진해를 왔다갔다 합니다. 준광역시다 뭐다 하면서 경남도를 떠난다 만다 합니다. 마산 출신 국회의원 둘은 지금 분리 주장이 맞다 아니다 옥신각신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들 헛소리입니다.

 

갈등 해결 방법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애초 하지 못했던 합의나 동의를 목표로 삼아 처리해 나가야 합니다. 주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실제로 참여하는 그런 토론 공간을 열어야 합니다. 몇 해가 걸려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길을 버려두고 이렇게 정치인이라는 것들이 ‘뻘밭에 개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소중한 유권자의 일상이나 지역 현안은 놓쳐지고 있습니다. 이중으로 죄를 짓고 매를 버는 인간이 바로 이런 정치인들입니다. 6월 10일 MBC경남 라디오광장의 세상읽기에서 이를 한 번 짚어봤습니다.

 

1. 마산 출신 시의원들의 가소로운 출사표

 

서수진 아나운서 : 오늘은 창원시의 재분리 문제와 지역 현안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좀 한다고요? 통합 창원시의 청사를 지금 쓰고 있는 임시청사 그러니까 통합 이전 창원시 청사를 쓰는 조례가 날치기 처리되면서 여러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2010년 주민 투표 없는 통합을 가결한 마산시의회.

 

김훤주 : 마산 출신 시의원들이 ‘새로운 마산을 만들기 위한 마산 분리안 국회 입법 쟁취 투쟁’에 나선답니다. 5월 27일과 28일 관련 기자회견을 잇달아 열었습니다. 시의원들은 박완수 창원시장을 겨냥해 시정이 만신창이가 됐다면서 명칭과 청사 다 챙긴 욕심을 나무랐습니다.

 

진 : 이미 많이 알고 있는대로 통합 당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탓이 크지요? 야구장마저 진해로 가게 생겼으니 마산 사람들 상실감도 크고 선거 과정에서 청사 마산 유치를 공언한 시의원들 불안감도 크고요.

 

주 : 마산 출신 시의원들이 한편 이해는 되지만요, 주민 의사도 제대로 묻지 않는 잘못된 통합을 앞장서 끌어 놓고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분리를 떠들고 있습니다. 시민 정서를 자극해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는 술수가 아닌지 미심쩍은 대목입니다. 이들은 실망과 혼란만 안겨줬습니다. 정치력도 없고 전략도 없고 조례 통과를 막을 물리적인 힘도 없는 3무 의원이라는 말만 듣고 있습니다.

 

통합창원시의회. 경남도민일보 사진.

 

진 : 마산 분리가 실제 가능성은 있는가요? 지방선거가 내년인데 마산 분리를 선거 공약으로 삼기 위한 것은 아닐까요?

 

주 : 둘 다를 노리지 싶습니다. 실현가능성이 없어도 일단 주장해 놓으면 득표에 도움되고 또 되지 않아도 나름 할 바는 했다는 앞가림은 되니까요. 또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내년 선거에 써먹을 공약으로 내세울 수도 있고요.

 

2. 못난 유권자가 못난 정치인을 만든다

 

진 : 하지만 마산 분리는 국회에서 법률 제정을 해야 되잖아요?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이 중요한데, 소속 정당은 같은 새누리당이지만 이주영 의원과 안홍준 의원이 서로 다르지요?

 

청사 관련 조례 가결 장면. 경남도민일보 사진.

주 :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지금까지 과정을 보면 이렇게 혼란과 갈등을 가져온 창원시 통합을 주도는 중앙정치권이 하고 그 뒷감당은 지역 정치판이 맡은 셈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행정체제 개편 시범 케이스로 마산·창원·진해를 꼽았고 그 실현에 안홍준·이주영 국회의원을 비롯한 지역 출신 새누리당 의원들이 앞장섰거든요. 그 뒤에 국회의원들은 손 놓고 구경만 했습니다.

 

진 : 그런 잘못이 앞으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겠지요. 유권자들도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 하겠지만 국회의원도 자기 유불리 또는 권력자를 위해 유권자 의사를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3. 안홍준 이주영을 보면 새누리 아닌 개누리 같다

 

 

주 : 두 국회의원 해법이 제각각입니다. 이주영 의원은 시의원들이 꺼내기도 전에 마산 분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산 분리를 명문화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진 : 오늘 10일 보도가 나왔네요. 옛 마산시를 분리하는 ‘마산시 설치에 관한 법률안’을 이 의원이 마련했어요. 2014년 7월 1일 정식 출범하도록 돼 있으니까 내년 지방선거에서 마산시장을 다시 선출하도록 한 셈입니다.

 

주 : 이 의원은 유일한 갈등 해결책이라 주장하는데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먼저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행정체계 개편을 계속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두 번째는 새누리당 안에 이주영 의원만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진 : 그렇지요. 마산회원구 안홍준 의원도 새누리당이고, 창원 박성호·강기윤 의원은 물론 진해 김성찬 의원도 새누리당 소속이죠.

 

주 : 의견 수렴을 하고 동료 의원을 설득하겠다지만 저는 쇼에 가깝다고 봅니다. 만약 이 의원이 권력이 세서 설득도 하고 통과까지 시켰다고 봅시다. 나머지 통합 창원시 출신 국회의원들은 다들 입장이 다른데 그러면 뭐가 되겠습니까? 이것만 봐도 아예 불가능한 것을 갖고 지역 유권자들 눈을 속이는 술수임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주영 법안 통과되면 이런 강기윤 선수는 어떡하나?

진 : 안홍준 의원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은 분리 주장이 맞지 않다, 청사를 가져오는 운동을 해야 하고 마산으로 도청을 옮기겠다는 홍준표 도지사의 공약을 실현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주 : 안 의원도 마찬가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안 의원은 마산 분리 운동이 날치기 처리된 청사 관련 조례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다지만 그것은 안 의원 주장이고 견해일 뿐이고요, 실제 마산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청사 관련 조례가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이가 안홍준 선수. 마산 분리 추진 모임에서 지금 당장 분리 주장은 맞지 않다고 하는 장면. 안키호테라고나 할까요. 경남도민일보 사진.

 

도청 마산 이전도 안 의원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실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진 : 안 의원은 지금 도청과 도의회 경남경찰청 터에 1000억원만 쓰면 마산으로 도청을 가져올 수 있고 그런 여력은 경남도가 충분하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주 : 바로 그 주장이 엉터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토목 공사에 쓸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통합 창원시 청사를 옮기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 드는 비용 때문입니까? 아니잖아요. 시의원을 비롯한 창원 쪽 정치인과 창원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마산으로 옮기지 못하잖아요?

 

도청 마산 이전도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돼 있습니다. 창원시 청사보다 더 큰 갈등과 혼란을 불러올 사안이라고 봐야 합니다.

 

4. 갈등 책임 시민한테 떠넘기는 박완수 시장

 

 

진 : 통합을 둘러싼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갈등이 또다른 갈등을 낳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어요. 진해로 일단 선정된 야구장 문제도 그렇고 박완수 창원시장의 창원 준광역시로 하자는 요구도 그렇고요.

 

주 : 마산 의원들이 야구장 건립 백지화를 요구하는데다 한국야구위원회 KBO도 창원시 결정에 맞서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창원시 집행부는 이를 거부했고요, 진해에서는 야구장을 지키느라 시민단체까지 나서고 있습니다.

 

준광역시 요구는 일단 순수해 보이지 않습니다. 박 시장이 5월 29일 안전행정부에 그렇게 건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창원시는 득을 많이 보겠지만, 일단 마산 분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임은 차치해도, 창원시 아닌 다른 기초자치단체들과 광역단체인 경남도는 상대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현재 갈등을 덮기 위해 다른 갈등을 부추기며 물 타기를 한다고 봐야 맞습니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지금 갈등이 지역 유권자들이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식으로 발언하기까지 했습니다. 3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시민에게 정확하게 정보를 제공해 오해와 갈등이 안 생기게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면 오해는 몰라도 갈등은 더욱 커질 것 같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무엇이 무서워서인지 당장 야구장 선정 관련해서도 창원시는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 않거든요. KBO가 신청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5. 이중으로 죄를 짓고 매를 버는 정치인 나부랑이들

 

진 : 이러는 새에 지역 현안이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당장 지역민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에 녹조가 나타났다는 보도가 나왔잖아요. 예년보다 한두 달 일찍 생겼다고 하죠?

 

주 : 아무래도 4대강 사업이 낙동강 수질 개선을 못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녹조 현상 그 자체가 아니고요, 이런 일에 지역 정치인들이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사자들이야 나름 까닭이 있겠지만 지켜보는 유권자로서는 통합 창원시 관련 갈등과 마찰 때문에 정작 민생 현안에는 신경을 못 쓰는 꼴 아니냐는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는 판입니다.

 

진 : 이밖에도 여러 현안이 있지 않습니까? 경남은행 인수 문제라든지, 갖은 의혹을 사고 있는 가포신항 개장 문제라든지 말씀입니다.

 

 

주 : 지난 40년 넘는 동안 지역 경제에 그리고 서민들에게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지역 상공계는 경남은행이 부산은행이나 대구은행에 넘어가지 않고 지역이 힘을 모아 인수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를 실현하려면 당장 움직임이 나와야 하는데 지역 정치권이 활발하게 그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홍준표 도정은 진주의료원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고요.

 

6. 가포신항 보면 지역 정치인 한심한 수준이 보인다

 

진 : 가포신항도 시민단체들 주장대로 확보할 수 있는 컨테이너 물동량이 전혀 없음이 확인되면서 컨테이너 전용 부두에서 잡화 그러니까 일반 화물 전용 부두로 바꿨어요. 그런데 관련 논의가 정치권에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 : 4월만 해도 해양수산부는 물동량 확보가 가능하다 했습니다. 그래 놓고 뒤꽁무니에서 업체랑 짜고 놀았는지는 모르지만 덜컥 잡화전용 부두로 바꿨습니다. 업체에 대한 특혜일 뿐 아니라 마산 사람들을 속이고 놀려먹은 결과일 뿐입니다.

 

가포신항 모습.

 

어째서 특혜냐 하는 문제는 너무 빤히 보이니까 그대로 두겠습니다. 속이고 놀려먹었다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컨테이너 전용이 아니면 항로 준설을 그렇게 깊이 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준설토 처리를 위한 마산해양신도시 건설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말이 뒤집어진, 배보다 배꼽이 큰 일을 저지르도록 만든 책임이 지역 정치인들한테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 정치권은 지금조 똑바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책임이라도 제대로 물어야 합니다.

 

동네 사업들도 팽개쳐져 있습니다. 마산 내서 광려천 환경 정비 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135억원을 들이는 공사에서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만드는데, 준공 1년도 안 돼 바닥이 들고 일어났고, 보수 공사조차 땜질식입니다.

 

 

그런데도 지역 시·도의원이나 국회의원이 문제를 짚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통합 창원시 갈등 때문에 그렇다 해도 말이 안 되고요, 평소 의정 활동이 이런 수준이라 하면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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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두메산골주조는 상표가 엉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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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나가면 틀림없이 여러 얘기들이 나올 것입니다. 힘도 없는 시골 마을 영세한 업체한테 어떻게 그렇게 가혹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따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세할수록 이런 조그맣지만 중요한 사안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렇습니다. 그냥 어제 저녁 제가 사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눈에 띄었을 뿐이랍니다. '경남'과 '창원'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창녕 우포의 아침에서 만드는 막걸리는 아스파탐 빼고는 100% 국산 쌀을 씁니다.

 

상표는 '창원 생탁주'입니다. 여기에 원료 성분이 어떻게 되는지 얘기를 해놓습니다. 간단합니다. 복잡할 까닭이 없습니다. 쌀 100%(국내산 쌀 100%). 그런데 거창 두메산골주조에서 만드는 막걸리는 조금 다릅니다.

 

 

이름도 경남 '탁생탁'으로 유별납니다. '탁'자 아래에 몇몇 글자를 적어놓았습니다. 상표 앞부분에는 '국내산 쌀'이라고, 뻘건 바탕에 하얀 글씨로 두드러지게 새겼습니다. 그런데 돌려봅니다. 쌀은 60%만 들었습니다.

 

 

나머지 40%는 소맥분(밀가루) 30%(수입산)와 전분당 10%입니다. 전분당이 어디 출신인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물론 멋진 막걸리 마니아가 보기에는, 둘 다 아스파탐을 쓴다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회적 소통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정직하게 표현하느냐 하지 않느냐 얘기인 셈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 거창 두메산골주조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참새 같은 꼴입니다.

 

멀리는 뛰고 싶고, 가랑이는 벌어지지 않고. 침은 길게 뱉고 싶고, 혀는 짧고. 국내산 쌀을 브랜드에서 키우고 싶으면 실제 원료를 국내산 쌀로 쓰면 됩니다. '창원 생탁주'처럼 하면 됩니다. 그러고서 '국내산 쌀'이라 적어넣으면 아무도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창녕 유어 막걸리 간판. 연세 높으신 어른이 막걸리를 옛날 방식으로 빗는 곳입니다.

창녕 유어 막걸리에 붙어 있는, 문화재. 저는 이것 누가 떼어갈까봐 겁이 났습니다.

실제로 국내산 쌀을 원료로 쓰지 않거나 적게 쓰면서 이런 때깔을 부리고 싶은 것이 잘못입니다. 어쨌거나, 멀리서 오는 원료를 갖고 만든 것들은, 사실 농산물이 아니라 석유 덩어리입니다. 배가 됐든 비행기가 됐든, 아니면 자동차가 됐든 모두 기름을 먹여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이제는 국산으로 찍혀 있는 막걸리 한 잔을 두고서도, 술을 마실 것이냐, 아니면 석유를 마실 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나 봅니다. 그것은 또 바로, 공산품을 마시느냐 농산물을 마시느냐로 바뀔 수도 있는 문제랍니다. 저는 공산품이 아닌 농산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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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걷기 좋은 남해 바래길 으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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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공동 주관하는 2013년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이 6월에는 19일 수요일에 남해로 갑니다. 남해 푸른 바다에서 건져 올린 녀석으로 만드는 멸치쌈밥도 먹습니다. 먼저 보리암으로 갑니다.

 

보리암은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700~800m 걷는 수고로움은 있지만 여기 서면 오장육부 내장까지 시원해집니다. 이 때쯤이면 날이 다르게 무성하게 짙어가는 초록을 시리도록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리암에서 우뚝 솟은 금산은 그 산줄기가 상주해수욕장으로 이어지면서 넌출넌출 보기 좋은 풍경을 뿌려놓습니다. 산줄기는 바다에 몸을 담근 뒤에도 줄곧 끊어지지 않아 점점이 섬들을 동동 띄웠습니다.

 

 

보리암은 대단한 기도처이기도 합니다. 여기 관세음보살은 사람이 빌면 적어도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합니다. 여기 가셔서 무엇을 빌고 싶으신가요? 저는 제발 욕심이 좀 사라지도록 해 주십사 빌고 싶습니다.

 

욕심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 욕심, 명예 욕심, 자리 욕심,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심, 남들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심, 남 못지 않게 깨끗하게 살고 싶은 욕심.

 

 

공자가 인생 일흔에 누리게 됐다는 군자삼락 가운데 마지막,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으니 마땅히 군자가 아닌가) 이런 마음가짐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욕심이니 생긴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멸치쌈밥은 물론 마산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통영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남해 멸치쌈밥이 으뜸이라 하지는 않겠지만 그 싱싱함은 아무래도 다른 지역에 견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와 더불어 소주나 막걸리 따위를 반주로 한 잔 걸치면 썩 훌륭하겠습니다.

 

풍성하게 점심을 챙겨 먹은 다음에는 대량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 바래길을 두어 시간 걷습니다. ‘바래길 사람들’의 송홍주 회장께서 몸소 추천해 주신 루트입니다. 더울 때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을 골라 주십사 부탁드렸더니 여기를 뽑아주셨습니다.

 

절반은 그늘 내려앉는 숲 속 오솔길이고, 절반은 바람이 시원한 바다를 낀 길이라 했습니다. 같은 바래길이라도 가천 홍현 지나는 길은 내려다보이는 바다가 멋지고 덩달아 눈맛도 시원하지만 도로가 아스팔트여서 팍팍하고 뜨겁습니다. 여기 이 길은 가파르지 않으면서도 흙 따위로 덮여 있습니다.

 

가천마을 전경.

 

게다가 5월 하순 답사하러 들렀을 때는 잘 익은 산딸기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30분남짓밖에 따지 않았는데도 바구니가 수북해지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나중에 가져와서 보니 시장 좌판에 3000원이라고 해 놓고 파는 더미로 쳐서 열 개는 되지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어쩌다 운 좋은 사람에게는 산뽕나무 오디가 걸려들는지도 모르는 노릇이겠습니다. 걸려들지 앟아도 그만이겠거니와, 갖은 풀꽃이 피어나고 파도도 넘실댈 것이기에 그런 정도 따위에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겠지요.

 

홍현마을 넘어가는 길에서. 이번 담사 때 사진을 찍지 못해 이렇게 다른 사진으로 땜질합니다.

 

송홍주 바래길사람들 회장은 여기 이 길이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길이가 그런 정도까지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송홍주 회장 말씀은 아마 바삐 걷기만 하지 마시고 이리저리 눈길도 던지고 발길도 돌리는 그런 걷기가 기준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상주해수욕장은 참 좋습니다. 물이 맑고 고우며 하얀 모래 또한 나무랄 데 없이 깨끗하지만 만약 우거진 솔숲이 있지 않다면 지금과 같은 호평은 받지 못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여기 들어가면 넘치도록 그늘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시원하게 핥아대는 바람까지 끊임이 없으니 바깥에서는 땀을 흘리다가도 여기 들면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게다가 솔숲 그윽한 느낌까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솔숲 그늘 바깥 뙤약볕에서 청춘 남녀 거닐거나 뛰어노는 모습이, 마치 딴 세상 일인양 여겨집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無聲)영화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스르륵 펼쳐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저는 여기 솔숲 그늘이 그래서 참 좋습니다.

 

 

 

참가비는 3만원입니다. 경남람사르환경재단 지원을 받기 때문에 헐한 편입니다. 람사르재단은 습지를 비롯한 자연생태계가 주는 즐거움이나 이로움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하고 또 널리 알리기 위해 이런 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선착순 20명입니다. 나머지 20명은 지역사회에 서비스로 제공됩니다. 신청·상담은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으로 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Orz.....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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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선비들의 으뜸 싸움터 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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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루트

 

수승대-1km, 황산마을-1.8km, 정온생가/반구헌-9km, (말목고개에서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서 갈 수 있음- 4.8km) 모리재-1.9km, 강선대- 5km, 분설담-6km, 갈계숲/만월당(강선대~갈계숲은 1.2km)-1.4km, 농산리 석불입상-0.5km 말목고개-3.3km(숲길은 2.9km, 걸어서 1시간), 수승대

 

1. 조선 천지 으뜸 명승 수승대라지만

 

선비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아마 대쪽 같은 기개 따위이기 십상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일부는 그랬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따져보고 되짚어보면, 그이들 역시 때가 묻고 욕심 부리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누리고 잘 대접받고 싶은 마음은 신분과 시대를 초월하는 인지상정이니 말입니다. 그런 자취가 거창에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수승대(搜勝臺)(명승 제53호)는 물과 숲과 바위의 어울림입니다. 그 가운데 바탕은 물입니다.

 

예부터 산 좋고 물 좋은 데에다 정자를 짓고 양반과 선비들이 모였습니다. 지배집단으로 아래 신분 사람들을 부리고 부를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았던 양반들은 그런 여유로움으로 멋을 찾고 풍류를 즐겼습니다. 풍광 좋은 계곡이나 기암절벽에다 정자를 세웠고요,

 

수승대에 들어서 있는 구연서원.

지역에서 그이들이 전반적으로 구심 역할을 했던지라 정치·문학·교육 등에 영향을 미치는 정자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선비들은 여기를 영남 으뜸 동천(洞天)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용추폭포의 심진동과 농월정·동호정 따위가 있는 화림동과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을 일러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했습니다.

 

화강암으로 이뤄진 깊고 길고 큰 계곡과 주변 산림이 어우러져 이른바 자연경관이 빼어납니다. 징검다리 등으로 물을 건너 한 바퀴 돌아보는 산책로를 걸으면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낮에도 서늘한 그늘을 만듭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했답니다. 수승대는 1543년 여기 마리면 영송 마을 처가에 설 쇠러 왔던 퇴계 이황이 고쳐 지은 이름이랍니다.

 

2. 양반 선비들이 욕심껏 싸우던 자리

 

퇴계 이황(1501~71) 개명시와 갈천 임훈(1500~84) 화답시가 유명하고 요수 신권(1501~73)의 관련 시도 있습니다. 수승대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바위에 새긴 이들의 시는 뒷날 긴 세월 동안 임씨와 신씨 가문의 부질없는 탐욕으로 얼룩졌다고 합니다.

 

신씨 문중은 거북바위에 ‘樂水藏修之臺(요수장수지대)’라 새겼고 임씨 문중은 ‘葛川杖屨之所(갈천장구지소)’라 새겼습니다. 신씨 집안은 요수 신권의 숨어서(藏) 수양하던(修) 데라 하고, 임씨 집안은 갈천 임훈의 지팡이(杖) 짚고 신발(屨) 끌던 데라 했습니다.

 

갖은 글씨와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는 수승대 거북바위.

 

뿐만 아니라 이 두 가문은 나중에 후손의 벼슬이 높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수승대의 소유권을 두고 낯 뜨겁게 다투었습니다. 조선 말기 3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건창은 수승대를 돌아본 뒤 ‘수승대기’에 썼습니다. 이렇게요.

 

“수승대는 시냇물 가운데 있는 한갓 바위일 뿐이니 누구 소유가 될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소송이 있겠는가. 이곳의 아름다움은 빼어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하다.” 하지만 수승대 거북바위에는 갖은 글씨가 가득하답니다. 옛말에 좋은 물건은 손을 타서 더러워지기 쉽다 했습니다.

 

시내 가운데 바위 하나를 두고 그토록 싸움을 그치지 않았던 두 가문의 이야기는 역사에 남길 만합니다. 탐욕과 비루함의 끝을 누구의 소유도 아닌 수승대는 말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수승대가 욕심 앞에 또 어떤 수난을 겪을지 걱정스레 바라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3. 제발, 요수(樂水)랑 관수(觀水) 좀 제대로 하기를

 

시내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는 요수정(樂水亭: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과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가 있습니다. 구연서원 뜰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 새긴 빗돌이 있는데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이겠지요.

건너편에 요수정이 보입니다.

관수루는 구연서원의 문루로 요수(樂水) 신권이 공부하며 노닐던 곳입니다. 여기서 굽이치며 흐르는 물을 바라봤을 텐데 계단을 따로 내지 않아 왼편 바위를 타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가문의 위상을 내세우는 비석들이 불편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건너편 요수정 또한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고향에서 안분낙도한 신권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水)은 학문의 표상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사람과 세상을 적십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채우면서 위로 올라옵니다. 배움과 실천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뜻이 관수와 요수에 담겨 있습니다.

 

3. 옛 담장과 새 담장이 어우러지는 황산마을

 

황산마을은 수승대 맞은편 길 건너편 신씨 집성촌으로 옛적 기와집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황산리 신씨고가(경상남도민속문화재 제17호)라고, 1927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원학고가(猿鶴古家)’라고도 일컫는 집이 가장 유명합니다.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이 있습니다. 벼슬살이를 한 사람의 집은 아니지만, 지붕 꼭대기에 눈썹마루까지 넣어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여기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59호)은 흙과 돌로 쌓았는데 활처럼 휘어지면서 이어짐으로써 옛집들과 잘 어울리게 돼 있습니다.

 

황산마을 옛 집 가운데 하나.

 

여기 찾은 사람들은 보통 옛 집보다는 옛 담과 옛 길에 더 많이 눈길을 주는 편입니다. 물이 잘 빠지도록 하려고 아래쪽은 흙은 없이 커다랗고 네모난 자연석만 써서 쌓았으며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섞어가며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데 옛 담장만 여기 있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벽화를 그려넣었습니다. 바깥으로 튀어나오게도 했고 위로 솟도록도 했습니다. 황산마을이나 수승대의 유래를 일러주는 내용도 덧붙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다른 데보다 여기서 더 즐겁게 노닙니다. 자기랑 통하는 바가 옛 담장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겠지요. 여기서는 민박을 할 수도 있고 토속 밥상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4. 동계 정온과 추사 김정희의 동병상련

 

거창을 대표하는 선비로 충절을 지킨 동계 정온(1569∼1641)이 태어나 살던 정온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은 조선 양반집의 세련됨과 우아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모와' 현판.

 

사랑채에서 오른쪽에 누정이 튀어나와 있고 눈썹지붕(벽 또는 지붕 끝에 물린 좁은 지붕)을 얹은 특징이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추운 북부지역 가옥처럼 겹집이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가 높은데 이는 한반도 남부에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온 고택. 대문으로 사랑채가 보입니다.

안채, 사람이 살고 있는 정취가 물씬 묻어납니다.

 

정온은 광해군과 인조 때 사람입니다. 광해군의 미움을 사서 10년 동안 제주도로 유배 갔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났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최명길 등의 주화에 맞서 척화로 일관했으며 임금이 삼전도서 치욕을 겪자 자결을 했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 고향으로 여기 돌아와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화가 옳으냐 척화가 옳으냐 논란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자기 품은 바 소신을 행동으로 거침없이 옮기는 자세만큼은 높이 사야 마땅하겠습니다.

 

정온 고택 사랑채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忠信堂(충신당)이라는 현판이 다른 것들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추사도 동계와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1840~1848)를 한 적이 있습니다.

 

충신당 현판.

 

그이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가는 길에 여기 들러서 썼다고 합니다. 그이의 그림 세한도가 여기 겹쳐지면서, 동계와 추사 사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짙게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옆에는 반구헌(反球軒:문화재자료 제232호)이 있습니다. 철종 때 양현현감을 지낸 정기필이 지내던 곳인데요, 택호 반구는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랍니다. 주인 정기필은 호가 야옹(野翁)인데요, 요 선비의 말장난이 재미있습니다.

 

 

야옹은 인품이 높고 덕행이 많았다고 합니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왔지만 재산이 없어 거처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당시 안의현감이 도와줘서 여기 반구헌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공직자 비리가 여전히 문제 되고 있는 오늘날, ‘청렴결백’을 되새겨봄직한 장소가 할 수 있겠습니다.

 

5.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재실 모리재

 

정온 고택에서 모리재까지 5km 숲길이 이어집니다. 정온이 다녔을 길로 짐작된다 해서 거창군이 역사 탐방로라 이름붙였는데 숲이 우거져 있으되 경사는 가파르지 않습니다. 수승대를 품고 있는 성령산 오솔길로 가다 보면 수승대 전체를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만난답니다.

 

말목고개. 왼편 자동차 있는 데에 모리재 가는 산길이 있습니다.

 

숲길 가운데 즈음에서 말목고개가 나오고 아스팔트길을 건너 왼편으로 모리재 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북상면 농산리 모리산 중턱에 있는 모리재(某理齋: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7호)는 재실 치고는 매우 규모가 큰 조선시대 건물입니다. 남부 지역 민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모리재 안 사당.

 

 

정온이 이 산 속에서 늘그막을 보냈답니다. 정온은 여기서 조를 심고 산나물을 뜯었습니다. 이를 기려 후대에 지은 재실입니다. 모리(某理)는 “거처를 물으면 모르는(某) 마을(里)로 갔다고 하라”고 정온이 일러줬다는 데서 나왔답니다. 정온 고택 사랑채 현판 모와(某窩:모르는 움집)와도 통하지요.

 

모리재 옆에 있는 유허비.

 

6. 강선대와 분설담과 만월당

 

이어지는 강선대 마을은 모리산 자락 북상면 농산리 산촌입니다. 모리재에서 내려오는 임도의 끝자락입니다. 거창군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마을 앞을 흐릅니다.

 

마을에는 강선정이 있고 시내 옆 길가에는 한자로 ‘강선대’라 적힌 바위가 있습니다. 신선(仙)이 내려왔다(降)는 것인데,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겠지요. 과연 그러해서 퍼질러 앉아 몇 시간 놀아도 전혀 지겹지 않겠습니다.

 

 

분설담(噴雪潭)은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마치 못에서 눈가루를 뿜어내는 듯하다고 붙인 이름입니다. 강선대에서 분설담까지는 대략 5km, 갔다가 돌아와야 하므로 10km, 다음에 들르는 갈계리까지 1km를 더하면 11km랍니다. 선비들이 탁족(濯足)으로 더위를 식히며 풍류를 누리던 장소지요.

 

왼편 가운데 아래에 분설담이 새겨져 있습니다.

송준길의 글씨라고 합니다.

여기 너럭바위에는 옛 자취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부산·담양 등 여러 사적비에 글씨를 남긴 조선 후기 동춘당 송준길(1606~72)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경상감사를 지낸 김양순(1776~1840)은 이름이 깊게 파여 있습니다. 해질 무렵 쏟아지는 햇살을 바위 위로 흐르는 물들이 튕겨내곤 한답니다.

 

남명 조식(1501~72)은 1558년 써낸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이런 글씨 새기기를 아프게 비판했습니다.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새가 과연 무슨 새인지 어찌 알겠는가?"

 

만월당(滿月堂: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70호)은 만월당 정종주(1573~1653)를 기리려고 1666년에 세웠다는데 1786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고 좌우에 방을 하나씩 들였습니다. 별달리 꾸밈이 없고 간결합니다.

 

 

거창 지역 문인들이 서로 사귀는 장소여서 지역 문화를 뿌리내리고 꽃피우는 데 이바지한 바가 크다는 평을 듣는다고 합니다. 정온의 <동계집(桐溪集)>에 ‘정찬보만월당기(鄭贊甫滿月堂記)’가 실려 있습니다. 찬보는 정종주의 자인데요, 그만큼 만월당의 역사가 뚜렷하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7. 갈계숲과 농산리 석불입상

 

갈계숲(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 이름은 임훈의 호 갈천에서 비롯됐습니다. 임훈은 어버이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수신(修身)을 으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대 선비들이 중국 것은 잘 알고 찾으면서도 우리나라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데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역사를 찾아 알려고 애썼다고도 합니다. 그이와 형제들이 거닐었던 갈계숲은 높이가 평균 20m, 나이가 200~300년 된 소나무·느티나무·느릅나무 따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농산리석조여래입상(農山里石造如來立像:보물 제1436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입니다. 북상면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습니다. 바위를 원추 모양으로 다듬어 불상과 광배를 돌 하나에 다 새겨넣었습니다. 높이가 2.7m나 되지만 수법이 상당히 세련돼 보입니다.

 

사진 찍은 때가 가을이어서인지 앞에 밤톨과 들꽃이 앞에 놓였습니다.

 

달걀 모양으로 오동통하게 복스러운 얼굴, 알맞은 이목구비와 은근한 웃음, 당당한 가슴과 유연한 어깨, 잘록한 허리, 얇은 옷 속에 비치는 실물 같은 몸매 등은 당대의 리얼리즘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망가진 데가 없지 않지만 규모도 크고 수법이 빼어난 데 더해 비슷한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까지 더해져 값어치를 톡톡하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탐방로가 조성되면서 이제는 관광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선이 만들어지면서 편한 길이 됐지만 대신 찾아나서는 재미는 덜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다듬고 개발하는 편이 좋은지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편이 더 나은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지만 수승대를 인간들이 탐욕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역사는 오늘날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말자는 거울로 삼아야 마땅하겠습지요.

 

김훤주

 

※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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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논에는 벼만 자란다고 여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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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판은 모내기철입니다. 갓 심긴 모가 옅은 초록색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아직 모를 심지 않은 논도 남아 있습니다. 물은 봇도랑을 흘러다니고 여기저기 논을 안팎으로 넘나들면서 곳곳을 적셔 줍니다.

 

1. 논이 사람에게 과연 무엇일까?

 

이런 논이 우리 사람에게 무엇일까요? 식량인 쌀을 생산해 주는 일만 할까요? 아닙니다. 닥치는대로 꼽아보겠습니다. 해마다 이렇습니다. 홍수 저장 36억t, 기온 떨어지는 효과를 불러오는 수증기 증발 효과 8070만t, 토양 쓸려 없어짐 방지 효과 2596t, 오염 정화 효과 5조9600억원이랍니다.

 

또 이산화탄소 제거 효과 4178억원, 산소 공급 효과 5조2795억원, 지하수 머금는 효과 157억5000만t 등입니다. 그리고 숱한 야생 동물과 식물의 삶터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논이 현실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돼 있습니다. 공공의 영역에서 그에 걸맞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리 잘린 황새 이야기를 동화로 만든 재일교포 3세 김황 작가.

 

이런 가운데 작지만 아주 중요한 행사가 우리 경남에서 열렸습니다. 논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짚어보는 행사였습니다. 논을 우리가 중요한 교육 현장이자 놀이터로 삼으면 좋겠다는 행사였습니다. 6월 17일 저녁 MBC경남의 라디오광장 세상읽기에서 이를 한 번 짚어봤습니다.

 

2. 논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숨결을 찾아

 

서수진 아나운서 : 지난 주 13일과 14일 창녕군 부곡면 일대에서 재미있는 행사가 열렸다지요? 논이 과연 무엇일까 알아보는 나름 중요한 행사였다고 하는데요.

 

김황 작가의 동화를 바탕으로 만든 그림연극 표지.

 그림연극 소개 화면.

 

김훤주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대표이사 고재윤)에서 주최했는데요, ‘제2차 논습지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한·일 지자체 네트워크 회의’였습니다. ‘논의 생물다양성 향상 10년 프로젝트 - 지자체와 NGO의 책무’가 주제였습니다.

 

일본 사도시청의 ‘따오기와 사람이 공존하는 사도섬 만들기’, 창녕군청의 ‘따오기 복원 현황과 야생 복귀 계획’ 등이 발표됐습니다. 이튿날에는 ‘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일본에서 온 세 사람이 강연을 하고 이어서 현장을 찾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2012년 4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주관했던 한·일 지자체 논습지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세미나에서 ‘생명을 살리는 농업의 촉진과 습지생태계로서 복원을 위한 한·일 민·관 공동선언’을 채택한 데 따른 것입니다.

 

진 : 그렇군요. 첫째 날이 강의 발표 위주였던 반면 둘째 날은 그렇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주 : 그래서인지 첫날은 옷을 제대로 차려 입은 사람이 많았던 반면 이튿날은 옷차림이 가벼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자분들이 많았고요. 이 날 발표는 모두 일본에서 온 분들이 했는데요. 먼저 재일교포 3세인 김황 동화작가가 능숙한 우리말로 '동화 속에서 본 논의 생명'을 말해줬습니다.

 

3. 황새나 따오기가 사라진 까닭은?

 

진 : 재일교포 3세라면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일본에 건너간 셈인데, 2세만 돼도 우리말을 잘 못하는 처지에서 보면 아주 특별한 노력을 했겠어요.

 

주 : 김황 작가는 일본에서 실제 일어난 일을 갖고 동화를 만들었는데, 그 동화가 나중에는 일본 초등학생 윤리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것도 바로 그와 관련돼 있었습니다.

 

진 : 재일교포 3세의 동화 작품이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고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초등학교 윤리 교재로 채택됐다는 소개.

 

주 : 1970년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황새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한 마리가 부리가 아래위로 모두 잘려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들이 관찰을 맡았는데 제대로 먹이를 먹지 못하니까 나날이 말라갔다고 합니다.

 

진 : 진짜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우리나라 같으면 어른이 모두 결정하고 말았을 텐데요.

 

주 : 어른들이 나서서 부리가 잘린 황새를 데려갔습니다. 데려가서는 암컷인 이 황새를 결혼시키려고 나섰습니다. 첫 번째는 수컷이 내쫓아 실패했고 두 번째 성공합니다. 첫 번째는 멀쩡한 수컷이었고 두 번째는 날개를 다쳐서 날지 못하는 황새였습니다.

 

진 : 동병상련인가요?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수컷이랑 부리를 다쳐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암컷이군요.

 

주 : 동화작가 눈에 그렇게 비쳤나 봅니다. 처음 수컷은 암컷을 내쫓았지만, 두 번째 날개 다친 수컷은 암컷을 제대로 보호했다고 합니다. 날개를 다쳐 날지 못하는 괴로움이 부리를 다쳐 제대로 먹지 못하는 고달픔을 이해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다고 합니다.

 

4. 논이 줄어들고 제 구실도 못하게 되니까

 

진 : 그렇게 해서 어떻게 마무리가 되나요?

 

주 : 알은 해마다 낳았지만 부화는 되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23년 세월이 흐른 뒤에 드디어 새끼가 태어났는데, 날지 못하는 부모를 대신해 지금도 두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황새.

그림연극에서 새로 태어난 새끼들이 하늘을 나는 장면.

 

진 : 그런데 황새가 그렇게 멸종하는 지경까지 간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도 예전에는 흔했다고 들었는데, 사냥꾼들 때문일까요?

 

주 : 물론 사냥꾼이 박제를 한다고 많이 잡은 까닭도 있겠지만, 근본 원인은 자연에서 찾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자연 환경이 살기 좋다면 그렇게 짧은 기간에 씨가 마를 리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진 : 그러면, 오늘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황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환경이 논이었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요?

 

주 : 그렇습니다. 일본에서 부리 잘린 황새가 사람한테 발견된 곳도 바로 논이었습니다. 그리고 황새가 하루에 먹는 양이 50kg인데, 이게 미꾸라지로는 하루에 80마리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김황 작가 발표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진 : 그러니까 논이 갈수록 줄어들어 미꾸라지가 살 수 있는 근거지가 사라지는 데 더해, 농약 같은 오염물질 때문에 논이 있어도 미꾸라지는 자라지 못하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얘기겠군요.

 

5. 논=자연환경+문화환경+사회환경+경제

 

주 : 그렇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슈사쿠 미나토라는 일본 선생님이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논 교육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1981년부터 어린이들에게 30년 넘게 논과 환경보전을 교육해 왔고, 2011년부터는 간사이대학교에서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는 분이었습니다.

 

자기 소개를 하고 있는 미나토 선생.

 

진 : 어떤 내용이었나요? 논이라 하면 일단 물이 있을 테고, 사람의 손길이 끼쳐졌을 테고, 그리고 벼가 자라고 있고 또 요즘은 우렁이다 미꾸리다 해서 일부러 집어넣기까지 하는데, 그런 여러 생물도 있겠네요.

 

주 : 그것을 두고 미나토 선생은 자연환경과 문화환경과 사회환경과 경제의 총합이라 했습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논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논을 제대로 공부하면 한 나라의 자연과 문화와 사회와 경제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제대로 놀아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논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갖가지 것들을 갖고 그렇게 놀아야 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체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논이 얼마나 줄어들었고 그 때문에 황새나 따오기 같은 것들이 살기 어려워졌고 그런 얘기는 곁가지였습니다.

 

6. 5668가지 생명과 함께하는 놀이터이면서 학교

 

5668가지 생명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논.

 

진 : 미나토 선생은 놀이 속에서 논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습니다.

 

주 : 논은 사람을 기르는 장소이면서 다른 생명도 함께 키우는 공간이었습니다. 벼 문화를 키워온 장소이면서 우리 모든 생명에게 소중한 물을 머금어 주는 습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과 농업과 경제와 인간 생존이 지속 가능해지도록 하는 공간이 됩니다.

 

교육활동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 : 이어서 현장 체험도 했다고 하셨잖아요?

 

주 : 저도 이 날 함께했는데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논과 논 주위 생명체가 무려 5668가지나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나토 선생이 30년 동안 조사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진 : 저도 무척 놀라운데요, 그렇다면 논 체험은 바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생명에 대한 체험이 되겠습니다.

 

행사장을 꽉 매운 사람들.

 

주 : 바탕은 그렇겠지요.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만들어놓은 갖은 현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가장 중심은 놀라움과 기쁨이었습니다.

 

진 :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신다면요.

 

현장 체험 행사장 풍경.

 

주 : 일단 논에 가서 밭두렁에 앉아 3분만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많은 생물들이 요렇게 조그만 데서 꼼지락거릴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고 했습니다. 거울을 갖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뒷면을 보는 것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오른편에 대나무로 표적을 세워놓고 풀을 뽑아 던져 맞히는 놀이.

 

이파리 냄새를 맡고 그 주인 되는 풀을 찾아오는 놀이도 했습니다. 그밖에 풀잎으로 배를 만들어 봇도랑에 띄우거나 표적을 만들어 세워놓고 풀을 뽑아 던져 맞히는 등등 다른 많은 놀이도 소개해 줬습니다.

 

작은 통 속에 풀을 집어넣고 냄새를 맡은 뒤 그 주인 되는 풀을 찾아오는 놀이.

 바삐 찾아와 미나토 선생(오른쪽에서 세 번째 하늘색 옷을 입은 사람)에게 확인을 받습니다.

7. 진리를 몸에 새기는 훌륭한 수단이 바로 놀이

 

진 : 말하자면, 논에서 나는 모든 것을 갖고 그냥 즐겁게 놀자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주 : 맞습니다. 진리는 숫자나 문장에 있지 않다는 얘기였습니다. 진리는 오로지 자기 몸에 새겨져야 진짜 진리가 되는데, 그렇게 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놀이라는 얘기였습니다.

 

풀잎으로 배를 만들어 봇도랑 물에 띄우고 있습니다.

 돌에 물길이 막혀 풀잎배가 걸려 있습니다.

풀잎배 경주에서 1등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풀잎배는 예쁘고 다양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른쪽 손은 미나토 선생의 것입니다.

 

진 : 저도 놀랍습니다. 논에서 사는 생물이 5668가지나 된다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저도 틈이 나면, 일부러라도 틈을 내어서 논에 한 번 나가 봐야 하겠습니다.

 

앞이나 뒤로 손을 오무려서 귓가에 대는 등 3분 동안 듣기. 소리를 네 개밖에 듣지 못한 사람에서 열한 개나 들은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헤아리지 않아서 몇 가지나 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들판에서 들리는 갖은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미나토 선생.

 

주 : 이렇게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미나토 선생은 오감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감성만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나 자연에 대한 인식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통 과학이라고 하는 영역도 풍부해진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지식이 책 속 활자가 아니라 생활 속 경험으로 이어지다 보니까 더욱 구체적으로 남는다고도 했습니다.

 

거울로 비춰 평소 못보던 뒷모습 보기도 했습니다. 그 느낌을 이렇게 한 낱말로 나타내 봤습니다. 싹이 트는 콩의 아래쪽 모습이 거울에 비쳐 있습니다.

논물 속에 이렇게 거울을 담갔더니 논이 아니라 하늘에 모를 심은 것 같은 느낌이었답니다. 여기 거울에는 '하늘모'라는 낱말이 적혔습니다.

 

진 : 놀이가 감성뿐 아니라 지식까지도 늘려준다는 얘기인데요, 이 얘기 듣는 학부모들은 아이들 데리고 하루라도 빨리 벼가 자라는 논으로 나가봐야 하겠습니다.

 

주 : 그렇습니다. 참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좀 버려도 좋을 옷차림이 좋겠지요. 저도 아이들이랑 함께 나간 적이 있는데, 돌아올 때 오늘 여덟 가지 새 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렇게 섬세하게 구분해 내는 힘을 자연 체험이 길러주더라고요.

 

 

진 : 재미있는 체험 사례네요. 그런 얘기를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8. 우리 경남과 논의 각별한 인연

 

논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하나를 찾아 그리는 놀이.

 

주 : 논은 우리 경남하고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논이 습지로 인정된 때가 2008년인데요, 그렇게 인정한 회의가 바로 그해 11월 경남에서 열린 제10차람사르협약당사국총회였습니다.

플랑크톤 개구리 황새 같은 열 가지 정도 생명과 물이 맺고 있는 먹고 먹히는 관계를 따라 고무줄로 잇는 놀이입니다.

 

당시 찬반 논란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세계 곳곳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 논을 습지로 인정하지 않고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이었습니다. 우리 경남 사람들이 이런 논 습지 체험을 좀더 많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진 : 예, 오늘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을 갖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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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갔다 들른 두 밥집, 죽포식당과 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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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때로는 많이 둔합니다. 사진 찍을 일이 있고 무엇인가 적어 놓아야 할 것이 있는데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치는 때가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직 맛집 관련해서는 글을 적극 써야겠다는 생각이 그리 크지 않은지라 더욱 그렇습니다.

 

경상도 마산 사는 제가 한 번씩 전라도에서 가서 밥을 먹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이 좋은지라 굳이 사진 찍을 생각을 했다가도 숫가락을 드는 순간 먹는 데 열중해져 버려서 사진 찍기를 까먹곤 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번에 여수에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6월 13일 여수 오동도 일대와 금오도를 답사하러 갔는데요, 점심은 죽포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여수시내 소호동에 있는 해오름이라는 데서 먹었습니다. 해오름은 ‘알콩달콩 섬 이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 임현철님 단골 가게였습니다.

 

 

이미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진 죽포식당에서는 6000원짜리 정식을 먹었고 해오름에서는 여러 안주 가운데 2만원짜리 정어리 조림과 함께 막걸리를 주문했습니다. 막걸리는 주로 임현철님이 마셨고요, 저는 주로 정어리 조림에 손이 많이 갔습니다.

 

블로그를 하면 이래서 좋은 면이 있습니다. 사실은 별로 많이 만나지 않은 사이지만 같은 블로그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편한 마음으로 연락하고 만나서 갖은 얘기를 할 수 있거든요. 이 날도 그랬습니다. 담사 목적을 얘기하고 이런저런 명소와 맛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충 마무리를 하고는 정치 얘기도 하고 사회 얘기도 하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려는지도 얘기했습니다. 또 임현철님 친한 선배이시면서 같은 블로그를 하는 오문수님도 자리를 함께하시고 저녁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일어서는데 임현철님이 갑자기 제게 따졌습니다. “훤주 형님! 사진 안 찍었지? 어째 그럴 수 있소! 음식 맛있게 먹었으면 사진도 찍고 해서 블로그에 올려야지 말이야.” 물론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하하.

 

임현철님은 저보다 안목이나 식견이 훨씬 높고 깊으면서도 제가 나이가 한두 살 많다는 이유로 사석에서는 꼬박꼬박 선배 대접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을 놓지는 않습니다요. ^^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둔합니다. 정어리 조림 씹히는 살점 맛을 즐겼으면서도 사진 찍고 글 쓸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상을 차리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식당 겉모습 사진을 찍고서는 블로그에 한 줄 올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화초도 이렇게 가꾸는 모양입니다.

 

그 약속을 지금 실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해오름은 일단 음식값이 쌉니다. 그러면서도 나오는 음식이 천박하지 않습니다. 그날 먹은 정어리 조림 같은 경우 간이 잘 돼 있으면서도 원재료 씹는 맛이 좋았습니다.

 

크기가 작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25인승 버스 한 대 정도 인원은 받을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나름 알려져 단체로 오는 손님이 간혹 있다고 주인 아주머니가 말씀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와 더불어 푸짐한 인심도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전라도 인심이 좋고 경상도 인심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렇게 인심만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라도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공동체가 아직 더 많이 있고 경상도는 그런 공동체의 남아 있는 정도가 전라도에 못 미칩니다.

 

또 언제나 그렇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경향상으로 따져보면, 화폐경제에 편입된 정도가 심할수록 공동체는 많이 해체돼 적게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상도는 공업을 비롯해 이른바 산업의 발달로 말미암아 화폐경제에 편입된 정도가 심합니다.

 

보기를 들자면, 경상도 창원 밥집에서는 김치 반찬을 하나 내놓아도 그게 돈으로 얼마다 하는 계산이 됩니다. 김치를 구성하는 갖은 요소들, 배추나 무 그리고 고춧가루 같은 여러 양념이나 젓갈 따위가 대부분 ‘돈을 주고 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전라도 여수 밥집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김치를 구성하는 갖은 요소들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기르거나 이웃에서 공짜로 얻거나 아니면 서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또는 아주 싸게 사들일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해오름 주인 아주머니도 이런저런 반찬을 자꾸 내놓으면서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돌갓=야생갓’으로 담근 갓김치를 내어놓기까지 했습니다. 경상도 인간인 저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야생 돌갓 김치라면 아주 귀한 것이고 그렇다면 값이 비싸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집어서 씹어 먹어 보니 그 쫄깃한 정도가 밭에서 나는 돌산갓으로 담근 갓김치랑 크게 달랐습니다. 통통하고 탱글탱글한 정도도 훨씬 더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자기가 여기저기 야산을 돌아다니면서 캐온 돌갓이라면서, 아무 스스럼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자기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는 것이고, 돌갓을 아무 대가 지불 없이 그냥 생긴 물건쯤으로 여기는 자세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줄곧 이어졌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블로거 오문수님이 조금 늦게 오셨는데요, 이 분을 위해 밥 한 그릇과 된장국을 따로 끓여 내었지만 한사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정어리 조림 2만원과 막걸리 세 통 값 2만9000원만 받았습니다.

 

게다가 해오름에서는 김치도 팔고 있었는데요, 임현철님이 제게 선물로 1만원 어치를 담아 달라했습니다. 스티로폼 상자에 얼음까지 넣어서 챙겨준 녀석을, 그날 집에 와서 열어보니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잘 익은 갓김치와 새로 담근 싱싱한 알타리김치가 수북했던 것입니다. 맛도 제게는 좋았습니다. 적어도 경상도에서는, 이렇게 많은 양을 1만원으로 사기 어렵습니다.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한 것은 죽포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밥그릇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ㅗ 깻잎, 양파, 배추김치, 물매기 말린 고기, 호박나물, 갑오징어무침, 낙지젓, 미나리무침, 잡어조림, 갓김치. 밥그릇 오른쪽 옆에는 게를 넣고 끓인 된장국이 있습니다.

 

죽포식당 정식이 값은 6000원이었지만 거기 담긴 음식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모두 다 집에서 만들어서 내놓는 것들 같았습니다. 호박나물도 그랬고 절인 듯 만 듯한 깻잎도 그랬습니다. 미나리 무침은 너무 세어서 먹기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배추김치 갓김치도 큼지막하게 통째 나왔는데요, 다른 어디에서 사온 것 같지 않은 투박함과 싱싱함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나는 해물은 더욱 그랬습니다. 오징어 무침이 나왔는데요,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오징어가 아니라 갑오징어였습니다.

 

곁들여 나온 낙지젓갈도 푸짐했는데요 제게는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이 바로 물매기 말린 고기랑 잡어 조림이었습니다. 물매기 말린 고기는 여기서 처음 먹었고요, 잡어는 당연히 양식한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 나는 것을 잡아내어 말렸다가 조리해 내놓은 것입니다.

 

미나리는 억세서 다 먹지 못했습니다. ㅎㅎ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습니다. 다른 음식까지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죽포식당에서 차려내놓는 음식은 모두 이처럼 그럴 듯할 것 같았습니다. 맛집 찾아 일부러 걸음하지는 마시고, 여수 들를 다른 일 있으시거든 이 두 밥집 한 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실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오름 : 여수시 소호동 725-12, 061-682-3727.

죽포식당 :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879-1, 061-644-3017.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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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안개 속에 걸은 남해 바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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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에는 아침까지 비가 세게 내렸습니다. 남해로 생태역사기행을 떠나기로 돼 있는 날이었습니다. 삼천포대교를 거쳐 금산 보리암을 들른 다음 멸치쌈밥을 맛나게 먹고 대량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래길을 걸을 예정이었습니다.

 

떠나기 앞서 실은 걱정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계속 내리면 어쩌나였고 다른 하나는 날씨가 무더우면 어쩌나였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날씨를 확인하니 비는 10시 전후해서 걷히고 더위는 그다지 심하지 않으리라는 예보를 확인했습니다.

 

1. 비 오는 날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점

 

하지만 실은 걱정을 크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은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상황은 사람이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하는 여정에서 거기에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럴 듯한 대목을 찾아내어 즐기거나 누리거나 하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좋은 구석을 찾아 누리면 됩니다. 게다가 이 날 같은 경우는 비가 내리면 여름답지 않게 걷는 길이 선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하나가 좋지 않으면 다른 하나는 좋아지게 돼 있는 것은 사람살이 아니라 이런 조그만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래서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2. 아련한 안개에 둘러싸인 금산과 보리암

 

어쨌거나 아침 8시 30분 창원시청 앞으로 떠난 일행은 이런저런 일로 조금 늦어지는 바람에 11시 남짓 보리암 아래 복곡주차장에 닿았습니다. 차삯이 왕복 2000원 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보리암 턱 밑에까지 갔습니다. 턱 밑이라 해도 입장료 1000원씩을 다시 낸 다음 500m 이상은 족히 더 걸어야 합니다.

 

일기예보대로 빗줄기는 이미 가늘어져 있었고 내리는 정도도 듬성듬성했습니다. 덕분에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금산 아래 상주해수욕장을 지나 바다와 섬으로 이어지는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안개는 시야를 흐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아련함을 안겨 줬습니다. 눈앞이 늘 이렇다면 갑갑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쩌다 한 번씩 이러면 그 또한 작으나마 새로움과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법이겠지요.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걷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요, 또 저처럼 혼자 떨어져서 걷는 이도 없지 않습니다. 또 원래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이렇게 길을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보리암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려 금산 줄기가 출렁출렁 뻗어내려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섬을 점점이 띄워놓은 쪽을 봅니다. 하지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로 마주하는 건너편 산자락조차도 어렴풋하게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6월 19일사진.2011년 6월 17일 사진.

 

옛적 해가 쨍쨍한 날에 와서 눈에 담았던 풍경을 머리에서 끄집어내 봅니다. 안개가 안겨준 백지에다가 그 풍경을 쓱쓱 그려봅니다. 푸른 솔숲과 하얀 모래밭과 울렁울렁 곡선으로 내려가는 산줄기 등날과 거뭇거뭇하게 박혀 있는 섬들입니다.

 

금산 꼭대기 가는 길.

 

해수관음상과 삼층석탑이 있는 쪽으로 가다말고 금산 마루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금산과 보리암을 자주 찾기는 했지만, 거기 산마루에 오른지는 벌써 10년도 넘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퍼뜩 들었기 때문입니다.

 

3. 오랜만에 올라본 금산 꼭대기

 

제 기억에는 산마루 둘레에 커다랗고 보기 좋은 바위들이 우뚝 있습니다. 거기 서면 푸르른 초록뿐 아니라 가뭇없이 멀어 보이는 하늘도 눈에 눈에 담기 좋았습니다. 거기서 200m 봉화대가 있는 꼭대기까지 신나게 올랐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산마루에 도달했습니다.

 

바위는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산길이 조금 달라져 있는 듯해서, 예전처럼 집채만한 바위와 바위 사이로 걸어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봉화대는 완전 새롭게 쌓여져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예전에는 여기에 그런 자취만 조금 있을 뿐이었는데 말씀입니다.

 

 

바위에는 유홍문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라고, 한자가 적혀 있습니다. 그 옆에는 주세붕을 비롯해 여러 사람의 이름이 같은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홍문은 무지개문을 뜻합니다. 여기 두 바위를 일러 무지개문이라 했나 봅니다. 이 ‘홍문으로 말미암아 그 위에 금산이 있다’는 정도로 뜻을 새겨봅니다.

 

 

주세붕 일행이 놀러 왔다 새겼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지 않을 개연성도 아주 많습니다. 오랜 세월 여러 사람들이 드나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자동차를 타고 턱 밑에까지 와서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예전에 이렇게 오르면 무엇 하나라도 자기 자취를 남기고 싶었을 수도 있기는 하겠다는 생각을 얼핏 해봅니다. 그렇다고 이런 데 글자를 새기는 일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습니다만.

 

4. 나오는 길에는 눈길을 멀리 던지지 않고

 

도로 내려옵니다. 해수관음상과 삼층석탑 있는 데로 가서 봅니다. 오늘 같은 날은 부러 자연경관을 눈에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들 노닐거나 움직이는 모습이 좋습니다. 이리 비가 오고 날씨가 흐린데도 보리암이 내뿜는 ‘기도빨’은 전혀 조금도 가시지 않나 봅니다.

 

바다를 등지고 해수관음상을 향해 절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삼층석탑을 둘러싸고 시계 방향으로 탑돌이를 하는 그림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 기도빨은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합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준다고 합니다.

 

돌아나오는 길에는 굳이 눈길을 멀리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보려고 하면 오히려 갑갑하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 데 대한 불만만 쌓이기 십상입니다. 자연이 보여주지 않을 때는 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서어나무 줄기.

 

대신 보여주는 만큼을 눈에 담는 것입니다. 나무줄기랑 이파리를 봅니다. 제가 공부가 얕아 이름 따위는 잘 모릅니다. 어쩌다 서어나무 노각나무 따위 이름을 아는 녀석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나무줄기 생김새랑 껍질이 저마다 다릅니다.

 

비를 맞아 거뭇거뭇해진 것도 있고 오히려 밝게 빛나는 것도 있습니다. 이파리 또한 종류마다 다른데요, 색깔조차도 사람이 말할 때는 다 같은 초록이지만 그 초록의 구체적인 현상은 나무마다 가지마다 죄다 다릅니다.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 한 번 더 눈길을 던집니다.

 

 

5. 밥집 사랑채에서 먹은 맛난 멸치쌈밥

 

이제는 점심을 먹을 차례입니다. 복곡주차장에서 내려와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왼쪽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오른편에 나오는 밥집 사랑채가 오늘 멸치쌈밥을 먹을 장소입니다. 멸치쌈밥은 거나했습니다.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있습니다. 산골짜기여서 흙탕물이 아니었습니다.

 

고추는 매웠습니다. 김치는 깔끔했습니다. 멸치젓은 짭쪼롬했고 멸치무침은 고소했습니다. 쌈장은 부드러웠으며 호박나물·가지나물은 사르르 녹았습니다. 그밖에 몇몇 나물은 씹히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찌개에 들어 있는 멸치들은 그 싱싱함 덕분에 부스러지지 않았습니다. 입에 들어가 씹힐 때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몇몇은 취향에 맞게 막걸리나 소주를 곁들였고 밥맛이 댕기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인지 하얀 쌀밥을 더 달라는 소리도 곳곳에서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채는 인심이 푸짐했습니다. 주인 되는 이는 더 달라고 먼저 말하지 않아도 반찬을 잔뜩 들고 밥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빈 접시를 채워줬습니다. 더 먹은 밥은 그릇 숫자가 많았는데도 돈을 더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표정이 벙글어졌습니다. 몸도 덩달아 푸근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 날 일정에서 가장 좋았던 것이 점심 멸치쌈밥이었다고 여길 사람이 가장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대량마을로 갑니다. 일행을 실은 버스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량마을 지나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노도.

 

6. 송홍주 바래길사람들 회장님 도움이 없었다면

 

앞서 답사를 자가용 자동차로 하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버스가 들어올 수 있는지 물어보지 못한, 세밀하게 점검하지 못한 대목이었습니다. 원래 목적했던 데까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30분 남짓 오르막길을 걸어올라야 하는 예상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이었습니다. 아침에 행여나 싶어 ‘바래길 사람들’의 송홍주 회장께 전화를 드린 일이 좋은 결과를 안겨줬습니다. 송 회장께서 몸소 일행을 맞으러 오신 것입니다. 송 회장은 짐차를 몰고 오셨습니다. 짐칸에는 가빠가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바래길 사람들 송홍주 회장 짐차 짐칸을 타는 모습.

 

송 회장께서는 짐칸에 우리 일행을 태우고 두 번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고 좋아했습니다. 자드락길 들머리까지 손쉽게 와 닿은 일행은 송 회장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 숲속길로 들어가 걸었습니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흰옷 입은 분이 송홍주 회장님.

일행을 태워주신 짐차로 돌아가고 있는 송홍주 회장.

 

 

7. 대부분이 흙길인 대량~상주 바래길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았지만 땀이 많이 났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풀이됐습니다. 해가 쨍 났어도 그늘로 덮였을 오솔길을 걷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잘 익은 산딸기를 따먹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금난초 삿갓나무 우산나물 원추리 같은 꽃과 풀을 눈에 담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요즘 드물게 흙길을 밟는 보람은 기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이리 좁은 길을 사람들이 일삼아 다녔다고 합니다. ‘바래길’에서 ‘바래’는 ‘물일이나 갯일’을 뜻하는 남해 지역말입니다. 그러니까 바래길은 바래를 하러 다니는 길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걸으려고 다니는 길이지만 옛날에는 일하러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대량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까지 5km 남짓은 남해 바래길 3코스의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3코스는 사포 김만중이 귀양 살던 섬 노도 맞은편 벽련마을에서 시작해 우리가 이 날 걸은 길을 지난 다음 유람선선착장과 금포마을을 거쳐 천하몽돌해수욕장까지 15km 이어집니다.

 

이름은 김만중이 노도에서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소설 제목인 ‘구운몽’길입니다. 가다 보면 두 군데 전망대가 나옵니다. 전망대가 원래부터 전망대는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군인들 경계 초소였습니다. 지금은 그 부스러기가 남았고 거기서 사람들은 바다와 섬과 하늘과 숲을 눈에 담습니다.

 

노도.

 

8. 숲길도 좋고 바다 풍경도 좋은 여기 바래길

 

길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바다가 보이는 데로 나왔다가를 되풀이합니다. 멀리 바다에는 안개가 깔려 있습니다. 저 아래 갯바위에서는 물결치는 소리가 철썩댑니다. 갯바위나 바다는 보이지 않는데도 파도 소리가 씩씩하게 들려오는 때도 적지 않습니다.

 

 

멀리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 날씨는 가까운 바위나 파도로 눈길을 돌리게 합니다. 걷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갯바위들은 모습이 다들 그럴 듯합니다. 비스듬히 드러누운 채 세로로 갈라진 주상절리는 더욱 그럴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걷는 동안 숲길이 끝이 납니다. 이제부터는 아스팔트길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적당하게 지친 시점이었습니다. 이날 앞선 대열이 잠깐 길을 잃는 바람에 조금 더 지친 측면이 있었습니다. 나름 까닭이야 없을 리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다시 하지 않아야 좋을 실수였습니다.

 

상주해수욕장 솔숲은 색깔이 짙어져 있었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은 물을 머금어 불그스레했습니다. 그 모래밭에서는 중학교 운동부 소속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훈련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로 한가로이 노니는 청년들의 걸음도 포개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본 상주해수욕장. 

 

9. 9월엔 거제 서이말 일대. 10월엔 지리산

 

일행들 가운데 지친 기색이 있는 이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나름 다들 낯빛은 밝았습니다. 낮 4시 조금 넘어서 버스를 타고 떠난 데로 돌아왔습니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보고 함께하며 걷는 보리암 탐방과 바래길 걷기였습니다.

 

마산용마고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지역의 자연 문화 역사 생태를 느긋하게 둘러보는 생태역사기행은 7월과 8월 두 달을 쉰 다음 9월과 10월로 이어집니다. 9월에는 25일 넷째 수요일에 거제 서이말등대 들머리에서 공곶이까지 이어지는 4.5km 자드락길을 걷습니다. 와현(臥峴=누우래재)해수욕장도 함께 누립니다.

 

10월에도 넷째 수요일인 23일에 길을 나서서 동강~방곡~쌍재~수철 지리산 굴레길 가운데 일부를 떼어내어 걸어갑니다. 참가비는 3만원입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후원하고 경남풀뿌리환경교육센터와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공동 주관합니다.

 

문의·상담·신청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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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콩나물콩의 닮은 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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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인데도 한여름 날씨 같던 날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을 6월에는 함안 법수 남강가로 갔습니다. 16일 일요일이었는데요, 함안 으뜸 누각 악양루에 올랐다가 맞은편 악양제방으로 가서 풀밭에서 꽃과 풀을 찾는 놀이를 즐긴 다음 공차기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더불어 둑방길 3km 남짓을 걸은 다음 거기 있는 조그만 공원에서 차려온 점심을 먹고는 촛대를 겸할 수 있는 작은 솟대를 만드는 체험을 하고 다시 자기 눈에 가장 좋아보이는 풀꽃을 찾아 그림으로 나타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방해를 했습니다. 아침 10시를 살짝 넘었을 뿐인데도 더위가 무척 심했습니다. 30도를 넘는 기온에 아이들은 힘들어했습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높다랗게 산중턱에 자리 잡은 악양루에서 남강과 함안천이 합류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악양루에서 내려다보이는 남강과 함안천.

 

 

걸어 나와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눈에 담고는 다리를 건너 악양제방으로 오는 동안에도 아이들은 지쳤고, 여기 와서 널찍한 풀밭에서 한 번 더 지쳤습니다. 제대로 놀아보기도 전에 지쳤는데, 여기저기 무리지어 있는 토끼풀 더미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놀이도 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늘 신나게 놀아보리라 다짐하고는 축구공까지 가져왔건만, 그래서 공을 풀밭에 던져 놓고 발길질을 해 봤는데 대부분 차 보지도 못하고 다들 늘어지고 말았습니다.

 

공놀이를 시작하는 아이들.

 

2. 더운데도 버스 타는 대신 둑방을 함께 걷고

 

더위 탓이었습니다. 일단 둑방 위로 올라가 원두막에 앉았습니다. 더위에 늘어진 아이들은 아우성을 내질렀습니다. 버스를 타고 어서 그늘로 가자, 왜 이렇게 더운 데 데려 왔느냐,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등등 갖은 얘기가 다 나왔습니다.

 

 

 

건너편에 가 있던 버스를 도로 오게 했습니다. 모두들 버스를 타고 갈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달그리메 선생님이 “나는 걸어서 건너편 공원까지 갈 생각인데, 한 사람이라도 같이 가려면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싸움소를 지나옵니다.

 

아이들 몇몇이 나섰습니다. 태현이랑 시현이 형제 등등이었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머지 아이들도 우르르 일어났습니다. 공을 차려고 뛰느라 배가 아픈 원규도 나섰고요, 신발 때문에 발이 아프다는 한이도 나섰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버스가 오니까 그것을 타도 된다고 했지만, 한 명만 남기고 모두 걷기를 자청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을 앞질러 뛰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원규와 한이는 뒤에 조금 처져서 저랑 함께 걸었습니다.

 

원규는 자기가 배가 아픈 까닭을 말해줬습니다. 무엇을 잘못 먹거나 배탈이 나서 아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고 나서 바로 뛰는 바람에 아픈 배라면서 천천히 걸어가면 곧 낫는다고 했습니다. 자기 말대로 원규는 건너편 공원에 도달해 얼마 있지 않았는데 다시 생생해졌습니다.

 

한이는 더위를 무척 탓했습니다. 물집이 생겼는지 걷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런데도 업어주겠다는 손길을 뿌리쳤습니다. “진짜 무겁거든요!” 했습니다. “한이 정도는 너끈히 업고 갈 수 있다”고 해도 기대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걸을 수 있거든요!”

 

3. 아이스크림과 아이들의 집중력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올라붙었습니다. 내뿜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차례대로 아이들은 수돗가로 가서 씻었습니다. 처음에는 버스에 올라타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정자 아래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원기를 되찾았는지 거기 있는 놀이·운동기구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더위를 가라앉힌 다음 빙 둘러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과정에서도 왁자합니다. 더위에 지친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왔습니다. 이렇게 더위에 늘어진 아이들에게는 그게 불량식품이든 아니든 이런 정도는 먹게 해야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갖고 온 아이스크림이 남았습니다. ‘설레임’이라고, 비닐봉지에 들어 있어서 녹아도 바로 흘러내리지는 않은 물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갖고 바로 놀이에 들어갔습니다. 369게임입니다. 1부터 정수를 하나씩 늘려나가는 게임입니다. 대신 3의 배수가 나오면 숫자를 소리내어 부르는 대신 입을 닫고 손뼉을 칩니다. 저는 아이들이 이렇게 집중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또 사람들은 아이들 놀이가 없다고들 쉽게 말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까 그렇다고 잘라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결국은 하나씩하나씩 탈락하더니 끝까지 남은 세 사람은 100을 넘겨서까지 이어갑니다. 승패가 갈라지지 않아 결국 가위바위보로 아이스크림의 주인공을 정합니다.

 

첫 게임 우승자 기현이가 왼편에 서 있습니다.

 

이긴 기현이는 무척 즐거워합니다. 바로 입으로 가져갑니다. 남은 아이들끼리 남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두고 다시 369게임을 합니다. 앞에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낸 아이들이 뒤에 게임에서는 먼저 떨어져나갑니다. 앞에 게임에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느라 기력이 많이 빠진 때문이 크겠습니다. 이번에도 승패는 가위바위보로 갈렸습니다.

 

4. 솟대 촛대 만들기 체험을 하는 보람

 

솟대 촛대 만들기 체험을 할 시간이 됐습니다. 마산창원환경운동연합의 감병만 사무국장이 초등학교 6학년 아들과 함께 왔습니다. 나중에 봤더니, 일부러 그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들은 아버지 체험을 진행할 때 조수 노릇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솟대는 옛날 역사가 없던 시절부터 거룩한 땅을 일러주는 표시였습니다. 사람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억눌리고 빼앗겼던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솟대는 지금도 좋은 무엇, 걸리적거림이 없는 좋은 상태를 뜻하게 됐습니다.

 

감병만 국장은 그런 솟대를 책상에 올려둬도 좋을 만큼 작은 크기로 만들면서 거기에 홈을 파 파라핀을 담은 그릇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파라핀에 불을 붙이면 촛불이 됩니다. 촛불이 피면 굳이 전등으로 방을 밝히지 않아도 됩니다.

 

 

에너지 절약을 생각하고 이산화탄소 발생에 따른 지구온난화 문제를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자는 취지라고 합니다. 솟대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를 감 국장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산 나무가 아닌 이미 죽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와 만든다고 했습니다.

 

왜 그리 힘들게 하느냐 물으면 이렇게 답을 한답니다. “산에 죽은 나무는 언젠가 썩기 마련이고 썩으면서 이산화탄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를 부추깁니다. 작으나마 그런 이산화탄소를 줄여보려고 그런 재료를 활용해 장식용 솟대를 만들어 봅니다.”

 

 

그런 솟대를 촛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같은 취지라고 했습니다. “지금 전기는 석유를 때거나 원자력 작용을 해서 나옵니다. 석유는 한정된 자원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때면 공기가 오염됩니다. 원자력, 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것 줄이거나 없애려면 결국 전기를 아껴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이렇게 촛불을 켜고 전기를 아끼는 시간을 마련해보면 어떨까요?”

 

5. 콩나물시루에 물 붓기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이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즐겁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에너지다 지구온난화다 원자력이다 따위는 아직은 알아듣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의 영역으로 봐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저희 처지에서도 아이들이 이런 말을 죄다 알아듣거나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냥 솟대 기둥으로 쓰는 대나무 얇은 가지에다 불기를 쬐어서 스스로 바라는 대로 멋들어지게 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지 끝에다 오리를 날렵하게 매달고 부리가 하늘을 제대로 하늘을 향하게 하는 것이 더 관심이 갑니다.

 

 

에너지 절약이나 지구온난화 따위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이들 자라면서 생각이 여물고 자라는 것이 꼭 콩나물시루에 들어앉은 콩알들 같기 때문입니다. 콩나물시루에 뿌려지는 물은 그냥 주루룩 흘러내릴 뿐입니다.

 

콩알 하나하나에 깊숙이 새겨들어가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물이 내려가는 그 순간에는 콩나물이 자라는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나절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보면 콩나물을 꼭 그만큼 자라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솟대촛대들. 하얗게 파라핀이 박혀 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그러므로, 그런 물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면, 아이들은 그야말로 절로 자라고 절로 여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른들에게 필요한 일은 아이들에게 믿음을 주고 아이들한테 스스로 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지요.

 

이렇게 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바로 생생해졌습니다. 오히려 어른이 제 생각대로 틀을 짜 놓고 거기에 맞춰 갖은 영양분을 주입하면 아이가 자기 가진 성질대로 크지 못하는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ㅏ.

 

6. 정말 잘 놀고 집중력도 대단한

 

해가 설핏 기울면서 그늘이 여기저기 생겨난 덕분도 있겠지요. 철봉에 가서 매달리기도 하고 수돗가에 가서 물장난도 합니다. 물론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핸드폰에 눈길을 고정하고 게임을 즐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 들어선 족구장에 절반쯤 그늘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은 다시 공을 들고 나섰습니다. 족구를 하자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뭐…… 이러면서 얕잡아 봤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족구를 하는 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공격도 잘하고 수비도 잘합니다. 어른인 저보다 공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합니다. 하기야 저 같은 경우 어른들끼리 족구를 할 때면 언제나 ‘개구멍’ 취급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오늘은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제가 배웠습니다.

 

 

더위에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굴더니 곧바로 자기네들끼리 재미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따분하게 여기지 않고 놀거리를 찾아내었습니다. 집중력도 대단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있는 어버이는 참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종이를 나눠주고는 그리기를 할까 하다가 낱말을 말해주고 기억해 놓은 만큼 쓰게 하는 놀이를 했더니 낱말 서른 개 가운데 스물여덟 개를 맞힌 아이도 있었습니다. 스물일곱, 스물셋을 맞힌 아이도 있었는데요, 아마도 저 같으면 스무 개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끝말잇기에서도 아이들 집중력과 지식은 만만찮았습니다. 선생님이랑 어울려 같이 했는데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는 저희 어른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끈질기기도 했습니다.

 

7. 7월에는 문화재 공부와 물놀이를 함께

 

어린이 청소년 여행 체험 프로그램에는 보통 스무 명 안팎이 참가를 하는데요, 이 날은 모두 아홉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기말시험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희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이문을 남기기로 작정했다면 당연히 취소하고 그렇지 못했겠습니다만 말씀입니다.(물론 앞으로는 적당하게 시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물놀이하기 딱 좋은 옥천골짜기.

7월에도 셋째 일요일인 21일에 어린이·청소년 여행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원래는 통영 연대도에 가서 해양 체험을 하려고 했지만, 연대도는 철이 다르기는 하지만 3월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어서 시원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산골짜기로 골라잡았습니다.

 

옥천사터 남은 석등 받침.

 

창녕 화왕산 옥천골짜기랍니다. 갖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관룡사와 용선대를 둘러보며 문화재를 공부한 다음 고려 말기 개혁을 이끌었던 신돈이 태어나 자랐던 옥천사터를 찾아봅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미리 장만한 재료들로 밥과 반찬을 만들어 먹고는 신나게 물놀이도 즐깁니다.

 

처음 통영 연대도 생각하고 산정한 참가비 4만7000원에서 오가는 배삯 5000원을 빼는 대신 점심 재료 3000원 정도를 4만5000원으로 맞출까 싶습니다. 손수 끼니를 해결해 보는 보람도 누리고 공산품에 가까운 과자 대신 제대로 된 간식도 마련합니다. 

 

7월 21일(일)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 옥천사터 옥천골짜기.

상담·문의·신청 : 055-250-0125, 010-8481-0126, haettane@gmail.com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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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산 분리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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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마산역 광장이 떠들썩하게 생겼습니다.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통합 창원시에서 마산을 분리하는 운동을 벌인다면서 3만 명 동원을 목표 삼아 여기서 오후 5시부터 집회를 한다고 합니다.

 

MBC경남에서 24일 저녁에 월요일마다 방송하는 라디오광장의 세상읽기에 나가서 이를 두고 한 마디 했습니다. 지금 분리운동이 과연 지역 주민들의 뜻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짚어보는 대목도 들어 있습니다.

 

1. 막연한 상실감과 피해의식에 기댄 마산 분리 운동

 

서수진 아나운서 : 요즘 달리는 자동차에서 선무 방송 비슷한 마이크 소리가 난데없이 밤늦게까지 시끄럽게 울려퍼지고 있던데요?

 

 

김훤주 기자 : 제가 마산 내서 광려천 가까운 아파트에 사는데요. 100m 가량 떨어진 높고 먼 데까지 들리더라고요. 마산 독립을 위해 25일 마산역 광장으로 모이자는 얘기입니다. 신경이 은근히 쓰이는 소음입니다.

 

진 : 교차로나 건널목 같이 왕래가 잦은 데도 플래카드가 붙어 있어요. 3·15의거나 10월 부마항쟁을 내걸면서, 마산의 잃어버린 7대 도시 영광을 되찾자는 식입니다.

 

주 : 2010년 통합 창원시 출범과 함께 이름도 사라지고 그 뒤 청사도 원래 합의와 달리 창원에 남고 야구장도 마산 아닌 진해에 새로 짓기로 하면서 생긴 피해의식 상실감에 터잡아 몇몇 단체들이 분리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 : 그 반작용일까요? 7월 1일 통합 창원시 출범 3주년을 맞아 창원시민의 날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집니다. 2PM 이효리 홍진영 엠블렉 강진 걸스데이 박현빈 바비킴 씨크릿 나인뮤지스 등 인기 유명 가수들이 한꺼번에 오는 모양입니다.

 

2.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의 본모습과 포장술

 

주 : 갈등과 대결만 일으키다 결국 마산 사람들이 딴 살림 차리겠다는 상황에서 창원시가 이렇게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니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25일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이 마산역 광장에서 벌이는 ‘마산 독립 쟁취와 불법 날치기 청사 처리 규탄 범마산인 궐기대회’도 문제가 있습니다.

 

진 : 무슨 문제가 있나요?

 

 

주 : 말씀대로 3·15의거나 4·19혁명, 10월부마항쟁 같은 마산의 역사적 사건을 내걸었지만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은 그런 민주주의 역사 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 등등 3·15관련 단체가 몇몇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기득권층이나 토호들과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 : 그래서인지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이 마산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입에 올리는 까닭을 모르겠다는 반응은 있는 것 같아요.

 

주 : 이들은 그동안 행정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마산시장의 손발 노릇을 충실히 했을 뿐 지역 사회 민주주의나 주민 권익 신장은 가로막아온, 주민을 위한 목소리는 내지 않은 관변단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도 아니면 자기네 이익을 위해 모인 이익집단일 뿐입니다.

 

진 : 보기를 들자면 어떤 단체들이 있는지요?

 

주 : 며칠 전 단체 명의로 낸 신문 광고를 봤습니다. 새마을협의회 새마을부녀회협의회 이·통장협의회 주민자치위원장협의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자유총연맹 새마을문고 마산예술총연합회 바르게살기위원회 국민생활체육마산경호무술협의회 경찰서 방범연합회는 관변단체고요.

 

마산어린이집 분과 지회 학원연합회 자연보호협의회 공인중개사협의회 마산아구데이위원회 음식업중앙회지부 유흥음식업중앙회지부 단란음식업중앙회지부 마산자전거연합회 마산한의사협의회 노래연습장협회지부 마산요트협의회 대한가수협의회지부 등은 이익단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

 

진 : 관변단체고 이익단체라면 주민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겠는데요? 그렇기는 해도 창원이 도시 이름과 시청사 소재지를 독식한 것은 분명 잘못이고 새 야구장 입지가 진해로 결정된 과정도 탐탁지는 않고요.

 

주 : 맞는 말씀입니다. 통합 창원시가 잘못했고, 그런 잘못을 두고 지역 사회 구성원은 누구라도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자유롭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발언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진정성과 무게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진 : 그러면서 분리가 되면 마산의 명예도 되찾아지고 1970년대 전국 7대도시의 영광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지요.

 

 

주 :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이라는 것도 우스운 얘기입니다. 인구가 얼마나 많으냐 공장이 얼마나 많으냐 이런 것으로 따지는데요, 그런 데 따르기 마련인 노동자 인권 침해라든지 여성 노동자 성폭행과 성추행, 산재사고 따위, 그리고 심각한 환경오염ㅇ 얼마나 많았는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지요.

 

진 :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인데요, 이를 아울러 다 보지 않고 성장지상주의 관점에서 보는 편향은 좀 있는 것 같아요.

 

주 : 그런 7대 도시 같은 주장을 덜어내고 보면, 마산이 분리 독립하면 무엇이 어떻게 좋아진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진 : 알맹이는 없고 선동만 있는 격이라 할 수 있겠네요.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이 그런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4. 반성도 못하고 전망도 못 내놓는 까닭

 

주 : 첫째는 통합 이전 마산이 엉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산시에 민선 시장은 김인규·황철곤 둘뿐인데 이 두 분이 많이 망쳐 먹었습니다. 김 시장은 두 번째 임기에 뇌물로 구속됐고 황 시장은 세 번째 임기 마친 뒤 구속됐습니다.

 

진 :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은요?

 

주 : 시의원들은 집행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권이나 이해관계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더욱이 시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시장개척단으로 외국에 나갔다가 룸살롱에서 부적절한 접촉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못했습니다. 법정에서 심판을 받은 김호일 김정부 두 의원도 그랬고 지금 두 의원도 좋은 성과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지금 마산 사람 대다수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산은 이런 옛 모습입니다.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 6월 1일 모임에서 발언하는 안홍준 국회의원.(앞쪽 등이 보이는 사람) 경남도민일보 사진.

 

진 : 하지만 그것은 당시 마산시장이나 해당 시의원 또는 국회의원의 문제이지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요?

 

주 : 그렇게 마산시정을 주물러 온 단체장들의 하위 파트너 역할을 해온 단체지요. 이 단체의 주요 구성원들이 특정 정당을 중심으로 마산 지역 정치인들과 얽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이게 전망을 제대로 못 내놓는 두 번째 까닭이라고 봅니다. 그런 모습이 무엇보다 뚜렷하게 드러났던 것이 STX조선기자재 공장 수정만 진입 사태였지요.

 

5. 황철곤 시장 위해 수정 주민 짓밟았던 사람들 

 

진 : 당시 마산시는 STX보다 앞장서서 공장 진입을 추진했어요. 바로 옆에 중학교가 있고 왕복 2차로 도로만 건너도 바로 주택이 있는 그런 데다 소음과 먼지가 엄청나게 나는 공장을 들여세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 : 그 때 주민 의사를 무시하고 몰아붙이는 황 시장을 위하던 단체가 마산발전범시민협의회였습니다. 당시 관변단체 대부분이 소속돼 있었는데요, 각종 궐기대회 규탄대회 기자회견에 나가 수정 주민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했습니다. 2007년 1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이어졌는데 결국은 주민 승리로 끝나기는 했습니다.

 

일제 악덕 지주 아래 같은 조선인 소작농을 괴롭혔던 마름 같은 관변단체였고 그러므로 잘못된 시정에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2008년 5월 14일 마산발전범시민협의회 집회. 경남도민일보 사진.

 

진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우리 옛 속담이 떠오르네요.

 

주 : 그랬던 대부분이 단체 이름을 조금 바꿔 지금 마산 분리 운동을 하니까 당연히 대다수 사람들은 옛날 마산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 : 통합 이전 마산시의 지방자치에 대한 반성도 없고 미래에 대해 제대로 된 전망도 없다는 정도로 요약이 되겠네요.

 

6. 마음 둘 곳 없어진 마산 사람들

 

주 : 지금 마산 사람들은 통합 청사를 마산에 두겠다는 약속을 어긴 창원 쪽 정치인들도 밉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산을 창원에서 떼어내 분리하겠다는 일부 마산 사람들 얘기에도 기꺼이 자기 마음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진 : 그런데 관변단체들만 마산 분리 운동을 벌이지는 않는 것 같던데요? 마산YMCA도 분리 운동에 나서 있는 줄 아는데요.

 

마산YMCA 5월 6일치 경남도민일보 광고.

 

주 :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고요, 그래서 마산살리기범시민협의회의 분리운동에 마산YMCA의 분리운동이 묻히는 느낌입니다.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 :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가요?

 

주 : 국회 입법을 통한 조속한 마산 분리 전략과 안홍준·이주영 두 국회의원에 대한 기대기와 이 과정에서 주민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기대기라는 말이 거치적거린다면 압박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사소한 점으로는 3·15나 10·18을 들먹이지 않고 7대도시 영광을 입에 올리지 않는 점이 다릅니다. 마산살리기범시민연합이 대규모 대중 동원을 주요 수단으로 쓴다면 마산YMCA는 시민사회 연석회의 같은 것을 통한 합의 또는 협의를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도 서로 다른 점입니다.

 

2009년 4월 3일 마산발전범시민협의회의 기자회견 장면. 자기네가 외부세력이면서, 외부세력 개입말라는 이상한 주장을 했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진 : 그나저나 지금 이렇게 꼬여 있는 국면에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주 : 지금 이런 단체들의 분리 주장은 뜬 구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산 주민 의견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분리 운동 단체들은 주민 대부분이 분리에 찬성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주민들은 통합 이후 약속대로 되지 않아 불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분리해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리한다 해도 더 좋아질 보장이 없고, 암담했던 옛날 마산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론 조사도 좋고 설문 조사도 좋고 사회적 토론도 좋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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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수도권에 발전소 필요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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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은 76만5000볼트짜리 초고압 송전탑을 짓는 문제로 2006년부터 8년째 전쟁 중이랍니다. 한국전력·중앙정부가 한 편을 먹고 다른 한편은 지역 주민입니다. 한전과 중앙정부는 공사 재개와 중단을 되풀이하다 5월 20일 다시 공사 강행에 들어갔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말 그대로 몸을 던져 맞섰습니다. 관심이 집중되고 반대 여론이 높아졌습니다. 한전과 정부는 29일 공사 강행을 일단 포기했습니다. 그러면서 40일 동안 주민·한전·국회가 추천하는 전문가 3명씩 모두 9명으로 협의체를 꾸렸습니다.

 

협의체는 그동안 송전선이 지나가지 않아도 되는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한전과 정부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방침을 굳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지요.

 

밀양 지역 주민들 또한, 보상은 전혀 바라지 않으며 지금 이대로 살다 가고 싶을 뿐이라고 한답니다.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면 삶터가 송두리째 무너지게 돼 있는데 보상이 무슨 보람이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포크레인 삽날에 들어가 공사를 막고 있는 할매.

 

전문가 협의체 활동 시한인 40일이 지나면 전쟁은 다시 시작되게 돼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이번 전쟁은 지역 주민 또는 한전·정부가 이기거나 해서 끝이 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끝이 나더라도 이런 문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줄곧 이어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지금도 문제지만 앞날은 더욱 문제랍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이런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기준을 이번에 세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밀양에 송전탑이 왜 필요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밀양에 들어설 송전탑은 밀양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 짓는 원자력(=핵) 발전소인 신고리 3호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서울 같은 수도권으로 보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울산에 있는 신고리 3호기가 전기를 생산하지 않으면 된답니다. 또 서울 같은 수도권이 울산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소비하지 않아도 해결이 된답니다.

 

굴착기 앞에 들어가 앉아 공사를 막고 있는 할매들.

 

또 밀양 지역 주민이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피해(또는 희생)가 과연 합당한지 여부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밀양 지역 주민들이 쓰는 전기는 고작해야 농업용 또는 가정용이 전부입니다.

 

농업용은 수도권 공장·백화점·고층빌딩 등이 기록하는 전력량과는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가정용 또한 겨울철 전기장판이나 냉장고·전등 따위가 전부이지요.

 

쓰는 전기는 쥐꼬리만 하면서도 받는 고통은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형평의 원칙에 맞지 않고 수익자 부담 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결책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기는 ‘여기’서 쓰고, ‘거기’서 생산되는 전기는 ‘거기’서 쓰고, ‘저기’서 생산되는 전기는 ‘저기’서 쓰면 되는 것입니다. 전기의 생산지와 소비지를 일치시키는, 말하자면 ‘로컬’발전입니다.

 

2012년 8월 25일치 <한겨레>보도 내용.

2012년 8월 25일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서울은 전기 소비가 4만6903기가와트고 생산은 1384기가와트여서 자급률이 3%였습니다. 경기·인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 전체를 보면 소비는 16만5988기가와트고 생산은 9만4127기가와트로 56.7% 전기자급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의 생산 초과 소비 전력량 4만5000기가와트에 맞먹는 발전 시설을 포함해 수도권에 7만2000기가와트짜리 발전 시설을 갖추면 됩니다. 그러면 국토의 남동쪽 끄트머리 경상도에서 멀리 수도권까지 초고압 송전탑을 길게 줄을 세울 까닭이 없어집니다.

 

쓰는 전기는 조그마한데도 주어지는 고통은 엄청난~~~

 

더불어서, 쓰는 전기는 손톱보다 적은데도 짊어지는 괴로움은 태산보다 더 큰 고통의 불균형도 사라집니다. 원자력이든 수력이든 석탄·석유든, 아니면 햇빛·조력이든 그런 따위 방법은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걸맞은 발전 시설이 들어서게 합시다. 이렇게 되면 발전의 위험성과 중요성에 대한 서울 지역 신문·방송·통신의 보도도 늘어나고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과 인식 또한 높아집니다.

 

아울러 에너지 절약 운동이나 핵발전 반대 운동도 틀림없이 왕성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정의가 아니면 무엇이 정의일까요? 그러므로, 수도권에 있는 다른 사람이나 단체는 몰라도, 환경·생태·반핵단체들은 크든작든 이에 호응해야 양심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훤주

 

※ <기자협회보> 6월 26일치에 실린 글을 조금 가다듬고 더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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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보도에 문제를 제기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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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를 다룸에 있어서 언론인들은 '가장 먼저 이야기할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라 '팩트를 확인할 기회를 놓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확인해주는 것'이야말로 저널리스트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명승은 벤처스퀘어 대표가 <시사인>에 쓴 칼럼 중 한 구절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인용하는 것은 실제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라온 '미확인 정보'를 언론이 확대재생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6월 19일 경남 사천시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국어 수업시간에 "역사적으로 전라도는 배반의 땅"이라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편향적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발언이 이어지자 부모가 광주 출신인 한 여학생의 눈에 눈물이 맺혔으며, 수업이 끝난 뒤 학생들이 모여 울음을 터뜨린 여학생을 위로하며 이유를 묻자 "선생님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답이 나왔다고 신문은 전했다.



보도의 파장은 컸다. 많은 매체가 <경향신문>의 이 기사를 인용 또는 베껴쓰는 방식으로 다시 보도했다. '다음 아고라'와 '오늘의 유머', '루리웹' 등 수많은 커뮤니티 사이트는 물론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도 수없이 반복 유통됐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민주당 최민희·김현미 의원, 강운태 광주광역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 공인들도 이 기사를 리트윗(재배포)하며 교사를 비난했다. 이들 중 강운태 시장은 "교사로서 기본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사실을 확인하여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밝혔고, 최민희 의원은 "경남교육청에 정식으로 징계심의해야죠"라는 말을 남겼다.


이들은 <경향신문> 보도를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팩트 확인'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좀 이상하다. 맨 끝에 교사의 해명이 짤막하게 달려 있는데, "전라도의 인재를 등용하지말라고 한 것이 잘못됐다는 취지였지 전라도를 비하할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게 핵심이다. 교사가 지역감정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그런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교사가 어떤 '취지'와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전체 맥락을 파악한 후 보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날 수업 전체를 녹음한 파일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녹음파일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적어도 수업을 직접 들은 다수의 학생에게 교차확인을 해야 한다. 직접 들은 학생도 제각각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뜨렸다는 그 학생도 확인 대상에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보도 이후 해당 교사는 취지가 왜곡됐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울었다고 지목된 학생도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으며, 기자의 확인 전화를 받은 적도 없다고 밝혔다.


물론 아직도 완벽한 진실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녹음파일도 없고, 기자가 누굴 통해 취재했는지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인이나 단체를 일순간에 매장시켜버릴 수도 있는 이런 기사일수록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법의 원칙은 언론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나는 <경향신문>이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좋은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경남도민일보>가 이번 <경향신문>의 보도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의 입장을 기사화한 것은 자칫 확실하지 않은 팩트를 근거로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언론은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흉기'가 된다.


같은 언론사끼리 미디어 비평을 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반대로 우리가 비슷한 잘못을 할 경우,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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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욱 노키아 회장, 은퇴후 10년 뭘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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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이재욱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인터뷰 약속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혹시 늦을세라 빗길을 서둘러 달린 결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영학리 학동마을 저수지 윗자락에 위치한 그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1시 45분.


이재욱(1941년생) 회장은 이미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온 그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정자 봉림정(鳳林亭)과 농기계 창고 등을 보여주었다.


“아픈 다음부터 여기에 통나무집을 지어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통나무집을 저기 아래로 옮기고 본채를 새로 지었지요.”


그는 2000년 후두암 수술을 받았다. 그 때부터 이 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2002년 지금의 2층 집을 지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그 때 수술로 인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데다 오랜 시간 말을 하기 어렵다. 1시간 30분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흔두 살의 나이, 일선에서 은퇴한지 10년이 다 됐지만 여전히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그는 1986년부터 핀란드 최대의 다국적 기업 노키아의 한국 법인인 (주)노키아티엠씨(NOKIA tmc) 대표이사를 맡아 2004년 1월 은퇴하기까지 연간 3조 7000억 원이라는 매출과 종업원 1인당 매출 42억 원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사장과 회장으로 있던 18년간 (주)노키아티엠씨는 100배 성장을 이뤘다.


그는 10년 전 은퇴 축하연 자리에서 자신의 퇴임을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나지만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사회사업들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에는 높은 자리에 있다가 은퇴하면 여기 저기 놀러 다니거나 명품 구입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남을 돕는 게 결국은 나를 돕는 것이거든요.”


그의 농기계 창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명함에 박힌 여섯 가지 직함


그로부터 10년 후 받아본 그의 명함에는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사단법인 대한검도회 명예회장’, ‘치릴로장학회 이사장’, ‘재단법인 봉림 이사장’, ‘사단법인 경남동그라미회 이사장’, ‘사단법인 한국지속농업 이사장’, ‘사단법인 날개 이사장’이라는 여섯 개의 직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돈을 버는’ 직함이라기보다 ‘돈을 쓰기 위한’ 직함들이었다. 이런 법인이나 단체에서 어떤 일들을 해온 것일까?


본채 1층 접견실로 꾸며놓은 방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방에는 어릴 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진과 상패, 기념패, 감사패, 각종 훈장 등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훈장은 남색 양복 상의에 마치 유럽 왕실의 대례복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노태우·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은탑산업훈장과 금탑산업훈장, 핀란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사자훈장,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에서 받은 금장·은장훈장 등이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저 옷에 있는 건 그동안 받은 훈장이군요.

“1년에 한 번 중요한 행사에는 이렇게 입고 나가요. 훈장은 죽을 때 관 앞에 놓으라는 게 아니거든요. 살아있을 때의 명예니까요. 그 명예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입고 나가는 걸 말려요. 부끄럽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나라에서는 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라는 말도 해요.”(웃음)


-아까 보니 정자 현판이 ‘봉림정’이던데, 봉림이 회장님 아호죠?

“내 별명이죠.”


-왜 별호를 봉림으로 했나요?

“30년 전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창원에 왔을 때 내가 살던 데가 창원대 앞에 있는 롯데아파트였거든요. 근처에 조그만 밭을 하나 사서 일구어 왔는데, 도로가 없어서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었어요. 그 뒷산 이름이 봉림산이었어요. 그 산에 내가 정을 주었고, 그래서 산 이름을 딴 거죠.”


1986년 대한전선(현 대우전자)에서 마산자유무역지역에 있던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스카우트되어왔을 때 봉림산 아래 600평 정도의 밭을 샀고, 거기서 무 배추 시금치 상추 등 채소를 키웠다. 그는 어린 시절 경작할 논이나 밭이 없어 겪었던 서러움 때문에 특히나 논·밭에 대한 애정이 깊은 듯했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부모님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죠?

“네. 북청물장수로 유명한 그 북청. 일제 때 서울로 오셨죠.”


-‘북청물장수’라는 말은 어디서, 왜 나온 거죠?

“서울의 역사와 지리를 알아야 해요. 서울의 부자들은 중앙청 오른쪽 북천마을에 많이 살았어요. 청일전쟁 나기 전에도 우리나라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어요. 동학란이 났을 때도 나무가 거의 없었어요. 농민반란, 홍경래의 난이 났을 때도 그랬죠. 우리나라가 다들 못 먹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부자들이 사는 북천마을에 청계천이 있었지만 물이 더러웠어요. 거기서 빨래하고 다 하니까. 그래서 부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깨끗한 물이었어요. 이걸 함경도 북청에서 온 사람들이 알게 된 거예요. 북청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오로지 나무 땔감이나 물을 길어서 부잣집에 갖다 파는 일을 한 거죠.”


-그런데 당시 서울에 전국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텐데, 유독 함경도 북청 사람들만 물장사를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경상도나 전라도는 사돈에 팔촌이라도 서울에 있었죠. 그런데 함경도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까 물장사 나무장사라도 한 거죠.”


-그렇군요. 회장님 쓰신 책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에서 보니 1950년 전쟁 중 부산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1.4 후퇴 때 피란지 부산에서 돌아가셨죠. 제 나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죠. 어머니는 서른 살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어떤 회사를 다니시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워낙 어릴 때여서 정확히는 몰라요.”


-원래 고향인 북청에 계실 때 선대 할아버지는 농사를 하셨나요?

“농사를 지었죠. 거긴 모두 농사였어요. 우리 고향 할아버지·할머니 사시던 곳 앞에 개천이 흐르는데, 그걸 남대천이라고 해요. 한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이북에 세우려 한 데가 바로 거기예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준 열사, 그 분이 바로 그 남대천 너머 산 너머에 사셨어요. 이준 열사는 워낙 학문이 높으시고 벼슬도 하시고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셨죠. 그래서 저도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참여하고 있죠.”


‘북청물장수’의 타고난 성실성과 향학열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그런데 왜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하신 걸까요?

“인구는 많고 땅은 좁아서 농사만 해갖고는 살 수 없으니까, 젊은 사람들은 대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물장수도 하고…. 그래서인지 북청은 우리나라에서 향학열은 넘버 원이에요.”


-북청 사람들의 향학열이 특별히 높은 배경이 있을까요?

“옛날부터 그랬어요. 공부를 안 하면 살 방법이 없었어요. 함경남도 장학회가 있는데, 군 단위, 면 단위 장학회까지 있어요. 저도 대학 다닐 때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함경남도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았죠. 아무리 못사는 마을이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는 지원을 해주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마산에 와서 성공했잖아요. 돈도 명예도 모든 걸 여기서 얻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열심히 장학재단을 만들고 지원을 하는 거죠.”


-봉림재단은 언제 만들었나요?

“장학사업은 그 전부터 해왔지만, 봉림재단은 2003년 여름에 만들었죠.”


-저희 경남도민일보를 통해 지급되는 장학금 말고도 다른 경로로 지급되는 장학금이 많더군요.

“한 군데에 줘서 운영하게 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봐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장학금이 지원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경남신문을 통해서도 삼영장학회라고 하여 매년 얼마씩 기금을 조성했죠. 그러다가 나중에 경남도민일보를 통해서도 지원하게 된 거죠. 그 다음에 피폭력 여성을 위해서도 지원을 하고 있어요.”


-어떤 여성들인가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죠. 그런 피해 여성들을 위한 피난처가 있는데, 나라에서 도와주는 것은 6개월뿐이에요. 여섯 달 후에는 그 여성이 어딜 갈까요? 그래서 6개월 동안 독립하지 못한 여성을 더 머물 수 있게 해주고,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교육도 시켜주고, 또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성은 그 애들과 함께 머물도록 하면서 아이들 학교 교육도 시켜주고, 그런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와서 도와주고 있어요. 그리고 몸 파는 10대 여성들, 나라에서 붙잡아 오는데, 그 아이들을 소년원에 보내면 더 악화되겠죠? 그래서 그 아이들을 돌봐주는 단체가 있어요. 거기 있는 아이들 중·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 진학할 경우 교육비도 지원하고 있죠. 인원 제한 없이 누구든지 학교 진학하면 도와주고 있어요. 그 애들이 부모도 못 믿고 사회도 못 믿고, 우리 봉림재단만이라도 믿을 수 있게끔 하는 거죠.”


-그게 어디에 있는 단체인가요? 범숙의 집?

“네. 그곳이에요. 그리고 고아원도 많잖아요? 그런데 거기 있는 아이들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떠나야 해요. 그러면 그 애들이 어딜 가요? 어디 가서 먹고 살아요? 그런 아이들 중 대학 진학하는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하죠. 전액은 아니지만. 그렇게 지원받은 아이들 중 둘에 하나는 성공을 해요. 그리고 삼진(진전·진북·진동면) 지역 아이들도 면장에게 추천해달라 하여 매년 20명, 30명씩 지원을 해주고 있어요. 이쪽에 고등학교가 딱 한 군데 있는데, 그동안 좋은 대학을 들어간 적이 없어요. 7~8년 전부터 특수반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조건이 있다. 나는 객지 사람이다. 내가 낸 만큼 지역사람들에게도 거둬라.’ 이렇게 지역에서 호응이 안 되면 어느 순간 다 끊을 거예요. 북청군 출신이 피난 와서 만든 장학회만 스무 개가 넘어요.”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그의 작심 발언 “객지 사람도 하는데, 이 지역 사람은 왜?”


이 대목에서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사회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제가 인터뷰에 응한 것은 사실 불만이 있어서예요. 10년 동안 장학회를 운영해왔는데, 나는 경남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서 학교도 안 나왔어요. 이렇게 객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장학회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10분의 1이라도 따라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지 않아서 불만이에요. 안 따라오는 이유 중에 돈이 없다고도 하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봐요. 함경도 북청 사람들은 어딜 가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장학회부터 만들어요. 그리고 묘역을 조성하기 위한 땅을 사죠. 3000평이든 5000평이든 임야를 사서 산소를 마련하죠. 그런데 이 지역은 어떻게 된 게 객지 사람이 와서 이렇게 판을 치는데, 왜 이 지역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위한 행위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객지 사람들이 이러면 여기 사람들은 향토애 때문에라도 마을마다, 면 단위마다 장학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죠. 난 그걸 이상하다고 봐요.”


단단히 작심하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봉림재단 사무국을 통해 지난해까지 10년간 지원 금액을 알아봤다. 18억 3500만 원이었다. 이번 인터뷰를 마친 직후인 6월 20일에도 진전·진북·진동면 등 삼진지역과 구산면의 초·중·고·대학생 50명에게 34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처럼 올해 상반기에 지원했거나 하반기에 지원될 금액까지 합치면 20억 원이 넘을 것이다.


-직함에 보니 ‘치릴로장학회’도 있던데, 그건 뭔가요?

“치릴로라는 신부가 있는데, 신부가 돈을 만들 줄을 모르니까. 몇 년간 짚세기로 뭔가를 만들어 팔아도 보고 했는데, 여성의 집 아이들 가르치려고 신부님이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안 되니까 나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당신 이름으로 하든 뭐로 하든…. 그래서 치릴로 장학회가 되었죠.”


-어느 여성의 집을 말하는 겁니까?

“창원여성의 집.”


-사단법인 날개는 뭡니까?

“집창촌에는 안 들어갔지만, 부모는 싫고, 길거리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여자애들이 꽤 있어요. 나라에서 그 아이들을 잡아서 부모에게 보내면, 또 뛰쳐나오고…. 들어가면 두들겨 맞으니까. 이런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필요하다고 하여 경남도에서 어느 단체에 요청을 했어요. 그 단체에서 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죠. 여성의 집과 비슷한데, 타락하기 직전의 아이들이죠. 도에서 인건비는 나오고, 진해에다가 집을 얻어서 직원 채용해서 운영하고 있죠. 대학도 갈 수 있고, 필요하면 유학도 갈 수 있고, 지금 5명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더 늘어날 거예요.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한 아이는 무조건 공부만 해요. 얼마 전 고입 검정고시 거쳤고, 금년 안에 대입 검정고시도 칠거예요. 나라에서 하긴 어렵고, 이 지역에선 해줄 사람이 없고…. 요즘 뉴스를 보니 아이들 수당 나오는 걸 갈취하는 곳도 심지어 있더군요.”


-동그라미회도 이사장을 맡고 계시죠.

“동그라미회도 제가 은퇴 직전에 만든 건데, 은퇴를 2003년 말, 2004년 1월에 했으니까….”


-당시 기업은행 마산지점장과 함께?

“박종권 지점장이 있을 때 박 지점장과 몇 사람이 추진을 했어요. 환경운동하던 백운길 그 사람 하는 일을 제가 도와줘요. 그 사람 하는 단체가 너무 열악하고, 좋은 일 많이 하는데, 그 사람이 박종권 지점장과 같이 와서 하는 말이 좋은 일 하는데 참여해달라고 해요. 설명을 주~욱 하는데 너무 좋은 일이라 이건 개인이 하기엔 너무 크다. 노키아가 개입을 해야겠다. 노키아 사장 입장에서 참여하겠다고 하여 활성화시켰죠. 언청이 수술이 지금은 많이 없는데다, 지금은 그 수술도 나라에서 해주는데, 10년 전엔 그걸 동그라미회가 해준 거죠. 지금은 다른 것도 많이 해줘요. 주종을 바꿨어요. 불법체류자들 많잖아요. 그런 어려운 이들 도와주고…. 2-3년 안 하다가 다시 들어가서 기금을 튼튼하게 했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노키아의 쇠락, 그러나 서서히 올라갈 것


-1941년생이니까 올해 일흔둘이시죠? 여전히 너무나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네요. 

“재작년부터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책임 안 져요.(웃음) 약속을 해놓고 저녁에 돌아오면 후회해요. 힘도 없으면서, 내일 아침에 죽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제가 뭘 할 때 온몸을 다 바쳐서 하거든요. 그렇게 하다간 지금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 책 제목도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이잖아요. 온 육체와 두뇌를 다 동원해서 일으킨 회사거든요. 8시간 근무가 아니에요. 18년 동안 풀타임이었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되지.”


-그렇게 키워온 회사인데, 가슴 아프시겠지만, 공교롭게도 회장님 퇴임 후에 노키아가 쇠락하고 있잖아요.

“사람에게도 수명이 있죠. 유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죠. 나라도 초기, 중기, 말기가 있고, 민족도 흥망성쇠가 있잖아요.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예외도 있긴 있어요. 하지만 50년 역사로 봤을 때 아마 다섯 개도 안 될 거예요. 노키아로 따지면 역사가 약 150년 내지 200년 되요. 그동안 굴곡이 있었어요.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제가 들어올 때가 노키아로선 가장 나쁠 때였어요. 경영 결과가 나빠서 회장이 연초에 자살을 했어요. 출근해서…. 도저히 안 되니까….”


-그게 1986년?

“제가 와서 4~5년 뒤였으니, 아마 1990년 전후였죠. 당시 노키아의 주종은 전화기가 아니었고, 전선(와이어)과 텔레비전 모니터 이런 거였는데, 경영이 나빠져서 90년이 되었을 때 자살했고…. 제가 사장으로 있던 마산만 괜찮았어요. 세계 시장에서 전화기가 1%도 안 될 때 제가 왔거든요. 노키아가 다른 건 다 안 됐는데 마산에서 이것만 잘 되니까 다시 올라간 거예요. 그러니까 전화기가 노키아를 살린 충신이죠. 그 중심에 한국의 노키아가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하여 20년 동안 잘 했거든요. 이제 한 번 내려와야죠. 지금 내려가는 중이에요. 너무 급히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올 때도 급히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제 육감으로 봐서는 아마 문은 안 닫을 거예요. 다시 올라갈 거예요. 그러나 예전에 제가 있을 때처럼 그렇게 급히 올라가진 않아요. 이제는 완만하게….”


-그러면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 그 전에는 텔레비전 모니터, 전선 이런 거 하시다가 전화기 사업을 시작한 곳이 한국 노키아였던 건가요?

“제가 오기 2년 전에 핀란드에서 시작은 했죠.”


-그걸 한국 마산에서 성공을 시킨 거로군요.

“네. 핀란드 사람들은 손도 바이킹이에요. 여자 손도 그래요. 손이 크다는 말이죠. 잽싸지가 않아요.”


-섬세한 작업을 못하겠군요.

“그리고 우리나라 문화를 잘 몰랐어요. 아시겠지만 한국인은 얼마나 머리가 빨라요? 문제 생기면 퇴근도 하지 않고 달려들죠. 그러나 선진국은 문제가 쌓여 있어도 퇴근 시간 되면 그냥 집에 가죠. 지금은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그러면 노키아의 휴대폰 신화는 한국 마산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 노키아로 확산되어 간 거로군요.

“네. 그렇죠.”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1986년 대표이사·사장으로 왔다가, 99년 회장으로 승진하셨는데, 어쨌든 오너는 아니고 CEO였잖아요? 월급만 받나요? 아니면 배당을?

“월급.”


-월급 받아서 재산을 그렇게 많이 불릴 수 있나요?

“재산? 저 재산 많지 않은데요? 제가 외환위기 전까지는 경남에서 제일 많이 봉급을 받았으리라고 봐요.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저보다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리나라 기업이 어떻게 된 건지 적자를 그렇게 냈는데도 월급이 많아요. 시시한 회사 임원도 월급이 저보다 많더라고…. 그래서 그 때부터 월급 이야기를 안 해요.”


-이렇게 장학사업도 많이 하려면 재산이 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재산이 있긴 있죠. 그러나 생각보다 많지는 않고 여러 군데서 지원을 받죠. 제가 뿌려놓은 씨앗들이 있으니까.”


-지금도 회장님을 지원해주는 곳이 있나 보네요?

“그럼요. 노키아가 아니라 노키아에 근무했던 사람들.”


-1886년도에 대한전선에 계시던 중 노키아에서 회장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사장으로 스카우트하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에도 전자산업에서는 저를 많아 알았어요. 여기선 잘 몰라도 중앙에서는…. 대한전선에서 컬러텔레비전을 제가 제일 먼저 했어요. 샤프라는 일본 회사와 제휴해서 만들었죠. 우리나라에서 전자레인지도 처음으로 만들었고….”


-대한전선에서 최종 직급이 뭐였나요?

“공장장. 공장이 구미에 있었죠.”


-아, 거기서 공장장 겸 이사로 계시다가 노키아로 스카우트 되신 거군요.

“네.”


-대한전선이 지금 대우전자죠?

“대우전자의 일부가 되었죠.”


-대한전선 이전에 계셨던 대한광학은 어떤 회사였나요?

“카메라하고 쌍안경 만들고, 방위산업에서 쓰는 대포의 조준경 그런 걸 만드는 회사였죠. 제가 7년 있었는데, 저 나오고 7년 만에 문 닫았죠.”


-대한광학 7년, 대한전선 11년, 노키아에 사장으로 오실 때 나이가 마흔 다섯밖에 안 됐잖아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된 경우가 회장님 말고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은 많죠. 지금 전자산업에서는 쉰이 넘으면 은퇴, 퇴물 취급을 받거든요. 삼성의 사장들도 다들 50대 초반이에요. 젊은 사람은 경험과 기술이 모자라는 대신 젊음과 열정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이 열정을 가지면 안 되는 게 없거든요. 나쁜 일도 안 되는 게 없지만 좋은 일도 안 되는 게 없잖아요.”


노키아 회장 월급은 국영기업체의 1/3


-책을 보니 대한전선에 계시다가 노키아 사장으로 스카우트되실 때 대한전선에서 받던 월급의 3배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던데, 그 3배의 월급이 당시 돈으로 얼마였나요?

“연봉으로 약 9000만 원 정도. 그런데 환율이 1300원대에서 800~900원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30% 이상 깎인 셈이 되었죠.”(웃음)


-노키아 본사에서는 핀란드 말을 쓰나요?

“아뇨. 다국적 기업이기 때문에 핀란드 사람도 있고 미국 사람도 있고,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영어로 쓰죠.”


-기업 내 공식 언어는 영어로 쓰는군요. 그러면 회장님이 구사하는 외국어는 영어와?

“일본어도 하죠. 일본 기업들과도 상대해야 하니까. 대한광학 다닐 때부터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했죠.”


-2004년 1월에 은퇴를 하셨으니까 1986년부터 18년 세월을 노키아와 함께 하셨는데, 은퇴는 회장님이 결정하신 건가요?

“제가 2000년 말에 수술을 했어요. 그 때 사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운이 좋아 다시 살아났고, 그 때부터 일을 줄여왔죠. 그리고 본사에서도 대화가 안 되니까. 한국말도 이렇게 발음이 어려운데…. 제가 회의하는 상대는 한국 사람이 없어요. 전부 핀란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매년 3조원 매출을 올리니까 본사에서도 그만 두라는 말을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2004년 그만 둔 거예요.”


-사장으로 들어왔다가 나중에 회장으로 승진하셨는데, 회장 연봉은 얼마나 되었나요?

“음. 많지 않아요. 많지 않았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기업 임원들 연봉을 보고 창피해서…. 핀란드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발표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을 정도니까. 한 때 전산 문제가 발생하여 내부 컴퓨터에서 내 월급 명세서가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 직원들이 ‘어! 회장님 월급이 이것밖에 안 돼?’ 하고 놀랐던 적도 있었어요. 20분 만에 회수하긴 했는데 그 때문에 간부들은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 월급이 우리나라 기업 사장이 받아야 할 적정 월급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되었나요.

“국영기업체 사장의 3분의 1 정도였어요.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일도 안 하면서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은 문제가 있죠.”


-어머니가 59세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던데, 그러면 78년~79년 그 때쯤 되겠군요. 회장님이 대한전선에 계실 때였는데, 노키아 사장으로 오시는 걸 못보고 돌아가셨군요.

“그렇죠. 원래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잖아요. 자식들이 성공하는 걸 못보고 돌아가시게….”


-그것도 회장님께 한이 많이 되셨겠습니다.

“아니, 하느님이 시키신 건데 뭐.”



-어머니가 참 고생을 많이 하셨겠습니다.

“내가 사진을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어요.”(어머니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줬다.)


-이게 대학 졸업하실 때 사진인가요?

“네. 졸업 때…. 이건 내 돌, 그리고 초등학교 때.”


-남대문초등학교였죠.

“네. 부산 피난지에서 남대문초등학교. 그리고 이건 고등학교 때.”


-휘문고등학교?

“그렇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오셨는데, 요즘은 전자공학이라는 분야가 일반적이지만 1965년도에 전자공학이면 새롭고 생경한 분야가 아니었나요? 그럴 때 어떻게 전자공학과를 가려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 통신공학과를 전자공학과로 바꾼 후 인재를 모으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거기 가게 됐죠.”



-원래 꿈은 농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을 가려고 했었다면서요?

“하도 배가 고픈 시절이었으니까 농과대학에 가서 농업혁명을 일으키자고 생각했죠.”


-그 때 농과대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농사일을…?

“그것도 많은 관계가 있죠. 우리나라가 앞으로 살아갈 방법은 농업이라기보다는 농업이 기초가 된 좋은 환경, 좋은 물, 좋은 산, 들, 바다, 강 이런 모든 자연이 우리가 먹고 살 진짜 재산이라고 저는 봐요. 중국은 크지만 사람 살 만한 데가 별로 없어요. 걔들이 관광을 가서 가장 좋아할 곳이 어디냐? 대한민국 전체 어디에 데리고 가도 걔들은 다 좋아해요. 중국에는 이런 데가 없어요. 있다면 황산이라고 요만큼 있고, 태산이라고 요만큼 있는 것뿐이에요. 우리나라는 저 앞에 저수지 있어. 개울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있어. 이게 재산이에요. 그래서 우리 산업은 소프트웨어 쪽으로 가야 해요.”


-혼자되신 어머니 밑에서 대학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대학에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셨겠네요.

“서울대는 등록금이 싸요. 게다가 장학금을 받았으니까. 제가 가정교사로 과외를 하면서 벌었죠.”


-ROCT 학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것도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렇죠. 월급 받으면서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소위로 임관하셔서 일선 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신 건가요?

“아뇨. 제가 전자공학을 했으니까 특수병과였죠. 유도탄 등 병기를 다뤘죠.”


-장교로 군 생활하셨던 게 이후 사회생활이나 기업 운영에 도움이 되셨나요?

“아주 많이 되었죠.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이나 통솔력. 기술 계통이라 부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다 우수한 인력들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을 엉성하게 통솔하면 아무 것도 안 되죠. 잘 해주고 도움 받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대학동기가 사병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동기모임에선 친구지만 군대에선 졸병이 된 거죠. 그런데 역시 졸병은 졸병의 역할을 해요. 장교는 장교의 역할을 하고. 바보 같은 놈도 소위 계급장 달면 장교답게 말하고 행동을 해요. 참 이상해. 선생님들도 어디에 교육생으로 가서 학생 자리에 앉으면 그들도 다 꾸벅꾸벅 졸 거예요. ”(웃음)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데,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뜻인가요?

“무식하게 말하자면 그게 진리인 것 같아요. 아까도 하느님, 조물주 이야기를 했지만, 살고 죽는 걸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막아요? 그건 천명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죠.”


경영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그래도 열심히만 하는 것 외에 회장님 나름의 성공 비결은 없나요?

“독서는 기본이고, 많이 읽어야죠. 서울 공대에는 다들 머리 좋은 학생들이 들어오는데, 저는 머리가 좀 덜 좋은 편이었어요. 다른 학생들은 한 번 보면 다 외우는데, 나는 그게 안 되니까 그들이 한두 번 책을 볼 때 나는 열 번 스무 번 본다는 생각으로 했죠. 머리 좋은 그들이 당구도 치러 다니고 이것저것 다른 일을 할 때 나는 오직 한 가지 공부만 했던 거죠. 남들 하는 것 나도 다 하면서 그들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이재욱 회장은 2004년에 펴낸 자전적 에세이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신원)에서 경영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우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간에 경영자는 시대와 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시대에선 조금만 잘못하면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영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변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경영자는 신문 하나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생활한다.

윗사람이 항상 아랫사람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로만 하지 말고 자신부터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위에서부터 철저하게 학습하는 풍토가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선 기업의 사활을 결정짓는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책은 주로 어떤 걸 읽으셨나요?

“주로 역사와 지리.”


-지리책은 왜?

“지도를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북경은 모래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데 100년쯤 뒤에는 사막이 될 거예요. 역사와 함께 지리를 공부하면 알 수 있어요.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사하라 사막은 원래 정글이었죠. 거기서 나오는 유물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지리와 역사를 알면 미래 예측이 가능하다는 거죠?

“그럼요. 깊이 보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이런 나라는 인구가 500만이 안 되거든요? 800만 되는 나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200만밖에 안 되었겠죠. 그런데 다를 그 나라의 언어를 써요. 그 나라의 문자를 쓰고. 그 나라의 풍습, 음악을 계속 지켜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를 갖고 있고, 5000만, 아니 8000만 인구가 있는데, 왜 우리말 중에 외국말이 많아요? 나보다 영어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우리말 속에 영어를 너무 많이 섞어서 쓰죠. 쓰려면 제대로 정확히 쓰든지. 이상한 외국말이 왜 그렇게 많아요? 라디오 텔레비전에서도 다 그래요.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500만도 안 되는 나라는 다들 자기 나라말을 쓰고 있는데. 나는 그게 불만이에요. 핀란드 말에는 영어가 안 섞여 있는데…. 음악도 그렇죠. 지금 우리나라 음악이 뭐 있어요? 언어 음악 문화 모든 게 오염이 되어도 너무 되었어요.”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거죠?

“지켜야 한다기보다 멋있게 유지해야 하는 거죠. 아까 제가 노키아 사이클을 이야길 했지만, 역사를 보면 중국도 200년마다 흥망성쇠가 있었어요. 그래서 노키아에 있던 친구들이 ‘창피하다’고 하면 내가 이래요. 네가 회사 다닐 때 네 부서를 더 튼튼히 했으면 이러지 않을 것 아니냐, 어따 대고 지금 하는 사람 잘못한다고 하느냐. 때가 되어서 지금 이렇게 내려가고 다시 이제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마라.”


-예전에 노키아에서 함께 있는 분들이 그런다는 말이죠?

“네. 만나면 저한테 울면서 그래요. 그리고 우리 민요를 들으면 다들 한(恨)이 서려 있다고들 말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보거든요. 한보다는 신이 나는 게 우리 민요거든요. 밀양아리랑을 불러도 신이 나게 부를 수도 있고, 반대로 부를 수도 있어요. 여기에는 예술가의 책임도 커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자꾸 어둡게만 만들고 있어요.”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체조와 산책 두 시간 하고, 아홉 시에 밥 먹고 사무실 출근하죠. 봉림재단 사무실. 거기 두세 시간 책이나 신문 보다 머리 아프면 대우문화센터 갔다가 오후 네 시나 다섯 시 넘으면 체력이 떨어져서….”


-집 뒤에 있는 밭은 직접 경작을 하십니까?

“예. 머리 아플 때 흙 만지고 일하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져요. 밖에 있다가도 힘들면 빨리 이 골짜기로 들어와요.”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그는 천생(天生) 농사꾼이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지난 2008년에는 고성군 거류면 들판 13.3㏊(4만 평)의 논에서 농민들과 함께 ‘지장(地藏)농법’으로 직접 가꾼 벼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 논에서 수확한 ‘고아미’ 벼를 주원료로 사용해 미세가공(건식, 습식)과 급속 냉동, 냉장의 과정을 거쳐 만든 소면, 잔치국수, 냉면, 자장면 등 4가지 음식을 700여 명에게 맛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그 쌀로 10만 명분 쌀국수 14톤(7000만 원 상당)을 경남도내 118개 초등학교에 급식용으로 기증했다.


연간 2억 원 가까이 들여 하고 있는 장학 사업이나 위기 청소년 돌보기 사업도 ‘사람농사’의 일환이다. 그는 자신이 돌봐주고 있는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이 가장 밝아보였다.


그가 노키아에서 일으킨 ‘신바람 경영’ 신화도 따지고 보면 ‘사람농사’의 한 영역이었다. 그는 책에서 신바람 경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바람 경영이란 말의 핵심은 종업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 방식대로 뜻을 펴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으로 사원들의 아이디어와 뜻을 대부분 수정하지 않고 수용하고 내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변경하도록 지도하여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면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면 ‘내 생각은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해주는 것으로 그친다. 요약하면 ‘네가 하고자 하는 뜻대로 일을 처리해라. 그리고 너의 책임 아래서 일을 마무리하라.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다’ 하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즉 책임보다 권한을 더 많이 주어 일을 찾아서 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 박일호 경남도민일보 기자


애초 한 시간 반 정도로 예정했던 인터뷰는 두 시간 반을 훌쩍 넘겼다. 그래서인지 이재욱 회장은 연신 물을 마시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와 인터뷰는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신문사야말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아니 전부인 조직이다. 그런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서 나는 과연 제대로 ‘사람농사’를 해왔을까 하는 반성이 밀려왔다.


이재욱 회장은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그런 자원을 엮어 하나의 큰 역량으로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바로 믿음과 신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얻는 물질적 혹은 금전적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성취감이며 일에서 얻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래! 아무래도 나는 마음수련이 더 필요하다.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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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통제용 명예훼손 소송 당해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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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도지사의 기자 상대 손배 소송


요즘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와 관련, 비판적인 보도를 한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각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일이 경남도민일보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일컬어 승소가 목적이 아닌 비판보도를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 봉쇄소송'(SLAPP, 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 다시 말해 '언론 통제용 소송'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소송은 홍 지사가 처음은 아니다. 나 역시 지난 2003년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으로부터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당한 적 있다.


마산시가 조두남 기념관 건립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두남의 친일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기념관 내부 전시물 등을 결정하는 설계자문위원회의 명단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정보공개를 신청했다. 그러나 마산시가 이를 거부한데 대해 폐쇄적 행정을 지적하는 비판보도를 하자 악의적 비방보도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기자 김주완과 그의 후배기자 박근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던 것이다.


이 소송으로 나는 본래 업무 외에 법적 공방을 위한 반박문(준비서면)을 5~6차례나 작성해 법정에 제출해야 했고, 재판에 참여하느라 수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야 했다.


내가 황철곤 시장에게 당했던 손배 소송 결과


그로부터 1년 만에 법원은 황철곤 시장의 청구가 '이유없다'며 나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04년 4월 8일 창원지법 제3민사부(재판장 조원철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언론기관의 보도와 관련한 불법행위 책임을 판단함에 있어 표현 내용이 공적관계에 관한 것인가, 사적관계에 관한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며 “경남도민일보 기사의 전체적 취지나 인상·관련 인물과 사안의 공공성·사회성 등을 종합했을 때 시장과 시의 명예나 신뢰를 침해 또는 실추시켰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증거도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자신의 공직선거법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법정에 출두하고 있는 황철곤 전 마산시장. @경남도민일보

재판부은 “오히려 조두남 기념관 기념사업이 시의 주도로 시작됐고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은 점, 설계자문위원들을 시가 위촉한 점 등을 감안하면 설계자문위원들도 공인의 지위를 가진다”며 “(그들이) 공인이라면 그 이름이 자신이 의욕하는 바와 달리 어느 정도 알려지고 공개되는 것을 일반인도 예상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전체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들은 원고들을 비난하는 기사 외에도 조두남의 공과를 함께 기록한다거나 기념관의 용도를 바꾸자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도 게재하였고, 전체적으로 조두남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의혹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돼 여론을 형성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계·문학계·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조두남기념관이 마산음악관으로, 노산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각 명칭이 변경된 면 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봉쇄 소송 규제법 우리도 만들어야


이렇게 승소하긴 했지만, 1년 동안 그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오죽하면 내가 다시 황철곤 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1년 동안 든 비용과 정신적 피해보상을 청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실익이 없다'며 만류했고,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경남도민일보 진영원 기자가 쓴 기사를 보니 "미국에서는 이미 '반봉쇄소송법' 또는 '봉쇄소송 규제법'(Anti-SLAPP Law)을 만들어 이 소송의 악의성을 차단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3∼4년 전부터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크게 공감되는 주장이다. 특히 고위관료나 권력자들의 소송 남용은 반드시 규제해야 할 일이다. 기록 차원에서 2004년 당시 판결문을 첨부해둔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황철곤 시장은 2012년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고, 그의 부인도 직선거법 위반과 제3자뇌물요구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는 사실도 기록해둔다.


판결문('판단'부분 발췌)


이 사건과 같이 언론기관의 보도와 관련한 불법행위 책임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표현된 내용이 사적 관계에 관한 것인가, 공적 관계에 관한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는 바,


즉 당해 표현으로 인한 피해자가 공적인 존재인지, 사적인 존재인지, 그 표현이 공적인 관심사안에 관한 것인지, 순수한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에 관한 것인지, 그 표현이 객관적으로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 사회성을 갖춘 사안에 관한 것으로 여론형성이나 공개토론에 기여하는 것인지 아닌지 등을 따져보아 공적 존재에 대한 공적 관심사안과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 간에는 심사기준의 차이를 두어야 하며,


당해 표현이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보다 명예의 보호라는 인격권이 우선할 수 있으나,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그 평가를 달리하여야 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하며, 피해자가 당해 명예훼손적 표현의 위험을 자초한 것인지의 여부도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대법원 2002. 1. 22 선고 2000다37524,37531 판결 참조).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들이 경남도민일보 등에 원고들을 비난하는 취지의 기사 등을 게재하였으나, 과연 기사의 전체적 취지나 인상을 종합할 때 피고들의 기사 게재가 관련 인물과 사안의 공공성, 사회성에 비추어 위법하게 원고들의 명예나 신뢰를 침해 내지 실추시켰는지에 대하여 살피건대,


갑 제1호증의 1~6, 갑 제9호증의 1~6, 갑 제10~11호(각 가지번호 포함)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 사건 조두남 등에 대한 기념관 건립은 마산 개항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원고 시의 주도 아래 시작된 점, 이와 관련하여 원고 시는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은 점, 그 설계자문위원들도 원고 시가 위촉한 점, 설계자문위원들의 업무에는 기념관내 전시내용을 결정하는 것도 포함된 점, 원고 황철곤은 원고 시의 시장으로서 조두남 등 기념관 건설업무를 수행하였던 점, 당시 ‘말’지의 보도로 인하여 조두남의 친일행적이 문제되어 피고들이 조두남의 친일 의혹에 대한 기사를 작성, 게재하였고, 원고들도 이에 대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 확인 작업을 벌인 점,


피고들이 원고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작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피고 김주완의 정보공개청구에 대한 원고 시의 부분공개결정인 점, 그 후 조두남 기념관은 마산음악관으로, 노산문학관은 마산문학관으로 각 명칭이 변경된 점은 앞서 본 바와 같고,


갑 제1~7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갑 제9~15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을 제1~4호증(각 가지번호 포함), 을 제7호증,을 제9~13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의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들의 원고들을 비난하는 기사 외에도 조두남의 공과를 함께 기록한다거나 기념관의 용도를 바꾸자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도 게재하였고, 조두남 기념관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계, 문학계, 음악계, 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설립되어 다각적 논의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므로 조두남 기념관 건설은 공적인 문제라 할 수 있고,


원고 시의 시장인 원고 황철곤 뿐만 아니라 그 전시 내용을 결정하는 등의 업무를 위해 원고 시에 의하여 위촉되어 활동한 설계자문위원들도 공인의 지위를 가지며, 공인이라면 그 이름이 자신이 의욕하는 바와 달리 어느 정도 알려지고 공개되는 것을 일반인도 예상할 수 있고,


피고들의 기사내용이 원고들을 비난하는 내용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두남의 친일행적에 대한 의혹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킨 면을 부정할 수 없다 할 것이므로 피고들의 행동이 위법행위로 평가될 정도에 이르렀음을 전제로 하는 원고들의 주장은 나머지 점에 대하여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없이 이유없다.


우리의 승소 판결 후 '화이팅'을 외쳤다. 왼쪽부터 정봉화, 구주모, 김주완, 조재영, 권범철, 이승환.


원고들은 피고들이 원고 마산시의 정보 공개 부분공개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국무총리 훈령에서 정보공개의 예외사유를 제외하여 사실을 왜곡 보도하였고, 이것이 공익을 위한 것으로 보기도 어려워 피고들에게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므로 살피건대,


언론기관의 기사의 진실성을 판단함에 있어 적시된 사실의 중요부분이 전체적으로 진실과 합치되면 족하고, 세부에 있어서 다소의 윤색이나 과장이 있다고 하여 이를 허위라고 할 수 없다고 할 것인바,


갑 제1호증의 1~6, 갑 제9호증의 1~6, 갑 제10호증의 1~6,을 제1~2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을 제4호증의 1~3,을 제8호증의 1~8,을 제9~10호증(각 가지번호 포함)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들의 원고들의 정보공개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국무총리 훈령을 인용한 사실, 위 국무총리 훈령 제정의 취지는 행정정보 공개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 사실, 피고들의 보도로 인하여 각계 인사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설립되어 다각적 논의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할 것이어서


위와 같은 기사 게재의 동기 및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본 건은 친일 의혹을 가진 사람에 대한 기념관 건립을 막기 위해 공개적 논의와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이를 강조하려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하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므로,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본건 기사 내용이 허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어서 원고들의 이 부분 주장은 이유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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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 질문에 당황하는 엄용수 밀양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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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1시 보라교 입구에서는 잠시 거친 말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엄용수 밀양시장이 시청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격앙된 일부 주민은 "도장 찍어 주고(건립 승인 절차 인가해주고) 우리 이렇게 고생시킨 것도 모자라 사람까지 죽게 만들어 놓고 무슨 낯으로 이 곳을 찾아왔느냐"며 거친 발언을 내뱉었다.


엄 시장은 밀양시청 직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결국 고인에게 절을 하고 떠났다." ("결국 사람이 죽어야 언론에서 이제야 찾아온다" 2012년 1월 17일 고 이치우 노인 분신 자결 현장 기사)


위는 1년 7개월 전 경남도민일보 기사 중 일부다. 이 기사 뿐이다. 경남도민일보(http://www.idomin.com)에서 '송전탑'을 검색하면 2012년 1월 17일부터 지금까지 320여 건의 기사가 나온다. 그러나 이들 기사 중 엄용수 밀양시장 이름이 나오는 건 위의 기사 한 건 정도에 불과하다.


이것만 봐도 자신이 시장으로 있는 지역 주민들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에 그가 별달리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2013년 7월 25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 중인 엄용수 밀양시장.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그러던 그가 느닷없이 지난 주 경남도청까지 찾아와'기자회견'을 했다. 많은 공무원들을 양쪽에 도열시킨 채 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765㎸ 송전선로 사업은 불가항력이고, 대안도 없다"며 "이제는 밀양시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사업을 종결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해주민들은 생업으로 돌아가고 과장·왜곡된 정보로 갈등을 만드는 외부세력은 개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이런 기자회견에 기자들도 황당했나 보다. 한겨레 최상원, CBS 김효영 기자 등은 엄용수 시장을 쇼파에 앉으라고 한 후, 이번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 주민들과 대화해봤느냐, 법적 근거도 없고 능력도 없는 밀양시가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거냐며 따져묻는다.


엄용수 시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얼버무린다.



이 과정을 경남도민일보 권범철 기자가 영상으로 기록했다.


참고 : 엄용수 밀양시장 '송전탑 기자회견'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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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릴 권리와 잘못할 자유를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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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기자단을 위한

글 쓰고 사진 찍는 법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에서 경남도민일보 위탁을 받아 어린이 기자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NIE 신문활용교육이고요 ‘도랑 살리기’가 주제랍니다.

 

2005년부터 해마다 ‘우선지원대상사 선정’을 하고 있는(경남도민일보는 여태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선정됐음)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공모 사업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기자단을 운영하면서 몇 가지 지침을 세워봤습니다. 글쓰기와 사진 찍기와 취재노트 활용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잡아놓고 보니까 ‘원래 취지를 잊지 말고 그대로 실현하자’가 가장 중요한 줄기였습니다.

 

이를테면 글쓰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알아들을 수 없도록 어렵게 쓴다든지 하면 안 되고,

사진도 보도 기사를 받쳐주는 내용이면 그만인데 일부러 예술 사진 찍듯이 하면 안 되고,

취재노트는 나중에 기사 쓸 때 도움을 받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쓰는데,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애쓰다 보면 그렇게 하기가 아무래도 어렵다는 얘기쯤 되겠습니다.

 

이와 함께 중요한 줄기 가운데 또 하나는, 이렇게 해야 맞고 저렇게 하면 틀린다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꿰어맞춘 틀에서 벗어나기였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이 글쓰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나아가 공포를 느끼기까지 하는 바탕에는 잘 써야 한다, 틀리지 않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이는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자면 이런 강박을 풀어주는 것, 이런 옳고 그름 또는 맞고 틀림에 매이지 말고 ‘뜻만 통하면 된다’면서 마음껏 쓰게 해 주는 것이 오히려 어쩌면 제대로 된 글쓰기 그리가 나아가 기사쓰기의 시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 세상살이에 접어든지 스무 해도 되지 않은 애들인데, ‘틀릴 권리’와 ‘잘못할 자유’를 십분 보장해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욱 짙게 들어 이리 한 번 해 봤습니다.

 

 

처음 글쓰기 십계명

 

1. 기사를 잘 쓰려면 무엇보다 먼저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 얘기를 귀 기울여 듣도록 애씁니다.

 

2. 좋은 기사를 쓰려면 취재하고 보도하려는 사물을 제대로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주변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도록 노력합니다.

 

3. 자신감을 가집시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틀렸을 때는 고치면 됩니다. 틀릴까봐 두려워하면 영영 글을 못 씁니다. 틀려보지 않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틀리기는 쉽지만 고치기는 더 쉽습니다.

 

 

 

4.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 문장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주어와 술어를 하나씩만 씁니다. 그래야 전달하는 뜻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5. 그렇지만 처음부터 짧게 쓸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이 정리돼 있지 않으면 짧게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짧게 쓰려고 하면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6. 먼저 생각이 떠오르는대로 길든 짧든 씁니다. 꾸밈말도 달아봅니다. 그러고는 다시 읽어보면서 길다 싶으면 잘라주고 꾸밈말이 지나치거나 거치적거리면 지웁니다. 

 

7. 아는 만큼만 씁니다. 자기가 아는 범위를 넘어서 글을 쓰면 자기도 모르는 어려운 낱말을 쓰게 됩니다. 자기가 모르는 얘기는 기사를 읽는 독자도 당연히 알아보지 못합니다.

 

8. 친구나 식구한테 편하게 얘기하는 식으로 씁니다. 독자가 자기를 어떻게 여길는지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과 느낌과 반응을 솔직하게 씁니다.(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줄은 압니다만^^) 

 

9. 원인과 결과 사이 관계를 밝혀 씁니다. 단순 사실 나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도 함께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10. 사람은 논리보다는 감성에 따라 더 많이 움직입니다. 글쓰기도 논리로 머리를 움직이기보다는 감동으로 감성을 움직이는 쪽으로 방향을 맞춰야 마땅합니다. 앞으로 대세느 논술이 아니라 감술입니다.

 

 

취재 노트 활용법

 

취재하고 사진 찍고 기사까지 쓰고 나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1. 나중에 기사를 쓸 때 찾아보고 활용하려고 취재노트를 쓴다는 사실을 명심합니다.

 

 2. 나중에 알아보기 쉽도록 날짜 시간 장소를 먼저 적습니다.

 

3. 일어나는 시간 순서대로 적어나갑니다.

 

4. 글씨를 예쁘게 잘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됩니다.

 

5. 생각을 하면서 적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적힌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6.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밑줄을 치거나 겹쳐 쓰든지 해서 표시가 나도록 합니다.

 

7. 취재를 마칠 때는 취재노트에 적은 내용을 전체적으로 한 번 훑어보고 흐름을 파악합니다.

 

8.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빠지거나 놓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보충해 줍니다.

 

 

취재 사진 촬영법

 

1. 취재를 하면서 찍는 사진은 아름답거나 보기 좋지 않아도 됩니다.

 

2. 취재 사진은 해당 기사를 독자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니다.

 

3. 해당 기사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와 걸맞은 장면을 찾아내어 사진을 찍으면 좋습니다.

 

 

4. 이 사진에는 어떤 상황이 담겼으며 사진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으면 더욱 좋습니다.

 

5. 보통 취재 사진에는 두 개 정도 초점이 있는데 중요도에 따라서 주된 소재와 부속 소재로 구분해 사진에 담습니다.

 

6. 사진에 담기는 크기는 주된 소재가 작을 수도 있고 부속 소재가 작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정도는 주된 소재가 높도록 해야 합니다.

 

7. 그러면서도 상황 전체를 담는 사진은 여러 장을 꼭 찍어둬야 합니다.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8. 기사와 함께 쓸 사진 고르기는 나중에 하는 편이 낫습니다. 미리 골라둬도 기사의 방향이나 초점이 달라지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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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청소년에게 들려준 습지와 사람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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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경남장애청소년교육문화진흥센터의 부탁을 받아 장애청소년과 그들을 돕는 비장애청소년을 상대로 ‘습지와 사람’을 주제로 삼아 교육을 했습니다. 7월 27일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정도였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부탁을 받고 교안을 만들 때 완성된 문장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요점을 정리하는 식으로 해 봤습니다. 중요한 몇 가지만 아이들 기억에 남도록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초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습지랑 우리 사람의 생명 유지 또는 삶이 전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습지라는 것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둘레 곳곳에 널려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보통 사람들은 습지라 하면 경남 창녕 우포늪(소벌)이라든지 전남 순천 순천만이라든지 하는 크고 잘난 그래서 널리 알려진 습지만을 떠올리는데 실제 습지=물에 젖어서 축축한 땅은 집앞 도랑을 흘러가는 물줄기와 그 둘레에 만들어져 있는 수풀 따위까지도 일컫는 보통 개념이라는 얘기입니다.

소벌(우포늪)의 고운 속살.

 

크고 잘난 그래서 널리 알려진 습지만 습지라고 여기면, 그런 잘난 습지는 사람들이 보전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면서도 자기랑 가까운 데 있는 보통 습지는 업신여기고 보호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어가는 머리에서는 물과 물놀이, 쌀과 밥을 얘깃거리로 삼았습니다. 집에서는 수도꼭지를 틀거나 정수기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물이 사실 따지고 보면 도랑을 거치고 낙동강을 거쳐서 오는, 말하자면 습지를 지나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또 쌀이 자라는 데를 논이라고 하는데, 그 논이 사람이 오랜 세월을 들여 만들고 발전시켜온 인공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원래 따지고 보면 습지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들어서는 논 그 자체를 중요한 습지 가운데 하나로 꼽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습지가 없다면 물도 쌀도, 물놀이도 밥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 물, 마실 물 그리고 물놀이

 

우리가 마시고 놀이하는 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리고 어디로 갈까?

 

* 쌀과 밥 그리고 논

 

쌀은 어디에서 나올까? 밥은 어떻게 지을까?

논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을까? 논이 원래부터 논이었을까? 

 

* 습지는 물에 젖어 축축한 땅, 그것은 무엇일까?

 

습지는 별난 존재가 아니랍니다. 습지를 두고 별난 무엇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 인간은 습지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바로 근본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아버지 고향 시골 마을에 가면 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져 있을까?

배산임수(背山臨水)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있는 자리.

산이 있어야 물이 나옵니다.

소벌의 한 부분인 나무개벌. 고요하고 그윽합니다.

 

“생명의 땅이다.

 생명이 움트는 자궁이다.

 생태계의 보고다.

 생물다양성이 살아 있는 터전이다.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자연저수지다.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터전이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생태관광지다.

 습지는 우리 인간의 삶터다.”

 

이렇게 진행하면서, “”안에 있는 낱말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도 해줬습니다. 사람들이 습지를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그런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을 우리 청소년이 낱낱이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다만 우리 둘레에 있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물과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이 핵심으로 중요하다는 얘기랍니다.

 

다음으로는 경남에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습지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짚어봤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어쩌면 옛날에는 더욱더) 습지와 관련을 지어 사람들이 살아왔다는 것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알려주면 좋겠다 여겼습니다.

 

경남은 가야의 옛 땅, 가야의 배경은 넓디넓은 습지

 

* 창녕 부곡면 비봉리 습지 유적

 

비봉리에서 나온 8000년 전 통나무배(쪽배).

 

나온 것들 :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소나무 쪽배, 사람 똥 화석(糞石), 망태기,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개더미, 도토리와 가래·솔방울·조, 목탄, 나무칼, 돌화살촉, 그물추, 재첩·굴·고막(짠물과 민물이 섞이는 지대에서 나는 먹을거리) 껍데기, 잉어(민물고기) 이빨, 사슴·멧돼지·개(산에서 잡을 수 있는 짐승들), 상어(바다에서 나는 고기) 척추, 가오리(바다에서 나는 고기) 꼬리뼈, 도토리 저장 구덩이(떫은 맛(타닌 성분)을 빼기 위해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만든 구멍), 갈돌·갈판(도토리·가래·조 같은 먹을거리를 가는 기구).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얻는 방법 :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 아직 농경은 하지 않았습니다.

 

습지 :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지역.

 

높은 생산성 : 갯벌에는 조개가 많았고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기수역이기까지 하다면 플랑크톤 같은 먹이를 찾아오는 물고기나 새들도 풍부했습니다. 게다가 뒤쪽 산에서는 풀과 나무 열매를 따기 쉬웠고 산짐승도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손쉽게 옮겨다닐 수 있는 조건 : 뭍에 있는 산길보다 물길이 옛날에는 안전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른 데로 가려고 산을 넘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배로는 다른 데와 교류도 하고 바다가 조용할 때는 나름대로 멀리까지 나가 바닷고기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위험과 맞닥뜨리지 않는 안전함 : 낙동강 같은 큰 강 옆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큰 강을 이뤄 흘러가는 물줄기의 에너지가 아주 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 강을 벗어나 그리로 이어지는 작은 물줄기가 있는 데는 물줄기가 적은데다 흐름도 세지 않아 안전합니다.

 

사람들이 습지를 벗어나 언덕배기에 살기 시작한 때는 농경사회에 들어선 다음이랍니다.

 

* 밀양 금천리 논 유적

 

밀양 금천리는 아닙니다만. ^^

3000년 전에 만들어진 보와 봇도랑, 무논(수답=水畓) 같은 농경 유적 + 돌로 둘러싸고 불을 땐 터와 마을 집터가 밀양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 있는 밀양 산외면 금천리에서 발견됐습니다.

 

마을 집터와 생활유적은 자연제방 높은 자리에 있었고 바로 밑에는 밭 터가 나왔으며 이어서 논 터가 나왔습니다. 배후습지는 논 터보다 뒤쪽에 있었는데, 보와 봇도랑은 배후습지와 논을 이어서 논에 물을 대거나 빼는 데 쓰였습니다.

 

*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

 

인간은 습지에 모여 살면서 거기 생물들을 먹을거리로 삼고 물길을 교통로로 사용해 왔습니다. 창원 동읍 다호리 고분군이 그런 습지 유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양쪽에 펼쳐져 있는 밭들이 그것입니다.

 

주남돌다리.

 

나온 것들

무덤과 널, 청동기·철기·목기, 붓과 노끈, 지우개칼, 오수전, 판상철부(납작도끼)

 

붓과 지우개칼 : 문자를 썼다는 증거입니다.

 

오수전 : 중국 한나라 때 쓰던 동전으로 전한과 후한 사이 잠깐 있었던 신나라의 왕망도 이 동전을 만들어 썼습니다. 만든 시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연대를 짐작하는 데 쓸모가 있습니다. 2100년 전에 이미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판상철부 : 실제 도끼 구실도 했지만 철정(鐵鋌=덩이쇠)과 마찬가지로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 가공 소재이기도 하고 화폐 구실도 함께 했습니다. 낙동강 일대에서 가장 일찍 철기 문화를 이룬 집단이 여기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습지의 높은 생산성과 편리한 교통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 김해 가락국

 

김해 가락국을 대표하는 유적은 봉황대와 관동리에 있습니다. 봉황대에서는 옛날 물 위에 지었던 고상(高床)가옥과 항구를 지키는 목책(木柵=나무 울타리) 그리고 조개더미 등등이 나왔습니다. 조개더미에서는 중국 동전과 청동으로 만든 칼, 불에 탄 쌀 따위가 나왔습니다.

 

복원해 놓은 김해 봉황대 유적. 오른편으로 고상가옥이 보입니다

 

또 관동리는 배를 대는 데로 짐작되는 뜬다리, 우물, 도로까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해평야의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삼아 가락국이 세워졌다고 하면 틀립니다. 지금은 평야지만 2000년 전 가야 시대에는 바다였습니다. 봉황대 유적 바로 옆에 하천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해반천(海畔川=바다를 끼고 있는 시내)인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봉황대 가까운 데 있는 조개무지 유적.

 

김해 일대는 갯벌이 발달해 있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오목한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김해시내 봉황대와 장유면 관동리 일대가 가락국의 항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가 깊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적은 곳이 좋은 항구입니다만, 이는 스크루를 돌려 추진력을 얻는 배가 고안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만 해당됩니다.

 

그 이전 오랫동안은 가장 좋은 항구의 조건은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야 했습니다. 밀물 때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뭍에다 배를 얹어 두고 짐을 내리고 물과 식량을 실은 다음 다시 밀물이 되면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창녕 출신인 성기각 시인이 발표한 시를 한 편 적어놓았습니다. 습지랑 더불어 살면서 사람들이 물과 양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습지에서 놀이를 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문학 활동도 이뤄진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시에 나오는 대지국민학교는 성기각 시인이 어릴 때 다닌 학교입니다. 시 제목이기도 한 토평천은 창녕 열왕산에서 발원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입니다. 이 토평천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다가 대지면 너른 들판을 만나면서 펑퍼짐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습지가 바로 우포늪(소벌)입니다.

 

토평천 창산다리 아래에 피어난 노랑어리연꽃들.

             토 평 천

 

   화왕산 정기 받아 넓은 들 안고

   굽이쳐 흘러가는 맑은 토평천

   토끼풀 가는 모가지에 꽃을 맺는 냇가에 서면

   대지국민학교 나갈 종소리 낭랑하게 퍼져오고

   여름 내내 우리는

   선생님 몰래 멱을 감았다

   돌틈 사이로 매기 잡는

   병우가 냇물 깊은 곳으로 자맥질하면

   꼭순이는

   검정고무신 넘치도록 피라미를 잡았다

   말매미 울어쌌는 버드나무

   마파람은 여지없이 거미줄에 걸리고

   수박서리 하러 갔던 홍경이가 멱살 잡혀 돌아오면

   오후 수업 시작종은 사분의삼박자로 이어졌다

   종소리에 놀라 우리는 제각기

   물에 젖은 깜장빤쓰를 입고

   발목 붙잡는 고등빼기 농로를 지나

   물새궁둥이를 흔들며 교실로 달려갔다.

 

여름철 물가 아이들의 일상을 꼼지락꼼지락 보여줍니다. 까만 반바지를 서둘러 껴입고서 물이 찔꺽거리는 고무신을 신은 채 엉덩이를 삐뚤거리며 뛰어들어가는 뒷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아마 수업 시간에 늦었다고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듣고 엉덩이나 뺨따귀 한 차례씩 얻어터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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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남 원장은 숲 생태 교육을 왜 못 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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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남 현당평생교육원 원장은 2004년 사회복지법인 현당복지재단을 설립한 이래 지금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현당평생교육원은 숲 생태교육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재단에서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사실 정 원장은 숲속자람터어린이집 원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답니다. 2005년 문을 연 장애 전문 어린이집인데 처음부터 생태교육을 해 왔습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안계마을 가장 위쪽,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이 끝나는 산자락에 있습니다.

 

장애-비장애 다함께 자연에서 놀고 논밭에서 일하는

 

논에서는 모내기도 하고 피도 뽑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우고 가을걷이까지 함으로써 밥이 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체험하게 합니다. 밭에서는 감자·고구마·상추·배추 갖은 채소를 심고 김도 매고 벌레도 잡고 물도 줍니다.

 

미나리꽝에서 개구리알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러 한 주일에 두 차례 하는 요리수업 재료로도 쓰고 간식도 하며 김장까지 몸소 한답니다. 대추·매실·보리수·앵두·자두도 따고 개구리·송사리도 잡고 잠자리·방아깨비 같은 곤충과 며느리밑씻개·고마리·여뀌 같은 여러 야생초도 교재로 삼습니다.

 

또 심심찮게 마주치는 두꺼비·다람쥐·꿩들과도 숲 속에서 함께 놉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있으면 그것을 그네 삼아 타고 놀며 알맞게 비탈져 있는 데 제대로 깔려 있는 잔디는 그대로 미끄럼틀이 됩니다. 자연 생태 속에서 놀이와 학습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생태교육이랍니다.

 

숲 교육 숲 유치원 숲 프로그램 등 요즘 뜨고 있는 이른바 ‘트렌드’입니다. 상처받은 아이들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을 만들어내니까, 그런 아이들에게 쫓기는 경쟁 교육이 아니라 생태적인 감수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생태교육은 장애 아이뿐 아니라 비장애 아이에게도 좋고 필요한 것이어서 그 부모도 많이 좋아합니다. 법령은 장애 전문 어린이집도 정원 40%까지 비장애 어린이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다른 장애 전문 어린이집은 비율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법령 규정대로 비장애 어린이 40%를 채우고 통합 교육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생태교육 아니라도 장애-비장애 어린이가 함께하는 통합교육은 소통·인정·배려·이해·협동을 키운다는 면에서도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교육 효과까지 내고 있습니다.

 

어린이집은 베이스캠프, 평생교육원은 전진기지

 

정 원장은 여기 어린이집 원장으로 5년 일하다가 현당평생교육원 원장으로 2010년 자리를 옮겼습니다.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이 기본 바탕으로 베이스캠프에 해당된다면 현당평생교육원은 숲 교육 생태교육을 사회 전반에 확산하고자 하는 전진기지라 할 수 있습니다.

 

“5년 운영하면서 어린이집을 안정시켜놓고 다시 외부 지원 전혀 없이 개척 정신으로 투신했어요. 평생교육원은 주로 숲 교육을 나이 관계없이 하고 있습니다. 어른 대상으로는 교사 직무 연수와 자격증 취득 과정이 있는데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산호동 교육장에서 합니다.

 

생태교육사·생태심리치유사·요리재활상담사·발달진단평가가·특수아동교육사, 그리고 미술·음악·독서치료사 등등 프로그램이 있지요. 아이들 상대로는 생태교육과 심리 치유가 있습니다.

 

가장 주력 분야는 심리 치유와 숲 생태 교육을 합한 생태심리치유입니다. ‘숲 심리 치유 프로그램’입니다. 숲 자체가 아이 어른 구분 없이 편안함을 줍니다. 놀이·운동·원예 이런 것들이 숲 안에서 종합적으로 이뤄지는 치유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10년 경남교육청 특별교육 위탁기관으로 선정된 현당평생교육원은 이듬해 ‘숲 유치원’과 ‘숲 학교’ 프로그램 기관으로 환경부 인증을 받았고 녹색창원 21로부터도 ‘찾아가는 생태교육’ 기관으로 뽑혔습니다. 올해는 산림청 녹색사업단 지원으로 학교 부적응 어린이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 ‘녹색교육, 녹색마음’을 하며 경남도 지원도 받아 ‘공격성 아동 심리지원 생태체험 프로그램’도 합니다.

 

“영남권에서 민간 기관으로서는 최초로 환경부 인증을 받았고 창원시에서는 지금도 우리밖에 없습니다. 올해는 숲 녹색 심리 치유 프로그램도 인증 신청을 할 예정입니다.

 

장애 어린이, 부적응 학생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한꺼번에 많이 할 수 없고 전문가가 필요한 부분이 많아 ‘일반’ 숲 활동보다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환경부 인증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지 못했는데 많이 설득을 해 놓은 바가 있기에 이번에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향 마산이 정 원장에게 베풀어준 것들

 

정 원장이 이렇게 생태교육, 그리고 장애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얘기를 들어보니 어린 시절 기억과 추억이 그이를 이리로 밀고 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전공이 치료교육이었고 좋은 성과도 냈지만 그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늘자 지금은 '숲 교육', '숲 심리치유'라는 새로운 분야에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정 원장 어린 시절처럼 어린이집이 있는 골짜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이라는 장애 전문 어린이집을 만들면서도 마산을 고집했어요. 길러준 부모가 비천하다고 부모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 제가 마산 본토박이예요. 양덕동, 수출 후문 앞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 개천에서 멱 감고 고기 잡고 앞바다에서 놀았습니다. 산에 있는 아카시나무 꿀을 따서 선생님께 드렸던 기억, 봉덕초등학교 뒷산에서 놀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애향심이 너무 커서 창원으로 가지 못하고 끝까지 마산을 놓지 못했습니다.”

 

1957년생인 정 원장은 대학을 나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지금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 가정 선생님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런 시절 고향 마산이 베풀었던 것에 대한 상실감이 여기에 깔려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될수록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상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정서장애아 전공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대구에서 대학원 다닐 때 임상실험을 했는데 마산·창원·통영에서 치료받으러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어요. 창원이나 마산 같은 경남에 이런 아이들을 위한 치료기관이 없었던 탓이지요. 지역 아이들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991년 창원 양곡에 ‘자람터’를 열었습니다. 양곡이 마산·창원·진해 어디서나 쉽게 올 수 있는 위치거든요.”

 

장애 전담 어린이집을 위한 오랜 노력

 

‘자람터’라는 특수아동교육장과 아동상담실을 했는데 당시는 국가 지원이 없어서(지금은 치료 비용 지원을 국가가 잘해 주고 있는 편입니다) 부모도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부모들이 자부담으로 장애 자녀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96년 장애 전담 어린이집이 무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창워보다 규모도 작은 경북 구미에 두 군데나 있다는 것이었어요. 여태 자부담으로 치료를 받아 온 장애 어린이와 그 부모들에게 커다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남도청 문을 두드렸더니 담당 공무원도 몰랐습니다. 돈이 없어 못한다는 말로 거절했습니다. 어린이집을 지으면 기초자치단체도 일정 부분 지원을 해야 하는데 마산은 돈이 없어 못하고 창원은 아예 안할 것이라고 공무원이 말했어요.”

 

장 원장은 경남도와 마산시에 매달렸습니다. 비판도 하고 공격도 하고 설득도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돈이 많은 편인 창원시가 나을 것이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장 원장에게는 고향 마산만 보였답니다. 마산시는 예산이 부담스러워 법인 설립 허가를 쉽사리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일을 낱낱이 다하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마산에 반드시 세우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 때문에 김해시에 시립으로 장애 전담 어린이집이 경남 최초로 생겼는데 거기 원장으로 오라는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1999년 김해시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인당어린이집으로 문을 열어 인제대학교가 운영을 위탁받은 상태였지요.

 

우여곡절 끝에 2004년 사회복지법인 현당복지재단이 설립됐고 건축비 2억4000만원 지원이 나왔습니다. 자람터를 운영하고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사들인 양지바른 산 속 땅 1000평을 법인에 출연한 상태였습니다.”

 

지금 법인 사무국과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이 있는 내서읍 안계마을 산기슭 끝자락이 거기입니다. 예산 지원을 받아놓고도 문제는 이어졌습니다. 건물을 지을 업체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2004년 12월 31일까지 건물을 짓는 계약서가 마산시에 들어가야 하는데, 해를 넘기면 예산을 도로 내놓아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업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100평만 해도 되는 건평 규모를 좀더 잘해 보려고 150평으로 늘렸는데다, 길이 좁고 평지가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서 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돌아가는 판이었습니다. 결국 12월 30일 2억4000만원보다 7000만원 많은 3억1000만원에 하기로 하고 단서 조항으로 개인 아파트라도 처분해 반드시 지불하겠다고 적어넣고서야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분이 고맙습니다.”

 

지금도 노후대책은 ‘시립 요양원 같은 데’

 

정 원장은 자기 아파트를 처분하려고 했답니다. 그런 뒤에는 어린이집에다 일정 공간을 개조해 몸을 누일 공간을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언니가 ‘여자 혼자 어떻게 산 속에서 밤을 지새느냐’며 4000만원을 후원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법인 이사장과 어린이집 원장을 겸임했습니다. 이사장은 어려울 때 운영비를 조달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사장은 무보수고, 원장은 월급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는 지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주위서는 노후 대책도 없이 모은 돈을 기부해 가면서 굳이 할 필요 있느냐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가진 돈을 누군가에게 필요한 곳에 쓰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나요? 시립 요양원 같은 데가 노후대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신 기부를 상당히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식들한테 봉사랑 기부를 보여줘야만 나중에 부모들한테 기대지 않는다, 그게 훌륭한 교육이라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고 만약 자식이 있었어도 물려줄 재산이 없게됐네요.”

 

보통 생각하는 그런 이사장, 그런 원장이 아니었습니다. 조그만 아파트에 살면서 나머지 재산은 자기가 설립한 재단에 내놓았습니다. 재단을 대대손손 물려나갈 자식이나 가족도 없습니다. 이사장으로서 운영에 책임을 지고, 원장으로서 주어진 급여를 받아갈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이에게는 무엇이 보람일까요?

 

“우리 경남에 장애어린이집이 하나도 없었기에 특수교육 전공자로서 스스로 책임을 느끼게 됐습니다. 숲 교육도 활발해져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없는 길을 만든다는, 선구자적인 개척자적인 역할입니다. 남이 안 하는 일을 한다는 데 대한 만족도가 높습니다.

 

물론 가끔씩 월급이 생각될 때면 비참합니다. 80년대 여고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과 견주면 월급이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일하는 강도와 시간에 견주면 보수는 너무 약합니다. 연봉 2500만원 정도? 대신 일하는 즐거움으로 채웁니다.”

 

자연을 거대하고 위대한 학교로 삼아나가는 즐거움

 

숲 속에서 멈춰 서서는 눈을 감고 오감을 열어보는 아이들.

 

그이가 누리는 즐거움이랄까 보람은 이렇습니다. 처음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이 땅을 골랐을 때 열에 아홉은 좋지 않다 했지만 지금은 한 사람만 거리가 멀다 하고 아홉 사람이 어떻게 이런 좋은 땅을 골랐느냐 한답니다. 10년 전 높은 안목이 지금 드러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는 지엽말단입니다.

 

“자연캠프에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합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참가비를 받고 참가시킵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고 불만 많고 자존감이 낮습니다. 책임감이나 감사함을 좀 가지라고 하는 일입니다.

 

학교 부적응 아이였다가 와서 보고 특수교육을 전공해 교사로 나간 아이, 장애아 재활 치료 기구를 만드는 아이, 교사로 나간 아이, 공부가 제일 쉽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아이, 우리 부모도 나 키울 때 이렇게 힘들었을까 생각할 수 있게 된 아이 등등….

 

장애 어린이를 돌보러 왔다가 더 큰 이득을 안고 돌아갑니다. 숲속자람터어린이집을 나와서 다른 유치원 가지 않고 곧바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올해 처음 6학년이 됐어요. 내년에 졸업을 합니다. 특별한 교육을 받았고 특별한 친구를 두고 있는 ‘자람터’ 출신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런 자부심을 좀더 높여 주려고 내년 2월에 이 아이들 장학금을 주러 갑니다.

 

어린이집 아이들도 사회봉사활동을 나갑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구세군 자선냄비 공연은 해마다 합니다. 추운 겨울 그 쓸쓸한 풍경이 너무 하다 싶기도 한데, 준비한 공연도 하고 저금통에 모았던 돈도 기부합니다. 그냥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확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보람이고 즐거움인 것 같았습니다. 정 원장은 자연 그 자체를 자기가 앞장서 커다란 배움터·놀이터로 삼아나가는 데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지겨울 정도로 원 없이 놀아서 이제는 공부 좀 해보자’ 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찮게 여겨지지만 놀기가 전혀 헛된 일이 아닙니다. 인성도 좋아지고 관찰력도 높아지고 체력도 좋아집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시간을 경영할 줄도 알게 됩니다.

 

개미 거미, 별꽃 개별꽃 구분하고 새 울음에서 까치 참새 소리 구분할 줄 안다면 교실에서 하는 ‘아’ ‘어’ 구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0점무당벌레와 12점 무당벌레 등딱지에 점이 몇 개 있는지 헤아리는 공부에 견주면 교실에서 종이에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하는 수업은 죽은 교육입니다.

 

이렇게 놀아도 아이들은 방종을 모릅니다. 오히려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지 못하면 산만하고 흐트러집니다. 우리 아이들이 집중을 잘 합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자람터를 비롯해 여섯 군데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동화 구연을 해주시는 할머니가 그러십니다.”

 

“소작농의 비애는 이제 그만 느끼고 싶다”

 

 

전통 방식으로 보내기를 하는 아이들.

 

생태교육을 하면서 어려움이 없느냐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제 소작농의 비애를 그만 느끼고 싶다”는 답을 돌려줬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더니 정 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들 농사 체험을 남의 땅을 빌려 하고 있습니다. 먹을거리 중요합니다. 강조하는 까닭이 인스턴트식품이 아이들 성격하고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고요, 식량 자급도가 20% 수준인데 식량이 문제가 되면 8명은 굶어 죽어야 합니다.

 

논 30평, 밭 150평 작은 농사인데, 여러 이유로 해마다 비껴달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새로 묵은 땅 개간해야 하는데, 고달프지요. 한 평에 50만 원 정도 하는데, 둘레에 직영 농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고 했더니 인간의 한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생태교육에 나선 계기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심리치유사와 상담사로서 살아왔어요. 개별 교육도 하고 조기 치료 교육도 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인간을 바꿀 수 있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자연에다 맡기자, 거대한 자연이 치유자가 되고 교사가 되고 학교가 되도록 하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꾸고 치유한다는 것은 신이 만든 아이를 인간이 바꾼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교만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학교 부적응 학생을 위한 '숲학교'도 설립하고 싶습니다. 동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대안학교는 박비가 비싸 집안 형편이 되는 아이들만입학할 수 있는 거의 귀족학교입니다.

 

소외계층 아이는 입학하기 어렵고 더구나 예방 차원이 아니라 격리 차원이 많습니다. 문제 행동이 조금씩 드러나는 초기 사춘기(초등학교 시절) 학교 부적응 아이를 위한 대안하교는 전혀 없어 이를 위한 프로그램이 절실하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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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짜기에도 공정여행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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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던 함양 용추 골짜기

 

11년 전인 2002년 5월 함양 용추계곡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여름을 앞두고 하루 정도 시원하게 지낼 데를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라 사람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났습니다. 바로 위에 있는 절간 용추사에 올라가 물었더니 한 해 전 여름철에 여기 온 사람들이 고기 구워 먹은 냄새가 골짜기 구석구석에 배여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놀라웠습니다.

 

7월 20일 창녕 옥천계곡에 다녀왔습니다. 일요일인 때문인지 오전 10시 즈음에 닿았는데도 곳곳에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싸온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고기 굽는 냄새가 11년 전 용추계곡만큼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밥이나 반찬이나 술이 담겼던 그릇들을 계곡에서 씻는 이들은 보였습니다. 11년 전 용추계곡에서도 이런 일은 마찬가지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2. 더없이 한산한 지역 주민이 하는 천막가게

 

반면 골짜기 여기저기 자리잡은 밥집은 무척 한산했답니다. 크고 번듯하게 잘 차린 밥집은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것 같았지만 동네 주민이 하는 것 같은 포장마차 수준 가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행 가운데 여기 조그만 천막가게에서 국수를 주문해 먹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는 국수 먹는 30분 동안 자기 말고 한 사람이 더 가게를 찾았는데 그조차 마실거리만 딱 일곱 깡통 사갔다고 했습니다. 들어올 때 먹을거리 마실거리 바리바리 싸 들고 오지 않는 이가 그렇게 드물었습니다.

 

낮 두 시 넘고 세 시 넘고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자리를 떴습니다. 골짜기를 벗어나는 이들의 두 손에는 천막과 깔개와 걸상·탁자 따위, 그리고 고기·밥·반찬 담은 통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3.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땀 범벅으로 돌아가고

 

골짜기가 시원은 하지만 살짝만 벗어나도 열기가 훅 끼쳐오는 날씨였는데 그이들 들고 가는 무거운 품이 벌써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골짜기 들어올 때도 더위에 찌들어 있었는데, 나갈 때도 적지 않은 짐 때문에 마찬가지로 땀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4. 군내버스 타고 골짜기 찾았던 기억

 

가만 생각해 봤습니다. 2011년 ‘시내버스 타고 우리 지역 열 배 즐기기’ 기획을 연재하면서 여기 옥천계곡을 찾은 때가 8월 3일이었습니다.

 

아침 9시 40분에 창녕읍내 터미널을 출발해 10시 10분 옥천골짜기에 닿는 버스를 탔었습니다. 몸에는 물병 하나랑 떡가래 두 조각 그리고 신문이랑 카메라랑 수건이 하나 들어 있는 배낭만 지녔었습니다.

 

 

골짜기 위에 있는 관룡사 절간을 둘러보고 중턱에 있는 용선대 석가모니석불까지 갔었습니다. 그렇게 땀에 범벅이 돼서 내려와서는 바로 옆 망한 절터 옥천사지까지 둘러보면서 솔바람을 쐬고 계곡물에 들어가 탁족을 하는 즐거움까지 누렸더랬습니다.

 

그러고는 돌아나오는 길가 가게에 들어가 동동주 한 통과 묵무침 하나와 국수 한 그릇을 주문해 먹었습니다. 이렇게 홀가분하게 놀다 쉬다 먹다 하는 동안에도 자가용 자동차들은 줄곧 밀려들었습니다. 곳곳에 만들어져 있는 주차장은 물론 관룡사까지 이어지는 도로까지 ‘만차’가 돼 있었습니다.

 

5. 자가용에 먹을거리 잔뜩 싸오면 좋을까?

 

그런 골짜기를 벗어나 돌아오는 버스를 탄 때가 낮 2시 40분이었습니다. 에어컨이 팡팡 돌아가는 버스 안은 자가용 자동차 못지 않게 시원했습니다. 무거운 짐도 없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답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 잔뜩 싸 들고 자동차 끌고 가면 돈이 아껴질 것 같지만 실제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가는 싸게 먹히지만 장만해 가는 분량이 많아지기 때문이겠습니다.

 

버스를 타고 짐도 단촐하게 해서 가면 고기 굽는 냄새로 골짜기를 찌들게 하지도 않는답니다. 그릇을 씻어 계곡물을 더럽히는 짓도 하지 않고 동네 주민한테 적당히 물건을 팔아주는 보람도 누리게 된답니다. 그리고 가져간 짐을 도로 챙겨 들고 나오는 낑낑거림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6. 공정여행이 먼 나라에만 있지는 않다

 

공정여행은 지역도 주민도 자연도 약탈하지 않는 여행입니다. 공정여행은 자기도 좋고 지역 주민도 좋으면서 자연에게는 해코지를 되도록 하지 않는 여행입니다. 이런 공정여행이 좋다지만 대부분은 다른 나라에나 가야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그만 데도 공정여행은 있습니다.

 

김훤주

 

※ 7월 23일치 경남도민일보에 실은 칼럼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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